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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투발루는 쉽게 갈 수 있는 곳이 아니야!

투발루를 향해, 중간 기착지인 피지로 들어가는 날 아침, 호텔 인근의 거리식당에서 버거로 아침을 때웠다. 여행객들이나 출근길 손님이 주요 고객인 듯 아침부터 손님이 많았는데, 반갑게도 가게는 젊은 한국인 부부가 운영하고 있었다. 가볍게 아침을 해결하고 남는 오전 시간에 "로열 보태닉 가든"을 산책하고 조금 일찍 시드니 공항으로 향했다.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체크인을 하고 Airside에 들어서 점심을 해결했다. 시간이 남아 면세점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시간을 보냈는데 전광판에는 오직 우리 비행기만 보딩 시간이 뜨지 않았다. 피지항공 부스에 들러 보딩 지연에 따른 30달러의 보상 쿠폰까지 받아 스넥과 음료를 마시고 놀다가 오후 시간을 다 보내 뒤에야 겨우 피지의 난디행 비행기를 탈 수 있었다.

난디행 피지항공은 편안했고 서비스도 만족스러웠다. 영화를 보고 음악을 듣고 일정을 챙기다 보니 4시간이 훌쩍 지나 난디 공항에 도착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난디에서 바로 수바행 비행기를 타야지 다음날 아침 투발루행 비행기를 탈 수 있는데 이미 수바행 비행편의 출발 시간을 넘겨버린 것이다. 항공사측과 지루한 공방 끝에 난디에서 자고 새벽 비행기로 수바로 이동, 투발루행 비행기를 탈 수 있도록 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덕분에 우리 일행 등 2~30명의 승객은 난디공항에서 버스로 20여분을 달려 "Double Tree Resort"라는 고급 리조트에서 늦은 저녁을 먹고 짐을 풀 수 있었다. 버스에서 내려 리조트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배를 타야하는 것도 이국적이었고, 리조트에 들어서자 직원들이 불라라고 외치며 환대해 주던 이벤트도 인상적이었다. 피곤한 몸이지만 나도 모르게 같이 활짝 웃으며 불라를 외칠 수밖에 없었다.

고급리조트에서 자정넘어 저녁을 먹고 새벽 430분에 다시 공항을 향해야하는 짧은 일정이 불만스러웠지만 어쩔수 없었다. 혼자 자기에 그리고 고작 3시간만 눈을 붙이고 나오기에는 너무 아쉬운 리조트였다. 새벽에 난디를 출발한 72인승 프로펠라 비행기는 걱정과는 달리 우리를 편안히 수바에 내려 놓았다. 수바 공항에는 우리보다 몇일 앞서 출장와 끼리바시 ODA사업관련 업무를 미리 보고 피지에 도착한 5명의 일행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건강한 모습에 서로 반가운 마음을 나누기도 잠간 투발루행 비행기가 결항이라는 소식이 전해왔다. 연료 수급에 문제가 생겨 투발루행 비행기가 결항이 되었고, 다음 비행기는 3일뒤에나 있으니 표를 바꾸고 미리 체크인을 하면 그 비행편은 꼭 태워주겠다는 것이었다. 선택지가 없으니 수용할 수 밖에 없었고 우리는 수바에서 억지로 3일을 머물게 되었다.

공항에서 숙소인 노보텔 수바 라미 베이를 향해 가는 길에 한국인이 하는 식당(The Grace Road Kitchen)에서 점심을 먹고, 유심을 갈고 아래층에 있는 마트에서 간단한 음료 등을 샀다. 일행이 늘어나다 보니 유심을 가는 데만도 시간이 한참을 지체하고 숙소에 들러 양말 등 간단한 빨레를 하고 나니 하루가 다 갔다. 저녁은 호텔에서 10분여 거리에 있는 한식당인 Korea House Restaurant 에서 성대히 가졌다.

62일 금요일 아침, 늦잠을 자고 일어나 나머지 일행들은 피지 현지 업체와 미팅이 잡혀 다 나가고 우리 일행 4명만 피지 현지 명예수산관을 만나 한국선원묘지를 참배하고, 한인회 회장단을 만나 피지 한인사회의 소식과 한국정부에 바라는 기대 등에 대해 청취하고, 오후에는 한국대사관을 방문했다. 대사님이 태도국회의가 있는 부산으로 출장을 떠나 있어 참사관을 만나 교민사회의 고민을 공유하고 끼리바시와 투발루 ODA사업 관련한 협력과 지원을 요청했다. 수바에 있는 대사관은 피지를 포함한 5개의 남태평양 소국의 통합 대사관 역할을 하고 있어 여러 가지 어려운 여건에서 업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수바거리에 K-POP축제를 알리는 현수막도 보이고, 대사관 건물에는 한국영화제를 알리는 포스트를 볼 수 있는 듯 다양한 활동상이 눈에 들어왔다. 저녁 시간에 호텔 로비에서 호텔을 지키는 경비원과 안내인 등이 공식 공연이 아니라 스스로 즐기며 노래를 불렀다. 맥주 한잔에 흥이 올라 같이 박수를 치며 흥얼대면서 수바의 밤을 만끽했다. 행복했다.

