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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1일 만우절 말,

거짓말같이 봉화 친환경생산자협동조합이 창립총회를 가졌다.

훌륭한 분들이 모여 성심을 다한 결과다.

하지만 이번 봉화친환경생산자협동조합의 설립은

설립과정에 참가하거나 조합원으로 가입하신 몇몇분들만의 성과가 아니라

봉화지역사회의 변화를 추동할 의미있는 사건으로 다가온다.

시대의 조류에서 가장 낙후된 봉화군에서 사회적 경제를 구현하기 위한

최초의 움직임이 작은 성과로 드러난 이번 협동조합의 설립은

사라져가는 마을공동체의 온기를 되살리고

농협이 방기한 협동경제와 사회적 경제의 단초를 여는데

적지않을 기여를 할 것이라 확신한다.

또한 이번 협동조합의 설립은 봉화군내에서 일어난 최초의

시민사회적 운동의 의미를 가지기도 한다.

관변적 작풍에 빠져 주체성을 잃어버린 지역사회의 다양한 단위들이

민주주의의 가치를 되묻고 주체적 사고를 시작하는 작은 계기가 될 수 도 있다고 본다.

농협과 관에 빌붙지 않고 오히러 관과 농협을 주도적으로 이끌 수 있는 힘이 바로

주민들 자신, 농민들 자신으로부터 시작된다는 진실을 직시하는 계기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경쟁에서 협동으로, 각자도생에서 더불어 사는 공동체로 나아가는

봉화 농업 역사에, 봉화 농촌공동체의 역사에 한획을 그을 봉화친환경생산자협동조합의 설립에

그 곁다리에나마 끼어서 같이했다는 사실이 너무나 자랑스럽다.

봉화의 첫 생산자협동조합이 보다 넓어지고 풍부해지고 넉넉해지길 빌며

같이하신 모든 분들께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아름다운 분들과 같이한 시간들이 고맙고,

같이 살아갈 날에 대한 기대가 가슴설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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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우는 법이 아니라 이기는 법을 배우는 책

 

만델라는 자신의 삶의 역정을  '자유를 향한 머나먼 길'이라 말한다. 그 길은 자유를 향한 길이었기에 멀 수 밖에 없는 길이었다. 그리고 아무리 먼나먼 길이라고는하지만 자유를 향한 길이기에 중간에 주저앉지 않고 참고 버텨낼 수 있는 길이기도 했다. 하지만 만델라의 남아프리카 공화국 해방 투쟁은 먼길이었을지언정 불투명한 길은 아니었다. 아파라트헤이트를 분쇄하고, 다인종이 조화롭게 사는 세상을 위한 투쟁의 대열은 명확한 목표를 공유했다. 영미의 불투명한 자세가 끊임없이 문제를 꼬이게 하고 본질을 흐려놓았지만 그래도 전반적인 국제사회의 전폭적인 지지라는 든든한 기반위에서 도덕적 정치적 명분을 동시에 움켜지고 치룬 질 수 없는 투쟁의 길이었다.

그렇다고 남아프리카 해방 투쟁이 희희낙낙 쉬운 길은 아니었다. 극단적인 인종차별에 기반한 백인지배 권력은 체제의 존속을 위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강구했다. 일제시대 일본제국주의가 그러했듯 소위 문화 통치라 부를 수 있는 포섭 회유책에서 부터, 원주민 부족간 분쟁을 부추키는 분할통치 수법, 저항 세력에 대한 합법을 가장한 정치적 억압, 그리고 테러와 암살이라는 비합법적 방법을 넘어 나찌를 연상케할 만한 대량 학살까지 백인 정부는 그들의 기득권을 존속시키기 위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그런 세상에서 흑인 청년 만델라가 갈 수 있는 길의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백인 지배질서를 수용하고 그 아래 부역함으로써 자신의 부귀와 영달을 꾀하는 길이 그 하나이고, 또 다른 하나는 존귀한 백인과 미천한 흑인의 이분법이 통용되는 세상의 부정의를 향해 분노하고 저항하는 길이었다. 만델라는 후자의 길을 선택했다. 그리고 고난의 가시밭길을 묵묵히 걸어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해방을 끝내 쟁취했다. 

