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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 다 죽여 놓고 조사는 뭔다고 하노?”

기사승인 2016.01.06  09:3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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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농림어업총조사 조사원이 본 우리농촌

 
 
▲ 송성일(경북 봉화군 명호면 풍호리)

배추농사를 끝내고 마지막 남은 콩 수확은 밀쳐 둔 채 농림어업총조사 조사원으로 나섰다. 내가 조사해야할 가구 수는 몇 달 전 있었던 인구총조사에서 농가로 분류된 2개 리의 70여 가구였다. 하지만 막상 일을 시작하고 보니 대상 가구 중 적지 않은 농가는 조사가 불가능했다. 그 몇 달 사이 돌아가신 분이 세 분이나 계셨고 한 해 농사를 억지로 끝내놓고 몸져누워 대화를 나눌 수 없거나 병이 위중해져 병원에 계신 경우도 여러 집이었다.

조사를 시작하고 한 집 한 집 농사살림을 들여다보니 더 놀라웠다. 같이 농사짓고 살아가면서 막연히 느끼고 있던 그 이상으로 우리 농촌의 살림이 철저히 무너지고 있었다. 50대 이하의 농민은 찾아보기 어려웠고, 60대 이상 농민 대부분은 일 년 벌이라고 해봐야 500만원을 채우지 못했다. 그 500만원조차 비닐, 농약, 비료대 제하고 나면 거의 남는 것이 없는 현실이었다. 그래도 노인네들의 답변은 한결같았다.

“저 밭을 놀리면 우야노? 살아있는 동안은 어떻게든 부쳐야제.”

물려받은 내 논밭 묵히지 않고, 도시에 있는 자식들한테 고추며 깨라도 한줌씩 보내주는 재미에 견뎌내고 계셨다. 평생 논밭을 일궈 우리 먹거리를 공급해 오신 늙은 농부의 안락한 노후를 보장해 주지 않는 세상에 분통이 터졌다.

농사 뒷정리를 하고 있는 밭에서 만난 한 어르신으로부터는 정부를 대신해 타박을 들었다.

“농촌 다 죽여 놓고 조사는 뭔다꼬 하노? 조사해봤자 도움 주는 거 아무것도 없더마는….”

집으로 마을회관으로 돌며 겨우 수소문해서 만난 할머니 한분은 영감님 돌아가신 뒤 혼자 수박농사를 지으신다며 산골짜기 밭까지 찾아온 조사원을 반갑게 맞으셨다. 논은 묵힌 지 오래되었지만 밭을 올해까지 어떻게든 농사를 지었는데 내년에는 남에게 줘야겠다고 하셨다. 오랜만에 하는 사람구경에 이런저런 묵힌 이야기 나누고 싶은 눈치였는데 애써 무시하고 돌아서고 나니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그나마 젊은 귀농자가 있어 마을이 보전되고 있는 경우도 전업으로 농사를 짓는 분을 만나기는 어려웠다. 법적으로 300평 농사만 지어도 농민으로 분류가 되지만, 실제로 농사를 지어 밥 먹고 살고 자식 키우는 전통적인 의미의 농민은 몇 명되지 않았다.

이번 조사를 통해 임종직전의 병들고 쇠락해진 농촌현실을 날것 그대로 마주할 수 있었지만 결코 절망감만 느낀 것은 아니다. 사람의 정, 마을공동체의 온기를 보전하고 있는 늙은 농부의 거친 손은 우리가 절망하기엔 너무 이르다고 손사래 치고 있었다. 우리 농민이 꿈꾸는 세상은 바로 그와 같은 온기가 가득한 세상이기 때문에 농사를 지키고 우리 농촌 공동체를 가꾸는 일이 더욱 절실히 다가왔다.

송성일(경북 봉화군 명호면 풍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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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이 되기 전에 나는 농협이 다른 많은 은행들 중 하나인 줄 알았다. ‘농협이 협동조합을 말하는 것인지, ‘협동조합이 뭐하는 것인지도 몰랐고, 관심도 없었다. 농민이 되자마자 원하든 원하지 않든지 나는 농협과 부대기며 살아야했다. 한해 두해 농사를 지어가면서 농협은 협동조합이고 적어도 이런저런 은행 중의 하나는 아니어야 한다는 사실을 배웠다. 하지만 농사를 짓고 먹고 산 17년 세월동안 농협은 더 은행스러워졌고, 덜 협동조합다워졌다. 이제는 간판 자체도 바꿔 달았다. “농협은행이라고!

도시생활을 접고 봉화 산골짝 비나리마을에 짐을 푸니 이웃어르신께서 알려주셨다. 농사를 지으려면 농협 조합원으로 무조건 가입하라고! “왜요?”라는 철없는 질문을 던지자마자 농협조합원이 되면 얼마나 좋은지에 대한 긴 설명이 이어졌다. 먼저 농자금을 받을 수 있고, 농자재를 외상으로 공급받을 수 있고, 명절이면 선물도 주고, 그리고 무엇보다 생산한 농산물도 출하할 수 있다는 말씀이셨다. 아이고 고마워라, 농협은 참 좋은 곳이구나며 달려가 조합원 가입원서를 내 밀었다. 아직도 이해가 잘 안되지만 조합원가입을 위해 서너 번을 더 농협을 찾아야했다. ‘다음 이사회 때 가입신청을 일관 처리할 예정입니다.’ ‘깜빡 잊고 가입원서를 본점에 넘기지 않았습니다. 다음에 처리해도 별 문제될 것 없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저번 이사회에서 안건이 많아 조합원 가입신청 안건을 다루지 않았습니다.’ 그런 무성의한 답변을 듣고 몇 달이 지난 다음에야 조합원 출자 증서를 두 손에 받아 쥐었다.

