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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트만두에서 보낸 첫 삼일은 휴식의 시간이었다면 마지막 4일은 지난 두달의 여행을 되돌아보고 기억의 창고 한켠에 차곡히 정리하는 시간이었다. 타멜거리를 또박또박 걸으며 곧 떠나게될 네팔에 대한 절절한 사랑을 추스리고 귀국한뒤 새로 시작할 한국에서의 생활을 위해 마음을 다잡았다.    

안나푸르나 라운드를 마치고 먼지투성이 카트만두로 돌아온 뒤 가벼운 몸살기가 계속 이어졌다. 그래도 하루하루 아무 망설임없이 카트만두로 돌아온 지난 몇일을 알차고 신나게 보냈다. 숙소와 타멜 거리를 오가고 스와얌부나트와 더바르광장, 그리고 아산바자르의 골목을 누볐다. 타멜 최고의 슈퍼마켓인 Shop Right Supermarket과 Pilgrims Book house도 들락날락거리며 기념품을 사기도 하고 구경도 했다. Pilgrims Book house는 서점이지만 동시에 머플러나 직물제품을 비롯한 각종 기념품을 갖추고 있었다. 카트만두에 체류한지 몇일이 지나자 나는 골목 구멍가게에서 야채를 사고 내가 필요한 물품을 어디를 가야 구할 수 있는지 대충 파악이 되었다. 나는 나 자신이 카트만두 시민이 다 되어감을 느꼈다. 

22일은 하루종일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숙소에서 빈둥거렸다. 일단 몸살기를 가라앉힌뒤 움직이는 것이 낮겠다고 판단했다. 그러다가 저녁이 되자 일행들과 같이 숙소를 나서서 타멜을 거쳐 다시 스몰스타를 찾았다. 뚱바가 그리워서가 아니라 남은 네팔에서의 시간이 아까워서 저녁시간을 숙소에서 그냥 보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우울한 표정의 종업원이 날라다 주는 안주와 뚱바를 앞에 두고 나도 모르게 손이 갔다. 하지만 몸은 이미 술을 받아들이기에 너무 지쳐있었다. 뚱바 한잔에 복통과 현기증에 오한까지 왔다. 겨우겨우 몸을 추스러 숙소로 돌아왔지만 몸살은 더 심해져있었다. 이날 하루 어떻게 보냈는지 단 한장의 사진도 남기지 않았다.  이상하게 이번 두달의 네팔 여행중에 꼭 카트만두에서 탈이 났다. 여행 초기에 식중독으로 고생하더니 여행 막바지에 다시 심한 몸살까지 앓게 되었다. 카트만두 먼지에 내 몸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역시 나는 산체질인 것 같았다. 몸이 무너지니 한국이 그리워졌다. 이제 돌아가도 미련이 없을 만치 걷고 먹고, 만나고 웃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23일 몸살에 지친 몸을 이끌고 타멜로 나섰다. 네팔 고유 브랜드라는 가게에서 티도 사고 재래식 옷가게에서 네팔리 스타일의 편안한 일상복도 한벌 샀다. 발길을 옮겨 타멜의 남쪽 골목 어딘가를 걷고 있는데 군악대의 연주소리가 들렸다. 음악 소리를 찾아 도착한 곳에선 거리의 악단이 연주를 하고 있었다. 상황을 보니 부유한 집안의 혼사가 있는 모양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꽃으로 장식한 차가 나타났다. 하지만 나에게는 오직 나를 위한 특별한 이벤트로 다가왔다. 여행이 끝나감에 따라 몸도 지치고 나도 모르게 조금은 우울해지기 시작했는데 악단의 연주를 보고 듣는 순간 내 몸과 마음은 갑자기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내 몸에서 다 빠져 나가 버린 기운이 다시 돌아오고 한없이 가라앉았던 기분도 풀리기 시작했다. 훈풍에 구름이 가쉬듯 나는 두달여정을 3일 남겨두고 내 자신에게 삶의 에너지가 충만해져옴을 느꼈다. 조금은 낡은 제복을 입은 단원들의 진지하고 신명이 넘치는 연주는 엉뚱하게도 나 자신의 삶에 대한 태도를 되돌아보게 했다. '초라할지언정 진지함을 잃지 않고 나름대로 신나게 살자'고 읊조리며 나는 발걸음을 옮겼다.   

