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청량산비나리마을 영농조합법인은

권역의 주민역량강화사업의 일환으로

김정헌 서울문화재단 이사장님을 모시고 주민대상 특강을 가졌습니다.

이날 7개리에서 모인 40여명의 주민들은

힘든 농사일에 졸음이 몰려오는 오후 시간이지만

모두다 선생님의 귀한 말씀을 경청하시며

마을공동체의 삶이 얼마나 뿌듯한지,

우리 마을이 앞으로 얼마나 더 인심좋고 풍요로운 공간으로

거듭날 수 있을지 그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김정헌 선생님께서는 마을의사결정구조를 민주화하고 활성화함으로써

마을공동체의 건강성을 유지하고 발전시켜 나갈 수 있고

궁극적으로는 마을 주민이 스스로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모든 사안에 개입하고 참여해서 더불어 풀어나가는 마을 자치의 꿈을

현실화 알 수 있음을 피력하셨습니다.

 

이름하여 마을공화국은 주민이 마을공동체의 미래에 희망을 가지고

자긍심과 사랑을 가지고 살아가고,

문화적 예술적으로 그리고 경제적으로 자족적인 삶의 단위입니다.

 

강의를 듣고 나니 마을내적인 경제적 자립, 의사결정구조의 민주적 확립,

미래의 희망과 가치 공유 로 마을공화국의 꿈을 이루는

협동적 마을살이가 우리 권역을 아름답게 꾸며나갈 것이라는

희망이 생겨났습니다.

 

바쁘신 중에도 귀한 걸음해 주신 김정헌 서울문화재단 이사장님,

피곤한 중에서 강의에 참여해 주신 주민여러분께 다시한번 감사드립니다.

 

 

 

 

반응형
반응형

 

 

‘예술가가 사는 마을’이란 어떤 마을일까? 그보다 먼저 필자가 이해하는 ‘예술가’와 ‘마을’은 무엇을 말하는지 그리고 필자는 어떤 '예술가'를 만나고 또 어떤 '마을'을 찾았을까? 많은 궁금증을 가지고 김정헌의 [예술가가 사는 마을을 가다]를 읽었다.

 

이 책은 필자가 [한국문화예술위원장]이라는 직을 부당하게 잃고, '중앙권력'의 저열한 아귀다툼에서 벗어나 마음을 다스리고 그 자신이 꿈꾸는 새로운 세상의 가능성을 찾아 전국을 주유한 흔적을 담고 있었다. 물론 그는 정처 없이 전국을 떠돈 것은 아니었다. 이런 저런 인연이 닿는 예술가들을 찾아, 그 예술가들이 사는 마을을 찾아 길을 나섰고, 예술가가 없어도 그야말로 예술적으로(!) 활로를 찾고 활기를 일궈나가는 마을도 마다않고 방문했다.

 

그가 만난 예술가는 다양했다. 주민과 담을 쌓고 철저히 자신의 세계에 몰입하는 예술가도 있었고, 마을 주민과 더불어 마을의 잃어버린 생기를 예술을 통해 불어넣어보고자 시도하는 현장 활동가도 있었다. 그들 모두의 공통분모를 찾기는 쉽지 않았고, 그 모든 만남을 통해 얻은 결론도 쉬 정리할 수 없었다. 하지만 예술가 자신과 마을과의 관계, 마을살이 속에서 예술가 자신의 역할에 대한 자의식이 있든 없든 예술가가 사는 마을은 조금은 특별했다. 독자인 나는 그 특별함이 무엇인지 촉각을 곤두세워 필자의 걸음을 따라 이 마을 저 마을을 기웃거렸고, 이런 저런 예술가의 삶과 예술을 곁눈질 했다.