하지만 조합원 가입 출자증서를 받고 뿌듯해 하던 순간은 짧았고, 나의 농협과의 악연은 아직까지 길게 이어져오고 있다. 사실 농자재 외상이야 읍내 농자재가게 어디서라도 얻을 수 있고, 명절에 주는 조합원 선물이라야 소금 20kg 한포, 3kg 한포가 전부였다. 그나마 지역농협에서 농산물 집하와 출하를 수행하는 농협의 역할은 충분히 의미 있고, 조합원 농민의 입장에서 요긴하긴 하지만, 농산물 유통이 농민들이 농협에 바라는 가장 중요한 역할인 것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했다. 알고 보니 농자금이나 정부정책자금은 농협조합원이 아니라도 받을 수가 있었고, 바로 여기에 농협과 농민의 건강한 관계를 형성을 가로막는 가장 큰 걸림돌이 놓여 있었다. 농업정책자금 대출로 생기는 이익이 농산물 유통을 통해 얻는 이익보다 크고 손쉽다 보니 농협은 농산물 유통조직이 아니라 농민상대로 정부의 정책자금을 대출해주고 이익을 취하는 대출 업자가 되어버린 것이었다.



그런데 가진 것 없이 산골에 짐을 풀고 농사를 시작하다보니 농협과의 첫 거래를 농가주택 신축자금대출로부터 시작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농사실패는 우선 빼어먹기 좋은 곶감처럼 달콤한 농자금대출로 눈을 돌리게 했고 농사 시작한지 몇 년 되지도 않아 상당한 부채로 불어났다. 흔히 이웃들이 농협직원 월급주려고 농사짓는다고 쓴 우스갯소리를 하는데 내 자신이 바로 그 꼴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세월이 흐르다보니 농협대의원이란 걸 자의반 타의반으로 맡게 되었다. 아무 생각 없이 처음 대의원 총회를 참석해 보니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조합장이 총회장 입구에 서서 입장하는 대의원에게 일일이 허리 숙여 악수를 청했다. 다른 임직원들도 황송할 정도의 응대로 몸 둘 바를 모르게 했다. 그리고 한 시간 남짓 꾸벅꾸벅 졸고나면 농사일 하루 일당보다 훨씬 많은 돈을 수당이랍시고 주고, 선물과 푸짐한 점심식사까지 대접했다.

한번 두 번 총회 참석이 늘어나면서 마음 한구석에 일말의 미안함이 싹텄다. 우리 마을 조합원을 대표해서 조합원의 이익과 편익을 늘이기 위해 총회에 참석해서 농협 경영을 감시하고 시책 제안을 제출해야 하는 것이 대의원의 역할 일진데 내 자신은 물론 대의원 거의 모두가 묵묵부답 말이 없었고 총회는 일사천리로 지나갔다. 배포된 사업계획서나 예결산 자료를 이해할 수도 이해할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마을로 돌아와 보면 누구나 할 것 없이 이구동성으로 농협을 지칭할 때 그 도둑놈의 새끼들이라는 수식어를 빼먹지 않았다. 간혹 오다가다 농협창구에서 큰 소리가 들리는 경우도 있었지만 가장 만만한 창구직원에게 어거지성 호통만 치는 조합원뿐이었다. 발언하지 않고 요구하지 않으면서 농협에 적의만 가지고 있는 조합원은 바로 자신이 비난하는 그 조합을 만들고 있다는 사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조합이 바로 자신들 것이라는 사실을 까먹고 있었다. 그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눈치도 없이 대의원 총회에서 발언하기 시작했다. 요주의 대의원으로 찍힐 게 분명하지만 나름대로 할 말을 하는 대의원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적은 내부에 있다고 하듯, 농협임직원들보다 대의원들 중에서 직접적인 반감이 표출되었다. “대충 하이소. 밥 묵으러 가입시더.”

농민의 농협을 진정한 농민 자신의 것으로 돌려놓기 위해 농민회 회원들은 농협을 방기해 놓을 것이 아니라 대의원으로 참여해서 발언하고, 대의원 총회의 분위기부터 바꾸어보자는 작당했다. 하지만 그 계획은 엉뚱한 이유로 실현되지 못했다. 바로 협동조합 기본법발효에 따라 새로운 협동조합운동이 봇물 터지듯 일어나면서 우리 지역에서도 나름대로 농민회중심으로 협동조합을 만들어 보자는 생각이 모아졌다. 농민회회원들은 끊임없이 농협개혁을 요구하면서 새로운 협동조합을 만드는 시도도 같이 하기로 했다. 이런저런 우여곡절 끝에 봉봉협동조합을 만들고 나서 보니 농민회에 열심히 참여하는 회원들 대부분이 임원을 맡게 되었다. 그런데 타 조합의 임원은 농협 대의원을 겸임할 수 없다는 법적인 자격문제가 있을 줄 미처 몰랐다.