두어달 전 만델라의 자서전을 선물받았을 때 지금 왠 뜬금없는 만델라인가는 생각이 들었었다. 하지만 잠들기 전 이부자리에서 한쪽 두쪽 읽기 시작한 뒤 나는 만델라의 삶에 빠져들었다. 한 사람의 삶을 통해 배울수 있는 것이 많긴 하겠지만 그로부터 얻은 배움이 고스란히 나의 지금 문제를 해결하는데 어떤 해결책을 제시해 주는 그런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이 책 역시 그랬다. 유신의 망령이 되살아나는 반동의 시대, 파시즘이 온갖 치장을 하고 민주주의 행세를 하는 거짓의 시대에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할것인가에 대해 만델라는 아무런 답을 주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일대기가 전해주는 이야기는 구체적인 답보다 훨씬 깊은 영감을 제시했다. 어떻게 싸울 것인가를 넘어 한 개인으로서의 나의 삶을 어떻게 살것인가를 다시금 되묻게 하는 만델라의 일대기가 다시 먼 전망을 모색해야하는 우리에게 참 좋은 교과서가 될 것같다.

나는 만델라의 삶의 역정을 따라가며 투사의 삶보다는 친근한 인간적 면모를 가진 한 사람의 성인을 연상했다. 그것은 이 책이 사후적으로 지난 투쟁을 정리하는 자서전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기본적으로 만델라의 삶에서 분노와 적의가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디 부정의에 대한 분노없이 정의를 위한 투쟁이 있을 수 있겠는가마는 만델라는 인종차별이라는 극악한 부정의에 맞서 흑인우월주의나 타인종 적대주의에 빠지지 않고 다양한 인종이 조화로운 삶을 사는 세상을 추구했다.  백인정권의 포악한 억압에 맞서 만델라가 무장투쟁 노선을 선언하고 '민족의 창'이라는 조직을 결성하여 군사훈련과 군사적 투쟁을 전개하는 과정에서도 그는 평온하고 담대한 모습을 잃지 않았다.

대적투쟁에서 보였던 만델라의 노선은 전선 내부의 분열과 대립과정에서도 그대로 견지되었다. 해방을 위한 투쟁의 도정에서 그가 속한 ANC(아프리카 민족회의)와 ANC의 온건노선에 반대해 조직된 PAC(범아프리카회의)가 분립하여 대치할 때도 그는 두조직이 적대하는 상황에 빠지지않도록 이끌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흑인 우파를 대표하는 인카타자유당과 줄루족의 분열주의와 참혹한 테러에 맞서 싸우는 과정에서도 만데라는 결국 백인 이든 줄루족이든 같이 위대한 남아프리카인으로 더불어 살아갈 사람이라는 전제를 견지했다. 그와같은 만델라의 연대와 평화에 대한 확고부동한 입장은 결국 남아프리카 인민과 세계인의 공감을 획득하게 된다. 결국 해방투쟁을 군사적 전투가 아니라 국제적 여론에 힘입은 지난한 협상의 과정을 통해 승리한다. 만델라가 승리할 수 있었던 힘은 바로 그와같은 연대와 평화의 정신이 아닌가싶다. 무장투쟁노선을 견지한 사람이 노벨평화상을 탈 수 있었던 것도  만델라 자신이 견지한 평화와 연대의 원칙 때문이기도 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이 백인 정권으로부터 해방되고나서도 만델라의 원칙은 [진실과 화해 위원회]에 그대로 반영된다. '진실을 밝히되, 처벌하지 않는다'는 만델라의 입장은 수많은 목숨을 받쳐 승리한 세력이 쉽게 채택할 수 있는 노선은 아니었다. 내부적인 반발과 권력을 잃은 구백인정권의 비협조와 조소는 만델라를 곤란에 빠뜨리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델라는 그와같은 노선을 통해 결국 진정한 승리를 챙취한다. 청춘을 바친 투쟁과 27년의 감옥살이, 그리고 수년에 걸친 협상과정을 통해 만델라는 백인정권을 해체하지만 그의 진정한 승리는 정권 장악뒤에 진행된 진실을 밝히고 화해하기 위한 투쟁을 통해 비로소 완성된 것이다. 

