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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3일

비오는 아침에 구례포를 출발, 신두리해변을 걷고, 소근진성을 거쳐 만리저수지, 의향3리를 지나 천리포, 만리포까지 걷고 롱비치패밀리호텔에 여정을 풀었다.

코로나 창궐뉴스가 계속되고 식당과 팬션에서 숙식을 거부까지 당하다 보니 잔뜩 위축되기 시작한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주인부부께 인사도 남기지 못하고 파스텔 펜션을 나서는데 겨울비 답지 않은 빗줄기가 우리를 막아섰다. 빗줄기를 보나 하늘을 보나 쉬 그칠 비가 아닌 것 같았다. 나름대로 여정을 위한 꼼꼼한 준비를 자부해왔는데 꼭 이를 때 나 스스로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비옷을 챙기지 않은 것이 드러났다. 젠장!! 가까이 비옷을 살 곳도 없고 마냥 기다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잠깐의 망설임 끝에, 옷깃을 세우고 모자를 눌러 쓰는 것으로 비 방비를 대신하고 그나마 빗줄기가 가늘어지는 순간, 길을 나섰다. 634번 도로를 따라 남쪽으로 걸으니 금방 향촌리 마을회관이 나오고 20여분쯤 더 걸어 오른쪽으로 도로를 벗어나 향골이라는 마을로 들어섰다.

한적한 농로를 따라 드문드문 농가가 흩어져 있는 마을을 관통해 신두리로 넘어가는 양청이재로 향했다. 몇 가구 되지 않는 마을은 인기척마저 드물었고 비가 지척이는 논두렁을 지나 언덕을 오르자 금방 마을은 끝이 났다. 다행히 그즈음 빗줄기가 가늘어 졌고, 우리는 언덕을 넘어 내리막길로 접어들자 신두리 해변에 거의 다가왔다는 느낄 수 있었다. 길은 언덕이 끝나는 지점에서 시작한 작은 마을을 지나 곧이어 중장비가 쓸고 지나간 지형이 넓게 퍼져있는 황무지로 이어졌다. 안내판은 공사를 하다만 것 같은 황무지가 조성중인 골프장임을 알렸다. 잠시 길을 잃고 우리는 골프장을 조성중인 사유지로 들어가 버렸다. 다시 돌아 나오기는 아까워 아무도 없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황량한 황무지를 지나 마침내 우리는 저수지를 끼고 돌아 신두리사구가 시작하는 해안으로 접근할 수 있었다.

해변은 저멀리 달아난 바닷물 때문에 광활한 갯벌이 펼쳐져 있었고 이 곳이 해변길 1코스 바라길의 시작점임을 알리는 표지가 우리를 반갑게 맞이했다. 해변과 저수지를 가르는 둑방 위로 트레일이 조성되어 있었다. 해안으로 내려갈지 트레일을 따라 걸을지 잠시 망설였지만 해안의 사구는 어디까지가 보호구역이고 진입이 개방되어 있는 곳인지 잘 구분이 되지 않아 결국 트레일을 선택했다.

왼편으로 저수지를 접하고 오른쪽으로는 썰물로 드러난 넓은 모래사장과 더 멀리 펼쳐진 약 1키로를 걸어 갈림길이 나오는 지점에 이르자 갑자기 빗방울이 굵어지기 시작했다. 우리는 급히 사람의 기척이 없는 관리사 같은 빈집의 처마 밑으로 달려가 비가 잦기를 기다렸다. 빗줄기가 가늘어지자 우리는 다시 걸음을 이어갔고, 길이 갈라진 지점을 만나 해안과 나란히 나아가는 오른쪽 길을 선택했다. 목재데크가 깔린 길이 갈대밭 속으로 우리를 이끌자 본격적으로 신두리 해안사구의 풍경이 펼쳐졌다. 끝을 알수 없는 갈대 숲속에서 가물가물 흐려지는 지평선을 바라다 보다 문득 우리가 길을 잃고 사막에 갇힌 듯 느껴졌다. 아니 세상을 피해 사막 속으로 숨어든 듯 평안과 안도가 그리고 조금의 외로움이 일었고 저 멀리 모래언덕 넘어 혹 어린왕자라도 마주칠까 설레임이 피어났다.

 

2키로 정도를 걸으니  위락시설들이 보이기 시작했고, 갈대마저 드문 모래 언덕들을 넘으니 신두리 관광단지 같은 곳에 도착했다. 단지를 관통하는 까페와 호텔이 즐비한 도로로 접어들자 허기를 느꼈고 우리는 한 까페에 들러 가벼운 피자로 늦은 아침겸 점심을 해결했다. 우리는 길을 계속 이어 신두리해수욕장을 벗어난 지점에서 다시 바다와 접한 해안길로 접어들었다.

비가 완전히 그치자 바람이 거세지기 시작했다. 사람이 날릴듯한 바람을 맞으며 해안길을 따라 소근진성을 지나고 직선으로 뻗은 제방도로를 걸어 제방이 끝나는 지점에서 해안을 벗어나 천리포로 바로 넘어가기 위한 마을길로 접어들었다. 마을 초입에는 너른 논이 잘 조성되어 있었다. 곧게 뻗은 논두렁길을 걸어 마을을 가로질러 천리포로 가는 언덕길로 접어들어 걷기시작하고 걸음이 늘어날수록 시야는 터이고 마을이 한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인적은 드물었고 시야에 들어오는 낡아가는 집과 방치된 밭은 쇠락해가는 농촌의 슬픔을 전해주었다. 그래도 마을 한켠에서 세월을 버티고 있던 늙은 감나무 한그루가 상처받고 능욕당하고도 끝내 존엄을 잃지 앓은 늙은 인디안 추장처럼 마을을 지키녀 지난 삶의 온기를 전해주었다.

 

언덕길의 넘어서자 마자 천리포가 나왔고 천리포의 마을을 관통해 남쪽으로 계속 걸어 천리포수목원을 지나자 그곳이 만리포임을 알리느 표지판들이 나왔다. 만리포는 늘어선 호텔과 까페, 레스토랑을 통해서도 얼마나 큰 관광지인지 알 수 있었다. 역시 다른 곳에서 불수 없던 서핑을 하는 사람들도 볼 수 있었다. 겨울바다를 보는 것 만도 오금이 저리는데 추위에 아랑곳하지 안고 서핑을 하는 청춘이 부러웠다. 점심겸 저녁을 먹고 바람이 거세지는 거리를 걸어 롱비치페밀리호텔을 숙소롤 잡고 짐을 풀었다. 어두워지기전에 인근 마트에서 저녁과 다음날 아침까지 해결할 장을 보고 태안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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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12일

아침 8시 백사장항과 드르니 항을 이어주는 조망다리를 건너 청포대, 달산포, 몽산포를 그쳐 해안사구에 형성된 솔숲길을 걷고 해안으롭 멋어나 남면에서 버스를 타고 태안읍을나가 다시 버스를 갈아타고 학암포까지 이동하고 학암포에서 걸어 구례포에 도착 하루 여정을 마무리 했다. 

어제는 노을없는 5코스 노을길을 완주하고, 집나온 지 처음으로 실망스런 저녁을 먹고, 여정의 끝에 김기덕 감독의 사망 소식마저 들었다. 나에겐 아무 일도 없었던 평화로운 하루였지만 영화감독 김기덕은 낯설은 이국에서 외롭게 죽음을 맞이했다고 했다. 개인적으로 일면식도 없고, 그의 작품을 좋아하지도 않았고 단지 그의 고향이 봉화라는 이유로 딱 한번 생가터를 찾아 이웃의 입을 통해 그에 대해 들었던 것이 전부였지만 그의 죽음은 계속 나의 뇌리를 맴돌았다. 천제적인 영화감독으로 살다, 성추문으로 상처받고 이국땅에서 쓸쓸히 죽어가야 했던 그의 운명이 애닯았다. 하지만 한 인간이 가진 어리석음과 잘못의 댓가는 또 고스란히 자신의 몫이기에 그의 영광과 치욕이 함께 그의 죽음을 통해 무로 돌아가길 빌었다. 죽음 뒤에 따르는 비난도 생전의 예술적 성과에 대한 칭송도 이제 산자의 몫이지 그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늘은 드르니항에서 태안 8경의 하나인 몽산포로 이어지는 4코스 솔모랫길을 완주하기 위해 조금 일찍 숙소를 나섰다. 백사장항에서 드르니항으로 넘어가는 인도교는 엄청난 높이에 큰 규모로 지어져 다리를 건너는 내내 오금이 저릴 정도였다. 생활도로도 아니고 물론 차도 다닐 수 없고 오직 트레커나 관광객을 위한 다리치고는 너무나 거창했다. 그래도 막상 다리위에서 바라다 보는 서해의 풍경은 장엄했다. 다리를 건너자 아침 해가 동쪽하늘로부터 비추기 시작했다. 석양대신 여명을 사진에 담고 드르니를 벗어나 갯벌과 양어장 사이의 둑방길을 따라 길을 이어나가자 바다풍경은 시야에서 사라지고 신온리라는 지명의 염전이 펼쳐졌다. 염전을 따라 걷다보니 길은 다시 솔숲으로 접어들었고 우리는 고운 모래밭에 형성된 솔숲 사이를 쉼 없이 걸어 나갔다. 2시간을 걸려 6키로쯤 솔숲을 걸은 끝에 청포대에 이르렀고, 길은 다시 해변을 따라 달산포까지 이어졌다. 해수욕장은 청포대, 달산포, 몽산포로 나뉘어져 이름을 얻고 있었지만 뚜렷한 경계도, 이름을 나눈 특별한 이유도 없었고 그냥 하나의 해변으로 끝없이 이어졌다. 간혹 바닷새 무리를 만나 걸음을 멈추기도 했고, 그래도 주말이라고 해변에서, 솔숲길에서 사람들을 마주치기도 했지만 마음의 평화를 깰 정도는 되지 못했고, 그냥 온몸으로 바람을 느끼고 햇살을 빨아들이며 아무런 동요도 없는 적멸의 영역에 들어선 듯 가볍고 평화로운 걸음을 이어가니 도저히 끝날 것 같지 않던 길이 줄어 몽산포의 헤수욕장의 남쪽 끝단에 접어들기 시작했다.

