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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사회], 한병철 저, 2012, 문학과지성사




 

한병철은국내에서 금속공학을 전공(고대 1982 졸업)하고 독일로 유학하여 신학, 독일문학, 철학을 공부하여 1994년 하이데거로 철학박사학위를 받고 2000년 스위스 바젤대학에서 데리다 연구로 교수자격을 획득, 이후 독일과 스위스의 여러대학에서 강의를 해 왔고 현제 베를린 예술대학에 재직중이다.

그는 2010년 발행한 [피로사회]를 통해 독일의 베스트셀러 문화비평가로 부상했고, 한국에는 2011[권력이란 무엇인가]로 처음소개 되었다. 주요저술로는 [피로사회], [시간의 향기], [투명사회], [에로스의 종말], [죽음의 타자성], [폭력의 위상학], [하이데거입문], [헤겔과 권력] 등이 있다.

이 책에서 피력한 한병철의 현실 인식을 보면 신자유주의의 병리학적 징후로 우울증을 이해하고, 우울을 불러 일으키는 것은 무엇보다 긍정적인 것의 과잉에서 찾고 있고, 이 문제의식이 전편에 퍼져있다.

 

2014년 차이트지의 밀스 보잉 등과의 인터뷰 기사 : 현실인식과 실천적 함의를 보여주는 언설

- 오늘날 우리는 신자유주의의 독재하에 살고 있습니다. 신자유주의에서는 모든 사람이 자기경영자입니다. 가시적 악의 소멸을 주장. (논란의 여지)

- 자기가 강제상태에 놓여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로 그 강제를 자유로 느낀다면 , 그건 자유의 종말입니다. 1980년대에는 인구조사를 시행하려고하자 모든 사람이 시위하러 나갔습니다. 그러나...

- 구조상으로는 지금 사회는 중세 봉건사회와 다르지 않습니다. ... 페이스북같은 디지털 봉건 영주들은 우리에게 땅을 주며 말합니다. 경작하라.... 결국 수확을 걷어가는 것은 봉건 영주들이죠. 이것은 소통의 착취입니다.... 이에 대한 저항이 없는 이유는 우리가 자유를 착취하는 시스템안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 “물적 자원 때문에라도 어쨌던 이대로 계속가지는 않을 겁니다. 원유는 50년 정도면 고갈됩니다...”(현실의 변화가능성을 인정?)

- 그래서 레닌도 말했죠. “배우고 배우고 또 배워라!”(낙관, 진보주의?)

- “이 세상에 대해서 기뻐할 일은 없습니다.” “오늘날에는 앎도 없고 정보만 있어요.”(비관, 염세?)

 

[피로사회]

피로사회는 작은 판형의 70여쪽의 책으로 총 7장으로 나뉘어져 있다.

7장중 전반부 4장까지 요약 발제.

신경성 폭력

[피로사회]의 첫문장은 시대마다 그 시대에 고유한 질병이 있다.”로 시작한다. 이 문장은 작자의 저술이 현대문명에 대한 문화병리학적 진단서 임을 보여준다. 그에 따르면 이 병은 타자의 부정성이 아니라 긍정성의 과잉으로 인한 질병이다.

21세기의 시작은 병리학적으로 신경증적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신경성 질환들, 우울증,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 경계성 성격장애, 소진증후군 등이 21세기초의 병리학적 상황을 지배하고 있다. 이들은 점염성이 질병이 아니라 경색성 질병이며, 면역학적 타자의 부정성이 아니라 긍정성의 과잉으로 인한 질병이다. 따라서 타자의 부정성을 물리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면역학적 기술로는 결코 다스려지지 않는다. 지난 세기는 면역학적 시대였다. 안과 밖, 친구와 적, 나와 남 사이에 경계선이 그어진 시대로 면역방어의 대상은 타자성 자체였다. 냉전의 종식으로 대표되는 패러다임의 변화는 이질성과 타자성의 소멸을 특징으로 한다. 이질성은 아무런 면역반응을 일으키지 않는 차이로 대체된다.

로베르토 에스포지토가 제시하는 면역학적 패러다임은 세계화 과정과 양립하기 어렵다. 면역반응을 일으키는 이질성은 탈경계 과정에 걸림돌이 될뿐이다. 그것은 보편적 교환과 교류과정을 가로막기 때문이다. 오늘 날 삶의 모든 영역은 일반적인 난교상태로 특징지어진다. 문화이론 담론과 생활감정자체를 지배하는 혼성화 경향 역시 면역화와는 반대되는 것이다.

면역의 근본 특징은 부정성의 변증법이다. 면역학적 타자는 자아 속으로 침투하여 자아를 부정하려는 부정분자이다. 자아는 타자의 이런 부정으로 인해 파멸되기 대문에 자아의 면역학적 자기주장은 부정의 부정을 통해 관철되는 것이다.

21세기의 신경성질환들은 부정성의 변증법이 아니라 긍정성의 변증법에 따른다. 그러한 질환은 긍정성의 과잉에서 비롯한 병리적 상태이다.

폭력은 부정성에서뿐만 아니라 긍정성에서도 나온다. 보들리야르같은 것에 의존하여 사는 자는 같은 것으로 인해 죽는다” “현존하는 모든 시스템의 비만상태와 같은 발언은 긍정성의 폭력에 관한 것이다, 하지만 그는 전체주의를 면역학적 관점에서 서술하는 이론적 약점을 드러낸다.

과잉 생산, 과잉 가동, 과잉 커뮤니케이션이 초래하는 긍정성의 폭력은 바이러스적이지 않다. 면역학은 그러한 폭력에 대해 아무런 수단도 없다. 긍정성의 과잉에 대한 반발은 면역저항이 아니라 소화신경적 해소 내지 거부반응이다. 과다에 따른 소진, 피로, 질식 역시 면역반응은 아니다. 그것은 모든 신경성 폭력현상으로서 면역학적 부정성에서 비롯되는 것이아니기 때문에 바이러스성 폭력에 해당하지 않는다.

하지만 보드리야르의 폭력이론은 긍정성 내지 동질적인 것의 폭력을 면역학적으로 서술하려는논리적 혼란에 빠져 있다. 긍정성의 폭력은 적대성을 전제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러 관용적이고 평화로운 사회에서 확산되고 부정이 없는 동질적인 것의 공간, 적과 동지, 내부와 외부, 자와와 타자의 양극화가 일어나지 않는 공간에 깃든다.

세계의 긍정화는 새로운 형태의 폭력을 낳는다. 새로운 폭력은 면역학적 타자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시스템 자체에 내재하는 것이며 그러한 내재적 성격으로 인해 면역저항을 일으키지 않는다. 긍정성의 폭력은 박탈하기보다 포화시키고, 배재하는 것이 아니라 고갈시키는 것으로 직접적으로 지각되지 않는다.

 

규율사회의 피안에서

푸코규율사회는 더이상 오늘날의 사회가 아니다. 21세기의 사회는 성과사회로 변모했다. 이사회의 주민은 더이상 복종적 주체라 아니라 성과주체라고 불린다. 그들은 자기 자신을 경영하는 기업가이다. 따라서 통제사회같은 개념은 더이상 적절성이 없다. 규율사회는 부정성의 사회다. 현대는 해서는 안된다는 금지의 부정성은 사라지고 할수있다는 긍정적이 이를 대체했다. 이제 금지, 명령, 법률의 자리를 프로젝트, 이니셔티브, 모티베이션이 대신한다. 규율사회의 부정성은 광인과 범죄자를 낳지만 성과사회는 우울증환자와 낙오자를 만들어 낸다. 이는 생산성의 최대화를 위한 패러다임의 변화이다. 일정한 수준의 생산성에 이르면 금지의 부정성보다 성과의 패러다임이, 당위의 부정성보다 능력의 긍정성이 훨씬 더 효율적이 된다. 하지만 생산성 향상이란 축면에서 당위와 능력사이에는 단절이 아니라 연속적 관계가 성립한다.