63일 토요일 새벽 일찍 짐을 챙겨 호텔을 나서니 7시였다. Suba Nausori 공항에 도착해서 체크인을 하고 보딩을 기다리는 동안 지난번 출장 때 투발루 정부와 협상을 이끌었던 직원이 갑자기 투발루인으로 보이는 분에게 달려갔다. 둘은 끌어 안고 반갑게 서로 이사를 나누었는데 그분은 다음아닌 이번 출장시 협의할 업무 책임자이신 Kitiona Tausi 투발루 수산통산부장관님이셨다. 부산에서 열린 태평양도서국 포럼 참석으로 이번 출장시 면담을 잡을 수 없었는데 우리가 수바에서 비행기 결항으로 일정이 늘어지면서 부산 출장으로 마치고 귀국하던 장관을 투발루로 들어가는 수바 공항에서 조우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세상사는 참 알 수 없다. 새옹지마라고는 하지만 이렇게 비행기 결항덕분에 갑자기 협상의 격이 높아지게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4. 모든 것이 늘 상상이상인 투발루

투발루 수산해양부 장관 부부와 차관과 함께 72인승 프로펠라 비행기를 3시간 30분 달려 드디어 투발루 상공에 도착했다. 산호로 이루어진 환으로 이루어진 육지와 그 육지로 둘러쌓인 라군 그리고 육지 밖의 남태평양이 조화를 이루며 환상적인 풍광이 시야 가득 다가왔다. 사진에서만 보던 풍경을 직접 바라다 보는 감동을 가득 안고 비행기는 푸나푸티 공항에 무사히 착륙했다.

비행기를 내려 투발루 땅을 밟는 순간 뜨거운 열기가 나를 감쌌다. 순간 견디기 힘든 더위를 느꼈지만 이내 편안해지며 주변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역시 소문대로 공항에 연접한 휴게소 같은 곳에는 막 도착한 우리 일행을 구경하며 사진을 찍어대는 주민들이 먼저 우리를 반겼다. 세상과 단절된 무료한 작은 섬나라에서 외부의 물문과 소식을 싣고 오는 비행기는 확실한 구경거리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를 찍는 사람들을 우리도 같이 사진을 찍으며 함박웃음 지어 보이고 손을 흔들었다.

공항에 들어서자 마자 영국기술자문 Michael Batty 씨가 먼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먼저 인사를 나누고 공항 인근의 통신사에 들어가 유심을 교환했는데 16명의 유심교환에 족히 한시간을 넘게 시간이 지체되었다. 어렵게 유심을 갈고 걸어서 바로 인근의 푸나푸티 라군 호텔에 짐을 풀었다. 짐을 풀자마자 한국에서 공수해온 햇반과 컵라면으로 점심을 해결하고 가볍게 투발루 도착 첫날의 과업을 수행했다. 각 그룹별로 흩어져 그룹별 과업수행을 위한 현지 방문을 수행하고 우리나라가 몇 년 전에 지원했지만 고장이 나서 사용하지 못하고 있다는 제빙기와 훈연기가 있는 수산청 건물옆 수산물 가공공장을 방문했다. 직원이 없어 설비실을 들어갈 수 없어 한참을 사람을 찾고 난리를 치룬 뒤에 해맑은 청년의 도움으로 기계에 접근이 가능했고, 동행한 기술자가 문제해결을 위해 비지땀을 흘리는 사이 나는 해변을 걷고 태양을 보고 라군을 누렸다. 기술자가 문제점을 발견하고 해결책을 찾은 뒤 우리 일행은 같이 차를 타0여분 달려고우리가 있는 투발루에서 제일 큰 섬인 퐁가페일의 북단까지 갔다가 돌아오면서 남태평양과 라군에 물드는 석양을 황홀하게 바라볼 수 있었다.

