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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밤의 논쟁과 소동으로 불편했던 잠을 깨고 그나마 가라앉은 마음으로 아침을 나누었다. 다라파니의  Superview lodge를 나서자마자 우선생 부부는 자신의 길로 떠났다. 간드룩 방향으로 산을 내려가 따로 룸비니 여행을 갈 예정이었다. 가이드 라마는 같이했던 한명의 포터를 딸려서 포카라까지 안내하도록 조치했다. 여정을 먼저 끝내기가 아쉬운 포터를 같은 마음으로 보내고나니 오늘은 여정 일주일만에 출발시에는 예정에 없던 작별마저 예고되어 있었다. Tadapani를 출발해 추일레를 거쳐 또 한번의 이별이 기다리고 있는 촘롱입구에 도착했다. 촘롱을 통해 시누와를 거쳐 안나푸르나 베니스캠프로 올라가는 길과 오른쪽 내리막으로 길을 잡아 모디콜라를 향해 내려가는 길이 갈라지는 지점의 롯지에서 차를 나누었다. 그리고 갑자기 흩뿌리는 진눈깨비를 맞으며 송선생님과의 어설픈 이별식을 준비했다. 같이 했던 포터를 한분 동행하게 하고 급히 마을에서 가이드를 한분 더 구했다. 츄리닝 홑바지 차림의 가이드와 준비가 부족한 포터에게 우리가 가진 여분의 옷가지와 장갑 등을 나누었다.  한명의 트레커와 두명의 어시스트는 산으로 올라가고 6명의 트레커와 4명의 어시스트는 안나푸르나 능선에 뿌리내리고 사는 마을을 찾아 길을 나섰다.   

마음에 남은 앙금이 없진 않겠지만 우리는 뜨겁게 포옹하고 서로의 안녕을 기원했다. 촘롱에서 지누단다까지의 거리는 멀지 않았고 우리는 이내 마을에 도착했다. 처음 들어간 숙소가 마음에 안든다며 라마는 우리를 끌고 다른 롯지를 찾아 갔다. 지누단다 초입의 Ever Green Hotel 에 짐을 풀고 우리는 가벼운 차림으로 뜨거운 물을 찾아 길을 나섰다. 모디콜라(모디강)가에 형성된 조그만 자연온천에서 묵은 때를 씻고 모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저녁식사와 함께 맥주파티까지 곁들였다. 작은 사안이지만 생각이 갈리고 그것이 다시 감정선을 건드리는 데 까지 나아갈때 연배차이까지 의사소통을 방해한다면 어쩔 수 없이 서로의 판단을 존중하는 수밖에 없다. 우린 그렇게 일행이 줄어 이제 우리의 여정을 돕는 가이드와 포터까지 합쳐 10명이라는 단촐한 그룹이 되어 있었다.

다음날을 뉴브릿지를 통해 란드룩까지 걸었다. 출발하면서 일찍 걸음을 멈추고 그동안 밀린 빨래도 하고 그냥 편안히 쉬자고 마음 먹었다. 막연히 계획했던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는 한걸음한걸음 멀어져가고 우리는 상승이 아니라 평탄한 길들을 걸어 마을 속으로 들어갔다. 모디콜라 계곡 넘어 간드룩과 마주한 란드룩이란 마을의New Peaceful Guest House에서 일찍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남은 하루의 시간을  알뜰하게 즐겼다. 빨래를 널고 햇살을 받으며 졸다가, 지루해지면 일어나 마을을 걸었다. 마을을 스쳐 지나가는 걸음이 아니라 마을 속을 샅샅히 걷는 훨씬 더 느린 걸음이었다. 네팔리의 일터인 논두렁을 걷고, 마을의 중심인 학교를 찾아 구경도 하고, 그리고 언덕위에 올라 멀리 지는 석양 빛에 마음까지 물들었다.