알랭 에랭베르는 우울증을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로 이행하는 시기에 나타나는 현상으로 규정한다. 그에 따르면 우울증은 권위적 강제와 금지를 통한 규율적 행위 조종 모델에서 자기주도성과 자기 책임을 요규하는 규범으로 대체하는 순간에 나타난다고 한다. 그런데 그는 우울증을 단지 자아의 경제라는 관점에서만 관찰하고, 오직 자기 자신이 되어야한다는 사회적 명령이 우울증을 낳는다고 본다. 그에게 우울증은 자기 자신이 되지 못한 후기근대적 인간의 좌절에 대한 병리학적 표현이다. 그러나 우울증의 원인은 사회의 원자화와 파편화로 인한 인간적 유대의 결핍에도 있다. 애랭베르는 성과사회에 내재하는 시스템의 폭력을 간과하고 이러한 폭력이 심리적 경색을 야기한다는 점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오직 자기자신이 되어야한다는 명령이 아니라 성과를 향한 압박이 탈진과 우울증을 초래한다. 인간을 병들게 하는 것은 과도한 책임과 주도권이 아니라 후기근대적 노동사회의 새로운 계율이 된 성과주의의 명령이다. 우울한 인간은 노동하는 동물로서 자기 자신을 착취한다. 우울증은 긍정성의 과잉에 시달리는 사회의 질병으로서 자기 자신과 경쟁을 벌이고 있는 인간을 반영한다. 자기착취는 자유롭다는 느낌을 동반하기 때문에 타자의 착취보다 더 효율적이다. 착취자는 동시에 피착취자이다. 가해자와 피해자는 더이상 분리되지 않는다. 성과사회의 심리적 질병은 바로 이러한 역설적 자유의 병리적 표출인 것이다.

 

깊은 심심함

긍정성의 과잉은 자극, 정보, 충동의 과잉으로 표출되기도 한다. 지각은 파편화되고 분산된다. 업무부담의 증가도 기간과 주의를 관리하는 특별한 기법을 요구한다. 그렇게 나온 멀티테스킹이라는 시간 및 주의 관리 기법은 문명의 진보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퇴화이다. 먹이를 먹으면서 주위를 살피는 동물의 수준이다. 동물은 자신이 마주하고 있는 대상에 사색적으로 몰입할 수 없다. 좋은 삶에 대한 사색은 불가능하고 날이 갈수록 생존자체에 대한 관심만 강화된다.

철학을 포함한 인류의 문화적 업적은 깊은 사색적 주의에 힘입은 것이다. 그러나 깊은 주의는 과잉주의에 자리를 빼았겼다. “귀 기울여 듣는 재능은 깊은 사색적 주의를 기울일 수 있는 능력에 바탕을 두는데 지나치게 활동적인 자아에게 그런 능력은 주어지지 않는다. 사물의 향기를 볼수있다던 폴 세잔은 깊은 사색적 관찰을 통해 풍경은 내 속에서 스스로 생각한다. 나는 풍경의 의식이다.”고 할 수 있는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러나 걸으면서 심심해하고 그런 심심함을 참지 못하는 사람은 마음의 평정을 잃고 안절부절 못하며 돌아다닌다. 깊은 사색적 주의 앞에서만 자신의 비밀을 드러내는 세계앞에서 현대인은 무력하다. 과잉활동성속에서 사색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니체는 인간에게 관조적 요소가 제거되면 인간 삶은 치명적인 과잉활동으로 끝날 것임을 경고했다. “우리 문명은 평온의 결핍으로 인해 새로운 야만상태로 치닫고 있다. 활동하는 자, 그러니까 부산한 자가 이렇게 높이 평가받은 시대는 일찍이 없었다.”

 

활동적 삶

한나 아렌트[활동적 삶]에서 사색적 삶을 우위에 놓는 전통적 입장에 맞서 활동적 삶의 가치를 복구하고 그 내적 다양성을 새롭게 표현하려고 했다. 그녀는 스승인 하이데거와 마찬가지로 영웅적 행동주의를 열렬히 옹호한다. 한나 아렌트에게 행동의 가능성은 탄생을 지향한다. 기적은 인간 탄생 자체, 그리고 인간이 그러한 탄생의 힘을 바탕으로 행동하여 실현할 수 있는 새로운 시작에 있다. 이제 기적을 일으키는 것은 영웅적 행동이며 탄생은 인간에게 그러한 행동의 의무를 부과한다. 그리하여 행동은 종교적인 차원으로 숭화된다.

아렌트에 따르면 근대사회는 인간을 노동하는 동물로 격하시키는 노동사회로서 행동의 모든 가능성을 파괴해 버리다. 행동이 능동적으로 새로운 과정을 발동시키는 것이라면 근대의 인간은 반대로 익명적 삶의 과정에 수동적으로 끌려가고 있다. 제작과 행동을 아루르는 활동적 삶의 모든 형식은 노동의 수준으로 떨어지고 치명적인 수동성으로 떨어진다.

근대가 낳은 노동하는 동물에 대한 아렌트의 서술은 오늘날 성과사회에 대한 관찰결과와 일치하지 않는다. 후기 근대의 노동사회는 개별화를 통해 성과사회. 활동사회로 변모했다. 익명성 속에 자아를 용해시켜버리는 것이 아니라 거의 찢어질 정도로 팽팽하게 자아로 무장되어 있고 과도하게 활동적이고 신경과민상태에 빠져있다. 사람들은 왜 그토록 초조하고 부산한 상태에 빠지는가 하는 물음은 다른 해답을 요구한다.

근대는 신과 피안에 대한 믿음, 현실에 대한 믿음까지 상실하고 극단적 허무에 직면했다. 이러한 존재의 결핍앞에서 초조와 불안이 생겨났다. 노동하는 동물이 유적 노동을 하고 있다면 동물다운 느긋함이 생겨났을 것이지만 그렇지 않다. 세계는 전반적으로 탈서사화되었다. 이로인해 허무는 더욱 강화되었다. 서사성이 사라진 죽음에 직면한 벌거벗은 생명은 그 자체라도 건강하게 유지해야한다는 강박에 빠진다. 니체가 말한 신의 죽음이후에는 건강이 여신의 자리에 등극한다. 벌거벗은 생명자체를 넘어서는 의미 지평이 존재한다면 건강의 가치가 이토록 절대화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오늘의 삶은 호모 사케르의 삶보다 더 많이 벌거벗겨져 있다. 후기 근대의 성과사회가 우리 모두를 벗거벗은 생명으로 환원시켜 버린다면 우리 모두는 예외없이 호모 사케르인 셈이다. 하지만 성과사회의 호모 사케르는 절대적으로 죽일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절대적으로 죽일 수 없는 존재라는 특성이 있다. 말하자면 그들은 죽지않는 자들이다. 여기스 사케르는 저주받은이 아니라 신성한을 의미한다. 신성한 것은 벌거벗은 생명차제로 그것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보존되어야 한다.

