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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월9일 란드룩을 출발하여  담푸스에서 걸음을 멈추고, 1월10일 안나푸르나를 벗어나 멀리 포카라가 내려다보이는 사랑곳에서 짐을 풀었다.

란드룩에서 보낸 반나절은 참 값졌다. 걸음을 시작한뒤 첫 휴식이었고 전체 여정의 절반이 지나는 시점에서 한 호흡을 쉬며 남은 여정을 준비하는 꼭 필요한 일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예정되었던 일행과의 작별에 이어 작은 분란뒤에 예정에 없던 작별마저 있은 뒤라 분위기 쇄신차원에서라도 뭔가 마디가 필요하기도 했다. 지누단다에서 란드룩까지 이르는 길은 모디콜라 계곡을 따라 이어졌다. 뉴브릿지마을을 만나 모디콜라를 건너고 다시 계곡을 따라 걸으며 서서히 오르막을 올라 강건너 간드룩이  마주보이는 높이에 이르러 자리잡은 마을이었다. 같은 고도의 마을이지만 상행길에 만난 간드룩은 산마을이자 트레커들을 위한 마을같은 느낌이었다면 하행길에 만난 란드룩은 그냥 산록 농촌마을로 다가왔다. 안나푸르나 산등성이에 자리잡은 농촌마을에서 하루를 쉬고 본격적으로 하행길로 접어드는날 우리는뒤돌아 안나푸르나를 바라다보고 등을 돌려 안나푸르나를 배경으로 기념 사진을찍었다.

란드룩 이후의 길은 편안했다. 완만했지만 그래도 내리막길을 따라 안나푸르나를 등지고 걷고 또 걸었다. 하산한다기 보다는 수평의 길을 걷는 느낌은 담푸스까지 이어졌다. 상승하는 삶은 이미 지나갔고 그리고 하강하기엔 뭔가 억울하지만 그래도 이제 수평적인 삶마저 끝나간다는 사실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되는 우리는 우리 삶을 닮은 길을 따라 걸었다. 우리가 걷는 한걸음 한걸음마다 안나푸르나는 멀어져가고 그만치 고도가 줄었다. 고도가 즐어드는 만치 초록빛은 늘어가고 우리는 네팔리 농부들이 가꾸어 놓은 이쁜 밭두렁길은 걸었다. 늘 논밭은 아름답고 그 아름다운 논밭을 가꾸어 놓은 농부의 삶은 고달프다. 농부로 사는 내가 한국에서 그렇듯 네팔의 농부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세상의 모든 농부는 수도자이고 농사는 수행인지도 모른다. 금전적 보상이 충분이 주어지지 않지만 피땀을 흘려가며 뭍생명의 먹을 거리를 만들고 세상을 아름답게 가꾸니 세상의 모든 농부가 성자가 아니면 누가 성자일 수 있겠는가. 나는 자격있는 트레커로 네팔리 농부가 가꾸어 놓은 아름다운 밭두렁길을 기쁜 마음으로 걸었다.   

두달일정의 이번 여정에서 친구들과의 첫 트래킹이 끝나가고 있었다. 이제 이틀만 지나면 우리는 안나푸르나품을 떠나 포카라로 되돌아간다. 영원히 잊지못할 아름다운 추억이 될 일행과의 여정이 하루하루 줄어들자 나의 뇌리에는 지금 이 순간을 지속시킬 묘안이 떠올랐다. 가이드 라마를 통해 얻어들은 정보지만 네팔 산골에 조그마한 학교 하나를 짓는데 3천만원이면 되고, 교사 월급이 1인당 10만원도 되지 않는다고 했다. 만약 도반들이 작당하고, 뜻을 같이하는 분들을 모아 힘을 합친다면 네팔에 작고 초라할 망정 학교 하나 정도를 운영못 할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학교를 중심으로 친구들이 인연을 엮고 그 학교에서 남은 삶을 살아도 되겠다는 막연한 기대도 생겨났다. 한 평생을 살면서 일정기간 자신의 삶의 한부분이라도 누군가를 위해서 헌신할 수 있다면 더할나위없는 삶이 될수도 있는 것 아닌가? 그것도 좋은 인연들과 작당하는 재미까지 있으니 더더욱 기쁜 일일 것이다. 현실화하기에는 더 많이 고려해야할 것들이 있겠지만 일단은 내 마음속에 수많은 꿈들중의 하나로 소중히 모셔두기로 했다.

