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다큐 [두물머리] 함께 보아요~

농사일이 조금씩 시작되는 절기, 더 바빠지기 전에 할일들이

하나둘이 아니지만 모처럼 주민 여러분과 함께 우리 농업을 지키려는

다른 농부들의 이야기를 나눠 보는 시간 가지고 싶습니다.


2014년 갖종 다큐멘타리영화제에 출품되어

좋은 평가를 받았던 서동일 감독의 다큐 [두물머리] 

비나리마을학교에서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일시/장소 :


2015년3월 11일(수) 저녁 7시~9시 / 비나리마을학교

영화관람후 감독과의 대화 및 막걸리 파티가 있습니다.


* 참가비는 무상이지만

[다이빙 벨]등  다음 작품  초대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소액의 자발적 후원은 받습니다.


문의 : 비나리마을학교 054-673-1927  

주관자 : 봉봉협동조합 010-2008-1468




반응형
반응형

비나리마을은 산과 강이 어울리는 마을이지만 또 옛것과 새것이 어울리고, 농업과 예술이 어우러진 마을입니다. 아직 시작으로부터 몇발자욱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올 여름이며 마을에 작은 커뮤니티 센타가 문을 열고  갖가지 인문학 강좌를 포함해 다양한 공동체 문화와 연관된 공연과 행사 등으로 마을이 붐비기 시작할 것입니다.

나름대로 마을공동체문화의 성지면서, 예술이 마을공동체와 결합해 마을의 삶을 풍부하게하는 작은 사례이길 도모하고 있는 비나리마을은 언제부턴가 다양한 예술가들의 발길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사진 동호회 회원들이 단체로 마을을 찾기도하고, 마을의 풍광을 캔파스에 담는 화가들의 발길도 이어집니다. 또한 마을과 예술의 건강한 관계를 도모하는 문화활동가들과 연구자들의 방문도 드물지 않습니다.  

지난 주에는 MB정권에 의해 저지러지고 있는 4개강 파괴현장을 답사나온 경희대 미대 학장님과 교수님 그리고 대학원생들, 그리고 개인적인 인연으로 함께한 예술인들이 마을을 찾았습니다.  이분들의 방문은 마을과의 인연으로 비나리마을 사업과 관련한자문위원을 수락해주신 김준기 대전시립미술관 학예연구실장님의 주선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예술이 마을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예술은 또 마을을 통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쉽지 않은 과제지만 삶과 예술이 함께해야하고, 상처 받은 삶이 날 것 그대로 드러나고 해체의 위기에 빠진 현장인 마을에 예술이 함께해야한다는 당위에 많은 분들이 공감합니다. 마을이  예술을 통해 다시 생명력을 되찾고 건강한 삶들이 붐비는 공동체로 거듭나는 일은 무척이나 어렵겠지만 최소한 마을을 이루는 작은 삶들이 보다 아름답고 풍부한 공간에서 삶을 영위할 수 있게 하는데 작은 기여는 할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렇게 예술이 마을의 삶을 가꾸어나갈 수 있다면 보다 많은 도시민의 발길역시 마을로  향할 것입니다. 예술을 통해 도시와 농촌이 어우러지는 또 하나기적이 일어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밤새 잔을 기울이며 마음과 생각을 나눴던 분들이 아침 일찍 또 다른 일정을 위해 집을 나섰습니다. 마을을 떠나는 길에 공사중인 마을커뮤티니 센타엘 들러 이렇게 주어진 공간을 어떻게 마을을 활성화하는데 기여할 수 있는 내용으로 채워나갈 수 있을지 '상상'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아직은 모든 것이 오리무중이지만 머지않아 이분 한분한분의 손길과 발길이 비나리마을에 사람의 발길이 늘고 사람의 향기기 잩어지는데 기여하는 날이  다가올 것입니다.  

예술가들이 찾는 비나리마을의 미래가 밝고 아름답습니다.


