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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30일 집을 나와 201712일 카트만두에 도착, 여정을 시작하고, 228일 집으로 돌아오는 2달동안의 네팔여행을 기록한다. 이 기록은 순전히 우리 부부 자신만을 위한 것이다. 다른 여행자를 위해 정보를 제공할 만치 섬세하게 여행을 기록하지도 못했고, 여행이 끝난 지 7개월이 지나 벌써 흐릿해지기 시작한 기억에 의존하다보니 이 모든 기록의 정확성도 떨어진다. 그래도 내가 늙도록 살아 더 이상 여행을 떠날 수 없을 만치 건강이 악화되었을 때 그나마 위안받을 수 있을 나만의 화려했던 지난 시절의 기록으로 2달여정의 네팔여행을 남긴다.


사실 5년전 했던 한달간의 안나푸르나 여행후 내내 네팔병앓이를 해왔고, 모든 힘든 순간을 다음 네팔행을 핑계로 이겨왔다. 그래서 네팔은 내 마음의 고향이 되었고 어쩌면 내 인생에 새로운 전기를 줄 미지의 샹그릴라이기도 했다. 지난 5년 막연한 네팔 커피 농장의 꿈을 키워보기도 했고, 지금과는 다른 네팔에서의 새로운 삶을 그려보기도 했다. 이번 여행은 그 가능성을 타진하는 여행이 아니라 그 불가능성을 확인하는 여행이 될 것이라는 예감을 가졌었고 사실 결과도 그랬다. 더 이상 네팔은 나에게 지금의 삶을 대체하는 새로운 삶이 가능한 공간이 아니라 내가 사는 한국과 공존하는 내 삶의 또 하나의 공간으로 자리잡았다.


이번 여정의 큰 얼개는 대충 3축으로 잡았다. 봉화친구들로 구성된 9명의 팀과 함께하는 보름 정도의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트레킹, 그리고 카트만두밸리 중심으로 여러 도시들을 탐방하다 운남여행을 통해 카트만두에 들어올 예정인 한명의 친구와 보내게 될 열흘정도의 도시여행, 그리고 나를 네팔로 안내한 비스타리님과 또 다른 친구한명 그리고 우리 부부가 함께 할 안나푸르나 라운드가 그것이다. 5년전 폭설로 마낭에서 돌아서야했던 쏘롱라는 다시 넘고 묵티나트와 까그베니를 지나 칼리칸다끼 강마을을 걸으며 무스탕을 맛보고 포카라에서 긴 휴식을 가질 예정이었다.


여행은 늘 계획에서 어긋나면서 더 멋지게 된다. 사실 마지막 까지 중간에 보름쯤 시간을 만들어 에베레스트베이스캠프를 걸어볼 마음도 먹었지만 다 포기했다. 여기저기 커피농장도 둘러볼 계획도 무산되었고 먹기여행이자던 다짐도 물거품이 되었다. 그리고 카트만두에서 만난 식중독과 안나푸르나 라운드뒤에 닥친 심한 몸살이 여정의 역동성을 떨어뜨렸다. 더 많이 걷고 더 많은 사람과 풍경을 만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고, 부부만 하던 여정과는 달리 거의 가이드에 준하는 책임을 느껴야했던 일행이 있는 여정은 결국 본전이긴 하지만 잃는 것과 얻는 것이 있었다.



이번 여행내내 여행을 왜 하는지 스스로 묻고 또 물었다. 누구는 삶이 여행이라고 했다. 여행 중에 도 다른 여행을 떠나는 것은 삶이 여행임을 망각해 가는 일상을 깨고 삶 자체가 여행임을 스스로 환기하기 위한 행위인지도 모르겠다. 땅에 뿌리내려야하는 농사꾼이 집만 나서면 마냥 좋고 자유로워짐을 느낀다. 그래서 늘 줄타기하는 인생이지만 그래도 길을 걸으면 내가 가진 모든 갈등과 긴장, 내 생각과 삶이 품은 모순들이 다 조화를 이루고 해결되니 길을 나설 수밖에 별 도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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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으로 돌아가는 날, 아침 늦게 눈을 떴지만 어제와 다른 도시의 분위기가 창으로 전해졌다. 먼저 가까이 타멜거리를 울려대던 택시의 클락션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도시의 하루를 준비하는 분주한 발길도 느껴지지 않았다. 대신 멀리서 군중들이 외침이 느리게 전해져 왔다. 간단히 세수를 하고 짐을 싼뒤 카트만두에서의 마지막 반나절을 누리기 위해 방을 나섰다.

