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2017년 1월13일 포카라를 떠나 카트만두에 도착, 14일 타멜과 박타푸르를 주유하다 15일 일행들은 모두 한국으로 출국하고 우리 부부만 덩그러니 남아 새로운 여행을 시작하다.

네팔 최고급 버스라는 자가담바를 타고 포카라 카투만두간 트리뷰반 하이웨이를 하루종일 달렸다. 예상 시간 7시간이라고 하지만 예상은 그냥 예상일 뿐이었다. 버스가 겨우 카트만두로 들어서는 마지막 고갯길을 넘어설 무렵 출발한지 9시간이 다되어 가고 있었다. 긴 시간이지만 버스는 아늑했고 길은 편안했다. 일반 마이크로버스 같은 난폭운전도 없었고 스튜어디스의 서비스도 지루함을 줄이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푹신한 좌석에 깊게 앉아 따사로운 햇살을 받으며 지난밤 꾸었던 지독한 꿈을 회상했다.

늘 반복되는 꿈이지만 세월이 가도 공포는 줄지 않았다. 나의 악몽은 늘 30살 전후에 멈춰. 대학원생의 신분이지만 학문을 계속할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다른 삶의 전망도 없고, 결혼은 하고 아이까지 있는 상황에서 먹고살 방도도 없는데 목을 죄는 수업의 하중은 날로 더해가는그때로 나는 다시 돌아간다.  꿈 속에서는 늘 나는 나를 확신하지 못한다. 과외를 할려고하지만 내가 가르칠수 있을까 영어는 원래 못하고 수학은 다 잊어버렸는데 어떻게하지 가슴졸인다 이어진 꿈에서 리포터를 제출해야하는데, 졸업논문을 작성해야하는데, 공부를 해야하는데 마냥 식은 땀을 흘리며 쫒기게 된다. 그리고 장면이 바뀌어 과사무실엘 갔는데 갑자기 내가 학생인지 확신이 들지 않고 졸업식장을 갔는데 내가 졸업생이 맞는지 학점은 다 땄는지 확신이 들지 않아 당황하며 잠을 깼다. 늘 반복된 꿈이지만 사랑곳까지 와서 같은 꿈을 꾸고 식은땀을 흘리며 선잠을 깨고나니 기분이 착잡했다. 힘들었던 그 시기를 지나온지 25년이 넘었는데 나의 무의식은 아직 그 시절에 사로 잡혀 있는걸까 알 수 없었다.

버스가 카트만두로 들어서는 검문소를 지나자 시커면 흙먼지가 거리를 휩쓸고 버스를 덮쳤다. 창틈으로 스민 먼지에 이내 목은 칼칼해지고 뿌연 흙먼지가 온몸에 달라붙었다. 도로는 온통 공사 중이었고, 비가 내린 기억조차 없는 건기다 보니 한순간 앞이 아무 것도 보이지 않을 만치 두터운 먼지가 거리를 덮고 있는데다 심각한 교통체증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카트만두에 들어선지 한시간이 훨씬 넘어 종점인 안나푸르나 호텔 마당에 도착했다. 카트만두 뷰띠끄호텔에 메일로 픽업을 부탁해놓은 택시와 룸보이 빔센이 우리를 맞았다. 교통체증으로 정확히 예정시간 3시간을 넘겨 우리가 도착했는데 기사는 그 3시간 동안 우리를 기다렸다고 했다. 불평이라기보다는 아무렇지도 않은 사실을 단지 알리는 표정이 더 당혹스러웠다. 혹시 우리만 손님으로 받아도 오후 벌이로 충분하다고 받아들이는 건지 묻고 싶었지만 감히 묻지 못했다. 어떤 경우도쫒기지 않는 것 같은 시간에 여유롭고 관대한 네팔인의 품성이 부러웠다.  모처럼 숙소 인근의 마은틴스테이크하우스에서 저녁을 먹고 아까운 저녁시간을 잠으로 채웠다.

일행의 출국을 앞두고 온전히 남은 카트만두의 마지막 하루를 시작하면서 정확히 어떻게 보낼 것인지 계획하지 못했다. 호텔을 나와 타멜 거리거리를 걷고 쇼핑도 하고 그리고도 시간이 남아 논의 끝에 박타푸르를 향했다. 일행들은 이미 여행 초기에 파수파티나트와 보드낫을 다녀왔기 때문에 남은 반나절을 값지게 보내기에 박타푸르만한 곳이 없었다. 라트나 버스파크에서 버스를 타고 30분이 채 지나지 않아 박타푸르에 도착했다. 박타푸르는 지난 2015년 4월 25일 대지진으로 엄청난 타격을 받았다는데 그 상처가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일부 건물은 흔적없이 무너져 내렸고, 골목몰목의 건물들 조차 긴 막대와 대나무로 아슬아슬하게 받쳐져있는 경우가 많았다. 불안해서 어떻게 저기에 살까 걱정되었지만 마땅한 대안이 없는 상황에서 주민들은 위험을 감내할 수 밖에 없는 처지같았다.

박타푸르는 카트만두와 파탄과 더불어 카트만두벨리의 3대왕국의 하나로 17세기 후반 조성된 왕국이라고했다. 순례자의 도시를 의미하며 BHADGAON이라고도 불리는 박타푸르는 다른 왕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개발이 덜되어 온전히 중세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듀바르 광장을 지나 지명도 모르고 어디로 이어지는 지도 모르는 골목길을 헤메기 시작했다. 도자기가마터도 지나고 여러가지 야채를 파는 노점상들이 늘어서 있는 골목도 지나 눈에 익은 Nyatapola 탑에 이르렀다. 그 자체가 하나의 사원이고 그앞쪽 마당에 같은 이름의 카페에서 5년전 차를 마시던 기억이 새로웠다.

광장과 사원으로 어우러진 구역을 서쪽으로 나와 인공호수 근처에 이르자 많은 인파들의 북적되고 음악소리가 들려왔다. 소리와 풍경을 쫒아 학교 운동장 같은 곳을 드러서니 수십명의 아이들이 가사를 입고 무슨 예식을 하고 있었다. 어쩌면 저 가사를 입은 아이들이 승려가 되는 예식을 올리는 그런 자리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행사는 그리 엄숙해 보이지 않았고 조금은 분주하고 소란스러웠다. 10여명으로 구성된 팀들이 나와 노래를 부르고 의상이 달라 꼭 부족을 달리하는 것같이 보이는 다른 팀이 이어서 노래를 불렀다. 한쪽에 늘어놓은 게시판 같은 것에는 기부금으로 보이는 목록을 적어놓기도 했고 마당 한켠에는 손수건 모양의 여러색갈의 천을 가지런히 늘어놓고 참가자들끼리 음식을 나누고 있었다. 영문을 몰라 휘둥그래한 눈으로 인파들 사이를 헤메다 카트만두로 돌아가기 위해 버스파크를 찾았다. 박타푸르를 떠나려는 우리 눈앞에 갑자기 전통밴드가 지나가고 신상을 앞세운 행진이 이어졌다. 타악기 중심의 거친주는 애조와 더불어 신령한 서정을 선물했다.  가락과 풍광에 매혹되어 행렬의 끝이 사라질 때까지 넋을놓았다.

 

 

 

카트만두로 돌아오니 라트나 버스파크에서 타멜로 이어지는 거리의 공터에는 수천명의 궁중이 모여 있고 길은 인파로 넘쳐났다. 무슨 정치 집회인지 축제인지를 끝내 물어보지도 못한 채 우리는 군중들의 파도에 휩쓸려 가까스레 타멜로 돌아왔다. 그런데 돌아오는 길에 카트만두 광장 인근에서 와이프를 잊어버렸다. 입장료를 10불이나 내야되는 구역인데 와이프는 현지주민같은 자연스런 걸음으로 무사통과를 해 버렸고 우리 일행은 쫒아들어가기 위해서는 입장료를 내야하는 상황이 되어 그냥 연락을 시도해서 다른 곳에서 만나는게 낮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일행들이 선물을 사러 돌아다니는 사이 나는 와이파이가 되는 까페에 들어가 와이프랑 연결을 시도했다.  연결은 되다가 말다가 불완전했지만 겨우겨우 최소한의 의사소통은 될 수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일행들은 먼저 네와르 음식 전문점이면서 문화공연도 하는 유명하다는 Nepali Chulo로 향했다. 일행들에겐 오늘이 네팔에서의 마지막 밤이다 보니 특별한 이벤트가 필요했다. Nepali Chulo는 여러군데 묻고 정보를 얻어 가장 고급스런 네팔전통식당으로 알고 선택했다. 먼저 도착한 일행들의 가슴을 졸인 끝에 와이프는 릭샤를 타고 도착했고 공연과 식사를 진행했다. 하지만 네팔물가를 고려할 때 엄청나게 비싼 식사임에도 불구하고 공연은 평범했고, 음식은 기대 이하였다. 나름대로 고급스런 식당건물이 음식값을 부풀려놓은 것으로 밖에 이해되지 않았지만 네팔에서의 마지막 만찬은 조금은 억울하게 끝이 났다.

