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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훈갤러리에서 가져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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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훈갤러리기획]류준화개인전

 

 



관훈갤러리기획

대지의 꽃 - 류준화 개인전


보라, 이 소녀들을 : 류준화의 소녀 월드, 소녀 미학

김영옥(이화여대, 이미지 비평가)

1. 동굴 우화, 그 이후: 소녀의 탄생

나는 주로 대중 잡지나 광고 이미지들을 이용하여 내가 의도하는 이미지로 다시 만들어 내고 있다. 잡지나 광고 이미지에서 에로틱한 여성의 신체 일부를 새의 날개처럼 표현하기도 하고 물고기의 꼬리처럼 보이게도 하여 남성적 시선에 고정된 여성의 전형화된 이미지로부터 자유로운 여성의 독립적 욕망을 담아내고 있다. ... 하지만 쏟아지는 이미지의 홍수 속에서 자유롭기란 어렵다. 나는 자유롭고자 하는 욕망조차 이미지 안에 머물러 있음을 동시에 ‘보여 주고자’ 한다.(강조: 필자)

여성의 욕망은 류준화의 작품세계를 관통하는 화두 중의 하나다. 비교적 작업 초기에 해당되는 <그녀의 침묵>(2001)전에 부친 위의 말은 <Spring>(2011)전에 이르기까지 이후 이어지는 그녀의 작업 모두에 대한 일종의 각주처럼 읽힐 수 있다. 국가주의-가부장제-자본주의가 통치해온 여성의 실존에 빗금처럼 그어져 있는 (그래서 그 상징계가 기획한 그 ‘여자’의 주체성을 실패로 이끄는) 자유의 욕망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 트랜스포머처럼 자신의 신체 일부를 새의 날개로 물고기의 꼬리로 변형시켜 이 상징계를 벗어나 새로운 세상을 여는 여성들. ‘이미지로 호명되면서 삶을 얻지만 또 그 이미지를 벗어나고픈 독립적 욕망, 그 경계지점’에 서 있던 초기의 작업세계가 돌파구로 찾은 것이 바로 소녀-새의 존재태다.



속삭임 mixed media on canvas 162x130cm 2011



류준화의 작업들은 그 초기에서부터 현재의 소녀 시리즈들에 이르기까지 ‘보기’를 둘러싼 다양한 철학ㆍ미학적 성찰들을 함께 불러들인다. 대중잡지나 광고 이미지에 등장하는 성애화된, 남성적 시각 주체의 쾌락의 대상인 여성 이미지, 그 이미지를 모방하고 싶으면서도 그 이미지에서 자유롭고 싶은 여성‘들’의 욕망, 이미지를 생산함으로써 여성들의 ‘자유’를 표현하고자 하는 류준화 여성 작가의 예술가적 욕망, 그리고 그 결과로 나타난 다양한 소녀 이미지들. 류준화가 생산해 낸 이미지들을 ‘보고 있는’ 관람객은 말하자면 이 모든 이미지들의 관계와 그것들의 추동력이거나 매개물인 욕망을 함께 보고 있다. 그렇다면 관람객의 이 ‘보기’는 어떻게 수행되는가? 명백하게 소녀로 ‘보이는’ 류준화의 ‘그림들’은 남성적 시각쾌락의 대상에서 자유롭고 싶은 여성들의 욕망을 어떤 ‘본질적 관점’에서 표상하고 있는가? 아니면 이 표상은 (플라톤의 동굴우화에 따른다면 심지어 이중적일)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가? 플라톤의 동굴우화와 그를 잇는 서구 형이상학 전통을 비판적으로 거슬러 읽으면서 카자 실버만은 세계관객(world spectator)로서의 바라보기를 주창한다. 서구 형이상학은 감각적 현상 세계와 초감각적 관념 세계를, 즉 모습(appearance)과 존재를 이분법적으로 대립시키고 현상을 참 존재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낙인찍는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에 대항해 카자 실버만은 서로‘에게’ 나타남으로써 (즉, 보여짐으로써) ‘존재’하는 사물들의 세계를 강조한다. 우리가 삶을 꾸려나가는 ‘세상’은 바로 서로의 바라봄에 그 존재를 빚지고 있는 존재들의 실존적ㆍ현상학적 공간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라봄’이 세상 안에서 세상을 향해 발생한다는 것이다. 류준화의 소녀들은 다른 생명체들, 사물들을 ‘향해’ 자신의 존재성을 ‘드러내고/표현하고’ 있는 소녀들의 이미지를 ‘재현’하고 있다. 그리고 이 이미지 ‘재현’은 이미 현존하는 것들의 다시 드러냄으로서의 재-현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비로소 현존하게 하는 수행적 실천행위로서의 재현이다. 그렇게 해서 류준화는 ‘이미지로 호명됨으로써 존재하되, 동시에 그 호명을 벗어나 독립적으로 존재하는(존재하고자 욕망하는) 여성들’을 ‘보여’준다. 이것은 늘 초감각적 관념 세계를 남성적 영역으로, 감각적 현상의 세계를 여성적 영역으로 간주해온 기존의 젠더화된 사유방식을 염두에 둘 때 의미심장한 일이 아닐 수 없다.