이선생은 메모 수첩을 잃어버려 마을위 언덕을 두어번 다시 올라야했지만 우리는 모두 석양빛에 물들어 지나온 세월을 회상하고, 지금 이 순간을 만끽하며, 앞으로 살아갈 날들을 꿈꾸었다. 나는 흐려진 유년의 기억들, 잊혀저가는 청춘의 꿈을 다시 움켜지기위한 헛된 노력들을 차분히 내려놓고 지나온 시간보다, 그리고 다가올 시간보다 지금 이 순간에 더 충실한 삶을 다짐하며 언덕을 내려왔다. 우리는 걷기 위해 왔지만 이날 하루는 적게 걸어 더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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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일찍 눈을 떴다. 저만치 멀어진 안나푸르나를 뒤돌아보며 [Modi Khola Guest House]를 나섰다. 밤새 2층 룸의 계단을 지켜주던 깔리는 길 떠나는 우리를 따라나서 한참을 배웅했다. 이미 만남과 이별이 습관이 되었을 깔리는 그래도 작별이 서운했는가 보다. 마을을 벗어나자 마자 얼마 안있어 이 마을의 이름을 바꾼 '뉴 브릿지'를 건넜다. 이 일대에서 처음으로 쇠줄을 걸쳐 만든 흔들다리였기에 아예 마을 이름까지 [뉴 브릿지]가 되었을터인데, 너무 빨리 만든 덕분에 이제는 낡아 대표적인 '올드' 브릿지가 되어 있었다. 한쪽 죄줄이 늘어져 다리가 모로 기울고 발판은 군데 군데 구멍이 나 있었다. 그래도 이름만은 '뉴 브릿지'로 오래도록 남아있을 다리를 건너 란드룩으로 방향을 잡아 하염없이 걷고 또 걸었다.

 

 

안나푸르나 산중에서 보내는 마지막 날, 길은 편했고 날씨마저 좋아 눈이 시리도록 흰 안나푸르나를 하염없이 뒤돌아보고 또 뒤돌아 보며 우리의 끝나가는 여정을 아쉬워했다. 상행 때는 쉬 다가오지 않던 산들이 하행 길엔 순식간에 덧없이 멀어져 갔다. 이제 가면 언제오나! 적금이라도 들어 5년뒤를 계획해 보지만 세상은 넓고, 인생은 짧으니 아마 이번이 이승에서 안나푸르나와의 마지막 인연이 될지도 알수 없는 노릇! 앞은 보지도 않고 뒤를 돌아보고 다시 고개를 떨구어 내가 딛고 있는 땅을 보고, 그리고 다시 고개를 돌려 걸어온 길과 멀어져 가는 안나푸르나를 바라다보기를 반복했다. 분명 다음 목적지는 포카라고, 카트만두고 그리고 인천으로 이어져야하는데 나는 정처없이 걷는 방랑자가 되었다. 어느 순간 나의 걸음을 이끄는 것은 계획이나 일정이 아니라 오직 앞에 놓인 길이 되어버렸다. 저 길이 나를 어디로 인도할지 모르는 사람처럼 나는 기가 죽었고 조심스러워졌다. 수백, 수천년 동안 비탈진 안나푸르나 산자락을 일구어 씨를 뿌리고 낱알을 거두어 가족의 삶을 지켜온 네팔리의 피와 땀, 사랑과 미움, 그리움과 그윽한 삶의 희열이 베일 돌길을 따라 꼭 한 발짝씩만 내디뎠다. 우리 삶이 그러하듯 걸음에 어떤 비약도 없었다, 걸어온 만치 새 걸음의 토대가 되고, 그 토대에서 내딛는만치 내 삶의 현실이 되었다.

 

 

안나푸르나 눈이 녹아 흐르기 시작한 차가운 물이 모여 Modi Khola를 이루고, 그 강이 흘러 깍아 세운비탈진 산자락에 따데기같은 다락 논을 일구어 생명을 보전하고 마을을 일구며 살아온 네팔리의 삶터를 가로질렀다. 촘롱강 건너 상행길에 걸었던 사울리바자르에서 간드룩으로 이어지던 길이 오늘 하행길과 나란히 이어졌다. 고개마루마다 놓여진 길손을 위한 쉼터를 '쪼따로'라 불렀다. 쪼따로에 앉아 강건너 바라다 본 아득한 길들이 실날같이 가날프고 아름다웠다. 내가 언제 저 길을 걸었고, 저 끝없는 돌계단을 한칸 두칸 올라 저 아찔한 고개마루에 터잡은 간드룩을 거쳐 갔던가! 벌써 상행길의 기억은 가물거리기 시작하고 이미 나의 마음속에 하나의 추억으로 남아버렸다.

