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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아이가 영화학과에 진학해서 벌써 2학년이 되었습니다.

그동안 영화를 얼마나 배웠는지는 알수 없지만

재법 겉멋도 들어가고 나름대로

영화를 이해하는 폭도 넓어진것 같기도 합니다.

한학기에 고작해야 두어번 만나는 것이 전부지만

가끔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을 때는

그래도 영화학도같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지난주에는 방학숙제로 5분짜리 영화를 직접 촬영한다고

스텝이며 배우며 8~9명을 이끌고 집으로 들이닥쳤습니다.

친구의 도움을 받아 카메라며 각종 조명기구 등

장비를 한 차 실어오고, 아역배우 조겨루 군(http://blog.naver.com/0504jij)

과 어머니, 그리고 저 연배의
배우 한분까지 모시고

2박3일의 촬영일짜를 빡빡하게 채워나갔습니다.



저 역시 딸아이를 돕느라고 늦게 도착한 일행을 봉화읍에서 싣어나르고

또 각종 소품을 조달하느라 나름대로 바쁘게 3일을 보냈습니다.

이웃으로 부터 낚시가방을 빌려오고

마을 식당에서 매운탕거리로 수족관에 받아둔

살아있는 물고기까지 몇마리 얻어서 소품으로 조달했습니다.

딸아이의 작업과정을 지켜보면서

저 역시 영화를 만들어 나가는 작업과정 자체를 즐기고,

영화에 대해 이해를 넓히고 사랑을 깊이할 수 있었습니다.



의외로 집요하게 원하는 장면을 얻기위해 열번 스무번 NG가 나도

지친 스텝들을 독려하고, 짜증난 아역배우를 달래서 다시 촬영하는

딸아이의 모습을 보고 조금 대견하기도 했고,

설사 결국 영화인이 되지 못하더라도

친구들과 같이 작업하던 지금의 그 순간들이

나중에 큰 추억거리이자

세상사는 지혜의 원천이 될 수 있을 것 같아 흐뭇하기도 했습니다.



특히나 20여년전 영화판에 있는 친구 덕분에

저가 유일하게 엑스트라로 출연했던 영화 [파업전야]에서

주요 배역을 맡았고 이후 많은 영화에 출연했던 배우 홍석연씨를

만날 수 있었던 점은 저에게 큰 행운이었습니다.

유명한 배우가 딸아이의 실험작품에 출연할 줄을 미처 생각지도 못했는데

처음뵙고 어디서 많이 뵌 분같아 골똘이 생각하다가

어렵게 어슴프레 기억을 되살릴 수 있었고

직접 여쭈어 보고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아뭏튼 지난 주말 딸아이의
영화 작업과정을 지켜보면서

잠시 덥고 습한 우기의 불쾌함을 잊고,

딸아이의 친구들과 아역배우 조겨루, 그리고 홍석연배우랑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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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학시인을 친구로 지내다보니 곁다리로 참 좋은 분들을 많이 만난다.
산을 탄다기보다는 차라리 산을 걷다가
적당한 곳에서 발길을 멈추고 그냥 산을 바라보고, 커피를 나누고,
담소를 나누다가 내려오는,
산 정상을 오르는 것에는 관심이 없는 분들과 함께하는  

가칭 '비정상산악회'라는 등산모임의 회워분들도 그런분들이다.
물론 그분들 중에는 미리 인연이 계신분들도 있긴하지만
안상학 시인을 통해 다른 차원의 친구가 되어가고 있다. 

그리고 지난 금요일 안동 정상동에 있는 반구정 마당에서
안상학 시인의 또다른 친구들과 인연을 맺었다.
시인과 친분이 깊은 가수분들을 모시고,
안동 지역사회에서 안상학시인을 아끼고 사랑하는 분들만 모여
작은 음악회를 연다는 연락이 왔다.
타이틀조차 '우리끼리음악회'란다.
안상학 시인이 지인이신 가수분들과 한 자리에서
'안동에서 하루놀자'는 말이 불씨가 되어 열게된 음악회란다.
 
우리끼리음악회에 초대된 '징검다리'의 가수 위대권님은
2004년 비나리산골미술관 개관식때 축하 노래를 해주셨고
부인이신 강미영님과 한께 징검다리라는 시노래패를 꾸리고 계신분이다. 
지금은 안동 정하동에서 라이브 카페 리코를 운영중이시다.
인디언 수니님은 광주5.18묘소에서 '님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는
동영상을 본적은 있었지만  이날 처음으로 공연을 보게 되었고
음악에 문외한이고 식견이 좁은 사람이다보니 '녹우'님은
이날 처음으로 알게되고
공연을 보게되기까지 되었다. 
모두 인연을 맺게 되어 고마운 분들이다.

저녁 7시 30분 안상학 시인의 인사로 시작한 음악회는
미리 짜여졌던 공연을 1부라 이름붙여 마무리하고
이어서 술과 음식을 나누며 담소와 노래를 나누는 2부로 이어갔다.
다시 새벽 1시를 넘겨 부슬비가 내리는 반구정 마당을
밤새 노래와 웃음으로 채우는 와중에 아쉬움을 남기고 먼저 자리를 떴다.

