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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6일 마낭을 출발하여 야크카르카에서 점심을 먹고 오후 3시경 레다르에서 도착하여 걸음을 멈추고, 2월 7일 9시경 출발하여 정오가 되기 전에 해발 4,450m인 소롱패디에 도착해서 짐을 풀고 다음날 새벽에 있을 쏘롱라 패스를 준비했다.



짙은 구름이 하늘을 뒤덮고 거친 바람이 모래바람을 일으키는 밤이 지나고 아침을 맞았다. 바람은 여전했지만 다행이 눈은 오지 않았고 하늘은 조금 개여있었다. 아침을 먹고 옷깃을 여미고 거친 바람을 맞으며 쏘롱라를 향해 출발했다. 마낭을 벗어나면서 길을 두갈래로 갈라졌다. 왼편의 길을 선택하면 강사르 마을을 지나 틸리초로 가게 되지만 우리는 쏘롱라를 향해 가는 오른쪽 길을 선택했다. 강사르와 틸리초는 5년전에도 폭설로 길이 끊어지는 바람에 가보지 못했는데 이번에도 인연이 닿지 않으니 영영 못가볼 곳으로 남을 것 같아 아쉬웠다. 마낭을 완전히 벗어나기 전 뒤돌아 마르샹디강과 마낭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 올라 지나온 길을 살폈다. 불탑을 지나며 쏘롱라를 무사히 넘어 다시 마낭으로 내려오는 일이 없기를 빌며 걸음을 재촉했다. 



Chulu East 산허리를 타고 군상까지 가황무지 길은 경사가 심했다. 모래바람을 맞으며 한시간 만에 해발 400m이상을 올려야하는 힘든 코스였다. 그래도 외편의 계곡을 넘어 멀리 틸리초 피그와 닐기리 봉이 이루는 절경을 보는 낙에 그나마 우리의 지친 걸음은 힘을 얻었다. 군상에서 쉬어가며 차라도 한잔 할려고 했지만 롯지는 비어있고 마당에 찬바람만 가득했다. 아쉬움을 털고 일어나 다음 마을인 야크카르카까지 강행군을 이어갔다. 다행히 군상을 지나서는 경사가 완만하고 편안한 길이 이어졌다.



점심이 다가오자 가는 눈발이 날리고 짙은 안개가 끼기 시작했다. 오후 1시즈음 야크카르카에 도착해 늦은 점심을 먹었다. 카르카가 집을 뜻한다니 야크의 집, 다시말해 방목 중인 야크가 머무는 동네나 야크치기 목동이 지내는 움막이 있던 동네 정도일 것이다. 역시나 야크카르카에 접근하자 방목중인 야크떼를 만날 수 있었다.  하지만 목동의 움막을 확인할 길이 없고 트레킹 덕분인지 야크카르카는 번듯한 숙소가 여러채 들어서 롯지촌을 이루고 있었다. 야크집에 들러 점심을 해결했으니 우리는 야크가 된 기분으로 불순한 날씨를 뚫고 우리의 길을 나아갔다.



오후3시무렵 해발 4200미터인 Ledar에 도착했다. 하루 650m의 고도를 올려 몸이 지치기도 했지만 이후 고도 적응을 위해 걸음을 멈추었다. Ledar로 들어서는 출렁다리를 건너자마자 첫 롯지에 짐을 풀었다.  롯지의 손님은 단촐했다. 두 스페인 남자와, 중국인 커플 그리고 우리 일행 4명이 전부였다. 그리고 서너명의 가이드와 롯지 운영자 두어명이 같이 있어 그나마 든든했다.  고도가 높아진 만치 기온이 내려가고 바람과 눈보라가 몰아치는 날씨 탓인지 모두다 다이님 룸에 몰려 들었다. 책과 지도를 펼쳐놓고 차를 마시며 야크 똥을 태우는 난로가에서 몸을 녹이니 마음까지 녹아들었다. 


  


이번 여정 처음으로 4,000m 고도에 진입하고 나니 조금은 불안했다.  아직은 호흡이 간혹 불편한것 빼고는 비교적 잘 먹고 잘 걷고 있는 셈이지만 산아래서 지낼 때의 몸과 비교해서는 분명 정상이 아닌 것 같았다. 그래도 벌써 식욕도 잃고 배탈에 두통에 불면증까지 시달리는 나의 두 일행에 비해서는 우리 부부는 거의 철인 수준인 듯 멀쩡했다. 다이닝 룸에 불살이 줄어들자 차가운 룸의 침낭을 기어들었다. 계곡을 쓸고 지나가는 눈바람 소리를 들으며 춥고 불안한 잠을 청하며 지나온 길을 더듬었다. 한걸음한걸음 발을 옮길 때마다 지나온 삶을 곱씹고 살아갈 삶을 그려본다. 많은 아쉬움은 남지만 결코 내 삶이 후회스런 삶은 아니었다. 지금의 희열 그리고 다가올 삶의 가슴뛰는 모험이 더 중요하다.



레다르의 밤은 험악했다. 밤새 거친 바람이 집을 흔들고 눈발이 천장틈으로 들어와 얼굴에 뿌려졌다.  9시에 침낭에 들었지만 자정에 눈이 떴다. 다행히 잠자리에 들무렵보다 호흡은 좋아졌다. 다시 감빡 잠이들다가도 금새 집이 흔들리고 바람소리가 하늘을 가르는 불안한 기운에 눈이 떠졌다.  마당을 나서니 바람은 사람마저 저 계곡 밑으로 날려버릴듯이 기세가 등등했다. 레다르의 밤은 너무 길었다. 수백번을 뒤척여도 아침은 오지 않았다.



새벽잠이 설핏 들었다가 억지로 일어나 다이닝룸에 들러니 8시였다. 스페인 트래커는 벌써 숟가락을 댄듯 만듯한 접시를 물리고 길을 나설 채비를 하고 있었다. 밤새 호흡곤란으로 고생한 D와 두통으로 고생한 M은 아침을 맞아 상태가 호전되었다고 했다. 그래도 모두 얼굴은 부풀고 두통과 소화불량으로 상태가 정상이 아닌 몸을 이끌고 길을 나섰다. 평단한 능선을 따라 3시간 동안 스무명가량의 트레커와 네팔리가 행렬을 지어 나아간다. 안나푸르나를 스쳐 멀리 소롱피크를 지나 출루 이스트 출루 웨스트를 비켜 꾸역꾸역 길을 줄였다. 큰 산을 걷는 사람의 움직임이 워낙 작아서 사람은 산과 같이 부동의 상태로 있고 오직 바람만이 산과 계곡을 쓸고 지나가는 것 같았다.   레다르를 출발한지 1시간 넘겨 계곡을 건너 서쪽으로 넘어가니 길은 가파르고 위험했다. 드디어 험준한 안나푸르나에 들어섰음을 실감했다.

 


정오가 되기전 소롱패디에 도착한다. 쏘롱라를 넘기 전 우리의 마지막 숙소가 될 소롱패디는 고도 4,450m였다.  방을 얻고 짐을 풀고 들어선 다이님룸에는 10여명의 서양팀이 자리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몇몇 개별 트래커들이 들러 점심을 먹고는 모두들 하나같이 길을 나섰다. 점심시간이 지나자 모두가 떠나고 마지막으로 중국인 커플마저 하이켐프를 향해 떠난뒤 소롱패디에는 우리만남게 되었다거친바람이 불지만 양지자른 다이닝 룸이 아늑하고 따뜻해서 4명모두 책을 한권씩쥐고 해드는 창가에 띄엄띄엄 앉았다. 나는 이내 긴의자에 몸을 눞이고 잠이 들었다고즈늑한 봄날의 평온이 우리를 감싸고 있던 소롤패디에서의 오후는 행복했다.

 


오후3시경 하이캠프로 떠났던 중국인 커플이 다이닝룸에 들어 섰다. 하이캠프 직전에 심한 두통으로 일단 퇴각했단다. 그리고 뉴질랜드 커플이 한쌍 도착했고 마지막으로 석양녁에 히피처림의 런던보이가 들어섰다. 다국적 트레커들이 둘러앉아 야크똥난로에 불을붙이고 화려한 소롱패디의 저녁을 맞았다. 이제 메뉴를 외울 때도 지났지만 늘 끼니가 다가오면 모두가 메뉴를 뒤척였다. 그래봤자 선택지는 뻔했다. 삶은 계란에 퍽퍽한 빵, 야채튀김을 뒤적이다가 다 먹지못하고 내일의 일용할 양식으로 남겼다.



다음 날 있을 대망의 소롱라 패스를 위해 일찍들 잠자리로 떠났다. 마지막까지 난로의 온기를 아껴 자리를 지켰지만 어둡고 차가운 방에 들어서며 시계를 보니 고작 720분이었다. 한컵의 물로 양치만하고 누운 잠자리가 너무나 낯설었다. 내가 누울 곳이 아닌 곳에 누워있는 듯한 어색한 잠자리를 뒤척이다 잠깐 잠이 들고 다시 눈을 떠 시간을 확인하니 고작 자정을 넘기고 있었다. 다시 몸을 뒤집다가 결국 2시를 겨우 넘겨 일어나 침대에 걸터앉고 말았다. 4시에 기상해서 4시반까지 식사를 하고 5시에 쏘롱라를 향해 출발하기로 되어있었는데 2시에 기상을 하고 나니 밤은 춥고 길고 시간은 느렸다.



이번 여정의 최고 고도이자 고비인 5400미터의 소롱라는 5년전 폭설로 마낭 에서 돌아서면서 넘지 못했다. 이제 곧 소롱라를 넘고나면 이번 여정의 성격이 바뀌게 될 것이다. 먼저 고산증의 위험에서 해방되고 하산 길로 접어든다. 베시사하르를 출발해 마르상디강을 따라 열흘을 넘겨 고도를 높혀왔던 여정은 칼리칸다키강을 따라 12일 여정의 하산길에 접어들게 되는 것이다. 마낭주의 산록과 마르상디강변의 초지를 거쳐왔던 여정은 무스탕의 황량한 황무지와 그 황무지를 갈라 무스탕에 삶의 터전을 키워주었던 검은강 칼히칸다끼를 따라 흘러갈 것이다. 하루하루 고도가 낮아지고 기온이 오르고 그리고 네팔 최고의 현대적 휴양도시인 포카라로 들어가면 이번 여정은 끝이 난다.  



이번 여정에서 소롱라가 기점이 되듯 이번 두달의 네팔여행이 내삶의 새로운 시작이길 빌었다. 유예된 꿈들, 이루지못한 계획들, 무산된 다짐들, 미완의 시도들 이 모든 것을 버리고 새롭게 내일을 시작하는 불가능한 꿈을 꾸며 새벽 4시를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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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4일 Nawal을 출발하여 뭉지와 Braga를 거쳐 Manang에 도착해서 하루 여정을 마치고, 2월 5일 쏘롱라 패스에 앞서 고산에 적응하고 체력을 비축하기 위해 마낭에서 하루를 더 쉬었다. 


갸루에서 나왈까지의 느낌 그대로 나왈에서 뭉지까지 길은 이어졌다. 산등성이는 메마른 돌투성이 흙이 드러나고 드문드문 식물이 자라고  있었다. 야크의 먹이가 되는 키작은 초목이 자라는 목초지는 될지언정 밭을 갈고 곡식을 심기에는 땅은 너무 경사지고 거칠었다.  멀리 마르샹디 계곡으로 홈대 비행장이 내려다 보이는 길을 따라 걷다가, 고개를 들어 마르샹디 계곡을 다라 서북쪽을 향하면 멀리 강가푸르나와 안나푸르나 3봉이 눈에 들어왔다. 이 아름다운 길의 기억을 기록에 남기기에는 나의 글은 너무나 짧고 사진으로 다 담기에는 또 놓치는 것이 너무 많은 하루였다.   




나왈을 출발해 2시간여를 걸어설까? 우리는 Low Pisang에서 Hongde를 거쳐 오는 길과 만나는 나왈에 도착했다. 나왈은 험준한 아난푸르나 산등성이에서는 보기 드물게 너른 초지로 이루어진 마을이었다. 역시 야크의 교잡종으로 보이는 소가 한가롭게 마른 풀을 뒤지고 있었고, 말은 초지 사이를 흐르는 개울에서 물을 마시고 있었다. 말이 물을 마시는 사이 마부도 쉬기 위해 말을 내렸고, 우리도 배낭을 벗고 쉬어가기로 마음 먹었다. 뭉지는 말도 마부도 트레커도 짐을 벗고 쉬어가기 좋은 동네였다. 너른 초지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는 소들을 바라다 보면서 우리 역시 인생의 짐을 내려놓고 시벅쥬스를 한잔 가득 마시며 한가로이 해바라기를 했다.


   


나왈에서 마르샹디 강을 만나 30여분을 더 걸으니 마낭 직전 마을인 Braga에 도착했다. 강쪽 길가에는 롯지촌이 형성되어 있었고 오른쪽 산자락아래는 사찰과 함께 민가들이 옹기종기 모여 마을을 이루고 있었다. 동네 앞에 너른 초지 중간에는 불상이 세워져 있었고 주변에는 몇개의 벤치도 놓여져 있었다. 동네의 광장같은 역할을 하는 공유지 같았다. 우리가 마을에 들어설 무렵 수업을 마친 한무리의 꼬마들이 우리 앞을 지나갔다. 아이들을 보니 장난기가 발동했다. 우리에게  남아있는 2개의 축구공 중에 한개를 주고 싶었다. 아이들에게 축구를 하자며 불러 세워 잠시 잠깐이나마 같이 공을 찼다. 좀 더 놀고 싶었지만 브라가도 3,500m 고도의 고산 마을이다보니 금방 숨이 찼다.  




브라가를 지나 마르샹디강을 따라 30분도 걷지 않아 마낭이 올려다보이는 지점까지 도착했다. 마낭 도착전 마지막 휴식을 위해 차우타라(chautara)에서 배낭을 벗고 숨을 돌렸다. 본격적인 고산 트레킹을 시작하는 마을 마낭에서 보낼 이틀의 휴식에 가슴설레이며 마을을 들어선뒤 Tilicho Hotel을 찾아 짐을 풀었다.  모처럼 밀린 빨래를 하고, 마을을 돌아보고, 생필품을 사고 그러고도 시간이 남아 가이드 바수의 부추킴에 넘어가 뚱바를 파는 가게를 찾아 자리를 잡고 일행을 불렀다. 맛있는 애플파이로 기억될 Tilicho Hotel에서의 첫날이 저물었다.  