몽산포로 접어들 무렵 시간은 정오를 넘어서고 허기가 지기 시작했다. 해변을 다라 가서는 식당을 찾기가 쉽지 않을 거라는 판단에 길을 육지 쪽으로 틀어 남면 면소재지로 기수를 돌렸다. 금방 나올 것 같던 시가지는 쉬 나오지 않았고, 배고픔에 거의 지쳐갈 즈음 남면 면사무소에 도착했다. 면사무소 건너길 모서리에 자리한 후줄구레한 식당은 한눈에 썩 끌리지는 않았지만 배는 고프고 다른 대안을 찾기도 귀찮아 망설임 없이 선택했다. 신성식당이라는 이름의 동네 식당에는 이미 피크를 넘긴 점심시간이기도 해선지 조용했다. 공사장 인부차림의 손님이 한 테이블에서 식사를 드시고 계셨지만 이내 식당에는 우리만 손님으로 남게 되었다. 주인 아주머니가 추천하는데로 평소에 먹고 싶던 물곰탕을 시켰다. 이내 상이 차려지고 물곰탕이 나왔다. 그런데 웬걸, 전혀 기대하지 않은 곳에서 너무나 푸짐하고 시원하고 맛있는 식사를 만났다. 아침도 먹지않고 오전에 15키로를 쉬지 않고 걷고 나서 만난 물곰탕은 허기와 피로를 한꺼번에 날려버렸다.

남면에서 오전 걷기를 멈추고 버스를 타고 태안읍으로 이동했다. 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고 태안의 북단이자, 해변길 1코스의 시작점인 학암포롤 향했다. 남면에서 태안읍을 거쳐 다시 남폭운전하던 버스를 갈아타고 학암포까지 도착하는데는 한시간을 조금 넘는 시간 밖에 걸리지 않았다. 학암포에서 하루를 마무리하고 숙소를 얻을 계획이었지만 예상보다 이른 시간에 도착하다보니 걸음을 조금 더 이어가기로 결정했다. 무엇보다 학암포의 분위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풍경이 아름다운 만치 그만치 사람의 발길이 잣고 상업화되는 것은 피할 수가 없었다. 애써 눈을 바다로 돌려 섬과 해안이 조화로운 풍경만을 담았다. 해안까지 바짝 붙어 형성된 사설 텐트촌과 방갈로, 그리고 상업적인 분위기가 물씬 나는 상가들을 피해 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방향을 잡고 걸어나갔다4키로 정도를 한시간 동안 걸으니 구례포 해수욕장에 도착했다. 구례포 역시 해안쪽 모레사구에는 텐트촌들이 형성되어 있었고 예상외로 텐트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고 아이들이 텐트사이를 뛰어다니고 여기 저기 고기곱는 연기조차 피어오르고 있었다. 막 텐트장을 들어서는 차들도 적지 않았다.

해안을 벗어나 634번 지방도를 따라 드문드문 자리한 민박과 펜션을 찾아 나섰지만 쉬 숙박지를 정할 수가 없었다. 어떤 집은 영업을 접었는지 문이 잠겨있었고, 어떤 집은 아예 코로나 때문에 손님을 받지 않는다고 문적박대를 했다. 다행히 길가의 펜션 안내판을 보고 전화를 돌린 끝에 파스텔팬션에 여정을 풀 수 있었다. 코로나가 휴가 풍경도 바꿔놓았는지 텐트촌은 사람들이 붐볐지만 막상 펜션에는 손님이 들지 않았다. 우리가 묵은 팬션 역시 우리가 유일한 손님이었다. 주인의 소개로 숙소에서 멀지 않은 곳의 식당을 소개 받았다. 한참을 걸어 도착한 식당은 영업중이었고, 막 도착한 경찰관들이 식사를 위해 식당을 들어가는 걸 볼 수 있었다. 뒤이어 우리가 식당을 들어가려고 하니 주인이 질색을 하면 우리를 외면했다. 코로나 때문에 단골 손님외의 여행객들은 손님으로 받을 수 없다며 매몰차게 우리를 문적박대 했다.

순간적으로 화가 치민 것은 사실이었지만 뭐 코로나 공포가 그런 대응을 하게 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숙소로 돌아와 주인아주머니를 찾아 라면이라도 빌려줄 것을 부탁했다. 다행히 멀지 않은 곳에 슈퍼마켓이 있고 차로 우리를 데려다 주셨고 라면과 도시락 등 간단한 식재료를 구입해 숙소롤 돌아올 수 있었고, 주인아주머니께서 맛있는 김치까지 한포기 내어주시는 바람에 그나마 저녁을 성찬으로 마무리할 수 있었다. 집 나온지 4일동안 옷점에서 만나 신세를 졌던 최씨 할머니, 장곡에서 차를 태워졌던 주민분에 이어 오늘 예정에 없던 차를 태워주고 김치를 내어준 파스텔 팬션을 이번 여정의 3번째 은인으로 기억에 남겼다.

저녁을 먹으며 켠 TV는 코로나가 다시 대유행기로 접어들었다는 뉴스로 도배를 했다. 숙박시설이 비고 손님을 거부하던 팬션과 식당도 경험하고 나니 우리도 남은 일정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일정을 줄일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한 이틀 정도 일정을 늘일까했던 나의 생각은 일단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이제는 초소한의 일정을 마무리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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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1일

 

꽃지해변 델마호텔을 나와 드르니항을 향해 출발 방포항과 기지포 해수욕장을 지나 드르니항과 다리 하나를 두고 마주한 백사장항에서 멈춰 럭스팬션텔에서 여장을 풀엇다.

어제 우리의 발길은 샛별길코스 의 종점이자 서해안의 아름다운 노을을 대표한다는 꽃지에서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도착한 꽃지해변은 잔뜩 기대했던 노을을 우리에게 선물하지 않았다. 날씨는 흐렸고, 구름을 비낀 하늘조차 노을을 품지 못했다. 일출이든 석양이든 행운이 따라야만 볼 수 있다는 엄연한 사실을 받아들이고 석양없는 저녁어스름이 내리는 해변을 싣컷 걷고 편안한 잠을 잤다. 늦은 아침 눈을 뜨니 창밖을 자욱한 안개로 오늘 하루 불안한 여정을 예감케 했다. 배낭을 뒤척여 남은 먹을거리로 아침을 해결하고 델마호텔을 나와 오늘의 목적지 드르니항으로 향했다. 꽃지 해변 주차장을 벗어나자 마자 도보용 현수교를 지나 방포항으로 건너갔다. 방포는 수산관련 창고가 늘어선 소박한 어촌마을이었는데 의외의 곳에 마을에서 운영하는 것으로 보이는 크지 않은 규모의 [바다목장체험장]이 들어서 있었다. 작은 규모지만 그에 어울리는 아기자기한 볼거리와 체험거리를 기대하고 들어가 보았는데 역시 다른 농어촌에 즐비한 관에서 지원하고 마을에서 운영하는 시설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조금은 실망감을 안고 나와 방포해변으로 넘어가는 산길로 접어들었다. 높지않은 언덕의 정점에 있는 전망대에서 지나온 꽃지해변을 뒤돌아봤다. 슬픈 사랑을 전하던 할미할애비바위 넘어 끝없이 펼쳐진 꽃지해수욕장에 아쉬운 작별을 하고 방포해변으로 발길을 돌렸다, 인적없는 겨울 방포해수욕장은 아름답고 호젓했고 조금은 쓸쓸하기조차 했다. 꽃지 못지않은 너른 모래사장의 끝은 어디인지 가물가물했지만 우리는 걷고 또 걸으며 겨울 바다의 정취에 취해갔다. 얼마나 걸었을까 끝날 것 같지 안않 모래사장은 끝이 나고 우리는 석양길은 우리를 야트막한 산길로 이끌었다.

내륙지역보다 훨씬 따뜻하다는 서해안 답게 벌써 수확이 끝났어야할 배추가 시퍼렇게 자라고 있는 산자락에서 농부 한분을 만났다. 반가운 마음에 인사를 드리고 나 자신도 배추농사 끝내고 모처럼 여행을 왔노라 말씀드렸더니 너무 반가워하셨다. 같은 농부끼리 만나 올해 가물어서 힘들었던 일이며, 폭락했던 가을 배추값과 어떤 배추 품종이 좋은지에 대한 이야기까지 한참을 대화하다 인사를 나누고 가던 길을 재촉했다. 끝없는 바닷 풍경에 시린 눈을 쉬기에 적당할만치 산길을 걷자 두에기 해변이 나왔다. 두에기 해수욕장은 방포나 그보다 훨씬 넓었던 꽃지해수욕장과 달리 아담한 가족해수욕장 같은 분위기였다. 겨울 바다의 멋은 꽃지나 방포가 더 있을지 모르겠지만 막상 해수욕 철이라면 나는 덜 붐비는 소박하고 아담한 두에기 해수욕장을 찾을 것 같았다. 금새 두에기 해변을 벗어나 길은 다시 밧개해수욕장으로 이어졌다. 서해안 어딘들 아름답지 않은 곳이 있겠냐만 해안따라 끝없이 이어지는 해수욕장은 그 이름조차 기억하기가 힘들었다. 꽃지, 방포, 두에기, 밧개... 밧개해변에서 다시 긴 걸음을 걷고 우리는 다시 바닷 쪽으로 내민 야트막한 야산으로 발길을 옮겼다. 야산의 정점에는 목재 테라스로 꾸민 작은 전망대가 나왔다. 다리도 쉴 겸 배낭을 벗고 도인들이 유달리 많았다던 두여해변을 눈에 담고, 바닷바람은 가슴에 품었다. 남은 빵과 과일로 점심을 해결하는 중에 한 무리의 트렉커들이 전망대로 들어섰다. 해변길을 걷기 시작한지 이틀만에 첫 여행자를 만난 반가움에 먹던 밀감을 나누고 서로의 행운을 축원하며 헤어졌다.

두여해변은 끝이 보이지 않을 만치 모래사장이 끝없이 이어졌다. 꽃지보다 훨씬 긴 해변을 따라 어디부터 어디까지인지 단락 지을 수 없는 해변을 따라 두여해수욕장, 안면해수욕장, 기지포해수욕장, 삼봉해수욕장이라는 이름이 이어졌다. 안내 지도를 보니 그 끝을 가르는 작은 산을 넘으면 오늘의 목적지 드르니항이 자리잡고 있었다.