담푸스는 아늑했다. 골목길 가득 친구들의 고함소리가 번지고, 옆집 누렁이 짓는 소리에 엄마가 아이들을 부르는 소리까지 들릴것 같이 유년의 한때를 환기시키기에 충분히 아름답고 아늑하고 평화로운 마을이었다. 저녁 무렵 수학여행을 온듯한 수십명의 학생들이 들이닥치지 않았다면 편하고 조용한 잠자리가 되었을터인데 밤새 학생들의 조잘거림과 동네 가득 울리는 개짓는 소리에 잠을 설쳤다. 밤의 소란은 아침 해와 함께 사라졌지만 어쩌면 산을 나와 도시가 가까워지는 마을에서 느낄 수 있는 삶의 생기였느지도 모르겠다.

잠을설친 새벽일찍 롯지를 나와 가까운 거리에 있던 전망대를 올랐다. 아직 공사가 덜된 전망대를 오르자 지나온 안나푸르나 산군이 한눈에 들어왔다. 담푸스전망대에서 바라다 보는 안나푸르나는 푼힐에서 보던 풍경과는 또다른 멋을 보였다. 푼힐에서는 비현실적일 정도로 가까이 느껴졌던 산과 달리  산에서는 한발짝 멀어졌지만 마을 넘어로 보이는 산은 보다 현실적이었다. 아쉬움을 달래고 돌아온 롯지는 정적이 흘렀다.  밤새 떠들던  학생들은 잠을 자는지 벌써 길을 떠났는지  알 수없었다. 우리는 아침 식사를 마치고 롯지를 나왔다. 담푸스를 벗어나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잠시 오르막길이더니 금새 내리막길로 접어들었고 한시간여만에 포카라-바글룽 하이웨이를 만났다. 

걸으러 왔다는 사람이 차 못탄지 몇일이나 되었다고 차를 만나니 너무 반가웠다. 대기하고있던 마이크로버스에 오르자 차는 바글룽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차는 더 오래 타고 싶은 내 마음을 아랑곳없이 이내 사랑곳 입구에 도착했고, 우리를 내려주고는 제 갈 길을 떠나갔다. 노점에서 밀감과 포도를 사들고 라마가 가리키는 길을 접어드니 우리를 맞는 길은 한창 공사중인 찻길로 흙먼지가 앞을 가렸다. 차라도 한대 지나칠 때면 숨을 쉬기 조차 힘들만치 먼지가 날리는 도로를 따라 사랑곳으로 향했다. 포카라를 떠나 트레킹을 시작한 뒤 최악의 길을 만나 힘든 하루를 보냈다. 그래도 도시와 산의 중간쯤에 있는 네팔리의 삶속을 걷는 경험은 즐거웠다.

 