64일은 일요일이다 보니 정부 관계자와 실무 협의를 진행할 수 없어 제빙기 기술자는 어제 하던 과업을 계속 수행했고, 나머지 인원은 영국인 기술고문과 함께 사업이 시행될 각 사이트와 하역을 위한 부두, 하역장 등을 두루 살펴봤다. 향후 500명 이상의 하객을 모시고 착공식을 진행할 만한 장소를 물색하고, 투발루의 전반적인 삶의 여건, 상품, 물류 등 행사나 이후 공사 진행과정에서 필요한 물적 인적 자원의 공급과 보관 등의 조건도 알아보고 이후 진행될 공사의 인부 숙소문제까지 전반적인 상황을 기술고문의 안내로 두루 둘러볼 수 있었다. 이날 제일 큰 성과는 확실한 행사장을 발견한 것이다. 최대 1000명은 유치 가능할 정도의 실내 공간이 정부종합 청사 인근에 지어져 있었다. 이후 협의 과정에서 확인해봐야겠지만 일단 공항 등 실외에서 행사를 하게 되면 천막 등 비 대비에 많은 비용과 시간이 들어가야하는 걸 피할 수 있어 무척 다행스러웠다.

일요일이라고 레스토랑도 운영하지 않는 호텔이지만 리셉션에 근무자가 있고, 맥주 등 음료는 판매하고 있어 그나마 다행스러웠다. 우리는 로비와 접한 식당공간에서 컵라면과 햇반을 먹고 맥주를 마시는 생활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리셉션 근무자와 친숙해 지면서 투발루에 대해 좀더 배우고 싶은 마음이 일고 우선은 간단한 투발루어 인사말에 대해서 묻고 익히기 위해 노력했다. 리셉션 근무하시는 분을 통해 배운 인사말은 쉽게 입에 익지 않았지만 그래도 만찬자리에서 마누이아를 외치고 투발루를 떠나면서 호텔과 공항에서 토파를 외칠 수 있었다. [ 파카탈로파 아투=안녕하십니까(간단하게 TALOPA = Hello), 마누이카=행운을 빈다=건배,   FAKAFETAI = Thank you, AU KO SEE = Sorry, TOFA = Farewell ]

하루가 저물 무렵 몇몇 일행과 함께 바다로 나가 해지는 투발루 라군을 바라다 보았다. 내 생애 참 많은 석양을 보았지만 40년전 해상기지 지원을 마치고 해지는 바다를 바라다보며 진해로 돌아오며 보았던 석양과 몇 년전 지금은 돌아가신 장모님을 모시고 우리식구 다 같이 갈치낚시 프로그램을 신청하고 해지는 목포 앞바다를 가로질러 갈치 잡이를 나갈 때 보았던 석양과 함께 평생 기억에서 지우지 못할 3번째 석양을 투발루에서 맞이할 수 있었다.

월요일 아침 10시부터 투발루 정부 측과 실무 협의가 있어 각 팀별로 아침부터 서둘기 시작했다. 사업에 대해 브리핑하기로 한 팀은 밤새 프로젝트 파일을 수정하고 브리핑 문안을 가다듬고 또 연습을 한다고 거의 밤을 새다시피 했다. 호텔에서 청사까지 5분 정도 달려 도착하니 투발루 정부측 인사들이 반갑게 우리를 맞이했다. 이내 수산청장을 중심으로 수산통상부 차관이 참석한 협의를 진행할 수 있었는데 시간은 예상외로 길어졌다. 중간에 다과가 나오고 브레이크 타임도 가지며 점심시간을 넘기며 협의가 이어졌다. 전체적으로 우리 쪽 준비는 깔끔해서 진행에 무리가 없었고, 투발루 측도 몇몇 추가적인 요구를 제안하기는 했지만 비용 등 여러 가지 불가능한 조건들을 설명하면 이내 수긍해 주었지만 워낙 세세한 사안들이 많다보니 시간이 지체될 수밖에 없었다.

한 가지 특이 사항은 차관과 수산청장은 이전에 협의된 것으로 알려진 대규모 착공식에 대해 전혀 인지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번 협의의 중요 사안중의 하나는 10월 예정된 현지 착공식 행사의 성격과 규모 등에 대한 완전한 합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논의를 통해 그 사안에 대한 인식차이를 좁히고 사업 수행을 위한 부두사용, 공사를 위한 부대 부지 사용, 기자재 관세 부과 그리고 인허가 진행 등과 관련해 전적인 편의를 제공받기로 합의 하는 등 예상한 것보다 훨씬 훌륭한 협의 결과를 얻고 회의를 마무리 할 수 있었다.

투발루 출장의 하이라이트는 이날 저녁에 이루어졌다. 수산통상부장관 내외와 차관 그리고 수산청장을 비롯한 수산청 주요 인사를 호텔로 초대해 만찬을 진행했는데 이날이 하필 나의 61번째 생일날이었었다. 아무에게도 이야기 하지 않고 입을 닫고 있었는데 이미 동행한 직원들은 내 몰래 이벤트를 준비해 놓고 있었다. 한참 만찬 분위기가 익어갈 무렵 갑자기 호텔 직원들이 케이크를 날아오고 저의 생일을 축하하는 노래를 부르자 갑자기 수산통상부장광내외가 투발루측 인사를 모두 앞으로 불러내어 축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내 생애 가장 화려한 생일 파티를 이국 투발루에서 그것도 수산통상부 장관 내외를 비롯한 현지인들의 축가를 들으며 맞이하다니 더없이 행복하다는 말 이상의 표현을 찾을 수가 없었다.