10리길도 넘어보이는 모래사장을 걷고 또 걸었다. 아무런 에피소드도 돌출적인 볼거리도 예상못한 사건도 없이 그야말로 풍속도 풍향도 변하지 않고 바닷새의 울음소리조차 시계추 같이 주기적인 정물화속에 나 자신이 녹아들었다. 다리는 걸었지만 의식은 낮잠을 자는 듯 몽롱해질 즈음 멀리서 보이지 않던 작은 강이 모래사장을 끊고 우리는 발길을 돌려 해안을 잠시 벗어나 창정교라는 다리를 건너야했다.

다리를 건너 시지포로 이어지는 길은 해안 사구에 형성된 솔숲으로 이어졌다. 낙엽쌓인 모랫길과 간혹 목재 데크로 이어지는 시지포 생태 탕방로를 따라 걷는 길은 의외로 많은 트레커를 만날 수 있었다. 우리는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가능한한 눈길을 피하며 옷깃이라도 스칠까 경계하며 멀찍이 빗겨났다. 이런 기괴한 행동을 통해 우리가 코로나19시대의 한가운데 있다는 사실을 새삼 환기했다.

해안이 끝나는 지점에서 유카가 무성한 삼봉이라는 작은 산을 비켜 백사장해수욕장에 도착하고 이내 드르니항이 건너다 보이는 백사장항의 위락지로 들어섰다. 횟집과 호텔이 즐비하고 수산물 가게들도 늘어선 백사장항에서 오랜만에 작은 무리나마 인파를 마주쳤다. 우리도 한 무리가 되어 가게들을 구경하며 숙소를 찾아 나섰고 우리의 취향과는 다른 조금은 낡은 한 모텔을 예약했다. 담배 냄새에 쩔고 어두침침한 모텔은 내가 기피하는 첫번째 숙소임에도 다른 대안이 없었다. 점심도 저녁도 아닌 애매한 시간에 골목을 누비다 해안에서 마을 쪽으로 좀 들어간 한적한 식당에서 짬뽕을 먹고 다시 숙소에 돌아와 한 쉼을 자고 일어나니 저녁 8시가 되었다. 배고픈 긴밤을 견뎌야하는 상황이 될까 걱정되어 다시 숙소를 나와 가까운 횟집에서 회덮밥으로 저녁을 먹으니 하루가 저물고 계획한 여정의 절반을 넘어섰다는 자각이 몰려왔다. 무심한 시간은 원망하며 남은 일정을 꿈꾸며 깊고 편한 잠으로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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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0일

830분에 영목항회관을 출발, 가경주마을에서 해변과 만나 고남제방길을 거쳐 장곡리까지 이동, 장곡리에서 트럭을 얻어타고 안면읍으로 나가 점심식사를 하고 장을 보고 걸어서 꽃지해변에 도착, 델마호텔에서 여장을 풀었다.

 

 

8시30분 숙소를 나와 멀리 원산도를 지나 보령까지 이어지는 신설 연육교가 보이는 바닷가에서 방향표지판을 뒤로하고 ‘태안해변길 7코스 바람길’을 걷기 시작했다. 출발부터 해안을 따라 걸어서야 하는데 해변길이 계속 이어지는지 확인이 되지 않아 지도에 나와있는 길을 선택하다보니 찻길로 접어들었다. 어제 버스로 들어왔던 길을 거슬러 북쪽으로 방향을 잡고 30여분을 걷다가 이내 도로를 벗어나 해안 쪽을 향해 서진했다. 인적이 드문 만수동이라는 작은 마을을 가로질러 끝없는 갯벌이 시야에 들어왔다. 어디까지가 갯벌이고 어디부터가 바다인지 모를 풍경을 바라보며 해안선을 따라 얼마나 걸었을까, 다시 길은 우리를 해안을 벗어난 작은 야산으로 이끌었다. 묵은 밭과 갈대 사이를 비집고 야산을 넘으니 가경주라는 마을이 나왔다. 안내판을 보니 마을 풍경이 아름다워 佳景地라는 지명이 붙었고 이것이 나중에 佳景州라는 마을이름으로 굳어졌다고 했다.

 

 

아침을 굶고 출발한 탓에 배가 고파왔고 마을에 들어서다 혹시라도 식당이 있나 두리번 거렸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마을주민에게 물어보니 근처에는 없다는 답만 돌아왔다. 이름처럼 아름다운 가경주마을의 해안을 따라 걸음을 옮기다 다시 길은 언덕으로 이어졌고 언덕길을 따라 현대식 펜션 사이를 걸어 가경주를 벗어났다.

 

 

늘어선 팬션이 끝나는 지점에서 옷점마을(고남4리)이 우리를 반겼다. 조개부리 체험마을로도 알려져 있어 혹시라도 식사를 해결할 식당이나 마트가 있지 을까 기대했지만 마을은 소박했고, 조용했다. 정감넘치는 좁고 꼬불꼬불한 마을길을 접어들어 얼마걷지 않아서 나지막한 집에 조그만 점방이 나왔다. 과자와 음료수 몇가지 정도가 진열되어있는 구멍가게에는 다행히 라면도 보였다. 머리가 천정에 닿을 듯한 가게에 문을 여니 할머니 한분이 우리를 반겨주셨다. 아내는 컵라면과 식수, 과자를 사고 나는 가게앞 조그마한 평상에서 물끓일 준비를 했는데 주인 할머니가 우리를 집으로 불러들였다. 날도 찬데 한데서 고생하지 말고 라면 끓여줄테니 집에 들어오라고 종용하셨고 우리는 못이기는척 방에 들어섰다. 막상 방에 들어가 할머니를뵈니 할머니께선 한쪽 다리를 잃고 불편하신 몸으로 우리를 위해 라면을 끓이고 계신게 아닌가! 뭉클한 마음에 그냥 돌아가신 할머니가 살아오신 듯 반갑고 애틋하고 늘 찾아뵙던 분을 다시 만난 듯 긴장이 풀렸다. 차려주신 상을 받아 라면과 맛있는 김치를 먹으며 할머니의 옛이야기를 들으며 살며보는 집은 구석구석 정갈하게 가꾸어져 있었고, 할머니의 삶을 이루는 자식이며 손주들의 흔적이 눈에 들어왔다. 결국 커피까지 얻어 마시고 가게를 나섰지만 할머니의 삶과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환대가 오래도록 나의 기억 속에 남아 나의 삶을 따듯하게 데워줄 것 같았다.

 

 

옷점 마을을 지나 다시 해안을 따라 북상하니 해안을 따라 직선으로 뻗은 제방이 나왔고, ‘고남제방길’이라고 했다. 제방길에 올라서니 새삼 시원한 바닷바람이 싱그러웠다. 맑은 햇살과 확 트인 시야, 그리고 시원한 바람까지 내 얼굴을 스쳐 지나가니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고남제방길을 지나 또다른 제방길이 이어지고 모래밭이 넓게 펼쳐진 ‘바람아래’라는 해안에 도착했다. 배낭을 벗고 모래를 만지며 쉬다가 산길로 올라서 다시 7코스 바람길의 시작점인 황포로 발길을 옮겼다. 산길을 걷다보니 오늘 걸음을 시작하고 나서 처음으로 장곡이라는 곳에서 벤치를 만났다. 잠시 쉬면서 다음 코스에 대해 아내랑 의견을 나누다보니 무엇보다 식사가 문제가 되었다. 아침과 점심을 겸해 라면 한 개를 먹은 것이 전부인데다가 얼마를 더 가야 식당이 나올까 불확실했다. 우리는 과감하게 코스를 벗어나 마을을 찾아 보기로 했다. 장곡에서 해변길을 벗어나 마을 쪽으로 걸음을 옮겼지만 역시나 식당을 찾기가 불가능했다 결국 버스로 면소재지로 나갈 마음을 먹고 장곡리 마을회관마당에서 버스를 기다렸다. 회관에 트럭이 한 대 들어서는 걸 보고 다가가 사정을 이야기하고 버스 시간을 물으니 원하는 데까지 태워줄테니 무조건 타라고 하셨다, 생각지도 못했던 고마운 분을 만나 농사이야기, 염전이며 새우 양식 이야기를 듣다보니 어느새 안면읍까지 나와버렸다.

 

 

안면수산시장에서 늦은 점심은 먹고 4km를 더 걸어 꽃지해변에 도착했다. 공원 주차장 한켠에 있는 델마호텔에서 커피를 마시고 방을 얻고 꽃지해변으로 나섰다. 통일 신라 시대 장보고 장군을 따라 출정나간 남편 ‘승언’을 기다리던 아내 ‘미도’가 끝내 돌아오지 못한 남편을 그리워하다 바위가 되었다는 할미바위와 그 할미의 한을 달래기 위해 세웠다는 할아비바위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해는 구름낀 서쪽 바다로 넘어가고 바다는 물이 빠져 우리는 저녁 어스름 속에 슬픈 사연을 품고 서있는 할미바위와 할애비바위까지 걸어 주변을 서성이며 꽃지해변의 밤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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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9일

 아침 9시경 한옥마을에서 택시로 전주고속터미날 도착, 대전행 버스를 타고 11시경 대전터미날에 도착, 태안행 버스를 기다리며 점심을 먹고 쇼핑을 즐기다가 12시반경 태안으로 출발했다. 태안에서 안면행 버스를 갈아타고 15시경 안면에 도착, 15 20분 영목행 533번버스를 타고 16시경 이번 트레킹의 출발점인 영목항에 도착했다.

 

 

조용하고 소박한 한옥민박집에서 편안한 잠을 잤다. 제공하는 조식을 사양하고 전날 들고 다니던 간식으로 아침을 떼우고 거리로 나섰다. 우리의 목적지 태안을 향해 간다는 설레임이 앞섰지만 그렇게 바쁠 것도 없는 하루를 일찍 시작했다. 택시를 타고 도착한 전주 터미널에서 쉽게 대전행 버스를 잡았다. 버스 차창을 스쳐 지나가는 풍경에 몰두 하다보니 이내 대전에 도착했다. 대전 터미널에 도착하고 보니 전날 묵었던 전주와 대비되어 촌에서 다시 도시로 나온 듯 휘황찬란했다. 붐비는 대합실과 다양한 가게들이 성업중이다보니 사람들이 마스크만 쓰지 않았다면 코로나가 오기 전 풍경과 다를 바가 없었다. 아내는 트레킹에 맞는 바지를 사고, 나는 대합실을 서성이며 다음 버스로 이어지는 여백을 만끽하며 기억창고를 살찌웠다.