과잉활동, 노동과 생산의 히스테리는 바로 극단적으로 허무해진 삶, 벌거벗은 생명에 대한 반응이다. 오늘 날 진행중인 삶의 가속화 역시 이러한 존재의 결핍과 관련이 있다. 노동사회, 성과사회는 자유로운 사회가 아니며 계속 새로운 강제를 만들어 낸다. 여기서 주인은 스스로 노에가 된다. 그는 포로이자 감돆관이며 희생자이면서 가해자이고 주인이면서 노예가 된다. 그렇게 인간은 자기 자신을 착취한다. 이로써 지배없는 착취가 가능해진다. 이제 인간은 우울증에 빠져 탈진하여 무력해진 나치수용소의 무젤만과 유사한 증상을 보인다.

한나 아렌트는 노동하는 동물의 승리에 대항하는 어떤 효과적 대안도 제시하지 않는다. 오직 사유의 힘을 손상받지 않은 소수의 행동에 호소한다. 노동하는 동물에 대항하는 활동적 삶을 피력하던 한나 아렌트는 결국 사유의 힘, 철학적 사색의 힘에 투항한다. 하지만 그녀는 사색적 능력의 상실이야말로 활동적 삶의 절대화와 관련되어 있으면 근대적 호라동사회의 히스테리와 신경증을 낳은 요인 가운데 하나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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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덮으며...

면역학적 적은 과연 사라졌는가? 자본 가노동자의 대립은 내재화되어 나 스스로 경영하는 자본가이자 착취당하는 노동자가 되었다는 언설의 현실성이 있는지 궁금하다. 자본의 탐욕, 부의 편중, 환경의 파괴, 위험의 증대, 민주주의의 훼손 이 모든 현장에 투쟁의 대상은 분명하다. 그런데 왜 행동하지 않는가는 정치심리학적 문제로 다른 차원에서 다루어야하는 것 아닐까? 몰라!

성과사회패러다임은 이전 프랑크푸르트학파의 하버마스 마르쿠제 등에 의해 제기된 자발적 복종, 체제내화, 그리고 그람시의 헤게머니 이론도 일맥상통해 보인다, 특히 푸코의 파놉티콘이론이 규율사회의 징표라면 후기의 통치성은 자발성에 포박된 후기 산업사회의 주체를 분석하는 틀로 성과사회이론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한병철 입론의 독특성은 다른 측면에서 찾아야하는것이 아닌가? 대중적이고 문학적인 언설로 철학적 주제를 다룬 점 그리고 동아시아를 통한 서양문화의 비판(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네 차이퉁)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의 관점에서 동아시아적 입지를 찾는 것으 도 다른 과제일것.

자기착취란 성공에 대한 심리적 압박에서가 아니라 구조의 산물이다.(장정일) 노동자는 자기 경영의 강박때문에 노동강도를 높이고 일거수일투족을 합리화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가의 자본증식의 요구에 따라 그렇게 할 뿐이다. 노동자는 자기경영의 주체가 아니라 여전히 자본의 노예이다.

그의 문화병리학적 진단의 심오함은 실천의 빈곤으로 귀결된다. 가장 중요한 주체의 문제에서 한병철은 무력하다. 개별화되고 파편회된 자기경영의 주체인 개인은 우울증의 원인인 사회구조적 문제를 보지 못하고 결국 개인적 힐링에 몰입하는 현대적 개인을 정당화한다. 늘 그렇지만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물론 한병철이 사회정치적 실천을 등한시하는 입장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문화병리학적 사회진단은 현실 이해의 출발점이지 실천적 함의를 제공해 주지 않는다. 그렇다면 한병철의 한계가 아니라 문화병리학의 한계일까?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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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석철학의 발흥, 프레게와 러셀 - 언어와 논리, 의미

- 이지훈

 

분석철학은 독일의 관념론에 대한 반발에서 촉발되었다. 프레게는 [산수의 기초]에서 칸트의 초월론적 관념론을 공격하고 수가 자립적인 대상이라고 주장하며 실제론을 옹호한다. 러셀은 절대적 관념론의 일원론에 대항하여 논리적 원자론이라는 다원론을 제기하고, 무어는 관념론이 인식주체와 인식대상을 구분하지 못한다고 비판하면서 실재론을 주장한다. 이 과정에서 사용한 방법론을 분석철학이라고 명명할 수 있는데, 분석철학은 언어분석을 통해 철학적 문제의 많은 부분을 해결 혹은 해소할 수 있다고 보는 일군의 철학자들이 가진 방법론적 입장을 지칭한다.

 

분석철학의 방법론은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 논고]에서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의 경계를 긋기 위한 시도가 이루어지면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말할 수 있는 것은 생각할 수 있는 것으로, 언어의 한계는 사유의 한계로 이해했다. 이점 이성의 한계를 긋고자 한 칸트의 철학적 기획과 일맥 상통한다. 칸트는 인간의 이성, 오성, 감성의 능력과 작용을 탐구함으로써 이 기획을 실현코자 했지만, 비트겐슈타인은 언어를 매개로 세계에 접근해 나갈 수 있으며, 의미와 논리의 문제를 천착했다.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입장을 같이하는 논리실증주의자들은 한 명제의 뜻은 그 명제의 검증방법이라는 검증원리를 통해 형이상학 등의 교설이 무의미한 헛소리임을 천명한다.

 

의미이론은 한 언어적 표현의 의미를 탐구하여 유의미한 것과 무의미한 것을 구분하는 방법과 원리를 탐구하는 이론으로 존재론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달리 말해 특정한 의미이론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 나름의 존재론을 상정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의미이론은 크게 3부류로 나눌 수 있다.

1. 플라톤의 지시의미이론 : 한 언어적 표현의 의미는 그것이 지시하는 대상이다

2. 관념의미이론 : 한 언어적 표현은 그것이 표상하는 관념이다.

3. 사용 의미이론 : 한 언어적 표현은 그것의 사용에 있다.

 

지시의미이론은 고유명사에만 설득력이 있으나 마이농의 황금산 같은 가능한 존재자의 문제에 봉착하고 만다. 지시의미이론을 거부하면 유명론에 빠진다. 이 난점을 해결하기 위한 시도가 관념의미이론이다. 한 언어적 표현의 지시대상인 존재자가 없어도 그 언어적 표현의 의미는 그것이 표상하는 관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관념의 주관성은 관념의미이론의 치명적 약점이다.

 

프레게는 지시의미이론의 약점을 언어분석을 통해 극복하고자 시도하고, 관념론이 수학적 진리마저 주관적인 것으로 치부하는 심리주의적 경향을 가지고 있다고 비판하며 이를 배격하는 것은 자신의 철학적 과제로 삼았다.  이를 위해 지시의미이론과 실재론을 바탕으로 수학의 진리와 개념을 논리학의 진리와 개념으로 환원가능 하다는 논리주의입장을 제기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어-술어 논리학을 거부하고 대신 논항-함수의 논리학을 제시함으로써  현대 논리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프레게는 1) 수학의 함수개념을 일상언어와 논리학에 도입하고, 양화사를 발명했으며, 2) 수의 개념을 최초로 정의했고, ‘논리주의라는 수학철학의 입장을 수립하고, 3) 의미를 뜻과 지시체로 구분하여 수학철학에서 심리주의와 주관주의를 배격했다.

 

러셀은 프레게의 뜻과 지시체 구분에 대해 비판하면서 은 여전히 심리주의의 잔재라고 보고 지시체만 인정했다. 그러면서 그는 지시의미이론과 실재론을 고수하면서 마이농의 과도한 존재론을 벗어나기 위해서 문장의 논리적 분석을 통해 확정기술구를 축출해 내어 무의미함을 밝히는, 비존재자 지시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기술이론을 제시함으로써 돌파하고자 했다.

 

기술이론은 고유명사와는 다른 확정기술이 지시체를 지닐 필요가 없다는 점을 보여줌으로써,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을 판명하는 기준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황금산같은 것이 꼭 존재한다고 간주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보여줄 뿐이다. 그래서 여전히 보편자의 존재를 수용하는 실재론을 벗어날 수 없었다.

