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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지가 꽃이나 나무로 기억되는 경우가 있다. 15여년전 경상북도로 부터 지역개발분야 상을 받고 부상으로 뉴질랜드 연수를 갖을 때 봤던 일명 뉴질랜드 크리스마스 나무(포후투카와)가 오랬동안 나의 뇌리에 남아 여정의 추억을 상기했다.  그리고 6년전 카트만두 거리에서 만난 '자카란다'와 안나푸르나 트레킹중 만난 '랄리구라스'가 그때의 추억을 대표했다면 이번 네팔 출장은 룸비니의 '인도비단나무'로 기억될 것 같다.  꽃이나 나무로 남은 여행의 잔상은 음식이나 유적보다도 쉽게 사그라들지 않아 더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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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을 떠나 낯선 세상으로 들어간다면 그것이 여행이든 출장이든 상관없이 마음 설레는 일이다. 이번 네팔 출장이 그랬다. 내 인생에서 대한민국 다음으로 많은 시간을 보낸 네팔은 2011년 말에 들어가 한 달, 2016년 말에 들어가 두 달 해서 꼭 90일을 보낸 나라다. 늘 다시 가고 싶었지만 쉽지 않았는데 정말 기대하지 않은 일을 맡게 되고 그로 인한 출장이 잡힌 것이다. 꽉 짜인 일정의 7박 9일 출장이지만 중간에 네팔 공휴일인 토요일이 한번 끼어 있어 그나마 갈증을 덜 수 있지 않을까는 기대를 품고 길을 나섰다.

Kathmandu에서 Bairahawa로 넘어가는 네팔 국내선

2월 20일 새벽 5시 잔듯만 듯 한 잠자리를 털고 일어나 분주히 움직였다. 씻고 챙기고 집을 나선 것이 6시 30분, 집앞에 도착한 일행과 한 차로 내달려 여유있는 시간에 인천공항 제2터미날에 도착했다.인천공항을 6년 전 마지막 방문했고 제2터미날은 그 뒤 개장했으니 나의 첫 방문이었다.이전과 별반 다르지 않은 느낌을 안고 청사안을 두리번 거리다 먼저 도착한 이번 프로젝트를 수행할 사업단의 일행과 조우했다. 대면 첫 수인사를 나누고 체크인과 보딩을 완료하고 좌석에 앉으니 이제 진짜 네팔로 가는구나 실감이 느껴졌다. 비행은 순조로웠고 안락했다. 멀리 안면도가 보이고 목포와 제주도인근 상공을 지날 때까지 창가에 붙어 바같 풍경에 눈을 떼지 않았다. 하나의 미물로 태어나 이렇게 구름위 하늘을 날면서 지구의 표면에 붙어사는 인간이라는 생물이 이룩한 문명을 내려다보는 호사에 가슴벅찼다.

몇년전 아내와 해안선따라 일주일을 걸었던 안면도가 내려다 볻인다.

네팔 상공에 접어들고 멀리 히말라야 설산이 눈에 들어오자 마음이 들뜨기 시작했다. 6년만의 네팔은 또 얼마나 변해있을까? 짧은 활주로 탓인듯 거친 착륙 뒤에 지루한 출국수속이 이어지고 핸드폰 유심칩을 사고 장착하는데 또 많은 시간이 흐른뒤 공항 밖으로 벗어났다. 기다리던 차에 탑승하고 혼잡한 공항을 벗어나 어둠이 내린 카트만두 거리를 질주했다. 거리는 어둡고 혼잡했지만 창밖 모든 것이 낯익은 듯 정겹게 다가왔다. 길을 지나는 사람마다 창을 내리고 손을 들어 인사를 나누고 싶었다.

숙소 에베레스트 호텔에 짐을 풀고 길 건너 로컬 식당인 Thakali Sekuwa Bhansa 에서 저녁과 맥주로 늦은 첫 저녁식사를 했다. 오랜만에 마시는 네팔 고르카맥주가 싱그러웠다.호텔로 돌아와 다음날 있을 일정을 체크하고 업무를 숙지했다.

에베레스트 호텔 앞길 육교에서 찍은 카트만두의 아침

21일 아침부터 분주했다. 27일 출국날을 빼고 6일간의 일정이 있지만 중간에 공휴일인 토요일이 있어 총 5일이 업무 가능일인데 사실 21일도 무슨 기념일이라 네팔 관공서가 모두 쉬었다. 다행히 한국 대사관은 업무를 해서 21일 한국 대사관 방문으로부터 업무를 시작했다. 22일은 네팔 수자원관개국 방문과 업무협의를 하고, 23~4일은 사업단이 세부 실무협의를 하는 사이 나는 카트만두서 소형비행기로 35분 거리의 Bairahawa시의 Sunwal 지역과 Susta 지역을 방문했다. 지역개발 원조사업이 수행된 지역을 방문해 주민 등 관계자를 만나 향후 우리 공사의 네팔 지역개발 ODA 사업 진출 가능성을 타진하고 방향성을 모색했다. 24일 늦게 카트만두로 돌아와 네팔 휴무일인 25일 토요일은 카트만두 인근으로 가볍게 당일 하이킹을 떠났다. 시바푸리 국립공원 하이킹은 해발 2732m인 정점(그냥 언덕의 정점이다. apex of Sivapuri Hill 이라고 부른다)을 향해 해발 1350m에서 시작해서 쉼없이 계단을 오르는 길이었다. 무려 3시간 넘어 1400여 미터를 계단으로 오르고 다시 두어시간 이상 걸려 내려오는 그야말로 지옥의 코스였다. 올라가면서 이미 후회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26일 마지막 업무일정에 다행히 수자원에너지국 차관과의 면담일정이 잡혀 정부청사를 들러 환대를 받고 업무 협의를 마칠 수 있었다. 이어서 차로 두어시간 거리인 둘리켈을 지나 Kavre에 있는 농수로 시설을 수자원국 국장과 아시아개발은행 네팔 책임자 등을 대동해 답사를 다녀왔다. 늦은 시간 카트만두로 복귀해 같이 했던 일행들과 마지막 만찬을 Nepali Chulo 라는 Newari족 전통 식당에서 성대히 치루는 것으로 업무 일정을 마무리했다. 27일은 출국에 앞서 마지막으로 스와얌부사원을 들른뒤 간단한 쇼핑으로 마무리하고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스얌부나트의 한 까페 루프탑에서  내려다 보는 카트만두 정경이 아름답다.

 

여행이 아니라 출장이어서 아쉬웠지만 또 출장이어서 여행에선 경험하지 못했을 다양한 세상을 맛보고 네팔에 대한 새로운 느낌을 안고 여정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다음 네팔 여정은 상당히 긴 여행이 되지않을까는 강한 예감을 안고 귀국했다.

첫 방문지 Sunwal 9지구 농기계임대 사업장

개인적 기록을 위해 업무를 크게 세 범주로 나누어 정리했다. 

1. 네팔 대사관  및 코이카 네팔과의 면담

먼저 코이카 측은 KRC가 네팔 ODA에 적극 참여할 것을 권유했다. 지역개발사업 관련한 농어촌공사의 전문성을 기대하며 코이카 주도의 지역개발 사업 현장 방문을 권장했다. 대사는 지역개발 ODA 사업은 앞으로도 계획되어 있지만 타 국가에서의 경험만 가지고 지역개발사업을 하기는 힘들 것이라고 보고 KRC의 네팔 지역개발 사업 참여시 현지 인맥 등이 없는 부분을 어떻게 해결할 건지 관심을 보였다. 지금까지 많은 ODA사업의  경우 상주 사무실 없이 한두번 방문으로 현지 에이젼시에 전적으로 사업을 맡기는 경우가 많았고 이로 인해 문제가 발생하거나 관계 형성에 성과가 없는 경우가 많음을 지적했다. 새겨 들은 조언이었다. 그리고 농천진흥청이 KOPIA( KOrea Partnership for Innovation of Agriculture/해외농업기술개발사업) 네팔 지사를 준비 중이고 곧 개설할 것을 알려졌는데 이와 KRC가 어떻게 역할을 나누고 협력할지 큰 청사진이 필요해 보였다.(kopia는 현제 아시아 8개국 등 22나라에 진출) 사업 수행과정에서 협력과 조언을 당부하고 예정시간을 넘긴 감담회를 마무리했다.

2. 네팔 수자원국 국장  및 차관 면담

수자원관개국(Department of Water Resource and Irrigation)에 들러 수자원국장(Susheel Chandra Acharya)과 부국장단과 일차 환담을 하고, 예정에 없던 차관(Gopal Prasad Sigdel)과의 면담을(장관 유고로 실제로 장관급) 추가로 진행하면서 전체적인 사업 윤곽에 합의하고 이 사업을 넘어 더 발전적인  사업 확대를 기대할 수 있었다. 이번 사업에 기초에서 네팔 전역의 농업용수 개발과 관리 시스템을 갖춰나갈 전망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두 번의 환담 시 모두 우호적이었고, 이 사업이 가지는 향후 전망 관련해 큰 기대를 가지고 있음을 확인했다. 특히 시그델 차관의  경우 이전 한국 기술연수를 한달간 했던 경험을 이야기하며 한국의 기술과 경험을 높이사며 네팔에 적용해 줄것에 대해 기대감을 표명했다.

수자원에너지부 차관님 과의 업무 간담회

 

하지만 적은 예산(35만불)은 초기 사업에 불과하고 장기 청사진(통합물관리시스템)을 제시하는 수준의 사업만 가능한데 사업에 대한 기대에 조금의 불일치가 확인되었다. 이번 사업은 (1)네팔 수자원 관리 시스템 분석,점검  및 보완, (2) 시범지구 선정후 시스템 장착, 가동 (3) 인력육성 연수 실시  정도이나 (3)에 대한 요구가 과도해 (2)를 축소하거나 (3)을 중심으로 실행하는 것을 두고 논의를 더 해야하는 상황에 빠졌다. ADB 도 현 논의 진행 상황을 공유하고 있어, 협의에 큰 어려움은 없다고 하나 예산 증액을 통한 네팔 수자원국 요청의 전면적 실행은 그 예산을 우리나라가 ADB에 공여하는 예산의 증액을 뜻하기  때문에 쉽지 않을 것으로 보였다. 3월중 실무 논의를 마무리 할 것을 합의 하고, 사업 추진에 따라 국장님 등 관계자가 한국으로 기술연수를 오게되면 다시 만날 것을 약속했다.  

코이카의 지원으로 운영중인 우수종자 집단 생산지

3. 지역개발ODA현장방문

이틀에 거쳐 네팔 남부 Lumbini주 Nawalparasi현의 Sunwal9지구(스와티농업협동조합 농기계고용센타)와 5지구(여성일자리 수공예공장인 Namuna여성기업과 우유집유 및 유통 조합인 자나세와협동조합),그리고 Susta2지구(종자생산협동조합) 등 방문하여 협동조합 관계자와 주민대표 그리고 지자체장(면장?)과 환담하고 현장을 견학했다. 사업을 수행하고 우리 견학을 안내해준 코이카와 굿네이버스 그리고 현지 에이젼시인 SAHAMATI와 GNI 덕분에 소중한 지역개발 현장을 직접 둘러보고 가는 곳마다 스무명 이상의 주민이 나와 환대하고 환담에 참석해 주시어 사업을 이해하고 다음 사업을 구상하는데 큰 영감과 지혜를 얻을 수 있었다. 각가의 현장마다 성과가 있고 고유한 문제가 있고 향후 추가되어야할 과제가 보였다.

Kavre 현장 가는 마을길, 작년 우기 지나고  5개월만에 첫 비가 내렸다.

 조합원, 주민 등과의 환담은 지원사업의 효과, 사업 집행 과정에서 개선점, 현 운영상황, 향후 추가 사업 방향 등에 대한 질의와 응답으로 진행되었는데, 전반적으로 코이카와 굿네이버스에 대한 높은 신뢰감과 감사 의지를 보였고 한국의 추가적인 지원에 대한 강한 갈망을 표명했다.

수스타농업협동조합 인원진과의 대화

대략적으로 살펴본 바로는 현제까지는 (조합설립 2년)큰 탈없이 사업이 진행되고 있으나 장기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빠질 수 있다는 판단이 들었다. 무엇보다 먼저 적은 자본금, 짧은 협동조합 운영 경험, 50%에 미치는 낮은 주민참여도는 큰 위험요소로 인식되었다. 역시 대화에서 지금 처한 어려움에 대해 토로했다. 현재는 농기계 작업대행이나 임대, 집유와 판매, 학교등 가방 납품, 종자 생산  및 판매, 감자공동생산  및 판매(인도) 등으로 유지되고 있으나 장기적으로 수명이 다한 농기계의 대체 능력은 확인되지 못했고, 젖소의 낮은 생산성, 가방 등 수공예품의 판로 개척 및 디자인 개발의 어려움,  공동생산한 감자 등의 저장 시설의 미비로 수확기 저가 판매 문제, 종자의 선별포장기를 설비하지 못해 지역내 판매만 하고 있어 판로한계 등 하나도 해결이 쉽지 않은 문제들에 대한 토로가 이어졌다. 간략히 정리하면 현제는 협동조합을 만들고 그 틀내에서 공동체 사업을 진행하는 초기 단계로 사업 성공에 대한 기대와 우려가 교차하는 시기로 판단되었다.아직은 자립 기반이 약하고 성공가능성에 대한 확신도 부족한 상황으로 향후 지속적인 지원이 없으면 존속하기 어렵다는 판단도 들었다. 새로운 사업 지구를 발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기존의 사업 성과를 이어 결실을 최대화하기 위한 추가적인 지원도 중요해 보였다. 