나는 그의 삶을 통해 어떻게 싸우는 것이 진정한 승리를 가져올 것인가에 대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덤으로 이책을 번역한 김대중전 대통령의 삶을 되돌아보았다. 만델라와 김대중.. 이 두 사람은 참 많은 유사점을 가진 것 같다. 오랜 세월 억압속에서도 평생을 정의를 향한 발걸음을 멈추지 않고, 끝내 승리를 가져온 점 뿐 아니라 투쟁과정에서 견지한 비적대적 입장, 정권 장악뒤에 가진 신실과 화해를 위한 노력, 나아가 그와같은 노선을 인정받아 노벨 펑화상을 타게 되는 것까지 똑같다. 만델라와 김대중 이 두 사람의 힘은 사실 일희일비하지 않는 담대함에 있는 것 같다.  

대선이 끝난뒤 한국의 진보 개혁 세력은 큰 혼돈에 빠진듯하다. 내부적으로 책임론이 제기되면서 또다른 분열의 조짐마저 보이고 있다. 대선 패배의 원인분석과 그에 따른 책임부여는 필요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자학적 비판이나 정파적 이해에 얽힌 기싸움은 진보개혁세력의 미래에 아무런 희망도 가져다 주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특히나 조중동 프레임을 그대로 채용한채 자행되는 '친노패권주의' 운운하는 마녀사냥이나, 좌편향 우편향으로 흔들리며 제기되는 선거전략의 이념적 편향에 대한 분석은 극히 위험해보인다. 연대의 방식에 대한 분석과 검토를 넘어, 연대 무용론까지 나가버리는 청산적 태도는 비의회주의적 변혁노선에서나 유의미한 것이 아닐까 싶다. 자신만의 진지를 온전히 보전하겠다는 소수좌파정당의 고집은 51대 49라는 판세로 결정되는 선거판에서 채택할 수 있는 전략으로는 적합하지 않기때문이다. 이 모든 의문에 대해 만델라는 정답이 아니라 그 답을 찾기 위한 바른 태도를 보여준다.  

뜬금없는 시기에 만델라의 일대기를 읽고 나는 그의 삶이 전해 주는 메시지를 싸우는 "방법을 넘어 승리하는 방법"로 읽었다. 극히 주관적인 감상이겠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질 수 없는 싸움에 번번히 지는 한국의 진보개혁세력은 아직 승리하는 법에 서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만델라의 싸움과는 달리 목표는 분명하데 상대는 훨씬 불투명한 싸움을 해야하는 한국의 진보세력에게 만델라가 주는 메시지는 그뿐이 아닐 것이다.  한국의 진보개혁 세력이 보다 담대해지고, 나아가 작은 정파적 차이에 대해 서로 관대해지고 파도치는 정치적 지형에 따라 보다 유연해 진다면 파시스트 잔당에 의해 장악된 기득권세력과의 싸움에서 진정한 승리를 획득하는 날이 그리 멀리 있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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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의 독서]는 유시민의 사상적 지평을 연 지성의 토대가 되는 청년시절 독서의 여정을 보여주는 책이다. 결과적으로 이 책은 오해도 많고 열성팬도 많은 '정치인' 유시민에게는 어쩌면 최종적 '입장'이 아니라 그 입장의 원천을 드러내는 일이 꼭 필요했었다고 보는데, 바로 그와같은 역할을 거뜬히 하고 있다. 물론 필자 유시민의 집필 동기는 스스로 밝히고 있는 바와 같이 다른데 있고, 그것은 바로 지표를 잃어버린 자의 삶의 길찾기, 즉 한국사회의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자의 한국 사회의 시대적 과제와 나아갈 바에 대한 모색일 것이다. 그 점에서 이 책 [청춘의 독서]는 청춘시절 독서의 중요성이나 책읽기의 방법을 청춘들에게 들려주는 측면보다는 필자와 같은 시대를 살았고, 같은 과제를 지고 살아가야 할 이미 기성세대가 된 나같은 독자와 그 고민을 나누는 데 더 큰 의미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길은 잃'은 유시민은 오래된 지도를 다시 편다. 그 지도는 청춘시절 읽었던, 이후 유시민의 삶의 방향을 이끈 나침판같은 역할을 해주던 주옥같은 14권의 고전이다. 그리고 다시 길이 보이지않는 지금 그는 새로운 지도가 아니라 바로 그 낡은 지도를 다시 편다. 도스토옙스키의 [죄와벌], 리영희의 [전화시대의 논리], 칼막스의 [공산당선언], 사마천의 [사기], 다윈의 [종의기원], E.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 [맹자], ... 어느 것 한권 무겁지 않은 책이 없지만 그렇다고 이들 14권의 고전이 세상의 근본을 모두 보여주거나 우리가 직면한 시대적 과제에 대한 구체적 해결책은 보여주지는 않을 것 같다. 이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을  필자 유시민은 자신의 사고와 행위의 근본을 이루는 가치의 보고를 다시 뒤적거림으로써 저만치 나아간 자가 아니라 이제 막 시작하는 자의 태도를 되찾길 바라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책이 보여주는 아름다움은 막무가내 밀어부치며 세상을 어지럽히는 위대한 바보들이 지배하는 시대에, 길이 막히면 돌아가고, 그 근본으로 돌아가 초심에서 다시 시작하는 자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데 있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마주할 수 있었던 그의 겸손한 삶의 태도가 참 건강하고 아름답게 다가온다. 


