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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일년, 나는 힘들 때 마다 곧 여행을 떠날 수 있다는 희망을 앞세워 견뎌 왔다. 초겨울 배추작업까지 끝난 뒤, 아침마다 된서리가 차창을 하얗게 뒤덮은 대설이 지나서야 마침내 배낭을 쌌다. 여행이 지난 고역에 대한 보상이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나는 당당히 여행할 권리를 앞세우며 일상의 의무를 내팽개치고 집을 나섰다.

늘 바다가 그립고, ‘한량없이 걷고 싶다는 아내의 제안을 받아 태안 해변길을 이번 겨울의 여행지로 선택했다. 해지는 바닷가를 한량없이 걷고 싶은 욕망이 앞섰고 무엇보다 한번도 가본적이 없는 미지의 장소라는 점 때문에 안면도를 선택했다. 일정이 다가오자 태안 군청에서 보내준 자료를 잠자리에 들 때 마다 뒤척이며 대충의 코스와 전체 여정의 얼개를 잡았다. 대중교통으로 도시간 이동을 하고 적당히 걷고, 많이 쉬고, 최대한 잘 먹는 일주일 여정의 청사진을 그렸다.

127일 배추 작업을 일달락 짓고 남은 뒷정리를 남겨둔채 짐을 꾸리고 기차표를 예매했다. 태안으로 들어가기 전 중간 기착지를 전주 한옥마을로 정하고, 8일 아침 일찍 이웃의 차를 얻어타고 영주역을 향했다. 몇일 있으면 낡은 중앙선 철도를 개선한 새 노선으로 기차가 다니게 된다는 뉴스에 그래도 봉화살이 24년동안 드문드문 신세를 졌던 낡은 중앙선 철도를 마지막으로 달리고 싶었다. 버스를 타면 전주로 바로 갈수도 있었지만 굳이 영주에서 제천, 제천에서 오송, 오송에서 다시 전주로 갈아타는 기차를 선택했다. 나의 여행은 늘 공간적인 목적지는 부수적이고, 집을 나서는 그 순간부터 시간여행이 시작되기 때문에 이동수단의 효율은 전혀 고려대상이 아니었다.

 

12월 8일 아침 7시51분영주역출발, 제천에서 오송행 열차로 갈아타고, 다시 오송에서 내려 전주행 KTX에 올라 오전 11시34분 전주역 도착, 한옥마을에서 오후 시간을 보내고 한옥민박에서 하루를 마무리 했다.

쌀쌀한 아침 공기가 플랫폼을 짓누르는 영주역 풍경이 새로웠다. 모두가 어깨를 움츠리고 마스크를 쓴 얼굴을 외투 속에 묻고서 침묵하는 긴 시간이 지난 뒤 예정보다 11분 연착한 제천행 열차가 도착했다. 751분 영주역을 출발한 열차는 낯익은 영주 시내를 돌고 풍기를 지나 소백산을 뚫고 단양, 제천으로 달렸다. 1시간이 지났을까, 그대로 북한을 지나 시베리아 까지 달려갔으면 좋으련만 언몸이 녹고 출발의 긴장이 풀릴 즈음 열차는 제천역에 도착했다. 이어지는 오송행 열차를 갈아탈 시간을 다 허비한터라 뒤도 돌아보지 않고 냅다 달려 문이 닫히기 시작한 열차에 뛰어올랐다. 아내의 배낭은 문짝에 끼여 한참을 당기고 실랑이를 벌인 뒤에야 객실에 들어설 수 있었다. 다시 오송에서 내려 이미 시간을 놓쳐버린 전주행 열차를 향해 달렸다. 다행히 달려오는 우리에게 손을 흔드는 승무원의 독려에 힘입어 사력을 다해 난생처음 타보는 KTX에 몸을 실었다.

불과 서너시간만에 3번을 경험하는 객실은 많지도 적지도 않은 승객이 하나같이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옷깃에 최대한 얼굴을 묻은채 각자의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는 침묵의 공간이었다. 열차여행은 화장실과 식당칸이 있고, 내부에서 자유로운 이동이 가능하고, 조금은 웃고 이야기하고 먹고 마시는 여유가 주어진다는 기대를 했지만 코로나 창궐기의 열차는 그러지 못했다. 난생 처음 타보는 KTX조차 꼼짝없이 좌석에 갇혀 숨막히는 침묵과 무거운 진동만을 느끼며 지루한 시간을 견뎌야했다.

점심시간에 도착한 전주역전은 한산했고 찬바람이 가득했다. 우선 허기를 달래기 위해 식당을 찾으며 전주의 공기를 통해 전주만의 느낌을 탐색했다. 조금은 낡고 스산한 거리의 풍경에서 옛 고도의 사라진 영광을 확인하기는 힘들었다. 버스로 동부시장까지 이동한 뒤 전주 한옥 마을로 향했다. 한옥마을은 최근에 가장 각광받는 여행지로 이름을 날리는 만치 코로나 와중에서도 관광지의 면모를 유지하고 있었다. 태조이성계의 초상을 모시고 있다는 경기전담벼락을 따라 소박하고 정겨운 거리를 걸었다. 한산한 중에도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드문드문 문을 닫은 가게들 사이로 뜨거운 김을 거리로 뿜으며 손님을 기다리는 가게들이 적지 않았다. 한산해서 좋으면서도 동시에 좀더 사람들의 왕래가 활발하고 문 닫은 가게들이 성업중인 활기찬 시절에 다시 한번 더 오고 싶은 마음이 일었다.

경기전을 둘러보고 한옥마을 주변 거리를 배회했다. 어진박물관을 비롯해 실내 공간은 모두 코로나로 문을 닫고 있었고, 역사 유적이나 명승지는 코로나 시기에 맞춰 수리를 하는지 하나같이 공사 중이었다. 한국 천주교 첫 순교자가 처형되었던 터에 100여년 전에 지어졌다는 전동성당을 비롯해 전주성의 풍남문, 조선시대 객사로 지어졌다는 풍패지관이 모두 공사중이라 지나쳤고, 문이 닫힌 전통문화전당 등을 스쳐지나 황량한 전주 거리를 오후 내내 걷기만 했다. 까페라도 들러 커피라도 한잔하면서 지친 다리도 쉬고 몸도 녹이고 싶었지만 테이크아웃만 가능하다니 그조차 포기했다. 전주 단팥죽과 단팥빵을 찾아 한참을 더 누볐지만 찾지 못하고 손님이 붐비는 수제만두집에서 요기를 하는 것으로 오후 일정을 접었다.

손님이라곤 우리밖에 없는 소리풍경이라는 소박하고 아기자기한 한옥 민박을 잡고, 짐을 풀고 따끈한 방바닥에 기대어 한참을 쉰 뒤에 다시 거리로 나와 저녁을 먹었다. 그냥 마무리하기에는 아쉬웠지만 뚜렷한 다른 대안이 없었다. 우리는 다시 방으로 파고 들어 읽히지 않는 책과 밤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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