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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4월 18일 ~

하노이서 밤새 달린 라오까이행 침대열차는 낡았고, 간식은 물론 물한병 준비 못했고 화장실은 좁고 불편했다. 위층 침대에는 낮선 사람도 함께 했고 기대했던 바깥 풍경은 암흑천지일뿐 기차는 진동으로만 달리고 있음은 감지할 수 있었다. 그래도 기차는 여행이 주는 모든 설레임을 선물했고 나는 밤새 행복했다. 잠들 것 같지 않았던 설레임과 기차의 진동에도 불구하고 기차는 밤새 우리를 낯선 공간으로 옮겨놓았다. 같은 캐빈에 여정을 풀었던 승객이 떠나는 것도 못 느낄 만치 깊은 숙면을 취했다. 기차 운행 중에 사파행 버스 티킷이 필요하냐고 승무원이 물었지만 거절했는데 라오까이 역에서 내리자마자 역무원이 버스표를 파는 임시 카운터를 펼쳐놓고 있었다. 쉽게 버스를 찾고 승차하니 버스로 가파른 길을 한 시간이나 달려 사파에 도착했다.

라오까이도 큰도시였지만 사파도 작은 시골은 아니었다. 보통의 읍보다 규모있고 짜임새있는 시가지를 가지고 있었다. 메인 광장인 사파센타를 중심으로 애초에 여행지로 조성된 듯 광장과 호수공원 그리고 호텔과 까페 등 여행관련 업소로 가득했다. 기념품과 가이드 써비스를 제안하며 여행자를 향해 달려오는 몽족 여인과 아이들은 이곳이 낯선 여행지임을 한시도 잊지 않게 했다. 애써 호객을 물리치고 예약한 호텔을 찾아 가는 길 중간에 한 식당을 들러 아침을 주문하고 나서야 겨우 사파에서 무엇을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식당을 나와 캇캇마을 쪽으로 내리막길을 10여분 걸으니 예약한 숙소인 Catcathills Resort 가 나왔다. 체크인전이라 호텔에 짐을 맡기고 천천히 걸어서 사파 센타로 나오니 MGallery Hotel과 함께 판시팡 가는 사파역이 나왔다. 적지 않은 가격에 잠시 망설이며 현장 구매보다 혹시 인터넷 구매가격이 싸지나 않은지 확인한 뒤 표를 사고 모노레일에 올랐다. 모노레일은 먼저 Sun Home Fansipan Legend에서 멈춘 뒤 케이블카를 갈아 타고 판시판역까지 올라간 뒤 다시 모노레일을 한 번 더 타고 베트남 최고봉이라는 판시팡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지점까지 올라갔다. 모노레일을종착지에 내려 가파른 계단을 10분도 걷지 않아 판시판 정상에 도착했다.

판시판은 해발 3147m로 베트남 최고봉인 데다 힘들이지 않고 모노레일과 케이블카를 이용해 쉽게 등정이 가능한 관계로 많은 관광객들의 발길로 붐볐다. 모노레과 케이블카를 갈아타는 중간 기착지마다 선물가게와 식당을 가로 질러야 했고 작은 롯데월드를 온양 조금은 분주하고 들떠 있는 관광지의 모습이었다. 외국인보다 훨씬 많은 베트남 인들이 눈에 들어왔고 베트남인들에겐 신혼 여행지로 사파가 유명하다고 했는데, 젊은 연인이 많았다. 유명 관광지 답게 혼자 카메라를 들고 중얼거리는 유투버들을 심심잖게 만날 수 있었다. 나 역시 판시판에 오르니 장대한 풍광에 한없이 기분이 고조되고 들떠 인파를 비집고 같이 쓸려다니며 연달아 사진을 찍었다.

다소 지친 몸으로 하산해서 사파시내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다시 호텔로 돌아와 늦은 체크인을 했다. 굳이 풀이 있는 비싼 숙소를 얻은 덕분에 아직은 추운 풀장에서 몸을 풀었다. 잠시 휴식 뒤 숙소를 나와 본격적으로 사파를 돌아다니다 사파호수에서 화려한 일몰을 맞고 캇캇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식당에서 사이공맥주하노이 맥주로 하루를 마무리 했다. 온 종일 들떠 신나게 뛰어다닌 덕에 이번 여행의 가장 값진 하루를 보냈다.

 

2023년4월 19일

분에 넘치는 시설과 친절 그리고 풍경까지 제공한 깟깟힐즈호텔에서 숙면을 취하고 아침에 눈을 떠자 창밖이 밝아오고 있었고 얼른 일어나 커튼을 걷으니 저 멀리 캇캇마을이 안개 속에 살아나고 있었다. 얼른 아내를 깨워 아침 안개속에 피어나는 캇캇마을 풍경을 보는 감동을 공유했다. 아내는 스케치를 하고 나는 짐을 싸고 또 다른 하루의 여정을 구상했다. 오전 일찍 깟깟마을 트레킹을 하고 오후 늦게 버스로 하노이로 돌아갈 계획을 세웠다. 늦게 조식을 한뒤 호텔 정원을 둘러보고 바로 깟깟마을 탕방을 나섰다.

