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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4

만리포에서 시내 버스로 태안읍 터미널로 가고, 태안에서 대전, 대전에서 안동까지 고속버스를 타고 이동, 안동에서 지인의 도움으로 봉화 집까지 무사히 도착, 67일의 여정을 마무리했다.

 

여행은 늘 아쉬움을 남겼다. 이번도 마찬가지다. 67. 국내 여행치고는 짧지 않은 기간이었고, 특히 태안해변길에 집중된 여행인 만치 여한 없이 여행을 즐길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시간은 너무 빠르게 흘렀고, 우리의 여정은 쉽게 줄었다. 전주를 거쳐 영목에서 시작해 꽃지로, 몽산포로  다시 학암포에서 신두리로 만리포로 이어지던 여정은 끝났다. 코로나만 아니었으면 몇일 더 이어가고 싶었던 길이지만 아쉽게 접고 집으로, 일상으로, 일속으로 돌아왔다. 나는 여정을 끝내며 주어진 삶을 사랑하고 맺어진 인연들에 더욱더 감사하자 다짐했다.

지난 일주일 사이 겨울은 더 깊어졌고, 나에게 가장 파란만장했던 한해인 2020년도 막바지에 접어들었다. 겨울추위와 코로나에 기대어 남은 한해, 최대한 나 자신에게 몰두하는 시간을 가지고, 지난 행적을 정리하고, 앞날을 꿈을 그리는 시간을 가져야 할 것이다.

같은 방향을 보면서 같은 길을 걷고, 같은 바다를 보고, 같은 바람을 마시면서 일주일간 땅과 하늘, 바다와 육지사이를 걸었던 아내가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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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12일

아침 8시 백사장항과 드르니 항을 이어주는 조망다리를 건너 청포대, 달산포, 몽산포를 그쳐 해안사구에 형성된 솔숲길을 걷고 해안으롭 멋어나 남면에서 버스를 타고 태안읍을나가 다시 버스를 갈아타고 학암포까지 이동하고 학암포에서 걸어 구례포에 도착 하루 여정을 마무리 했다. 

어제는 노을없는 5코스 노을길을 완주하고, 집나온 지 처음으로 실망스런 저녁을 먹고, 여정의 끝에 김기덕 감독의 사망 소식마저 들었다. 나에겐 아무 일도 없었던 평화로운 하루였지만 영화감독 김기덕은 낯설은 이국에서 외롭게 죽음을 맞이했다고 했다. 개인적으로 일면식도 없고, 그의 작품을 좋아하지도 않았고 단지 그의 고향이 봉화라는 이유로 딱 한번 생가터를 찾아 이웃의 입을 통해 그에 대해 들었던 것이 전부였지만 그의 죽음은 계속 나의 뇌리를 맴돌았다. 천제적인 영화감독으로 살다, 성추문으로 상처받고 이국땅에서 쓸쓸히 죽어가야 했던 그의 운명이 애닯았다. 하지만 한 인간이 가진 어리석음과 잘못의 댓가는 또 고스란히 자신의 몫이기에 그의 영광과 치욕이 함께 그의 죽음을 통해 무로 돌아가길 빌었다. 죽음 뒤에 따르는 비난도 생전의 예술적 성과에 대한 칭송도 이제 산자의 몫이지 그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늘은 드르니항에서 태안 8경의 하나인 몽산포로 이어지는 4코스 솔모랫길을 완주하기 위해 조금 일찍 숙소를 나섰다. 백사장항에서 드르니항으로 넘어가는 인도교는 엄청난 높이에 큰 규모로 지어져 다리를 건너는 내내 오금이 저릴 정도였다. 생활도로도 아니고 물론 차도 다닐 수 없고 오직 트레커나 관광객을 위한 다리치고는 너무나 거창했다. 그래도 막상 다리위에서 바라다 보는 서해의 풍경은 장엄했다. 다리를 건너자 아침 해가 동쪽하늘로부터 비추기 시작했다. 석양대신 여명을 사진에 담고 드르니를 벗어나 갯벌과 양어장 사이의 둑방길을 따라 길을 이어나가자 바다풍경은 시야에서 사라지고 신온리라는 지명의 염전이 펼쳐졌다. 염전을 따라 걷다보니 길은 다시 솔숲으로 접어들었고 우리는 고운 모래밭에 형성된 솔숲 사이를 쉼 없이 걸어 나갔다. 2시간을 걸려 6키로쯤 솔숲을 걸은 끝에 청포대에 이르렀고, 길은 다시 해변을 따라 달산포까지 이어졌다. 해수욕장은 청포대, 달산포, 몽산포로 나뉘어져 이름을 얻고 있었지만 뚜렷한 경계도, 이름을 나눈 특별한 이유도 없었고 그냥 하나의 해변으로 끝없이 이어졌다. 간혹 바닷새 무리를 만나 걸음을 멈추기도 했고, 그래도 주말이라고 해변에서, 솔숲길에서 사람들을 마주치기도 했지만 마음의 평화를 깰 정도는 되지 못했고, 그냥 온몸으로 바람을 느끼고 햇살을 빨아들이며 아무런 동요도 없는 적멸의 영역에 들어선 듯 가볍고 평화로운 걸음을 이어가니 도저히 끝날 것 같지 않던 길이 줄어 몽산포의 헤수욕장의 남쪽 끝단에 접어들기 시작했다.

