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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월초, 마을 사업 관련해서 마을주민과 함께 일본 연수를 떠났고 그때 1시간 정도 유후인을 스쳐 지나갈 수 있었다 눈발이 날리고 찬바람이 몰아쳐 그 짧은 1시간마저 유후인을 보는둥마는둥 보내고 말았지만, 그때 가이드로부터 유후인이 '일본여성이 일생에 꼭 한번 여행을 오고 싶어하는 곳'으로 최고로 인기있는 관광지라는 말이 인상에 남았었다. 그리고 귀국후 이런저런 자료를 보면서 유후인의 매력에 빠져들었고, 지난 1월 23일에야 아내와 딸을 동반하고 1박까지 하는 넉넉한 일정으로 유후인을 찾았다.

내가 아는 유후인은 참 특별한 관광지다. 대단한 역사문화적 자산이 남겨진 곳도 아니고, 자연 경관이 유별나서 사람을 매혹시키는 그런 곳도 아니다. 골프장이나 대형 리조트, 호텔 인프라는 아예 찾아볼 수도 없다. 현대문명의 현란함도 도시적 매력도 없고 그렇다고 전원의 목가적 풍경만으로는 관광지가 되기에 아무리 봐도 부족한 지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구 만2천여 명에 동서 8km, 남북 22km의 유후인은 년 400만 명의 관광객이 찾아오는 일본 최고의 관광지중 하나다. 유후인은 인구나 도시 면적으로만 본다면 봉화읍 정도와 크게 다를 바가 없는 지역이다. 그런데 도대체 어떤 매력이 유후인을 그토록 성공적인 관광지로 자리 잡게 했을까?


그 비밀을 풀기 위해 우선 유후인을 인상짓는 몇 가지 자원을 생각해 봤다. 유후인을 내려다보는 해발 1500m가 넘는 유후다게라는 산이 있다. 유후다케는 아소쿠주 국립공원의 일부로 화산작용으로 생겨난 산이다. 이 유후다케를 비롯해 해발 1000m가 넘는 산록이 유후인을 둘러싸고 있다. 산세로 따진다면 물론 보기에 아름다운 산들이지만 그것만으로는 유후인의 성공을 설명할 수 없다. 유후다케는 유후인의 명성을 통해 알려진 산으로 유후인의 작은 자원일 뿐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기 때문이다.
 


유후인을 찾았던 사람들은 유후인의 긴린코 호수를 잊지 못한다. 긴린코 호수는 관광객이 제일 많이 붐비는 거리의 끝에 위치한 조그마한 연못이다. 석양이 비칠 때면 호수에서 뛰어오르는 붕어의 비늘이 금빛으로 빛난다고 해서 긴린코(金鱗湖)라고 이름 붙인 호수다. 온천과 냉천이 함께 솟아나 항상 김이 피어나는 신비로운 호수로 주변의 아기자기한 미술관이나 카페들과 잘 어울려 그 아름다움이 빼어난 호수지만 자그마한 크기의 호수에 불과하다. 긴린코 호수가 가진 이름의 의미가 관광객의 흥미를 끄는 것도 사실이고, 주변경관과 어우려져 신비로운 매력을 드러내는 호수의 아름다움에 탄복할 수밖에 없지만 이 역시 유후인의 매력을 다 설명해 주기엔 턱없이 부족한 자원이다.


유후인은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만든 대표작인 <이웃집 토토로>와 <센과 이치로의 행방불명>의 배경이 된 곳이다. 그러다보니 이들 만화영화의 주인공을 형상화한 케릭터 상품이 즐비하고, 전문 가게들마저 성업 중이다. 이 역시 유후인의 큰 관광자원의 하나지만 유후인의 명성을 충분히 설명해주지는 못한다.

유후인의 참 매력을 드러내는 규정은 다름 아닌 “친환경 관광도시”라고 한다. 하지만 어떤 자원들이 유후인을 친환경관광도시가 만들었는지, 그리고 어떤 과정을 통해 오늘날의 친환경 관광도시 유후인이 탄생되었는지 살펴보지 않고는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없을 것 같다.
 


유후인은 1975년 오이타현을 중심으로 일어난 지진으로 유후인의 대표적 호텔건물이 붕괴하는 등 참사를 겪었다. 당시 유후인은 인근의 유명한 관광지인 벳부 덕분에 ‘작은 벳부’라고 불리며 지명도가 높아지던 시기였는데 지진에 의해 그 명성이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될 위험에 처하게 된 것이다. 그때 마을 주민을 중심으로 지진이 초래한 위기를 극복하고자 ‘마을재건위원회’가 구성되었는데, 마을재건위원회는 대규모 관광단지 조성 사업 같은 개발을 통한 극복 방안과 유후인의 고유한 경관을 보존하면서 주민의 삶의 질을 우선시하는 개발 방향을 높고 대립하기도 했지만 결국 투표를 통한 주민의 선택으로 ‘보존’으로 방향을 잡았다고 한다. 이후 주민자치위원회는 음악제와 영화제 등을 만드는 등 유후인을 문화와 예술이 넘치는 마을로 만들어가면서 동시에 ‘정감 있는 마을 만들기 조례’를 재정하고 지역의 농업, 관광, 주민의 삶까지 아우르는 지속가능하고 친환경적인 지역 개발 모델을 구상하고 실천했다고 한다. 1988년에는 유후인에 3,600실 규모의 대형 리조트 건설이 추진되었는데, 이 때문에 일부 주민의 이해관계가 대립하기도 했지만 민관이 함께 이를 저지하고, 아예 1990년에는 유후인 내에 5층 이상의 건물을 짓지 못하게 하는 조례까지 재정해 버렸다고 한다. 그런 주민들의 노력이 오늘날 유후인을 전국 최고의 ‘친환경관광도시’로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특히 유후인 브랜드를 만들어 나가는 과정에서 핵심적인 것은 유후인의 고유한 가치를 스스로 확인하고 이를 중심에 놓고 지역의 발전 방향을 잡아나갔다는 것이다. 물론 그 과정은 주민자치활동의 일환으로 이루어졌고 당연히도 주민주도적인 공유 과정이 선행되었다. 결정과정의 공유는 자발적 참여를 이끌어내는 결정적인 힘이 되었을 것은 당연지사라 할 것이다. 유후인의 고유한 가치를 찾는 과정은 좁게 보면 유후인 인근의 최대 관광지인 벳부와의 차별성을 찾고 확립해 나가는 과정이었다. 벳부가 일본경제의 상승기에 단체관광, 기업관광이 주를 이룰 때 번성하여 남성중심, 밤거리와 유흥가, 대형 숙박시설 등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면, 휴후인은 그와 정확히 반대되는 가치에 기반하고 있다. 유후인 관광자원은 여성 중심적이고 가족중심적인 가치에 기반 하여, 예술, 문화쇼핑, 생활체험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유후인은 시대적 트랜드의 변화를 먼저 읽고 자신의 고유한 차별적 가치를 그 중심에 세움으로써 성공적인 지역개발 모델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와 같은 유후인 만의 고유한 관광정신을 가장 잘 구현해 보이고 있는 것이 바로 ‘유노쓰보’ 거리다. 이 거리는 유후인역에서 긴린코 호수에 이르는 약 2km정도 되는 거리다. 이 길을 중심으로 작은 골목길들이 이어져 있고, 골목 마다 수십 개의 미술관과 공방, 베이커리, 까페, 그리고 각종 특산물과 기념품, 공예품, 골동품 가게 등이 늘어서 있다. 미술관이라고는 하지만 대단한 시설의 화려한 건물은 하나도 없고 오밀조밀한 거리에 그만그만한 규모의 소박한 미술관들이 전부다. 사실 어느 것이나 하나를 떼어놓고 본다면 특별한 것이 없다. 그런데 유노쓰보 거리의 이들 모든 것이 어울려 만들어 내는 분위기가 일년에 400만의 관광객을 끌어들이는 중심적인 매력으로 승화한다. 사람들은 문화예술의 빛 아래서 나름의 취향에 따라 금상 고로케와 유후인 에끼벤을 사먹고, 유후인 버거와 유후인 롤케익을 즐기며 충만감을 느끼고 행복해 하는 것이다.