그렇다고 봉봉협동조합을 만들고 운영을 해 나가면서 농협은 남의 일로 방치할 순 없었다. ‘협동조합은 저절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참여자들이 끊임없이 배우고 고민하는 과정과 병행할 때만 제대로 만들 수 있는 조직이었다. 우리는 난생 처음으로 협동조합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했고, 협동조합에 대해 알게 되는 만치 농협에 대한 요구도 더 늘어났다. 누가 뭐래도 농협은 한국 협동조합의 맏형이다. 설립 배경과 그동안의 역사를 도외시하자는 말이 아니라 현실적인 규모나 농촌에서의 영향력에서 그렇다는 말이다. 현재 들불처럼 일어나고 있는 협동조합 붐이 우리사회를 움직이고, 우리의 생활을 규정짓는 원리들을 그 저변에서부터 바꾸는 역할을 재대로 수행할 수 있도록 이끄는데 농협이 할 역할이 분명이 있고, 그것도 지대할 것으로 보인다. 협동조합 설립 붐은 농협의 토대를 위협하는 불순한 움직임이 아니다. 농촌에서 생겨나는 신생 군소 협동조합의 설립 붐은 농협이 우리 사회에서 가질 바른 위상을 찾고 협동조합 본연의 역할을 수행하는 조직으로 탈바꿈하게 하는 계기가 되어야하고, 그럴 때 농협은 한국 협동조합의 맏형 역할을 톡톡히 해낼 수 있을 것이다.

농협이 협동조합의 맏형 역할을 해 줄 것을 기대한다면 모두 다 언감생심이라고 면박을 줄 것이다. 농협이 나서서 지역사회 내 소규모 신생 협동조합들을 지원하고 이끌어야하지만 현실을 전혀 그렇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이런 기대를 하는 자신조차 농협에 무슨 요구를 할 것인지, 지역사회 내 사회적 경제를 구축하는데 어떤 역할을 기대할 것인지 참 막연하다. 하지만 농협이 농민의 것이기에 결코 포기할 순 없다. 그렇다면 차라리 아주 기본에서 시작하면 될 것 아닌가.



사실 나는 농협 조합원 17, 대의원 6년 동안 단 한 번도 협동조합이 무엇 하는 조직인지, 협동조합의 정신이 무엇이고 농협은 또 어떤 조직이어야 하는지 배운 적이 없다. 어쩌다가 신규 대의원 교육이라는 이름의 연수를 갈 기회가 있었지만 농협 자신의 경영성과에 대한 자화자찬과 대의원을 위무하는 유흥으로 채우진 일정밖에 기다리는 것이 없었다. 협동조합을 만들면서 조합원 교육이 조합의 사활을 건 중심적 활동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적어도 농협은 조합원 교육을 스스로 방기해 왔고, 의도적으로 회피해 왔다. 복식부기를 이해하고, 대차대조표를 읽을 줄 알고, 농협경영에 토 달 수 있는 조합원을 스스로 키워낼 정도로 농협은 성실하지도 당당하지도 않았다. 이제 비록 미미한 존재지만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 볼 거울이 생겼다. 이번 기회에 협동조합 교육의 장을 농협 주도로 지역사회 내 신생 협동조합들과 연대하여 만들어보자.

지금은 거의 껍데기만 남은 것으로 알고 있지만 농협 업무에는 분명히 지도사업이라 것이 있다. ‘작목반같은 생산자 조직 지원이나 팜스태이같은 도농교류 사업 지원 등을 일부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역 내 농업관련 협동조합의 조합원 대부분은 동시에 농협 조합원이다. 결국 농협과 신생 협동조합의 관계는 농협과 작목반의 관계와 크게 다를 것이 없다. 작목반의 활성화가 농협의 이익에 도움이 되듯, 지역사회 내 다양한 농업관련 협동조합이 활력을 가진다면 곧바로 지역 농협의 발전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된다. 농협이 나서서 지역내 신생 협동조합이 자리 잡고 재대로 운영되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지 둘러보고, 무엇을 지원하고 어떻게 이끌 것인지 지도사업의 범주 내에서나마 고민하길 빈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 생산자협동조합이 농협의 준조합원으로 가입을 하던지 필요하다면 다른 관계 방식을 얼마든지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공동 교육이나 지도사업을 통해 만나게 될 신생협동조합은 거대 농협으로 하여금 지금은 잃어버린 초심을 돌아보게 할 것이다. 자원을 동원할 수 있는 물적 기반과 경영 능력과 성과 면에서 거대 농협의 만분의 일도 되지 않는 신생 협동조합은 대신에 헌신적인 조합원, 조합원과 조합의 밀착된 동반관계, 신뢰와 협동에 기반한 운영, 경영 자료의 공개와 공유를 위한 노력, 교육에 대한 갈망, 너 나아가 세상을 따뜻한 공동체로 바꾸겠다는 꿈과 열정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공룡 같은 농협과 개미만한 신생 협동조합이지만 충분히 서로 주고 받을 것이 있다고 믿는다. ‘교육에서 시작하는 공동사업을 통해 농협은 재벌적 경영주체가 아니라 그야말로 농민을 위한 협동조합으로 거듭나기 위해서 꼭 필요한 가치와 덕목을 회복하고, 신생 조합은 농협으로부터 경영 노하우와 최소한의 물적 기반을 나누어 가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렇게만 된다면 농협은 우리 농촌, 나아가 우리 사회를 생존경쟁만 있는 정글이 아니라 서로 돕고 사는 따뜻한 인류공동체로 만들어 나가는데 적지 않은 기여를 하게 될 것이다.