호텔을 나와 캇캇마을을 향해 언덕길을 내려갔다. 여러 번 오토바이가 호객을 했지만 내리막길이기도 하고 걷는 재미를 위해 전통의상 대여점들이 즐비한 길을 지나 마을 입구에 도착했다. 하지만 난관에 봉착했다. 가지고 잇는 베트남 돈이 부족해 미국달러나 카드로 결제를 시도했지만 불가능했다. 마을은 겉만 보고 오토바이 택시를 흥정 끝에 타고 묵었던 호텔로 돌아왔다. 다시 하루 일정을 논의 한 뒤 택시로 사파 시내로 나가 환전을 하고 하노이로 돌아갈 버스를 예약했다. 남은 시간이 애매해 트레킹을 포기하고 택시투어를 할까 했지만 이역시 여의치 않아 포기했다. 호텔에서 짐을 찾아 버스사무실에 맡기고 넓지 않은 사파 시내를 오르락내리락 거리며 여유를 만끽했다. 지루하기 시작할 때쯤 재래시장에 들러 2인 한 끼 3500원 짜리 시장음식을 맛있게 먹고 사파호 주변 까페로 돌아와 커피를 시켜 노상 테이블에 앉아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모습과 지나는 강아지 그리고 거리를 흐르는 바람을 느끼며 모처럼 일정비운 시간의 공백을 누렸고 바쁠 필요가 없었던 어렸던 그 언젠가를 회상했다. 걷고 먹고 쉬기 위한 일정치고는 이동이 잦았지만 그래도 하루 2만보 이상 걷고 싼값 덕분에 실컷 먹고 좋은 풍광 속에서 삶을 누렸다. 이번은 관광이고 휴식이고 결국은 소비지만 언젠가는 다시 순례로 구도로 세상을 주유할 것을 꿈꿨다. 오늘 하루도 세상에 삶의 기쁨이 가득하고 모든 존재가 서로에게 축복이기를 빌며 하노이행 버스에 올랐다.

난생처음 타는 슬리핑 버스는 편안하고 아늑했다. 두어 시간마다 휴게소에 들러 300원을 내고 화장실을 사용하고 버스가 출발하면 바같 풍경을 즐기다 이내 잠이 들곤 했다. 6시간을 길다고 느끼지 않은 채 하노이에 도착했고 이동 중에 예약한 마리나 호텔은 버스 종점 바로 길 건너였다. 호텔은 좁았지만 깨끗했고 있을 거 다 있고 아늑했다. 거리로 나와 길모퉁이 해산물 가게에 들러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 와중에 이번 일정 중에 제일 비싼 고동 요리와 조개탕을 시켜 볶음당면과 맥주로 저녁을 해결했다. 호안끼엠 호수주변 구시가지는 그냥 그 속에 들어서는 순간 박물관 관람도 유적지 탐방도 아무 짓도 하지 않아도 여행자가 되는 신기한 장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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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4월16일~

4시간은 길지 않았지만, 새벽비행기라 모두 창을 내리고 잠만 자는 바람에 내가 좋아하는 창밖 구경을 하지 못한 점이 많이 불편했다. 현지 시간 아침 8시 조금 넘어 하노이 노이바이공항에 착륙했다. 비행은 편안했고, 공항은 한산했다. 나의 첫 베트남여행은 트랩을 내려설 때 갑자기 들이닥친 습하고 뜨거운 공기로 다가왔다. 영상과 활자를 통해 베트남 전쟁으로만 접했고, 나의 농사일을 돕는 베트남 노동자를 통해 간접 체험했던 베트남 풍경을 바라다 보는 마음이 복잡했다. 마음은 혼란스러웟지만 베트남에 입국심사는 쉽게 끝났고 이내 대합실로 넘어와 유심을 갈고, 환전을 했다. 하노이행 버스를 타기 전에 공항내 식당을 찾아 첫 베트남 현지 쌀국수를 비싸게 체험했다.

하노이 시내로 가는 86번 버스는 찾기 쉬웠다. 비슷한 차림의 다양한 인종의 여행자들이 몰리니 그냥 무리지어 따라다니기만 해도 길을 잃을 일은 없었다. 버스는 편안했는데 차창 선팅 때문에 창밖 풍경을 보기에 만족스럽지 못했다. 그래도 베트남의 첫인상을 얻기 위해 열심히 고개를 돌리고 몸을 틀어 전통과 현대가 만나고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하노이의 풍경을 눈에 담았다. 어디 홍콩 영화의 뒷골목 배경 같은 호안끼엠 호수 인근에 버스가 들어서고 승객의 대부분이 몰려 내렸다. 구글맵을 켜고 골목을 걸으며 영화 속에서나 보던 베트남의 거리와 현실을 비교하며 좁고 복잡한 인도로 트렁크를 끌고 예약해 둔 호텔을 찾아 나섰다.