 

책을 읽어 나가면서 나는 결국 '예술가'는 누구인가, 예술가와 민중은 어떤 관계여야 할까 혹은 예술가는 어떻게 살아야하는가 같은 규범적 물음을 일단을 접어 두기로 했다. 그리고 또 이상적인 마을의 상, 예술을 매개로 한 공동체라는 이상향의 꿈을 접었다. 그것은 필자의 발자취를 따라 나서는 과정에서 지금까지 내가 견지해 온 사회 속에서 예술가가 가지는 역할에 대한 관념적인 이해, 예술이 공동체적 삶에서 가지는 의미에 대한 추상적인 이해를 잠시 밀쳐두기로 마음먹게 되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예술은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될 수 없으며 그 자체를 ‘향유’하는 것이 가장 근본적인 존재 이유이며, 사회적 부정의를 고발하고 변화를 추동하는 발언으로 승화되는 지점에서 조차 선전의 도구가 아니라 예술적 향유가 근본이 되어야하는 게 아닐까, 또한 예술가는 사회의 변화를 이끄는 ‘지도자’나 공동체의 주류가 아니라 예술을 통해 사회에 변화의 염감을 불어넣는 불온한 아웃사이드이고, 아웃사이드이기를 포기했을 때라도 예술가는 가장 평범한 공동체의 일원이거나, 아니면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이 예술가가 되는 지점이 바로 가장 이상적인 ‘예술가가 사는 마을’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가 찾은 [예술가가 사는 마을]이 뭔가 특별할 수 있었던 것은 내가 아는 현실의 예술 생태계나 예술가의 존재방식과는 조금씩 다른 다양한 길을 모색하는 생동감 넘치는 예술가들의 삶을 목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산업화를 넘어 세계화의 파고에 휩쓸려 ‘마을’의 존립 자체가 불가능하게 되어 가는 현실에서 ‘마을’을 새롭게 정립해서 새로운 삶의 공간으로 일궈나가는데 있어서 예술이 마을 재건을 추동하는 영감을 촉발하는 그런 마을들이었기 때문이다.

 

필자는 예술가다. 그가 꿈꾸는 마을은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이 농부이면서 시인이고, 동시에 예술가고 철학자인 세상일 것이다. 그와 같은 마을의 연대로 이루어진 [마을공화국]은 인류가 오래 꿈꾸어오던 이상향이다. 이 책을 통해 마을공화국의 꿈을 현실화할 수 있는 단초를 끝내 찾을 수 없을지라도 나는 존경하는 필자의 생각을 이해하고, 더불어 많은 예술가를 만나그들의 마을살이가 어떻게 시도되고 있는지 그 궁극은 꿈은 무엇인지 확인하는 것 만으로도 의미 있었다. 필자가 찾아 주었던  한 마을의 주민으로서 이 책을 읽고, 예술가와 농부의 구분이 사라진 세상, 마을과 마을의 경계를 넘는 어떤 곳에서 만들어질 마을공화국의 꿈을 가슴에 나누어 담는다.

반응형
반응형

[예술마을 네트워크]가 제천 대전리에 [마을 이야기 학교]를 펼쳐놓은지 아직 1년이 되지 않았는데 벌써 2번째 마을 기획전을 가진다고 했다. 오래전 시간이 멈춰버린 공간은 살려 마을주민의 발길을 모으고, 지난 겨울내내 주민의 열의를 모아 마을기획전을 마련했단다. 지난 토요일, [생전 처음]이라는 이름의 마을기획전이 궁금하기도 했고, 예마네 식구님들도 보고싶은 마음에 문경 사불암 걷기 모임에 갔던 길에 바로 대전리로 향했다.
 
오픈시간이 오후 2시로 잡혀있었는데 우리가 대전리에 도착한 것은 거의 오후 4시가 다 되었을 무렵이었다. 교정에는 예마네 대장이신 김정헌선생님께서 방송국 카메라앞에서서 인터뷰를 진행중이셨다. 눈인사만 나누고 전시가 열리고 있는 교실로 들어섰다. 이미 전시 오픈식은 끝났고, 이날 전시의 주인공이신 주민들과 손님들은 자리를 떠나고  없었다. 교실 한켠에는 오픈 상이 그대로 차려져 있었다. 다시 복도로 나와 전시 공간과 작품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복도에서 부터 전시를 펼친 한 칸의 교실에는 주민의 열정이 담긴 자화상에서 부터 풍경화, 그리고 겨울내내 공부했던 국어공부 영어공부의 흔적들, 그리고 입주작가의 도움으로  만든 돌 전각 작품과 이들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모습을 담은 사진들 그리고 그들 강좌에 참여하고 과정을 마쳤음을 증명하는 수료증까지 온갖종류의 작품들이 작은 공간을 빼곡히 채우고 있었다.  그야말로 생전 처음으로 붓을 들었고, 영어를 공부했고, 그리고 마을 행사의 주인공이 되신 주민들의 작품은 오래전 바로 그 교실을 채웠을 아이들이 일으켰을 소란과 열기를 되살려주고 있었다. 소박한 전시물들을 산만하게 배치하여 더더욱 지난 시간의 아이들이 북적거렸을 정감 넘치는 교실의 정서가 그대로 살아나는 듯 했다.