Lake View Lodge Sarangkot에 짐을 풀고 멀리 내려다 보이는 페와호수와 포카라의 풍경을 만끽하며 네팔여정의 첫 트레킹 일정을 마무리했다. 이제 본격적인 트레킹을 시작할 우리 부부와는 달리 곧 여정을 접고 귀국해야하는 친구들은 아쉬움이 많은 것 같았다. 산을 통해 느낀 몸과 다스린 마음은 비로소 도시를 만나고 일상으로 돌아왔을 때 그 진가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각자가 이번 트레킹을 어떻게 느끼고 정리해서 기억의 한켠을 채울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이번 트레킹을 통해 모두의 얼굴은 더 밝아지고 목소리의 생기가 더 높아졌다. 옥상에 빨래를 걸어 바람을 맞히니 우리는 롱다가 된 빨래와함께 포카라와 페와호수, 그리고 사랑곳의 전망좋은 롯지를 더욱 풍요롭게하는 하나의 풍경이 되었다. 어둠이 롯지를 삼키니 멀리 포카라의 야경이 선명히 살아났다. 이제 우리는 안나푸르나의 대자연을 떠나 도시가 가까워졌음을  느껴야했다. 아랫배가 살짝 아파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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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푸르나의 아쉬운 마지막 밤을 보내고 빗소리 들으며 아침을 맞으니 오늘은 산을 떠나 도시 포카라로 들어서는 날이다. 아침을 들고 서성이다 비가 가늘어지자 과감히 지름길을 잡아 담푸스로 향했다. 담푸스 가는 지름길은 트레킹 코스를 벗어나 수목과 바위가 어우러진 소로들이었다. 간혹 방목중인 소들이 길을 막고 있었고, 논밭이 보이는 언덕위에서 길이 수풀 속으로 사라져 당혹스럽기도 했지만 큰 마을이 인접한 야산을 헤쳐 나가기엔 큰 어려움이 없었다. 담푸스는 차량이 들어올 수 있는 큰 마을이었다. 넓은 비포장길을 따라 형성된 건물은 롯지와 가게를 겸한 주택들이 많았고 수공예 기념품을 만들고 파는 공방도 여럿 보였다. 한 공방 앞을 지나자 젊은 남자가 직접 만들었다는 천 제품을 들어 보이며 한국어로 호객을 하기도 했다. 오스트렐리안 캠프를 떠난지 한 시간도 안되어 우리는 이미 도시로 접어든 느낌이었다. 담푸스를 지나 패디로 향하는 길은 논밭사이의 오솔길과 농가와 농가를 잇는 아름다운 돌길이 이어졌다. 길을 나설 때가지 뿌리던 비가 그치고 투명한 햇살과 따스한 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분명 안나푸르나는 한겨울인데 고도를 낮추어 페디로 접어드니 한국의 봄날처럼 온화한 기운이 넘쳐났다.

오스트렐리안 캠프를 떠난지 두세시간이 지났을까, 페디에서 포카라 나야풀간 도로와 만나는 가파른 돌계단을 내려서자 파샹이 불러놓은 택시가 기다리고 있었다. 택시가 과속과 위험한 추월을 시작하자 이미 습관이 되어버린 요구를 했다. '나는 바쁘지 않으니 천천히 운전해 주세요.' 그래도 그 한마디에 택시는 속도를 줄였고 이내 네팔 최고의 현대적 도시인 포카라에 접어들었다. 포카라 떠난 지 몇일 되었다고 도시의 생동감이 반갑고 북적이는 사람의 발길에 흥이 일었다. 부산한 사람들의 움직임 속에 또 한 사람의 장례행렬이 이어지고, 몰려다니는 아이들의 분주한 동작들이 장례행렬과 함께 어우려졌다. 산은 산대로 아름다워 우리의 발길을 불렀지만 도시는 또 나름의 도시다운 인간미가 넘쳐났다.

 산행전 묵고 짐을 맡긴 '터치 네팔 호텔'에서 짐을 찾아 파샹의 소개로 미리 예약한 '베스트 탑 뷰 호텔'로 향했다. 베스트 탑 뷰 호텔 역시 레이크 사이드의 중심에 있었다. 중급 호텔로 조식 포함 하루 22불에 하루종일 뜨거운 물이 나오고 미네랄 워터가 제공된다고 했다. 밤이면 암흑 천지로 변하는 네팔에서 하루종일 따뜻한 물이 나오는 호텔은 나에게 대단한 호사임이 분명했다. 파샹의 친구가 성수기에 스텝으로 근무한다는 이유로 선택된 호텔이지만 비교적 만족스러웠다.