메이드빌프리미어 호텔을 찾았지만 체크인 시간이 많이 남아 짐을 맡기고 거리로 나섰다. 먼저 호안끼엠 호수를 한바퀴 돌기 시작했다. 외국인도 적지 않았지만 더 많은 현지인들의 무리가 거리를 쓸고 지나갔다. 여기저기 부스가 설치되고 작은 공연이나 체험 프로그램 등이 진행되고 있었고 상황을 살펴보니 프랑스와 무슨 교류의 날 같은 행사가 열리고 있었다. 우선은 낯선 베트남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아이스크림을 사 물고 사방을 두리 거리며 베트남스러움을 한껏 느끼기 위해 호안끼엠 호수를 한 바퀴 돌았다. 호숫가의 응옥썬사당엔 인파로 넘쳐났다. 비집고 들어가 오래전 나라를 구할 칼을 전해줬다는 거북이의 전설을 읽고 유물을 보고 호텔로 돌아왔다.

한낮의 더위는 들뜬 여행객을 지치게 하기에 충분했고, 난생처음 호텔 옥상 풀장으로 달려가 수영을 했다. 오직 풀장을 위해 두 배의 비용으로 예약한 호텔이니만치 풀장을 건너뛸 수는 없었다. 규모는 작고 수질을 그럭저럭 이었지만 다행히 아무도 없는 풀장에서 신나게 놀았다. 길지 않은 시간이지만 충분히 즐겼을 때쯤 덩치 큰 서양인들이 몰려오자 풀장을 나와 다시 하노이 투어를 위해 거리로 나섰다. 호텔을 나오자 마자 길모퉁이 식당에서 쌀국수를 포함한 몇가지 정체불명의 음식을 시켜 점심을 해결하고 그랩을 불러 호치민 박물관으로 향했다.

박물관을 둘러보고 호치민 묘소로 향했지만 오픈 시간이 지나 다시 걸음을 옮겨 레닌동상이 있는 거리로 향했다. 길 중간에 한국인에게 더 유명하다는, “베트콩에서 이름 따 왔다는 밀리터리컨셉 인테리어의 콩까페에 들러 코코넛 커피를 마시고 베트남 현대사와 호치민의 삶을 생각했다. 역사에서 한 번도 부패한 지배세력을 신진세력이, 구시대를 신시대가 완벽히 제압하고 승리하는 경험을 갖지 못한 대한민국과 그 경험을 가진 베트남의 차이는 무엇일까? 많이 부러운 게 사실이지만 또 한편 그 승리에 도취되어 나아가지 못하고 머물러있는 듯한 베트남의 현실은 또 다른 아쉬움으로 느껴졌다. 승리한 혁명이 부패한 관료의 손아귀로 귀착되는 역사의 아이러니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대한 혁명의 역사를 공유한 민족의 자존과 자긍의 힘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코코넛 커피로 몸을 식힌 뒤 다시 거리로 나서 레닌 동상에 들러 참배하고, 포토존으로 유명한 철도건널목을 지나 따히엔 맥주거리까지 걸으며 하노이의 밤을 맞았다. 하노이는 밤에 살아났다. 한낮의 더위가 가쉬자 마자 맥주거리로 알려진 호안끼엠 호수 인근의 따히엔 거리는 낮은 탁자와 앉은뱅이 의자로 길이 채워졌다. 2차로의 중간만 오토바이가 지나갈 정도만 남기고 길 양쪽의 거리는 업종에 관계없이 모두 빽빽이 좌판으로 채워졌다. 골목 여기저기서는 다양한 공연이 이어졌고, 풍선장사나 기타 기념품을 파는 상님들까지 모여들어 그야말로 거리는 축제의 장이 펼쳐졌다. 한번씩 경찰이 나서 통로확보를 지시했지만 경찰이 지나가자마자 이내 거리는 다시 의자와 탁자로 메꿔졌다. 우리가 묵는 호텔이 그야말로 맥주거리의 중심이다 보니 같이 들뜬 기분에 거리로 나서 좌판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닭발요리와 이런저런 안주거리를 시켜놓고 타이거 맥주를 마시며 거리를 휩쓰는 맥주거리의 열기에 휩쓸려 들어갔다. 하노이의 첫 밤은 그렇게 뜨거웠다.

2023년4월 17

아침부터 침대머리에서 오늘 하루 투어 코스를 점검했다. 가보고 싶은 곳은 많고 동선이나 그곳에 대한 정보는 미리 준비된 것이 없었다. ‘베트남 여성박물관호아 로 감옥 박물관그리고 국립미술관을 대충의 목적지로 잡고 구글맵에 의지한 채 거리로 나섰다. 먼저 택시를 불러 하노이역을 들러 짐을 맡기고 밤에 떠날 사파행 기차표를 예매한 뒤 발길 닫는 데로 걷기 시작했다. 동서남북에 대한 인식 없이 마냥 걷다보니 다시 호안끼엠 인근의 항쫑 화원을 지나 성요셉성당에 이르렀다. 자료를 찾아보니 프랑스 식민제국 시절 하노이를 제압한 프랑스는 본국의 노트르담 성당을 본 따 성요셉성당을 지었고 이후 프랑스 식민군을 물리친 베트민에 의해 장악되고 성당의 기능을 잃었다가 1990년 이후 베트남의 개방과 더불어 교회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고 했다. 제국주의 침략의 상징이면서 동시에 식민지 민중의 종교적 열망의 상징물이 된 성요셉 성당이 지금은 이방인 관광객이 찾는 관광명소가 되는 삶과 역사의 섭리가 오묘했다.