Sunwak5지구 조합 간부들과의 대화후 기념사진

이번 출장은 네팔 수자원정보화사업이라는 ODA사업 수행을 위한 걸음이었지만 추가적으로 KRC의 네팔 지역개발 ODA 진출을위한 사전 조사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대사관과 코이카 그리고 굿네이버스의 친절한 조언과 진심을 다한 안내로 KRC의 향후 지역개발 사업 네팔 진출을 위해 필요한 많은 영감을 얻었다. 당장 진행중인 수자원 정보화 관련 사업은 마지막 단계의 합의 과정남 남겨준체 순항할 것으로 기대되지만 처음 시도할 네팔 농촌개발 공적원조사업은 그 첫 단추가 쉽지 않게 느껴졌다. 일단은 다른 기관에 의해 진행된 기존 사업에 대한 분석 평가를 통해 그 성과를 딛고 새로운 사업을 개척해 나가야할 형편이다. 단기적으로 단일사업을 단속적으로 시행하는 방식으로는 인적 관계망을 구축하거나 사업 노하우를 쌓기 어려운 만치 지금 추진중인 수자원정보화 사업에 추가해 농업 기반구축관련 사업으로 범주를 확대하고 거기다가 동시에 지역개발 사업을 추가해 현지 상설 사무소 설치가 필요한 수준으로 사업 규모를 키울 필요가 있지 않을까는 생각도 들었다.

Kavre 수로 현장 조사

물론 미얀마 등 여러나라의 농촌개발 사업의 경험과 성과가 없진 않지만 네팔의 특수성에 대한 사전 이해가 좀더 필요하고 이에 기반해 사업아이템과 사업추진 방식을 구축해 나갈 필요가 더 절실해 보였다. 단일 사업이 네팔의 국가 발전 전략과 잘 맞아떨어져 타 사업들과 유기적으로 결합해 네팔 농업의 현대화와 농민의 삶의 질 개선에 기여할 수 있도록 설계해야한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특히 보이지 않는 카스트가 잔존하고 지역사회 토호에게 권력이 집중된 상황에서 정말 필요한 사람이 혜택에서 배제되지 않게 적정한 사업 모델을 찾는 일이 무척 어려울 것으로 예상되었다.

Susta 2지구 협동조합 관계자들과의 환담

네팔은 ‘가장 먼저 웃고’ 좀처럼 화내지 않는 선한 눈빛을 가진 착한 사람들이 사는 아름다운 나라다. 동시에 네팔은 세계 양대 시장인 중국과 인도사이에 위치해 수천년 이어온 무역의 통로면서 풍부한 수자원과 자연적 자원을 보유하고 100개가 넘는 민족의 풍부한 역사 문화적 자산을 보유한 발전 잠재력을 가장 많이 품고 있는 나라중의 하나다. 우리가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원조를 하는 나라가 된지 얼마되지 않았듯이 네팔의 미래 역시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나는 기대한다. 우리의 원조가 인류 공동번영에 이바지하면서 동시에 우리의 잠재적 경제 동반자의 육성에 기여한다는 측면에서 정부의 공적원조 확대 방침도 확고한 만치 앞으로 ODA사업이 획기적으로 확대될 전망이다. 여기에 힘입어 네팔 농촌개발 ODA 사업을 KRC가 주도적으로 개척해 나가는데 나름 최선을 다하고 싶다 

마을 홈스테이들이 운영되고 있는 카트만두 끼티푸르 골목

이번 출장 전 과정에서 같이 한 모든 분들게 큰 고마움을 느꼈다. 먼저 동행한 KRC직원들의 노고를 잊을 수 없다. 동행 한 두분은 새벽까지 전날 회의 내용을 정리하고 다음날 회합을 위해 준비하다보니 제대로 카트만두 구경도하지 못하고 귀국해야 했다. 이번 사업을 실질적으로 수행하고 있는 사업단의 두분과 자문 교수님의 열정과 노고에도 큰 감동을 받았다. 네팔 대사관과 코이카 그리고 굿네이버스 관계자분들 등 국제사회에서 대한민국의 높은 위상이 이렇게 자기영역에서 열정을 받쳐 최선을 다하신 분들 덕분임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일정을 같이 나눈 모든 분들게 감사를 전하며 마음의 평화와 안녕을 빈다.

마지막 만찬을 가진 카트만두의 민속 식당 Nepali chulo의 공연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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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을 기다려온 네팔 여정 두달이 끝났다. 출국에 앞서 마지막 하루를 라트나 버스파크, 파탄, 그리고 카트만두 최고의 번화가 더바마그를 걷고 2월 26일 출국 당일 아침 일찍 다시 한번 더 스와얌부나트를 다녀왔다. 오후 늦게 출발한 비행기는 쿤밍과 상하이를 거쳐 2월 27일 저녁 늦게 인천에 도착했다.  

 

 

2월 25일 출국에 앞서 남은 마지막 하루를 어떻게 시작할까 고민하며 눈을 떴다. 즉흥적으로 카트만두 북쪽의 Shivpuri Nagarjun National Park로 가기로 마음먹었다. 마지막 하루는 숲길을 걷고 싶었다. 무작정 라트나 버스파크로 향했다. 가는 길에 대학가를 지났고 각종 정치구호가 담벼락에 그려져있고 적기가 휘날리는 대학가는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는 네팔청년들의 역동성과 기개가 느껴졌다. 라트나 버스파티에 도착했지만 나가르준행 버스를 찾을 수 없었다.  몇번을 묻고 헤메다 꼭 나가르준을 가야할 이유도 없어 발을 돌려 택시를 잡아 타고 파탄으로 향했다.  

 

 

이번에는 파탄 드바르광장으로 진입하지 않고 주로 외곽을 걸었다.  발길이 닿는데로 파탄의 골목길을 걷고 또 걸었다. 예식이 진행중인 힌두사원을 들러 향과 연기에 취해 넋을 놓고 앉아있다가 다시 주택가 골목길로 걸음을 옮겨 네팔리의 삶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몰려가는 아이들 틈에서 나는 등교하는 학생이 되었다가, 일없이 길가에 앉아 해바라기를 하는 여인들을 보면 나도 심심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진 한 사람의 방랑자가 되었다. 일터를 오고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도 평범한 네팔리 노동자가 되었다. 우리는 아무 생각없이 골목을 어슬렁거리는 사이 네팔리의 삶을 닮아갔다. 늘 목적의식을 가지고 빠릿빠릿 바쁘게 살아야 잘 사는 인생이라는 강박에 쫒겨온 인생 50년을 되돌아 보고 어떤 삶이 더 좋은 삶인지 더 가치있는 삶인지 곱씹었다. 앞으로 살아가면서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아무런 계획도 일도 만남도 없는 그런 공백을 내 일상에 주기적으로 배치하는 삶을 살아야지 다짐했다.

 

버스를 타고 라트나로 돌아와서 더바마그 거리로 향했다. 익숙한 브랜드의 가게들이 즐비한 카트만두의 가장 현대적 거리의 풍경은 한국의 도시와 다르지 않았다. 아내는 옷가게로 들어가고 나는 베스킨라빈스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달콤한 아이스크림에 녹아들었다. 쇼핑백을 들고 나온 아내와 한국 도시의 어느 쇼핑가를 걷는듯 우리는 여행객스러워졌고 조금은 들뜬 걸음으로 나라야니티 왕궁박물관을 지나고 꿈의 정원을 스쳐 타멜거리를 찾았다. 네팔을 떠나기전 사라진 식욕을 찾고 기운을 되찾아 줄 마지막 성찬을 찾아 헤멘끝에 한 일식집에 들어갔다. 하지만 이날 저녁 식사는 네팔 여정 최악의 음식으로 기억에 남았다.  허탈한 마음으로 숙소로 돌아가는 타멜거리에서 아쉬운 카트만두의 마지막 밤을 맞았다. 

  

 

남루한 여정이 저문다. 내 일생에서 가장 화려한 일탈이었을 두달의 네팔 체류가 마지막 밤을 남기고 있다. 가슴 뜨겁고 벅찬 순간들을 기억하지만 난 벌써 봄볕아래 새로운 여정의 단꿈에 빠져든다. 인생이 아름다운 것은 인간은 모두가 여행자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머물고 가지고 집착하지 않고 그저 인생은 잠시 스쳐가는 여정임을 받아들이게 된다면 나는 혹독한 히말라야의 가난 속에서도 뭍 생명에게 손을 내밀고,  지진으로 무너진 벽돌더미위에서도 활짝 웃을 수 있는 네팔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나의 이번 여정은 어떻게 정리되어야하나 잠시 발을 멈추지만 나의 여정은 내일 또다시 쿤밍으로 상하이로 인천으로 그리고 봉화로 이어질 것 임을 깨닫는다. 나는 여행 중에 히말라야를 들렀고 다시 여행이 한국으로 이어질 뿐이다. 주어진 시간을 정하는 것은 나의 몫이 아니지만 여행이 끝나는 그때까지 나는 나의 몸에 집중하고 내 몸과 마음이 가는데로 나를 맡기고 싶다.

 

2월 26일 드디어 네팔을 떠나야되는 날이 밝았다. 다행히 몸 상태는 조금 나아졌다. 아직 식욕도 없고 먹고난뒤 소화를 확신할 수 없어 배는 고프지만 아침을 건너뛰었다. 쿤밍가면 맛난 음식을 만날지 모르다는 기대로 대신했다. 익숙한 수어러꾸떼 골목을 나와 스와얌부나트로 향했다.  숙소 마야거르츄와 닿아있는 일종의 예능고등학교인 Star High School의 담벼락에도 인사를 전하고 그동안 거의 매일 지나치던 고깃간에 묶여있던 죽어간 염소들에게도 명복을 빌었다. 골목끝에 방치되어 있는 지난 지진으로 무너진 호텔 부지를 지키며 남아있는 한그루의 정원수에게도 안부를 남겼다. 

 

 

스와얌부나트로 가는 골목길을 걸으며 한발한발 기억을 되새기고 얼굴을 스치는 카트만두의 바람에게도 안부를 남겼다. 도착한 스와얌부나트는 이른 아침부터 참배객과 관광객의 발길이 붐비기 시작했고 사원앞 공터에는 각지각색의 야채를 진열한 노점상이 삶의 온기와 세상의 아름다움을 더하고 있었다. 나는 탐욕스레 모든 것을 눈에 담았지만 곧 흐려지고 잊혀질 풍경임을 알기에 마음이 아렸다. 스와얌부나트의 진짜 주인인 원숭이들에게도 작별인사를 남겼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네팔리들이 즐겨찾는 스넥가게에서 점심을 해결했다. 배가 고파서라기보다는 공복을 채울 무언가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허전한 기분을 네팔의 음식으로 달래고 숙소로 돌아가 두달을 지고 이고 다닌 짐을 챙겼다. 먹고 소비하고 준 그만치 새로운 것들로 채워진 배낭은 여전히 배가 불렀다. 택시로 도착한 트리뷰반공항은 나름 변해가고 있었다. 조금은 더 친절해졌고 대합실도 5년전에 비해 좋아져 있었다. 비행기는 예정시간 한시간을 넘겨 출발했다. 지난 두달 동안 나의 삶이 있었던 네팔의 산하가 구름속으로 사라졌다. 네팔의 산하가 그리고 맺었던 모든 인연이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쿤밍에서 환승에 문제가 생겼다. 공항청사에서 어슬렁 거리다 체크인 시간을 넘겨버렸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헐레벌떡 달려갔더니 이미 마감한 게이트를 열고 우리를 입장 시켜줬다. 하지만 고마운 마음으로 올라 탄 비행기는 끝내 이륙하지 못했다. 거의 한시간을 비행기에 같혀 지체한 뒤에 기체고장이라며 대체기로 갈아탈 것을 요구했다. 결국 상해에서 인천가는 연결편의 출발시간을 넘겨버렸다. 그런데 웬걸! 상해에 도착해보니 우리를 싣고갈 인천행 비행기는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게 아닌가! 역시 연착이나 결항이 잣다는 동방항공이지만 그만치 스케줄 조정이 유연한것 같았다. 한국으로 돌아오는 승객들은 상해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안내 팻말을 든 항공사 직원을 따라 숨차게 뛰어가 인천행 비행기에 올랐고 예상시간보다 많이 늦긴했지만  무사히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카트만두에서 쿤밍으로, 쿤밍에서 상하이로, 상하이에서 인천으로 이어지는 30시간의 귀향길 끝에 두달동안 그리워하던 딸을 안았다.

  

 

이번 네팔 여정에서 나는 많은 네팔의 변화를 읽었다. 계곡에는 댐이 들어서고, 카트만두에는 수도를 설치하는 공사가 진행중이었다. 카트만두와 포카라에는 정전이 사라졌고 도시의 쓰레기는 눈에 띄이게 줄었다. 거리에는 손을 벌리던 거지 아이들도 만날 수 없었고 네팔리의 발걸음에는 자신감이 늘었다. 그리고 카트만두 낙후성의 상징이다시피한  바그마티강은 정화작업이 한창 진행중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번 여행을 통해 내 자신의 변화를 더 읽고 싶었다.  나이를 먹었고, 체력은 그만치 줄었음을 느꼈다. 그러나 마음 속에 평생을 키워온 '화'를 벗어던지고 자신과 세상에 보다 관대해지고, 이미 늦었기에 조바심도 버린 나를 만나고 싶었다. 하지만 나의 그런 모습은 쏘롱라에도 깔리간다키에서도 만나지 못했다. 그래서 다음 여정의 계획을 가슴에 품는다. 그때는 지금의  딱 절반의 속도로, 꼭 네팔 어딘가에 있을 보고싶은 나를 찾아 걷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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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트만두에서 보낸 첫 삼일은 휴식의 시간이었다면 마지막 4일은 지난 두달의 여행을 되돌아보고 기억의 창고 한켠에 차곡히 정리하는 시간이었다. 타멜거리를 또박또박 걸으며 곧 떠나게될 네팔에 대한 절절한 사랑을 추스리고 귀국한뒤 새로 시작할 한국에서의 생활을 위해 마음을 다잡았다.    