 

 


반응형
반응형

 


1월24일 유후인을 떠나 후쿠오카의 엑셀도큐하카다호텔에 짐을 풀고,
텐진거리와 캐널시티 등 도심을 둘러보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그 다음날 일찍 텐진역에서 기차로 한시간 거리인 운하의 도시 야나가와로 향했다.
나카야마 미호가 출연했던 [도코맑음]이란 영화의 배경이 되기도했고,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야나가와 수로이야기]로 알려진 야나가와는  
최근 MB표 운하를 선전한는데 이용되면서 한국인에게 더욱 친숙해진 곳이다.


이번 규슈여행에서 야나가와 코스를 선택한 것은
도시를 실핏줄처럼 잇는 수로를 따라 가와쿠다리라는 뱃놀이를 즐기며
가족이라는 인연의 고마움을 다시 생각하면서
결혼 생활 20년이라는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기위해서 였다.
또한 아직도 개발광풍이 몰아치고
개발만능이라는 야만이 지배하는 나라에 살다보니
개발과 환경, 인간과 자연의 조화로운 공존을 구현한
아름다운 도시의 한 전형을 보고싶고 또 걷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MB의 야만적 토건주의를 옹호하기위해 이용했다는 야나가와 운하는
환경재앙적 개발주의와 극단적으로 다른 환경 친화적 개발의 산표본이었다.
야나가와 운하가 생기게 된 배경부터가 4대강사업과는 극단적으로 판이했다. 
한때 도시를 가르는 물길이 쓸모가 없어지고 오염되어 흉물이 되어가자 
시당국은 수로를 콘크리트 관으로 다 대체하고
묻어버리는 계획을 입안하고 추진하려 했다고 한다.
이때 야나가와의 한 말단 공무원이 이 계획을 반대하고 나서서
손수 혼자서 도랑을 치우고, 물길을 다듬어 나가기 시작했다.
이에 시민들이 호응하면서 개발계획은 철회되고 쓸모가 없어진 운하가
야나가와를 대표하는 상징물로 서서히 바뀌어 나가게 되었다.
오늘날 물의 도시 야나가와를 상징하는 운하는 
바로 그와같은 반개발주의 시민운동의 결과물이다.
이를 통해 야나가와는 상징적인 친환경적 도시로 부각되면서
년 100만명이상의 관광객을 끌어들이는 도시로 탈바꿈할 수 있었다고 한다.


텐진역에서 가와쿠다리 티킷을 산뒤, 기차를 타고 한시간을 달린 뒤 야나가와 역에 내려섰다. 조그만 시골 기차역같은 한산함과 소박함이 묻어나는 역사를 벗어나오자 가와쿠다리를 안내하는 안내원이 10분뒤에 셔틀버스기 온다며 대기실로 안내했다. 조그마한 대기실은 훈기가 넘쳤지만 야나가와 안내 팜플릿 몇 종류와 야나가와를 홍보하는 영상을 내보내는 TV가 전부인 소박한 공간이었다. 젊은 한국인 커플 한쌍과 관광객이 아니라 바같 추위를 피해 들어온듯한 일본 노인 한분이 전부인 탓에 자그마한 대기실도 조금은 허전해 보였다. 10분도 지나지 않아 셔틀버스가 도착했고, 셔틀 버스에 오른지 5분도만에 드디어 가와쿠다리 출발지점에 도착했다. 
  


나루터에는 같은 모양의 작은 배들이 나란이 늘어서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고, 쌀쌀한 날씨와 이른 시간때문인지 한산하기만 했다. 주변 풍경을 사진으로 남기다가, 얼마 기다리지 않아 아이와 함께 나온 일본인 가족과 한국인 커플 그리고 우리 가족해서 8명이 한 배를 탔다. 신발을 벗고 배에 오르자 작은 배는 한사람 한사람이 탈때마다 좌우로 크게 흔들려 금방이라도 뒤집어 질듯했다. 배의 중간에는 일본식 난방탁자인 코타츠가 놓여있었고 사람들은 모두 코다츠에 발을 넣었다. 이내  할아버지 사공이 삿대를 젓자 배는 수로를 따라 나아가기 시작했다. 


