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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으로 돌아가는 날, 아침 늦게 눈을 떴지만 어제와 다른 도시의 분위기가 창으로 전해졌다. 먼저 가까이 타멜거리를 울려대던 택시의 클락션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도시의 하루를 준비하는 분주한 발길도 느껴지지 않았다. 대신 멀리서 군중들이 외침이 느리게 전해져 왔다. 간단히 세수를 하고 짐을 싼뒤 카트만두에서의 마지막 반나절을 누리기 위해 방을 나섰다.

숙소 로비에 내려가니 오늘 카트만두는 총파업중이라고 했다. 모든 택시와 버스가 운행을 중단하니 평소보다 두어시간 서둘러 공항으로 향해라고 했다. 오후 3시 40분에 카트만두 트리뷰반 공항을 이륙, 한국시간 26일 새벽 1시에 인천에 도착예정이니 타멜에서 점심을 먹고 공항으로 나갈려든 계획을 수정해야만 했다. 일단은 상황을 살피러 타멜거리를 나섰다. 지금가지 봐왔던 타멜거리가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우릴 맞았다. 차는 자취도 없이 사라졌고, 식당이며 선물가게며 조그만 구멍가게까지 문을 연곳이 단 한군데도 보이질 않았다. 간혹 릭샤라는 인력거가 지나가곤 했지만 타멜거리는 평소의 번잡함이 싹 가쉰 말쑥한 얼굴이었다. 타멜을 빠져나와 멀리 시위대의 구호가 들리는 곳으로 발길을 잡았다. 대로로 나서자 무장경관들이 군데군데 나와있었고 멀리 한무리의 시위대가 지나가고 있었다. 냅다달려 시위대 근처까지 가서 사진을 찍고 상황을 살폈지만 도대체 저들이 무슨 요구를 걸고 시위를 하는지 도무지 알아낼 재간이 없었다.

두세 무리의 시위대가 여러방향에서 나와 사거리에서 집결해 더 큰 무리를 이뤄 타멜 외곽을 돌아 왕궁쪽으로 행진을 계속했다. 도로에는 간혹 군경을 싣을 트럭과 엠블란스가 싸이렌을 울리며 지나갈 뿐 거리는 차를 대신해 시위대와 시민이 차지하고 있었다. 차로부터 해방된 도로를 걸으니 이유를 알 수 없는 해방감이 나의 가슴에도 벅차올랐다. 시위대를 마냥 따라갈 수도 없었고, 오늘 카트만두의 상황을 살펴보고 택시나 버스없이 공항으로 나갈 방법도 알아볼 겸 다시 숙소로 돌아왔다. 숙소의 스텝이 전한 이야기로는 오늘 시위가 석유값 폭등에 따라 생활이 어렵게 된 운전자 노조를 중심으로 조직되고 있다고 했다. 네팔은 모든 노동자조직, 시민조직, 기타 단체들이 잘 조직되어 있는데 이번 이슈에 동조해 전국적인 총파업이 일어나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오전 동안 카트만두 시내를 더 돌아다닐려고 했던 계획은 물건너갔고 어떻게 안전하게 공항으로 달려갈 것인가가 문제가 된 상황이었다. 하지만 스텝이야기로는 총파업은 일상적인 사건에 불과하고, 여행자들은 위해서는 별도의 셔틀버스가 운행되기 때문에 큰 걱정은 하지 말라고 했다. 타멜초크 지나 어제 방문했던 '꿈의 궁전'근처에 가면 타멜과 공항사이를 운행하는 임시 셔틀버스가 거의 30분 간격으로 운행된다는 것이었다. 최악의 경우 걸어서라도 갈 수 있을 만치 넉넉한 시간을 두고 공항으로 갈 방법을 찾으려고 했는데 이외로 쉬운 해결책이 있어 안도했다. 그렇지만 교통수단이 없고, 모든 가게며 관공서 공원까지도 문을 닫은 카트만두 시내를 둘러 볼만한 흥도 나지 않았고 또 혹시나 하는 일말의 불안감 때문에 최대한 빨리 공항으로 가기로 마음 먹었다.

셔틀버스가 정차한다는 타멜입구쪽으로 가니 벌써 여행자들이 배낭을 매고 끌고 불안한 표정으로 몰려들기 시작하고 있었다. 수십명의 무장경관들이 무료한 표정으로 거리를 지키고 있었고 멀리 시위대의 함성이 간간히 들려오기도 하는 타멜입구는 평소의 번잡함이 사라져 오히려 공기도 맑고 햇살도 투명해 더 평화롭게 느껴졌다. 일시에 외국인 여행객들이 몰려들어 조금 어수선해지기 시작할 무렵 [투어리스트 버스]가 도착했다. 한대의 버스가 떠난뒤 또 한참을 지난뒤 두번째 버스가 도착했을 때 우리부부도 잽싸게 줄을 서고 버스에 오를 수 있었다. 버스는 3명의 무장경관이 동승해 시위대가 점거한 거리를 살피며 버스를 호위했다. 버스는 시위대가 막아선 길을 피하기 위해선지 아니면 또 다른 호텔에서 외국인을 싣기위해선지 큰길을 피해 골목같은 우회로로 돌아 몇번을 정차해 승객을 더 싣은 뒤 공항에 도착했다.

트리뷰반 공항은 삼엄한 경비속에 많은 여행객들로 붐비고 있었다. 1층 로비에 들어가기 위해서 먼저 여권을 검사하고, 1층에서 발권뒤 탑승구가 있는 2층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트 앞에서 또 무장경관이 여권과 항공권을 검사했다. 1층로비에서 안나푸르나 라운드 때 차메에서 만났던 학생 커플을 반갑게 만나 같이 햄버거로 아침을 떼웠지만 공항청사안에는 제대로된 식당도 매점도 없었다. 생각보다 너무 빨리 공항에 도착하는 바람에 서너시간을 공항 청사안에서 지내야만 했다. 청사안은 일반적인 국제공항에 비해 좁고 빈약해서 별다른 놀거리가 없었다. 시골의 버스터미날 수준의 조그만한 매점에서 사먹을 수 있는 것이라고는 맛없는 햄버거가 거의 전부였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발권을 하고 승강구가 있는 청사 2층으로 올라갔다. 조금 더 큰 매점과 레스토랑 그리고 선물을 살 수 있는 가게들이 있었지만 특별히 돈을 쓸 일이 없었다. 쓰고 남은 네팔돈을 기부받는 함이 2개 있었는데 한개는 적십자가 그려져 있었고 또 한개는 무종교를 표방한 기부함이었다. '신없는 성덕'을 꿈꾸는 나는 무종교를 표방한 함에 남은 네팔 돈을 넣었다. 공항에서 만난 한국인 모녀여행객으로부터 여행사에서 제공한 도시락을 얻어 먹고 청사안을 수십바퀴를 돈 뒤에나 비행기에 올라 한국으로 향할 수 있었다.

 

 

비행기가 카트만두 상공으로 솟아오르자 멀리 우리가 걸었던 안나푸르나와 함께 에레레스트 산맥이 눈에 들어왔다. 알 수 없는 벅찬 감정이 마음을 흔들었다. 살아생전에 꼭 하고 싶었던 어떤 일을 끝낸것 같은 성취감이 아니라 안나푸르나에서 보낸 시간과 그 시간속에서 보낸 나의 삶을 놓아두고 떠나는 아쉬움이 밀물같이 몰려왔다. 멀리 사라져가는 히말라야 산맥을 바라다보며 살아온 날에 대한 고마움과 살아갈 날에 대한 희망을 되새기며 얇은 잠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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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국 하루전이라고 급할 것은 없지만 마지막 남은 시간을 아껴 숙소를 나섰다.  타멜거리로 나와 아침 일찍부터 문을 연 베이커리에서 따끈따끈한 빵과 진한 커피를 들고 여분의 빵을 가방에 담아 길을 나섰다. 갓 깨기 시작한 타멜거리에는 택시들이 늘어서기 시작했다. 빵집을 나서자마자 택시를 잡았다. 좁은 택시 안에 굵은 향을 2개나 피우고 있던 기사와  300루피에 흥정을 하고 보드낫을 향했다. 역시 난폭운전을 했다. 제발 천천히 가자고 외쳤지만 그는 'God bless you!'를 읊조리며 전혀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그는 지름길인지 좁은 골목으로 접어 들어 노폭에 아랑곳없이 과속과 곡예운전으로 금새 보드낫에 도착했다.

보드낫은 네팔의 사원답게 문앞부터 아수라장이었다. 택시와 사람, 상인과 순례객, 네팔리와 관광객이 뒤엉킨 사이를 뚫고 정문을 향해 다가가자 거지와 사두들의 내민 손이 정신을 빼놓았다. 1인당 160루피의 입장료를 내고 들어선 보드낫은 사진을 통해 미리 낯을 익힌 반구형의 탑을 중심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행렬이 이어지고 있었다. 부처의 눈을 그려놓은 탑은 거칠지만 위엄있고, 단조로운 형태지만 나름 조형미를 갖추고 있었다. 네팔내 최고의 티벳 불교 성지로 알려진 보드낫은 종교를 넘어 티벳 문화와 삶, 전체를 느낄 수 있는 특이한 곳이었다. 머리 장식을 유별나게 하는 네팔 젊은 남성들의 모습도 눈에 띄이고 티벳 승려의 행렬도 이어졌다. 병든 노인네들의 힘겨운 발걸음과 젊은이의 발길 또한 붐비는 보드낫의 풍경은 어쩌면 '티벳'에서 종교의 지배력을 잘 드러내 주는 곳이기도 했다. 티벳 불교에 대해 아는 바가 없지만 스투파를 둘러싼 종교 물품을 파는 가게며 관광기념품 가게며 레스토랑, 호텔의 모습 그리고 보드낫 구역에 속하면서 원형 스투파와 그를 둘러싼 원형의 상가건물뒤 골목으로 들어가면 다양한 채소와 생활용품을 파는 시장이 들어서 있었다. 식육점까지 버젓이 사찰의 영역안에서 조금도 어색하지 않게 공존하면서 또 다른 내세의 삶을 꿈꾸게 만드는 티벳 불교는 이미 '종교'가 아니라 티벳탄의 삶 자체로 보였다. 또한 티벳불교는 티베탄에겐 이미 정치적, 현실적 권력이기도 한 것 같았다.

전날 파샹을 만났을 때 오늘 파샹 역시 보드낫에 올 일이 있었다고 했지만 우리가 보드낫을 떠나기전까지 파샹을 만날 수 없었다. 우리가 너무 이른 시간에 보드낫에 왔기 때문인 것 같았다. 다시 택시를 타고 퍄슈파나트로 향했다. 보드낫에서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있는 파슈파나트는 네팔 흰두교도의 성지로 나는 그냥 흰두교식 '화장장'으로 알고 있던 곳이었다. 사원은 역시 입구부터 상인과 사두들, 그리고 거지와 순례객에다가 우리같은 관광객들까지 뒤엉켜 장터를 이루고 있었다. 한사람당 500루피의 입장료를 내고 사원을 들어서니 가족을 잃은 슬픔을 종교적 의식을 통해 극복하고자 하는 망인의 가족들과 더불어 이 모든 과정에 개입하여 삶을 이어가는 사두와 점성술사 그리고 자칭 '가이드'들의 발길 또한 분주했다.

매표소에서 부터 우리를 따라 나선 '가이드'는 시간당 얼마간의 돈을 요구하며 조금은 성가시게 따라 붙었다. 거부의사를 밝히자 그는 떨어져 갔지만 또 다른 가이드가 다시 우리를 따라 붙었다. 한국어가 농통하지는 않았지만 기본적인 단어는 구사하는 네팔리였다. '화장', '제사', '부자;, '보통사람', '시체' , '3시간', '오천루피' 등의 단어를 구사하며 다가선 두번째 가이드마저 사양했지만 그를 통해 나는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부자를 화장하는 곳과 보통 사람을 화장하는 곳이 다르고, 보통사람들은 오천루피의 비용을 내고 화장을 하고, 시신을 화장하는데는 약 3시간 정도의 시간이 걸리고, 강 한쪽의 사각형 돌판은 화장을 하는 곳이고, 맞은 변 둥근 돌판은 제사를 지내는 곳이라는 사실까지 고스란히 그를 통해 들었지만 나는 팁도 주지않고 그를 내쳐버렸다. 누군가에게 서비스를 받고 돈을 지불하는 일에 익숙하지 않다보니 가이드의 도움을 받는 일이 왠지 어색하기만했다. 구체적인 지식을 얻지 못하더라도 그냥 혼자 조용히 사원의 분위기나 살피며 걷고싶기도 했다. 나중에 생각하니 내가 너무 위축되어 가이드를 거부한 것은 옳지 않은 선택으로 여겨졌다. 혹시라도 이와 비슷한 다음 기회가 있다면 꼭 가이드비를 부담해서라도 도움을 받기로 마음 먹었다.

파슈파티나트의 화장장은 흰두들이 성스러운 강으로 여기는 갠지스강의 지류인 바그마티강을 따라 늘어서 있었다. 파수파티나트를 가로 지르는 바그마티강은 작은 규모에다 수량도 많지 않았고, 시신을 태운뒤에 쓸어넣은 쓰레기와 위에서 부터 유입되는 생활폐수 등으로 강물이 시커멓게 썩어 있었다. 하지만 그 더러운 강물로 시신을 닦는 의식을 치루고 그 강물로 세수를 하고 몸을 씻으며 흰두들은 마음의 평화를 얻고 있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그 강물에 들어가 시신에서 나온 금이빨 같은 것을 얻기위해 강바닥을 뒤지고 있었다. 성스러운 바그마티강에 들어가 하루종일 강바닥을 뒤지는 사람들은 강물에 오래 머문 만치 더 많은 시바신의 가호를 받고, 동시에 강을 통해 물질적 구원까지 받고 있었다.