하지만 러셀은 비트겐 슈타인을 만나 자신의 철학적 사고의 준칙이었던 오캄의 면도날이라는 원리와 기술이론은 논리적 원자론으로 한단계 진전을 이룬다. 

오캄의 면도날이란 존재론에서 최소의 존재자를 확보하려는 전략으로 어떤 추정된 실재가 있다면 그것을 구성하는 더 근원적인 실재로 대체하라는 원리로 러셀에 의해 논리적 원자론으로 구체화된다.

 

논리적 원자론에 따르면 임의의 명제는 기술이론을 적용하여 분석해 들어가면 더 이상 분석이 불가능한 최후의 잔여를 만나게 되는데 이를 원자사실(atomic facts)이라고 한다. 이들 원자사실을 위장된 고유명사가 아니라 논리적 고유명사로 이들이 세계를 궁극적으로 구성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논리적 원자론은 절대적 관념론에 대항해 다원론과 실재론을 옹호하기 위해 제시된 철학적 입장이지만 문제제기 후 엄밀하고 통일적인 체계를 세우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다. 단지 세계에 대한 철학적 탐구에 있어 언어, 논리, 의미에 대한 연구의 중요성을 확인하고, 그와 같은 입장의 분석철학의 조류를 20세기를 대표하는 철학적 입장으로 세우는데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러셀이나 프레게에 대한 비판은 주로 프레게의 실재론이나 러셀의 논리적 원자론이 그 자체 하나의 형이상학적 기획이라는 점에 맞춰져 있다. 이후 분석철학은 콰인 등에 의해 의미의 존재론과 형이상학을 모색하려는 움직임으로 전개되어 나간다.

 

문제의식>

1. 철학적 작업이 문명비판적 측면을 가진다고 볼 때, 프레게와 러셀의 문제의식은 관념론의 어떤 측면에 대한 공격이었을까?

 

2. 프레게의 실재론이나 러셀의 논리적 원자론도 그 자체 하나의 형이상학적 주장이라는 공격으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울까? 이 문제를 푸는 해답은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에서 시작될 것 같다. 인간이 가진 사고 체계 중 형이상학적이지 않은 것이 가능하기나 할까? 이 역시도 의문이다.

 

3. 분석철학이 철저한 분석을 통해 도달한 지점에서 남은 잔여는 몇 개의 언어학적 지식들 뿐인 거시 아닌가? 분석적 방법이 언어의 잘못된 이해에서 비롯된 인식적 오류를 극복하는데 기여했다고 해도 과연 그것을 하나의 세계관, 하나의 존재론으로 받아들일수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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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슐라르의 새로운 과학정신

- 과학과 예술의 관계에 적용될 철학의 가능성

- 지훈


어렵게 바슐라르를 읽었다. 사실 길지 않은 글에 너무나 많은 내용을 담고 있어 이것을 다시 축약한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노동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지금까지 나는 바슐라르를 철학자라기 보다는 예술철학자로 이해하고 있었다. , 불 등 상상력의 4대근원에 대한 글을 오래전에 읽었던 것으로도 기억된다. 하지만 알고보니 바슐라르는 콩트의 문제의식과 같은 선상에서 당대 과학의 발전을 토대로 한 실증정신을 확립하여 새로운 과학정신을 수립코자 시도했다고 한다. 이에 따라 제시된 그의 인식론은 과학을 넘어 예술의 영역에까지 적용코자 시도했고, 그 시도의 결과가 바로 저가 이전에 읽었던 바슐라르의 저작들이었나 보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지훈은 이 글에서 바슐라르의 과학인식론만을 살피고 있다. 물론 그것마저도 너무 내용적으로 많고, 논변은 복잡하다 .

 

먼저 바슐라르는 새로운 과학정신에 입각한 인식론을 수립하기 위해 과학의 불연속적 발전에 주목하고 이를 지속적 단절로 개념화한다. 그는 상식과 감각, 또는 기존 이론의 전제 등 새로운 문제의 해결을 가로막는 인식의 걸림돌을 문제를 발생시킨 인식의 틀을 대체함으로써 해소하는 것을 인식적 단절이라고 보고, 이런 단절은 과학의 거시적 역사는 미시적 차원에서 상시적으로 지속된다는 의미에서 바로  지속적 단절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그리고 그는 과학이 현상영역이 아니라 그와 같은 현상을 산출하는 근원인 본체를 이해할 수 있다고 보는 비실증주의적 주장을 펼치기도 하는데 이는 인간의 창조성이 현상을 만들어내는 만치 그 현상의 배후가 되는 본체를 이해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여기서 그가 제시한 방법론이 바로 현상-기술개념이다. 이 개념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바슐라르는 현상과 본체의 괴리를 극복하는 인식론적 단절을 넘어 인간존재론 차원의 단절을 제시한다. 이를 통해 열린 정신의 합리적 유물론에 도달 할 수 있고, ‘폐쇄적 코기토에서 실천적 코기토로 나아갈 수 있다고 제시한다.

 

이렇게 주어진 인식의 걸림돌과 맞서는 능동성을 욕망과 욕구의 구분에서 찾고 꿈을 향한 욕망의 무한 긍정을 통해 주관적 심리적 오류를 극복하고 단절과 상승의 원동력을 회복할 것을 주문한다. 바슐라르는 현실적 유용성에 바탕을 둔 욕구와 상상력의 원천인 욕망을 구분한다. 그는 욕구가 만들어내 주관적 오류는 사이비과학을 낳는데 반해 욕망에 원천한 꿈의 역동성은 진정한 과학의 역사를 낳는다고 주장한다. 나아가 과학사의 불연속과 귀납적 종합을 규명하며, 신생이론과 선행이론 사이의 관계에 적용되는 개념으로 형이상학적 귀납’ ‘포섭을 제시하기도 한다.

 

바슐라르의 인식론은 오류에 대한 개방성새로운특성으로 하며 기존의 합리성에서 벗어난 꿈, 상상력, 욕망, 의지 같은 개념을 원동력으로 포함시켰다는 측면에서 의의를 가진 것으로 보인다. 물론 푸코에 와서 무한 긍정되는 비합리적 요소가 여전히 긍정적 억압의 통제 대상으로 남아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이지훈의 글을 읽고 여전히 남는 의문은 바슐라르의 인식론이 현대 과학의 성과를 과연 과학적으로 수용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과학 속에 있는 비과학적 요소의 개입양상을 해명하여 새로운 과학철학의 장을 개척한 의의를 인정하지만 그의 인식론은 문학적요소가 너무나 깊이 개입한 것 같은 의혹을 지울 수가 없다. 바슐라르의 인식론의 수립과정에서 스스로 긍정적 억압을 어는 정도 성공하고 있는가하는 의문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철학적 입론이 합리성을 잃으면 주의주장은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철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바슐라르는 문학적 상상력, 예술적 상상력에 그의 지적 궤적이 가 닿아 있고 그곳에 인식의 닻을 내린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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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 세르의 인식론 : 공존의 모색

- 지훈


바슐라르의 새로운 과학정신은 그의 제자이자 나중에 푸코의 스승이 되는 캉길렘을 통해 계승된다. 캉길렘은 바슈라르의 문제의식을 계승해서 이를 생물학의 영역에까지 확대하고 과학사연구의 인식론적 성격을 극대화한다. 그는 콩트의 세포이론 해석에서 바슐라르의 욕구/욕망범주를 보다 객관적인 사회정치적 범주로 전환했고, 이는 한 시대의 지식 형성에 개입하는 사회적 힘과 규율의 문제를 다루는 푸코 사상의 출발점을 제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셸 세르는 콩트의 연속성’, 바슐라르의 단절과 다른 입장으로 과학의 진보는 인정하지만 과학이라는 단수의 용어로 묶을 만한 단일한 진리의 연대기적 축적은 없다고 보는 특이한 입장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르는 이성의 역할을 신뢰하고, 이성의 역할을 극대화할 것을 주장한다. 이 입장에서 세르는 바슐라르를 비판하는데, 바슐라르가 이성을 과학의 영역에 한정시키고 예술, 인문학 등을 몽상의 영역으로 밀쳐버렸다는 것이다. 