이날 녹우님의 기타소리에 혼이  빠지고,
인디언 수니님의 정열에 매혹되면서도,
안동의 가수이신 위대권강미영님의 징검다리가 노래를 부를 때
더욱 몰입이 되고 신명이 났다.

그래도 이날의 주빈은 역시 안상학 시인이었다.
다른건 다 몰라도 안시인은
얼마나 사람복이 있는 사람인지 확인할 수 있었다.

늘 행사때마다 지원에 나서고 이날도
구질구질한 뒷치닥거리를 마다않던 권경옥님, 권기혁님도 그렇고,
몸을 던져(!) 잔치판에 신명을 돋구던 박경환님 부부, 이정희님, 권두현님의
새로운 모습도 볼수 있어 너무 좋았고, 
조명을 지원해 주신 송봉근님, 찬조출연을 해 주신 김이난 가수 등도 
너무나 인상적이었다. 
다 베푼만치 거둘겄이지만 유독 안시인은
사람사는 멋 하나로 그냥 인심을 얻고 사랑을 받는 사람인 것 같다.

우리시대 시인이 어떤 존재인지 잘 모르겠지만
안시인은 구질구질한 삶을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같은 사람들을 대신해
호쾌하게 쌈빡하게 그리고 멋있게 살아주는 사람인 것은 분명하다.
최소한 나에게 안상학시인은 언어를 넘어 삶으로 먼저 말하는 예술가이다.
그것이 창작의 걸림돌이 아니라
작품의 밑거름이 되는 경지였으면 더욱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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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창식의 노래는 좌절된 꿈, 상처받은 자존, 나도 모르게 배게를 적시게 하던 알 수 없는 그리움이 아픔이 아니라 삶이 주는 달콤함, 생명의 환희임을 알게 해준다. 송창식의 노래를 들으면 나도 모르게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세상을 보는 눈길이 깊어짐을 느낀다. 송창식의 노래는 슬픔을 아픔이 아니라 기쁨으로 승화시키는 이상한 힘이 있다.  

가지고 있던  CD를 테잎으로 구워 근 10년을 넘어 운전대를 잡으면 늘상 틀어 듣고 중얼거리며 따라불러 오던 송창식이 언제부턴가 보고싶어지기 시작했다. 더 늦기전에...



오늘도 안동갔다 들어오는길 내내 아내와 같이 송창식을 들었다. 그가 부르는 노래는 듣기는 편안하지만 따라부르기가 왜이리 참 힘드냐며 투들거리며 집에 들어오자마자 미사리 어디에 송창식의 라이브까페 록시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오랜 세월전의 기억을 되살려 인터넷을 뒤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더이상 송창식의 라이브 가페는 찾을 수 없었다. 세상에는 송창식의 라이브를 들을 수 있는 곳이 없어 보였다.

그 순간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송창식은 나이가 얼마나 되었을까? 나보다 10년은 족히 더 되었으니 한갑은 넘었겠네 하고 아내와 이야기를 나무며 그와 나에게 주어진 세월의 여분을 생각해 봤다. 이러다가 결국 내 인생에서 송창식의 라이브를 못듣는거 아니냐며 포기를 하려했다.

그리고 다시 배경음악으로 사용할 송창식의 곡을 뒤적이다 세시봉 전국순회공연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반가운 마음에 이렇게 올려본다.
"세시봉친구들"이 올 연초부터 전국 순회 공연을 하고 있다. 트윈폴리오의 멤버였던 송창식, 윤형주 그리고 김세환이  MC 이상벽의 지행으로 공연을 펼치고 있단다. 어제 오늘은 안산에서 공연이 있고, 6월23~24일에는 대전에서, 7월1~2일에는 진주에서, 7월 8일은 서울에서 공연을 가진다는 사실이 웹서핑에 걸려들었다. 이렇게 기록에 남기고 게획을 세워본다. 입장료는 7만7천원에서 11만원정도다.

이번 기회에 공연을 보러가든지 그렇지 않더라도 다음기회가 또 있을 것같아 일단은 안도감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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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나리마을은 산과 강이 어울리는 마을이지만 또 옛것과 새것이 어울리고, 농업과 예술이 어우러진 마을입니다. 아직 시작으로부터 몇발자욱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올 여름이며 마을에 작은 커뮤니티 센타가 문을 열고  갖가지 인문학 강좌를 포함해 다양한 공동체 문화와 연관된 공연과 행사 등으로 마을이 붐비기 시작할 것입니다.

나름대로 마을공동체문화의 성지면서, 예술이 마을공동체와 결합해 마을의 삶을 풍부하게하는 작은 사례이길 도모하고 있는 비나리마을은 언제부턴가 다양한 예술가들의 발길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사진 동호회 회원들이 단체로 마을을 찾기도하고, 마을의 풍광을 캔파스에 담는 화가들의 발길도 이어집니다. 또한 마을과 예술의 건강한 관계를 도모하는 문화활동가들과 연구자들의 방문도 드물지 않습니다.  