 

2. 류준화의 소녀는 누구인가? - 없거나 하나가 아닌 여성주체들

치렁치렁 자라고 흐르고 날아다니는 머리카락으로 (특히 여성과 관련된) 상형문자를 형상화함으로써 기존의 가부장적 상징계를 해체하고 새로운 기호계를 구성하는 문자도(文字圖)까지 포함해 류준화는 오랫동안 다양하게 소녀들의 형상화에 주력했다. (이번 전시에서 우리는 소녀 형상화가 드디어 어떤 ‘세계’ 즉 ‘소녀 우주’라 일컬을 수 있는 경지로까지 나아갔음을 확인한다.)



문자날개 mixed media on canvas 145.5x112cm 2012


소녀, 아니 ‘류준화의 소녀’는 누구인가? 그녀의 작업을 지켜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이런 질문을 했을 것이다. 도대체 소녀란 어떤 존재이며, 류준화의 소녀는 우리가 알고 있는 여타의 소녀들과 어떻게 다른가? - 이런 질문으로 관객들은 류준화의 소녀 그림에 다가갈 것이다.

소녀는 일반적으로 아이와 여성의 사이 공간 (in-between), 문지방의 공간에 위치해 있는 존재다. 소녀가 불러일으키는 매혹과 두려움은 소녀의 이런 문지방적 성격에서 나온다. 소녀들은 급격한 사회 변동기에 아방가르드의 상징적 위치를 부여받는다. 한국사회에서 촛불집회 때 실제와 상징 양측에서 ‘촛불소녀’가 보여주었듯이 소녀성은 사이공간으로서 특히 급격한 사회변혁의 와중에서 성공과 희망, 실패와 불안의 투사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장소로 기능한다.

한국사회의 현실 공간 속에서 소녀들은 남아선호 사상으로 불이익을 당하는 전통적인 위치에서부터 테크놀로지와 팬픽, 야오이, 코스프레 등 대중문화의 선진적ㆍ유희적 소비를 통한 하위문화 주체로, 그리고 가출과 원조교제의 위험한/위협받는 성적 주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을 형성한다. 소녀는 또한 성적 폭력에 가장 빈번히 노출되는 사회적 약자로서 지식인 남성들의 감성적/감상적 자기 반성이 투영되는 타자이기도 하다. 중요한 것은 한국사회 소녀들이 이 모든 것을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 사회의 순수와 오염을 상징하는 이 기표로서의 소녀들은 현실에서 또한, 오형근의 ‘소녀 연기’ 사진들이 보여주고 있듯이, 무구와 유혹 사이에서 능수능란한 시이소 게임을 벌인다. 그렇다면 작가 자신에게 소녀는 누구인가?


대지의 꽃 mixed media on canvas 181x227cm 2012



나에게 소녀는 불안한 경계입니다. 뭔가 충돌하는 긴장된 지점이기도 하고 무엇도 확신할 수 없는 모호함이고 그러면서 알 수 없는 미래를 고집스럽게 확신하는 분열의 지점입니다. 그리고 소녀는 자신의 출구를 발견하게 되는 문이기도 합니다.