 

 

15일 친구들은 트리뷰반 공항을 통해 출국하고 우리부부는 왠지 모를 허기를 느꼈다. 당장 내일부터 우리 부부 단독의 여정을 이어갈 예정이라 조금은 홀가분하고 들떠야할 것 같아지만 기분은 한없이 가라앉았다. 기분전환을 위해 호텔을 나섰고 네팔민속박물관을 찾아 나라얀히티왕궁앞의 더바마그 거리를 걸었다. 지도에는 나와있는 민속박물관은  찾지 못하고 인근에서 옥류관이라는 북한식당을 우연히 맞딱뜨렸다. 반가운 마음에 식당을 들어섰는데 우리를 맞는 여성 종업원의 눈길은 곱지 않았다. 주관적인 느낌일까 의아했지만 최대한 편하게 마음을 먹고 음식을 주문했다. 음식에 대해서는 인상적이지 않았지만 식당의 분위기는 오랫동안 뇌리에 남을 것 같았다. 왠지 모를 서먹함과 낯설음이 현지 네팔리 식당보다 더한 느낌이 들었다. 찾지 못한 민속박물관의 위치를 물어보니 네팔산지가 3년이 된다는 종업원은 알지 못한다고 답변했다. 그리고 무엇인가 물어볼까봐 미리 경계하는 듯한 눈빛이 가슴아팠다. 정치 체제의 차이가 같은 한족사이에서도 이리 정서적 벽을 세울 수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지난 보름을 같이 했던 일행들이 떠난 타멜거리를 걸으며 저녁을 맞았다.  5명의 일행이 떠나간 타멜은 갑자기 텅 비어보였다. 나에게는 네팔 여정을 같이 하기 전의 친구는 네팔 여행을 같이한 뒤의 친구와 같은 사람일 수 없었다.  나는 그들과 평생 네팔의 추억을 나누고 의지하며 살아갈 사람으로 새로운 인연을 시작하게 된지도 몰랐다. 그래서 기뻐야했고, 마음 따뜻해야했다. 그런데 쓸쓸함이 밀려오고 걸음은 허전해졌다. 조금은 고급스런 저녁으로 스스로를 위무하고 일찍 들어온 호텔에서 남은 한달 반의 여정을 계획하며 얉은 잠을 청했다.

 

반응형
반응형
2017년 1월 11일 사랑곳에서 두명의 남자는 짚차를 타고 나머지는 패러글라이드를 타고 일주일만에 포카라로 돌아왔다. 도착한 첫날 오후 재래시장과 가이드 라마가 다녔던 트리뷰반대학 포카라캠퍼스를 둘러보고, 12일 까훈마을을 찾아 기부행사를 하고 데비폭포, 마하데브동굴, 그리고 타쉬링 티벳탄 난민촌을 방문하고, 13일 카트만두로 복귀했다. 

사랑곳의 아침은 황홀했다. 롯지옆 계단을 따라 어둠을 가르는 움직임이 소란해지자 우리도 마음이 급해졌다. 가이드 라마의 재촉에 세수도 하지 않은 얼굴로 너나할 것없이 방을 나섰다. 단체 여행을 온 학생들 무리와 관광객들이 섞인 행열을 따라 500여m를 올라가자 Sarankot View Tower가 나왔다. 도착하자마자 어둠속에서 두런두런 들리는 목소리가 탄성으로 바뀌고 멀리 동녘이 밝아왔다. 한평생을 살면서 한번도 보지 못한 일출을 네팔에 온지 열흘만에 4번째  마주했다. 푼힐에서 맞은 첫 일출과는 달리 여전한 울릉거림 한켠에 아쉬움이 일었다. 레이크사이드에선들 마차푸차례가 보이질 않을리 없을뿐아니라 아직 한달반의 네팔여정이 남아있음에도 불구하고 왠지 사랑곳에서 마주 보는 마차푸차례를 향해서 작별인사라도 올려야할 것 같았다.

이날은 세계3대 패러글라이딩 명소라는 사랑곳을 찾은 김에 패러글라이드를 타기로 되어있었다. 라마의 제안을 하늘을 마음껏 날아보고 싶었다는 김셈이 받았기때문이다. 6명의 일행중 나는 송선생과 함께 패러글라이드를 포기했다. 사실 고소공포를 이길 만치 용기가 나지 않았다. 아침을 먹고 준비된 차에 오르니 금새 Sarangkot Paragliding Take off Point에 도착했다. 너무 이른 시간이기도했고, 바람의 방향이 바뀌는 시간도 아니어서 인지 아직은 한산했다. 주변을 둘러보고 멀리 포카라 전경을 바라보며 한참을 시간을 보낸뒤 파일럿이 도착하고 우리팀은 활공을 준비했다. 하늘을 날면서 페와호수와 포카라를, 그리고 멀리 안나푸르나 산군을 내려다보는 경험이 얼마나짜릿할지하는 기대에 활동을포기한 나조차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내 준비가끝나고 첫주자로 와이프가 날아올랐다. 잠시 달리다 땅에서 발이 떨어진뒤 계곡으로 처박히는듯 위태롭게 가라앉다가 갑자기 상승기류를 만난듯 하늘을 치고 올라갔다.  하늘을 빙글빙글 돌던 글라이드는 까마득한 높이로 올라가 하나의 점이 되었고, 이내 우리 일행과 다른 체험객까지 하나둘 활공을 시작하니 하늘은 새떼들이 몰려나는듯 멋진 장관이 연출되었다.

일행모두가 활공을 하고 송선생과 나는 라마와 함께 찦을 타고 포카라로 향했다. 호텔 Karuna에 도착하고 얼마되지 않아 패러글라이드로 포카라에 도착한 일행들이 무사히 착지를 하고 호텔로 들어섰다. 모두들 들떤 기분에 간단히 짐을 풀고 포카라의 여행자들의 거리인 레이크사이드로 몰려나갔다. 산에 들어간지 일주일 남짓 밖에 되지 않았지만 모두들 다시만난 도시가 반가웠다. 오랜만에 고급 레스토랑에서 생선요리를 먹고 세탁소에 빨래를 맡기고 라마의 사무실을 방문했다. 그리고 레이크사이드의 자유를 만끽하며 활보하고 라마의 안내로 재래시장을 거쳐 트리뷰반대학 포카라 캠퍼스를 둘러보고, 다시 포카라의 옛거리를 거쳐 레이크 사이드로 돌아왔다. 저녁에는 한국식당에서 지난 여정을 같이한 가이드와 포터에게 한식을 대접하고 우리의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

다음날 아침 일찍 우리는 라마와 함께 포카라 시내에서 그리 멀지 않은 Kahun마을로 향했다. 조그마한 기부행사가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2012년 첫 네팔여행 때 마주쳤던 길거리의 아이들과 트레킹 코스에 만난 가난한 아이들이 늘 눈에 밟혔고 여행내내 마음을 불편하게도 했다. 조금이라도 자책을 덜고자 이번 여행에서는 작은 기부를 하기로 했다. 여행을 같이 하는 동행 들이 십시일반하고 친구들이 여행경비에 보태라며 전해준 금액까지 합쳐 많지 않은 돈이지만 에이전시에 기부 방법을 물었고 작은 학교에 학용품을 기부하기로 약속했었다. '행사'를 원치 않았지만 가이드 라마는 자신이 속한 로타리 클럽을 통해 대대적인행사로 기획을해놓은상태였다. 참 곤혹스럽고 부담스런 자리지만 마지못해 참여를 결정했다.

 

시내를 벗어나 꼬불꼬불한 언덕길을 한참을 빙빙돌라 도착한  Kahun Community Primary School은 전교생 61명에 수명의 교사, 그리고 작은 규모의  초라한 건물로 이루어져 있었다. 낡은 건물은 여기저기 보수가 필요했고, 가구며 기자재는 초라하기 이를데 없었다. 고작 문구류와 책가방 몇십개 가지고 와서 도움을 준다는 것이 낯부끄러운 일이지만 로타리클럽과 학교측에서는 너무 성대한 준비로 우리를 맞았다. 방학중임에도 불구하고 전교생과 학부모가 등교를 하고 지역 유지라는 분들이 행사를 이끌었다. 라마의 통역에 힘입어 한국어로 인사말을 전하고 기념 사진을 찍었지만 끝내 부끄러운 마음은 가쉬지 않았다. 기부를 통한 기쁨보다는 많이 돕지못한 아쉬움이 더 컸다. 그래서 였을까, 나는 덜컥 한가지 약속을 해 버렸다. 어린 여학생 한명이 얼굴에 여러갈래로 찟어져 꿔맨 흉터가 남아있었고 사연을 들어보니 어릴 때 호랑이에게 물린 상처라고 했다. 얼떨결에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이 아이를 한국에 초대해 상처를 치료할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보겠다고 말해버렸다.