유후인은 대중의 소박한 정서에 철저히 부합하는 관광지다. 특별히 화려한 것도 대단한 것도 없는 거리에 대중적 감수성에 부합하는 작은 자원들이 어울려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지역 주민의 행복한 삶을 우선시 하는 관광개발을 펼쳤다는 것이다. 단적인 예로 대규모 호텔이 들어설 경우, 지자체는 세입 증대라는 이익이 있겠지만 주민과 관광객의 관계는 단절되고, 고유한 지역의 경관과 정서는 파괴되고 만다. 유후인은 그런 식의 대형 호텔의 건설을 저지하면서 오늘날 100여개의 중소 료칸이 성업하게 되는 여건을 지켜낼 수 있었고, 그렇게 지켜진 료칸 자체가 하나의 중심적인 유후인의 관광자원이 되었다.

유후인 거리를 걷다보면 관광지라기보다는 잠시 산책 나온 거리, 내 집에서 거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친숙하고 마음 편안한 공원에 나온 것 같은 기분에 빠진다. 그것은 유후인의 거리가 관광이 아니라 ‘생활’, ‘체험’을 모토로 하는 유후인의 관광정신을 철저히 구현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모처럼의 가족 여행을 유후인으로 선택한 것은 먼저 우리가족이 유후인의 매력을 즐기기 위한 것이었고 그리고 부가적으로 내가 사는 봉화, 그리고 비나리마을의 바람직한 개발 방향에 대한 착안을 얻기 위해서 였다. 1박2일의 유후인 여행으로 뭐 대단한 성과를 얻을 수있겠냐만 그래도 오랫동안 유후인은 나의 뇌리에 남아 곱씹어야 될 생각거리를 제공해 줄 것이 분명해 보였다. 다 떠나서도 그 이틀 동안 동안 딸과 아내와 함께 유노쓰보거리를 걸으며 다코야끼를 사먹고, 벌꿀 아이스크림을 나누어 먹던 행복한 시간은 오랫동안 기억에 남아 나의 메마른 삶을 훈훈하게 뎁혀줄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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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전 일본농촌마을 선진지 견학으로 규슈여행을 다녀왔다. 즐겁고 의미있는 연수이긴 했어도 공적인 일정이 주는 아쉬움도 많았다. 나는 짧은 연수기간이었지만 일본의 멋에 매료되었고 특히 일본 농촌의 아름다움에 빠져버렸다. 연수를 마치고 돌아오는 비행기안에서 작은 다짐 하나를 했다. 빠른 시일내에 다시한번 가족과 함께 유후인이랑 야나가와를 보러가겠다고. 그리고 작년 10월이 결혼 20주년이다보니 충분히 핑게도 되었고, 틈틈히 웹을 뒤져 규슈여행 정보를 모아나갔다. 가까운 규슈지만 엄연히 외국인데 일본어도 못하고 영어도 못하는 사람이 자유여행을 가려고 하니 사전 준비가 많아야 했다. 늦었지만 난생 처음하는 단독 해외여행의 불안감을 떨치기 위해 여행안내서적들도 사서 읽고, 오랜 세월 방치되었던 일본어회화에다, 영어회화 공부까지 하기 시작하고 이러저런 블로그를 찾아 여행기를 읽어나갔다. 나중에는 유후인과 후쿠오카를 가지않고도 모스버거와 벌꿀 아이스크림 그리고 금상고로케의 맛을 논하는 유후인, 후쿠오카 전문가가 되다 시피했다. 그리고 10월이 다가오면서 드디어 교통편과 숙박편 예약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딸애의 합류와 이런저런 다른 사정까지 겹쳐 일정은 12월로 연기되고,  '대기'상태의 배편을 구한 상태에서 숙소를 예약한뒤, 배편이 틀어지면서 예약된 숙소의 일정을 바꾸기도 하는 우여곡절끝에 해를 넘기고 지난 1월 22일 드디어 배낭을 매고 집을 나섰다. 일주일동안 집을 지켜야되는, 자기가 사람인줄 착각하고 사는 우리집 똥강아지 초롱이가 서운한 눈빛으로 우릴 배웅했지만 개무시하고 악세레다를 밟았다. 