 

 

대중교통으로 이어지는 하루일정이 영목항에서 끝나기까지 한번의 택시와 4번의 버스를 타야했다. 전주에서 대전으로, 대전에서 태안으로, 태안에서 안면으로, 다시 안면에서 영목으로 이어지는 버스 여행은 착착 맞아떨어지는 연결 버스 덕분에 기대보다 훨씬 짧은 시간에 목적지에 도착했다. 하루종일 차를 타는 지겨운 하루 일정중에도 대전이라는 대도시 대합실의 번화함도 즐기고, 태안의 정감넘치는 소박한 터미널의 정취도 즐기고, 안면읍의 장터에서 버스를 내려 영목으로 이어지는 버스를 기다리며 느꼈던 시골 장터의 가난하지만 따뜻한 서정조차 즐길 수 있었던 것은 내가 배낭을 메고 여행중이어서일 것이다. 마지막 늦은 오후 사람의 발길이 끊기고 무겁게 내려앉은 흐린 하늘아래 찬바람만 가득한 영목항 종점에 발을 내디딜 때 왠지 모르게 울컷 솟아나던 서글픔이 있었다. 지나간 모든 것들에 대한 아쉬움과 이제는 다시 못볼 인연들에 대한 애도의 정감인지, 아니면 바닷바람이 상기시킨 고향진해와 그 바닷가에서 놀던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어린시절의 추억 때문인지도 몰랐다.

 

 

예정된 라디오 인터뷰가 있어 미리 ‘영목항회관’에 방을 잡고 아내는 바닷가 스케치를 나갔다. 난생처음 여행지에서 준비가 덜된 라디오 인터뷰를 어설프게 마치고 막 저녁 어스름이 내리는 영목항으로 나섰다. 가설다리로 연결된 바지선을 따라 작은 고깃배들이 수십척 정박해 있는 저녁바닷가는 평화로웠다. 바람이 잦아든 해안에는 찬 공기가 내리누르고 인기척 없는 선착장엔 어둠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우리는 짧은 산책을 끝내고 숙소로 돌아와 ‘회덮밥’으로 긴 이동이 이루어진 하루의 노고를 치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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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일년, 나는 힘들 때 마다 곧 여행을 떠날 수 있다는 희망을 앞세워 견뎌 왔다. 초겨울 배추작업까지 끝난 뒤, 아침마다 된서리가 차창을 하얗게 뒤덮은 대설이 지나서야 마침내 배낭을 쌌다. 여행이 지난 고역에 대한 보상이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나는 당당히 여행할 권리를 앞세우며 일상의 의무를 내팽개치고 집을 나섰다.

늘 바다가 그립고, ‘한량없이 걷고 싶다는 아내의 제안을 받아 태안 해변길을 이번 겨울의 여행지로 선택했다. 해지는 바닷가를 한량없이 걷고 싶은 욕망이 앞섰고 무엇보다 한번도 가본적이 없는 미지의 장소라는 점 때문에 안면도를 선택했다. 일정이 다가오자 태안 군청에서 보내준 자료를 잠자리에 들 때 마다 뒤척이며 대충의 코스와 전체 여정의 얼개를 잡았다. 대중교통으로 도시간 이동을 하고 적당히 걷고, 많이 쉬고, 최대한 잘 먹는 일주일 여정의 청사진을 그렸다.

127일 배추 작업을 일달락 짓고 남은 뒷정리를 남겨둔채 짐을 꾸리고 기차표를 예매했다. 태안으로 들어가기 전 중간 기착지를 전주 한옥마을로 정하고, 8일 아침 일찍 이웃의 차를 얻어타고 영주역을 향했다. 몇일 있으면 낡은 중앙선 철도를 개선한 새 노선으로 기차가 다니게 된다는 뉴스에 그래도 봉화살이 24년동안 드문드문 신세를 졌던 낡은 중앙선 철도를 마지막으로 달리고 싶었다. 버스를 타면 전주로 바로 갈수도 있었지만 굳이 영주에서 제천, 제천에서 오송, 오송에서 다시 전주로 갈아타는 기차를 선택했다. 나의 여행은 늘 공간적인 목적지는 부수적이고, 집을 나서는 그 순간부터 시간여행이 시작되기 때문에 이동수단의 효율은 전혀 고려대상이 아니었다.

 

12월 8일 아침 7시51분영주역출발, 제천에서 오송행 열차로 갈아타고, 다시 오송에서 내려 전주행 KTX에 올라 오전 11시34분 전주역 도착, 한옥마을에서 오후 시간을 보내고 한옥민박에서 하루를 마무리 했다.

쌀쌀한 아침 공기가 플랫폼을 짓누르는 영주역 풍경이 새로웠다. 모두가 어깨를 움츠리고 마스크를 쓴 얼굴을 외투 속에 묻고서 침묵하는 긴 시간이 지난 뒤 예정보다 11분 연착한 제천행 열차가 도착했다. 751분 영주역을 출발한 열차는 낯익은 영주 시내를 돌고 풍기를 지나 소백산을 뚫고 단양, 제천으로 달렸다. 1시간이 지났을까, 그대로 북한을 지나 시베리아 까지 달려갔으면 좋으련만 언몸이 녹고 출발의 긴장이 풀릴 즈음 열차는 제천역에 도착했다. 이어지는 오송행 열차를 갈아탈 시간을 다 허비한터라 뒤도 돌아보지 않고 냅다 달려 문이 닫히기 시작한 열차에 뛰어올랐다. 아내의 배낭은 문짝에 끼여 한참을 당기고 실랑이를 벌인 뒤에야 객실에 들어설 수 있었다. 다시 오송에서 내려 이미 시간을 놓쳐버린 전주행 열차를 향해 달렸다. 다행히 달려오는 우리에게 손을 흔드는 승무원의 독려에 힘입어 사력을 다해 난생처음 타보는 KTX에 몸을 실었다.

불과 서너시간만에 3번을 경험하는 객실은 많지도 적지도 않은 승객이 하나같이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옷깃에 최대한 얼굴을 묻은채 각자의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는 침묵의 공간이었다. 열차여행은 화장실과 식당칸이 있고, 내부에서 자유로운 이동이 가능하고, 조금은 웃고 이야기하고 먹고 마시는 여유가 주어진다는 기대를 했지만 코로나 창궐기의 열차는 그러지 못했다. 난생 처음 타보는 KTX조차 꼼짝없이 좌석에 갇혀 숨막히는 침묵과 무거운 진동만을 느끼며 지루한 시간을 견뎌야했다.

점심시간에 도착한 전주역전은 한산했고 찬바람이 가득했다. 우선 허기를 달래기 위해 식당을 찾으며 전주의 공기를 통해 전주만의 느낌을 탐색했다. 조금은 낡고 스산한 거리의 풍경에서 옛 고도의 사라진 영광을 확인하기는 힘들었다. 버스로 동부시장까지 이동한 뒤 전주 한옥 마을로 향했다. 한옥마을은 최근에 가장 각광받는 여행지로 이름을 날리는 만치 코로나 와중에서도 관광지의 면모를 유지하고 있었다. 태조이성계의 초상을 모시고 있다는 경기전담벼락을 따라 소박하고 정겨운 거리를 걸었다. 한산한 중에도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드문드문 문을 닫은 가게들 사이로 뜨거운 김을 거리로 뿜으며 손님을 기다리는 가게들이 적지 않았다. 한산해서 좋으면서도 동시에 좀더 사람들의 왕래가 활발하고 문 닫은 가게들이 성업중인 활기찬 시절에 다시 한번 더 오고 싶은 마음이 일었다.

경기전을 둘러보고 한옥마을 주변 거리를 배회했다. 어진박물관을 비롯해 실내 공간은 모두 코로나로 문을 닫고 있었고, 역사 유적이나 명승지는 코로나 시기에 맞춰 수리를 하는지 하나같이 공사 중이었다. 한국 천주교 첫 순교자가 처형되었던 터에 100여년 전에 지어졌다는 전동성당을 비롯해 전주성의 풍남문, 조선시대 객사로 지어졌다는 풍패지관이 모두 공사중이라 지나쳤고, 문이 닫힌 전통문화전당 등을 스쳐지나 황량한 전주 거리를 오후 내내 걷기만 했다. 까페라도 들러 커피라도 한잔하면서 지친 다리도 쉬고 몸도 녹이고 싶었지만 테이크아웃만 가능하다니 그조차 포기했다. 전주 단팥죽과 단팥빵을 찾아 한참을 더 누볐지만 찾지 못하고 손님이 붐비는 수제만두집에서 요기를 하는 것으로 오후 일정을 접었다.

손님이라곤 우리밖에 없는 소리풍경이라는 소박하고 아기자기한 한옥 민박을 잡고, 짐을 풀고 따끈한 방바닥에 기대어 한참을 쉰 뒤에 다시 거리로 나와 저녁을 먹었다. 그냥 마무리하기에는 아쉬웠지만 뚜렷한 다른 대안이 없었다. 우리는 다시 방으로 파고 들어 읽히지 않는 책과 밤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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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작년 봄언저리에 1박2일 지리산을 다녀왔다. 백무동을 거쳐 장터목에서 1박한뒤 천왕봉을 거쳐 다시 갔던 길을 되돌아 왔다. 그 여정뒤 아쉬움이 남아 지리산 종주를 계획했다. 그리고 삶에 쫒기다 2년을 훨씬 넘긴 끝에 이번 추석연휴를 이용해 아내와 지리산 3박4일 종주를 다녀왔다.

9월20일 승용차로 봉화를 출발하여 중산리에 차를 주차하고, 버스로 성삼재까지 가서 걷기를 시작하고 노고단에서 1박, 연하천에서 1박, 그리고 세석에서 1박 한 뒤 중산리로 하산하는 코스를 잡았다. 이번 계획을 짜면서 대도시가 아닌 경북 봉화에서 지리산에 접근해서 종주하는데 교통편이 제일 문제라는 사실을 알았다. 결국 자신의 차를 이용해 시작점으로 되돌아오는 코스를 짜야했는데 이것이 그나마 가장 합리적이라고 짠 코스인 셈이다.  