야나가와를 물의 도시, 운하의 도시라고 하지만 야나가와의 운하는 거대한 콘크리트 운하와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친환경적인 작은 수로에 불과했다. 이들 수로들은 집과 집을 잇고, 길과 길을 이으며 야나가와 항구까지 이어지는 작은 뱃길이면서 동시에 도시를 가로지르는 도랑이기도 했다. 수로를 따라 늘어진 나무와 숲, 세월의 때가 묻어나는 작은 집들의 아기자기한 정원들, 그리고 그 수로가  인간들만의 것이 아니라 오리들 자신들을 위한 것이기도 하라는 사실을 시위하는 오리떼 가족... 배는 물위를 흐르듯 나아가고, 나의 상념은 지난 세월을 지나 다가올 먼 미래를 오가며 흔들렸다. 수로의 폭은 점점 넒어지고 물길이 깊어지다가 어느새 샛강으로 접어 들기도하고, 다시 넒은 수로로 나아가기를 여러번  능수능란한 늙은 사공의 숨결이 가빠져 갔지만 작은 배는 물살을 일으키며 중심을 잡아 흔들림이 없었다.    


약 1시간의 뱃놀이는 금방 끝이 났다. 발걸음은 선착장에 올려놓자  언제 다시 와 볼 수 있을까는 생각에 가슴이 저렸다. 하지만 다 저 물처럼 흘러가는 것. 향유했던 지난 시간의 기억이나마 소중히 간직하고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은 큰 복이 아니겠는가. 아쉬움을 뒤로하고 한시간을 배로 내려온 수로를 거슬러 이번에는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수로와 도로가 헤어지고 한참을 주택지 사이를 헤메기도하면서 원래의 출발지인 야나가와 역을 찾아 나갔다. 깨끗하고 소박한 야나가와의 골목골목을 헤메는 재미에 푹빠져 한시간을 넘어 걷다가 결국 길을 놓쳐버려 다시 한시간을 더 묻고 찾고 한 끝에 야나가와 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오랜동안 가졌던 야나가와 방문의 꿈, 카와구타리를 해 보고 싶었던 꿈은 실현되었지만 야나가와를 떠나는 기차를 기다리는 마음은 아쉬움으로 가득찼다. 세상의 모든 삶의 터전이 다 이처럼 아름다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자연과 인공이 조화롭게 어우려져 사는 삶의 공간을 향유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복된 경우인가, 그리고 앞으로 살아갈 우리의 삶의 터전은 바로 이렇게 가꾸어나가야하지 않을까는 생각이 이어지고, 기차는 다시 후쿠오카로 향했다.


후쿠오카로 향하는 기차간에서 멀리 일본의 도시와 농촌의 풍경을 두눈 가득 담았다. 바로 그 순간 나는 일본이 부러워졌다. 최소한 환경과 전통에 대한 일본인의 애착만큼은 우리가 소중히 여기고 배워와야할 것들이 아닌가? 아직까지 박정희식 개발만능주의가 국민의 의식을 지배하고, 바로 그와같은 국민의 의식이 MB라는 구시대의 괴물을 현실에 불러들이는 악마의 주술에 빠져있는  우리 사회가 안타까웠다. 하지만 오늘의 일본인들 그와같은 개발만능의 시기가 없었겠는가. 시행착오를 피하면 좋겠지만 인간은, 인간의 세상은 그렇게 완벽할 수가 없는걸 어떻하겠는가. 그래서 인간세상인 것을!


하루의 여정으로 끝이 난 야나가와는 하루보다는 훨씬 더 큰 기억으로 나의 뇌리에 남아 오랫동안 나의 삶을 데워줄 것이다. 반추할 수 있는 행복했던 시간을 선사한 야나가와와의 인연에 감사하면서 2011년 야나가와 여행은 저물어갔다. 