타멜 산책을 끝내고 5년전 추억이 깃든 꿈의 정원을 찾았다. [Garden of Dream]은 타멜쵸크에서 나라얀히티 왕궁박물관쪽으로 가는 길 왼편에 높은 담으로 둘러싸여 있는 이질적인 공간이다. 오래전 개인이 꾸민 저택과 정원이 우여곡절 끝에 공공의 소유가 되고 다시 시민의 휴식처로 개방된 유료 정원이 되었다. 역시 산책중인 외국인 관광객은 몇명 되지 않았고 대부분의 손님들은 데이트중인 네팔리 청춘들이었다. 그래도 화구를 펼쳐놓고 작업중인 서양인 할아버지의 모습이 가장 멋졌다. 우리는 정원 산책 끝에 내부에서 운영중인 레스트랑의 가장 좋은 야외 테이블을 차지했고 아내는 펜을 꺼내고 스케치북을 펼쳤다. 카트만두의 중심부에 있으면서 카트만두의 소음과 먼지와 단절된 이색적인 공간에서 식사를 하며 아내와 나는 지난 여정의 추억을 음미했다. 이만치면 되었다는 안도감 혹은 포만감을 느끼면서도 눈을 감으면 마르샹디와 깔리깐다키 줄기가 어른거리고 설산에서 피어나는 흰구름처럼 뭉개뭉개 그리움이 피어올랐다. 모든 걸 버리고 줄여야될 나이에 자꾸 그리움이 늘면 큰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돌아온 숙소에서 내일이면 라오스로 떠날 팟상을 위한 삼겹살파티가 열렸다. 네팔을 같이 사랑하고 같은 숙소에 지내는 인연을 나눈 분들과 함께 자리를 했지만 나는 술한잔에 나가 떨어져 룸으로 올라와 침대로 기어들었다. 낮에 살아났던 몸이 밤이 되자 다시 무너져 내렸다. 나의 몸 상태와 무관하게 다음 날이 시바신의 탄신일로 시바라티 축제가 열린다고 했다. 룸의 창문을 흔드는 축포소리와  상공을 화려하게  수놓는 불꽃놀이가 카트만두의 밤을 잠들지 못하게 했다

 

2월 24일 시바라티축제가 있는날 팟상은 라오스로, 나의 일행 M과 D는 한국으로 떠났다. 갑자기 마야거르추에 정적이 감돌았다. 원래 여행은 이렇게 좀 쓸쓸해야하는 법이라고는 하지만 갑자기 닥친 공복처럼 견디기 힘들었다. 시바라티축제가 열리는 파슈파티나트로 가기 위해 숙소를 박차고 나왔다. 골목을 벗어날 무렵 한무리의 아이들이 줄로 길을 막고 우리가 지나가자 손을 내밀며 무언가를 요구했다. 처음에는 상황파악이 안되어 당황했는데 이날 하루 종일 걷다보니 이런 아이들을 수도 없이 만나게 되었다. 알고 보니 시바 탄신일 날에만 허용되는 일종의 전래놀이로 아이들이 길을 막고 어른들에게 통행료를 요구하는 것이었다. 아이들은 일년 365일중 이날 하루만이라도 세상의 모든 골목이 우리들의 것임을 선언하는 셈이었다. 골목을 지키는 아이들은 지나가는 사람뿐 아니라 오토바이든 택시든 마구잡이로 단속(!)했고 대부분은 아이들에게 져주는 것으로 보였다. 나중에는 우리도 가게에 들러 아이들에게 나누어주기 위해  잔돈을 한주먹 바꾸어 주머니에 넣고 다녔다.    

 