기부행사를 마치고 레이크사이드로 돌아온 우리는 촘롱에서 상행길을 택해 혼자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를 다녀온 A선생을 맞이했다. 서로에 대한 실망과 서운함이 남았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은채 우리는 서로를 격려하고 포옹하며 화해했다. 지독한 감기에 몸살까지 걸려 힘겨워하는 A선생을 호텔에 남겨두고 나머지 일행은 모두 오후 내내 데비폭포, 마하데브 동굴, 타쉬링 티벳탄 난민촌 등을 버스와 도보로 돌아다니며 포카라에서 보내는 마지막 하루를 즐겼다. 데비폭포까지 간선길을 걸을 때 나는 문득 우리가 포카라의 이방인이 아니라 어쩌면 오래전부터 살아왔고 포카라의 골목 골목에 추억을 간직하고 있는 주민이 되어버린 듯한 느낌을 받았다. 아마도 길과 집, 친절하고 익숙한 표정을 가진 사람과 놓아 먹이는 순한 강아지들, 그리고 거리에 날리는 쓰레기들까지 이 모든 것이 우리가 보냈던 지난 시절의 완벽한 기억을 현실에 재생해 놓은 듯한 착각을 주기에 충분했기 때문일 것이다. 늦은 오후 페와호수로 돌아와 부메랑 레스토랑에서 벤치에 누워 얇은 오수를 즐기며 차를 마셨다. 인생에 다시 없을 호사를 누리며 포카라에서 보내는 남은 시간을 아쉬워했다.  

https://www.rotaractnepal.org/project/detail?id=12048

반응형
반응형
2017년 1월9일 란드룩을 출발하여  담푸스에서 걸음을 멈추고, 1월10일 안나푸르나를 벗어나 멀리 포카라가 내려다보이는 사랑곳에서 짐을 풀었다.

란드룩에서 보낸 반나절은 참 값졌다. 걸음을 시작한뒤 첫 휴식이었고 전체 여정의 절반이 지나는 시점에서 한 호흡을 쉬며 남은 여정을 준비하는 꼭 필요한 일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예정되었던 일행과의 작별에 이어 작은 분란뒤에 예정에 없던 작별마저 있은 뒤라 분위기 쇄신차원에서라도 뭔가 마디가 필요하기도 했다. 지누단다에서 란드룩까지 이르는 길은 모디콜라 계곡을 따라 이어졌다. 뉴브릿지마을을 만나 모디콜라를 건너고 다시 계곡을 따라 걸으며 서서히 오르막을 올라 강건너 간드룩이  마주보이는 높이에 이르러 자리잡은 마을이었다. 같은 고도의 마을이지만 상행길에 만난 간드룩은 산마을이자 트레커들을 위한 마을같은 느낌이었다면 하행길에 만난 란드룩은 그냥 산록 농촌마을로 다가왔다. 안나푸르나 산등성이에 자리잡은 농촌마을에서 하루를 쉬고 본격적으로 하행길로 접어드는날 우리는뒤돌아 안나푸르나를 바라다보고 등을 돌려 안나푸르나를 배경으로 기념 사진을찍었다.

란드룩 이후의 길은 편안했다. 완만했지만 그래도 내리막길을 따라 안나푸르나를 등지고 걷고 또 걸었다. 하산한다기 보다는 수평의 길을 걷는 느낌은 담푸스까지 이어졌다. 상승하는 삶은 이미 지나갔고 그리고 하강하기엔 뭔가 억울하지만 그래도 이제 수평적인 삶마저 끝나간다는 사실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되는 우리는 우리 삶을 닮은 길을 따라 걸었다. 우리가 걷는 한걸음 한걸음마다 안나푸르나는 멀어져가고 그만치 고도가 줄었다. 고도가 즐어드는 만치 초록빛은 늘어가고 우리는 네팔리 농부들이 가꾸어 놓은 이쁜 밭두렁길은 걸었다. 늘 논밭은 아름답고 그 아름다운 논밭을 가꾸어 놓은 농부의 삶은 고달프다. 농부로 사는 내가 한국에서 그렇듯 네팔의 농부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세상의 모든 농부는 수도자이고 농사는 수행인지도 모른다. 금전적 보상이 충분이 주어지지 않지만 피땀을 흘려가며 뭍생명의 먹을 거리를 만들고 세상을 아름답게 가꾸니 세상의 모든 농부가 성자가 아니면 누가 성자일 수 있겠는가. 나는 자격있는 트레커로 네팔리 농부가 가꾸어 놓은 아름다운 밭두렁길을 기쁜 마음으로 걸었다.   

두달일정의 이번 여정에서 친구들과의 첫 트래킹이 끝나가고 있었다. 이제 이틀만 지나면 우리는 안나푸르나품을 떠나 포카라로 되돌아간다. 영원히 잊지못할 아름다운 추억이 될 일행과의 여정이 하루하루 줄어들자 나의 뇌리에는 지금 이 순간을 지속시킬 묘안이 떠올랐다. 가이드 라마를 통해 얻어들은 정보지만 네팔 산골에 조그마한 학교 하나를 짓는데 3천만원이면 되고, 교사 월급이 1인당 10만원도 되지 않는다고 했다. 만약 도반들이 작당하고, 뜻을 같이하는 분들을 모아 힘을 합친다면 네팔에 작고 초라할 망정 학교 하나 정도를 운영못 할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학교를 중심으로 친구들이 인연을 엮고 그 학교에서 남은 삶을 살아도 되겠다는 막연한 기대도 생겨났다. 한 평생을 살면서 일정기간 자신의 삶의 한부분이라도 누군가를 위해서 헌신할 수 있다면 더할나위없는 삶이 될수도 있는 것 아닌가? 그것도 좋은 인연들과 작당하는 재미까지 있으니 더더욱 기쁜 일일 것이다. 현실화하기에는 더 많이 고려해야할 것들이 있겠지만 일단은 내 마음속에 수많은 꿈들중의 하나로 소중히 모셔두기로 했다.

담푸스는 아늑했다. 골목길 가득 친구들의 고함소리가 번지고, 옆집 누렁이 짓는 소리에 엄마가 아이들을 부르는 소리까지 들릴것 같이 유년의 한때를 환기시키기에 충분히 아름답고 아늑하고 평화로운 마을이었다. 저녁 무렵 수학여행을 온듯한 수십명의 학생들이 들이닥치지 않았다면 편하고 조용한 잠자리가 되었을터인데 밤새 학생들의 조잘거림과 동네 가득 울리는 개짓는 소리에 잠을 설쳤다. 밤의 소란은 아침 해와 함께 사라졌지만 어쩌면 산을 나와 도시가 가까워지는 마을에서 느낄 수 있는 삶의 생기였느지도 모르겠다.

잠을설친 새벽일찍 롯지를 나와 가까운 거리에 있던 전망대를 올랐다. 아직 공사가 덜된 전망대를 오르자 지나온 안나푸르나 산군이 한눈에 들어왔다. 담푸스전망대에서 바라다 보는 안나푸르나는 푼힐에서 보던 풍경과는 또다른 멋을 보였다. 푼힐에서는 비현실적일 정도로 가까이 느껴졌던 산과 달리  산에서는 한발짝 멀어졌지만 마을 넘어로 보이는 산은 보다 현실적이었다. 아쉬움을 달래고 돌아온 롯지는 정적이 흘렀다.  밤새 떠들던  학생들은 잠을 자는지 벌써 길을 떠났는지  알 수없었다. 우리는 아침 식사를 마치고 롯지를 나왔다. 담푸스를 벗어나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잠시 오르막길이더니 금새 내리막길로 접어들었고 한시간여만에 포카라-바글룽 하이웨이를 만났다. 

걸으러 왔다는 사람이 차 못탄지 몇일이나 되었다고 차를 만나니 너무 반가웠다. 대기하고있던 마이크로버스에 오르자 차는 바글룽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차는 더 오래 타고 싶은 내 마음을 아랑곳없이 이내 사랑곳 입구에 도착했고, 우리를 내려주고는 제 갈 길을 떠나갔다. 노점에서 밀감과 포도를 사들고 라마가 가리키는 길을 접어드니 우리를 맞는 길은 한창 공사중인 찻길로 흙먼지가 앞을 가렸다. 차라도 한대 지나칠 때면 숨을 쉬기 조차 힘들만치 먼지가 날리는 도로를 따라 사랑곳으로 향했다. 포카라를 떠나 트레킹을 시작한 뒤 최악의 길을 만나 힘든 하루를 보냈다. 그래도 도시와 산의 중간쯤에 있는 네팔리의 삶속을 걷는 경험은 즐거웠다.