이어서 찾은 여성박물관은 큰 기대 없이 일정에 넣었지만 의외로 다양한 콘텐츠로 많은 울림을 남겼다. 입구에서 조금의 비용을 지불하고 한국어 설명이 나오는 헤드폰을 빌려 각 섹트마다 돌며 상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어 이해에 큰 도움이 되었다. 박물관은 일상적인 베트남 여성의 삶과 혁명기 여성 혁명가의 역할을 비롯해 다양한 소수민족의 혼례와 일상 노동에 대한 컨텐츠까지 적어도 반나절은 할애해 둘러보아야 할 만치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가난한 집안의 딸로 태어나 학교교육을 받지 못하고 어린 나이에 일터로 내몰려 혹독한 노동을 통해 가족의 생계를 보조하는 여성의 삶‘14살에 프랑스군에 체포되어 결국 사형선고를 받고 18살이 되자 처형당한 어린 민족해방투사의 삶까지 베트남에서 존재했던 그리고 현재도 존재하는 여성의 다양한 삶을 담고 있는 베트남 여성박물관은 오래도록 하노이 여행의 기억 속에 남아있을 것 같았다.

여성박물관을 나와 다음 행선지로 호아 로 감옥 박물관을 잡고 거리를 걷다가 마침 점심 나절이다 보니 거리의 여기저기에 앉은뱅이 의자를 놓고 앉아 쌀국수를 먹는 풍경을 마주하게 되었고 우리 역시 그 무리에 휩쓸려 베트남인이 되고 싶은 이방인마냥 스며들어 즐거운 마음으로 점심을 해결했다.

이어서 찾은 호아 로 감옥은 의외로 외국인 관람객이 넘쳐났고, 프랑스 식민지 시절 최고의 문명국을 자처하던 서양인에 의해 자행된 야만과 학살의 현장은 찬 기운이 가득했다. 원래 호아로는 한자로 火爐로 식민지 이전 시대에는 숯을 굽고 도자기를 굽던 곳이라고 했다. 이곳은 프랑스에 대항해 베트남의 독립을 도모하던 베트남인들을 가두고 고문하고 그리고 처형하던 장소로 베트남인에게는 독립항쟁의 상징적 성지였다. 나중에 프랑스를 물리친 뒤에는 다시 미국의 침략에 맞서 생포한 미군 조종사들을 수용하는 곳으로 이용되어 미군들에겐 하노이 힐턴호텔로 불리기도 했다고 한다. 관람객 모두 긴 침묵을 이어가며 묵묵히 안내된 동선을 따라 감옥을 탐방했는데 이어폰을 통해 흘러나오는 설명에 시간가는 줄 모를 만치 몰입하 모습이었다. 문득 가해국이었던 프랑스와 미국의 국민들은 호아루 감옥을 둘러보며 어떤 생각을 할까 궁금해졌다. 이어폰을 통해 독립운동가들의 개별적 사연을 들을 때면 하나의 역사적 드라마인양 장엄하고 비장했다. 두어시간이나 흘렀을까? 독립투사의 사형을 집행하던 마지막 장소에서 그분들의 명복을 빌며 향을 올린 뒤 거리로 나섰다.

이어서 인근의 국립미술관과 하노이 문묘를 관람했다. 미술관은 불상 등 몇몇 불교 문화재와 20세기 이후 현대화 중심으로 꾸려져 있었고 관람에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인근의 문묘 역시 많은 관람객이 있었지만 그냥 한번 훝어보고 지나칠 정도의 명소로 느껴졌다. 더위에 지친 몸을 이끌고 하노이역 인근으로 돌아와 스타벅스에서 더위를 식히다 약속된 지인을 만나 고급진 후에 전통요리를 전문으로 한다는 식당에서 화려한 저녁을 먹었다. 반세오의 맛을 기억하고 다시 하노이역으로 돌아와 사파행 야간열차를 기다리며 역내를 살피고 오고가는 인간 군상을 구경했다. 10시 출발 예정인 기차에 30분 전부터 승객을 들이기 시작했고 우리가 탈 기차는 임시 증설된 기차인지 제일 마지막 칸으로 다른 기차에 비해 훨씬 세월의 흔적이 진했다. 10시에 정확히 출발한 기차는 손에 닿을 듯한 건물사이를 비집고 속도를 내기 시작했고, 나는 흐린 창으로 보는 바깥 풍경을 놓치지 않기 위해 졸린 눈을 부릅떴지만 어느새 기차의 진동 속에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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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은 신혼여행 가고 우리 부부는 舊婚旅行을 떠나다!
아내를 만나 결혼을 하고 딸 아이 하나 낳아 기르며 산지 삼십 몇 년이 흘렀다. 그사이 아이는 자라 짝을 만나고 혼례를 치루니 우리 부부도 지난 세월을 추억하며 하노이 구혼여행길에 올랐다. 지난 고난의 기억을 지우는 행복한 여정을 기록에 남겨 노후를 대비해 본다.
 