화장장을 들어서니 막 불붙기 시작한 시신과 다타들어가 뼈만 남은 것 같은 시신 그리고 저멀리 막 종교의식을 치루며 화장을 준비하는 한무리의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화장을 진행하는 사람은 시신이 타들어가는 모습이 흉칙하게 드러나지 않도록 계속해서 시신에 짚을 얹었다. 이전에 덜 탄 시신의 일부를 원숭이들이 들고 다니며 뜯어 먹는 경우도 있다고 들은 적이 있었는데 사원안을 돌아다니는 원숭이 떼가 많았지만 다행히 화장터까지 접근하는 놈은 없어 보였다. 화장중인 시신들은 지키고 있는 가족이나 지인들이 많지 않아 보였는데 화장을 준비하며 종교의식을 치루고 있는 무리는 재법 많은 사람들이 같이 하고 있었다. 죽음이 삶을 이기고, 삶의 증거인 육체마저 지우는 의식이 화장이지만 그래도 한 생명으로 세상을 살다가는 그 순간이나마 누구도 쓸쓸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전의 가난이 죽어서도 계속되고, 생전의 부귀와 영화를 죽어서도 누리는 것을 보면 그래도 죽음보다 삶이 더 강한 것 같았다.

화장을 준비 중인 무리에서 한 여성의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곧 화장을 시작하기위해 강물로 시신의 발을 닦는 마지막 의식을 치루는 과정을 진행하고 있었는데 그녀는 죽은 자의 아내로 보였다. 이제 곧 사랑했던 사람의 시신에 불이 붙고 그가 한 생명으로 이세상을 살았던 물직적 흔적이 지워져버리게 된 순간 그녀는 종교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죽음의 고통 그리고 슬픔에 몸부림쳤다. 결국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죽음의 한계, 그 상실과 잊혀짐의 공포를 어떻게 '종교'가 전부 구제해 줄 수 있겠는가. 정신줄을 놓고 발작적으로 시신을 붙들고 오열라는 그녀의 모습에 나또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애써 눈물을 감추고 바그마티강건너 돌계단을 한참 올라 부도들이 늘어서 있고 그 사이를 원숭이 떼가 한가로이 놀고 있는 언덕위 유적지를 걸었다.

아침 일찍 시작한 여정을 끝내고 타멜로 돌아오니 늦은 점심시간이었다. 안나푸르나 여정을 준비하며 알게 되었던 한국 식당 '소풍'으로 향했다. '소풍'은 산을, 네팔을 사랑했던 남녀가 만나 그 사랑의 증표로 남긴 타멜 뒷골목의 소박한 식당이었다. 산에서 만나 사랑하고, 산에 더 가까이 지내기 위해 타멜에 식당겸 여행객의 쉼터를 열었지만, 아내는 이내 병이 들고 영영 세상을 등져버렸다고 했다. 그들 부부가 꿈꾸었던 '소풍'은 이제 네팔 여성들의 손에 운영되고 있었다. 주인이 바뀌었는지, 어떤 형태로 운영되고 있는 지는 알 수 없지만 여전히 '소풍'은 소박한 쉼터로 우리를 맞았다. '소풍'은 안나푸르나로 히말라야로 떠나거나 되돌아 온 사람들에게 휴식을 취하며 지난 여정을 곱씹고 새로운 꿈을 꿀 수 있게 하는, 산과 세상을 잇는 간이역으로 남아있었다.

소풍에서 '떡뽁기'를 먹고 타멜 거리로 나와 어제 눈여겨 보았던 선물가게에서 작은 목각 몇가지를 구입했다. 생각보다 싸게, 오랜 흥정이 필요없이 새와 소와 물고기, 사자 등의 동물을 부조로 새긴 목각 몇개를 사고나니 작은 배낭이 한짐이 되었다. 숙소로 돌아가 배낭을 내려놓고 다시 타멜 거리로 나왔다. 서점을 들러 네팔 전통문양집고 여신에 대한 책을 사고, 선물가게에서 허브차를 사고, 수퍼마켓에서 유명한 인도산 립그로스인 '립밤'을 샀는데 그래도 시간이 남았다. 남은 시간동안 가 볼 만한 곳으로 [Garden of dreams]로 정하고 찾아나서니 타멜쵸크를 지나 왕궁 쪽으로 방향을 잡자마자 바로 그곳이었다.

높은 담으로 둘러싸진 '꿈의 궁전'은 카트만두 시내를 처음 걸었을 때 이미 그 앞을 지나갔던 곳이었다. 까페와 레스토랑이 있는 작은 공원 정도로 생각하고 들어선 '꿈의 궁전'은 군인인지 경찰인지 정복차림의 근무자가 있고 입장료를 받고 있었다. 매표소를 지나 궁전안으로 들어서니 '꿈의 궁전'은 네팔과는 다른 그리스 로마 시대의 정원인양 서구적 형태의 건축물과 조경으로 꾸며진 대저택으로 보였다. 나눠준 안내문을 보니[꿈의 궁전]은 1920년대 쯤 한 장군의 사저로 지어졌다가 그의 실각으로 방치된 뒤 정부에 귀속되었다고 했다. 그 뒤 호주정부의 지원으로 원래 규모의 절반정도로 복원된뒤 네팔 정부 문부성 관리하에 유료 공원으로 개방하고 있다고 했다.

'꿈의 궁전'은 카트만두의 연장이 아니라 철저히 단절된 서구적 공간으로 다가왔다. 건축물은 물론이고 너른 정원, 정원에 깔린 잔디, 아름다운 조경수들, 장미덩쿨, 분수와 파고라, 벤치등 모든 것이 서구적 조형미를 띠고 있었는데 신기하게도 카트만두 시내 한 복판에 있는 공간이 고요하기기까지 했다. 어느 것 하나 카트만두스러운 점이라곤 없는 '꿈의 정원'이지만 다행히 정원을 노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네팔리였다. 사실 '꿈의 궁전'은 카트만두를 찾고 안나푸르나나 에베레스트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찾기에는 뭔가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서구적 멋을 한껏 낸 정원이지만 서구인이 혹하기에는 뭔가 부족했다. 적어도 네팔을 찾는 서구인 대부분은 특히나 더욱 네팔스러운 것들을 찾아 나설 것이기 때문이다. 정원 구석구석의 벤치에는 청춘 남녀들이 뜨겁게 포옹을 하고 사랑을 속삭이고 있었고 우리는 그 사이를 지나 정원을 한바퀴 돌고 못들어진 야외 까페에서 커피를 마셨다. 해가 떨어지는 카트만두의 별천지 '꿈의 정원'에서 커피 향에 취해 지난 여정을 되돌아보고 내일이면 돌아가야 될 한국에서의 생활을 가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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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안한 잠을 푹잤다. 눈은 일찍 떴지만 잠은 충분했다. 남은 경비를 계산해 보고 필요한 선물목록을 만들고, 남은 일정을 살펴보고 일어나 세수를 하고 전날 사둔 빵으로 아침을 떼우고도  7시가 되지 않았다. 다시 침낭속으로 들어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 '바가바드기타'를 읽었다. 브라만과 아트만, 그리고 현신인의 이야기들, 행동하지도 느끼지도 않는 경지, 절대지... 아침부터 머리가 지끈 거렸다.

8시 30분 더이상 견디지 못하고 숙소를 나왔다. 타멜 거리를 벗어나 오늘 목적지인 세계문화 유산에 등제된 박타푸르행 버스파크를 향해 길을 더듬어 나갔다. 하지만 지도와 실제를 일치시키기엔 지도는 너무 단순했고 길은 너무 복잡했다. 한참을 걷다가 출근중인 행인에게 길을 묻고 우리 위치를 확인해보니 우리는 반대 방향으로 걸어 버스파크에서 더 멀어져 있었다. 박다푸르행 버스 파크는 타멜에서 걸어가도 될 만치 가까운 곳이었는데, 아침부터 지치기 싫어 결국 택시를 타고 버스 파크에 도착했다. 버스를 타고 가다 개통한지 얼마되지 않는 멋진 도로를 달렸다. 네팔와서 한번도 보지 못한 신호등까지 설치되어 있는 도로 곳곳에는 일본의 원조로 만들어졌음을 알리는 안내 간판이 있었다. 버스를 탄지 30여분 지나 박타푸르에 도착했다. 한 사람당 15달러나 하는 비싼 입장료 때문에 잠시 망설였지만 그냥 포기하기엔 너무 아쉬웠다.

막상 박타푸르 구역안으로 들어서니 박다푸르가 왜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고 입장료가 그만치 비싼지 금방 공감이 되었다. 지금은 사라져버린 옛왕국의 영화를 느끼면서 살아있는 문화 유산사이를 걸었다. 박다푸르 구역내의 모든 건물은 대부분 붉은 벽돌로 지어진 2백년이상된 건물들이지만 여전히 사람이 살고 있었다. 전시용 으로 만든 '민속촌'이거나 거주민이 없이 보전되고 있는 박제화된 유적지가 아니라 그대로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시가지 자체가 그냥 살아있는 문화유산이었다. 카트만두 시내에서 만난 아산바자르의 골목에서 보았던 낡은 건물의 때묻고 썩고 삯은 문지방, 갈라진 벽돌 그리고 골목을 넘쳐나는 쓰레기와 가난한 네팔리의 삶은 지금은 사라진 네팔의 옛 영화를 증명하기에 조금은 부족해 보였다. 하지만 박타푸르에 들어서자 여전히 가난한 사람들의 삶이 가감없이 드러나는 중에도 밀집한 적벽돌 건물과 사원, 탑과 길을 덮은 붉은 벽돌의 화려한 문양 등이 지금은 떼가 타고 낡고 삯았지만, 한 때 이 왕국이 얼마나 번창했고 아름답고 위대한 문명을 자랑했는지 쉬 느낄 수 있었다.

아침 일찍 박다푸르를 찾은 덕분에 우리가 도착했을 때 구역내에는 관광객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다행히 관광지가 아니라 주민들의 삶의 터전인 박타푸르의 모습을 느낄 수 있어 오히려 좋았다. 등교하는 학생들과 출근중인 주민들의 분주한 발걸음으로 고색창연한 박다푸르는 삶의 훈기가 돌고 생동감이 넘쳐났다. 오늘 하루 다른 일정은 전혀 잡혀있지 않았고 오직 박다푸르만 보고 느끼고 걸으면 되었기 때문에 출근길에 바쁜 네팔리 사이로 너긋하니 골목과 광장을 오가며 박다푸르의 과거와 현재를 소요했다. 골목 모퉁이에 차려진 구멍가게의 물건들을 살피고, 시골장터같은 골목을 지나면서는 우리 역시 장보러 나온 사람마냥 네팔리와 휩쓸려 난전을 두루 살폈다.

 

시간이 지나고 하나둘 관광객의 발길이 늘어나자 우리는 다시 그들과 어우려져 관광객의 눈으로 다시 박다푸르를 보기 시작했다. 같이 광장을 가로지르며 탑과 석조 조형물을 배경으로 사진도 찍고, 군인들이 경비중인 흰두사원을 이교도가 들어갈 수 있는 지점까지 들어가도 보고, 박다푸르의 과거와 현대의 예술작품이 동시에 전시되어 있는 박물관도 들렀다. 광장은 점점 더 관광객의 발길이 늘어났지만 의외로 박물관 안은 한적했다. 사실 박물관 안에 전시된 작품보다 박물관 바같에서 만날 수 있는 네팔리의 삶과 삶을 이어가는 공간, 그리고 삶이 묻어나는 각가지 생활용품, 장식 등이 더 예술적이라서 굳이 박물관에 입장료를 내고 들어올 필요가 없는지도 물랐다. 박물관에 전시된 작품보다 전시공간이 된 건물이 더 멋있는 박물관을 나왔다. 광장을 내려다볼 수 있는 탑에 올라 박타푸르 광장들을 쓸고 지나가는 관광객과 네팔리의 걸음속에 묻어나는 박다푸르의 옛 향기를 맡고, 현재의 삶을 느끼고, 그 미래를 점쳤다.  

박다푸르의 중심 듀발스퀘어에 이르자 수년전 아내가 네팔 여정중에 잠시 들렀지만 정확히 기억해 내지 못해 안타까워했던 네팔의 사원을 회상해 내었다. 분명 카트만두 어디 전통 시장 같은 곳이었다며 카트만두에 도착하자 마자 이야기를 꺼냈지만 아산바자르와 타멜을 포함해 카트만두 시내를 다 뒤지고도 찾아 내지 못한 추억의 장소를 박타푸르에 와서 확인하게 되었다. Cafe Nyatapola! 듀발스퀘어 한켠에 자리잡고 있는 3층 짜리 낡은 목조건물로 바로 그 카페가 아내와 여성문화계 선배 동료들과 함께 티벳을 거쳐 잠시 네팔에 들렀을 때 차를 마시며 네팔의 향기를 느껴볼 수 있었던 곳이었다. 배도 출출해지고 다리고 지쳐갈 즈음 Cafe Nyatapola에 들어섰다. 제일 위층 듀발스퀘어 전체가 내려다 보이는 모퉁이에 자리에 잡아 간단한 샌드위치를 들고 커피를 마셨다. 이제 한가롭게 차라도 마시는 시간이면나의 가슴에는 여행의 설레임보다 끝나가는 여정에 대한 아쉬움이 차올랐다. 다 지나가리다. 하지만 세상의 섭리가 어그러지는 숱한 순간들이 있었듯 내 작은 삶을 이루는 지금의 시간도 잠시 잠깐이나마 흐름을 멈춘다면 얼마나 좋을까...