 

 

뉴브릿지를 떠나 Tolka를 지나면서 점심을 먹었다. 메뉴는 전통 구릉족 빵이라는데 빵은 지금까지 먹었던 티벳 빵과 구별이 되지 않았는데 딸려나온 국이 꼭 한국 된장국이었다. 된장만 안들어갔지 말린 시레기를 잘게 썰어 넣고 콩가루를 넣어 뻑뻑하니 끓인 국이었다. 전통 구릉족 빵을 주문하자 파샹은 조금 걱정스런 표정으로 되물었는데 아마 그런 시레기국을 우리가 잘 먹어낼지 걱정이 되었던 것 같았다. 구릉족 시레국을 맛있게 잘 먹는 우리를 보고 파샹은 신기해 했다. 롯지를 나와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길을 역시 초행인 파샹과 같이 더듬어 나갔다. 톨카를 지나 포타나가 다가오자 길이 여러갈래로 갈라지고 엉키면서 우리는 멈출 수밖에 없었다. 어느 길이 우리를 포타나로 이끌지 파샹도 몰랐고 물을 수 있는 주민들도 보이지 않았다. 할 수없이 란드룩에서 만난 홍콩인 커플 트레커를 기다렸다. 아니 홍콩인 커플을 안내하는 포터와 가이드를 기다렸다. 그들의 안내로 잃어버린 길을 되찾아 다시 걷다보니 얼마 지나지 않아 포타나 체크 포인드가 나왔다. 팀스카드에 Check-Out 도장을 받고 나니 나는 이제 더이상 트레커가 아니게 되었다. 그 순간부터 나는 단지 네팔 투어리스트의 한명일뿐!

 

 

오늘 하루 한국인 트레커를 한명도 만나질 못했다. '코리언시즌'이라 불리는 만치 겨울 비수기 2달동안 전체 트레커의 절반 이상이 한국인이라는 ABC에서 하루종일 한국인을 만나지 않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고 했다. 나야풀, 사우디바자르, 간드룩, 촘롱구간이나 따다파니, 따또파니, 푼힐, 촘롱구간과는 달리 촘롱에서 지누단다를 거쳐 란드룩, 톨카, 팜푸스, 페디로 이어지는 구간은 거의 한국인이 없는 것 같았다. 나야풀로 바로 하행하는 것보다 하루 반나절을 더 길게 잡아야 하는 코스를 선택해 산중에서 지친 몸을 이끌고 지체하기에는 한국인의 성정에 어우리지 않는 코스인지도 모르겠다. 포타나의 체크체크포스틀 빠지며 근무자에게 물으니 오늘은 한명의 한국인도 체크포스트를 지나지 않았다고 했다.

 

 

포타나 체크포인트에서 길을 물어 '오스트렐리안 캠프'를 찾았다. 담푸스로 바로 빠기기에는 아직 트레킹에 미련이 남아있기도 했지만 떠나는 안나푸르나를 마지막으로 바라다 보기 위한 선택이었다. 중국인 커플의 가이드 말로는 '오스트렐리안 캠프'가 주 트레킹 코스에서 조금 떨어져 있긴 하지만 멋진 View Point면서 조용하게 지낼 수 있는 마을이라고 했다. 또 한가지, 톨카를 지날 때 만난 한 네팔리로부터 오스트레릴리안 캠프에 한국인이 살고 있고 롯지를 운영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이왕이면 그곳에서 지낼까 하는 생각도 있었다.

 

 

오스트렐리안 캠프는 40여년전 오스트렐리안 무리가 캠프를 한데서 연유한 지명이라고 했다. 포타나에서 담푸스로 빠지기 전 오른쪽 언덕길을 15분정도 오르다 야트막하게 보이는 뒷산을 등지고 삼면이 트인 꽤 넓은 평지가 나오고 4~5개의 롯지가 자리잡고 있었다. 마을은 외졌고 아름답고 그리고 멋진 뷰포인트에 자리잡고 있었다. 파샹이 나서 지나는 네팔리에게 한국인이 운영하는 롯지를 물었다. 이 동네에는 20여년전에 들어와 살고 있는 한국인이 있긴 하지만 롯지를 운영하지는 않고 그냥 조용히 '마음 공부'를 하고 계신다고 했다. 마을 구경 삼아 동네 끝까지 갔다가 마지막 롯지면서 마을 이름을 가져온 '오스트렐리안 캠프'가 열렸던 자리에 터잡은 [오스트렐리안 캠프 게스트 하우스]에 방을 잡아 방해받지 않는 시야를 얻었다.