인터뷰를 마치고 들어오신 김정헌 선생님과 박명학선생님 그리고 송이양과 송이양의 친구와 함께 손님들이 다 떠난 오픈상에 둘러앉아 막걸리를 나누었다. 그동안 예마네의 활동에 대해 듣기도하고, 나의 비나리 마을 사업에 대한 말씀도 드리면서 잔을 나누다 보니 어느새 대전리분교 교정에 저녁어스름이 깔리기 시작했다. 교실을 나와 수리중인 교장사택을 같이 둘러보고, 해가 지는 교정의 풍경을 카메라에 담았다. 벌써 수리해서 숙소로 사용중인 교사사택에 다시 모여앉아 송이양 친구가 난생 처음으로 만든 돼지등뼈감자탕을 안주로해서 남은 막걸리를 비웠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마을 이야기 학교"는  작년에 만화가 한분이 입주하면서 상설화되었고, 그분들의 자발적 봉사로 주민과 함께하는 한글교실, 영어교실, 그림교실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겨우내 진행할 수 있었단다. 그리고 김정헌 선생님이 마을노인회에 가입한 이야기며, 예마네 식구들이 마을주민과 친해져가는 과정도 듣고, 또 도시이주민들의 친화력 부족과 주민과의 불화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작별을 하고 돌아오는 길 이런저런 생각들이 들었다. 이번 전시가 주민들에게 기쁨을 주고 쓸쓸한 마을에 활력을 불어넣는데 작은 충격을 주었을 것이지만 이날 전시가 있기까지 예마네 식구들을 비롯한 많은 분들의 열정과 희생이 요구되었다. 생활근거지인 서울에서 계속 오고가며 길에서 보낸 비용과 시간도 그렇고, '대중문화활동'이 가지는 작가의 개인적 작업과의 괴리를 감수해야하는 부분도 보통 부담스러운 것이 아닐 것 같았다.

아직도 교사는 자비를 들여 수리가 진행중이었고,  젊은 만화가 한분이 아예 입주를 해서 생활을 하는 바람에 그나마 학교가 상시 오픈되고 온기가 유지될 수 있었지만 겨우내 시설 여기저기는 동파라는 피해를 피해갈 수 없었다. 그리고 일부 공모에 참여해 기금을 받기도 했지만 산출없는 마을사업에 지속적으로 자비를 투여해야 하는 점도 마을과 문화예술인의 관계맺기를 가로막는 큰 장애로 작용할 것 같았다.  

사실 마을과 예술가의 관계맺기를 도덕적 차원, 예술가 혹은 지식인의 의무라는 차원에서 요청하기도 하지만 현실적으로 모범적 사례를 도출하기가 쉬운 일은 아니다. 잘 알려진 몇몇 예술가의 경우를 보아도,  20여년을 넘어 마을에 정착해 작업하면서 마을공동체와 호흡을 같이하려는 부단한 노력을 진행해 왔지만 성과는 더디고 삶은 너무 힘든 경우가 대부분이다. 사실 예술가가 살아가기에는 마을에 예술가가 숨쉬고 살아갈 삶의 공간이 쉬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기도하고, 또 예술가 자신의 문제도 없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삶 전체를 싣는 '마을로의 이주'를 결행하지 않고도 물론 다양한 결합방식이 있고, 이것이 보다 현실적이기도 할 것 같다. 그렇지만 이 경우는 또 마을이 대상화되고, 작가의 의도가 일방적으로 투영되거나, 외부에서 마을에 일시적으로 투입된 문화 예술적 자원이 마을과 어떤 트러블을 일으키기가 쉬울 것같다. 마을이 '작업'에 이용되기만 하고 마을주민이 향유하기에 너무나 거리가 먼 '예술'이 될 수도 있기때문이다. 그렇지 않더라도 '생활'속에 들어와 삶속에 녹아들지 않는 이벤트성 문화예술 '행사'는 마을에 활력을 증진하는 긍정적 변화를 추동하기에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을 것 같다.  

