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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번 잠이 깼다. 새벽 일찍 서둘러야하는데 혹시라도 늦잠을 잘까봐 걱정이 되기도 했고, 포카라에서 마지막 보내는 밤이 많이 아쉽기도 했다. 새벽 5시에 일어나 서둘러 짐을 쌌다. 호텔비 아까워 핫샤워를 하고 6시에 로비에 내려가 다이닝 룸에 앉았다. 곧바로 아침 주문을 하고 기다렸다. 짧은 네팔 여행 경험상 예약을 해도 시간이 되기 전에 미리 좌석을 차지하고 있어야 제시간에 음식이 나왔기 때문에 오늘은 미리 자리를 잡은 것이었다. 6시 30분이 넘어서야 음식이 나왔다. 먹는둥 마는둥 허겁지겁 허기를 속이고 체크아웃을 하고 투어리스트 버스파크로 뛰다시피 걷기 시작했다. 택시비 200루피 아끼려고 새벽부터 강행군을 한 것은 아니지만 중간에 택시를 잡으려니 택시도 없고 또 조금 억울하기도 했다. 7시까지 꼭 도착해야 된다던 매표소 직원의 말을 신뢰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불안한 마음에 무거운 배낭에도 아랑곳 없이 땀이 나도록 뛰어 정각 7시에 버스 파크에 도착했다. 

버스파크에는 벌써 사람들이 붐비고 대형 버스들이 10여대 줄줄이 서있는데 그중에 우리가 탈 BABA버스를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버스들 대부분은 겉으로 봐서 멀쩡해 보였고, 일부만 로컬버스처럼 지붕에 짐을 싣고 사람이 오르락내리락 거리고 있었다. BABA라는 국영 회사의 투어리스트 버스는 원래 여행객 전용버스로 포카라에서 카트만두까지 운행하는  최고 비싼 버스였다. 1일당 18불에 물과 점심이 제공되는  바바버스는 내가 알고 있던 것과는 달리 투어리스트보다 네팔리 승객이 훨씬 많았다. 어떤 자료에서는 15불짜리 민간 투어리스트 버스가 훨씬 써비스가 좋다고 되어 있었지만 나는 그래도 네팔 정부를 더 믿고 싶었다.

7시간 가까이 버스는 고속도로를  달렸다. 말이 고속도로지 거의 내가 사는 봉화의 군도보다 못한 포장 상태에 소와 염소, 개와 오토바이가 수시로 길을 막고 군데군데 포장이 부서져 비포장길이나 진배없는 산길을 꼬불꼬불 달렸다. 그래도 버스비 값어치를 하는지 급가속이나 급제동, 위험한 추월없이 편안한 운전을 하는 기사덕에 마음 편안해서 좋았다. 출발한지 1시간 조금 지나 한 휴계소에 들러 잠시 쉬다가 다시 달려 11시 30분 정도에 한가로운 마르샹디 강가의 한 레스토랑에 서 맛있고 충분한 점심을 먹었다.  2시가 넘어 버스는 S자 오르막 길을 한참 오른 뒤에 카트만두 검문소를 통과했다.

그때부터 모든 게 카트만두다워졌다. 도로는 먼지와 쓰레기 투성이고 거기다가 교통체증까지 겹쳐졌다.  도시 외꽉의 굴뚝들은 거의 대부분 붉은 벽돌을 굽는 공장들로 보였는데 굴뚝이 만들어 내는 풍경이 이국스러움을 더했다. 막히는 길을 힘겹게 비집고 버스는 타멜근처의 투어리스트 버스파크에 도착했다. 버스를 내리자 마자 처음 포카라에 도착했을 때 처럼 택시와 호텔 삐끼들이 몰려와 혼줄을 빼어 놓았다. 그러나 한번 당하지 두번 당할 수는 없는 일, 냉정하게 바로 여기가 목적지고 예약해 놓은 호텔이 있다고 시치미를 떼고 유유히 타멜거리를 찾아 나섰다. 하지만 타멜을 찾기 위해 한참을 헤메고 두세번을 묻고, 다시 타멜거리에서 예정했던 네팔짱이라는 숙소를 찾기 위해 또 한참을 거리를 헤메고 너댓번은 더 물어야했다. 먼저 기준지점인 타멜쵸크를 찾고 근무중인 경찰과 군인들의 길안내로 가까스레 네팔짱에 도착했다.

룸 챠지가 하루 350루피 한국돈으로 5000원인 셈인데, 싼 만치 시설은 형편없었다. 그래도 다른 호텔을 찾아 나서기에는 피곤하기도 했고 남은 경비도 조금 불안하기도 해서 그냥 짐을 풀었다. 다시 거리로 나와 릭샤와 택시, 네팔리와 외국인 여행객들로 붐비는 카트만두의 중심 타멜거리를 헤메기 시작했다. 여행사와 장비가게, 환전소, 호테르 식당, 각종 기념품 선물가게가 줄줄이 들어선 타멜거리는 그야말로 여행객의 해방구 같은 그런 분위기 였다. 여행객에게 필요한 모든 물품과 서비스가 있고, 모든 것이 여행객에게 맞춰져 있는 거리, 거리를 활보하는 사람의 절반은 여행객이고 모두가 여행객을 통해 먹고사는 거리, 여행객의 요구가 곧 법이 되는 거리가 타멜이었다.  릭샤를 끄시는 한분이 우리의 거절에도 불구하고 릭샤를 타라고 끊질기게 요구하자 멀리서 경찰이 다가와 바로 제지했다.

타멜에서 제일 먼저 할 일은 우리 포터 파샹이 근무한다는 J.Vill을 찾아 나서는 일이었다. 하지만 허탕을 쳤다. 지도를 보고, 네팔리들에게 물어도 보았지만 J.Vill은 쉬 찾을 수 없었다. 작은 여행사기도 했지만 워낙 길이 복잡해서 어디가 어딘지 알 수가 없었다. 아직 3일이나 일정이 남은 상태라 선물을 구입하기도 이른것 같아 이 가게 저가게를 기웃거리며 구경을 하다가 저녁을 맞았다. 저녁은 'Food Bazar'라는 팝송이 흐르고 네팔의 젊은이들이 찾는 듯한 '현대적 레스토랑'에서 먹었다. ' 탄도리'라고 하는 장작으로 구운 닭고기와 맥주을 마시고 카트만두에 들어온 첫날의 하루를 접었다. 이밤 모든 생명가진 것들의 평온을 빌며  네팔짱에서의 첫날 밤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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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6시 30분에 파샹과 같이 아침을 먹고 작별을 했다. 파샹은 7시에 투어리스크 버스파크에서 카트만두행 버스를 타기로 되어 있었다. 우선은 작별을 하지만 몇 일뒤 카트만두에서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고 아쉬움을 달랬다. 룸에서 잠시 시간을 보내고 우리 부부도 호텔을 나섰다. 파샹의 안내없이 지도와 짧은 영어에 의지해 투어리스트 버스파크까지 걸었다. 학교운동장 보다 너른 빈터가 버스파크라고 했다. 텅빈 버스파크에 붙은 가게에 들러 물어보니 바로 거기서 예매를 하라고 했다. 아직 교통편에 대한 마음을 정하지 않았지만 매표소 직원은 내일 아침에 바로 떠날 차표를 사지 못하면 카트만두에는 다음 날 갈 수 밖에 없다며 미리 예매할 것을 강권했다. 긴 판단없이 그냥 네팔 정부가 운영하는 일종의 국영 버스표를 예매했다. 1인당 18불에 미테랄 워터 한병씩에 고급 점심식사를 제공한다고 했다. 모든 종류의 카트만두행 버스는 7시부터 출발을 시작하기 때문에 반드시 7시 이전에 버스 파크에 도착해야된다는 알듯 모를듯한 설명을 했다. 7시면 7시지 7시 부터 출발하는데 정확한 출발시간을 미리 알수 없고 그래도 7시까지는 버스파크로 나와있지 않아 버스를 놓치면 내 책임이라니 조금은 억울했다. 하지만 여기는 네팔이고 나는 여행중이니 모든 것이 용납 되었다. 여행은 사람을 관대하게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버스파크를 나와 멀리 마차푸차레가 보이는 북쪽을 향해 시가지를 계속 걸었다. 시끌벅적한 시장통을 지났다. 시장은 삶의 의미를 되새겨 보게 하는 참 좋은 순례지다. 아우성과 몸부림이 넘쳐나는 장바닥을 지나며 우리 삶의 끈을 잇는 생명활동의 근본을 되새겼다. 먹고 사는 일이 다 그렇고 그렇겠지만 네팔거리에서는 늘 날 것으로 삶의 속살을 마주 할 수 있었다. 호객으로 목이 터져라 외치지만 그들은 늘 즐거워 보이고, 한가해 보이다 못해 심심해 보였다. 남루한 형색에 좌판의 물건을 다 팔아도 돈 될 것 같지 않은 형편이지만 그들에게 그것은 삶은 전부일 것이다. 그래도 그들은 심각하고 초조하고 우울하지 않았다. 뭐, 자살율 세계최고의 사회, 한국에서 온 사람에게는 어떤 나라를 여행해도 다 그렇게 보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시장을 지나고 주택가도 지나고 그냥 포카라를 하염없이 걸었다. 레이크사이드를 벗어나자 마자 외국인 관광객임이 확 드러나는 우리 차림이 사람의 눈길을 끄는 것 같았다. 아이들이 따라 붙고 'Hallo!를 외쳤다. 나중에는 대여섯명의 아이들이 무리를 지어 반복적으로 할로를 외치며 따라붙었다. 지나ㅏ는 여성 여행객으로 보이는 사람에게 다가가 주머니에 손을 집어 넣어 놀라게 만들고 내게도 가까이 다가와 카메라를 뺏어려 드는 아이까지 있었다. 어느 순간 아이들이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뭐 그래봤자 아이들은 아이들이니깐 웃어넘길 수 밖에 없었다. 어른들도 눈만 마주치면 '니하오?' ' 안뇽하세요' '곤니찌와!'를 번갈아 외치며 방긋 웃어준다. 친절한 네팔리들이 반갑고 고마우면서도 마음이 조금은 아려왔다. 네팔리들은 이방인에 대해 철저히 방어의식을 버려버린 사람들 같았다.