고도적응일로 꼭 하루 더 쉬어갈 것을 강권하는 안내서들에 따라 우리도 마낭에서 걸음을 멈췄다. 사실 마낭에서의 하루는 단지 쉬기 만을 위한 날은 아니다. 2박 3일을 지내도 다 둘러보지 못한 숱한 명소와 볼거리가 널려 있기 때문이다.  강가푸르나 호수와 빙하,  Milerepa's Cave와  Ice Lake 만해도 하루에 다 가 볼 수 없을 정도인데 나는 틸리초로 가는 길목에 있는 강사르 마을을 가보고 싶었다. 하지만 계획은 틀어지고 명소들은 다 건너 뛰고 가까이 마을 산책으로 하루를 보내기로했다.




게으른 아침을 보낸뒤 우리는 늦게 롯지를 나와 전날 스쳐 지나왔던 Braga로 향했다. 목적지 없이 보내는 하루를 브라가 곰파를 찾는 것으로 시작했다. 가파른 계단을 통해 올라간 곰파는 500년 이상된 사원이라고 했고 나름 세월의 멋을 간직하고 있었지만 사람의 손길을 받지 못하고 낡아가는 느낌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계절적인 이유로 일시적으로 비워져 있는 건지는 알수 없었지만 사람이 살지 않고 마을에 의해 관리되는 곰파치고는 너무나 방치된 느김이었다. 지금까지 들렀던 티벳불교 사원 거의 대부분이 중건중이거나 잘 관리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브라가 곰파는 그렇지 못했다.




브라가 곰파에서 내려와 마르샹디를 건너 강가푸르나와 마르샹디가 만나 형성된 널다란 초원을 걸었다. 늘 바람처럼 가벼워지고 자유롭고 싶다던 소망이 그 순간만은 이루어진것 같았다. 우리는 초원 여기저기에 흩어져 풀을 뜯는 말들 사이로 풀잎처럼 가벼운 몸과 마음으로 정처없이 걷고 또 걸었다. 일년 365일을 살면서 단 하루라도 가야할 곳도 없고, 기다리는 사람도 없고, 시간을 느낄 필요도 없는 진공같은 평화를 내 자신에게 선물하고 싶었는데 그 작은 소망이 마낭에서 마침내 이루어지고 있었다.



마르샹디는 강물은 많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맨발로 건널만치 적은 수량도 아니었다. 한참을 강을 거슬러 마낭 시가지가 끝나는 위치까지 가서야 다리를 만났다. 가파른 강둑을 올라 마을을 들어서니 마땅히 할일이 없이 마을을 배회하고 있던 바수와 나브라즈와 마주쳤다. 마지막 남은 축구공과 학용품을 전해줄만한 아이들을 만나지 못한 바수와 나브라즈는 우리를 마낭 곰파로 안내하며 마낭곰파에 딸린 마을 공동체 조직에서 아이들을 위한 프로그램 같을 것을 운영하고 있고 그곳에 기증하면 좋겠다는 제안 했다. 



마낭 곰파에 들어서니 7~8명의 사람들이 마주앉아 차를 돌리고 예불을 준비중이었다. 학용품이나 전달하고 부처님 앞에 공양이나 하고 나올 참이었다가 갑자기 곰파의 안내를 받아 경내에 착석하고 차까지 대접받았는데 곧바로 예정에 없던 예불에 참여까지 하게 되었다. 혹시 방문객을 위한 공연 개념의 예불이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겠냐는 생각이 더 크게 들었다. 전통악기를 연주하며 불경을 외는 네팔리의 목소리에 우리 모두는 푹 빠져 들었다. 고단한 삶이 그대로 묻어나는 투박한 형식의 예불이 억지로 짜내는 화려한 성전의 경건함보다 더 절실하게 다가왔다. 제도화가 덜된 날것 그대로의 종교를 만난듯한 감동은 오래도록 남을 것 같았다. 이렇게 예불마저 참여하고 나니 쏘롱라를 향한 우리의 발걸음에 부처님의 가호가 함께할 것이라는 믿음이 나를 든든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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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1일 차메를 출발, 브라탕, 두쿠르포카리를 거쳐 어퍼피상에서 하루 밤을 머물고, 2월2일 가파른 오르막을 힘겹게 올라 갸루에서 점심을 먹고 나왈까지 걸어 하루를 마무리했다.



차메의 아침은 분주했다. 고산증으로 하산중인 캐나다 청년은 사우니를 통해 짚차를 알아보고 이른 아침 도망가듯 떠나갔다. 도로는 좁고 가파랐고 포장이나 가드레일은 물론 없었다. 사륜차가 아니면 다닐 수도 없는 열악한 조건인데 눈까지 얼어붙어 나같으면 도저히 그 길을 차를 타고 내려갈 자신이 없었다. 짚이 떠난뒤 사우니 이야기로도 작년에도 사람과 짐을 가득 실은 차가 수백미터 아래 마르샹디로 떨어져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등 역시나 사고가 빈발한다고 했다.  캐나다 청년은 떠나갔지만 탄촉부터 그 청년을 따라왔다는 검정개는 우리곁에 남아 있었다. 어제 저녁 롯지 복도에 잠을 자던 검정개는 롯지의 개가 아니고 그 청년을 따라 들어온 낯선 개라고했다. 낯선 개가 롯지 실내에 들어와 복도에서 잠을 자도록 버려두는 네팔리들의 동물에 대한 태도가 참 남달랐다.



길을 나서기전 롯지에서 일을 보던 13살 소녀 수니타에게 축구공과 아주 조금의 용돈을 쥐어주었다. 그 아이는 일찍 아버지를 여위고 엄마는 다른 롯지에서 일을 하고 자신도 역시 포탈라 롯지에서 심부름을 하면서 입을 들고 학교를 다니고 있다고 했다. 맑은 눈에 꿈많은 아이가 살아갈 세상이 꽃길은 아닐 지언정 제발 험하고 곡절많은 가시발길이 아니길 빌면서 롯지를 나섰다. 깔리(검정개)도 우리를 따라 길을 나섰다.

 


차메를 벗어나기위해 한바탕 법석을 떨어야했다. 우리를 따라 나선 깔리를 지나는 길목마다 지키고 있던 다른 개들이 그냥 두질 않았다. 집단으로 덤벼드는 개를 쫒고 우리 뒤로 숨어드는 깔리를 지키면서 겨우 마을을 벗어났다.  길을 걷기 시작하자 마자 탈레큐를 지났다. 우리는 숲속으로 들어갔다가 금방 나오고  조금 가파른 듯한 언덕길을 오르다가도 어느새 편안한 길을 걷고 있었다. 누구라도 지치지 않고 편안히 걷기에 딱 좋은 길이 이어졌다. 날씨 마저 최상의 날이었다. 공기는 건조하고, 하늘은 투명하도록 새파란 빛에 흰구름마저 어울렸다. 계곡을 갈라 파란 하늘이 열리고 그 너머로 설산이 얼굴을 내미는 아름다운 길은 아무리 걸어도 지칠 것 같지 않았다.   



 

차메를 떠난지 두세시간이나 지났을까 목이 마르고 잠시 쉬어 가고 싶을 때쯤 커다란 사과 과수원이 길따라 가꾸어져 있고 농장 시설이 있는 브다땅을 지났다. 오랜만에 신선한 과일향이 그리워 과수원에 딸려 있는 듯한  bhratang Tea House에서 배낭을 벗었다. 말라 비틀어진 조그마한 사과를 생각보다 훨씬 높은 가격에 사고, 예상보다 시원하고 향그러운 데다 가격까지 싼 사과쥬스를 한잔씩 나누었다.  사과농사를 짓는 입장에서 볼때 과수 상태는 볼 것도 없었지만 그 규모만은 놀랄만했다.  대규모의 농장이 소농의 삶의 터전을 흡수하는 방식이 아니라 지역 농민에게 도움이 되는 방식으로  가꾸어지기를 빌었다. 땀이 마르고 겉옷을 찾을 만치 몸이 식은 뒤 다시 걷기 시작했다.

 


 

입안에 가득 사과향을 머금고 브라탕을 출발하자마자 좁고 긴 계곡을 이루는 절벽을 깨서 만든 위태로운 길이 나왔다. 사람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 건지 어떻게 이런 절벽을 깨서 길을 만들 생각을 했을까 신기하기만 했다. 반터널같은 길을 지나 가파른 숲길을 통과하자 갑자기 시야가 넓어지고  오른쪽으로 깍아세운듯한 암벽능선이 보이기 시작했다. 디쿠르포카리에 접근하자 이 암벽 능선은 우리의 시야를 압도하는데  '스와르가 드와르'(혹은 paungda Danda)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빙하의 침식이 만든 무려 1500m 높이의 바위 한개로 이루어진 절벽으로  여기 사는 티벳사람들은 자신이 죽으면 그 바위산을 넘어 고향 티벳으로 돌아간다고 믿는다고 했다.

 

 

Dhukure Pokhari를 지나면 이날 하루의 휴식이 기다리고 있는 Pisang이지만 피상은 마르샹디 계곡을 따라 형성된 Low Pisang과 마르상디 계곡을 벗어나 북쪽 산자락에 자리잡고 있는 Upper Pisang으로 나누어져 있고, 이번에는 Upper Pisang을 택해 길을 잡았다. Dhukure Pokhari를 왼편으로 끼고 돌아, 멋진 나무다리를 밟고 마르샹디를 건너 완만한 언덕길을 잡아 3km쯤 걸었다. 

 

 

Pisang 마을을 들어서자 가파른  골목길을 타고올라 마을의 제일 높은 위치에 자리잡은 롯지에 짐을 풀었다. 빨래를 들고 데크에 나가서니 시야가 너무나 시원했다.  마르샹디 계곡아래 Low Pisang을 내려다 보고, 고개를 들어 안나푸르나 2봉을 비롯한 산군들을 바라다 보다가, 다시 눈을 돌려 '스와르가 드와르'넘어 지나온 길을 더듬었다. 그리고 오른쪽을 눈을 돌리니 우리가 넘어야할 쏘롱라로 이어지는 가는 길들이 헌준한 산들 사이에 실가락 처럼 사라졌다. 

 

 

숙소를 나와 마을 꼭대기에 있는 불교 사원에서 남은 오후 시간을 보냈다. Gompa의 역사는 알수 없었지만 마을 사람들이 기부해서 만든 절이라고 했다. 사찰내 건물의 대부분은 새로 지어진 듯 했고 오래된 절이 갖는 멋은 없어 보였다. 그래도 우리는 본전에 들어가 모두 부처앞에 절을 올렸다. 우리의 가이드 바수와 나브라즈는 흰두교 신자지만 부처와 시바가 다르지 않다고 했다. 나는 무신론자지만 그 순간에는 여기 터잡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신을 존중하고 싶었다. 그리고 십몇년을 같이 살다 네팔로 떠나오기 직전 생을 마친 우리집 강아지 초롱이의 명복을 빌었다. 롯지로 돌아와 전망 좋은 다이닝 룸에서 해지는 안나푸르나의 멋에 취해 밤을 맞았다.

 

 

하루에 600m를 높여 고도 3300m인 Upper Pisang에서 아주 가벼운 고산증이 왔다. 조금의 불면과 가슴두근거림 정도라서 걱정스러울 정도는 아니었지만 아직 갈 길이 머니 내 몸 상태의 변화에 대해 세심한 관찰이 필요해 보였다.  피상을 벗어나 수평에 가까운 길은 마르샹디의 흐름과 같이 하면서 한시간 쯤 걸은 뒤 출렁다리를 건너자 마자 길은 갑자기 가파른 상승길로 바뀌었다. 단 한번의 내리막이나 평지도 없이 가파른 오르막길은 끝없이 이어졌다. 거의 심리적 육체적 한계치에 도달할 즈음 작은 Tea House가 나왔고 우리는 갸루 입구에 도착을 했다.

 

 

우리는 잠시 차를 나누며 숨을 고른뒤 애매한 점심시간때문에 고민하다가 좀 더 걷기로 하고 출발 했다. 하지만 마을을 관통하는 골목길을 벗어나자 마자 우리는 발길을 돌려 되돌아왔다. 다음 마을까지 거리도 멀고 혹시 문을 연 식당이 없을 수도 있다는 가이드의 조언을 받아들여  엿다. 사람의 온기가 식어 한산하고 쓸쓸한 마을로 돌아왔지만 문을 연 식당을 찾을 수 없었다. 여행안내서에는 이곳 주민들이 주로 야크를 키우고 곡물을 재배하면서 오래 전에 획득한 무역영업권을가지고 여전히 무역업에 종사한다는 설명을 읽었지만 눈으로 확인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마을 입구에 들어섰을 때 우리를 붙잡던 식당으로 돌아가니 놓친 손님을 다시 받게된 사우니가 반갑게 우리를 맞았다.

 

 

뚝바를 시키고 사우니가 밀가루 반죽을 미는 동안 나브라즈는 사우니를 통해들은 마을 사정을 전했다. 갸루에는 7명의 아이가 있는데 그중 3명이 카트만두 유학중이고 이 마을도 점점 사람이 줄어 마을이 비어가고 있다고 했다. 네팔 역시 저개발상태를 벗어나기 위해 도시화를 할 수밖에 없다고 보면 산간에 형성된 갸루같은 외진 마을이 사라져가는 현상도 피해갈 수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사람도 나고 죽듯 마을 역시도 생겨나고 소멸하는 순환과정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이 당연한데도 이 마을에 사람이 줄고 있고 머지않아 마을 자체가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가슴이 아팠다.