어찌 보면 첫 자기 이해의 순간, 그 지점이 소녀 아닌 소녀일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그렇지 않을까 ... 생각한다. 아이에서 어른으로 성장하는 그 경계지점에서 소녀와 소녀의 감성이라는 게 생긴다고 본다. ... 자기를 알게 되고, 또 ‘자기를 알아가고 싶어 하는’ 존재로 스스로를 지각하는 그 지점, 그게 바로 죽음의 경계를 넘어 이승으로 돌아오는 바리데기의 지점일 거라고 생각한다.

각각 2007년, 2012년에 행해진 이 설명들에서 소녀의 ‘경계적’ 존재성은 현상적 차원에서 점차 여성의 ‘자기 이해’에 대한 존재론적 원형 이미지로 움직인다. 정체성의 관점에서 볼 때 소녀는 이후에 전개될 삶의 모든 국면들을 품고 있는, 혹은 관통하고 있는 어떤 단단한 핵 같은 것이다. 여기서 나는 소수자 감수성이 뛰어난 소설을 쓰는 쓰시마 유코가 ‘남자’와 ‘소년’에 대해 한 말을 떠올린다. ‘남자는 부재한다. 남는 것은 남자 속에 계속 살아있는 소년이거나 아니면 사회적인 관념 그 자체일 뿐이다. 사회적인 관념으로 화하여 살고 있는 남자를 제대로 된 인간으로서 묘사하는 것은 헛수고라는 기분도 든다’고 그녀는 말한다. 소년이거나 사회적 관념 그 자체이거나, 둘 중의 하나로서만 존재할 수 있는 남자와 달리 여자는 소녀면서 여자로, 여자면서 소녀로 살 수 있다. 가부장적 언어체계 안에서 여성은 남성/성을 설명하기 위한 기호로 작동한다. 많은 여성주의 철학가들은 그래서 ‘여성에겐 성이 없다’고 말하거나(모니크 위티그), ‘여성주체는 없다. 만약 여성이 주체라면 주체는 하나가 아니다’라고 말한다(뤼스 이리가레). 모든 담론이 남성중심의 의미경제 체계 안에 갇혀 있다면 그 안에서 여성에게 부여된 그 어떤 주체적 위치성도 유효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남자는 소년이거나 사회적 관념 그 자체일 뿐이지만, 여자는 소녀이면서 수많은 여자들로, 즉 하나가 아닌 주체로 존재한다. 류준화의 소녀는 그래서 현실적 연령을 가늠하기 어려운 몸과 표정을 간직하고 있다.



꽃구름 mixed media on canvas 112x145.5cm 2012



그런데 이렇게 수많은 여자들로 존재하기까지, 그토록 슬프고 괴기어린 “초록날개”(2007)에서 “새”(2007)로 변신하기 시작해 그토록 단단하고 고요하게 생명을 창조하는 “물의 시간”(2009)에 이르기까지, 이번 전시가 보여주듯이 아예 거대한 꽃들의 대지가 되지 않고는 못 배기는 환희의 지경에 이르기까지, 류준화의 소녀들은 폭력과 희생, 분노를 숨기면서 드러내고 (드러내는 것조차 금지되었으므로), 드러내면서 숨겨왔다 (기존 재현 방식의 일의적ㆍ투사적 수용에 저항하기 위해). 그렇게 소녀를 소녀로 살지 못하게 하는, 즉 여성들을 ‘스스로 이해한 자기’로 살지 못하게 하는 폭력적 현실을 무대화했다.

본격적으로 여성/주의 그림을 그리기 전 대학시절에 작업한 그림들에서는 그 기괴함이 더 강하다. 구체적인 형상은 없는 추상화들인데도 그랬다. 내 안에 분노들이 많았던 것 같다. 사실 내 그림 속에는 엄마의 한들이 서려있었다. 그래서 오히려 추상적인 형상들 속에 내가 담고 싶은 그 분노의 내용들을 숨겼던 거다. 그 때도 역시 내 머리 속에는 늘 약자에 대한 생각이 있었고, 그 약자의 대변인으로서 항상 어린 아이를 담았던 것 같다 ... 추상적 형상 속에. 휠체어 탄 아이를 넘어뜨리는 어른같은.