네팔에 있는 거의 대부분의 현대적 시설들은 외국의 원조에 기대어 지을 수 있었고 지금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세계 12대 빈국의 하나인 네팔의 주산업은 농업이지만 다음은 관광이라고 했다. 네팔 농업의 조건은 자연적으로나 기술적으로나 거의 최악으로 보였다. 현대적 공장이라곤 하나도 없는 네팔은 오직 관광에 목을 멜 수밖에 없는 형편이 분명했다. 그래서 그런지 네팔은 관광객을 상대로한 적대적 범죄가 거의 없고, 젊은 여성이 혼자서 트레킹을 떠나도 위험하지 않을 정도라고 했다. 관광객에게 위해를 가하면 자신들의 밥줄을 끊는 셈이 되기 때문에 일종의 금기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뿐아니라 레스토랑이며, 롯지며, 호텔이며 관광객이 머무는 곳은 모두 최대한 서구인에 맞추어져 세팅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키가 179cm인 내가 사용하기에 불편할 만치 높게 달리 소변기며, 세면대며 아예 네팔리는 그런 시설을 사용하지도 않을 것이라는 전제하에 지어진 시설도 그렇고 안나푸르나 라운드중에 만난 롯지 대부분의 식단 역시 서구인의 기호에 맞춰져 있었다. 먹고 사는 일이, 그리고 네팔의 가난이 가슴이 아팠다.

스리야나 사거리를 지나 길은 넓었지만 인파는 별로 없는 한산한 '뉴로드'로 접어들었다. 지도와 표지판판을 따라 주택가 골목길을 통과하니 다시 큰 길을 만나고 길건너 오늘의 첫 목적지인 'Regional Museum'이 눈에 들어왔다. 박물관을 들어서니 단체관람 온 어린 학생들이 막 관람을 마치고 나왔는지 기념사진을 촬영중이었다. 우리가 다가가자 교사로 보이는 여성이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을 했다. 단정한 교복을 입고 나란히 서있는 아이들이 싱그럽고 이뻤다. 그 아이들이 밝은 미소에 네팔의 미래가 보였다. 소액의 입장료를 내고 들어선 전시장은 낡고 초라했다. 소장된 민속자료들도 먼지가 앉고 거미줄이 쳐져 소박한 전시물이 더욱 초라하게 보였다. 농기구에서 부터 생활 연장들을 비롯해 각 민족의 결혼예식과 장례식의 전통을 재현해 놓은 전시물을 둘러 보는 일은 시간을 아껴야하는 여정에서 불필요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전시장을 나와 정원을 걸으며 그래도 이 박물관이 보다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길 바라는 마음에 여행기를 쓴다면 꼭 다음 여행객들이 이 곳 박물관을 찾아가볼 만한 곳으로 여기게 만들고 싶었다. 낡고 초라한 민속박물관이지만 네팔이의 삶을 느껴 볼 수 있는 귀한 기회를 누리는 일이 바로 이 박물관을 유지하고 더욱 풍성하게 가꾸는 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Regional Museum'을 나와 오늘의 두번째 목적지인 올드바자르를 향했다. 올드바자르는 지금까지 지나온 다른 시장에 비해 더 규모가 크고 인파가 붐볐다. 여행자의 거리인 레이크 사이드보다 경기가 좋지 않은 시장인지는 모르겠지만 포카라의 가장 번화한 거리가 아닌가 여겨졌다. 시장을 관통하며 오렌지를 한봉지 사먹고, 아내는 문양 도장을 파는 상인에게 재미로 손등을 내밀었다가 도장을 찍히고 생각지도 않은 돈을 뜯기기도 했다. 어린 거지 여자아이에게 작은 돈을 건네자, 자신의 동생들을 데리고 와서는 동생들에게도 돈을 달라고 떼를 썼다. 올드 바자르를 지나며 겪은 사소한 애피소드가 우리의 여정을 풍부하게 했다.

세번째 목적지인 Bhindhyabasini사원을 향했다. 지도상으로는 얼마되지 않는 거리인데 골목에서 길을 잃고 헤메다 보니 시간을 지체했다. 배는 고파왔고 마땅히 사먹을 만한 곳이 없었다. 낡은 이삼층 짜리 벽돌 건물이 늘어선 전통마을 같은 거리를 지나고 버스파크로 보이는 지역을 벗어나자 겨우 간판을 찾고 목적지에 도착했다. 사원은 언덕위에 세워져 있고 그 아래 시민공원같은 잔디밭에는 가족나들이를 나오 네팔리들이 붐비고 있었다. 어쩌면 사원을 참배한 뒤 한가한 시간을 가지고 있는지도 몰랐다. 사원을 오르는 계단에는 적선을 요구하는 장애인과 노인, 아이들의 손길이 발걸음을 잡았다. 이 역시 보시를 통해 받는 사람과 베푸는 사람이 더불어 굶주림을 면하고 업을 벗는 종교적 의식의 한가지로 보였다. 사원은 큰 예배가 있는 날인지 좁은 경내가 사람들로 꽉차있었다. 여기저기 향불이 피어오르고 수십명씩 뭉쳐 탑을 돌고 무엇인가를 신상에 뿌리는 등의 의식을 진행했다. 사람들의 열기와 소음, 특히나 향불 연기 때문에 경내에 오래 머물 수가 없었다. 사방에 뿌려져 흰두교 특유의 붉은 색이 주는 공포감과 향불 연기가 품은 알 수 없는 냄새에 쫒겨 사원 뒷편의 계단을 통해 사원을 벗어났다.

공원과 사원을 올라가는 계단 근처에는 몇몇 식당이 성업중이었다. 허기라도 면하기 위해 이곳 저곳을 둘러 봤지만 이곳은 외국인이 찾는 관광지가 아닌지 우리가 먹을 만한 음식을 팔고 있지 않았다. 딱 한 군데 스파게티 등의 서양식 메뉴가 있는 식당에 들어섰지만 오늘은 식당 전체가 예약되어 있어 손님을 받을 수 없다고 했다. 할 수 없이 길가 조그만 구멍가게 겸 식당에 들어가 종류를 알수 없는 음식을 골고루 선택해 허기를 떼웠지만 너무 달아 식사대용이 되지 못했다. 네팔에 들어와 근 한달만에 처음으로 먹기에 힘든 음식을 시킨셈이었다.

오늘 네번째 목적지인 Gurkha Memorial Museum을 향했다. 사실 말이 목적지지 그냥 포카라라는 도시를 구석구석 걷고 싶어 정할 일정이었다. 포카라를 남북으로 거의 관통해 구르카 기념박물관에 도착했다. 다리도 아프고 부실한 점심때문에 허기도 졌다. 구르카 기념 박물관은 구르카족이라는 특정 민족의 민속 박물관 정도로 생각했는데 막상 박물관을 들어서니 완전히 군사박물관이었다. 박물관은 구르카족이 얼마나 용맹한 민족인지 그리고 얼마나 많은 전쟁에 참가해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영연맹이 지어준 것이라고 했다. 시대에 따른 쿠르카 용병의 변천사와 복장, 무기 등을 전시하고 있었고 특히 참가한 전투와 그 전투에서 전공을 세운 전쟁 영웅들을 기념하고 있었다.

사실 전시장을 도는 내내 분노가 치밀었다. 중간에 박물관을 나오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견디기 힘들었다. 특정 민족을 선택해 그들의 충성심과 용맹성을 부추켜 필요한 용병으로 길러 자국의 이익을 위해 전쟁에 투입해온 사악한 제국주의의 범죄행위를 칭송하고 기념하기 위한 공간에 입장료를 내고 들어왔다는 사실이 못내 억울했다. 아직도 영국주도로 용병을 모집하고 있고, 네팔 내에는 용병 양성소가 수십개나 운영되고 있으며, 이삼년에 한번씩 용병을 모집할 때는 거의 100대 1의 경쟁률을 기록한다는 사실이 너무나 가슴 아팠다. 가난한 네팔리가 단기간에 큰 돈을 질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길이 용병이 되는 것이라는 사실이 가슴 아팠지만, 그들의 삶의 조건을 이용해 그들의 목숨을 사서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투입하는 '선진국' 영연방의 야만성이 용납되는 현실에 화가 났다.