 

 

갸루에서 나왈까지도 메마른 산자락을 따라 길이 이어졌다. 계절 탓도 있겠지만 주변의 숲은 빈약했고, 자갈 투성이 흙은 푸석거렸고, 키작은 식물들은 거친땅에 뿌리를 내리고 겨우 연명하는듯 애초로웠다. 그래도 어퍼피상 트렉을 선택하고 가파른 오르막을 올라 갸루를 지나고 다시 수평의 길을 따라 나왈까지 가는 길은 탁월한 조망을 우리에게 선물했다. 갸루를 향해 한번도 쉬지 않고 600m의 고도를 올리 때는 후회가 컸지만, 막상 갸루 이후 수평의 길을 걸으며 안나푸르나 2봉, 피상 피크, 그리고 안나푸르나 4봉을 손에 닿은듯 가까이서 마주하면서는 우리의 선택이 자랑스러웠다.  갸루를 출발한지 2시간이 안되어 멀리 나왈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왈 역시도 주변의 산과 언덕, 밭과 초지를 닮아 눈에 드러나지 않는 흙빛 마을이었다. 마을이 갸루 보다는 크고, 마을을 이루는 터전 역시 넓어 보였지만 사람의 발길이 드문 것은 전혀 차이가 없었다. 마을은 비어있는듯 조용하고 오고가는 사람의 흔적이 드물었다. 하루종일 주민을 만난 것은 손에 꼽을 만치 적었고 트레커는 단 한명도 만나지 못했다. 순전히 계절탓만은 아닌 것 같았다. 우리를 따르던 깔리도 어느 순간 사라졌다. 기회가 되면 고기를 듬뿍 넣은 볶은밥이라도 한그릇 시켜줄려고 마음 먹고 있었는데 우리의 행동이 너무 굼떴다. 더이상 기다리지 못한 깔리는 다른 인심좋은 트레커를 따라 자신의 길을 간것이 틀림없었다. 나왈의 밤은 깊고 편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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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31일 아침 Tal을 출발 카르테지나 다라파니에서 점심을 먹고 바가르찹지나 다나큐에서 길을 멈추고, 2월1일 다나큐를 출발 티망지나 탄촉에서 점심을 먹고 고토지나 차메에서 하루 일정을 마무리 했다. 



딸을 출발해 마르상디의 동쪽 강변길을 걷다가 출렁다리를 넘어 서쪽 찻길로 접어들었다. 얼마를 걷다가 다시 동쪽으로 강을 건너고 마을이 보이는 데서 서쪽으로 강을 넘어오니 카르테다. 역시  걷는 길은  옛길이 좋다. 그 길을 걸은 사람과 동물의 발자욱이 보이고, 흘린 땀내가 맡아지고, 사연 깊은 이야기가 들려 오기 때문이다. 산과 강이 만나 위태롭지만 아름다운 강과 산과 하늘빛이 조화로운 카르테를 지나 이른 점심 무렵 다라파니에 도착했다. 다라파니는 마나슬루산군과 안나푸르나 라운드코스가 갈라지는 분기점에 자리잡은 마을이다. 동쪽 계곡으로 들어가서 마나슬루 산군으로 갈까, 가던 길을 이어 서쪽으로 계속가서 쏘롱라까지 올라갈까 마음이 흔들리는 마을 다라파니에서 점심을 먹었다. 



딸 지나 다라파니까지도 그랬지만 다라파니 지나  다나큐까지 이어지는 길도 평탄했다. 중간의 바가르찹은 오래전 산사태로 롯지들이 매몰되는 사고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었지만 눈으로 보기에는 흔적을 느낄 수 없었다. 하루 종일 강을 따라 편안한 길만 걸다보니 동네 뒷산 산책 나온 듯 마음이 가벼웠다. 고산증을 느끼거나 추위를 걱정할 만치 높은 고도도 아니고, 그렇다고 너무 더워 걷기에 불편하게 낮은 고도도 아닌데다가 가파르고 험한 길도 없었다. 앞으로 하루하루 고도가 높아지고 길은 험해지고 추위와 고산증의 위험이 커지겠지만 아직까지는 실감이 나지 않아다. 



하루 밤을 쉬어갈 다나큐가 다가오자 하늘은 잔뜩 찌푸렸고 끝내  진눈깨비를 뿌렸다. 진눈깨비를 맞으며 Hotel Peacefull & Restaurant를 들어섰다. 룸에 배낭을 내려놓자마자 한기를 느끼고 다이닝 룸을 찾아 난로를 부탁했다. 네팔에서 아직까지 훨훨 타는 난로를 본적이 없었고 이 롯지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부족한 연료로 지핀 알뜰한 작은 불씨 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따뜻했다. 난로가로 모여든 중국인 커플과 우리 일행은 덜마른 빨래를 말리고, 지도를 살펴 내일의 일정을 체크하고, 난로가 전해주는 온기에 기대어 여행이 주는 행복에 취했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얼마되지 않아 계곡에 어둠이 깔리고 빗소리가 굵어졌다. 그때 갑자기 한무리의 네팔리가 조용하던 다이닝룸을 들이 닥치고  씨끌벅쩍해지면서 우리의 안식은 끝이 났다. 



룸으로 돌아와 침낭에 들어가니 자기에는 너무 이른 시간이었다. 지루한 저녁 시간을 줄이려 모처럼 책을 들었다. 혹시하면서 굳이 배낭에 넣어 온 덕분에 참 오랜만에 니이체를 읽었다. 하지만 글은 눈에 들어오지 않고 그냥 가슴만 울릉거렸다.  내 젊은 날의 꿈들이 꿈틀거리며 되살아났다. 인식에 내 삶을 온전히 받치겠다는 호기는 간데없고 생활의 노예가 되어 힘겹게 견뎌온 나의 삶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과잉 자의식과 무기력 말고는 달리 규정할 수 없는 나의 지난 세월이 이제는 후회하기에도 너무 늦었건지도 몰랐다. 남은 나의 인생을 잘 살자는 다짐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사실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남은 한가지는 그냥 있는 그대로의 내 삶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고 그런 태도가 나이가 주는 지혜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 덕분에 단잠이 들었다.



2월 1일 아침 다나큐의 Hotel Peacefull & Restaurant 을 나오니 밤새 내리던 비는 거치고 말쑥한 하늘이 우리를 맞았다. 마을을 벗어난뒤 얼마지나지 않아 가파른 숲길을 만났다. 다나큐에서 티망까지 무려 700m의 고도를 1시간 남짓만에 올려야 하니 모처럼 숨이 차고 땀이 났다. 몇구비의 비탈진 산길을 올라 시야가 시원하게 터이는 마을에 도착하니 티망이었다. 티망에서 서쪽으로 눈을 돌리니 마나슬루봉이 손에 닿일듯 바짝 다가와 있었다. 어제 내린 진눈깨비가 고도 덕분에 티망에서는 눈이되어 쌓여있고 동네 아이들이 눈썰매를 타느라 정신이 없었다. 아이들 노는 모습을 사진에 담다가 사진만으로 당이 차지 않아 어른들도 나섰다. 아이들에게 부탁해서 썰매를 빌려 바수와 라마나쉬 그리고 우리도 잠시잠깐이나마 동심으로 돌아갔다.



티망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뒤 다음 목적지인 탄촉을 향했다. 고도 3, 000m인 티망에서 탄촉까지는 300m의 고도를 내려야 하는 완만한 내리막 숲길이 이어졌다.  탄촉 직전  Evergreen Hotel & Restaurant의 눈쌓인 야외에서 따뜻한 햇살을 받으며 점심을 먹고 지난 한달간 나의 머리와 얼굴을 지켜주던 모자를 남겨두고 길을 나섰다. 계곡으로 내려가 다시 오르막을 타고 산사태로 무너져 조금은 위험해 보이는 길을 통해 마을로 들어섰다. 어떤 마을은 지나고 나서야 더 머물렀어야 했다는 미련이 남곤했는데  탄촉 마을이 꼭 그랬다. 딸이나 차메는 트레커가 붐비고 트레커를 위해 만들어진 마을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면 탄촉은 그와 반대였다.  탄촉은 주민에게는 트레커가 낯설고, 트레커에게는 주민을 마주치기가 어색한 전통적인 산간 마을로 다가왔다.  



야외에서 눈을  밟으며 점심을 먹고 출발한뒤 한시간여만에  Naar -Fu 계곡과 마르샹디강이 만나는 koto 를 지나고 오후 3시 30분에 마낭주의 수도 차메에 도착했다. 지금까지 가이드에게 숙소 선택을 거의 맡기다 싶이 해 왔는데 이날만은 우리가 롯지를 정했다. 한국에서 오랜동안 일을 해서 한국어에 능통하고 한국인의 식성과 문화를 전적으로 이해하는 사우니(여주인)가 운영하는 Potala Guest House에 짐을 풀었다. 



모처럼 한국어에 능통한 사우니를 만나니 묻고 싶은 것도 많았고 말하고 싶은 것도 많았다. 롯지의 여주인은 서울 근처 도시에서 오랜동안 일을 하다가 이명박정권 때 불법체류 노동자로 적발되어 추방당했고 지금도 한국가서 일하고싶다는 뜻을 내비췄다. 우리에게는 무척이나 친절했고 한국식 수제비를 맜있는 깍두기와 함께 내어 놓아 우리를 기쁘게 해주셨다. 안나푸르나 라운드 중에 어쨌던 한식을 먹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못했는데 배가 작아서 아쉬웠다. 



나에게 차메는 본격적인 산으로 들어가는 입구같은 마을로 느껴졌다. 차메 다음 코스인 피상만해도 해발 3300m나 되니 술과 담배를 자유롭게 할 수 있는 마지막 마을이 차메인 셈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차메에 도착하면 똥바라도 한잔하고 쏘롱라를 넘을 때 까지는 술과 담배를 절제하기로 마음먹었다. 첫 라운드 때는 그래도 나름 절제를 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이번에는 그렇지 못했다. 해발 3500m인 마낭에서 마지막 술을 마시고 해발 5400m인 쏘롱라를 넘을 때까지 담배를 계속 피워댔다.  



포탈라롯지는 밤새 정전이 되었다. 정전된 방에 일찍 올라가기도 그렇고 무엇보다 난로가 있는 다이닝 룸을 떠나기 싫어 밍거적 거렸다. 그나마 다이닝 룸은 충전지를 이용해 켜진 여린 전등이 있었다. 심한 고산증으로 쏘롱라를 넘지 못하고 하산한 캐나다 청년과 쏘롱라를 향해 우리와 같이 올라가야할 씩씩한 스페인 청년 그리고 영어에 젬병인 우리 일행이 난로를 사이에 두고 어색한 대화를 나누었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네팔 트레킹 때는 늘 밤이 길다. 이번에도 그랬다. 내가 트레킹을 할 수 있는 계절이 꼭 겨울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산이 높고 계곡이 깊어서 그렇기도할 것이지만 아마도 잦은 정전도 한몫을 하는 것 같다. 밤은 긴데 책을 보기에는 눈이 시리고, TV나 PC도 없고 폰도 와이파이가 불안전하니 마땅히 할짓이 하나도 없다. 영어가 짧으니 대화상대를  만나도 그냥 간단한 인사이상으로 대화를 이어나갈 수가 없다. 그러다보니 생각이 많아진다. 생각이 많아진다는 것은 좋게 말하며 자신에게 온전히 집중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할 것이다. 



정전마저 되어 일찍 침대에 들었지만 두 눈은 감기지 않고 의식은 말똥말똥 되살아나니  밀쳐둔 생각들이 구름처럼 밀려 왔다. 삶의 현장을 탈출해 보내게 된 두달의 네팔 망명(!)이 이후 나의 삶에 어떤 변화를 가져다 줄까, 아니면 그 자체 어떤 의미가 있을까는 의문이 일었다. 하지만 이번 여정을 통해 단지 쉬는 것 이상의 어떤 것을 바란다면 그것은 과욕이 분명한 것 같았다. 굳이 의미를 부여한다면 그냥 일상의 긴장 속에 굳은 의식의 근육을 풀수 있도록  내 자신에게 스스로 자유를 선물하는 것 정도가 전부가 아닐까 생각되었다. 하지만 단지 그 정도를 위해서 두달의 시간과 비용을 지불해도 좋은가는 물음에는 단호히 그렇다고 정리했다. 지금까지 나에게 여행보다 대단한 일상이 있어본 적이 없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 확실하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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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9일 아침 Upper Ngadibazar에서 출발하여, 바훈단다까지 오전에 걷고 Germu에서 1박을 한뒤, 1월 30일 옛 트레킹 코스 반대편 서쪽 강둑 절벽을 따라 돌을 깨고 만든 새길로 Tal까지 가서 1박을 했다.

 

우리는 Ngadi의 롯지에서 최악의 시설과 최고의 친절을 동시에 경험했다. 배갯머리에 쥐똥이 쌓이고 유리도 없는 창은 방 안밖의 구별을 불가능하게 했지만 모처럼 손님을 맞은 사우지 사우니는 연신 우리가 자신의 롯지를 찾아주어 너무 행복하다고 했다. 우리가 누군가를 행복하게 해줄수 있다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더할나위 없는 행복한 트레킹이 될 것을 예감하면서 라운드 둘째 날을 맞았다. 

 


점심을 먹은 바운단다까지의 길은 편안했다. 날씨는 온화했고 바람도 없고 맑고 투명했다. 그냥 숨을 쉬고 걷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행복에 겨워지는 그런 날이었다. 얼굴에 웃음기가 번지고 하루종일 걸어도 지칠 것 같지 않은 기분으로 도착한 바훈단다의 롯지는 평화로웠다. 바훈은 브라만을 뜻하고 단다는 언덕을 뜻한다니 바훈단다는 '브라만이 사는 언덕 마을'일 것이다. 여전히 작동하고 있는 카스트의 최상단 계층이 모여사는 마을은 다른 마을과 어떻게 다른지 모르겠지만 일단은 깨끗하고 잘 사는 동네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햇살 좋은 Hotel Superb View 정원에서 점심을 먹고 차를 마시고 그냥 그 자리에 눌러 앉고 싶기도했지만 마지못해 다시 배낭을 짊어지고 길을 나섰다. 못내 아쉬운 가이드는 그냥 여기서 하루를 쉬자고 제안했지만 하루를 마무리하기엔 걸은 길이 너무 짧았다. 


