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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오랜만에 봉화왔다. 마당은 심술궂은 여신이 지켜보는 와중에 산마늘과 부추와 상사화가 낙엽을 밀치고 잎을 틔웠다. 앞마당 산수유는 꽃망울을 가득 달았고 곧 자지르지게 꽃을 피울 준비가 끝났다. 방안은 온갖 신들이 지키고 있었지만 겨울 한파로 부터 화분들을 지켜내지 못했고 아끼던 커피나무와 올리브 나무까지 유명을 달리했다.

오랜만에 동네돌며 인사드렸지만 못뵌 분들이 더 많다. 지난해 유달리 세상을 떠난 이웃이 많았고 그렇게 그리움은 늘고 나는 나이를 더 먹었다. 오랜만에 만난 형님들도 그동안 주름이 더 깊어졌다. 그런 이웃 형님들이 내 걱정을 해 주신다.

몸 편하제? 나주 생할은 어떻노? 식구들은 건강하제 ? 우예 자네 흰머리가 더 늘었다.  인자 얼마나 지났노? 한 이년 됐제? 끝나면 농사지로 오나? 밥벌어묵을만 하면 농사지로 오지마라.  

행님 월급쟁이도 힘드니더. 저는 농사가 났니더.  벌써 절반지났고 일년 남았니더.  우야든동 행님 형수님 건강하이소. 돌아와서 오래오래 같이 농사짓고 사시더.

동네한바퀴 도니 날이 저물고 22년5월에 멈춘 달력을 갈고 먼지 앉은 집안 청소를 하니 밤이 깊었다. 내일은 누구를 만나고 몇시에 나주로 츌발할까. 길이 멀고 여정은 짧으니 보고싶은 사람들은 다 남겨두고 비나리 바람만 한 가슴 가득 품고 집을 떠날 수 밖에 없다.  그래도 나는 돌아 올 마을이 있고 집이 있고 일할 밭이 있고 나를 아끼고 사랑해 주는 이웃이 있는 참 복이 많은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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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에게 개인전은 1~2년에 한번씩 있는 일이지만, 매번 개인전이 있을 때마다 똑같은 설레임과 긴장이 있을 것 같다. 화가의 남편인 나 역시도 마찬가지다. 그림을 포장하고, 나르고, 그리고 전시관련한 이런저런 뒤치닥거리를 하긴 하지만 그 역할에 비해 가지는 설레임은 훨씬 더 크다.


2009년11월인가 가나아트 미루에서 개인전을 연지 거의 1년 6개월만에 이번에는 사간동과 인사동 사이에 있는 조그만 신생화랑 갤러리비원에서 개인전을 열게되었다. 급히 전기 계획이 잡혔지만 다행히 갤러리의 규모가 작고, 작업 컨셉이 준비된 것이 있어 전시가 가능했다. 총 9점의 작품을 싣고 사진 촬영을 위해 서울 나들이를 하고, 다시 봉화로 싣고 왔다가 일주일 뒤 전시에 맞춰 갤러리로 싣어 나르고, 그리고 다시 오픈 파티가 있은 어제 서울행을 해야만 했다.


갤러리비원은 규모는 작지만  사람이 붐비는 Y자 거리의 모퉁이에 있고, 갤러리 앞 마당은 나무와 벤치가 있는 제법 넉넉한 공간까지 있어 알찬 전시공간을 갖춘 갤러리다. 듣기로는 주로 30대 젊은 작가의 기획전을 열어오다가 이번에 처음으로 40대 후반 작가를 초대했다고 한다. 일단 젊은 작가의 대열에 같이 끼게된 것만으로도 기분좋은 일일것 같다. 
 


어제 아침 일찍 출발을 할 예정이었지만 출발 직전에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은행에서 연락이 와서 작품을 반입할 일이 생겨버렸다. 모든 준비는 끝났고 몸만가면 될 산황에서 갑자기 일이 생겨버린 것이다. 승용차에서 트럭으로 짐을 옮겨 싣고, 미술은행에 넣은 그림을 찾아 포장을 풀고 자료용 사진을 찍고, 다시 재포장을 해서 트럭에 싣고 정오를 넘겨서야 집을 나섰다.
  