구르카 박물관을 나와 오늘의 마지막 일정인 안나푸르나 박물관을 들렀지만 우리가 도착했을 때 막 문을 닫고 있었다. 문을 닫던 직원은 박물관은 오후 3시에 문을 닿으니 내일 다시 오라고 안내했다. 하루종일 걸은 탓에 몸도 지치고 해서 숙소가 있는 레이크사이드로 가는 로컬버스를 올랐다. 버스 정류장이 있긴하지만 아무데나 버스를 세우고 승객을 싣고 내리고 하기 때문에 그냥 길가에 서서 지나는 버스에 대고 '레이크 사이드'만 외치면되었다. 레이크 사이드로 가는 길에 시위대에 길이 막혔지만 우회도로를 통해 금새 레이크사이드 입국에 도착했다.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로 떠나기 전에 들렀던 레이크 사이드 거리는 한국인 천지였는데 그동안 한국인은 사라지고 중국인 천지로 바뀌어 있었다. 코리언시즌중이라지만 설날을 맞아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한국으로 돌아가 버렸기 때문이었다. 벌써 낯 익어버린 레이크사이들 거리를 걷다가 저녁 식사를 하기에는 으른 시간에 허기를 면하기 위해 페와호수가의 한 레스토랑에 들렀다. 빵과 커피를 시키고 평화로운 호수의 풍광에 취해 있는데 레스토랑 스텝 한 분이 말을 걸어왔다. "Are you Chiness?" 우리는 한국인이라고 대답하자 그는 바로 한국말로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나 하국 가요. 세달있으면 가요." 그분은 곧 한국에 노동자로 들어갈 예정이시고 5년계획으로 한국에서 일을 하실거라고 했다. 그리고 바로 이 레스토랑에만해도 3명이 같이 한국으로 가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누운 의자에 기대어 지는 해가 지는 페와 호수를 바라다보고 있었고 그는 서서 말을 걸었다. 어색한 자세를 바로 잡았지만 참 할 말이 많으면서도 막상 무슨 말을 해야할지 당혹스러웠다.

그는 곧 시작할 한국생활에 대한 기대와 두려움을 동시에 드러냈다. 한국인을 만나 최대한 한국에 대해 이야기를 누고 싶은 눈치였다. 그는 한국의 추위에 대해 물었다. 여기보다는 많이 추울 거라고 대답하고 한국사람은 네팔 사람이 부지런해서 인기가 많다고 말했지만 순전히 한국 자본가의 입장에서 나온 평가일뿐이라고는 말하지 못했다. 이곳에 와서 네팔에 오래 체류하신 분들 입을 통해 네팔사람이 부지런하고 순하고 말잘들어 한국 공장에서 다른 동남아 노동자에 비해 인기가 많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지만 그것은 순전히 일을 시켜 먹는 사람들의 기준에 따른 평가일 뿐이었다. 한국사람은 성질이 급하고 '빨리빨리'를 입에 달고 다니지만 좋은 사람들이고, 한국은 좋은 나라라고 말했지만 다하지 못한 말이 입안에 맴돌았다. 하지만 진심을 다해 축하를 드리고 레스토랑을 나섰다.

"좋은 경험이 될겁니다. 축하드립니다.!"

페와 호수가를 거닐다 커피를 마셨던 레스토랑과 인접한 '부메랑 레스토랑'이라는 곳에서 포카라의 마지막 저녁을 보냈다. 포카라의 마지막 밤은 조금은 화려하고 싶었다. 스테이크를 시키고, 민속공연을 보면서 날이 저무는 페와 호수를 두눈에 가득 담았다. 네팔리들이 전통의상을 입고, 전통 악기를 연주하며, 렛산피리리를 부르는 저녁... 테이블 사이에는 장작불이 이글거리고, 호수 건너편 대기속으로 사라져가는 겹겹히 쌓인 산과 산들 그리고 포카라의 빛을 모아 반짝이는 페와 호수의 잔물결을 바라다 보다가 나는 갑자기 진해 앞바다가 목이 메이도록 그리워졌다. 해지는 바다의 섬들 사이를 배를 타고 지나며 그 아름다움에 취해 "그래 지금 여기서 죽어도 좋을 것 같다'며 호기롭게 생각했던 스무살 시절이 생각났다. 그 청년은 이제 패기를 잃고 세월의 힘에 씻겨 50대 장년의 눈으로 해지는 호수를 바라다 보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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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푸르나의 아쉬운 마지막 밤을 보내고 빗소리 들으며 아침을 맞으니 오늘은 산을 떠나 도시 포카라로 들어서는 날이다. 아침을 들고 서성이다 비가 가늘어지자 과감히 지름길을 잡아 담푸스로 향했다. 담푸스 가는 지름길은 트레킹 코스를 벗어나 수목과 바위가 어우러진 소로들이었다. 간혹 방목중인 소들이 길을 막고 있었고, 논밭이 보이는 언덕위에서 길이 수풀 속으로 사라져 당혹스럽기도 했지만 큰 마을이 인접한 야산을 헤쳐 나가기엔 큰 어려움이 없었다. 담푸스는 차량이 들어올 수 있는 큰 마을이었다. 넓은 비포장길을 따라 형성된 건물은 롯지와 가게를 겸한 주택들이 많았고 수공예 기념품을 만들고 파는 공방도 여럿 보였다. 한 공방 앞을 지나자 젊은 남자가 직접 만들었다는 천 제품을 들어 보이며 한국어로 호객을 하기도 했다. 오스트렐리안 캠프를 떠난지 한 시간도 안되어 우리는 이미 도시로 접어든 느낌이었다. 담푸스를 지나 패디로 향하는 길은 논밭사이의 오솔길과 농가와 농가를 잇는 아름다운 돌길이 이어졌다. 길을 나설 때가지 뿌리던 비가 그치고 투명한 햇살과 따스한 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분명 안나푸르나는 한겨울인데 고도를 낮추어 페디로 접어드니 한국의 봄날처럼 온화한 기운이 넘쳐났다.

오스트렐리안 캠프를 떠난지 두세시간이 지났을까, 페디에서 포카라 나야풀간 도로와 만나는 가파른 돌계단을 내려서자 파샹이 불러놓은 택시가 기다리고 있었다. 택시가 과속과 위험한 추월을 시작하자 이미 습관이 되어버린 요구를 했다. '나는 바쁘지 않으니 천천히 운전해 주세요.' 그래도 그 한마디에 택시는 속도를 줄였고 이내 네팔 최고의 현대적 도시인 포카라에 접어들었다. 포카라 떠난 지 몇일 되었다고 도시의 생동감이 반갑고 북적이는 사람의 발길에 흥이 일었다. 부산한 사람들의 움직임 속에 또 한 사람의 장례행렬이 이어지고, 몰려다니는 아이들의 분주한 동작들이 장례행렬과 함께 어우려졌다. 산은 산대로 아름다워 우리의 발길을 불렀지만 도시는 또 나름의 도시다운 인간미가 넘쳐났다.

 산행전 묵고 짐을 맡긴 '터치 네팔 호텔'에서 짐을 찾아 파샹의 소개로 미리 예약한 '베스트 탑 뷰 호텔'로 향했다. 베스트 탑 뷰 호텔 역시 레이크 사이드의 중심에 있었다. 중급 호텔로 조식 포함 하루 22불에 하루종일 뜨거운 물이 나오고 미네랄 워터가 제공된다고 했다. 밤이면 암흑 천지로 변하는 네팔에서 하루종일 따뜻한 물이 나오는 호텔은 나에게 대단한 호사임이 분명했다. 파샹의 친구가 성수기에 스텝으로 근무한다는 이유로 선택된 호텔이지만 비교적 만족스러웠다.

호텔에 짐을 풀고 레이크 사이드의 거리로 나서니 오후 2시가 지났다. 급한 빨레를 세탁소에 맡기고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식당을 찾아 두리번 거리다가 내일이면 헤어질 파샹을 위해 점심과 저녁 메뉴의 선택권을 주었다. 파샹에게 트레킹 동안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 무어냐고 물었더니 피자라고 했다. 그래서 두어번 롯지에서 피자를 시켰지만 두번 다 맛이 형편없었다. 그래서 파샹에게 포카라 가면 마지막 만찬은 꼭 고급 피자로 하자고 제안했고 파샹은 좋아했다. 역시 파샹은 점심으로 '피자'를 선택했다. 레이크사이드의 한 피자가게에 들어갔다. 유럽풍의 고급스런 분위기에 피자와 햄버거 스파게티까지 하나같이 맛이 좋았다. 파샹도 만족스러워 했는데 특히나 평소에 마음껏 마실 기회가 거의 없는 콜라를 너무 좋아하는 것 같았다.