호텔에 짐을 풀고 레이크 사이드의 거리로 나서니 오후 2시가 지났다. 급한 빨레를 세탁소에 맡기고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식당을 찾아 두리번 거리다가 내일이면 헤어질 파샹을 위해 점심과 저녁 메뉴의 선택권을 주었다. 파샹에게 트레킹 동안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 무어냐고 물었더니 피자라고 했다. 그래서 두어번 롯지에서 피자를 시켰지만 두번 다 맛이 형편없었다. 그래서 파샹에게 포카라 가면 마지막 만찬은 꼭 고급 피자로 하자고 제안했고 파샹은 좋아했다. 역시 파샹은 점심으로 '피자'를 선택했다. 레이크사이드의 한 피자가게에 들어갔다. 유럽풍의 고급스런 분위기에 피자와 햄버거 스파게티까지 하나같이 맛이 좋았다. 파샹도 만족스러워 했는데 특히나 평소에 마음껏 마실 기회가 거의 없는 콜라를 너무 좋아하는 것 같았다.

점심을 먹고나니 거의 3시가 다 되어 다른 일정을 잡기에는 이미 늦은 시간이 되었다. 그렇다고 뚜렷하게 할 일도 없어 마냥 레이크 사이드를 싸돌아 다녔다. 하지만 레이크 사이드는 30분 길게 잡아 1시간이면 넉넉하게 돌아볼 수 있을 정도의 규모에 불과했다. 거리와 접한 2층 가페에서 레이크 사이드 거리의 아름다운 가게와 이곳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바라다보며 향기로운 커피를 마셨다. 거리는 한산했고 네팔리와 관광객의 표정은 여유로왔다. 우리는 세상과 삶의 아름다움을 음미하고, 안나푸르나에서 보낸 여정을 회상하며 포카라에서의 반나절을 향유했다. 다시 거리로 나와 같은 길을 서너바퀴나 돌다가 일몰을 맞는 페와 호수가에 머물렀다.  해지는 페와호수는 부풀은 의식을 잠재우고 들뜬 마음을 가라앉혔다. 호수만치 차분한 마음으로 나는 뜬금없이 고향 진해의 바닷가를 떠올렸다.  순간 갯내음이 입안에 번지고 고향에서 부모님과 살아가고 있는 동생을 생각했다.  그리고 지나간 모든 시간들이 다시 그리워졌다.

호텔에서 쉬고 있기로 한 파샹은 저녁시간에 한국음심점인 산마루 식당에서 만나기로 했다. 파샹이 오늘 저녁메뉴로 'Korean Food'을 원했기 때문이다. 산마루 식당에서 '불고기 백반'을 먹었고 다행히 파샹은 아주 맛있어 했다. 다시 베스크 뷰 호텔로 돌아와 파샹과 커피를 한잔 들며 그동안의 수고에 감사한 마음을 전하며 작별의 아쉬움을 달랬다. 포카라에서 카트만두로 귀환할 버스비와 얼마간의 팁을 주었지만 더 많이 주지 못하는 처지가 못내 아쉬웠다.

이번 여정이 즐거울 수 있었던 것은 단연 파샹을 만난 행운 때문이었다. 늘 즐거운 표정으로 씩씩하게 앞서 나가며 우리 부부의 모든 편의를 살펴주었던 파샹이 없었다면 이번 여행의 묘미는 반감되었을지도 모른다. 네팔의 정치적 상황과 네팔 청년의 고민을 나누며 네 딸이 살아갈 한국과 파샹이 살아갈 네팔의 현실을 비교하며 안타까움을 나눴고, 우리 모두의 행복한 미래상을 같이 그려보던 시간이 그리웠다. 마낭을 오르고 다시 내려오던 길에서 맞은 눈보라 속에서 파샹과 우리 부부는 트레커와 포터가 아니라 도반이자 가족이 되었다. 서로의 안전을 보살피며 서로의 즐거움을 북돋기 위해 애써던 시간들은 우리 부부가 살아가는 동안 내내 그리움으로 되살아 추억이 되었다.