   


길을 걸으며 나는 5년전의 기억과 지금을 비교하고 기억의 흔적을 드덤고 달라진 것들을 확인했다. 5년전 있던 것이 없어지고 그 때 없던 것이 새로 생겨난 분명한 것이 있었다. 당나귀와 댐이 그것이다. 5년전 트래킹 내내 앞서거니 뒤서거니 같이 했던 그 많던 당나귀들이 보이질 않았다. 마르샹디강따라 찻길이 뚤리면서 그많은 당나귀와 노새들 그리고 목동들이 다 사라진 것 같았다. 당나귀와 노새대신 차와 기사가 더 많은 짐을 손쉽게 고산지대 마을로 나르게 되었으니 주민의 삶은 훨씬 덜 고달파졌을 것이다. 길을 걷는 내내 귀전에 울리던 방울소리가 귀국후에도 한참을 이명으로 남아 나를 몽환 속으로 이끌곤 했었는데 이제 나귀의 방울과 발자욱 소리 대신에 간혹 지나가는 차가 우리를 감짝 놀래키곤 했다. 변화는 바람직하고 피해갈 수 없는 것이긴 한데 그 많던 당나귀는 어디로 가고 그 목동은 운전기사가 되었을까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그전에 없던 것이 새로 생겨난 것은 바로 댐이었다. Upper Marsyandi 수력댐은 중국의 원조로 네팔의 전력난을 해소하는데 기여할 수력발전소라고 했다. 세계 2위의 수자원보유국이면서 수도 카트만두 조차 하루 몇시간밖에 전기가 들어오지 않던 시절은 벌써 옛이야기가 되었고 이번 여행중에는 기적같이 거의 정전이 없었다. 그것이 바로 이런 수력댐 덕분일진대 댐이 옛길을 삼키고 마을을 내쫏고 풍경을 변화시킨 것에 대해 마음 아파 할 수만은 없었다. 내 보기 좋자고 그들에게 불편을 감수하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아닌가? 그래도 입안엔 쓴맛이 남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중국 자본에 네팔이 휘둘리지 않기를, 네팔의 개발과 발전이 네팔의 자연의 아름다움을 집어 삼키지 않는 방향으로 나아가기를 빌며 댐을 피해 길을 걸었다. 



이른 오후에 게르무 레인보우 롯지에 도착했고 하루를 마무리하기로 했다. 아름다운 마르샹디 동쪽강둑위에 형성된 게르무 마을은 아름다웠고, 레인보우 롯지는 깨끗하고 운치있었다. 여유있는 오후시간을 빨래와 샤워, 그리고 편안한 휴식으로 보내고 지나온 길을 반추하며 이른 잠자리에 들었다.  행복의 절정에는 늘 그늘이 끼기 마련일까? 바훈단다를 지나며 문득 얼굴을 스쳐지나는 바람에 나의 청춘을 지배하던 불안을 환기했다. 수만갈래의 길이 앞에 놓여있던 시절 그 어느 길도 선택할수 없어 불안만이 나의 자의식을 확인시켜 주었었다. 헤어날 수 없었던 불안의 심연에서 나마 그 불안사이를 비집고 게으름을 만끽하던 나의 청춘은 감히 아름다웠다고 말 할수있을 것이다.  희미한 기억속을 비집고 정체를 드러낸 그 느낌이 온전히 나의 것이 된다면 내 나머지 삶은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여행은 지나간 나의 삶을 온전히 되돌려받는 축복이다.



게르무에서는 씼고 쉬고 잠도 잘 잤지만 포터 바순의 나쁜 술버릇이 드러났다. 전날 나디에서 술주정이 부끄러웠던지 바순은 내가 권한 락시까지 거절하며 쏘롱라패스후에 묵디나트에서나 같이 한잔하자며 패스전에는 '노소주'한다고 호언했다. 하지만 부억을 들락날락 거리던 바순은 호언한지 두시간도 안되어 술냄새를 풍기며 수다스러워졌다. 더 가관인 것은 알콜이상의 뭔가를 한 낌새를 느낄 수 있었다. 계속 실없이 웃고 떠들어 분위기가 불편해지기 전에 모두들 침실로 흩어졌지만 잠자리에 든 뒤에도 룸의 얇은 벽을 통해 한참을 동료 라마라쉬와 떠들어되는 라마의 취한 목소리를 들어야했다. 



가파른 강둑을 내려와 마르샹디강을 건너니 상계가 나오고 강의 서쪽 길을 걸어 Shrichaur의 Boomerang 롯지를 지났다. 시리사우르를 지나자 지그재그의 가파른 길을 한참 올라가니 강과 마을을 조망할 수 있는 지점에 도달했다.  Jagat 이후에는 강을 건너 티벳탄이 소금을 나르던 아름다운 산길을 당나귀와 한줄로 나란히 걸고 싶었다. 하지만 강의 서쪽으로 새로 찻길이 나면서 사람의 발길이 끊긴 구길은 관리가 안되는지 여기저기 산사태로 끊겨 있고 었다. 딸까지는 가파른 암벽 절벽을 깨서 만든 위태로운 돌길이 이어졌다. 발아래 천길 낭떨어지 아래 마르샹디 강이 흐르고 머리위 절벽은 돌이라도 굴러내리지 않을까 위태롭기까지 했다. 대신 소금을 나르던 티벳탄의 발길을 따라 걷던 옛길의 따뜻함은 줄었지만 가파른 절벽위를 가르는 길은 시원함을 넘어 아찔한 조망을 우리에게 선물했다. 


새로난 찻길이 우리를 딸까지 이끄는 동안 다행히 먼지를 일으키며 우리를 놀래키던 차를 몇대 만나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구길이 오르락내리락 사람을 지치게 했다면 새길은 구길보다 평탄하긴했어도 훨씬 더  길어진 것 같았다.  도저히 길을 만들 수 없어 보이던 절벽을 깨고 돌면서 길을 내다보니 길은 산 구비를 따라 멀리 돌기도하고 아예 마르샹디강이 보이지 않는 산넘어가지 이어지기도 했다. 역시 농가가 있고 아이들이 있고 집에서 키우는 염소가 있던 아기자기한 아름다움이 사라진 새길은 우리를 쉬 지치게 했다. 딸이 멀리 보이기 시작하면서부터 우리는 더 빨리 지쳐갔다. 손에 잡힐 듯 보이는 딸은 쉽게 다가오지 않았고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겨우 딸을 향해 가파른 언덕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카트만두의 숙소 마야거르츄를 출발할 때 파샹님으로부터 제안을 받은게 있었다.  어떤 트레커가 축구공과 학용품을 맡기면서 고산지대의 아이들에게 전달해주기를 부탁했다고 했다. 파샹님은 그 축구공과 학용품을 우리가 좀 전달해주면 안되겠냐고 했다. 사실 트레킹 짐을 싸면서는 가능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최소한의 짐만남기는 것이 철칙인데 예정에 없던 축구공 3개와 문구 한짐을 맡아 고산지대까지 지고 가기에는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그것을 마련해 주었던 분의 따뜻한 마음을 거역할 수 없어 각자의 배낭에 한개씩의 축구공과 문구를 나누어 지고 왔다.  딸이라고해봤자 고작 해발 1700여미터밖에 되지 않으니 아직 공을 나누어 줄 때가 되지 않았지만 이날 첨으로 예정에 없던 축구공 나눔을 해야했다. 

강변으로 내려오니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망치로 자갈을 깨고 있었다. 집을 짖거나 도로를 포장할 때 사용할 잔자갈을 직접 망치로 깨서 만들고 있는 것이라고했다. 눈과 코주변은 물론 온 몸을 돌먼지로  뽀얗게  뒤집어 쓴 아이들이 하얀 이를 드러내며 우리를 향해 나마스태를 외쳤다. 하루에 1달러전후의 저임금 아동노동이 극심하다는 네팔의 현장을 우리는 한가로운 트래커로 막딱뜨린 셈이었다. 값싼 동정심이라고 비난받을 지도 모르지만 순간 가슴이 너무 아려왔다. 그 아이들에게 무어라도 해주고 싶었고 나도 모르게 배낭을 열고 축구공을  꺼냈다. 한 아이를 불러 축구공을 주었다. 이 아저시가 왜 이러지 어리둥절하면서도 너무 좋아하던 그아이의 얼굴이 나의 마음에 새겨졌다. 그 아이의 마음에는 어떤 기억이 남겨질 모르지만 나는 그 아이의 얼굴을 통해 나의 유년을 느끼고 세상의 가난과 그 가난 속에서 삶의 온기를 지키는 아름다운 사람들의 사랑과 연대를 생각했다. 그 아이의 얼굴로 기억될 딸에서 하루의 길을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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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7일 네팔 들어온지 한달이 지났고 새로운 한달을 안나푸르나 라운드로 시작하기 위해 길을 떠나기전 하루의 여유를 카트만두 여러 곳을 둘러보는 것으로 보냈다. 28일 버스로 베시사하르까지 가서 바로 걷기를 시작하여 불불레 지나 라디바자르에서 라운드 첫 밤을 지냈다.  


아침에 눈을 뜨니 비가 내리고 있었다. 건기에 내리는 비는 축복이라고 했다. 대기의 먼지가 씻기고 마야거르츄의 마당은 촉촉히 젖어들었다.  우리가 걸을 길들 역시 먼지가 가라앉고 적당히 젖어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니 기분이 좋아졌다.  내일이면 우리 부부는 M과 D와 함께 안나푸르나 라운드를 떠나고  미리 와있던 L은 귀국길에 오르니 모두가 같이 하는 이날 하루가 더없이 소중했다. 일행이 늘어 택시 한대로 움직일 수 있는 규모를 넘어서다보니 2대를 부탁했다. 파슈파티나트로 향했다. 



카트만두를 찾는 방문자들이 꼭 들러야 하는 곳 중의 하나가 Pashupatinath다. 파슈파티나트는 네팔에서 가장 유명한 힌두교 사원으로  멀리 인도서까지  순례자들이 찾아 오는 곳이라고 했지만 우리에게는 노천 화장의식을 하는 하는 곳으로 더 알려져 있다. 사원과 일체를 이루고 있는 화장장인 아라 갓(aarya ghat)은 파괴의 신인 시바신의 화신인 파슈파티(야수의 왕)에게 받쳐진 사원의 한 부분일 뿐이다. 핵심적인 사원내부만 비힌두교도에게 입장을 금지하고 있지만 거의 날것 그대로의 흰두 예식과 화장 의식을 접할수 있는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중의 하나다.

 

 

택시에서 내려 일행을 찾는 동안 가는 비가 보도를 적시고 있었다. 비둘기떼의 어지러운 날개짓과 비가 만나니 파슈파니나트의 풍경이 더 스산해졌다. 1인당 천루피의 입장료를 내고 사람들의 흐름에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몇걸음 걷지 않아 갑자기 군인들이 다가와 나의 걸음을 막아섰다. 아무 생각없이 힌두교도만 들어갈 수 있는 사원 입구로 향하다 군인으로부터 제지를 받은 것이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방향을 바꾸어 허용된 구역 안으로 들어서니 말라가는 바그마티강과 강변의 화장터가 눈에 들어왔다. 오직 하나의 화장터에서만 마지막 불꽃이 사그라들고 있었다. 오늘은 또 어떤 사연을 간직한 삶이 지상에서 그 삶의 마지막 흔적을 지우게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구구절절한 이야기를 듣지 않아도 한명의 삶이 가졌을 모든 순간들의 희열과 고통, 그리고 그의 마음을 채웠을 그리움과 공허가 물밀듯 다가왔다.  그리고 죽음을 바라다 보는 산사람들의 마음에 피어오를 만가닥 상념의 소용돌이가 느껴졌다. 



바그마티 강을 건너  시바신에게 받쳐졌다는 Pandra Shivalaya라는 탑들 사이를 걷고, 강가의 둥근 반석위에서  의식을 치루고 있는 사람들의 처진 어깨를 바라다 보다 가파른 계단을 올라 동산의 정상에 올랐다. 동산을 이루고 있는 므르가스탈리 숲을 가로지르는 길은 한치의 틈도 없이 사원과 탑들이 빼곡히 채워져 있었고, 탑들마다 시바신이 타기를 기다리는 Nandi의 궁둥이가 우리를 반겼다. 비맞은 원숭이가 추운듯 서로 엉켜 웅크렸지만 낯선 방문객을 마득잖은 눈으로 바라단 볼 때는 주인의 위엄이 느껴졌다. 하지만 비에 젖은 Prasad(신전에 받치는 음식)를 주워먹을 때의 눈빛은 혹시나 낯선 인간들에게 나의 몫을 뺏기지난 않을까는 초조함과 비루함을 담고 있었다.  삶은 존엄과 비천 사이에 두루 걸쳐 있는 것! 그점은 모든 생명에게도 해당할 것이기에 우리는 늘 겸손해야하는 지도 모르겠다. 



북동쪽으로 방향을 잡아 동산을 내려오니 시바의 아내 Parvati의 자궁이 묻힌 자리에 세워진  Shree Guhyeshwori Temple이 있었다.  이 사원은 불임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임신을 축원하는 유명한 사원이라고 했는데 지난 지진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공사가 한창이었다. 사원을 지나 바그마티 강을 건너니 한적한  주택가가 이어졌다. 그리 멀지 않은 거리라 6명의 일행은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었고 아무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얼마나 걸었을까? 대로를 벗어나 골목으로 접어든뒤 혹시라도 길이 어긋날까 일행을 기다렸는데 결국 와이프가 보이질 않았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고 길이 갈라지는 지점에서 다른 길을 택해 달려가 보았지만 하늘로 솟아는지 만날 수 없었다. 하지만 보드낫이라는 목적지를 공유하고 있으니 택시를 타도 되고 물어서 걸어 와도 그리 멀지 않은 곳이라 남은 일행 5명은 보드낫으로 향했다.