점심을 먹고나니 거의 3시가 다 되어 다른 일정을 잡기에는 이미 늦은 시간이 되었다. 그렇다고 뚜렷하게 할 일도 없어 마냥 레이크 사이드를 싸돌아 다녔다. 하지만 레이크 사이드는 30분 길게 잡아 1시간이면 넉넉하게 돌아볼 수 있을 정도의 규모에 불과했다. 거리와 접한 2층 가페에서 레이크 사이드 거리의 아름다운 가게와 이곳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바라다보며 향기로운 커피를 마셨다. 거리는 한산했고 네팔리와 관광객의 표정은 여유로왔다. 우리는 세상과 삶의 아름다움을 음미하고, 안나푸르나에서 보낸 여정을 회상하며 포카라에서의 반나절을 향유했다. 다시 거리로 나와 같은 길을 서너바퀴나 돌다가 일몰을 맞는 페와 호수가에 머물렀다.  해지는 페와호수는 부풀은 의식을 잠재우고 들뜬 마음을 가라앉혔다. 호수만치 차분한 마음으로 나는 뜬금없이 고향 진해의 바닷가를 떠올렸다.  순간 갯내음이 입안에 번지고 고향에서 부모님과 살아가고 있는 동생을 생각했다.  그리고 지나간 모든 시간들이 다시 그리워졌다.

호텔에서 쉬고 있기로 한 파샹은 저녁시간에 한국음심점인 산마루 식당에서 만나기로 했다. 파샹이 오늘 저녁메뉴로 'Korean Food'을 원했기 때문이다. 산마루 식당에서 '불고기 백반'을 먹었고 다행히 파샹은 아주 맛있어 했다. 다시 베스크 뷰 호텔로 돌아와 파샹과 커피를 한잔 들며 그동안의 수고에 감사한 마음을 전하며 작별의 아쉬움을 달랬다. 포카라에서 카트만두로 귀환할 버스비와 얼마간의 팁을 주었지만 더 많이 주지 못하는 처지가 못내 아쉬웠다.

이번 여정이 즐거울 수 있었던 것은 단연 파샹을 만난 행운 때문이었다. 늘 즐거운 표정으로 씩씩하게 앞서 나가며 우리 부부의 모든 편의를 살펴주었던 파샹이 없었다면 이번 여행의 묘미는 반감되었을지도 모른다. 네팔의 정치적 상황과 네팔 청년의 고민을 나누며 네 딸이 살아갈 한국과 파샹이 살아갈 네팔의 현실을 비교하며 안타까움을 나눴고, 우리 모두의 행복한 미래상을 같이 그려보던 시간이 그리웠다. 마낭을 오르고 다시 내려오던 길에서 맞은 눈보라 속에서 파샹과 우리 부부는 트레커와 포터가 아니라 도반이자 가족이 되었다. 서로의 안전을 보살피며 서로의 즐거움을 북돋기 위해 애써던 시간들은 우리 부부가 살아가는 동안 내내 그리움으로 되살아 추억이 되었다.

집을 떠난지 처음으로 산마루식당의 전화를 빌려 딸 아이와 통화를 했다. 다행히 잘지내고 있다고 하고,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외할머니도 잘 신다는 소식을 받으니 조했던 시간들이 뒤로 밀려났다. 내 전화는 네팔에 입국하자마자 먹통이 되었다. 아내의 전화기가 있긴 했지만 와이파이 존은 없고, 3G망은 요금이 무섭고, 요금을 따로 내고 롯지에서 충전을 했지만, 산이 높아 아예 먹통이 된 전화 핑게로 집 나온지 22일 만에 딸한테 안부를 묻게 되었다. 롯지에서 요금을 내고 유선전화를 사용할 수도 있었지만 사실은 그냥 한국으로 전화하기가 싫었다. 혹시라도 아주 나쁜 소식이 있어 여정을 중단하고 돌아가게 되거나, 소소한 문제들이 있어 내가 여기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이 걱정만 떠안게 되는 그런 상황이 싫었다. 오로지 그냥 연락을 끓고 여정에 몰두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늘 딸아이에 대한 걱정은 목에 걸린 생선까시처럼 가쉬지 않았다. 여행내내 따라다니던 생선까시가 전화 한통화로 쏙 빠져 버렸다. 날듯이 마음이 가벼워졌다.

파샹과의 마지막 저녁을 먹고 호텔로 돌아왔다. 하루 22불자리 호텔이라고 그래도 무료로 카메라 밧데리 충전이 되고, 온수가 나오고, 아침식사가 나오고, 인터넷이 되었다. 로비에 놓인 1대의 컴퓨터에는 늘 사람들이 붐볐다. 호텔을 들고 나면서 계속 컴퓨터를 차지하기 위해 노렸지만 내 차례는 돌아오지 않았다. 스텝에게 물어보니 오후3시부터 초저녁 정전전까지 컴퓨터를 할수 있다고 했다. 3층 객실에서 로비까지 몇번을 들락거린 끝에 컴퓨터 앞에 앉을 수 있었다. 카메라 메모리를 백업하려 시도했지만 파일은 많고 속도는 느려터져 중간에 포기하고 말았다. 파일 복사중에 웹브라우즈를 열고 비나리마을 홈페이지와 네이버에 연결을 시도했다. 무려 23일만의 인터넷 접속이었다. 가슴이 한정없이 두근거리고 밀려났던 나의 삶들이 한꺼번에 죄여오는듯 갑자기 나의 삶의 무게가 중력을 얻었다. 고산 체질인가? 고산지대에서는 고산증을 전혀 느끼지 못하다가, 저지대로 오니 갑자기 나의 삶이 버겁게 다가온다. 멀리 보냈던 현실이 컴퓨터를 만지는 순간 나의 코앞으로 바짝 다가왔다. 알수 없는 긴장이 나의 몸을 감싸고 여행후 처음으로 가벼운 복통이 일어났다. 신경증이다. 초조와 불안은 내 삶의 필수불가결한 현실인가보다. 마을 홈페이지는 첫화면에서 멈춰 자유게시판의 게시물 목록만 조금 보이다 만다. 재부팅을 하고나서 다행히 네이버에 접속이 되었다. 눈에 띄는 뉴스가 보였다. '곽노현 첫출근'... 순간 반가왔다. 하지만 이어 선정적인 중앙일보기사가 눈에 띄인다. '곽노현 사건 판결 판사 알고보니...'아마 또 자기들의 입맛에 맞지 않는 판결을 내린 판사에 대한 사상검증 시비일 것이다. 뉴스를 클릭했지만 컴퓨터가 또 다운이다.

마을 홈페이지에 인사를 남기고, 나의 블로그와 페이스북을 들어가 보겠다던 기대는 포기하고 룸으로 돌아왔다. 온수로 샤워를 하고 양말을 빨고, 아내와 내일 새벽 파샹을 떠나 보낸 뒤의 우리 일정을 논의 했다. 이제 우리는 안나푸르나에서는 완전히 벗어났다. 우리에게는 네팔 최고의 현대도시 포카라와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라는 도시에서 보낼 수 있는 다섯밤과 여섯 낮이 남아있다. 어떻게 배분하고 무엇을 하며 보낼지 궁리를 하다가, 참체에서 만난 호주인이 권해서 염두에 두었던 반디푸르 여정을 포기하고 일단 내일 하루는 포카라의 박물관을 순례하고, 그 다음날 카트만두로 '투어리스트 버스'를 타고 가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파샹이 떠난뒤 영어도 네팔어도 안되는 우리 부부의 여정이 조금은 불안하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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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 보통 추위가 아니었나보다. 일어나 물병을 찾아 컵에 물을 부으니 물이 나오질 않는다. 물병을 때리자 얼음가루가 컵안으로 쏱아진다. 방에 난방이 따로 없으니 당연한 일이다. 티망에서부터 눈길로 접어들었지만 확실히 3,000m가 넘는 고지인 피상은 추위가 확연히 다른 것 같다. 이렇게 본격적으로 추워지면 4천, 5천 고지로 올라가서는 얼마나 더 추워질지 걱정이다. 어제 만난 하산 트렉커들은 견디기 힘들만치 추웠다고들 호들갑을 떨었다. 마낭이 영하 20도 정도라고 했다. 내가 사는 곳도 겨울아침이면 영하20도정도씩 자주 내려가니깐 못견딜 정도는 아니겠구나 안도가 되었다.
 


아침으로 삶은 감자와 애플팬케익을 먹고 8시 45분 Tilicho Hotel을 나섰다. 어제 추위에 쫒기며 대충 둘러봤던 마을을 다시 한번도 찬찬히 들여다 보았다. 마을을 벗어나자 마자 작은 강을 건너고 오른쪽으로는 Upper Pisang쪽으로 가는 길이고 왼편으로 마낭쪽으로 갈라지는 지점에 탑이 하나 있다. 무슨 탑인지 멀리서 사진을 찍고 가까이 다가가 보니 생각지도 않은 곳에 한국인 위령탑이 아닌가. 찬찬히 읽어 보니 1989년 9월 나와 동갑내기 산악인이 이곳에서 생을 마감한 것이다. 그때라면 내가 대학을 막 졸업하고 취업과 학문, 그리고 또 다른 인생길을 놓고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잠시 헤메다가 다시 대학원을 준비하던 시기가 아니던가? 그 시퍼런 청춘에 그분들은 이곳 낯선땅 안나푸르나의 눈속에 잠이 드신 것이다. 대학원 진학이라고는 하지만 마땅히 하고 싶은 것도 없고, 살고싶은 삶은 살 용기는 부족하여 단지 결정을 유보하기 위한 고육지책에 불과했던 것이 사실인데, 그 분들은 이곳 피상의 설산을 오르며 자신의 삶의 가능성을 찾고 대자연의 신비 앞에서 주어진 자신의 삶을 축복하며 마지막 생명의 에너지를 불사른 것이 아닌가?