 

Lake View Lodge Sarangkot에 짐을 풀고 멀리 내려다 보이는 페와호수와 포카라의 풍경을 만끽하며 네팔여정의 첫 트레킹 일정을 마무리했다. 이제 본격적인 트레킹을 시작할 우리 부부와는 달리 곧 여정을 접고 귀국해야하는 친구들은 아쉬움이 많은 것 같았다. 산을 통해 느낀 몸과 다스린 마음은 비로소 도시를 만나고 일상으로 돌아왔을 때 그 진가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각자가 이번 트레킹을 어떻게 느끼고 정리해서 기억의 한켠을 채울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이번 트레킹을 통해 모두의 얼굴은 더 밝아지고 목소리의 생기가 더 높아졌다. 옥상에 빨래를 걸어 바람을 맞히니 우리는 롱다가 된 빨래와함께 포카라와 페와호수, 그리고 사랑곳의 전망좋은 롯지를 더욱 풍요롭게하는 하나의 풍경이 되었다. 어둠이 롯지를 삼키니 멀리 포카라의 야경이 선명히 살아났다. 이제 우리는 안나푸르나의 대자연을 떠나 도시가 가까워졌음을  느껴야했다. 아랫배가 살짝 아파왔다.

반응형
반응형

지난 밤의 논쟁과 소동으로 불편했던 잠을 깨고 그나마 가라앉은 마음으로 아침을 나누었다. 다라파니의  Superview lodge를 나서자마자 우선생 부부는 자신의 길로 떠났다. 간드룩 방향으로 산을 내려가 따로 룸비니 여행을 갈 예정이었다. 가이드 라마는 같이했던 한명의 포터를 딸려서 포카라까지 안내하도록 조치했다. 여정을 먼저 끝내기가 아쉬운 포터를 같은 마음으로 보내고나니 오늘은 여정 일주일만에 출발시에는 예정에 없던 작별마저 예고되어 있었다. Tadapani를 출발해 추일레를 거쳐 또 한번의 이별이 기다리고 있는 촘롱입구에 도착했다. 촘롱을 통해 시누와를 거쳐 안나푸르나 베니스캠프로 올라가는 길과 오른쪽 내리막으로 길을 잡아 모디콜라를 향해 내려가는 길이 갈라지는 지점의 롯지에서 차를 나누었다. 그리고 갑자기 흩뿌리는 진눈깨비를 맞으며 송선생님과의 어설픈 이별식을 준비했다. 같이 했던 포터를 한분 동행하게 하고 급히 마을에서 가이드를 한분 더 구했다. 츄리닝 홑바지 차림의 가이드와 준비가 부족한 포터에게 우리가 가진 여분의 옷가지와 장갑 등을 나누었다.  한명의 트레커와 두명의 어시스트는 산으로 올라가고 6명의 트레커와 4명의 어시스트는 안나푸르나 능선에 뿌리내리고 사는 마을을 찾아 길을 나섰다.   

마음에 남은 앙금이 없진 않겠지만 우리는 뜨겁게 포옹하고 서로의 안녕을 기원했다. 촘롱에서 지누단다까지의 거리는 멀지 않았고 우리는 이내 마을에 도착했다. 처음 들어간 숙소가 마음에 안든다며 라마는 우리를 끌고 다른 롯지를 찾아 갔다. 지누단다 초입의 Ever Green Hotel 에 짐을 풀고 우리는 가벼운 차림으로 뜨거운 물을 찾아 길을 나섰다. 모디콜라(모디강)가에 형성된 조그만 자연온천에서 묵은 때를 씻고 모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저녁식사와 함께 맥주파티까지 곁들였다. 작은 사안이지만 생각이 갈리고 그것이 다시 감정선을 건드리는 데 까지 나아갈때 연배차이까지 의사소통을 방해한다면 어쩔 수 없이 서로의 판단을 존중하는 수밖에 없다. 우린 그렇게 일행이 줄어 이제 우리의 여정을 돕는 가이드와 포터까지 합쳐 10명이라는 단촐한 그룹이 되어 있었다.

다음날을 뉴브릿지를 통해 란드룩까지 걸었다. 출발하면서 일찍 걸음을 멈추고 그동안 밀린 빨래도 하고 그냥 편안히 쉬자고 마음 먹었다. 막연히 계획했던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는 한걸음한걸음 멀어져가고 우리는 상승이 아니라 평탄한 길들을 걸어 마을 속으로 들어갔다. 모디콜라 계곡 넘어 간드룩과 마주한 란드룩이란 마을의New Peaceful Guest House에서 일찍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남은 하루의 시간을  알뜰하게 즐겼다. 빨래를 널고 햇살을 받으며 졸다가, 지루해지면 일어나 마을을 걸었다. 마을을 스쳐 지나가는 걸음이 아니라 마을 속을 샅샅히 걷는 훨씬 더 느린 걸음이었다. 네팔리의 일터인 논두렁을 걷고, 마을의 중심인 학교를 찾아 구경도 하고, 그리고 언덕위에 올라 멀리 지는 석양 빛에 마음까지 물들었다.

이선생은 메모 수첩을 잃어버려 마을위 언덕을 두어번 다시 올라야했지만 우리는 모두 석양빛에 물들어 지나온 세월을 회상하고, 지금 이 순간을 만끽하며, 앞으로 살아갈 날들을 꿈꾸었다. 나는 흐려진 유년의 기억들, 잊혀저가는 청춘의 꿈을 다시 움켜지기위한 헛된 노력들을 차분히 내려놓고 지나온 시간보다, 그리고 다가올 시간보다 지금 이 순간에 더 충실한 삶을 다짐하며 언덕을 내려왔다. 우리는 걷기 위해 왔지만 이날 하루는 적게 걸어 더 행복했다.

 

 

 

 

반응형
반응형

1월5일 아침 울레리를 출발하여 난계탄티를 거쳐 고라파니 Hilltop 호텔에서 여정을 풀고, 1월6일 새벽일찍 푼힐을 오르고 다시 고라파니로 내려와 반탄티를 거쳐 다라파니에서 묵었다.

 

이틀의 여정은 극적이지 않았지만 나름 걸음을 통해 큰 산과 만나는 잔잔한 감동이 이어졌다. 첫날은 고도 2000m의 울레리에서 3000m의 고라파니까지 무려 1000m의 고도를 높여야 했고, 다음 날은 어두운 새벽에 3200m고지의 푼힐을 올라 서광에 살아나는 다울라기리와 안나푸르나 산군을 마주 했다. 서울을 출발하는 날 광화문 촛불집회에서 챙겨온 "박근혜 탄핵" 손피킷을 들고 안나푸르나 산군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고 시민들과 함께하지 못한 미안함을 대신했다. 전망대를 오르내리고 뜀박질을 하며 기념사진을 찍다 처음으로 불편한 호흡을 통해 고도를 느낄 수 있었다.

 

 

우연히 같은 코스를 걷는 한국에서 온 유명 여행사의 단체 여행객과 조우했다. 한국인이 유달리 많아 특별히 서로를 주목할 아무런 이유도 없었다. 그냥 동행으로 서로 '나마스테'를 주고 받으며 앞서거니 뒤서거니 길을 걷다보니 한짐을 지고 나르는 여행사 고용 포터들의 뒤를 따르게 되었다. 누군가의 입에서 '너무 심하다'는 말이 터지자 마자 모두 하나같이 돈과 노동, 고용과 인권, 그리고 네팔의 경제 사정에 대한 갑론을박을 이어나갔다. 우리 가이드인 라마는 특히나 과도한 짐을 맡기는 여행사의 처사에 대해 불만이 많았고 우리 일행 모두가 동의했지만 어떻게 할것인가에 대해서는 누구도 쉬 의견을 내지못했다. 여론환기를 위한 SNS 공개이상 우리가 포터의 짐을 줄여줄 수있는 특뱔한 방법은 강구할 수가 없었다.   

 

 

푼힐을 내려와 다시 푼힐 못지않은 조망을 가진 언덕을 오르고 고도를 낮춰  밀림으로 덮힌 계곡을 지나며 고도 2600m정도의 타다파니에서 하루의 여정을 마무리했다. 이날 하루는 유달리 오르막과 내리막이 교차하는 코스였다. 푼힐 까지 200m를 올렸다가 금세 다시 내려오고 다시 한참을 오르막을 걷다가 어느새 깊은 계곡을 한없이 내려갔고 또 어느새 다시 끝날 것 같지 않은 언덕길을 올라야했다. 원래 산이란게 그렇커니 나는 무심했지만 일행들은 그렇지 않았다는 사실을 한참을 지나서야 알게 되었다.