휠체어 탄 아이를 넘어뜨리는 어른. 망설임 없이 작가의 입에서 나온, 그만큼 작가의 마음속 깊숙이 새겨져 있음에 틀림없는 (‘도가니’ 현상이 보여주듯 장애소녀에 대한 폭력은 사실 한국인 모두의 무/의식에 새겨져 있다.) 이 이미지는 인간사회에서 볼 수 있는 모든 폭력의 어떤 원형적 이미지 같은 것이다. 그녀의 전 작업과정은 말하자면 폭력의 원형적 희생 이미지 소녀에서 죽음과 삶 전부를 껴안는 여성적 생성의 원형적 이미지 소녀로 변화해온 셈이다. 그리고 이 변화의 과정은 제의적 아우라에 둘러싸여 있다.

첩첩산중 두메산골에 살던 어머니가 들려주던 이야기에는 늘 폭력에 희생당하는 여자들이 등장했다. 어머니들이 모여 앉아 나누던 이야기도, 실제 삶도 그랬다. 어머니 주변에, 내 주변에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야 했던 여자들이 많았다. ... 그때 어머니는 촛불 켜놓고 공양을 드리며 신들을 모셨다. 신들을 모시던 어머니의 행위는 내게 익숙했다.




검은 땅 mixed media on canvas 130x194cm 2012


작가가 들려주는 이 어머니의 이야기는 물론 그녀의 ‘사적인’ 어머니의 ‘사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전쟁을 겪고, 유교가부장제의 혹독한 조건 속에서 묵묵히 삶을 책임지던 당시 어머니들의 보편적 이야기다. 촛불을 켜고 정한 물을 떠놓고 기도를 드리는 것은 험난한 삶을 견디는 일상적 제의였다. 류준화의 소녀 그림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이 약간의 으스스한 유령적 느낌과 어떤 구원적 영성을 동시에 품고 있는 것은 이렇듯 한국사회 어머니‘들’의 제의적 행위성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내 유년기에 나의 어머니도 늘 신들을 모셨다.) 그녀에게 가장 강력한 영감을 준 어머니‘들’의 제의행위는 그녀의 작업에 등장하는 소녀들에게 이중적 존재성을 부여한다. 즉 여기서 소녀는 아버지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죽음의 장소를 다녀온 바리데기처럼 만신이면서 동시에 그 만신이 생명을 구원하는 소녀-여성들이다. 그녀의 소녀에게서는 제의를 관장하는 만신과 제의에 자신의 삶을 (혹은 그 삶의 구원을) 의탁하는 여성들이 함께 숨 쉬고 있다. 한을 씻어 내리기 위해 신들을 향해 밝힌 ‘어머니 만신들’의 촛불은 류준화의 그림에서 소녀를 비롯해 모든 존재들이 몸담고 있는 투명하고 성스러운 물로 계속 빛나고 있다.

이렇듯 류준화의 소녀 그림들은 예술이 한편에서는 아직 종교에서, 그리고 다른 한편에서는 자연에서 분리되지 않았던 시기의 예술-자연-종교의 관계를 환기시킨다. 그러나 그녀의 이미지가 상상계로서의 설화적 세계만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한은 “실현되지 않은 욕망들”이다. 류준화가 불러낸 이 소녀들은 실현되지 않은 바로 그 욕망들을 품고 귀환하는 여성들이다. “출항”(2009)이라는 그림을 보자. 배 위에 노를 잡고 있는 한 소녀가 있다. 뺨은 상기되어 있고 머리카락은 바람에 휘날린다. 당차고 늠름한 자태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 소녀는 떠나는 게 아니라 이제 막 도착하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이 그림에서 뿐 아니라 거의 모든 경우 류준화의 소녀들에게서 ‘출항’은 이렇듯 떠남과 귀환의 이중적 움직임으로 표현된다. 귀환으로서의 떠남, 떠남으로서의 귀환. 떠남과 귀환의 이 겹침은 의미심장하고 매우 실존/주의적이다. 이 겹침은 설화의 세계와 역사적 현장의 겹침이고, 원형적 이미지를 개별적 ‘사건’으로서의 이미지로 전환시키는 겹침이다. 지워지고 침묵된 욕망으로 피흘리던 소녀들이 차례로 불림을 받아 ‘지금 여기’ 역사의 자리로 돌아오고 있다.

 

3. 이주의 시대, 소녀-이방인의 환대

이동 중의 사람들 ... 슬프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고, 분노하기도 하고 용서하기도 하고 기억하고 싶기도 하고 지워버리고 싶기도 한 경계 위에 서있는 자의 감성을 표현하고 싶은 거였습니다.

