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2월4일 Nawal을 출발하여 뭉지와 Braga를 거쳐 Manang에 도착해서 하루 여정을 마치고, 2월 5일 쏘롱라 패스에 앞서 고산에 적응하고 체력을 비축하기 위해 마낭에서 하루를 더 쉬었다. 


갸루에서 나왈까지의 느낌 그대로 나왈에서 뭉지까지 길은 이어졌다. 산등성이는 메마른 돌투성이 흙이 드러나고 드문드문 식물이 자라고  있었다. 야크의 먹이가 되는 키작은 초목이 자라는 목초지는 될지언정 밭을 갈고 곡식을 심기에는 땅은 너무 경사지고 거칠었다.  멀리 마르샹디 계곡으로 홈대 비행장이 내려다 보이는 길을 따라 걷다가, 고개를 들어 마르샹디 계곡을 다라 서북쪽을 향하면 멀리 강가푸르나와 안나푸르나 3봉이 눈에 들어왔다. 이 아름다운 길의 기억을 기록에 남기기에는 나의 글은 너무나 짧고 사진으로 다 담기에는 또 놓치는 것이 너무 많은 하루였다.   




나왈을 출발해 2시간여를 걸어설까? 우리는 Low Pisang에서 Hongde를 거쳐 오는 길과 만나는 나왈에 도착했다. 나왈은 험준한 아난푸르나 산등성이에서는 보기 드물게 너른 초지로 이루어진 마을이었다. 역시 야크의 교잡종으로 보이는 소가 한가롭게 마른 풀을 뒤지고 있었고, 말은 초지 사이를 흐르는 개울에서 물을 마시고 있었다. 말이 물을 마시는 사이 마부도 쉬기 위해 말을 내렸고, 우리도 배낭을 벗고 쉬어가기로 마음 먹었다. 뭉지는 말도 마부도 트레커도 짐을 벗고 쉬어가기 좋은 동네였다. 너른 초지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는 소들을 바라다 보면서 우리 역시 인생의 짐을 내려놓고 시벅쥬스를 한잔 가득 마시며 한가로이 해바라기를 했다.


   


나왈에서 마르샹디 강을 만나 30여분을 더 걸으니 마낭 직전 마을인 Braga에 도착했다. 강쪽 길가에는 롯지촌이 형성되어 있었고 오른쪽 산자락아래는 사찰과 함께 민가들이 옹기종기 모여 마을을 이루고 있었다. 동네 앞에 너른 초지 중간에는 불상이 세워져 있었고 주변에는 몇개의 벤치도 놓여져 있었다. 동네의 광장같은 역할을 하는 공유지 같았다. 우리가 마을에 들어설 무렵 수업을 마친 한무리의 꼬마들이 우리 앞을 지나갔다. 아이들을 보니 장난기가 발동했다. 우리에게  남아있는 2개의 축구공 중에 한개를 주고 싶었다. 아이들에게 축구를 하자며 불러 세워 잠시 잠깐이나마 같이 공을 찼다. 좀 더 놀고 싶었지만 브라가도 3,500m 고도의 고산 마을이다보니 금방 숨이 찼다.  




브라가를 지나 마르샹디강을 따라 30분도 걷지 않아 마낭이 올려다보이는 지점까지 도착했다. 마낭 도착전 마지막 휴식을 위해 차우타라(chautara)에서 배낭을 벗고 숨을 돌렸다. 본격적인 고산 트레킹을 시작하는 마을 마낭에서 보낼 이틀의 휴식에 가슴설레이며 마을을 들어선뒤 Tilicho Hotel을 찾아 짐을 풀었다.  모처럼 밀린 빨래를 하고, 마을을 돌아보고, 생필품을 사고 그러고도 시간이 남아 가이드 바수의 부추킴에 넘어가 뚱바를 파는 가게를 찾아 자리를 잡고 일행을 불렀다. 맛있는 애플파이로 기억될 Tilicho Hotel에서의 첫날이 저물었다.  




고도적응일로 꼭 하루 더 쉬어갈 것을 강권하는 안내서들에 따라 우리도 마낭에서 걸음을 멈췄다. 사실 마낭에서의 하루는 단지 쉬기 만을 위한 날은 아니다. 2박 3일을 지내도 다 둘러보지 못한 숱한 명소와 볼거리가 널려 있기 때문이다.  강가푸르나 호수와 빙하,  Milerepa's Cave와  Ice Lake 만해도 하루에 다 가 볼 수 없을 정도인데 나는 틸리초로 가는 길목에 있는 강사르 마을을 가보고 싶었다. 하지만 계획은 틀어지고 명소들은 다 건너 뛰고 가까이 마을 산책으로 하루를 보내기로했다.




게으른 아침을 보낸뒤 우리는 늦게 롯지를 나와 전날 스쳐 지나왔던 Braga로 향했다. 목적지 없이 보내는 하루를 브라가 곰파를 찾는 것으로 시작했다. 가파른 계단을 통해 올라간 곰파는 500년 이상된 사원이라고 했고 나름 세월의 멋을 간직하고 있었지만 사람의 손길을 받지 못하고 낡아가는 느낌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계절적인 이유로 일시적으로 비워져 있는 건지는 알수 없었지만 사람이 살지 않고 마을에 의해 관리되는 곰파치고는 너무나 방치된 느김이었다. 지금까지 들렀던 티벳불교 사원 거의 대부분이 중건중이거나 잘 관리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브라가 곰파는 그렇지 못했다.




브라가 곰파에서 내려와 마르샹디를 건너 강가푸르나와 마르샹디가 만나 형성된 널다란 초원을 걸었다. 늘 바람처럼 가벼워지고 자유롭고 싶다던 소망이 그 순간만은 이루어진것 같았다. 우리는 초원 여기저기에 흩어져 풀을 뜯는 말들 사이로 풀잎처럼 가벼운 몸과 마음으로 정처없이 걷고 또 걸었다. 일년 365일을 살면서 단 하루라도 가야할 곳도 없고, 기다리는 사람도 없고, 시간을 느낄 필요도 없는 진공같은 평화를 내 자신에게 선물하고 싶었는데 그 작은 소망이 마낭에서 마침내 이루어지고 있었다.



마르샹디는 강물은 많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맨발로 건널만치 적은 수량도 아니었다. 한참을 강을 거슬러 마낭 시가지가 끝나는 위치까지 가서야 다리를 만났다. 가파른 강둑을 올라 마을을 들어서니 마땅히 할일이 없이 마을을 배회하고 있던 바수와 나브라즈와 마주쳤다. 마지막 남은 축구공과 학용품을 전해줄만한 아이들을 만나지 못한 바수와 나브라즈는 우리를 마낭 곰파로 안내하며 마낭곰파에 딸린 마을 공동체 조직에서 아이들을 위한 프로그램 같을 것을 운영하고 있고 그곳에 기증하면 좋겠다는 제안 했다. 



마낭 곰파에 들어서니 7~8명의 사람들이 마주앉아 차를 돌리고 예불을 준비중이었다. 학용품이나 전달하고 부처님 앞에 공양이나 하고 나올 참이었다가 갑자기 곰파의 안내를 받아 경내에 착석하고 차까지 대접받았는데 곧바로 예정에 없던 예불에 참여까지 하게 되었다. 혹시 방문객을 위한 공연 개념의 예불이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겠냐는 생각이 더 크게 들었다. 전통악기를 연주하며 불경을 외는 네팔리의 목소리에 우리 모두는 푹 빠져 들었다. 고단한 삶이 그대로 묻어나는 투박한 형식의 예불이 억지로 짜내는 화려한 성전의 경건함보다 더 절실하게 다가왔다. 제도화가 덜된 날것 그대로의 종교를 만난듯한 감동은 오래도록 남을 것 같았다. 이렇게 예불마저 참여하고 나니 쏘롱라를 향한 우리의 발걸음에 부처님의 가호가 함께할 것이라는 믿음이 나를 든든하게 했다. 

반응형
반응형

2월1일 차메를 출발, 브라탕, 두쿠르포카리를 거쳐 어퍼피상에서 하루 밤을 머물고, 2월2일 가파른 오르막을 힘겹게 올라 갸루에서 점심을 먹고 나왈까지 걸어 하루를 마무리했다.



차메의 아침은 분주했다. 고산증으로 하산중인 캐나다 청년은 사우니를 통해 짚차를 알아보고 이른 아침 도망가듯 떠나갔다. 도로는 좁고 가파랐고 포장이나 가드레일은 물론 없었다. 사륜차가 아니면 다닐 수도 없는 열악한 조건인데 눈까지 얼어붙어 나같으면 도저히 그 길을 차를 타고 내려갈 자신이 없었다. 짚이 떠난뒤 사우니 이야기로도 작년에도 사람과 짐을 가득 실은 차가 수백미터 아래 마르샹디로 떨어져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등 역시나 사고가 빈발한다고 했다.  캐나다 청년은 떠나갔지만 탄촉부터 그 청년을 따라왔다는 검정개는 우리곁에 남아 있었다. 어제 저녁 롯지 복도에 잠을 자던 검정개는 롯지의 개가 아니고 그 청년을 따라 들어온 낯선 개라고했다. 낯선 개가 롯지 실내에 들어와 복도에서 잠을 자도록 버려두는 네팔리들의 동물에 대한 태도가 참 남달랐다.



길을 나서기전 롯지에서 일을 보던 13살 소녀 수니타에게 축구공과 아주 조금의 용돈을 쥐어주었다. 그 아이는 일찍 아버지를 여위고 엄마는 다른 롯지에서 일을 하고 자신도 역시 포탈라 롯지에서 심부름을 하면서 입을 들고 학교를 다니고 있다고 했다. 맑은 눈에 꿈많은 아이가 살아갈 세상이 꽃길은 아닐 지언정 제발 험하고 곡절많은 가시발길이 아니길 빌면서 롯지를 나섰다. 깔리(검정개)도 우리를 따라 길을 나섰다.

 


차메를 벗어나기위해 한바탕 법석을 떨어야했다. 우리를 따라 나선 깔리를 지나는 길목마다 지키고 있던 다른 개들이 그냥 두질 않았다. 집단으로 덤벼드는 개를 쫒고 우리 뒤로 숨어드는 깔리를 지키면서 겨우 마을을 벗어났다.  길을 걷기 시작하자 마자 탈레큐를 지났다. 우리는 숲속으로 들어갔다가 금방 나오고  조금 가파른 듯한 언덕길을 오르다가도 어느새 편안한 길을 걷고 있었다. 누구라도 지치지 않고 편안히 걷기에 딱 좋은 길이 이어졌다. 날씨 마저 최상의 날이었다. 공기는 건조하고, 하늘은 투명하도록 새파란 빛에 흰구름마저 어울렸다. 계곡을 갈라 파란 하늘이 열리고 그 너머로 설산이 얼굴을 내미는 아름다운 길은 아무리 걸어도 지칠 것 같지 않았다.   