 

 

무릎관절에 문제가 있는 친구와 역시 산행에 무리가 있는 친구의 부인은 한참을 시간이 흐른뒤에야 그날 너무 힘들었다는 고백을 했다. 하지만 산을 걸을 때는 누구도 아픈 다리와 지친 호흡에도 불구하고 그만 걷자고 말하지 못했고, 자신의 고통을 내색하지 않았다. 나는 눈치없이 혼자 신나게 걷고 또 걸었다. 오직 일행의 최고 연장자 한분만이 푼힐 이후에 지친 표정이 역력해 가이드가 배낭을 대신 들어주고 따로 보조를 맞춰 걸어주기도 했다. 이날은 특별히 힘들여서 일까 드디어 한국을 떠난뒤 일주일만에 사단이 났다.

 

 

Tadapani의 Superview lodge에서 짐을 풀고 저녁 식사를 마치자마자 이후의 일정에 대해 논의하는 자리를 가졌다. 지난 이틀동안 힘든 여정을 묵묵히 견뎌온 일행들은 내일이면두명이 룸비니를 목적지로 간드룩 쪽으로 떠나기로 예정돼있었기도 했고, 나머지 7명은 상하행이 갈라지는 총롬을 지나게 되어 전체 일정에 대해 결정을 할 필요가 있기도 했다. 떠나오기전 이번 여정의 원칙은 가장 가난한 사람에 맞춰 숙식수준을 정하고, 가능하면 대중교통으로 그보다는 도보로, 그리고 가장 약한 사람에 맞춰 걸음의 속도를 맞추기로 했다. 그리고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를 향해 걷지만 이는 목적지가 아니고 우리 여정의 목적은 안나푸르나 언덕에 기대 살아가는 네팔리의 삶속으로 들어가 같이 산과 사람을 느끼는 것으로 잡았다. 나만의 생각이 아니라 일행들은 대충 생각을 같이한다는 믿음을 갖고 길을 시작했다.

 

 

하지만 이야기를 펼쳐놓고보니 상행이냐 하행이냐에는 양자 택일의 문제에 막닥뜨리게 되었고, 의견은 갈라졌다. 많은 이야기가 오갔지만 결국 한분만 상행을 원했고 나머지는 지누단다를 거쳐 란드룩으로해서 담푸스까지 평탄한 내리막길을 쉬엄쉬엄 걷기를 원했다.  타협은 불가능했고, 다음 날이 밝으면 먼저 2명이 룸비니를 행해 떠나고, 또 한분은 촘롱을 걸쳐 상행길로 떠나고 나머지 6명은 지누단다를 거쳐 킴롱콜라를 건너 란드룩쪽으로 가기로 결정했다. 결정과정에서 언성이 높아지고 얼굴을 붉힌 우리는 끝내 마음을 풀지못하고 각자의 방으로 흩어졌다. 나는 그래도 내일이면 떠날 분들은 떠나고 새로이 시작될 여정을 꿈꾸며 지난 시간을 정리했다. 

나는 어린왕자가 되어 지구별을 밟았다. 보드라운 흙과 풀의 촉감을 느끼고, 땅의 온기와 차가운 돌의 체온을 음미하며 걷고 또걸었다. 내가 만날 내일의 우주는 또 어떤 모습일까 내딛는 걸음마다 설레임이 피어났다.

 

 

반응형
반응형

전날 예정된 호텔이 문제가 생겼다며 가이드 라마는 우리를 다른 호텔로 안내했다.  마무리가 덜 된 신축건물로 HOTEL KARUNA 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뜻을 알아보니 불교 용어로 부처와 보살이 지녀야하는 4가지 마음가짐인 사무량심의 하나인 悲를 뜻한다고한다. 자비의 비를 의미하는 호텔의 이름이 생경했지만 뭐 여기는 흰두교와 함께 불교가  삶과 버무려진 네팔아닌가.


아침 일찍 라마는 도착하고 우리는 한국식 미역국이 일품인 인근 한국인 식당에서 고산증 예방 의식의 하나로 소고기가 넉넉한 미역국을 배터지게 먹고 마이크로 버스에 올랐다. 5년전과 달라진 포카라 시내는 아직 포장이 안되어 흙먼지가 시야를 가렸지만 전에 없던 대로가 도심을 가로질러 건설중이었다. 주유소를 들러고 차는 도심을 벗어나 금새 포카라-바글링 하이웨이로 접어들었다. 하이웨이라고는 하지만 한국 시골의 낡은 2차선도로보다 나을게 없었고,  차들은 신호위반이나 교통법규 위반과는 무관하게 질주했다. 세상의 틀이 잡히고 문명화된다는 것이 주는 많은 이점과 그로 인해 잃게 되는 또다른 많은 것의 무게를 잰다면 어느것이 더 무거운지 아직 알지 못하기 때문에 나는 최소한 네팔에서 보내는 시간동안은 네팔의 모든 것이 더 소중했다. 무질서는 자유로 다가왔고, 거리를 휩쓸고 지나가는 먼지와 구석구석 쌓인 쓰레기조차 나의 시간여행을 돕는 친근한 친구로 다가왔다. 선진-후진이 아니라 단지 차이가 있을 뿐 나름의 삶은 고유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설산이 보이는 뷰포인트에서 한번 차를 세운뒤 곧바로 Phedi를 지나 트레킹 출발점인 나야풀에 도착했다. 산을 들어서기 전 설레는 마음을 달래며 입구의 가게에서 차를 한잔나누며 모두들 신발끈을 다시 메고 배낭끈을 조였다. 비시즌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적지 않은 트레커들과 마을을 가로질러 빗물고인 길을 따라 우리는 걸음을 시작했다. 얼마걷지않아 길은 마을을 벗어나고, 강을 건너자마자 갈림길이 있는 비렌탄티에 도착했다. 오른쪽으로 가면 사울리바자르를 지나 촘롱까지 다다르게 되고, 왼쪽으로 가면 힐레를 거쳐 오늘의 숙박지인 울레리가 나오니 우리는 망설임없이 왼쪽방향으로 걸음을 틀었다. 5년전 걸었던 오른쪽 길을 다시 못가보게 되어 아쉬움이 남았지만 두길을 동시에 걸을 수 없으니 어찌하랴...


 

울레리로 가는 길은 차가 다닐 수 있도록 넓게 닦아진 비포장길로 시작했다. 잊을만하면 한번씩 짚차가 지나갔고, 그때마다 먼지가 일고 우리는 바람 방향에 운을 맡길 수 밖에 없었다. 1월이지만 아직 길은 더웠고, 숨이 막히는 먼지 마저 시야를 가리니 트레킹 첫날의 걸음부터 가볍지 못했다. 확 트인 전망도 아니고, 우리를 반기는 설산도 아직 얼굴을 내밀지 않았다. 아직 네팔의 산을 오르는 느낌이 들기에는 한국산과 너무나 닮은 길을 걸었다.

 

간혹 길가에는 현지인들이 도코라는 광주리지게를 메고와 밀감을 팔고 있었다. 가격에 비해 그 신선함과 향기는 지친 트레커에겐 너무나 큰 선물이었다. 시간이 지나니 울레리까지 하루 걸음은 지친 몸에 힘을 주던 밀감의 상큼한 향기가 가장 남는다. 

힐레에 이르자 드디어 차들은 더 이상 우리의 걸음을 쫒아올 수 없게 되어 먼지로 부터 해방되었다. 차와 먼지로부터 신경을 끊으니 풍광은 더 선명해지고 안나푸르나에 기대에 살아가는 네팔리들의 삶도 더 살갑게 다가왔다. 일행은 서로의 컨디션을 살피며 같이하는 여행의 위험을 피하고 그 멋을 더하는데 배려심을 아끼지 않았다. 많은 대화를 나누지 않아도 눈을 마주칠 때마다 웃어주는 표정에 마음을 다 담고 있었다. 사실 나는 같이하는 여행보다는 단촐한 여행을 더 선호한다. 그런데 취향에 반한 이번 여행이 나의 일방적인 강권으로 성사되었다. 지상에서 맺은 인연중에 가장 소중한 사람들에게 나는 내가 사랑하는 안나푸르나의 풍경을 나누고 싶었다. 나역시 소중한 인연으로부터 주어진 강권에 못이겨 네팔과 인연을 맺고 사랑에 빠졌듯이 나의 친구들이 다 그렇게 네팔의 친구가 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안나푸르나의 추억을 공유한 그들과 같이 늙어가며 추억담을 나누고 싶었다. 그래서 이번 여행은 애기를 다루듯 조심스럽게 진행되어야했고 혹시라도 상처가 나거나 관계에 금이가는 어떤 금도를 넘어서는 행동도 피해야만했다. 물론 그런 입장이 긴장을 주거나 부담으럽게 다가오지 않았고 즐거움을 더할 것이라 굳게 믿었다.