   ▶ http://usimin.net/  에서 퍼옴

근본을 되짚는 [청춘의 독서]는 그렇다고 한가한 고전읽기의 흔적은 아니다. 그는 치열한 현실에 두발을 딛고 달음박질에 앞서 호흡을 가다듬는 마음으로 현실과 책속을 오간다. 그 접점이 어디이고, 그의 사색의 과정이 가져올 결과는 알 수 없지만 휴머니스트 유시민의 젊고 건강한 정치적 행보와 삶의 여정을 지켜보고 싶다.

유시민은 이제 젊은 정치인이 아니라 50대의 기성세대가 되었다. 하지만 그의 정치적 입장은 항상 청춘을 갈망했고, 그의 지지자들 역시 청춘일 수 밖에 없었다.  자연적 나이를 뛰어넘는 그의 젊음은 바로 독서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는 그가 지근거리에서 모시던 노무현대통령의 삶과도 일맥상통하는 모습이다. 독서하는 정치인, 지성적 정치인에 목마른 한국사회에 그와같은 정치인의 큰 획을 긋는 유시민의 이후 삶의 행로에 큰 행운이 함께하길 빈다. 그의 행운이 한국사회의 행운과 일치하기를, 그의 정치 여정이 표면적으론 다르지만 근본에서 같은 세력이 더불어 민주주의의 기초를 지키며 우리사회가 나아가야될 큰 비젼을 함께 모색하며 그 토대를 쌓는 과정일 수 있기를 또한 기원한다.   
  
[청춘의 독서]를 읽으며 나는 비슷한 연배로서 이제는 잊어져가는 아련한 꿈들을 되새긴다. 그리고 잊었던 이름들을 불러본다. 칼 막스, 라스콜리니코프, 쇼냐, 이명준...  그리고 늦은 숙제를 떠 안는다. 다음 두권의 책을 꼭 읽어봐야지.  소스타인 베블런 [유한계급론]과  헨리 조지의 [진보와 빈곤].

 필자가 [진보와 빈곤]에서 인용한 구절을 다시한번 적어본다.
   