66일 화요일 아침 10시에 어제 진행된 협의문에 대해 이상 없음을 상호 확인하고 확약서를 교환하는 작은 식을 가진 뒤 바로 출국을 위해 푸나푸티 공항으로 향했다. 그 과정에서 수산청장이 조개목걸이를 우리쪽 15명의 인사들 한분 한분께 선물로 걸어주었고, 공항에 도착하니 영국인 기술고문이 또 다시 같은 선물을 우리들 목에 걸어주었는데, 마지막으로 수산통상부 장관이 직접 공항에 마중을 나와 우리 모두에게 다시 조개껍질 목걸이를 하나씩 걸어주며 우리의 전도를 축복해주셨다. 무려 3개의 목걸이를 목에 걸치니 발길이 무거워져 쉬 투발루를 떠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오후 1시경 비행기는 투발루 푸나푸티 공항을 이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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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래도 해외출장이다!

제일 맛있는 음식이 미리 준비해간 컵라면과 햇반이고, 호텔에서 바퀴벌레와 베드버그를 걱정해야 되는, 편도 4번의 비행기를 타야 도착할 수 있는 나라에 출장을 다녀왔다. 비록 힘들었지만 출장이 아니면 평생 가볼 기회가 없을 아름다운 남태평양의 작은 나라 투발루 출장을 지극히 사적인 관점에서 기록한다.

해수면 상승으로 인해 바닷물 속으로 사라질 위기에 처한 대표적인 남태평양의 소국 투발루로 출장을 다녀왔다. ODA(Official Development Assistance / 공적원조사업)의 일환으로 소형 부두와 커뮤니티센타, 수산물 판매장 등을 지원하는 사업이다. 예산은 67억 정도지만 단순 물품지원이 아닌 첫 SOC포함 해외어촌개발 사업인 만치 성공적으로 사업을 수행해 모델을 구축해야 하는 중대한 미션을 농어촌공사가 부여받은 셈이다.

투발루는 인구 1만명 남짓에 불과한 세계 4대 소국이다. 국토가 9개의 산호섬이 모여 환으로 이루어져 있고, 국토의 폭이 최대 350m에 불과하고 좁은 곳은 20~30m밖에 되지 않는다. 국토의 고도는 평균 2m로 해수면이 매년 4mm씩 상승해 언제 지도에서 사라질지 모르는 운명에 처해있다. 현재 유엔의 도움으로 라군(산호호수)의 모레를 퍼 올려 국토를 보강하고 있지만 최악의 경우를 상정해 한국의 SK의 협력으로 메타버스 국가를 구축할 준비도 하고 있다. 국토가 사라져도 주권은 남아 세계 참치 어획량의 많은 몫을 차지하는 투발루 수역의 권리를 유지하고 국가적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과업이라고 했다.

투발루와 대한민국의 인연은 깊다. 한국의 원양어선이 40년이상 투발루 해역에서 쿼터를 받아 참치잡이를 해 오고 있다. 인연이 오래된 만치 인적 네트워크나 신뢰관계가 비교적 돈독한 상태로 알려져 있다. 이번에 예정된 ODA사업은 안정적인 참치 쿼터 확보와 협조 강화를 위한 목적과 더불어 2030부산엑스포 유치를 위한 투발루의 지지를 얻기 위한 측면도 포함된다.

 

이번 출장의 목적은 지난 3월 실무팀이 사업 개요에 대한 협의를 잘 진행한 성과를 바탕으로, 구체적인 설계 작업에 들어가기 전 최종 사업리스트를 확정짓고 사업에 수반된 다양한 실무적 문제를 (건축물디자인, 규모, 기자제에 대한 관세, 항만 부두 사용 비용, 인부 숙소, 작업부지 등) 깔끔하게 정리하는 것이다. 더불어 10월 착공식 관련한 투발루 정부 측의 의사를 최종 확인해 행사의 컨셉과 규모 등을 확정하고 관할 피지 대사관의 협조를 구하고 피지 등 기자재 등을 공수할 물류 기지가 될 인근 도시의 여건을 살피고 구체적인 지원 체계를 구축하는 것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qeJIGGd4lco 

일정은 529일 아침에 나주를 출발하여 인천공항을 이륙하여 다음날 아침 시드니에 도착하고, 시드니에서 하루를 체류한 뒤 FijiNandi로 날아가 Fiji 국내선으로 피지의 수도인 Suba로 이동후 일박을 하고, 다음날 Tuvalu로 들어가 63일 까지 업무를 진행하고 다시 수바로, 난디로, 시드니로, 인천으로 66일 돌아오는 일정을 계획했다. 하지만 수바에서 투발루로 들어가는 비행기가 연료부족으로 결항하면서 3일간 발이 묶이고 전체 일정이 69일까지 연장되었다. 덕분에 예정에 없는 공백을 이용해 피지 교민회장단과 면담을 진행하고, 한국선원묘지 찹배와 대사관 면담 등을 진행, 사업 수행을 위한 주변 조사, 협의 등을 추가로 수행할 수 잇었다.