 

하지만 세르의 입장은 이성의 폐쇄적 절대주의로 나가지 않고, 개방적 합리성이라는 입장을 고수한다. 이는 한 체계로 세계를 설명하려는 이성이 아니라 다른 체계들과 서로 작용하고 보충하는 이성으로서의 개방적 합리성을 말하는 것이다. 한 체계의 개방성은 자기체계의 한계를 인정하는 데서 출발하고 바로 그로부터 합리성이 나온다고 본다. 다시 말해 세르의 인식론은 전체로서의 체계라는 근대적 이상을 완전히 벗어나 있다. 그의 입장에서 한 체계의 절대적 완결성은 불가능할 뿐 아니라 체계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세르는 철학이 바다를 떠돌다 잠시 만나는 작은 섬에 불과하다고 보고, 영원히 정착할 안정된 대륙, 세계를 한 번에 구성해줄 철학은 없다고 본다. 바로 이점에서 세르는 맥루한과 비교되기도 한다.

 

맥루한은 미디어가 메시지라고 보면서, 모든 미디어의 내용이 또 다른 미디어의 형식이 되는 내용/형식의 상호 순환적 영향관계를 제기하며 궁극적인 기원, 최종적인 원형을 거부한다. 화자와 청자, 내용과 형식, 주체와 객체는 끊임없이 순화하며 상호 반전되는 관계일 뿐이라는 것이다. 바로 이점에서 맥루한의 입장은 기원의 신화를 해체하고, 기원을 통해 성립하는 닫힌 체계를 논박하는 세르의 입장과 상통한다. 다시 말해 중심은 끝없이 이동하기 때문에, 한 체계 내부의 교환을 모두 매개하고 제어하는 초월존재를 인정할 수 없지만 체계 외부의 끊임없는 유입은 인정할 수 밖에 없다고 본다. 즉 열린 구조는 소통을 긍정할 수밖에 없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세르와 맥루한은 이질적인 매체, 이질적인 지식의 공존에 대한 입장에서 갈라진다. 세르는 맥루한과는 달리 공존의 관점에서 소통의 숨은 요소인 소음에 주목한다. 세르는 이 소음의 개입과 간섭을 긍정함으로써 인간사유 발전의 가능성을 열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또한 정보에 대한 입장에서도 세르와 맥류한은 갈라선다. 맥루한은 in-formation에서 ‘in’의 의미를 중립적인 질료를 형상 속에 집어넣기라는 관점에서 이해하고, 세르는 ‘in’을 고정된 형상이 없는것으로 이해한다. 따라서 맥루한에게 개별 매체는 자기완결적이지만, 세르에게 매체들은 이질동상적이다. 세르는 이와 같은 입장에서 정보를 천사에 비유하며 소통하고 이동하는 정보자체의 특징을 드러낸다.

 

그런데 소통은 기본적으로 교환이며, 나름의 주고받는 규칙을 전제로 한다. 그리고 규칙은 위반되고, 규칙을 위반한 요소는 배제되는데 여기에는 초월축출이 일어난다. 이상적인 교환체계는 이들 기식자를 효과적으로 축출함으로써 안전하게 닫힌 체계를 유지하려 한다. 하지만 완전한 축출은 불가능하고 외부와 내부에 걸쳐있는 기식자는 늘 상존한다. 이들 기식자는 체계의 안밖에 걸쳐 있으면서 한 체계의 외부를 지속적으로 체계의 내부와 공존토록 하고, 이를 통해 새로움의 가능성을 제기하고, 나아가 한 체계의 붕괴와 새로운 체계의 생성을 낳기도 한다.

 

세르는 이와 같은 소음, 기식자, 제외된 제3자 같은 것들의 의미를 찾는다. 이들 담론질서에 포함되지 않은 것들의 창조적인 성격에 주목함으로써 세르는 진정한 소통의 근거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과학 아닌 것과 과학의 관계에서 바슐라르는 비대칭적 시각인 바면 세르는 과학 아닌 것에서 과학성을 읽고, 과학 속에서 비과학성을 있는 대칭적 시각을 보인다. 그렇다고 세르가 과학과 비과학의 경계를 허물어버리고 지적 무정부상태에 빠지진 않는다. 그에게는 과학과 예술을 통일하는 근본원리가 있는 것도 아니고, 과학사가 참의 역사만은 아니지만  참된 개념을 만들어 가려는 노력들, 개념화 형식의 집합이다. 따라서 세르는 연대기적 순서의 과학적 진보, 사회적 진보는 존재하지 않지만 세계를 보다 포괄해서 보여주는 관점의 존재가능성을 인정하는 수준에서 진보를 인정한다. 세르에게 시간개념은 비일적선적 개념으로 시간의 복잡성, 시간의 다발을 긍정하는 인식론으로 오늘날의 복잡성의 과학에 걸맛는 인식론이다.    

 

세르의 인식론은 정보유토피아를 보여주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하지만 세르의 인식론을 바로 인터넷 소통, 정보사회 차원으로 환원함으로써 생길 수 있는 위험을 무시할 수 없어보인다. 이지훈의 이 글만을 통해 이해한 세르는 소음의 배제 과정에서 일어나는 갈등, 한 체제의 외부와 내부가 충돌하는 과정에서 야기되는 폭력성 등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다. 그리고 중심의 이동과 다극화에 대한 담론은 현실 이해와 일정 정도 괴리되는 측면을 가지기도 한다. 세상은 권력의 속성, 자본의 지배라는 틀이 여전히 온존하며 오히려 더 강화되는 면을 보인다. 정보의 홍수, 정보의 민주화라고는 하지만 사실 더 교묘하게 정보는 관리 통제되고 집중되는 양상도 드러난다. 정보의 유통구조가 복잡화 되고 점점 더 파악 불가능한 것으로 전화하면서 정보의 통제자는 빅브라더가 되고 보이지 않는 신이 되어가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르는 세계의 열린 구조를 이야기하지만, 세계지배질서는 여전히 닫힌 구조로 강건하게 유지 존속되고 있고, 닫힌 구조의 근원이 되는 계급구조는 고착화가 더 심각해지는 상황이다. 다시 말해 세르의 지식의 세계-대수학에 바탕을 둔 열린 구조는 현실의 세계-자본에 바탕을 둔 닫힌 구조와 합치하지 않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드는 생각이지만 과학과 철학의 행복한 맛남은 쉬운 일이 아닌 것 같다.철학자의 과학에 대한 해석은 종종 이론이 아니라 인식의 과정에서 가지는 심리적 반응, 정서적 반응일 경우가 많아 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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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5 10일 화요일

오귀스트 콩트(Auguste Comte, 1798~1857)

 

<참고문헌>

이지훈, “콩트와 실증주의 인식론의 기초, [현대철학의 모험]

[서양철학사] 램프레이트, 을유문화사

 

콩트는 19세기의 과학적 성과를 철학적 사고의 토대로 끌어들였다. 그는 생시몽으로부터 인류 문명의 진보에 대한 확신을 얻고, 스스로의 과학적 연구를 통해 과학적 지식의 엄밀성과 확실성에 대한 확신에 이르렀다. 콩트는 과학적 지식에 대한 확신에서 기반해 실증 가능한 것만을 철학의 영역, 학문의 영역에 남기고 실증 불가능한 지식들, 비과학적 인식론을모호하고 불분명한 것들로 팽개쳐 버렸다.