숙소 로비에 내려가니 오늘 카트만두는 총파업중이라고 했다. 모든 택시와 버스가 운행을 중단하니 평소보다 두어시간 서둘러 공항으로 향해라고 했다. 오후 3시 40분에 카트만두 트리뷰반 공항을 이륙, 한국시간 26일 새벽 1시에 인천에 도착예정이니 타멜에서 점심을 먹고 공항으로 나갈려든 계획을 수정해야만 했다. 일단은 상황을 살피러 타멜거리를 나섰다. 지금가지 봐왔던 타멜거리가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우릴 맞았다. 차는 자취도 없이 사라졌고, 식당이며 선물가게며 조그만 구멍가게까지 문을 연곳이 단 한군데도 보이질 않았다. 간혹 릭샤라는 인력거가 지나가곤 했지만 타멜거리는 평소의 번잡함이 싹 가쉰 말쑥한 얼굴이었다. 타멜을 빠져나와 멀리 시위대의 구호가 들리는 곳으로 발길을 잡았다. 대로로 나서자 무장경관들이 군데군데 나와있었고 멀리 한무리의 시위대가 지나가고 있었다. 냅다달려 시위대 근처까지 가서 사진을 찍고 상황을 살폈지만 도대체 저들이 무슨 요구를 걸고 시위를 하는지 도무지 알아낼 재간이 없었다.

두세 무리의 시위대가 여러방향에서 나와 사거리에서 집결해 더 큰 무리를 이뤄 타멜 외곽을 돌아 왕궁쪽으로 행진을 계속했다. 도로에는 간혹 군경을 싣을 트럭과 엠블란스가 싸이렌을 울리며 지나갈 뿐 거리는 차를 대신해 시위대와 시민이 차지하고 있었다. 차로부터 해방된 도로를 걸으니 이유를 알 수 없는 해방감이 나의 가슴에도 벅차올랐다. 시위대를 마냥 따라갈 수도 없었고, 오늘 카트만두의 상황을 살펴보고 택시나 버스없이 공항으로 나갈 방법도 알아볼 겸 다시 숙소로 돌아왔다. 숙소의 스텝이 전한 이야기로는 오늘 시위가 석유값 폭등에 따라 생활이 어렵게 된 운전자 노조를 중심으로 조직되고 있다고 했다. 네팔은 모든 노동자조직, 시민조직, 기타 단체들이 잘 조직되어 있는데 이번 이슈에 동조해 전국적인 총파업이 일어나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오전 동안 카트만두 시내를 더 돌아다닐려고 했던 계획은 물건너갔고 어떻게 안전하게 공항으로 달려갈 것인가가 문제가 된 상황이었다. 하지만 스텝이야기로는 총파업은 일상적인 사건에 불과하고, 여행자들은 위해서는 별도의 셔틀버스가 운행되기 때문에 큰 걱정은 하지 말라고 했다. 타멜초크 지나 어제 방문했던 '꿈의 궁전'근처에 가면 타멜과 공항사이를 운행하는 임시 셔틀버스가 거의 30분 간격으로 운행된다는 것이었다. 최악의 경우 걸어서라도 갈 수 있을 만치 넉넉한 시간을 두고 공항으로 갈 방법을 찾으려고 했는데 이외로 쉬운 해결책이 있어 안도했다. 그렇지만 교통수단이 없고, 모든 가게며 관공서 공원까지도 문을 닫은 카트만두 시내를 둘러 볼만한 흥도 나지 않았고 또 혹시나 하는 일말의 불안감 때문에 최대한 빨리 공항으로 가기로 마음 먹었다.

셔틀버스가 정차한다는 타멜입구쪽으로 가니 벌써 여행자들이 배낭을 매고 끌고 불안한 표정으로 몰려들기 시작하고 있었다. 수십명의 무장경관들이 무료한 표정으로 거리를 지키고 있었고 멀리 시위대의 함성이 간간히 들려오기도 하는 타멜입구는 평소의 번잡함이 사라져 오히려 공기도 맑고 햇살도 투명해 더 평화롭게 느껴졌다. 일시에 외국인 여행객들이 몰려들어 조금 어수선해지기 시작할 무렵 [투어리스트 버스]가 도착했다. 한대의 버스가 떠난뒤 또 한참을 지난뒤 두번째 버스가 도착했을 때 우리부부도 잽싸게 줄을 서고 버스에 오를 수 있었다. 버스는 3명의 무장경관이 동승해 시위대가 점거한 거리를 살피며 버스를 호위했다. 버스는 시위대가 막아선 길을 피하기 위해선지 아니면 또 다른 호텔에서 외국인을 싣기위해선지 큰길을 피해 골목같은 우회로로 돌아 몇번을 정차해 승객을 더 싣은 뒤 공항에 도착했다.