 

2. 시드니야, 오랜만이다.

529일 아침 일찍 나주를 출발했지만 인천공항을 통해 시드니에 도착하니 30일 아침이다. 2006년에 경상북도로부터 지역개발분야 농정대상을 받고 부상으로 뉴질랜드와 호주의 농촌을 10일간 연수한 뒤 처음이니 거의 17년 만의 호주 방문이다. 그때의 기억은 가물가물해 그냥 한국 농업 현실과 비교되는 뉴질랜드와 호주의 농업 여건에 기가 죽어 희망이 아니라 절망에 빠졌던 기억이 난다. 우리 농민이 호주의 농민 같은 사회적 지위를 얻을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불가능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아무튼 부상으로 열흘간의 짧은 연수를 오긴 했지만 내 인생에서 다시 호주를 찾을 수 있을까 기대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하다 보니 업무 출장으로 호주를 다시 방문하게 된 것이다.

입국 수속을 밟고 유심을 갈고 공항을 벗어나니 피지로 가기 전 호주에서 체류할 수 있는 여유 시간이 반나절쯤 남았다. 알뜰하게 일정을 잡아 바닷가를 중심으로 해수욕장과 선착장, 해변 공원 등을 차를 타고 둘러보고 잠시 산책까지 한 뒤 날이 저물었다. 시드니를 둘러보는 내내 17년전 첫 시드니 여행의 기억을 되살리려 애썼지만 쉽지가 않았다. 기억속의 Gap 해변은 실제의 Gap해변과 어긋났다. 그동안 변질된 기억은 오페라하우스와 페리 선착장의 위치도 왜곡해 버렸다.

 

호주는 지금 겨울이다 보니 해는 짧고 밤은 길어 11명의 일행이 첫 미팅을 하고 한식당에 저녁을 먹은 뒤 각자의 숙소로 일찍 흩어졌다. 하지만 시드니의 밤이 아쉬워 나는 젊은 친구 한명과 같이 숙소 근처의 빠(Incafe)에 들러 칵테일 한잔을 놓고 시드니의 밤거리를 눈에 담았다. 중앙역 근처의 Central Studio Hotel에서 여정을 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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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4월23일

이번 여행은 하나 있는 딸 혼례를 마치고 남은 부부의 새로운 삶을 여는 계기이자 그동안 작업으로 고생한 아내에 대한 위로 그리고 세상살이를 나름 잘 버텨낸 내 자신에 대한 위무차원이었다.  그리고 가장 가까이 만나 일했던 베트남 분들을 통해 궁금해진 베트남을 여행하고픈 숨겨진 의도도 있었다.  덤으로 청년시절 읽었던 [베트남혁명사]와 [사이공의흰옷]으로 강렬한 인상을 주었던 베트남의 정치경제 사회적 변화를 읽고 싶었다. 작은 여행에 너무 큰 미션을 얹다보니 여행을 시작하자마자 모든 것이 허욕임을 직감했다. 일단 그 부여된 의미의 무게에 비해 너무 초라한 일정이었다.  여행 전후의 준비와 마무리도 너무 허술했다. 그래도 오랜만에 떠나 여행은 난에게 더 많은 여행의 꿈을 선물했다.  모든 것이 감사한 여행이었고, 지나 온 모든 시간에 감사하는 여행이었다.

사소하지만 이번여행을 통해 처음 만난 베트남에 대해 알게되거나 더 궁금해진 사실이 있다. 베트남에 의외로 모기가 많지 않았다. 건물은 좁은 터에 지어진 경우가 많았고 창문이 너무 작았다. 대중교통비가 싸서 여행하기에 너무 좋았다. 시내외 버스며 택시며 기차 요금이 기대 이상으로 저렴했다. 내가 만난 베트남 사람들은 다 친절하고 부지런하고 정직했다. 안내문이나 표지판에 의외로 영문을 쓰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군경 등 공직자들은 의외로 권위적 이어서 놀랬다.