박타푸를를 빠져나와 타멜행 버스에 올랐다. 버스는 곧바로 카트만두로 접어들었고 트리뷰반 공항을 스쳐지나갔다. 카트만두-박다푸르간 새길을 따라 번화가를 달리자 건물외벽에 늘어선 간판과 광고판이 눈에 들어왔다. 익숙한 삼성과 엘지같은 한국기업은 물론 코카콜라, 소니같은 세계적 자본의 간판이 즐비했다. 척박한 땅 네팔에서도 자본은 자신의 지배 공간을 확장하며 무한 증식을 계속하고 있었다. 익숙한 세계적 자본의 광보판보다 더 인상적인 것은 어학학원을 홍보하는 플랭카드였다. 네팔은 편집광처럼 영어 공부에 몰빵하는 한국보다도 어쩌면 더 외국어 공부에 자신의 미래를 거는 사람이 많은지도 몰랐다. 대부분의 초등학교에서 외국어를 가리키고 아예 '외국어 초등학교'까지 있는 모양이었다. 외국어를 배워 외국으로 나가 돈을 벌고 자신의 꿈을 실현하는 기회를 잡거나, 네팔에 남아서도 관광을 위시한 비지니스에 외국어가 필수적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런지 아니면 영어와 네팔어의 구조적 유사성 때문인지 초급 교육을 받은 정도면 다 영어를 어느정도 구사한다고 했고 실제로 만나보니 그런것 같았다. 대학나온 한국사람보다 초등학교만 나온 네팔사람들이 영어를 더 잘 하는것 같았다.

그런데 학원 안내 플랭카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드러나듯 몇년전부터 네팔에는 한국어 붐이 일어났다고 했다. 한국은 그들에게 기회의 땅이고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고 했다. 네팔리에게 물어보니 일본을 더 선망하지만 일본은 현실적으로 들어가 일자리를 덛기가 너무 힘들고 두번째로 한국을 선호하는데 한국은 자신만 잘하면 들어가 일을 구할 수 있는 현실적으로 실현 가능한 나라로 여긴다고 했다. 그러다보니 최근에는 한국어가 제일 인기있는 외국어가 되었다고 했고, 역시 여행중에 가이드든 포터든 지나는 사람들이건 우리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이야기하면 자가와 말을 걸고 자신이 아는 두어마디의 한국어를 자랑하기도 했다. 박타푸르를 나와 카트만두거리를 달리면서 한국 자본의 힘을 느껴야 하는 이율배반적인 묘한 감정을 안고 타멜에 도착했다.

인드라쵸크, 아산바자르 그리고 타멜거리를 배회하다 다시 J.Vill을 찾아나섰다. 다행히 안나푸르나 라운드 때 차메에서 만났던 한국학생들을 만났다. 참체에서 포카라로 먼저 떠난 학생들은 반디푸르에서 머물다 오늘 카트만두에 들어왔다며 J.Vill의 위치를 알고 있었다. 드디어 파샹을 상봉했다. 혹시라도 카트만두에서 만나 맛있는거 사먹자고 한 약속이 빈말이 될까봐 걱정했었는데 다행히 파샹을 만나게 되어 너무 기뻤다. 파샹과 청량음료와 피자를 먹고 파샹의 소개로 자신의 친구가 운영한다는 '캐시미르 샾'에 들러 야크와 야생 염소의 속털로 만들었다는 머플러를 구입하고 파샹의 삼촌이 운영한다는 여행사에 들러 인사를 나누었다. 파샹까지 봤으니 마음에 남을 일들이 다 다 끝나 마음도 편해졌다. 해도 저물어 숙소에 들러 구입한 선물을 내려놓고 '경복궁'이라는 한식당에 들러 맛있는 된장찌게를 먹었다. 그리고 내일의 여정을 그리며 '네팔짱'의 두번째 밤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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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번 잠이 깼다. 새벽 일찍 서둘러야하는데 혹시라도 늦잠을 잘까봐 걱정이 되기도 했고, 포카라에서 마지막 보내는 밤이 많이 아쉽기도 했다. 새벽 5시에 일어나 서둘러 짐을 쌌다. 호텔비 아까워 핫샤워를 하고 6시에 로비에 내려가 다이닝 룸에 앉았다. 곧바로 아침 주문을 하고 기다렸다. 짧은 네팔 여행 경험상 예약을 해도 시간이 되기 전에 미리 좌석을 차지하고 있어야 제시간에 음식이 나왔기 때문에 오늘은 미리 자리를 잡은 것이었다. 6시 30분이 넘어서야 음식이 나왔다. 먹는둥 마는둥 허겁지겁 허기를 속이고 체크아웃을 하고 투어리스트 버스파크로 뛰다시피 걷기 시작했다. 택시비 200루피 아끼려고 새벽부터 강행군을 한 것은 아니지만 중간에 택시를 잡으려니 택시도 없고 또 조금 억울하기도 했다. 7시까지 꼭 도착해야 된다던 매표소 직원의 말을 신뢰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불안한 마음에 무거운 배낭에도 아랑곳 없이 땀이 나도록 뛰어 정각 7시에 버스 파크에 도착했다. 

버스파크에는 벌써 사람들이 붐비고 대형 버스들이 10여대 줄줄이 서있는데 그중에 우리가 탈 BABA버스를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버스들 대부분은 겉으로 봐서 멀쩡해 보였고, 일부만 로컬버스처럼 지붕에 짐을 싣고 사람이 오르락내리락 거리고 있었다. BABA라는 국영 회사의 투어리스트 버스는 원래 여행객 전용버스로 포카라에서 카트만두까지 운행하는  최고 비싼 버스였다. 1일당 18불에 물과 점심이 제공되는  바바버스는 내가 알고 있던 것과는 달리 투어리스트보다 네팔리 승객이 훨씬 많았다. 어떤 자료에서는 15불짜리 민간 투어리스트 버스가 훨씬 써비스가 좋다고 되어 있었지만 나는 그래도 네팔 정부를 더 믿고 싶었다.

7시간 가까이 버스는 고속도로를  달렸다. 말이 고속도로지 거의 내가 사는 봉화의 군도보다 못한 포장 상태에 소와 염소, 개와 오토바이가 수시로 길을 막고 군데군데 포장이 부서져 비포장길이나 진배없는 산길을 꼬불꼬불 달렸다. 그래도 버스비 값어치를 하는지 급가속이나 급제동, 위험한 추월없이 편안한 운전을 하는 기사덕에 마음 편안해서 좋았다. 출발한지 1시간 조금 지나 한 휴계소에 들러 잠시 쉬다가 다시 달려 11시 30분 정도에 한가로운 마르샹디 강가의 한 레스토랑에 서 맛있고 충분한 점심을 먹었다.  2시가 넘어 버스는 S자 오르막 길을 한참 오른 뒤에 카트만두 검문소를 통과했다.

그때부터 모든 게 카트만두다워졌다. 도로는 먼지와 쓰레기 투성이고 거기다가 교통체증까지 겹쳐졌다.  도시 외꽉의 굴뚝들은 거의 대부분 붉은 벽돌을 굽는 공장들로 보였는데 굴뚝이 만들어 내는 풍경이 이국스러움을 더했다. 막히는 길을 힘겹게 비집고 버스는 타멜근처의 투어리스트 버스파크에 도착했다. 버스를 내리자 마자 처음 포카라에 도착했을 때 처럼 택시와 호텔 삐끼들이 몰려와 혼줄을 빼어 놓았다. 그러나 한번 당하지 두번 당할 수는 없는 일, 냉정하게 바로 여기가 목적지고 예약해 놓은 호텔이 있다고 시치미를 떼고 유유히 타멜거리를 찾아 나섰다. 하지만 타멜을 찾기 위해 한참을 헤메고 두세번을 묻고, 다시 타멜거리에서 예정했던 네팔짱이라는 숙소를 찾기 위해 또 한참을 거리를 헤메고 너댓번은 더 물어야했다. 먼저 기준지점인 타멜쵸크를 찾고 근무중인 경찰과 군인들의 길안내로 가까스레 네팔짱에 도착했다.

룸 챠지가 하루 350루피 한국돈으로 5000원인 셈인데, 싼 만치 시설은 형편없었다. 그래도 다른 호텔을 찾아 나서기에는 피곤하기도 했고 남은 경비도 조금 불안하기도 해서 그냥 짐을 풀었다. 다시 거리로 나와 릭샤와 택시, 네팔리와 외국인 여행객들로 붐비는 카트만두의 중심 타멜거리를 헤메기 시작했다. 여행사와 장비가게, 환전소, 호테르 식당, 각종 기념품 선물가게가 줄줄이 들어선 타멜거리는 그야말로 여행객의 해방구 같은 그런 분위기 였다. 여행객에게 필요한 모든 물품과 서비스가 있고, 모든 것이 여행객에게 맞춰져 있는 거리, 거리를 활보하는 사람의 절반은 여행객이고 모두가 여행객을 통해 먹고사는 거리, 여행객의 요구가 곧 법이 되는 거리가 타멜이었다.  릭샤를 끄시는 한분이 우리의 거절에도 불구하고 릭샤를 타라고 끊질기게 요구하자 멀리서 경찰이 다가와 바로 제지했다.

타멜에서 제일 먼저 할 일은 우리 포터 파샹이 근무한다는 J.Vill을 찾아 나서는 일이었다. 하지만 허탕을 쳤다. 지도를 보고, 네팔리들에게 물어도 보았지만 J.Vill은 쉬 찾을 수 없었다. 작은 여행사기도 했지만 워낙 길이 복잡해서 어디가 어딘지 알 수가 없었다. 아직 3일이나 일정이 남은 상태라 선물을 구입하기도 이른것 같아 이 가게 저가게를 기웃거리며 구경을 하다가 저녁을 맞았다. 저녁은 'Food Bazar'라는 팝송이 흐르고 네팔의 젊은이들이 찾는 듯한 '현대적 레스토랑'에서 먹었다. ' 탄도리'라고 하는 장작으로 구운 닭고기와 맥주을 마시고 카트만두에 들어온 첫날의 하루를 접었다. 이밤 모든 생명가진 것들의 평온을 빌며  네팔짱에서의 첫날 밤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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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6시 30분에 파샹과 같이 아침을 먹고 작별을 했다. 파샹은 7시에 투어리스크 버스파크에서 카트만두행 버스를 타기로 되어 있었다. 우선은 작별을 하지만 몇 일뒤 카트만두에서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고 아쉬움을 달랬다. 룸에서 잠시 시간을 보내고 우리 부부도 호텔을 나섰다. 파샹의 안내없이 지도와 짧은 영어에 의지해 투어리스트 버스파크까지 걸었다. 학교운동장 보다 너른 빈터가 버스파크라고 했다. 텅빈 버스파크에 붙은 가게에 들러 물어보니 바로 거기서 예매를 하라고 했다. 아직 교통편에 대한 마음을 정하지 않았지만 매표소 직원은 내일 아침에 바로 떠날 차표를 사지 못하면 카트만두에는 다음 날 갈 수 밖에 없다며 미리 예매할 것을 강권했다. 긴 판단없이 그냥 네팔 정부가 운영하는 일종의 국영 버스표를 예매했다. 1인당 18불에 미테랄 워터 한병씩에 고급 점심식사를 제공한다고 했다. 모든 종류의 카트만두행 버스는 7시부터 출발을 시작하기 때문에 반드시 7시 이전에 버스 파크에 도착해야된다는 알듯 모를듯한 설명을 했다. 7시면 7시지 7시 부터 출발하는데 정확한 출발시간을 미리 알수 없고 그래도 7시까지는 버스파크로 나와있지 않아 버스를 놓치면 내 책임이라니 조금은 억울했다. 하지만 여기는 네팔이고 나는 여행중이니 모든 것이 용납 되었다. 여행은 사람을 관대하게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버스파크를 나와 멀리 마차푸차레가 보이는 북쪽을 향해 시가지를 계속 걸었다. 시끌벅적한 시장통을 지났다. 시장은 삶의 의미를 되새겨 보게 하는 참 좋은 순례지다. 아우성과 몸부림이 넘쳐나는 장바닥을 지나며 우리 삶의 끈을 잇는 생명활동의 근본을 되새겼다. 먹고 사는 일이 다 그렇고 그렇겠지만 네팔거리에서는 늘 날 것으로 삶의 속살을 마주 할 수 있었다. 호객으로 목이 터져라 외치지만 그들은 늘 즐거워 보이고, 한가해 보이다 못해 심심해 보였다. 남루한 형색에 좌판의 물건을 다 팔아도 돈 될 것 같지 않은 형편이지만 그들에게 그것은 삶은 전부일 것이다. 그래도 그들은 심각하고 초조하고 우울하지 않았다. 뭐, 자살율 세계최고의 사회, 한국에서 온 사람에게는 어떤 나라를 여행해도 다 그렇게 보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시장을 지나고 주택가도 지나고 그냥 포카라를 하염없이 걸었다. 레이크사이드를 벗어나자 마자 외국인 관광객임이 확 드러나는 우리 차림이 사람의 눈길을 끄는 것 같았다. 아이들이 따라 붙고 'Hallo!를 외쳤다. 나중에는 대여섯명의 아이들이 무리를 지어 반복적으로 할로를 외치며 따라붙었다. 지나ㅏ는 여성 여행객으로 보이는 사람에게 다가가 주머니에 손을 집어 넣어 놀라게 만들고 내게도 가까이 다가와 카메라를 뺏어려 드는 아이까지 있었다. 어느 순간 아이들이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뭐 그래봤자 아이들은 아이들이니깐 웃어넘길 수 밖에 없었다. 어른들도 눈만 마주치면 '니하오?' ' 안뇽하세요' '곤니찌와!'를 번갈아 외치며 방긋 웃어준다. 친절한 네팔리들이 반갑고 고마우면서도 마음이 조금은 아려왔다. 네팔리들은 이방인에 대해 철저히 방어의식을 버려버린 사람들 같았다.