트리뷰반 공항은 삼엄한 경비속에 많은 여행객들로 붐비고 있었다. 1층 로비에 들어가기 위해서 먼저 여권을 검사하고, 1층에서 발권뒤 탑승구가 있는 2층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트 앞에서 또 무장경관이 여권과 항공권을 검사했다. 1층로비에서 안나푸르나 라운드 때 차메에서 만났던 학생 커플을 반갑게 만나 같이 햄버거로 아침을 떼웠지만 공항청사안에는 제대로된 식당도 매점도 없었다. 생각보다 너무 빨리 공항에 도착하는 바람에 서너시간을 공항 청사안에서 지내야만 했다. 청사안은 일반적인 국제공항에 비해 좁고 빈약해서 별다른 놀거리가 없었다. 시골의 버스터미날 수준의 조그만한 매점에서 사먹을 수 있는 것이라고는 맛없는 햄버거가 거의 전부였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발권을 하고 승강구가 있는 청사 2층으로 올라갔다. 조금 더 큰 매점과 레스토랑 그리고 선물을 살 수 있는 가게들이 있었지만 특별히 돈을 쓸 일이 없었다. 쓰고 남은 네팔돈을 기부받는 함이 2개 있었는데 한개는 적십자가 그려져 있었고 또 한개는 무종교를 표방한 기부함이었다. '신없는 성덕'을 꿈꾸는 나는 무종교를 표방한 함에 남은 네팔 돈을 넣었다. 공항에서 만난 한국인 모녀여행객으로부터 여행사에서 제공한 도시락을 얻어 먹고 청사안을 수십바퀴를 돈 뒤에나 비행기에 올라 한국으로 향할 수 있었다.

 

 

비행기가 카트만두 상공으로 솟아오르자 멀리 우리가 걸었던 안나푸르나와 함께 에레레스트 산맥이 눈에 들어왔다. 알 수 없는 벅찬 감정이 마음을 흔들었다. 살아생전에 꼭 하고 싶었던 어떤 일을 끝낸것 같은 성취감이 아니라 안나푸르나에서 보낸 시간과 그 시간속에서 보낸 나의 삶을 놓아두고 떠나는 아쉬움이 밀물같이 몰려왔다. 멀리 사라져가는 히말라야 산맥을 바라다보며 살아온 날에 대한 고마움과 살아갈 날에 대한 희망을 되새기며 얇은 잠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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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국 하루전이라고 급할 것은 없지만 마지막 남은 시간을 아껴 숙소를 나섰다.  타멜거리로 나와 아침 일찍부터 문을 연 베이커리에서 따끈따끈한 빵과 진한 커피를 들고 여분의 빵을 가방에 담아 길을 나섰다. 갓 깨기 시작한 타멜거리에는 택시들이 늘어서기 시작했다. 빵집을 나서자마자 택시를 잡았다. 좁은 택시 안에 굵은 향을 2개나 피우고 있던 기사와  300루피에 흥정을 하고 보드낫을 향했다. 역시 난폭운전을 했다. 제발 천천히 가자고 외쳤지만 그는 'God bless you!'를 읊조리며 전혀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그는 지름길인지 좁은 골목으로 접어 들어 노폭에 아랑곳없이 과속과 곡예운전으로 금새 보드낫에 도착했다.

보드낫은 네팔의 사원답게 문앞부터 아수라장이었다. 택시와 사람, 상인과 순례객, 네팔리와 관광객이 뒤엉킨 사이를 뚫고 정문을 향해 다가가자 거지와 사두들의 내민 손이 정신을 빼놓았다. 1인당 160루피의 입장료를 내고 들어선 보드낫은 사진을 통해 미리 낯을 익힌 반구형의 탑을 중심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행렬이 이어지고 있었다. 부처의 눈을 그려놓은 탑은 거칠지만 위엄있고, 단조로운 형태지만 나름 조형미를 갖추고 있었다. 네팔내 최고의 티벳 불교 성지로 알려진 보드낫은 종교를 넘어 티벳 문화와 삶, 전체를 느낄 수 있는 특이한 곳이었다. 머리 장식을 유별나게 하는 네팔 젊은 남성들의 모습도 눈에 띄이고 티벳 승려의 행렬도 이어졌다. 병든 노인네들의 힘겨운 발걸음과 젊은이의 발길 또한 붐비는 보드낫의 풍경은 어쩌면 '티벳'에서 종교의 지배력을 잘 드러내 주는 곳이기도 했다. 티벳 불교에 대해 아는 바가 없지만 스투파를 둘러싼 종교 물품을 파는 가게며 관광기념품 가게며 레스토랑, 호텔의 모습 그리고 보드낫 구역에 속하면서 원형 스투파와 그를 둘러싼 원형의 상가건물뒤 골목으로 들어가면 다양한 채소와 생활용품을 파는 시장이 들어서 있었다. 식육점까지 버젓이 사찰의 영역안에서 조금도 어색하지 않게 공존하면서 또 다른 내세의 삶을 꿈꾸게 만드는 티벳 불교는 이미 '종교'가 아니라 티벳탄의 삶 자체로 보였다. 또한 티벳불교는 티베탄에겐 이미 정치적, 현실적 권력이기도 한 것 같았다.