하노이 다녀오면서 비엣젯 타면 반복해서 나오던 노래가 궁금해 찾아봤다. Hello Vietnam. 단순히 달콤한 사랑 노래인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베트남계 벨기에인인 ‘팜 꾸이난’이 조국 베트남에 대한 애끓는 사랑을 표현하고 있었다. 처철한 전쟁으로 기억되는 베트남을 넘어 그들의 삶의 터전에 대한 애끓는 사랑이 가사에 담겨 있어서일까 오랫동안 하노이여행을 환기하는 노래로 나에게 기억될 것 같았다.

 

https://www.youtube.com/watch?v=WwOY1o16T4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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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노이역에 도착하니 닌빈행 3시반 기차를 30분 전부터 탑승이 가능했다. 기차가 출발하자 오징어 땅콩 있어요를 외치며 지나가던 지금은 잊혀진 풍경이 재현되고 시골아줌마들의 수다와 지친 아이들의 울음소리, 숨죽인 서양인 여행가족의 낯설은 속삼임과 시끌벅적한 중국인 무리의 알 수 없는 유쾌한 대화 속에 녹아들었다. 거친 진동 속에서 나는 현실감을 잃어갔다. 문득 고개를 드니 끊없이 이어질듯 계속된던 풍경 끝에 닌빈 역에 도착했다.

급히 예약한 숙소는 손님도 주인도 없었고 익스큐즈미를 수십번 외친 끝에 주인 할머니를 만났다. 오너를 불러 주겠다며 할머니가 다급하게 전화를 걸었고 달려온 오너는 전혀 준비 안 된 방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에어컨을 켜고 방이 식기를 기다리는 시간에 저녁을 해결하러 숙소를 너왔다. 주택가 골목을 잠시 걷다 들어선 선술집은 동네 청년들의 아지트로 보였지만 좋은 식당을 골라 찾아갈 만치 여력이 없어 그냥 들어섰다. 구글 번역기로 한바탕 법석을 한뒤 볶음면과 두부구이 그리고 볶음밥을 받고 베트남 와서 기본이 된 한 끼 한 맥주로 하루를 접었다.

 

2023년 4월 22일

긴 여정이 끝나는 닌빈의 하루를 즐기기 위해 아침 일찍부터 서둘렀다. 새벽 6시에 숙소를 나와 그랩을 불러 항무아에 도착하고 날이 더워지기 전에 봉우리를 올랐다. 입장료 10만동에 의아했지만 입구에서 정상까지 가꾸고 다듬은 정성이 충분했고 주변경관과 어우러진 항무아는 마땅히 대접받아야할 명소였다. 항무아는 차라리 사진 몇장으로 모든 언어를 대신할 수 있는 곳이었다. 표현할 말을 잃고 마냥 풍경속에 녹아들었다. 정상에서 내려다 보는 풍경은 이미 인간세계가 아니라 곧 신선이 학을 타고 나올법한 선계에 다름아니었다. 새벽부터 많지 않은 사람이었지만 다양한 국적의 커플들이 함께 등산길에 동반했고 모든 인종이 공통의 진리를 찾아 순례의 길에 만난 도반같이 반갑고 정겨웠다.

하산뒤 간단한 요기를 하고 택시를 불러 짱안으로 달려갔다. 역시 명성대로 짱안은 인파로 북적였고 인당 25만동의 입장료를 요구했다. 또 한번 비싼 입장료에 입을 삐죽거렸지만 짱안 역시 명성과 입장료에 값하는 명소임을 부정할 수 없었다. 손님을 기다리는 수백대의 쪽배와 몰려오는 손님을 싣고 선착장을 떠나가는 무리진 배들이 연출하는 풍경이 가히 일품이었다. 힘차게 노를 저어 선계를 향해 달려가는 수십대의 쪽배가 그려내는 풍경 속에 나도 모르게 빨려들어갔다.

30분 맛만보고 끝난줄 알았던 뱃놀이는 두시간 넘어 이어졌다.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몇개의 동굴을 지나고 적절히 쉬어가는 사원이 있어 지루하지 않게 두시간이 지났다. 모두가 하나의 풍경 속에 스며들어 각자의 생각에 골몰한 채 물위를 흘러갔다. 같은 풍광속에서 누구는 먹고 사는 문제에 최선을 다하고 있었고 또 누구는 지친 영육을 치유하고 있었고 또 누구는 사랑하는 사람을 얻기 위해 구애 중이었고 또 누구는 자신의 미래를 위해 새로운 꿈을 세우고 있었을 것이다.

짱안 뱃놀이가 끝나고 하노이행 기차가 도착하기까지 3시간 반이나 남은 상황을 정리하기 위해 닌빈시내의 명소 기린사를 향해 달려갔다. 갓 세운 호수위에 불교 조형물이 아름다웠고 무엇보다 물가의 풍경 속에 자리한 까페가 마음에 들었다. 사원을 둘러보고 까페에 들러 시원한 에어컨 바람과 커피향속에서 페북을 만지며 땀을 식히고 다시 힘을 내어 거리로 나왔다.