네팔에 있는 거의 대부분의 현대적 시설들은 외국의 원조에 기대어 지을 수 있었고 지금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세계 12대 빈국의 하나인 네팔의 주산업은 농업이지만 다음은 관광이라고 했다. 네팔 농업의 조건은 자연적으로나 기술적으로나 거의 최악으로 보였다. 현대적 공장이라곤 하나도 없는 네팔은 오직 관광에 목을 멜 수밖에 없는 형편이 분명했다. 그래서 그런지 네팔은 관광객을 상대로한 적대적 범죄가 거의 없고, 젊은 여성이 혼자서 트레킹을 떠나도 위험하지 않을 정도라고 했다. 관광객에게 위해를 가하면 자신들의 밥줄을 끊는 셈이 되기 때문에 일종의 금기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뿐아니라 레스토랑이며, 롯지며, 호텔이며 관광객이 머무는 곳은 모두 최대한 서구인에 맞추어져 세팅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키가 179cm인 내가 사용하기에 불편할 만치 높게 달리 소변기며, 세면대며 아예 네팔리는 그런 시설을 사용하지도 않을 것이라는 전제하에 지어진 시설도 그렇고 안나푸르나 라운드중에 만난 롯지 대부분의 식단 역시 서구인의 기호에 맞춰져 있었다. 먹고 사는 일이, 그리고 네팔의 가난이 가슴이 아팠다.

스리야나 사거리를 지나 길은 넓었지만 인파는 별로 없는 한산한 '뉴로드'로 접어들었다. 지도와 표지판판을 따라 주택가 골목길을 통과하니 다시 큰 길을 만나고 길건너 오늘의 첫 목적지인 'Regional Museum'이 눈에 들어왔다. 박물관을 들어서니 단체관람 온 어린 학생들이 막 관람을 마치고 나왔는지 기념사진을 촬영중이었다. 우리가 다가가자 교사로 보이는 여성이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을 했다. 단정한 교복을 입고 나란히 서있는 아이들이 싱그럽고 이뻤다. 그 아이들이 밝은 미소에 네팔의 미래가 보였다. 소액의 입장료를 내고 들어선 전시장은 낡고 초라했다. 소장된 민속자료들도 먼지가 앉고 거미줄이 쳐져 소박한 전시물이 더욱 초라하게 보였다. 농기구에서 부터 생활 연장들을 비롯해 각 민족의 결혼예식과 장례식의 전통을 재현해 놓은 전시물을 둘러 보는 일은 시간을 아껴야하는 여정에서 불필요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전시장을 나와 정원을 걸으며 그래도 이 박물관이 보다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길 바라는 마음에 여행기를 쓴다면 꼭 다음 여행객들이 이 곳 박물관을 찾아가볼 만한 곳으로 여기게 만들고 싶었다. 낡고 초라한 민속박물관이지만 네팔이의 삶을 느껴 볼 수 있는 귀한 기회를 누리는 일이 바로 이 박물관을 유지하고 더욱 풍성하게 가꾸는 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Regional Museum'을 나와 오늘의 두번째 목적지인 올드바자르를 향했다. 올드바자르는 지금까지 지나온 다른 시장에 비해 더 규모가 크고 인파가 붐볐다. 여행자의 거리인 레이크 사이드보다 경기가 좋지 않은 시장인지는 모르겠지만 포카라의 가장 번화한 거리가 아닌가 여겨졌다. 시장을 관통하며 오렌지를 한봉지 사먹고, 아내는 문양 도장을 파는 상인에게 재미로 손등을 내밀었다가 도장을 찍히고 생각지도 않은 돈을 뜯기기도 했다. 어린 거지 여자아이에게 작은 돈을 건네자, 자신의 동생들을 데리고 와서는 동생들에게도 돈을 달라고 떼를 썼다. 올드 바자르를 지나며 겪은 사소한 애피소드가 우리의 여정을 풍부하게 했다.

세번째 목적지인 Bhindhyabasini사원을 향했다. 지도상으로는 얼마되지 않는 거리인데 골목에서 길을 잃고 헤메다 보니 시간을 지체했다. 배는 고파왔고 마땅히 사먹을 만한 곳이 없었다. 낡은 이삼층 짜리 벽돌 건물이 늘어선 전통마을 같은 거리를 지나고 버스파크로 보이는 지역을 벗어나자 겨우 간판을 찾고 목적지에 도착했다. 사원은 언덕위에 세워져 있고 그 아래 시민공원같은 잔디밭에는 가족나들이를 나오 네팔리들이 붐비고 있었다. 어쩌면 사원을 참배한 뒤 한가한 시간을 가지고 있는지도 몰랐다. 사원을 오르는 계단에는 적선을 요구하는 장애인과 노인, 아이들의 손길이 발걸음을 잡았다. 이 역시 보시를 통해 받는 사람과 베푸는 사람이 더불어 굶주림을 면하고 업을 벗는 종교적 의식의 한가지로 보였다. 사원은 큰 예배가 있는 날인지 좁은 경내가 사람들로 꽉차있었다. 여기저기 향불이 피어오르고 수십명씩 뭉쳐 탑을 돌고 무엇인가를 신상에 뿌리는 등의 의식을 진행했다. 사람들의 열기와 소음, 특히나 향불 연기 때문에 경내에 오래 머물 수가 없었다. 사방에 뿌려져 흰두교 특유의 붉은 색이 주는 공포감과 향불 연기가 품은 알 수 없는 냄새에 쫒겨 사원 뒷편의 계단을 통해 사원을 벗어났다.

공원과 사원을 올라가는 계단 근처에는 몇몇 식당이 성업중이었다. 허기라도 면하기 위해 이곳 저곳을 둘러 봤지만 이곳은 외국인이 찾는 관광지가 아닌지 우리가 먹을 만한 음식을 팔고 있지 않았다. 딱 한 군데 스파게티 등의 서양식 메뉴가 있는 식당에 들어섰지만 오늘은 식당 전체가 예약되어 있어 손님을 받을 수 없다고 했다. 할 수 없이 길가 조그만 구멍가게 겸 식당에 들어가 종류를 알수 없는 음식을 골고루 선택해 허기를 떼웠지만 너무 달아 식사대용이 되지 못했다. 네팔에 들어와 근 한달만에 처음으로 먹기에 힘든 음식을 시킨셈이었다.

오늘 네번째 목적지인 Gurkha Memorial Museum을 향했다. 사실 말이 목적지지 그냥 포카라라는 도시를 구석구석 걷고 싶어 정할 일정이었다. 포카라를 남북으로 거의 관통해 구르카 기념박물관에 도착했다. 다리도 아프고 부실한 점심때문에 허기도 졌다. 구르카 기념 박물관은 구르카족이라는 특정 민족의 민속 박물관 정도로 생각했는데 막상 박물관을 들어서니 완전히 군사박물관이었다. 박물관은 구르카족이 얼마나 용맹한 민족인지 그리고 얼마나 많은 전쟁에 참가해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영연맹이 지어준 것이라고 했다. 시대에 따른 쿠르카 용병의 변천사와 복장, 무기 등을 전시하고 있었고 특히 참가한 전투와 그 전투에서 전공을 세운 전쟁 영웅들을 기념하고 있었다.

사실 전시장을 도는 내내 분노가 치밀었다. 중간에 박물관을 나오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견디기 힘들었다. 특정 민족을 선택해 그들의 충성심과 용맹성을 부추켜 필요한 용병으로 길러 자국의 이익을 위해 전쟁에 투입해온 사악한 제국주의의 범죄행위를 칭송하고 기념하기 위한 공간에 입장료를 내고 들어왔다는 사실이 못내 억울했다. 아직도 영국주도로 용병을 모집하고 있고, 네팔 내에는 용병 양성소가 수십개나 운영되고 있으며, 이삼년에 한번씩 용병을 모집할 때는 거의 100대 1의 경쟁률을 기록한다는 사실이 너무나 가슴 아팠다. 가난한 네팔리가 단기간에 큰 돈을 질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길이 용병이 되는 것이라는 사실이 가슴 아팠지만, 그들의 삶의 조건을 이용해 그들의 목숨을 사서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투입하는 '선진국' 영연방의 야만성이 용납되는 현실에 화가 났다.

구르카 박물관을 나와 오늘의 마지막 일정인 안나푸르나 박물관을 들렀지만 우리가 도착했을 때 막 문을 닫고 있었다. 문을 닫던 직원은 박물관은 오후 3시에 문을 닿으니 내일 다시 오라고 안내했다. 하루종일 걸은 탓에 몸도 지치고 해서 숙소가 있는 레이크사이드로 가는 로컬버스를 올랐다. 버스 정류장이 있긴하지만 아무데나 버스를 세우고 승객을 싣고 내리고 하기 때문에 그냥 길가에 서서 지나는 버스에 대고 '레이크 사이드'만 외치면되었다. 레이크 사이드로 가는 길에 시위대에 길이 막혔지만 우회도로를 통해 금새 레이크사이드 입국에 도착했다.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로 떠나기 전에 들렀던 레이크 사이드 거리는 한국인 천지였는데 그동안 한국인은 사라지고 중국인 천지로 바뀌어 있었다. 코리언시즌중이라지만 설날을 맞아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한국으로 돌아가 버렸기 때문이었다. 벌써 낯 익어버린 레이크사이들 거리를 걷다가 저녁 식사를 하기에는 으른 시간에 허기를 면하기 위해 페와호수가의 한 레스토랑에 들렀다. 빵과 커피를 시키고 평화로운 호수의 풍광에 취해 있는데 레스토랑 스텝 한 분이 말을 걸어왔다. "Are you Chiness?" 우리는 한국인이라고 대답하자 그는 바로 한국말로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나 하국 가요. 세달있으면 가요." 그분은 곧 한국에 노동자로 들어갈 예정이시고 5년계획으로 한국에서 일을 하실거라고 했다. 그리고 바로 이 레스토랑에만해도 3명이 같이 한국으로 가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누운 의자에 기대어 지는 해가 지는 페와 호수를 바라다보고 있었고 그는 서서 말을 걸었다. 어색한 자세를 바로 잡았지만 참 할 말이 많으면서도 막상 무슨 말을 해야할지 당혹스러웠다.

그는 곧 시작할 한국생활에 대한 기대와 두려움을 동시에 드러냈다. 한국인을 만나 최대한 한국에 대해 이야기를 누고 싶은 눈치였다. 그는 한국의 추위에 대해 물었다. 여기보다는 많이 추울 거라고 대답하고 한국사람은 네팔 사람이 부지런해서 인기가 많다고 말했지만 순전히 한국 자본가의 입장에서 나온 평가일뿐이라고는 말하지 못했다. 이곳에 와서 네팔에 오래 체류하신 분들 입을 통해 네팔사람이 부지런하고 순하고 말잘들어 한국 공장에서 다른 동남아 노동자에 비해 인기가 많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지만 그것은 순전히 일을 시켜 먹는 사람들의 기준에 따른 평가일 뿐이었다. 한국사람은 성질이 급하고 '빨리빨리'를 입에 달고 다니지만 좋은 사람들이고, 한국은 좋은 나라라고 말했지만 다하지 못한 말이 입안에 맴돌았다. 하지만 진심을 다해 축하를 드리고 레스토랑을 나섰다.

"좋은 경험이 될겁니다. 축하드립니다.!"

페와 호수가를 거닐다 커피를 마셨던 레스토랑과 인접한 '부메랑 레스토랑'이라는 곳에서 포카라의 마지막 저녁을 보냈다. 포카라의 마지막 밤은 조금은 화려하고 싶었다. 스테이크를 시키고, 민속공연을 보면서 날이 저무는 페와 호수를 두눈에 가득 담았다. 네팔리들이 전통의상을 입고, 전통 악기를 연주하며, 렛산피리리를 부르는 저녁... 테이블 사이에는 장작불이 이글거리고, 호수 건너편 대기속으로 사라져가는 겹겹히 쌓인 산과 산들 그리고 포카라의 빛을 모아 반짝이는 페와 호수의 잔물결을 바라다 보다가 나는 갑자기 진해 앞바다가 목이 메이도록 그리워졌다. 해지는 바다의 섬들 사이를 배를 타고 지나며 그 아름다움에 취해 "그래 지금 여기서 죽어도 좋을 것 같다'며 호기롭게 생각했던 스무살 시절이 생각났다. 그 청년은 이제 패기를 잃고 세월의 힘에 씻겨 50대 장년의 눈으로 해지는 호수를 바라다 보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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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푸르나의 아쉬운 마지막 밤을 보내고 빗소리 들으며 아침을 맞으니 오늘은 산을 떠나 도시 포카라로 들어서는 날이다. 아침을 들고 서성이다 비가 가늘어지자 과감히 지름길을 잡아 담푸스로 향했다. 담푸스 가는 지름길은 트레킹 코스를 벗어나 수목과 바위가 어우러진 소로들이었다. 간혹 방목중인 소들이 길을 막고 있었고, 논밭이 보이는 언덕위에서 길이 수풀 속으로 사라져 당혹스럽기도 했지만 큰 마을이 인접한 야산을 헤쳐 나가기엔 큰 어려움이 없었다. 담푸스는 차량이 들어올 수 있는 큰 마을이었다. 넓은 비포장길을 따라 형성된 건물은 롯지와 가게를 겸한 주택들이 많았고 수공예 기념품을 만들고 파는 공방도 여럿 보였다. 한 공방 앞을 지나자 젊은 남자가 직접 만들었다는 천 제품을 들어 보이며 한국어로 호객을 하기도 했다. 오스트렐리안 캠프를 떠난지 한 시간도 안되어 우리는 이미 도시로 접어든 느낌이었다. 담푸스를 지나 패디로 향하는 길은 논밭사이의 오솔길과 농가와 농가를 잇는 아름다운 돌길이 이어졌다. 길을 나설 때가지 뿌리던 비가 그치고 투명한 햇살과 따스한 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분명 안나푸르나는 한겨울인데 고도를 낮추어 페디로 접어드니 한국의 봄날처럼 온화한 기운이 넘쳐났다.