전날 파샹을 만났을 때 오늘 파샹 역시 보드낫에 올 일이 있었다고 했지만 우리가 보드낫을 떠나기전까지 파샹을 만날 수 없었다. 우리가 너무 이른 시간에 보드낫에 왔기 때문인 것 같았다. 다시 택시를 타고 퍄슈파나트로 향했다. 보드낫에서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있는 파슈파나트는 네팔 흰두교도의 성지로 나는 그냥 흰두교식 '화장장'으로 알고 있던 곳이었다. 사원은 역시 입구부터 상인과 사두들, 그리고 거지와 순례객에다가 우리같은 관광객들까지 뒤엉켜 장터를 이루고 있었다. 한사람당 500루피의 입장료를 내고 사원을 들어서니 가족을 잃은 슬픔을 종교적 의식을 통해 극복하고자 하는 망인의 가족들과 더불어 이 모든 과정에 개입하여 삶을 이어가는 사두와 점성술사 그리고 자칭 '가이드'들의 발길 또한 분주했다.

매표소에서 부터 우리를 따라 나선 '가이드'는 시간당 얼마간의 돈을 요구하며 조금은 성가시게 따라 붙었다. 거부의사를 밝히자 그는 떨어져 갔지만 또 다른 가이드가 다시 우리를 따라 붙었다. 한국어가 농통하지는 않았지만 기본적인 단어는 구사하는 네팔리였다. '화장', '제사', '부자;, '보통사람', '시체' , '3시간', '오천루피' 등의 단어를 구사하며 다가선 두번째 가이드마저 사양했지만 그를 통해 나는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부자를 화장하는 곳과 보통 사람을 화장하는 곳이 다르고, 보통사람들은 오천루피의 비용을 내고 화장을 하고, 시신을 화장하는데는 약 3시간 정도의 시간이 걸리고, 강 한쪽의 사각형 돌판은 화장을 하는 곳이고, 맞은 변 둥근 돌판은 제사를 지내는 곳이라는 사실까지 고스란히 그를 통해 들었지만 나는 팁도 주지않고 그를 내쳐버렸다. 누군가에게 서비스를 받고 돈을 지불하는 일에 익숙하지 않다보니 가이드의 도움을 받는 일이 왠지 어색하기만했다. 구체적인 지식을 얻지 못하더라도 그냥 혼자 조용히 사원의 분위기나 살피며 걷고싶기도 했다. 나중에 생각하니 내가 너무 위축되어 가이드를 거부한 것은 옳지 않은 선택으로 여겨졌다. 혹시라도 이와 비슷한 다음 기회가 있다면 꼭 가이드비를 부담해서라도 도움을 받기로 마음 먹었다.

파슈파티나트의 화장장은 흰두들이 성스러운 강으로 여기는 갠지스강의 지류인 바그마티강을 따라 늘어서 있었다. 파수파티나트를 가로 지르는 바그마티강은 작은 규모에다 수량도 많지 않았고, 시신을 태운뒤에 쓸어넣은 쓰레기와 위에서 부터 유입되는 생활폐수 등으로 강물이 시커멓게 썩어 있었다. 하지만 그 더러운 강물로 시신을 닦는 의식을 치루고 그 강물로 세수를 하고 몸을 씻으며 흰두들은 마음의 평화를 얻고 있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그 강물에 들어가 시신에서 나온 금이빨 같은 것을 얻기위해 강바닥을 뒤지고 있었다. 성스러운 바그마티강에 들어가 하루종일 강바닥을 뒤지는 사람들은 강물에 오래 머문 만치 더 많은 시바신의 가호를 받고, 동시에 강을 통해 물질적 구원까지 받고 있었다.