그시절 그 나이 때는 보통사람이 외국여행을 한다는 것은 감히 상상도 못할 일이었지만, 만약 내가 기회가 주어져 이곳 안나푸르나를 밟았다면 나의 삶의 또 다른 가능성을 확인할 수도 있었을 지도 모르겠다. 그때 내게 주어진 우주는 좁았고, 눈은 어두웠고, 심장은 약해빠졌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망설임 속에서 나이만 먹어 온 나의 긴 삶과 청춘을 불살라 그렇게 낯선 설산에서 생을 마감한 그 분들의 짧은 삶이 대비되면서 앞으로 살아갈 내 인생의 무게가 묵직하게 느껴졌다. 두 분의 명복을 빌며 걸음을 재촉했다.



한시간이나 걸었을까? 멀리 비행장이 있다는 홈데가 보이는 언덕엘 올라섰다. 나로다라 언덕이란다. 전망대가 있고 홈데와 홈데 넘어 안나푸르나 연봉들이 한눈에 들어오는 멋진 조망이다. 배낭을 벗고 한참을 쉬며 고도가 높아감에 따라 억지로 줄이고 있던 담배를 한대 피웠다. 삶의 곡절이 많은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살아가다가 이렇게 한번씩이라도 전망이 확 터이는 그런 경험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는 얼토당토 안한 생각이 일었다. 하지만 내 삶의 전망이야 그 자리에 그냥 만들어져 있는 풍경이 아니고 스스로 만들어나가야하는 걸, 내가 게을러서, 그리고 소심한 탓에 지금 답답한 삶을 살고 있는걸 누구탓을 하겠는가? 다시 배낭을 짊어지고 내리막길로 들어섰다.



길은 눈속에 파묻히고 온데 간데 사라졌지만, 눈 속에 숨은 길을 찾아 네팔리들이 내놓은 발자국을 따라 끝없이 걷었다. 눈은 점점 깊어졌다. 잠시 쉴 때는 아름다운 설경에 감탄하면서도, 길을 걷기 시작하면 이내 풍경은 다 잊어버리고 오직 시야는 앞사람의 발자국만 쫒아 기계적인 걸음에 내몰였다. 풍경에 빠져들기엔 발길이 너무 바쁘기 때문이다.


오후 1시나 되어서야 홈데에 도착했다. Maya 식당이라는 곳에 들어서니 미리 도착한 분들이 반갑게 인사를 해온다. 우선 음식을 시켜놓았는데 뒤쳐진 제주 여학생이 감감 무소식이다. 눈구덩이에 혹시라도 길을 잃으면 보통 일이 아니다. 모두다 걱정을 하고 있었는데 15분 정도 늦게 도착한다. 추위에 쫒겨 너나할 것 없이 모두 롯지의 부엌에 몰려든다. 좁은 부엌이 조리에 불편할 만치 사람들이 들어서자 가이드 한분이 남자들은 다이닝룸으로 나가달란다. 와이프와 학국인 여선생님은 부엌에 남아 롯지 주인의 아이들과 놀아준다. 역시 특수학교 선생님 이셨어 그런지 말이 통하지 않는 네팔 아이들 조차 소통하고 공감하는 능력이 탁월하다. 나중에 식사가 끝나가자 아이들이 다가와 'pen'을 요구했다. 아내가 가방에서 한개를 꺼내 주자, 자기 언니 것도 하나 더 달라고 한다. 어쩔 수 없이 또 하나를 주고 나니 우리가 쓸 게 없을까봐 걱정스럽다.


체크포스트에 들러 체크를 하고 홈데 비행장의 상황을 살폈다. 혹시라도 쏘롱라 패스가 불가능해질 경우 비행기로라도 이동해야하는 상황이 될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자갈밭 활주로에 소형비행기를 별로 타고 싶지 않았지만 상황이 악화되면 그역시 어쩔 수 없는 선택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근래에 비행기가 오지도 않았고 가지도 않았단다. 역시 활주로는 두터운 눈이 그대로 쌓여있어 혹시라도 지금 비행기가 온다고해도 활주로에 눈을 치우는데만 몇일은 족히 걸릴 것같다. 소형 비행장에 짧은 활주로지만 장비라고는 하나도 없이 오직 육체노동으로 눈을 치워야하기 때문이다. 되돌아 하산 하게 될 경우 홈데에서 비행기를 이용하는 대안은 가능성이 없어 보였다.


뭉지와 브라카는 어떻게 지났는지 기억도 없다. 미리 카투만두에서 듣고서 기대했던 '베이커리'를 만날 수 있었지만 모조리 휴업중이었다. 오래 실망하고 할 것도 없이 군침만 삼키고는 그냥 계속 걸음을 재촉했다. 오직 눈만보고 하루를 보낸 것 같다. 예상보다 눈이 깊어 시간이 지체되어 날이 저물기 전에 마낭에 도착하려면 여유가 없었다. 홈데를 떠난 뒤로는 빨리 마낭에 도착하는 목적말고는 아무생각없이 발을 내디뎠던것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덕위에 자리한 마낭을 들어설 때는 산그늘이 짙어 저녁 어스름으로 변해가는 시간이었다. 하루의 트레킹을 마치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이었지만 그나마 어둠이 길을 삼키기 전에 도착한 것에 안도했다. 마낭을 둘러보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이고, 또 사람의 활기가 사라진 마을을 구경할 흥도 나지 않았다.


지난 몇일 알고보면 파샹이 늘상 이용하고 안면이 있는 롯지에서 묵게 되었지만 파샹은 꼭 마지막 나의 의사를 물었다. 내가 롯지의 선택권을 줬음에도 불구하고 꼭 롯지를 선택하기 전에 나의 의사를 물었는데 사실 '이러러저러해서 이 롯지가 좋고 저 롯지는 좋지 않다. 어떤 롯지를 선택하겟는가?'는 식으로 물어오니 솔직히 물어보나 마나다. 나의 'OK! This is good!' 한 마디는 단지 파샹을 존중하는 제스추어불과했다. 특별히 고집할 이유가 없는한 가이드나 포터가 선택하는 롯지에 대부분 머무는가보다. 우리도 그랬고, 다른 팀들도 다 그랬는데, 오직 한명만 다른 롯지로 향했다. 그분의 포터가 원하는 단골롯지로 향한것 같다, 우리는 'Yeti Hotel'을 들어섰다.


마당은 통행이 가능할 정도의 공간만 남기고 모조리 누구덩이다. 사람이 사는지, 영업은 하는지 온기라곤 없고 인기척도 없다. 파샹이 윗층으로 올라갔다 오더니 룸번호를 알려주며 키를 준다. 키를 들고 가까스레 찾은 방에 짐을 부리고, 이틀밤을 지낼 곳이라서 빨래를 맡기기 위해 거리로 나섰다, 역시 세탁소는 많았지만 문을 연곳은 하나도 없었다. 지나가는 네팔리 말로는 주인이 카트만두로 겨울을 나러 갔단다 . '그래, 이 와중에 왠 빨래는... ' 쉽게 포기하고 롯지로 돌아와 양말이라도 빨 요랑이었지만 화장실은 물도 나오지 않는다.


맨 위층인 4층에 있는 다이닝룸으로 향했다. 겉에서 보기엔 영업을 하는지 마는지 의아했었는데 그동안 트렉커들이 몰려왔나보다. 호주 등에서 왔다는 20세전후의 예닐곱명의 젊은이들로 다이닝룸이 왁작지걸 소란스럽다. 같은 일행이 아니었지만 모두들 쏘롱패디나 하이캠프 등에서 이삼일씩 날이 좋아지기를 기다리다가 결국 쏘롱라를 넘어가는 것을 포기하고 되돌아 내려왔단다. 어디 미개척지를 정복이라도 하고 온양 의기양양한 젊은이들의 열기로 다이닝 룸이 후끈거렸다. 구석에 세워져 있는 기타를 들고 노래까지 부르며 차가운 안나푸르나의 밤을 뜨겁게 달구었다.