2023년 4월 14일
휴가를 얻어 딸아이 결혼식을 위해 서울로 올라왔다. 사실은 딸 결혼식보다 식 끝나고 떠날 울 부부 베트남 여행에 더 설레는 마음을 안고 서울 왔다. 용산역에서 마라탕으로 점심을 해결하고 코엑스에서 열리고 있는 “2023서울화랑미술제”를 관람했다. 일만여점의 현란한 작품에 눈이 호사를 누렸지만 그림이 너무 많아 어떤 작품도 귀하게 여겨지지 않을까 걱정되었다. 2만원이라는 비싼 입장료를 내고 방대한 아트페어 현장을 누볐지만 그래도 마음에 남는 유일한 작품은 [관훈갤러리]를 통해 출품한 아내 류준화의 작품이었다.

코엑스 나와 홍대로 달려오니 아내와 딸은 네일샵에 들어가고 나는 거리의 미아가 되었다. 아내가 홍대서 학위를 하고 내가 합정에서 친구들과 출판사를 하면서 합숙을 할 때 자주 들렀던 홍대거리를 혼자서 배회했다.

추억이 서린 홍대 거리를 걷고 고풍 찬연한 프랑스식 요리점에서 딸과 아내와 더불어 세 식구가 같이 비싼 저녁을 먹고 초저녁에 호텔에 들어와 곯아 떨어졌다. 새벽에 눈을 떠니 축의금 문자가 쌓였고 꼭 그만치 사정이 생겨 혼례에 참석하지 못한다는 메시지가 쌓여 있다. 오히려 마음 쓰이게 한 내가 미안하다. 결혼식이란 게 참 걱정이 많다. 평생에 한번 치루는 대사니 시행착오가 용납되지 않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하객이 너무 많을까봐 걱정이었는데 나중엔 너무 안오실까봐 걱정이다. 신랑신부에게 누가되지 않을까 사돈께 실례를 범하지 않을까 다 걱정이다. 이래도 걱정 저래도 걱정인데 다시 생각하니 그냥 되는대로 즐기면 되는 게 아닌가는 생각도 들었다.

4월 15일 혼례가 무사히 끝났다. ‘식’은 단순하고 단조로웠고 부모의 역할이라고는 하객맞이와 정해진 성혼선언문과 당부의 글을 읽는 것이 전부였다. 사실 부모로서 별로 도와주지도 못했고, ‘식’보다 ‘실’을 중시하기에 아쉬운 것도 없었다. 자기들이 알아서 하는 결혼식이었지만 그래도 식이 끝나니 긴장이 풀리고 미리 세워둔 하노이 여행에 대한 설레임이 비로소 일기 작했다. 인근 까페에서 마지막 하객과의 담소가 끝나고 작별한 뒤 살아온 세월을 되돌아보고, 살아갈 날을 점치며 만감이 교차하는 마음을 억누르며 인천공항 는 지하철로 달려갔다. 올림머리에 메이크업 그대로 딸사위보다 먼저 공항으로 떠나니 지인들이 놀리며 부부여행이 아니라 재혼여행으로 보인단다.

출국 때마다 자주 이용하는 인천공항 찜질방인 [스파온에어]에 누울 자리를 확보하고 몇 일간 먹지 못할 한식으로 저녁을 먹었다. 마땅히 할일도 없고 마음은 들떠 그냥 공항 청사를 할 일없이 걸었다. 공항은 나에게 알 수 해방감을 준다. 내안에 사는 내가 통제 불가능한 내가 숨을 죽이고 내가 통제 가능한 내가 기세를 얻는다. 나는 늘 길 위에서 행복하다. 자식가진 인간의 책무를 벗어던지고 나니 이제 좀 막 살아도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16일 새벽6시 출발하는 비엣젯을 타기위해 4시부터 분주하게 움직였다. 트램을 타고 승강장 까지 이동하니 너무 이른 시간이라 아침식사를 해결할 곳은 유일하게 햄버거집 밖에 없었다. 그것도 주문의 선택지는 없고 오직 한 메뉴만 주문이 가능했다. 비싼 기내식 사먹는 것보다 나은 선택이란 생각에 새벽부터 버거랑 찬 콜라로 배를 채웠다. 정시에 비엣젯에 올라 덜 잔 잠을 채우려 애쓰는 사이 착륙준비 멘트가 잠을 깨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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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농어촌개발도시개발을 포함한 지역개발일반에서 분리되어 그 특수성이 모색되고, 새로운 정책적 과제로 부상한 지 벌써 60년이 넘었다. 1960년대부터 초가지붕과 부엌 개량사업이 진행되긴 했지만 1969년도에 입법된 [농촌근대화촉진법]에 기반해 70년대에 수행된 새마을운동은 한국농어촌개발 사업의 효시라고 할 수 있다. 새마을운동은 철저하게 관 주도로 시행되어 낙후된 농촌의 취락구조를 개선하여 주민 삶의 편리를 향상하는 것은 물론, 농민의 정신개조와 지도자 양성 그리고 경제적 낙후성의 탈피까지 도모한 그야말로 입체적 농촌 개발사업이라 할 수 있다. 권위주의 정부에 의해 주민을 동원한 관 주도 하향식 사업으로 산업노동력의 공급을 위해 농촌의 분해를 가속화 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고, 한편으로는 주민의 자발적이고 전폭적인 참여를 끌어내는 데 성공했고, 그 세대는 여전히 자신이 국가 건설의 주역으로 대접받았고 스스로 자긍심을 가질 수 있었던 시절로 기억하기도 한다.