 

보드낫은  여전했다. 입구는 인파가 붐비고 앞길은 차들이 엉켜 복잡했다. 티벳 불교의 성지 답게 각지 에서 모여든 티벳탄 순례자들과 우리같은 방문자들로 북적였다. 옛날 한때는 티벳 라사와 카트만두를 오가는 무역상이 머룰던 타망족의 마을이었던 이 구역 일대는 이제 티벳이 중국에 복속된 뒤 망명한 피벳탄의 집단거주질 바뀌었다고 했다. 보드낫 안으로 들어서자 스튜파를 도는 티벳탄들의 무리를 따라 나도 모르게 휩쓸리며 내가 가진 세상에 대한 기원을 읊조리기 시작했다. 순례객이 스튜파를 도는 의식을 kora라고 하는데 언젠가 다큐에서 몸을 겨우 가누는 할머니가 오체 투지를 하며 kora를 하는 이유를 묻자 뭍 생명의 고통을 들기위해서라고 하던 인터뷰가 떠올랐다. 나도 내 자식의 성공이 아니라, 나의 부귀와 영화가 아니라 세상의 생명 가진 모든 존재의 안녕을 빌며 스튜파를 두어바퀴 돌았다. 그리고 스튜파를 감싸고 있는 건물의 전망좋은 레스토랑에 자리를 잡고 어렵게 와이파이를 연결해 길일흔 와이프와 접촉했다.

 


일찍 숙소롤 돌아와 내일이면 떠날 안나푸르나 라운드를 위해 짐을 쌌다. 빠진 것은 없는지, 빼도 될 짐은 없는지 꼼꼼히 살피고 20여일동안 입에 맞는 음식을 접하지 못할 것에 대비해 저녁을 삼겹살로 준비했다. 벌써 익숙해진 가까운 골목길 구멍가게에서 식재료를 사서 밥을 하고 고기를 구웠다.  마야거르츄의 팟샹은 어떻게 구했는지 냉동 삼겹살을 조달해 주었고 다른 일행과도 같이 음식을 나누고도 고기가 남았다.  모처럼 속이 편안했고, 마음 편히 식사를 하고 나니 라운드 내내 계속 속이 안좋으면 어쩌지 하는 걱정이 사라졌다. 역시 나는 산 체질이라 산을 가기 전날부터 몸이 살아난다고 너스레를 떨며 침실로 돌아왔다. 



안나푸르나 라운드를 떠나는 날 아침이 밝었다. 지난 일주일 같이 했던 L은 한국으로 돌아가고 남은 4명은 같이 안나푸르나로 떠나는 날  마야거르추의 아침은 일찍 시작됐다. 6시 30분 L과 아쉬운 작별을 하고 앞으로 20여일의 여정을 같이할 2명의 포터 라마나쉬와 Basu 그리고 4명의 트레커가 2대의 택시를 타고 겅거부 뉴버스파크로  향했다. 도착한 겅거부는 5년전의 남루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언제 들어섰는지 번듯한 건물과 넓은 버스 승강장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곧 출발한 버스는 역시 시원하게 뚤린 RING ROAD를 따라 칸트만두를 벗어나기 위해 달리기 시작했다. 길은 달라졌지만 수시로 서고 가기를 반복하면서 문을 연채로 위태롭게 매달린 조수가 호객을 하는 모습은 달라진 것이 없었다. 버스는 거의 1시간 반 만에 카트만두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포카라를 가는 프리씨비 하이웨이를 둠레까지 달려 둠레에서 북쪽으로 방향을 잡은 버스의 시야에 설산들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가슴뛰는 설산의 풍경을 배경으로 그 아래 산중턱에 터잡아 살아가는 삶이 도드라지게 다가왔다. 오후 1시 30분이 넘어 안나푸르나가 시작하는 마을 베시사하르에 도착했다. 오래전 유일한 출발지 였던 베시사하르는 불불레까지 길이 나면서 트레커의 외면을 받기 시작했고, 다시 참체까지 길이나고 결국 마낭까지 길이 나면서 트레킹 출발점의 면모를 잃어버렸다고했다. 버스를 내린 우리는 이때까지 트레킹 출발점을 정하지 못했고 라마라쉬가 차를 구하러 사라진 뒤에 길가 식당에서 요기를 했다. 시간에 맞춰 출발하는 버스를 구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우리는 차를 타고 불불레까지 가서 걷기를 시작했던 지난 여정과는 달리 이번에는 베시사하르부터 바로 걷기를 작정했다. 



베시사하르를 출발해서 불불레 까지 가는 길은 편안했다. 마르샹디강을 따라 형성된 길을 걷고 민가를 만나니 아직 우리의 걸음은 산에 들어가지 못했고 하루종일 마을길로 이어졌다. 길도 단순했고 멀리 설산이 우리의 목적지를 안내하니 그냥 멀리 설산을 보고 걷고 또 걸었다. 불불레가 얼마 남지 않은 길을 지나자 마을 잔치가 한창인 것 같았다. Basu에게 물어보니 이날이 구릉족에게는 '로사르'라고 하는 설날이고 이웃의 친인척이 함께 모여 음식을 나누고 춤과 노래로 하루를 보낸다고 했다. 산업화의 댓가로 우리에겐 사라진 옛풍습을 낯선 안나푸르나 기슭에서  목격하게 되니 마음이 따듯해져 왔다. 흐뭇하게 바라다 보는 우리를 보고 춤 삼매경에 빠진 남성분이 손짓을 하며 우리에게 같이 할 것을 권했지만 오늘 가야만될 거리도 있고 실례도 될 것 같아 그냥 합장으로 인사하고 가던 길을 걸었다.



오늘 쉬었으면 하던 마을인 불불레를 도착했다. 지난 5년간 불불레는 강건너 동쪽 마을에도 찻길이 생기고 강과 롯지는 길로 갈라섰다. 집과 강과 마을이 한데 엉커 조화롭던 풍경은 사라지고 조금은 삭막하고 어설픈 불불레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어다,. 오랫만에 만난 친구가 너무 변해 있어 왠지 서먹한 그런 기분이 들었다.  바수와 라마나쉬는그리 멀지 않은 곳에 숙소가 있다며  우리가 계속 걷기를 권했다. 트레킹 첫날은 무리하지 않고 몸을 푸는 정도만 걸고 불불레에서 묵을 예정이었지만 잠깐의 망설임끝에 Upper Nadibazar 까지 걷게되었다. 우리는 지쳤고 해가 떨어져갈 무렵 5시 반이 넘어서야 낡고 허름한 롯지에 도착했다. 하지만 롯지는 마음에 들지 않았고, 첫 숙소 선정부터 가이드에게 속은 느낌이 들었다. 



불불레 지나면서 언제부턴가 우리의 포터들과 동행을 하게된 어떤 사람이 있었는데 그 분이 바로 이 롯지의 주인이었다. 나는 와이파이와 온수가 되는 롯지를 원했지만 가이드는 곤혹스런 표정이 역력했다. 아마도 롯지 주인의 호객에 넘어가 여기까지 무리해서 왔는데 우리는 불만스러워 보였고, 그렇다고 다른 롯지를 찾아 나설려니 해는 떨어지고 이 롯지 주인에게 미안하기도 해 곤란해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내일 부터는 숙소 결정에 좀더 관여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라운드 첫 숙소인 Upper Nadhibazar의 Annapurna Garden Restaurant & Guesthouse라는 이름의 남루한 롯지에 짐을 풀었다.

 


롯지 건물은 시설이라고 할 것도 없을 정도로 양철과 폐목재로 지어 비와 바람을 가리는 수준이었다. 녹슬고 구겨진 양철로 얼기설기 꾸린 움막수준의 건물은 그렇다고 해도 눕기에도 겁이 나는  곰팡내 나는 침대는 사실 받아들이기 불편했다. 그래도 그물망 창으로 들어오는 차가운 밤바람은 막아야할 것 같아 특별히 주인게게 부탁해 받은 얇고 작은 천을 스카치 테이프로 발라 잠자리를 갖추었다. 다이닝 룸에서 주문한 식사를 받았는데 역시 손님이 거의 없는 시즌이니 식재료가 잘 갖춰줘 있을 리가 없고 음식은 초라했다. 



하지만 이 모든 악조건에도 주인 내외의 친절은 우리의 마음을 풀어주기에 충분했다. "당신들을 우리 집에 모실 수 있어 너무나 행복합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찌그렸던 인상을 펼 수밖에 없었고, 아무런 불편함도 없고 만족스럽다는 표정으로 인사를 건넬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말뿐이 아니고 시설이나 물질로는 할 수 없는 띠뜻한 마음으로 우리를 대했다. 준비한 식사가 맛이 없지는 않은지를 묻고, 빈 접시를 채워주고 그리고 식사가 거의 끝나가자 온기가 있는 부억으로 우리를 초대했다.  젊어서 요리사로 바같 세계를 떠돌았다는 낯선 네팔리 한분을 포함해 모두가 모닥불을 중심으로 옹기종기 둘러 앉아 라운드의 첫 저녁을 맞았다. 



나디에서의 낭만적인 모닥불 파티는 일찍 끝났다. 자리를 같이했던 롯지 주인과의 관계는 알 수 없었던 네팔리는 우리에게 친절하고 우호적이었다. 미국에서 피자가게에서 일을했다며 우리 곁을 떠나지 않고 잘 알아듣지도 못하는 우리를 붙들고 끝임없이 영어를 늘어놓았다. 그는 마리화나를 하고 우리에게 권하기도 했다. 분위기에 젖은 바수는 락시를 들이키고 어느 순간 수다스러워졌다. 마리화나에 취한 네팔리와 술에 취한 바수가 자리의 분위기를 일찍 흐려놓는 바람에 다뜻한 모닥불의 아까운 불씨를 포기하고 침실로 흩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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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24일 복통 중에 짐을 싸서 닥신칼리를 거쳐 파르핑에서 하루를 접고, 25일 분가만티를 통해 다시 파탄으로 복귀 1박을 하고, 26일 카트만두의 숙소 마야거르츄로 돌아가 이후 여정을 20여일동안 같이할 또 다른 일행 M과 D를 맞았다.

 

전날 복통으로 아무 것도 못하고 있는 사이 L은 타멜 거리를 카메라에 담으며 혼자 돌아다녔다. 계속 숙소에서 밍거적 거리고 있기에는 시간이 아까웠고, 어렵게 네팔에서 만난  L을 고려해도 그냥 있을 수가 없었다. 타멜만치 친숙해져 버린 라트나 버스파크로 향했다. 일차 목적지를 Shree Dakshinkali Temple로 정했다. 버스를 찾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진 않았고 일부노선이 파업 중이었지만 다행히 닥신칼리행은 운행 중이었다. 

 

 

닥신칼리로 가는 길은 도심을 벗어나자마자 비포장길이었다. 앞을 분간하기 힘들만치 두터운 먼지가 일고, 엉성한 창틀을 통해 실내로 밀려 들어왔다. 마스크를 했지만 숨쉬기가 쉽지 않았다.  차안의 공기는 탁했고 그렇다고 창문을 열 수도 없는 두어시간을 견딘뒤에야 닥신칼리 입구의 버스파크에 도착했다. 먼지만 아니었으면 버스를 타고 온 2시간이 나름 즐거운 여행길이었을테고, 바같의 풍경에 좀더 몰입할 수 있었을 텐데 많이 아쉬웠다. 사실 여행 중에 사전 공부 없이 만나는 풍경은 무미건조할 수 있다. 순간순간 스쳐 지나가는 풍경에 스토리를 입히고 나의 기억 속에 저장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일정한 사전 정보를 가지고 바라다보는 풍경일 때 비로소 의미를 가지고 나의 것이 되기가 훨씬 쉬울 것이다. 사실 그런 면에서 닥신칼리는 나에게 미지의 장소였다. 제물로 희생된 동물의 비피린내가 진동하는 끔직한 흰두사원이라는 것 말고는 아무런 이해도 없었다.

 

닥신칼리는 외래 관광객이 그리 많이 찾지 않는 곳 같았다. 버스를 같이 타고온 승객들은 대부분 현지인으로 사원에 참배를 오거나 가까운 사람들과 함께 나들이라도 온것 같았다. 한무리의 젊은 아가씨들이 버스에서부터 우리에게 대화를 시도했다. 낯선 외국인을 보고 반갑고 호기심이 일었는지 어디서 왔는지, 왜 왔는지, 어디로 갈건지 등등을 물었지만 우리의 영어는 짧고 단편적인 대화를 넘어설 수 없었다. 버스파크에서 내리자마자 현지인이 가는 식당에서 간단한 식사를 하고 사원을 향해 걸었다. 그리 멀지 않은 계곡 속에 '피비린내 나는' 사원이 자리하고 있었다.  다행히 이날은 재물을 희생하는 의식이 많지 않은 날인지 핏빛 바닥을 맨발로 지나가야하긴 했어도 직접 살육장면을 보지 못했다. 흰두교도가 아닌 사람은 들어갈 수 없다는 성전도 바로 옆의 통로를 지나며 볼 수 있었는데 선입견이 준 느낌 때문에 오래 머물고 싶지는 않았다. 사원을 지나 오르막을 한참 올라 전망대가 있었지만 전망대로 올라가는 입구의 기념품 가게와 노점상을 구경하며 그들의 삶을 느끼는 것 만으로도 닥신칼리 방문은 충분했다.

닥신칼리에 오래 머물지 않고 바로 파르핑을 물어 걷기 시작했다. 한번씩 차가 지나갈 때 마다 바람방향을 살피며 먼지를 피해 뛰어야했는데 다행스럽게 길은 멀지 않았고 파르핑 시내는 금방 나왔다. 많지 않은 네팔 여행중에 만난 도시는 늘 사원과 사원을 찾는 순례객을 위한 숙소가 혼재되어 었다. 생활과 종교를 따로 데어놓을 수 없을 만치 삶이 종교와 밀착되어 있는 것 같았다. 파르핑도 다르지 않았다. 구불구불 이어지는 골목길을 지나 신시가지로 접어들기 전에 만난 숙소를 다 지나치고 막상 숙소를 찾기 시작할 무렵에는 마땅한 곳이 나타나지 않았다. 한산한 가게앞에서 현지인에게 숙소를 물었더니, 네팔에서 늘 그랬지만 주변의 사람들이 다 몰려 들어 나에게 길을 알려주기 위해 의견을 모았다. 네팔리의 친절함은 내가 경험한 세계에서는 의문의 여지 없이 최고였다.