 

 

짐을 풀고 마당을 나서니 멀리 구름 위에 떠있는 사우스 안나푸르나, 히운출리, 마차푸차레 그리고 람중히말이 한눈에 눈에 들어왔다. 검은 대지위에 짙은 구름이 머물고, 구름이 엹어져 하얗게 번지는 사이로 안나푸르나의 자태가 들어났다. 흰구름과 흰 산이 만나니 구름이 산을 만들고 산이 구름으로 흩어졌다. 지상으로부터 하늘로 번져 올라가는 어둠이 희색으로 우뚝 솟은 안나푸르나를 더욱 두드러지게 해 오히러 현실감이 떨어졌다. 산이 산이 아니고 하늘에 떠 있는 '하늘 궁정'같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니 멀리 페와딸이 보이고 아득히 포카라 넘어 겹겹산들이 깊었다. 혹시 영산 다울라기리를 볼수 있을까 기대했지만 확인할 길이 없었고 다울라기리 방향으로 짙은 구름까지 끼어 다음을 기약했다.

 

 

 

 

다이님 룸에 들어서니 한명의 손님이 창가를 지키고 있었다. 네팔리와 똑같은 외모에 파샹이 말을 건넸지만 그는 알아듣지 못했고 알고 보니 일본인이라고 했다. 그는 들어서는 우리 일행에게 눈인사도 보내지 않고 담배를 피우고 차를 마시고, 식사를 마치고 또 담배를 피웠지만 시선은 늘 창밖으로 향해있었다. '나마스테. 곤니찌와.' 인사를 건네도 착한 얼굴로 눈인사만 주었을 뿐 그의 시선은 여전히 창밖으로 향했고 마음은 멀리 떠나있는 표정이었다. 그가 룸으로 돌아간뒤 사오지가 전하길 그는 일주일째 이 롯지에 머물고 있으면서 하루종인 창가에 앉아 먼산만 바라보고 있다고 했다. 그는 어떤 사연을 품고 안나푸르나의 산 언저리에 방을 얻어 일주일 내내 창밖만 바라다 보고 있는건지, 그리고 이 마을에 20년째 살고 있다는 한국인은 또 어떤 사연을 품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태산같은 짐을 지고 안나푸르나 돌계단을 아슬아슬하게 내 딛는 조랑말의 삶의 무게나, 5평 따데기 논을 일구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네팔리의 삶의 무게처럼 한사람 한 사람에게 주어진 몫의 삶은 다 그렇게 힘겹고 아픈 건지도 모르겠다. 고도는 낮아지는 만치 삶의 무게는 그만치 더 무겁게 다가왔다. 

 

 

비교적 싼 음식값에 풍성한 저녁을 주문했다.  롯지 주인 식구들이 먹기위해 조리했다는 메뉴에 없던 닭고기 조림 한접시에 락시까지 한잔 시켜놓고 안나푸르나에서 보내는 마지막 저녁을 보내며 나의 삶을, 그리고 세상을 살아가는 뭇 생명의 삶을 그 삶의 무게를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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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일찍 영인이 아빠를 만나 쓴 식전 담배를 같이 하면서 하루를 시작했다.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를 향해 올라갈 사람과 지누단다를 지나 뉴브릿지까지 내려가야할 사람의 만남은 짧았다. 뭐라고 더 절실한 인사말이라도 남겨야할 것 같은데 그냥 가벼운 미소를 서로의 안부를 기원했다. 어제 저녁은 이래저래 풍성했다. 이번 여정의 최고점인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를 딛고 해발 3000m 이하로 내려왔다는 안도감 때문이기도 했고, 반가운 사람을 만났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제대로 된 김치를 먹을 수 있었던 날이었다. 전날 저녁 먹었던 김치 맛을 한번 더 느끼고 싶어 오늘 아침에는 아예 롯지 주인에게 김치찌게를 끓여 달라고 요청했다.  같이 김치찌게를 시켜 먹자고 작당한 여선생님은 적당량의 물만 붓고 끓여주기만 하면 된다고 가이드분에게 설명까지 덧붙였다. 김치찌게에다 맨밥을 시켜 신나게 먹고나니 오히려 식사비도 더 싸게 치였다.




