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농어촌개발’이 ‘도시개발’을 포함한 ‘지역개발’ 일반에서 분리되어 그 특수성이 모색되고, 새로운 정책적 과제로 부상한 지 벌써 60년이 넘었다. 1960년대부터 초가지붕과 부엌 개량사업이 진행되긴 했지만 1969년도에 입법된 [농촌근대화촉진법]에 기반해 70년대에 수행된 새마을운동은 한국농어촌개발 사업의 효시라고 할 수 있다. 새마을운동은 철저하게 관 주도로 시행되어 낙후된 농촌의 취락구조를 개선하여 주민 삶의 편리를 향상하는 것은 물론, 농민의 정신개조와 지도자 양성 그리고 경제적 낙후성의 탈피까지 도모한 그야말로 입체적 농촌 개발사업이라 할 수 있다. 권위주의 정부에 의해 주민을 동원한 관 주도 하향식 사업으로 산업노동력의 공급을 위해 농촌의 분해를 가속화 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고, 한편으로는 주민의 자발적이고 전폭적인 참여를 끌어내는 데 성공했고, 그 세대는 여전히 자신이 국가 건설의 주역으로 대접받았고 스스로 자긍심을 가질 수 있었던 시절로 기억하기도 한다.
이후 지역개발의 개념이 변화하고 정책의 목적도 바뀌어 왔다. 1970년대에 진행된 새마을 운동은 쌀 증산을 통한 식량 자급이라는 국가적 과제에 종속되어 추진되었다면, 1980년대 농촌개발정책은 처음으로 농업을 넘어서기 위한 모색을 시도한다. 70년대에 일어난 위협적인 농촌분해의 속도를 누그러뜨리고 농촌 마을의 자립적 구조를 확보하기 위해 농공단지 조성이나 농산가공업 등 농촌소득원 개발 등을 수행한다. 이는 1994년에 농어촌정비법이 제정되면서 한 층 탄력을 받게 된다. 농어촌정비법은 농어촌 공간의 기능이 전통적인 어로나 영농을 포함해 생산기반과 관광휴양자원, 산업단지나 한계농지 등으로 분화된 현실을 반영해 농어촌공간을 종합적이고 체계적으로 정비하고 개발하기 위한 목적으로 수립되었다. 90년대의 대표적 농어촌 개발사업은 정주권생활개발사업이나 문화마을 조성사업을 예로 들 수 있다.
2,000년대 들어 농어촌개발 개념이 획기적으로 전환된다. ‘농촌’문제를 농업 ‘생산’과 완전히 분리해서 정립함으로써 농촌개발 문제가 먹거리 생산보다 훨씬 포괄적인 외연을 확보하게 된다. 이렇게 농촌의 기능 전환에 따라 마을 내부 개발에 사로잡혔던 폐쇄적 시각에서 벗어나 도시와의 관계 재정립을 시도한다. 농촌이 단순 먹거리의 생산 공급처에서 고유한 농촌의 문화적 역사적 자산을 통해 도시민의 정서적 안식처, 마음의 고향으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 이런 인식전환에 기반해 본격적인 도농교류사업이 시작되어 ‘팜스테이마을사업’이나 ‘녹색농촌체험마을’ 사업이 시행되고 귀농정책 역시 본격화된다.
또한, 이전까지의 국가 주도 사업 모델의 한계를 탈피하고자 상향식 개발 방식이 도입되고 무엇보다 주민 주도성이 강조된 농촌마을종합개발사업이 시행된다. 농촌마을종합개발사업은 이미 분해단계에 들어가 자기완결성이 떨어지는 몇 개 마을을 묶어 지구 단위로 소득사업을 포함한 종합적이고 포괄적인 개발을 도모하게 된다. 하지만 이미 주체가 분해되거나 미약한 상황에서 주민주도성에 기댄 농촌마을종합개발 사업은 쉬 난맥상이 드러났다. 이후 주체 형성을 위한 지역활동가 육성이나 중간지원조직 양성을 포괄하는 신활력프러스사업을 도입하고, 농촌종합개발 사업이 추구했던 포괄적 정책 목표를 세분해서 정확한 정책목표를 타킷팅한 일반농산어촌사업이나 취약지구 생활여건 개조사업, 중심지 활성화사업 등등 다양한 정책들이 수행되게 된다.
