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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2C 외씨버선길 개발을 위한 제주올레 체험연수를 떠나다.

2010년 5월 13일 아침, 안동상공회의소 마당에 차를 세우고 대절한 버스에 올랐다. 일행은 모두 스무명 남짓, 봉화군과 영양군, 영월군과 청송군에서 공무원 14명과 민간인 4명해서 18명이 함께했고, 그리고 인솔자인 경북북부연구원 사무국장이 같이했다.
대구공항에서 경북대 권오상 교수가 합류하고, 제주공항에 도착하자 생산성본부 관계자 가 합류하고 저녁에 따로 합류하신 분까지 합쳐 일행은 총 25명이 되었다.

이번 제주행의 목적은 경북 북부지역의 낙후지역으로 알려진  봉화,영양,영월,청송의 4개군이 합쳐 청정 오지라는 지역조건에 맞는 걷기길을 만들어 나가는데 제주 올레길의 성공사례를 배우는 것이다. 걷기가 붐이되고, 지리산 둘레길, 북한산 둘레길, 소백산자락길, 부안 마실길 등
전국에 갖가지 걷기길이 생겨나는 시점에 BY2C라 불리는 4개군도 가칭 '외씨버선길'이라는 걷기 길을 추진하기 위해서란다. 그동안 몇번의 심포와 회의가 있었다고 했지만 참가하지 못했고 간접적으로 그런 길을 만든다는 소식만 들어오다 이번 제주 올레길 탐방길에 따라 나서게 된 것이다.

어쩌면 2여년동안 드문드문이지만 마을걷기를 하고 
그 소식을 마을 홈페이지 등에 올려온 까닭에 봉화군청의 
업무관계자가 청해준 것이 아닐까 생각했지만 담당자는
내가 이번 연수에 따라 나서게 된 것은 그런 연유가 아니라고 했다.  
1년전 제주 올레길을 맛만 보고 언제 다시 차근차근히
걷고 싶은 마음이 마음 한구석에 있었기 때문에
청을 쉬 받아들여 이날 여정에 함께하게 되었다.


연수일정은 1일차에 올레7코스를 걷고, 밤에 워크삽을 가지고
2일차에는 오전에 사단법인 제주올레의 안은주선생으로 부터 
'올레기획의 의의와 지역사회의 변화'라는 내용의 강의 듣고
오후에는 10코스를 걷는 것으로 짜여져 있었다. 
전체적으로 빡빡한 일정이었지만 올레길을 걷게된다는 기대와
우선 봄날 제주도를 다녀올 수 있다는 기대만으로도 
가슴부푼 여정이 되었다.


숙소인 풍림리조트에 도착하자마자 짐도 풀지 못한채 올레를 나섰다.
올레길 7코스는 외돌개에서 월평항구까지 총 15km의 코스지만 
풍림리조트가 그 코스 중간에 있는 까닭에 풍림리조트에서 역으로
7코스의 출발점인 외돌개로 방향을 잡았다.
일행이 대부분 산골에 사는 분들이라서 그런지
단지 바닷가를 걷는다는 것 만으로도 다들 상기된 표정이셨다.
처음부터 올레길 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올레길이 인기를 끌면서 갑자기 영업에도 큰 도움도 얻게되었던
풍림리조트는 올레길 관련한 안내데스크나 물품기증테이블, 올레우체국등을 운영하고,
무료셔틀 버스를 운행하고 화장실까지 개방하였다.
그와같은 취지로 개방한 풍림리조트의 정원을 통해
바닷길을 걷기 시작했다.
청명한 하늘을 지고 따갑지 않은 봄햇살을 받으며
맘껏 바닷바람을 쐬며 걷는 올렛길은 편안했고 평화로웠다.
멈추면 살아나는 걱정거리도 길을 가면 다 가벼워지는가보다.
사실 쉼없이 마주치고, 스쳐지나가는 올레꾼은 다 나름의 사연을 안고 살아가고
그만큼의 고뇌와 삶의 짐을 지고 있겠지만
길위에서만은 순례를 떠나는 도반들 모양 한가지로 평화로운 표정이었다.


좁고 험한 길도 있고,  길같지 않은 해안을 걷기도 했지만 누구도 길을 문제라고 느끼지 않았다. 간혹가다 굴러다니는 쓰레기와 쉼없이 마주치고 스쳐지나가는 올레꾼들이 사실 조금은 성가시게 느껴질 때도 있었지만 어디 이런 길을 혼자만의 호젓한 길로 누릴 수 있단 말인가! 
사실 올레 7코스는풍림리조트와 월평포구사이의 강정항에 해군기지가 들어오는 일로 몸살을 앓고 있는 지역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평화의 길에 군사기지가 들어오는 계획이 철회되고 다시 평화로운 바닷마을로 돌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이, 평화에대한 기원으로 피어올랐다. 어쩌면 나중에 올레길 7코스는 '평화의 길'로 재명명될지도 모를 일이다.  


7코스 앞 바다에 떠있는 범섬을 바라다보며 걷다보면 법환포구가 나오고 이어서 수봉로와 수봉교를 지났다. 수붕교를 지나자 얼마 안있어 서귀포여고인근에서 이날 길걷기는 접게되었지만 누구도 외돌개까지 걷지 않게된 것을 탓하지도 않았고 그냥 넉넉한 표정들이셨다. 걷기가 더이상 싫어서일까 아니면 그만치 걸은 것만으로도 마음의 풍요를 한껏 느길 수 있었기 때문일까?  올레길을 벗어나 우리 일행을 싣기 위해 불러놓은 버스에 몸을 싣고 숙소로 향하는 길은 고단했지만 편안했고 아쉬웠지만 섭섭하지 않았다. 일정이 일부 어긋나면서 첫날의 여정을 다하지 못했지만  7코스를 걷고 돌아가는 나의 뇌리에는 걷기 길에 대한 이러저런 상념들이 떠올랐다.


걷기가 붐인 것은 확실한데, 일시적일까 지속적일까? 제주올레길이 성공했다고 각 지자체마다 이런저런 걷기길을 만드는 게 붐이다. 이제 우리 봉화에도 걷기길을 만들려고 하는데 사실 너무 늦은 것은 아닐까? 도대체 봉화는 어떤 테마의 걷기 길이 가능하고, 어떻게 만들어 나가야 올레길처럼 환경친화적이고 주민참여적인 프로그램으로 안착할 수 있을까? 사실 이번 연수는 그와같은 물음에 대한 답의 실마리를 찾기 위한 것이었지만 두어코스 걸기로 그 실마리를 얻기는 애시당초 불가능했다. 하지만 안을 만들기 이전에 기본적인 전제들, 기초해야될 가치들, 실행단계에서 지켜야될 원칙들에 대한 생각만이라도 정리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저런 생각이 이어지고 버스는 숙소에 도착했다. 첫날의 일정은 저녁 시간에 생산성본부의 정혜선박사님의 강의를 마지막으로 끝맺음을 했다. 


2박3일중 둘째날은 사실 여행일정상으로도 보면 가장 중요한 날이다.
오는 날, 가는 날이 아니라 온전히 하루를 통으로 영행에 받칠 수 잇는 날이기 때문이다.
아니나다를까 이날 일정은 아침식사가 끝나자마자 사단법인 제주올레의 안은주 선생의 강의로 시작되었다.  안은주 선생의 강의 내용을 다 정리할 수 없지만
먼저 제주 올레길의 현황에 대한 걸로 성공리에 지역사회에 정착해 들어가고 있다는 점과
두번째 그와같은 성공을 위해 견지했던 원칙들에 대한 태도로 집약되었다.
먼저 작년에 제주 전체 관광객은 약 540만명이었는데 그중 5%정도가 순수한 올레꾼이란다. 2007년개장 원년에 약 3000명이 걸었던 올레길이 2009년에 25만명이상이 걷게 되었고 올해는 아마 작년의 2배에 이를 것으로 짐작된다. 올레길에 들어간 예산 대비 관광객 유치 효과로 본다면 어떤 사례와도 비교할 수 없는 성공작임이 분명하다. 사실 제주는 비싸고 개발된 관광지로 인식되면서 한때 관광객이 줄고 특히 생태를 중시하는 젊은 여행마니아들로부터 외면받아온 게 사실이다. 올레길은 단순히 년 20만명의 제주 관광객을 늘인 것 만으로는 그 의의를 다 평할 수 없고 오히려 부수적으로 제주의 그런 부정적 이미지를 일소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게 된 점이 더 중요하다고 본다.    