소녀와 새에 관한 오래된 전설이 하나 있다. 할머니에게서 어머니에게로, 어머니에게서 딸에게로 전승되던 아주 슬프고 잔혹한, 그러나 전율과 매혹으로 빛나는. 한 소녀가 있었다. 그녀는 사랑하는 사람을 구하러 먼 길을 떠나야 했다. 그 길은 너무 멀어서 소녀는 날개가 필요했고, 소녀를 등에 태우고 강과 들판 위를 나는 새는 굶주린 배를 채울 고기가 필요했다. 소녀는 새에게 자신의 팔과 다리를 떼어 주며 여행을 계속했다. 그리고 류준화의 “발 없는 새” 소녀 그림이 있다. 그 그림 속에서 소녀는 발 없는 새를 오른 팔로 안고 있다. 그녀의 허리께에 착 붙어있는 그 새는, 소녀의 옆구리에서 태어난 소녀의 욕망처럼 보이기도 한다. 발 없는 새와 날개 없는 소녀가 만나면 새는 발이 생기고 소녀는 날개가 생긴다. 소녀-새가 탄생한다.


날개 mixed media on canvas 72x91cm 2012


이 그림을 두고 작가는 인터뷰에서, 계속 날기만 해야 하는, 발이 없어 쉴 수 없는 새를 한 소녀가 쉬게 해 주는 것처럼 자신의 그림들이 이동 중에 있는 사람들이 쉴 수 있는 장소가 되길 바란다고 말한 적이 있다. 지금 전 지구적 차원에서의 불균등 발전 때문에, 더 나은 삶에 대한 꿈을 좇아 수많은 사람들이 이동 중이다. 근대 이래로 이주는 일국의 차원에서, 지구적 차원에서 언제나 있어왔다. 그러나 기술, 통신, 초국적 자본, 미디어 등이 촉발하는 당대의 이주는 더 이상 비서구에서 서구로의 일방향이 아니라, 아시아 내에서, 혹은 비서구와 서구 간의 쌍방향으로 진행되면서 특히 이방인과의 삶에 익숙하지 않았던 한국사회에 큰 변화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류준화의 “발 없는 새”는 모든 이동하는 이들, 이방인들의 알레고리로 읽힌다. 여기서 “하나가 아닌 주체들”로서의 소녀는 성별을 벗어나 아무 곳에도 정착할 수 없는, 그래서 역설적으로 모든 곳에 정착할 수 있는 이방인들의 정체성으로 확장된다. 사람마다 소녀-새를 바라보고 교감하는 방식이 다르겠지만 시대적 상황이 우리로 하여금 ‘발 없는 새’의 비행을 이방인과 환대의 관점에서 이해하도록 촉구한다. 인류학적 관찰이 증명하듯이, 그리고 데리다가 역설하듯이 모든 이방인은 환대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 손님을 맞는 사람들은 이방인들의 이 환대권에 응답해야 할 책무를 지닌다. 이 응답은 손님과 적의 바로 그 경계에서 이루어진다.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이방인을 손님으로 인정하고 환대하는 것, 이것은 개인과 국가의 차원 모두에서 당대가 요구하는 가장 급진적인 정치학의 하나가 될 것이다.


4. 끝나지 않은 에필로그: 봄의 제전, 소녀 월드

우주인의 관점으로 이 지구를 봤을 때 나는 물이 제일 신비롭다고 생각한다. 물처럼 신기한 게 없는 거다. 생긴 모양도 너무 특이하고. 잡혀지긴 하는데 잡히지 않고 경계가 없고 그러면서 투명하고 ... 마실 수도 있고. 또 그 안에 모든 영양분이 다 들어있고 ...

너무나 성스러운, 너무나 흔한, 누구에게나 흘러드는, 누구에게나 세례를 베푸는 물. 이 물의 감흥이 나를 키웠다.