화장장을 들어서니 막 불붙기 시작한 시신과 다타들어가 뼈만 남은 것 같은 시신 그리고 저멀리 막 종교의식을 치루며 화장을 준비하는 한무리의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화장을 진행하는 사람은 시신이 타들어가는 모습이 흉칙하게 드러나지 않도록 계속해서 시신에 짚을 얹었다. 이전에 덜 탄 시신의 일부를 원숭이들이 들고 다니며 뜯어 먹는 경우도 있다고 들은 적이 있었는데 사원안을 돌아다니는 원숭이 떼가 많았지만 다행히 화장터까지 접근하는 놈은 없어 보였다. 화장중인 시신들은 지키고 있는 가족이나 지인들이 많지 않아 보였는데 화장을 준비하며 종교의식을 치루고 있는 무리는 재법 많은 사람들이 같이 하고 있었다. 죽음이 삶을 이기고, 삶의 증거인 육체마저 지우는 의식이 화장이지만 그래도 한 생명으로 세상을 살다가는 그 순간이나마 누구도 쓸쓸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전의 가난이 죽어서도 계속되고, 생전의 부귀와 영화를 죽어서도 누리는 것을 보면 그래도 죽음보다 삶이 더 강한 것 같았다.

화장을 준비 중인 무리에서 한 여성의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곧 화장을 시작하기위해 강물로 시신의 발을 닦는 마지막 의식을 치루는 과정을 진행하고 있었는데 그녀는 죽은 자의 아내로 보였다. 이제 곧 사랑했던 사람의 시신에 불이 붙고 그가 한 생명으로 이세상을 살았던 물직적 흔적이 지워져버리게 된 순간 그녀는 종교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죽음의 고통 그리고 슬픔에 몸부림쳤다. 결국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죽음의 한계, 그 상실과 잊혀짐의 공포를 어떻게 '종교'가 전부 구제해 줄 수 있겠는가. 정신줄을 놓고 발작적으로 시신을 붙들고 오열라는 그녀의 모습에 나또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애써 눈물을 감추고 바그마티강건너 돌계단을 한참 올라 부도들이 늘어서 있고 그 사이를 원숭이 떼가 한가로이 놀고 있는 언덕위 유적지를 걸었다.

아침 일찍 시작한 여정을 끝내고 타멜로 돌아오니 늦은 점심시간이었다. 안나푸르나 여정을 준비하며 알게 되었던 한국 식당 '소풍'으로 향했다. '소풍'은 산을, 네팔을 사랑했던 남녀가 만나 그 사랑의 증표로 남긴 타멜 뒷골목의 소박한 식당이었다. 산에서 만나 사랑하고, 산에 더 가까이 지내기 위해 타멜에 식당겸 여행객의 쉼터를 열었지만, 아내는 이내 병이 들고 영영 세상을 등져버렸다고 했다. 그들 부부가 꿈꾸었던 '소풍'은 이제 네팔 여성들의 손에 운영되고 있었다. 주인이 바뀌었는지, 어떤 형태로 운영되고 있는 지는 알 수 없지만 여전히 '소풍'은 소박한 쉼터로 우리를 맞았다. '소풍'은 안나푸르나로 히말라야로 떠나거나 되돌아 온 사람들에게 휴식을 취하며 지난 여정을 곱씹고 새로운 꿈을 꿀 수 있게 하는, 산과 세상을 잇는 간이역으로 남아있었다.

소풍에서 '떡뽁기'를 먹고 타멜 거리로 나와 어제 눈여겨 보았던 선물가게에서 작은 목각 몇가지를 구입했다. 생각보다 싸게, 오랜 흥정이 필요없이 새와 소와 물고기, 사자 등의 동물을 부조로 새긴 목각 몇개를 사고나니 작은 배낭이 한짐이 되었다. 숙소로 돌아가 배낭을 내려놓고 다시 타멜 거리로 나왔다. 서점을 들러 네팔 전통문양집고 여신에 대한 책을 사고, 선물가게에서 허브차를 사고, 수퍼마켓에서 유명한 인도산 립그로스인 '립밤'을 샀는데 그래도 시간이 남았다. 남은 시간동안 가 볼 만한 곳으로 [Garden of dreams]로 정하고 찾아나서니 타멜쵸크를 지나 왕궁 쪽으로 방향을 잡자마자 바로 그곳이었다.