제주올레는 2009년 한국의 10대 히트상품에 선정되었다. 제주 올레는 어느새 단순한 길이 아니고, 제주가 나아갈 길, 어쩌면 인류의 미래로 통하는 새로운 트랜드, 새로운 가치로 통하는 시대의 길인지도 모른다. 
아직까지 우리사회는 토건국가로 개발독재적 발상이 통용되는 휘귀한 나라에서 여성적인 감수성과 생태주의를 가치기반으로하고, 그리고 목적이 아니라 과정을 소중히 여기는 올레길이 이처럼 붐을 일으킨다는 것은 어쩌면 새로운 시대의 문에 우리사회가 들어섰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올레길을 통해 제주는 단기관광에서 장기 체류형관광으로, 단체관광에서 개별관광으로, 그리고 대중교통을 이용한 관광으로 급속히 자귀기 시작했고, 길을 따라 게스트하우스와 구멍가게가 증가하고 궁극적으로는 마을이 활성화되는 엄청난 변화를 격고 있다.
단적으로 서귀포만 보드라도 재래시장 매출이 17%나 증가하고, 적자를 면치 못했던 공용버스의 승객이 400%나 증가했다. 그러다보니 서귀포재래시장을 '서귀포올레시장'으로 이름을 바꾸게 되었고, 올레길을 처음 시작한 서명숙 이사장의 고향집이 있기도 했던 서귀포시장에는 설립자의 고향집이던 '서명숙상회'를 복원해서 올레 관련 기념품가계로 상인회에서 운영하기로 했단다. 길거리 마다 '올레'가 들어간 상호가 늘어나고 아침식사를 제공하는 식당이 늘어나고, 올레짐꾼(올레꾼 짐 배달서비스)같이 올레꾼을 대상으로한 갖가지 일자리마저 생겨나게 되었다. 그뿐아니라 올레관련한 다양한 기념품과 문화상품이 개발되고, 이렇게 개발된 상품은 지역사회에 일자리를 제공하고 활력을 부어넣는 사회적 기업을 탄생시켰다. 
한국관광, 나아가 한국사회의 미래를 볼려면 바로 올레길이 가리키는 곳을 보면된다고 할 수 있을 만치 올레길은 관과상품을 넘어 한시대의 조류를 형성하는 문화아이콘이자 시대의 트랜드마크가 된 셈이다. 


올레길이 그처럼 단기간에 주요한 문화적 현상으로 자리잡게 되는데는 설립자들의 올곳은 가치관과 이를 견지하기 위한 사업의 원칙이 있었음을 알수 있었다. 그들이 제시하는 올레길을 만드는 원칙은 사실 대단한 것이 아니지만 근본적인 것이었고, 소소한 것이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것들이었다. 가능한한 있는 길을 이용하고, 그리고 사라진 옛길을 찾고, 새길을 만들어도 곂코 노폭은 1m이상으로 만들지 않고, 개인소유의 당을 지나는 길도 가능하면 올레가 소유하지 않고 오직 통행만 보장받는가 하면, 화장실 등 기초 인프라도 최대한 기존 시설을 개방하게하여 지역 사회가 올레길을 만드는 일에 참여하도록 끌여들였다. 차라리 매입을 하고 예산을 다내어 시설을 건설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지만 제주올레는 이 어려움을 마다않고 감수하면서 오늘의 올레가 가능하도록 만든것이다.


오전 강의를 마치고 오후는 화순항에서 식사와 함께 올레길 10코스 걷기를 나섰다.응회암으로 이루어진 해안절벽을 따라걷고, 산방산을 오르고, 하멜 전시관을 지나, 사계화석발견지, 마라도선착장, 그리고 송악산과 알뜨르비행장을 지나 모슬포항까지 이어지는 10코스는 전날 걸은 7코스와는 달리 바다와 산이 어우러진 길이었다. 바닷가를 걷는 멋과 산길을 걷는 흥을 함께 느낄 수 있었던 송악산길은 비록 험했지만 힘든지 몰랐다. 말을 방목하는 목장을 가로지르고 평지로 내려선 뒤 도로를 따라 알뜨르비행장과 모슬포항으로 이어지는 길 어디쯤에서, 뒤에 쳐진 일행을 실은 버스를 만나 10코스 걷기가 마무리되었다.  


2박 3일이지만 결코 짧지 않은 일정이 마무리단계에 접어들면서 연수의 목적인 봉화,영양, 영월, 청송을 잇는 외씨버선길을 어떻게 만들어 나갈 건지에 대한 고민이 되살아났다.
무엇보다 먼저 지금 걷기붐이 일어나게된 시대적 흐름, 가치의 변화에 주목하고 올레길이 성공할 수 있었던 사업의 발상에서부터 조직, 추진 원칙과 가치지향 등 어느 것 하나도 놓치지 않고 세밀히 검토한 뒤 꼭 '외씨버선길'이 필요하거나 가능하다고 판단되었을 때 시작해야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다른 사업들처럼 예산먼저 따고 그 돈을 어떻게 쓸것인지를 고민하는 과정이 반복된다면 결코 외씨버선길을 성공할 수가 없을 것이다. 왜 해야하고 어떻게 하면되는지 먼저 이해하고 그렇지 않다면 과감히 포기할 수도 있는 열린 자세로 사업에 임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걷기 길은 단순한 관광아이템이 아니라 새로운 '가치'의 실현이라는 핵심토대를 놓치지 않는 사업 과정이 되어야만 할 것이다.

여정에서 막 돌아 온 지금 아직까지 생각은 정리되지않고 산만한 상념만 남아있지만 오래시간 곱씹고 자료를 찾고 고민하는 과정이 뒤따른다면 비록 외씨버선길이 후발주자지만 그래서 불가능하지만은 않을 것이라 생각해 본다.   

마을사업에 관여한지 10여년만에 처음 접한  완벽한 지역사업 성공사례인 올레길을 만날 수 있은 것은 나에게 큰 행운이었다.  행복했던 여행의 기억을 가져다 준 모든 분들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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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3월 29일
전날 저녁에 있은 전시 오픈과 저녁 술자리에도 불구하고
또 하루의 걸음을 위해 일찍 눈을 떳다.
간단한 아침을 먹고 카멜리아힐을 나서 무조건 한라산쪽으로 향했다.
등산정보도 없고 정확한 길도 모르지만
마냥 북동쪽으로 걷다보면 한라산이 나온다는 무모한 믿음하나에 의지한채
이날 하루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길을 나선지  1시간 만에 1115번길을 만나 다시 남동쪽으로 방향을 잡아 탐라대학교방향으로 계속걸었다. 길을 가며 도로표지판에 의지해 한라산을 찾는 무모한 짓을 포기할 때즘 이미 점심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무작정 길가는 차를 향해 손을 들었지만 다 지나가고 마침 택시 한대가 정차했다.  '한라산 갑시다!'는 저의 무모한 요구에 기사님 왈 이미 입산시간이 지났고, 한라산이 그렇게 뒷동산오르듯 만만한 산이 아니란다. 차라리 가까운 윗세오름이라고 한라산의 두번째 봉우리를 오르는게 나을 거란다.  그리고 본인은 사정상 그쪽 손님을 태울 수가 없고 동료를 불러주겠단다. 택시가 떠나고 또 한참을 걷다가 떠나간 택시 기사의 동료로부터 전화가 오고 곧 택시도 왔다.



택시비 2만원에 영실탐방로 입구까지 도착했다. 단체 등산객으로 보이는 무리들과 수학여행을 온 학생들, 그리고 가족 연인단위의 등산객으로 등산로가 미어터졌다. 입구 휴계소에서 우동을 한그릇씩 먹고  사람들의 발길에 휩쓸려 윗세오름을 향했다.  사람들이 많아도 산은 산대로 산다웠고 이어지는 등산로는 비록 가파른 곳도 많았지만 힘겹거나 지루한 코스는  거의 없었다. 멀리 서귀포를 넘어 태평양이 내려다보이는 등산로를 걷는 재미는 아름다운 산세와 더불어 등산객의 피로를 말끔히 씻어주기에 충분했고 걷거 또 걸었지만 지치지 않았다. 정상에 오르고 초원이 펼쳐진 사이로 설치된 데크를 따라 한참을 걷기도 했는데, 정상부근에서 시작한 눈발을 맞으며  하산 코스를 어리묵탐방로로 잡았다. 한라산을 맛만본 두세시간의 등반과 하산으로 많은 아쉬움이 남았지만 윗세오름이 준 인상은 깊었고 그만치 많은 기억으로 남았다.


어리묵탐방로 안내소까지 내려와 서귀포행 버스를 기다렸다.
많은 사람들이 같이 길을 걸었지만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대부분 단체버스를 이용하던지 아니면 등반을 시작한 코스로 다시 하산을 했기때문이다.
서귀포로 향하는 길은 거의 롤러코스트 같았고 기사님은 무뚝뚝했다.
올레길 8코스를 맛보기위해 적당한 하차지점을 물었지만 대답은 없었고
무조건 중문단지에 하차를 하고 바다를 향해 걸었다.