류준화는 지금 어느 때보다도 물의 성스러움에 감염되어 있다. 이 감염의 결과는 ‘덩어리’로 등장하는 소녀들이다. 이전에도 여러 소녀들이 물속을 유영하거나 여행하는 그림들이 있었지만, 지금 거침없이,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솟아나고 있는 이 소녀들처럼 이렇게 무리지어 나타난 적은 없다. “대지의 꽃”, “봄의 소리”, “달의 정원”, “검은 땅” 등등 - 그렇다. 광대하게 펼쳐지는 “봄의 제전”이다. 이 작업들은 물의 성스러움과 생성의 황홀에 전율한다. 여전히 소녀들의 몸에서는 크고 작은 날개가 솟고, 꽃들은 피흘리며 만개한다. 소녀는 어머니와 딸로 증식하고 개와 사슴이 소녀의 곁을 지킨다. 소녀들은 오체투지를 하고 기도를 올리며 애도에 잠긴다. 사막을 횡단하는 중인가? 소녀의 곁에 선인장들도 무성하다. 그리고 엉키고 설킨 덩어리로 나타나는 소녀들. 이 소녀들은 더 이상 예전의 설화적ㆍ알레고리적 소녀-여성의 모습을 띠고 있지 않다. 머리카락이나 표정에 있어 현실세계의 구체적인 개별 얼굴들을 하고 있다. 이 변화는 봉화에 내려와 살면서 류준화가 경험한 ‘자연세계’의 우주적 생성과 무관하지 않다.

자연에는 끊임없는 반복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같은 자리에 똑같은 풀이 나고 ... 그러나 그러면서 조금씩 자기의 씨앗을 번식시킨다. 자연을 계속 접하다보면 여자의 몸과 닮았다는 생각을 갖게 되더라. 아이를 잉태하고 출산하는 여자의 시간이 자연의 시간과 마찬가지라는 거다. 신비롭고 영적이다. 우주적이다. 꽃망울이 알아서 터지면서 씨앗을 흩뿌리는 것부터 시작해서 그 긴 겨울동안 또 다른 생명을 키우기 위해서 시간을 축적하는...

류준화는 화가다. 화가는 색과 형태의 스케일에 민감하다. 광대한 스케일에 대한 욕망은 예술가적 추동력과 무관하지 않다. 그리고 모든 스펙타클이 드 기보르가 『스펙타클의 사회』에서 지적한 이데올로기적 문제점들로 귀결되는 건 아니다. 문화정치, 문화전쟁의 시대에 주류 이데올로기가 자본주의 문화산업과 결탁해 무차별하게 확대시키는 스펙타클한 문화생산품들, 행사들에 대항해 반문화적(counter-culture) 행동으로 기획되는 스펙타클도 있다.

저렇게 소녀들이 군상으로 나오면 그 소녀들이 품는 기들이 있을 거라 생각한 거다. 소녀들의 그 기들이 자연이 내뿜고 있는 생명의 기운들을 보여줄 거라 생각한 거다.

이처럼 화가 류준화는 문화산업이 만들어내는 ‘소녀 시대’와는 다른 소녀 세계를 꿈꾸고 있다. 이 소녀 세계가 펼쳐 보이는 봄의 축제는 ‘봄의 제전’이 거대하고 풍요로운 봄의 생성을 위해 어떻게 소녀들을 희생제물로 바쳤는지 잘 기억하고 있다. 꽃의 한가운데를 파먹는 새들의 모습이나, 늘 피 흘리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꽃들, 발 없는 새 - 이 모든 형상들을 품고 있는 제전이고 황홀이다. 여기서 소녀들과 사물들은 서로에게 ‘나타남’으로써 ‘존재’하는 세계 내적 존재인 세계 관객‘들’로서 세계 관객‘들’인 우리에게 나타나고 있다. 우주적 경이를 품었으되 초월이나 관념으로서가 아니라 현실의 생명들로서.
(중략)


'보라, 이 소녀들을: 류준화의 소녀 월드, 소녀 미학 중에서..