높은 담으로 둘러싸진 '꿈의 궁전'은 카트만두 시내를 처음 걸었을 때 이미 그 앞을 지나갔던 곳이었다. 까페와 레스토랑이 있는 작은 공원 정도로 생각하고 들어선 '꿈의 궁전'은 군인인지 경찰인지 정복차림의 근무자가 있고 입장료를 받고 있었다. 매표소를 지나 궁전안으로 들어서니 '꿈의 궁전'은 네팔과는 다른 그리스 로마 시대의 정원인양 서구적 형태의 건축물과 조경으로 꾸며진 대저택으로 보였다. 나눠준 안내문을 보니[꿈의 궁전]은 1920년대 쯤 한 장군의 사저로 지어졌다가 그의 실각으로 방치된 뒤 정부에 귀속되었다고 했다. 그 뒤 호주정부의 지원으로 원래 규모의 절반정도로 복원된뒤 네팔 정부 문부성 관리하에 유료 공원으로 개방하고 있다고 했다.

'꿈의 궁전'은 카트만두의 연장이 아니라 철저히 단절된 서구적 공간으로 다가왔다. 건축물은 물론이고 너른 정원, 정원에 깔린 잔디, 아름다운 조경수들, 장미덩쿨, 분수와 파고라, 벤치등 모든 것이 서구적 조형미를 띠고 있었는데 신기하게도 카트만두 시내 한 복판에 있는 공간이 고요하기기까지 했다. 어느 것 하나 카트만두스러운 점이라곤 없는 '꿈의 정원'이지만 다행히 정원을 노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네팔리였다. 사실 '꿈의 궁전'은 카트만두를 찾고 안나푸르나나 에베레스트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찾기에는 뭔가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서구적 멋을 한껏 낸 정원이지만 서구인이 혹하기에는 뭔가 부족했다. 적어도 네팔을 찾는 서구인 대부분은 특히나 더욱 네팔스러운 것들을 찾아 나설 것이기 때문이다. 정원 구석구석의 벤치에는 청춘 남녀들이 뜨겁게 포옹을 하고 사랑을 속삭이고 있었고 우리는 그 사이를 지나 정원을 한바퀴 돌고 못들어진 야외 까페에서 커피를 마셨다. 해가 떨어지는 카트만두의 별천지 '꿈의 정원'에서 커피 향에 취해 지난 여정을 되돌아보고 내일이면 돌아가야 될 한국에서의 생활을 가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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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안한 잠을 푹잤다. 눈은 일찍 떴지만 잠은 충분했다. 남은 경비를 계산해 보고 필요한 선물목록을 만들고, 남은 일정을 살펴보고 일어나 세수를 하고 전날 사둔 빵으로 아침을 떼우고도  7시가 되지 않았다. 다시 침낭속으로 들어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 '바가바드기타'를 읽었다. 브라만과 아트만, 그리고 현신인의 이야기들, 행동하지도 느끼지도 않는 경지, 절대지... 아침부터 머리가 지끈 거렸다.

8시 30분 더이상 견디지 못하고 숙소를 나왔다. 타멜 거리를 벗어나 오늘 목적지인 세계문화 유산에 등제된 박타푸르행 버스파크를 향해 길을 더듬어 나갔다. 하지만 지도와 실제를 일치시키기엔 지도는 너무 단순했고 길은 너무 복잡했다. 한참을 걷다가 출근중인 행인에게 길을 묻고 우리 위치를 확인해보니 우리는 반대 방향으로 걸어 버스파크에서 더 멀어져 있었다. 박다푸르행 버스 파크는 타멜에서 걸어가도 될 만치 가까운 곳이었는데, 아침부터 지치기 싫어 결국 택시를 타고 버스 파크에 도착했다. 버스를 타고 가다 개통한지 얼마되지 않는 멋진 도로를 달렸다. 네팔와서 한번도 보지 못한 신호등까지 설치되어 있는 도로 곳곳에는 일본의 원조로 만들어졌음을 알리는 안내 간판이 있었다. 버스를 탄지 30여분 지나 박타푸르에 도착했다. 한 사람당 15달러나 하는 비싼 입장료 때문에 잠시 망설였지만 그냥 포기하기엔 너무 아쉬웠다.