지난 주에는 MB정권에 의해 저지러지고 있는 4개강 파괴현장을 답사나온 경희대 미대 학장님과 교수님 그리고 대학원생들, 그리고 개인적인 인연으로 함께한 예술인들이 마을을 찾았습니다.  이분들의 방문은 마을과의 인연으로 비나리마을 사업과 관련한자문위원을 수락해주신 김준기 대전시립미술관 학예연구실장님의 주선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예술이 마을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예술은 또 마을을 통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쉽지 않은 과제지만 삶과 예술이 함께해야하고, 상처 받은 삶이 날 것 그대로 드러나고 해체의 위기에 빠진 현장인 마을에 예술이 함께해야한다는 당위에 많은 분들이 공감합니다. 마을이  예술을 통해 다시 생명력을 되찾고 건강한 삶들이 붐비는 공동체로 거듭나는 일은 무척이나 어렵겠지만 최소한 마을을 이루는 작은 삶들이 보다 아름답고 풍부한 공간에서 삶을 영위할 수 있게 하는데 작은 기여는 할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렇게 예술이 마을의 삶을 가꾸어나갈 수 있다면 보다 많은 도시민의 발길역시 마을로  향할 것입니다. 예술을 통해 도시와 농촌이 어우러지는 또 하나기적이 일어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밤새 잔을 기울이며 마음과 생각을 나눴던 분들이 아침 일찍 또 다른 일정을 위해 집을 나섰습니다. 마을을 떠나는 길에 공사중인 마을커뮤티니 센타엘 들러 이렇게 주어진 공간을 어떻게 마을을 활성화하는데 기여할 수 있는 내용으로 채워나갈 수 있을지 '상상'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아직은 모든 것이 오리무중이지만 머지않아 이분 한분한분의 손길과 발길이 비나리마을에 사람의 발길이 늘고 사람의 향기기 잩어지는데 기여하는 날이  다가올 것입니다.  

예술가들이 찾는 비나리마을의 미래가 밝고 아름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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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전도사 박원순 변호사가 이웃 영양군에 있는 우리손산촌유학센타에 [상생의 농촌 마을만들기와 사회적기업]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강연을 왔다. 이번 강연은 희망제작소 창립 5주년기념으로 전국 50개 지역을 순회 강연하는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이루어졌다. 영양에서 지역활동을 하시는 분의 연락을 미리 받고 내가 사는 봉화군 지역사회에 이 소식을 전하자 명호면의 젊은 친구들이 자비를 들여 자발적으로 강연을 알리는 플랭카드를 만들어 달기까지했다. 그리고 오늘 명호의 젊은 친구들은 2대의 차로 나누어 타고 출발을 하고, 봉화자활센타에서는 아예 관광버스를 전세내어 50여명의 자활사업 참여자를 이끌고 영양으로 향했다. 


평일 오전에 열린 강연은 예상했던대로 참여가 저조해 봉화에서 간 사람들이 영양 주민들보다 휠씬 많은 것 같았다. 원래의 강연장소는 영양군청의 비협조로 우리손 산촌유학센타로 정해졌다가 봉화자활센타의 단체 참여로 영양성당으로 급히 변경되었다.  갑작스런 강연 장소변경에 따른 이유도 있을 것이지만 무엇보다 경북 북부지역사회의 정치적 낙후성도 영향이 있을 것 같았다.  박원순 같은 시민운동가에 대한 관의 시대착오적인 대우도 그렇고 지역주민의 대책없는 보수적 편향, 극우적 정치성향을 다시한번 느낄 수 있어  조금은 안타깝기도 했다. 그렇더라도 지역공동체활동을 하는 우리 지역사회의 낮은 주체적역량이 더 큰 문제일 것이다.


9시30분에 시작하는 강연에 늦지않기위해 8시에 비나리마을을 출발했다.  918번 지방도를 따라 봄농사준비로 기지개를 펴는 영양의 봄 언덕을 1시간여 달려 영양읍에 도착했다. 역시 남루한 농촌의 소도읍인 영양읍을 가로질러 강연이 열린 영양성당에 도착했다.  참 오랜만에 성당경내에 들어선 때문인지 카토릭신자였던 어린시절의 추억도 떠오르고, 또 종교가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사회에서 종교의 문제가 무엇인지, 그중에서도 가톨릭교회의 물량적 성장과 보수화에 대한 이런저런 생각도 들었다.  그래도 이렇게 영양군내에서 이런 일에 장소를 제공해줄 기관이나 단체가 성당밖에 없다는 사실이 고맙기도하고 씁쓸하기도 했다.  


대중강연이 다 그렇겠지만 강연의 내용은 평이하고 단순했다. 박원순씨 자신의 삶의 역정을 보여주며 어떻게 살것인가, 어떤 가치에 기반한 삶을 살것인가는 말씀을 이어나갔고, 그리고 '커뮤니티 비지니스'의 여러 성공사례를 들어 우리 농촌사회도 희망을 가지고 열심히 미래를 맞이하자는 내용의 강연을 이어갔다. 편안하고 친근한 화법,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내용... 박원순같은 대중활동가만이 갖는 자질이 부러웠다. 


한시간정도의 강연을 이어 질의 응답시간을 한시간 정도 가졌다. 중1아이의 어머니께서 아이 교육에 대한 질문도 하고, 희망제작소와 지역주민의 구체적인 연대와 결합방식에 대한 질문도 있었다. 그리고 '아름다운 방앗간'을 운영하는 명호의 나무아빠가  '정의'가 무엇인지에 대한 박원순씨의 생각도 묻다보니 11시조금넘어 강연은 끝이났다.