어제 오후에 비까지 내리던 날씨가 자고 일어나니 더 할 나위 없이 쾌청했다. 해가 나기 시작하니 고도가 낮아진 만치 기온마저 올라 밤의 한기는 온데 간데 없고 팍팍한 여정의 피로마저 풀려 온 몸에 기운이 솟았다. Upper-Sinuwa에서 곧바로 돌계단을 따라 하염없이 내려가는 길에 Low-Sinuwa를 지났다. 화창한 햇살아래 지나는 길과 집이 하나같이 단정했다. 길가에는 쓰레기를 찾아볼 수 없었고, 마당은 모두 비질까지 해 놓았다. 구질구질한 생활 도구들도 말끔히 치워진 모습이었다. 마을로 들어서니 음악소리가 울려퍼지고 심상찮은 기운이 감돌았다. 아니나 다를까, 오늘 이 동네에서 결혼식이 있다고 했다. 가파른 산동네에 공터라고는 있을 수 없는 형편이니 그나마 넓은 길에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처마밑에 세워둔 앰프에서 경쾌한 음악이 흘러나오고 화려하지 않지만 단정한 차림의 젊은이들이 음악에 맞춰 이쁘게 춤까지 추고 있었다. 어른들은 마당 한켠에는 솥을 걸어놓고 온동네 가득차게 연기를 피우며 잔치 음식을 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온동네가 잔치집 분위기였다.



예식장이라는 공간에서 진행되는 재력과 사회적 지위를 과시하는 형식만 남은 결혼식에 초대될 때마다 사회적 의무를 피하지 못해 그냥 체면치레로 자리를 지키던 한국의 결혼식 문화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결혼식'이 서비스업의 하나가 되고 신랑 신부는 서비스 상품을 소비하는 소비자로 결혼생활을 시작하는 것이 아닐까 늘 마음이 편치않은 한국의 결혼식과는 달리 집마당에서 온동네 이웃이 다 모여 치루는 결혼식은 축복이 넘치고 삶의 숭고함이 느껴졌다. 그것은 나의 복고적 심성이나 편향된 취향 탓일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결혼식은 온동네가 같이 한 이틀 먹고, 마시고, 춤추고, 놀면서 사랑의 숭고함을 확인하고, 진정한 축복을 주고받을 만치 중요한 인생의 한 계기로 받아들이는 그들의 삶이 더 아름답게 느껴졌다. 오늘 결혼하는 새 신부신랑의 행복을 빌며, 그들의 귀한 인연을 축복하며 촘롱을 향해 하염없이 이어지는 돌계단을 내려갔다.


우리가 걷는 길을 나란히 걸어 촘롱의 학교로 등교하는 아이들과 스쳤다. 죽니 사니 하며 진땀을 빼면서 오르락 내리락 해야했던 촘롱-시누아 구간의 돌계단을 10살도 안되 보이는 이 아이들은 매일 등하교를 하고 있었다. 아이들 모습이 너무나 정겨웠다. 단정한 교복에 까만 구두를 신은 여학생의 발랄한 발걸음이 가파른 촘롱의 2400개 돌계단의 부담을 함껏 들어줬다. 이 곳 네팔의 살골짜기에도 교육열풍이 불었는지 모르겠지만 촘롱에 들어서 학교와 가까워지자 의외로 등교하는 아이들이 북적였다. 파샹이야기로는 약 80%의 학생들이 진학을 한다고 했다. 어떤 자료에선가 보니 그중 약 80% 학생이 또 학업을 다 마치지 못하고 중도에 그만둔다는 이야기도 본 것 같았다. 학교를 중도에 그만두는 경우도 그렇지만 아예 학교 문턱도 가보지 못하는 아이들은 농사일에 가사일에 어려서 부터 혹독한 삶을 산다고 했다. 사실 여정중에 '나마스테! Sweet!"을 외치며 손을 내미는 아이들은 교복을 입지 않았고, 방과중인 시간에 집에 길에 남아있는 아이들이었다. 왕정 독재 체제에서 막 벗어나서 세계 최고 빈국의 대열에서 탈출하려는 네팔 정부의 몸부림이 얼른 큰 성과를 이루었으면 좋겠지만 당장 그 아이들이 처한 삶의 조건이 너무나 안타까웠다. 마음으로 그 아이들의 삶에 축복이 있길 빌고 돌아섰지만 오래도록 마음이 게운하지가 않았다.