인적이 드문 산중 마을에서 사람을 만나는 것 만치 반가운 일이 없지만 올라가기위해 마낭에 도착한 사람들에게 등정을 포기하고 하산중인 사람들과의 만남은 썩반갑지 않을 수 밖에 없었다. 계속 올라 갈 것인가 되돌아 내려갈 것인가 하는 어려운 결정의 순간이 다가온 셈이다. 파샹은 계속 비관적인 전망을 내어놓으며 설사 쏘롱라를 통과한다고 해도 묵디나트, 까그베니까지 완전히 빙판이라서 위험하기 이를데 없단다. 솔직히 같이한 몇일사이 파샹은 항상 짧은 하루의 목표치, 그리고 느린 일정을 제안했다. 가이드가 편안한 일정을 원하는 것은 당연지사고 혹시라도 위험이 따르는 시도는 피하고자하는 당연한 일일것이다. 하지만 파샹의 판단을 전적으로 따르다보면 트렉킹이 그야말로 관광투어가 되어버릴 것이 붐명했다. 판단을 마낭에서 지내는 이틀동안 천천히 상황파악을 더 하고 내리자고 미루었지만 사실 나 역시 비관적인 생각이 들었다.


한고비를 넘기고 다음 일정을 확정한 청년들은 홀가분함때문인지 계속 들떠 있었고 시끄럽기까지 했다. 상행인 트레커들은 나이도 나이였지만 몸도 그만치 피곤한 상태인데다가 또 아직 쏘롱라 패스를 포기할 것인지 시도할 것인지 결정을 못한 상태의 긴장감 때문인지 난로가에 둘러앉아 묵묵히 불만 쬐고 있었다. 날이 저물고 상행인 일행은 모두 비슷한 시간에 저녁을 주문했는데 그때 먼저 주문한 청년들이 음식이 나왔다. 돌접시 위에서 계속 지글거리며 맛난 향과 김이 무럭무럭 나는 그 음식이 이곳에서 먹을 수 있는 최고급 음식인 야크스테이크라고 했다. 이 말을 듣는 거의 동시에 모두 '주문 취소'를 외치고는 주문을 다시 하겠다고 나섰다. 800루피면 비싼편에 드는 다른 음식값의 두배가 넘는 가격이지만 강행군을 한 이날 하루는 그래도 다들 그 정도의 저녁 식사비가 아깝지 않은 눈치였다. 안나푸르나 라운드를 떠나와 이날 최고의 음식으로 고단한 육신을 위로하고 따뜻한 다이님룸에서 밤이 깊어지기를 기다리다가 침실로 돌아왔다.


침실 화장실은 물도 나오지 않고, 방안에는 화장실 냄새가 가득했다. 창밖은 눈발이 다시 굵어지고 바람역시 거세져 약한 외창을 부서져라 흔들어댔지만 곤한 몸은 아랑곳하지 않고 잠을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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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핏 잠이 들고 새벽일찍 눈을 뜨 2012년의 첫날을 맞았다. 오늘부터 라운드가 시작점인 불불레로 로컬버스를 타고 떠난다. 먼지와 진동 소음과 밀폐공포와도 싸워야할 것이다. 7시간에서 길게는 9시간이 걸린다는 여정. 기대되고 또 걱정되기도 한다. 카트만두는 해발 1300m 정도지만 먼지와 매연때문인지 고도때문인지 가벼운 제체기와 콧물이 나고 호흡이 조금은 불편하다. 이제 시작인가?


7시가 조금 넘어 오늘 길을 떠나는 트레커들과 함께할 가이드와 포터분들이 자이언트 민박을 들이닥쳤다. 모두 너댓명. 그중 한명이 우리 부부와 안나푸르나 라운드를 같이할 포터다. 먼저 다른 코스로 떠나는 트레커들과 식탁에 앉았고, 네팔리 분들은 따로 상을 차렸다. 식사를 하고 나서 이구대장님께서 그 중 가장 젊어 보이는 한 사람을 소개해 준다. Pashang Kagi Sherpa. 


일단 건실한 인상에 젊어서 마음에 들었다. 인사를 나누고 나이를 물으니 스무살이란다. 내 딸 보다 두살어린 학생이다. 카트만두의 한 대학에서 생물학을 공부중인데 방학중에 아르바이트로 포터일을 한단다. 인사를 마치고 먼길 갈 짐을 쌌다. 포카라행 비행기를 타야하는 트레커들이 먼저 숙소를 떠나기 시작했고, 한팀 두팀 배웅을 하다보니 마지막으로 우리 부부만 남았다.
이틀 밤을 자고 많은 시간을 같이 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벌써 정이들기 시작한 이구대장님, 그리고 [네팔 히말라야 트레킹 길라잡이]의 저자이시고,  내가 아는 한 한국에서 가장 네팔을 잘 알고 사랑하시는 분이신 '백두산'님과 인증샸을 찍고, 앞으로 스무날 넘게 한길을 가야할 파샹, 그리고 자이언트민박에서 주방일을 맡고 있는 상냥하고 이쁜 아가씨 찬드라와도 출발에 앞선 인증샷을 찍었다.


8시15분에 집을 나섰다. 그 순간 자이언트 민박의 울타리를 완전히 벗어나 낯선 나라로 접어드는 기분이 들었다. 일차 목적지인 베시사하르행 버스를 타기 위해 겅거부 버스파크로 향했다. 숙소에서 걸어서 10여분 거리밖에 되지 않았지만 도착한 버스파크는 내가 상상했던 버스터미날이 아니었다. 매표소라고는 구멍가게보다도 작았고, 버스의 종류나 출발 시간, 목적지 도착예정 시간 등 없으면 안될 것 같은 정보는 하나도 없었다. 버스터미날임을 알려주는 표식은 단지 도로를 따라 이런저런 종류의 차량들이 여러대 서있다는 것이 전부였다. 사실 정보에 대한 강박이 현대병인지 모르겠지만 그 모든 당연한 것들의 부재에도 버스는 나를 목적지까지 데려다주는데 아무 문제가 없었다.


황량한 겅거부 버스터미날을 떠나기 까지 또 여러명의 거지들과 곤혹스런 조우를 하고, 우리의 대형 배낭 두개는 봉고 지붕으로 올려졌다. 출발 직전에 앞타이어 하나를 똑같이 닳아 더 나아 보이지도 않은 다른 타이로로 교체한 버스는 9시가 다 되어 출발했다. 버스비는 외국인 트레커와 네팔인사이에 이중가격제가 행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파샹으로부터 들었고 3명분 1,145루피를 지불했다. '가난한 나라에 그렇게라도 해야지 먹고살지.'라는 생각을 잠시잠깐하고 있는데, 버스는 시내의 복잡한 도로를 따라 수많은 오토바이들과 뒤엉켜 질주하기 시작했다. 예상했던 일이지만 손에 땀을 쥐게하는 공포의 질주를 하루 온종일 감수해야된다는 사실에 곤혹스러웠지만 그 역시 한국인의 '신경증'에 지나지 않을터... 마음을 다잡았다.


가파른 내리막길에, 길 왼편은 천길 낭떠러지고, 노면의 아스팔트 포장은 거의 다파헤쳐져 있고, 가드레일도 제대로 설치되지 않은 길이지만 버스는 고속도로 달리듯 질주를 계속했다. 클락션 하나로 다른 차량들과 모든 신호를 주고 받으며 가파른 커버길에 구애받지 않고 거의 대부분의 차량을 추월했다. 한국에서 질주하는 택시를 위해 다른 차들이 양보해 주는게 일종의 불문률이듯, 네팔에서 봉고버스는 미친듯이 질주했고 다른 차량들은 거의 대부분 역시 클략선으로 신호를 주고 받으며 길을 양보했다. 베시사하르까지 가면서 길가에 쳐박힌 두어대의 차를 볼 수 있었지만 다행히 큰 인명 피해는 아닌것 같아 보였다. 이런 길에서 이런 차로 그렇게 운전하고도 사고가 이렇게 많지 않은 것이 오히려 신기했다. 아니, 내가 느끼는 공포는 그와 같은 생활이 일상인 사람들에게 이해할 수 없는 것인지도 몰랐다. 사고의 공포, 죽음의 공포가 망상으로 까지 확대된 사람과 죽음과 삶이 너무 가까이 있고 서로가 낯설지 않은 세상과의 조우... 이 역시 네팔이라는 나라에 와서 겪게되는 또 하나의 색다른 경험인지도 모르겠다.


어느새 나의 시선은 멀리 산자락의 계단식 논으로 향했다. 가파른 산을 깍아 계단식으로 논을 만들어 농사를 지어 자식을 먹이고 가르키며 살아가는 네팔리들의 삶이 다가왔다. 여행객인 내가 어떻게 그들의 삶을 속속들이 알수 있겠냐마는 계단논의 경사를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그들의 고단한 삶과 숨가쁜 일상이 가슴저미게 느껴져 왔다. 역시 농사를 지어 밥먹고 살아보려고 헉헉되는 삶을 사는 같은 처지지만 네팔 농부들의 삶을 한국 농부의 삶과 비교하는 것은 애시당초 불가능했다. 버스를 타고 스쳐지나가며 네팔농촌의 삶을 들여다보며 감상에 젖는 불경을 피하기 위해 그냥 창밖 풍경을 무심히 관조하기 위해 애썼다.