몽산포로 접어들 무렵 시간은 정오를 넘어서고 허기가 지기 시작했다. 해변을 다라 가서는 식당을 찾기가 쉽지 않을 거라는 판단에 길을 육지 쪽으로 틀어 남면 면소재지로 기수를 돌렸다. 금방 나올 것 같던 시가지는 쉬 나오지 않았고, 배고픔에 거의 지쳐갈 즈음 남면 면사무소에 도착했다. 면사무소 건너길 모서리에 자리한 후줄구레한 식당은 한눈에 썩 끌리지는 않았지만 배는 고프고 다른 대안을 찾기도 귀찮아 망설임 없이 선택했다. 신성식당이라는 이름의 동네 식당에는 이미 피크를 넘긴 점심시간이기도 해선지 조용했다. 공사장 인부차림의 손님이 한 테이블에서 식사를 드시고 계셨지만 이내 식당에는 우리만 손님으로 남게 되었다. 주인 아주머니가 추천하는데로 평소에 먹고 싶던 물곰탕을 시켰다. 이내 상이 차려지고 물곰탕이 나왔다. 그런데 웬걸, 전혀 기대하지 않은 곳에서 너무나 푸짐하고 시원하고 맛있는 식사를 만났다. 아침도 먹지않고 오전에 15키로를 쉬지 않고 걷고 나서 만난 물곰탕은 허기와 피로를 한꺼번에 날려버렸다.

남면에서 오전 걷기를 멈추고 버스를 타고 태안읍으로 이동했다. 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고 태안의 북단이자, 해변길 1코스의 시작점인 학암포롤 향했다. 남면에서 태안읍을 거쳐 다시 남폭운전하던 버스를 갈아타고 학암포까지 도착하는데는 한시간을 조금 넘는 시간 밖에 걸리지 않았다. 학암포에서 하루를 마무리하고 숙소를 얻을 계획이었지만 예상보다 이른 시간에 도착하다보니 걸음을 조금 더 이어가기로 결정했다. 무엇보다 학암포의 분위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풍경이 아름다운 만치 그만치 사람의 발길이 잣고 상업화되는 것은 피할 수가 없었다. 애써 눈을 바다로 돌려 섬과 해안이 조화로운 풍경만을 담았다. 해안까지 바짝 붙어 형성된 사설 텐트촌과 방갈로, 그리고 상업적인 분위기가 물씬 나는 상가들을 피해 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방향을 잡고 걸어나갔다4키로 정도를 한시간 동안 걸으니 구례포 해수욕장에 도착했다. 구례포 역시 해안쪽 모레사구에는 텐트촌들이 형성되어 있었고 예상외로 텐트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고 아이들이 텐트사이를 뛰어다니고 여기 저기 고기곱는 연기조차 피어오르고 있었다. 막 텐트장을 들어서는 차들도 적지 않았다.

해안을 벗어나 634번 지방도를 따라 드문드문 자리한 민박과 펜션을 찾아 나섰지만 쉬 숙박지를 정할 수가 없었다. 어떤 집은 영업을 접었는지 문이 잠겨있었고, 어떤 집은 아예 코로나 때문에 손님을 받지 않는다고 문적박대를 했다. 다행히 길가의 펜션 안내판을 보고 전화를 돌린 끝에 파스텔팬션에 여정을 풀 수 있었다. 코로나가 휴가 풍경도 바꿔놓았는지 텐트촌은 사람들이 붐볐지만 막상 펜션에는 손님이 들지 않았다. 우리가 묵은 팬션 역시 우리가 유일한 손님이었다. 주인의 소개로 숙소에서 멀지 않은 곳의 식당을 소개 받았다. 한참을 걸어 도착한 식당은 영업중이었고, 막 도착한 경찰관들이 식사를 위해 식당을 들어가는 걸 볼 수 있었다. 뒤이어 우리가 식당을 들어가려고 하니 주인이 질색을 하면 우리를 외면했다. 코로나 때문에 단골 손님외의 여행객들은 손님으로 받을 수 없다며 매몰차게 우리를 문적박대 했다.