 

차메를 떠난지 두세시간이나 지났을까 목이 마르고 잠시 쉬어 가고 싶을 때쯤 커다란 사과 과수원이 길따라 가꾸어져 있고 농장 시설이 있는 브다땅을 지났다. 오랜만에 신선한 과일향이 그리워 과수원에 딸려 있는 듯한  bhratang Tea House에서 배낭을 벗었다. 말라 비틀어진 조그마한 사과를 생각보다 훨씬 높은 가격에 사고, 예상보다 시원하고 향그러운 데다 가격까지 싼 사과쥬스를 한잔씩 나누었다.  사과농사를 짓는 입장에서 볼때 과수 상태는 볼 것도 없었지만 그 규모만은 놀랄만했다.  대규모의 농장이 소농의 삶의 터전을 흡수하는 방식이 아니라 지역 농민에게 도움이 되는 방식으로  가꾸어지기를 빌었다. 땀이 마르고 겉옷을 찾을 만치 몸이 식은 뒤 다시 걷기 시작했다.

 


 

입안에 가득 사과향을 머금고 브라탕을 출발하자마자 좁고 긴 계곡을 이루는 절벽을 깨서 만든 위태로운 길이 나왔다. 사람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 건지 어떻게 이런 절벽을 깨서 길을 만들 생각을 했을까 신기하기만 했다. 반터널같은 길을 지나 가파른 숲길을 통과하자 갑자기 시야가 넓어지고  오른쪽으로 깍아세운듯한 암벽능선이 보이기 시작했다. 디쿠르포카리에 접근하자 이 암벽 능선은 우리의 시야를 압도하는데  '스와르가 드와르'(혹은 paungda Danda)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빙하의 침식이 만든 무려 1500m 높이의 바위 한개로 이루어진 절벽으로  여기 사는 티벳사람들은 자신이 죽으면 그 바위산을 넘어 고향 티벳으로 돌아간다고 믿는다고 했다.

 

 

Dhukure Pokhari를 지나면 이날 하루의 휴식이 기다리고 있는 Pisang이지만 피상은 마르샹디 계곡을 따라 형성된 Low Pisang과 마르상디 계곡을 벗어나 북쪽 산자락에 자리잡고 있는 Upper Pisang으로 나누어져 있고, 이번에는 Upper Pisang을 택해 길을 잡았다. Dhukure Pokhari를 왼편으로 끼고 돌아, 멋진 나무다리를 밟고 마르샹디를 건너 완만한 언덕길을 잡아 3km쯤 걸었다. 

 

 

Pisang 마을을 들어서자 가파른  골목길을 타고올라 마을의 제일 높은 위치에 자리잡은 롯지에 짐을 풀었다. 빨래를 들고 데크에 나가서니 시야가 너무나 시원했다.  마르샹디 계곡아래 Low Pisang을 내려다 보고, 고개를 들어 안나푸르나 2봉을 비롯한 산군들을 바라다 보다가, 다시 눈을 돌려 '스와르가 드와르'넘어 지나온 길을 더듬었다. 그리고 오른쪽을 눈을 돌리니 우리가 넘어야할 쏘롱라로 이어지는 가는 길들이 헌준한 산들 사이에 실가락 처럼 사라졌다. 

 

 

숙소를 나와 마을 꼭대기에 있는 불교 사원에서 남은 오후 시간을 보냈다. Gompa의 역사는 알수 없었지만 마을 사람들이 기부해서 만든 절이라고 했다. 사찰내 건물의 대부분은 새로 지어진 듯 했고 오래된 절이 갖는 멋은 없어 보였다. 그래도 우리는 본전에 들어가 모두 부처앞에 절을 올렸다. 우리의 가이드 바수와 나브라즈는 흰두교 신자지만 부처와 시바가 다르지 않다고 했다. 나는 무신론자지만 그 순간에는 여기 터잡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신을 존중하고 싶었다. 그리고 십몇년을 같이 살다 네팔로 떠나오기 직전 생을 마친 우리집 강아지 초롱이의 명복을 빌었다. 롯지로 돌아와 전망 좋은 다이닝 룸에서 해지는 안나푸르나의 멋에 취해 밤을 맞았다.

 

 

하루에 600m를 높여 고도 3300m인 Upper Pisang에서 아주 가벼운 고산증이 왔다. 조금의 불면과 가슴두근거림 정도라서 걱정스러울 정도는 아니었지만 아직 갈 길이 머니 내 몸 상태의 변화에 대해 세심한 관찰이 필요해 보였다.  피상을 벗어나 수평에 가까운 길은 마르샹디의 흐름과 같이 하면서 한시간 쯤 걸은 뒤 출렁다리를 건너자 마자 길은 갑자기 가파른 상승길로 바뀌었다. 단 한번의 내리막이나 평지도 없이 가파른 오르막길은 끝없이 이어졌다. 거의 심리적 육체적 한계치에 도달할 즈음 작은 Tea House가 나왔고 우리는 갸루 입구에 도착을 했다.

 

 

우리는 잠시 차를 나누며 숨을 고른뒤 애매한 점심시간때문에 고민하다가 좀 더 걷기로 하고 출발 했다. 하지만 마을을 관통하는 골목길을 벗어나자 마자 우리는 발길을 돌려 되돌아왔다. 다음 마을까지 거리도 멀고 혹시 문을 연 식당이 없을 수도 있다는 가이드의 조언을 받아들여  엿다. 사람의 온기가 식어 한산하고 쓸쓸한 마을로 돌아왔지만 문을 연 식당을 찾을 수 없었다. 여행안내서에는 이곳 주민들이 주로 야크를 키우고 곡물을 재배하면서 오래 전에 획득한 무역영업권을가지고 여전히 무역업에 종사한다는 설명을 읽었지만 눈으로 확인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마을 입구에 들어섰을 때 우리를 붙잡던 식당으로 돌아가니 놓친 손님을 다시 받게된 사우니가 반갑게 우리를 맞았다.

 

 

뚝바를 시키고 사우니가 밀가루 반죽을 미는 동안 나브라즈는 사우니를 통해들은 마을 사정을 전했다. 갸루에는 7명의 아이가 있는데 그중 3명이 카트만두 유학중이고 이 마을도 점점 사람이 줄어 마을이 비어가고 있다고 했다. 네팔 역시 저개발상태를 벗어나기 위해 도시화를 할 수밖에 없다고 보면 산간에 형성된 갸루같은 외진 마을이 사라져가는 현상도 피해갈 수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사람도 나고 죽듯 마을 역시도 생겨나고 소멸하는 순환과정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이 당연한데도 이 마을에 사람이 줄고 있고 머지않아 마을 자체가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가슴이 아팠다.

 

 

갸루에서 나왈까지도 메마른 산자락을 따라 길이 이어졌다. 계절 탓도 있겠지만 주변의 숲은 빈약했고, 자갈 투성이 흙은 푸석거렸고, 키작은 식물들은 거친땅에 뿌리를 내리고 겨우 연명하는듯 애초로웠다. 그래도 어퍼피상 트렉을 선택하고 가파른 오르막을 올라 갸루를 지나고 다시 수평의 길을 따라 나왈까지 가는 길은 탁월한 조망을 우리에게 선물했다. 갸루를 향해 한번도 쉬지 않고 600m의 고도를 올리 때는 후회가 컸지만, 막상 갸루 이후 수평의 길을 걸으며 안나푸르나 2봉, 피상 피크, 그리고 안나푸르나 4봉을 손에 닿은듯 가까이서 마주하면서는 우리의 선택이 자랑스러웠다.  갸루를 출발한지 2시간이 안되어 멀리 나왈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왈 역시도 주변의 산과 언덕, 밭과 초지를 닮아 눈에 드러나지 않는 흙빛 마을이었다. 마을이 갸루 보다는 크고, 마을을 이루는 터전 역시 넓어 보였지만 사람의 발길이 드문 것은 전혀 차이가 없었다. 마을은 비어있는듯 조용하고 오고가는 사람의 흔적이 드물었다. 하루종일 주민을 만난 것은 손에 꼽을 만치 적었고 트레커는 단 한명도 만나지 못했다. 순전히 계절탓만은 아닌 것 같았다. 우리를 따르던 깔리도 어느 순간 사라졌다. 기회가 되면 고기를 듬뿍 넣은 볶은밥이라도 한그릇 시켜줄려고 마음 먹고 있었는데 우리의 행동이 너무 굼떴다. 더이상 기다리지 못한 깔리는 다른 인심좋은 트레커를 따라 자신의 길을 간것이 틀림없었다. 나왈의 밤은 깊고 편안했다.

 

 

 

  

반응형
반응형

1월31일 아침 Tal을 출발 카르테지나 다라파니에서 점심을 먹고 바가르찹지나 다나큐에서 길을 멈추고, 2월1일 다나큐를 출발 티망지나 탄촉에서 점심을 먹고 고토지나 차메에서 하루 일정을 마무리 했다. 



딸을 출발해 마르상디의 동쪽 강변길을 걷다가 출렁다리를 넘어 서쪽 찻길로 접어들었다. 얼마를 걷다가 다시 동쪽으로 강을 건너고 마을이 보이는 데서 서쪽으로 강을 넘어오니 카르테다. 역시  걷는 길은  옛길이 좋다. 그 길을 걸은 사람과 동물의 발자욱이 보이고, 흘린 땀내가 맡아지고, 사연 깊은 이야기가 들려 오기 때문이다. 산과 강이 만나 위태롭지만 아름다운 강과 산과 하늘빛이 조화로운 카르테를 지나 이른 점심 무렵 다라파니에 도착했다. 다라파니는 마나슬루산군과 안나푸르나 라운드코스가 갈라지는 분기점에 자리잡은 마을이다. 동쪽 계곡으로 들어가서 마나슬루 산군으로 갈까, 가던 길을 이어 서쪽으로 계속가서 쏘롱라까지 올라갈까 마음이 흔들리는 마을 다라파니에서 점심을 먹었다. 



딸 지나 다라파니까지도 그랬지만 다라파니 지나  다나큐까지 이어지는 길도 평탄했다. 중간의 바가르찹은 오래전 산사태로 롯지들이 매몰되는 사고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었지만 눈으로 보기에는 흔적을 느낄 수 없었다. 하루 종일 강을 따라 편안한 길만 걸다보니 동네 뒷산 산책 나온 듯 마음이 가벼웠다. 고산증을 느끼거나 추위를 걱정할 만치 높은 고도도 아니고, 그렇다고 너무 더워 걷기에 불편하게 낮은 고도도 아닌데다가 가파르고 험한 길도 없었다. 앞으로 하루하루 고도가 높아지고 길은 험해지고 추위와 고산증의 위험이 커지겠지만 아직까지는 실감이 나지 않아다. 



하루 밤을 쉬어갈 다나큐가 다가오자 하늘은 잔뜩 찌푸렸고 끝내  진눈깨비를 뿌렸다. 진눈깨비를 맞으며 Hotel Peacefull & Restaurant를 들어섰다. 룸에 배낭을 내려놓자마자 한기를 느끼고 다이닝 룸을 찾아 난로를 부탁했다. 네팔에서 아직까지 훨훨 타는 난로를 본적이 없었고 이 롯지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부족한 연료로 지핀 알뜰한 작은 불씨 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따뜻했다. 난로가로 모여든 중국인 커플과 우리 일행은 덜마른 빨래를 말리고, 지도를 살펴 내일의 일정을 체크하고, 난로가 전해주는 온기에 기대어 여행이 주는 행복에 취했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얼마되지 않아 계곡에 어둠이 깔리고 빗소리가 굵어졌다. 그때 갑자기 한무리의 네팔리가 조용하던 다이닝룸을 들이 닥치고  씨끌벅쩍해지면서 우리의 안식은 끝이 났다. 