촘롱에 오르니 확실히 물가가 달라졌다. 물가가 싸지니깐, 싼 맛에 파샹이 좋아하는 환타를 사주고 간식도 사먹었다. 한국에서도 흔한 다국적 상표들의 초코렛과 포장이 엉성한 네팔산 과자를 샀는데 네팔과자는 싼 대신 맛도 덜하고 모레가 씹혀 다 먹지 못했다. 상행길에 묵었던 롯지를 지나 촘롱을 벗어나서 바로 외쪽 가파른 돌길을 따라 까마득히 아래 Mudi Khola 가 흐르고 있었고 그 계곡 가까이에 지누단다가 보였다. 지누단다로 내려 가는 길은 한산했다. 올라오는 사람도 내려가는 사람도 없었는데 중간쯤에서 단 한명의 트레커를 만날 수 있었다. 짐작으로 80살은 넘어 보이는 한 백인 할머니가 가이드의 도움을 받으며 이 거친 안나푸르나를 걷고 있었다. '나마스테!'라고 인사를 건네며 스쳐 지나갔지만 내리막길 내내 그 할머니의 여정과 삶이 궁금했다. 나는 여든 살이 넘어 다시 안나푸르나를 찾을 만치 건강한 몸과 정신을 보전할 수 있을까 생각했지만 자신이 없었다. 뒤돌아보면 가파른 돌계단을 몇개 오르지 못하고 쉬고, 다시 쉬고 언제 저 많은 돌계단을 다 올라가실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하루에 우리가 가는 일정의 오분지 일은 고사하고 그냥 평길을 걷는 것 조차 불편해 보이는데 그분은 왜 이 길을 혼자 나섰는지 알 수 없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안나푸르나에 묻었을까? 아니면 살아생전에 꼭 오고 싶었던 안나푸르나를 이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황혼에나마 그 꿈을 이루고 계신건가, 아니면 젊어서 같이 걷던 남편을 먼저 여의고 사랑하는 남편의 자취를 쫒아 다시 안나푸르나를 오르는 것일까...


지누단다의 한 롯지에서 점심을 주문하고 전날 비에 젖은 옷들을 따사로운 햇살아래 늘어놓으니 그냥 오늘 여기서 머물러버릴까는 생각도 들었다. 점심을 먹고 곧바로 노천 온천을 향했다. 15분 걸려 내려가서 30분 걸려 올라와야 되는 강에 바로 붙어 있는 노천 온천이라 했다. 동네 목욕탕만한 탕이 두개에 샤워를 할수 있도록 호수를 박아 물을 흘리고 있는 꼭지가 세개인 온천에 도착했다. 흐름한 양철 가건물이 탈의실로 쓰였고, 할아버지 한분이 관리를 하고 있었다. 이 온천을 보전하고 가꾸는데 필요하다며 1인당 50루피를 기부라는 이름으로 요구했다. 햇살은 따사로운데 계곡의 바람은 차서 옷을 벗고 물까지 뛰어가다시피해서 따뜻한 온천물에 몸을 담갔다. 물은 이끼인지 부유물이 떠다녔지만 그래도 땀에 절은 나의 몸은 고스란히 온천에 녹아들고 생명의 충만감에 빠져들었다. 그 순간 내가 살아있음이 얼마나 고마운지, 얼마나 행복한지 몰랐다. 파샹과 그동안 묵은 땀을 씻어내고 피로를 씻고 한참을 다뜻한 물에서 그 순간의 행복을 만끽했다. 관리인 할아버지가 파샹과 같이 목욕하는 우리 사진을 찍어 주셨다.


파샹은 전날 사람이 많을 것 같다며 온천을 하지말자는 뜻을 밝혔는데 왠걸 온천을 하는 동안도 그렇고 온천까지 오르락 내리락 거리는 동안에도 단 한명의 트레커 밖에 만날 수 없었다. 아마 파샹은 지누단다를 지나 란드룩으로 해서 페디로 빠지는 일정보다 간드룩에서 나야풀로 빠지는 빠른 일정을 택해 빨리 포카라로 가고 싶어 뻥을 친것 같았다. 온천을 우리만 누리는 호사를 더 만끽하고 싶었지만 마음을 고쳐먹고 다시 지누단다로 올라와 롯지에 맡겨놓았던 배낭을 찾아 매고 뉴브릿지로 향했다. 지누단다에서 다시 한참을 내리막길을 걸어 Kimrong khola에 이르러 쉬고 있자니 우리가 비켜 왔던 아가씨들이 파샹에게 농을 걸었다. 서로 길이 갈라져 멀어져 가면서도 아가씨들은 계속 파샹에게 무어라고 농을 던지고 파샹은 계속 싱글벙글 입을 다물지를 못했다. 나도 덩달아 파샹에게 배낭은 나에게 주고 저 아가씨들 따라가라고 부추키며 놀리니깐 얼굴마저 새빨갛게 변했다. 파샹의 순진무구한 그 설레임이 아름다웠고 그럴 수 있는 나이가 부러웠다.