순간적으로 화가 치민 것은 사실이었지만 뭐 코로나 공포가 그런 대응을 하게 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숙소로 돌아와 주인아주머니를 찾아 라면이라도 빌려줄 것을 부탁했다. 다행히 멀지 않은 곳에 슈퍼마켓이 있고 차로 우리를 데려다 주셨고 라면과 도시락 등 간단한 식재료를 구입해 숙소롤 돌아올 수 있었고, 주인아주머니께서 맛있는 김치까지 한포기 내어주시는 바람에 그나마 저녁을 성찬으로 마무리할 수 있었다. 집 나온지 4일동안 옷점에서 만나 신세를 졌던 최씨 할머니, 장곡에서 차를 태워졌던 주민분에 이어 오늘 예정에 없던 차를 태워주고 김치를 내어준 파스텔 팬션을 이번 여정의 3번째 은인으로 기억에 남겼다.

저녁을 먹으며 켠 TV는 코로나가 다시 대유행기로 접어들었다는 뉴스로 도배를 했다. 숙박시설이 비고 손님을 거부하던 팬션과 식당도 경험하고 나니 우리도 남은 일정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일정을 줄일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한 이틀 정도 일정을 늘일까했던 나의 생각은 일단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이제는 초소한의 일정을 마무리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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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일년, 나는 힘들 때 마다 곧 여행을 떠날 수 있다는 희망을 앞세워 견뎌 왔다. 초겨울 배추작업까지 끝난 뒤, 아침마다 된서리가 차창을 하얗게 뒤덮은 대설이 지나서야 마침내 배낭을 쌌다. 여행이 지난 고역에 대한 보상이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나는 당당히 여행할 권리를 앞세우며 일상의 의무를 내팽개치고 집을 나섰다.

늘 바다가 그립고, ‘한량없이 걷고 싶다는 아내의 제안을 받아 태안 해변길을 이번 겨울의 여행지로 선택했다. 해지는 바닷가를 한량없이 걷고 싶은 욕망이 앞섰고 무엇보다 한번도 가본적이 없는 미지의 장소라는 점 때문에 안면도를 선택했다. 일정이 다가오자 태안 군청에서 보내준 자료를 잠자리에 들 때 마다 뒤척이며 대충의 코스와 전체 여정의 얼개를 잡았다. 대중교통으로 도시간 이동을 하고 적당히 걷고, 많이 쉬고, 최대한 잘 먹는 일주일 여정의 청사진을 그렸다.

127일 배추 작업을 일달락 짓고 남은 뒷정리를 남겨둔채 짐을 꾸리고 기차표를 예매했다. 태안으로 들어가기 전 중간 기착지를 전주 한옥마을로 정하고, 8일 아침 일찍 이웃의 차를 얻어타고 영주역을 향했다. 몇일 있으면 낡은 중앙선 철도를 개선한 새 노선으로 기차가 다니게 된다는 뉴스에 그래도 봉화살이 24년동안 드문드문 신세를 졌던 낡은 중앙선 철도를 마지막으로 달리고 싶었다. 버스를 타면 전주로 바로 갈수도 있었지만 굳이 영주에서 제천, 제천에서 오송, 오송에서 다시 전주로 갈아타는 기차를 선택했다. 나의 여행은 늘 공간적인 목적지는 부수적이고, 집을 나서는 그 순간부터 시간여행이 시작되기 때문에 이동수단의 효율은 전혀 고려대상이 아니었다.

 

12월 8일 아침 7시51분영주역출발, 제천에서 오송행 열차로 갈아타고, 다시 오송에서 내려 전주행 KTX에 올라 오전 11시34분 전주역 도착, 한옥마을에서 오후 시간을 보내고 한옥민박에서 하루를 마무리 했다.