룸으로 돌아와 침낭에 들어가니 자기에는 너무 이른 시간이었다. 지루한 저녁 시간을 줄이려 모처럼 책을 들었다. 혹시하면서 굳이 배낭에 넣어 온 덕분에 참 오랜만에 니이체를 읽었다. 하지만 글은 눈에 들어오지 않고 그냥 가슴만 울릉거렸다.  내 젊은 날의 꿈들이 꿈틀거리며 되살아났다. 인식에 내 삶을 온전히 받치겠다는 호기는 간데없고 생활의 노예가 되어 힘겹게 견뎌온 나의 삶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과잉 자의식과 무기력 말고는 달리 규정할 수 없는 나의 지난 세월이 이제는 후회하기에도 너무 늦었건지도 몰랐다. 남은 나의 인생을 잘 살자는 다짐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사실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남은 한가지는 그냥 있는 그대로의 내 삶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고 그런 태도가 나이가 주는 지혜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 덕분에 단잠이 들었다.



2월 1일 아침 다나큐의 Hotel Peacefull & Restaurant 을 나오니 밤새 내리던 비는 거치고 말쑥한 하늘이 우리를 맞았다. 마을을 벗어난뒤 얼마지나지 않아 가파른 숲길을 만났다. 다나큐에서 티망까지 무려 700m의 고도를 1시간 남짓만에 올려야 하니 모처럼 숨이 차고 땀이 났다. 몇구비의 비탈진 산길을 올라 시야가 시원하게 터이는 마을에 도착하니 티망이었다. 티망에서 서쪽으로 눈을 돌리니 마나슬루봉이 손에 닿일듯 바짝 다가와 있었다. 어제 내린 진눈깨비가 고도 덕분에 티망에서는 눈이되어 쌓여있고 동네 아이들이 눈썰매를 타느라 정신이 없었다. 아이들 노는 모습을 사진에 담다가 사진만으로 당이 차지 않아 어른들도 나섰다. 아이들에게 부탁해서 썰매를 빌려 바수와 라마나쉬 그리고 우리도 잠시잠깐이나마 동심으로 돌아갔다.



티망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뒤 다음 목적지인 탄촉을 향했다. 고도 3, 000m인 티망에서 탄촉까지는 300m의 고도를 내려야 하는 완만한 내리막 숲길이 이어졌다.  탄촉 직전  Evergreen Hotel & Restaurant의 눈쌓인 야외에서 따뜻한 햇살을 받으며 점심을 먹고 지난 한달간 나의 머리와 얼굴을 지켜주던 모자를 남겨두고 길을 나섰다. 계곡으로 내려가 다시 오르막을 타고 산사태로 무너져 조금은 위험해 보이는 길을 통해 마을로 들어섰다. 어떤 마을은 지나고 나서야 더 머물렀어야 했다는 미련이 남곤했는데  탄촉 마을이 꼭 그랬다. 딸이나 차메는 트레커가 붐비고 트레커를 위해 만들어진 마을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면 탄촉은 그와 반대였다.  탄촉은 주민에게는 트레커가 낯설고, 트레커에게는 주민을 마주치기가 어색한 전통적인 산간 마을로 다가왔다.  



야외에서 눈을  밟으며 점심을 먹고 출발한뒤 한시간여만에  Naar -Fu 계곡과 마르샹디강이 만나는 koto 를 지나고 오후 3시 30분에 마낭주의 수도 차메에 도착했다. 지금까지 가이드에게 숙소 선택을 거의 맡기다 싶이 해 왔는데 이날만은 우리가 롯지를 정했다. 한국에서 오랜동안 일을 해서 한국어에 능통하고 한국인의 식성과 문화를 전적으로 이해하는 사우니(여주인)가 운영하는 Potala Guest House에 짐을 풀었다. 



모처럼 한국어에 능통한 사우니를 만나니 묻고 싶은 것도 많았고 말하고 싶은 것도 많았다. 롯지의 여주인은 서울 근처 도시에서 오랜동안 일을 하다가 이명박정권 때 불법체류 노동자로 적발되어 추방당했고 지금도 한국가서 일하고싶다는 뜻을 내비췄다. 우리에게는 무척이나 친절했고 한국식 수제비를 맜있는 깍두기와 함께 내어 놓아 우리를 기쁘게 해주셨다. 안나푸르나 라운드 중에 어쨌던 한식을 먹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못했는데 배가 작아서 아쉬웠다. 



나에게 차메는 본격적인 산으로 들어가는 입구같은 마을로 느껴졌다. 차메 다음 코스인 피상만해도 해발 3300m나 되니 술과 담배를 자유롭게 할 수 있는 마지막 마을이 차메인 셈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차메에 도착하면 똥바라도 한잔하고 쏘롱라를 넘을 때 까지는 술과 담배를 절제하기로 마음먹었다. 첫 라운드 때는 그래도 나름 절제를 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이번에는 그렇지 못했다. 해발 3500m인 마낭에서 마지막 술을 마시고 해발 5400m인 쏘롱라를 넘을 때까지 담배를 계속 피워댔다.  



포탈라롯지는 밤새 정전이 되었다. 정전된 방에 일찍 올라가기도 그렇고 무엇보다 난로가 있는 다이닝 룸을 떠나기 싫어 밍거적 거렸다. 그나마 다이닝 룸은 충전지를 이용해 켜진 여린 전등이 있었다. 심한 고산증으로 쏘롱라를 넘지 못하고 하산한 캐나다 청년과 쏘롱라를 향해 우리와 같이 올라가야할 씩씩한 스페인 청년 그리고 영어에 젬병인 우리 일행이 난로를 사이에 두고 어색한 대화를 나누었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네팔 트레킹 때는 늘 밤이 길다. 이번에도 그랬다. 내가 트레킹을 할 수 있는 계절이 꼭 겨울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산이 높고 계곡이 깊어서 그렇기도할 것이지만 아마도 잦은 정전도 한몫을 하는 것 같다. 밤은 긴데 책을 보기에는 눈이 시리고, TV나 PC도 없고 폰도 와이파이가 불안전하니 마땅히 할짓이 하나도 없다. 영어가 짧으니 대화상대를  만나도 그냥 간단한 인사이상으로 대화를 이어나갈 수가 없다. 그러다보니 생각이 많아진다. 생각이 많아진다는 것은 좋게 말하며 자신에게 온전히 집중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할 것이다. 



정전마저 되어 일찍 침대에 들었지만 두 눈은 감기지 않고 의식은 말똥말똥 되살아나니  밀쳐둔 생각들이 구름처럼 밀려 왔다. 삶의 현장을 탈출해 보내게 된 두달의 네팔 망명(!)이 이후 나의 삶에 어떤 변화를 가져다 줄까, 아니면 그 자체 어떤 의미가 있을까는 의문이 일었다. 하지만 이번 여정을 통해 단지 쉬는 것 이상의 어떤 것을 바란다면 그것은 과욕이 분명한 것 같았다. 굳이 의미를 부여한다면 그냥 일상의 긴장 속에 굳은 의식의 근육을 풀수 있도록  내 자신에게 스스로 자유를 선물하는 것 정도가 전부가 아닐까 생각되었다. 하지만 단지 그 정도를 위해서 두달의 시간과 비용을 지불해도 좋은가는 물음에는 단호히 그렇다고 정리했다. 지금까지 나에게 여행보다 대단한 일상이 있어본 적이 없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 확실하므로!

반응형
반응형
1월 29일 아침 Upper Ngadibazar에서 출발하여, 바훈단다까지 오전에 걷고 Germu에서 1박을 한뒤, 1월 30일 옛 트레킹 코스 반대편 서쪽 강둑 절벽을 따라 돌을 깨고 만든 새길로 Tal까지 가서 1박을 했다.

 

우리는 Ngadi의 롯지에서 최악의 시설과 최고의 친절을 동시에 경험했다. 배갯머리에 쥐똥이 쌓이고 유리도 없는 창은 방 안밖의 구별을 불가능하게 했지만 모처럼 손님을 맞은 사우지 사우니는 연신 우리가 자신의 롯지를 찾아주어 너무 행복하다고 했다. 우리가 누군가를 행복하게 해줄수 있다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더할나위 없는 행복한 트레킹이 될 것을 예감하면서 라운드 둘째 날을 맞았다. 

 


점심을 먹은 바운단다까지의 길은 편안했다. 날씨는 온화했고 바람도 없고 맑고 투명했다. 그냥 숨을 쉬고 걷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행복에 겨워지는 그런 날이었다. 얼굴에 웃음기가 번지고 하루종일 걸어도 지칠 것 같지 않은 기분으로 도착한 바훈단다의 롯지는 평화로웠다. 바훈은 브라만을 뜻하고 단다는 언덕을 뜻한다니 바훈단다는 '브라만이 사는 언덕 마을'일 것이다. 여전히 작동하고 있는 카스트의 최상단 계층이 모여사는 마을은 다른 마을과 어떻게 다른지 모르겠지만 일단은 깨끗하고 잘 사는 동네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햇살 좋은 Hotel Superb View 정원에서 점심을 먹고 차를 마시고 그냥 그 자리에 눌러 앉고 싶기도했지만 마지못해 다시 배낭을 짊어지고 길을 나섰다. 못내 아쉬운 가이드는 그냥 여기서 하루를 쉬자고 제안했지만 하루를 마무리하기엔 걸은 길이 너무 짧았다. 


   


길을 걸으며 나는 5년전의 기억과 지금을 비교하고 기억의 흔적을 드덤고 달라진 것들을 확인했다. 5년전 있던 것이 없어지고 그 때 없던 것이 새로 생겨난 분명한 것이 있었다. 당나귀와 댐이 그것이다. 5년전 트래킹 내내 앞서거니 뒤서거니 같이 했던 그 많던 당나귀들이 보이질 않았다. 마르샹디강따라 찻길이 뚤리면서 그많은 당나귀와 노새들 그리고 목동들이 다 사라진 것 같았다. 당나귀와 노새대신 차와 기사가 더 많은 짐을 손쉽게 고산지대 마을로 나르게 되었으니 주민의 삶은 훨씬 덜 고달파졌을 것이다. 길을 걷는 내내 귀전에 울리던 방울소리가 귀국후에도 한참을 이명으로 남아 나를 몽환 속으로 이끌곤 했었는데 이제 나귀의 방울과 발자욱 소리 대신에 간혹 지나가는 차가 우리를 감짝 놀래키곤 했다. 변화는 바람직하고 피해갈 수 없는 것이긴 한데 그 많던 당나귀는 어디로 가고 그 목동은 운전기사가 되었을까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그전에 없던 것이 새로 생겨난 것은 바로 댐이었다. Upper Marsyandi 수력댐은 중국의 원조로 네팔의 전력난을 해소하는데 기여할 수력발전소라고 했다. 세계 2위의 수자원보유국이면서 수도 카트만두 조차 하루 몇시간밖에 전기가 들어오지 않던 시절은 벌써 옛이야기가 되었고 이번 여행중에는 기적같이 거의 정전이 없었다. 그것이 바로 이런 수력댐 덕분일진대 댐이 옛길을 삼키고 마을을 내쫏고 풍경을 변화시킨 것에 대해 마음 아파 할 수만은 없었다. 내 보기 좋자고 그들에게 불편을 감수하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아닌가? 그래도 입안엔 쓴맛이 남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중국 자본에 네팔이 휘둘리지 않기를, 네팔의 개발과 발전이 네팔의 자연의 아름다움을 집어 삼키지 않는 방향으로 나아가기를 빌며 댐을 피해 길을 걸었다. 