반응형
반응형



1년전 일본농촌마을 선진지 견학으로 규슈여행을 다녀왔다. 즐겁고 의미있는 연수이긴 했어도 공적인 일정이 주는 아쉬움도 많았다. 나는 짧은 연수기간이었지만 일본의 멋에 매료되었고 특히 일본 농촌의 아름다움에 빠져버렸다. 연수를 마치고 돌아오는 비행기안에서 작은 다짐 하나를 했다. 빠른 시일내에 다시한번 가족과 함께 유후인이랑 야나가와를 보러가겠다고. 그리고 작년 10월이 결혼 20주년이다보니 충분히 핑게도 되었고, 틈틈히 웹을 뒤져 규슈여행 정보를 모아나갔다. 가까운 규슈지만 엄연히 외국인데 일본어도 못하고 영어도 못하는 사람이 자유여행을 가려고 하니 사전 준비가 많아야 했다. 늦었지만 난생 처음하는 단독 해외여행의 불안감을 떨치기 위해 여행안내서적들도 사서 읽고, 오랜 세월 방치되었던 일본어회화에다, 영어회화 공부까지 하기 시작하고 이러저런 블로그를 찾아 여행기를 읽어나갔다. 나중에는 유후인과 후쿠오카를 가지않고도 모스버거와 벌꿀 아이스크림 그리고 금상고로케의 맛을 논하는 유후인, 후쿠오카 전문가가 되다 시피했다. 그리고 10월이 다가오면서 드디어 교통편과 숙박편 예약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딸애의 합류와 이런저런 다른 사정까지 겹쳐 일정은 12월로 연기되고,  '대기'상태의 배편을 구한 상태에서 숙소를 예약한뒤, 배편이 틀어지면서 예약된 숙소의 일정을 바꾸기도 하는 우여곡절끝에 해를 넘기고 지난 1월 22일 드디어 배낭을 매고 집을 나섰다. 일주일동안 집을 지켜야되는, 자기가 사람인줄 착각하고 사는 우리집 똥강아지 초롱이가 서운한 눈빛으로 우릴 배웅했지만 개무시하고 악세레다를 밟았다. 


안동 강변의 한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부산까지 가는 기차를 타기 위해 안동역을 들어섰다. 한달전 예매를 하고 프린터해 둔 티킷을 주머니를 뒤척여 찾아 놓았지만 승무원 누구도 기차표를 확인하지 않았다. 예매를 하면서 안동에서 부산까지 버스로 2시간 30분이 걸리지만 기차로는 4시간이 넘게 걸린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빨리 가고싶은 마음이랑, 기차를 타고 싶은 마음이랑 한참을 갈등했지만 근 7~8년만에 하게 될 기차여행의 유혹을 뿌리칠 수 없었다. 플랫폼을 들어서는 나의 가슴은 벌써 여행의 흥에 벅차오르기 시작했다.


세식구가 함께 챙겨야될 가방의 수를 확인하고  각자가 책임져야할  몫을 나누다보니 금방 기차가 도착했다. 12시 12분 안동발, 16시 27분  부산 부전역도착예정인 무궁화호는 넉넉하게 좌석이 비어 있었다. 그래도 좌석번호를 찾아  선반에 짐들을 올려놓고 
차창밖으로 사라져가는 안동의 익숙한 풍경들을 두 눈에 담았다. 낯선 풍경들이 차장을 스치기 시작할 즈음 카페열차칸을 운영한다는 안내방송이 나왔다. 카페열차칸에서 마시는 커피 한잔의 낭만을 찾아 들어선 카페열차는 텅텅 비어있었고, 매장은 빈약했지만 그래도 창을 스치는 겨울 산하의 풍경을 바라보며 따끈한 원두 커피 한잔의 향기에 취했다. 카페칸 차창을 스치는 풍경은 객실 차창을 스치던 바로 그 풍경이 아니었다. 커피향 가득한 까페열차칸에서 바라다보는 차창밖 풍경은 지난 추억을 고스란히 환기시켰다. 어린시절 무서운 꿈을 꾸다 잠은 깬뒤 깊은 잠에 빠져 있던 식구들 사이에서 혼자 두려움과 외로움에 떨든 새벽, 소년의 귀에 울려오던 새벽기차소리는 두려웠던 밤이 다 가고 새날이 밝아오고 있음을 알려주는 구원의 소리에 다름아니었다. 중학교3학년 시절 갑자기 공부에 신명이 붙어 책보다 더 많은 도시락을 담은 무거운 가방을 들고 새벽 기차를 타고 전교 1등으로 등교를 하기 시작했다.  그 시절 시발역인 진해역에서 경화역까지 짦은 시간동안 새벽기운이 걷혀가는 세상을 차창밖으로 바라다보던 소년의 가슴은 온갖 굴레에 묶인 지금이 아니고 모든 것이 가능할 미래에 대한 꿈들로 벅차올랐다. 
 