쌀쌀한 아침 공기가 플랫폼을 짓누르는 영주역 풍경이 새로웠다. 모두가 어깨를 움츠리고 마스크를 쓴 얼굴을 외투 속에 묻고서 침묵하는 긴 시간이 지난 뒤 예정보다 11분 연착한 제천행 열차가 도착했다. 751분 영주역을 출발한 열차는 낯익은 영주 시내를 돌고 풍기를 지나 소백산을 뚫고 단양, 제천으로 달렸다. 1시간이 지났을까, 그대로 북한을 지나 시베리아 까지 달려갔으면 좋으련만 언몸이 녹고 출발의 긴장이 풀릴 즈음 열차는 제천역에 도착했다. 이어지는 오송행 열차를 갈아탈 시간을 다 허비한터라 뒤도 돌아보지 않고 냅다 달려 문이 닫히기 시작한 열차에 뛰어올랐다. 아내의 배낭은 문짝에 끼여 한참을 당기고 실랑이를 벌인 뒤에야 객실에 들어설 수 있었다. 다시 오송에서 내려 이미 시간을 놓쳐버린 전주행 열차를 향해 달렸다. 다행히 달려오는 우리에게 손을 흔드는 승무원의 독려에 힘입어 사력을 다해 난생처음 타보는 KTX에 몸을 실었다.

불과 서너시간만에 3번을 경험하는 객실은 많지도 적지도 않은 승객이 하나같이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옷깃에 최대한 얼굴을 묻은채 각자의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는 침묵의 공간이었다. 열차여행은 화장실과 식당칸이 있고, 내부에서 자유로운 이동이 가능하고, 조금은 웃고 이야기하고 먹고 마시는 여유가 주어진다는 기대를 했지만 코로나 창궐기의 열차는 그러지 못했다. 난생 처음 타보는 KTX조차 꼼짝없이 좌석에 갇혀 숨막히는 침묵과 무거운 진동만을 느끼며 지루한 시간을 견뎌야했다.

점심시간에 도착한 전주역전은 한산했고 찬바람이 가득했다. 우선 허기를 달래기 위해 식당을 찾으며 전주의 공기를 통해 전주만의 느낌을 탐색했다. 조금은 낡고 스산한 거리의 풍경에서 옛 고도의 사라진 영광을 확인하기는 힘들었다. 버스로 동부시장까지 이동한 뒤 전주 한옥 마을로 향했다. 한옥마을은 최근에 가장 각광받는 여행지로 이름을 날리는 만치 코로나 와중에서도 관광지의 면모를 유지하고 있었다. 태조이성계의 초상을 모시고 있다는 경기전담벼락을 따라 소박하고 정겨운 거리를 걸었다. 한산한 중에도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드문드문 문을 닫은 가게들 사이로 뜨거운 김을 거리로 뿜으며 손님을 기다리는 가게들이 적지 않았다. 한산해서 좋으면서도 동시에 좀더 사람들의 왕래가 활발하고 문 닫은 가게들이 성업중인 활기찬 시절에 다시 한번 더 오고 싶은 마음이 일었다.

경기전을 둘러보고 한옥마을 주변 거리를 배회했다. 어진박물관을 비롯해 실내 공간은 모두 코로나로 문을 닫고 있었고, 역사 유적이나 명승지는 코로나 시기에 맞춰 수리를 하는지 하나같이 공사 중이었다. 한국 천주교 첫 순교자가 처형되었던 터에 100여년 전에 지어졌다는 전동성당을 비롯해 전주성의 풍남문, 조선시대 객사로 지어졌다는 풍패지관이 모두 공사중이라 지나쳤고, 문이 닫힌 전통문화전당 등을 스쳐지나 황량한 전주 거리를 오후 내내 걷기만 했다. 까페라도 들러 커피라도 한잔하면서 지친 다리도 쉬고 몸도 녹이고 싶었지만 테이크아웃만 가능하다니 그조차 포기했다. 전주 단팥죽과 단팥빵을 찾아 한참을 더 누볐지만 찾지 못하고 손님이 붐비는 수제만두집에서 요기를 하는 것으로 오후 일정을 접었다.

손님이라곤 우리밖에 없는 소리풍경이라는 소박하고 아기자기한 한옥 민박을 잡고, 짐을 풀고 따끈한 방바닥에 기대어 한참을 쉰 뒤에 다시 거리로 나와 저녁을 먹었다. 그냥 마무리하기에는 아쉬웠지만 뚜렷한 다른 대안이 없었다. 우리는 다시 방으로 파고 들어 읽히지 않는 책과 밤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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