이른 오후에 게르무 레인보우 롯지에 도착했고 하루를 마무리하기로 했다. 아름다운 마르샹디 동쪽강둑위에 형성된 게르무 마을은 아름다웠고, 레인보우 롯지는 깨끗하고 운치있었다. 여유있는 오후시간을 빨래와 샤워, 그리고 편안한 휴식으로 보내고 지나온 길을 반추하며 이른 잠자리에 들었다.  행복의 절정에는 늘 그늘이 끼기 마련일까? 바훈단다를 지나며 문득 얼굴을 스쳐지나는 바람에 나의 청춘을 지배하던 불안을 환기했다. 수만갈래의 길이 앞에 놓여있던 시절 그 어느 길도 선택할수 없어 불안만이 나의 자의식을 확인시켜 주었었다. 헤어날 수 없었던 불안의 심연에서 나마 그 불안사이를 비집고 게으름을 만끽하던 나의 청춘은 감히 아름다웠다고 말 할수있을 것이다.  희미한 기억속을 비집고 정체를 드러낸 그 느낌이 온전히 나의 것이 된다면 내 나머지 삶은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여행은 지나간 나의 삶을 온전히 되돌려받는 축복이다.



게르무에서는 씼고 쉬고 잠도 잘 잤지만 포터 바순의 나쁜 술버릇이 드러났다. 전날 나디에서 술주정이 부끄러웠던지 바순은 내가 권한 락시까지 거절하며 쏘롱라패스후에 묵디나트에서나 같이 한잔하자며 패스전에는 '노소주'한다고 호언했다. 하지만 부억을 들락날락 거리던 바순은 호언한지 두시간도 안되어 술냄새를 풍기며 수다스러워졌다. 더 가관인 것은 알콜이상의 뭔가를 한 낌새를 느낄 수 있었다. 계속 실없이 웃고 떠들어 분위기가 불편해지기 전에 모두들 침실로 흩어졌지만 잠자리에 든 뒤에도 룸의 얇은 벽을 통해 한참을 동료 라마라쉬와 떠들어되는 라마의 취한 목소리를 들어야했다. 



가파른 강둑을 내려와 마르샹디강을 건너니 상계가 나오고 강의 서쪽 길을 걸어 Shrichaur의 Boomerang 롯지를 지났다. 시리사우르를 지나자 지그재그의 가파른 길을 한참 올라가니 강과 마을을 조망할 수 있는 지점에 도달했다.  Jagat 이후에는 강을 건너 티벳탄이 소금을 나르던 아름다운 산길을 당나귀와 한줄로 나란히 걸고 싶었다. 하지만 강의 서쪽으로 새로 찻길이 나면서 사람의 발길이 끊긴 구길은 관리가 안되는지 여기저기 산사태로 끊겨 있고 었다. 딸까지는 가파른 암벽 절벽을 깨서 만든 위태로운 돌길이 이어졌다. 발아래 천길 낭떨어지 아래 마르샹디 강이 흐르고 머리위 절벽은 돌이라도 굴러내리지 않을까 위태롭기까지 했다. 대신 소금을 나르던 티벳탄의 발길을 따라 걷던 옛길의 따뜻함은 줄었지만 가파른 절벽위를 가르는 길은 시원함을 넘어 아찔한 조망을 우리에게 선물했다. 


새로난 찻길이 우리를 딸까지 이끄는 동안 다행히 먼지를 일으키며 우리를 놀래키던 차를 몇대 만나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구길이 오르락내리락 사람을 지치게 했다면 새길은 구길보다 평탄하긴했어도 훨씬 더  길어진 것 같았다.  도저히 길을 만들 수 없어 보이던 절벽을 깨고 돌면서 길을 내다보니 길은 산 구비를 따라 멀리 돌기도하고 아예 마르샹디강이 보이지 않는 산넘어가지 이어지기도 했다. 역시 농가가 있고 아이들이 있고 집에서 키우는 염소가 있던 아기자기한 아름다움이 사라진 새길은 우리를 쉬 지치게 했다. 딸이 멀리 보이기 시작하면서부터 우리는 더 빨리 지쳐갔다. 손에 잡힐 듯 보이는 딸은 쉽게 다가오지 않았고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겨우 딸을 향해 가파른 언덕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카트만두의 숙소 마야거르츄를 출발할 때 파샹님으로부터 제안을 받은게 있었다.  어떤 트레커가 축구공과 학용품을 맡기면서 고산지대의 아이들에게 전달해주기를 부탁했다고 했다. 파샹님은 그 축구공과 학용품을 우리가 좀 전달해주면 안되겠냐고 했다. 사실 트레킹 짐을 싸면서는 가능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최소한의 짐만남기는 것이 철칙인데 예정에 없던 축구공 3개와 문구 한짐을 맡아 고산지대까지 지고 가기에는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그것을 마련해 주었던 분의 따뜻한 마음을 거역할 수 없어 각자의 배낭에 한개씩의 축구공과 문구를 나누어 지고 왔다.  딸이라고해봤자 고작 해발 1700여미터밖에 되지 않으니 아직 공을 나누어 줄 때가 되지 않았지만 이날 첨으로 예정에 없던 축구공 나눔을 해야했다. 

강변으로 내려오니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망치로 자갈을 깨고 있었다. 집을 짖거나 도로를 포장할 때 사용할 잔자갈을 직접 망치로 깨서 만들고 있는 것이라고했다. 눈과 코주변은 물론 온 몸을 돌먼지로  뽀얗게  뒤집어 쓴 아이들이 하얀 이를 드러내며 우리를 향해 나마스태를 외쳤다. 하루에 1달러전후의 저임금 아동노동이 극심하다는 네팔의 현장을 우리는 한가로운 트래커로 막딱뜨린 셈이었다. 값싼 동정심이라고 비난받을 지도 모르지만 순간 가슴이 너무 아려왔다. 그 아이들에게 무어라도 해주고 싶었고 나도 모르게 배낭을 열고 축구공을  꺼냈다. 한 아이를 불러 축구공을 주었다. 이 아저시가 왜 이러지 어리둥절하면서도 너무 좋아하던 그아이의 얼굴이 나의 마음에 새겨졌다. 그 아이의 마음에는 어떤 기억이 남겨질 모르지만 나는 그 아이의 얼굴을 통해 나의 유년을 느끼고 세상의 가난과 그 가난 속에서 삶의 온기를 지키는 아름다운 사람들의 사랑과 연대를 생각했다. 그 아이의 얼굴로 기억될 딸에서 하루의 길을 멈췄다. 


반응형
반응형

1월 27일 네팔 들어온지 한달이 지났고 새로운 한달을 안나푸르나 라운드로 시작하기 위해 길을 떠나기전 하루의 여유를 카트만두 여러 곳을 둘러보는 것으로 보냈다. 28일 버스로 베시사하르까지 가서 바로 걷기를 시작하여 불불레 지나 라디바자르에서 라운드 첫 밤을 지냈다.  


아침에 눈을 뜨니 비가 내리고 있었다. 건기에 내리는 비는 축복이라고 했다. 대기의 먼지가 씻기고 마야거르츄의 마당은 촉촉히 젖어들었다.  우리가 걸을 길들 역시 먼지가 가라앉고 적당히 젖어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니 기분이 좋아졌다.  내일이면 우리 부부는 M과 D와 함께 안나푸르나 라운드를 떠나고  미리 와있던 L은 귀국길에 오르니 모두가 같이 하는 이날 하루가 더없이 소중했다. 일행이 늘어 택시 한대로 움직일 수 있는 규모를 넘어서다보니 2대를 부탁했다. 파슈파티나트로 향했다. 



카트만두를 찾는 방문자들이 꼭 들러야 하는 곳 중의 하나가 Pashupatinath다. 파슈파티나트는 네팔에서 가장 유명한 힌두교 사원으로  멀리 인도서까지  순례자들이 찾아 오는 곳이라고 했지만 우리에게는 노천 화장의식을 하는 하는 곳으로 더 알려져 있다. 사원과 일체를 이루고 있는 화장장인 아라 갓(aarya ghat)은 파괴의 신인 시바신의 화신인 파슈파티(야수의 왕)에게 받쳐진 사원의 한 부분일 뿐이다. 핵심적인 사원내부만 비힌두교도에게 입장을 금지하고 있지만 거의 날것 그대로의 흰두 예식과 화장 의식을 접할수 있는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중의 하나다.

 

 

택시에서 내려 일행을 찾는 동안 가는 비가 보도를 적시고 있었다. 비둘기떼의 어지러운 날개짓과 비가 만나니 파슈파니나트의 풍경이 더 스산해졌다. 1인당 천루피의 입장료를 내고 사람들의 흐름에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몇걸음 걷지 않아 갑자기 군인들이 다가와 나의 걸음을 막아섰다. 아무 생각없이 힌두교도만 들어갈 수 있는 사원 입구로 향하다 군인으로부터 제지를 받은 것이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방향을 바꾸어 허용된 구역 안으로 들어서니 말라가는 바그마티강과 강변의 화장터가 눈에 들어왔다. 오직 하나의 화장터에서만 마지막 불꽃이 사그라들고 있었다. 오늘은 또 어떤 사연을 간직한 삶이 지상에서 그 삶의 마지막 흔적을 지우게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구구절절한 이야기를 듣지 않아도 한명의 삶이 가졌을 모든 순간들의 희열과 고통, 그리고 그의 마음을 채웠을 그리움과 공허가 물밀듯 다가왔다.  그리고 죽음을 바라다 보는 산사람들의 마음에 피어오를 만가닥 상념의 소용돌이가 느껴졌다. 



바그마티 강을 건너  시바신에게 받쳐졌다는 Pandra Shivalaya라는 탑들 사이를 걷고, 강가의 둥근 반석위에서  의식을 치루고 있는 사람들의 처진 어깨를 바라다 보다 가파른 계단을 올라 동산의 정상에 올랐다. 동산을 이루고 있는 므르가스탈리 숲을 가로지르는 길은 한치의 틈도 없이 사원과 탑들이 빼곡히 채워져 있었고, 탑들마다 시바신이 타기를 기다리는 Nandi의 궁둥이가 우리를 반겼다. 비맞은 원숭이가 추운듯 서로 엉켜 웅크렸지만 낯선 방문객을 마득잖은 눈으로 바라단 볼 때는 주인의 위엄이 느껴졌다. 하지만 비에 젖은 Prasad(신전에 받치는 음식)를 주워먹을 때의 눈빛은 혹시나 낯선 인간들에게 나의 몫을 뺏기지난 않을까는 초조함과 비루함을 담고 있었다.  삶은 존엄과 비천 사이에 두루 걸쳐 있는 것! 그점은 모든 생명에게도 해당할 것이기에 우리는 늘 겸손해야하는 지도 모르겠다. 



북동쪽으로 방향을 잡아 동산을 내려오니 시바의 아내 Parvati의 자궁이 묻힌 자리에 세워진  Shree Guhyeshwori Temple이 있었다.  이 사원은 불임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임신을 축원하는 유명한 사원이라고 했는데 지난 지진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공사가 한창이었다. 사원을 지나 바그마티 강을 건너니 한적한  주택가가 이어졌다. 그리 멀지 않은 거리라 6명의 일행은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었고 아무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얼마나 걸었을까? 대로를 벗어나 골목으로 접어든뒤 혹시라도 길이 어긋날까 일행을 기다렸는데 결국 와이프가 보이질 않았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고 길이 갈라지는 지점에서 다른 길을 택해 달려가 보았지만 하늘로 솟아는지 만날 수 없었다. 하지만 보드낫이라는 목적지를 공유하고 있으니 택시를 타도 되고 물어서 걸어 와도 그리 멀지 않은 곳이라 남은 일행 5명은 보드낫으로 향했다.