제주 컨벤션센타를 만나고 왼쪽으로 길을 바꾸자 얼마안있어 아프리카 박물관이 나오고
다시 뒤돌아 주상절리가 유명한 열리해안길을 따라 걸고
다시 컨벤션센타를 오른쪽으로 끼고 중문해수욕장 쪽으로 향했다.
성천포구에서 중문해녀의 집을 만나 회도 한접시 맛보고
다시 해거름이 내릴 때까지 1100번 도로를 따라 북상하기 시작했다.
베릿내 오름을 따라난 계곡을 내려다보며  길을 걷다가 천제연폭포를 지나고
여미지 식물원도 지났다. 다 보고 싶은 곳이지만 이미 영업시간이 끝나 그냥 스쳐지나갔다.


내일이면 제주를 떠나 다시 일상의 늪으로 돌아가야한다는 강박때문일까.
어둠이 내리기 시작한 길을 그곳이 정확히 어딘지도
또 어디로 향하는 길위인지도 확인하지 않은채
한참을 걷고 또 걸었다.
어둠이 두터워지고 허기가 진 뒤에야 
택시를 타고 숙소인 카멜리아 힐로 돌아왔다.
너무 많은 것은 보고 겪은 하루는 잘 정리되지 않았지만
밤은 깊고 잠은 편안했다.

그렇게 3박4일간의 제주 여행은 끝이나고 
대구행 비행기에 올라 다시 돌아올 일상을 생각했다.
언제까지 무엇을 해야하고, 
결제일은 언제고 그리고 누굴 만나야하고...
집나간 주인을 기다리는 '일상'의 충성심에 치가 떨리지만
그렇게 또 고스란히  나의 삶은 보전되고 이어지게되니 뭐 세상살이가 그렇커니 해야되겠지...
달라진 것 하나 없는 일상을 시작하며 또 다시 나그네의 모습으로 올레길을 걷는 나 자신을 만나보고 말거라는 대책없는 계획을 세웠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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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3월 27일 오후 제주공항에 근 15년만에  발을 내딛었다.
낡은 기억속엔 아무 것도 참조할 만한게 없었고 모든 것이 낯설었다.
공항을 나서자마자 꽉찬 주차장에는 온통 렌터카 천지였고,
주차장을 가로질러 공항앞 도로로 나가는 길은 찾기 어려웠다.

아내의 작은 전시회가 있었고, 덤으로 올레길이라 불리는
제주도의 봄길을 걷기위한 여정이기에
대중교통과 도보만으로 이동하기로 마음먹은대로 버스를 찾아나섰다.
행인에게 몇번이나 노선을 물었는데 친절하기는 했지만 정확한 정보는 없었고,
몇번을 반복해서 묻고 매번 물을 때마다 다른 답을 얻으며 
제주시내를 헤맨뒤에샤  버스안에서 친절한 한명의 문화관광해설사를 만났다.
그분의 안내를 받아 겨우 목적지를 향한 버스에 오를 수 있었지만
기사분이 또 우리를 목적지보다 두어구간 지나서 내려주었다.
그렇게 도착한 일차목적지 카멜리아힐은 농사를 지으며 농장을 꾸리고
그 농장을 도시민이 찾는 농원으로 만들어나가길 꿈꾸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려볼 수 있는 아름다움을 갖춘 리조트였다.


그날 오후 내내 아름다운 동백숲으로 이루어진 정원을 거닐며  
아름다운 펜션과, 카페 그리고 갤러리를 구경하고 
제주에서의 한가롭고 평화로운 첫날을 보냈다.
저녁 늦게 도착한 다른 작가분들과 그 가족들이 들여닥치자
작은 술자리도 마련되었지만 피곤한 몸을 일찍 잠자리에 누였다.

3월 28일 아침일찍 창을 비집고 들어오는 제주의 햇살에 눈을 뜨고
창릉 열고 제주의 바람을 맞았다.
그리고 간단한 아침식사후 저녁 5시 예정인 전시오픈 전에
제주 올레길을 찾아 카멜리아힐을 나섰다.
길을 나서 한적한 시골길을 남쪽으로 한참을 걸어 
1136번 도로를 만나고 1136번도로를 따라
자동차박물관을 지나 국도를 벗어나 왼쪽으로 작은 도로를 따라 다시 화순항으로 남하했다.


올레길 9코스의 종점이자 10코스의 출발점인 화순항을 향해 가는 길은
봄볕과 봄바람이 길을 걷는 사람을 서정을 부추키고
힘든줄 모르고 내딛는 발걸음마다 살아있음의 기쁨이 느껴졌다.
길을 걸으며 이렇게 벅차오르는 생명의 활홀경을 맛볼 수 있다는 사실이
어떻게 이 시대에 걷기가 붐이 될 수 있는지를  말해주었다.
아직도 개발광풍과 경제지상주의가 지배하는 세상이지만
그런 못된 지배가치와 지배계급을 대체할 새로운 가치,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는 
반란은 이렇게 작고 가벼운 발걸음에서부터 시작하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갈대와 모래사장이 맞아주는 화순항을 향해가는 길은
제주도만이 보여줄 수 있는 이국적인 정취를 한껏 느낄 수 있었다.
식생이 달라서겠지만 유독 제주는 육지와는 다른 풍경으로 다가왔다.
제주의 봄을 상징하는 유채꽃, 가로수로 늘어선 야자수들, 
이른 봄이지만 겨울의 흔적이라고는 찾아볼수 없는 풍경,
구멍뚤린 돌로 쌓은 돌담, 밀감밭 그리고 길가의 풀들 조차
제주는 완벽하게 육지와 달랐다.
눈에 들어오는 모든 풍경이 일시에 나를 향해 외쳤다.
'당신은 일상을 벗어나 자신의 삶의 터전과는 다른 어떤 곳에 들어섰다. 
그 전의 삶은 잊고 맘껏 즐기시라. 이곳은 당신의 일상밖이니...'
그렇게 제주는 관광을 업으로 먹고사는 지역이 되었나 보다.


화순항을 벗어나 역으로 올레길 9코스를 시작하자마자
화순삼거리 조금 못미쳐 송도식당인가 하는데서 점심을 먹었다.
올레길관련 정보를 구하다 알게된 조그만 식당인데
주인의 친절과 가격 대비 맛도 좋은 곳으로 알려져 있었다.
마침 그 앞을 지나갈 즈음 점심시간도 되어 들어가
소문대로  친절한 아주머니께 비빔보리밥을 시켜 먹었다.
역시 소문대로 만족스런 식사를 하고
다시 걷기 시작하자마자
[성박물관]이란 곳을 지나게 되었는데
언제 또 이곳을 지날까 싶어 박물관에 들러 잠시 구경도 했다.
입장료가 아깝기는 했지만 의외로 관람객도 많았다.




박물관을 벗어나 1132번 국도를 따라 동쪽으로 방향을 잡고 걷가보니
금세 안덕계곡이 나왔다. 계곡에서 오랜 시간을 지체할 수 없어
잠시잠깐 안덕계곡을 걷고 이내 다시 창천삼거리까지 걸었다.
참천삼거리에서 북쪽으로 방향을 잡아 1136번 국도를 따라 올라가면 숙소인 카멜리아힐이지만
국도를 따라 걷기만 하는 여정을 피하기위해
창천삼거리에서 다시 유턴해서 내려오다가 북쪽방향으로 농로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그렇게 국도를 벗어나는 순간 진짜 올레길을 걷게된 셈인데,
대충 짐작으로 방향을 잡아 숙소와 어긋나지 않도록 주의를 하긴 했지만
의외로 엉뚱한 곳으로 길이 빠져 예상보다 훨씬 많은 걸음이 필요했고
그만치 제주의 삶과 자연을 좀더 깊숙히 느켜볼 수 있는 귀한 기회도 가졌다.

하루 20여 km를 걷고 다시 돌아온 카멜리아 힐의 저녁은 
또 얼마나 풍요롭고 아늑했는지,
이날 하루의 여정은 오랜동안 기억에 남아 
나의 가난한 마음에 작은 여유를 가져다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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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을 주제로한 리조트에서 가진 동백을 주제로한 전시회

2009 3월 제주도 서귀포에 위치한 리조트 카멜리아힐(http://www.camelliahill.co.kr/)의 부대시설인 [갤러리 카멜리아]에서 동백꽃을 주제로 한 전시회가 있었다

8천년 동안의 봄, 다시 8천년 동안의 가을 – 동백언덕을 노닐다

2009. 3. 28 () ~ 6. 14()

리조트 카멜리아 힐 內 갤러리 카멜리아

강석문, 김경신, 노석미, 류준화, 박형진, 최혜인, 황희진


카멜리아 힐은 5만여평의 정원을 20여년을 가꾸어 온 양언보 사장의 일생의 역작이다. 전시회에 맞춰 참여 작가의 가족까지 초청해주신 양언보사장과의 식사자리에서 간략하게 나마 카멜리아힐의 역사에 대해 들을 수 있었지만 한 명의 농부가 지금의 카멜리아힐을 일궈내는 과정은 짧은 식사자리에서 나눈 담소 정도로 다 전해 듣는다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할 것이다. 남들 다 감귤 농사에 올인 할 때, 그리고 감귤 농사가 한창 큰 돈이 될 때 양사장은 감귤 나무를 베어내기 시작했고 그 자리에 동백을 심었다고 한다. 주위의 만류와 어리석은 짓에 대한 비난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동백나무를 심은 것은 단지 동백나무에 매료되어 그 아름다움에 빠져버린 자신의 내면의 욕구에 따른 것일 뿐이란다. 물론 농장 외의 다른 사업을 벌여가며 돈을 벌어야 했지만 그렇게 벌어들인 돈도 고스란히 감귤농장을 지금의 [카멜리아힐]로 바꿔나가는데 밀어 넣었단다. 그렇게 20년의 세월을 받쳐 지금은 서귀포의 한 명소로 자리잡을 카멜리아 힐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단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했을 뿐인데 결과적으로 사업적 성과도 낳은 경우를 언론 등을 통해 종종 접하게 되는 데 바로 카멜리아힐이 그 대표적인 경우의 하나인 것이다.