막상 박타푸르 구역안으로 들어서니 박다푸르가 왜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고 입장료가 그만치 비싼지 금방 공감이 되었다. 지금은 사라져버린 옛왕국의 영화를 느끼면서 살아있는 문화 유산사이를 걸었다. 박다푸르 구역내의 모든 건물은 대부분 붉은 벽돌로 지어진 2백년이상된 건물들이지만 여전히 사람이 살고 있었다. 전시용 으로 만든 '민속촌'이거나 거주민이 없이 보전되고 있는 박제화된 유적지가 아니라 그대로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시가지 자체가 그냥 살아있는 문화유산이었다. 카트만두 시내에서 만난 아산바자르의 골목에서 보았던 낡은 건물의 때묻고 썩고 삯은 문지방, 갈라진 벽돌 그리고 골목을 넘쳐나는 쓰레기와 가난한 네팔리의 삶은 지금은 사라진 네팔의 옛 영화를 증명하기에 조금은 부족해 보였다. 하지만 박타푸르에 들어서자 여전히 가난한 사람들의 삶이 가감없이 드러나는 중에도 밀집한 적벽돌 건물과 사원, 탑과 길을 덮은 붉은 벽돌의 화려한 문양 등이 지금은 떼가 타고 낡고 삯았지만, 한 때 이 왕국이 얼마나 번창했고 아름답고 위대한 문명을 자랑했는지 쉬 느낄 수 있었다.

아침 일찍 박다푸르를 찾은 덕분에 우리가 도착했을 때 구역내에는 관광객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다행히 관광지가 아니라 주민들의 삶의 터전인 박타푸르의 모습을 느낄 수 있어 오히려 좋았다. 등교하는 학생들과 출근중인 주민들의 분주한 발걸음으로 고색창연한 박다푸르는 삶의 훈기가 돌고 생동감이 넘쳐났다. 오늘 하루 다른 일정은 전혀 잡혀있지 않았고 오직 박다푸르만 보고 느끼고 걸으면 되었기 때문에 출근길에 바쁜 네팔리 사이로 너긋하니 골목과 광장을 오가며 박다푸르의 과거와 현재를 소요했다. 골목 모퉁이에 차려진 구멍가게의 물건들을 살피고, 시골장터같은 골목을 지나면서는 우리 역시 장보러 나온 사람마냥 네팔리와 휩쓸려 난전을 두루 살폈다.

 

시간이 지나고 하나둘 관광객의 발길이 늘어나자 우리는 다시 그들과 어우려져 관광객의 눈으로 다시 박다푸르를 보기 시작했다. 같이 광장을 가로지르며 탑과 석조 조형물을 배경으로 사진도 찍고, 군인들이 경비중인 흰두사원을 이교도가 들어갈 수 있는 지점까지 들어가도 보고, 박다푸르의 과거와 현대의 예술작품이 동시에 전시되어 있는 박물관도 들렀다. 광장은 점점 더 관광객의 발길이 늘어났지만 의외로 박물관 안은 한적했다. 사실 박물관 안에 전시된 작품보다 박물관 바같에서 만날 수 있는 네팔리의 삶과 삶을 이어가는 공간, 그리고 삶이 묻어나는 각가지 생활용품, 장식 등이 더 예술적이라서 굳이 박물관에 입장료를 내고 들어올 필요가 없는지도 물랐다. 박물관에 전시된 작품보다 전시공간이 된 건물이 더 멋있는 박물관을 나왔다. 광장을 내려다볼 수 있는 탑에 올라 박타푸르 광장들을 쓸고 지나가는 관광객과 네팔리의 걸음속에 묻어나는 박다푸르의 옛 향기를 맡고, 현재의 삶을 느끼고, 그 미래를 점쳤다.  

박다푸르의 중심 듀발스퀘어에 이르자 수년전 아내가 네팔 여정중에 잠시 들렀지만 정확히 기억해 내지 못해 안타까워했던 네팔의 사원을 회상해 내었다. 분명 카트만두 어디 전통 시장 같은 곳이었다며 카트만두에 도착하자 마자 이야기를 꺼냈지만 아산바자르와 타멜을 포함해 카트만두 시내를 다 뒤지고도 찾아 내지 못한 추억의 장소를 박타푸르에 와서 확인하게 되었다. Cafe Nyatapola! 듀발스퀘어 한켠에 자리잡고 있는 3층 짜리 낡은 목조건물로 바로 그 카페가 아내와 여성문화계 선배 동료들과 함께 티벳을 거쳐 잠시 네팔에 들렀을 때 차를 마시며 네팔의 향기를 느껴볼 수 있었던 곳이었다. 배도 출출해지고 다리고 지쳐갈 즈음 Cafe Nyatapola에 들어섰다. 제일 위층 듀발스퀘어 전체가 내려다 보이는 모퉁이에 자리에 잡아 간단한 샌드위치를 들고 커피를 마셨다. 이제 한가롭게 차라도 마시는 시간이면나의 가슴에는 여행의 설레임보다 끝나가는 여정에 대한 아쉬움이 차올랐다. 다 지나가리다. 하지만 세상의 섭리가 어그러지는 숱한 순간들이 있었듯 내 작은 삶을 이루는 지금의 시간도 잠시 잠깐이나마 흐름을 멈춘다면 얼마나 좋을까...