안나푸르나 라운드를 마치고 먼지투성이 카트만두로 돌아온 뒤 가벼운 몸살기가 계속 이어졌다. 그래도 하루하루 아무 망설임없이 카트만두로 돌아온 지난 몇일을 알차고 신나게 보냈다. 숙소와 타멜 거리를 오가고 스와얌부나트와 더바르광장, 그리고 아산바자르의 골목을 누볐다. 타멜 최고의 슈퍼마켓인 Shop Right Supermarket과 Pilgrims Book house도 들락날락거리며 기념품을 사기도 하고 구경도 했다. Pilgrims Book house는 서점이지만 동시에 머플러나 직물제품을 비롯한 각종 기념품을 갖추고 있었다. 카트만두에 체류한지 몇일이 지나자 나는 골목 구멍가게에서 야채를 사고 내가 필요한 물품을 어디를 가야 구할 수 있는지 대충 파악이 되었다. 나는 나 자신이 카트만두 시민이 다 되어감을 느꼈다. 

22일은 하루종일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숙소에서 빈둥거렸다. 일단 몸살기를 가라앉힌뒤 움직이는 것이 낮겠다고 판단했다. 그러다가 저녁이 되자 일행들과 같이 숙소를 나서서 타멜을 거쳐 다시 스몰스타를 찾았다. 뚱바가 그리워서가 아니라 남은 네팔에서의 시간이 아까워서 저녁시간을 숙소에서 그냥 보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우울한 표정의 종업원이 날라다 주는 안주와 뚱바를 앞에 두고 나도 모르게 손이 갔다. 하지만 몸은 이미 술을 받아들이기에 너무 지쳐있었다. 뚱바 한잔에 복통과 현기증에 오한까지 왔다. 겨우겨우 몸을 추스러 숙소로 돌아왔지만 몸살은 더 심해져있었다. 이날 하루 어떻게 보냈는지 단 한장의 사진도 남기지 않았다.  이상하게 이번 두달의 네팔 여행중에 꼭 카트만두에서 탈이 났다. 여행 초기에 식중독으로 고생하더니 여행 막바지에 다시 심한 몸살까지 앓게 되었다. 카트만두 먼지에 내 몸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역시 나는 산체질인 것 같았다. 몸이 무너지니 한국이 그리워졌다. 이제 돌아가도 미련이 없을 만치 걷고 먹고, 만나고 웃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23일 몸살에 지친 몸을 이끌고 타멜로 나섰다. 네팔 고유 브랜드라는 가게에서 티도 사고 재래식 옷가게에서 네팔리 스타일의 편안한 일상복도 한벌 샀다. 발길을 옮겨 타멜의 남쪽 골목 어딘가를 걷고 있는데 군악대의 연주소리가 들렸다. 음악 소리를 찾아 도착한 곳에선 거리의 악단이 연주를 하고 있었다. 상황을 보니 부유한 집안의 혼사가 있는 모양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꽃으로 장식한 차가 나타났다. 하지만 나에게는 오직 나를 위한 특별한 이벤트로 다가왔다. 여행이 끝나감에 따라 몸도 지치고 나도 모르게 조금은 우울해지기 시작했는데 악단의 연주를 보고 듣는 순간 내 몸과 마음은 갑자기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내 몸에서 다 빠져 나가 버린 기운이 다시 돌아오고 한없이 가라앉았던 기분도 풀리기 시작했다. 훈풍에 구름이 가쉬듯 나는 두달여정을 3일 남겨두고 내 자신에게 삶의 에너지가 충만해져옴을 느꼈다. 조금은 낡은 제복을 입은 단원들의 진지하고 신명이 넘치는 연주는 엉뚱하게도 나 자신의 삶에 대한 태도를 되돌아보게 했다. '초라할지언정 진지함을 잃지 않고 나름대로 신나게 살자'고 읊조리며 나는 발걸음을 옮겼다.   

타멜 산책을 끝내고 5년전 추억이 깃든 꿈의 정원을 찾았다. [Garden of Dream]은 타멜쵸크에서 나라얀히티 왕궁박물관쪽으로 가는 길 왼편에 높은 담으로 둘러싸여 있는 이질적인 공간이다. 오래전 개인이 꾸민 저택과 정원이 우여곡절 끝에 공공의 소유가 되고 다시 시민의 휴식처로 개방된 유료 정원이 되었다. 역시 산책중인 외국인 관광객은 몇명 되지 않았고 대부분의 손님들은 데이트중인 네팔리 청춘들이었다. 그래도 화구를 펼쳐놓고 작업중인 서양인 할아버지의 모습이 가장 멋졌다. 우리는 정원 산책 끝에 내부에서 운영중인 레스트랑의 가장 좋은 야외 테이블을 차지했고 아내는 펜을 꺼내고 스케치북을 펼쳤다. 카트만두의 중심부에 있으면서 카트만두의 소음과 먼지와 단절된 이색적인 공간에서 식사를 하며 아내와 나는 지난 여정의 추억을 음미했다. 이만치면 되었다는 안도감 혹은 포만감을 느끼면서도 눈을 감으면 마르샹디와 깔리깐다키 줄기가 어른거리고 설산에서 피어나는 흰구름처럼 뭉개뭉개 그리움이 피어올랐다. 모든 걸 버리고 줄여야될 나이에 자꾸 그리움이 늘면 큰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돌아온 숙소에서 내일이면 라오스로 떠날 팟상을 위한 삼겹살파티가 열렸다. 네팔을 같이 사랑하고 같은 숙소에 지내는 인연을 나눈 분들과 함께 자리를 했지만 나는 술한잔에 나가 떨어져 룸으로 올라와 침대로 기어들었다. 낮에 살아났던 몸이 밤이 되자 다시 무너져 내렸다. 나의 몸 상태와 무관하게 다음 날이 시바신의 탄신일로 시바라티 축제가 열린다고 했다. 룸의 창문을 흔드는 축포소리와  상공을 화려하게  수놓는 불꽃놀이가 카트만두의 밤을 잠들지 못하게 했다

 

2월 24일 시바라티축제가 있는날 팟상은 라오스로, 나의 일행 M과 D는 한국으로 떠났다. 갑자기 마야거르추에 정적이 감돌았다. 원래 여행은 이렇게 좀 쓸쓸해야하는 법이라고는 하지만 갑자기 닥친 공복처럼 견디기 힘들었다. 시바라티축제가 열리는 파슈파티나트로 가기 위해 숙소를 박차고 나왔다. 골목을 벗어날 무렵 한무리의 아이들이 줄로 길을 막고 우리가 지나가자 손을 내밀며 무언가를 요구했다. 처음에는 상황파악이 안되어 당황했는데 이날 하루 종일 걷다보니 이런 아이들을 수도 없이 만나게 되었다. 알고 보니 시바 탄신일 날에만 허용되는 일종의 전래놀이로 아이들이 길을 막고 어른들에게 통행료를 요구하는 것이었다. 아이들은 일년 365일중 이날 하루만이라도 세상의 모든 골목이 우리들의 것임을 선언하는 셈이었다. 골목을 지키는 아이들은 지나가는 사람뿐 아니라 오토바이든 택시든 마구잡이로 단속(!)했고 대부분은 아이들에게 져주는 것으로 보였다. 나중에는 우리도 가게에 들러 아이들에게 나누어주기 위해  잔돈을 한주먹 바꾸어 주머니에 넣고 다녔다.    

 

큰길로 나서니 공휴일이라 그런지 거리가 한산했다. 쉽게 택시를 잡고 축제가 열리는 퍄슈파니나트로 갈 것을 부탁했다. 생각보다 비싼 흥정끝에 택시는 곡예하듯 대로를 피해 골목과 골목을 이어달렸지만 끝내 파슈파티나트에 도달하지 못했다. 목적지의 절반을 겨우 넘겨 군경에 의해 교통은 완전히 통제되어 있었고 파슈파티나트로 향하는 모든 길은 차없는 거리로 축제장으로 변해 있었다. 그래도 택시비는 출발전에 흥정한 데로 다 받아갔고 우리는 축제를 즐기는 네팔리 무리에 휩쓸려 파슈파티나트로 향했다. 하늘에는 헬기들이 축하 현수막을 늘어트리고 비행 중이고 파슈파티나트가 가까워질수록 인파는 불어났다. 역시나 경찰들의 거친 단속이 눈쌀을 찌푸리게 했지만 기념품이나 먹거리를 파는 노점상들도 전국에서 다 모여든 것처럼 엄청난 수로 늘어났고 그 종류도 다양해졌다. 네팔은 물론 멀리 인도서까지 모여들었다는 사두들의 무리도 보이기 시작했다. 축제에 참여하기 위해서 모여든 순례객들의 차림을 보니 그들에게 종교가 얼마나 절실할 것인지 저절로 느껴졌다. 많은 순례객들이 거리에서 노숙을 한듯 집채만한 이불보따리를 길가에 쌓아두고 있었다. 시바신의 탄신일을 축하하기위해 노숙도 마다않고 먼길을 달려온 것이 분명했다. 

 

 

이날 비힌두교도에게는 파슈파티나트 입장을 허용하지 않는다고 했다. 우리는 파슈파티나트로 들어가는 입구의 도로까지만 네팔리 무리에 섞여 축제를 즐기고 되돌아섰다. 축제장을 벗어나기 위해 한참을 걸어 그나마 인파가 적은 가게를 찾아 네팔식 스넥으로 점심을 해결했다. 그리고 다시 걷다보니 카트만두 최초의 대형 수퍼마켓이라는 Bhat Bhateni에 들러게 되었다. 구경도 하고 장을 보고 숙소로 되돌아왔다. 식욕이 있고 출국일이 좀 더 남았다면 바구니 가득 장을 봐서 맛난 요리를 싣컷 해 먹고 싶었지만 조금 샀던 식재료도 결국 다 못해먹고 귀국길에 올라야 했다. 그래도 네팔에서의 마지막 장을 보고 숙소에서 하루의 남은 시간을 조리와 식사 그리고 휴식으로 보내고 그리고도 남는 시간에 귀국을 위한 짐을 싸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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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일만에 돌아온 카트만두에서 일주일이라는 긴 휴식을 취하고 2월 26일 동방항공을 통해 한국으로 돌아왔다. 지나고 보니 카트만두에서 보낸 정확히 8일동안은 여행이라기보다는 비록 짧지만 '머물고 생활하기'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카트만두 도착후 마야거르츄는 우리의 숙소를 넘어 하나의 생활 거점이 되었다. 인근 가게에서 야채와 기타 식재료를 사서 조리를 해서 나누어 먹고, 심심해지면 수어러꾸떼 골목길을 통해 여행자의 거리인 타멜로 나와 하루종일 어슬렁 거렸다. 타멜은 여전했다. 비시즌이라서 덜 분빈다고는 했지만 전세계에서 몰려든 다양한 국적의 트레커들이 골목을 휩쓸고 다녔고 더 많은 네팔리들은 자신의 삶의 터전으로 몰려들어 늘 활기가 넘쳤다. 타멜의 끝에 붙어있는 대형 시장인 아산바자르는 온갖 물품과 이를 찾는 네팔리의 발길로 분주했다. 딱히 필요한 것도 없이 마냥 시장을 지나는 네팔리들에 묻혀 아산바자르를 지날 때는 나 역시 무슨 절실한 것을 찾아 시장을 헤메는듯 삶의 긴장감이 높아졌다. 

 

숙소룸의 전등이 어두워 책을 보기가 힘들어 19일은 보조랜턴을 사러 타멜의 몇몇 등산용품점을 들락거린뒤 마음에는 들지만 비싸서 망설여지는 앙징맞은 블랙 다이아몬드 LED등을 2800루피에 구입했다. 그리고 오고가는 길에 몇몇 골동품가게에 들러 작은 기념품 몇개를 구입했다. 일행 D는 싱잉벨이라는 울림소리가 신비로운 청동그릇을 여러 가게에서 여러개를 구입했다. 값도 값이지만 무게가 부담스러워 나는 싱잉벨대신에 주로 나무 목각을 구입했다. 토템인듯 귀신같은 토속적인 인형들은 인상적이지만 집에 가져가기엔 어울리지 않아 보여 주로 동물형상의 목각을 구입했다. 한 골동품 가게에서 작은 말모양의 청동상을 보고 마음에 들어 딸에게 선물해 줄까 망설였는데 결국 크기나 형태에 비해 비싼 5-6만원하는 청동상을 구입하지 못했다. 한참 국내에서 최순실이 자신의 딸에게 삼성이라는 거대 기업을 동원해 말을 뇌물로 받아 챙겨주는 알뜰한 모정이 뉴스로  흘러나오는 때에 나는 5-6만원하는 말 조각 청동상 하나 딸에게 사주기가 부담스러웠다. 

 

하루를 어떻게 보낸지 모르게 카트만두에도 밤이 왔다. 벌써 여러번 들렀고 이날도 같은 거리를 몇번을 왔다갔다했는지 모를 정도로 하루종일 타멜거리를 헤멘셈인데 그래도 복잡한 타멜의 골목을 다 파악할 수 없었다. 아산바자르와 왕궁 그리고 더바르광장 같은 대표적인 장소로 이동하는 동선 정도를 겨우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타멜의 대표적인 한식당인 '한국사랑'에서 부대찌게로 하루를 마무리했다. 한국사랑에는 짐작과는 달리 한국여행객보다 훨씬 많은 네팔리 손님이 진을 치고 있었다. 한국에서 일했던 노동자들이 추억의 한국음식을 찾았을 수도 있고, 아니면 한국을 동경하는  젊은 친구들이 몰려온건지도 몰랐다.

 

 

2월 20일의 아침은 일찍 맞았다. 식전에 숙소를 나와 스와얌부를 향해 걸었다. 막 깨어나기 시작한 주택가골목을 이른 출근을 하는 네팔리와 나란히 걸었다. M은 전날도 이른 아침에 스와얌부나트를 다녀왔는데 이날도 같이 동행했다. 숙소가 있는 수어러꾸데에서 스와얌부너트까지는  30~40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스와얌부나트는 원숭이가 많이 살아 Monkeys Temple이라고도 불리는 네팔의 가장 중요한 불교사원중의 하나로 유구한 역사와 전설이 이어져오고 있는 여행자들의 필수적인 방문처다. 불교사원이라고는 하지만 힌두신앙을 나타내는 다양한 장식과 시설이 공존하며 사원을 뒤덮은 향과 촛불, 끝없이 이어지는 신도들의 참례행렬, 그리고 카트만두 시내 전체가 내려다 보이는 환상적인 조망이 카트만두 방문객이면 꼭 찾아야 할 곳으로 여겨졌다. 우리 역시 다른 곳은 한번 방문으로 끝냈지만 스와얌부나트는 이날을 포함해 여러번 찾았다.