오스트렐리안 캠프를 떠난지 두세시간이 지났을까, 페디에서 포카라 나야풀간 도로와 만나는 가파른 돌계단을 내려서자 파샹이 불러놓은 택시가 기다리고 있었다. 택시가 과속과 위험한 추월을 시작하자 이미 습관이 되어버린 요구를 했다. '나는 바쁘지 않으니 천천히 운전해 주세요.' 그래도 그 한마디에 택시는 속도를 줄였고 이내 네팔 최고의 현대적 도시인 포카라에 접어들었다. 포카라 떠난 지 몇일 되었다고 도시의 생동감이 반갑고 북적이는 사람의 발길에 흥이 일었다. 부산한 사람들의 움직임 속에 또 한 사람의 장례행렬이 이어지고, 몰려다니는 아이들의 분주한 동작들이 장례행렬과 함께 어우려졌다. 산은 산대로 아름다워 우리의 발길을 불렀지만 도시는 또 나름의 도시다운 인간미가 넘쳐났다.

 산행전 묵고 짐을 맡긴 '터치 네팔 호텔'에서 짐을 찾아 파샹의 소개로 미리 예약한 '베스트 탑 뷰 호텔'로 향했다. 베스트 탑 뷰 호텔 역시 레이크 사이드의 중심에 있었다. 중급 호텔로 조식 포함 하루 22불에 하루종일 뜨거운 물이 나오고 미네랄 워터가 제공된다고 했다. 밤이면 암흑 천지로 변하는 네팔에서 하루종일 따뜻한 물이 나오는 호텔은 나에게 대단한 호사임이 분명했다. 파샹의 친구가 성수기에 스텝으로 근무한다는 이유로 선택된 호텔이지만 비교적 만족스러웠다.

호텔에 짐을 풀고 레이크 사이드의 거리로 나서니 오후 2시가 지났다. 급한 빨레를 세탁소에 맡기고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식당을 찾아 두리번 거리다가 내일이면 헤어질 파샹을 위해 점심과 저녁 메뉴의 선택권을 주었다. 파샹에게 트레킹 동안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 무어냐고 물었더니 피자라고 했다. 그래서 두어번 롯지에서 피자를 시켰지만 두번 다 맛이 형편없었다. 그래서 파샹에게 포카라 가면 마지막 만찬은 꼭 고급 피자로 하자고 제안했고 파샹은 좋아했다. 역시 파샹은 점심으로 '피자'를 선택했다. 레이크사이드의 한 피자가게에 들어갔다. 유럽풍의 고급스런 분위기에 피자와 햄버거 스파게티까지 하나같이 맛이 좋았다. 파샹도 만족스러워 했는데 특히나 평소에 마음껏 마실 기회가 거의 없는 콜라를 너무 좋아하는 것 같았다.

점심을 먹고나니 거의 3시가 다 되어 다른 일정을 잡기에는 이미 늦은 시간이 되었다. 그렇다고 뚜렷하게 할 일도 없어 마냥 레이크 사이드를 싸돌아 다녔다. 하지만 레이크 사이드는 30분 길게 잡아 1시간이면 넉넉하게 돌아볼 수 있을 정도의 규모에 불과했다. 거리와 접한 2층 가페에서 레이크 사이드 거리의 아름다운 가게와 이곳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바라다보며 향기로운 커피를 마셨다. 거리는 한산했고 네팔리와 관광객의 표정은 여유로왔다. 우리는 세상과 삶의 아름다움을 음미하고, 안나푸르나에서 보낸 여정을 회상하며 포카라에서의 반나절을 향유했다. 다시 거리로 나와 같은 길을 서너바퀴나 돌다가 일몰을 맞는 페와 호수가에 머물렀다.  해지는 페와호수는 부풀은 의식을 잠재우고 들뜬 마음을 가라앉혔다. 호수만치 차분한 마음으로 나는 뜬금없이 고향 진해의 바닷가를 떠올렸다.  순간 갯내음이 입안에 번지고 고향에서 부모님과 살아가고 있는 동생을 생각했다.  그리고 지나간 모든 시간들이 다시 그리워졌다.

호텔에서 쉬고 있기로 한 파샹은 저녁시간에 한국음심점인 산마루 식당에서 만나기로 했다. 파샹이 오늘 저녁메뉴로 'Korean Food'을 원했기 때문이다. 산마루 식당에서 '불고기 백반'을 먹었고 다행히 파샹은 아주 맛있어 했다. 다시 베스크 뷰 호텔로 돌아와 파샹과 커피를 한잔 들며 그동안의 수고에 감사한 마음을 전하며 작별의 아쉬움을 달랬다. 포카라에서 카트만두로 귀환할 버스비와 얼마간의 팁을 주었지만 더 많이 주지 못하는 처지가 못내 아쉬웠다.

이번 여정이 즐거울 수 있었던 것은 단연 파샹을 만난 행운 때문이었다. 늘 즐거운 표정으로 씩씩하게 앞서 나가며 우리 부부의 모든 편의를 살펴주었던 파샹이 없었다면 이번 여행의 묘미는 반감되었을지도 모른다. 네팔의 정치적 상황과 네팔 청년의 고민을 나누며 네 딸이 살아갈 한국과 파샹이 살아갈 네팔의 현실을 비교하며 안타까움을 나눴고, 우리 모두의 행복한 미래상을 같이 그려보던 시간이 그리웠다. 마낭을 오르고 다시 내려오던 길에서 맞은 눈보라 속에서 파샹과 우리 부부는 트레커와 포터가 아니라 도반이자 가족이 되었다. 서로의 안전을 보살피며 서로의 즐거움을 북돋기 위해 애써던 시간들은 우리 부부가 살아가는 동안 내내 그리움으로 되살아 추억이 되었다.

집을 떠난지 처음으로 산마루식당의 전화를 빌려 딸 아이와 통화를 했다. 다행히 잘지내고 있다고 하고,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외할머니도 잘 신다는 소식을 받으니 조했던 시간들이 뒤로 밀려났다. 내 전화는 네팔에 입국하자마자 먹통이 되었다. 아내의 전화기가 있긴 했지만 와이파이 존은 없고, 3G망은 요금이 무섭고, 요금을 따로 내고 롯지에서 충전을 했지만, 산이 높아 아예 먹통이 된 전화 핑게로 집 나온지 22일 만에 딸한테 안부를 묻게 되었다. 롯지에서 요금을 내고 유선전화를 사용할 수도 있었지만 사실은 그냥 한국으로 전화하기가 싫었다. 혹시라도 아주 나쁜 소식이 있어 여정을 중단하고 돌아가게 되거나, 소소한 문제들이 있어 내가 여기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이 걱정만 떠안게 되는 그런 상황이 싫었다. 오로지 그냥 연락을 끓고 여정에 몰두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늘 딸아이에 대한 걱정은 목에 걸린 생선까시처럼 가쉬지 않았다. 여행내내 따라다니던 생선까시가 전화 한통화로 쏙 빠져 버렸다. 날듯이 마음이 가벼워졌다.

파샹과의 마지막 저녁을 먹고 호텔로 돌아왔다. 하루 22불자리 호텔이라고 그래도 무료로 카메라 밧데리 충전이 되고, 온수가 나오고, 아침식사가 나오고, 인터넷이 되었다. 로비에 놓인 1대의 컴퓨터에는 늘 사람들이 붐볐다. 호텔을 들고 나면서 계속 컴퓨터를 차지하기 위해 노렸지만 내 차례는 돌아오지 않았다. 스텝에게 물어보니 오후3시부터 초저녁 정전전까지 컴퓨터를 할수 있다고 했다. 3층 객실에서 로비까지 몇번을 들락거린 끝에 컴퓨터 앞에 앉을 수 있었다. 카메라 메모리를 백업하려 시도했지만 파일은 많고 속도는 느려터져 중간에 포기하고 말았다. 파일 복사중에 웹브라우즈를 열고 비나리마을 홈페이지와 네이버에 연결을 시도했다. 무려 23일만의 인터넷 접속이었다. 가슴이 한정없이 두근거리고 밀려났던 나의 삶들이 한꺼번에 죄여오는듯 갑자기 나의 삶의 무게가 중력을 얻었다. 고산 체질인가? 고산지대에서는 고산증을 전혀 느끼지 못하다가, 저지대로 오니 갑자기 나의 삶이 버겁게 다가온다. 멀리 보냈던 현실이 컴퓨터를 만지는 순간 나의 코앞으로 바짝 다가왔다. 알수 없는 긴장이 나의 몸을 감싸고 여행후 처음으로 가벼운 복통이 일어났다. 신경증이다. 초조와 불안은 내 삶의 필수불가결한 현실인가보다. 마을 홈페이지는 첫화면에서 멈춰 자유게시판의 게시물 목록만 조금 보이다 만다. 재부팅을 하고나서 다행히 네이버에 접속이 되었다. 눈에 띄는 뉴스가 보였다. '곽노현 첫출근'... 순간 반가왔다. 하지만 이어 선정적인 중앙일보기사가 눈에 띄인다. '곽노현 사건 판결 판사 알고보니...'아마 또 자기들의 입맛에 맞지 않는 판결을 내린 판사에 대한 사상검증 시비일 것이다. 뉴스를 클릭했지만 컴퓨터가 또 다운이다.

마을 홈페이지에 인사를 남기고, 나의 블로그와 페이스북을 들어가 보겠다던 기대는 포기하고 룸으로 돌아왔다. 온수로 샤워를 하고 양말을 빨고, 아내와 내일 새벽 파샹을 떠나 보낸 뒤의 우리 일정을 논의 했다. 이제 우리는 안나푸르나에서는 완전히 벗어났다. 우리에게는 네팔 최고의 현대도시 포카라와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라는 도시에서 보낼 수 있는 다섯밤과 여섯 낮이 남아있다. 어떻게 배분하고 무엇을 하며 보낼지 궁리를 하다가, 참체에서 만난 호주인이 권해서 염두에 두었던 반디푸르 여정을 포기하고 일단 내일 하루는 포카라의 박물관을 순례하고, 그 다음날 카트만두로 '투어리스트 버스'를 타고 가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파샹이 떠난뒤 영어도 네팔어도 안되는 우리 부부의 여정이 조금은 불안하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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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일찍 눈을 떴다. 저만치 멀어진 안나푸르나를 뒤돌아보며 [Modi Khola Guest House]를 나섰다. 밤새 2층 룸의 계단을 지켜주던 깔리는 길 떠나는 우리를 따라나서 한참을 배웅했다. 이미 만남과 이별이 습관이 되었을 깔리는 그래도 작별이 서운했는가 보다. 마을을 벗어나자 마자 얼마 안있어 이 마을의 이름을 바꾼 '뉴 브릿지'를 건넜다. 이 일대에서 처음으로 쇠줄을 걸쳐 만든 흔들다리였기에 아예 마을 이름까지 [뉴 브릿지]가 되었을터인데, 너무 빨리 만든 덕분에 이제는 낡아 대표적인 '올드' 브릿지가 되어 있었다. 한쪽 죄줄이 늘어져 다리가 모로 기울고 발판은 군데 군데 구멍이 나 있었다. 그래도 이름만은 '뉴 브릿지'로 오래도록 남아있을 다리를 건너 란드룩으로 방향을 잡아 하염없이 걷고 또 걸었다.

 

 

안나푸르나 산중에서 보내는 마지막 날, 길은 편했고 날씨마저 좋아 눈이 시리도록 흰 안나푸르나를 하염없이 뒤돌아보고 또 뒤돌아 보며 우리의 끝나가는 여정을 아쉬워했다. 상행 때는 쉬 다가오지 않던 산들이 하행 길엔 순식간에 덧없이 멀어져 갔다. 이제 가면 언제오나! 적금이라도 들어 5년뒤를 계획해 보지만 세상은 넓고, 인생은 짧으니 아마 이번이 이승에서 안나푸르나와의 마지막 인연이 될지도 알수 없는 노릇! 앞은 보지도 않고 뒤를 돌아보고 다시 고개를 떨구어 내가 딛고 있는 땅을 보고, 그리고 다시 고개를 돌려 걸어온 길과 멀어져 가는 안나푸르나를 바라다보기를 반복했다. 분명 다음 목적지는 포카라고, 카트만두고 그리고 인천으로 이어져야하는데 나는 정처없이 걷는 방랑자가 되었다. 어느 순간 나의 걸음을 이끄는 것은 계획이나 일정이 아니라 오직 앞에 놓인 길이 되어버렸다. 저 길이 나를 어디로 인도할지 모르는 사람처럼 나는 기가 죽었고 조심스러워졌다. 수백, 수천년 동안 비탈진 안나푸르나 산자락을 일구어 씨를 뿌리고 낱알을 거두어 가족의 삶을 지켜온 네팔리의 피와 땀, 사랑과 미움, 그리움과 그윽한 삶의 희열이 베일 돌길을 따라 꼭 한 발짝씩만 내디뎠다. 우리 삶이 그러하듯 걸음에 어떤 비약도 없었다, 걸어온 만치 새 걸음의 토대가 되고, 그 토대에서 내딛는만치 내 삶의 현실이 되었다.