봉화에서 신갈까지는 순탄한 길이었지만, 신갈부터 서울 쪽으로 차가 밀리다보니 그림 사진을 찍은 서초IC에서 차를 내릴 때는 벌써 4시가 넘었다. 단골 스투디오인 '포토리스트 강남점'을 들러 일을 마치고 다시 한남대교 쪽으로 방향을 잡으려 했지만 진입로가 공사로 인해 차단되어 있었다. 유턴을 어렵게 하고 부산방행으로 차를 올렸다가 양제IC에서 차를 내려 다시 유턴을 한남대교쪽으로 차를 올릴 수 있었다. 잘 알지도 못하는 길에 오픈 시간을 다가오고 자못 긴장된 시간이었지만 5시 30분경에 인사동에 도착해서 미술은행에 들어갈 그림의 액자를 부탁하고 갤러리 비원에는 6시를 10여분 남긴 시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우리 부부가 도착하기 진전에 갤러리 앞에서 텔랜트 소지섭과 한효주가 무슨 드라마를 찍고, 한효주는 갤러리를 들어와 그림을 둘러보고 방명록에 싸인을 남기고 갔다고했다. 조금 일찍 도착했으면 한효주랑 같이 사진을 찍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조금 아쉬웠지만 남아있는 싸인으로 만족해야지^^*


갤러리에 도착했을 때보니 만신 이해경선생님과 문하생 2분이 작품을 둘러보고 있었다. 급히 인사를 나누고 차를 주차시킨뒤 갤러리로 돌아와 보니 낯익은 얼굴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많은 분들이 와 주셨지만 귀한 시간내어주신 김정헌선생님과 박명학님, 송이님, 장경호선생님, 박영숙 선생님, 윤석남선생님, 김혜승 전여성사전시관 관장님, 김혜순시인 그리고 새사연의 김점식이사님, 그리고 제주 까멜리아힐에서의 인연을 이어가고 있는 노석미 님과 그의 일당여러분이 너무나 반가웠다.
개인전을 여는 재미가 바로 이런 것이구나 싶게 많은 분들을 오랜만에 뵐 수 있었다. 10여년만인가 이웃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갖고 계신 박불똥선생님과 네오룩 최금수 대표, 대전시립미술관 김준기학예실장님, 학고제 김지연 큐레이터 그리고 류준화의 영원한 동지분들이신 정정엽, 제미란, 하인선 님등 입김 멤버님들, 아내와 나의 옛친구들...

갤러리가 좁아 갤러리 앞 길가 벤치에 나와 앉아 계신 분들 사이를 오가며 정신없이 인사를 나누고 와인을 나르고 뒷풀이 장소를 안내 하다보니 날이 저물었다. 8시가 다 되어서야 뒷풀이 장소에 도착해서 드디어 긴장을 풀수 있었다.


10시에 자리를 파하고 옛친구부부들과 함께 커피를 한잔 나누면서 취기를 가라앉히고, 자정이 되어서야 차에 오르고 봉화로 향했다. 졸음과 싸우며 까까스레 집에 도착해보니 새벽 4시... 이렇게 또 한번의 아내의 개인전을 열고 나는 일상으로 돌아왔다.   

좋은 일에도 늘 아쉬움이 남는다. 항상 이런저런 행사때마다 달려와서는 같이해주고 도와주는 풍기의 강석문, 박형진 작가부부를 맥주한잔 대접못하고 보내버렸다. 정신없는 와중에 강석문. 박형진 부부와 노석미씨등 까멜리아힐로 인연맺은 작가님들에게 아무 신경도 못쓰드려 너무 미안하다. 나중에 밥이라도 한끼 대접드려야겠다.  

그리고 이번 초대를 해 주신 갤러리비원 이정연대표님께도 감사를 드린다.
류준화展

 

6월3일_6월25일까지
11am - 6pm / 월요일 휴관

서울시 종로구 화동 127-3

T +82 (0)2 732 1273
F +82 (0) 2 732 1274

gallerybeone@naver.com
gallerybeone@gmail.com

지하철
3호선 안국역 1번출구
윤보선생가 방향으로 직진

버스
종로경촬서 또는 안국역 하차
윤보선 생가 방향으로 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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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혹독한 겨울이었습니다.
사람은 물론이지만 소돼지같은 짐승들에겐
다시는 없어야될 참혹한 시절이었습니다.
수천 수만마리 소와 돼지가 오직 구제역이라는 전염병이 번져
고기의 생산성이 떨어지는 것을 막기위한다는 이유로
마무가내로 생매장되고 대량 살육되었습니다.

인간이 참 죄가 많습니다.
신이 없기에 다행스럽긴하지만,
인간의 죄를 누가 물을까 두렵습니다.