 

 

사원은 다행히 지난 2015년 지진의 피해가 크지 않았다. 무너진 부속건물을 비롯해 피해의 흔적은 아직 여기저기 늘려있었지만 스와얌부나트의 상징적 건물인 스튜파는 의젓하게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제3의 눈으로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우리는 참배객들과 함께 똑같은 경건한 마음으로 세상의 평화와 모든 고통받는 존재의 평온을 빌며 덤으로 우리 자신의 삶이 좀더 알차고 아름다울 수 있기를 기도했다.  사원의 입구 오른편에는 신도들이 모여 전통 악기를 연주하며 예불을 드리고 있었다. 예불소리가 너무나 절실하게 마음에 녹아들어 우리는 걸음을 멈첬다.  한참을 예불을 들은뒤 발길을 돌려 스와얌부나트를 내려오는 우리의 발걸음은 올라갈 때와는 달라있었다. 

사원아래 식당가에서 네팔 전통 빵들로 아침을 해결했다. 참배온 네팔리 할머니들과 같은 빵들을 주문했는데 모양도 재미있고 값도 쌌지만 맛은 없었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싱잉벨을 직접 만드는 가게에 들러 일행 D는 싱잉벨을 구입하고, 우리는 숙소 거의 다와서 이전에 박타푸르 왕만 먹었다는 요플레인 주주더히를 사서 숙소로 돌아왔다. 주주더히는 토기그릇에 담겨져 아침 일찍 몇몇 대리점같은 가게에만 배달이 되어오기 때문에 이른 아침 시간 외에는 살 수가 없었다.  다 먹고 남은 토기만 남다보니 주주더히를 담았던 토기가 마야거르츄 마당 한컷에 켜켜히 쌓여갔다.

안나푸르나 라운드를 같이 했던 가이드 바수가 숙소를 찾아왔다. 한번 이야기가 있었던 자신의 고향집에 우리를 초대하고 싶어했다. 카드만두 북쪽에 있는 나가르준 어딘가가 자신의 고향집이고 그곳에서 부모님이 물고기를 기르고 있는데 같이 농장도 체험하고 물고기도 잡아 먹고 놀자고 제안했다. 딱히 다른 일정이 없어 같이할까하는 마음이 있었지만 다른 일행들이 반기질 않았고 특히 바수의 술버릇때문에 마음 편히 따라갈 수 없는 눈치라서 포기했다. 바수는 상당히 서운해 하는 것 같았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대신에 수어러꾸떼 골목길 구멍가게에서 장을 보고 숙소에서 조리를 해서 끼니를 해결한뒤 밤이 되자 네팔 전통주인 뚱빠로 유명한 스몰스타를 찾아 한잔하는 것으로 하루를 마무리했다.

2월 21일도 마찬가지로 정해진 일정이나 목적지가 없는 하루였다. 이날 오후에 출국한다며 네팔의 특산물인 야크치즈를 사러가는 분들과 함께 숙소를 나섰다. 숙소에서 10여분 걸어서 정부가 운영한다는 유제품 공장인  DDC Dairy Ltd.  로 향했다. 공장에 도착은 했지만 의사소통의 부족으로 공장 사무실로 들어가 치즈를 요구하자 담당이 외출중이라며 한참을 기다리게 했는데 마침내 담당은 돌아왔지만 치즈 판매는 공장내의 다른 매장에서 하고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우리는 제법 많은 양의 야크치즈를 사서 숙소로 돌아온 뒤 다시 일행과 함께 숙소를 나서 두바르 광장을 향했다. 타멜을 지나면서 헝겊으로 만든 작은 브로치같은 값싸고 실용적인 선물을 사고 딸을 위한 인형도 같이 구입했다. 그리고 타멜의 길고 복잡한 골목을 통해 두바르 광장에 도착했다. 두바르광장으로 진입하지 않고 멀리서 보아도 지진의 피해가 심각해 보였다. 지진으로 심각하게 무너지고 파손된 두바르광장이지만 입장료는 1000루피 그대로였다. 4명의 일행이 4만원 가량의 돈을 내고 들어가기에는 아까운 구석도 있고, 굳이 두바르 광장을 봐야할 이유도 없어 걸음을 돌렸다.

두바르광장을 비켜선 우리의 걸음은 정처없이 이어졌다. 타멜을 중심으로 한  관광객의 거리를 벗어나 네팔리들의 삶의 터전인 카트만두의 구석구석을 뒤지기 시작했다. 가는 곳마다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어머니의 아이들 부르는 소리가 있고, 단 한번도 끊어지지 않고 종교적 상징물이 늘려있고 한 블록을 벗어나기 전에 꼭 규모를 갖춘 힌두사원을 만났다.  보여주기위한 박제화된 공간이 아니라 날것 그대로의 네팔리의 삶을 더 가까이서 보고 느끼는 발길을 이어가다보니 어느새 우리는 스와얌부나트를 가기 위해 건너야했던 바그마티강의 지류인 비슈누마티강에 이르렀다. 강을 따라 발길을 북쪽으로 돌려 우리의 출발지를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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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16일 찦차를 대절해 갈리수와르를 출발 베니와 바글룽을 거쳐 포카라에 도착하여 숙소를 정하고, 다음날 티벳 난민촌 등 포카라를 둘러보고, 2월18일 자가담바 버스를 타고 근 한달만에 카트만두로 돌아왔다.

 

 

 

갈리수와르의 아침이 밝아오자 전날 갑론을박 끝에 예약한 짚차가 도착했다. 베니와 바글룽을 거쳐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트랙이 시작되는 나야풀을 지나 포카라까지 우리를 싣어줄 찦차는 출발했다. 대절비는 6000루피로 정했다. 짚차는 출발한지 10분도 안되어 베니라는 도시에 진입했다. 교통의 중심도시로 알려져 있는 베니는 역시 넓은 버스파크에 많은 차들이 몰려 있었다. 그런데 우리가 탄 찦은 무슨 이유에선지 바로 갈 길로 들어서지 않고 베니 시내로 들어가 몇 곳을 들러 짐을 싣기도 하고 사람을 만나기도 하며 시간을 지체했다. 아침 일찍 출발해야지만 베니로 돌아오는 손님을 싣을 수 있다고 새벽 출발을 종용하던 가이드의 주장이 무색할 정도였다. 아마도 기사는 포카라로 가는 김에 지인들의 소소한 부탁을 받아 해결하려는 것 같았다. 차를 대절한 우리의 입장에서는 클레임을 걸 수있는 상황인데도 기사가 우리에게 양해를 구하지도 않았고 하다못해 가이드의 상황설명도 없었다. 네팔이기 때문일까. 이런 상황에서도 기사가 매너가 없다거나 부당하게 우리의 시간을 빼앗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차라리 네팔사람들은 참 관대하고 느긋하다는 느낌을 주었다. 네팔리들은 우리를 기다리게 했지만 자신들도 아무 꺼리낌 없이 늘 웃으면서 남을 기다려주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땅을 밟아보지도 못한 베니에 대한 인상을 아무 것도 남기지 못하고 칼리간다끼를 건넌 찦은 달리기 시작했다. 베니를 출발한 뒤 오른쪽으로 강을 끼고 30여분을 달렸을까, 차는 포카라-바글룽 하이웨이를 벗어나 우회전을 해서 다리를 건너 다시 우회전을 해서 바글룽으로 향했다. 바글룽 역시 아무런 사전 준비없이 방문하게 된 도시다.  가이드는 흰두사원을 추천했고 나는 덧붙여 바글룽 시가지를 차로 한바퀴 돌아 겉할기라도 해보자는 제안을 덧붙였다. 가이드의 설명으로는 바글룽 사원은 오전 특정시간까지만 비흰두인에게 개방되기때문에 시간에 늦지 않게 도착해야 된다고 갈리수와르에서 출발할 때, 그리고 베니를 떠나 바글룽으로 향하는 중에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정작 베니에서 찦의 기사가 시간을 허비할 때는 아무 소리도 하지 않았다. 우리가 사원에 도착했을 때는 비흰두교도에게는 이른 아침에만 개방된다는 가이드의 설명과 무관하게 사원의 문은 우리에게 활짝 열려 있었다. 

 

이전에 닥신칼리의 사원과 전날 갈리수와르에 이어 바글룽의 Kalika Bhagwati Temple은 세번째 방문한 흰두사원이었다. 흰두교에 대한 사전 지식이 없는 상태로 들른 흰두 사원은 붉은색 장식이 많아 전체적으로 화려한 색감이지만 무서운 신상이 많고 특히 염소 등을 제물로 받치는 장면을 목격하거나  그 흔적을 볼 때는 소름끼치고 혐오스럽기도 했다. 아주 옛날에는 많은 종교가 사람을 제물로 바쳤고 세월이 지나면서 동물로 대체되다가 마지막에는 돈이 제물을 대신하는 과정을 겪었다면 힌두교는 아마도 동물을 번죄하는 단계에 머물러 있는지도 몰랐다. 물론 힌두교가 가장 오래되고 포용적이고 풍부한 종교의 하나라는 사실을 부인할 순 없지만 아직 산 동물을 재물로 바치는 의례는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이 날도 애초로운 눈빛으로 울어대던 어린 염소가 가차없이 목이 잘리고 그 피를 뿌리는 제례가 진행되었지만 지금까지 방문한 3힌두사원중 가장 오래 머물며 꼼꼼이 둘러보고 줄을 서서 이마에 티카를 찍고 예배까지 올렸다.        

 

바글룽 시내를 한바퀴 돈뒤 그냥 아무것도 안하고 스쳐 지나가기에 아쉬워 찦을 내려 음료수를 사서 한병씩 돌렸다.  음료수를 마시고 차는 바로 바글룽을 나와 강을 건너고 조금 전 벗어났던 바글룽-포카라 하이웨이를 다시 올라탔다. 편한 길을 따라 평화로운 마을을 지나고 어디라도 내려서 걸어도 좋을 아름다운 풍경 속을 차는 달렸다.  풍경 하나하나가 그냥 스쳐지나가 내 기억속에 머물지 못하고 사라져갈 것을 생각하니 이 모든 것이 아쉬움을 넘어 슬프게 느껴졌다. 어떤 장소 어떤 순간에도 머물 수 없고 오직 확실한 것은 바로 이 순간이라는 섭리가 애닯펐다. 안나푸르나 라운드가 끝나가는 시간 아쉬움과 서글픔이 내 마음에 차올랐다.

 

이미 익숙해진 안나푸르나베이스캠프 코스의 출발점인 나야풀을 지나 길가 식당에 차를 세운뒤 기사는 식사를 하지 못했다며 식당안으로 사라졌다. 네팔사람들은 아침겸 점심을 오전 10시경 먹는 생활습관을 가지고 있는데 그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덕분에 안나푸르나 라운드가 완전히 끝내기 직전 차를 내려 네팔의 산과 들, 안나푸르나 기슭의 삶의 터전을 다시 한번 느껴볼 수 있었다. 가난 속에서 아름답게 지켜온 네팔리들의 삶의 온기와 긍지를 안나푸르나를 통해 다시금 반추했다.  

 

근 40일만에 포카라로 돌아왔다. 그동안 카트만두 인근 도시를 주유하고 안나푸르나를 한바퀴 돌았다. 다시 돌아온 포카라는 초록이 더 짙어졌고, 날은 더 더워져 있었다. 두 가이드와 4명의 트레커는 식당을 찾아 점심을 나누고 바수에게 약속했던 선글라스를 선물했다. 가이드하고는 카트만두서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고 헤어졌다. 그리고 숙소를 찾아 잠깐 거리를 헤멘뒤 이쁜 정원이 달린 값싼 숙소에 짐을 풀었다. 온수가 나오고 와이파이가 되면서 이쁜 정원이 딸린 [Hotel Elia]에서 하루에 1000루피, 우리 돈으로 만원정도에 방을 얻었다. 우리에겐 충분한 시설이였고, 여행자의 거리인 레이크사이드에 접해있으면서도 조금은 덜 번잡한 거리여서 모든게 마음에 들었다. 짐을 풀자마자 M과 나는 호텔을 나서서 이발소를 들렀다. 바로 호텔과 붙어있는 작은 이발관이었다.  한국 떠난뒤 거의 두달만에  산적머리가 되어버렸는데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좀 깔끔해지고 싶었다. "Only hair cut, please!"를 외치고 비몽사몽간에 이발을 마치자 "Ok!"를 몇번이나 반복해서 외쳤던 이발사는 컷트비, 안면 마사지비, 안마비, 두피마사지비, 세발비 등등을 붙여 무려 두사람 이발비로 6000루피 가량을 요구했다. 잠깐 실랑이를 벌이다 요구를 거의 다 들어주고 나왔는데, 혼자서 쇼핑 갖다가 뒤늦게 이발소를 들렀던 D역시 엄청난 바가지를 쓰고 왔다. 우리는 이날 포카라판  "3얼간이"를 찍었다며 스스로를 위무했다. 그날 이후 포카라를 떠날 때까지 몇번을 더 마주친 이발사는 우리에게 반가운 인사를 보냈지만 우리는 그를 마주치는 것이 너무 싫었다.  나쁜 기억을 빨리 잊고 싶은데 그 이발사에게 너무나 즐거운 기억이었을 것이 틀림 없었다.  '낮술'에서 저녁을 먹으며 포카라의 밤을 맞았다. 