집을 떠난지 처음으로 산마루식당의 전화를 빌려 딸 아이와 통화를 했다. 다행히 잘지내고 있다고 하고,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외할머니도 잘 신다는 소식을 받으니 조했던 시간들이 뒤로 밀려났다. 내 전화는 네팔에 입국하자마자 먹통이 되었다. 아내의 전화기가 있긴 했지만 와이파이 존은 없고, 3G망은 요금이 무섭고, 요금을 따로 내고 롯지에서 충전을 했지만, 산이 높아 아예 먹통이 된 전화 핑게로 집 나온지 22일 만에 딸한테 안부를 묻게 되었다. 롯지에서 요금을 내고 유선전화를 사용할 수도 있었지만 사실은 그냥 한국으로 전화하기가 싫었다. 혹시라도 아주 나쁜 소식이 있어 여정을 중단하고 돌아가게 되거나, 소소한 문제들이 있어 내가 여기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이 걱정만 떠안게 되는 그런 상황이 싫었다. 오로지 그냥 연락을 끓고 여정에 몰두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늘 딸아이에 대한 걱정은 목에 걸린 생선까시처럼 가쉬지 않았다. 여행내내 따라다니던 생선까시가 전화 한통화로 쏙 빠져 버렸다. 날듯이 마음이 가벼워졌다.

파샹과의 마지막 저녁을 먹고 호텔로 돌아왔다. 하루 22불자리 호텔이라고 그래도 무료로 카메라 밧데리 충전이 되고, 온수가 나오고, 아침식사가 나오고, 인터넷이 되었다. 로비에 놓인 1대의 컴퓨터에는 늘 사람들이 붐볐다. 호텔을 들고 나면서 계속 컴퓨터를 차지하기 위해 노렸지만 내 차례는 돌아오지 않았다. 스텝에게 물어보니 오후3시부터 초저녁 정전전까지 컴퓨터를 할수 있다고 했다. 3층 객실에서 로비까지 몇번을 들락거린 끝에 컴퓨터 앞에 앉을 수 있었다. 카메라 메모리를 백업하려 시도했지만 파일은 많고 속도는 느려터져 중간에 포기하고 말았다. 파일 복사중에 웹브라우즈를 열고 비나리마을 홈페이지와 네이버에 연결을 시도했다. 무려 23일만의 인터넷 접속이었다. 가슴이 한정없이 두근거리고 밀려났던 나의 삶들이 한꺼번에 죄여오는듯 갑자기 나의 삶의 무게가 중력을 얻었다. 고산 체질인가? 고산지대에서는 고산증을 전혀 느끼지 못하다가, 저지대로 오니 갑자기 나의 삶이 버겁게 다가온다. 멀리 보냈던 현실이 컴퓨터를 만지는 순간 나의 코앞으로 바짝 다가왔다. 알수 없는 긴장이 나의 몸을 감싸고 여행후 처음으로 가벼운 복통이 일어났다. 신경증이다. 초조와 불안은 내 삶의 필수불가결한 현실인가보다. 마을 홈페이지는 첫화면에서 멈춰 자유게시판의 게시물 목록만 조금 보이다 만다. 재부팅을 하고나서 다행히 네이버에 접속이 되었다. 눈에 띄는 뉴스가 보였다. '곽노현 첫출근'... 순간 반가왔다. 하지만 이어 선정적인 중앙일보기사가 눈에 띄인다. '곽노현 사건 판결 판사 알고보니...'아마 또 자기들의 입맛에 맞지 않는 판결을 내린 판사에 대한 사상검증 시비일 것이다. 뉴스를 클릭했지만 컴퓨터가 또 다운이다.