안동 강변의 한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부산까지 가는 기차를 타기 위해 안동역을 들어섰다. 한달전 예매를 하고 프린터해 둔 티킷을 주머니를 뒤척여 찾아 놓았지만 승무원 누구도 기차표를 확인하지 않았다. 예매를 하면서 안동에서 부산까지 버스로 2시간 30분이 걸리지만 기차로는 4시간이 넘게 걸린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빨리 가고싶은 마음이랑, 기차를 타고 싶은 마음이랑 한참을 갈등했지만 근 7~8년만에 하게 될 기차여행의 유혹을 뿌리칠 수 없었다. 플랫폼을 들어서는 나의 가슴은 벌써 여행의 흥에 벅차오르기 시작했다.


세식구가 함께 챙겨야될 가방의 수를 확인하고  각자가 책임져야할  몫을 나누다보니 금방 기차가 도착했다. 12시 12분 안동발, 16시 27분  부산 부전역도착예정인 무궁화호는 넉넉하게 좌석이 비어 있었다. 그래도 좌석번호를 찾아  선반에 짐들을 올려놓고 
차창밖으로 사라져가는 안동의 익숙한 풍경들을 두 눈에 담았다. 낯선 풍경들이 차장을 스치기 시작할 즈음 카페열차칸을 운영한다는 안내방송이 나왔다. 카페열차칸에서 마시는 커피 한잔의 낭만을 찾아 들어선 카페열차는 텅텅 비어있었고, 매장은 빈약했지만 그래도 창을 스치는 겨울 산하의 풍경을 바라보며 따끈한 원두 커피 한잔의 향기에 취했다. 카페칸 차창을 스치는 풍경은 객실 차창을 스치던 바로 그 풍경이 아니었다. 커피향 가득한 까페열차칸에서 바라다보는 차창밖 풍경은 지난 추억을 고스란히 환기시켰다. 어린시절 무서운 꿈을 꾸다 잠은 깬뒤 깊은 잠에 빠져 있던 식구들 사이에서 혼자 두려움과 외로움에 떨든 새벽, 소년의 귀에 울려오던 새벽기차소리는 두려웠던 밤이 다 가고 새날이 밝아오고 있음을 알려주는 구원의 소리에 다름아니었다. 중학교3학년 시절 갑자기 공부에 신명이 붙어 책보다 더 많은 도시락을 담은 무거운 가방을 들고 새벽 기차를 타고 전교 1등으로 등교를 하기 시작했다.  그 시절 시발역인 진해역에서 경화역까지 짦은 시간동안 새벽기운이 걷혀가는 세상을 차창밖으로 바라다보던 소년의 가슴은 온갖 굴레에 묶인 지금이 아니고 모든 것이 가능할 미래에 대한 꿈들로 벅차올랐다. 
 


안동을 벗어난 기차는 간혹 낙동강을 나란히 달리다가 낙동강의 지류들을 건너기도 하고, 의성과 군위를 지나면서는 낙동가의 본류를 가로지르기도 했다. 하지만 마음 편히 아름다운 겨울강을 바라다불 수만은 없었다. 한달쯤 전 구미에 일이 있어 갔다가 4대강사업으로 구미보를 설치하는 공사장 주변을 지나칠 일이 있었다. 그때 말로만 듣던 4대강사업 현장을 직접 두눈으로 보면서 강변 농토에 끝없이 쌓여있는 준설토 무더기와 거대한 보기둥을 보면서 경악했다. 한 인간의 야욕이 무참히 뭉개버린 자연을 바라다보면서  21세기에도 여전히 야만이 지배하고 있는 우리 사회에 절망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저 평화의 강이 끊기고 무자비하게 파괴된 공사 현장이 곧 나타날 것만 같아 창밖 강풍경을 바라다보는 마음이 불안으로 가득했다. 


기차는 부산 부전역에 도착하고, 우리는 짐을 들고 부전시장쪽으로 빠져나왔다. 지하철을 타고 중앙역으로 가기 위해서 였지만, 승선수속까지는 아직 2시간이 남아있었고, 가야할 전철 구간은 몇개되지 않았다. 가방을 끌고서 부전시장을 구경하자는 아내와겨루다가 그냥 길가 뜨거운 김이 피어오르는 포장마차에서 말로만 듣던 부산오뎅을 사먹기도하고, 중앙역에서 국제여객터미날까지 굳이 걸어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부산 국제 여객터미날에 도착하고보니 아직도 시간이 많이 남아있었다.  좁은 대합실을 들어서니 의외로 인파가 넘쳐나고 여행객의 설레임으로 후끈겨렸다. 비행기 삯에 비해 배삯이 싸서 그런지, 아니면 승객의 수가 적어서 그런지 알 수 없지만 왠지 어설프고 조금은 지저분한 여객터미날은 여행사별, 단체별로 무리를 지어 인원을 점검하고 여권과 승선티킷을 나누어주는 등 부산했다. 개별 자유여행에 오른 우리가족만 일행이 없이 홀가분하게 보였고 넓지 않은 터미날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승선시간을 기다렸다. 


발권을 하고 한참을 서성거린뒤에 먼저 출항할 시모노세끼행 성희호 승객들이 승선을 하는 과정을 구경을 했다. 그러고 나서야 우리가 타고갈 하카다행 뉴카멜리아호 승객들의 승선이 시작된다는 방송이 흘러나왔다. 아침에 집을 나와 이제사 후쿠오카행 배를 타게되는구나 하는 안도감과 설레임을 안고 들어선 승선장에는 면세점이 있었지만 잠깐 구경만하고는 곧장 배에 첫발을 디뎠다. 뉴카멜리아호 갑판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 그렇게 큰 배였지만 생각지도 않은 울릉거림이 전해져 왔다. 그 울릉거림이 파도때문인지 설레임때문인지는 알수 없었다. 