 

2월 17일 아침 게으른 잠에서 깨어나 샤워를 하고 호텔인근의 식당에서 아침을 해결한뒤, 와이프는 호텔에서 스케치나 하면서 쉬겠다고 남고, 남자 3명이서 Tashi Palkhel  티벳 난민촌을 찾아 길을 나섰다. '할란촉'에서 '제로킬로미터'라는 지명의 교차로에 이르고 거기서 다시 버스를 갈아타고 전날 포카라로 돌아올때 달렸던 길을 바글룽 쪽으로 되돌아갔다. 버스가 포카라 시가지를 벗어날 즈음에 왼쪽 언덕위에 룽다와 타르초가 휘날렸다. 우리와 닮은 사람들이 사는 타시팔켈 티벳난민촌에 도착했다. 같은 몽골계라서 그런지 티벳탄을 만날 때 마다 꼭 어릴 때 동네에서 부댓기며 살아가던 이웃을 떠올리게 된다, 지나간 시절의 이웃 아저씨나 삼촌같은 사람들을 다시 만날 수 있는 타시 팔켈 티벳난민촌은 조용했다. 골목을 뒤덮은 고요와 한적함이 현실감을 줄였고 꼭 타임머신을 타고 50년전 어린시절로 되돌아온듯 몽롱했다. 골동품가게가 있고 기념품을 팔고 있는 노점상들이 있었지만 방문객이라고는 우리밖에 없었다. 마을을 돌기전에 먼저 식당에 들러 물소고기를 듬뿍 넣은 뚝바를 먹으며 삶의 현실감을 되찾았다. 

 

식당을 나오자마자 마을입구에 있는 골동품 가게를 들러 작은 기념품을 사고 D로부터 멋진 골동품 주전자를 선물로 받았다. 가지고 싶은 것은 많았지만 소유의 덪없음을 깨우쳐주는 사찰입구에서 욕심을 다 채울 수는 없었다. 마을을 둘러보고 캠프촌과 사원 그리고 멀리 포카라 변두리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위 뷰포인트까지 올랐다. 그리고 골목길을 따라 내려와 사랑곳에서 짚라인이 이어지는 "Hemja 번지점프"를 지나 또다른 불교 사원을 들렀다. 사원은 확장 공사중이었고 아마도 승려 부속학교를 운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무렇지도 않게 낯선 사람이 들고 나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이들의 무경계심이 불교의 탓인지 네팔리의 심성  탓인지는 알수 없었다.  참 신기하게도 가는 곳마다 네팔리들은 사람에 대한 경계심을 드러내는 경우를 본적이 없었다. 

 

티벳 불교 사원과 고향을 떠난 이국에서 난민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모여사는 난민촌 골목길을 걷던 3명의 일행은 각자의 상념에 빠져 길을 잃었고 모두 흩어지고 말았다. 우여곡절끝에 나는 M과 만났지만 결국 D는 합류하지 못했다. 리버사이드로 돌아오가는 버스라고 올랐지만 몇정거장 못가서 내리게 되고 다시 한참을 걸어 '제로킬로미터'라는 거리에 가서야 겨우 리버사이드를 가는 버스에 오를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혹시 한국인이냐며 물어온 한국에서 일한 적이 있다는 네팔리를 만나 친절한 안내를 받기도 했다. 어렵게 돌아온 호텔에 길잃은 D 마저 돌아오자 지난 달 친구들과 안나푸르나를 걸을 때 신세졌던 가이드 라마님과 연락이 닿았다. 오랜만에 만나 나는 늘 궁금한 것이 많은 네팔의 삶에 대해 물었지만 한국에서 노동자로 오래 근무한 적이 있는 라마는 늘 한국의 삶과 '사업'에 대해 궁금한 것이 더 많았다. 지난 여정을 함께한 모두 '산마루식당'에 둘러 앉아 행복한 포카라의 마지막 밤을 만끽했다. 

 

카트만두로 돌아가는 날 아침 일찍 잠을 깼다. 전날 라마를 통해 예약해둔 자가담바 버스를 타기위해 짐을 끌고 할란촉으로 나갔다. 7시에 온다던 버스는 오지 않고 아침마다 지고다니며 이른 출근객과 여행객을 대상으로 파는 거리의 빵으로 아침을 떼우고 있자니 예정시간을 30분이나 지나서 버스는 도착했다. 그나마 안도하며 버스에 올라 조용히 창가를 통해 물러나는 포카라의 거리를, 리버사이드와 댐사이드의 지난 여정의 흔적을 드듬었다. 이제 그리움으로 변해버릴 포카라에서의 기억들을 곱씹으며 하루종일 버스는 포카라-카트만두간 프리씨비 고속도로를 달렸다. 차창을 쓰쳐 뒤로 물러나는 풍경들이 초등학교 졸업 앨범의 가슴시린 사진마냥 어렴풋한 기억으로 나의 뇌리에 쌓여갔다.  

 

 

돌아온 카트만두의 숙소 마야거르츄는 여전했다. 내일이면 산으로 떠난다는 사람들이 있고. 아침에 산으로 떠났다는 사람들의 이야기와 온기가 남아 있었다. 우리는 슬그머니 마야거르츄의 원주민인양 스며들어 그들과 자연스레 하나가 되었다.  우리가 없는 사이 다른 많은 사람들이 마야거르츄를 들러고 그리고 안나푸르나나 랑탕, 그리고 히말라야를 거친뒤 다른 사람이 되어 돌아와 다시 머문뒤 한국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우리는 산전수전 다 겪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마야거르츄에 돌아왔지만 안나푸르나로 떠나기 전의 자신과 달라진게 아무것도 없음을 애써  자각하지 못한듯 안타까워하지도 부끄러워하지도 않은채 편한 표정으로 세상을 마주했다. 

 

 

오랜만에 돌아온 카트만두의 첫날도 타멜거리로 나갔다.  특별히 할 일도 목적지도 없이 타멜의 거리를 걷고 이런 저런 가게를 들러  기념품을 샀지만 네팔에서 제일 유명하다는 서점인 pilgrim bookstore에서 두권의 책과 몇가지 기념품을 샀다. 여정이 끝나고 귀국하고 나면  네팔의 마오주의 혁명사를 다룬 [The Bullet and The Ballot Box]와 네팔의 역사를 간략하게 정리한 [The History of Nepal]을 틈틈히 읽으며 네팔에서 보낸 나의 시간들을 반추할 것이다. 저녁은 타멜거리의 블랙올리브에서 성찬으로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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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4일 가사를 출발하여 먼지투성이 찻길을 따라 걸어 다나에서 점심을 먹고 따또파니에서 하루의 여정을 멈추었다. 2월 15일 드디어 걸음을 마무리하고 버스로 따또파니를 출발하여 Galeshwor에 도착해 숙소에 짐을 풀고 마을을 탐방하고 흰두사원을 참배했다.  

 

가사의 플로리다롯지를 나설 때까지 어제 저녁의 산불은 이어지고 있었다. 눈에 띄게 불길이 치솟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느린 걸음으로 위로위로 번져가고 있었다. 강의 동쪽에 형성된 오솔길을 통해 걸어가고 싶었지만 산불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강의 서쪽에 만들어진 찻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고도가 낮아지고 도시가 가까워질수록 찻길은 넓어지고 그만치 지나는 차의 수도 늘어갔다.  어떻게든 먼지를 피하기 위해 가능한한 찻길을 벗어나 산길을 선택해 걷곤했지만  어쩔 수 없이 다시 찻길로 내려와 먼지를 뒤집어 쓰야하는 구간이 늘어났다. 

 

가사를 벗어나 남쪽으로 향하는 길은 어느새 열대의 기운이 느껴졌다. 길가에 바나나나무가 늘어섰고, 수확이 끝나가는 오렌지과수원이 드문드문 이어졌다. 유채꽃은 막 노랑 꽃순을 터트렸고, 복숭아와 자두 끛은 만발했다. 부지런한 들꽃은 이미 지기 시작했고 배낭을 짊어진 등짝에는 땀이 흘렀다. 땀에 젖고 더위에 지쳐갈 무렵 Rupse Chhahara(아름다운 폭포)가 나왔다. 길 오른쪽으로 폭포가 올려다 보였지만 물이 줄어 볼폼은 없었다. 차라리 길 왼편 강쪽으로 "세계에서 제일 깊은 계곡"이라는 간판이 있었고 따라가 보니 계곡을 내려다보는 전망대가 있었다. 거기서 보는 깊게 패인 강줄기의 계곡이 더 멋있었다. 

 

Rupse Chhahara를 지나 Dana에서 차가 지나갈 때마다 온몸으로 음식을 가려야하는 먼지 투성이 길가 식당에서 달밧을 먹었다. 기후가 온화한 지역까지 내려온데다 주변에 푸성귀도 많이 키우고 있어 잔뜩 기대했는데 달밧에는 야채로 만든 떠꺼리 반찬이 빠져 있었다. 조금은 실망스러운 점심을 먹고 다시 먼지 날리는 무미건조한 길을 나섰다. 다행히 얼마가지 않아 강을 건너고 차와 먼지가 없는 마을길로 접어들었고 네팔리의 삶이 있는 아름다운 마을들을 지났다. 아이들이 한참 공놀이 중인 학교를 지나고 돌담에 붉은 꽃기린 꽃과 가시과 어울리는 아름다운 마을을 지났다.    

 

 

하루 여정을 마무리할 따토파니에 오후 3시반 즈음 도착했다. Old Kamala라는 롯지에 짐을 풀었다. 따토파니는 우리가 두발로 이어오던 여정을 멈추고 오랫동안 잊었던 차로 남은 여정을 이어갈 곳이었다. 트레킹 종료를 축하하는 백숙을 주문해놓고 간단한 세면도구를 챙기고 "따뜻한 물"을 의미하는 마을이름 그대로 따토파니를 향했다.  따토파니의 야외온천은 역시나 기대 이하였다.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구간에서 만났던 지누단다보다 접근성은 좋았으나 한적함이나 밀림속에 숨어있는 은밀함이 주는 신비함이 없었다개방적이고 번잡한 시골장터같은 개방성이 당혹스러울 정도였다비쩍마른 맨몸을 다중앞에 드러내야하는 곤혹스러움에 한참을 망설이다 옷을 벗었다

기대 이하의 수온에 물이끼와 오물이 둥둥 떠다니는 따토파니에 몸을 담구었다그래도 도시를 떠나온지 처음 잠겨보는 온수를 몸은 반긴다좀더 나아보이는 옆탕에는 거의 모든 사람이 집결해있어 차라리 호젖함을 선택해 덜 따뜻하고 지저분하지만 사람이 적은 탕을 선택했다네팔리 주민들도 상당히 많아보이고 트레킹 중에는 만나지 못했던 젊은 서양트레커도 10여명이 넘어보였다트레킹도중에 만났던 다 큰 서양아가씨가 팬티차림으로 아는 채를 하고 인사를 건넸다서양인들은 자신의 몸에대한 의식이 우리와는 참 다른 것 같았다. 저렇게 세상에 대해 당당하고 의연하게 자신의 몸을 드러낼 수 있는 태도가 참 부러웠다.

먼저 탕에 들어간 가이드 바수는 온천에 붙은 가게에서 맥주부터 찾았다. 주문해 둔 닭백숙에 반주라도 한잔할 생각이었는데 가이드 바수의 술주정이 걱정되었다. 목욕을 마치고 돌아온 롯지에는 수학여행 왔는지 학생들이 롯지의 1층을 채우고 있었다. 시간이 일러 따토파니의 골목을 돌다가 롯지의 별관같은 다이닝 룸에서 저녁을 멋었다. 주문해 둔 백숙이 나왔지만 그저그랬다. 조금 먹다보니 동닭울 덜 삶아 안쪽은 아직 다 익지도 않았다. 닭은 다시 물린뒤 한참 야심한 시간에야 본격적으로 저녁을 먹기 시작했다찬이 없는 백숙을 먹기가 곤혹스러워 네팔 김치인  아짜르를 요구했다. 무짠지같은 '물러아짜르'가 나와서 그나마 덜 느끼하게 솥을 비웠다딱 한잔이 아쉬웠지만 알콜릭인 바수가 신경쓰여 아예 술없는 백숙잔치가 되어버렸다고객이 고용한 가이드 눈치를 봐야하는 상황이 기가찼다.

 

식사중에 다음 일정을 협의해서 나브라즈가 제안한 바글룽 쪽으로 마음을 굳히자 바수가 반발했다. 바수는 어떤 이유에선지 고라파니로 일정을 고집했다. 초기 일정으로 한달전 다녀온 고라파니를 나는 다시 갈 이유가 없었다. 바수는 자신의 의견이 통하지않자 얹짢아하는 기색으로 자신은 포카라로 들어가지 않고 바로 카트만두에 돌아가겠다고 선언했다. 바수의 고집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다은날 아침 술이 깨고나면 달라질 것을 기대하고 논의를 접었다.

 

좁은 계곡으로 따토파니의 아침이 깨어나자 갈리스와르행 로컬버스를 타고 출발했다. 바수가 고집하던 고라파니를 가기위해서는 따토파니를 벗어나자마자 좌측으로 길을 돌려 안나푸르나 보전지역으로 진입해야 했지만 우리는 고라파니를 대신해 바글룽을 선택했고, 걷기를 대신해 버스를 선택했다. 근 20여일만에 차를 타니 절로 신이 났다. 네팔은 걸기 위해서 왔고 나는 걷기를 너무나 좋아한다고 싣컷 자랑해왔는데 막상 차를 타니 그렇게 좋을 수 없었다. 입이 절로 벌어지고 버스의 진동에 따라 어깨가 들썩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험준한 계곡을 지나고 도저히 차가 지나갈 수 없을 것 같은 험한 길을 요동치며 지날 때는 얼굴에 웃음이 가쉬고 등에 식은 땀이 났다. 늘 이 길을 다니는 사람은 무감각해져 있을지 모르지만 나는 도저히 평정심을 유지할 수 없었다. 계곡옆으로 차가 바짝붙으면 온 힘을 다해 손잡이를 잡고 두발을 있는 힘껏 버팅겼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얼마가 길을 내려왔는지 어느 순간 마음이 편해지고 버스에 흐르던 네팔 음악이 귀에 들려오기 시작했다. 목적지인 갈리수와르가 가까워졌다. 