숙소를 들러 짐을 챙기고 역에 도착하니 우리가 거의 선발주자였다. 지인에게 톡을 보내 하노이서 만나 같이 저녁을 먹을 약속을 정하고 출국 시간과 한국 도착시간을 확인하고 인천에서 나주까지 교통편을 알아보고 예약하다보니 하노이행기차가 도착했다. 세상의 축소판같은 번잡한 하노이행 기차칸 풍경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아 베트남 여행의 느낌을 반추할 수 있게 해 줄 것만 같았다. 친근하고 즐거운 여정이 끝나고 하노이에서 만난 지인과 비싼 한국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노이바이공항까지 환송을 받고 대합실에 들어섰다. 남은 시간 뼈속까지 베트남 여행의 느낌이 스며들길 기대하며 공항을 주유하며 남은 시간을 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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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4월 20일

새벽부터 붐비는 36거리에서 쌀국수로 아침을 해결했다. 하루를 시작하는 롱비엔 거리의 기운을 느끼며 노상에서 먹는 아침 쌀국수가 나를 행복하게 했다. 식사를 마치고 롱비엔버스 터미날로 달려가니 이내 47A 버스가 도착했고 인당 350원을 주고 타고 홍강을 건너 40여분을 달리니 밧짱 도자기마을에 도착했다. 밧짱은 도자기마을 답게 도자기 가게와 공장이 즐비했지만 이른 시간 탓에 거리는 한산했다. 가게들도 자세히 보니 개별 관광객 손님이 아니라 도매상인을 대상으로 하는 분위기였다. 오직 한곳 도자기박물관만은 그렇지 않았다.

단체로 관람 온 학생들로 활기가 넘쳤고 볼거리도 풍부했고 기념품을 사기도 수월했다. 한국 도자기와는 완전히 다른 원색의 화려한 문양과 다양한 자태가 이채로웠다. 제작 과정과 역사를 담고 있는 전시실을 돌다 옥상 라운지에서 한가하게 커피를 마시고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일층에 있는 기념품 가게에 들러 딸을 위한 작은 선물을 사는 것으로 한 시간 정도의 박물관 관람을 마무리했다. 다시 버스로 롱비엔으로 돌아와 뜨거워진 거리를 걸어 호텔로 돌아왔다. 체크아웃을 하고 예약된 LeaH Silk Hotel로 짐을 옮겼다. 오후 2시 체크인까지 호안끼엠 호수가의 고급진 레스토랑에서 조금의 미안함과 함께 맥주를 겉들인 점심을 먹고 호수가를 덜었다.

체크인 하자마자 수영복을 챙겨 루프탑 풀장으로 달려가니 조그만 풀이지만 사람이 없어 둘만을 위한 풀에서 더위와 먼지에 시달린 몸을 위무할 수 있었다. 지치지 않을 만치 수영을 하고 다음날 떠날 닌빈행 기차를 예약할 겸 그랩 택시를 불러 하노이 역으로 달려갔다. 다행히 왕복표는 여분이 있었지만 카드는 안된다고 해 달러로 결제하니 10%이상 나쁜 환율을 제안했다. 거부하고 역앞 가까운 은행을 둘러 좋은 환율로 환전을 해서 다시 역으로 돌아와 표를 예매했다.

하노이에서 마지막 여유 있는 시간을 쇼핑으로 할애했다. 그랩으로 롯데센타로 달려가 지하 롯데마트에 들어서니 손님의 절반은 한국 사람들이었고 친숙한 상품에 가격대는 착했다. 과자며 건과일이며 이것저것 싸고 간편한 선물을 잔뜩샀다. 베트남가면 많이 먹겠다던 잭풀룻과 망고, 망고스틴은 실컷 먹었지만 꼭 먹어보겠다던 두리안은 롯데마트에서 처음 만났다. 비싼 줄은 알았지만 그래도 생각보다 비싼 가격에 망설이다 캐리어에 담고 말았다. 베트남 청년들이 주요 고객인 듯한 한켠의 푸드코트에서 한국식 떡볶기와 순대를 사고 코코넛을 마시며 저녁식사를 대신했다.

호안끼엠 거리로 돌아와 오직 두리안을 먹기 위해 길모퉁이 까페에 들렀다. 지독한 냄새 때문에 호텔 침실에서 먹는 것도 금지되어있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까페 여사장에게 양해를 구하고 맥주와 함께 두리안을 먹기 시작했다. 모양은 그렇다고 해도 향은 너무 지독해 오래 묵은 정화조 냄새와 진배없었고 질감은 삶은 고구마 상한 것 같이 뭉컹거렸다. 비싼 두리안을 버리기는 아깝고 해서 여사장에게 한 덩어리를 드리고, 혼자 외롭게 맥주를 마시던 옆 자리 서양인에게도 권했다. 다행히 맛이 있다며 고마워했다. 구글번역을 이용해 짧은 대화를 하고 늘어난 짐을 감당할 가방을 하나 서서 호텔로 돌아오니 아쉬운 또 하루가 가고 3일의 여정만 남겨놓고 있었다.