객실은 카멜리아호의 3층,4층,5층에 나누어져 있었고, 우리가족은 4층의 12명이 들어가는 한 다인실에 여장을 풀었다. 남녀실이 다르거나 혹은 비슷한 가족여행객들로만 같은 호실 손님을 몰아준다든지 한다는 이야기를 들어왔지만 우리 선실은 전부 개인 남자 승객뿐이었다.  우리가족은 조금의 불편함과 불안감을 갇지 않을 수 없었지만 다행이 우리 호실의 승객은 7~8명에 불과해 넉넉한 자리에 트렁크를 벽삼아 내려놓을 수가 있었다. 여행이란게 이런 불편함을 즐기기 위한 것이 아니겠는가며 스스로를 위무하며 저녁 7시 승선후 11시 30분 출발까지 선상의 여행을 시작했다. 배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구경도 하고, 각종 자판기를 사용해보기도 하고,  갑판으로 나가  어둠에 싸인 부산항과 부산시의 야경을 사진에 담기도 하고 기념 사진도 찍었다. 카멜리아호는 일본 선적인지 선내에서는 엔화밖에 사용할 수가 없었고 자판기로 판매하는 상품들 역시 일본 상품들 이었다. 배를 타는 순간 왠지 모르게 이미 일본에서의 시간이 시작된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가만히 서 있는 배에서 보내는 시간의 지루함을 줄일 순 있었지만 4시간 30분이라는 시간은 한 공간에서 보내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배도 고파왔지만 선내 레스토랑은 예약된 단체 손님을 우선 받고 8시40여분이 지나서야 일반 개인 손님을 맞기 시작했다. 일부 메뉴는 이미 매진이 된 상태였지만 다양한 음식을 먹어보자며 3명이 각각 다른 메뉴를 주문했다. 음식값은 각 850엔 정도 였고 그런데로 한끼 식사를 해결하기에 부족함이 없었지만 이날 압권인 음식은 단연 연어알밥이었다. 국내에서 먹던 일반적인 알밥만을 생각하고 연어알밥을 주문했다. 주문을 받는 아가씨가 몇번을 반복해서 연어알밥을 드실 수 있으시겠냐고 되물어왔다. 먼저 국적을 묻고 연어알밥은 비린내가 많이 나서 한국사람 입맛에 맞지 않을 수 있다는 친절한 안내를 해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뭐든지 먹을 수 있습니다!' 라고 소리치고는 고집스레 주문을 하고 말았다. 하지만 차려진 그릇의 뚜껑을 열자마자 와이프는 스필버거의 인디아나존스에 나오는 눈알이 둥둥 떠 있는 스프를 연상시킨다면 질겁을 했다. 나는 돈이 아까워 억지로 먹어보려 시도했지만 연어알이 입안에서 터질때마다 비릿한 생선 썩은 냄새 같은게 입안에 퍼지면서 거의 구토가 날 지경이었다. 남은 2인분의 다른 음식을  3명이 나누어 먹으면서 웃고 떠들며 부산앞바다의 밤은 깊어갔다. 식사를 마치고 부산항 밤바다를 바라다보고 기념사진도 찍다가 선실에 들어가 잠을 청했다. 


잠이 설핏 든 사이 배의 출렁거림이 느껴져 눈을 떴다. 배가 출항을 했는지 확인해 보기 위해 나선 갑판에서 바라다 보는 부상항을 점점 멀어져가고 있었다.  멀어져 가는 부산항을바라다 보며 멀어져 가는 나의 지난 시간들도 더불어 작별했다.  

배를 타고 떠나는 일본여행을 꿈꿔온지 오래다. 선상에서 밤바다를 보고 싶었다.  망망대해 한가운데서 맞는 일출, 그리고 일몰, 바다 한가운데서 보는 밤 하늘의 별들... 그리고 파도소리. 하지만 이번 여행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깜깜한 밤바다에 별도, 일출도 볼수가 없었다. 빛마져 다 빨아들이는 블랙홀 한가운데 남아있는 것 같은 느낌... 그리고 멀미까지. 

 

여행을 준비하면서 갖는 여행의 꿈은, 막상 길 떠나게 되면서 막닥뜨리는 구질구질한 현실과 의외의 변수들에 의해 뭉개져 버리지만 그래도 현실은 그 꿈보다 훨씬 풍부하고 아름답다는 사실을 직시하게 된다.

삶은 항상 의외의 사건들로 가득차고, 늘 미지의 것을 남겨 놓고 있지. 그래서 세상은 신비롭고,  삶은 살만하지 않은가? 낯선 여행만큼이나 설레임 가득찬 나의 삶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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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20주년 첫 가족 일본여행을 떠나며...

나는 호젓이 떠나는 여행을 꿈꾸고, 혼자만의 시간을 그리워한다.
여행은 모든 익숙한 것들로 부터 벗어나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기회다.
멀리서 바라다 보는 '나',  '나'를 둘러싼 삶터,
그리고 '나'와 관계 맺고 살아가는 사람들...
길을 나서면 이 모든 것이 나의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의 것이 된다.
'나'는 '그'가 되고 그는 고개를 들어 멀리 수평선 넘어 번지는 석양을
그 자신의 눈으로 바라다 본다.


낯선 눈으로 익숙한 것을 바라다보는 생소함이 내가 꿈꾸는 여행의 묘미다.
하지만 그 생소함은 너무 친숙해서 느끼지 못하게 된 사물들을 발견하게하고,
익숙함의 궁극을 나타내는 나자신을 회복하고,
궁극적으로는 모든 존재의 상처받은 신비를 치유하는데 묘약이 될 것이다.

객관화된 자신을 '그'의 눈으로 바라다보면서 '그'가 산 삶을 되짚어보고,
'그'가 살아갈 앞날의 삶을 꿈꾸는 여행은 결국 떠난 자리로 돌아오기 위한 여정이다.
나는 더 멋진 유랑을 꿈꾸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최대치는 여행일뿐이다.
여행은 길고 지루한 인생이라는 길위에서 잠시 느티나무 그늘로 스며들어
낡은 운동화나마 벗어 먼지를 털고 다시 신는 그런 시간이다.
나는 운동화를 고쳐신고 느티나무 가지 사이로 번져오는 햇살과
파란 하늘을 바라다 보며 새로운 여정을 시작할 것이다.