강연을 끝나고 성당 마당엘 나와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 단체별로 박원순님과 기념사진을 찍고 성당을 나섰다. 일터로 바삐 돌아와야할 형편이었지만 주체측에서 식당을 예약한 탓에 원하지 않는 8,000원 짜리 비빔밥을 억지로 먹고 오후일과를 위해 명호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오늘 강연에서 박원순님한테 하고싶었지만 주제와의 관련성때문에 하지 못한 질문을 생각해봤다. 박원순씨는 전 정부시절 정부비판에 날을 세웠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극단적인 반환경 반인권 반민주 반노동 정권인 MB정권하에서 오히려 비판의 빈도가 줄어든 것으로 알고 있다. 이런 상황은 혹시 최근 골몰하고 있는 '사회디자인'과 '정치'를 분리하여, 사회디자인의 고유 영역에 몰두하고 '정치'의 역할에 대해서는 회의를 갖고 있는건지 궁금했다.

그리고 저녁 시간 '희망제작소의 무상 인턴사원' 논란 뉴스를 접했다. 많은 논란거리가 있지만 나는 자식이 대학졸업후에도 부모로부터 생활비를 받아가며 인턴사원을 한다는 것에 대해 정서적으로 용납이 되지 않았다. 결국 '희망제작소'같은 비영리 사회단체에 인턴사원이 되기위해선 생활비 걱정이없는 부자집 자식이 되어야하는게 아닐까하는 생각때문이다. 비록 사기업과 다른 비영리사회단체일 지라도 자원봉사자와는 다른 인턴 사원에게 하루 5000원의 식비가 아니라 기본적인 생활비, 교통비, 용돈 정도는 주는것이 맞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선한 의지조차 지나치면 독선의 길로 빠지기쉽고, 내적 확신에 충만하다보면 타인의 작은 삶들을 보지못하게 되는 우를 범할 수 있는게 아닐까 쉽다.  
  
책으로만 접했던 박원순변호사를 가까이서 접하고 농촌에서 희망만들기에 대한 그의 생각을 듣는 시간을 가진 날, 나는 또 숱한 고민을 덤으로 안고 일터로 돌아왔다. 언제나 출발점에 머물러 있는 마을 사업도 그렇고 마을사업을 진행 하는 과정에서 갖는 나의 역할에 대한 진전없는 생각들도 꼬리를 물었다.

그래도 아직 일한 밭이 있고, 같이할 젊은 친구들이 있는 나는 행복한 사람이겠지?
또 삽이나 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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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8일부터 양일간 대구농업기술원에서 있은 정보화마을 프로그램 관리자 양성교육에 다녀왔다. 이번 교육의 주제는 화상채팅에 대한 실무적 이해와 그 활용이었는데 이는 올해부터 각 마을 정보센타를 다문화 가정을 위한 화상상봉 공간으로 활용하게 됨에따라 편성하게되었다고 한다. 

사실 마을 사업관련 교육을 자주 받다보니 이번에도 뭐 그렇커니 하고 기대를 하지 안았지만, 이번 교육에는 이전에 없었던 우리 사회에 진행되고 있는 아주 중대한 변화이기는 하지만 별로 깊이 생각해본 적이 없는 '다문화'에 대한 배움의 시간이 있었다. 강의록을 받아든 뒤에야 다른 강좌는 몰라도 이 강좌만이라도 한번 들어볼만하다고 생각했는데, 주제의 신선함에다가 강사의 열정까지 더해 근년에 보기드문 명강을 2시간넘게 몰입해서 들을 수 있었다.

먼저 강사는 장흔성님이라고 구미다문화가족지원센타 대표이다. 사실 너무 많은 내용을 이야기했고, 그 중에서는 쉽게 어떤 결론이나 대책을 말하기가 어려운 문제들도 많았지만 강의를 통해 배우게된 내용을 단편적으로 떠 오르는대로  정리해 본다.

먼저 강의는 다문화문제에 앞서 경북이 가진 문화적 특수성을 언급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강의에 따르면 경북이 전국에서 출산율이 최하위란다. 거기다가 경북이 다문화가정 이혼율에서도 전국 최고라고 했다. 강사께서 그 이유가 무엇일까를 묻자 대부분이 여성인 피교육자분들은 이구동성으로 '유교의 전통'때문이라고 대답했다. 경북에 살고 있는 한 사람으로서 그 부분에 대해 전적으로 공감이 갔다.

그리고 강사는 다문화 가정의 일반적인 양태에 대해 설명했고, 일부 가정이 정착에 성공해서 지역사회의 일원으로 잘 살고있지만 많은 경우 실패하는 이유를 여러 측면에서 설명했다. 제시된 많은 이유 중에는 각국의 문화에 대한 상호 몰이해도 있고, 한국 남성의 결혼에 임하는 준비문제, 한국 남성의 성차별 의식 등등을 제시했다.