 

421일 닌빈으로!

LeaH Silk Hotel 에서 잘 자고 잘 먹고 닌빈행 기차가 떠나는 오후 3시까지 하노이를 마지막 즐기기 위해 거리를 나섰다. 먼저 역에 들러 가방을 맡겨두고 지난번 호치민박물관만 들러고 참배를 실패했던 호치민 묘소를 향해 걸었다. 기차거리며 성요셉성당이며 벌써 익숙해지기 시작한 거리를 지나 그리 머지 않은 거리였지만 아침부터 온몸은 땀에 젖고 지치기 시작했다.

호치민 묘소를 향해 걷는 길에 레닌 동상을 다시 만났다. 전에 없는 화환이 놓여져 있었고 알고 보니 422일이 그가 태어난 날이라고 했다. 그가 꿈꾸던 혁명이 여전히 유효한지 이미 파탄난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새로운 세상에 대한 인간의 꿈과 열정은 여전히 유효하지 않을까 생각 들었다. 역사는 늘 미완이기 마련이고 인간은 변화를 추구하고 도모하기에 더 중요한 것은 시대적 과제와 이를 해결하려는 시대정신이 아닐까는 생각을 하며 길 건너 머지 않은 곳에 우뚝 선 하노이깃발 탑으로 향했다.

하노이 깃발탑은 베트남군사박물관과 함께 있었다. 관광 혹은 학습을 위한 명소인 듯 유치원 아이들이 단체로 몰려왔고 주차장은 멀리서 온 듯한 관광버스가 몰려있었다. 박물관 마당에는 제국주의 침략자 프랑스와 미국에 대항한 해방전쟁의 승리를 웅변하는 기록물과 전리품으로 가득 찾고 특히 격추한 프랑스와 미군기로 만들어 놓은 상징물이 인상적이었다. 탑을 오르내리며 베트남 독립항쟁의 역사를 반추했다.

 

이어서 탕롱황성을 들러 프랑스침략군을 전멸시키고 해벙전쟁의 결정적 승리를 가져온 디엔비엔푸 전투의 기록물과 민족해방전사들이 패태하는 프랑스군을 몰아내고 하노이로 진주하면서 군사퍼레이드를 펼치며 승리를 축하하던 기록물들을 관람했다. 이곳 역시 유치원아이들이 단체로 몰려왔고, 성을 배경으롣 ᅟᅡᆫ체사지을 찍는 아이들이 선생님의 선창에 따라 김치를 외쳤다. 한때 침략군에 부역하던 나라의 대중문화가 지금 세대의 삶속에 자연스레 스며들어 향유되는 세상의 섭리가 씁쓸하고 오묘했다.

탕롱황성을 나와 바딘광장을 가는 길에 콩까페에 들러 코코넛커피를 마시며 땀을 식혔다. 커피향에 취해 하노이 거리를 내려다보며 여전히 베트남을 지배하고 있는 해방전쟁 승리의 기억과 도이모이를 통해 시장경제를 수용하고 경제적 성장을 추구하는 베트남 사이의 절충점을 찾아 생각의 늪에 빠져들었다. (베트)콩 까페는 해방군 코스프레를 한 종업원들과 실내 디자인으로 특화되어 각인된 탓에 특히 한국인들에게 인기가 많은 곳이라고 했다.

공항같은 검색을 거친뒤 바딘광장을 들어서고 호치민묘소에 들렀지만 금요일 역시 참배를 쉬는 날이었다. 호치민 관저도 점심시간 때문인지 입장이 거부되고 뭇꼭만 들른 뒤 바딘을 벗어났다. 서호로 향해 꽌탄도교사원을 들른 뒤 이어 쩐꾸억사원에 들렀지만 점심 휴관이라 남는 시간에 가까운 파리파게트에서 점심을 해결했다. 계속 먹으려고했지만 기회를 잡지 못했던 반미를 파리바게트에서 비로소 처음 영접했다. 다시 사원으로 돌아가니 같은 이유로 관람객들이 줄서 기다리고 있었고, 버스투어를 하던 한국인 부부와 잠시 이야기도 나눌 수있었다. 그렇게 인상적이지 않은 쩐꾸언 사원을 관람하고 하노이 역 근처로 다시 이동해 에어컨 켠 까페를 찾아 쥬스를 마시고 마지막 환전을 한 뒤 역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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