 


34일동안 머문 카멜리아 힐은 그야말로 동백정원이었다. 겨울의 여왕이라 불리는 동백을 전세계를 누비며 5백여종의 희귀종까지 모아 동백정원을 만들어 나가는 과정은 한편의 드라마 같았을 것이지만 그 과정이 힘들었을 만치 지금의 그 결과물은 희양찬란 했다. 국내 유일의 동백을 테마로 한 리조트인 카멜리아힐에는 물론 동백나무만 있는 것은 아니다. 구석구석 돌 하나, 풀꽃 하나까지 정성을 다해 가꾸어 놓은 정원은 그렇다고 드러나게 인공적이지도 않았다. 화려한 동백꽃과 어우러진 정원의 아름다움은 그 공간에 들어 오는 모든 사람이 단지 그 사실 만으로 자신의 존재감이 고양됨을 느끼고 그리고 삶과 세상의 존귀함을 느끼게 해 주었다 그것은 자연과 인공의 조화의 극치를 보여주는 아름다움의 힘인지 모르겠다.


카멜리아힐이 오랜 준비기간을 걸치면서 일부 시설이 완비되는대로 이용이 되어 왔지만 2008년 11월이 되어서야 최종적으로 완공되었다. 화려한 준공식을 가진뒤 얼마되지 않은 시점에 동백을 주제로한 리조트인 카멜리아힐에서 동백을 주제로한 전시회를 가지게 된 것은 어쩌면 참 자연스럽고 꼭 필요한 일이기도 했다.
한국의 현대미술을 이끄는 젊은 작가들과 함께 [동백언덕을 노닐다]전에 작가의 한명으로 참가한 와이프 덕에 농부의 한명으로 성공적인 삶을 살아오신 카멜리아 힐 양언보 사장민도 만나고, 아름다운 카멜리아 힐에 매료되기도 했지만 사실 가장 큰 수확은 다른데 있었다.
바로 카멜리아힐을 노닐면서 자연스럽게 제주 올레길로 접어들었다는 사실이다. 올레길에 대한 사전 정보를 가지고 전시여행을 우리 부부의 올레길 걷기 여행으로 계획을 세웠지만 사실 막연하고 확정적이지도 않았었다. 하지만 동백길을 걷는 재미가 쉬 올레길을 걷을 용기를 가져다 주었고 그리고 마침내 카멜리아 힐을 나와 올레길 10코스를 항해 걸음을 옮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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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적인 강제에 의한 이주도 아니고
일로 인한 출장도 아니고
정착할 곳을 찾지 못해 떠도는 유랑도 아닌
오직 내적인 힘에 밀려 집을 떠나
낯선 거리를 떠도는 '여행'은 우리에게 무엇일까?

몇일전 대구 엑스코에서 열린
대구경북 관광박람회에 참가해서
봉화은어축제를 홍보하는 은어만들기 체험을 진행하는 중에
행사진행본부에서 하는 방송소리를 들었다.

3층 메인 무대에서 도보여행가 김남희 씨를 초청하여
[유럽배낭여행]에 대한 강연회를 열고 있다는 것이었다. 
은어마을기 체험에 열중하고 있는 아이들을 외면하고
와이프에게 체험장은 맡겨두고 급히 3층으로 올라갔다.

3층 행사장 한쪽 켠에 놓인 무대위에서
검정 옷을 입은 조그만 여자 한명이 마이크를 두손으로 쥐고
이야기를 진행하고 있었다.
'이렇게 살 수도 이렇게 죽을 수도 없는....'이라는 표현 하나로 
나를 사로잡았던 김남희씨를 처음 마주한 순간이었다.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내 스스로 만들어낸 조작된 이미지인지 알 수 없지만
검은 옷 때문일까? 왠지 수녀같다는 느낌과
아둥바둥 살아가는 현실의 장에서 왠지 비켜선 사람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미 강연은 진행되고 있었고,
관중석에는 30~40대 여성분들을 중심으로
의외로 나이드신 어르신들까지
남여와 다양한 세대를 아우르는 
사람들이 자리를 하고 있었다.
붐빈다고는 할 수 없지만
결코 적지 않은 관객들을 향해 
김남희씨는 '여행'이란 무엇인지.
여행은 어떻게 준비하고 떠나고, 정리해야하는지
나름의 삶속에서 얻은 경험과 지식, 그리고 깨달음을 전해주고 있었다.
열심히 받아적고 고개를 끄덕거리며 공감을 표시하는
아주머니들도 여럿 볼 수 있었다.   
 
에모준비도 없이 급히 강연회에 참가했지만
김남희씨의 강연중에 몇몇 구절은 아직도 나의 뇌리에
메아리로 남아있다.

'여행은 자신이 그동안 살아오면서 쌓은 성의 바깥으로 나가는것'이라며
누군가를 인용해 정리한 여행에 대한 규정은 참으로 공감되었다. 
또한 여행중인 사람의 배낭을 열어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단다.
그가 소중히 여기는 것이 무엇인지 알수 있기 때문이란다.
 
강연의 중반을 넘기면서
김남희가 걸었던 유럽의 여행길을 
사진으로 보여주며 
여행의 후일담을 진행하는 걸 보고
행사장이 걱정이 되어 강연회장을 떠났지만
그녀가 남긴 여행에 대한 생각들은 
대충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여행은 자신이 쌓은 성 바같으로 나가
새로운 자신을 만나고 ,
새로운 타인들을 만나고,
자연을 만나고. 인류의 문화유산을 만날 수 있게 한단다. 
그리고 끝으로 좋은 여행이 되기위해서는
준비하는 여행, 공부하는 여행, 그리고 공정여행이어야 한단다.
특히 공정여행에 대해서는 긴 설명을 덧붙이면서
자신의 여행이 여행지의 사람들에게 어떤 모습일지,
어떤 영향을 주고, 어떤 피해를 줄지 생각하는 여행이 되어야 한단다.

세계 도처를 가도 꼭 있는 3가지가 있단다.
하나는 중국음식점이고.
또 다른 하나는 일본이 관광객이란다.
일본의 관광은 이미 유명 관광지를 벗어나
나만의 여행을 떠나는 단계로 접어들었단다.

그런데 3번째는 무엇일까?
무척 굼금했지만 
세계 어디에나 있는 3가지 중의 하나는
어쩔 수 없이 얼굴이 화끈거리고 참혹한 기분이 드는
내용이었다. 바로 한국인 기독교 선교사란다.

수세기전 유럽의 선교사들이 군사적, 산업적 우월성을 바탕으로
지적, 도덕적 우월감에 사로잡혀
자신의 신을 강요하던 선교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꼭 같은 경우는 아니지만 그와 같은 큰 잘못을 
한국 사람들이 되풀이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이나라 저나라에 나가,
당시의 종교가 틀리고 당신의 신을 대신해 예수를 믿어라 외치는
한국의 기독교 선교사들의 모습을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그 문화, 그들의 신과 종교를 존중하고 
그 가치를 인정하는 속에서 맺는 관계가 아니라
일방적 관계 맺음의 대상으로 타국사람들을 바라다보는
협소한 시각은 인류의 평화를 해치는 
불의의 씨앗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 대한 김남희의 생각은 알 수 없지만
나의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은 시각의 소유자라는 느낌이다.

여하튼 글로만 만날 수 이었던 여행가 김남희를
만나고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던
2010년 대구경북 관광박람회는
이래저래 참 좋은 여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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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은 항구도시입니다.
그 항구를 따라 형성된 길과 시장에 갯내음 물씬 풍기는 오후,
여러 매체를 통해 너무나 친숙하게 된 통영의 새 명소 동피랑을 찾았습니다.
동피랑이 동쪽에 있는 벼랑을 뜻한다고 하는
서피랑과 작을 이룬 산동네입니다.
산동네가 다 그렇듯 동피랑은 가난하고 낙후된 동네,
그래서 개발의 파고가 언제라도 덮칠 수 있는
지킬 것도 없고 지킬 힘도 없는 그런 동네였습니다.
하지만 거센 개발의 파고를 막아내기 위해 지역 예술인들이
힘없는 붓을 들고 나섰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붓으로 포크레인을 막아낸
아름다운 마을로 거듭났습니다.
지금은 통영의 새 명소로 많은 관광갱들의 방문이 이어지고
개발의 파고를 예술의 힘으로 이겨낸 드문 사례의 하나로
많은 예술인과 문화동호인들의 사랑을 받고있습니다. 