이웃 마을까지 구제역이 번져 이웃 소들이 살처분되는 와중에도
비나리 소들은 다행히 구제역 참화를 비켜났습니다.
전래가 없는 대량 살육의 와중에 태어난 송아지가 이만치 자라
어미의 사랑속에서 따사로운 봄햇살을 맞고 있습니다.
생명의 안스러움과 그 애틋함에 가슴이 뭉클합니다.


간디가 그랬답니다.
"문명사회의 척도는 그 사회에도 동물들을 어떻게 대우하는가이다"
잡식성 동물인 인간이 육식을 회피하기는 정말 어렵습니다.
채식주의자들이 있긴하지만 인류의 0.1%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고기를 위해 짐승을 키우고, 그 고기를 죄책감없이 취할 수 있다고는 하지만
최소한 한 생명체를 대하는 인간의 태도는 좀더 경건해져야할 것입니다.
저 애틋한 송아지의 맑은 눈을 바라다보면서 
지금 당장 채식주의자가 될 수는 없지만
이제부터 가능한 육식을 줄여 나가야지 하고 다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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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가 산수유 꽃봉우리가 한껏 부풀었습니다.
오늘같은 햇살이면 몇일 지나지 않아 
꽃망울을 터뜨리고야 말것같습니다.
요 몇일 꽃샘추위 핑계로 대낮에 방구석에서 책도 읽고,
블로그도 주물럭거리면서 한가로움을 만끽했습니다.
하지만 오늘 오후부터 갑자기 풀리기 시작한 날씨는
완연한 봄을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따사로운 햇살, 푸른 하늘,
그리고 산들바람조차 훈기를 품었습니다.
드디어 더는 견디지 못하고 작업복을 챙겨입고 마당을 나섰습니다.


지난 몇일사이 고구마와 야콘 모종도 작업을 끝내었습니다.
다음 작업은 한 열흘뒤에 사과나무 500여그루를 심는 일인데
지금쯤 밭정리부터 들어가야합니다.
이제 더이상 미룰 수 없어 슬슬 일을 시작해야 되는데
다음주초부터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가기로하고
오늘 내일은 집주변 대추밭부터 손을 보기로했습니다.


지난 가을 우리에게 아름다운 자태와 향기,
투명한 빛색으로 자연의 아름다움을 한껏 선사해주었던
시들은 국화며 코스모스며 여러가지 꽃 대궁을 거두고
국화꽃을 받쳐주고 있던 철사도 제거하고 
올 봄 나무를 심을 구덩이도 서너개 파놓는 걸로 
오늘 아름다운 봄의 하루 오후를 보냈습니다. 


여러분의 아름다운 봄날의 하루는 어떠셨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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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몇일 볼일이 있어 지방을 다녀왔습니다.
그 사이 계속된 비 덕분인지 날씨가 많이 눅었습니다.
비닐하우스안은 따뜻하다 못해 더워지기 시작했고,
지난주에 파종한 고추가 싹을 틔웠습니다.
운좋게 비닐하우스 안에 자리잡은 풀씨들은
벌써부터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워
비닐하우스 바닥을 녹색으로 칠해 버렸습니다.

비닐하우스안에만 봄풀들이 제철을 만난 것은 아닙니다.
뒷마당 언덕도 옅은 연두빛을 띄기 시작했고,
자세히 들여다 보면 마른 풀입과 나뭇가지 사이로
연두빛 새싹을 키우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봄은 소리없이 비나리마을에 성큼 다가왔습니다.

이제 농부의 마음은 바빠지지만,
세상은 더 아름다운 절기를 맞이 하겠지요.
봄은 맞는 농부의 마음은 각별합니다.
다 잘 될 것 같고, 무엇이라도 새로 시작하고 싶은
그런 계절이 바로 봄이랍니다.

올 봄 저의 농장에도 작은 희망을 심을 것입니다.
새로 시작하는 사과농사가
3년뒤면 우리집 살림살이를 책임져 줘야하는데...
확실한 것은 아무 것도 없는 농사라지만
그래도 나무를 심는 마음은 희망으로 부풉니다.

아름다운 봄날,
새봄을 맞는 농부의 기쁨 마음을 여러분과 나누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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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걷이가 끝나면 '이놈에 농사 다시는 안한다'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니는 이웃이 한둘이 아닙니다. 그러다가 긴 겨울 휴식을 보내고 입춘이 지나고 우수가 다가오면 너도 나도 언제 그랬냐는 듯 시작하는게 농사입니다. 농사가 업이다보니 그럴 수 밖에 없기도 하지만 농사가 가지는 묘한 중독성도 무시 못할 이유인 것 같습니다.