숙소를 잡고, 창을 통해 해지는 파르핑의 삶을 바라다 보면서 하루를 정리했다. 타멜거리를 떠나 닥신칼리를 경유해 파르핑까지 많은 풍경을 하루동안 스쳐 지나쳤다. 나에겐 풍경이었지만 그곳에 터잡아 살아가는 네팔리에게는 구구절절한 삶의 현장일진대 여행자의 눈으로 오늘 하루 그들의 삶을 모욕하지 않았기를 빌었다. 그리고 낯선 나라를 이렇게 여행자로 떠돌 수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말할 수 없는 축복이거늘 나는 왜 늘 나의 삶을 스스로 부정하고 탈주를 꿈꿀까 스스로에게 반문했다. 일상이 주는 안락함과에 겨워 방랑의 낭만을 갈구하는걸까? 나는 진정 무엇에 목말라하는지 스스로 물었지만 답을 찾지 못했다. 그래서 남은 일정의 여행은 순례가 되어야했다.

안개속을 번져오는 노래소리에 눈을 뜨며 parphing의 아침을 맞았다.  신을  찬미하고 새로운 하루를 맞은 생명의 환희를 담은 어린 여학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까이에 여학교 기숙사라도 있는건지 아니면 사원에서 들려오는 소린지 알수 없었지만 나는 궁금하지 않았다. 나에겐 그냥 파르핑 전체가 사원과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방을 나와 아침 햇살에 삶이 피어나는 파르핑의 시가지를 내려다 봤다. 게스트하우스 4 층에서 내려다보이는 앞집 옥상에는 향을 올리고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는 여인이 보였다. 그녀는 어떤 신에게 무엇을 축원하고 소원했을까 알 수 없었지만 나는 단지 어둠을 이기고 아침을 맞는 모든 삶앞에 우리는 숙연해진다는 사실을 알수 있었다. 그녀 역시 자신의 안녕과 욕망의 충족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생명의 안녕과 존재의 기쁨을 축원했을 것이라고 믿어졌다.

숙소를 체크아웃하고 인근의 바라이요기니 템플을 향했다. 나의 새벽잠속으로 달콤하게 녹아들었던 찬송이 사원에서 울려나왔다. 이제는 어린 여학생의 목소리가 아니라 삶의 경륜이 묻어나는 탁한 목소리였다. 가사를 하나도 이해하지 못하는 찬송이지만 그 절실한 축원의 마음을 느끼기에는 충분했다. 찬송장면을 사진으로 남기고도 싶었지만 그냥 마음에 담고 사원을 나왔다. 계단을 내려오자 맞닥뜨린 남루한 요들의 불편한 적선요구를 외면하고. 계단 모퉁이에서 농산물을 펼쳐놓고 손님을 기다리는 아주머니들과 눈을 맞춰 웃음을 나누고 도로를 만나는 길모퉁이 까페에서 아침을 청한다.

 

 

분가마티는 지도상 직선거리로 얼마되지 않았지만 파르핑과 분가마티를 가르고 있는 바그마티 강 때문일까, 마땅한 버스 노선을 찾을 수 없었다. 파탄까지 나가서 다시 분가마티로 가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택시는 어떻게든 분가마티로 바로 갈수 있을 거란 기대를 가지고 물어보니 한 기사가 선듯 나서주었다. 안도하며 올라탄 택시는 카트만두 쪽으로 달리기만 하고 분가마티는 더 멀어지는 것 같았다. 기사도 나중에는 길에 대한 확신이 없었던지 지나는 다른 기사나 주민에게 묻기 시작했고, 다시 방향을 파르핑 쪽으로 잡아 왔던 길을 되돌아왔다. 결국은 분가마티에 도착하지 못한 택시는 우리를 한적한 강가의 철제 다리 근처 마을에 내려놓고 도망가듯 사라져 갔다.

 

 

걷기 위해 온 네팔이니 우리는 개의치 않고 걷기 시작했다. 강이라기 보다 하수구에 더 가까운 바그마티 강을 건너고 다시 강을 따라 북쪽으로 방향을 잡아 한참을 헤메야했다. 강을 벗어나자 연두색으로 살아나는 밭둑길이 나오고 멀리 시가지가 시야에 들어왔다. 아직 1월에 불과해지만 아열대기후인 네팔의 들녘은 벌써 봄를 닮아 있었다. 정갈하고 아름다운 전원 도시로 알려진 분가마티로 향하는 들길은 아름다웠다. 겨우 길을 찾고 따가운 햇살을 맞으면 오르막길을 올라 분가마티를 만났다.

 

도착한 분가마티는 남루했다. 지난 지진의 여파때문일까, 시가지 자체가 여느 다른 도시와는 달리 낡고 지저분했다. 뿌연 먼지를 뒤집어 쓴 건물들은 위태로웠고, 방치되어 있었다. 인적이 드물고 생기없는 골목길을 돌아 겨우 물어 찾아간 민속박물관은 초라했다. 지금까지 카트만두나 포카라를 중심으로 주요한 도시만 돌아다닌 끝에 처음으로 관광루트에서 벗어나 만난 도시가 분가마티가 아닐까는 생각도 들었다. 지금까지는 네팔의 허상들이었고, 분가마티가 네팔의 진상이란 말인가, 알수 없었다. 버스파크 근처에서 너무 싼 가격에 놀란 식당에서 모모와 사모사 그리고 콜라로 점심을 해결하고 파탄행 버스에 몸을 맡겼다.

 

5일만에 다시 찾은 파탄이 반가웠다. 편한 잠자리와 풍부한 먹거리가 있고, 사람들의 활기와 아름다운 건축물이 즐비한 파탄으로 돌아왔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 벅찼다. 지난 몇일간 계속되는 복통으로 체력은 현저히 떨어졌다. 마땅히 먹을 것도 없었는데다가 무얼 먹어도 소화가 되지 않았다. 그렇게 몇일을 지내다보니 실제보다 훨씬 긴 여정을 다녀온듯 몸도 지쳤고 마음도 처졌다. 그래도 긴 흥정 끝에  Lalit Heritage Home에 짐을 풀었다. 파탄 드바르광장이 내려다 보이는 환상적인 조망의 룸에서 짐을 풀자 메니저가 커피를 날라왔다. 고마운 마음에 팁을 건넸지만 팁이 호텔비에 이미 포함되어 있다며 사양했다, 고맙고 기분 좋았다. 커피향을 맡으며 아름다운 건축물이 조화롭게 모여있고 그 사이를 살아가는 인파를 행복한 눈으로 한참을 바라다 보다 어둠이 내리는 파탄의 아름다움에 흠뻑 젖어갔다.

 

처음으로 파탄에서 아침을 맞았다. 역시 신을 경배하는 찬양소리에 이른 잠을 깼다. 작고 아기자기한 룸때문인지 편안하고 아늑한 잠자리를 누렸다. 간혹 도시의 밤하늘을 울리는 개짓는 소리에 잠을 깨기도 했지만 나의 숙면을 방해하지 못했다. 밤새 도시를 뒤덮던 개울음 소리는 아침을 알리는 서광이 비치자 자취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 찬양소리 사이로 일과를 시작하는 사람들의 기척이 늘어만 갔다. 방을 나와 옥상을 올라갔다. 소박한 정원 넘어 파탄 두바르 스퀘어의 아름다운 풍광이 한눈에 들어왔다.

밤새 보이지 않던 숙박객들이 조식을 들기 위한 다이닝룸에 부쩍였다. 모처럼 한국인들도 만나고 지진 피해를 복구하기 위해 지원온 일본인들도 있었다. 일어를 하는 L은 일본인들을 고향사람 만난듯 반가워 대화를나누었다. 외국어가 절실해 지는 순간이었다. 한국에서 M과 D가 도착하고 안나푸르나 라운드를 준비하는 여정의 터닝 포인트에 도달하는 날, 우리는 타멜거리로 되돌아 가기 위해 Heritigi Home을 나섰다.  

교통체증으로 한국같으면 살인이라도 날것 같은 골목을 지나 타멜행 버스를 찾았다. 다시 돌아온 타멜거리를 걷고 숙소 마야거르츄에 짐을 풀었다. 일정 없는 하루를 한가롭게 보냈다. 오후에 M과 D가 도착해 반갑게 맞고 다시 타멜 거리로 나섰다. 타멜거리에서 제일 규모가 크다는 Shop Right Supermarket에서 트레킹 물품을 사고, 한국에서 일했던 네팔 노동자가 운영한다는 Small Star 주점에서 뚱바(Tungba)를 마셨다. 뚱바는 수수같이 보이는 꼭또라는 곡물을 발효해 통에 담은 뒤 뜨거운 물을 붓고 빨대로 마시는 네팔만의 술이었다. 왠지 술에 흠뻑 젖고 싶은 날이지만 불편한 속과 다음 여정을 위해 참았다. 

 

두달 여정의 절반이 지나는 밤 침대에 누우니 많은 생각들이 일었다. 나는 스스로에게 다그치듯 묻기 시작했다. 나는 네팔을 또 올까? 올 수 있을까? 오고싶을까? 아무 대답도 가능하지 않았다. 너는 네팔에 뭐 하러 왔지? 왜 네팔을 그토록 목말라했지? 질문은 이어졌지만 심경만 복잡해 질뿐 답을 구할 수 없었다. 나에게 네팔은 내 삶의 알리바이인가? 나의 순수를 보증해주는 방패일까? 위장막 혹은 화려한 목걸이같은 장식일까? 먼지와 차가운 방, 입에 맞지 않는 먹거리를 감수하고도 네팔을 찾은 나는 내 자신에게 얼마나 정직한 것일까 문득 묻고 싶어졌다.  집이 그립고 딸이 보고싶고 뽀득뽀득 윤기나는 접시에 상큼한 야채를 담은 그런 식탁보가 있는 아침이 그리워졌다. 아직 한달이나 남았잖아! 문득 조갑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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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1일 아침, 뷰띠크 호텔 체크아웃하고 택시로 마야거르츄로 이동하여 짐을 풀고, 왕궁박물관과 파탄을 돌아다니고, 22일 공항에서 앞으로 일주일 여정을 같이할 L씨를 맞이하고 타멜에서 시간을 보낸 뒤, 복통을 만나 23일 내내 방에서 보냈다.


100리터 배낭 두개와 두사람이 소형 택시를 타고 마야거르츄가 있는 수어러꾸떼로 향한다. 5분만에 도착한 마여거르츄는 트레커들이 다 떠나고 적막감마저 감돌았다. 혼자 계신 관리자분께 인사만 하고 방으로 짐을 옮긴뒤 단촐한 차림으로 Narayanhiti Palace Museum으로 향한다. 타멜거리를 지나고 Garden of Dream을 지나 10시가 조금 넘어 박물관에 도착했다. 11시에 문을 연다니 30분이나 남은 이른 시간이지만 가족나들이객들로 붐비기 시작했. 주변을 둘러보니 안내문이 있고 박물관 입장을 위해 지켜야하는 규칙이 나열되어 있었는데 상당히 위압적이었. 역시 권위적 권력의 소산이겠지만 왕은 죽었고 왕정은 무너졌으며 좌파 민주정부가 들오선지 10년이 지났지만 아직 네팔은 변화를 시도하는 단계에 머물러있는 듯 보였. 거리에서 가장 당당하고 멋진 사람이 총을 든 군인이거나 경찰인 국가에서 시민은 늘 초라하다. 사실 카트만두가 그랬다.

 

박물관은 네팔의 마지막 왕인 가렌드라가 폐위되는 2007년 까지 살던 왕궁이지만 2008년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박물관으로 공개되었다고 한다. 오전 11시부터 오후 3시까지 문을 여는 박물관은 입장을 위해서는 엄격한 소지품 검사를 받고 가방은 물론 촬영을 못하도록 핸드폰까지 맡겨 놓아야 했다. 내부관람 중에도 삼엄한 경비를 서고 있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는데 그렇다고 관람을 방해받지는 않았다. 박물관은 나름 볼거리가 풍부했고, 여행객이라면 한번쯤은 들러 네팔 왕실의 삶을 통해 네팔 문화를 이해하는 기회를 가져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물관을 통해 나는 네팔이 고립된 왕국이 아니라 세계와 풍부한 교류를 한 개방적인 나라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사실 네팔의 역사에 대해 충분한 지식없이 왕궁박물관을 둘러보니 그야말로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한  '구경'이상이 될수 없었다. 단지 네팔 혁명과 왕정의 붕괴과정에 대해 일말의 뉴스라도 접해보았다고 비렌드라 왕의 일가가 아들 디펜드라에 의해 살해된 현장을 둘러볼 때는 왠지 모를 섬뜻함이 느껴졌다. 공식적으로는 왕자 디펜드라가 사랑한 인도 여인과의 결혼을 반대한 부모에 대한 반감으로 술과 마약에 취해 총기를 난사한 사건으로 정리가 되었다고한다. 하지만 비렌드라의 동생으로 비명횡사한 형으로부터 왕위를 물러받은 가렌드라의 음모라는 설을 민간에서는 더 믿고 있었다. 어쩌면 민중의 혁명열기에 국토의 대분분이 장악되고 대도시만 간신히 남아 있던 상황에서 왕정의 종말을 예감한 디펜드라의 광기가 발로되어 일어난 사건이 아닌가 싶기도했다. 종말은 에견되어 있었고 그 악역을 디펜드라가 맡은 것뿐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Narayanhiti Palace Museum을 나와 카트만두밸리의 세왕국중 하나였던 파탄을 향해 남쪽으로 걸었다. 5~6km나 되는 잛지 않은 거리였지만 택시도 버스도 마다하고 걷기로했다. 안나푸르나를 걷는 것과는 달리 혼탁한 공기를 마시며 걷는 도심 트레킹은 쉽지 않은 일이지만 여행자의 거리라는 타멜을 벗어나 그야말로 카트만두의 날것 그대로를 느끼고 싶었다.  mapsme에 목적지를 입력하고 하염없이 걸었다. 앱의 특성때문이겠지만 미로같은 골목길을 오고가는 네팔리와 어깨를 부딪고 만나는 꼬마들과 눈을 맞추고 미소를 주고 받으며 걸을 수 있었다. 어느 순간에는 내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 내가 서있는 곳이 어디인지 당혹스럽기도 했지만 다시 길을 이어주는 앱 덕분에 어느새 바그마티강에 이르고 강을 건너자 UN공원이라는 곳이 나왔다. 청춘 남여들이 데이터를 하는 곳이지만 청춘이 지난 우리 부부도 나무 그늘을 찾아 들어 간식을 먹고 음료를 마시며 휴식을 취했다. 