그냥 헛된 꿈인지도 모른다. 모든 농민이 자신이 농협의 조합원인 사실을 자랑스레 여기고, 농협 임직원이 농민을 위해 일한다는 자긍심과 성취감을 느끼는 세상. 이는 먼저 농협이 농민과의 거리를 좁히는 작업들로 시작해야 한다. 사실 농협점포에 들어서면 다 아는 얼굴이다. 한해 두해 농사지은 것도 아니고 좁은 지역사회 에서 모르는 얼굴이 있다면 오히려 이상하다. 농협 직원 들은 조합원이 점포에 들르면 늘 반갑게 인사하고 커피부터 권한다. 표면적으로만 본다면 이전하고는 퍽 달라진 풍경이다. 하지만 개인적인 안면관계를 넘어 농민과 농협이 마주한 지점에는 늘 긴장감이 흐른다. 농민은 농협에 대해 넘을 수 없는 벽을 느낀다. 왜일까? 농민과 농협의 이익이 서로 맞서있다고 느끼기 때문이고 최소한 이익을 같이하는 운명공동체라고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조합원 농민의 소득과 농협 직원의 임금은 연동시키거나 상징적으로 조합장 연봉만이라도 연동하는 방법도 강구해 볼만하다. 그것이 어렵다면 농협은 농협이 버려둔 공터에서 자라나, 농협이 방기한 가치를 기반으로 자라나고 있는 신생협동조합과 손을 잡고 농민 곁으로 다가가면 된다. 그것도 교육같은 쉬운 것부터 시작하자.

힘들게 농사 뭐하려 짓냐는 짓궂은 물음에 농협직원 월급주려고 짓는다는 쓰라린 자조를 사라지게하고, 사회적 경제의 큰 주체로서 농업협동조합이 우뚝 설 것을 주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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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8일(토) 비나리마을에서 명진스님의 귀한 말씀자리가 있습니다.

명진스님은 조계종 중앙종회 부의장을 지내셨고 2006년부터 2010년까지 서울삼성동 봉은사 주지를 지내셨습니다.

귀한 자리 정성을 다해 준비하겠습니다. 관심있으신 분들의 많은 참석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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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1일 만우절 말,

거짓말같이 봉화 친환경생산자협동조합이 창립총회를 가졌다.

훌륭한 분들이 모여 성심을 다한 결과다.

하지만 이번 봉화친환경생산자협동조합의 설립은

설립과정에 참가하거나 조합원으로 가입하신 몇몇분들만의 성과가 아니라

봉화지역사회의 변화를 추동할 의미있는 사건으로 다가온다.

시대의 조류에서 가장 낙후된 봉화군에서 사회적 경제를 구현하기 위한

최초의 움직임이 작은 성과로 드러난 이번 협동조합의 설립은

사라져가는 마을공동체의 온기를 되살리고

농협이 방기한 협동경제와 사회적 경제의 단초를 여는데

적지않을 기여를 할 것이라 확신한다.

또한 이번 협동조합의 설립은 봉화군내에서 일어난 최초의

시민사회적 운동의 의미를 가지기도 한다.

관변적 작풍에 빠져 주체성을 잃어버린 지역사회의 다양한 단위들이

민주주의의 가치를 되묻고 주체적 사고를 시작하는 작은 계기가 될 수 도 있다고 본다.

농협과 관에 빌붙지 않고 오히러 관과 농협을 주도적으로 이끌 수 있는 힘이 바로

주민들 자신, 농민들 자신으로부터 시작된다는 진실을 직시하는 계기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경쟁에서 협동으로, 각자도생에서 더불어 사는 공동체로 나아가는

봉화 농업 역사에, 봉화 농촌공동체의 역사에 한획을 그을 봉화친환경생산자협동조합의 설립에

그 곁다리에나마 끼어서 같이했다는 사실이 너무나 자랑스럽다.

봉화의 첫 생산자협동조합이 보다 넓어지고 풍부해지고 넉넉해지길 빌며

같이하신 모든 분들께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아름다운 분들과 같이한 시간들이 고맙고,

같이 살아갈 날에 대한 기대가 가슴설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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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8일 비나리마을학교 강당에서

[봉화공동체 포럼]이 있었습니다.

이번 포럼에는 봉화군 농민회 등 단체와 개인을 포함해

아름답고 활력넘치는 마을공동체를 일구기 위해 노력해오신

많은 분들이 참가하여 열띤 발표와 토론의 기회를 가졌습니다.

 

참여 단체로는 '교육복지문화공동체 하모니'와

'봉화친환경생산자협동조합', 재산 갈산마을에 둥지를 튼 '별난농부들'

'봉화지역 자활센타', '청량산비나리마을', '봉화국악협회' '봉화귀농인협회'

그리고 '봉화군 농민회'가 같이 했습니다.

 

참가 단체들은 각 단체의 목적과 걸어온 길

그리고 앞으로 해 나갈 활동들에 대한 발표를 했고,

향후 지역사회내에서 이들 단체가 연대하여

추구하고자 하는 꿈들을 나누었습니다.

 

이번 포럼이 갖는 무엇보다 중요한 의미는

 봉화의 각 지역에서 흩어져 터를 잡고

나름대로 오랜 세월동안 지역공동체의 건강성을 회복하고

지속가능하고 활력넘치는 마을을 만들기 위해

분투해 오신 분들이 같이 한자리에 모여 머리를 맞대었다는 사실입니다.

 

모두가 만남의 기쁨과 같이 살아갈 날의 희망을 나눌 수 있었던

이날 회합에 참가하고 나서가지게 된 생각은

다음과 같이 정리되어도 좋을 것 같았습니다.