통영여객선터미널에 차를 세워두고,
충무김밥집이 밀집해 있는 중앙시장을 끼고 5분 정도를 걸었습니다.
오른쪽으로는 통영항이고, 왼쪽으로는 통영중앙시장인 해안도로인 이 길은
굳이 동피랑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걸을만한 볼거리가 있고,
풍성한 삶의 향취를 느낄 수 있는 그런 전통시장의 느낌을 주는 거리입니다.

중앙시장의 끄트머리에 어시장이 있습니다.
펄펄 살아 뛰는 생선과 싱싱한 조개류 등 해물을 팔고 있는 어시장 바로 뒤가
동피랑입니다, 먼저 그냥 보는 것만으로도 생의 활력을
거저 얻을 수 있는 통영 어시장을 둘러보고
동피랑 보고오는 돌아오는 길에 
통영 횟거리 사고 말았습니다.
똑같은 해양도시인 고향 진해도 시싱한 횟거리를 파는 어시장이
있는데 보기에 반해서 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웃지 못할

그리 크지 않은 어시장을 10여분 둘러보고 바로 동피랑을 올랐습니다.
진입도로가 잘 구분이 안될 것 같았는데
바로 어시장 뒤편 언덕위에 벽화가 그려진 산동네가 눈에 들어오니
어렵사리 진입로를 찾을 수 이었습니다.
골골골목 누빈 흔적을 이렇게 올려봅니다.
설 연휴가 시작하는 첫날,
분비는 어시장과는 달리 동피랑 좁은 골목이
결코 좁아보이지 않을 만치 한산했습니다.
날씨마저 흐리고, 바람마저 일어
산동네 골목골목을 순례 한다는 것이 그리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그래도 벽화가 그려진 좁을 골목을 누비며 '작품' 하나하나를 보다 잘 보기위해
최적의 관람 지점을 찾기 위해 우왕좌왕 하다보니,
골목의 훈기가 느껴지고 언 몸이 풀리기 시작했습니다.
걷기의 힘인지 예술의 힘인지
잔뜩 어깨를 웅크리고 시작한 벽화순례는
이내 즐겁고 신나는 '소풍'으로 바뀌었습니다.
갈라진 벽을 따라 나뭇가지가 그려지고
멀뚱멀뚱 큰고기 눈깔은 멀리 통영항을 넘어 남해
난바다를 바라다 보고 있었습니다.
 
그 눈을 드러다보다가 이런 생각을 해 보게 됩니다.
"아기자기 하고 이쁜 벽화가 동네 가득 넘쳐났는데,
저 벽으로 둘러쌓인 집안에 사는 사람들은 행복한 삶을 살까,
아니면 벽화가 그려짐에 따라 삶의 느낌이 조금이라도 변하게 되었을까?"

사실 공공미술은 어려운 분야라고 합니다.
대중과 예술가의 접점에 공공작품이 놓여있지만
대중이 이를 거부하거나, 예술가가 대중의 정서를 외면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어렵게 설치한 공공미술작품이 대중의 반발로 철거되는 일이
비일비재한 것이 이를 반증합니다.
하지만 벽화마을 동피랑은 드물게(?)
성공적인 공공미술의 현장이 아닐까 생각되었습니다.
사람도 넘치고 글도 넘치고, 조형물과 이미지마저 흔해 빠진,
 풍요를 넘어 존재의 낭비까지 치닫는 현대 사회에서
'돈만 있으면 되는' 엉터리 공공미술도 넘쳐납니다.
안하니만 못한 벽화를 자주 목격하게 되고,
괴기스럽다 못해 시각적 폭력을 행사하는 조형물들 역시 
도심의 거리 곳곳에서 마주하게 됩니다.

하지만 벽화마을 동피랑은
동피랑의 존재 방식에 가장 적합한 양식의 공공미술로 벽화를 선택했고,
작품 하나하나 마저 심사를 통해 동피랑의 역사와 현실에 가장 어울리는 
작품들로 마을을 꾸몄다고 합니다.
다 그런 안목과 식견을 가지신 분들에 의해 오늘의 동피랑이 만들어질 수 있었을 겁니다.

사람사는 세상의 훈훈한 인정을 가슴에 가득담고 동피랑을 내려왔습니다.
그리고 다시 어시장을 들러 횟거리를 사고,
이어서 환상적인 대장간 순례까지...
동피랑 갔다 온 그날 하루는 참 행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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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늦게 까지 숙소에서 놀다가 11시가 넘어 길을 나섰습니다.
오늘의 목적지인 통영 동피랑 벽화마을을 들러기전에
먼저 해금강을 가기위해 '바람의 언덕'이 있는 도장포로 향했습니다.
연휴가 시작되고 바람마저 불어 해금강 유람선이 드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역시 배는 연휴 뒤에나 운항을 한다고 했습니다.
몇년전 지금처럼 유명세를 타기전에 [바람의 언덕]을 들런적이 있는데
그때 역시도 명절연휴때라 유람선을 타지 못했는데
해금강 유람선은 저하고 인연이 없나봅니다.
어쩔수 없이 눌러쓴 모자마저 날릴듯이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이름 그대로의 '바람의 언덕'을 올라 보고 급히 내려와
바로 통영으로 향했습니다.
거제도는 바닷가만 보아왔지 한번도 재대로 내륙을 가로질러 본적이 없었는데
이날은 처음으로 거제의 중심을 가로질러 구거제대교를 통해 거제를 벗어났습니다.
 
이날 통영의 첫 목적지는 중앙동 충무김밥 거리입니다.
고속도로 휴계소 등에서 자주 먹어봐서 잘 알고 있는 [충무김밥]이지만
이전에 충무를 들러서도 결코 본토의 원조 충무김밥을 먹어보지 못했습니다.
이번에는 큰 마음먹고 아예 주요 목적지 중의 하나로 [충무김밥골목]을 정하고
사전에 [다음지도]에서 지도까지 출력해서 준비했습니다. 
그렇게 찾아간 충무김밥집은 통영 여객선터미날에서
동피랑 가는 해안도로를 따라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사실, 주변 건물들도 다 마찬가지였지만
초라하다못해 조금은 구질구질한 외관에 실내 역시 좁고 어수선했습니다.
그래도 원조충무김밥을 찾는 사람이 많고 가게들이 성업중인것은
갯마을 선술집같은 작고 초라하지만 갯사람의 깊은 정감이 물씬 풍겨져 오는
바로 그 정취때문일 겁니다.

길가에 하고 많은 충무김밥집 중에 우리가 들어서 식당은 [일번지 할매충무김밥].
역시 작고 초라하고 못해, 손님용 테이블 한개, 그리고 방바닥 테이블 한개가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막  김밥을 사서 들고 나가시는 손님이 먼저
반갑게 인사를 건네고, 잘오셨다면서 자리를 권했습니다.
이웃 단골이시라는데 자리에 앉자마자 주인보다 앞서
가게 선전에 열릉 올립니다.

벽 한쪽 전면을 장식하다싶이한 메모지를 가리키며
이 식당에 들런 손님들이 남긴 감사 메모라며
우리도 나갈 때 메모 한장 남기라고 권하십니다.
따로 주문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김밥을 말기 시작한 주인 할머니께 양해를 구하고 사진을 찍어대었습니다.

1인분에 4000원해서 4명 1600원 짜리 밥상이지만
해물된장국 한 냄비가 떡하니 중심을 잡고 있습니다.
바지락이랑, 홍합을 듬뿍 넣어 시원한 해물 된장국을
떠먹어가며, 통영 본거지에서 먹는 충무김밥은
전날 옥포에서 먹은 4만원짜리 아구찜보다 차라리 나았습니다.
성씨가 고씨인 주인할머니 말씀에 따르면
원래 충무김밥은 연안 고기잡이를 떠나는 뱃사람들이
점심 도시락으로 싸가지고 가던 음식이랍니다.
바쁜 와중에 주변에 흔한 재료를 이용해 만들어 놓은
무우김치와 삶은오징어무침, 그리고 
따로 속을 넣지 않은 김밥은 물때를 맞춰야하는
바쁜 뱃사람에게 딱 어울리는 점심 도시락이 되었는가 봅니다.
참,  삶은 오징어 무침에는 어묵이 꼭 들어가야지만
원조 충무김밥이 된답니다.