여행이 단순한 '소비행위'일뿐인 시대에
그래도 굳이쇼핑센타를 가지 않고 배낭을 매고 길을 나서는 것은 
단지 지나간 시절에 대한 향수나
몸에 베어있어 버리지 못하는 타성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나는 아직도 세상의 모든 존재가 다 그 신비를 잃지 않길 바라고
마찬가지로 세상의 모든 여행이 설레임으로 가득차길 빈다.
세상의 모든 작은 여행들이 우주여행의 황홀함을 나눠갖는다면
사람들은 좀더 따뜻하고 충만한 의미속에서 살아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 난생 처음으로 가족일본 여행을 떠난다.
우리 가족은 규슈에서 5박6일의 짧지 않은 시간을 부유할 것이다.
유후인의 거리를 지나 관광객의 발길이 닿지 않는 마을 속으로 스며들고
후쿠오카 빌딩 숲의 한 모둥이에 쳐박혀 잊혀져가는 가게에서 우동을 먹으며,
익숙한 가족의 의미와 인연의 깊이를 되짚고 
우리가 살아있는 이 세계의 신비를 회복하는 시간을 가지고싶다.
그리고 다시 진부한 일상으로 돌아와 진부하지 않은 삶을 도모하고 싶다.
익숙한 모든 것을 그리워하기 위한 떠남에서 돌아야
모든 존재와 모든 관계에 스민 사랑을 회복하고 싶다.


1월22일 봉화출발 / 부산발 카멜리아호
1월23일 하카다항 도착 유후인으로 이동 / 코우노쿠라 료칸에서 1박
1월24일 후쿠오카로 이동 /하카다도큐 엑셀 호텔 1박
1월25일 야나가와로 이동/ 다자이후 관광 / 1박
1월26일 후쿠오카 관광 / 1박
1월27일 하카다항 출발 부산 귀환
1월28일 봉화 도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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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정 둘째날 - 구마모토성과 아소산 그리고 구로가와마을

평생 처음으로 다다미방에서 숙면을 취하고, 
일본에서의 둘째날을 힘차게 시작했다.
아침일찍 온천욕을 하고, 유카타 차림으로 식당을 들어섰다.
일행들은 일본 여행 하루만에 현지 적응이 다 되었는지 하나같이 유카타를 입고
'오하이요 고자이마스'를 외치며 식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일행은 모두 전날부터 두세번씩 온천욕도 하고, 맛있는 일본 음식을 잘 드신 덕분에
얼굴은 화기가 넘쳤고, 또 본격적인 일본 여행에 거는 기대때문인지 조금씩 들떠 있었다.

둘째날의 여정은 구마모토현의 중심부에 소재한 구마모토성을 관람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1601년에 시작해 1607년에 완공한 구마모토성은 임진왜란 때
조선을 침략한 왜장중에 가등청정에 의해 지어졌다고 한다.
성과 관련된 수많은 역사적인 지식을 가이드로부터 전해 들었는데,
구마모토 성을 세운 가등청정(가토 기요사마)와 도쿠가와 이에야스,
그리고 토요토미 히데요시 등의 역사적 인물과 연관된 성의 역사는
참으로 흥미진진했다. 특히나 일본 역사에 대한 박식한 가이드를 만난 덕분에
지루한 역사강의가 될 수도 있는 상황이 참으로 즐겁고 유익한
배움의 기회가 될수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나같은 필부에게 권력의 중심에 도달했던 인간들의
권력에 대한 끝없는 집착과 탐욕, 
획득한 권력을 지키기위한 무자비한 보복과 음모들은
비현실적일 정도로 끔찍하기만 했다.
인간의 위대한 역사가 아니라 인간의 피비린내나는 역사가 몸서리쳐졌다.
오직 인간만이 그토록 징글징글한 탐욕과 집착을 가질 것이다.
 
구마모토 성을 떠나 우리 일행을 싣은 버스는 아소산으로 향했다.
아소산은  활화산으로 지금도 가스와 수증기를 뿜고 있고
몇십년에 한번씩 용암을 분출하기도 한다고 했다.
그렇게 화산들의 활동으로 형성된 분지를 중심으로 산맥이 이어지듯
산등성이가 이어지는데 그렇게 형성된 산등성이는 정상부위가
모두 갈대밭으로 형성되어 목초지로 활용되고 있었다. 
아소산 가는 길은 이렇게 형성된 갈대밭을 따라 이어지는데
이 길을 '쿠사센리'(갈대천리)라고 했다.

아소산 정상은 짙은 안개와 강한 바람으로 오르지 못하고 내려와야만 했지만
화산 분지를 따라 형성된 산등성이를 따라 아소산을 오르는 길은
광활한 자연의 숭고함과 깊은 아름다움을 보여주었다.
아소산을 내려와 구로가와 마을을 가는 길목에서
'홈와이드'라는 대형  농자제, 철물 공구상을 들렀다.
일본에 대중화된 전원가꾸기와 텃밭 농사를
간접적으로나마 엿볼 수 있었는데,
한겨울임에도 불구하고 성업중인 가게에는
각종 꽃모종과 연장들, 농기구들,
특히나 탐나는 갖가지 연장들을 구경할 수 있었다.
혹시 다음에 다시 올 기회가 있다면
꼭 연장을 서너개는 사고 싶은 그런 곳이었다.

이어서 이날 오후부터 첫 방문 마을인 구로가와 마을로 길을 잡았다.
구로가와 마을은 지금은 유명해진 온천 마을로,
좁은 계곡을 따라 수십개의 소규모 온천이 옹기종기모여있는 마을이었다.
대규모의 숙박시설보다는 5~10호실 정도의 전통료칸이 대부분인 구로가와마을은
침체된 마을을 주민의 힘으로 활성화시킨 대표적인 성공사례라고 했다.
일반적인 농업중심의 농촌마을과는 분명 다르지만
마을 단위 공동체가 어떻게 지역사회를 살려낼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귀한 사례가 아닐 수 없었다.

일종의 주민회관 같은 공간에서 구로가와 마을의 온천조합이사장인 엔도우상으로부터
구로가와 마을 활성화 사업 과정을 비롯해 마을의 현황과
미래 비젼에 대한 간략한 강의가 듣고, 이어지는 질의 응답시간을 가졌다.
구로가와 마을은 전체 200여호로 이중 29개의 료칸이 운영되고 있고,
객실은 총 477개로 하루 1500여명의 숙박객을 받을 수 있다고 한다.
초기 대중온천으로 마을을 변모시켜나가는 과정에서
업체간 매출의 차이를 줄이고 협력을 높이기 위해
숙박과 별개로 온천을 공동 사용할 수 있게하는 
온천사용권(삼나무 토막으로 만든 마패같은 모양)을 판매하고
공동관리하게 되었다고 했다.
바로 그 마패를 구로가와 온천마을의 단합과 성공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여기고 있는 엔도우 이사장의 자부는 대단했다. 
  