장 소 : 관훈갤러리 1, 2F

일 시 : 2012. 11. 14 - 1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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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人열

현대백화점 미아점 10주년 기념展


참여작가 / 1부 : 천경자_김영미_강유림_이수경_한지선 
                2부 : 황영자_류준화_조정화_홍지연윤정원

주최 / 현대백화점 미아점 주관 / 아트세인 주관_정영숙((갤러리세인, 아트세인 디렉터,( blog.naver.com/jysagnes)_이은희(큐레이터)

관람시간 / 11:00am~08:00pm

현대백화점 미아점 갤러리 H GALLERY H 서울 성북구 길음동 20번지 현대백화점 미아점 10층 Tel. +82.10.9327.9515/+82.2.3474.7290

갤러리 H는 현대백화점 미아점 개점 10주년을 기념하는 전시 『 10인열전』을 개최한다. 국내 여성작가 중 원로, 중진, 그리고 신진작가에 이르기까지 회화, 입체작품 등 장르를 초월하여 열정이 가득한 10명 작가의 작품을 4, 5월에 2회 걸쳐 전시한다. ● 국내에서 첫 여류 서양화이자 최초로 개인전을 개최한 나혜석, 초상화에 뛰어났던 근대 최초의 여성화가 아르테미시아 젠텔레스키(Artemisia Gentileschi)은 여성이 활동하기에는 척박한 시대상황에서도 화가의 길을 당차게 걸었던 인물이다. 이처럼 당당하게 시대에 저항하거나 천부적인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여성작가들은 현대미술에서는 소수자가 아니다. 최근 작가들을 조사하고 섭외하면서 여성작가들의 인원이 4~5년 전보다 월등이 증가하고 있음을 파악하게 된다. 숫자의 증원을 넘어 중요한 가치는 작품 내용일 것이다. ● 이번 전시는 원로세대 천경자, 황영자부터 중견작가 김영미, 류준화 그리고 40대 전후 역량 있는 작가 강유림, 한지선, 조정화, 홍지연 또한 신진작가 이수경, 윤정원에 이르기까지 독자적 감성의 발현이 탁월한 작가로 구성하여 단편적이지만 한국 여성작가의 한 흐름을 소개하는데 의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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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치명적이다'! 
'왜?'
'여자니깐!'
여자는 '아름다워서, 위험해서, 위대해서' 치명적이다.
누구에게?
다름아닌 남성권력에게!!
 
남성이 지배자로 군림하는 시대가 시작되자 모든 권력은 남성성과 합체한다.
교회와 군주, 왕실과 문중은 남성권력의 화신이다.
여자는 신성한 권력에 대해 도전할 수 있는 유일한 위험세력이다.
모든 여자는 남성을 유혹해 권력의 비밀을 탐지해내는 데릴라거나
경국지색의 양귀비거나 요녀 장희빈이다. 
지배자인 남성권력에게 여성과 남성이 우열이 아닌 상호 의존적 관계임을 주장하고,
동등한 대우를 요구하는 선지적 여성은 바로 '마녀'였다.
그리고 간혹 남성권력에 균열을 주는 전위적 여성이 출몰했지만
가차없이 색출되었고 무자비하게 처단당했다.
'왜? '
'여자니깐!!'

그렇게 남성권력은 탕녀와 마녀, 요조 숙녀와 열녀를 만들었고
나혜석을 처단하고 신사임당을 옹립했다.

인류는 자신의 어머니가 여성이고, 자신의 딸이 또한 여성임을 자각하는데 수천년의 세월을 필요로했다. 여자가 여류작가가 되고 다시 여성작가가 되는데도 만만치 않은 세월이 필요했다.  문명의 진보는 여성과 남성의 상호의존성과 동등성은 증명했고, 그리고 드디어 여성이 작가가 되고, 작가가 여성이 되는 시대가 도래했지만 마녀사냥꾼은 자본의 숲으로 도망쳤다. 그리고 위대한 마녀사냥꾼은  여성의 상품화라는 신 병기로 무장한채 숲을 나왔고 순식간에 지구를 정복했다. 이제 자본화된 남성권력은 실효성을 잃은 마녀를 대신해 비쥬얼 섹시스타를 앞세우며 지구의 절반인 여성에게 우상숭배를 강요한다. 이렇게 자본의 시대에 여자는 '상품'으로 거듭났다. 섹시한 상품이길 거부하는 여성은 이제 찌질이거나, 루즈다. 성형과 다이어트는 여성이 인간이 되기위한 최소한의 조건이 되었다.
섹시스타는 외친다.
'섹시 천국! 불신 지옥!' 