 

 

Patan은 산스크리트어로 Lalitpur라고 하고 City of Beauty라는 의미라고 했는데 역시 아름다운 도시였다. 카트만두와 박타푸르 그리고 랄리푸르가 공존하던 시절 전쟁 대신에 서로 도시를 아름답게 가꾸는 걸로 경쟁했다고 한다. 그 덕분이겠지만 랄리푸르 역시 박타푸르나 카트만두 못지 않은 아름다눈 건축물들이 듀바르 광장을 중심으로 집중되어 있었다. 듀바르 광장은 입장료를 받고 있는데 이날은 체크 없이 입장이 가능했다. 특별한 날이었는지 근무자가 자리를이탈한 건지 알수 없는 이유로 입장료없이 두바르거리들 들어섰다. 5년전의 기억을 더듬어 지난 지진의 흔적을 찾았고, 사라진 건축물의 빈자리도 보이고 여기 저기 복구공사가 한창인 곳도 많았지만 그나마 도시의 경관 전체가 주는 느낌은 손사되지 않고 살아있는 것 같아 무척 다행스러웠다. 거리는 그곳을 삶의 터전으로 살아가는 주민들의 무심한 표정과 주변을 두리번 거리는 관광객의 호기심 어린 눈이 어지럽게 교차하고 있었다.  아내는 아름다운 거리를 스케치하고 나는 현지인의 무료한 표정으로 파탄의 골목골목을 걷고 오후 늦은 시간에 어렵게 버스길을 물어 타멜로 돌아왔다.

 

1월 22일, 한국에서 쿤밍 여행 끝에 카트만두로 들어와 우리랑 합류하기로 되어있던 L님이 오는 날 공항 마중 말고는 특별히 정해진 일정이 없었다. 수어러꾸떼 골목의 가게에서 장을 보고 직접 조리를 해서 식사를 해결하고 빨레를 한 것 말고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그래도 시간은 가고 도착 예정시간인 오후 4시 30분이 다가오자 숙소에 부탁해 택시를 불렀다. 공항까지는 금방 도착했어야 했지만 길이 막혔고 차는 돌았다. 혹시라도 낯선 공항에 먼저 도착해 헤메지나 않을까, 호객꾼들에게 혼줄이나 나지 않을까 걱정되었지만 역시 네팔의 만만디 수속 덕분에  무리없이 만날 수 있었다. 외국서 만나서 더 반가운 상봉을 하고 숙소로 돌아와 짐을 풀고 타멜을 지나 북한 식당 옥류관으로 향했다. 모처럼 한국서 온 지인과 북한 동포가 서비스하는 한식을 신나게 먹고 내게 주어진 삶에 감사했다. 

1월 23일의 아침을 맞기위해 엄청난 댓가를 치뤄야했다. 전날 북한식당 옥류관에서 먹은 음식이 문제를 일으켰다. 전날 옥류관에서 보낸 즐거운 기억은 악몽으로 변했다. 복통과 설사 오한에 현기증까지 거의 탈진한 채로 아침을 맞았다. 주문한 음식을 대신해 권유한 육개장이 문제인것 같았다. 육개장을 전혀 먹지않은 L은 아무 문제가 없었고, 조금 먹은 와이프는 배탈 정도에 머물렀고, 거의 대부분을 먹은 나는 완전히 초죽음이 되었다. 가져온 비상 약을 먹고 숙소에 부탁해 네팔 약국에서 사다주는 약까지 먹었지만 몸은 정상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하루를 완전히 침대에서만 지내고 나서 극심한 오한과 현기증에서는 벗어났지만 음식을 조금만 입에 대어도 바로 복통과 설사가 잇달았다. 잘 먹고 살찌는 여행이라는 목표는 완전히 무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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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일 아침 파노라마롯지를 도보로 출발 둘리켈 버스파크에서 버스를 탑승하여 박다푸르까지 가고, 다시 1km를 걸어 버스를 갈아타고 나가르곳에 도착하여 1박을 한뒤 20일 카트만두 타멜로 돌아와 이전 묵었던 카트만두 뷰띠그호텔에서 하루를 더 묵었다.  

 

예정에 없던 2박을 하게된 둘리켈 파노라마 롯지를 나오며 주인에게 거듭 감사한 마음을 전했다. 물론 가격을 지불했지만 피우던 담배와 유심카드까지 신세를 지고 편안하고 평화로운 이틀을 묵을수 있었던 것에 대해 감사했다.  한적한 아침 산길을 걸어 민가를 만나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간혹 오토바이나 차량이 지나가기도 했지만 편안함을 방해할 정도는 아니었는데 롯지를 나온지 얼마되지 않아 길가에 여기 저기 흩어져 있는 지폐를 발견했다. 10여장의 지폐를 주워 세어보니 모두 245루피나 되었다. 한국돈으로 3000원 정도되는 돈이지만 공무원 한달 월급이 10만원 전후인 나라에서 하루 일당은 되는 돈이었다. 주운 돈을 다시 산길에 뿌려둘 수도 없고 어떻게 처리할지 고만하다가 지도상으로 우리가 가기로 예정된 코스안에 얼마되지 않아 경찰서가 있어 신고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하지만 우리보다 더 난감한 것은 경찰같았다. 분실물에 대한 처리 규정이 없는 건지 바디랭귀지로 설명을 했지만 경찰서 정문을 지키는 경찰은 그 돈을 받을 수 없다고 그냥 가져가라고 했다. 곤혹스럽긴 했지만 경찰마저 인정해 주는 불로소득을 주머니에 넣었다. 나에게 둘리켈은 불안으로 시작해서 행복을 주고, 마지막으로 행운까지 선사한 멋진 도시로 남았다.

  


둘리켈에서 카트만두 방향으로 가는 버스는 많아 보였다. 티벳 국경을 넘는 Kodari고개에서 카트만두로 이어지는 Arniko Highway 상에 있는 둘리켈은 교통의 요지였다.  버스는 이어졌고 거의 기다리지 않은 채 바로 탑승할 수 있었다.  Panauti와 갈라지는 Banepa까지는 낯선 길이었지만 그 다음부터는 그래도 한번 지나갔다고 익숙한 길이 이어졌다. 박타푸르까지는 한시간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다. 박타푸르에 도착한 지점은 나가르곳 가는 버스를 탑승하는 곳과 달랐다. 1km쯤 걷고 물어서 승객이 곽차 빈좌석이 없는 나가르곳행 버스에 올랐다. 버스는 굴곡지고 가파른 오르막 길을 달려 나가르곳 종점에 도착했다. 


점심을 해결하기 위해 우선 maps.me에 cafe du mont을 목적지로 설정하고 찾아 나섰다. 소나무 숲속으로 이어지는 깨끗한 도로를 따라 1.2km를 걸었지만 길은 군부대로 가로막혔고 다시 되돌아 버스에서 하차한 지점에 이르러 방향을 되찾고 목적지에 도착했다. 다행히 왕복 한시간여를 걸은 길은 차들이 거의 다니지 않는 한적한 포장도로로 양쪽으로 쭉쭉뻗은 소나무 숲이 형성되어 있어 시간내어 일부러 걷기에도 부족함이 없는 좋은 길이었다. cafe du mont은  lonely planet에 소개된 Peaceful Cottage라는 호텔의 부속식당으로 독특한 외관이 인상적이었다, 괜잖은 음식과 조망이 마음에 들기도 했고 숙소를 다시 찾아나서기도 귀찮아 흥정을 통해 전망좋고 넓은 방을 50불에 묵기로 하고 일찍 짐을 풀었다. 나가르곳이 물가가 비싸기로 유명하다고는 했는데 역시 이정도의 호텔이 50불이니 분명히 싼것은 아니었다.   

 

 

둘리켈이후 3일째 호텔방에서 보내는 시간이 늘었다. 이날도 빨래를 하고, 샤워를 하고  지난 여정을 정리하고 다음 일정을 계획한다는 핑게로 Lonely planet Nepal을 뒤척거리며 방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산책을 나왔지만 호텔 주변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맴돌다가 호텔 옥상에 올라 바라다 본 해지는 히말라야는 참 인상적이었다. 둘리켈에서 바라다 본 히말라야가 조금 더 앞으로 다가온 듯한 느낌이 들었고 카트만두 인근 최고의 히말라야 뷰포인트라 할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울라기리에서 에베레스트 그리고 칸첸중가까지 다 조망권에 들어온다고 하지만 저산이 어떤 산인지는 구분할 필요도 없이 그냥 히말라야의 신령함에 압도될 뿐이었다.

 

과분한 호텔에서의 하루를 보내고 13식에 네팔리 한달 월급에 해당하는8960루피를 지불하고 나오는 발걸음이 가볍지 않았다. 단지 그때문만은 아니겠지만 Nagargot은 나같은 여행자에게 적당한 여행지는 아닌 것 같았다. 단지 히말라야를 조망한다는 것 하나로 찾아 오기에는 다른 매력이 적었고, 관광지화된 마을은 네팔 산간 마을의 따뜻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설화에 따르면 오래 전에 카트만두는 물이 가득찬 호수였는데 칼로 산허리를 쳐 물을 빼내어 지금의 도시 카트만두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장본인인 문수보살이 3일간 머문 곳이 다름아니라 바로 나가르곳이라고 알려져 있다. 설화는 재미있었지만 관광지다 보니 물가는 비싸고 대부분 시즌에는 번잡하기 까지 하다고 했다.  

 

호텔을 10시에 나와 버스파크에 도착하니 이미 만차여서 이번에는 11시까지 기다렸다가 좌석에 앉아 출발했다. 박타푸르까지 인당 50루피의 차비를 내고 다시 타멜행 버스로 갈아타니 인당 25루피의 요금을 요구했다. 저렇게 싼 요금으로 크고 깨끗한 버스를 이용해 여행할 수 있는 네팔이 새삼 고마웠다. 5일만에 돌아온 카트만두는 여전히 혼동과 소음, 먼지와 쓰레기의 천국이었다. 그 점이 싫거나 낯설지 않고 더 반가운 라트나버스파크에서 버스를 내려 타멜로 행했다. 어느새 카트만두는, 특히나 타멜거리는 나의 마음속에서 고향처럼 편안한 안식처로 변해 있었다. 한식당인 경복궁을 찾아 오랜만에 김치지개와 제육뽁음으로 맛있는 점심을 먹었다.

 

 

몇일 있으면 새로 합류한 일행이 있어 카트만두에서 지금까지 지내던 숙소를 새 숙소롤 옮기로 결정하고 바로 새 숙소인 "마야거르츄"를 찾아 나섰다. 타멜 거리를 지나고 이전에 네팔짱이 있던 골목을 벗어나 북쪽으로 5분거리에 있는 "수어러 꾸떼" 라는 지역에 있는 National Star High School 까지는 잘 갔는데 바로 옆에 위치한다는 숙소는 한참을 더 헤멘뒤에나 찾을 수 있었다. "마야거르츄"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는 의미로 이전에 한국에서 노동자로 근무하면서 네팔 노동자의 인권 운동을 하시다가 추방당했다는 라미찬씨가 운영한다고 했다. 문재인씨가 네팔 트레킹을 할 때 머문 숙소로도 유명세를 타고 있었고, 대문에서부터 세월호를 추모하는 노란리본이 걸려있는 것이 범상치않은 숙소로 다가왔다. 촛불집회가 이어지고 있는 한국 상황을 외면하고 떠나온 여정이다보니 늘 마음에 무거웠는데  노란 리본이 반갑고 고마웠다.

 

마야거르츄는 조용하고 깨끗했고, 공동 운영하신다는 파샹님은 친절했다. 다음주에 합류할 일행의 예약상황을 확인하고 우리 부부도  안나푸르나 라운드와 숙소를 부탁하고 카투만두 뷰티끄 호텔로 돌아왔다. 오랜만에 만난 룸보이 빔센은 벌써 서먹해진 표정으로 우릴 맞았고 우리는 전체 일정의 3분지 1을 지나는 날의 저녁을 화려한 타멜거리의 레스토랑에서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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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6일 버스로 카트만두를 출발, 박다푸르, Sanga, Banepa를 지나 Panauti에서 일박을 하고, 17일 나모붓다사원까지  걷고, 히치하이킹으로 Dhulikhel까지 가서Panoroma View Lodge에서 2박을 함.

 

모두 떠났다. 지난 보름 같이 먹고 자고 걸었던 도반들은 먼저 귀국길에 올랐다. 허허로운 마음에 힘없이 타멜을 걸었다. 식욕도 없이 저녁을 떼우고 깊지만 불안한 잠을 잤다. 가볍게 찾아온 우울. 하지만 새벽 늘어진 의식을 깨워 본격적인 여정을 준비했다. 짱구나라얀과 파나우티, 둘리켈과 나가르곳 사이에서 고민하다 결국 파나우티행을 결정했다. 박타푸르와는 또다른 중세문화가 있고 한적한 시골도시라는 것이 내가 가지고 있던 유일한 사전 지식이었다. 단기 일정인 만치 짐을 줄이기위해 두 개의 대형 배낭을 호텔에 맡기고 오직 50리터 배낭 한 개만 준비해서 길을 나섰다. 박타푸르와 같은 방향으로 가는 버스일 거라는 확신에 룸보이가 제안한 다른 길을 무시하고 타멜을 가로질러 1킬로미터나 걸리는 라트나버스 파크로 향했다. 행운이 따랐는지 오직 두 번을 물은 끝에 파나우티행 버스에 탑승했다.