마을 홈페이지에 인사를 남기고, 나의 블로그와 페이스북을 들어가 보겠다던 기대는 포기하고 룸으로 돌아왔다. 온수로 샤워를 하고 양말을 빨고, 아내와 내일 새벽 파샹을 떠나 보낸 뒤의 우리 일정을 논의 했다. 이제 우리는 안나푸르나에서는 완전히 벗어났다. 우리에게는 네팔 최고의 현대도시 포카라와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라는 도시에서 보낼 수 있는 다섯밤과 여섯 낮이 남아있다. 어떻게 배분하고 무엇을 하며 보낼지 궁리를 하다가, 참체에서 만난 호주인이 권해서 염두에 두었던 반디푸르 여정을 포기하고 일단 내일 하루는 포카라의 박물관을 순례하고, 그 다음날 카트만두로 '투어리스트 버스'를 타고 가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파샹이 떠난뒤 영어도 네팔어도 안되는 우리 부부의 여정이 조금은 불안하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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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일찍 눈을 떴다. 저만치 멀어진 안나푸르나를 뒤돌아보며 [Modi Khola Guest House]를 나섰다. 밤새 2층 룸의 계단을 지켜주던 깔리는 길 떠나는 우리를 따라나서 한참을 배웅했다. 이미 만남과 이별이 습관이 되었을 깔리는 그래도 작별이 서운했는가 보다. 마을을 벗어나자 마자 얼마 안있어 이 마을의 이름을 바꾼 '뉴 브릿지'를 건넜다. 이 일대에서 처음으로 쇠줄을 걸쳐 만든 흔들다리였기에 아예 마을 이름까지 [뉴 브릿지]가 되었을터인데, 너무 빨리 만든 덕분에 이제는 낡아 대표적인 '올드' 브릿지가 되어 있었다. 한쪽 죄줄이 늘어져 다리가 모로 기울고 발판은 군데 군데 구멍이 나 있었다. 그래도 이름만은 '뉴 브릿지'로 오래도록 남아있을 다리를 건너 란드룩으로 방향을 잡아 하염없이 걷고 또 걸었다.

 

 

안나푸르나 산중에서 보내는 마지막 날, 길은 편했고 날씨마저 좋아 눈이 시리도록 흰 안나푸르나를 하염없이 뒤돌아보고 또 뒤돌아 보며 우리의 끝나가는 여정을 아쉬워했다. 상행 때는 쉬 다가오지 않던 산들이 하행 길엔 순식간에 덧없이 멀어져 갔다. 이제 가면 언제오나! 적금이라도 들어 5년뒤를 계획해 보지만 세상은 넓고, 인생은 짧으니 아마 이번이 이승에서 안나푸르나와의 마지막 인연이 될지도 알수 없는 노릇! 앞은 보지도 않고 뒤를 돌아보고 다시 고개를 떨구어 내가 딛고 있는 땅을 보고, 그리고 다시 고개를 돌려 걸어온 길과 멀어져 가는 안나푸르나를 바라다보기를 반복했다. 분명 다음 목적지는 포카라고, 카트만두고 그리고 인천으로 이어져야하는데 나는 정처없이 걷는 방랑자가 되었다. 어느 순간 나의 걸음을 이끄는 것은 계획이나 일정이 아니라 오직 앞에 놓인 길이 되어버렸다. 저 길이 나를 어디로 인도할지 모르는 사람처럼 나는 기가 죽었고 조심스러워졌다. 수백, 수천년 동안 비탈진 안나푸르나 산자락을 일구어 씨를 뿌리고 낱알을 거두어 가족의 삶을 지켜온 네팔리의 피와 땀, 사랑과 미움, 그리움과 그윽한 삶의 희열이 베일 돌길을 따라 꼭 한 발짝씩만 내디뎠다. 우리 삶이 그러하듯 걸음에 어떤 비약도 없었다, 걸어온 만치 새 걸음의 토대가 되고, 그 토대에서 내딛는만치 내 삶의 현실이 되었다.

 

 

안나푸르나 눈이 녹아 흐르기 시작한 차가운 물이 모여 Modi Khola를 이루고, 그 강이 흘러 깍아 세운비탈진 산자락에 따데기같은 다락 논을 일구어 생명을 보전하고 마을을 일구며 살아온 네팔리의 삶터를 가로질렀다. 촘롱강 건너 상행길에 걸었던 사울리바자르에서 간드룩으로 이어지던 길이 오늘 하행길과 나란히 이어졌다. 고개마루마다 놓여진 길손을 위한 쉼터를 '쪼따로'라 불렀다. 쪼따로에 앉아 강건너 바라다 본 아득한 길들이 실날같이 가날프고 아름다웠다. 내가 언제 저 길을 걸었고, 저 끝없는 돌계단을 한칸 두칸 올라 저 아찔한 고개마루에 터잡은 간드룩을 거쳐 갔던가! 벌써 상행길의 기억은 가물거리기 시작하고 이미 나의 마음속에 하나의 추억으로 남아버렸다.