어쨌던 예술가가 마을과 함께 살아가면서 마을 공동체에 문화예술의 향유기회를 넓혀나가고 궁극적으로는 마을이 활기가 넘치는 사람 사는 공간으로 거듭나게하는데 참여하기 위해서는 나름의 생존방식과 관계형식을 창출해야하는 과제를 더불어 짊어지고 나가야하는데 이는 사실 작가 혼자 감당하기에는 너무 무거운 짐이기도 하다.

사실 예술이 무엇이고, 예술마을은 또 뭔지 잘 모르겠다. 예술이 마을주민의 관심사가 전혀 아니기도하고, 예술마을이 예술인의 동호인 마을이 아닌다음에는 입주한 작가에게 너무 큰 부담으로 과제가 부과되기도 하기에 쉽게 예술마을을 주장하기에는 두렵기도 하다. 궁극적으로는 주민 모두가 예술을 향유할 수 있는 마을을 넘어 주민모두가 예술가일 수 있는 마을공동체를 꿈꾸지만 맑스가 말한 "노동자 농민이 동시에 예술가이지 철학자인 세상"의 꿈만치나 요원하기만 하다. 그래서 아직은 공동체 문화활동가는 외로운 혁명가일 수밖에없고 그러다보니 예술마을은 [예술마을네트워크]로  조직화되어야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참 값지고 의미있는 일이지만 또한 힘든 길이기도한 [마을예술네트워크]의 활동에 큰 성과가 있기를 발고 미력하나마 그들이 가는 길에 한발 걸치고 뒤따라라도 갈수 있도록 노력해야겠다.  
 

 

 

 

 

 

 

 

반응형
반응형

오래 전에 문을 닫아 운동장 가득 개망초만 무성했던
충북 제천시 수산면 대전리 분교가
[마을 이야기 학교]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한때 650여명의 아이들의 뛰어놀던 '대전리분교'가 있어 
대전리 농민들은 힘든 농사일도 신나게 할 수 있었고,
암담한 현실에서 꿈과 희망, 자긍심을 잃지않고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학교는 마을의 심장이었고, 마을의 모든 이야기는 학교를 중심으로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산업화와 합리화라는 풍파에 밀려
농촌의 아이들은 마을을 떠나고, 마을의 심장은 멋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긴 세월, 학교는 잊혀졌고 마을은 그렇게
사라져버릴듯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다시 들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마을'을 잃고 '학교'를 잊고 아무 일도 없었던 양 살 수 없었습니다.
마을이 없는 세상의 모든 삶은 갈수록 팍팍해지고, 삶의 향기를 잃어갔습니다. 
그래서 모두가 마을을 잊어버릴 즈음
조용한 마을에 사람의 온기 가득한 마을의 미래를 담은 풀씨가
하나 둘 날아들었습니다.  



그리고 '폐교'로 불리우던 대전리분교에도
김정헌, 박명학 그리고 김송이라는 풀씨가 날아들었습니다.
이들 풀씨는 잊어져가는 마을의 이야기를 찾아,
예술을 통해 생명력을 불어넣고,
마을의 심장인 학교를 일구고  삶의 향기 넘쳐나는
풍요로운 마을을 만들어나가겠다는 꿈을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난 8월 14일,
대전리 분교에 그 풀씨가 작은 마을 영화제라는 싹을 틔웠습니다.
그 싹이 어떻게 자라나서 어떤 꽃을 피우고,
어떤 열매를 맺을지 아직은 아무도 모릅니다.
하지만 멀리서 찾아온 손님들의 관심과 사랑뿐 아니라,
흥이 넘쳐나는 마을 주민들의 표정속에서
그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마을 이야기 학교]가 있는 대전리는
세세년년 삶들이 이어져 내려가
작은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아름다운 마을로 이어져갈 것입니다.
 