 

 

안나푸르나 눈이 녹아 흐르기 시작한 차가운 물이 모여 Modi Khola를 이루고, 그 강이 흘러 깍아 세운비탈진 산자락에 따데기같은 다락 논을 일구어 생명을 보전하고 마을을 일구며 살아온 네팔리의 삶터를 가로질렀다. 촘롱강 건너 상행길에 걸었던 사울리바자르에서 간드룩으로 이어지던 길이 오늘 하행길과 나란히 이어졌다. 고개마루마다 놓여진 길손을 위한 쉼터를 '쪼따로'라 불렀다. 쪼따로에 앉아 강건너 바라다 본 아득한 길들이 실날같이 가날프고 아름다웠다. 내가 언제 저 길을 걸었고, 저 끝없는 돌계단을 한칸 두칸 올라 저 아찔한 고개마루에 터잡은 간드룩을 거쳐 갔던가! 벌써 상행길의 기억은 가물거리기 시작하고 이미 나의 마음속에 하나의 추억으로 남아버렸다.

 

 

뉴브릿지를 떠나 Tolka를 지나면서 점심을 먹었다. 메뉴는 전통 구릉족 빵이라는데 빵은 지금까지 먹었던 티벳 빵과 구별이 되지 않았는데 딸려나온 국이 꼭 한국 된장국이었다. 된장만 안들어갔지 말린 시레기를 잘게 썰어 넣고 콩가루를 넣어 뻑뻑하니 끓인 국이었다. 전통 구릉족 빵을 주문하자 파샹은 조금 걱정스런 표정으로 되물었는데 아마 그런 시레기국을 우리가 잘 먹어낼지 걱정이 되었던 것 같았다. 구릉족 시레국을 맛있게 잘 먹는 우리를 보고 파샹은 신기해 했다. 롯지를 나와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길을 역시 초행인 파샹과 같이 더듬어 나갔다. 톨카를 지나 포타나가 다가오자 길이 여러갈래로 갈라지고 엉키면서 우리는 멈출 수밖에 없었다. 어느 길이 우리를 포타나로 이끌지 파샹도 몰랐고 물을 수 있는 주민들도 보이지 않았다. 할 수없이 란드룩에서 만난 홍콩인 커플 트레커를 기다렸다. 아니 홍콩인 커플을 안내하는 포터와 가이드를 기다렸다. 그들의 안내로 잃어버린 길을 되찾아 다시 걷다보니 얼마 지나지 않아 포타나 체크 포인드가 나왔다. 팀스카드에 Check-Out 도장을 받고 나니 나는 이제 더이상 트레커가 아니게 되었다. 그 순간부터 나는 단지 네팔 투어리스트의 한명일뿐!

 

 

오늘 하루 한국인 트레커를 한명도 만나질 못했다. '코리언시즌'이라 불리는 만치 겨울 비수기 2달동안 전체 트레커의 절반 이상이 한국인이라는 ABC에서 하루종일 한국인을 만나지 않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고 했다. 나야풀, 사우디바자르, 간드룩, 촘롱구간이나 따다파니, 따또파니, 푼힐, 촘롱구간과는 달리 촘롱에서 지누단다를 거쳐 란드룩, 톨카, 팜푸스, 페디로 이어지는 구간은 거의 한국인이 없는 것 같았다. 나야풀로 바로 하행하는 것보다 하루 반나절을 더 길게 잡아야 하는 코스를 선택해 산중에서 지친 몸을 이끌고 지체하기에는 한국인의 성정에 어우리지 않는 코스인지도 모르겠다. 포타나의 체크체크포스틀 빠지며 근무자에게 물으니 오늘은 한명의 한국인도 체크포스트를 지나지 않았다고 했다.

 

 

포타나 체크포인트에서 길을 물어 '오스트렐리안 캠프'를 찾았다. 담푸스로 바로 빠기기에는 아직 트레킹에 미련이 남아있기도 했지만 떠나는 안나푸르나를 마지막으로 바라다 보기 위한 선택이었다. 중국인 커플의 가이드 말로는 '오스트렐리안 캠프'가 주 트레킹 코스에서 조금 떨어져 있긴 하지만 멋진 View Point면서 조용하게 지낼 수 있는 마을이라고 했다. 또 한가지, 톨카를 지날 때 만난 한 네팔리로부터 오스트레릴리안 캠프에 한국인이 살고 있고 롯지를 운영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이왕이면 그곳에서 지낼까 하는 생각도 있었다.

 

 

오스트렐리안 캠프는 40여년전 오스트렐리안 무리가 캠프를 한데서 연유한 지명이라고 했다. 포타나에서 담푸스로 빠지기 전 오른쪽 언덕길을 15분정도 오르다 야트막하게 보이는 뒷산을 등지고 삼면이 트인 꽤 넓은 평지가 나오고 4~5개의 롯지가 자리잡고 있었다. 마을은 외졌고 아름답고 그리고 멋진 뷰포인트에 자리잡고 있었다. 파샹이 나서 지나는 네팔리에게 한국인이 운영하는 롯지를 물었다. 이 동네에는 20여년전에 들어와 살고 있는 한국인이 있긴 하지만 롯지를 운영하지는 않고 그냥 조용히 '마음 공부'를 하고 계신다고 했다. 마을 구경 삼아 동네 끝까지 갔다가 마지막 롯지면서 마을 이름을 가져온 '오스트렐리안 캠프'가 열렸던 자리에 터잡은 [오스트렐리안 캠프 게스트 하우스]에 방을 잡아 방해받지 않는 시야를 얻었다.

 

 

짐을 풀고 마당을 나서니 멀리 구름 위에 떠있는 사우스 안나푸르나, 히운출리, 마차푸차레 그리고 람중히말이 한눈에 눈에 들어왔다. 검은 대지위에 짙은 구름이 머물고, 구름이 엹어져 하얗게 번지는 사이로 안나푸르나의 자태가 들어났다. 흰구름과 흰 산이 만나니 구름이 산을 만들고 산이 구름으로 흩어졌다. 지상으로부터 하늘로 번져 올라가는 어둠이 희색으로 우뚝 솟은 안나푸르나를 더욱 두드러지게 해 오히러 현실감이 떨어졌다. 산이 산이 아니고 하늘에 떠 있는 '하늘 궁정'같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니 멀리 페와딸이 보이고 아득히 포카라 넘어 겹겹산들이 깊었다. 혹시 영산 다울라기리를 볼수 있을까 기대했지만 확인할 길이 없었고 다울라기리 방향으로 짙은 구름까지 끼어 다음을 기약했다.

 

 

 

 

다이님 룸에 들어서니 한명의 손님이 창가를 지키고 있었다. 네팔리와 똑같은 외모에 파샹이 말을 건넸지만 그는 알아듣지 못했고 알고 보니 일본인이라고 했다. 그는 들어서는 우리 일행에게 눈인사도 보내지 않고 담배를 피우고 차를 마시고, 식사를 마치고 또 담배를 피웠지만 시선은 늘 창밖으로 향해있었다. '나마스테. 곤니찌와.' 인사를 건네도 착한 얼굴로 눈인사만 주었을 뿐 그의 시선은 여전히 창밖으로 향했고 마음은 멀리 떠나있는 표정이었다. 그가 룸으로 돌아간뒤 사오지가 전하길 그는 일주일째 이 롯지에 머물고 있으면서 하루종인 창가에 앉아 먼산만 바라보고 있다고 했다. 그는 어떤 사연을 품고 안나푸르나의 산 언저리에 방을 얻어 일주일 내내 창밖만 바라다 보고 있는건지, 그리고 이 마을에 20년째 살고 있다는 한국인은 또 어떤 사연을 품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태산같은 짐을 지고 안나푸르나 돌계단을 아슬아슬하게 내 딛는 조랑말의 삶의 무게나, 5평 따데기 논을 일구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네팔리의 삶의 무게처럼 한사람 한 사람에게 주어진 몫의 삶은 다 그렇게 힘겹고 아픈 건지도 모르겠다. 고도는 낮아지는 만치 삶의 무게는 그만치 더 무겁게 다가왔다. 

 

 

비교적 싼 음식값에 풍성한 저녁을 주문했다.  롯지 주인 식구들이 먹기위해 조리했다는 메뉴에 없던 닭고기 조림 한접시에 락시까지 한잔 시켜놓고 안나푸르나에서 보내는 마지막 저녁을 보내며 나의 삶을, 그리고 세상을 살아가는 뭇 생명의 삶을 그 삶의 무게를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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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일찍 영인이 아빠를 만나 쓴 식전 담배를 같이 하면서 하루를 시작했다.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를 향해 올라갈 사람과 지누단다를 지나 뉴브릿지까지 내려가야할 사람의 만남은 짧았다. 뭐라고 더 절실한 인사말이라도 남겨야할 것 같은데 그냥 가벼운 미소를 서로의 안부를 기원했다. 어제 저녁은 이래저래 풍성했다. 이번 여정의 최고점인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를 딛고 해발 3000m 이하로 내려왔다는 안도감 때문이기도 했고, 반가운 사람을 만났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제대로 된 김치를 먹을 수 있었던 날이었다. 전날 저녁 먹었던 김치 맛을 한번 더 느끼고 싶어 오늘 아침에는 아예 롯지 주인에게 김치찌게를 끓여 달라고 요청했다.  같이 김치찌게를 시켜 먹자고 작당한 여선생님은 적당량의 물만 붓고 끓여주기만 하면 된다고 가이드분에게 설명까지 덧붙였다. 김치찌게에다 맨밥을 시켜 신나게 먹고나니 오히려 식사비도 더 싸게 치였다.




어제 오후에 비까지 내리던 날씨가 자고 일어나니 더 할 나위 없이 쾌청했다. 해가 나기 시작하니 고도가 낮아진 만치 기온마저 올라 밤의 한기는 온데 간데 없고 팍팍한 여정의 피로마저 풀려 온 몸에 기운이 솟았다. Upper-Sinuwa에서 곧바로 돌계단을 따라 하염없이 내려가는 길에 Low-Sinuwa를 지났다. 화창한 햇살아래 지나는 길과 집이 하나같이 단정했다. 길가에는 쓰레기를 찾아볼 수 없었고, 마당은 모두 비질까지 해 놓았다. 구질구질한 생활 도구들도 말끔히 치워진 모습이었다. 마을로 들어서니 음악소리가 울려퍼지고 심상찮은 기운이 감돌았다. 아니나 다를까, 오늘 이 동네에서 결혼식이 있다고 했다. 가파른 산동네에 공터라고는 있을 수 없는 형편이니 그나마 넓은 길에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처마밑에 세워둔 앰프에서 경쾌한 음악이 흘러나오고 화려하지 않지만 단정한 차림의 젊은이들이 음악에 맞춰 이쁘게 춤까지 추고 있었다. 어른들은 마당 한켠에는 솥을 걸어놓고 온동네 가득차게 연기를 피우며 잔치 음식을 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온동네가 잔치집 분위기였다.



예식장이라는 공간에서 진행되는 재력과 사회적 지위를 과시하는 형식만 남은 결혼식에 초대될 때마다 사회적 의무를 피하지 못해 그냥 체면치레로 자리를 지키던 한국의 결혼식 문화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결혼식'이 서비스업의 하나가 되고 신랑 신부는 서비스 상품을 소비하는 소비자로 결혼생활을 시작하는 것이 아닐까 늘 마음이 편치않은 한국의 결혼식과는 달리 집마당에서 온동네 이웃이 다 모여 치루는 결혼식은 축복이 넘치고 삶의 숭고함이 느껴졌다. 그것은 나의 복고적 심성이나 편향된 취향 탓일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결혼식은 온동네가 같이 한 이틀 먹고, 마시고, 춤추고, 놀면서 사랑의 숭고함을 확인하고, 진정한 축복을 주고받을 만치 중요한 인생의 한 계기로 받아들이는 그들의 삶이 더 아름답게 느껴졌다. 오늘 결혼하는 새 신부신랑의 행복을 빌며, 그들의 귀한 인연을 축복하며 촘롱을 향해 하염없이 이어지는 돌계단을 내려갔다.


우리가 걷는 길을 나란히 걸어 촘롱의 학교로 등교하는 아이들과 스쳤다. 죽니 사니 하며 진땀을 빼면서 오르락 내리락 해야했던 촘롱-시누아 구간의 돌계단을 10살도 안되 보이는 이 아이들은 매일 등하교를 하고 있었다. 아이들 모습이 너무나 정겨웠다. 단정한 교복에 까만 구두를 신은 여학생의 발랄한 발걸음이 가파른 촘롱의 2400개 돌계단의 부담을 함껏 들어줬다. 이 곳 네팔의 살골짜기에도 교육열풍이 불었는지 모르겠지만 촘롱에 들어서 학교와 가까워지자 의외로 등교하는 아이들이 북적였다. 파샹이야기로는 약 80%의 학생들이 진학을 한다고 했다. 어떤 자료에선가 보니 그중 약 80% 학생이 또 학업을 다 마치지 못하고 중도에 그만둔다는 이야기도 본 것 같았다. 학교를 중도에 그만두는 경우도 그렇지만 아예 학교 문턱도 가보지 못하는 아이들은 농사일에 가사일에 어려서 부터 혹독한 삶을 산다고 했다. 사실 여정중에 '나마스테! Sweet!"을 외치며 손을 내미는 아이들은 교복을 입지 않았고, 방과중인 시간에 집에 길에 남아있는 아이들이었다. 왕정 독재 체제에서 막 벗어나서 세계 최고 빈국의 대열에서 탈출하려는 네팔 정부의 몸부림이 얼른 큰 성과를 이루었으면 좋겠지만 당장 그 아이들이 처한 삶의 조건이 너무나 안타까웠다. 마음으로 그 아이들의 삶에 축복이 있길 빌고 돌아섰지만 오래도록 마음이 게운하지가 않았다.