[코스 개략 ]

9월  20 봉화출발 중산리 도착 -> 버스이동후 노고단 1박 / 21 연하천 1(6시간트렉) / 22 세석 1(6시간 트렉) / 23 중산리하산 (7시간트렉)

산을 걷기 시작하기 까지 종착지에 차를 대고 출발점으로 버스로 이동하기가 쉽지가 않았다. 무려 4번의 버스를 갈아타고 출발점인 성삼재까지 가는 일은 나름대로 많은 교통 정보가 필요했다. 버스시간 정보를 바탕으로 20일 하루 일정을 정리했고 그일정에 따라 움직였다. 혹시라도 일정이 흐트려지면 돈을 들여 택시로 잃어버린 시간을 많이할 수밖에 없는 조건이라서 나름 타이트한 하루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중산리-성삼재 버스 이동 정보 ]

봉화출발 5(4시간 소요) 중산리도착 910<여유40>

중산리 09:50 출발(75분 소요) 1105분 진주버스터미날도착 촉석루/점심 <여유2시간25>

진주 13:30 출발 (60분 소요) 하동도착 14:30 <50분여유>

하동 15:20 출발 (40분 소요) 구례도착 16:00 <20분여유>

구례 16:20 출발 (40분 소요) 성삼재도착 17:00 -> 노고단 (도보 40분 소요)

 

  [중산리-성삼재구간 버스 시간표]

중산리 출발 진주행 (75) : 9:50 / 11:00 / 12:20 ........

진주 출발 하동행 (60) : 12:10 / 12:40 / 13:30 / 14:10 / 15:00

하동 출발 구례 (40) : 13:30 / 14:20 / 15:20 / 16:30 / 17:30

구례 출발 성산재 (40분 소요) : 14:20 / 16:20

계획짜기도 쉽지 않았지만 출발 역시 쉽지 않았다. 배낭을 비롯해 구질구질한 장비를 작은 방 가득 늘어놓은지 오래되었지만 사실 출발 당일 새벽에야 짐을 꾸릴 수 있었다. 출발 전날 저녁 상주에서 회의가 있어 출발 당일 새벽두시에나 귀가했다. 그 시간에 급히 답해야할 메일이 와있어 형식적인 답변을 하고 자리에 누우니 몸은 천근인데 잠은 오지 않았다. 새벽 5시에 집을 나서야하는데 짐도 싸지못한채 잠을 청하니 어찌 잠이 오겠는가. 두어시간 잔듯만듯 누워있다 일어나 와이프를 깨우고 세수를 하고 짐을 챙기고 정신없이 집을 나서니 벌써 7시가 넘었다. 쉬지 않고 차를 몰아 중산리로 접어드니 계획했던 버스는 중산리 휴게소 10분전에 우리를 스쳐 지나갔. 950분발 버스를 넣치고 11시발 버스를 기다리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사진을 찍고 페북에 자랑질을 하고나니  버스가 도착했다.

중산리서 진주까지 한시간 조금 더 걸리는 길은 꼬불꼬불한 길이 문제인지 운전이 문제인지 버스는 정신없이 커브길을 꺽고 중앙선을 넘어 흔들렸다. 바깥 풍경을 즐기기에도 부족한 잠을 청하기에도 불편했다. 그 와중에 옆자리 할머니의 사연이 귀에 들어왔다. 버스 옆자리 할머니가 대전 가신단가. 막내아들이 전기공사 일을 하는데 회식을 마치고 나오다 사고를 당해 대전의 중환자실에 있다고 큰아들 연락을 받으셨단다. 큰 아들은 어머니는 괜히 올라 오지마라고 하는데 잠을 잘 수도 없고 음식을 먹을 수도 없어 혼자 낯선 대전으로 나서셨단다. 마음 급한 할머니는 원지에서 내려 한시바삐 대전으로 달려 가고싶은 마음에 기사에게 원지에서 대전가는 차를 탈 수 있는지 물으니 기사는 모른단다. 버스가 원지에 도착해 조금의 여유있는 대기 시간이 있어 정류소 직원에게 물으니 하루에 두어번 밖에 없는 노선이니 그냥 진주가서 대전가는 차편 타는게 빠르다는 답이 돌아왔다. 중산리에서 원지까지 할머니 옆자리 손님은 계속 바뀌었고 할머니는 사람이 바뀔 때마다 하소연을 반복했다. 차는 진주에 도착했고 할머니는 떠나갔지만 추석을 앞두고 아들이 불의의 사고를 당한 할머니 아픈 마음이 뇌리에 남아 지리산종주 내내 다친 아들의 쾌유를 빌었다. 

진주터미널에 도착해서 남은 조금의 시간이나마 알뜰하게 보내기 위해 짐보관소를 찾았다. 안내에 따라 70년대 조폭영화의 아지트같은 터미날 2층사무실에 두개의 배낭을 삼천원에 맡기고 터미날에서 10분거리인 진주성을 향하다. 진주성에 다와서 "북경장"이라는 예정에 없던 맛집을 만나 맜있는 만두와 짜장면으로 점심을 해결했다. 여행의 즐거움은 역시 맛있는 음식임을 확인하고 서둘러 진주성을 둘러보려 했지만 하동행 버스를 타야하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서둘러 성 외곽과 축제 준비 중이라고 각가지 조형물이 들어서고 있는 진주 남강을 내려다보는것으로 진주투어를 포기하고 다시 터미날로 북귀했다. 130분발 하동행 버스에 급히 올라 타고 다시 부족한 잠을 보충하려했지만 역시 길은 험하고 운전은 거칠었다.

도착한 하동 터미날은 작지만 깔끔했다. 다시 구례행 버스가 출발하기에는 조금의 여유가 허용되었다. 터미날을 나서서 하동읍을 구경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시간, 그냥 터미날에 설치된 TV를 통해 남북 정상의 평화회담 뉴스를 뜨거운 마음으로 시청하다 버스에 올랐다. 구례행 버스 기사는 출발과 동시에 핸드폰을 들고 끝없는 통화를 이어갔다. 기사의 머리 위쪽에는 기사가 핸드폰을 손에 들고 통화할 경우 신고하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기사는 직전에 승객이 내린뒤 버스는 출발했고 뒤늦게 하차를 요구한 승객이 있어  브레이크를 밟았고 승객은 쓰려진 사고에 대한 이야기를 반복해 이어갔다. 얼마나 다친지 모르지만 병원에 다친 승객을 보냈고 다시 버스를 출발시켰다고 했다. 그러다보니 회사와 보험사, 동료와 가족의 전화가 이어졌다. 가족과 나누는 소소한 사연까지 억지로 듣다보니 하동 구례간 한시간이 금방지났다. 다친 사랑은 신체 및 정신지체 2등급에 나와 같은 62년생인데 70먹은 노인네 몸골을 하고있었단다. 마음이 아렸지만 그분의 삶의 역정이 얼마나 험했을까 짐작할 뿐이었다. 이번 지리산으로 들어가는 길에 유달리 사연이 많았다.

구례에 도착해 보니  한산한 터미널에 등산객 차림은 거의 보이지도 않았다. 주로 새벽녘에 성삼재행 등산객이 몰리는 까닭인것 같았다. 버스가 출발하기전 터미날을 둘러보다보니 중산리행 직행 버스가 안내되고 있었다. 지리산 종주를 위해 중산리에서 성삼재까지 네 번의 버스 순례를 한 자신이 미워졌고 매표소로 달려가 직원에게 물었다. 자주 받는 질문이었을까 재밌다는 표정으로 이 중산리가 그 중산리가 아니란다. 동명의 지명일뿐이라고 했다. 실망이 아니라 안도감을 느끼며 승차장으로 돌아와 기사도 손님도 없는 성삼재행 버스에 올라탔다.

버스가 출발하고 지리산 속으로 들어가면서 점점 비가 굵어졌다. 승객이라고는 우리 부부밖에 없는 버스는 경사가 심한 꼬불꼬불한 길에 안개가 짙고 비까지 뿌렸지만 그에 굴하지 않고 잘도 달렸다. 도착한 성삼재는 인기척이라고는 없었다. 안내소 처마밑으로 비를 피해 배낭을 고쳐 맨뒤 노고단대피소를 향해 걸었다. 비를 맞으며 무거운 배낭을 지고 한시간만에 도착한 노고단 대피소는 우리포함 5명의 등산객이 전부였다. 옷과 신발 건조기가 있어 비에 젖은옷을 말리고 취사실에서 식사를 준비하니 하루의 긴장이 일시에 날아갔다. 이제 진짜 지리산이구나는 안도감이 몰려왔다.  식사를 마치고 전날 점이 부족한 탓에 9시 소등 무렵 미리 잠에 빠져들었다. 바닥은 차고 딱딱했지만 공기는 훈훈했다. 적은 인원 때문이겠지만 발냄새 없고 코고는 소리 없는 대피소에서 잠을 자는 호사를 누렸다.

새벽두시에 잠이깨고 화장실을 다녀온뒤 자는둥 마는둥 뒤척이다 아침을 맞았다. 지붕에 빗듣는 소리에 모두들 잠저리를 털고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7시가 넘어서야 내가 먼저 일어나 전등을 켰다. 밤새 아이 둘을 동반한 여성 한분이 소리없이 숙소에 합류 있었고 대피소 마당에는 아침에 성삼재에 도착해 노고단을 지나는 몇몇 등산객이  보였다. 천천히 준비한 아침을 들고  8시면 퇴소해야 된다며 빗자루를 들고 문앞에 서있는 직원에 쫒겨 대피소를 출발하려고 보니 820분이었다. 두아이팀만 두고 맨마지막으로 대피소를 나서 비오는 노고단길을 걷기 시작했다. 

노고단고개를 지나 쉬지 않고 비속을 걸었다. 노고단고개를 지나 피아골 삼거리 까지 이르자 빗물이 등줄기를 타고내리고 등산화에 물이 차기 시작했다. 커버를 잊고 와 다 젖은 배낭을 뒤늦게 지키려 비옷을 벗어 배낭에 씌웠다. 몸은 이미 다 젖어 더이상 비옷으로 가릴 이유가 없었다. 비속을 걸으니 내가 지라산을 걷고 있는지 눈으로 확인할 수 없었다. 비와 안개가 가린 나의 시야엔 지라산 풍경이라곤 없었다. 한치앞울 분간하기 힘든 짙은 안개와 빗줄기가 나의 시야를 다음 발걸음이 닿은 길바닥에 고정시켰다. 경사가 심해지면 호흡이 가파오다 다시 평지와 내리막을 만나면 호흡을 되찾았다. 비줄기가 굵어뎠다 가늘어뎠다 변화할뿐 나의 걸음은 한결같았고 마음은 걸음이 더할 수록 가벼워졌다.