두어시간을 달린 버스가 아무런 시설도 없는 길가 공터에 차를 세웠다. 승객들은 우르르 몰려나가 듬성듬성 시들어 있는 수풀 사이에 적당한 거리를 두고 남녀 가릴 것 없이 볼일을 보기 시작했다. 다시 버스가 지그재그 커브길을 달리기 시작하자 승객들은 구토를 하기 시작했다.
"플라스틱!"
한국에서 '비닐 봉지'라 부르는 것을 이곳에서 '플라스틱 봉지'라고 하는가 보다. 한 뭉치의 '플라스틱 봉지'가 뒷자리로 넘어가면서 필요한 사람들이 한장씩 뜯어 챙겼다. 구토가 끝난 승객은 창문을 열고 봉지를 길가로 던져버렸다. 우리 앞자리에 않은 어린아이가 구토를 하기 시작했고 순간 아이의 얼굴이며 옷이 토사물로 범벅이 되었다. 배낭에서 물휴지를 꺼내 건네자 아이 엄마는 미소로 답례를 했다. 염치없이 물휴지 몇장으로 누군가에게 작은 도움이 되는 기쁨을 느꼈다. 모두가 지쳐갈 무렵 버스는 휴계소 같은 곳에 도착했다. 다시 화장실에 줄을 서고, 마당 건너편 식당에서 음식을 사 먹기 시작했다. 파샹은 식사를 하러 가 버렸고 우리는 어떻게 음식을 사서 먹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이름도 모르고, 맛도 모르는 여러 음식을 남들처럼 접시에 조금씩 퍼 담고, 스파게티같은 것도 한 주걱 받아 네팔의 첫 '노상'음식을 아내와 나누어 먹었다. 알고보니 각자 음식을 담아 음식의 종류와 양에 따라 값을 치루고 먹어야 했는데 우린 그걸 모르고 다먹고 나서 빈접시를 들고 카운트로 갔다. 곤혹스러워하는 직원에게 우리가 먹은 음식의 종류와 양을 바디랭귀지로 전하고 '90'루피라는 너무나 저렴한 음식값을 지불했다. 우리는 휴계소 마당가에서 팔고 있던 토마토를 100루피 주고 한 봉지 샀고, 파샹은 별도로 오렌지를 3개 구입했다.



토마토와 오렌지를 먹으며 바깥풍경을 보고있으니 오전의 여정에 비해 휠씬 편안하고 시간도 빨리 흘러 오후 2시 30분 즈음 버스는 베시사하르에 도착했다. 베시사하르는 '람중'주의 수도로 나름 꽤 큰 시가지를 형성하고 있었고 중심을 가로 지르는 길도 넓고 상가들도 많았다. 버스를 내리자 다시 불불레행 버스를 타러 15여분을 걸었다. 불불레행 버스는 베시사하르의 도심에서 벗어난 언덕 아래 공터에 있었는데 드디어 배낭을 지고 걷기 시작하는 기분이 들었다. 아내는 배낭을 지고 10분도 걷기 전에 숨이 차고 가슴이 쿵광거린다며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안나푸르나에 발을 들여놓기도 전에 가슴이 죄여오는 것 같다니 정작 고산지대로 접어들면 어떡할 지 걱정이 들었지만 시간이 약이거니 여길 수 아밖에 없었다.


버스파크의 매표소는 곧게 잠겨 있었고 직원은 온데간데 없었다. 가게에서 음료수를 한잔씩 나누고 30분쯤 기다리고 있는데 직원같은 사람이 나타났다. 오늘 버스는 마지막 1대가 남았다며 공터에 세워져 있던 폐차 직전의 버스를 가리켰다. 퍄상은 곤혹스러워하며 그래도 타겠나 아니면 내일 떠나겠냐를 물어왔지만 라운드 첫날부터 일정이 어그러지는 것도 싫고해서 그냥 타기로 했다. 몇몇 승객이 더 타고 나서 버스는 출발을 하려고 했지만 시동이 걸리지 않았다. 한참을 부르렁거리다 조수가 내리고 기어를 후진으로 넣고 다시 스타트를 거는 순간 조수는 바퀴를 받쳐놓은 돌을 빼내자 기사는 다시 기어를 전진으로 바꾸며 버스는 언덕길을 구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몇번의 시도 끝에 드디어 시동이 걸렸다.
'젠장! 이걸 타고 그 위험한 길을 가야만하나!' 나도 모르게 혼자 구시렁거리는 사이 버스는 우리의 포터 퍄상을 남겨둔채 호기롭게 언덕길을 치고 올라갔다. 퍄상은 손을 흔들며 웃음짓고 있고, 버스는 마냥 달리고 순간적으로 어떻게 하면 좋을 지 몰랐지만 파샹의 표정을 보니 심각한 상황은 아닌듯했다. 버스는 베시사하르 시내를 돌았고 조수는 연신 '불불레'를 외쳤다. 이내 버스는 승객으로 가득차고 지붕까지 사람들을 태우기 시작해서야 다시 출발했던 버스파크로 돌아가 파샹과 나머지 승객을 싣었다. 버스는 그제사 불불레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오전에 탄 버스는 9인승정도 되는 소형버스에 지붕까지 포함해 24명까지 타는 것을 확인하고 이후 더 이상 세지 않았는데, 오후의 로컬 버스에는 조금 덩치가 크다고 40명 이상의 승객을 싣었다. 가다가 서고 사람을 싣고 또 가다가 사람을 싣고 나중에 더 이상의 공간이 나오지 않자 남자 승객을 종용해서 지붕으로 보내고 조수 역시도 지붕으로 올라갔다. 지붕으로 올라간 조수는 버스가 달리는 중에도 창문을 통해 버스안으로 들어오기도 하고 다시 창문을 통해 지붕으로 올라가는 곡예를 부리면서 요금을 받기도 했다. 목적지 거의 다와서는 한무리의 어린 학생들이 버스에 오르고 장난을 치기 시작했다. 달리는 버스가 노면이 고르지 못한 곳에서 속도를 줄이면 뛰어내리기도 하고 다시 버스 꽁무니를 잡고 지붕으로 올라가기도 했다. 처음에는 이런 아이들의 행태가 당연한 것으로 받아 들여지는 것으로 생각했지만 꼭 그런것만은 아닌 것 같았다.


어떤 마을 앞을 지나자 외모가 비교적 단정해 보이는 남자가 버스를 세웠고, 버스를 세우자 마자 아이들이 지붕에서 뛰어내려 도망을 가기 시작했다. 그 분을 버스 지붕까지 올라가 숨어 있는 아이들을 확인하고, 다시 버스를 내려 버스 기사와 조수를 향해 삿대질을 하고 심하게 꾸짓는 것으로 보였다. 결국 화를 참지 못하고 버스를 발길질까지 하고서야 그분은 돌아섰고 대꾸도 한마디 못하고 눈치만 보던 버스 기사는 다시 버스를 몰기 시작했다. 당당해 보이고 씩씩해 보이던 버스 기사가 대꾸도 못하고 당하는 걸 보니 많이 잘못했거나 아니면 항의 하던 그 분이 경찰이나 공무원 아니면 지역의 무슨 실력자일까 상상해 보았지만 내가 알 도리는 없었다.


베시사하르를 출발한 버스는 2시간 만에 불불레에 도착했다. 드디어 트레킹 출발점인 불불레에 도착한 것이다. 퍄샹의 안내로 '투어리스트 체크 포스트'에 들러 '팀스카드'에 확인 도장을 받고 저녁 어스름이 내리기 시작한 마르상디 강을 건너 롯지들이 촘촘이 들어선 골목으로 들어섰다. 퍄샹은 롯지를 선택할 것을 요청했지만 선택권을 퍄샹에게 일임했다.
"너가 숙소를 더 잘 알것아닌가. 너의 선택에 따르겠다." 퍄샹은 밝은 얼굴로 "호텔 마낭"이란 롯지로 들어섰다.


오늘 모든 것이 처음이었듯 말로만 듣던 '달밧'도 처음 마주했다. 도착하자마자 롯지 한켠에서 어린 아이가 냄비에 콩을 삶기 시작했고 그것이 바로 콩국인 '달'이었고, 밥을 '밧'이라고 한다고 하니 달밧은 '콩국과 밥' 인 셈이다. 예상대로 달밧은 내 입맛에 아무런 거부감이 없었고 커리와 나물까지도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식사를 하고 나자 긴장이 풀리고 몸도 고단해져 왔다. 판자로 얼기설기 엮은 이층 숙소로 올라가 잠을 청했다. 하지만 밤이 깊어갈수록 계곡을 따라 불어내리는 바람소리와 마르상디 강물소리가 커졌고 급기야는 양철지붕을 때리는 빗물까지 듣기 시작했다. 두달 동안 비 한방울 내리지 않아 먼지가 너무 많다던 카트만두를 떠나오자 마자 비가 내리기 시작하니, 트레킹을 떠나온 입장에서 반가워할 수도 안할 수도 없었다. 판자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찬바람과 강물소리, 그리고 양철지붕을 때리는 빗줄기에 거의 잠들지 못했다. 라운드 첫날밤 숙면을 취한다면 오히려 그것이 이상한 일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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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 잠들지도 못했는데 새벽이 다가오자 수선한 발걸음이 더 이상 누워있지도 못할 정도다. 시간이 많이 남았지만 '스파 온 에어'를 나와  따끈한 우동으로 배를 채우고 티켓을 끊고 검색대를 지나 바로 면세구역으로 들어갔다. 면세 구역에서 면세혜택을 전혀 보지 못한채, 2시간을 배회하며 현대문명의 꽃, 한국자본주의의 기념탑 '인천국제공항'을 만끽했다. '공항'은 인간 욕망의 결정체다. 항공기술의 비약적 발전에 힘입어 '자본'은 세상에 대한 지배력을 확대했고, 물질적 정신적 장악력을 키워나왔을 것이다.  인천 국제 공항은
루이비통, 샤넬, 같은 명품매장과 샘소나이트 그리고  스타벅스 같은 자본주의의 상징들을 집약된 공간안에 품고 있었다. 말로만 듣고 가까이 해 보지 못한 명품 매장들의 화려한 인테리어와 상품을 지척에서 살펴보는 재미는 사실 박물관의 낡은 유물들을 관람하기 보다 더 흥미로왔다. '샤넬 백'이 가지고 있는 어떤 요소가 그 상품을 '명품'이게 하는지 당연히 잘 알수 없었지만 반자본, 반문명의 땅으로 떠나는 비행기를 기다리며 명품백을 감상하는 마음은 자못 비장하기 조차 했다.