촘롱에 오르니 확실히 물가가 달라졌다. 물가가 싸지니깐, 싼 맛에 파샹이 좋아하는 환타를 사주고 간식도 사먹었다. 한국에서도 흔한 다국적 상표들의 초코렛과 포장이 엉성한 네팔산 과자를 샀는데 네팔과자는 싼 대신 맛도 덜하고 모레가 씹혀 다 먹지 못했다. 상행길에 묵었던 롯지를 지나 촘롱을 벗어나서 바로 외쪽 가파른 돌길을 따라 까마득히 아래 Mudi Khola 가 흐르고 있었고 그 계곡 가까이에 지누단다가 보였다. 지누단다로 내려 가는 길은 한산했다. 올라오는 사람도 내려가는 사람도 없었는데 중간쯤에서 단 한명의 트레커를 만날 수 있었다. 짐작으로 80살은 넘어 보이는 한 백인 할머니가 가이드의 도움을 받으며 이 거친 안나푸르나를 걷고 있었다. '나마스테!'라고 인사를 건네며 스쳐 지나갔지만 내리막길 내내 그 할머니의 여정과 삶이 궁금했다. 나는 여든 살이 넘어 다시 안나푸르나를 찾을 만치 건강한 몸과 정신을 보전할 수 있을까 생각했지만 자신이 없었다. 뒤돌아보면 가파른 돌계단을 몇개 오르지 못하고 쉬고, 다시 쉬고 언제 저 많은 돌계단을 다 올라가실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하루에 우리가 가는 일정의 오분지 일은 고사하고 그냥 평길을 걷는 것 조차 불편해 보이는데 그분은 왜 이 길을 혼자 나섰는지 알 수 없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안나푸르나에 묻었을까? 아니면 살아생전에 꼭 오고 싶었던 안나푸르나를 이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황혼에나마 그 꿈을 이루고 계신건가, 아니면 젊어서 같이 걷던 남편을 먼저 여의고 사랑하는 남편의 자취를 쫒아 다시 안나푸르나를 오르는 것일까...


지누단다의 한 롯지에서 점심을 주문하고 전날 비에 젖은 옷들을 따사로운 햇살아래 늘어놓으니 그냥 오늘 여기서 머물러버릴까는 생각도 들었다. 점심을 먹고 곧바로 노천 온천을 향했다. 15분 걸려 내려가서 30분 걸려 올라와야 되는 강에 바로 붙어 있는 노천 온천이라 했다. 동네 목욕탕만한 탕이 두개에 샤워를 할수 있도록 호수를 박아 물을 흘리고 있는 꼭지가 세개인 온천에 도착했다. 흐름한 양철 가건물이 탈의실로 쓰였고, 할아버지 한분이 관리를 하고 있었다. 이 온천을 보전하고 가꾸는데 필요하다며 1인당 50루피를 기부라는 이름으로 요구했다. 햇살은 따사로운데 계곡의 바람은 차서 옷을 벗고 물까지 뛰어가다시피해서 따뜻한 온천물에 몸을 담갔다. 물은 이끼인지 부유물이 떠다녔지만 그래도 땀에 절은 나의 몸은 고스란히 온천에 녹아들고 생명의 충만감에 빠져들었다. 그 순간 내가 살아있음이 얼마나 고마운지, 얼마나 행복한지 몰랐다. 파샹과 그동안 묵은 땀을 씻어내고 피로를 씻고 한참을 다뜻한 물에서 그 순간의 행복을 만끽했다. 관리인 할아버지가 파샹과 같이 목욕하는 우리 사진을 찍어 주셨다.


파샹은 전날 사람이 많을 것 같다며 온천을 하지말자는 뜻을 밝혔는데 왠걸 온천을 하는 동안도 그렇고 온천까지 오르락 내리락 거리는 동안에도 단 한명의 트레커 밖에 만날 수 없었다. 아마 파샹은 지누단다를 지나 란드룩으로 해서 페디로 빠지는 일정보다 간드룩에서 나야풀로 빠지는 빠른 일정을 택해 빨리 포카라로 가고 싶어 뻥을 친것 같았다. 온천을 우리만 누리는 호사를 더 만끽하고 싶었지만 마음을 고쳐먹고 다시 지누단다로 올라와 롯지에 맡겨놓았던 배낭을 찾아 매고 뉴브릿지로 향했다. 지누단다에서 다시 한참을 내리막길을 걸어 Kimrong khola에 이르러 쉬고 있자니 우리가 비켜 왔던 아가씨들이 파샹에게 농을 걸었다. 서로 길이 갈라져 멀어져 가면서도 아가씨들은 계속 파샹에게 무어라고 농을 던지고 파샹은 계속 싱글벙글 입을 다물지를 못했다. 나도 덩달아 파샹에게 배낭은 나에게 주고 저 아가씨들 따라가라고 부추키며 놀리니깐 얼굴마저 새빨갛게 변했다. 파샹의 순진무구한 그 설레임이 아름다웠고 그럴 수 있는 나이가 부러웠다.



새 다리를 놓아 마을 이름조차 뉴브릿지로 변해 버린 마을은 두세개의 롯지가 전부인 조그마한 마을 이었다. 다른 트레커도 보이질 않고 단지 닭을 지고 나르는 짐꾼 몇이 앞 롯지에 방을 얻은 것 같았다.조금 일찍 도착한 덕분에 롯지 주변을 산책하고 마당에 풀어놓은 개 한마리와 놀 수 있었다. 덩치 큰 검은 개가 한마리 2층 룸으로 가는 계단을 지키고 있었는데 우리는 그냥 '칼리'라고 불렀다. 이 개의 진짜 이름은 뭔지 모르지만 파샹을 통해 검은 개는 네팔어로 '칼리 꾸꾸루'고 그냥 줄여서 '깔리'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미리 배웠두었기 때문에 그냥 보이는 검은 개는 다 깔리라고 불렀다. 깔리를 타고 넘어야 1층으로 내려갈 수 있어 부담스러웠지만 깔리는 순하디 순한 성품이어서 자신을 타고 넘어가도 감은 눈을 뜨지도 않았다. 그래도 밤 늦게 아내가 룸에서 20m는 족히 떨어져 있는 화장실에 갈 때는 크게 짖어대어 믿고 있던 사람을 깜짝 놀라게 했다.


데크에 앉아 식사를 기다리며 해지는 안나푸르나를 바라보니 벌써 산이 제법 멀어져 있었다. 같이 하산하던 트레커들은 전부 간드룩이나 따다파니 쪽으로 하산했는지 아무도 보이질 않았다. 그래도 이쪽 방향으로 내려오기로 한 여선생님을 기다렸지만 날이 어둡도록 내려오시질 않았다. 아마 지누단다에서 여정을 푸신 것 같았다.


다른 롯지에서도 그랬지만 이곳도
부엌이 아니라 꼭 헛간 같은 데서 따로 조리를 했다. 내가 알기로는 이곳은 나무로 음식을 하지 못하게 규제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안나푸르나 보전지역내에서는 산림을 보호하기 위해 가스나 석유를 사용하게 하는데, 가스나 석유가 워낙 비싸서 그렇겠지만 손님이 적고 시간 여유가 있을 때는 그냥 헛간에서 나무로 조리를 하는 것 같았다. 롯지 주인집 딸이 조리를 하면서 자꾸 힜끗거리며 낯선 트레커인 우리를 쳐다봤다. 그 아이는 바같 세상이 궁금한 것이 분명했다. 우리가 묻혀 들어 온 바같 세상의 바람따라 어쩌면 저 아이도 언젠가는 부모의 뜻과 무관하게 세상 밖으로 떠나갈지 알 수 없었다.



식사가 나오고 우리는 하산 기념으로 락시를 한잔 시켰다. 파샹은 자신의 달밧에 따라 나온 토마토 아자르와 염소 젖을 맛보게 했다. 토마토 아자르는 모양과 맛이 꼭 걸죽한 김치국물같아 입맛을 돋구었고, 염소 젖은 가공을 했는지 요플레같이 건데기가 있고 시끔하니 먹을 만 했다. 파샹은 달밧에 얹혀있는 버팔로 고기도 아내와 나에게 한토막씩 건네주었다. 먹어보니 맛이 좋았다. 매운 고추를 넣고 간장에 조린 듯한 버팔로 고기는 우리 입맛에 딱 맞았다. 파샹에게 부탁해서 버팔로 고기를 따로 한 접시 주문해서 안주를 삼고, 락시를 한잔하며 핸드폰으로 김광석을 털어놓고 해 지는 안나푸르나를 올려다보았다. '다 좋다'는 말밖에 할 말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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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일찍 눈을 뜨고 계속 침낭 속에서 미기적거렸다. 10여명이 다이님 룸에서 같이 잠을 자다보니 먼저 일어나 서성일 수가 없었다. 그래도 불편함보다 정겨움이 더 컸다. 뿔뿔히 자신의 방으로 흩어지지 않고 트레커랑 가이드와 포터랑, 롯지 식구들 까지 다이님룸에 소복히 모여서 같이 잠자리에 누우니 한 방에 4형제가 같이 지내던 어린 시절이 생각 났다. 창밖에 새벽 어스름이 비추기 시작하자 이불을 걷고 일어나 밖으로 나갈 준비를 했다. 일출 장면을 사진에 담겠다고 캠프에서 10여분 거리인 View Point까지 올라갔다.
6시 30분, 일출 장면을 찍기에는 이미 늦어버렸는지 날이 훤하다. 살을 애는 얼음 바람을 맞으며 한국인 트레커들과 같이 사진을 찍고, 청명한 하늘과 맞닿은 안나푸르나 연봉을 바라보는데 갑자기 산 정상이 황금빛으로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낮은 산은 어둠속에서 갑자기 산 전체가 드러나는데, 안나푸르나는 아침 어스름 속에 산 전체가 먼저 드러나고, 다시 햇살이 산 정상을 비추기 시작하면  황금빛으로 불타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안나푸르나는 백설의 설산으로 돌아왔다. 절로 탄성을 지르며 열심히 카메라의 셔터를 눌렀다.


주위를 둘러보니 1980년에 태어나 2006년에 이곳에서 생을 마감한 한 남자의 위령탑이 깨어나는 안나푸르나를 바라다 보며 우뚝하니 서 있었다. 그는 이곳에 남아 아침 햇살 받으며 깨어나는 안나푸르나를 영원히 지켜볼 것이고, 우리는 오늘 하산하면 남은 삶동안 다시 이곳 안나푸르나를 오기는 힘들 것같았다. 산과 산을 지키는 낯선 한 영혼에게 아쉬운 작별인사를 남기고, 더 이상 추위를 참지 못해 도망치듯 숙소로 돌아왔다.


하산길도 파샹이 앞장을 서기로 했다. 다른 팀들보다 먼저 롯지를 나섰다. 어제 상행 중에는 눈과 구름속에 숨어 자태를 드러내지 않았던 마차푸차레 정상이 우리의 정면을 막아섰다. 아무것도 없는 설원의 끝에 위압적으로 서 있는 마차푸차레지만 어쩌면 그냥 계속 걸어 쉬 올라갈 수 있을 것 같이 느껴졌다. ABC코스에 접어들면서, 아니 포카라에서 부터 너무 자주 봐서 이미 친숙해져 버린 탓일거다. 간드룩에서 다이님룸에서 만난 폴라드인 트레커는 다음 기회에 마차푸차레 정상을 등정해 보고싶다며 파샹에게 등정을 위한 허가 과정이나 최소 인원, 비용 등에 관해 물었던 적이 있었다. 이렇게 마주 보는 것 만으로도 좋지만 기회가 되고 여건이 된다면 나도 일생에 한번쯤은 저런 산에 오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나이는 쉰을 넘었고, 평생 높은 산은 한번도 타본 적이 없고, 시간도 비용도 내기 힘든 주제에 꿈도 야무지다며 스스로 핀잔을 주고는 걸음에 속력을 붙였다.



올라올 때, 그렇게 힘든 길이었는데 내려갈 때는 너무 쉽다. 근 3시간을 걸어 올라갔던 MBC에서 ABC가던 길은 1시간만에 주파했다. 어제는 눈속에 길을 서둘러야했지만 오늘은 쾌청한 날씨에 하산길이니 길을 서둘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파샹은 저만치 앞서가고 나도 모르게 발길이 빨라졌다. 오전 중에 데우랄리를 스쳐 지났고 점심은 히말랴야에서 먹게 되었다. 상행 때의 꼭 2배 속도로 걸은 셈이었다. 히말라야를 출발해 도반과 밤부까지는 거의 쉬지 않고 내려왔다. 밤부가 가까워지자 쾌청했던 하늘에 짙은 구름이 몰려오고 한방울 두방울 진눈깨비가 내리더니 롯지에 도착하니 진눈깨비는 비로 변해있었다. 우산도 비옷도 없는 상황에서 비를 맞아가면서까지 하산할 만한 이유는 없었다.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며 밀크커피를 마시며 30분 정도를 쉬다보니 호주 청년트레커 두 커플은 비닐을 뒤집어 쓰고 상행길에 나섰고, 오래전에 한번 왔던 길을 다시 찾아왔다는 일본인 트케커도 비를 맞으며 상행길에 올랐다.