삼도봉에서 호흡을 고치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아침일찍 노고단을 먼저 지나쳤던 등산객을 앞지르기도 하고, 낯선 분들이 우리를 앞서가기도하는데 우리보다 늦게 출발한 두 아이 일행은 따라오지 않았다. 오후부터 큰 비가 예보된 상황에서 걷기 시작했지만 토기봉에 이르자 마음이 한결 누그러졌다. 비가 아무리 와봤자 연하천까지는 얼마남지 않았다는 안도감이 들었고 근래에 나를 감싸던 어려운 결정의 순간이 떠올랐다. 그 결정의 연장선에서 나는 이번 지리산 종주를 계획했다. 지리산에 와서 나는 무슨 결정을 하겠다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나의 결정을 지리산에 고하고 조그만 위안이라도 안고 삶터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묻고 싶었다. 나의 결정은 순수한가,  합리적이고 온당하기나 한 것인가... 산사람들의 아우성이 빗속에 전해왔다.  나의 걸음은 더 빨라지고 1시를 조금 넘어 연하천에 도착했다. 6시간 코스를 한시간 줄여 5시간만에 도착했지만 우중산행이니 만치 쉬운 길은 아니었다.

연하천대피소는 아직 이른 시간이라 입실을 허락하지 않았다. 정식으로는 오후 6시가 입실시간이지만 4시이후에는 허용하겠다는 산장지기의 전언을 받았다. 미리 도착한  서너팀 10여명은 점심 식사후 취사실바닥에 비닐을 깔고 앉거나 누워 오후 4시까지 춥고 불편하고 무료한 시간을 견뎠다. 노고단에서 같이 지냈던 외국인 젊은 커플은 전날 저녁식사를 신라면으로 하더니 오늘 점심은 햇반으로 해결했다. 그리고 바닥에 앉아 카드가 아니라 화투놀이로 즐거웠다. 한국에 유학온지 1년되었다는 외국인 청년 커플의 현지 문화에 대한 적응력이 놀라웠다.

지루한 기다림 끝에 4시를 넘기자 규정보다 미리 입실을 허용했다.  큰 선심이라도 쓰는쓱대는 직원덕에 숙소에 들어서니 노고단에 비해 좁고 누추했고 건조기 등 설비도 없었다. 그래도 안까지 젖은 배낭을 쏟아 붇고 젖은 옷을 온기가 있는 바닥에 펴고 추위에 지친 몸을 침상에 뉘웠다. 해가 지자 온기를 회복한 몸을 일으켜 저녁을 해결하고 침실로 돌아오니 어제와는 달리 사람으로 붐비고 젖은 옷가지로 습하고, 사람 냄새와 소음으로 가득찬 불편한 잠자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잠자리에 들기전 노고단에서 만난 두 아이와 고모되는 분이 도착했다. 하루종일 걱정했던 아이들을 만나니 반갑고 고마웠다.  

연하천의 아침이 밝았다. 새벽 두어시에 잠이 깨서 마당을 서성인뒤 다시 잠자리에 들어 뒤척이다 창밖이 밝아오는 것을 확인한뒤 잠자리를 틀고 일어났다. 그래도 새벽 잠이 들었는지 숙소의 많은 침상은 비어 있었다. 세석까지의 짧은 일정 때문에 일찍 출발할 필요가 없다보니 느긋하게 아침을 해먹고 연하천대피소를 나섰다. 어제비로 말쑥히 씻긴 투명한 하늘이 우리를 반겼고 아침 걸음을 독려했다. 비록 덜마른 옷을 입고 여전히 첨벙대는 등산화를 신고 나선 걸음이지만 바람은 시원했고 햇살을 따사로왔다. 지리산에서 두밤을 지낸 뒤 처음으로 지리산의 풍모를 느끼고 그 매력에 빠져들었다. 아직은 멀었지만 살짝 선보이기 시작한 단풍이 나의 마음을 흔들었다. 어제는 보지 못했던 겹겹히 이어지는 넉넉한 지리산 자락이 그윽하게 다가왔다.

삼각봉과 형제봉을 지나 공사로 폐쇄된 벽소령에 도착해 늦은 아침을 라면으로 대신했다. 다시 벽소령을 출발해 이번 일정의 마지막 숙소인 세석평전을 향해 나아갔다. 전날까지 비속에 묻힌 지리산 자태를 재대로 느낄 수 없었기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벽소령에서 세석까지 이어지는 코스는 이전의 코스와 비교할 수 없을 만치 좋았다. 골짜기로 인해 시야가 갇히거나, 숲으로 인해 지리산의 진면모를 바라볼 수 있는 조망을 방해받지 않는 환상적인 길이 이어졌다. 연하천과 세석의 중간지점인 선비샘터에서 휴식을 취하고 다시 걷기 시작하자 한걸음 한걸음이 남은 길을 줄여나가는 기쁨이 아니라 남은 알사탕을 한알한알 까먹는 아쉬움으로 다가왔다.  

선비샘터를 지나자마자 아내의 등산화가 문제를 일으켰다. 그 신발은 2년전 안나푸르나 라운딩 때 신발 바닥이 분리되어 네팔 현지에서 수리한 신발이었다. 그 사실을 잊고 아무 거리낌없이 신고 왔는데 이것이 문제를 일으킨 것이다. 걸음을 조심해서 이번 일정을 마무리하고싶었지만 한번 분리되기 시작한 바닥은 금새 걷기가 불가능할만치 벌어져버렸다. 임시방편으로 고무줄을 매고 결국은 양말로 신발에 신기는 조처로 위기는 모면하는 듯 했지만 불편한 신발이 걷는 자세를 흐트려버렸는지 아내는 갑자기 무릅통증으로 걷기가 불편해졌다.  할 수없이 걷는 속도를 줄이고 예정보다 늦게 세석에 도착했는데 세석대피소는 시골 장터 못지 않게 인파로 넘쳐났다. 식사를 할 수 있는 마당의 탁자는 빈자리가 없었고, 양방향으로부터 계속해서 새로운 사람이 도착을하고 또 쉬었던 사람들이 떠나갔다.

세석의 밤이 다가오자 숙소는 배정되었고, 사람들은 자신의 짐을 챙겨 침낭으로 기어들었다. 세석대피소의 침상은 너무좁았다. 옆사람과 분리된 조금의 공간도 없는 그야말로 옆사람과 어깨가 부딪는 잠자리였다. 나는 숙면을 위해 거실같은 공간으로 잠자리를 옮겼고, 밤새 사람들이 들고 날고 조금 춥기가지한 잠자리였지만 차라리 낯선 사람과 얼굴을 맞대고 자는 것 보다는 훨씬 편안하고 깊은 잠을 잘 수 있었다. 거실에 잠자리를 편 덕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밤새도록 사람들은 야간산행을 떠나고 대피소에 도착하고 있었다. 안전상행을 위해 몇시 이후에는 출발하지 못하게하는 규정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어두운 뒤에 중산리 쪽에서 올라오는 사람들이 있었고, 새벽 두어시가 되자 짐을 꾸려 대피소를 나서는 사람들이 있었다. 

3박4일의 지리산 종주를 마감하는날 새벽 5시에 잠자리를 걷고 일어나 과일로 요기를 하고 5시 30분경 길을 나섰다. 이른 시간인줄 알았지만 취사실은 일출을 보기 원하는 사람들로 북적였고 우리와 비슷하게 숙소를 나서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숙소를 나선지 얼마되지 않아 완만한 언덕을 한참 오르니 일출 조망이 좋은 촛대봉에 이르렀다. 벌써 많은 분들이 카메라 삼각대를 펼치고  대기하고 있었고, 폰으로 동영상을 찍었다. 우리도 배낭을 벗어던지고 동쪽 하늘을 향해 바위에 걸터 않았다. 남은 과자로 요기를 하고 구름에 가려 지체된 일출을 기다리다가 붉은기운이 번지는 아침 하늘을 폰에 담은 것으로 만족하고 다시 길을 걸었다. 장터목에서 천왕봉을 포기하고 중산리로 하산을 시작했다. 고장난 신발과 아내의 무릎탓도 있었지만 2년전 올랐던 찬왕봉을 이번에는 왠지 남겨두고 싶었다.

장터목에서 중산리까지의 길은 계곡의 흐름과 헤어지고 다시 만나기를 반복하며 가파른 내리막이 이어졌다. 길과 계곡이 교차하고, 멋진 폭포와 큰 바위로 이루어진 중산리 계곡은 기대하지않은 큰 선물로 다가왔다. 큰 산이 만든 큰 계곡은 나름의 멋을 뽐내고 있었고 중산리의 유명세가 이해되었다. 3시간거리를 거의 5시간만에 주파하고 중산리 출발점에 도착했다. 도착해서 보니 자동차키를 찾을 수 없었다. 결국 농사 동료이자 이웃에게 무리한 부탁을 하고 늦었지만 무사히 추석 전날 늦은 시간에 집에 도착했다. 더 늦기 전에 경험한 지리산 종주기도 했고 나름의 큰 결정 뒤에 마음을 다잡기 위한 산행이기도 했던 3박 4일의 지리산 종주를 무사히 마무리했다. 뒤돌아보니 잊지 못할 벅찬 산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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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디보스톡을 떠난 시베리아 횡단열차는 우수리강이 아무르강을 만나는 도시 하바롭스크를 향해 밤새 달렸다.  시베리아횡단열차가 주는 낭만적인 서정에 젖어 4인실침대칸에 자리잡은 우리 일행은 들뜬 기색을 감출 수 없었다. 열차바퀴가 내는 규칙적인 마찰음을 능가하는 한껏 높은 톤으로 대화를 나누고 한국에서 가져온 소주와 컵라면으로 허기를 채웠다. 하지만 아쉽게도 창밖은 암흑천지라 사방을 분간할 수도 없었고, 좁은 공간은 우리를 쉬지치게해 자정이 되기전에 각자의 침대에 누웠다.  하지만 누구도 쉬 잠들지 못하는 것 같았다. 생각보다 거친 열차의 진동과 밤새 쉬지 않고 울리는 경적소리, 그리고 잠이 들려고 하는 순간 굉음을 지르며 마주 스쳐지나가는 반대차선의 열차는 눈을 번쩍 뜨게 만들었다. 하룻밤 사이 환상은 깨어지고 열차를 타고 시베리아를 횡당하겠다던 나의 버킷리스트가 한개 줄어들었다.