 

이후 지역개발의 개념이 변화하고 정책의 목적도 바뀌어 왔다1970년대에 진행된 새마을 운동은 쌀 증산을 통한 식량 자급이라는 국가적 과제에 종속되어 추진되었다면, 1980년대 농촌개발정책은 처음으로 농업을 넘어서기 위한 모색을 시도한다. 70년대에 일어난 위협적인 농촌분해의 속도를 누그러뜨리고 농촌 마을의 자립적 구조를 확보하기 위해 농공단지 조성이나 농산가공업 등 농촌소득원 개발 등을 수행한다. 이는 1994년에 농어촌정비법이 제정되면서 한 층 탄력을 받게 된다. 농어촌정비법은 농어촌 공간의 기능이 전통적인 어로나 영농을 포함해 생산기반과 관광휴양자원, 산업단지나 한계농지 등으로 분화된 현실을 반영해 농어촌공간을 종합적이고 체계적으로 정비하고 개발하기 위한 목적으로 수립되었다. 90년대의 대표적 농어촌 개발사업은 정주권생활개발사업이나 문화마을 조성사업을 예로 들 수 있다.

 

2,000년대 들어 농어촌개발 개념이 획기적으로 전환된다. ‘농촌문제를 농업 생산과 완전히 분리해서 정립함으로써 농촌개발 문제가 먹거리 생산보다 훨씬 포괄적인 외연을 확보하게 된다. 이렇게 농촌의 기능 전환에 따라 마을 내부 개발에 사로잡혔던 폐쇄적 시각에서 벗어나 도시와의 관계 재정립을 시도한다. 농촌이 단순 먹거리의 생산 공급처에서 고유한 농촌의 문화적 역사적 자산을 통해 도시민의 정서적 안식처, 마음의 고향으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 이런 인식전환에 기반해 본격적인 도농교류사업이 시작되어 팜스테이마을사업이나 녹색농촌체험마을사업이 시행되고 귀농정책 역시 본격화된다.

 

또한, 이전까지의 국가 주도 사업 모델의 한계를 탈피하고자 상향식 개발 방식이 도입되고 무엇보다 주민 주도성이 강조된 농촌마을종합개발사업이 시행된다. 농촌마을종합개발사업은 이미 분해단계에 들어가 자기완결성이 떨어지는 몇 개 마을을 묶어 지구 단위로 소득사업을 포함한 종합적이고 포괄적인 개발을 도모하게 된다. 하지만 이미 주체가 분해되거나 미약한 상황에서 주민주도성에 기댄 농촌마을종합개발 사업은 쉬 난맥상이 드러났다. 이후 주체 형성을 위한 지역활동가 육성이나 중간지원조직 양성을 포괄하는 신활력프러스사업을 도입하고, 농촌종합개발 사업이 추구했던 포괄적 정책 목표를 세분해서 정확한 정책목표를 타킷팅한 일반농산어촌사업이나 취약지구 생활여건 개조사업, 중심지 활성화사업 등등 다양한 정책들이 수행되게 된다.

 

2020년대에 들어서면서 지난 50년 동안 수행된 농촌개발사업의 성과와 한계를 딛고 새로운 미래를 모색하는 과정에서 농촌공간 재구조화 및 재생지원에 관한 법”, 일명 농촌공간계획법이 수립된다. 이는 지금까지의 농촌개발 개념을 획기적으로 전환하며 한국의 농촌지역개발사업의 역사에서 한 획을 긋는 분기점이 된다.

 

가장 중요한 전환은 농촌개발사업에 과정의 개념이 도입된 점이다. ‘마을은 생성, 발전, 쇠퇴의 과정 속에 있고 농촌개발은 단지 그 지속가능성을 확보하기 위한 활동에 다름 아니기에 완결된 단일 사업의 관점이 아니라 흐름과 과정의 관점에서 농촌개발사업을 바라다 봐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지금까지 수행된 단기적인 사업 기간과 협소한 시각으로 일정한 예산을 한정된 시간에 소진해서 물리적 건축물이라는 성과를 산출하는 기계적 작업으로서의 농촌개발은 멈출 때가 되었다는 자기 비판적 인식이 전제된다. 이제 농촌개발은 과정의 관점에서 인간의 삶의 기반인 농촌공동체가 갖는 지리적 공간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포괄하는 인문사회학적, 역사적 공간 안에서 이루어지는 인간 행위라는 인식이 전제될 것을 요구받게 된 것이다.