새 다리를 놓아 마을 이름조차 뉴브릿지로 변해 버린 마을은 두세개의 롯지가 전부인 조그마한 마을 이었다. 다른 트레커도 보이질 않고 단지 닭을 지고 나르는 짐꾼 몇이 앞 롯지에 방을 얻은 것 같았다.조금 일찍 도착한 덕분에 롯지 주변을 산책하고 마당에 풀어놓은 개 한마리와 놀 수 있었다. 덩치 큰 검은 개가 한마리 2층 룸으로 가는 계단을 지키고 있었는데 우리는 그냥 '칼리'라고 불렀다. 이 개의 진짜 이름은 뭔지 모르지만 파샹을 통해 검은 개는 네팔어로 '칼리 꾸꾸루'고 그냥 줄여서 '깔리'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미리 배웠두었기 때문에 그냥 보이는 검은 개는 다 깔리라고 불렀다. 깔리를 타고 넘어야 1층으로 내려갈 수 있어 부담스러웠지만 깔리는 순하디 순한 성품이어서 자신을 타고 넘어가도 감은 눈을 뜨지도 않았다. 그래도 밤 늦게 아내가 룸에서 20m는 족히 떨어져 있는 화장실에 갈 때는 크게 짖어대어 믿고 있던 사람을 깜짝 놀라게 했다.


데크에 앉아 식사를 기다리며 해지는 안나푸르나를 바라보니 벌써 산이 제법 멀어져 있었다. 같이 하산하던 트레커들은 전부 간드룩이나 따다파니 쪽으로 하산했는지 아무도 보이질 않았다. 그래도 이쪽 방향으로 내려오기로 한 여선생님을 기다렸지만 날이 어둡도록 내려오시질 않았다. 아마 지누단다에서 여정을 푸신 것 같았다.


다른 롯지에서도 그랬지만 이곳도
부엌이 아니라 꼭 헛간 같은 데서 따로 조리를 했다. 내가 알기로는 이곳은 나무로 음식을 하지 못하게 규제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안나푸르나 보전지역내에서는 산림을 보호하기 위해 가스나 석유를 사용하게 하는데, 가스나 석유가 워낙 비싸서 그렇겠지만 손님이 적고 시간 여유가 있을 때는 그냥 헛간에서 나무로 조리를 하는 것 같았다. 롯지 주인집 딸이 조리를 하면서 자꾸 힜끗거리며 낯선 트레커인 우리를 쳐다봤다. 그 아이는 바같 세상이 궁금한 것이 분명했다. 우리가 묻혀 들어 온 바같 세상의 바람따라 어쩌면 저 아이도 언젠가는 부모의 뜻과 무관하게 세상 밖으로 떠나갈지 알 수 없었다.



식사가 나오고 우리는 하산 기념으로 락시를 한잔 시켰다. 파샹은 자신의 달밧에 따라 나온 토마토 아자르와 염소 젖을 맛보게 했다. 토마토 아자르는 모양과 맛이 꼭 걸죽한 김치국물같아 입맛을 돋구었고, 염소 젖은 가공을 했는지 요플레같이 건데기가 있고 시끔하니 먹을 만 했다. 파샹은 달밧에 얹혀있는 버팔로 고기도 아내와 나에게 한토막씩 건네주었다. 먹어보니 맛이 좋았다. 매운 고추를 넣고 간장에 조린 듯한 버팔로 고기는 우리 입맛에 딱 맞았다. 파샹에게 부탁해서 버팔로 고기를 따로 한 접시 주문해서 안주를 삼고, 락시를 한잔하며 핸드폰으로 김광석을 털어놓고 해 지는 안나푸르나를 올려다보았다. '다 좋다'는 말밖에 할 말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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