 

 

 

원래 짰던 계획에는 없던 갈리수와르에 도착했다. 비교적 큰 도시에 큰 규모의 흰두사원이 있고 하루정도 쉬어가기에 좋은 도시로 느껴졌다. 전날 저녁부터 기분이 상해있던 바수는 버스지붕에서 배낭을 내리다 배낭에 얼굴을 맞았다. 선글라스가 부서졌고 다행히 얼굴에 다친데는 없었다.  포카라까지 같이 가지않고 바로 카트만두로 돌아가겠다던 바수를 포카라에 가서 새로 선글라스를 사주겠다며 달랬다. 버스정류장에서 주택가를 지나 깔리깐다키와 다울라기리쪽에서 내려오는 한 지류와 만나는 절묘한 지점에 자리잡은 호텔리버사이드에 여장을 풀었다.  

  

Galeshwor에 이르자 불교문화권은 끝나고 흰두문화권에 접어 들었다는 것을 실감했다. 타르초와 룽다가 사라지고 사원은 화려한 색감을 자랑했다. 네팔의 불교는 한국의 불교와는 사원의 분위기에서 큰 차이가 났다. 아마도 흰두교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그럴 것이다. 그리고 물어보면 힌두교와 불교는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보고 흰두교도가 불교사팔을 참배하거나 그 반대의 경우에 대한 거부감이 전혀 없어 보였다.  그래도 불교지역과 힌두교 지역은 확실히 분위기가 달랐다.  기후나 지형때문인지도 모르지만 힌두교가 지배적인 지역의 사람들이 확실히 동적이고 낙천적인것 같았다. 갈리슈와르가 그랬다. 

 

 

두 강이 만나는 지역을 신성시하는 힌두의 전통에 따라 갈리슈와르도 꽤 중요한 힌두사찰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고보니 우리가 여장을 푼 롯지를 비롯해 갈리수와르 전체가 트래커보다는 순례자가 주로 찾는 곳이라는 인상이 들었다. 시가지를 둘러보고 힌두교 사찰인 Radha Krishna Mandir를 들렀다.  암반위에 지어진 사찰은 그 암반을 포함해 거대한 조각품같이 조형적이었다. 힌두교사찰에서는 우리도 힌두신자와 같이 시바신에게 참배를 하고, 헌금을 한뒤에 Tika라고 불리는 꽃을 이겨 만든듯한 붉은 반죽을 이마에 찍었다. Tika 는 행운을 가져 온다고 하니 남은 우리의 여정은 안전하고 즐거운 시간이 될 것이 틀림없었다. 

 

손님이라고 우리밖에 없는 식당에서 지금까지 산중에서 먹을 수 없었던 생선튀김을 비롯해 거한 저녁식사를 즐겼다.  내일이면 네팔 최고의 현대적 도시이자 휴양도시인 포카라에 들어갈 기대에 부풀어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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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2일 좀솜에서 출발하여 Syang이라는 마을을 지나 마르파에서 점심을 해결하고 차이로 숲길을 따라 투구체에 도착하여 하루를 마무리했다. 다음날 투구체를 출발하여 코켄탄티에서 점심을 먹고 칼로파니 지나 가사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아침 일찍부터 좀솜공항에는 비행기가 도착하고 이어서 이륙을 준비했다.  공항과 붙어 있는 숙소다 보니 비행기 소음이 장난이 아니었다. 숙소 옥상에 나가 가까이서 프로펠라 비행기가 이착륙하는 장면을 구경했다. 포카라와 좀솜을 잇는 정기항공노선이지만 좁은 계곡을 오르내리는 항로가 위험하다보니 사고도 잦은 구간이다. 쏘롱라를 넘은 대부분의 트레커는 여기서 걸음을 멈추고 비행기로 포카라로 빠져버린다. 우리는 가능한한 포카라 가장 가까이 까지 고집스럽게  걸음을 계속하기로 했다. 다울라기리 쪽으로 올라 포카라로 향하는 비행기가 사라져 간 깔리깐다끼 강을 따라 우리도 길을 나섰다. 

 

 

 

좀솜을 벗어나자마자 홍수가 휩쓸고 지나간듯 거친 지형의 계곡 합류점을 건넜다. 그리고 바로 깔리깐다기를 벗어나 오른쪽 가파른 언덕길을 통해 Syang으로 향했다. Syang은 전날 들렀던 티니가온과는 다른 또 다른 멋이 있는 마을이었다. 골목은 정갈했고 마을은 훨씬 정돈된 느낌이 들었다. 사람이 떠나가는 마을이 아니라 머물고 살아가고 자자손손 이어갈 마을로 사람의 훈기가 느껴졌다. 양지바른 담벼락 아래 해바라기를 하고 마을의 느낌을 온 몸으로 받아들여 평온한 마음으로 마을을 걸었다. 마을을 벗어날 즈음 한 네팔리 아가씨가 학교앞에서 등교하던 아이들과 과자를 난주어 주면서 놀고 있었다. 우리의 가이드는 금방 그 아가씨랑 친해져 좀솜으로 올라간다는 사람을 왔던 길을 되돌아 우리와 합류하게했다. 이날 걸음을 멈춘 투쿠체까지 같이 걸었던 그 아가씨는 무슨 연유로 가던 길을 되돌아 우리와 합류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왜 다시 떠나갔는지 끝내 이해할 수 없었다.

 

Syang을 지나 마르파까지 가는 길은 초록이 완연했다. 해발 고도가 3000m이하로 내려 온 뒤로 늘어가던 초록빛이 네팔 사과의 최고 생산지인 마르파가 다가오자 더욱 진해졌다. 2월에도 아랑곳없이 마르파에는 봄이 오고 있었다. 멀리 설산을 등지고 깔리깐다끼 강을 안은 초록 밀밭과 살구꽃이 어우러진 과수원의 풍경이 평화로웠다. 네팔 사과 브랜디의 산지로 유명한 마르파가 다가오자 나의 가슴은 뛰기 시작했다. 마르파가 브랜디의 산지라서가 아니라 네팔 사과의 주산지라는 사실이 사과 농사를 짓는 한국 농부에게는 각별하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마르파의 사과농사에 대한 기술적 경영적 정보는 하나도 중요한 것이 없겠지만 사과나무가 자라고 계절이 오면 꽃이 피고 잎이나고 열매가 달려 빨갛게 익어갈 네팔의 한 마을을 만났다는 그 사실이 나에게는 소중했다. 마르파는 좀솜에서 거리 멀지 않았다. 점심무렵 좀솜 베니간 도로를 벗어난 우리의 걸음은 마르파를 들어서기 시작했다.

사과의 산지로만 알고 있던 마르파는 한적한 농촌 마을이 아니라 트레커의 발길이 머무는 주요한 거점도시였다. 다울라기리 베이스캠프 코스로 들어가는 체크포스트가 있고 따라서 호텔과 레스토랑은 물론 트레킹관련 용품 가게까지 즐비했다. 도시가 번화한 만치 공동체 도서관과 교육 시설도 갖추어져있고 한때 일본인의 발길이 붐볐는지 '사꾸라' 라는 이름의 호텔도 있었다. 우리는 식사를 하고 마르파를 벗어나기전에 마르파를 조망할 수 있는 언덕위에 자리잡은 사원을 방문했다. 계단을 통해 사원에 이르자 많은 신도들이 마당에서 식사를 나누고 있었다. 식사중인 무리를 가로질러 지나가기가 불편했지만 마르파를 조망할 수있는 위치까지 올라가 전체가 한 덩어리로 붙어있는 듯 꽉짜인 마르파의 전경을 눈에 담았다.  

마르파에서 애플브랜디를 사고싶었지만 그 무게에 지레 겁이나 포기하고 다음 행선지인 차이로를 향했다. 차이로는 깔리깐다끼를 서쪽으로 넘어 티벳탄 캠프가 있는 숲속마을이었다. 이때부터 이날 오후는 투쿠체에 이르기까지 아름답고 편안한 숲길이 계속 이어졌다. 고개를 들어 멀리 설산을 보지않는다면 길은 한국의 야트막한 야산의 숲길과 진배없었다. 오후내내 길은 평탄했고 녹색의 숲은 짙고 싱그러웠다.

투쿠체에 들어설 무렵 오후가 깊어져 마음이 급해지기 시작했다. 비시즌이다보니 몇몇 숙소는 아예 문을 닫았고 마땅한 숙소를 쉬 찾지 못했다. 가이드로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는데 다행히 마을이 끝나갈 무렵 손님을 받는 숙소를 구할 수 있었다. 그렇지 못했다면 우리는 야간 트레킹을 두어시간 더해서 다음 숙소를 찾아야만 하는 어려운 상황에 처할뻔했다. 짐을 풀고나니 가이드 나브라즈는 이곳에서 애플 브랜디 공장을 운영중인 친구가 있다며 몇병 싸게 해줄테니 사기를 권했다. 우리는 사고싶지만 아직 걸어야할 길이 많은데 짐을 감당할 수가 없다고 답했다. 하지만 나브라즈는 자신들이 그정도는 얼마든지 들어줄 수 있다고 강권하는 바램에 한명당 두어병의 브랜디를 사게 되었다.

 

숙소의 옥상에는 다이닝룸으로  사용되는 유리온실같은 작은 공간이 있었다. 아직은 아침저녁으로 쌀쌀한 날씨인데 다이닝 룸은 따듯했다. 그 시간까지 손님이 우리밖에 없다보니 우리는 다이닝 룸을 우리만의 공간인양 점령했다. 늦게 칠레 트레커 한팀이 합류하기 전까지 우리는 다이닝 룸에서 커피와 담배를 나누며 해지는 다울라기리를  바라다보는 호사를 누렸다. 강길에서 숲길로, 좀솜에서 시작해 상과 마르파와 차이로를 지나 투쿠체까지 참 많이 걷고 행복했던 하루를 나브라즈가 사온 애플브랜디를 한잔 나누며 마무리했다. 룸에 들어와 침대에 누워서 처음으로 이제 한국으로 돌아가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관계, 환경, 그리고 삶에 대해 더 사랑하게 될 것같은 예감에 사로잡혔다. 집이 그리워졌다.

2월 13일의 아침이 밝자 간단한 조식을 해결하고 짐을 싸는데 우리 가이드와 롯지 주인간에 싸늘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가이드는 식사도 거부하고 빨리 떠나기만을 바라는 눈치였다. 대충 파악한 바로는 어제 저녁 외부에서 사온 브랜디를 마신 것에 롯지 사우니가 기분나쁜 소리를 한것 같았다. 롯지도 브랜디를 파는데 왜 외부에서 사온 술을 마셨냐고 사우니가 따진것 같았다. 우리는 나름대로 양해를 구했다고 알고 있었는데 우리와 가이드, 가이드와 사우니, 그리고 우리와 사우니간의 삼각 소통에 문제가 있었던 것 같았다.

투쿠체를 출발해 얼마지나지 않아 라르중이라는 마을에서 식당에 들러 간식을 먹으며 휴식을 취했다. 숙소의 사우니와 틀어진 가이드가 아침을 굶고 출발한 덕에  우리까지 든든한 참을 먹고 다시 길을 이어갔다. 라르중을 지나 점심을 해결한 코켄탄티까지 이어지는 길은 어제의 느낌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우리는 강을 따라 평탄한 초록 숲길을 걸었고 걸음이 이어질수록 나무는 높고 초록빛깔은 더 짙어졌다.  숲길을 벗어나면 하상으로 내려와 사막같은 강바닥을 자갈을 밝고 걷고 다시 길을 만나면 초록 숲으로 걸음을 이어갔다. 깔리깐다끼의 오후 바람이 워낙 유명해 오전동안 걷고 오후에는 걸음을 멈추라는 가이드북의 안내에 잔뜩 긴장했는데 우리 일정 동안에는 그렇게 험한 바람을 만나지 않았다. 우리는 오전에도 걷고 오후에도 깔리깐다끼를 따라 마냥 걸었다.

까그베니를 지난 뒤로 깔리깐다끼강을 도대체 몇번을 건넜는지 모른다. 강의 왼편길을 걷다가 다시 강을 건너 오른편 길을 걷고, 그리고 언덕을 만나면 강으로 내려섰다가 다시 강둑을 올라 또 강을 건넜다. 코켄탄티을 만나기 위해서 찻길을 벗어나 다시 강의 동쪽으로 건넜다. 코켄탄티 마을은 몇 가구되지 않는 소박한 마을이었다. 그나마 강쪽으로 붙어있는 집들은 수해로 무너져 내려 지난 홍수의 흔적을 안고 있었다. 강과 마을이 너무 붙어있고 강과 길이 거의 수평에 가까운 마을이다 보니 또 언제 수해를 당할 지 위태로워 보였다. 우리는 조그만 롯지에서 점심을 주문하고 덜마른 빨래를 배낭에서 꺼내 햇볕에 늘었다. 차를 마시며 지도를 보고 다음 일정을 검토하며 점심을 기다리는 시간이 충만했다. 걸어서 좋고, 걷다가 쉬어서 좋고, 쉬다가 다시 걷는 것 또한 좋으니 어쩌면 걷기는 인간의 가장 완벽한 행위인지도 모르겠다.

 

 

고도를 낮추고 길이 산에서 멀어지는 만치 사람의 발길과 마을의 훈기는 늘었다. 코켄탄틴을 지나면서부터 마을도 마을과 마을을 잇는 길도 분위기가 달라졌다. 찻길과 트레킹코스를 교차하며 우리의 길을 찾아나가면서 만나는 사람들의 활기가 달랐다. 산에서 만나 사람들은 아직 겨울에 갖혀 추위에 웅크리고 봄을 잊고 있었다면 고도가 낮아지고 벌써 봄이 느껴지는 지대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얼굴에 화색이 돌고 걸음걸이도 씩씩해졌다. 초록색이 들판에서 시작해 산으로 번져감에 따라, 봄은 우리 마음에서 시작해 몸에서 완성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코켄탄티를 출발해 오후의 휴식을 깔로파니에서 커피를 마시며 보냈다. 커피를 마신 깔로파니 게스트하우스는 규모도 있고 시설도 고급스러웠는데 우리 가이드는 하루 일정을 거기서 멈출 것을 제안했다. 좋은 숙소에서 지내고싶은 마음이 없지는 않았지만 걸음을 멈추기에는 너무 이른 시간이었다. 일정상 너무 일찍 걸음을 멈추면 다음날 일정이 늘어나 고생할 수밖에 없어서 제안을 받아들일수 없엇다. 아쉬워하는 가이드와 함께  예정된 숙소가 있는 가사까지 다시 걸었다. 