 

그리고 법령의 이름에서 드러나듯 공간을 농촌개발의 핵심 개념으로 세운 점이다. 지금까지의 농촌개발은 개발적 측면이 강했다. 단일한 건축물이 완결된 단일 사업의 결과물이 되는 방식의 농촌개발은 중복개발과 난개발, 저개발이 혼재하는 공간적 부조화와 난맥상을 초래했다. 한정된 자원을 투여해 인간 삶의 질을 향상하기 위한 개발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3차원적 공간개념에 기반해 삶터, 일터, 쉼터로서의 농촌다움을 북돋울 정책적 방안이 마련될 필요가 있었고 농촌공간계획법은 그와 같은 요구에 부합하기 위해 입법된 것이다. 농촌공간계획법이 시행되면 입체적 공간에 대한 인식과 과정이라는 관점에서 장기적 계획과 3차원적 공간개념에 기반한 농촌공간재생프로젝트가 시행될 예정이다농촌개발 영역에서 괄목상대할만한 변화 발전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고 우리 앞에 보랏빛 미래만 놓여있는 것은 아니다. ‘지역개발 개념은 변화 발전을 거듭해 왔지만, 정책이 바뀌어도 현장에서는 바뀐 게 아무것도 없다고 느끼는 경우가 많았다. ‘과정으로서의 농촌개발, 3차원적 공간개념의 도입이라는 구상이 법령에 머물고 현장에서 작동하지 못할 수도 있다. 사실 정책의 현장 적용성이 떨어지는 경우가 많았고, 현장의 요구에 맞지 않는 법은 그야말로 무용지물이다. 그래서 농촌공간계획법에 따른 시행령, 시행규칙 등에 법의 취지를 살리는 현장의 요구를 담는 작업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리고 소위 말하는 경로의존성 때문에 정책의 의의가 구현되지 못하는 측면도 무시할 수 없다. 사실 걷던 길이 편하고 해오던 방식이 익숙하다. 그것은 우리 인간의 본성에 가깝다그러면 어떻게 경로의존성에서 탈피하고 농촌공간 재생의 취지를 살릴 정책수행이 가능하도록 할까? 

 

손쉬운 답을 구할 순 없지만 먼저 내외부 인적 자원을 폭넓게 포괄하면서 주민주도성을 견지하는 사업 설계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인적 자원이 빈약한 마을 현실에서 전적으로 마을주민에게 결정권과 책임을 떠넘길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이를 이유로 행정이나 외부 전문가가 전적인 사업 졀정권을 가지는 것은 농촌개발사업 취지의 절반을 버리는 셈이 될 것이다. 주민과 중간지원조직, 행정 등 다양한 주체가 어우러져 미래를 도모하는 환상의 꼴라보를 만드는 것이 농촌개발 사업의 처음이자 끝이다. 그 과정이 마을 주민역량의 향상으로 귀속되고 새로운 인적 자원을 창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시행착오를 밑바탕으로 폭넓게 정책의 유연성을 확보할 필요가 있다. 정책의 유연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사업 현장의 요구를 행정의 틀에 끼워 맞추거나 요식을 위해 사업 목적을 훼손하는 걸 막아야 한다.  공직자의 직권남용과 주민의 이기심과 편의주의 등에 의해 정책 목적이 훼손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정책 유연성은 사라지고 세세한 사업 지침까지 강제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그러다 보니 실제 주민은 할 일이 많지 않다고민도 그렇게 필요하지 않고 소위 성공사례를 따라 하기에 바쁘고 결과적으로 판박이 사업을 양산해왔다사업의 목적에 부합하는 사업의 영역을 최대한 열어놓아야 마을사람들은 고민하기 시작하고 고민이 많아야 좋은 생각이 나올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농촌개발의 개념을 획기적으로 확장하기 위한 시도가 필요하다. 이런 조건이 충족될 때 좀 더 정책의 취지를 살리는 모험적이고 진취적인 사업수행이 현장에서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지금까지 마을개발의 개념이 확장되어온 것은 사실이다. 점 개발에서 면 개발, 이제는 3차원적 공간개념까지 도달했다. 하지만 아직은 부족하다. 의료, 교육, 에너지자립, 사회적 자본 형성 그리고 무엇보다 주민의 삶을 담보할 경제,  농업 기반조차 지역개발의  틀 속에서 함께 고민되어야 한다.다시 말해 주민의  전체가 농촌개발 개념 속에 녹아내야 한다. 농촌의 폐쇄적 틀을 넘어 대한민국의 조화로운 발전과 기후위기에 빠진 전 지구적 생태환경 미션까지도 농촌개발 개념 속에 녹아 들여야 한다. 농촌개발은 그냥 농촌의  전체와 관련된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사업의 목적과 성과 대한 가치기준, 평가 기준을 바꾸는 것이 필요해 보인다. 실패 사례를 양산하는 기존의 평가 기준을 버리고 실패조차 마을의 잠재적 자산이 되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 소득 증대나 방문자 증가 등의 기준을 앞세우다 보니 늘 농촌개발사업을 낭비성 예산으로 공격받게 된다. 오히려 내외적 협력과 학습, 그리고 새로운 시도의 경험을 자산으로 하는 사업 수혜 주민의 삶의 질 향상, 행복도 증가, 사회에 대한 공익적 기여가 기준이 된다면 사업도 바뀌고 농촌도 바뀌지 않을까 생각된다.