배불리 먹고 [일번지 할매 충무김밥]집을 나서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동피랑 표지판이 보였습니다.
동피랑 언덕 골목골목을 돌고 내려오니
언덕아래 이어지는 골목에 어시장이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싱싱한 횟거리며 갖가지 해물을 담은 다라이를
끊임없이 호스를 통해 공급되는 바닷물이 질퍽하게 흐르는 
노상 좌판에 펼쳐놓고 설대목기댕 들떠있는 아주머니, 할머니들의 호객외침이
펄떡이는 생선만치나 힘차게 어시장 여기저기에서 울려퍼졌습니다.
어디가 더 좋고 싸고 할 것도 없이 아무데서나 사려고 하는데
옆좌판의 눈치가 보여 이것도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우리 가족이 모두 좋아하는 회거리를 3만원어치를 사니
무직하니 양도 많고, 뼈까지 매운탕용으로 얻어담은 비닐 봉투를 드니
마음이 바빠졌습니다.
통영에서 진해까지는 차로 2시간 정도 걸리지만,
혹시라도 명절 귀향차량으로 길이라도 막히지 않을까 걱정스러웠습니다.
싱싱한 횟거리를 싣고 길에서 몇시간씩 지체하는 일이 일어날까봐
노심초사 신나는 걸음으로 차로 달려갔습니다.


바쁜 마음에도 불구하고 예상치 못한 복병을 만났습니다.
중앙동 어시장을 나오자 마자 얼마지나지 않아
옛날 40여년전 저가 초등학교 다니기 시작할 무렵 학교가는 길에
보았던 그런 대장간이 이곳 통영거리에 아직 남아있는 것이 아니겠습니다.
진해에서 초등학교를 다니던 시절, 등교길 한 모퉁이를 지날때마다
시뻘건 불과 연신 내려치는 망치 소리가 무섭게 다가왔던
조그마한 대장간이 있었습니다.
그 기억은 희미해 졌고,
그 뒤 고향 진해에서 대장간이라는 것은 영영 사라지고 말았지만 
기억과 상상이 만들어낸 마음속의 대장간은 항상
망치소리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 대장간을 생각지도 않은 통영 거리에서 만나다니
여간 감격스럽지 않았습니다.

손에든 횟거리때문에 빨리 진해로 가야된다는 생각을 잊고
바쁜 대장간 아저씨의 손놀림을 따라 나의 두눈은 따라다니기 시작했고
어설프나마 카메라로 그 풍경을 담기 시작했습니다.
그래도 한참을 그 앞을 떠나지 못하고 서있다가
필요도 없는 호미를 한개 사게 되었습니다.
사라져 가는 것을 붙들고 보나마나 어려운 삶을 살아오셨을 것 같은
대장간 아저씨에 대한 고마운 마음을 달리 표현할 길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층무공작소라는 대장간에서 만든 호미는 농사용이 아닙니다. 
간판에는 분명 '농기구'라고 쓰여있지만
밭이 아니라 갯벌에 조개를 캐는 용으로 보였습니다.
뭐 어민들에게 농사는 바다농사 갯벌농사니깐 
'농기구'라는 호칭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겠지요^^* 

즐거운 하루는 저물고 귀행길은 귀성차량으로 막혔지만
그렇게 많은 시간을 지체하지 않고
고향집에 도착했습니다.
고향집에 도착하자마자 여행모드에서 설날모드로
분위기가 바뀌고 저의 처신도 달라졌습니다.
이렇게 또 한해의 설날을 맞이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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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진해가 고향인 사람이 어쩌다 경북 최북단 봉화에 살게 되다보니
사실 바다가 그리울 때가 많습니다.
물론 1시간 30분 거리에 동해바다가 기다리고 있지만
동해의 밋밋한 수평선은 남해의 멋에 중독된 사람에게
그다지 충분한 만족을 주질 못합니다.
원래 자기 고향 것이 최고라고 믿는 합리적이지 못한 욕구겠지만 말입니다.

일년에 최소한 2번, 추석과 설날이면 고향 진해를 다녀옵니다.
그리고 고향길에 꼭 바다를 들르게 됩니다.
올해는 거제시에서 운영하는 '거제자연휴양림'에 미리 방을 예약했습니다.

2월 11일.
설날을 3일 앞두고 귀성길 스트레스를 받지 않기 위해 미리 집을 나섰습니다.
아침 7시 출발 예정이었지만 6시부터 내리기 시작한 눈이
한시간만에 3~4cm나 쌓이는 바람에 출발을 망설이다가
1시간이나 늦어지게 되었습니다.
결국 눈이 잦아들것 같지않아 더 지체하다간 완전히
발이 묶일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으로 체인을 감고 출발했습니다.
계속되는 눈발속을 거북이 걸음으로 달리는 차장 밖은
완전히 설국으로 변해버렸고,
국도는 거의 인적이 끊기다시피 한산했습니다.
평소 1시간도 안걸리는 안동까지 2시간이나 걸려 도착했지만
안동이 가까워 오면서 길가 여기저기 접촉사고 차량이 늘부러져 있고,
언덕길을 오르지 못해 미끄러지는 차량을 여러대 목격해야했습니다.
안동까지 무사히 도착한 것만으로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체인을 풀고,
녹기 시작해 질척거리는 고속도로를 접어 들었습니다.
거의 군위휴계소 근처까지 오자 고속도로의 눈이 녹아
주행에 어려움이 없어졌습니다.


  
진해 고향집에 도착한 것이 거의 12시, 바로 동생을 싣고 진해 속청항으로 달려가
거제 실전항 사이를 오가는 1시 30분 발 삼보11호를 탈 수 있었습니다.
명절 직전이라서 그런지 의외로 한산한  배에 올라
눈길 운전으로 쌓인 피곤을 풀고 한껏 바다 향취에 취할 수 있었습니다.




진해 속천항을 떠난 배는 오랜 기억속의 흔적을 따라 흔들리며 1시간만에 거제 실전항에 도착했습니다. 지나온 바다는 내해임에도 불구하고 너울이 일어 배가 흔들리고, 찌푸린 날씨에 간간히 가는 눈발마저 날렸습니다. 하지만 저는 동화속 모험을 떠나는 소년처럼 마냥  가슴두근거리며 내내 갑판과 선실을 오가며 바다와 하늘, 그리고 스쳐가는 섬들을 보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실전항은 거제의 북단에 가깝고 숙박지인 자연휴양림은 거제의 남단이다보니 점심은 가는 길 중간쯤인 옥포에서 해결했습니다. 배는 고프고 마땅한 식당은 없고 거리를 잠시 헤메다 들어선 식당에서 아구찜으로 즐겁지 않은 식사를 하고, 다시 차를 달려  구조라를 거쳐 학동몽돌 해수욕장에서 내륙으로 우회전한뒤 얼마지나지 않아 산속의 자연휴양림에 도착했습니다.
 

자연휴양림은 당연히 바다가 보이는 곳에 위치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해안가에서 차로 5분이상 떨어진 첩첩산중의 참나무 숲속에 자리한 숙소였습니다.
10인실, 15평짜리 목조주택으로 많이 낡았지만 그래도 지낼만한  공간이었는데
7만원이라는 비교적 싼가격이었습니다.

애초에는 낚시를 할 계획이었지만 여전히 날리는 싸락눈에 바람까지 불어 취소하고 다뜻한 방안에서 모처럼 TV도 보고, 주변 등산로도 걸으면서 쉴 수 있었습니다.
해가지고, 저녁을 먹고나니 완전히 암흑천지에 고립무원, 이웃의 숙소에는 불빛 하나없고 휴양림전체는 우리 밖에 없는듯 고요했습니다. 마땅히 나갈 곳도 없고 해서 미리 이부자리를 깔고 거제 지도를 펼쳐  다음날의 쾌적한 날씨를  기원하며 이런 저런 계획들로 일정을 짜는 것으로 저녁시간을 보냈습니다.
결국 다음날은 동피랑을 둘러보고 그리고 충무김밥을 꼭 먹어본다는 두가지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길고 편안한 잠 속으로 빠져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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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박5일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이 후딱 지나가버리고
드디어 마지막날이 밝았다.
전날 저녁 난생 처음으로 일본 술집에서 맥주를 마시고,
저녁늦게 까지 호첼객실에서 2차 술자리를 한 탓으로
몸이 무거웠지만 그래도 일본에서의 마지막 하루를 보다 즐겁고 값지게 보내야된다는
기대때문인지 아니면 의무감때문인지 일찍 눈이 떠졌다.
벌떡 일어나 세수를 하고 아직 문을 열지도 않은 
식당에 제일 먼저 도착했다.
곧이어 몇몇 외국인이 줄을 서고 뒤이어 우리 일행들이 한명 두명 내려왔다.
아침부페를 간단히 들도 곧바로 우리 일행은 새벽 청과물 도매시장으로 향했다. 