 

 

가사에 도착해 "플로리다 게스트하우스"에 짐을 풀었다. 미지근한 물이 나오다 찬물로 바뀌어 버린 수도꼭지에 몸을 맡기고 나니 온기가 절실했다. 다행히 우리에 이어서 두어팀의 트레커도 들어섰고 같은 숙소에 지내게 된 손님이 늘어나니 다이닝룸에 숯불 난로가 들어오고 온기가 흘렀다. 너무 붐비지도 않고 쓸쓸하지도 않을 정도의 손님이 함께 하는 숙소가 딱 좋았다. 

 

 

 

롯지와 가까운 안나푸르나 산자락에 산불이 났다. 불길이 커졌다 작아졌다 살아 움직이고 흰 연기가 쉼없이  피어났지만 산불을 꺼기위한 어떤 움직임도 보이질 않았다. 네팔리들은 아무도 산불을 의식하지 않는듯 태연했는데, 산불이 번져봤자, 눈이 쌓여 있는 고도에서 멈출 수 밖에 없고 우거진 숲이 없어 크게 신경쓸것도 없다고 생각하는 건지 아니면 험준한 산악지대에 산불을 끌 소방헬기도 없고 인력으로 끈다는 것도 불가능하니 그냥 방치하기 때문인지는 알수 없었다. 불 타는 산 아래 마을의 숙소에서 조금은 불안한 잠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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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0일 묵니나트를 출발해 자르곳을 지나 Upper Mustang으로 들어가는 마을 까크베니에서 머문 뒤, 11일 깔리깐다기를 따라 좀솜까지 걸었다.  



 

구원의 땅 묵디나트에서 문득 두고온 집을 생각했다. 따뜻한 물이 나오고, 드끈뜨끈한 방바닥에  깨끗한 이불 그리고 맛있는 밥이 있는 집이 왜 갑자기 생각났는지 알수 없다. 여정이 40여일을 넘기면서 나도 모르게 거친 네팔 생활에 조금은 지쳤는가보다. 고산증의 위험도, 고산의 추위도, 힘든 강행군도 다 지나갔고 오직 따뜻한 햇살 속을 걷는 일만 남게되자 간사한 몸이 더 편하고 싶어진게 틀림없다. 그래도 여행을 마치고 귀국하고 나면 이 곳 네팔이 엄청 그리울 것이 분명한데 나이가 들수록 잊고 버려야 하는데 그리운 것이 늘어나서 큰 일이다. 



밤새 기온이 떨어졌는지 샤워실 물이 얼어 나오지 않아 고양이 세수를 하고 길을 나섰다. 전날 한국서 일하신다는 네팔리의 가족들도 묵다나트 사원을 참배하고 자신의 길을 가기 위해 숙소를 나섰다. 가벼운 작별인사를 나누었지만 그분의 차가 시동이 걸리지 않았다.  밤새 떨어진 기온 탓인지 시동이 걸리지 않는 네팔리의 짚차를 같이 밀어 겨우 시동이 걸리는 것을 확인하고 서로의 안녕을 빌며 작별했다. 라니포와에서 멀지 않은 거리에 있는 신비한 마을  자르곳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자르곳은 깔리깐다끼 계곡을 향해 돌출된 언덕 위에 형성된 마을로 멀리서 보면 위태롭기까지 했다.  



자르곳의 좁은 골목길을 따라 사원을 찾았다. 굳이 우리가 보기 원하는 걸 말하지 않아도 가이드 바수는 항상 앞장서 곰파를 향했다. 뭐 딱히 보여줄게 없기도 하겠지만 이곳 네팔리의 삶을 지탱하는 근본이 종교다보니 사원은 그들의 삶의 중심이 틀림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개별 사원의 특성을 이해하기에는 식견이 없으나 마을의 규모나 생활 형편을 사원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작고 가난한 마을의 사원과 크고 경제적으로 넉넉한 마을의 사원은 같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자르곳 역시 별다르지 않았지만 사원은 깨끗했고 마을의료나 교육관련 시민조직의 사무실도 사원과 붙어있어 나름 마을 공동체의 중심 역할을 하고 있어 보였다. 사나워 보이는 개의 환대를 받으며 사원을 나와 네팔리의 체취를 쫏아 골목을 누빈뒤 다시 가던 길을 따라 까그베니로 향했다. 



까그베니 가는 길은 묵디나트까지의 길과 확연히 달랐다. 베시사하르부터 묵디나트까지는 산행이었다면 묵디나트 이후 까그베니까지는 황량한 평원을 걷는 사막횡단 같은 느낌이 들었다. 길은 메마르고 척박한 황무지 능선이 이어지고 가파르게 깍힌 게곡과 파스텔톤이 번지는 신비한 색감의 능선들이 무스탕 특유의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그래도 금방 조성되었거나 조성중인 찻길을 따라 드물지만 여행객을 위한 찻집이나 롯지가 자리잡고 있었다.  물론 Upper Mustang이나  Dolpo와 같은 극한 오지의 느낌은 확실히 덜했다. 

   

 

묵디나트에서 까그베니까지의 길은 멀지 않았다. 서두르지 않고 걸어 늦지 않은 점심시간에  도착했다. 그래도 중간에 가게앞에 베틀을 두고 야크나 산양 털로 만들었다는 수제 숄과 머플러를 전시한 가게에서 구경도 하고, 가게와 붙어있는 찻집에서 차를 마시는 등 여유롭게 쉬기도 했다. 길은 편했고, 간혹 지나가는 차가 먼지를 일으켰지만 다행히 많지 않았다. 전봇대를 세우고 전선을 까는 기사들을 만나 물어보니 길을 따라 인터넷을 설치하고 있다고 했다. 지구상 몇안되는 오지의 대명사격인 무스탕에 인터넷이 들어오고 있다니 좀 씁쓸하기도 했지만 현지 주민의 삶을 생각한다면 환영할 수밖에 없었다. 



까그베니의 멋은 마을에 들어서기전 언덕위에서 내려다볼 때 확연히 다가왔다. 깔리깐다기와 묵디나트에서 흘러오는 강이 만나 이루어진 조금은 옹색한 계곡아래 형성된 퇴적지에 자리잡은 마을은 주변 황무지 산이나 능선과는 달리 초록색을 띠고 있었다. 거대한 무채색의 산과 구릉과 강 사이에 한 조각의 연두빛 마을이 자리잡고 있는 풍경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까그베니 덕분에 연두빛이 이렇게 도드라진 색상인지 난생 처음 알게 되었다.    



편한 걸음 끝에 도착한 까그베니의 롯지 [Hotel Nilgiri View]에 짐을 푸니 넉넉히 마을을 둘러볼 수 있는 오후 시간이 남겨져 있었다. 가이드가 인도한 롯지는 멋진 조망을 가지고 있었고 시설은 운치있고 편안했다. 점심을 먹고 마을 산책을 나섰다. 먼저 마을을 가로질러 Kag Chode Thupten Samphel Ling Monastery를 찾았다. 안내서를 보니 나름 역사가 깊고 규모있는 사원으로 교육사업 등을 하고 있으며 사원의 유지를 위해 후원도 받고 있었다. 흙과 나무로 거칠게 만든 탑은 본전으로 보였고 그 옆에는 신축 건물이 지어져 있었는데 본전을 마주보는 현대식 2층 건물에는 많은 티벳탄들이 공동생활을 하는 것 처럼 보였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는 티벳탄으로 보이는 신도들이 양지바른 마당 가에 모여 앉아 찬송을 하고 있었다. 운좋게 예불 시간에 우리가 도착한 것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어쩌면 예배 시간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하루 온종일 예배 중인지도 몰랐다. 늘 기도와 찬송으로 삶을 채우는 티벳탄들이 일은 언제하는지 궁금했다. 나는 네팔 여정중에 그들이 일을 하는 경우보다 기도하는 경우를 더 많이 본것 같았다. 그들에게 현세는 단지 스쳐지나가는 한 과정에 불과할테니 열심히 일하고 무엇가를 이루기 위해 분투할 장이 아닐 것이 분명했다. 집착할 아무런 이유도 없는 그들의 삶이 부러웠다. 



골목이라기 보다는 집과 집사이의 틈을 비집고 지나간다고해야 더 정확할 것같은 미로를 지나 Upper Mustang이 시작하는 지점에 도착했다. 깔리깐다키의 강폭은 광활하다고 표현해도 좋을 만했지만 건기다 보니 수량은 많지않았고 강을 따라 걷기에는 적격이었다. 우리는 모두 강으로 내려가 강바람을 맞으며 모래를 만지고 강물에 손을 적시며 강이 시작되었을 알수 없는 신비한 세계의 느낌을 더듬었다. 자갈을 던져 물수제비를 뜨고, 자갈을 뒤져 암모나이트 화석을 주우며 멀리 무스탕 깊숙히 자리잡고 있는 Lo Mantang까지 걸어가고싶은 마음을 가라앉혔다. 깔리깐다끼를 통해 Upper Mustang의 맛만 보고 마을로 돌아왔다. 



롯지는 비수기라서 손님이 우리밖에 없었지만 시설이나 진열해 놓은 상품 등을 보니 꽤 부유한 롯지로 느껴졌다. 제일 아랫층이 식당과 주방이 있고 2층에는 객실과 주인의 살림집이 있었고 우리가 지낸 3층은 객실과 다이닝 룸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층과 층을 잇는 계단이나 룸을 이어주는 복도가 오래된 일본이난 중국의 목조 건물같이 고색찬연하고 오밀조밀한 운치가 있었다. 그래서인지 하루밤 잠과 세끼 식사를 해결하기 위해 1층 식당과 3층 다이닝 룸을 잇는 계단을 수십번 오르락 내리락 거렸지만 불편하거나 힘들지 않았다.   

[Hotel Nilgiri View]는 교양있고 단정한 차림의 아가씨가 우리를 안내하고 식사 주문을 받았는데 그 당당함에 미루어 주인집 딸이 분명해 보였다. 나중에 나타난 꽤째째한 옷차림에 힐긋힐긋 우리를 살피며 부엌을 하는 식모아이 우리 때문에 이웃에서 급히 불려 온 낮은 계급의 딸로 보였다. 좁은 공간에서 롯지 주인딸과 식모아이를 대하니 단정함과 남루함, 도도함과 비굴함을 나누는 계급성의 현실을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아렸다. 정전으로 촛불을 켜는 바람에 더 운치있는 저녁 식사를 하고 하루를 마무리했다. 침실로 돌아오니 깔끔한 이부자리에 깔리깐다키 강바람에 날려온 한주먹의 모레가 먼저 내려 앉아 있었다.

 

 

아침 일찍 강건너 수직 절벽 아래에는 동네 꼬마들이 다 모여 있었다. 아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아슬아슬하게 절벽을 타고 올라 무슨 이유에선지 돌을 굴렸다. 그 충격으로 엄청난 토사가 큰 소리를 내면서 강으로 굴러 떨어졌다. 우리 가이드도 아이들이 왜 그러는지 알지 못했고 우리도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없었다. 그런데 우리 숙소 앞을 지나던 중년 여성 한분이 아이들을 향해 고함을 지르고 화를 내는 것으로 보아 아마 아이들이 위험을 즐기는 것같이 느껴졌다. 저러다가 한 순간 아이들의 목숨을 잃을 만지 위험한 장난을 하는데도 그 여성말고 온동네 사람들이 그냥 무관심해 보이는 것은 늘 목숨을 위협하는 위험이 산적해 있는 삶의 조건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무스탕의 마을 까그베니를 뒤로하고 한없는 아쉬움을 남기고 돌아서며 나는 빌었다. 내 살아 생전에 까그베니를 넘어 무스탕과 돌포를 주유할 수 있는 한달 여정의 기회가 꼭 주어지기를! 좀솜으로 가는 길은 단순했다. 왼편으로 닐기리봉과 틸리초크를 스쳐지나며 멀리 다울라기리 산군을 향해 깔리깐다끼는 흘렀고 우리의 걸음도 따라 흘렀다. 간혹 길과 강의 경계가 흐려지는 곳에서는 강으로 내려섰다가 다시 물을 만나면 강둑으로 나오는 과정을 반복했다. 강을 따라 걷는 길은 평탄했고 편안했다. 고도의 변화가 없는 수평을 길을 물처럼 흘러갔다.

 

 

까그베니를 출발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Ekle Bhattee 라는 강변마을을 만났다. 두세개의 롯지와 레스토랑이 있는 작은 마을인데 강과 마을의 경계가 불확실 해 꼭 우기에는 물에 잠길듯한 위치에 자리잡고 있었다. 마을입구의 조용한 첫 집에서 차를 마시고 쉬었다가 출발하자마자 근처 롯지앞에 모여있는 한무리의 트레커들을 만났다. 대부분의 트레커들이 소롱라를 넘어 묵디나트를 지나 좀솜쪽으로 하산하는데 반해 이들은 좀솜에서 출발해서 묵디나트 쪽으로 상행중이었다. 덕분에 오랜만에 트레커를 조우한 셈이다.

 

 

 

Ekle Bhattee 를 출발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점심무렵  좀솜까지 도착했다. 좀솜은 마을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컸다. 포카라서 오는 정기 비행기를 맞는 비행장 까지 있는 곳이다보니 많은 롯지와 여행관련 업체들, 그리고 지역 군대까지 주둔하고 있는 이 근처의 중심도시로 느껴졌다. 시가지를 쭉 가로질러 거리가 거의 끝나는 지점에서 숙소를 잡았다.