그는 인류의 사고 단계를 3단계로 나누고, 신학적 단계와, 형이상학적 단계를 이어 과학적 단계로 불렀다. 신학적 단계는 미지의 세계를 인격적 정서에 의해 설명하고, 가상적 공상적으로 이해한다. 형이상학적 단계는 인격적 힘을 이용한 세계 이해에서 벗어나 경험적 현상을 넘어 선본질이나실체등과 같은 추상적인 술어로 세계를 설명한다. 과학적 인식의 단계에 접어들면 현상을 실증적인 소여로 받아들이고 이 현상들의 상호관계를 탐구하여 일반화하는 데로 나아간다. 그와 같이 분류한 인류의 사고 단계를 바로 인류 문화의 발전 단계로 등치 시키면서, 콩트는 자신이 살아가던 당대를 <과학적-실증적 단계>로 이해한다. 그리고 과학적 사고를 가장 뒤떨어진 영역인 인류의 도덕적, 정치적, 종교적 방면에까지 적용하려고 노력했다. 그 과정에서 과학을 사회학의 영역까지 확장하여사회물리학즉 사회과학을 정립하는 사상적 성과를 낳기도 했다. 이후 사랑하던보오부인과의 사별이라는 아픔을 겪으면서 개인의 정감활동이 이성의 힘의 지배를 벗어남을 깨닫고 이를 제어하기 위한 교육, 종교적 훈육에 골몰하게 되고 급기야는 <인류교>라는 종교의 창시에 이르게 된다.

그의 주요한 철학적 성과는 지훈의 글에서 다루고 있듯 <실증주의 인식론>에 있다.

콩트의 실증주의는 실학으로 볼 수 있으며, 상대주의적 성격을 가진다. 실증주의의 상대성은 세계에 대한 유일한 설명이라는 통일과학의 이념을 부정하고 과학에서의 다원주의를 인정한다는 데 있다. 그 점에서 실증주의는 과학주의와 차이가 있는데 과학주의가 과학이론은 모두 경험적 명제로 구성된다는 입장과 모든 학문이 자연과학으로 뒷받침되어야만 한다는 입장을 가진 반면 실증주의는 현실성, 유용성, 확실성, 정확성, 유기적 상대성 등을 중시하는 입장이다.

또한 콩트는 과학에서 수학의 역할을 높이사지만 모든 과학지식의 수학화는 인정하지 않는다. 실증주의는 수학적 형식화를 과학의 보편토대로 보지 않고 개별과학의 고유성, 상대성을 인정한다.

나아가 실증주의는 과학을 합리적 허구로 본다. 과학은 문학적 상상력을 필요로 하고, 그 연구 과정에서 가설을 도입하나 가설은 수학적 성격을 가진다. 그런데 수학은 추상적 허구적 성격을 가지며, 실험은 주관적이고 상대적이기 때문에 과학은 허구적 성격을 가질 수 밖에 없다고 본다. 허구지만 합리적이라고 하는 것은 실증주의가 과학지식은 역사적, 상호주관적, 집체적 동의를 통해 정립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런 지식에 대한 상대주의와 역사성의 인정은 지식의 유연성과 개방성을 부여한다.

콩트는 인식의 추상적인 발생근거 자체보다는 인간의 앎, 지식의 성립 근거를 있는 그대로 탐구했다. 그 과정에서 콩트는 철학의 토대는 인식론이라고 보고  인식론은 과학의 성찰을 통해 구성하고, 과학의 성찰은 과학의 역사에 관한 성찰이라는 전통을 세우게 되었다. 이를 통해 공상적인 통일성을 부여하는 철학체계를 거부하고, 철학적 주장이 과학의 성과와 모순을 일으키지 않도록 조정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한다.

<핵심 개념>

실증

연역과 종합의 통일

경험과 법칙의 대등화

과학의 상대성

수학의 허구성

 

<문제제기>

1. 실증적 방법과 과학적 방법의 차이는 무엇일까?

콩트는 과학적 방법을 절대화하는 과학주의를 배격하면서 상대주의적 입장의 실증주의를 피력한다. 실증주의가 학문 영역간 방법론의 상대주의를 인정하지만 과학주의를 배격한다고해서 과학적 방법에 대한 신뢰를 버리는 것이 아니다. 실증주의는 과학적으로 검증가능한 것만 인식의 대상으로 제한하며 모든 형이상학적 인식론을 배격한다는 측면에서 과학적 방법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드러낸다. 나는 어디까지가 형이상학적 방법이고 어디부터 과학적 방법인지 정확히 구분하지 못하겠다.

 

2. 실증가능한 것의 범주는 어디까지 일까?

콩트는 물리적 세계를 포함해, 사회적, 정신적 현상까지 실증 가능한 영역으로 보았다. 그가 시큐러리스트(비종교적 도덕주이자)인 점을 보면 신학을 거부한 것으로 보이는데 예술영역까지도 실증적 인식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하지만 검증(실증) 가능한 것의 영역을 그렇게 넓게 잡을 수 있는지 확신할 수 없다.

 

3. ‘경험의 모호성, 주어진 소여의 불확실성을 제기하는 다양한 논지에 대해 실증주의는 어떻게 대응하고 있을까?

철학은 주어진 경험의 주관적 성격과 모호성, 나의 감성적 인식의 불활실성, 일반화된 지식의 오류가능성 등에 대한 자각으로부터 시작된 인간 사고의 흔적이다. 그와 같은 인식비판의 기초를 외면하고 곧바로 주어진 소여, 경험, 과학적 검증 가능성이라는 지평으로 철학적 인식론을 한정하는 것은 실용적태도인지 몰라도 인간의 궁극적인 철학적 물음에 대해 외면하는 것이 아닐까? 실증할 수 없는 많은 것들 - 생명의 신비와 죽음, 영적 경험과 예술적 환타지, 그리고 당장 이렇게 봄비 소리를 듣고 있는 나의 우울…-  바로 이것들이야 말로 인간이 철학하는 이유가 아닐까? 과학조차 끝내 건드리지 못한 미지의 영역와 끊임없이 생성되는 신비가 넘쳐나는 세계내 존재인 인간은 항상 주어진 경험 그 이상의 것을 탐구하려는 경향을 가지며 그와 같은 이유로 철학이 학문으로 성립하고 존속되는 것이 아닐까? 어떤 면에서는 칸트의 인식비판으로부터 후퇴한 것으로 보이기도 하는데 앞으로 더 공부가 필요한 과제가 아닐까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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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했다고는 하지만  나는 제대로 철학공부를 해본 적이 없다.  또 늘 마음 한구석엔  인식에 대한 목마름이 남아있었지만 먹고 사는 일에 쫒기고 게으름에 밀려 공부는 늘 뒷전이었고 이렇게 그냥 나이만 먹었다. 그렇게 먹은 나이 마흔 후반에서 쉰언저리를 맴도는 비슷한 처지의 이웃 지인 두어분이 '철학'공부를 같이 하자고 찾아왔다. 사실 농사로 밥벌어 먹고 아이 대학보내는 것도 감당하기 힘든 처지고, 또 겁없이 벌여놓은 마을 사업이 갈수록 태산이다보니, 마음을 끌렸지만 사양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다시 찾아오신 두분의 절실함이 끝내 나로 하여금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하게 만들었다. 