 

"그동안 참 외로웠는데 이제 외롭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우리 봉화에 이렇게 훌륭한 분들이 많이 계시고

오랫동안 공동체의 건강성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해오고 있었다는 사실이 자랑스럽고 감동적이다."

 

앞으로 한달에 한번씩 가지게 될

봉화공동체 포럼이 외연을 넓히고

그 내용적 깊이를 더해간다면

봉화를 아름다운 농촌공동체의 새로운 전형으로 거듭다는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구세대와 신세대, 토착주민과 귀농인,

농업인과 예술인을 포괄해

다양한 세력과 개인이 연대하여

지역사회의 미래를 준비하는

"봉화공동체 포럼"의 무궁한 발전이 계속되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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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19일 서울 신도림의 '디큐브 아트센타'에서 있은 '귀농귀촌토크쇼'에 출연했다.  귀농 15년차로 귀농인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현지화된 사람이지만 나름대로 재미있을 것 같아 청해준 SBS와 농림부에 감사한 마음으로 응했다. 오후 4시에 출연자와 연출자 등 관계자가 미팅을 갖고, 오후 6시부터 7명의 출연자와 함께 토크쇼를 가지기로 되어 있었다.

 

오전에 집을 나서 봉화읍에서 볼 일을 보고 영주 터미날에서 서울 강변터미날행 버스에 올랐다. 오랜만에 시외버스로 서울까지 가는 2시간 20여분 동안 김정헌님의 [예술가가 사는 마을을 가다]를 다 읽었다. 혹시 귀농귀촌토크쇼 출연에 재미를 못보더라도 덕분에 책 한권을 읽은 것 만으로도 본전을 건질 수 있게 되었다.

 

버스는 오후 3시 조금 지나 강변 터미날에 도착했고, 터미날을 나와 지하철로 이어지는 짧은 시간이 아쉬워 길가 쉼터에 잠시 멈춰 혼잡한 서울 거리를 구경하며, 서울에 살았던 지난 시간을 회상했다. 약속시간에 개의치 않고 느린 걸음을 걸어 강변역사에 들어서자 티켓팅도 노선도 낯설게 다가왔다. 한참을 두리번 거린뒤 1회용 티킷을 한장 끊어 승강장으로 들어섰다. 하지만 2호선 순환열차를 어느쪽에서 타야하는지 혼란스러웠고 폰을 통해 지하철 노선도를 확인한뒤 다시 반대편 승강장으로 건너가서 지하철을 타고 신도림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보는 지하철 안의 풍경도 참 낯설었다. 오래전에는 지하철을 타면 신문을 펼치고 있는 사람이 제일 많았는데 지금은 승객들이 다 스마트 폰 삼매경이었다. 

 

 

강변에서 40여분 걸려 스무개 역을 지나 신도림역에 도착했다.  역사를 나와 디큐브시티  건물앞에서 이번 행사를 진행하는 스텝분에게 전화를 드렸다. 다행히 바로 그 건물 7층에 있는 디큐브 아트센타가 이날 행사장이라고 했다.  행사장이 있는 디 큐브 아트센타는 아직 관객이 몰리기에는 이른 시간 때문인지 한산했다. 출연자 대기실로 안내를 받아 들어서니 이미 다른 출연자들이 도착해 계셨다. 낯익은 분도 계셨지만 대부분 낯설은 분들이었다. 그래도 같은 프로의 출연자라는 동질감 때문인지 쉬 편안해 졌고 잠깐의 출연을 위해 4시간여를 같은 공간에서 지내게 되었다.

 

스텝이 말한 미팅은 진행되지 않았고 지루한 기다림이 계속되는 와중에 출연자분들과 귀농 귀촌에 대해, 그리고 농촌문제 일반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것으로 아까운 시간을 채웠다. 토크쇼의 진행은 농림부 장관을 위시한 출연자들이 한 자리에서 귀농귀촌과 관련한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는 방식이 아니라 출연자가 차례로 1명씩 나가 공연과 공연사이에 10여분씩 사회자와 대담을 나누는 식으로 진행되었다. 토크쇼의 성격을 이해하지 못하고 무슨 귀농 정책과 관련한 농림부장관과의 토론회라도 되는 양 크게 착각한 것이 겸연쩍었지만 분에 넘치는 환대를 받으며 유명 가수의 공연도 보고, 유명 MC와 짧은 시간이나마  함께 할 수 있어 나름대로 행복한 시간, 귀한 추억이 되었다.

 

토크쇼의 성격상 다 하지 못한 이야기는 대기실에서 기다리는 동안 귀농전문가 교수님들과 나누었다. 이날  공식적인 프로그램 진행중에 발언하고싶었지만 할 수 없었던 귀농귀촌정책과 관련한 나의 생각을 나름대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지금까지 시행되고 있는 귀농귀촌 관련 정책들을 보면 정책의 기조에서 문제가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귀농정책을 도입하고 시행하는 전제에는 지금까지 한국 농업 농촌을 지켜오던 기존의 농민으로는 경쟁력있는 한국 농업으로 재편하는데 한계가 있다는 인식이 깔려있다. 현실적으로 젊은 인구는 다 이농했고, 노령인구만 남아 한국 농업 농촌을 지키고 있는 셈이니 그런 인식이 근거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나는 기존의 농민, 농촌주민의 한국 농업에서 해온 그리고 해나갈 역할에 대한 과소평가가 곧바로 잘못된 귀농정책으로 귀결되었다고 본다. 단순화해서 보면 농촌이 잘먹고 잘살면 귀농정책이 뭐가 필요하겠는가?  농촌이 직면한 위기를 농촌에 남아있는 농민 자신의 탓으로 돌리고, 한국 농업의 미래를 위해 고학력, 고자본의 젊은 인력을 농촌에 유치함으로써 타개해 나갈 수 있다고 보는 문제의식은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  한국 농업을 지켜온 늙은 농부의 무능이 한국 농업농촌을 망쳐온 것이 아니라, 한국 농촌의 병든 현실이 늙고 병든 농부만 남겨놓은 것인데 그 농부 탓을 하는 것은 전말이 전도되어도 한참을 잘못된 인식이다. 이런 인식에 기초해서 나오는 귀농정책은  농업농촌을 활성화하기위한 정책과 유기적으로 결합되지 못하고 농촌이 처할 수 밖에 없는 구조적인 문제를 도외시하는 대증요법에 지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