 

 

 

이른 도착으로 오후는 티니가온이라는 가까운 마을 까지 작은 트레킹을 떠났다. 그냥 호텔에서 쉬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일행 M의 유혹에 굴복했다. 가이드에게는 자유를 선물했지만 굳이 우리를 따라 나섰다. 강을 동쪽으로 건너 30여분 정도 산길을 오르니 좀솜 시가지가 내려다 보이는 티니가온에 도착했다. 농사철도 아니고 여행 성수기도 아닌 계절 탓인지 아니면 마을은 늘 이런 모습인지 알 수 없었지만 티니가온 역시 인기척이 드물 정도로 한산었다. 영업중인 식당을 겨우 찾아 차를 마시고 마을을 관통해 다시 되돌아 내려오는 골목길에서 만난 장난꾸러기 아이들이 무척이나 반가웠다.  아이들이  줄고 학교가 사라지는 한국의 농촌에서 사는 나의 과민반응이겠지만 늘 마을을 만나면 걱정이 앞선다. 이 마을은 대대손손 사람의 삶이 이어지기를 빌며 숙소로 돌아왔다. 

 

 

 

트레커 조차 만나기 힘든 여정 끝에 모처럼 좀솜에서 사람들을 만났다. 두 한국 청년을 비롯해 국적이 다른 몇몇 트레커와 여행중이라는 네팔리 두 대학생까지 여정은 다르지만 같이 좀솜에 있고 그것도 한 호텔에 머물게 되었다는 것 만으로도 친근감이 느껴졌다. 우리의 가이드는 네팔 아가씨와 담소를 나누느라 정신이 없었고, 우리는 탁자 밑에 넣어주는 숯불의 온기에 녹아들었다. 반가운 마음과는 달리 여정과 관련한 몇마디 말밖에 주고받지 못했지만  네팔의 거친 자연과 삶을 찾아 온 한국 청년 학생들을 보면 왜 그리 대견스러운지 모르겠다. 내가 그 나이 때는 네팔이라는 나라도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이 조금은 억울하긴 했지만 그래도 지금 이 순간 그들 청년과 내 삶을 나누고 있다는 사실이 자랑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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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8일 새벽 4시에 기상하여 간단한 식사후 쏘롱라를 향해 출발, 하이캠프를 지나 해발 5,416m인 쏘롱라에 정오무렵 도착, 이후 묵디나트를 향해 하산하여 저녁무렵 Ranipauwa에 도착 Hotel  North Pole에서 짐을 풀고 이틀을 머물렀다.



밤새 뒤척이다 새벽 4시에 기상하여 아침을 먹는둥 마는둥하고 점심으로 빵을 챙겨 5시에 롯지를 나섰다. 사방은 암흑천지지만 머리에 해드랜턴을 단 10여명의 트레커와 더댓명의 가이드 포터가 나란히 쏘롱라를 향해 출발했다. 좁고 가파른 길이 우리를 맞이했다. 다행히 바람도 눈도 없고 기온도 차갑지 않았다. 다리 아프고 숨이 찬 것 말고는 아무런 장애가 없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우리는 눈앞만 비추는 핸드랜턴에 의지해 오직 발디딜 곳만 확인하고 걸어야 했다.  설사 주변이 밝았다고 해도 발이라도 미끌어지는 순간 천길 낭떨어지가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라 경치에 신경쓸 겨를도 없었을 것이긴 했다. 긴 침묵 속에 해드랜턴의 불빛이 점점이 이어지는 가파른 길을 걷고 또 걸었다. 



어둠에 묻힌 절경을 보지 못하고 세 걸음 걷고 한숨을 돌리고 다시 세 걸음을 걷고 동행의 상태를 살피고 그렇게 계속해서 걷다보니 어느새 먼동이 트고 주변이 밝아 왔다. 갑자기 암흑 속에서 산들이 기적같이 살아났다. 산중에서 이런 일출을 맞을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는데 안나푸르나는 덤으로 가슴벅찬 감동을 안겨주었다. 아침 여명이 히말라야를 깨우고 우리의 걸음은 좀더 자유로워졌다. 출발하고 1시간 15분 남짓 지났을까 해발 4950m의 마지막 롯지가 있는 하이캠프에 도착했다. 짧은 시간에 고도를 무려 400m나 올린 셈이었다. 전날 하이캠프에서 잠을 잔 트레커들은 이미 다 출발하고 한명도 남아있지 않았다. 쏘롱패디에서 출발한 우리 일행들만 롯지에 들러 커피를 마시고 숨을 고른뒤 다시 길을 나섰다.

 

 

중국인 커플과 뉴질랜드인 커플 그리고 우리 한국인 4명에 3명의 포터가 나란히 출발했다. 음지의 위험한 눈길이 계속 이어지고 고도를 높일수록 시야는 더 넓고 자유로워졌다. 왔던 길을 뒤돌아보면 멀리 Chulu East(6429m)자태가 공룡 등짝같이 경이로웠고, 우리가 가는 길의 왼쪽으로는 Khumjungar(6759m)로 이어지는 산세의 흐름이 아름다웠다.  하지만 트래커들은 모두 지쳐가기 시작했고 걸음은 쳐졌고 숨은 가파졌다. 그리고 점점 사람과 사람 사이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우리 부부는 아까운 체력을 소진하지 않기 위해 걸을 수 있을 때 최대한 올라가자는 마음으로  다른 팀들을 추월해서 앞서 나가기 시작했다. 



쏘롱라에 다가 갈수로 나는 나도 모르게 호흡과 다리, 그리고 시간과 거리에만 정신이 쏠렸다. 가쁜 숨과 아픈 다리가 해가 지기전에 묵디나트로 나를 데려다 줄수 있을까하는 사실만 중요해지고 더 중요한 나머지는 사소해지는 이상한 경험을 하였다.  걸음을 통해 산의 기운을 느끼고, 안나푸르나가 선물하는 절경에 취해 생명의 환의에 들뜰줄 알았는데 나의 걸음은 고난의 구간을 벗어나기에 바쁘기만했다. 하이캠프를 나선지 꼭 4시간만에 쏘롱라에 도착했다.  



먼저 도착한 안도감도 잠시 걷기를 멈추자 추위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일행을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지자 걱정도 되기 시작했다. 쏘롱라 옆 언덕까지 올라 왔던 길을 되돌아봐도 일행의 흔적은 보이질 않았다. 그렇다고 되돌아 가보기엔 올라온 길이 너무 아까웠다. 무려 한시간이나 지체한 뒤에 먼저 나의 일행이 거의 탈진 상태로 도착했다.  11시 30분이었다. 자신의 작은 배낭마저 포터에게 넘기고 몸만 겨우 올라왔지만 막상 도착해서는 그랟 기운을 차렸다. 같이 간식을 나누고 사진을 찍는 사이 뉴질랜드 커플과 중국인 커플도 도착했다. 어떻게 된 것이 나이와 역순으로 쏘롱라에 도착하는 걸 보니 젊다고 튼튼한 것은 아닌게 확실했다. 우리 부부는 괜한 우쭐함에 어깨 힘이 들어갔다.



정오가 되자 우리 부부는 제일 먼저 출발했다. 상행길과 마찬가지로 서로 각자의 체력메 맞춰 걸어나갔다. 하행길의 풍광은 상행길에 비할 바는 못되었다. 발을 딛고 선 주변의 풍경은 초라했다. 하지만 고개를 들면 멀리 병풍처럼 앞을 가로 막고 선 다울라기리 산군의 숨막힐 듯한 풍광에 탄성이 절로 나왔다. 다울라기리까지 걸어갈 요랑이었는지 쉼없이 내달려 오후 2시반에 고도 4,200m의 바즈라마을에 도착했다. 파라다이스 롯지에서 시벅쥬스와 정체를 알 수 없는 rhubarb 쥬스를 와이프랑 나눠 마시며 일행을 기다렸다. 롯지주인에게 담배를 요청하니 새갑을 구하지 못해 자신의 담배 2개비를 나누어 주었다. 무려 한시간이 지나서야 일행이 도착했다, 상행길 한시간 하행길 한시간을 기다림으로 보냈다. 너무 좋은 체력이 문제였다. 그런데 사실 그 기다림의 시간이 너무 좋았다.



3시반에 도착한 일행과 차를 마시고 4시에 바즈라를 출발하여 530분에 묵디나트를 지나 Ranipauwa에 도착했다. Ranipauwa는 네팔여정중 최고의 풍경을 가진 가장 드라마틱한 마을이었다. 꿈속에서나 그리던 풍광을 지닌 Ranipauwa는 높은 설산이 멀리 둘러쳐진 활무지로 형성된 너른 구릉지의 양지바른 언덕위에 자리잡고 있는 오래된 마을이었다.  석양을 받으며 꿈속같이 안온한 느낌을 주던 마을은 밤이 되니 설산과 구름 그리고 달빛과 타르초가 어울려 내 눈과 마음을 맑게해 주었다. 어린 시절 골목길을 나설 때 서늘한 밤공기 주던 알 수 없던 울렁거림이 다시 되살아남을 느낄수 있었다. 



마을을 관통해 거의 끝에 다다라서야 외관이 조금 낡은 Hotel North Pole에서 방을 구했다.  외관은 낡고 복도 끝에 설치된 세면장과 화장실은 불편하기 이를데 없었다. 하지만 친절한 주인이 피워주는 숯불 난로 하나로 모든 불편함을 잊을만했다. 특히나 생각보다 싼 가격에 맛난 야크스테이크를 먹을 수 있어서 행복했다.  



새벽 4시에 일어나 하루에 고도를 1,000m나 높이고 다시 1,600m를 내린 쏘롱라 패스를 축하하면서 락시를 한잔 나누면  서로의 노고를 격려했다. 고산증으로 인해 배탈과 두통 호흡곤란을 겪은 두 친구와 특히 우리 짐까지 지고 힘든 하루를 용케 견뎌낸 두 가이드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그러고 보니 우리 부부만 전혀 아무렇지도 않게 쏘롱라를 넘은 것 같았다. 하지만 지나고 보니 새벽부터 어두워지기 직전까지 이번 여정 중 가장 많이 걸은 하루였고 가장 극적인 최고 고도를 넘어온 하루였지만 의외로 기억에 남는 풍경은 많지 않았다. 나름 힘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날은 네팔 여정중 가장 많이 걷고 가장 조금밖에 못본 하루가 된 셈이다. 


 

마낭에서 고소적응을 위해 이틀을 머문뒤 다시 묵디나트 Ranipauwa에서 이틀을 머물렀다. 이번에는 고소적응이 아니라 그냥 쉬기 위해서 이틀을 머물기로 했지만 Ranipauwa도 그냥 쉬기에는 가볼 곳이 너무 많았고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이틀도 부족할 것 같았다. 하지만 많은 것을 보기보단 차라리 더 많은 휴식을 위해 단촐한 일정을 잡았다.

 

 

먼저 전날 지나쳤던 묵디나트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원래의 마을 이름보다는 그냥 묵디나트로 불리는 라니포와와 붙어있는 듯 가깝게 느꼈는데 그래도 막상 걸어보니 30여분이 걸렸다. 겨울 사원은 한산했고 엄숙했다. 몇몇 관광객이 말을 타고 사원앞 공터에서 소란을 떨긴 했지만 계절상 많지 않은 순레객이 단정한 몸가짐으로 사찰을 돌고 108갈래의 성수로 몸을 씻어 죄를 씻고 다시 태어나는 의식을 치루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은 늘 죄업을 쌓고 있고 자신의 삶이 부정한 것에 물들어 있다고 생각하는가 보다. 약육강식의 세계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싸워야 하는 삶이고, 거기다가 어리석기까지 하다보니 늘 후회로 점철된 것이 인생일 것이다. 그래서 종교가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묵니나트를 흐르는 108줄기의 물로  몸을 씻고 사원 뒷마당 언덕에 입던 속옷마저 벗어 던지고 나면 저분들은 깨끗한 몸과 마음으로 다시 자신의 현실 속으로 돌아갈 것이다. 복잡한 삶의 방정식에 비해 너무나 단순한 답에 불과하지만 그 소박한 믿음을 통해서마나 삶에 생기를 불어넣을 수 있다면 뭘 더 바라겠는가.

묵니나트를 나와 Ranipauwa주변의 작은 사원과 언덕위에 새로 조성된 비슈누상까지 둘러보는 것으로 하루의 일정을 마쳤다. 오랜만에 샤워와 빨래를 하고 성대한 저녁상을 받은 자리에서 옆테이블의 한국에서 일하신다는 네팔 노동자 가족을 만났다. 오랜만에 귀국해서 가족들과함께 묵니나트에 참배 여행을 왔다고 했다. 한국에서 일하고 계시다는 것 만으로도 괜히 반가웠다.  

 

술기운에 일찍 잠이 들었다가 불편한 꿈에 쫒겨 새벽 3시에 잠을 깼다. 30대 초반부터 따라다니던  꿈은 늘 나를 세상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불안한 상황 속으로 몰아 넣는다.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하고, 스스로 누구인지 조차 확신하지 못하는 나는 늘 이십대와 삼십대의 경계에 서 있었다. 꿈을 깨고 나서 나는 스스로 물었다. 결국 어떤 것도 선택하지 못하고 세월의 힘에 밀려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닐까. 내가 하고자 하는 것, 하고 싶은 것을 마주하지 못하고 회피했다는 자책감이 나를 엄습했다.

 

 

나는 지금 나의 사회활동이 있고, 농사가 있고, 내 인생을 스스로 즐길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다는 생각으로도 내 자신을 위무할 수 없었다. 나는 한번도 뜨거워본 적이 없었고, 그 어디에도 제대로 한번 미쳐보지 못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구원의 땅 묵다나트에서도 나는 평화를 얻지 못했다. 바람에 휘날리는 타르초 소리를 들으며 다시 잠을 청했다. 내 귀에 울리는 타르초 소리는 바람이 불경을 읽는 소리일까 아니면 내 마음에 이는 번뇌와 갈등의 아우성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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