아사쿠라농산물도매시장은 인구 120만 도시인 후쿠오카에 있는 다섯개의 농산물 도매시장 중 하나라고 했다. 규모나 시설로 봐서는 사실 이웃 안동농산물 도매시장보다 훨씬 초라한 모습이었다 시장은 노천에 지붕만 씌운 시설에 불과했고 경매시스템도 현대식 전자경매가 아니라 재래의 방식 그대로 였다.
하지만 우리 공판장과 다른 모습도 확인할 수 잇었다. 우리나라 공판장에 가면 주변에 농산물 포장재로부터 폐농산물 까지 주변에 쓰레기가 늘려 있는데, 아사쿠라도매시장 바닥 어디에도 한개의 쓰레기도 확인하기 힘들 정도로 깨끗했다.  그리고 출하된 농산물의 상태는 그대로 슈퍼 진열대에 올려놓을 수 있는 완벽한 선별과 세척 그리고 소량포장으로 정리되어 있었다. 일행중 몇몇분이 '뭐, 일본도 별거아니네.'라고 하시면서도 농산물의 선별포장 상태에 대해서만은 감탄을 아끼지 않으셨다.  사실 고급스런 포장재를 사용하지 않으면서도 오직 정성으로 완벽한 선별포장을 한 일본사람의 완벽주의를 엿볼 수 있었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4박5일 여행내내 일본사람이 소리를 지르거나 씨끄럽게 떠드는 것을 본 적이 없었는데 이곳 농산물 도매시장에 와서야 처음으로 일본사람이 고함을 지르고 떠드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가까운 이웃이면서도 참 다른 일본인과 한국인^^*) 


아사쿠라 농산물 도매시장을 나와 하카타 포트타워로 향했다.
부산에서 카멜리아호라는 여객선을 타면 도착한다는 하카타항이 내려다 보이는
별로 멋지거나 화려하지 않은 하카타 포트타워를 잠시 들러 사진을 찍고,
곧바로 태재부(다이자이후) 천만궁으로 향했다.
후쿠오카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다이자이후 시에 있는 신사인 천만궁은 9세기무렵 살았던 스가하라 미치스네라는 사람을 학문의 신으로 받들고 있는데, 입시철이 되면 시험을 잘보게 해달라고 비는 참배객들로 엄청나게 붐빈다고 했다. 인근 학교에서 아예 버스를 대절해 단체로 참배를 오기도 할 정도라고 했다. 우리가 찾았던 그날도 적지않은 학생들이 소원종이(?)를 사서 자신의 이름을 적어 나무에 매달거나 신사에 헌금을 내고 복을 비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아쉬운 연수가 마무리되고 김해를 향한 비행기에 오르고 부터 뇌리에 떠나지 않는 상념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짧지 않은 여정이었지만. 일본의 모든 것은 고사하고 일본의 농촌과 농업에 대해서 만이라도 일정한 이해를 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면 참 좋았을 것이지만 사실 모든 것이 겉핡기에 불과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일본인과 인본 문화에 대한 이해, 일본 농업 농촌에 대한 이해는 뒷날의 과제로 남겨두고 이번 연수를 통해 얻었던 다양한 문제 의식만은 정확히 기록해 두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항에서도 일행과 계속 주고받은 생각들이지만 어떤 분들은 이번 여행을 통해 일본의 '침체'를 절감했다고도 하고, 일본농촌정책은 실패작이라는 판단도 많은 분들이 공유했다. 사실 일본여행중에 호텔 TV를 통해 JAL의 부도 소식을 접했고, 귀국해서도 도요타 사태라든지, 일본의 유명 백화점의 연쇄부도 소식 등 일본에 대한 부정적인 뉴스가 끊이질 않았다. 현제 일본이 막다뜨린 침체의 문제는 일본의 관료주의가 근원이라는 판단듣도 있었고,  부의 불균등한 분배구조에 문제가 있다는 생각을 피력하시는 분들도 있었다.

사실 선진대국인 일본거리의 소박함(초라함?), 낡은 호텔이나 관광시설, 거리를 메운 소형차들, 작고 초라한 주택, 화려하지 않은 일본인의 옷차림 등등 일본을 세계2위의 선진국으로 알고 선망해오던 시골분들이 이런 일본을 직접접하고는 실망과 우리 나라의 경제수준에대한 자긍심을 일정가지는 것이 당연해 보이면서도 한편 나는 다른 생각이 들기도 했다.

사실 나는 과연 일본은 침체되었는가?라는 판단이 가장 어렵다. 일본의 관료주의, 가난한 개인과 잘사는 나라를 만드는 분배의 문제,  지향을 잃어버린 국가나 개인의 정체성의 문제, 불완전고용상태를 초래한 비정규직의 보편화와 고착화된계층 구조로 인한 활력의 상실 등등의 문제는 분명 일본사회가 처한 현실을 나타낼것이다. 하지만 달리 생각해보면 이런 일본의 현실이 침체인지 안정화인지 면밀한 판단이 필요할 것이다., 사회적 지향을 가진 활력이 넘치는 사회가(일제시대 일본의 모습) 정상적인 사회인지 아니면 일상의 소소한 삶속으로 천착해 들어가는 지금의 일본인의 삶이 정상적인 모습인지 판단하는 것이 그리 쉬운 건 아닐 것 같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우리 사회가 오직 경제성장에 목을 매고 전사회가 매진하는 지금의 거의 광적인 모습이 비정상적인 상태이고,우리 사회역시도 10~20년 내에 지금의 일본의 '침체'된 모습을 띌 것이라는 사실이다. 개인적인 취향의 문제인지도 모르지만 나는 지나치게 활력이 넘치는 사회가 싫다. 일본인같이 경제적으로 소박한 삶을 누리면서 내면의 가치를 천착하고 셰계와 삶에 대한 인식의 깊이를 심화하는 그런 삶의 자세가 보다 인간적인 세상을 만들지 않을까는 생각을 포기할 수 없다.

앞으로 공부하고픈 몇가지 주제나 소제를 정리하는 것으로 이번 여정의 기록을 마무리하고 싶다.
1. 일본은 주체성이 강한 나라인가 아닌가?
일본인은 서양지향적인 모습을 분명히 가지고 있다. 기독교식의 결혼식이 대표적일 것이다.  사실 일본은 타 종교에 대해 아주 개방적이다. 신도나 불교, 유교가 아주 자연스럽게 융합해 있고, 기독교같은 타종교에 대해서도 훨씬 개방적이다.  하지만 일본인은 우리보다 기독교의 역사가 깊으면서도 기독교 신자가 전국민의 1%도 되지 않는다. 한국은 조선의 붕괴와 함께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인 유교를 내팽겨치고 서양의 사상. 특히 기독교에 바져들었다. 사실 겉은 따라가도 정신만은 놓지 않는 일본이 더 주체적인 나라가 아닌가?

2. 일본의 농촌 정책은 성공적인가?
오래전부터 한국의 몇몇 교수등 전문가 집단은 일본의 정책을 그대로 뱃겨온 사례가 너무나 많다. 사실 별거아니지만 정보를 먼저 접했다는 것 하나로 뭐 대단한 성공사례인양 소개하고, 그리고 그 사례가 우리 농촌을 구원하는 비책이라도 되는 양 피력해 온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일본 농촌의 현실은 그리 성공적이지 않다. 먼저 농산물 자급률이 우리보다 훨씬 못하다.(한국 약 30% 전후, 일본 약 20%전후) 사실  일본 농촌 공동체의 붕괴는 한국보다 훨씬 덜한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성공적인 농촌정책때문이아니라 한국과는 다른 지방 중소도시의 활력대문이라고 보는 것이 보다 정확하다. 서울만 있는 한국과는 달리 일본은 아름의 지방 도시들이 자생력을 가지고 번영하고 있다. 그와같은 지방 도시를 둘러싼 일본 농촌은 인근 도시와의 교류와 소통속에서 농촌사회의 유지 발전을 꾀할 수가 있었다. 이는 일본 농업인의 많은 비율이 투잡, 쓰리잡이라는 사실이 잘 보여주고 있다.  한국 농민은 농한기에 인근 도시에서 일자리를 찾을 수가 없다. 서울 경기만 있고 지방은 다 죽었기 대문이다. 한국 농민은 아예 농촌을 떠날 수 밖에 없다.

3. 일본 농촌 사업은 주민자치역량에 기반하는가, 고도화된 행정서비스에 의존하는가? 그린투어리즘이 침체된 농촌에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잇는가?
연수중에 방문했던 많은 사업단위들에서 사실 주민의 모습을 별로 볼 수 없었다. 우키하마을, 오쿠니마을은 아예 공무원이 마을 사업을 주관하는 듯이 보였고, 전체적으로는 그린투어리즘에 기반한 도농교류를 통해 많은 농민이 생업기반을 가지는 모습도 확인할 수 없었다. 그린투어리즘이 활성화된 곳에서 마저 전체 농가의 1%미만만이 도농교류 사업에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린투어리즘을 한국 농촌의 활력을 되찾을 수 있는 대단한 비책인양 여기는 정책입안자들의 판단은 잘못된 것이라는 점을 보여주는것같다. 그렇다고 다른 대책은 없지만 그린투어리즘에 대한 과대 평가는 조심해야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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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온천하면 그래도 뱃부가 제일 친숙한 곳이다.
물론 일본을 언제 여행해본 적도 없는 나에게 뱃부는 단지 들어서 친숙해진
곳이기는 하지만 알고보니 그럴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가이드에 따르면 뱃부의 관광객중 60%가 한국인이란다.
그러면 뱃부는 결국 한국인이 먹여살리는 도시인 셈이다.
그래서 뱃부의 밤거리를 편안하게 헤메보고 싶었지만
매서운 추위한 거센 바닷바람으로 호첼을 나선지 10분도 되기전에
발길을 돌려야만 했고, 슈퍼마켓에서 장을 보고 호텔방에서
뱃부에서의 밤을 마냥 보내야만 했다.