 

보드낫은  여전했다. 입구는 인파가 붐비고 앞길은 차들이 엉켜 복잡했다. 티벳 불교의 성지 답게 각지 에서 모여든 티벳탄 순례자들과 우리같은 방문자들로 북적였다. 옛날 한때는 티벳 라사와 카트만두를 오가는 무역상이 머룰던 타망족의 마을이었던 이 구역 일대는 이제 티벳이 중국에 복속된 뒤 망명한 피벳탄의 집단거주질 바뀌었다고 했다. 보드낫 안으로 들어서자 스튜파를 도는 티벳탄들의 무리를 따라 나도 모르게 휩쓸리며 내가 가진 세상에 대한 기원을 읊조리기 시작했다. 순례객이 스튜파를 도는 의식을 kora라고 하는데 언젠가 다큐에서 몸을 겨우 가누는 할머니가 오체 투지를 하며 kora를 하는 이유를 묻자 뭍 생명의 고통을 들기위해서라고 하던 인터뷰가 떠올랐다. 나도 내 자식의 성공이 아니라, 나의 부귀와 영화가 아니라 세상의 생명 가진 모든 존재의 안녕을 빌며 스튜파를 두어바퀴 돌았다. 그리고 스튜파를 감싸고 있는 건물의 전망좋은 레스토랑에 자리를 잡고 어렵게 와이파이를 연결해 길일흔 와이프와 접촉했다.

 


일찍 숙소롤 돌아와 내일이면 떠날 안나푸르나 라운드를 위해 짐을 쌌다. 빠진 것은 없는지, 빼도 될 짐은 없는지 꼼꼼히 살피고 20여일동안 입에 맞는 음식을 접하지 못할 것에 대비해 저녁을 삼겹살로 준비했다. 벌써 익숙해진 가까운 골목길 구멍가게에서 식재료를 사서 밥을 하고 고기를 구웠다.  마야거르츄의 팟샹은 어떻게 구했는지 냉동 삼겹살을 조달해 주었고 다른 일행과도 같이 음식을 나누고도 고기가 남았다.  모처럼 속이 편안했고, 마음 편히 식사를 하고 나니 라운드 내내 계속 속이 안좋으면 어쩌지 하는 걱정이 사라졌다. 역시 나는 산 체질이라 산을 가기 전날부터 몸이 살아난다고 너스레를 떨며 침실로 돌아왔다. 



안나푸르나 라운드를 떠나는 날 아침이 밝었다. 지난 일주일 같이 했던 L은 한국으로 돌아가고 남은 4명은 같이 안나푸르나로 떠나는 날  마야거르추의 아침은 일찍 시작됐다. 6시 30분 L과 아쉬운 작별을 하고 앞으로 20여일의 여정을 같이할 2명의 포터 라마나쉬와 Basu 그리고 4명의 트레커가 2대의 택시를 타고 겅거부 뉴버스파크로  향했다. 도착한 겅거부는 5년전의 남루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언제 들어섰는지 번듯한 건물과 넓은 버스 승강장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곧 출발한 버스는 역시 시원하게 뚤린 RING ROAD를 따라 칸트만두를 벗어나기 위해 달리기 시작했다. 길은 달라졌지만 수시로 서고 가기를 반복하면서 문을 연채로 위태롭게 매달린 조수가 호객을 하는 모습은 달라진 것이 없었다. 버스는 거의 1시간 반 만에 카트만두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포카라를 가는 프리씨비 하이웨이를 둠레까지 달려 둠레에서 북쪽으로 방향을 잡은 버스의 시야에 설산들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가슴뛰는 설산의 풍경을 배경으로 그 아래 산중턱에 터잡아 살아가는 삶이 도드라지게 다가왔다. 오후 1시 30분이 넘어 안나푸르나가 시작하는 마을 베시사하르에 도착했다. 오래전 유일한 출발지 였던 베시사하르는 불불레까지 길이 나면서 트레커의 외면을 받기 시작했고, 다시 참체까지 길이나고 결국 마낭까지 길이 나면서 트레킹 출발점의 면모를 잃어버렸다고했다. 버스를 내린 우리는 이때까지 트레킹 출발점을 정하지 못했고 라마라쉬가 차를 구하러 사라진 뒤에 길가 식당에서 요기를 했다. 시간에 맞춰 출발하는 버스를 구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우리는 차를 타고 불불레까지 가서 걷기를 시작했던 지난 여정과는 달리 이번에는 베시사하르부터 바로 걷기를 작정했다. 



베시사하르를 출발해서 불불레 까지 가는 길은 편안했다. 마르샹디강을 따라 형성된 길을 걷고 민가를 만나니 아직 우리의 걸음은 산에 들어가지 못했고 하루종일 마을길로 이어졌다. 길도 단순했고 멀리 설산이 우리의 목적지를 안내하니 그냥 멀리 설산을 보고 걷고 또 걸었다. 불불레가 얼마 남지 않은 길을 지나자 마을 잔치가 한창인 것 같았다. Basu에게 물어보니 이날이 구릉족에게는 '로사르'라고 하는 설날이고 이웃의 친인척이 함께 모여 음식을 나누고 춤과 노래로 하루를 보낸다고 했다. 산업화의 댓가로 우리에겐 사라진 옛풍습을 낯선 안나푸르나 기슭에서  목격하게 되니 마음이 따듯해져 왔다. 흐뭇하게 바라다 보는 우리를 보고 춤 삼매경에 빠진 남성분이 손짓을 하며 우리에게 같이 할 것을 권했지만 오늘 가야만될 거리도 있고 실례도 될 것 같아 그냥 합장으로 인사하고 가던 길을 걸었다.



오늘 쉬었으면 하던 마을인 불불레를 도착했다. 지난 5년간 불불레는 강건너 동쪽 마을에도 찻길이 생기고 강과 롯지는 길로 갈라섰다. 집과 강과 마을이 한데 엉커 조화롭던 풍경은 사라지고 조금은 삭막하고 어설픈 불불레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어다,. 오랫만에 만난 친구가 너무 변해 있어 왠지 서먹한 그런 기분이 들었다.  바수와 라마나쉬는그리 멀지 않은 곳에 숙소가 있다며  우리가 계속 걷기를 권했다. 트레킹 첫날은 무리하지 않고 몸을 푸는 정도만 걸고 불불레에서 묵을 예정이었지만 잠깐의 망설임끝에 Upper Nadibazar 까지 걷게되었다. 우리는 지쳤고 해가 떨어져갈 무렵 5시 반이 넘어서야 낡고 허름한 롯지에 도착했다. 하지만 롯지는 마음에 들지 않았고, 첫 숙소 선정부터 가이드에게 속은 느낌이 들었다. 



불불레 지나면서 언제부턴가 우리의 포터들과 동행을 하게된 어떤 사람이 있었는데 그 분이 바로 이 롯지의 주인이었다. 나는 와이파이와 온수가 되는 롯지를 원했지만 가이드는 곤혹스런 표정이 역력했다. 아마도 롯지 주인의 호객에 넘어가 여기까지 무리해서 왔는데 우리는 불만스러워 보였고, 그렇다고 다른 롯지를 찾아 나설려니 해는 떨어지고 이 롯지 주인에게 미안하기도 해 곤란해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내일 부터는 숙소 결정에 좀더 관여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라운드 첫 숙소인 Upper Nadhibazar의 Annapurna Garden Restaurant & Guesthouse라는 이름의 남루한 롯지에 짐을 풀었다.

 


롯지 건물은 시설이라고 할 것도 없을 정도로 양철과 폐목재로 지어 비와 바람을 가리는 수준이었다. 녹슬고 구겨진 양철로 얼기설기 꾸린 움막수준의 건물은 그렇다고 해도 눕기에도 겁이 나는  곰팡내 나는 침대는 사실 받아들이기 불편했다. 그래도 그물망 창으로 들어오는 차가운 밤바람은 막아야할 것 같아 특별히 주인게게 부탁해 받은 얇고 작은 천을 스카치 테이프로 발라 잠자리를 갖추었다. 다이닝 룸에서 주문한 식사를 받았는데 역시 손님이 거의 없는 시즌이니 식재료가 잘 갖춰줘 있을 리가 없고 음식은 초라했다. 



하지만 이 모든 악조건에도 주인 내외의 친절은 우리의 마음을 풀어주기에 충분했다. "당신들을 우리 집에 모실 수 있어 너무나 행복합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찌그렸던 인상을 펼 수밖에 없었고, 아무런 불편함도 없고 만족스럽다는 표정으로 인사를 건넬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말뿐이 아니고 시설이나 물질로는 할 수 없는 띠뜻한 마음으로 우리를 대했다. 준비한 식사가 맛이 없지는 않은지를 묻고, 빈 접시를 채워주고 그리고 식사가 거의 끝나가자 온기가 있는 부억으로 우리를 초대했다.  젊어서 요리사로 바같 세계를 떠돌았다는 낯선 네팔리 한분을 포함해 모두가 모닥불을 중심으로 옹기종기 둘러 앉아 라운드의 첫 저녁을 맞았다. 



나디에서의 낭만적인 모닥불 파티는 일찍 끝났다. 자리를 같이했던 롯지 주인과의 관계는 알 수 없었던 네팔리는 우리에게 친절하고 우호적이었다. 미국에서 피자가게에서 일을했다며 우리 곁을 떠나지 않고 잘 알아듣지도 못하는 우리를 붙들고 끝임없이 영어를 늘어놓았다. 그는 마리화나를 하고 우리에게 권하기도 했다. 분위기에 젖은 바수는 락시를 들이키고 어느 순간 수다스러워졌다. 마리화나에 취한 네팔리와 술에 취한 바수가 자리의 분위기를 일찍 흐려놓는 바람에 다뜻한 모닥불의 아까운 불씨를 포기하고 침실로 흩어졌다. 

반응형
반응형
 

트레킹을 떠나온 뒤 가장 잘 잤다. 한번을 침대에서 떨어지고 새벽3시에 깰 때까지 뭔가 조금은 불안하고 종잡을 수 없는 꿈속을 헤맸다. 잠도 깊고 꿈도 깊어 눈을 뜨니 갑자기 방안이 낯설고 여기가 어딘지 깨닫기에는 조금의 시간이 걸렸다. 집 나온 지 2주가 다 되어 가는데 아직 시차 적응이 안 되는 건지 아니면 고도 탓인지 늘 새벽 일찍 눈이 떠진다. 시차나 고도 탓이 아니라 저녁시간에 마땅히 할 거리를 못 찾아 초저녁에 잠이 들어서인지도 모르겠다. 저녁을 먹고 룸으로 돌아오면 추위 때문에 바로 침낭에 들어갈 수밖에 없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경우도 있었지만 들어와도 약한 조명 때문에 헤드라이트에 의지해 책이라도 보고 일기라도 적다 보면 쉬 눈도 피곤해 지고 졸리워 진다. 그러니 초저녁에 잠에 골아 떨어지고 꼭 새벽 3시면 잠이 깬다. 그때부터 이리 뒤척 저리 뒤척이면서 창이 밝아 오기를 기다린다.