안동을 벗어난 기차는 간혹 낙동강을 나란히 달리다가 낙동강의 지류들을 건너기도 하고, 의성과 군위를 지나면서는 낙동가의 본류를 가로지르기도 했다. 하지만 마음 편히 아름다운 겨울강을 바라다불 수만은 없었다. 한달쯤 전 구미에 일이 있어 갔다가 4대강사업으로 구미보를 설치하는 공사장 주변을 지나칠 일이 있었다. 그때 말로만 듣던 4대강사업 현장을 직접 두눈으로 보면서 강변 농토에 끝없이 쌓여있는 준설토 무더기와 거대한 보기둥을 보면서 경악했다. 한 인간의 야욕이 무참히 뭉개버린 자연을 바라다보면서  21세기에도 여전히 야만이 지배하고 있는 우리 사회에 절망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저 평화의 강이 끊기고 무자비하게 파괴된 공사 현장이 곧 나타날 것만 같아 창밖 강풍경을 바라다보는 마음이 불안으로 가득했다. 


기차는 부산 부전역에 도착하고, 우리는 짐을 들고 부전시장쪽으로 빠져나왔다. 지하철을 타고 중앙역으로 가기 위해서 였지만, 승선수속까지는 아직 2시간이 남아있었고, 가야할 전철 구간은 몇개되지 않았다. 가방을 끌고서 부전시장을 구경하자는 아내와겨루다가 그냥 길가 뜨거운 김이 피어오르는 포장마차에서 말로만 듣던 부산오뎅을 사먹기도하고, 중앙역에서 국제여객터미날까지 굳이 걸어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부산 국제 여객터미날에 도착하고보니 아직도 시간이 많이 남아있었다.  좁은 대합실을 들어서니 의외로 인파가 넘쳐나고 여행객의 설레임으로 후끈겨렸다. 비행기 삯에 비해 배삯이 싸서 그런지, 아니면 승객의 수가 적어서 그런지 알 수 없지만 왠지 어설프고 조금은 지저분한 여객터미날은 여행사별, 단체별로 무리를 지어 인원을 점검하고 여권과 승선티킷을 나누어주는 등 부산했다. 개별 자유여행에 오른 우리가족만 일행이 없이 홀가분하게 보였고 넓지 않은 터미날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승선시간을 기다렸다. 


발권을 하고 한참을 서성거린뒤에 먼저 출항할 시모노세끼행 성희호 승객들이 승선을 하는 과정을 구경을 했다. 그러고 나서야 우리가 타고갈 하카다행 뉴카멜리아호 승객들의 승선이 시작된다는 방송이 흘러나왔다. 아침에 집을 나와 이제사 후쿠오카행 배를 타게되는구나 하는 안도감과 설레임을 안고 들어선 승선장에는 면세점이 있었지만 잠깐 구경만하고는 곧장 배에 첫발을 디뎠다. 뉴카멜리아호 갑판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 그렇게 큰 배였지만 생각지도 않은 울릉거림이 전해져 왔다. 그 울릉거림이 파도때문인지 설레임때문인지는 알수 없었다. 