 

현재의 귀농활성화정책은 바로 경제적 유인, 현 주민과의 차별적 혜택을 통한 유인이라는 시혜적 귀농정책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시혜적 귀농책은 귀농 실패를 부추키는 가장 큰 요인이 되고 있다고 본다. 귀농 희망자는 어느 지자체가 귀농정착자금을 더 많이 주는지 고려하지 않을 수 없고, 그와같은 수혜에 기반한 귀농은 수혜의 약발이 떨어지는 순간 흔들릴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농업농촌 정책기조로는 특히 MB정권하의 농업농촌 정책으로는 지금의 귀농인을 다시 그들이 생각하기에 무력한 기존의 농민으로 만들뿐이다. 올해 당장 한미FTA로 연 1조원의 농업손실을 초래하는 한국 농업현실에서 젊고 유능한 귀농인은 머지않아 지금의 무기력한(!) 농민과 똑같아질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자칭 귀농전도사다. 늘 귀농을 준비하시는 분을 만나면 나는 이야기한다. 자연이 아니라 새로운 농촌공동체 속으로 들어간다는 마음의 준비를 하시고 언제라도 보따리를 싸시라고. 농촌이 아무리 어렵다고 해도 여전히 사람사는 곳이다. 저 허리 굽은 노인네도 밥먹고 사는데 사지 멀쩡한 내가 밥 못먹고 살겠는가는 생각으로 사전준비 없는 무모한 귀농을 감행한 나는 이제 15년차를 넘기며 현지화에 성공한 셈이다.  귀농 실패를 하지 않기 위해 재정적 준비, 농사 기술적인 준비 기타 여러가지 사전 정보 등의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겠지만 최종적으로 귀농은 결단의 문제다. 기존의 농민과 구별되는 다른 마인드의 귀농인이 아니라 동일하게 처한 한국 농업 농촌 현실이라는 조건에서 더불어 문제를  풀어 나가는 귀농인이 늘어간다면 한국 농업농촌의 미래도 그만치 밝아질 것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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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부터 아침 9시가 되면 비나리정보화센타 앞마당에 이쁜 차가 도착합니다.

"명호 보듬이 나눔이 어린이집" 통근차량이 바로 그 주인공입니다.

 

작년 경제단체의 지원을 받은 봉화군이 명호면 면민회관을 리모델링하여

올 3월에 명호어린이집을 개관했습니다.

명호어린이집은 명호면민이 육아의 어려움에서 벗어나

보다 편안하게 생업에 종사할 수 있게 하는데 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명호어린이집에는 현재 총 11명의 어린이가 등록을 하고 있고,

두분의 교사가 이 아이들을 돌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제부터 드디어 명호어린이집 통학차량이 운행하기 시작했습니다.

비나리마을에는 명호어린이집에 다니는 아이가 단 한 명밖에 없지만

아침마다 정보화센타마당에는 진풍경이 연출됩니다.

 

 

비나리마을의 유일한 '명호어린이집' 원생은 권영식 어르신의 손주 기현군입니다.

어르신의 자제분은 도시에 살고 있으면서 부부가 직장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고향마을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손주를 맡아 돌봐주고 있습니다.

아이가 귀한 동네에 '기현'이는 온 동네 주민의 사랑을 독차지 하고 있답니다.

마을회관에 주민모임이라도 있는 날이면 온동네 사람이

서로 기현이를 안아보고싶어 시셈을 할 정도로,

기현이 하나 때문에 동네에 생기가 돌고 사랑이 넘쳐납니다.

 

오늘 아침 권영식 어르신께서 손주 기현이를 업고 마을 정보센타 앞마당까지 나오셨습니다.

어린이집 차량이 도착하고, 선생님이 기현이를 데려가자하자

할아버지 품에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기현이가 울고불고 한바탕 난리가 났습니다.

그 모습이 아름다운 봄날의 비나리마을 풍경과 어우러져

보는 사람마다 절로 얼굴에 웃음을 머금게 했습니다.

기현이 하나때문에 비나리마을이 더 아름답고

정감이 넘치는 마을로 다시 태어난 것 같습니다. 

마을에서 한 아이의 힘은 정말 대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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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창을 받아 슬픈 경우도 있다.
봉화군 농민회 명호면지회를 재구성하자마자 전농으로 부터 표창을 받았다.
농업이 기울고, 농민이 줄고 그리고 그보다도
더 빠르게 농민회가 와해되어 왔기 때문일까,
100여개 시군농민회 중 5개 농민회가 표창을 받았는데
그 중 봉화군은 면지회 구성이 사유였다.