하루 종일 걸을 때는 사실 아무 생각이 없다. 그냥 걷는다. 그리고 생각은 꼭 이렇게 이른 새벽에 침낭 속에서만 하는 것 같다. 어제 하루 어떤 길을 걷고, 어떤 사람들을 만나고, 어떤 풍경 속에서 보냈는지 되짚어 보고 오늘 보낼 하루의 여정을 머리 속에 그려본다. 오늘은 마르샹디강 서편을 따라 Nayagon까지 간다. 시간은 남을 것 같은데 Nayagon을 지나 Khudi까지 가기에는 너무 멀고 그 사이에는 묵을 수 있는 롯지가 없다. 그리고 내일 베시사하르를 거쳐 포카라로 간다.



창문에 엹은 새벽 빛이 비치기 시작하고 조랑말 방울소리가 은은히 들려온다. 무거운 짐을 지고 힘든 길을 올라가기 위해 새벽부터 부산을 떠는 조랑말의 울음소리가 새벽 안개를 타고 번져왔다. 조랑말 소리가 꿈과 현실의 경계에 나의 의식을 한참 붙들어 놓는다. 더 이상 침낭 속에 머물 수 없을 만치 창이 밝아오고 나서야 침대를 내려섰다.


참 오랜만에 핫 샤워를 하고, 푹 잠을 잔 덕분에 출발하는 몸이 가벼웠다. 그래도 여정에 지침 몸, 오르막이 나오면 호흡이 가쁘고 힘겹긴 마찬가지였고, 다시 내리막이 나오면 고장 난 오른쪽 4번째 발가락이 쑤시고 아팠다. 그래도 고개를 들면 흰 눈을 지고 있는 아득한 산허리에 수백 겹으로 첩첩이 쌓인 5평 다락 논 산자락이 눈에 들어오고, 산꼭대기 언덕 위에 옹기종기 부락을 이루고 살아 온 네팔리의 삶의 무게가 가슴에 다가왔다. 여행자의 몸으로 안나푸르나 산허리를 주유하는 나의 삶은 얼마나 사치스럽고, 그에 반해 저들이 지고 사는 삶의 무게는 얼마나 무거운가! 하지만 그 무거운 삶을 짊어지고 살아가는 네팔리의 터전인 안나푸르나는 또 얼마나 깊고 숭고한지 한발한발 내딛는 발걸음마다 되새겼다.


딸에서 참체까지는 순탄한 내리막길이 이어졌다. 온화한 햇살 속을 마르샹디 계곡을 따라 걸으며, 간혹 상행하는 트레커와 나마스테!’를 주고 받았다. 트레커들과 네팔리들이 겨울을 견딜 양식과 생필품을 싣은 조랑말 대열과 조우했고, 강 건너 너럭바위 위에서 놀고 있는 원숭이들과 알아듣지 못하는 인사를 나눴다. 식생은 바뀌어 바나나 같은 열대 과일들이 눈에 들어오고 강물은 점점 푸르러갔다. 눈이 끝나는 길부터는 먼지가 일기 시작했고, 길은 조랑말 똥으로 덮혀 있었다. 하지만 조랑말 똥과 먼지는 거슬리지 않았고 우리의 발걸음은 탄력이 붙기 시작할 때쯤 참체에 도착했다.


 

상행 때 점심을 먹었던 롯지에서 블랙티를 한잔하고 있는데 위에서 만났거나 같은 롯지에서 머물렀던 트레커들이 하나둘 몰려왔다. 3명의 독일인 그룹과 단독 트레킹에 나선 호주인 그리고 한국인 청년이 마을로 들어섰다. 독일인 그룹은 차를 타지 않고 베시사하르까지 끝까지 걸어갈 태세였고, 호주인은 불불레에서 상행할 때 마르샹디 동편의 구 코스를 걸었는데 그 길이 너무 이상에 남아 다시 그 길로 걸어서 불불레까지 갈 예정이라고 했다. 이틀 전 차메에서 같이 출발했던 한국 학생들은 차가 들어올 수 있는 첫 마을인 참체에서 짚을 타고 떠나 베시사하르까지 가서 다시 로컬버스를 타고 오늘 포카라에 입성할 거란다. 서로의 행운을 빌며 학생들을 싣은 차는 출발했고 우리는 학생들이 짚을 타고 지난 길을 걸으며, 이제 평생 다시 못올 것 같은 마르샹디강을 눈이 시리도록 보고 또 보며 걸었다. 참체에서 자가트까지 1시간, 자가트에서 다시 상계까지 1시간을 더 걸었다.


자가트에서 점심을 먹었다. 달밧! 파샹은 거의 매끼를 달밧만 먹었다. 물론 아침은 누들 수프 같은 간단한 메뉴를 선택했지만 점심과 저녁의 꼭 달밧이다. 달밧은 밥과 콩국, 커리와 나물 한가지로 이루어진 네팔리의 가장 보편적인 식단인 것 같았다. 콩국은 식당마다 한국의 메주콩을 재료로 하는 집이 있고, 또 팥이나 녹두 같은걸 재료로 하는 집이 있는 정도의 차이가 있었다. 커리는 감자, 야채 등의 재료의 변화에 따라 조금의 차이가 있었는데 가장 변화가 많은 것이 바로 나물이었다. 고도가 높지 않은 마을에서는 식사를 주문받고 나서 밥을 안치고, 밥이 되는 사이 텃밭에서 한국의 유채같은 것을 뜯어와 삶아서 나물을 무쳐내었다. 나물거리가 없는 곳에서는 한국의 김치와 거의 유사한 "achar"라고 불리는 저장 음식을 내어놓는다. 무우말래이나 당근, 혹은 고추같을 걸 주재료로해서 숙성시킨 아자르를 우리부부는 '네팔 김치' 라고 불렀고, 파샹은 '피클'이라고 했다. 상행길에 딸에서 맛을 본 뒤, 묵는 롯지마다 달밧을 시키면 꼭 아자르가 있는지 물어본다. 나중에는 투명 용기에 담긴 아자르가 식당 구석이나 찬장에 있는지 살피게 되었고, 훅시라도 발견하게 되면 '저게 무어냐' ' 곡 한국 김치같다' '맛좀 볼 수 있느냐'고 물었다. 한번 두번 얻어 먹고나서는 달밧에 아자르 대신 야채나물이 나와도 꼭 아자르를 추가로 얻어 먹었다. 오늘도 자가트에서 달밧에 따라 나온 갓 뜯어온 싱싱한 나물무침에 아자르까지 푸짐하게 먹고 나서 롯지를 나섰다.



상행길에 묵었던 시리사우르를 지나자 맑았던 하늘에 짙은 구름이 몰려들고 이내 한방울 두방울 비를 떨어트렸다. 파샹은 지난 이틀간의 강행군에 지쳤는지 'Hard Walking! Hard Today!"를 연신 외치며 차를 타고 싶은 눈치다. 상계에서 차를 타면 오늘 중으로 베시사하르에 도착하고 내일 점심을 포카라에서 먹을 수 있다며 계속 유혹한다. 사실 우리도 무리한 하산으로 지쳐 있는 상황에서 파샹의 유혹을 물리치기 어려웠다. 하지만 참체에서는 1인당 1200루피나 하는 차비도 만만치 않았고, 또 특별히 차를 타야 할 이유도 없어 차의 유혹을 뿌리칠 수 있었다. 사실 깍아 지른 절벽 위로 이어지는 좁고 가파르고 파이고 거친 노면의 길을 브레이크도 핸들도 기어도 믿을 수 없는 차를 타고 싶지가 않았다. 걷기 위해 온 여정을 줄이기 위해 그 모든 위험을 감수하고 굳이 차를 탈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참체에서 외면했던 차를 상계에 이르러 결국 탈 수 밖에 없었다. 마침 상계에 이르자 빗방울이 굵어지고 출발 직전의 짚 차까지 대기하고 있었다. 어쩔 도리 없이 짚에 올랐다.


상계에서 짚을 타고 불불레까지 1시간 40여분동안 죽음의 도로를 달렸다. 길을 막는 염소떼들, 잘 키운 수박 통만한 돌들이 나뒹굴고 도저히 차가 다닐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길을 짚은 잘도 달렸다. 길은 좁고 왼편은 마르샹디 강이 흐르는 깍아 지른 절벽이었지만 상행인 차와 절묘하게 교행했다. 상행 때에 강 건너편에서 절벽 위에 걸쳐있는 실낱 같은 길을 보면서 무서워서 저 길을 어떻게 차가 다니겠냐고 했던 기억이 났다. 하지만 네팔리들에게 이런 도로를 차를 타고 달리는 일은 일상적인 것이 보명해 보였다. 파샹에게 깍아지른 절벽을 가리키며 '무섭지 않냐'고 물어보자 전혀 무섭지 않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하지만 젊은 운전기사는 초긴장한 모습으로 두 눈을 번들거리며 너무나 진지하게 운전을 했다. 한번씩 핸드폰을 받는 것 말고는 최선을 다하는 것 같은 기사의 운전 실력에 기대어 차를 탄지 2시간반만에 살아서 불불레에 도착했다.


불불레에 도착하자
Check Point에 들르기 위해 나 혼자 짚에서 내렸다. 팀스카드에 확인 도장을 찍고 나니 이제 안나푸르나 라운드는 미완으로나마 종결되었다는 사실이 실감났다. 오로지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불불레서 부터 베시사하르까지는 상행 때 고물 로컬 버스를 타고 달려 온 길이다. 베시사하르에서 불불레까지 들어올 때는 이 길 역시 그렇게 무서웠었는데 이제 다시 같은 길을 따라 짚을 타고 달리는 데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상계에서 불불레까지의 길이 워낙 거칠고 위험하다보니 불불레에서 베시사하르까지의 길은 안락하다 못해 졸립기까지 했다.


오후 5시에 아침에 세운 계획보다 하루 빨리 베시사하르에 접어들었다. 차가 시내에 들어오자 마자 기사는 운전대를 놓았고 다른 사람이 차에 올라 운전을 하기 시작했다. 왜냐고 묻자 파샹은 운전기사가 너무 지쳐 다른 기사에게 운전대를 넘긴 것이란다. 사실 그 거친 길을 초긴장한 상태로 상하행 다 운전을 하다보 면 지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승객보다는 그래도 운전기사가 훨씬 더 신경이 곤두섰을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파샹은 베시사하르에 도착하자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에베레스트 중턱에서 태어나 살다가 카트만두로 나온 파샹이 산보다는 도시를 좋아하는 건 당연할 것이다. 파샹은 신나는 발걸음으로 베시사하르에서 제일 좋은 호텔이라며 Tuckche Peak Hotel로 우리를 이끌었다. 호텔비가 부담되지 않을까 걱정스러웠지만 우리의 걱정에 아랑곳하지 않고 당당하게 앞장서는 파샹을 따라 호텔로 들어섰다. 남중의 수도인 베시사하르에서 가장 좋다는 호텔이지만 낡고 초라했고 요금도 700루피(한국돈 만원)로 그리 비싸지 않았다. 4층의 룸에 짐을 풀고 베시사하르의 거리로 나섰다. 이미 해는 떨어져 초저녁 인데, 하루의 노고를 접고 집으로 돌아가는 네팔리의 분주한 발걸음이 골목 가득 넘쳐났다. 몰려다니는 아이들, 어른들의 바쁜 발걸음, 야채가게 앞에 모여든 아주머니들, 길가에 앉아 분주한 골목을 바라다보며 지는 하루 해를 아쉬워하는 할머니들 사이를 뚫고 골목으로 접어 들었다.