비행은 늘 그렇듯, 지루하고, 답답하고, 그리고 긴장되기 조차한다. 적지않은 비행기 탑승 경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내발이 땅에서 떨어져 하늘높이 나르고 있다는 사실이 주는 알 수 없는 긴장감은 곧 도착할 낯선 땅에 대한 설레임과 교차하면서 육체적 피로를 배가했다. 다행히 같은 열의 창가쪽 승객인 네팔 청년과 아주 짧고 간단한 대화로 지루한 시간을 조금이나마 죽일 수 있었다. 집은 포카라고 캐나다에 유학중인 이 청년은 캐나다에서 직항이 없어 한국을 경유해 다시 네팔로 들어가는 길이란다. 캐나다 유학중인 네팔리라면 네팔에서 내놓으라하는 부잣집 아드님일 텐데 예의바르고 순박해 보였다. 짧은 인연이었지만 그 청년은 내가 만난 첫 네팔리로 아마 오래 기억될 것 같다.  

7시간의 비행끝에 멀리 히말라야연봉이 희미하게나마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육체적 피로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비행기의 오른쪽 지평선 끝에 히말라야가 보이기 시작한다는 승무원의 안내방송이 나오기도 전에 승객들은 카메라를 꺼내고 오른쪽 창가로 다가서려 했지만 비행기 내부 공간이 그렇듯 카메라를 창유리에 들여될만한 곳은 별로 없었다. 복도쪽 좌석에 앉아 창가 승객의 양해를 구해 몇번의 셔터를 눌렀지만 나의 카메라 줌은 먼 히말라야의 자태를 당기기에는 역부족이었고, 재대로 촛점을 맞출만한 경황도 없었다.



도착한 카트만두의 트리부탄국제공항은 소문대로 만만디다. 몇명의 직원이 있었지만 비자 발급을 기다리며 길다란 줄을 만들고 선 승객들에 아랑곳하지않고 유유자적이다. 그렇다고 비자발급이 안될 것도 아니고 나 역시 '빨리빨리'정신을 버리고 바로 현지화된다.

비자 발급만 늑장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짐을 찾는데도 한참을 기다려야했다. 지루한 것은 물론 허리통증을 느낄만치 기다린뒤 배낭을 찾고 공항을 나섰다. 택시와 찦 기사들이 우르르 달려들었지만 예약된 숙소 자이언트 민박에서 픽업을 나온 분과 쉽게 만날 수 있었고 다른 여행객 몇분과 함께 낯선 카트만두 거리를 달려 겅그부 '까따리 바자르'로 향했다. 픽업을 나오신 분은 Lal Prasad Bhattarai씨라고 한국에서 노동자로 11년을 보낸 동생이 있으시단다. 그 분 역시 동생 덕분에 한국을 여러번 오가며 적지않은 세월동안 노동자 생활을 하셨는데 그 경헝을 밑천으로 J Vill이라는 여행사를 운영하신다고 했다. 한국말은 거의 한국인과 다를바 없을 수준이고 착하고 친절한 인상이셨다.

카트만두 거리는 무질서했고, 지저분했고, 경적 소리로 씨끄럽고 먼지에 목과 눈이 따가웠다. 중앙선을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신호등은 구경도 할 수 없었다. 도로 여기저기에 들어누운 소와 마음껏 돌아다니는 개, 그리고 질주하는 오토바이와 곡예 운전하는 택시, 그 사이를 비집고 길을 건너는 사람들로 카트만두 거리는 아수라장이다.

하지만 경적소리에 누구도 놀라지 않아 보였고, 쓰레기가 나뒹구는 거리에 먼지를 뒤집어 쓰고 앉아서도 얼굴찡그리는 사람은 없어보였다. 간혹 마스크를 사용한 사람들을 볼 수 있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먼지에 개의치 않아 보였고, 도로를 차지한 소나 개를 향해 분노를 표출하거나 곡예를 부리듯 차를 비켜 달려나가는 오토바이를 나무라지 않았다.


순간 카트만두는 문명의 산물인 '신경증'에서 자유로운 도시로 다가왔다. 계속 눌러되는 경적은 경계용, 협박용이 아니라 '나 당신을 의식한다', '인식한다'는 증표에 다름아니었다. 무관심과 무시로 익명의 관계라는 늪속에서 외로움에 지쳐가는 현대인의 삶이 왜 문명적이고 힘이 센지 순각 혼동스러웠다. 저들의 삶과 우리의 문명사이에 건널 수 없는 심연이 놓여 있음에도 우리는 동일한 잣대로 그들의 삶을 평가절하고 있는 건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 심연을 넘어 점령하고 포섭해 들어오는 자본- 펩시콜라, 삼성, 소니, 현대 등의 광고판이 눈에 들어왔다. 먼지 이는 도심의 시야를 점령하기 시작한 자본의 힘은 강했다. 가난은 불편하고, 약하고, 그리고 끝내 '악'이라는 가르침을 통해 이데올로기 전선에서 이미 자본은 승리하고 있었다.


상념에 빠져 있을 새가 없이 차는 이구대장님이 운영하고 있는 자이언트민박에 도착했다. 호인이시고 친절하신 이구대장님과 인사를 나누고 휴식을 취한 뒤, 푸짐한 저녁을 대접받고 담배를 사기위해 숙소앞 골목길을 나와 담배가게를 찾았다. 처음으로 아무런 보호막없이 타국을 느끼며 깜깜한 거리를 잠시 헤맨뒤 작은 등을 밝히고 있는 구멍가게에 들어섰다.  호의와 겸손함이 몸에 베인 것 같은 주인과 혹시라도 속거나 무엇이라도 잃어버리까봐 노심초사하는 한국인이 만나 230루피와 담배를 주고 받았다. 내가 "시가렛!"을 외치자 그는 말보루를 내 보였지만, 나는 다시 호기롭게 "네팔 시카렛!" 을 외쳤고 '태양'을 의미하는 Surya를 두갑 받았다. 


숙소에서 네팔 담배를 피우며,  '모택동주의자'가 집권을 하고 다시 공산당이 다수당으로 연합정부를 주도한다는 이 아름다운 여신의 땅이 자본의 침탈과 지배로 부터 영워히 자유롭기를, 그리고 우리 부부 필생의 여정인 한달여의 안나푸르나 라운드가 순탄하기를 또한 빌며 카트만두에서의 첫밤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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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신의 땅 안나푸르나로 떠납니다.
안나푸르나는 저에게 혹독한 자연의 원초적 힘이 살아있는  미지의 세계이지만,
그곳에 터잡아 살아가는 사람들에겐
나름의 역사와 문화를 일구어 가는 안락한 삶의 보금자리입니다.

많은 바같세상 사람들이 안나푸르나를 찾는 이유는 어쩌면 
안나푸르나가 간직한 원시적 생명력이 주는 어떤 힘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서구화된 문명에 적응해 살아가면서도,
나름의 고유한 문명을 일구고 살아온 사람들의 원초적 삶에 대해 목말라 하고, 안락한 삶에 겨워 그와는 또 다른 원시적 건강성에 기반한 삶에 대한
새로운 욕망에 들떠 있는 이중성이 그 이유일까 두렵습니다.

이번 여정을 통해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얻어올까 생각해 봅니다.
위대한 자연앞에 서서, 그 위대한 자연에 순응해서
작게, 낮게 살아가는 사람들과 마주해서
나는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배울 수 있을지,
무엇을 버리고 또 다른 무엇을 얻어을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12월 29일 인천공항에서 밤을 새고 30일 카트만두에 들어가
불불레서부터 트레킹을 시작 마낭을 거쳐
토롱라를 넘어 묵티낫, 고레파니까지,
다시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를 걷고 포카라에서 걸음을 멈출 계획입니다.
1월26일 인천에 돌아와 우리가족의 삶의 터전인 비나리마을에 돌아오면
세상은, 그리고 나 자신을 어떻게 바뀌었을까 궁금합니다.

2011년 12월 29일 아침 집을 나서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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