큰길로 나서니 공휴일이라 그런지 거리가 한산했다. 쉽게 택시를 잡고 축제가 열리는 퍄슈파니나트로 갈 것을 부탁했다. 생각보다 비싼 흥정끝에 택시는 곡예하듯 대로를 피해 골목과 골목을 이어달렸지만 끝내 파슈파티나트에 도달하지 못했다. 목적지의 절반을 겨우 넘겨 군경에 의해 교통은 완전히 통제되어 있었고 파슈파티나트로 향하는 모든 길은 차없는 거리로 축제장으로 변해 있었다. 그래도 택시비는 출발전에 흥정한 데로 다 받아갔고 우리는 축제를 즐기는 네팔리 무리에 휩쓸려 파슈파티나트로 향했다. 하늘에는 헬기들이 축하 현수막을 늘어트리고 비행 중이고 파슈파티나트가 가까워질수록 인파는 불어났다. 역시나 경찰들의 거친 단속이 눈쌀을 찌푸리게 했지만 기념품이나 먹거리를 파는 노점상들도 전국에서 다 모여든 것처럼 엄청난 수로 늘어났고 그 종류도 다양해졌다. 네팔은 물론 멀리 인도서까지 모여들었다는 사두들의 무리도 보이기 시작했다. 축제에 참여하기 위해서 모여든 순례객들의 차림을 보니 그들에게 종교가 얼마나 절실할 것인지 저절로 느껴졌다. 많은 순례객들이 거리에서 노숙을 한듯 집채만한 이불보따리를 길가에 쌓아두고 있었다. 시바신의 탄신일을 축하하기위해 노숙도 마다않고 먼길을 달려온 것이 분명했다. 

 

 

이날 비힌두교도에게는 파슈파티나트 입장을 허용하지 않는다고 했다. 우리는 파슈파티나트로 들어가는 입구의 도로까지만 네팔리 무리에 섞여 축제를 즐기고 되돌아섰다. 축제장을 벗어나기 위해 한참을 걸어 그나마 인파가 적은 가게를 찾아 네팔식 스넥으로 점심을 해결했다. 그리고 다시 걷다보니 카트만두 최초의 대형 수퍼마켓이라는 Bhat Bhateni에 들러게 되었다. 구경도 하고 장을 보고 숙소로 되돌아왔다. 식욕이 있고 출국일이 좀 더 남았다면 바구니 가득 장을 봐서 맛난 요리를 싣컷 해 먹고 싶었지만 조금 샀던 식재료도 결국 다 못해먹고 귀국길에 올라야 했다. 그래도 네팔에서의 마지막 장을 보고 숙소에서 하루의 남은 시간을 조리와 식사 그리고 휴식으로 보내고 그리고도 남는 시간에 귀국을 위한 짐을 싸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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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7일 네팔 들어온지 한달이 지났고 새로운 한달을 안나푸르나 라운드로 시작하기 위해 길을 떠나기전 하루의 여유를 카트만두 여러 곳을 둘러보는 것으로 보냈다. 28일 버스로 베시사하르까지 가서 바로 걷기를 시작하여 불불레 지나 라디바자르에서 라운드 첫 밤을 지냈다.  


아침에 눈을 뜨니 비가 내리고 있었다. 건기에 내리는 비는 축복이라고 했다. 대기의 먼지가 씻기고 마야거르츄의 마당은 촉촉히 젖어들었다.  우리가 걸을 길들 역시 먼지가 가라앉고 적당히 젖어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니 기분이 좋아졌다.  내일이면 우리 부부는 M과 D와 함께 안나푸르나 라운드를 떠나고  미리 와있던 L은 귀국길에 오르니 모두가 같이 하는 이날 하루가 더없이 소중했다. 일행이 늘어 택시 한대로 움직일 수 있는 규모를 넘어서다보니 2대를 부탁했다. 파슈파티나트로 향했다. 



카트만두를 찾는 방문자들이 꼭 들러야 하는 곳 중의 하나가 Pashupatinath다. 파슈파티나트는 네팔에서 가장 유명한 힌두교 사원으로  멀리 인도서까지  순례자들이 찾아 오는 곳이라고 했지만 우리에게는 노천 화장의식을 하는 하는 곳으로 더 알려져 있다. 사원과 일체를 이루고 있는 화장장인 아라 갓(aarya ghat)은 파괴의 신인 시바신의 화신인 파슈파티(야수의 왕)에게 받쳐진 사원의 한 부분일 뿐이다. 핵심적인 사원내부만 비힌두교도에게 입장을 금지하고 있지만 거의 날것 그대로의 흰두 예식과 화장 의식을 접할수 있는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중의 하나다.