힐레에서 점심을 먹고 길가의 돌담에 몸을 뉘었다. 햇살, 바람, 그리고 흙의 향기까지 나의 몸에 스며드는 순간 깜빡 잠이 들었는지도 모른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을 것이다. 나는 의식을 옥죄던 모든 것들이 사라진 한순간의 희열을 느꼈다. 사실 해탈의 순간은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냥 모든 것을 놓아버리는 순간이기에 어쩌면 죽음을 닮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다시 울레리까지 걸으며 '여행'에 대해 생각했다. 집을 나서면 늘 자신에 부과되던 가능한 모든 규정들로부터 자유로워 진다. 그래서 여행은 모든 것들과 작별하는 연습이기도하고 죽음과 친해지는 시간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늘 여행을 꿈꾸는 것은 그렇게 대단한 동인이 있어서라기보다는 차라리 현재의 삶이 주는 속박을 벗어나기 위한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자기 긍정이 확고한 사람은 여행이 불필요하다면 편협한 생각일까? 지금 여기에 만족한다면 왜 굳이 길을 찾아 나서겠는가. 그런데 나는 무엇에 목마른것일까...

 

모두들 지쳐갈 무렵 울레리에 도착했다. 산등성이에 아담하게 모여앉은 마을이 이뻤다. 비슷하게 도착해 잠자리를 찾는 트렉커들의 소란이 한순간에 사라지고 멀리 노을빛이 먼 옛시간을 상기시키며 사라져갔다. 이내 초저녁의 고요가 아늑하게 마을을 감쌌다. 연꽃을 의미하는 KAMALA라는 이름의 게스트하우스에 짐을 풀고 슬슬 냉기를 느끼며 모여든 다이닝 룸에서 안나푸르나의 첫 밤을 맞았다. 식사를 마치고 흥과 취기에 들떤 다른 팀의 네팔리 가이드가 춤과 노래로 다이닝룸의 열기를 더했지만 이내 시들해졌다. 흥취보다는 고요를 찾는 일행은 각자의 방으로 흩어져 아쉬운 하루를 마무리했다.

반응형
반응형

1/3

누구라도 할 것 없이 새벽 일찍부터 눈이 떴는지 호텔이 분주했다.  호텔서 제공하는 간단한 토스트로 아침을 때우고 나니 이내 부탁한 택시가 도착했다. 2박을 한 팀들은 벌써 매니저와 룸보이랑 몇 년을 알고 지낸 사람들처럼 오래 작별인사를 나누고 팁을 아끼지 않았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이 왜 그리 많을까 늘 의심하고 삶의 크기를 줄이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로만 이루어진 9명의 팀이지만 짐은 만만하지 않았다. 룸보이의 도움까지 받아가며 9개의 중대형 배낭과 또 그에 못지않은 소형 배낭 그리고 손가방까지 다 모아놓으니 한 트럭분은 되어 보였다. 두 대의 택시에 나눠 빈병 물 채우듯 빈틈없이 짐과 사람을 구겨 넣으니 그래도 숨 쉴 공간은 남았다

네팔 최고의 버스라는 포카라행 자가담바의 출발점인 타멜에서 차로 5분거리가 되지 않는 안나푸르나호텔로 향했다. 타멜 거리를 지나는 가깝지만 혼잡스럽고, 몸은 불편한 시간동안 나는 막 시작한 여정에 대한 가슴 부푼 기대보단 타멜의 거리와 얽힌 기억의 흔적을 쫒는데 여념이 없었다. 5년 전 들렀던 레스토랑이며 호텔의 위치, 그리고 마트와 서점을 더듬었다. 그를 리가 없지만 혹시라도 2천만 네팔인구중에 내가 아는 2~3 명중의 한명이 우연이 이 길을 지나가지 않을까 나의 눈은 열심히 거리를 훑었다. 지난 추억에 대한 미련인지, 나는 이 거리에 낯선 사람이 아니라는 확인을 받고 싶은 욕망인지 혼란스러웠다. 어쩌면 갈수록 흐릿해 지는 기억의 확실성을 움켜지려는 집착인 것도 같았다.

이내 도착한 안나푸르나호텔은 별천지였다혼잡하고 지저분한 카트만두의 거리와는 물리적으로 단절된 채 네팔의 가난과도 무관한 공간으로 다가왔다싱그러운 나무와 꽃들한적하고 편안한 정원 그리고 그 속을 거니는 여유로운 사람들... 이 모든 것을 누릴 권리가 나에게도 있을까 드는 의심을 애써 외면하고 싱그러운 카트만두의 정취에 마양 취했다정원을 거닐고 향기로운 아침공기를 들이쉬며 안나푸르나 여정을 같이할 길동무들과 기념 사진을 찍었다그래도 제일 젊은 L이 제안한 연출 사진이 가장 멋졌다서로 맞댄 흐린 얼굴 넘어 무언가 뜨거운 꿈을 공모하는 짜릿한 유대감이 느껴졌다.

혼잡한 카트만두 시내를 지나 버스는 이내 네팔의 산하를 달렸다네팔리의 삶이 스민 산자락 다락밭들과 차장으로 스치는 멀리 눈덮인 봉우리가 우릴 반겼다들뜬 눈으로 차창을 스치는 먼 산과 네팔리의 삶이 깃든 마을을 바라봤다. 뛰어노는 아이들과 지나가는 소마저 나를 반겨주는 듯 정겨웠다카드만두 분지를 벗어나기 위한 산자락 길은 여전했지만 포장을 새로 하고 난간을 세워 훨씬 안전해진 느낌이 들었다아무데나 버스를 멈추고 볼일을 보게 하던 5년전과 달리 그래도 휴게소다운 휴게소가 있고 길가의 쓰레기도 훨씬 줄어들었다버스에서길가에서휴게소에서 마주치는 네팔리마다 특유의 여유 있고 편안한 표정으로 여행객을 맞았다. 2015년 대지진 이후 인심이 팍팍해지고 거칠어졌다는 소문과는 달리 네팔의 표정은 5년전보다 더 밝게 다가왔다.

내 인생의 화려한 한때를 즐길 마음의 준비도 없이 포카라에 도착했다카트만두를 떠나자마자 포카라를 향해 달리는 버스 속에서 내내 이번 여행의 의미를 물었다나는 이번 여행을 통해 무엇을 얻고자 하는가 곱씹었다굳이 바란다면 이번 여행이 내 마음의 지병인 화를 다스리는 순례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버스를 내리며 다짐했다. ‘잊자쉬자놀자걷자아무것도 하지 말고 계획하지 말자.’ ‘여행의 의미를 찾고나의 삶을 생각하고 미래를 꿈꾸는 것조차 피하자.’ 그냥 먹고 걷고 쉬는 것이 이번 여행의 유일한 목적이고자 다짐하며 나는 지금껏 열심히 살아왔고 충분히 쉴 자격이 있다고 스스로를 위무했다.

버스정류장엔 우리의 가이드 라마가 차량과 직원을 대동하고 마중 나와 있었다전화와 카톡으로 연락만 주고받다가 처음 마주하고 보니 상상했던 인상보다 훨씬 강직해보였고 보스 기질의 사업가 기풍이었다서둘러 인사를 나누는 사이 우리 짐은 라마가 준비한 차로 옮겨졌고 예약했던 호텔이 문제가 있다며 막 새로 들어선 다른 호텔로 우리를 안내했다정식 개업도 안한 것 같은 새 호텔에 짐을 풀고 나자 우리는 새장에서 해방된 새들처럼 포카라 리버사이드거리로 쏟아져 나갔다안나푸르나를 걷는 모든 여행자들의 발길이 머물고 오래전 전세계 히피들이 모여들었다는 리버사이드 거리를 내 자신이 걷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 울릉거렸다. 9명의 일행은 뒷골목의 골목대장이라도 된 듯 의기양양하게 리버사이드 거리를 휩쓸며 구경도 하고 쇼핑도 하다가 해직녁이 다되어서야 페와호수가로 몰려갔다.