밤부에서 묵기에는 시간도 좀 남았고, 오늘 숙소 예정지로 잡았던 시누아도 머지않아 우리도 마음을 고쳐 먹고 비를 맞으며 하행길에 나섰다. 다행히 길을 나서자 비는 더 가늘어졌고, 시누와가 가까워지면서 아예 그쳐 버렸다. 시누와에서는 만날 사람이 있었다. 이번 여행을 강력이 권유한 후배다. 그는 다른 일정으로 네팔에 들어왔는데 오늘 쯤 서로 교행하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었다. 한국을 떠나기 전 미리 전해 받은 일정표는 잃어버렸고, 여행 시작일과 기간 정도만 기억하는 상태에서 파샹에게 물으니 시누와나 촘롱 정도에서 만나지 않을까 예상을 했다. 그러데 그 예상은 정확히 적중했다. 시누와에 들어서니 첫집 헛간에서 바삐 움직이며 조리 중인 사람들이 보였고, 단체 손님을 맞을 준비를 하는 것 같았다. 길가 쓰레기 장에는 한국어로 '당면'이 선명하게 쓰인 포장지가 나뒹굴고 있었다. 이 계절에 단체 손님이라면 당연히 한국인일 거라고 짐작은 했지만, 물어보니 혜초여행사라고 했다. 네팔리 사이에서도 '혜초여행사'는 아주 유명한지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혜초 여행사의 단체손님이라니 거의 확실해 보였다.


시누와에 도착한 것이 오후 5시였는데 의외로 Upper Sinuwa는 붐볐다. 2개의 롯지가 영업중이었지만 한 집은 혜초여행사 그룹이 독차지를 하고 있었고, 나머지 한 집으로 여러 무리가 모여들었다. ABC를 같이 걸은 호주청년들, 한국 청년커플, 한국 여선생님, 그리고 상행하는 낯선 한국 청년들이 7~8명이 뒤늦게 들이닥쳤고, 외국인 트레커도 두어명 더 합류했다. 작은 다이닝룸이 곽찼다. 거기다가 나의 손님까지 합류하니 스토브를 켜지 않아도 좋은 만치 사람의 온기가 다이님룸에 가득했다. 3000m이하로 내려왔으니 제일먼저 담배 생각이 났다. 그리고 낯선 땅에서 만난 후배 내외와 함께, 그리고 ABC를 같이 오르고 내린 동행 트레커들과도 한잔 나누고 싶었다. 락시 한병과 후배가 가져온 유명한 "한라산소주"를 딱 한잔씩 나누었다. 많은 아쉬움이 남았지만 후배는 내일 ABC로 올라가야 될 형편이라 일찍 숙소로 갔다. 그리고 한국인 여선생님과 좀더 대화를 나누었고, 그 대화를 통해 그분이 직면한 삶의 문제와 관계가 나의 삶의 지향, 나의 삶의 방식을 되돌아 보게하는 적지않은 영감을 주었다. 그녀 덕분에 친환경 농업, 마을 공동체, 진보적 삶과 정치적 실천 등 평생의 화두가 안나푸르나에서 다시 되살아나게된 셈이었다.


전문산악인이 아닌 나같은 사람이 접근할 수 있는 한계점인 ABC를 딛고, 다시 하생길에 영인 아빠를 만나니 나의 이번 여정은 끝나가는 기분이다. 이제 이삼일이면 포카라에 들어갈 것이고. 이삼일 더 포카라에서 헤메다가, 또 카트만두 거리를 이삼일 더 걸으면 귀국해야한다. 귀국을 생각하기 시작하니 딸이 더 보고 싶어졌다. 전날 밤 아내도 꿈속에서 딸아이를 보았단다. 네팔에 도착하자마자 핸드폰이 고장이 나고, 달리 전화걸 수단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냥 한국과의 모든 연락을 끊고 지내고 싶었다. 익숙한 세상이랑 한달쯤 철저히 단절한다고 내 삶에 무슨 변화가 있겠냐는 객기 아닌 객기였다. 그래도 포카라에 가면 근 한달만에 사랑하는 딸에게 전화를 해야겠다. 우리 딸이 너무 보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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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 잘 자지 못했다. 평소보다 제법 늦게까지 다이님룸에서 다른 트레커들과 노닥거리다 방에 들었지만 옆방에 든 호주트레커들이 늦게 까지 떠들어 되었다. 지금까지 묵은 롯지 대부분은 방과 방사이 벽체를 합판 한장으로 막아놓았는데 이곳 히말라야 롯지도 마찬가지였다. 또 벽쪽으로 침대가 붙어 있어, 마찬가지로 옆방의 침대가 합판 한장 넘어 붙어있다보니 밤이 깊어 조용해지면 옆방 손님의 숨소리까지 들릴 정도였다. 그런 방에 묵을수록 소음을 내지 않기 위해 신경을 써야하는데 옆방의 청년들은 전혀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여행 초반에 티망의 롯지 2층에서 묵을 때 밤에 잠시 화장실을 다녀온 적이 있었다. 그런데 다음날 1층에서 묵었던 네팔리들이 내가 밤새 쿵쿵 거리고 돌라다녀 자신들의 잠을 깨웠다며 항의성 농을 걸었다. 사실은 내가 아니고 옆방의 트레커가 배탈이났는지 밤새 들락날락 거린 거였다. 아뭏튼 롯지는 최소한의 재료로 만든 숙소기때문에 단열이나 방음 같은 거는 전혀 고려치 않고 지은 집이다. 그래서 늘 옆방에 젊잖은 손님이 들기를 기원해야하는데 어제는 재수가 없었다.


찌뿌등한 몸을 이끌고 밤새 눈이 내린 길을 나섰다. 여전히 눈발을 계속 휘날리고 안나푸르나 연봉들은 구름 속에 사라지고 없었다. 흰쿠동굴에 이르자 상행인 트레커들이 소복히 바위 아래 모여 있었고, 잠시 쉬는 사이 하행길 트레커들도 바위 밑으로 모여들었다. ABC(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상황이 궁금했는데 무사히 다녀오는 사람들은 만나니 조금은 안도가 되었다. 그들 대부분은 한국인이었다. 하행인 트레커들은 조금은 과장된 표정으로 자신들이 얼마나 힘들게 다녀왔는지 이야기했고, 그리고 기상으로 봐서 오늘 상행인 사람들이 베이스캠프에 도달할 수 있을 지 걱정이라며 겁을 주었다. 사실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고도가 4200m라는 사실도 조금은 부담스러웠고, 꼭 거기까지 가야할 이유도 없었기에 MBC(마차푸차레 베이스 캠프)에서 머물고 내일 아침 일찍 배낭을 두고 안나푸르나 베이스 캠프까지 다녀오는 것도 괜찮다는 생각도 있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오늘의 기상과 다른 여건의 변화에 달려 있는 것이기에 그대까지 어떤 결정도 내리지 않았다.


흰쿠동굴을 떠난뒤 곧 바로 데우랄리에 도착했다. 눈발을 계속 굵어지고 그만치 시야는 점덤 좁아져 갔다. 뜨거운 블래티를 한잔하고 온수로 물통을 채웠다. 시누와를 지나면서부터 1리터 페트병에 담긴 공산품인 미네랄워터는 더이상 팔지 않았다. 지고 올라오기가 불가능하다는 이야기다. 대신 '따토파니'라고 자연수를 끓여서 팔았다. 미네랄워터보다 값은 싼데 물맛은 별로고 간혹 모레같은 불순물도 보였다. 사실 네팔리들은 그 물을 끓이지도 않고 그냥 마시는데 아무런 탈이 없다. 하도 여행안내정보에서 자연수를 마시지 말라고 해서 계속 미네랄워터만 사서 마셨는데 좋은 선택인지는 잘 모르겠다.


히말라야에서 흰쿠동굴을 지나 데우랄리까지 꼭 2시간이 걸렸다. 쉬엄쉬엄 걷기도 했고 눈때문에 빨리 걸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데우랄리를 나와 마차푸차레 베이스캠프로 향했다. 밤새내리던 눈은 하루종일 끊이질 않았고 고도를 높일수록 점점 더 거세졌다. 데우랄리를 지나면서부터는 설경이 눈에 들어오지 않고 오직 맹목적인 걸음에 몰두하게 되었다. 마음속에 조금의 두려움도 싹트고, 특히나 데데우랄리지나 MBC가는 계곡에서는 나도 모르게 마음이 달아오르고 서둘기까지 했다. 파샹 이야기로는 삼년전 바로 이 계곡에서 눈사태로 십여명이상의 트레커와 포터가 목숨을 잃었다고 했다. 사태가 일어난 코스는 약 15분 걸리는 계곡길이었는데 왼쪽 사면의 경사나 쌓인 눈을 봐서는 사태가 일어날 지역같지 않았다. 파샹에게 물어보니, 그 경사의 상단부에 눈이 쌓였다가 일시에 무너져 내리는 특수한 지형탓에 사고가 잦다고 했다.


데우랄리에서 MBC까지 다시 2시간이 걸려 오후 1시경 MBC에 도착 했다. ABC에서 이제 막 도착했다는 한국인 남성 한분은 거의 사력을 다해 내려오다 여러번 넘어지고 굴렀다면서 계속 하행을 할지 어쩔지 걱정이 태산같았다. 무리하지 않는게 좋을 듯 했지만 그렇다고 추운 롯지에 계속 머물수도 없는 상황이라 그분은 결국 계속 하행을 하기로 하고 롯지를 나섰고, 다음은 우리가 결정을 할 차례가 되었다. 계속 ABC까지 올라갈지 아니면 MBC에 머물다 내일 아침 ABC까지는 가벼운 차림으로 다녀와서 하산을 할지 아직 결정하지 못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점심을 먹고 나니 더 이상 고민이 필요 없게 되었다. 호주청년, 한국청년 할 것 없이 모두 ABC까지 올라가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고 보니 우리 부부만 덩그러니 MBC에 남을 이유가 없어 보였다. 차라리 먼저 롯지를 나섰다. 우리 포터 파샹은 MBC에 올라온 예닙곱명의 네팔리 중에서 가장 젊었다. 꼭 그래야만하는 것은 아닌것 같았지만 다른 네팔리들이 파샹에게 제일 앞에서 길을 뚫고 나갈 것을 종용했다. 파샹이 맨앞에서 길을 찾고 우리 부부가 뒤따랐다.


MBC부터는 눈발도 눈발이지만 안개인지 구름인지 사방천지에 아무 것도 볼 수가 없게 되엇다. 눈과 구름이 발밑과 머리 위, 그리고 사방에서 우리를 감쌌다. 사방팔방이 흰색이고 우리는 그속에 갇혀버렸다. 사방 10m의 공간에 갇혀 그밖의 상황을 알 수없는 채로 그냥 맹목적으로 걷고 또 걸었다. 길은 눈속에 숨고 산은 구름 속에 숨었다. 사람의 발길은 눈속에 묻혔고, 우리 뒤를 따라 올라오던 트레커들은 안개속에 숨었다가 간혹 흐르는 구름이 엹어지면 나타나기도 했지만 너무 멀리 떨어져 갔다. 나의시야는 1m앞의 발자욱에 묶이고 그 냥 발길을 이어갔다. 아무런 이유도 없다. 합리도 사리도 판단도 없이 그냥 걸었다. 구름속에 잠시 나타났던 ABC는 아무리 걸어도 가까워져 오는 것 같지가 않고 어느새 짙은 구름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이렇게 3시간을 걸으니 멀리 ABC 안내간판이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기쁨 마음에 달려가 아내와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캠프로 올라갔다.


ABC에 도착하자 한치 앞을 볼 수 없게 내리던 눈이 먼추고 잠시 구름이 물러났다. 역시 우리는 운이 좋았다. 눈때문에 산을 볼 수 있을 거라는 기대도 없이 올라왔는데 석양을 받고 황금빛으로 피어나는 마차푸차레와 안나푸르나가 우리를 반겨줬다. ABC는 나같은 일반인이 안나푸르나봉에 접근할 수 있는 최고의 한계다. 5분정도 걸어서 View Point까지 가면 숙소 보다 해발이 조금 더 높아지겠지만 하여튼 안나푸르나 베이스 캠프에서 안나푸르나정상으로 진입해 들어가기 위해서는 엄격한 기준에 따라 당국의 허가를 받아야한단다. 몇명의 셀파에 적지않은 입산료, 보험료 등을 부담해야되지만 무엇보다 자신의 생명을 담보하지 않으면 접근할 수 없는 지역이기 때문이다.


캠프에 도착하니 롯지 두군데가 문을 열고 있었다. 호주팀을 다른 롯지로 가고 우리 부부는 파샹의 권유로 캠프입구 오른쪽 롯지에 들어섰다. 이어서 한국인 여성 한 분이 들어오고, 해가 떨어질 무렵 한국 청년 커플까지 도착했다. 방은 배정되었지만 아예 방을 둘러보지도 않았고 저녁내내 다이닝 룸에서 지냈다. 4,200미터의 고도 때문에 모두 얼굴이 대문짝만하게 부풀었고, 또 고산증의 위험때문에 술도 한잔 나눌 수 없었지만 모두다 추운 방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눈꼽만치도 없어 보였다. 급기야는 네팔 여행을 떠나와 처음으로 다이닝 룸의 길다란 의자에서 롯지 식구와 한국인 트레커 그리고 네팔리 포터들 까지 모두 같이 자기로 했다. 외국에서 오랫동안 노동자 생활을 하셨다는 사오지는 이불까지 내놓으면 편의를 봐주셨다. 이렇게 내 생애 최고의 고지에서 얇지만 편안한 잠을, 꿈길 사나왔지만 마음 따뜻한 밤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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