 

 

택시에서 내려 일행을 찾는 동안 가는 비가 보도를 적시고 있었다. 비둘기떼의 어지러운 날개짓과 비가 만나니 파슈파니나트의 풍경이 더 스산해졌다. 1인당 천루피의 입장료를 내고 사람들의 흐름에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몇걸음 걷지 않아 갑자기 군인들이 다가와 나의 걸음을 막아섰다. 아무 생각없이 힌두교도만 들어갈 수 있는 사원 입구로 향하다 군인으로부터 제지를 받은 것이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방향을 바꾸어 허용된 구역 안으로 들어서니 말라가는 바그마티강과 강변의 화장터가 눈에 들어왔다. 오직 하나의 화장터에서만 마지막 불꽃이 사그라들고 있었다. 오늘은 또 어떤 사연을 간직한 삶이 지상에서 그 삶의 마지막 흔적을 지우게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구구절절한 이야기를 듣지 않아도 한명의 삶이 가졌을 모든 순간들의 희열과 고통, 그리고 그의 마음을 채웠을 그리움과 공허가 물밀듯 다가왔다.  그리고 죽음을 바라다 보는 산사람들의 마음에 피어오를 만가닥 상념의 소용돌이가 느껴졌다. 



바그마티 강을 건너  시바신에게 받쳐졌다는 Pandra Shivalaya라는 탑들 사이를 걷고, 강가의 둥근 반석위에서  의식을 치루고 있는 사람들의 처진 어깨를 바라다 보다 가파른 계단을 올라 동산의 정상에 올랐다. 동산을 이루고 있는 므르가스탈리 숲을 가로지르는 길은 한치의 틈도 없이 사원과 탑들이 빼곡히 채워져 있었고, 탑들마다 시바신이 타기를 기다리는 Nandi의 궁둥이가 우리를 반겼다. 비맞은 원숭이가 추운듯 서로 엉켜 웅크렸지만 낯선 방문객을 마득잖은 눈으로 바라단 볼 때는 주인의 위엄이 느껴졌다. 하지만 비에 젖은 Prasad(신전에 받치는 음식)를 주워먹을 때의 눈빛은 혹시나 낯선 인간들에게 나의 몫을 뺏기지난 않을까는 초조함과 비루함을 담고 있었다.  삶은 존엄과 비천 사이에 두루 걸쳐 있는 것! 그점은 모든 생명에게도 해당할 것이기에 우리는 늘 겸손해야하는 지도 모르겠다. 



북동쪽으로 방향을 잡아 동산을 내려오니 시바의 아내 Parvati의 자궁이 묻힌 자리에 세워진  Shree Guhyeshwori Temple이 있었다.  이 사원은 불임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임신을 축원하는 유명한 사원이라고 했는데 지난 지진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공사가 한창이었다. 사원을 지나 바그마티 강을 건너니 한적한  주택가가 이어졌다. 그리 멀지 않은 거리라 6명의 일행은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었고 아무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얼마나 걸었을까? 대로를 벗어나 골목으로 접어든뒤 혹시라도 길이 어긋날까 일행을 기다렸는데 결국 와이프가 보이질 않았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고 길이 갈라지는 지점에서 다른 길을 택해 달려가 보았지만 하늘로 솟아는지 만날 수 없었다. 하지만 보드낫이라는 목적지를 공유하고 있으니 택시를 타도 되고 물어서 걸어 와도 그리 멀지 않은 곳이라 남은 일행 5명은 보드낫으로 향했다.


 

보드낫은  여전했다. 입구는 인파가 붐비고 앞길은 차들이 엉켜 복잡했다. 티벳 불교의 성지 답게 각지 에서 모여든 티벳탄 순례자들과 우리같은 방문자들로 북적였다. 옛날 한때는 티벳 라사와 카트만두를 오가는 무역상이 머룰던 타망족의 마을이었던 이 구역 일대는 이제 티벳이 중국에 복속된 뒤 망명한 피벳탄의 집단거주질 바뀌었다고 했다. 보드낫 안으로 들어서자 스튜파를 도는 티벳탄들의 무리를 따라 나도 모르게 휩쓸리며 내가 가진 세상에 대한 기원을 읊조리기 시작했다. 순례객이 스튜파를 도는 의식을 kora라고 하는데 언젠가 다큐에서 몸을 겨우 가누는 할머니가 오체 투지를 하며 kora를 하는 이유를 묻자 뭍 생명의 고통을 들기위해서라고 하던 인터뷰가 떠올랐다. 나도 내 자식의 성공이 아니라, 나의 부귀와 영화가 아니라 세상의 생명 가진 모든 존재의 안녕을 빌며 스튜파를 두어바퀴 돌았다. 그리고 스튜파를 감싸고 있는 건물의 전망좋은 레스토랑에 자리를 잡고 어렵게 와이파이를 연결해 길일흔 와이프와 접촉했다.

