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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6일 마낭을 출발하여 야크카르카에서 점심을 먹고 오후 3시경 레다르에서 도착하여 걸음을 멈추고, 2월 7일 9시경 출발하여 정오가 되기 전에 해발 4,450m인 소롱패디에 도착해서 짐을 풀고 다음날 새벽에 있을 쏘롱라 패스를 준비했다.



짙은 구름이 하늘을 뒤덮고 거친 바람이 모래바람을 일으키는 밤이 지나고 아침을 맞았다. 바람은 여전했지만 다행이 눈은 오지 않았고 하늘은 조금 개여있었다. 아침을 먹고 옷깃을 여미고 거친 바람을 맞으며 쏘롱라를 향해 출발했다. 마낭을 벗어나면서 길을 두갈래로 갈라졌다. 왼편의 길을 선택하면 강사르 마을을 지나 틸리초로 가게 되지만 우리는 쏘롱라를 향해 가는 오른쪽 길을 선택했다. 강사르와 틸리초는 5년전에도 폭설로 길이 끊어지는 바람에 가보지 못했는데 이번에도 인연이 닿지 않으니 영영 못가볼 곳으로 남을 것 같아 아쉬웠다. 마낭을 완전히 벗어나기 전 뒤돌아 마르샹디강과 마낭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 올라 지나온 길을 살폈다. 불탑을 지나며 쏘롱라를 무사히 넘어 다시 마낭으로 내려오는 일이 없기를 빌며 걸음을 재촉했다. 



Chulu East 산허리를 타고 군상까지 가황무지 길은 경사가 심했다. 모래바람을 맞으며 한시간 만에 해발 400m이상을 올려야하는 힘든 코스였다. 그래도 외편의 계곡을 넘어 멀리 틸리초 피그와 닐기리 봉이 이루는 절경을 보는 낙에 그나마 우리의 지친 걸음은 힘을 얻었다. 군상에서 쉬어가며 차라도 한잔 할려고 했지만 롯지는 비어있고 마당에 찬바람만 가득했다. 아쉬움을 털고 일어나 다음 마을인 야크카르카까지 강행군을 이어갔다. 다행히 군상을 지나서는 경사가 완만하고 편안한 길이 이어졌다.



점심이 다가오자 가는 눈발이 날리고 짙은 안개가 끼기 시작했다. 오후 1시즈음 야크카르카에 도착해 늦은 점심을 먹었다. 카르카가 집을 뜻한다니 야크의 집, 다시말해 방목 중인 야크가 머무는 동네나 야크치기 목동이 지내는 움막이 있던 동네 정도일 것이다. 역시나 야크카르카에 접근하자 방목중인 야크떼를 만날 수 있었다.  하지만 목동의 움막을 확인할 길이 없고 트레킹 덕분인지 야크카르카는 번듯한 숙소가 여러채 들어서 롯지촌을 이루고 있었다. 야크집에 들러 점심을 해결했으니 우리는 야크가 된 기분으로 불순한 날씨를 뚫고 우리의 길을 나아갔다.



오후3시무렵 해발 4200미터인 Ledar에 도착했다. 하루 650m의 고도를 올려 몸이 지치기도 했지만 이후 고도 적응을 위해 걸음을 멈추었다. Ledar로 들어서는 출렁다리를 건너자마자 첫 롯지에 짐을 풀었다.  롯지의 손님은 단촐했다. 두 스페인 남자와, 중국인 커플 그리고 우리 일행 4명이 전부였다. 그리고 서너명의 가이드와 롯지 운영자 두어명이 같이 있어 그나마 든든했다.  고도가 높아진 만치 기온이 내려가고 바람과 눈보라가 몰아치는 날씨 탓인지 모두다 다이님 룸에 몰려 들었다. 책과 지도를 펼쳐놓고 차를 마시며 야크 똥을 태우는 난로가에서 몸을 녹이니 마음까지 녹아들었다. 


  


이번 여정 처음으로 4,000m 고도에 진입하고 나니 조금은 불안했다.  아직은 호흡이 간혹 불편한것 빼고는 비교적 잘 먹고 잘 걷고 있는 셈이지만 산아래서 지낼 때의 몸과 비교해서는 분명 정상이 아닌 것 같았다. 그래도 벌써 식욕도 잃고 배탈에 두통에 불면증까지 시달리는 나의 두 일행에 비해서는 우리 부부는 거의 철인 수준인 듯 멀쩡했다. 다이닝 룸에 불살이 줄어들자 차가운 룸의 침낭을 기어들었다. 계곡을 쓸고 지나가는 눈바람 소리를 들으며 춥고 불안한 잠을 청하며 지나온 길을 더듬었다. 한걸음한걸음 발을 옮길 때마다 지나온 삶을 곱씹고 살아갈 삶을 그려본다. 많은 아쉬움은 남지만 결코 내 삶이 후회스런 삶은 아니었다. 지금의 희열 그리고 다가올 삶의 가슴뛰는 모험이 더 중요하다.



레다르의 밤은 험악했다. 밤새 거친 바람이 집을 흔들고 눈발이 천장틈으로 들어와 얼굴에 뿌려졌다.  9시에 침낭에 들었지만 자정에 눈이 떴다. 다행히 잠자리에 들무렵보다 호흡은 좋아졌다. 다시 감빡 잠이들다가도 금새 집이 흔들리고 바람소리가 하늘을 가르는 불안한 기운에 눈이 떠졌다.  마당을 나서니 바람은 사람마저 저 계곡 밑으로 날려버릴듯이 기세가 등등했다. 레다르의 밤은 너무 길었다. 수백번을 뒤척여도 아침은 오지 않았다.