농부가 씨를 뿌린다는 것의 의미는 경제 활동으로만 이해한 투자라는 개념과 조금은 다릅니다.
농부가 뿌리는 고추씨는 수확후 판매를 통해 수익을 창출하기 위한 투자와는 다른, 안될 줄 알면서도 할 수밖에 없는 어떤 숙명성 같은 것을 지니고 있습니다. 항상 그것이 무엇인지 궁금하기도 하고, 또 숙명처럼 돈 안되는 농사를 지어야되는 이웃 어르신의 삶이 솔직히 안타까울 때도 있습니다. 
저 자신이 농사가 업이고 그래서 똑같이 가을이면 '이놈에 농사 때려치운다'고 떠들고 다니다가 이렇게 입춘이 지나고 집앞 개울에 얼음이 녹아 물흐르는 소리가 들리면 언제 그랬냐는 듯, 고추 종자를 뭘로 할지, 농사 일정을 어떻게 잡을지 고민하기 시작합니다.
사실 스스로 선택한 삶에 대한 괜한 집착인지도 모르겠지만 아직까지 농사를 포기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렇다고 농사를 통한 비젼 같은 것도 가지고 있질 못합니다. 어떤 분들은 농촌공동체가 신자유주의가 지배하는 현대 사회의 폐해를 줄이거나 치유해줄 새로운 대안공동체로 받아들이고 귀농켐페인을 사회운동차원에서 수행하시기도 합니다. 또 어떤 분들은 생명을 다루는 농업이 가진 특성에  몰입해 자연파괴적이고 반생명적인 현대 산업사회의 병폐를 치유하고, 근본적으로 인간의 삶을 바꿀 수 있는 기획으로 농업을 받아들입니다. 이런 분들은 자연 농업을 넘어 도시농업으로 까지 농업의 영역을 확대하기도 하고, 농업의 산업 경쟁력보다는 경제적 가치로 환원할 수 없는 자연적 사회적 순기능에 촛점을 맞춰 농업을 이해합니다. 

생태주의자를 넘어 농업근분주의자에 가까운 분들의 많은 주장이 충분이 이해가 가고 공감이 가지만 평균적인 욕망을 가진 저같은 보통사람이 실천을 하기에는 어려운, 그래서 그런 분들을 존경을 하되 감히 따라가지 못하는 형편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그냥 농사 짓는 일이 다른 직업에 비해 속박이 적고 자유스러울 뿐아니라, 자연과 더불어 즐기면서 할 수 있는 직업이라서 선택한 것뿐입니다. 
사실 농업에 대한 수많은 가치부여는 어제 오늘이 아닙니다. 예로부터 '농자천하지대본야'라고 하기도 하고 현대에 들어서는 '농업의 발전 정도는 선진국이 되는 척도'라는 등의 농업의 가치를 높게 평가하는 참 좋은 말들이 많습니다. 누구는 정치적 수사로 그런 좋은 말들을 들먹였지만, 또 어떤 분들은 진정으로 건실한 농업이 번성하고 농민이 대접받는 세상에 대한 희망을 담아 그럴 말씀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런 좋은 말들이 농업을 경시하는 세력이나 최소한 도시민을 향해 주장되어야 하는데 현실은 경제적 문화적 소외로 고통받는 농민에 대한 위무용 립서비스로 사용되는 경우가 더 많아 보입니다. 그러다보니 농민 스스로 그런 말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단지 비소할 따름입니다. 

생명을 다루는 농업, 자연과 환경에 순응하는 농업, 인간의 보다 고양된 삶을 가능하게 하는 원리를 제공하는 농업, 인간을 지속가능한 삶으로 인도하는  농업... 사실 농업은 이 모든 위대한 가치를 포괄하고 있다고 인정합니다. 그리고 저는 개인적으로 그런 농업에 종사하는 저 자신의 삶에 대해 뿌듯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그런 이데올로기만으로 농민을 농업에 묶어두는 시대는 끝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당당하게 나는 농민이라고 자부할 수 있는 사회적 보상체계가 만들어 지고,가업으로 자식에게 농업을 물려줄 수 있는 사회적 풍토가 마련되는 세상이 되어야 합니다. 어떻게 농민의 삶이 그런 가치있는 삶으로 사회적 인정을 받을 수 있을지 아직은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2010년 봄, 14해째 농사를 시작하기에 앞서 쓸데없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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