객실은 카멜리아호의 3층,4층,5층에 나누어져 있었고, 우리가족은 4층의 12명이 들어가는 한 다인실에 여장을 풀었다. 남녀실이 다르거나 혹은 비슷한 가족여행객들로만 같은 호실 손님을 몰아준다든지 한다는 이야기를 들어왔지만 우리 선실은 전부 개인 남자 승객뿐이었다.  우리가족은 조금의 불편함과 불안감을 갇지 않을 수 없었지만 다행이 우리 호실의 승객은 7~8명에 불과해 넉넉한 자리에 트렁크를 벽삼아 내려놓을 수가 있었다. 여행이란게 이런 불편함을 즐기기 위한 것이 아니겠는가며 스스로를 위무하며 저녁 7시 승선후 11시 30분 출발까지 선상의 여행을 시작했다. 배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구경도 하고, 각종 자판기를 사용해보기도 하고,  갑판으로 나가  어둠에 싸인 부산항과 부산시의 야경을 사진에 담기도 하고 기념 사진도 찍었다. 카멜리아호는 일본 선적인지 선내에서는 엔화밖에 사용할 수가 없었고 자판기로 판매하는 상품들 역시 일본 상품들 이었다. 배를 타는 순간 왠지 모르게 이미 일본에서의 시간이 시작된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가만히 서 있는 배에서 보내는 시간의 지루함을 줄일 순 있었지만 4시간 30분이라는 시간은 한 공간에서 보내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배도 고파왔지만 선내 레스토랑은 예약된 단체 손님을 우선 받고 8시40여분이 지나서야 일반 개인 손님을 맞기 시작했다. 일부 메뉴는 이미 매진이 된 상태였지만 다양한 음식을 먹어보자며 3명이 각각 다른 메뉴를 주문했다. 음식값은 각 850엔 정도 였고 그런데로 한끼 식사를 해결하기에 부족함이 없었지만 이날 압권인 음식은 단연 연어알밥이었다. 국내에서 먹던 일반적인 알밥만을 생각하고 연어알밥을 주문했다. 주문을 받는 아가씨가 몇번을 반복해서 연어알밥을 드실 수 있으시겠냐고 되물어왔다. 먼저 국적을 묻고 연어알밥은 비린내가 많이 나서 한국사람 입맛에 맞지 않을 수 있다는 친절한 안내를 해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뭐든지 먹을 수 있습니다!' 라고 소리치고는 고집스레 주문을 하고 말았다. 하지만 차려진 그릇의 뚜껑을 열자마자 와이프는 스필버거의 인디아나존스에 나오는 눈알이 둥둥 떠 있는 스프를 연상시킨다면 질겁을 했다. 나는 돈이 아까워 억지로 먹어보려 시도했지만 연어알이 입안에서 터질때마다 비릿한 생선 썩은 냄새 같은게 입안에 퍼지면서 거의 구토가 날 지경이었다. 남은 2인분의 다른 음식을  3명이 나누어 먹으면서 웃고 떠들며 부산앞바다의 밤은 깊어갔다. 식사를 마치고 부산항 밤바다를 바라다보고 기념사진도 찍다가 선실에 들어가 잠을 청했다. 


잠이 설핏 든 사이 배의 출렁거림이 느껴져 눈을 떴다. 배가 출항을 했는지 확인해 보기 위해 나선 갑판에서 바라다 보는 부상항을 점점 멀어져가고 있었다.  멀어져 가는 부산항을바라다 보며 멀어져 가는 나의 지난 시간들도 더불어 작별했다.  

배를 타고 떠나는 일본여행을 꿈꿔온지 오래다. 선상에서 밤바다를 보고 싶었다.  망망대해 한가운데서 맞는 일출, 그리고 일몰, 바다 한가운데서 보는 밤 하늘의 별들... 그리고 파도소리. 하지만 이번 여행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깜깜한 밤바다에 별도, 일출도 볼수가 없었다. 빛마져 다 빨아들이는 블랙홀 한가운데 남아있는 것 같은 느낌... 그리고 멀미까지. 

 

여행을 준비하면서 갖는 여행의 꿈은, 막상 길 떠나게 되면서 막닥뜨리는 구질구질한 현실과 의외의 변수들에 의해 뭉개져 버리지만 그래도 현실은 그 꿈보다 훨씬 풍부하고 아름답다는 사실을 직시하게 된다.

삶은 항상 의외의 사건들로 가득차고, 늘 미지의 것을 남겨 놓고 있지. 그래서 세상은 신비롭고,  삶은 살만하지 않은가? 낯선 여행만큼이나 설레임 가득찬 나의 삶을 위하여!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