새롭게 안 사실인데 한국의 일반적인 이혼남성의 거의 대부분이 재혼을 원하는 것과 달리 이혼 여성은 35%가 재혼을 하길 원치 않는단다. 그래서 남녀성별인구구성비의 차이보다는 결혼에 대한 남여의 입장차가 '신부'의 부족을 초래하는 측면이 더 크다고 한다. 강사분께서 이 부분에서 한국 남자는 왜 혼자살지 못하는가를 물었고 수강생들은 한국 남성은 혼자살 능력이 없기 때문이라고 대답했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결혼만족도가 남성과 여성 사이에 너무 현격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일단은 이런 이유로 한국의 많은 남성들이 결혼배우자를 구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한국정부의 노동력 보급정책, 출산율 제고 정책과 맞물려 드라마 등을 통해 부풀려 알게된  물질적으로 풍요롬고 낭만적인 한국사회에 대한 저개발국가 여성의 동경이 만나 이루어진 다문화  가정은 근본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강사는 동기에서의 모순이 꼭 비극적 결론을 필연적으로 동반한는 것은 아니며 사회적 관심과 교육이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임을 강하게 주장했다.

내가 이해하는 강의의 핵심은 국가가 사적 결혼에 개입해서 비극을 초래하는 정책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과 '다문화가족정책'이 '다문화정책'으로 변화되어 다문화 여성결혼이주자의 가족내 정착위주의 지원에서 한국사회에서 역할과 위상제고로 나아가야한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강사는 아직 일부 지자체에서 진행하고 있는 다문화 결혼 지원정책은 다른 형태로 바꿀것을 제안했고, 결혼이주여성의 한국사회내 위상제고를 위해 다문화 신부 대학보내기 운동 등을 전개해 나가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유엔인권위가 "정부주도의 인신매매"로 까지 비판하는 사랑이 전제되지 않은 인구정책, 노동력보급정책차원에서의 결혼 지원정책은 사적인 공간에 정부가 지나치게 개입하는 것으로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을 이야기 하지만  하지만 이들 모든 문제에 앞서 한국사회의 양성평등이 획기적으로 진전되어야 함을 역설하는 것 같았다.  

아뭏튼 이번 강의를 듣게 되어 가까운 이웃이 된 결혼이주여성을 어렵지 않게 대하게 된 현실에서 최소한 이웃의 한사람으로서 다문화가정을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서로 돕고 살아야하는지 고민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감히 몇줄로 정리될 수 없는 풍부하고 유익했던 강의에서 들었던  내용들을 두서없이 기록해 본다.

- 한국선원이 태평양 제도의 소녀성매매의 최대 고객으로 국제적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다.

- 베트남 , 필리핀 등에 한국인 현지처 등의 2세가 수만명 버려져있다.  

- 한국인 여성과의 재혼 4~5천만원이 든다. 다문화여성과의 결혼에는 1천만원정도가 들고 이마저도 지자체에서 50% 지원하는 경우가 많다.

- 사적인 결혼에 지자체가 개입하여 선심성지원을 함으로써 비극을 잉태한다. 결혼중개업소가 800여개되고, 정부가 결혼중개를 하는 것은 세계에 유래가 없는 일로 유엔인권위가 한국정부가 인신매매를 주도한다고 비판한다.

- 다문화가정의 50%가 기초생활수급자이고 평균 부부의 나이차는 17년이고, 전국 18만 결혼이민자 여성중 2만명가량이 현재 가출중이다. 다문화가정의 한국인 남성은 35%가 재혼이상이다.

- 결혼이주가 노예계약인 경우가 많다. 한국 국적취득에 3~4년이 걸리다보니 싫어도 참고 억지도 사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제도 개선을 통해 가정폭력이 가출의 원인이 될 경우 국적 취득에 제한이 없도록 조처한 뒤로 일부 개선되고는 있다.

- 60만 외국인 노동자 중 15만이 불법체류지만 외국인 노동자가 한국 사회에 주는 이익을 엄청나다.

- 외국인 노동자의 증가에 따라 나름의 매춘 시장이 형성되어, 결혼이주자의 가출문제가 또 다른 측면에서 문제가 된다.

- 몽골 GDP의 20%가 한국에서 송금한 돈이다.

- 다문화자녀중 40%가 중학교에서 탈락하고 고등학교에서 70%가 탈락 한다. 미국 하층게급의 고등학교 졸업률 30%와 거의 동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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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 영양군 수비면에 있는 [우리손배움터]에서 반가운 연락이 왔습니다. 우리 사회의 낮은 곳에서 새로운 공동체의 부활을 추동하는 희망제작소의 박원순 님을 모시고 같이 배우고 생각을 나눌 수 있는 자리를 만들었답니다.

이번 자리를 준비한 영양의 젊은 일꾼들이 부럽기도하고 고맙기도 합니다. 피폐해가는 농촌에서 삶의 터전을 지키며 희망을 만들어가는 지역의 젊은 일꾼들이 한분이라도 더 참가하여 좋은 뜻을 나누고 같이 배우는 자리를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마을만들기'를 설파하지만 너무 추상적이거나 관념적이라서 쉬 농촌 주민들에게 호소력을 가지지 못하고 있는게 현실입니다. 농촌 마을 밖에서는 마을만들기를 외치지만 정작 마을안에서는 반향이 없고, 생태나 환경에 대한 논의들도 마을안으로 파급되지 못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이유는 마을 안과 밖이 다르기 때문이기도 하겠고, 또한 그로인해 마을밖에서 마을에 바라는 요구가 현실성이 떨어지기 때문이기할 것입니다. 이런 갭을 해결하는데 박원순님의 오랜 경험과  지혜가 큰 힘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현재 진행중인 비나리마을 사업을 '사회적 기업'으로 발전시켜나가려는 전망을 세우고 있는 마을의 입장에서 본다면 다시없는 좋은 교육의 기회이기도 합니다. 가치지향으로나 실무적 지침으로나 큰 힘을 얻는 귀한 기회가 될 이번 강연에 경북 북부지역 시군의 농민들이 많이 참여하실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우리 봉화 명호지역의 젊은 일꾼들은 당일 강연이 있는 영양 수비까지 함께 이동하기로 하고 더불어 [박원순의 희망열차]에 우리의 작은 힘이나마 더한다는 의미에서 봉화지역에 2~3장 정도의 플랭카드를 우리 힘으로 제작해 게시할 계획입니다.