반응형
반응형

예술이 마을을 살릴 수 있을까?

-“예술과 마을 네트워크에서 희망을 본다.

 



인간 삶의 시공간적 근본인 마을을 살리는데 인간 삶의 또 다른 근원인 예술이 기여할 수 있을까? 만약에 그럴 수 있다면 어떻게 가능하고, 그렇게 해서 살아난 마을은 또 어떤 모습일까?

 

다 알고 있다시피 이미 전통 농촌 마을은 재생산구조가 파괴되어 아이들 울음소리가 끊긴지 오래다. 경제적 자립구조가 붕괴되어 헤어날 수 없는 부채더미에 신음하고 있고, 삶의 터전인 논밭마저 절반이상이 도시자본에 넘어갔다. 마을 내 의사결정구조인 전통적 자치 기구는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고, 전통적 자치기구를 대체해 중앙권력의 지배편리를 위해 만들어져 하부행정단위의 역할을 하는 이반장체제는 주민자치의 꿈을 실현하는 기구로 역할 하기에는 그 근본부터가 다르다. 마을 주민을 정신적으로 묶어주던 많은 제도적 문화적 장치들이 형해화 되었다. 두레나 울력 같은 공동노동. 협력노동의 전통은 사라졌고, 동제나 당제 같은 마을신앙도 사라지거나 드문 경우에 그 흔적만 간신히 보존되고 있다. 상여계, 토지계 같이 마을 공동체를 유지시켜주고, 주민의 정체성을 이뤄주는 근간이 되었던 마을 모듬은 약화되고 기금은 고갈되었다. 사실 마을의 근본인 사람이 사라지는 판에 다른 것들은 말해 무엇 하겠는가?

이젠 농가부채대책은 없고, ‘희망근로사업도 줄어들고, 농업보조정책도 패지 해 나간단다. 경제적 파탄을 넘어 정책적 방기 속에 농촌 마을은 어떻게 될까? 농촌마을의 미래는 암담하고, 쇠락의 대세는 반전될 어떤 가능성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이상적으로 마을 공동체를 회복한 성공적인 사례도 없고, 따라서 마을 회복을 위해 분투하는 주민들이 의지할 마을 회복 프로그램도 그 로드맵도 없다.

 

그럼 도시마을은 어떤 모습일까? 도시의 거주형태나 시가지 형태는 전통적인 마을 단위의 공간구분을 무의미하게 한다. 그렇다고 도시는 마을이 성립하지 않을까? 그렇지 않다고 본다. 어쩌면 도시의 마을은 도시민의 생활반경, 활동반경이 물리적 공간의 협소한 규정을 넘어 그 필요와 구성원의 가치나 기호에 따라 넓혀짐에 따라 새로운 형태, 새로운 의미의 마을로 재구성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따라서 주민자치, 마을만들기는 농촌에 국한된 문제의식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니다. 당연하게도 사람 사는 곳 모두가 마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도시도 사람이 넘쳐나긴 하지만 마을다운 마을이 없기는 매한가지다. 마을다운 마을을 이루기 위해서는 일정한 공간 안에서 정신적, 문화적 일체감이라는 주민정체성을 공유하는 집단이 필요하다. 하지만 무한 경쟁하는 개인들로 꽉 찬 도시는 마을이 성립될 수 있는 토대가 너무 허약하다.

 

농촌마을과 도시마을의 구분을 넘어 인간 삶을 가능하게 하는 근본으로서의 마을은 똑같다. 사실 원시공동체에 대한 향수가 전통적 농촌 마을에 대해 우선적으로 가치를 부여하게 하지만, 전통마을에 대한 향수보다는 새로운 마을의 현재성에 주목하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마을은 이념이기 이전에 삶이고 현실이다. 그 삶과 결합되지 못하는 예술, 문화, 자치, 환경, 민주주의는 헛구호에 불과하다. 마을의 존립이 시급한 현안이 되는 마당이기 때문이다.