페와호수는 여전히 평화롭고 아름답고 물가를 거닐고 뱃놀이를 하는 사람들은 행복해 보였다그 속에 나도 한 부분이고 싶어 선뜻 흥정을 하고 두 대의 배에 나누어 올랐다배는 호수가운데 떠 있는 작은 사원이자 섬인 바라히 힌두사원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코스였다배에 오르자 모두 물 만난 고기마냥 자유를 얻었다누가 먼저 시작했는지 모르지만 우리는 주변을 잊고 노래를 시작했다잊혀진 80년대의 색 바랜 민중가요가 페와호수에 번져나갔다물살 때문인지 우리 노래의 울림 때문인지 물에 비친 안나푸르나 연봉이 흔들렸다. 

도착한 바라히사원은 임신을 원하는 사람이 참배를 하면 소원을 이룰 수 있다는 풍문이 있었다하지만 우리는일행은 더 이상 자식을 얻을 연배가 하나도 없으니 다들 무슨 소원들을 빌었는지 모르겠다안나푸르나 연봉이 비친 페와호수가 석양이 물들 때 출발했던 곳으로 돌아오는 배에서 나는 빌었다안전한 산행과 즐거운 동행을그리고 우리 딸의 행운과 건강을, 우리부부의 사랑과 건강을, 어머니의 건강과 장수를 그리고 정의로운 대한민국을소원을 빌다보니 나는 여전히 바라는 게 너무 많고 버리지 못하고 지고 가는 짐이 너무 많은 욕심쟁이라는 사실을 다시 절감했다.

페와호수와 리버사이드 거리가 어둠에 물들자 우리는 민속공연과 모닥불이 있는 부메랑식당으로 몰려갔다.  여정을 같이할 가이드 라마님도 동석해서 일정과 비용을 조율하고, 맛있는 스테이크와 맥주를 정겨운 친구들과 나누니 가는 밤이 아쉬웠다.  포카라의 밤이 깊으니 곧 만나게 될 산들이 그리워졌다. 내일 여정이 우리를 부메랑에 모래 머물지 못하게 했다. 사람을 미치게하던 봄밤의 기운을 느끼며  리버사이드 거리를 지나 숙소로 돌아왔다. 산행을 위한 짐을 다시 한번 챙기고 침대에 몸을 눞혔다.  

반응형
반응형

17/01/02

아침 햇볕이 공항라운지를 비추기 시작하고 닫혔던 가게들이 하나둘 셔터를 올리는 때가 되어 서야 밤새 찾지 못했던 청사내 호텔을 발견할 수 있었다. 지난 밤새 경찰인지 경비인지 공항근무자들에게 물어보았지만 하나같이 대답은 No! 한마디였다. 난 공안이지 안내원이 아니라는 간고한 입장표명으로만 느껴졌다. 사실 공항은 엄중한 공간이기도하지만 많지 않은 여행경험 중에 이렇게 피부로 와 닿는 삼엄한 경비는 처음이었다. 몽둥이와 방패까지 든 군인들이 청사 내를 끝없이 순찰하고 청사로 들어오는 사람들을 줄을 세우고 일정한 숫자가 되면 한꺼번에 입장을 시켰다. 이런 시스템은 공항 보안의 문제라기보다는 시민으로 하여금 국가 권력의 살아있음을 몸으로 느끼고 굴종케 하는 장치로 느껴졌다. 아마도 티벳 독립운동과 관련한 긴장 때문으로 이해되지만 티벳 사람은 좋아하지만 티벳 독립은 또 다른 문제로 느끼는 내같은 사람에게도 거부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카투만두 트리뷰반공항을 향하는 비행기에 올랐다. 동방항공에 대한 수많은 악플들과는 달리 비행기는 쾌적했고 승무원은 친절했다. 우리가 탄 비행기는 4시간여 비행 끝에 멀리 눈덮인 히말라야가 보이는 카트만두 하늘에 다달았다. 하늘은 쾌청했고 석양에 물든 서쪽 하늘의 적란운이 멋있었다. 그런데 곧 착률 할 것 같은 비행기는 공항사정으로 착륙시간을 지체해야 했다. 오전내내 안개로 밀렸던 비행기들의 이착륙으로 내가 탄 비행기는 한 시간을 넘도록 땅을 딛지 못했다. 긴장과 울렁거림으로 힘든 시간을 견뎌내자 석양이 지는 초저녁 하늘을 이고서 비행기는 활주로에 닿았다. 세계에서 제일 위험하다는 루클라공항에 착륙한 것도 아닌데 승객들은 너나할 것 없이 환호하고 박수를 쳤다. 가슴 벅찼다. 5년을 기다린 네팔행인데 너무 쉽게 도착하면 안될 일이긴 했다.

 


청사로 들어서며 5년전 기억을 되살리며 공항과 주변을 훑어보았지만 지난 기억은 흐리고 지금 있는 모든 풍경은 늘 항상 그렇게 있어온 것들처럼 친숙했다. 입국 비자비를 심사원이 아니라 은행창구에서 내는 것으로 달라진 공항을 나왔다. 5년 전과 똑같이 달려드는 삐끼들을 비집고 예약된 픽업택시를 찾았다. 배낭을 억지로 빼앗아 택시에 싣어 주던 삐끼가 팁을 요구했지만 잔돈을 미리 준비하지 못해 그냥 무시했다. 없는 살림에 100달러지폐를 팁으로 줄 수는 없었다. 무시하라는 택시기사의 싸인을 받고, 또다른 하국 여성 여행자 한사람과 같이 픽업택시에 몸을 싣었다. 꽉 막힌 카트만두 시내를 가로지르며 5년전 기억을 더듬었다. 카투만두 거리의 소란과 무질서는 여전했지만 5년전에 비해 차량은 늘어났고 사람들은 더 붐볐다. 곽막힌 도로를 따라 정체는 이어졌고 예상시간을 함참 넘겨 예약해둔 카투만두 뷰티크 호텔에 도착했다.

 


하루 먼저 여정에 오른 일행과 반가운 조우를 하고나니 나의 네팔 오는 길은 집나온 지 무려 34일이 걸린 셈이었다. 같이 늙어가고 싶은 친구들과 네팔에서의 첫 식사를 했다. 비싼 한식이나 고급레스토랑이 아니라 호텔 인근의 누추한 네팔리 식당에서 하는 식사라 더 즐거웠다. 익숙한 친우들이지만 바로 이 순간 한층 각별한 인연으로 다가왔다. 나에게 7명의 동행은 인생의 아주 중요한 순간을 나눈 친구가 된 것이다. 나에게 네팔 여행은 그저 소비하는 여행상품이나 그저 그런 일상의 한 조각이 아니라 일생일대의 대 이벤트였기 때문이다. 식사를 마치고 가슴 울렁이는 타멜 거리의 가로질러 숙소로 돌아왔다. 우리는 각자의 방으로 흩어졌고 곧 시작할 트레킹을 위한 짐을 꾸렸다. 나는 피곤한 몸을 침대에 뉘웠지만 내일부터 시작한 꿈같은 여정에 가슴 부풀어 네팔에서의 첫밤을 쉬 잠들지 못했다.   

반응형
반응형

16/12/30

일은 끝나지 않았고 우리를 싣고 갈 비스타리님은 도착했다. 네팔! 5년을 기다려 온 여정이다. 출구 막힌 일상의 도피처이자 스트레스의 배출구였던 네팔행의 꿈. 드디어 떠난다. 하지만 짐도 마음의 준비도 여정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도 끝내지 못했다. 사과 발송을 마지막으로 집을 나섰다. 명호면 소재지에 들러 라티와 짜장면 한 그릇으로 작별을 대신하고 수원으로 향했다.

수원에 도착해서 비스타리님의 아파트에 짐을 풀고, 시내로 나와 마트에 들러 일부 준비물을 구했다. 오랜 세월 멈춰있던 손목시계의 건전지를 갈고, 3000불 환전에 대한 현금을 송금하고 나니 마음이 조금 여유로워진다. 네팔전문 레스토랑을 찾아 곧 시작할 두 달 여정의 네팔 생활을 맛보는 리허설을 했다.

 

16/12/31

수원집을 나와 아침부터 줄은 선다는 유명식당에서 해장국으로 아침을 해결하고, 영종도에 있는 처형댁에 들러 장모님을 뵙고 불편한 30분의 체류 뒤에 공항으로 향했다. 첫 일정을 같이할 5명의 일행이 하나 둘 모이자 네팔에서 기부할 약품을 여러 배낭으로 나누고 불안한 수화물 발송을 마치고 나니 오후 2시가 지났다. 내일 다시 카트만두서 재회하겠지만 상해와 쿤밍을 경유하는 낯선 길에 부디 아무 착오가 없기를 약속하며 5명의 도반은 출국장으로 사라졌다.