새벽잠이 설핏 들었다가 억지로 일어나 다이닝룸에 들러니 8시였다. 스페인 트래커는 벌써 숟가락을 댄듯 만듯한 접시를 물리고 길을 나설 채비를 하고 있었다. 밤새 호흡곤란으로 고생한 D와 두통으로 고생한 M은 아침을 맞아 상태가 호전되었다고 했다. 그래도 모두 얼굴은 부풀고 두통과 소화불량으로 상태가 정상이 아닌 몸을 이끌고 길을 나섰다. 평단한 능선을 따라 3시간 동안 스무명가량의 트레커와 네팔리가 행렬을 지어 나아간다. 안나푸르나를 스쳐 멀리 소롱피크를 지나 출루 이스트 출루 웨스트를 비켜 꾸역꾸역 길을 줄였다. 큰 산을 걷는 사람의 움직임이 워낙 작아서 사람은 산과 같이 부동의 상태로 있고 오직 바람만이 산과 계곡을 쓸고 지나가는 것 같았다.   레다르를 출발한지 1시간 넘겨 계곡을 건너 서쪽으로 넘어가니 길은 가파르고 위험했다. 드디어 험준한 안나푸르나에 들어섰음을 실감했다.

 


정오가 되기전 소롱패디에 도착한다. 쏘롱라를 넘기 전 우리의 마지막 숙소가 될 소롱패디는 고도 4,450m였다.  방을 얻고 짐을 풀고 들어선 다이님룸에는 10여명의 서양팀이 자리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몇몇 개별 트래커들이 들러 점심을 먹고는 모두들 하나같이 길을 나섰다. 점심시간이 지나자 모두가 떠나고 마지막으로 중국인 커플마저 하이켐프를 향해 떠난뒤 소롱패디에는 우리만남게 되었다거친바람이 불지만 양지자른 다이닝 룸이 아늑하고 따뜻해서 4명모두 책을 한권씩쥐고 해드는 창가에 띄엄띄엄 앉았다. 나는 이내 긴의자에 몸을 눞이고 잠이 들었다고즈늑한 봄날의 평온이 우리를 감싸고 있던 소롤패디에서의 오후는 행복했다.

 


오후3시경 하이캠프로 떠났던 중국인 커플이 다이닝룸에 들어 섰다. 하이캠프 직전에 심한 두통으로 일단 퇴각했단다. 그리고 뉴질랜드 커플이 한쌍 도착했고 마지막으로 석양녁에 히피처림의 런던보이가 들어섰다. 다국적 트레커들이 둘러앉아 야크똥난로에 불을붙이고 화려한 소롱패디의 저녁을 맞았다. 이제 메뉴를 외울 때도 지났지만 늘 끼니가 다가오면 모두가 메뉴를 뒤척였다. 그래봤자 선택지는 뻔했다. 삶은 계란에 퍽퍽한 빵, 야채튀김을 뒤적이다가 다 먹지못하고 내일의 일용할 양식으로 남겼다.



다음 날 있을 대망의 소롱라 패스를 위해 일찍들 잠자리로 떠났다. 마지막까지 난로의 온기를 아껴 자리를 지켰지만 어둡고 차가운 방에 들어서며 시계를 보니 고작 720분이었다. 한컵의 물로 양치만하고 누운 잠자리가 너무나 낯설었다. 내가 누울 곳이 아닌 곳에 누워있는 듯한 어색한 잠자리를 뒤척이다 잠깐 잠이 들고 다시 눈을 떠 시간을 확인하니 고작 자정을 넘기고 있었다. 다시 몸을 뒤집다가 결국 2시를 겨우 넘겨 일어나 침대에 걸터앉고 말았다. 4시에 기상해서 4시반까지 식사를 하고 5시에 쏘롱라를 향해 출발하기로 되어있었는데 2시에 기상을 하고 나니 밤은 춥고 길고 시간은 느렸다.



이번 여정의 최고 고도이자 고비인 5400미터의 소롱라는 5년전 폭설로 마낭 에서 돌아서면서 넘지 못했다. 이제 곧 소롱라를 넘고나면 이번 여정의 성격이 바뀌게 될 것이다. 먼저 고산증의 위험에서 해방되고 하산 길로 접어든다. 베시사하르를 출발해 마르상디강을 따라 열흘을 넘겨 고도를 높혀왔던 여정은 칼리칸다키강을 따라 12일 여정의 하산길에 접어들게 되는 것이다. 마낭주의 산록과 마르상디강변의 초지를 거쳐왔던 여정은 무스탕의 황량한 황무지와 그 황무지를 갈라 무스탕에 삶의 터전을 키워주었던 검은강 칼히칸다끼를 따라 흘러갈 것이다. 하루하루 고도가 낮아지고 기온이 오르고 그리고 네팔 최고의 현대적 휴양도시인 포카라로 들어가면 이번 여정은 끝이 난다.  



이번 여정에서 소롱라가 기점이 되듯 이번 두달의 네팔여행이 내삶의 새로운 시작이길 빌었다. 유예된 꿈들, 이루지못한 계획들, 무산된 다짐들, 미완의 시도들 이 모든 것을 버리고 새롭게 내일을 시작하는 불가능한 꿈을 꾸며 새벽 4시를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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