쉬지않고 몸을 뒤척이는 사이 몸의 피로는 더 깊어지고 거의 몸과 의식이 동시에 축 쳐져 나갈 즈음 창밖은 밝아지기 시작했고, 아직 벌판의 어둠이 채가시지도 않았는데 승무원의 거친 손은 4인분의 아침 도시락을 객실에 던져주고 갔다. 그래도 늘 밥은 반가운 법, 모두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잼과 팬케익을 꾸역꾸역 먹기 시작했다. 그렇게 도착한 하바롭스크는 블라디보스톡과는 또 다른 느낌으로 우리를 맞았다.

버스로 조금을 달려 레스토랑에서 러시아식 조식을 먹고 곧장 우리는 러시아식 전통사우나인 "반야"를 하기위해 자작나무 숲속의 작은 리조트를 찾았다. 6~8명이 들어가는 반야는 탈의실과 화장실 그리고 작은 침실과 사우나실로 이루어져있었고, 바깥에서 장작과 석탄으로 불을 지피며 사우나실 내부의 자갈이 달구어지는데 그 달구어진 자갈에 물을 뿌려 뜨거운 수증기를 피워서 몸을 댑히는 방식으로 색다른 체험을 우리에게 선사했다. 자작나무 잎으로 뭉쳐만든 빗자루 같은 걸로 몸을 때려주면 몸을 더 잘 댑힐 수 있다는 가이드의 설명을 충실히 따랐다.

 

오전시간을 반야에서 보내고 우리는 동방정교회 구세주 성당을 들러 천정을 올려다보며 세바퀴를 돌면서 소원을 빌었다. 난,ㄴ 전쟁의 공포가 더이상 한반도를 지배하지 말기를, 그리고 남북이 평화롭게 공생하는 합의에 이르고 미국이 우리의 삶을 좌우하는 국면이 하루빨리 끝나기를 빌었다. 성당을 나와  향토박물관을 관람하고 우초스전망대를 찾아 아무르강의 광활하고 삭막한 풍경을 눈에 담고, 다시 꼼소몰스까야 광장을 거쳐 얼어붙은 아무르강을 만났다. 바다같은 강은 광야로 변해있었고, 매서운 강바람은 나의 귀를 때렸다. 이 강가 어디선가 김알렉사드라가 총살을 당하고 그 시신이 버려졌다는 사실을 상기하고 역사적 소명과 한 인간의 결기를 생각했다. 하바롭스크주민들은 김알렉산드라의 시신이 버려진 아무르강에서  2년간 물고기를 잡아먹지 않았다는 전설같은 이야기를 상기하며 한민족 볼세비키 지도자였던 그녀의 명복을 빌며 그녀가 삶을 걸었던 민족해방과 게급해방을 꿈을 상기했다.

 

아무르강을 벗어나 우리는 현지주민과 만나는 중앙재래시장을 찾았다. 한시간20여분의 자유시간을 얻고 시장골목과 연접한 백화점을 둘러 보며 짧은 여정의 아쉬움을 달랬다. 낯선 건과일들 향신료 그리고 골동품에 이르기 까지 추운날씨 탓에 인적이 붐비지는 않았지만 시장은 없는 것이 없었다. 꿀과 연어, 그리고 한국식 반찬과 각가지 쏘시지와 치즈 등 사고 싶은것은 많았지만 원앙새목각 딱하나를 400루블을 주고 샀다. 이번 여행의 징표로 오래동안 둘수있다는 사실과 색감이 마음에 들었기때문이다. 

중앙재래시장을 벗어나 얼음조각공원으로 꾸려진 레닌광장을 찼았다. 갖가지 얼음 조작이 광장을 채우고 있었고, 아이들을 동반한 시민들의 발걸음이 이어지고 있었다. 일행을 벗어나 현지인들 무리에 몸을 숨기고 그들과 걸음을 맞춰 저녁색이 짙어지는 공원을 마냥 걸었다. 아쉬움을 가슴 가득안고 숙소인 인뚜리스트 호텔로 향하며 해지는 러시아의거리, 하바롭스크의 거리를 가슴과 폰에 담았다. 언제 다시 올수있을까... 나는 또하나의 그리움을 가슴에 담고 하바롭스크의 밤을 맞았다.

이번 여행은 봉화군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위원들의 워크삽 명분으로 3박4일 일정으로 블라디보스톡과 하바롭스크를 방문하는 프로그램으로 인솔자 포함 26명의 일행이 함께했다. 이질적인 사람들로 양분된 위원간 이질감을 줄이고 유대를 강화하는 것이 목적이었고, 부수적으로는 연해주 독립운동의 현장을 답사하는 것이었다. 사실 나랏돈으로 하는 단순 유흥관광적인 성격에서 완전히 자유스럽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위원들중에는 개인적으로 연해주 한민족사에 대한 이해를 깊이하고 조선공산당의 초기활동과 민족해방운동의 이해를 통해 역사의식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이번 여행을 통해 단편적으로나마 듣게된 러시아의 삶은 나에게 많은 호기심을 자극했다. 이미 자본주의화되고 푸틴 독재에 가까운 정치체제가 되었지만 그래도 사회주의적 자취가 남아 가정용 전기가 거의 공짜에 까깝고 의료와 교육 역시 사회적 보장정도가 상당하고 성공과 돈에 대한 집착이 거의 없다는 사실은 놀라웠다. 그리고 여성상위적인 사회정책으로 인해 결혼후 이혼이 여성에게는 횡제고 남성에게는 재앙이라는 사실, 그와 무관하게 러시아인들은  한주에 몇일은 꼭 저녁식사를 가족이 함께하는 가정적인 사람들이지만 이혼율은 70%에 달한다는 것도 참 의아했다. 사람들은 가정적이고 화목한 가정생활을 누리는데 이혼율은 높다는 사실은 무엇을 말하는지 잘 이해할 수없었다. 가정에 정성을 다하지만 집착하진 않는다?

그리고 '블라디보스톡'이 '동방으로 진군하라!'는 군사적 구호이고 여전히 중요한 극동 군항이고 러시아가 혁명의 나라라서 그런걸까? 혁명전사 혹은 군인에 대한 예우가 보편화되어있고 도심의 요지에 있는 추모탑과 연중이어지는 시민들의 방문과 헌화, 그리고 자식 세대에게 전해주는 자긍심이 느껴졌다. 대중 매체나 거리에서 밀리트리룩을 쉽게 접할 수 있고 군대에 대한 높은 자긍심이 보여주는 것은 힘에 대한 숭상이나 국가주의적 잔재일까 아니면 민중혁명을 통해 만든 나라에 대한 자부심의 발로일까? 루스키다리아래 해군기지에는 갖가지 전투함과 잠수함까지 언바다에 갇혀 침묵하고 있었다.

또 한가지 인상은 러시아인들이 참 아름답다는 것이었다. 쭉쭉 뻗은 손발이며 몸매, 뚜렷한 이목구비 등 그냥 만나는 사람마다 다 배우같은 선남선녀들 뿐이었다. 너무 이뻐서 현실감이 없고 그냥 깍아놓은 인형같았던 소년 소녀들도 인상에 남는다. 조금은 시크한 분위기가 러시아 훈남훈녀의 아름다움을 더해주는것 같기도하다.

그리고 남는 아쉬움 3가지를 기록하고 싶다. 먼저 김알렉사드라 추모비를 찾지 못한 점은 못내아쉬웠다. 물론 연해주 독립운동의 자취가 선재한 우수리스크 방문도 다음 과제로 남겨야했다. 둘째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되었다가 다시 돌아와 만든 한인촌인 '우정마을'이 한국인의 무례에 분노해 한국인의 입장을 막아버렸다는 사실은 나의 가슴을 참 아프게했다. 이 문제의 원인을 찾고 해결을 위한 노력이 없어보여 참 가슴아팠다. 그리고 2차대전 종전후 남북 공히 버렸던 사할린 동포에 대한 이야기는 도대체 국가와 민족이란 무엇인지 다시한번 되묻게 했다.  버려졌던 동포에 대한 국가적 사죄와 그들의 상처를 치유과하기 위한 노력이 꼭 필요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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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2월 7일 양양을 출발 블라디보스톡에 도착  1박하고 다음날 야간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11시간 30분 달린 뒤 하바롭스크에 도착, 1일 관광후 다시 1박, 2월 10일 아침 하바롭스크 공항을 출발 양양에서 여정을 마무리함

승객 26명을 태운 비행기는 텅빈 양양 공항을 이륙했다. 목적지는 블라디보스톡. Yakutia Aero 라는 러시아 국적 항공사 비행기를 탄 덕분에 우리는 북한상공을 지나 블라디보스톡으로 가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래서 국적기에 비해 30분에서 1시간 빨리 도착한다고 했다. 그러나 비행기는 북한 상공을 지나지 않았고 북한 산하를 볼수 있다는 기대는 허무하게 무산되었다. 그래도 나의 설렘은 다른데서 왔다.  우리일행이 탄 보잉 737-800기는 오직 우리일행 26명만을 만을 위한 전세기라고 했다. 항공사가 도대체 어떻게 타산을 맞추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 내가 알 바는 아니었다. 남과북의 대치 덕분에  남쪽방향으로 이륙한 비행기는 곧바로 북쪽을 향해 유턴을 해서 울릉도 근해를 지나 블라디보스톡으로 방향을 잡았다.

처음 타보는 러시아비행기는 여는 비행기와 다르지 않았다. 우리 국적기 같이 젊고 아리따운 승무원이 아니라 나이에 무관하게 승무원을 채용한 유럽 비행기라는 느낌이 든 것은 그렇다고 해도  승무원의 무표정은 분명히 한국과 다른 것 같았다. 이륙후 10분이 지나지 않아 안전고도에 도달했는지 무표정한 승무원은  음료수 서비스를 하고 기내식을 나눠줬다. 애써 웃어주니 웃음으로 답해주긴했지만 여행안내서에서 소개한 러시아인의 무표정 뒤에 숨겨진 따뜻함과 친절함을 확인하기에는 비행시간이 너무 짧았다. 이륙 한시간 20분만에 우리 비행기는 바다를 건너 시베리아가 시작하는 육지로 접어들었다.

1시간 시차의 블라디보스톡에 도착해서 가이드를 조우하고 곧바로 대절해 놓은 버스에 올랐다. 3박4일중 첫날의 일정은 오직 블라디스톡에 도착하는 것이 전부였다. 공항을 나와 버스를 타고 식당으로 이동해 저녁식사를 하고 현대호텔에서 잠을 자는 것이 소증한 3박4일중 1박1일이라는 사실이 많이 아쉽기는 했지만  친절한 가이드를 통해 몇가지 주의점과 러시아 문화에 대한 소개를 듣는 것으로 그나마 허기를 달랠수는 있었다.