농촌! 농민들 만의 문제가 아니라 도시민을 포함한 모두의 미래가 달린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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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마을 네트워크]가 제천 대전리에 [마을 이야기 학교]를 펼쳐놓은지 아직 1년이 되지 않았는데 벌써 2번째 마을 기획전을 가진다고 했다. 오래전 시간이 멈춰버린 공간은 살려 마을주민의 발길을 모으고, 지난 겨울내내 주민의 열의를 모아 마을기획전을 마련했단다. 지난 토요일, [생전 처음]이라는 이름의 마을기획전이 궁금하기도 했고, 예마네 식구님들도 보고싶은 마음에 문경 사불암 걷기 모임에 갔던 길에 바로 대전리로 향했다.
 
오픈시간이 오후 2시로 잡혀있었는데 우리가 대전리에 도착한 것은 거의 오후 4시가 다 되었을 무렵이었다. 교정에는 예마네 대장이신 김정헌선생님께서 방송국 카메라앞에서서 인터뷰를 진행중이셨다. 눈인사만 나누고 전시가 열리고 있는 교실로 들어섰다. 이미 전시 오픈식은 끝났고, 이날 전시의 주인공이신 주민들과 손님들은 자리를 떠나고  없었다. 교실 한켠에는 오픈 상이 그대로 차려져 있었다. 다시 복도로 나와 전시 공간과 작품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복도에서 부터 전시를 펼친 한 칸의 교실에는 주민의 열정이 담긴 자화상에서 부터 풍경화, 그리고 겨울내내 공부했던 국어공부 영어공부의 흔적들, 그리고 입주작가의 도움으로  만든 돌 전각 작품과 이들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모습을 담은 사진들 그리고 그들 강좌에 참여하고 과정을 마쳤음을 증명하는 수료증까지 온갖종류의 작품들이 작은 공간을 빼곡히 채우고 있었다.  그야말로 생전 처음으로 붓을 들었고, 영어를 공부했고, 그리고 마을 행사의 주인공이 되신 주민들의 작품은 오래전 바로 그 교실을 채웠을 아이들이 일으켰을 소란과 열기를 되살려주고 있었다. 소박한 전시물들을 산만하게 배치하여 더더욱 지난 시간의 아이들이 북적거렸을 정감 넘치는 교실의 정서가 그대로 살아나는 듯 했다.

인터뷰를 마치고 들어오신 김정헌 선생님과 박명학선생님 그리고 송이양과 송이양의 친구와 함께 손님들이 다 떠난 오픈상에 둘러앉아 막걸리를 나누었다. 그동안 예마네의 활동에 대해 듣기도하고, 나의 비나리 마을 사업에 대한 말씀도 드리면서 잔을 나누다 보니 어느새 대전리분교 교정에 저녁어스름이 깔리기 시작했다. 교실을 나와 수리중인 교장사택을 같이 둘러보고, 해가 지는 교정의 풍경을 카메라에 담았다. 벌써 수리해서 숙소로 사용중인 교사사택에 다시 모여앉아 송이양 친구가 난생 처음으로 만든 돼지등뼈감자탕을 안주로해서 남은 막걸리를 비웠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마을 이야기 학교"는  작년에 만화가 한분이 입주하면서 상설화되었고, 그분들의 자발적 봉사로 주민과 함께하는 한글교실, 영어교실, 그림교실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겨우내 진행할 수 있었단다. 그리고 김정헌 선생님이 마을노인회에 가입한 이야기며, 예마네 식구들이 마을주민과 친해져가는 과정도 듣고, 또 도시이주민들의 친화력 부족과 주민과의 불화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작별을 하고 돌아오는 길 이런저런 생각들이 들었다. 이번 전시가 주민들에게 기쁨을 주고 쓸쓸한 마을에 활력을 불어넣는데 작은 충격을 주었을 것이지만 이날 전시가 있기까지 예마네 식구들을 비롯한 많은 분들의 열정과 희생이 요구되었다. 생활근거지인 서울에서 계속 오고가며 길에서 보낸 비용과 시간도 그렇고, '대중문화활동'이 가지는 작가의 개인적 작업과의 괴리를 감수해야하는 부분도 보통 부담스러운 것이 아닐 것 같았다.

아직도 교사는 자비를 들여 수리가 진행중이었고,  젊은 만화가 한분이 아예 입주를 해서 생활을 하는 바람에 그나마 학교가 상시 오픈되고 온기가 유지될 수 있었지만 겨우내 시설 여기저기는 동파라는 피해를 피해갈 수 없었다. 그리고 일부 공모에 참여해 기금을 받기도 했지만 산출없는 마을사업에 지속적으로 자비를 투여해야 하는 점도 마을과 문화예술인의 관계맺기를 가로막는 큰 장애로 작용할 것 같았다.  