공부에 대한 절박함없이, 공부를 할 만한 삶의 여건도 되지 못하는 형편에서 허욕으로 시작한 철학공부지만 철학적 사유 이전에 철학서적에 대한 독서의 편린이나마 편지 글로 정리하여 블로그에 정리해 보고 싶었다. 외적인 성과에 대한 기대 없이 그냥 그렇게 늘 더불어 공부하는 삶이 진정 아름답고 알찬 삶이 아니겠는가는 믿음 하나로 나는 편지를 썼다.
 



벌써 달이 바뀌었습니다. 비나리 천지는 소생하는 생명들이 내뿜는 연두빛으로 가득합니다. 언제부턴가 새 봄을 맞으면 이 봄을 보지 못하고 지난 겨울 세상을 버린 뭍 생명을 애도하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세상에 무슨 희망이 있고, ‘나’라는 한 생명은 또한 무슨 의미가 있는지 알 수 없지만 봄을 맞는 환희는 의미보다도 더 근원적인 것인가 봅니다.

철학’을 같이 공부하겠다고 말씀을 드린뒤 [현대철학의 모험]을 구입하고, 지금은 잊혀진 어린시절의 친구 얼굴을 억지로 기억해내려 애쓰듯 이미 생소해진 개념들을 뒤적거리며 조금씩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개념의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릴 뿐 저의 손에는 지푸라기 하나 조차 잡히는 게 없습니다.

난해한 - 저한테만 그런지 모르지만 – 책을 읽어 내려가다보면 또 생각은 옆길로 빠져듭니다. 이걸 읽으면, 이걸 이해하면 나는 지혜로와지나? 아니면 삶의 의미, 존재의 의미에 조금이라도 다가가는데 도움이 될까? 그렇게 책을 읽지 않아도 좋은 이유를 찾는 나태한 의식을 깨워 다시 책속으로 들어가지만 그러한 물음은 앞으로도 책을 읽는 도정 내내 하나의 문제의식으로 계속남아 있을 것 같습니다.

사실, 철학은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면 더 혼돈스럽습니다. 우리가 공부하는 철학은 대부분 서양철학의 편린에 불과할 것이고, 그나마 학교를 다닐 때 잠시잠깐식이라도 맛을 보았던 것은 인도철학이나 중국철학 그리고 그 연장선에서 한국철학 정도 였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그보다도 훨씬 넓고 심원합니다. 인디언들은 또 그들 나름대로 세상을 이해하고 삶의 의미를 묻고 답하는 나름의 철학이 있을을 터이고 그것은 아프리카사람이든 필리핀사람이든 다 마찬가지 였을 것입니다. 한국만 해도 책으로 묶어 질 수 없는 제도권밖의 무속신앙과 불교와 유교, 도교 등이 결합하고 상호 침투하여 이룩한 다양한 세계관이 다 그 나름의 가치를 가지고 존재해 온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 문제의식은 인식의 성실성을 촉발하기는 커녕, 그냥 인식의 끈을 놓아버리는 의식유기의 상태로 저를 몰았습니다. 치밀하고 집요한 인식의 추적을 포기하고 그냥 그대로 대충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인연에 힘입어 다시금 철학책을 손에 쥐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도저히 도달하지 못할 지평이기에 미리 포기하는 삶대신, 좋은 분들 만나 마음 편하게 인류의 철학적 사유의 자취를 곱씹어보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조금씩 읽기 시작한 책이 이제사 제2부의 끝에 다다랐습니다. 이제까지 통독한 생성존재론과 해석학, 현상학에 대한 정리는 불행히도 다음으로 미뤄야할 것 같습니다. 일단 엘레야학파, 플라톤의 사고가 어떻게 서양의 철학적 사고를 지배해 왔고 그것이 이떻게 서양 근세 철학까지 이어져 왔는지 추적하는 것이 필요해 보입니다. 또한 이정우가 현대 철학의 분기점을 ‘시간’의 복권에서 찾고, 생성과 시간을 일차적인 존재로 격상시킨 사고를 “생성 존재론”이라 이름을 붙인 것이 정당한가에 대한 검토 역시 필요하다고 보여집니다.

그리고 해석학과 현상학은 이전에 공부할 때도 그렇지만 여전히 저에게는 명료하게 다가오지 않는 미지의 영역입니다. 가볍게 통독한 수준에서 그 많은 내용을 스스로 정리하기가 벅차기도 합니다. 나중에 다시 그렇게 분류되는 철학자 한명한명에 대한 이해의 과정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전문적인 학자가 하는 철학공부와 먹고사는 일에 거의 대부분의 생을 받쳐야만하는 생활인이 할 수 있는 철학공부는 애초에 같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전문적인 학자들이 내린 최종적 성과를 나의 삶의, 인식의 지표로 받아들여도 좋을까라고 스스로 생각해 보면 쉬 납득할수도 없습니다. 사실 마르크스가 말한 노동자면서 동시에 시인이고 철학자인 삶이 가능한 세상의 꿈은 아직 구현되지 못했고 저 개인의 삶조차 그와같은 이상과는 한참 동떨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철학’하는 삶의 고통, 혹은 부담을 차라리 종교에 귀의 함으로써 들어버리려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 대중들의 안일함이 한국 종교산업의 번영을 초래했겠지요.

그런 나태한 의식에 빠지지 않기위해 이번주부터 콩트에서 시작해 매주 한 꼭지씩 읽고 정리한 생각을 메일로 나누겠습니다. 우선 보내주신 두 꼭지의 글-사르트르와 콩트-은 잘 읽었습니다. 지적, 인식적 성실성에 경의를 표하는 것 말고 저가 토를 달 수 있는 글이 아닌것 같습니다. 사실 토론이 되면 좋겠지만 토론이 아니라 그냥 각자의 감상 만이라도 나눌 수 있다면 좋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렇게 생각을 나누다가 기회가 되면 차라도 나누면서 자리 함께 하면 좋겠습니다. 사실 올해 주 1회 봉화문화원에서 배우기 시작한 기타강좌는 표기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다보니 주 6일을 마을사업관련 공사판에서 노가다를 뛰고 또 하루 시간 내기가 쉽지가 않습니다. 그렇게 한해를 보내다 겨울에 집중해서 공부했으면 좋겠습니다. 마음의 짐을 내리지 못하고 한달은 지고 다니다가 이제사 마음을 정하고 그 짐을 내려놓고 편하게 잠자리로 기어듭니다.

20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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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을 전공했다는 이유로 주변 사람들에게 자주 질문을 받는다. 도대체 철학이 무엇인지, 뭐 하는 것인지. 하지만 그 질문에는 꼭 아무 쓸모없는 철학 공부는 왜 했냐는 공격적인 뉘앙스를 담고 있는 경우도 많다. 그리고 질문 끝에는 꼭 능청스런 표정으로 철학을 [철학관]과 관련 지으며 혹시 사주 팔자 볼 줄 아냐고 물어오곤 한다. 하지만 1980년대 초반에 대학을 들어가 1990년대 초반까지 다녔지만, 나는 그뒤 어떤 '철학적 사유'도 없이 막 사는 삶을 살아왔고, 그나마 학교다니면서 얻었던 빈약한 철학적 지식마저 20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깡그리 잊어버린지 오래다. 그 세월동안 '철학'과 관련해서는 그런 성가신 질문을 모면하는 나만의 메뉴얼을 갖추었을 뿐이다. 일단은 '철학'이 무엇인지 물어오면 웃고 넘기지만 알만한 사람이 그것도 집요하게 추궁해 들어올 때는 일단 상대를 무시하는 전략을 구사한다 .