 


일찍 숙소롤 돌아와 내일이면 떠날 안나푸르나 라운드를 위해 짐을 쌌다. 빠진 것은 없는지, 빼도 될 짐은 없는지 꼼꼼히 살피고 20여일동안 입에 맞는 음식을 접하지 못할 것에 대비해 저녁을 삼겹살로 준비했다. 벌써 익숙해진 가까운 골목길 구멍가게에서 식재료를 사서 밥을 하고 고기를 구웠다.  마야거르츄의 팟샹은 어떻게 구했는지 냉동 삼겹살을 조달해 주었고 다른 일행과도 같이 음식을 나누고도 고기가 남았다.  모처럼 속이 편안했고, 마음 편히 식사를 하고 나니 라운드 내내 계속 속이 안좋으면 어쩌지 하는 걱정이 사라졌다. 역시 나는 산 체질이라 산을 가기 전날부터 몸이 살아난다고 너스레를 떨며 침실로 돌아왔다. 



안나푸르나 라운드를 떠나는 날 아침이 밝었다. 지난 일주일 같이 했던 L은 한국으로 돌아가고 남은 4명은 같이 안나푸르나로 떠나는 날  마야거르추의 아침은 일찍 시작됐다. 6시 30분 L과 아쉬운 작별을 하고 앞으로 20여일의 여정을 같이할 2명의 포터 라마나쉬와 Basu 그리고 4명의 트레커가 2대의 택시를 타고 겅거부 뉴버스파크로  향했다. 도착한 겅거부는 5년전의 남루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언제 들어섰는지 번듯한 건물과 넓은 버스 승강장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곧 출발한 버스는 역시 시원하게 뚤린 RING ROAD를 따라 칸트만두를 벗어나기 위해 달리기 시작했다. 길은 달라졌지만 수시로 서고 가기를 반복하면서 문을 연채로 위태롭게 매달린 조수가 호객을 하는 모습은 달라진 것이 없었다. 버스는 거의 1시간 반 만에 카트만두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포카라를 가는 프리씨비 하이웨이를 둠레까지 달려 둠레에서 북쪽으로 방향을 잡은 버스의 시야에 설산들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가슴뛰는 설산의 풍경을 배경으로 그 아래 산중턱에 터잡아 살아가는 삶이 도드라지게 다가왔다. 오후 1시 30분이 넘어 안나푸르나가 시작하는 마을 베시사하르에 도착했다. 오래전 유일한 출발지 였던 베시사하르는 불불레까지 길이 나면서 트레커의 외면을 받기 시작했고, 다시 참체까지 길이나고 결국 마낭까지 길이 나면서 트레킹 출발점의 면모를 잃어버렸다고했다. 버스를 내린 우리는 이때까지 트레킹 출발점을 정하지 못했고 라마라쉬가 차를 구하러 사라진 뒤에 길가 식당에서 요기를 했다. 시간에 맞춰 출발하는 버스를 구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우리는 차를 타고 불불레까지 가서 걷기를 시작했던 지난 여정과는 달리 이번에는 베시사하르부터 바로 걷기를 작정했다. 



베시사하르를 출발해서 불불레 까지 가는 길은 편안했다. 마르샹디강을 따라 형성된 길을 걷고 민가를 만나니 아직 우리의 걸음은 산에 들어가지 못했고 하루종일 마을길로 이어졌다. 길도 단순했고 멀리 설산이 우리의 목적지를 안내하니 그냥 멀리 설산을 보고 걷고 또 걸었다. 불불레가 얼마 남지 않은 길을 지나자 마을 잔치가 한창인 것 같았다. Basu에게 물어보니 이날이 구릉족에게는 '로사르'라고 하는 설날이고 이웃의 친인척이 함께 모여 음식을 나누고 춤과 노래로 하루를 보낸다고 했다. 산업화의 댓가로 우리에겐 사라진 옛풍습을 낯선 안나푸르나 기슭에서  목격하게 되니 마음이 따듯해져 왔다. 흐뭇하게 바라다 보는 우리를 보고 춤 삼매경에 빠진 남성분이 손짓을 하며 우리에게 같이 할 것을 권했지만 오늘 가야만될 거리도 있고 실례도 될 것 같아 그냥 합장으로 인사하고 가던 길을 걸었다.