블라디보스톡 유일한 5성급호텔이고, 현대 사옥과 같은 외관을 지닌 현대 호텔에서 짐을 풀고 곧바로 잠을 청하기에는 블라디보스톡에서의 밤이 아쉬웠다. 4명의 동지가 작당을 하고 호텔을 나와 블라디보스톡의 밤길을 나섰다. 하지만 호텔에서 멀리 벗어나기에는 우리의 여행경험은 적고, 두려움은 많았다. 호텔과 아주 가까운 곳에 위치한 Saint Pub이라는 맥주 바 같은 곳을 들어가니 우리가 환영받는 손님인지는 확인할 수 없었지만 적어도 배척하는 기색은 없었다. 안되는 언어로 어렵게 술과 음식을 시켜 늘 같이 고생만하고 부귀영화와는 거리가 먼 동지 들과 러시아에서의 화려한 첫밤을 같이햤다. 다가오는 선거와 지역정치 그리고 남북 대치와 통일 그리고 항구적인 반도의 평화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 늦게 돌아온 호텔에서는 일부 일행이 소주에 절어 훌라 삼매경이다.

화려한 조식을 마치고 둘째날의 일정은 신한촌 방문으로 시작했다. 1900년대 초반의 이주의 역사와  파란속에서 자존과 삶을 지켜온 같은 민족의 흔적을 마주치는 일은 나에게 낯설고 힘든 일이었다. 여행전에 [조선공산당사]를 통해 알게된 1910년대 연해주를 일대의 볼세비키 혁명가이자 독립운동가들의 삶을 낱낱이 살피기에는 여행 성격이나 동행한 일행들의 성향에 비추어 불가능하겠지만 적어도 나는 최재형과 김 알렉산드라는 만나고 싶었다. 저녁무릅 아르바트 거리에서 최재형은 몰라도 한국 청년들은 다 아는것 같은 소위 "해적커피"를 한잔하고 나서 인근에 있는 최재형선생의 생가를 찾는 것으로 나의 기대는 접어야 했다. 김알렉산드라는 만나는 것은 예정된 일정상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신한촌은 개발되고 오직 비석만으로 그 흔적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초라하고 무미건조했을 비석공원은 한분의 의인으로 인해 빛을 발하고 있었다. 리바체슬라브선생! 그분을 만난것은 헛된 감상과 무익한 너스레로 끝날 이번 여정을 뜨거운 역사의식과 인간에 대한 믿음을 확인하는 값진 기회로 만들어주었다. 신한촌기념비를 한국에서 만들어 불라디보스톡으로 싣어오는 과정에서 세관의 횡포로 어려움에 처하자 저신의 재산을 털어 관세를 내어 통관을 시키고 기념비 설립후에도 주변건물에 막혀 초라하게 묻힌 기념비나마 지키기위해 비 옆에 움막을짖고 사시사철 살아오셨단다. 10여년전 그분의 공적이 국내에 알려져 민주평화통일자문위원에도 위촉되었지만 그 이후 어떤 지원이나 예후가 이었는지 알려진 바는 없다. 3년전 중풍이 온 후에도 인근으로 가족을 이사시켜 출퇴근하며 기념비를 지키고 계신다고했다. 비를 지키는 일이 어떤 의미인지 감히 물을수 없었지만 나는 그냥 고개가 숙여지고 숙연해졌다. 삶은 어쩌면 작고 단순한 것에서 그 숭고함이 빛을 발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신한촌 기념비공원에서 단체 기념 사진을 찍고 우리 일행은 브라디보스톡 시내를 여러번 가로지르며 유명 관광지와 유적지를 주유했다.  인구 60만 정도의 규모 때문인지 도로로 인한 동선 때문인지 우리가 묵은 호텔앞을 이날 하루동안 서너번은 다시 지나간 것 같았다. 해짧은 하루동안 너무 많은 것을 볼수 있어 기억의 타래가 바로 얽히기 시작했다. 그래도  금각교가 내려다 보이는 독수리전망대라 불리는 언덕위에 세워진  러시아 문자를 창제했다는 끼릴형제의 동상, 알레우트스카야 거리의 기차역과 철도 박물관, 레닌동산과 율부리너 동상을 구경하고, 전쟁공원의 꺼지지않는 불과  니콜라이 개선문을 둘러봤다.  그리고 잠수함 박물관과  루스키 다리를 건너 학생 4만명에 교수만 5천명이나 된다는 극동연방대학교를 지나 '북한섬'이라 불리는 해안가에 찬바람을 맞고 우리는 아르바트 거리로 돌아와 하루를 마무리하고 랍스타로 배를 불린뒤 블라디보스톡기차역으로 향했다.

 나의 버킷리스트중의 하나인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유라시아를 가로지르는 꿈을 실현하기에는 아직 여건이 안되지만 그 맛봬기를 할 기회가 왔다. 블라디보스톡에서 시베리아 횡단철도로 약 1000km를 달리면 나오는 하바롭스크를 향해 우리는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벅찬 하루의 긴장과 피로를 풀기위해 신발끈을 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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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지난해는 다사다난했다고 한다.

나에게 지난해 역시 그랬다.

봄가뭄과 고라니로 고생만 한 밤호박 농사,

다시 초가을 가뭄과 초겨울 장마 그리고 늦더위로 역시 고생만 한 배추농사로

한해 참 힘겹게 보냈다.

그리고 한중 FTA 등으로 농업의 사회적 여건이 악화되는 것을 막기위해 

동분서주한 농민회 활동과 11월 14일 전국민중대회를 시작으로 

계속 이어지던 투쟁 그리고 백남기 농민형제가 쓰러진 자리를 지켜내기 위한 농성...

그뿐 아니라 책임을 지고 있는 봉봉협동조합의 출구없는 경영악화,

비젼과 에너지가 고갈된 10몇년을 종사해온 비나리마을 공동체 사업...

이 모든 것이 지난 3월 27일 봉봉협동조합 총회를 기점으로 일단락지어졌다. 

지난 일은 다 묵은 해의 기억들이 되었고 이제부터 만들어나갈 시간은 고스란히 내 손아귀에 있으니...

총회가 끝나자 마자 바로 배낭을 쌌다. 

지리산 장터목 1박을 시작으로 이후 일정을 정해나갔는데

막연히 가보고 싶었던 여수 밤바다에서 1박,

그리고 유년의 기억을 확인하고 싶어 마지막 1박을 진해 군항제 전야제에 맞첬다.



늘 산언저리에서 얼정거리기만 했던 지리산 속으로 들어가

산을 통해 사람과 역사를 느끼고, 

천왕봉에서 넘실넘실 펼쳐진 산의 바다를 바라다 보며

고갈된 삶의 에너지를 채웠다.

산사람의 함성을 들으며 그들이 꿈꿨던 세상과

지금의 세상은 얼마나 가까워졌는지,

그리고 그 세상을 앞당기기 위해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생각했다.

세상은 여전히 정의롭지 못하고 

그들 산사람들이 가졌던 그런 비장함이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삶과 역사는 결코 가볍지 않다.


장터목 대피소의 1박은 불편했지만 설레였고

백무동의 무미건조하고 가파르기만 한 등산로는 나를 지치게 했지만

그래도 오르락내리락거리면 만난 사람들의 표정은 

살만한 삶을 기대하게 하는 기운을 전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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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을 서편으로 반바퀴 돌아 두시간에만에 도착한 여수 밤바다.

새로운 삶을 향한 모험이 시작되는 항구의 서정에 끌려 도착한 여수는 

기대에 어긋나지 않는 설레임이 기다리고 있었다.

갯내음 맡으며 바닷가를 걷고, 한상 가득 해물이 넘치는 밥상을 받고

도시와 바다가 만나는 어시장을 스쳐지나 항구의 밤을 만끽했다.

난생 처음 게스트하우스에 짐을 풀고 낯선 젊은 친구들을 만나 

여행의 설레임과 삶의 희망들을 나누었던 기억은 참 오래갈것 같다.

나에게 난생 첫 게스트하우스가 된 여수 곰하우스가 번창하길 빌어본다.



http://gomguesthouse.modoo.at/


승용차를 버리고 케이블카와 버스 그리고 걷기로 여수의 하루를 보냈다. 

돌산도와 향일암, 그리고 오동도... 어디를 가도 바다는 시원했고, 마을은 아름다웠다.

아름다운 산세와 만난 바다가 멋진 해안선을 만들고

갈매기는 파도소리에 맞춰 생명의 자유를 춤췄다.

봄햇살과 바닷바람 맞으면 걷는 돌살도의 길은

언젠가 다시 한번 더 멀리 오랜시간 걷고 싶은 위시리스트로 남았다.



여수와 순천 그리고 진주로 이어지는 길목에서 지는 해를 맞으며,

유년의 기억을 찾아 진해로 향햤다. 

1963년부터 시작한 군항제는 한해 먼저 세상에 태어난 나와 함께 나이를 먹어 이제 54회를 맞았단다.

화려한 불꽃놀이로 시작되던 군항제는 전국의 거리예술가와 스커스단은 물론

소매치기와 야바위꾼이 다 몰려 세상의 온갖 볼거리와 먹을 거리 그리고 즐길거리로 가득찾던 

시절로 나의 유년을 만들어주었다.

하지만  유년의 기억 뒤엔 한번도 군항제 전야제의 불꽃을  볼 수 없었다.

모처럼 만든 기회에 기억을 잃어가는 어머니와 함께

지난 기억을 되살리고 새로운 추억을 만들기 위해 진해거리를 나섰다.

진해의 거리를 걷고 ,어깨 부딪고, 먹고, 놀았다. 



 

3박4일의 지리산-여수-진해 여행을 마쳤고,

다시 한해의 농사와 농민회 그리고 봉봉협동조합의 업무가 시작되었다.

지쳐 스러질것 같은 몸에 새로운 에너지가 채워졌고

다시 힘겨운 일년을 견딜 자신을 얻었다.

여행은 참 좋다. 세상의 모든 행위에는 후회를 남긴다. 사랑조차도 그렀다.

하지만 오직 여행만은 그렇지 않을 것 같다. 

나에게 후회되는 여행은 없다.

자 다음 여행을 위해 올 한해 열심히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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