뱃부의 아침은 아름다웠다.
여기저기 온천에서 내뿝는 수증기로 이국스런 뱃부의 아침은
노을을 닮은 붉은 아침 햇살로 더욱 신비로운 풍경이었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바로 뱃부 관광에 나섰다.
제일 번저 도착한 곳은 가마도 지옥!
지옥이 웬 말인가 싶었더니 그냥 온천을 地獄이라고 했단다.
아주 옛날부터 온천주위에 정착한 사람들은 
땅속에서 김이 뿜어져 나오고, 뜨거운 물이 솟는 현상이
신비스럽다기보다는 거의 공포스러웠을게 틀림이 없다.
그러다보니 온천이라는 온화한 이름보다는 
그냥 지옥이라는 이름이 훨씬더 그네들의 공포심을 잘 표현해주는 명칭이었을 법하다.
그러다보니 아직도 많은 온천이 **온천이 아니라 **지옥이라고 이름하고 있다.

가마도 지옥은 넓지 않은 공간에 다양한 형태의 온천이 공존하는 특이한 곳이었다.
색깔이 다른 온천들이 산재하고, 식음용 온천, 얼굴에 김을 쪼이는 온천, 
100도가 넘는 뜨거운  김이 뿜어져 나오는 온천.
그리고 족탕 온천까지 짧은 시간에 다양한 온천의 즐거움을 선사하는 곳이었다.
순전히 온천의 열만으로 삶은 계란을 먹으며 족탕을 하는 재미에 시간가는 줄 몰랐는데
일행들은 벌써 버스에 올라있었다. 
 
뱃부에서의 일정은 가마도지옥 관람이 전부였다.
아직 고속도로 통행금지는 풀리지 않았고,
갈길은 먼데다 또 연수일정으로 우키하마을 방문과
미치노에끼 탐방이 있었다.
그리고 후쿠오카까지 가서 짐을 풀어야되는 강행군이 기다리고 있었다.
설경에 묻힌 우키하시의 모습이 아름답다.
산과 들과 도시가 조화로운 아름다운 삶의 터전으로
농촌과 도시가 공존하는 인구 약 3만 4천의 이상적 모습으로 보였다. 
아니나다를까, 우키하시를 지나는 국도변에 대규모 농산물 직판장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른바 "미치노에끼"(みちのえき, 道の驛)라는 일본 농산물 직거래를 이끄는 대표적인
시설인데 우리나라의 고속도로 휴계소 정도 규모로 전국 국도 변에 약 500여개가 설치되었다고 한다.
나중에 우키하마을에서 강의를 통해 알게 되었지만
미치노에끼는 초기 사업비 8억엔중 농민이 3.3억엔을 출자하고
나머지는 정부지원으로 제3섹터를 구성하고 이렇게 구성된 제3섹터가 주축이 되어
운영한다고 한다. 우키하미치노에끼에는 인근의 농민이 자발적으로 농산물을
위탁해서 팔수 있는데 온산물의 질과 안전성 등은 자체 검사를 통해
통과된 경우만 참여가 허용되고 이후 반복적으로 잘못이 드러날 경우
퇴출된다고 했다.
미치노에끼의 연매출은 약 7억엔으로 고객의 90%는 현내주민이고
약 10%정도가 외지인 고객이라고 했다.
이런저런 이유로 사람들의 왕래가 별로 없는 구석에
초라하기 짝이 없는 농산물 판매장을 지어놓고 성과가 적다고
실패한 사업이다 어쩐다면서 농업예산자체를 줄일려고만하는
우리 현실과 비교가 되었다.
 
우키하 미치노에끼를 둘러보고 기념품도 구입하고 하는 사이
이날 다랭이논으로 유명한 우키하마을로 우리를 안내할
공무원인 키구키상이 마중을 나오셨다.
키구키상이 모는 승용차를 따라 우리가 탄 버스는 점차 산속으로,
계곡속으로 접어들었다. 도저히 버스가 지나다닐수 없을 것 같은 길인데도 
계속해서 들어가다 보니 계곡을 따라 논들이 보이고 농가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계곡의 중간쯤되는 곳에 버스가 섰고 그때부터 한 10분을 걸어 도착한 곳은
일종의 마을 커뮤니티센타였는데 그곳에서 식사를 하고 강의를 듣는다고 했다.
원래는 마을 다랭이 논의 정상부까지 올라가서 동네 풍경도 보고, 
다랭이논 농사에 대한 현장설명도 들을 예정이었지만
심한 경사길에 눈까지 쌓여 도저히 접근이 불가능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것도 우리 일행이 식사를 하는 동안 담당공무원인 키구키상이 식사도 거른채
혼자 걸으서 도로사정을 확인하고 와서 알려준 것이었다.
또 한번 일본 공무원의 그 철저한 서비스정신에 탐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본 연수 내내 한번도 즐겁지 않은 식사가 없었지만
이날 우키하에서 받은 식사도 보기도 좋고 맛도 좋았다.
좋은 기분에 모처럼 일본청주 2병을 무려 1800엔을 주고 쏘았는데,
일행인 동윤씨 하는 말 "오래살다보니 송형이 사는 술도 다 먹어보네'란다.
이런~ 돈쓰고 놀림받고 ㅋㅋ

즐거운 식사를 마치고 옆방에서 키구키상으로부터 우키하 마을사업 등에 대한 강의를 듣고 질의 응답시간을 가졌다. 농업 여건이 열악한 다랭이 논을 그냥 방치하지 않고 의미를 부여하고 상품화하여 다른 평지 논에서 생산되는 쌀보다 약 25%비싸게 판매도 하고, 논두렁에 핀 피아나 꽃을 홍보해서 히간바라순례라는 프로그램을 만들어 내어 공동체를 활성화하고 경제적으로 재생산이 가능한 마을로 이끈 우키하마을의 사례는 참으로 모범적인 사례가 아닐까 생각되었다. 이번 연수증 가장 진솔하고 성실한 강의가 아니었나 생각되었는데, 특히 마을의 자원을 결합해 상품화한다는 '곳단자이론'과 '풍경 10년, 경관 100년, 풍토 1000년'이라는 모토는 한 인간이 지역 공동체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야하나 하는 가치를 생각케해보는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다.
내 살고 가면 그뿐인 것이 아니라 1000년가는 풍토까지 생각하며 살아야한다는 이들의 의식은 거창한 역사의식을 들먹이지 않드라도 충분히 공감가는 바가 많았다. 
물론 35농가중 이제 5농가 정도만 남아 다랭이 논 농사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 씁씁한 뒷맛을 남겼고, 마을 주민을 누구도 만나보지 못해 그들의 이야기를 직접 들을 수 없었던 점은 참으로 아쉬웠다.  


우키하시를 벗어나 우리를 태운 버스는 곧장 우리의 첫 출발지였던 후쿠오카로 향했다.
후쿠오카를 향해 달리는 2시간 내내 비로서 일본의 산천과 도시가 어우러진 아름다운 풍광을 한껏 느껴볼 수 있었다. 관광지나 산속 마을이 아니라 들판과 도시 그리고 산이 적당히 어우려져 형성된 삶의 터전이 너무나 평화롭고 아름다웠다.
오후 늦게 후쿠오카에 도착했지만 저녁 식사시간은 멀었고, 또 일행중 몇몇분이 산골짜기가 아니라 도시관광도 좀 하자는 요구를 하기도해 버스는 캐녈시티라는 후쿠오카 최대의 도심 복합쇼핑센타에 도착했다. 모두들 산속마을만 돌아다니다가 모처럼 복잡한 도심에 부려지니 어리둥절하니 정신을 못차리는 것 같았다. 일행중 여자2분만 신이나 쇼핑센타를 돌아다니신것 같고 나머지 남자분들은 사실 별로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번잡한 도시가 더 나은지 별로 불만스런 표정은 아니었다.
이어서 텐진거리와 텐진 지하상가를 구경하고,  일본에서의 마지막 저녁 만찬을 가진 이름은 잊어버린 '고기부페'집으로 향했다. 성대한 저녁을 먹고 술까지 한잔씩 걸친 일행은 흐쿳한 표정으로 숙소인  후쿠오카 역앞의 미야코 호텔에 짐을 풀었다. 이어서 호텔 뒷편 거리의 한 술집에서 간단한 술자리를 가지고 일본에서의 마지막 밤의 아쉬움을 달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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