 

 

뉴브릿지를 떠나 Tolka를 지나면서 점심을 먹었다. 메뉴는 전통 구릉족 빵이라는데 빵은 지금까지 먹었던 티벳 빵과 구별이 되지 않았는데 딸려나온 국이 꼭 한국 된장국이었다. 된장만 안들어갔지 말린 시레기를 잘게 썰어 넣고 콩가루를 넣어 뻑뻑하니 끓인 국이었다. 전통 구릉족 빵을 주문하자 파샹은 조금 걱정스런 표정으로 되물었는데 아마 그런 시레기국을 우리가 잘 먹어낼지 걱정이 되었던 것 같았다. 구릉족 시레국을 맛있게 잘 먹는 우리를 보고 파샹은 신기해 했다. 롯지를 나와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길을 역시 초행인 파샹과 같이 더듬어 나갔다. 톨카를 지나 포타나가 다가오자 길이 여러갈래로 갈라지고 엉키면서 우리는 멈출 수밖에 없었다. 어느 길이 우리를 포타나로 이끌지 파샹도 몰랐고 물을 수 있는 주민들도 보이지 않았다. 할 수없이 란드룩에서 만난 홍콩인 커플 트레커를 기다렸다. 아니 홍콩인 커플을 안내하는 포터와 가이드를 기다렸다. 그들의 안내로 잃어버린 길을 되찾아 다시 걷다보니 얼마 지나지 않아 포타나 체크 포인드가 나왔다. 팀스카드에 Check-Out 도장을 받고 나니 나는 이제 더이상 트레커가 아니게 되었다. 그 순간부터 나는 단지 네팔 투어리스트의 한명일뿐!

 

 

오늘 하루 한국인 트레커를 한명도 만나질 못했다. '코리언시즌'이라 불리는 만치 겨울 비수기 2달동안 전체 트레커의 절반 이상이 한국인이라는 ABC에서 하루종일 한국인을 만나지 않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고 했다. 나야풀, 사우디바자르, 간드룩, 촘롱구간이나 따다파니, 따또파니, 푼힐, 촘롱구간과는 달리 촘롱에서 지누단다를 거쳐 란드룩, 톨카, 팜푸스, 페디로 이어지는 구간은 거의 한국인이 없는 것 같았다. 나야풀로 바로 하행하는 것보다 하루 반나절을 더 길게 잡아야 하는 코스를 선택해 산중에서 지친 몸을 이끌고 지체하기에는 한국인의 성정에 어우리지 않는 코스인지도 모르겠다. 포타나의 체크체크포스틀 빠지며 근무자에게 물으니 오늘은 한명의 한국인도 체크포스트를 지나지 않았다고 했다.

 

 

포타나 체크포인트에서 길을 물어 '오스트렐리안 캠프'를 찾았다. 담푸스로 바로 빠기기에는 아직 트레킹에 미련이 남아있기도 했지만 떠나는 안나푸르나를 마지막으로 바라다 보기 위한 선택이었다. 중국인 커플의 가이드 말로는 '오스트렐리안 캠프'가 주 트레킹 코스에서 조금 떨어져 있긴 하지만 멋진 View Point면서 조용하게 지낼 수 있는 마을이라고 했다. 또 한가지, 톨카를 지날 때 만난 한 네팔리로부터 오스트레릴리안 캠프에 한국인이 살고 있고 롯지를 운영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이왕이면 그곳에서 지낼까 하는 생각도 있었다.

