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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당을 나온 암탉](황선미저, 사계절출판사)을 읽고

동화는 기본적으로
"아이에게 들려주는 어른들의 이야기"이다. 동화는 어른들의 꿈, 어른들의 가치, 어른들의 세상살이에 대한 지혜가 담겨있다. 그렇다고 동화가 어른들의 세계만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 동화의 스토리는 항상 아이들의 세계에서 펼쳐지고, 그 이야기의 주인공은 물론 아이들이거나 아니면 아이들의 분신인 동물들이다.  그러면 동화는 어른들이 아이들의 세계를 빌어 아이에게 들려주는 싶은 내용을 전달하는 수단에 불과한 것인가?

물론 답은 '아니!'라고 하고 싶지만 부정적 대답 뒤의 수습에 자신이 없기 때문에 무척 머뭇거리게 된다. 최소한 동화를 만드는 사람은 어른이지만, 동화를 만드는 과정은 어른의 욕망을 아이에게 투영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의 세상에 어른이 참여하는 방식이어야 할 것이다. 물론 쉽지 않지만 말이다. 그래서 동화는 아이들이 이해할 만한 수준으로 어른들의 세상을 단순화해서 꾸겨 담은 당의정이 아니라 아이들의 눈으로 재생상된 아이들의 꿈, 아이들의 가치, 아이들의 세상을 담고 있어야 한다. 동화는 기본적으로 환타지여야 할 것 같다.

[마당을 나온 암탉]은 스스로 '잎싹'이라 이름 붙인 암탉의 일대기를 담고 있다. 잎싹은 양계장에서 산란계로 살고 있는 '평범한' 암탉이다. 하지만 평범한 산란계가 꿈을 가지자 비상한 '잎싹'이 된다. 양계장의 좁아터진 공간을 벗어나 햇볕을 받는 넓은 마당을 마음껏 뛰어 노는 꿈, 알을 낳자마자 주인이 거두어 가버리는 산란장에서 벗어나 자신의 알을 스스로 품어 보고 싶은 '불순한' 꿈을 가지자마자 잎싹의 가짜 '행복'은 끝나고 고난의 여정은 시작된다. 하지만 그 고난은 스스로 선택한 삶이 가져다 주는 축복으로 그 고난의 과정을 통해 진정한 삶의 가치, 생명이 주는 희열을 만끽한다.

이 책을 읽자마자 어른들의 세계, 내가 속해 있고 살아가는 세상, 생존에 발버둥치며 보다 많은 부와 권력을 갈구하는 개인들로 가득 찬 세상이 떠올랐다. 잎싹이 사는 닭의 세상은 정확히 3가지 삶의 부류로 구분된다. 노예로 살아가는 산란계와 마당에서 자유롭게 살아가는 닭들, 그리고 노예의 삶과 일상의 편안함에 안주하는 마당의 삶도 거부하고 자유의 꿈을 쫓아 위험 천만한 야생의 삶을 살아가는 잎싹의 삶이 그것이다. 세상은 지배하는 자와 지배 받는 자, 그리고 그 사이에서 반역을 꿈꾸는 혁명가가 있다면 잎싹은 금기된 것을 쫓아 고난의 길을 떠난 혁명가에 정확히 일치한다. 반성하지 않는, 반성하지 못하는 불임의 세상에 중독된 혹은 지배당하는 현대인의 삶은 양계장의 산란계가 아니면 출세한 마당닭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잎싹의 불순한 꿈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꿈을 이루는 도정에는 잎싹의 목숨을 쉬지 않고 노리는 족제비의 번들거리는 두 눈이 따라다닌다. 잎싹과 같이하거나 최소한 도와주어야 할 동료집단으로부터 따돌림 당하고 혹독한 야생의 조건에서 생명을 부지해야만 한다. 하지만 꿈이 있는 곳에 길이 있고,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잎싹은 또 다른 외토리 나그네 천둥오리를 만나 삶을 얻고, 알을 품는 꿈을 이룬다. 비록 스스로 낳은 알은 아니지만 입양자식을 가슴으로 낳은 자식이라고 하듯, 잎싹은 천둥오리가 남겨준 알을 품고 생명 창조의 희열을 만끽한다. 하지만 꿈을 이룬 잎싹의 삶은 달라지지 않는다. 여전히 족제비의 위협은 계속되었고, 외톨이의 삶은 변함이 없었다. 아니, 가슴으로 낳은 자식-'초록머리'조차 자신의 무리를 쫓고, 잎싹의 품에서 멀어져 간다. 그렇게 잎싹의 삶은 이어지지만 잎싹은 한번도 꿈의 허망함이나, 삶의 무의미에 빠지지 않는다. 비록 수만년전 잃어버린 비상의 꿈은 엄두도 낼 수 없고, 가슴으로 낳은 초록머리의 비상을 통해 대리 실현할 수밖에 없었지만 말이다.

"나도 가고 싶다! 저들을 따라서 날아가고 싶다.'

마침내 초록머리가 천둥오리의 무리를 따라 이국만리 먼 길을 떠나게 되고, 자신의 육신은 족제비의 먹이가 되기 직전 잎싹은 잃어버린 닭 종족의 영원한 꿈, 비상의 꿈이 자신의 가슴 깊이 자라고 있었음을 확인한다. 하지만 그 비상의 꿈은 족제비의 날카로운 이빨로 목이 꺽인 뒤에 빈사상태의 잎싹의 눈에 환영으로만 이루어진다

[마당을 나온 암탉]은 독자의 기대에 쉽게 타협해 해피앤딩으로 맺지 않았지만 결코 비극도 아니다. 차라리 다양한 꿈과 현실의 운동이 부딪히면서 빗어내는 복잡하고 현란한 교향곡 같은 세상살이의 진실을 드러내는 작품이다. 그렇지만 생뚱 맞은 의문은 남는다.

[마당을 나온 암탉]은 아이들이 좋아하는 작품일까, 아이들의 부모가 좋아하는 작품일까?    이 의문에 답하는 과정은 긴 공부와 깊은 생각을 필요로 할 것이다.

[마당을 나온 암탉]이 곧 MK픽처스 오성윤 감독의 손에 의해 애니메이션으로 출시된다고 한다. 애니메이션에 거는 기대를 안고 다시 읽은 [마당을 나온 암탉]은 왠지 모를 아쉬움이 있다. 세상과의 대비가 초래한 환타지의 부족이라고 하긴 나의 안목이 부족하지만 말이다. 하여튼 그 아쉬움이 애니메이션 작품을 통해 깨끗이 날아가 버릴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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