구로가와 마을을 떠나 숙소가 예정되어있는 고코노에로 가는 길은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먼저 내린 눈이 길 여기 저기 쌓이기 시작했고, 혹시나 폭설이라도 내려
고코노에의 산마을에 갇혀버리지나 않을지 걱정스럽기도 했지만
규슈는 그래도 제주도보다도 훨씬 남쪽에 위치해 
그런 폭설을 걱정할 만치 추운 지역이 아니라는 사실을 재차 되새기며 위안을 삼았다.

1시간을 넘어 산길을 달린 끝에 도착한 고코노에마을은 저녁 어스름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거리는 온천관광지를 무색케할 만치 한산하고 고즈넉하기까지 했다.
우리의 숙소인 하나소우겐 호텔 역시 좁은 계곡에 위치하고 있어 버스가 임구까지 들어갈 수 없는
버스 도착에 맞춰 호텔 직원들이 짐을 싣어나르기 위해 대기하고 있었다.
친절한 호텔 직원보다고 더 우리를 반겼던 
'네오'라는 커다란 강아지가 기억에 남는 하나소우겐 호텔에서
 선대한 저녁식사를 받으며 규슈에서의 이틀째 여행을 마무리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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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초 일본 규슈를 4박5일동안 다녀왔다.
농업 선진지 연수라는 테마로 지역 주민15명 가량이 같이한 여행이었다. 후쿠오카에서 구마모토로, 아소산에서 쿠로가와온천으로, 그리고 뱃부와 유후인을 다녀왔다. 동선을 보면 관광여행처럼 오해하기 쉽지만 사실 각 관광지 인근의 농촌마을을 탐방하고 농촌관광과 관련한 일본 관광의 풍토변화를 느껴보기 위한 연수과정이었다. 

나에게 이번 연수는 난생 처음 해보는 일본 여행이었지만, 개인여행이 아니라 단체 연수라는 성격때문에 별반 설레임도 없이, 사전준비도 아무 것도 없이 무작정 따라갔다온 여행이 되어 버렸다. 그렇다고 여행이 재미없거나 무의미했다는 것은 아니다. 이국의 거리를 혼자서 걷는 가슴두근거리는 자유, 언어도 통하지 않는 낯선 나라에서 다음에 닥칠 난관이 무엇일지 모르는 그 불안한 설레임은 없었지만 그것 빼고는 다 있었다.

낯선 풍경과 풍물들, 낯선 사람들과 음식, 그리고 편안한 사람들과 낯선 세상을 여행하는 그 일체감같은 것이 주는 즐거움은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할 큰 기쁨이었다. 그리고 일본에서 돌아온뒤 몇일 지나지 않아 책을 한권 샀다.
그것도 다름아닌 [규슈100배줄기기]를!

기가 막힐 노릇아닌가? 진즉에, 일본으로 출국하기 한달쯤 전에 사서 달달 외우다시피, 책 모서리가  뭉개질만치 읽었어야 되는 책이 아니든가?

하지만, 여행이 끝나고 산 [규슈100배 즐기기]는 규슈여행의 새꿈을 나에게 가져다 주었다. 언젠가 (물론 그렇게 먼 미래는 아닐것이다) 조금 무리를 해서라도 규슈가족여행을 다녀오기로 마음 먹었다. 물론 시코쿠 순례로 이어지는 코스로 잡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연수와 여행이 다르고, 여행과 순례는 또 다른 차원이지만, 꼭 한가지 길을 떠난다는 점에서 똑같고 따라서 길떠나기 위한 준비가 필요하다는 점 또한 똑같을 수밖에 없다. 한정된 시간에 일정한 지역을 여행하는 여행객의 주관심사는 어떻게 보다 효율적으로 더 많이 보고 더 많이 경험하고, 더 깊이 느낄 수 있을까하는 점일 것이다. 물론 덤으로 더 싸게 그러한 여행을 즐길 수 있다면 더할 나위없이 좋을 것이다. 최소한 규슈여행에 국한 해서 본다면 이책 [규슈100배즐기기]가 이 모든 것에 대한 답을 담고 있다고 보아도 좋다.

너무 후한 평일까? 일정한 돈과 여권, 이 책 한권이면 규슈주민 같지는 않더라도, 전라도 사람이 경상도에 놀러오거나 경상도 사람이 함경도 쯤에 놀러간 정도의 긴장만 있으면 먹고 놀고 보고 즐기에 충분할 것 같다.
덧붙이자면 물론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희망사항인지 모르지만, 이 책이 내용을 아무 것도 버리지 않고도 조금 얇아지고 기벼워질 수 있지않을까는 생각이 든다. 하다못해 내용적으로 편집을 다시 해 그날그날 필요한 부분만 들고 다닐 수 있는 분권형태로 책을 만들었다면 더 좋았을 것 같다. 이 책을 들고 규슈를 돌아다닐 생각을 하니 드는 생각이다.

나는 참 욕심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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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1일부터 15일까지 4박5일간 일본 연수를 다녀왔다.
이번 연수는 경북 봉화군 명호면의 7개리로 꾸려진
청량산비나리권역 주민등 17명이
일본 규슈의 대표적인 농촌마을을 견학하며
마을 공동체 사업을 통해 마을을 활성화한 사례를
밴치마킹하기 위한 '주민역량강화사업'의 일환으로 진행된 것이다.
넉넉하지 않은 일정과 사전 준비부족으로 충분한 연수의 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적지않은 배움과 새로운 경험의 기회를 얻을 수 있었던
값진 여행이었다.
5일간의 여정을 나름대로 3번에 나누어 정리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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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수 첫날

5일간의 부재를 대비한 이런저런 정리와
여정을 위한 준비로 새벽1시가 되어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잠이 설핏 들자마자 핸드폰 소리가 울리고
억지로 몸을 일으켜 전화를 받고 시계를 보니 새벽 2시반,
새벽 4시에 명호에서 출발하기로 되어있는데
위원장님께서는 한잠도 못주무시고
동행할 각 위원님과 관계자분들께 전화를 한 것이다.