사실 마을과 예술가의 관계맺기를 도덕적 차원, 예술가 혹은 지식인의 의무라는 차원에서 요청하기도 하지만 현실적으로 모범적 사례를 도출하기가 쉬운 일은 아니다. 잘 알려진 몇몇 예술가의 경우를 보아도,  20여년을 넘어 마을에 정착해 작업하면서 마을공동체와 호흡을 같이하려는 부단한 노력을 진행해 왔지만 성과는 더디고 삶은 너무 힘든 경우가 대부분이다. 사실 예술가가 살아가기에는 마을에 예술가가 숨쉬고 살아갈 삶의 공간이 쉬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기도하고, 또 예술가 자신의 문제도 없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삶 전체를 싣는 '마을로의 이주'를 결행하지 않고도 물론 다양한 결합방식이 있고, 이것이 보다 현실적이기도 할 것 같다. 그렇지만 이 경우는 또 마을이 대상화되고, 작가의 의도가 일방적으로 투영되거나, 외부에서 마을에 일시적으로 투입된 문화 예술적 자원이 마을과 어떤 트러블을 일으키기가 쉬울 것같다. 마을이 '작업'에 이용되기만 하고 마을주민이 향유하기에 너무나 거리가 먼 '예술'이 될 수도 있기때문이다. 그렇지 않더라도 '생활'속에 들어와 삶속에 녹아들지 않는 이벤트성 문화예술 '행사'는 마을에 활력을 증진하는 긍정적 변화를 추동하기에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을 것 같다.  

어쨌던 예술가가 마을과 함께 살아가면서 마을 공동체에 문화예술의 향유기회를 넓혀나가고 궁극적으로는 마을이 활기가 넘치는 사람 사는 공간으로 거듭나게하는데 참여하기 위해서는 나름의 생존방식과 관계형식을 창출해야하는 과제를 더불어 짊어지고 나가야하는데 이는 사실 작가 혼자 감당하기에는 너무 무거운 짐이기도 하다.

사실 예술이 무엇이고, 예술마을은 또 뭔지 잘 모르겠다. 예술이 마을주민의 관심사가 전혀 아니기도하고, 예술마을이 예술인의 동호인 마을이 아닌다음에는 입주한 작가에게 너무 큰 부담으로 과제가 부과되기도 하기에 쉽게 예술마을을 주장하기에는 두렵기도 하다. 궁극적으로는 주민 모두가 예술을 향유할 수 있는 마을을 넘어 주민모두가 예술가일 수 있는 마을공동체를 꿈꾸지만 맑스가 말한 "노동자 농민이 동시에 예술가이지 철학자인 세상"의 꿈만치나 요원하기만 하다. 그래서 아직은 공동체 문화활동가는 외로운 혁명가일 수밖에없고 그러다보니 예술마을은 [예술마을네트워크]로  조직화되어야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참 값지고 의미있는 일이지만 또한 힘든 길이기도한 [마을예술네트워크]의 활동에 큰 성과가 있기를 발고 미력하나마 그들이 가는 길에 한발 걸치고 뒤따라라도 갈수 있도록 노력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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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살다보면 어느 순간 자신의 삶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사물의 색이 바래고 자신의 삶을 이끌던 의미 혹은 희망 같은게 하잖아 보이게 되는 때가 있을 것이다. 사실 요즘 내가 그랬다.대충 살아 온 시간들,  확 늘어버린 나이, 불투명한 앞날... 거기다가 앞으로 살아갈 동안 의지할 수 있는 돈도 재능도 사람도 가지고 있지 못한 빈털털이라는 사실까지 어느 것 하나 위안을 얻을 곳이 없었다.

그렇게 내 삶의 가치, 가능성, 의미는 이미 바닥을 드러냈고 사람에 대한, 세상 모든 존재에 대한 신비감마저 잃어버리고 어쩌면 삶이 다하는 그날 까지 이렇게 무료하고 무의미하게  하루하루 늙어가야하지 않을까하는 무력감에 시달렸다.

그러나가 지난주 분명 일탈일 수 밖에 없는 여행을 떠났다. 그것도 결혼20주년을 핑게로, 멀리 규슈까지. 이런저런 즐거움과 행복감 충만한 시간들도 있었지만 이번 여행의 가장 큰 수확은 생각지도 않은 유후인의 화가 東 勝吉(ひがし かつきち)과의 만남이다.


東 勝吉은 오이타 현에서 1908년에 태어나 유후인에서 2007년에 돌아가신 분이다. 그를 유후인의 화가라고 칭하는 이유는 그의 노후를 보내고 영면한곳이 바로 유후인의 노인요양원인 '온수원'이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그의 화가로서의 활동이 바로 그 유후인의 '온수원'에서 시작되었고,  작품의 전부가 이루어졌고, 또 평가 받았기 때문이다.