 

다행히 언제부턴가 마을공동체의 가치에 대한 새로운 평가가 일어나고 농촌에는 귀농과 마을 만들기가, 도시에는 녹색도시’, 도시공공디자인 운동 등이 일어나고 있다. 중앙권력의 민주화, 지배가치의 진보화에 일정한 성과와 좌절을 동시에 경험한 세력들이 주민자치(스와라지)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가지고 스스로 하방을 시작했다. 도시는 아파트의 동, 행정단위인 통반을 넘어 동호인모임, 다양한 가치를 추구하는 시민모임, 정치적 지향을 같이 하는 사람들의 정당활동, 구체적 삶의 질을 결정하는 생활환경에 대한 요구를 관철시키기 위한 시민모임 등 다양한 형태의 자치단위, 새로운 형태의 마을만들기를 시도하고 있다. 농촌은 생태환경과 근원적 생명의 가치에 대한 재발견을 통해 사라져가는 마을을 복원하고 마을자치와 마을 공동체성을 회복하려는 시도를 시작했다. 나눔과 공생, 순환이 마을의 가치기반이 되고, 자본이라는 단일 권력의 지배에 저항을 시작했다. 마을을 살리기 위한 활동은 다양한 영역에서 이뤄지고 있다. 생활협동조합운동, 마을자치운동, 자활농장만들기, 마을 역사연구, 마을박물관만들기, 마을자원조사 등 마을 공동체를 복원하기 위한 다양한 활동이 시도되고 있다.

 

그 연장선일까?  예술로 마을을 살리겠다는 일군의 활동가, 예술가들이 단체를 만들었단다. 일명 예술마을네트워크(예마네)”란다.  예마네는 [마을만이 희망이다]는 기치를 당당히 내걸고 문래동 철공소 골목에 조그마한 연구실을 열었다. 웹상에 그를듯한 까페도 하나 번듯이 차려놓았고 (http://cafe.naver.com/yemane) 예술가가 사는 마을을 탐방하는 것으로 벌써 활동을 시작했다.

 

예마네는 예술이 마을을 진정으로 생각한 적이 없고 마을 또한 예술을 마음 편하게 받아들인 적이 없는 상황에서, 원시적 마을이 예술과 함께 했듯 이 둘의 통일을 회복하는 것이 아수라장이 된 우리의 현재적 삶을 혁파하는 첩경임을 주창한다. 이를 위해 예마네는 문화와 예술로 마을을 사유하고 연대하고 소통하고,   마을을 생각하는 모든 활동을 매개하는 연구기지를 자임하고 있다.

예마네가 스스로 상정한 과제는 다양하다. 마을의 생태 환경과, 경관 인적 물적 자원에 대한 실태 조사 및 연구, 공동체를 활성화하는데 기여할 문화예술 프로그램의 개발과 보급, 문화예술 공동체 네크워크 구축을 위한 인적 물적 교류사업 등이 그것이다. 이를 좀더 구체화하면, 마을조사 및 마을지표개발, 마을축제 연구기획, 마을 박물관 보급, 마을 디자인, 그리고 마을학 연구라는 과제로 집약된다.

 

사실 예술이 어떻게 마을을 살리는데 기여할 수 있을지, 예술이 살린 마을의 모습은 어떤 형태일지 궁금하다. 마을 공동체의 형성과 발전에 기여하는 예술은 예술일반과는 분명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을을 살리는 예술은 아무도 가지 않은 새로운 길을 개척해 나가야 한다. 무척 힘겹고 고단한 과정임에 분명하다. 또한 단위 마을 내 예술가와 마을주민간의 유대와 교류마저 힘든 현실에서, 예술가가 사는 마을간 네트워크를 만들어낸다는 구상은 대담하나 비현실적이고, 가치 있지만 지난한 작업으로 보인다.
누군들 그 사실을 모르겠냐만 예마네 구성원들이 어디 만만하고 손해보지 않는 작업만 해오는 그런 분들인가? 그래서 차라리 희망적이다. 안되면 당연하고 되면 기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꼭 기적이 일어날 것 같다.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