2020년대에 들어서면서 지난 50년 동안 수행된 농촌개발사업의 성과와 한계를 딛고 새로운 미래를 모색하는 과정에서 “농촌공간 재구조화 및 재생지원에 관한 법”, 일명 ‘농촌공간계획법’이 수립된다. 이는 지금까지의 농촌개발 개념을 획기적으로 전환하며 한국의 농촌지역개발사업의 역사에서 한 획을 긋는 분기점이 된다.
가장 중요한 전환은 농촌개발사업에 ‘과정’의 개념이 도입된 점이다. ‘마을’은 생성, 발전, 쇠퇴의 과정 속에 있고 ‘농촌개발’은 단지 그 지속가능성을 확보하기 위한 활동에 다름 아니기에 완결된 단일 사업의 관점이 아니라 흐름과 과정의 관점에서 농촌개발사업을 바라다 봐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지금까지 수행된 단기적인 사업 기간과 협소한 시각으로 일정한 예산을 한정된 시간에 소진해서 물리적 건축물이라는 성과를 산출하는 기계적 작업으로서의 농촌개발은 멈출 때가 되었다는 자기 비판적 인식이 전제된다. 이제 농촌개발은 ‘과정’의 관점에서 인간의 삶의 기반인 농촌공동체가 갖는 지리적 공간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포괄하는 인문사회학적, 역사적 공간 안에서 이루어지는 인간 행위라는 인식이 전제될 것을 요구받게 된 것이다.
그리고 법령의 이름에서 드러나듯 ‘공간’을 농촌개발의 핵심 개념으로 세운 점이다. 지금까지의 농촌개발은 ‘점’개발적 측면이 강했다. 단일한 건축물이 완결된 단일 사업의 결과물이 되는 방식의 농촌개발은 중복개발과 난개발, 저개발이 혼재하는 공간적 부조화와 난맥상을 초래했다. 한정된 자원을 투여해 인간 삶의 질을 향상하기 위한 개발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3차원적 공간개념에 기반해 삶터, 일터, 쉼터로서의 농촌다움을 북돋울 정책적 방안이 마련될 필요가 있었고 ‘농촌공간계획법’은 그와 같은 요구에 부합하기 위해 입법된 것이다. 농촌공간계획법이 시행되면 입체적 ‘공간’에 대한 인식과 ‘과정’이라는 관점에서 장기적 계획과 3차원적 공간개념에 기반한 농촌공간재생프로젝트가 시행될 예정이다. 농촌개발 영역에서 괄목상대할만한 변화 발전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고 우리 앞에 보랏빛 미래만 놓여있는 것은 아니다. ‘지역개발’의 개념은 변화 발전을 거듭해 왔지만, 정책이 바뀌어도 현장에서는 바뀐 게 아무것도 없다고 느끼는 경우가 많았다. ‘과정’으로서의 농촌개발, 3차원적 ‘공간’개념의 도입이라는 구상이 법령에 머물고 현장에서 작동하지 못할 수도 있다. 사실 정책의 현장 적용성이 떨어지는 경우가 많았고, 현장의 요구에 맞지 않는 법은 그야말로 무용지물이다. 그래서 농촌공간계획법에 따른 시행령, 시행규칙 등에 법의 취지를 살리는 현장의 요구를 담는 작업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리고 소위 말하는 경로의존성 때문에 정책의 의의가 구현되지 못하는 측면도 무시할 수 없다. 사실 걷던 길이 편하고 해오던 방식이 익숙하다. 그것은 우리 인간의 본성에 가깝다. 그러면 어떻게 경로의존성에서 탈피하고 농촌공간 재생의 취지를 살릴 정책수행이 가능하도록 할까?