 

 

오스트렐리안 캠프는 40여년전 오스트렐리안 무리가 캠프를 한데서 연유한 지명이라고 했다. 포타나에서 담푸스로 빠지기 전 오른쪽 언덕길을 15분정도 오르다 야트막하게 보이는 뒷산을 등지고 삼면이 트인 꽤 넓은 평지가 나오고 4~5개의 롯지가 자리잡고 있었다. 마을은 외졌고 아름답고 그리고 멋진 뷰포인트에 자리잡고 있었다. 파샹이 나서 지나는 네팔리에게 한국인이 운영하는 롯지를 물었다. 이 동네에는 20여년전에 들어와 살고 있는 한국인이 있긴 하지만 롯지를 운영하지는 않고 그냥 조용히 '마음 공부'를 하고 계신다고 했다. 마을 구경 삼아 동네 끝까지 갔다가 마지막 롯지면서 마을 이름을 가져온 '오스트렐리안 캠프'가 열렸던 자리에 터잡은 [오스트렐리안 캠프 게스트 하우스]에 방을 잡아 방해받지 않는 시야를 얻었다.

 

 

짐을 풀고 마당을 나서니 멀리 구름 위에 떠있는 사우스 안나푸르나, 히운출리, 마차푸차레 그리고 람중히말이 한눈에 눈에 들어왔다. 검은 대지위에 짙은 구름이 머물고, 구름이 엹어져 하얗게 번지는 사이로 안나푸르나의 자태가 들어났다. 흰구름과 흰 산이 만나니 구름이 산을 만들고 산이 구름으로 흩어졌다. 지상으로부터 하늘로 번져 올라가는 어둠이 희색으로 우뚝 솟은 안나푸르나를 더욱 두드러지게 해 오히러 현실감이 떨어졌다. 산이 산이 아니고 하늘에 떠 있는 '하늘 궁정'같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니 멀리 페와딸이 보이고 아득히 포카라 넘어 겹겹산들이 깊었다. 혹시 영산 다울라기리를 볼수 있을까 기대했지만 확인할 길이 없었고 다울라기리 방향으로 짙은 구름까지 끼어 다음을 기약했다.

 

 

 

 

다이님 룸에 들어서니 한명의 손님이 창가를 지키고 있었다. 네팔리와 똑같은 외모에 파샹이 말을 건넸지만 그는 알아듣지 못했고 알고 보니 일본인이라고 했다. 그는 들어서는 우리 일행에게 눈인사도 보내지 않고 담배를 피우고 차를 마시고, 식사를 마치고 또 담배를 피웠지만 시선은 늘 창밖으로 향해있었다. '나마스테. 곤니찌와.' 인사를 건네도 착한 얼굴로 눈인사만 주었을 뿐 그의 시선은 여전히 창밖으로 향했고 마음은 멀리 떠나있는 표정이었다. 그가 룸으로 돌아간뒤 사오지가 전하길 그는 일주일째 이 롯지에 머물고 있으면서 하루종인 창가에 앉아 먼산만 바라보고 있다고 했다. 그는 어떤 사연을 품고 안나푸르나의 산 언저리에 방을 얻어 일주일 내내 창밖만 바라다 보고 있는건지, 그리고 이 마을에 20년째 살고 있다는 한국인은 또 어떤 사연을 품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태산같은 짐을 지고 안나푸르나 돌계단을 아슬아슬하게 내 딛는 조랑말의 삶의 무게나, 5평 따데기 논을 일구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네팔리의 삶의 무게처럼 한사람 한 사람에게 주어진 몫의 삶은 다 그렇게 힘겹고 아픈 건지도 모르겠다. 고도는 낮아지는 만치 삶의 무게는 그만치 더 무겁게 다가왔다. 

 

 

비교적 싼 음식값에 풍성한 저녁을 주문했다.  롯지 주인 식구들이 먹기위해 조리했다는 메뉴에 없던 닭고기 조림 한접시에 락시까지 한잔 시켜놓고 안나푸르나에서 보내는 마지막 저녁을 보내며 나의 삶을, 그리고 세상을 살아가는 뭇 생명의 삶을 그 삶의 무게를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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