상가와 접한 주택가 골목에는 네팔리의 삶의 소리와 향기가 넘쳐났다
. 모퉁이마다 구멍가게가 있고, 골목은 뛰어다니는 아이들의 생동감 넘치는 목소리로 가득했다. 그리고 그 생동감을 지키고 키워준 가정의 따사로운 온기가 창문을 넘어 번져 나오고 있었다. 창에 희미한 불이 들어오고 나는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 골목을 걸으며 깊은 상념에 빠져들었다. 1960년대 말에서 70년대 초까지 내가 '국민학교'를 다니던 시절의 진해시 여좌동 재건주택의 골목 속으로 나의 의식은 빨려 들어갔다. 다시 돌아가 어른의 눈으로 봤을 때 그렇게 좁을 수 없었던 그 골목이 그 아이의 눈에는 왜 그리도 넓고 풍성했는지. 그 골목을 이리저리 휩쓸고 돌아다니던 아이들의 무리가 보이고, 웃음소리,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그 속에 낯익은 한 아이가 달려가는 모습이 보였다. 멀리서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만 놀고 들어 온나. 저녁 먹어야지!"


 

반응형
반응형


아침에 눈을 뜨니 여전히 창밖은 흐리고 가는 눈발이 날리고 있었다. 미련없이 하산하기로 마음먹고 잠을 청했지만 막상 아침을 맞았는데도 상황이 변화된게 없어 조금은 실망스러웠다. 다이님 룸에 모인 트레커들 역시 어제 올라온 한국인 남성 한분만 빼고 모두 하산을 결정한 상태다. 티벳탄 브레드를 먹고 룸으로 돌아와 하산을 위해 배낭을 꾸렸다. 예티호텔을 나서니 차메에서 동행했지만 다른 숙소에서 지내게 된 한국인 여성분은 기상이 좋아질 때까지 하루이틀 더 기다려 보겠다며 남으시겠다고 했다. 그 말을 듣자 다시 순간적으로 멈짓거렸다. 하지만 마낭에서 이삼일 지체하다 결국 쏘롱라를 넘지 못하고 하산을 하게 되면 안나푸르나 라운드뿐 아니라 ABC(안나푸르나 베이스 캠프) 코스조차 시도하지 못하게 될 수도 있어 다시 자라는 미련의 싹을 잘랐다. 서로의 행운을 빌며, 그리고 큰 아쉬움과 또 하나의 삶의 과제를 안고 뒤돌아섰다. 언제가 될지 기약할 수 없지만 살아생전에 꼭 한번 다시 쏘롱라를 찾아야만할 것같은 과업을 받은듯 발걸음이 무거웠다. 
 


마낭을 벗어나자마자 잔뜩 찌푸린 하늘이 재법 굵은 눈을 뿌리기 시작했다. 거친 바람이 계곡을 타고 불어내리고 하늘에서는 함박눈이 시야를 가릴 만치 거칠게 쏱아졌다. 지상에 닿은 눈조차 다시 바람을 타고 대지를 쓸고 지나가며 따갑게 얼굴을 때렸다. 눈발이 세어지는 만치 마음이 급해지고 발걸음이 빨라졌다. 앞서간 트레커들 덕분에 다행히 길은 눈위에 드러나 있었다. 눈을 피해 고개를 수그리고 길의 흔적만 쫒아 말없는 행군이 이어졌다. 브라카에서 잠깐 티하우스를 들러 몸을 녹였다. 티하우스의 젊은 부부와 어린 아이의 차림에 가난이 묻어났지만 애틋한 삶의 온기가 사랑스러웠다. 두잔의 히말라야 커피를 주문하고, 다시 파샹이 마시는 밀크차를 두잔 더 주문해서 모두 5잔의 차를 마시고도 90루피밖에 받지 않았다. 그렇게 하루 몇잔의 차를 팔아 어린 자식과 더불어 겨울을 나는 그들의 가난하지만 불행하지 않은 삶이 애틋했다.


티하우스의 따뜻한 부뚜막을 떠나기가 아쉬웠지만 목적지 차메까지 어두워지기 전에 도착하려면 서둘려야했다. 티하우스를 나와 뭉지와 홈데, 피상까지 단숨에 내달랐다. 올라올 때 묵었던 피상의 틸리초호텔에서 점심을 먹고, 체력을 장담할 수 없어 다른 트레커들보다 먼저 일어나 출발했다. 한시간 정도 걷다가 쉬기를 반복하다보니 늦게 출발한 한국인 학생들이 우리를 추월했다. 거침없이 내리는 눈은 배낭이며 어깨며 머리며 할 것없이 수북히 쌓였다가 무너져 내렸다. 그런데 목덜미에 쌓인 눈이 속을 썪였다. 배낭과 등사이에 흘러든 눈이 체온으로 녹아 옷안으로 흘러들어왔다. 축축해진 등이 당장은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몸에 열이 나도록 걷고 있을 때는 별게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혹시라도 중간에 걸음을 멈추게 된다면 급격히 체온을 떨어트릴 수 있기 때문에 계속 신경이 쓰였다.


눈발은 옅어졌다 다시 강해지기를 반복했지만 하루종일 멈추지 않았다. 퍄상은 틈 날때마다 확짝 웃으며 "Goog Decision! We are Lucky!"를 외쳤다. 마낭에 머물렸다간 어쩌면 올라가지도 내려오지도 못한채 몇일동안 갇혀버릴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대단한 폭설이었다. 평생 한번도 보지 못한 거친 눈보라 속을 하루종일 걸었다. 그나마 오후부터는 마음도 조금 풀리고 자신감도 붙으면서 폭설이 내리는 안나푸르나 진풍경에 빠져들었다.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안나푸르나의 설경을 두눈에 가득 담고 아내와 눈만 마주치면 "우와 죽인다!"를 백번도 더 외친것 같다.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걷는듯 신비롭고 장엄한 풍경 속에 한 생명으로 들어와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고맙게 느껴졌다.


폭설 속에도 마낭을 향해 올라오는 트레커들을 만날 수 있었다. 한두명씩 올라가는 트레커들도 서너 팀 만났지만 한번은 7~8명 되는 한팀의 한국인 트레커들과도 만났다. 올라가는 분들은 위의 상황을 물었고 우리는 그분들의 행운을 빌었다. 한번은 네팔 트레킹을 몇 번 하셨다는 비슷한 연배의 한국인 남자를 만났다. 그분은 나의 배낭이 무거워 보인다며 포터에게 왜 더 많은 짐을 지우지 않냐며 물어왔다. 그분이 보시기에 내가 너무 지쳐보이거나 약해보였는지 모르겠다. 아뭏튼 그분의 나에 대한 선의에 고맙다는 인사를 드리고 헤어졌다. 나는 파샹을 쳐다보고 눈웃음을 보냈고, 파샹은 무슨 영문인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어쩌면 고산지대에 살면서 어려서부터 무거운 짐을 져 나르던 네팔리들이 우리같은 약골에 비해 두세배의 짐을 져 나를는게 당연한 건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나는 파샹이 고용된 포터라기 보다는 라운드 내내 그냥 동행길의 친구로 남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고, 지금까지 그는 충분히 좋은 그 역할 다 하고 있었다.


피상을 떠나 어떻게 걸었는지도 모르게 디카리포카리와 브라탕 탈레규를 거쳐 차메에 도착했다. 아직 어둠이 내리기 전인 5시 반에 하루의 강행군이 끝났다. 이틀 걸려 올라갔던 거리를 하루만에 내려온 것이다. 올라갈 때 묵었던 마낭주의 수도 차메의 같은 숙소인 마르상디 만다라호텔에 지을 풀었다. 벌써 도착한 트레커와 네팔리들이 다이님룸에 가득했다. 타오르는 장작난로를 둘러싸고 서너명의 호주청년들, 1명의 일본인 산악인과 너댓명의 가이드와 셀파들, 그리고 한국인 학생과 포터가 다이닝룸을 채우고 있었다.


일본인 산악인은 오늘 지나온 마을 피상을 내려다보는 해발 6090m의 피상피크를 등정하고 막 내려왔다고 했다. 그는 많이 지쳐보였고 거의 주변에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은채 거친 숨을 쉬며 자신의 육체적 변화에 의식을 집중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전문산악인으로 많은 산들을 등정했고, 이번에는 혼자서 세명의 셀파와 같이 피상피크를 올랐단다. 알고보니 피상피크는 피상에 있던 한국인 위령비에 새겨진 고인들이 등정하다 사고를 당한 바로 그 산이었다. 그의 나이는 60살이라고 했다. 그 연세에 만만하지 않은 정상을 등정하고 왔으니 그의 지친 모습과 주변에 의식을 빼앗기지 않고 자신에 집중해 있던 모습이 이해가 되었다. 같이 했던 셀파들은 모두 큰일을 막 치룬 사람 특유의 의기양양함과 조금은 들떤 모습이었다.


7시가 넘어 사면이 어둠에 둘러쌓여 깜깜하게된 뒤에야 마낭에서 비슷하게 출발했던 3명의 독일 트레커가 도착했다. 같이 피상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우리 보다 늦게 출발한 그들이 보이지 않아 걱정이 되었지만 윗마을 어딘가에 숙소를 잡아거니 생각하고 잊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어둠이 덮친 위험한 길을 마다않고 차메까지 강행군을 한 셈이었다. 눈을 뒤집어 쓰고 추위에 지친 그들을 위해 글거리는 난로가에 모여 앉아 얼굴이 발갇게 익은 우리는 모두 일어나 환호를 질러주고 박수를 쳤다. 3000m이상의 고도에서 그것도 한치앞이 안보이는 폭설을 뚫고 하루에 800m의 고도를 줄이며 28km를 걷는 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독일인 트레커 중 형인 사람은 이번이 9번째 네팔 트레킹이라고 했다. 마지막 까지 마낭에서 쏘롱라로 올라갈 것인지 아니면 돌아 내려갈 것인지 갈등할 때 그의 판단은 나에게도 중요했다. 그는 혼자라면 쏘롱라 패스를 강행할 생각이었지만 첫 트레킹에 고산증때문에 두통에 시달리는 동생과 재수씨와 같이 강행하기에는 자신이 없어 하산을 결정한다고 했다. 우리에겐 포터 파샹의 판단이 더 중요했지만 트레킹 베테랑인 그의 판단도 무시할 수 없었다.


저녁을 먹으며 오늘 수고한 파샹을 위해 네팔 막걸리인 '창'을 시켰다. '창'은 곡물로 빗은 술인데 메뉴에는 'Local Beer'라고 나와 있었다. 맥주라고는 하지만 우리나라 막걸리와 술의 색이나 맛이 비슷했다. 아내와 나도 한잔씩 마셨는데 이날은 힘든 여정때문이기도 했지만 상행 때의 긴장감이 사라져서인지 거의 모든 트레커들이 '창'과 '락시'를 주문했다. 파샹은 전문산악인이 꿈이다보니 체력을 관리하기 위해 담배도 피우지 않고 술은 좋아하지만 딱 한잔 이상 마시지 않는다고 했다. 술값 때문인지 아니면 술을 절제하기 위해선지 모르지만 파샹은 늘 그 한잔을 한모금 한모금 맛을 음미하면서 아끼며 마셨다.