아이고 무식하기는, 남들 공부할 때 공부 안하고 뭐했는데요?” 

좀 더 편한 관계일 땐 악담도 서슴지 않는다.

니 상판데기 관상을 보니 올해 넘기기 힘들겠다. 우야면 좋노!”

그리곤 이런저런 개론서에서 배웠던 어원적인 분석을 보여주며 [philosophy = philos()+ Sophia()] 철학은 지식에 대한 사랑’, 혹은 지혜에 대한 사랑이라고 말해주기도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한참 부족하다. 그래서 세상을 이해하는 틀이니, 세계관이니 그러다가도 안되면 철학자체의 개념 변천사까지 들먹여본다.



인간의 모든 지적인 행위 전체를 아우르며 학문'이 곧 '철학이었던 시대를 지나, 철학에서 자연과학이 분리되고, 다시 심리학마저 철학에서 분리 되면서 철학에 정체성의 위기가 초래되고 철학의 개념을 재정립하는 과정은 곧 철학의 영역을 축소하는 과정이었다고. 이렇게 말해 보지만 이것은 질문자가 원하는 답이 아니 것이 분명하다.


질문자가 원하는 것은 '철학'의 현실적인 쓰임새가 무엇인지, 철학을 공부함으로써 도대체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사실 나 자신도 그같은 질문자의 물음을 해소해 줄만한 답을 제시하기가 궁색하다는 데 있다.
   
그 궁색한 처지를 모면하기 위한 철학에 대한 이해, 혹은 나 자신의 태도가 이제와서 다시 철학을 공부하고싶은 나의 욕망을 근거짓는 주춧돌일 수 있다. 왜 아무짝에도 필요없는 철학공부가 다시하고싶은가! 지금 다시 하는 철학공부가 나에게 대단한 깨달음을 주거나, 세상을 바라다보는 통찰력을 가져다 줄 것같지도 않고, 내가 하는 농사, 마을일들, 그리고 직접적으로 나의 생계를 해결하거나 나의 사회적 활동을 북돋아주는데 큰 도움이 될 것 같지도 않다. 더더군다나 이미 학자의 길을 가기에는 멀어져도 한참은 벗어난 인생을 살아왔고, 앞으로 대단한 저술가가 되거나, 하다못해 나름의 '인생철학'을 구축하고 어떤 수준에서든 한명의 사상가나 철학자로 입신할 가능성은 사실 제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다시 철학공부를 하고 싶은 것은  지극히 사적인 이유들과 더불어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철학의 매력때문이다.

먼저 나는 학생시절 제대로 공부를 한 적이 없다. 공부를 너무 하지 않은 학부시절이 끝나면서 그 사실이 너무 아쉬워 무작정 대학원을 진학했다. '대학원'이 나의 삶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에 대한 생각은 전혀없이 오직 나태한 학부시절 못한 공부를 다시 한번 재대로 해 보겠다는 얄팍한 욕구에 이끌려 대학원에 진학했지만, 사실 대학원 시험을 준비했던 7~8개월동안 공부한 것 말고는 대학원 시절 역시 학부시절을 지배했던 게으름의 연속이었다. 더군다나 결혼과 여타 사회적 활동까지 부가된 대학원시절은 휴학과 복학을 반복하면서 끝내 학위조차 얻지 못하고 중도에 포기하고 말았다. 결국 못다한 지적 탐구에 대한 미련이 그 솔직한 이유의 하나다.

그리고 이제 나는 내 스스로 받아들이기가 참 곤혹스럽긴하지만 적은 나이가 아니다. 나이를 잊고 살다가도 동년배의 나온 배와 벗겨진 이마를 마주하거나, 나와 친구들의 다 자라버린 자식을 대하게되면 움찔 놀라지 않을 수 없는 나이가 되었다. 대학진학은 물론 군대를 간 아이들도 하나둘이 아니고, 반갑지않은 청접장이 날아들 날도 얼마남지 않은게 사실이다. 마흔 아홉은 결코 적은 나이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참 막연하지만 내삶의 의미를 묻고 싶은 욕구가 마음 한켠에서 자라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이 허무의 바다인 세상에서 무의미한 삶을 살고 있지만 결코 그 무의미가 삶의 전부는 아닐 것이라는 느낌들을, 세상의 본질이 허무만을 아닐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을 천착하고 싶은 나이가 된 것 같다. 

사실 서양 철학은 재정립을 거듭하다가 비트겐슈타인에 와서는
가치판단마저 배제되고 철학이 순전히 언어의 의미를 명학히하는 작업으로 국한되기도했지만 사실 철학이 삶의 의미를 묻는 지적 사유가 아니라면
철학은 그 존재 이유가 없다고 본다. 내가 스스로 이해하는 철학은 인간이 자신의 삶의 근거를 묻는 인식적 작업이 아닐까 생각한다. 왜사는지, 생물학적 생명의 연장이 아니라, 인간적 삶의 지속성을 담보하기 위해서 요구되는 사는 이유를 만들어 나가는 작업이 바로 철학이라는 것이다.

철학을 업으로 삼는 학자들이 이해하는 철학이,
대중들이 일상생활속에서 사용하는 철학과 같은 의미일 순 없다.
'철학'을 검색어로 웹검색을 해보면 당장 드러나지만
우리는 일상속에서 수없이 많은 경우에 '철학'이라 용어가 사용되고 있음을 알수 있다.
정치가들의 '통치철학', 자본가들의 '경영철학', 교사들의 '교육철학' 등등
대중적 의미에서 '철학'은 어떤 판단이나 사고의 저변에 그것을 가능케하는 근본 원리같은 걸 말하는것 같다. 다시말해 학문의 한 분과가 아니라 여전히 인간이 영위하는 모든 학문, 모든 사고, 모든 행위의 저변을 형성하는 인식의 틀이나, 가치의 근거같을것을 '철학'이라는 용어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한술 더 떠 '철학'을 비학문적 도닦기를 포괄해서 사용하는  경우도 많다대중들의 뇌리속에서 철학은 '학문'과 '득도'를 다 포괄하는 인간의 인식적 노력을 말하는 것이다.

나는 철학을 철저히 학문적 견지에서 이해한다. '득도'는 도인들의 몫이고 나는 득도에 관심이 없다. 나는 단지 명징한 세계인식과 나의 삶을 근거짓는 자연과 사회 속에서, 그리고 인간의 역사속에서 나의 작은 삶의 의미를 찾고 싶을 뿐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럼 어떻게 철학공부를 할 것인가에 있다.
사실 대학시절, 학자의 길을 나의 인생으로 받아들이지 않은 이유는 그때에는 학자만치 시시껄렁한 삶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대학이라는 틀, 교수라는 직업이 나의 삶의 다양한 가능성을 옭아매는 걸 허용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제와서 그런 길로 인도하는 방식의 철학공부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의미가 없다.
농사로 밥벌어먹고살아야되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철학공부는 좀 달라야한다는 생각이지만 아직까지 명확한 결론을 얻지 못하고 있다.
우선은 어쩔수 없이 주제중심으로 공부를 하고 생각을 정리할 만한 지적 성과도 시간적 여유도 없는 처지에 맞춰 철학사를 중심으로 공부하는 과정을 이어갈 생각이다.

'철학하기'와 '철학자로 살기'가 괴리된 현실에서  '재미'와 지적 허영으로 하는 철학공부를 벗어날 방도를 미리 알지 못한 상태로 시작하는 철학공부가 그 과정에서 바른 길을 찾을 수 있기를 막연히 희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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