1990년 전국농민회총연맹이 결성되고 나서,
농촌 공동체를 지키고 농업의 가치를 확산하기 위해 투쟁해 왔지만  
농업의 붕괴와 농촌 공동체의 와해를 막아내는데 역부족이었다.
그러나 아직 싸움은 끝나지 않았고,
희망을 꺽지 않았다.

면지회 구성조건인 5명이상의 회원으로
봉화군농민회 명호지회를 만들려고 했는데
구성이 되자마자 10명이상이 가입을 하고
다시 스무명가까이 조직이 불어나게 되었다.

정부와 농협의 지원을 받는 많은 농업인 단체들이 있지만
많은 농민들은 한국 농업과 농촌의 이익을 대변하는 조직에
목말라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언제가는 약사들이 약사회에 가입하고,
변호사는 변호사회에 가입하듯이
농민이면 당연하게 농민회에 가입하여
농민의 이해를 관철하고 농촌공동체와 농업을
지켜나갈 수 있을 날이 올것이라 믿는다.

그 길로 나아가는 선봉에 봉화군 농민회 명호지회 깃발이
항상 휘날리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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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부터 농사를 지었으니 벌써 올해까지 꼭 15년이 되었다.
그동안 우여곡절도 많고 적지 않은 변화도 있었지만
꼭 그때 15년전 내가 첫발은 디뎠던
비나리마을의 가을을 잊을 수 없다.

그 고즈넉한 가을 하늘아래 펼쳐진 평화로운 마을전경...
살다보면 사람일은 알수 없으니 내가 설혹 비나리마을을 떠나
또 다른 낮천 거리에 헤메게 될지라도
그 때 그 비나리마을의 풍광은
고스란히 나의 가슴에 남아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해 두해 농사를 지어 가면서
그 평화로운 풍경뒤에 감춰진 한국 농촌의 참담한 현실을
눈으로 몸으로 느껴갈 수 밖에 없었다.
말로서, 글로서 알고 있덨던 실상보다 춸씬더
참혹한 농촌의 실상은 그 어떤 처방으로도 회복이 불가능해 보였고,
한 때는 내 자식을 키우며 살아갈 터전으로 받아들일 수 없어
탈농을 생각해 보기도 했다. 


그런 와중에 어떻게든 살아보겟다고 농사를 벌이고,
정부가 지원하는 이런 저런 마을사업을 벌이면서도 
그 어떤 것도 근본적인 처방이 될수가 없다는 점에
늘 목말라하면서 결
국 농촌, 농업의 문제는
농민이 주체적으로 나서  

해결할 수 밖에 없음을 절감했다.
그래서 농민회에 가입하고 농민동지들과 전망을 찾고
한국 농촌의 미래 비젼을 공유하고자 했지만
처음 몇년은 우선 내 농사기반이라도 닦고 나서 가입하자고
미루게 되었고,
다음 몇년은 이런저런 마을 사업에 정신이 팔려
미쳐 농민회 가입을 생각지도 못했고,

그리고 최근까지는 농민회의 이념적 지향에서 동의하지 못하는
몇가지 점들과
지역농민회와의 연결의 어려움 때문에
가입을 미루고 있었다.


그런데 얼마전 미뤘던 농민회 가입이 이뤄지고
지난 금요일에는 명호면에서 농민회가 소집한
자역 농업인대표자 회의(?)에 참가하게 되었다.
나선 자리, 두려운 자리였지만
농민회의 뚝심과 지역사회에서 갖는 영향력을 몸소 느낄수 있었고,
비록 조직이 쇠락했지만 여전히 농민들 사이에서는
농민회가 살아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농민회 회원 개개인의 무한정한 헌신의 삶을 목도할 수 있었고,   
그동안 관변단체로 여겨 배제했던 농업경영인회 등도
농민회와 동반자로서
투쟁에 같이 나서는 모습을 확인하는 기쁨도 있었다.

나아가 지역 각종 농민단체의 조직원으로 활동하시는
지역 형님들 선배님들의

건강한 삶의 모습으로부터도 많은 영감을 받을 수 있었다.
지역의 다른 농민단체 형님들께서도
지금은 와해된 봉화군 농민회 명호면 지회를 복원하는 과제를
맡기면서
도와주시겠다고 나서는데 고무되어
나는 연말까지 봉화군 농민회 명호면 지회를
복원하겠다는 공언을 하기도 했다.  


이날 회의를 통해 10월 10일 경북도내 각 시군 농민단체와 마찬가지로
봉화군 농작물피해대책위원회에서도
버스 10대 이상을 동원하기로 하고, 

이에 명호면은 버스 한대를 맞춰 각 단체가 인원과 비용을 배정하여  
경북 도청앞으로 집결 [경북농민대회]에 참가하기로 결의 했다.