다시 이불속으로 기어들어가 얕은 잠을 자다가
3시30분이 되어서야 일어나 세수를 하고 집을 나섰다.
두어번의 유럽과 후주 여행의 경험때문인지 그리 먼길을 떠나는 기분도 들지 않고
또 긴 일정도 아니어서 전날 간단히 배낭을 꾸려놓았었다.
세수를 하고 옷을 입고, 전날 꾸려 두었던 배낭을 매고
출발지인 명호에 도착해보니 벌써 일행들은 도착해 있었다.
 모두들 들떠있는 모습이었다.

급한 인사를 나누고, 5일간의 즐거운 여행을 서로 축원하면서
버스는 눈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김해공항에서 후쿠오카행 아시아나 항공기는 10시 30분에 이륙하기로 되어 있었지만
눈길에다가 일본여행에 대한 설레임이 이른 출발을 재촉했다.
김해 공항을 30여분 남겨두고 청도 휴계소에서 이른 아침을 먹고,
공항에 도착하여 출국수속을 밟고 출국장에 들어서니
드디어 진짜 일본여행을 가긴 가는가보다는 설레임으로
가슴이 콩닥거리고 작은 긴장이 몰려왔다.

개인적인 여행이 아니라 일본 농촌사업을 벤치마킹하기위한
마을주민 연수다 보니 이번 여행의 목적은 사실 명확했다.
마을 사업 추진위원님들간의 유대와 단합의 계기가 되고
그리고 일본의 선진마을 사례를 통해
우리 지역공동체의 활성화를 도모한다는 것이
이번 여행의 목적이다.

그래도 이번여행에 거는 나의 개인적인 기대는 없을 수 없었다.
첫 일본여행이기도 하지만 일본에 대한 조금은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있었다.
2~3년전 와이프의 일본인 친구분들이 우리집에서 3일간 머문적이 있었고
그때나는 직접 그분들을 모시고 안동과 봉화지역을 돌며 안내를 했었다.
그리고 그분들이 떠나며 오사카 방문을 권유했고, 실제 와이프는
오사카 여성영화제에 초대받아 그분들의 집에 수일간 머문적도 있다.
그 이후 메일과 엽서 등을 통해 교류를 한 때문인지
일본이 세상 어떤 나라보다 관심이 가는 나라가 되어 버렸다.
     
꼭 그것때문은 아니지만 일본의 문화와 문물을 접하고
낯선 삶 속에서 익숙한 나 자신의 삶을 되돌아 보는
그런 여정이길 기대했다.

가깝고도 먼나라 일본이라지만
사실은 가깝고도 가까운 나라가 일본이었다.
김해공항을 이륙한 비행기는 겨우 40여분이 될까말까하는 사이
후쿠오카공항에 착륙을 시도했다.
긴 줄을 따라 입국심사를 받고 공항을 나와 후쿠오카 공기를 들이쉬며
바라다본 도시는 낯선 이국이 아니라
너무나 친숙한 풍경이었다.

한국인과 외모가 크게 다르지 않은 일본인들,
차, 건물, 도로 등 어느것 하나 이질적인 것이 없고 친숙했다.
그 친숙하고 다르지 않은 외양속에
또 얼마나 다른 점이 감춰져 있는지 알게 되는데는
그다지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나에게
결코 낯선나라가 아니라 친숙하고 또 친절한 이웃으로 남게 되었다.


 김해공항 출국장 풍경.
낯선 나라로 떠나갈 분들의 가벼운 발걸음과 새로운 세상에 대한 동경과
새로운 만남에 대한 설레임이 가득하다.

후쿠오카에서 첫 식사를 한 식당이다.
가벼운 소고기 구이와 기무치, 밥과 미소된장국으로 이루어진 식단은
깔끔하고 맛깔스러웠다.
이번 일행중 가장 어린 이웃 욱이 아빠가 폼을 잡고 있다.


첫 식사를 마치고 들런 모모치해안이다.
방조제를 만들고 바다를 메궈 땅을 넓혀나간 자리에
인공으로 모래사장을 만들고 공원을 만들었다고 한다.

모모치 모래사장에서 주운 사랑의 기원을 적은 조개껍질이다.
신년에 바닷가에서 조개껍질에 소원을 적어 바다에 던지는 풍습이 있는지 모르겠다.
사랑의 기원이 이루어지기를 축원하면서 바다로 돌려 보냈다.

첫날 두번째 방문지인 아사히 맥주공장.
공장견학을 마치고 맥주 시음을 할수있는데
일인당 3잔까지 맥주를 공짜로 마실 수 있었다.
뭐 별다른 맛이 있는 것도 아니고,
공장이 인상깊었던 것도 아니고
그냥 맥주 석장 얻어마시러 귀한 여행일정을 소비해야 하는지
의아스러웠다.

일본의 거리는 겉으로 보이는 깨끗하다는 인상보다 훨씬더
우리와 비교해 다른 점을 가지고 있었다.
일본인의 삶의 태도를 이루는 많은 요소들중에
차와 관련된 것만 한정해서 보고 부러워하거나 비난하는 일은 어리석은 일이겠지만
기본적으로 일본인의 운전문화는 우리가 많이 배워야할 것 같았다.
먼저 거리에서 쓰레기를 볼 수 없는 것은 물론,
차가 아무리 많아도 경적소리를 거의 들어볼 수 없었다.
그리고 정지선을 지키고 정지했을 때의 충분한 차간거리,
절대로 규정속도를 위반하지 않는 운전습관,
고속도로 규정속도가 시속 80KM라는 사실은 놀라울 정도였다.
일본 고속도로가 나빠서 규정속도가 작은 것도 아니고,
또 고속도록 규정속도가 작아서 일본의경쟁력이 뒤쳐지는 것도 아닐 것이다.
무엇보다 안전을 최우선시 하는 그들의 삶의 태도는
모든 가치를 다 내팽겨치고 오직 경제성장이라는 단일 가치를 향해 질주하는
한국사회에 어떤 메시지를 주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 일행이 4일간 타고 다닌 버스 기사님께
휴계소에서 아이스크림을 드렸더니
먹으면서 운전하면 불법이라고 하시면서
승객인 우리들의 양해를 구했다.
그뿐이 아니다.
도로가 갓길에 포크레인이 정지 작업을 하는데
프크레인 기사가 헬멧을 쓰고 작동을 하는 것을 보고
우리 일행은 모두 몰랬다. 한국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광경이라고.
거기다가 3방향에 각 1명씩 3명의 교통통제 요원이 포크레인을 감싸고
차량의 소통을 안내하고 있었다.
일본여행중에 안전과 관련된 그들의 철저한 준비 자세는
혀를 내두를 정도 였다. 참으로 부럽고 또 부러웠다.