부의 분배가 매우 불평등한 사회에서는 정부가 민주화 될수록 사회는 오히려 악화된다.(......) 부패한 민주정부에서는 언제나 최악의 인물엑 권력이 돌아간다. 정직성이나 애국심은 압박받고 비양심이 성공을 거둔다. 최선의 인물은 바닥에 가라앉고 최악의 인물이 정상에 떠오른다. 악한 자가 나가면 더 악한 자가 들어선다. 국민성은 권력을 장악하는 자, 그리하여 결국 존경도 받게 되는 자의 특성을 닮게 마련이어서 국민의 도덕성이 타락한다. 이러한 과정은 기나긴 역사의 파노라마 속에서 수없이 되풀이되면서 자유롭던 민족이 노예상태로 전락한다.(.....)가장 미천한 지위의 인간이 부패를 통해 부와 권력에 올라서는 모습을 늘 보게 되는 곳에서는, 부패를 묵인하다가 급기야 부패를 부러워하게 된다. 부패한 민주정부는 결국 국민을 부패시키며,국민이 부패한 나라는 되살아날 길이 없다....(Progressive and Poverty, p53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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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꿈많은 청년" 노무현 대통령의 기일이다. 그래서 내리는 비인가 보다. 전날 시작한 비가 하루 온종일 내리고도 못다내린양 밤늦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농사일에 쫒겨 도착한지 일주일 넘어 손에 들지 못했던 책을 펼쳤다. 그는 [운명이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깊은 슬픔을 감춘듯 조금은 어색한 표정으로 싱긋이 웃어보이며 우리를 떠나갔다. 그가 떠난 자리는 너무도 컸다. 세상은 꺼꾸로 돌기 시작했다. 해는 서쪽에서 뜨고 동쪽으로 졌으며, 낮에 달이 뜨고, 밤에 해가 떴다.
민주주의는 독재자의 전용어가 되었고, 평화는 전쟁을, 환경은 무자비한 토건공사를 의미하게 되었다. 모든 진보적 가치는 좌익뺄갱이의 기만선전술에 불과한 것으로, 복지에 대한 요구는 거지근성으로 치부되었다. 진솔함과 정직함은 무능력의 다른 이름으로 뜻이 바뀌었고, 분권과 자치, 대화와 타협은 사전에서 사라졌다.  

[운명이다]는 유년의 기억으로부터 시작한다. 간단한 가족사와 어린시절의 추억들, 그리고 그 속에서 자라나는 자의식의 흔적들을 추적한다. 가난에 대한, 가난한 자에 대한 연민과 더불어 '사람 사는 세상'에 대한 꿈이 자라나는 청년 노무현의 삶을 따라가며, 그가 나고 자라고 살았던 시대, 그리고 우리가 함께했던 시대의 흔적들을 만난다. 그는 어떻게 한 평범한 인간이 시대의 격랑속에서 한명의 시민운동가로 정치가로 그리고 마침내 한 나라의 대통령으로 살았고 그리고 죽어갔는지 담담히 이야기한다. 자신의 이야기가 아니라 시대의 이야기를, 한명의 정치가가 아니라 한명의 인간이 어떻게 살았는지 어떻게 불의에 맞섰고, 어떻게 '사람사는 세상'을 실현하고자 분투했는지 이야기하는 그의 눈빛에 깊은 슬픔이 묻어난다. 그의 한계가 아니라 시대의 한계를, 그의 실패가 아니라 우리의 실패를 말하는 그의 이야기는 쉬 끝나지 않고았 낙숫물소리와 함께  신새벽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책을 덮었다.
여전히 비가 내린다. 나는 오늘 봉하마을 부엉이 바위나 아니면 대한문 앞에서 비를 맞고 서 있어야했다. 지인으로 부터 문자가 온다. '혹시 봉하마을에 와 계신가 해서요?' 나는 오늘 집을 나서지 않았다. 하루종일 [운명이다]를 읽고 그의 삶을, 그리고 나의 삶과 우리의 삶을 생각했다. 가슴이 미어진다. 그의 삶과 죽음이, 우리의 삶과 우리시대의 과제가 뒤엉킨다. 어디서부터 다시 시작할 것인가? 묻고 또 물었다. 