손쉬운 답을 구할 순 없지만 먼저 내외부 인적 자원을 폭넓게 포괄하면서 주민주도성을 견지하는 사업 설계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인적 자원이 빈약한 마을 현실에서 전적으로 마을주민에게 결정권과 책임을 떠넘길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이를 이유로 행정이나 외부 전문가가 전적인 사업 졀정권을 가지는 것은 농촌개발사업 취지의 절반을 버리는 셈이 될 것이다. 주민과 중간지원조직, 행정 등 다양한 주체가 어우러져 미래를 도모하는 환상의 꼴라보를 만드는 것이 농촌개발 사업의 처음이자 끝이다. 그 과정이 마을 주민역량의 향상으로 귀속되고 새로운 인적 자원을 창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시행착오를 밑바탕으로 폭넓게 정책의 유연성을 확보할 필요가 있다. 정책의 유연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사업 현장의 요구를 행정의 틀에 끼워 맞추거나 요식을 위해 사업 목적을 훼손하는 걸 막아야 한다. 늘 공직자의 직권남용과 주민의 이기심과 편의주의 등에 의해 정책 목적이 훼손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정책 유연성은 사라지고 세세한 사업 지침까지 강제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그러다 보니 실제 주민은 할 일이 많지 않다. 고민도 그렇게 필요하지 않고 소위 성공사례를 따라 하기에 바쁘고 결과적으로 판박이 사업을 양산해왔다. 사업의 목적에 부합하는 사업의 영역을 최대한 열어놓아야 마을사람들은 고민하기 시작하고 고민이 많아야 좋은 생각이 나올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농촌개발의 개념을 획기적으로 확장하기 위한 시도가 필요하다. 이런 조건이 충족될 때 좀 더 정책의 취지를 살리는 모험적이고 진취적인 사업수행이 현장에서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지금까지 마을개발의 개념이 확장되어온 것은 사실이다. 점 개발에서 면 개발, 이제는 3차원적 공간개념까지 도달했다. 하지만 아직은 부족하다. 의료, 교육, 에너지자립, 사회적 자본 형성 그리고 무엇보다 주민의 삶을 담보할 경제, 곧 농업 기반조차 지역개발의 큰 틀 속에서 함께 고민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주민의 삶 전체가 농촌개발 개념 속에 녹아내야 한다. 농촌의 폐쇄적 틀을 넘어 대한민국의 조화로운 발전과 기후위기에 빠진 전 지구적 생태환경 미션까지도 농촌개발 개념 속에 녹아 들여야 한다. 농촌개발은 그냥 농촌의 삶 전체와 관련된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사업의 목적과 성과’에 대한 가치기준, 평가 기준을 바꾸는 것이 필요해 보인다. 실패 사례를 양산하는 기존의 평가 기준을 버리고 ‘실패’조차 마을의 잠재적 자산이 되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 소득 증대나 방문자 증가 등의 기준을 앞세우다 보니 늘 농촌개발사업을 낭비성 예산으로 공격받게 된다. 오히려 내외적 협력과 학습, 그리고 새로운 시도의 경험을 자산으로 하는 사업 수혜 주민의 삶의 질 향상, 행복도 증가, 사회에 대한 공익적 기여가 기준이 된다면 사업도 바뀌고 농촌도 바뀌지 않을까 생각된다.
아직 붕괴될 여지가 남아있다는 사실이 오히려 신기할 지경이지만 여전히 대한민국의 농어촌은 붕괴하고 있다. 공과에 대한 평가가 중요하지만, 농촌개발정책의 실패를 그 원인으로 말하기엔 산업화의 파고가 너무 높았다. 여전히 농촌개발정책은 유효하고 새로운 시대에 맞는 농촌의 대안 모델 제시까지 나아가야 한다. 그 점에서 ‘농촌공간계획법’에 따른 농촌공간 재구조화와 재생 노력은 우리 농촌의 삶을 개선하는데 중요한 기여를 할 것으로 기대되지만 그렇다고 만병통치약은 될 수 없다. 농촌 설계는 국가 설계의 하부 단위에 종속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농촌의 지속가능성이 확보된 국가 미래상을 제시하는 것까지가 농촌을 기반으로 살아가는 우리의 과제가 아닐까 생각된다. 이래저래 농촌 주민은 참 짐이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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