구마모토에 도착,최고의 번화가인 '시모도오리(선로드)'를 1시간 정도 돌아봤다.
일본의 대중문화, 특히 청소년 문화를 접하고, 상가의 모습들도 불러볼 수 있었다.
이날은 일본의 공휴일의 하나인 성인의 날이었다고 했다.
거리마다 기모노를 입은 젊은 아가씨와 까만 양복의 청년들이
떼지어 몰려 다니는 것을 볼 수 있었는데
모두들 올해 스무살이 된 젊은이들이라고 했다.
일본의 성인의 날은 그해 성인이 되는 남녀가 기모노와 양복을 입고
성인식 같은 행사를 치루고 같이 파티도하고 의미있는 시간들도 가지는 그런 날이라고했다.

출국전 딸아이가 나에게 특별히 부탁한 음악 CD가 있었다.
"동방신기" 일본어로는 '토호신끼'라고 한다는데
언어도 안되는 낯선 타국에서, 그것도 단체 행동을 해야하는 와중에
CD를 구입하기는 쉬운일이 아닐것 같았다.
연수 이틀째부터는 본격적으로 산골마을을 돌아다니며
견학을 해야하기 때문에 딸아이가 부탁한 음악 CD를 사기에는 이날이
절호의 기회였다. 다른분들이 거리를 돌아다니며
일본인의 삶과 문화를 만끽하고 계셨지만
나는 오직 레코드 가게를 찾기위해 온신경을 모았다.
가까스레 레코드 가게를 찾아 과업을 완수할 수 있었지만
돈만있으면 손짓과 표정으로도 충분히 의사를 나누고
물건을 사고 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시모도오리거리를 산책을 마치고 일본에서의 첫날밤을 보낼 숙소인
시로가네호텔에 짐을 풀었다.

일본인의 친절에 대해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만
현지에서 느끼는 정도는 상상을 초월했다.

버스가 도착하는 시간에 맞춰 호텔 직원들이
문앞에 나와 있다가 우리를 맞고, 우리 짐을 버스에서 내려
호텔 로비까지 들어다주었다.

침실에 들어가니 차와 간단한 비스킷이 준비되어 있었고,
이는 일본 여행 내내 숙소마다 만날 수 있는 작은 것이지만
낯선여관이 아니라 편안한 내집같은 느낌을 주게되는
소중한 서비스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료칸(온천이 있는 여관)마다 '유까타'라는 전통 옷이 있었다.
온천을 하거나 식사를 할때, 료칸 내에서 마음대로 입고 다닐 수 있는
편한 옷이었다. 짐을 풀자마자 모두들 우카타를 입고 호텔 로비로 내려와
서로의 모습을 보고 웃고 사진을 찍으며 저녁 식사 시간을 기다렸다.
이번 여행 일행중에 여성은 딱  두분인데 한분은 봉화군 개발위원인 박여사시고
또 한분은 무리마을 사무장이다. 두분이 우카타를 입고 있는 모습이
잘 어울린다.

료칸에서 받은 첫 식사다.
일본식 정식이라고 하는 데 먹을 게 없어 보이지만 사실은
푸짐하고 맛깔스런 음식이었다.
남길게 하나도 없는 슬기로운 식단에 매료되어 일본 여행 내내
한번도 음식을 남기지 않고 그릇을 다 비웠다.
몇몇분은 일본 음식이 입에 맛지않아 미리 준비해간 고추장을 찾으시거나,
음식을 남기는 경우도 있었지만
적어도 나는 5일 내내 맛있는 식사를 할 수 있어 너무 행복했다^^*

호텔 객실은 다다미가 깔린 화실로 2인실이었다.
낡은 듯하면서도 깔끔한 객실은 
한국에서 들렀던 현대적인 모텔에 비해 훨씬더 아늑하고 
잠이 잘 올것같은 그런 방이었다.

호텔 방에 있는 침실내 구닥다리  TV다.
사실 TV뿐 아니라 료칸의 이런저런 물품이나
건물을 살펴보면 어느것 하나 낡지 않은 것이 없었다.
새것에 대한 우리의 집착과는 달리
일본사람들은 낡은 것에 대한 애착이 상당히 강한가 보다.
사실 료칸의 등급을 매길때도 얼마나 역사가 깊은 곳인가 하는 것을
제일 중요하게 고려한다고 한다. 

일본 여행 첫날의 밤은 깊어가자
몇몇방에서는 한국에서 가져온 소주파티가 벌어졌다.
하지만 일본에 와서 호텔방에서 소주나 마시고 있는다는 게
나는 도저히 용납이 안되어 호텔을 나섰다.
호텔 입구에는 우리 일행 두명이 나와 같은 생각으로
나와있었지만 마땅히 갈 것을 몰라 서성이고 있었다.
우리가 지내는 호텔은 조금은 외진 구마모토 시의 외곽에 위치한
때문에 사실 호텔 문을 나서도 갈 곳이 없었다.
택시를 불러 시가지로 나서기에는 두려움도 있었고,
또 첫날이다보니 어두컴컴한 호텔 주변 주택가를 산책만 하고 돌아왔다.

호텔 6층에 있는 온천에서 목욕을 하고 방으로 돌아오니
들뜬 마음이 가라앉으면서 밀린 피곤이 몰려왔다.
새벽부터 움직이다보니 전날 거의 잠을 자지도 못한데다가
항공여행이 주는 긴장감이 피로를 더했는가보았다.

일본 여행 첫날, 잘 보고, 잘 먹고, 온천 잘하고,
편안한 잠자리에 누우니 너무나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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