 

아직 붕괴될 여지가 남아있다는 사실이 오히려 신기할 지경이지만 여전히 대한민국의 농어촌은 붕괴하고 있다. 공과에 대한 평가가 중요하지만, 농촌개발정책의 실패를 그 원인으로 말하기엔 산업화의 파고가 너무 높았다. 여전히 농촌개발정책은 유효하고 새로운 시대에 맞는 농촌의 대안 모델 제시까지 나아가야 한다. 그 점에서 농촌공간계획법에 따른 농촌공간 재구조화와 재생 노력은 우리 농촌의 삶을 개선하는데 중요한 기여를 할 것으로 기대되지만 그렇다고 만병통치약은 될 수 없다. 농촌 설계는 국가 설계의 하부 단위에 종속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농촌의 지속가능성이 확보된 국가 미래상을 제시하는 것까지가 농촌을 기반으로 살아가는 우리의 과제가 아닐까 생각된다. 이래저래 농촌 주민은 참 짐이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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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이 만나 사랑과 신뢰를 쌓고

혼인을 결심하고

혼례를 준비하는 긴 과정을 거쳐

오늘 혼례식을 무사히 치러

드디어 성혼을 선언하게 되었습니다.

잘 자라준 딸과 사위에게,

딸을 잘 키운 아내에게,

그리고 듬직한 사위를 길러 내신 사돈 내외께

고맙다는 말씀을 올리면서

성혼선언문을 낭독하도록 하겠습니다.

 

성 혼 선 언 문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부부의 인연을 맺게 되는 경사스러운 날에

먼 길 마다 않고 찾아주신 양가 친지와

하객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오늘 저의 사위가 될 신랑 *** 군과

저의 사랑하는 딸 신부 ** 양이 부부가 되려 합니다.

 

결혼은 온전히 자신의 삶을 스스로 책임지고

서로를 동반자로 선택해 무한한 사랑으로 보살피며 살아가겠다는

두 사람의 약속입니다.

 

삶은 늘 환희와 고난이 교차하는 미로 속에 있지만

둘이 서로의 등불이 되어 의지하기에

두려울 것이 없을 것입니다.

 

부모의 품에서 벗어나 더 큰 행복을 찾아

새로운 세계로 향하는 두 사람의 앞날을 축원해 주시기를

하객 여러분께 당부드립니다.

 

이제 두 사람의 결혼이 원만하게 이루어졌음을

양가 친지와 하객 여러분 앞에 선언합니다.

 

2023415

 

신부 아버지 ***

 

성혼선언문 낭독에 이어

부부라는 새로운 인생의 길로 첫발을 내딛는

신랑 신부에게

아빠로서 두세 가지 당부의 이야기를 전하고 싶습니다.

 

먼저 시간을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시간은 흘러가 버린 뒤에야 그 소중함이 드러납니다.

청춘은 늘 시간을 허비하기 쉽고

노년은 헛되이 흘려버린 시간을 아쉬워하며 후회로 가득차기 마련입니다.

지금 이 순간순간이 금쪽같은 축복이고

다시 못 올 내 인생의 화양연화라는 사실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한순간도 미워하지 말고,

매순간 사랑으로 가득 찬 인생을 만들어가기 바랍니다.

 

두 번째, 자신에게 주어진 인연을 아끼고 가꾸라고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나는 내가 맺는 인연의 산물입니다.

부모자식의 인연, 친구의 인연, 직장 동료와의 인연

이 모든 것이 나를 이루기에

이들 인연을 아끼고 사랑하고

그리고 그 인연을 넓혀

나를 둘러 싼 가장 큰 인연인 세상의 도리와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삶을 살아라고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시간과 성장에 대해 이야기해주고 싶습니다.

나무의 크기는 나무를 비켜간 세월의 크기입니다.

그런데 유독 사람은 시간이 저절로 성장시키지 않습니다.

시간은 천사의 앞 얼굴과 악마의 뒷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잘 산 세월은 정답고 아름답고 그립지만

헛되이 보낸 시간은 나를 지치게 하고 남루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시간을 기다리지 말고

늘 스스로 가꾸고 다듬고 성장하는 삶을 살아갈 것을 당부드리면서

아빠의 짧은 당부의 이야기를 마치겠습니다.

 

이제 사위 ***과 딸 **

온전히 둘의 인생을 위해

힘차게 세상 밖으로 출발하기 바랍니다.

하객 여러분께서는

큰 박수로 둘의 행복을 축원해 주시길 당부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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