여성이 좋아한다는 이유로 찾은 유후인에서 아내와 딸과 더불어 하루 낮을 보내고 하루밤의 사치를 위한 료칸의 송영을 기다리는 시간, 한기를 피하고자 유후인 역사의 대기실 같은 작은 홀에 들어섰다. 30여평의 홀의 사면에는 수준이 고르지 못한 다양한 그림들이 걸려있었고,  그림 한점한점을 한참을 둘러보다가 그 그림들이 83세 이상의 노인들이 그린 그림이라는 사실을 알고  깜짝놀래기도 했다. 하지만 더 놀라운 사실은 바로 그 전시회가  바로 유후인이 낳은 어떤 화가를 기념하기위한 정기 공모전이었고, 그 화가는 다름아닌 83세에 첫 붓을 잡은 東 勝吉이라는 분이라는 사실이었다.


東 勝吉은 가난하고 힘든 삶 끝에 78세에 유후인의 노인보호시설인 '온수원'에 입소하고 83세가 되어서야 평생 처음으로 붓을 잡았다고 한다. 그리고 89세에 바로 그 유후인 역 홀에서  첫 전시회를 가지고 2007년 99세에 숨을 거두기 까지 작업에 몰두 했다고 한다.

나는 사실 그의 작품을 예술적으로 평가할 재주가 없다. 하지만 나의 눈에 비친 그의 작품은 어느 프로 작가의 작품들보다도 뛰어나게 아름다왔으며 감동적이었다. 나는 그의 삶과 예술에 대해 여행 내내 곱씹어 떠올릴 수 밖에 없었다. 그는 자신이 가진 재능을 83년 동안 고이 간직하고 살아왔으면서도 그전에는 그 사실을 전혀 느끼지 못했을까? 예술은 후천적인 노력보다는 천부적인 재능이 더 중요할까? 화가가 되고 싶은데 타고난 재주가 없어 예술이라는 병을 평생 앓아야만 하는 사람은 불행할까, 아니면 불가능한 꿈이나마 가지고 살아가니 행복하다고 해야할까? 그가 노년에나마 화가로서의 자신의 삶을 불사를 수 있었던 것은 일본의 노인 복지 시스템 덕분이겠지? 건데 어떻게 예술교육이라곤 한번도 받아본 적이 없는 사람의 붓에서 저런 색이, 저런 선이, 저런 조형미가 탄생할 수 있었지?  끝없는 상념들이 꼬리에 고리를 물ㄹ고 일어났지만 정작 더 중요한 사실은 사람들은 자신도 인식하지 못한 재능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고, 그 가능성의 실현 여부를 떠나 하나의 삶이 가진 가능성의 존재 자체가 그 삶을 이끄는 힘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그를 통해 느끼게 된 것이다.
거의 모든 삶은 자신이 가진 가능성을 고히 간직하고 무덤속으로 가져가버리겠지만 하여튼 바닥나지 않는 가능성의 영역안에 자신의 삶이 놓여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은 참 중요하지 않을까. 내가 東 勝吉을 알게 되고 기쁘하는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다. 이제 쉰이다, 희망을 갖자!

http://www.yufuinartstock.com/ARTSTOCK.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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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한해 비나리미술관은 마을 아이들을 중심으로 멀리 안동, 영주 어린이들도 참가하는
'미술체험' 수업을 진행해 왔습니다. 많게는 30여명의 어린이들이 부모님, 마을 공부방 인솔선생님과 함께 매주 토요일 오후를 비나리미술관에 모여 그림을 그리고 신나게 뛰어놀았습니다.
벌써 올해로 5년째, 처음 미술관 수업에 참가한 마을 어린이들이 지금은 자라 고등학생이 되기도했고, 그 때 막 태어난 아이들이 자라 지금은 미술관에서 같이 수업에 참가하고 있기도 합니다. 지난 5년 작지 않은 세월이지만, 언제 지나갔는지 세월은 그렇게 또 후딱 지나가 버렸습니다.

연말이 되면  지난 세월을 추억하고 정리하면서 한편 새로운 한해를 맞을 마음을 준비하게 됩니다. 비나리미술관은 매년 이맘때가 되면 작은 마을 전시를 열고 주민이 함게 모여 지난 한해서로의 노고를 격려하고  새로 맞을 한해의 꿈을 나누는 자리를 가져왔습니다. 첫해에 마을아이들의 전시를 시작으로 마을주민전시 등을 열어왔는데 올해 다시 마을 아이들의 전시회를 열어 주민이 함께 하는 조촐한 잔치를 가졌습니다.

구제역 한파로 지역사회의 모든 행사가 취소되고, 사람들의 왕래조차 줄어든 사정으로 외부 손님 초청없이 마을주민과 아이들만 참가한 소박한 자리였지만 풍성한 음식과 넉넉한 인심으로 즐겁고 정이 넘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사람도 줄고, 희망도 줄고 남아있는 삶들은 날로 팍팍해져 가는 산골마을에서 소박한 '미술교실'하나가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지만, 그나마 마을 젊은이들 사이에 작은 유대를 형성하고 그 유대를 토대로 작은 꿈들을 공유해 나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 불가능한 꿈의 한자락에서 비나리미술관이 내년 한해 지역사회의 작은 사랑방으로 사람의 발길이 늘고 활기가 넘쳐나면 좋겠습니다.
 
지난 한해 수고하신 만형이 어머니를 비롯한 공부방 선생님들, 봉화자활센타 관장님, 그리고 이날 잔치를 준비하신 학부모여러분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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