그는 부림사건을 통해 새 세상을 만나고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그리고 긴 가시밭길을 묵묵히 걸었다. 도반이 없어도, 노자가 떨어져도 그는 발길을 멈추지 않았다. 그길의 끝이 모멸과 오욕, 좌절과 실패의 구렁텅이일지라도 그는 그 길을 마다하지 않았다.  2009년 5월 23일, 지구가 꺼꾸로 돌기 시작하던 날 [운명이다]는 멈춘다. 그의 삶은 불의가 정의를 이기고, 술수가 정직을, 돈이 사랑을 이기는 세상에 대한 반역이었다. 그렇다고 그의 삶은 비장하거나 거창하지  않았다. 그는 이웃 형님의 한분같이 소탈하고 소박한 삶을 살았고 그래서 그는 수많은 사람들을 울렸다. 그의 죽음은 그만의 죽음이 아니고, 그의 꿈은 우리 모두의 꿈이었기에! 책을 덮었지만 그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나머지 이야기는 우리의 몫이다. 그가 던지고 간 [사람사는 세상]에 대한 꿈은 온전히 우리 손아귀에 남아있다. 그리고 삶들은 계속되고 그 꿈은 싹을 피우고 자라날 것이다. 노무현의 자서전은 우리의 자서전이 되고, 우리의 자서전은 완결된 해피엔딩으로 끝나야한다. 그것은 운명이기 때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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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세대를 위한 민주주의 교과서라는 부제를 단 [진보의 미래]는 미완의 저술이다. 하지만  '미완'이란 수식어는 나태의 결과나 능력의 부재, 혹은 자연적 한계에 의한 것이 아니다. 이는 [진보의 미래]에 담고자 했던 바로 그 진보의 진전을 두려워하는 자들에 의해 강제된 수식어다세상에 어디 완결된 삶이 있고, 완결된 역사가 있을 수 있겠는가? 많은 독자는 이 책이 미완으로 끝난 것만을 아쉬워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미완을 강제한 무자비한 권력의 독기가 여전히 서슬퍼른 세상에서처음 가슴으로 받아들였던 진정한 대통령, 사랑하고 존경하는 지도자의 부재를 아쉬워하고 가슴 아파하는 것이다.  

필자 노무현의 손에서 미완으로 남은 책을 전해 받는 순간 나의 가슴은 뜨거워지고 숨을 가빠졌으며 코 끝에는 희미한 피 냄새와 짙은 국화꽃 향기가 느껴졌다. 인류의 긴 역사 속에서 어디 진보의 진전이 저절로 주어진 적이 있었던가. 진보는 투쟁의 산물이며, 소수지배에 대한 다수 인민의 승리의 전리품이었다. 이 진실을 받아들이지 않고 어떻게 '진보의 미래'를 말하고 도모할 수 있겠는가? 지난 봄, 필자 노무현은 우리 곁은 떠나갔고 우리 손에는 그가 죽음으로 지키고자 했던 '진보의 미래'가 고스란히 과제로 남아있다. 따라서 이 책을 통해 필자의 고뇌의 궤적을 따라가는 여정은 필자가 제시하는 역사적 과제의 엄중함과 그 실천의 지난함을 마주하는 엄숙한 시간일 수밖에 없다.



필자는 불가능한 꿈을 가슴에 품은 이상주의자로, 그리고 그 꿈을 현실 정치판에 뛰어들어 실현하려 했던 철저한 리얼리스트로 살았다. 이 책은 그 이상주의자의 현실 속 투쟁의 발자취이자 고뇌의 옹근 결과물이다행간에서 읽는 피와 눈물의 흔적은 그와 같은 투쟁의 여정이 고스란히 책 속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필자 노무현이 이상주의자인 이유는 이 책을 집어 들고 몇 장 넘기지 않아 금방 드러난다. 성장주의, 개발만능주의, 물질주의가 뼛속까지 지배하는 한국사회에서 그는 '역사가 돈의 편이 아니라 사람의 편'이고 또한 '역사의 진운이 함께 할 것'이라는 믿음으로 감히 세상을 '더불어 사는 복지 공동체'로 바꾸려는 '불가능한 꿈'을 가슴에 품었다. 그 이상이 필자의 삶을 정치적 실천으로 이끌었고, 정치가의 한 명으로 일국의 대통령이라는 직위에 까지 오르는 정치적 역정을 걷게 했다. 그 역정은 개인의 영달이 아니라 한국 민주주의의 역사와 궤를 같이 했다. 그의 입신은 한국 민주주의의 발전과 같이 했고, 그의 좌절은 한국 민주주의의 좌절에 다름 아니었다그것은 그가 정치적 실천의 역정에서 '불가능한 꿈'을 구체적 현실 속에 구현하기 위해 철저한 '리얼리스트'로 고뇌하고 분투한 결과이다그의 두뇌는 명석했고, 그의 가슴은 뜨거웠기에 그의 정치적 선택은 치밀하지만 차갑지 않고, 철저히 현실적이었지만 살가운 온기가 느껴졌다.