농민회를 가입하자마자 벌써 몸이 바빠지게되었다.
아직 밭에 할일도 태산인데 내 주머니에서 비용을 갹출해 가면서
집회에 참가하게 되니 이게 무슨 망조인가 싶기도 하다.
하지만 농사 15년 만에 농민회 가입을 통해
나의 삶이 또 다른 비약을 하게 된 것임을 확신하다.
나는 이제 진짜 농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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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내가 고등학교 1학년 시절 소위 '고추파동'이 났다. 기억을 되살려보면 내가 살던 진해서는 아예 국내산 고추를 구경조차 하기 어려웠던것 같다. 어머니가 고추를 사지 못해 걱정하시던 모습이 어렴풋이 기억이 나고, 결국 인도, 멕시코 등으로 부터 수입했다는 모양도 다르고 맛도 맵기만 한 이상한 고추를 평년의 고추값보다도 더 비싸게 사서 먹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리고 까마득이 잊었다. 내 자신이 농사꾼이 될 거라고 생각도 못했기 때문이기도 했고, 1년에 우리가족이 고작해야 5근의 고추도 먹지 않는 식생활의 변화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나는 얼치기 농사꾼이 되어 벌써 15년째 농사를 짓고 있다. 그러다 보니 고추값은 내가 고추농사를 하든 말든 매년 가을만 되면 나의 주관심사의 하나가 되었다. 고추값은 이곳 산골 농민의 1년 생계가 달린 문제고, 그에 따라 당연히 지역 상가의 경기와도 직결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1997년 IMF로 온나라가 들썩이던 그 때, 내가 들어와 살기 시작한 비나리마을은 IMF보다도 고추값 폭락으로 더 고통받고 있었다. 고추 상품 1근 600g가격이 2,200원전후로 형성이 되면서 끝물 고추수확을 포기한 집이 한집두집이 아니었다. 그해 고추수확에 나선 할머니들의 하루 일당이 20,000원에서 22,000원 정도 였으니 하루 일당으로 약 10근의 상품 건고추를 받아가는 셈이었다. 숙련된 한명의 인부가 하루수확하는 건고추 양이 약 40~50근 정도이고, 또 인부들은 따로 교통비를 지불하고 인근의 영주 등으로부터 매일 공수해 오든지 아니면 아예 가을 내내 불러서 같이 지내면서 먹이고 재워야했기 때문에 인부를 사서 수확을 하느니 차라리 하품은 수확을 하지 않는 것이 합리적인 상황이었다.

그런데 고추값 폭락의 와중에 고추농사를 지으며 평생을 살아오신 어르신들의 사고속에서 하나의 로망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이른바 "1978년 고추파동의 추억"이었다. 

1978년 도시에 살던 우리 가족이 고추를 구하지 못해, 아니 고추 살 돈이 없어 헉헉되던 시절  고추농사를 짖던 분들은 일생에 다시 못올 영화를 누리고 있었다고 한다. 고추 한근을 보자기에 싸서 봉화장엘 들고 나가 팔면, 이런저런 부식거리도 사고, 고무신도 사서 들어오는 길에 선술집에서 막걸리한잔을 하고도 돈이 남았다고 했다. 도대체 고추한근이 얼마였기에 그럴수 있었는가하면 그때 가격으로 무려 만원을 넘어섰다고 한다. 지금 물가로 환산하면 대충 6~7만원으 족히 될것이다. 그러니고추 한근이면 충분히 그럴말한 값어치가 있었을 것이다.

박정희가 죽기 1년전, 한국 농촌에 선물로 남긴 것이 바로 고추 1근 1만원의 신화다. 이는 새마을운동이란 무기로 한국 농촌공동체를 해체한 일등공신인 박정희가 아직도 옛어르신의 뇌리에 위대한 지도자로 남아있을 수 있게 하는데 적지 않을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짐작된다. 아직도 '그때가 좋았는데...'를 읊조리는 어르신은 꼭 고추 한근 1만원의 신화를 입에 올리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올해 33년만에 다시 '고추파동'이 났다. 하지만 이번 고추파동은 평년작의 50% 이상 감수한 1978년 정도의 파동에는 미치지 못하는가보다. 오올해  평년수확량의 약 34% 정도가 감수된 전망이라고 한다. 그리고 가격면에서도 1978년의 만원은 지급 가격 2만원의 족히 3배이상의 화폐 가치를 띤다고 볼 때 올해의 고추값 상승은 '고추파동'이라고 이름붙이기에는 조금 지나치다고 볼 수 있다.

정부는 올해 고추 수확예상량은 평년보다 약 34% 정도 감수된 7만9천여톤으로 보고 있다. 신문들을 보면 현재 소비자 가격은 약 2만원 정도로 형성되고 있는데 정부의 개입으로 매주 400여톤, 총 8,000여톤의 정부물량이 시장에 풀릴 것으로 보이고, 또 좋은 날씨가 이어지고 추석이 지나면서 고추값이 하락세로 접어 들것이라는 기사가 넘쳐난다.

이들 고추 관련 기사들이 공유하고 있는 인식의 전제는 현재 형성되고 있는 고추가격이 지나치게 높다는 사실이다. 경제 대통령이라는 MB가 국가 경제를 파탄시키고 물가고로 서민의 목을 죄고 있는 상황에서 내가 아무리 농민이지만 지나친 농사물 가격상승은 바람직하지 않다는데 동감한다. 하지만 올해 고추가격과 수확량을 감안하면 평년에 비해 농민이 얼마정도 경제적 이익을 보았을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생산량 감소에 따른 가격 상승은 시장경제의 신봉자들인 그들에겐 '공정'하기 이를데 없는 현상인데, 농산물 가격하락에 그렇게도 둔감한 정부가 가격 상승에는 이렇게 호들갑을 떠는 모습을 보니 참 어이가 없다.

아뭏튼 나는 고추의 생산 전과정을 소상히 알고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그리고 한국 농촌공동체의 유지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고추 한근 2만원은 결코 지나치게 비싼 가격은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것이라 믿는다. 곧 지나가버라겠지만, 나는  올해 처음으로 정상적인 고추가격을 기쁜마음으로 목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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