오늘 쉬었으면 하던 마을인 불불레를 도착했다. 지난 5년간 불불레는 강건너 동쪽 마을에도 찻길이 생기고 강과 롯지는 길로 갈라섰다. 집과 강과 마을이 한데 엉커 조화롭던 풍경은 사라지고 조금은 삭막하고 어설픈 불불레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어다,. 오랫만에 만난 친구가 너무 변해 있어 왠지 서먹한 그런 기분이 들었다.  바수와 라마나쉬는그리 멀지 않은 곳에 숙소가 있다며  우리가 계속 걷기를 권했다. 트레킹 첫날은 무리하지 않고 몸을 푸는 정도만 걸고 불불레에서 묵을 예정이었지만 잠깐의 망설임끝에 Upper Nadibazar 까지 걷게되었다. 우리는 지쳤고 해가 떨어져갈 무렵 5시 반이 넘어서야 낡고 허름한 롯지에 도착했다. 하지만 롯지는 마음에 들지 않았고, 첫 숙소 선정부터 가이드에게 속은 느낌이 들었다. 



불불레 지나면서 언제부턴가 우리의 포터들과 동행을 하게된 어떤 사람이 있었는데 그 분이 바로 이 롯지의 주인이었다. 나는 와이파이와 온수가 되는 롯지를 원했지만 가이드는 곤혹스런 표정이 역력했다. 아마도 롯지 주인의 호객에 넘어가 여기까지 무리해서 왔는데 우리는 불만스러워 보였고, 그렇다고 다른 롯지를 찾아 나설려니 해는 떨어지고 이 롯지 주인에게 미안하기도 해 곤란해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내일 부터는 숙소 결정에 좀더 관여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라운드 첫 숙소인 Upper Nadhibazar의 Annapurna Garden Restaurant & Guesthouse라는 이름의 남루한 롯지에 짐을 풀었다.

 


롯지 건물은 시설이라고 할 것도 없을 정도로 양철과 폐목재로 지어 비와 바람을 가리는 수준이었다. 녹슬고 구겨진 양철로 얼기설기 꾸린 움막수준의 건물은 그렇다고 해도 눕기에도 겁이 나는  곰팡내 나는 침대는 사실 받아들이기 불편했다. 그래도 그물망 창으로 들어오는 차가운 밤바람은 막아야할 것 같아 특별히 주인게게 부탁해 받은 얇고 작은 천을 스카치 테이프로 발라 잠자리를 갖추었다. 다이닝 룸에서 주문한 식사를 받았는데 역시 손님이 거의 없는 시즌이니 식재료가 잘 갖춰줘 있을 리가 없고 음식은 초라했다. 



하지만 이 모든 악조건에도 주인 내외의 친절은 우리의 마음을 풀어주기에 충분했다. "당신들을 우리 집에 모실 수 있어 너무나 행복합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찌그렸던 인상을 펼 수밖에 없었고, 아무런 불편함도 없고 만족스럽다는 표정으로 인사를 건넬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말뿐이 아니고 시설이나 물질로는 할 수 없는 띠뜻한 마음으로 우리를 대했다. 준비한 식사가 맛이 없지는 않은지를 묻고, 빈 접시를 채워주고 그리고 식사가 거의 끝나가자 온기가 있는 부억으로 우리를 초대했다.  젊어서 요리사로 바같 세계를 떠돌았다는 낯선 네팔리 한분을 포함해 모두가 모닥불을 중심으로 옹기종기 둘러 앉아 라운드의 첫 저녁을 맞았다. 



나디에서의 낭만적인 모닥불 파티는 일찍 끝났다. 자리를 같이했던 롯지 주인과의 관계는 알 수 없었던 네팔리는 우리에게 친절하고 우호적이었다. 미국에서 피자가게에서 일을했다며 우리 곁을 떠나지 않고 잘 알아듣지도 못하는 우리를 붙들고 끝임없이 영어를 늘어놓았다. 그는 마리화나를 하고 우리에게 권하기도 했다. 분위기에 젖은 바수는 락시를 들이키고 어느 순간 수다스러워졌다. 마리화나에 취한 네팔리와 술에 취한 바수가 자리의 분위기를 일찍 흐려놓는 바람에 다뜻한 모닥불의 아까운 불씨를 포기하고 침실로 흩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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