이 책은 그의 정치적 역정의 전과정의 발자취를 담고 있지만 특히 정치적 실천의 절정에 섰던 지난 5년간의 대통령직 수행의 과정에서 절감했을 우리 사회의 역사적 한계와 그 한계를 돌파하고자 했던 개혁 정치가의 좌절을 반영하고 있다. 따라서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의 뒷받침 없이 보수시대에 진보정치를 펼쳤던 외로운 검투사의 좌절감이 행간에 묻어있음을 마주하지 않을 수 없다.

재임 5년의 과제를 연구와 저술을 통해 마저 하고자 했던 그의 의지마저 꺾인 자리에 남겨진 이 책이 담고 있는 고뇌의 깊이와 넓이는 우리 사회의 실종된 거대담론의 부활을 촉구한다. 필자가 정치의 장에서 수행하고자 했던 역할의 한계는 바로 국민의 사고를 지배하는 근본 프레임의 한계라는 엄연한 진실에 직면했다. 그래서 이 책은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근본 프레임에 대한 회의 없이, 국가 권력이 아직도 국민에 대한 지배수단의 성격을 가지고 국민의 행복한 삶을 증진하는데 기여하는 시민의 자발적 의사 결집체로 나아가지 못하는 현실에 대한 근본적 문제제기 없이 천박한 정치공학과 미시 정책적 차원의 담론에 매몰된 정치 현실을 질타한다.  

필자는 사람이 성장과 개발의 목적이 아니라 도구가 되는 경제만능주의의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국민의 생각을 바꿔야 하지만, 국민의 생각을 실제적으로 지배하는 것은 거대 미디어이고, 그와 같은 미디어를 지배하는 것은 돈인 세상에서 그 지배권력의 무한 반복하는 연결 고리를 끊을 힘은 어디에서 올 수 있을까 고민한다. 인터넷이란 신병기가 있지만 완벽하지 못하고, 결국 다시 책이라는 지적 무기에 주목할 수밖에 없었던 필자의 선택은 어쩌면 무기력한 자의 불가피한 결정으로 오해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필자가 주목한 것은 단기적 정치동학이 아니라 기나긴 역사적 안목에서 인간의 이성적, 문화적 발전의 토대 위에 인간의 사회적 존재조건을 변화시켜나가는 인간 지성의 힘이다그와 같은 인간지성의 힘을 통해 보다 인간의 사회적 존재조건을 개선시켜나가고자 했던 그의 고민의 지점은 명확했다.

90%의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이 아니라 이사회를 지배하고 사회적 산출물을 독점하는 10%밖에 되지 않는 지배계급의 이익에 표를 던지는가?

왜 진보세력은 중도 개혁세력의 성공을 통해 진보의 지평을 넓혀나가지 않고 극우 보수세력과 함께 중도개혁세력을 협공함으로써 중도개혁세력과 동반 몰락의 길을 선택하는가?

왜 사람들은 성장을 통해 복지가 달성된다는 트리클 다운 이론을 맹신하는가? 왜 사람들은 삼성이라는 재벌의 이익이 자신의 주머니 사정과 직접적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왜 사람들은 자신이 복지정책의 수혜 대상임에도 불구하고 복지의 증대가 우리 사회의 경제적 발전을 가로막고 사회의 활력을 떨어뜨린다고 주장을 받아들이는가?


학벌주의, 지역주의 , 그리고 재벌과 조중동으로 대표되는 언론권력, 교육마피아와 검찰마피아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그 근본적 변혁을 가능케 하는 힘으로 어디에서 나오는가?

그는 극우보수세력의 집단 광기가 자신의 목을 죄어 오는 마지막 순간까지 민주주의의 마지막 보루로서의 인간 이성의 힘에 대한 신뢰를 기반으로 위의 과제를 천착했다. 그리고 정치적 성공이 아니라 정치 자체를 바꾸고자 했던 그는 그 미완의 과제를 남기고 부엉이 바위에서 몸을 던졌다.

책을 덮으며, 필자 노무현을 질시하고 저주하고 끝내 살해한 자들에 대한 피끓는 분노로 몸서리치고 ,다시 올 수 없는 길을 떠나며 무거운 역사적 짐을 살아남은 자에게 남기고 간 그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으로 가슴 저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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