다이닝룸의 온기가 아쉬워 쉬 방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한참을 파샹과 우리가 오늘 얼마나 좋은 결정을 했는지, 우리는 얼마나 운이 좋은 사람인지 되뇌이며 건배를 했다. 힘든 여정을 잘 견뎌낸 아내와 자칭 'Strong Man'인 나 그리고 우리 부부의 길동무가 되어준 파샹은 서로를 치켜세우고 격려하며 또 건배를 했다. 그리고 파샹이 궁금해하는 한국에 대해, 내가 궁금해 하는 네팔에 대해 이갸기를 나누었다. 파샹은 자신은 부자를, 권력자를 혐오하는 마오주의자라고 고백했다. 나 역시 나의 정치적 입장과 한국의 정치상황, 네팔의 정치상황에 대해 짧은 언어와 식견으로 혼동스런 대화를 주고 받으며 밤이 깊어갔다.
반응형
반응형



하루 쉬기로 한 날이 밝았다. 보통은 안나푸르나 라운드 중 고도적응을 위해 마낭에서 하루를 쉰다고 한다. 우리는 고도적응이 아니라 쏘롱라로 올라갈 건지 말것인지 결정을 위한 대기상태로 마낭에서 하루를 보내게 됐다. 아침에 일어나 세수할 물을 구하려 방을 나서니 파샹이 잠깐 기다리란다. 파샹은 금방 김이 나는 따뜻한 물을 한주전자 구해서 가져왔다. 따뜻한 물이 얼마나 반갑고 고맙던지 물을 아껴 아내와 양치와 세수를 하고 다이닝룸에 올라갔다. 어제 하이캠프 등에서 하산했다던 청년들은 아침을 먹고 아쉬운듯 머뭇거리다 호텔을 떠나고 고스란히 상행중인 일행만 다이님룸에 남았다.  

 


피상에서 같이 올라온 트레커들은 우두커니 오늘 하루 무엇을 하고 지낼지 걱정스런 얼굴이었다. 방에서 지내자니 춥고 할 일도 마땅찮다. 마낭 시내를 돌아다니고 가게도 들러 시간을 보내자니 문을 연 가게도 인적도 드물었다. 서로들 뭘 하고 지낼건지 궁금해 하고, 가이드가 전해오는 주변 지역의 기상과 길 상황에 대한 소식들을 취합하며 오늘 하루 계획과 이후 여정을 결정하기 위해 조금은 초조한 기색이었다. 한가한 아침 나절을 다이닝룸에서 머무는 동안 비관적인 소식이 속속 도착했다. '쏘롱라는 현재까지 내린 눈만으로도 넘을 수가 없을 뿐아니라 날씨가 계속 안좋아 더 많은 눈이 내릴지도 모른다.' '위로 올라가는 것은 꿈도 꾸지마라', '마낭에서 한나절만에 다녀올 수 있는 코스인 아이스 레이크로 가는 길도 눈이 많이 쌓여 도저히 접근이 불가능하다'. 틸리초로 가는 길 역시도 눈에 묻혀 접근하기에는 너무나 위험하단다. 그나마 강사르까지는 접근이 가능할지 모르지만 확신할 수는 없는 상태라고 했다.


아름다운 강마을 강사르는 이번 여정에 꼭 가 보고 싶었던 곳이었기에 파샹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접근이 가능할지 모른다는 소식에 과감히 호텔을 나서기로 했다. 침실로 돌아와 간단한 비상식량을 챙기고 가장 가벼운 차림으로 길을 나섰다. 강사르 쪽으로 가다가 조금이라도 위험해 보이면 돌아올테니 파샹은 쉬고 싶으면 호텔에서 쉬어라고 권했다, 하지만 결국 파샹도 우리부부만 보내기가 걱정스러웠나보다. 혹시 위험할지도 모른다며 자신도 같이 가겠다고 따라나섰다. 다른 트레커들도 나름의 여정을 잡거나 아니면 상황파악 겸 산책겸 마을 주변을 둘러보겠다며 모두 호텔을 나서기 시작했다.


마낭의 거리는 눈더미에 묻혀있었다. 간혹 추위에 웅크린 주민들과 조우하곤 했지만 그래도 상당히 큰 산중도시인 마낭의 거리치고는 너무나 사람의 발길이 드물었다. 쏘롱라 쪽으로 방향을 잡고 마을을 관통하자 왼쪽으로 갈라지는 길이 틸리초 방향이라고 가리키고 있는 표지를 만났다. 막상 마낭시가지를 벗어나 틸리초쪽으로 방향을 잡고나니 파샹은 조금 걱정스런 얼굴로 눈속에 묻혀버린 길을 찾을 수 없어 당황하는 기색이었다. 결국 대여섯번 안나푸르나 라운드를 했지만 틸리초쪽은 한번도 가본 적이 없단다. 길을 모른다고 뒤 늦게 고백한 파샹은 자신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 우리 부부보다 몇십미터 앞서서 둔턱에 올라 길을 살피기도 하면서 용감히 앞서나갔다. 파샹은 길을 찾지 못하고 눈밭을 헤메기 시작했다. 길을 물을 사람을 찾은 수도 없어 난감한 상황이 조금 이어졌지만 오래지않아 다행히 바람에 눈이 쓸려 지나간 길의 자락을 발견하게 되었고 본격적으로 강사르 쪽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왼편으로 마르샹디 강을 끼고 가파른 절벽을 따라 이어진 평탄한 길을 걸으며 눈과 산, 그리고 마르샹디 강이 이룬 환상적인 풍경에 빠져들었다. 마르샹디 강은 상류쪽 협곡에서 내려오는 두줄기의 강이 합쳐져 넓은 수역과 광활한 고수부지를 형성하고 있었다. 오른쪽 협곡은 쏘롱라쪽에서 내려오는 줄기고, 왼쪽의 협곡은 틸리초에서 발원하여 강사르를 지나쳐 오는 강이라고 했는데, 이들 두 줄기의 강이 합쳐지는 지점에서 강사르 쪽으로 건너가는 다리가 있었다.


 
다리를 향해 나아가는 중에 갑자기 시야에 가파른 절벽을 타고 올라 길을 가로질러 뛰어가는 야생염소의 무리가 들어왔다. 파샹은 이들 야생염소를 Tahr라고 한다며 너무 반가워했다. 안나푸르나 트레킹을 하다가 일정 고도 이상에서 이들 야생염소를 만날 수 있지만 아주 드문 경우라도 했다. 어디선가 읽었는데 이들 야생염소를 만나면 행운이 온다는 속설이 있단다. 행운을 가져다준다고 믿을 만치 귀한 야생염소를 이렇게 쉽게 그것도 바로 지척에서 무리로 만나다니 이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누르며 염소 무리를 따라 나섰다. 하지만 절벽을 타는 야생염소의 발걸음을 내가 따라갈 수는 없었다. 더 큰 문제는 강쪽으로부터 가파른 절벽을 타고 올라 길을 가로질러 산쪽 언덕으로 뛰어가는 야생염소을 뒤따르자니 그들이 굴리고 간 돌이 내 쪽으로 쏱아져 내려서 더이상 접근하기가 불가능했다. 파샹의 말로는 야생염소가 지나가면서 자연스레 구르는 돌도 있지만 사람이 따라오지 못하도록 염소가 의도적으로 돌을 굴리기 때문에 정말 위험하단다. 그래도 그들 야생염소의 모습을 그럭저럭 사진에 담아 뿌듯한 마음으로 행운을 현실화할 방도를 생각하며 길을 이어갔다. 나는 아내에게 귀국하자마자 로또를 사볼까며 농을 치며 로또가 당첨된 상황을 상상하는 재미에 신이났다.


마르샹디강을 건너 좁고 가파른데다가 눈이 무릎까지 빠지는 길을 올랐다. 오른쪽은 강바닥까지 떨어지는 수십미터의 수직 낭떠러지다. 그냥 돌아가기에는 아쉬움이 너무 크고 계속 전진하자니 감수해야할 위험이 너무 컸다. 마음속에 공포가 자라기 시작할 때쯤 갑자기 파샹이 절벽쪽으로 넘어져 수십미터 낭떠러지를 미끄러내려가려는 것이 아닌가. 나는 순간적으로 슬라이딩을 하여 파샹이 메고 있는 배낭의 끈을 움켜쥐고 당겨 올렸고, 파샹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눈을 털며 일어섰다. 나는 너무 놀라 가슴이 뛰고 이마에 땀이 솟았다. 그런데 파샹은 얼굴 가득 웃음을 띠는 것이 아닌가? 파샹은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장난이었다고 했다. 나는 화를 누르고 다시는 그런 장난을 하지마라고, 장난이 장난으로 끝나지 않고 사고로 이어진다고 재차 주장을 했고 파샹은 조금 머슥한 표정을 지었다. 진정을 한뒤 언덕길을 마저 올라 멀리 강사르 마을이 보이는 지점까지 도달했다.


강사르 마을은 시야에 들어오는데 마을로 가는 길은 강을 건너기 전의 길과는 달리 쌓인 눈의 깊이와 길의 여건이 또 달랐다. 이런 식으로 계속 전진하기에는 위험이 너무 크게 느껴졌다. 결국 강사르마을과 마르샹디 강, 그리고 산과 강의 조화가 만들어 낸 풍경에 한참을 빠져있다가 더이상의 전진을 포기하기로 하고 뒤돌아섰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마낭 거의 다 와서야 강사르를 찾아 길을 나선 한국인 트레커들을 만났다. 길 상황을 전하고 모두 같이 호텔로 돌아왔다.

다이닝룸에 난로를 피우자, 강가푸르나 딸까지 다녀왔다며 독일인 트레커들이 들어섰다. 강가푸르나까지는 그렇게 힘들이지 않고 접근이 가능했단다. 조금있으니 오늘 피상에서 올라왔다는 한국인 남성 트레커 한분이 들어섰다. 그분은 가이드나 포터도 없이 포카라서 부터 트레킹을 시작하셨다는데 베시사하르에 이르기 전에는 마을을 찾기 전에 날이 저물어 노숙까지 하며 강행군을 하셨다고 했다. 한국에서 물리 선생님을 하신다는 그분은 보통 배짱이 아니신 분 같았다. 그분이 한국에서 준비해 오신 누룽지 차를 얻어 마시며 오랜만에 구수한 한국 밥의 맛과 향을 기억해 보았다.

늦은 오후 네팔리들이 마을회관 같은데서 영화상영이 있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우리부부는 난로가를 떠나기 싫어 그냥 다이닝룸에 머물렀고 트레커들은 주변 나들이를 갔다가 속속 도착했다. 눈에 갇혀 내일의 여정을 결정할 수 없는 트레커들과 네팔리들이 모여 담소를 나누며 마낭에서의 이틀째 밤을 맞았다. 그리고 그 순간까지 접한 정보와 이날 강사르 쪽으로 접근해왔던 경험을 아울러 최종적으로 하산을 결정했다. 독일인팀도 동생과 제수가 고산증을 보이며 두통에 시달리는 상황때문에 하산을 결정했다. 오늘 도착한 한명의 한국인 트레커만 남기고 같은 호텔에 묵은 모든 트레커가 하산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방으로 돌아와 또 내리기 시작한 눈발을 유리창 너머로 확인하며 잠을 청했다.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