우리에겐 다음날 아침 8시까지 여유가 주어졌다. 어제부터 가이드겸 기사를 자청한 비스타리님도 작별을 하고, 공항철도를 타고 1시간만에 광화문에 도착했다. 봉화군농민회 회원을 싣은 버스는 아직 톨게이트를 통과중이라니 딸을 만나 식사를 했다. 딸이 주는 내복 선물을 챙기고 광장을 나가 농민회 동지들을 만나 박근혜 퇴진!”을 힘껏 외치다 다시 공항으로 향했다.

스파온에어의 잠은 깊지 못했다. 어수선한 와중에 억지로 잠을 청하며 여행이 내 삶의 또 하나의 장식물이 아니기를 기원했다. 그리고 혹시라도 2달간의 이번 네팔여정이 나의 삶에 생기를 불어넣는 어떤 계기라도 가져다주지 않을까하는 막연한 기대에 가슴 부풀었다.


17/1/1

아침 5, 굳이 깨지 않아도 일어날 수 있었다. 잠을 잔 것이 아니라 그냥 밤새 누워있었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빵과 커피로 간단히 아침을 해결하고 840분 비행기는 인천에서 발을 뗐다. 비행은 늘 불편했다. 고소공포일까 밀폐공포일까 아니면 단순한 조갑증일까? 둘러보니 아이들은 마냥 즐거워하지만 중노년들은 다 똥씹은 표정이다. 나이가 들면 겁도 늘고 걱정도 느는가보다. 걱정이나 공포는 인간의 합리성의 증거일까 비합리성의 산물일까? 객관적으로 안정성이 높다는 사실과 무관하게 그냥 몸이 하늘에 떠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불안한 것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1시간 50분을 비행 후 푸동공항에 도착하니 현지시각 945분이다. 소통이 불가능한 공무원과 입국비자로 실랑이를 벌였다. 알고 보니 출국 바우처를 요구한 거였다. 내 인생의 첫 중국 방문이니 뭐 그 정도는 감수 할만 했다. 쿤밍행 비행기를 타기에는 10여 시간이 남았지만 공항 밖 상해는 너무 멀어보였다. 청사 바깥을 걸어서 나가 보았지만 짧은 시간 상해를 맛보기에는 사전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못했다. 공항내 까페와 레스토랑을 돌며 먹고 또 먹고 시간을 죽이다 간혹 비스타리님한테 받은 lonely planet NEPAL을 읽었다. 그래도 시간은 흘러 오후 9시에 쿤밍행 동방항공에 탑승했다.

 

두세시간 비행뒤 쿤밍에 도착했다. 처음 여행을 계획할 때 운남성에서 보름 정도를 보내는 일정을 생각했었다. 두 달을 온전히 네팔여정에 집중하기로 결정하면서 쿤밍공항은 그냥 스쳐지나가는 곳이 되어버렸다. 상해 푸동공항은 아직 중국이 아니었다. 푸동공항은 여는 국제공항과 크게 다르지 않는 느낌이었다. 다양한 인종과 화려한 명품 매장들 그리고 사람들의 바쁜 발길조차 인천공항의 판박이였다.

하지만 쿤밍은 달랐다. 쿤밍에 들어와 비로소 폐부 깊숙이 중국의 냄새가 느껴졌다.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이 휩쓸고 지나갔지만 그들은 다 중국인이었다. 특히나 무리지어 다니는 티벳탄 때문에 쿤밍은 더욱더 중국답게 다가왔다. 떼에 쩔은 옷차림과 배낭에 색동실로 장식한 머리카락은 기름에 떡져 뽀얀 먼지가 덮고 있었지만 표정은 당당했고 친근했다. 왜 티벳탄들은 하나같이 어린 시절 기억속의 이웃 아저씨 같이 편안하게 느껴질까 궁금했다. 그들은 차림으로 보아 노숙인과 다름없었지만 보무도 당당하게 현대식 공항청사를 휘저었다. 참 멋있다는 느낌을 가지고 그들 무리의 뒤를 쫏아 청사 지하의 대합실로 향했다. 그들은 따라 가는 것만으로 왠지 든든했다.

여기저기 무리를 지어 아예 이부자리를 펴고 누운 사람들로 넓은 공간이 만원이라 우리 부부가 몸을 누일 적당한 자리를 찾지 못했다. 공항밖 숙소로 향하기에는 시간적 여유도 불확실했고 사실 치안도 알 수 없어 공항내 있다는 호텔을 찾을 수 없었다. 어렵게 찾은 잠자리 대안으로 발마사지 가게를 발견했다. 겨우 와이프만 발마사지 가게에 몸을 누이고 나는 구석진 복도에 담요를 깔았다. 결국 이번에 실현할 계획이 아니었던 찌질한 나의 버킷리스트중 하나인 공항노숙을 실현했다.

 .

 

반응형
반응형


20161230일 집을 나와 201712일 카트만두에 도착, 여정을 시작하고, 228일 집으로 돌아오는 2달동안의 네팔여행을 기록한다. 이 기록은 순전히 우리 부부 자신만을 위한 것이다. 다른 여행자를 위해 정보를 제공할 만치 섬세하게 여행을 기록하지도 못했고, 여행이 끝난 지 7개월이 지나 벌써 흐릿해지기 시작한 기억에 의존하다보니 이 모든 기록의 정확성도 떨어진다. 그래도 내가 늙도록 살아 더 이상 여행을 떠날 수 없을 만치 건강이 악화되었을 때 그나마 위안받을 수 있을 나만의 화려했던 지난 시절의 기록으로 2달여정의 네팔여행을 남긴다.


사실 5년전 했던 한달간의 안나푸르나 여행후 내내 네팔병앓이를 해왔고, 모든 힘든 순간을 다음 네팔행을 핑계로 이겨왔다. 그래서 네팔은 내 마음의 고향이 되었고 어쩌면 내 인생에 새로운 전기를 줄 미지의 샹그릴라이기도 했다. 지난 5년 막연한 네팔 커피 농장의 꿈을 키워보기도 했고, 지금과는 다른 네팔에서의 새로운 삶을 그려보기도 했다. 이번 여행은 그 가능성을 타진하는 여행이 아니라 그 불가능성을 확인하는 여행이 될 것이라는 예감을 가졌었고 사실 결과도 그랬다. 더 이상 네팔은 나에게 지금의 삶을 대체하는 새로운 삶이 가능한 공간이 아니라 내가 사는 한국과 공존하는 내 삶의 또 하나의 공간으로 자리잡았다.


이번 여정의 큰 얼개는 대충 3축으로 잡았다. 봉화친구들로 구성된 9명의 팀과 함께하는 보름 정도의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트레킹, 그리고 카트만두밸리 중심으로 여러 도시들을 탐방하다 운남여행을 통해 카트만두에 들어올 예정인 한명의 친구와 보내게 될 열흘정도의 도시여행, 그리고 나를 네팔로 안내한 비스타리님과 또 다른 친구한명 그리고 우리 부부가 함께 할 안나푸르나 라운드가 그것이다. 5년전 폭설로 마낭에서 돌아서야했던 쏘롱라는 다시 넘고 묵티나트와 까그베니를 지나 칼리칸다끼 강마을을 걸으며 무스탕을 맛보고 포카라에서 긴 휴식을 가질 예정이었다.


여행은 늘 계획에서 어긋나면서 더 멋지게 된다. 사실 마지막 까지 중간에 보름쯤 시간을 만들어 에베레스트베이스캠프를 걸어볼 마음도 먹었지만 다 포기했다. 여기저기 커피농장도 둘러볼 계획도 무산되었고 먹기여행이자던 다짐도 물거품이 되었다. 그리고 카트만두에서 만난 식중독과 안나푸르나 라운드뒤에 닥친 심한 몸살이 여정의 역동성을 떨어뜨렸다. 더 많이 걷고 더 많은 사람과 풍경을 만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고, 부부만 하던 여정과는 달리 거의 가이드에 준하는 책임을 느껴야했던 일행이 있는 여정은 결국 본전이긴 하지만 잃는 것과 얻는 것이 있었다.



이번 여행내내 여행을 왜 하는지 스스로 묻고 또 물었다. 누구는 삶이 여행이라고 했다. 여행 중에 도 다른 여행을 떠나는 것은 삶이 여행임을 망각해 가는 일상을 깨고 삶 자체가 여행임을 스스로 환기하기 위한 행위인지도 모르겠다. 땅에 뿌리내려야하는 농사꾼이 집만 나서면 마냥 좋고 자유로워짐을 느낀다. 그래서 늘 줄타기하는 인생이지만 그래도 길을 걸으면 내가 가진 모든 갈등과 긴장, 내 생각과 삶이 품은 모순들이 다 조화를 이루고 해결되니 길을 나설 수밖에 별 도리가 없다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