지배권력에 대한 반역의 음모는 권력의 바같에 웅크린 바로 그 찌질이와 루즈들 사이에서 피어나기 마련이다. 새로운 혁명은 남성권력의 바같에서 앙칼진 목소리로 일어난다. 여성은 남성지배사회를 전복하려는 반란의 주모자들이다. 그 반란녀들이 예술이란 무기를 들고 일어났다.  그녀들은 지배권력의 바닥을 보았고 예술이란 무기를 벼려 지배자 남성의 등에 칼이 아니라 꽃을 꽂는다. 예술이라는 신병기는 꽃잎처럼 부드러워 적을 상처내지 않은채 굴복시키고, 거위털보다 부드러워 뭇생명이 깃든다.  차가운 금속성 칼날을 삭히는 촉촉함과 생명의 온기를 가져 인프루앤자보다도 빠른 전염성을 가진 그녀들의 무기는 위험하다 못해 치명적이다 .그래서 여성예술가는 모두 전위이고 혁명가다.



그런 시대, 그런 세상에서 필자 제미란은 한국의 대표적 여성예술가를 찾아나섰다. 그리고 그녀들과 포옹하고, 대화하고, 차와 밥을 나누며 그녀들의 예술세계를 헤집고, 느끼고, 참여한다. 그리고 그 흔적은 온전히 한권의 책안에 담아냈다.
한국 현대 미술을 대표하는 14명의 여성 작가를 담고있는 [나는 치명적이다-경계를 넘는 여성들, 그리고 그녀들의 예술]은 여성적 삶이 한국 사회에서 어떻게 영위되고 예술로 승화되는가를 보여주는 여성작가론이자 동시에 여성예술론이다. 여자인 나는 어떻게 작가로 살아가는가, 그리고 동시에 여성작가인 나는 어떻게 자신의 정체성을 작업속에 온전히 녹여넣고 나만의 내밀한 세계를 창조하는가를 탐색해 나가는 필자 제미란은 사실 또 다른 작가이기도 하다.

필자가 14명의 여성예술가의 아뜨리에를 찾아 나선 것은 단지 그들 작가를 만나 담소를 나누고, 그들의 예술세계를 향유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그녀는 그리움이 된 그림을 찾아 자신의 예술세계를 모색하고 구축하기 위한 순례의 길목에서 단지 14명의 여성예술가를 우연히 마주친 것인지도 모른다. 분명한 것은 값싼 기획출판물과는 달리 [치명적이다]는 필자 제미란이 자신의 삶을 관통하는 예술적 탐색과정, 그리고 그녀들과의 맞남으로 응축된 자신의 삶의 기록을  통해 독자적인 예술적 고뇌에 이르고 있다. 그래서  [치명적이다]는 결국 미술가 제미란의 예술론이기도 하다.

제미란이 만난 14명의 여성작가는 사실 제각각이다. 그들을 한권의 책으로 묶는 끈은 여성성뿐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무의식적으로 여성성을 예술로 구현해낸 작가가 있는가하면 여성주의적 자각을 작업으로 승화시킨 작가도 있다. 그것을 여성적 미술과 여성주의 미술로 나누어도 좋을지 모르겠다. 나아가 그녀들은 회화와 설치, 행위예술과 공예를 아우른다.

필자의 입담과 필력을 따라가다보면 나는 어느새 14명의 그녀들을 아우르는 여성미술의 고갱이를 대면할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나는 책을 덮으면서도 그들 14명의 여성작가가 가진 공통분모에 이르지 못했다. 그것은 한국의 여성미술의 지평이 그만치 넓어지고 깊어졌기 때문인지 모른다.  여성미술이 미술의 한 파트가 아니라 미술전체를 아우르는 현대미술의 트렌드라고 보아도 부족함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필자가 초두에 던지 '공명(共鳴)'이라는 화두앞에 다시하번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다. 공명은 동일한 삶의 기반, 경험의 공유를 넘어 존재기반의 본질적인 동질성에 기반하는지 모르겠다. 한국적 현실에서 여성으로, 여성 예술가로 살아가는 14명의 작가가 일으키는 공명의 사이클 어디쯤에 필자 제미란은 자신의 자리를 확보하고 있지만, 그 끄트머리 어디쯤 미미한 구석에 독자인 나의 자리역시 가지고 싶다.
김원숙, 김은주, 김주연, 함연주, 유미옥, 윤석남, 윤희수, 류준화...... 제미란, 그리고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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