 

 

 

라트나 버스파크를 출발한 버스는 Arniko HWY를 따라 박타푸르를 지나 Banepa를 향해 달렸다. 버스파크에서 마이크로버스의 조수들이 계속해서 "바네파!"를 외치며 호객하는 걸로 미루어봐서 바네파가 교통의 요지인 것같았다.  박다푸르를 지나 외곽으로 갈 수록 흰 연기를 뿜고있는 높다란 굴뚝이 이어졌다. 카트만두와 박타푸르에서 볼수 있었던 그 많은 붉은 벽돌집이 여기서 만들어진 벽돌로 세워진것 같았다. 평화로운 시골풍경과는 어룰리지않았고 무엇보다 매쾌한 연기가 재채기를 일으켰다. 나의 관념 속에는 파란 하늘과 시원한 공기, 신령한 설산과 아름다운 전원, 맑은 강과 영적인 삶이 있는 네팔이 있다면, 이곳에 터잡고 살아가는 네팔리의 삶은 차라리 저 삭막한 벽돌공장이 있는 풍경이 더 현실적인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중노동과 저임금, 혹독한 노동환경과 아동노동의 현장을 배낭을 메고 스쳐지나가는 여행객의 마음이 아렸다.

 

 

네팔을 여행할 때면 늘 나의 여행이  '가난을 소비하는' 행위가 될 수 있음을 의식한다. 그래서 네팔리의 입장에서 혹시라도 상처나 모욕이 될수 있는 언행이 아닌지 살피고 씀씀이를 조심한다. 그래도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음을 알기에 늘 마음 한켠에 불편함이 있다. 사실 네팔이 가난한 나라가 아니라면 내가 이렇게 쉽게 접근하고 오랜 기간을 주유할 수도 없을 것이 분명하다.  궁벽한 네팔리의 삶을 생각하다 뜬금없이 희망이란 무엇일까, 특히 네팔리에게 희망을 무엇을 의미할까 궁금해졌다. 아니 네팔에 희망이 있을까라는 의문이 일었다. 희망은 지금의 현실을 견디게 하고 새로운 미래를 당기는 힘의 근원이라고 하지만 나는 네팔리에서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회의가 들었다. 내 자신이 가진 막연한 커피농장의 꿈은 혹독한 네팔의 삶을 목격하면 할수록 엹어져 갔다.  나에게 네팔은 낭만이고 나의 희망을 쉽게 만들어지고 또 쉽게 철회될 수 있는 것이지만 그들에게 네팔은 자신들의 삶의 현장이기에 희망을 권하는 것도, 희망 없음을 단정하는 것도 나의 몫은 아닐 것이다. 그냥 삶이 있을뿐!

카트만두에서 Panauti까지는 4km이상의 비포장길을 포함해 30여km의 거리에 불과했다. 잦은 정류소 마다 정차하고는 승객을 내리고 싣다보니 2시간이 넘게 걸렸지만 정오 무렵에 도착할 수 있었다. 터미날과 시장이 혼재된 거리에서 점심을 해결하고 파나우티의 Indreshwor Mahadev Temple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5분도 걸리지 않는 거리에 작은 박다푸르 같은 느낌의 구역이 나왔고, 골목 안으로 들어가니 커뮤니티 안내센타가 나왔다. 근무하는 아가씨에게 숙소 소개를 부탁하니 마을에서 운영하는 숙소가 있다며 우리를 안내했다. 사원을 스쳐지나 한사람이 겨우 지나갈 듯한 좁은 골목끝에 좁다란 3층 건물로 우리를데려갔지만 문이 잠겨 한참을 지체했다. 아랫층에는 주민이 살고 있고 맨 위층 옥탑방만 숙소로 제공되고 있는 것 같았다.  숙소는 불결했고, 부실했다. 혹독한 추위는 아니지만 그래도 새벽이면 서리가 내리는 기온임에도 불구하고 출입문은 유리창이 아니라 그물망만 씌워져있었다. 그래도 사설 호텔보다 마을공동체가 운영하는 숙소에서 하루를 나기로 마음을 먹고 시설에 비해 터무니없는 1600루피의 숙박료를 내고 팜플릿과 책자를 찢어 창을 가렸다.

 

짐을 풀고 숙소를 나섰다. 사원의 부설 박물관에 600루피의 입장료를 내고 들어갔지만 기억에 남을 인상적인 유물은 없었다. 파나우티 사원과 지역의 유래나 역사를 소개하는 안내문을 건성으로 읽고, 박물관을 나와 한적한 사원의 평화를 즐겼다. 사원을 나와 아이들이 뛰어 놀고, 아주머니들이 모여서 담소를 즐기다가 낯선 이방인을 신기한 눈으로 쳐다보는 골목길을 지났다. 마을은 크지 않았고 외부 방문객으로 보이는 사람은 한 사람도 만나지 못했다. 얼마걷지 않아 사원의 끝이자 파나우티를 성지로 만들어준 두 강이 만나는 지점까지 걸어 Bashuki Nag Temple에 멈춰섰다. 카트만두의 파슈파티나트 처럼 화장을 하는 장소에 이르니 이 지역을 신성한 곳으로 여겨 사원을 세우고 마을이 형성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아름다움 속에서 신성함 역시 깃들여 있을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추위와 비둘기 소리에 밤새 뒤척이다 사원의 탑으로 몰려드는 까마귀 떼의 소란에 눈을 떴다. 차가운 새벽 공기를 마시며 서광이 비치는 사원과 먼 산을 바라보며 하루 여정의 행운을 빌었다. 바로 짐을 챙기고 아침식사를 해결했다. 전날 점심을 식당에서 먹고난뒤 연이은 두끼를 전날 아침에 카트만두 부띠끄호텔에서 제공한 토스트 두어장에 컵라면 하나, 그리고 조금의 과자만 가지고 해결했다.  열악한 숙소지만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커피포트가 있어 컵라면 조리가 가능했다는 것이다. 식당이 있는 곳까지 나갔다 돌아오기도 귀잖았고, 한번씩은 당연한 것을 건너 뛰어도 좋다는 생각도 들었다.

 

 

 

 Panauti를 떠나 나모붓다로 향하는 길은 가슴 부풀었다. 오늘은 어떤 우연과 그로인한 난관과 희열이 우리를 기다리고있을까 두근 거리는 가슴을 안고 숙소를 나섰다. 이른 아침 햇살에 대지를 덮은 서리가 수증기로 피어오르는 시골길을 따라 maps.me가 가리키는 7.8km의 길을 걸었다. 등교를 하는 학생과 출근하는 직장인, 그리고 일터로 나가는 농부와 소까지 마주치기도하고 나란히 걷기도 하면서 앞서거니 뒤서거니하면서 시골길을 하염없이 걸었다. 간혹 지나가는 차들이 일으키는 먼지가 우리를 괴롭혔지만 전반적으로 거리는 쾌적했고 전원은 아름다웠다. 오렌지 농장을 지날 때면 녹색농원에 점점히 박힌 주항색 빛깔의 조화에 눈을 뗄수가 없었고, 관광지가 아니라 네팔 농촌의 진수를 느낄 수 있는 길이라 더욱 좋았다.  조형적인 이랑을 만들고 무엇인가를 심고 있는 밭 풍경을 만나 살펴보니 감자를 심고 있었다. 우리 처럼 직선의 이랑이 아니라 미로같은 이랑을 만들고 감자를 심는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이지만 묻지 못했다. 전날 버스를 타고 지나며 보았던 벽돌공장들을 걷기 시작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만날 수 있었다. 주변과 부조화를 이루며 돌출적으로 솟아있고 굴뚝과 검은 연기, 그리고 흙더미  사이를 오가며 인부들은 벽돌을 나르고 있었다.  매캐한 연기 냄새를 피해 종종 걸음으로 공장 지역을 벗어났다.  

 

 

 

지도가 가리키는 거리보다 훤씬 더 걷고 휠씬 더 많은 시간이 걸린 뒤에 나모붓다에 도착했다. 숙소와 가게들로 이루어진 가파른 골목길을 올라 절의 초입 광장에 이르렀다. 광장은 불탑이 있는 마당 한쪽을 제외하곤 식당들이 빙둘러 자리하고 있었고 우리는 햇살 좋은 가게에 들어가 이른 점심을 해결했다. 불탑을 도는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한무리의 백인 여성들로 이루어진 승려들이 불탑앞에서 예배를 올렸다. 우리도 불탑을 한바퀴 돌고 오색 타르초가 휘날리는 계단을 올라 나모붓다사원의 본전에 도착했다. 조망 좋은 산능선을 따라 형성된 사원은 세월의 흔적은 많지 않았지만 깨끗하고 아름다웠다. 멀리 히말라야 설산까지 이어지는 광할한 대지를 배경으로 좁은 터에 아기자개하게 배치된 사찰의 건축물이 인상적이었다. 안내문을 보니 오래전 왕국의 자비롭고 현명한 왕자 마하사티가 우연히 굶주린 호랑이를 만났는데 자신의 몸을 보시하고 부처가 되었다는 설화가 있고 이를 기리기 위해 지어진 사원이라고 했다.

 

 

시원한 조망을 가진 아름다운 사찰에서 스케치하는 아내 덕에 한참을 머물렀다. 그리고 올라갔던 그 계단을 통해 나모붓다사원을 나와 둘리켈로 가는 버스를 찾았다.  의사소통의 어려움 때문에 정확한 정류소 위치와 버스 도착시간을 알수가 없어 그냥 하염없이 둘리켈 쪽으로 방향으로 잡아 걷기로 했다. 내리막길을 30분 정도 걸어 첫마을이 나왔을 때 우리가 방향을 잘못잡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왔던 길을 되돌아 확인된 버스 정류장에서 음료수를 마시고 버스를 기다렸다. 화물차가 지나가자 같이 버스를 기다리던 네팔리들은 화물차에 올라타고 사라져갔다. 그렇게 몇번을 반복해서 우리 부부만 남는 상황이 게속되자 불안감이 몰려왔다. 혹시 이러다가 해라도 떨어지면 마땅한 숙소를 찾을 수도 없는 산중턱마을에서 오도가도 못하는 상황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마냥 둘리켈행 버스를 기다리고만 있을 수 없어 일단은 최대한 걷기로 마음을 먹고 또 다시 낯선 길을 걷기 시작했는데 30분을 채 걷지 않아서 승용차 한대가 다가오더니 우리의 목적지를 물었다. 우리의 목적지와는 조금 어긋나지만 같이 갈수 있는데 까지 태워주겠다는 차에 염치 불구하고 올라탔다. 승용차에는 네팔청년과 네덜란드여성이 타고 있었고 둘은 인근 트리뷰반 대학교와 관련있는 사람들로 보였다. 간단한 인사를 건넨뒤 졸음이 오기 시작할 무렵 차는 둘리켈로 들어섰고 삼거리 버스파크에서 우리는 내리고 승용차는 왼쪽으로 틀어 트리뷰반대학쪽으로 떠나갔다. 고마운 마음을 대신해 아내는 스케치북에 그린 그림 한장은 찢어 선물했다.

 

다행히 승용차를 얻어타는 바람에 쉽게 둘리켈에 도착했다. 하지만 이 도시에 대해 거의 아는 것도 없었고 무엇을 할 것인지 구체적 계획도 없어 막상 도착하고나니 난감했다. 우선 호텔을 찾기로 했다. 터미날 근처다 보니 여러개의 호텔이 산재해 있어 손쉽게 선택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판이었다. 여행객의 행색을 보고 건달같은 호객꾼이 우리를 따라붙었다. 호텔을 들어서면 한발 먼저 카운터에 달려가 우리를 자신이 데리고 온 손님으로 소개하고 호텔비를 흥정했다. 당신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다고 여러번 이야기하고 뿌리쳤지만 우리의 대응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끝까지 우리를 따라왔다. 날을 곧 질것 같은데 호텔을 정하지 못하고 건달까지 따라 붙은 상황이 불안감을 일으켰다. 어렵게 택시를 타고 여행안내서에 소개된 호텔로 가자고 했지만 기사는 우리가 요구하는 호텔의 위치를 몰랐다. 결국 택시 기사는 그 건달한테 핸드폰까지 빌려쓰며 길을 물어보는 상황이 되고, 외딴 산길을 불안하게 헤매던 끝에 어두워지기 직전 '파노라마롯지'라는 호텔에 도착했다. 예상 택시비의 두배를 물고 들어선 호텔은 지난 지진의 흔적을 지우기 위한 부분적인 공사가 진행중이었고 손님은 우리가 유일했다. 롯지의 주인은 친절했고 우리가 요구하는데로 어두운 전등을 갈아주고 전기 스토브까지 내어주었고 음식과 이부자리는 다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낮시간의 불안감이 이어지면서 깊은 잠을 청하지 못하고 새벽을 맞았다.

 

 

북쪽과 동쪽으로 창이 나 있어 북쪽으로 눈을 돌리면 멀리 히말랴야 설산이 시야에 잡히고 침대에 앉아 정면 동쪽으로 바라보면 일출을 볼수 있는 전망 좋은 방에서 침대위 이불속에서 꿈같은 일출을 맞았다.  떠오르는 해가 온 세상을 비추자 지난날 오후부터 밤새 나를 사로 잡았던 불안감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언제  왜 인지도 모를 막연한 불안감이 물러가자 방안 가득 환희가 넘쳤다. 내가 묵고 있는 이 호텔의 이 공간이 세상에서 제일 아늑하고 편안한 공간으로 다가왔다. 기쁜 마음으로 아침을 먹고 호텔을 나와 산책을 나섰다. 산책길은 따뜻했고, 아름다웠고 조금은 신비롭고 한산한 산길이었는데, 간혹 경비원이 경비를 서고 있어 정부 시설이 접해있는지 의아했다. 나중에 알고보니 "The Dwarika's Resort"라는 고급 리조트의 외곽 산책길이었다. 내가 묵은 롯지보다 10배가 훨씬 넘는 숙박비를 내야하는 The Dwarika's Resort의  산책길을 저렴한 비용으로 이용한 셈이었다.

 

 

산책끝에 panorama view lodge에 하루를 더 머물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인근의 네팔 청년들의 데이트 장소로 보이던 Devisthan이라는 뷰포인트에 올라 시간을 보내고 호텔로 돌아와 책을 읽고 일지를 적고 혹은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파노라마롯지에서의 꿈같은 이틀을 보냈다. 기록할 것이 없어 더 좋았던 이틀의 시간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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