박타푸를를 빠져나와 타멜행 버스에 올랐다. 버스는 곧바로 카트만두로 접어들었고 트리뷰반 공항을 스쳐지나갔다. 카트만두-박다푸르간 새길을 따라 번화가를 달리자 건물외벽에 늘어선 간판과 광고판이 눈에 들어왔다. 익숙한 삼성과 엘지같은 한국기업은 물론 코카콜라, 소니같은 세계적 자본의 간판이 즐비했다. 척박한 땅 네팔에서도 자본은 자신의 지배 공간을 확장하며 무한 증식을 계속하고 있었다. 익숙한 세계적 자본의 광보판보다 더 인상적인 것은 어학학원을 홍보하는 플랭카드였다. 네팔은 편집광처럼 영어 공부에 몰빵하는 한국보다도 어쩌면 더 외국어 공부에 자신의 미래를 거는 사람이 많은지도 몰랐다. 대부분의 초등학교에서 외국어를 가리키고 아예 '외국어 초등학교'까지 있는 모양이었다. 외국어를 배워 외국으로 나가 돈을 벌고 자신의 꿈을 실현하는 기회를 잡거나, 네팔에 남아서도 관광을 위시한 비지니스에 외국어가 필수적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런지 아니면 영어와 네팔어의 구조적 유사성 때문인지 초급 교육을 받은 정도면 다 영어를 어느정도 구사한다고 했고 실제로 만나보니 그런것 같았다. 대학나온 한국사람보다 초등학교만 나온 네팔사람들이 영어를 더 잘 하는것 같았다.

그런데 학원 안내 플랭카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드러나듯 몇년전부터 네팔에는 한국어 붐이 일어났다고 했다. 한국은 그들에게 기회의 땅이고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고 했다. 네팔리에게 물어보니 일본을 더 선망하지만 일본은 현실적으로 들어가 일자리를 덛기가 너무 힘들고 두번째로 한국을 선호하는데 한국은 자신만 잘하면 들어가 일을 구할 수 있는 현실적으로 실현 가능한 나라로 여긴다고 했다. 그러다보니 최근에는 한국어가 제일 인기있는 외국어가 되었다고 했고, 역시 여행중에 가이드든 포터든 지나는 사람들이건 우리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이야기하면 자가와 말을 걸고 자신이 아는 두어마디의 한국어를 자랑하기도 했다. 박타푸르를 나와 카트만두거리를 달리면서 한국 자본의 힘을 느껴야 하는 이율배반적인 묘한 감정을 안고 타멜에 도착했다.

인드라쵸크, 아산바자르 그리고 타멜거리를 배회하다 다시 J.Vill을 찾아나섰다. 다행히 안나푸르나 라운드 때 차메에서 만났던 한국학생들을 만났다. 참체에서 포카라로 먼저 떠난 학생들은 반디푸르에서 머물다 오늘 카트만두에 들어왔다며 J.Vill의 위치를 알고 있었다. 드디어 파샹을 상봉했다. 혹시라도 카트만두에서 만나 맛있는거 사먹자고 한 약속이 빈말이 될까봐 걱정했었는데 다행히 파샹을 만나게 되어 너무 기뻤다. 파샹과 청량음료와 피자를 먹고 파샹의 소개로 자신의 친구가 운영한다는 '캐시미르 샾'에 들러 야크와 야생 염소의 속털로 만들었다는 머플러를 구입하고 파샹의 삼촌이 운영한다는 여행사에 들러 인사를 나누었다. 파샹까지 봤으니 마음에 남을 일들이 다 다 끝나 마음도 편해졌다. 해도 저물어 숙소에 들러 구입한 선물을 내려놓고 '경복궁'이라는 한식당에 들러 맛있는 된장찌게를 먹었다. 그리고 내일의 여정을 그리며 '네팔짱'의 두번째 밤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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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푸르나의 아쉬운 마지막 밤을 보내고 빗소리 들으며 아침을 맞으니 오늘은 산을 떠나 도시 포카라로 들어서는 날이다. 아침을 들고 서성이다 비가 가늘어지자 과감히 지름길을 잡아 담푸스로 향했다. 담푸스 가는 지름길은 트레킹 코스를 벗어나 수목과 바위가 어우러진 소로들이었다. 간혹 방목중인 소들이 길을 막고 있었고, 논밭이 보이는 언덕위에서 길이 수풀 속으로 사라져 당혹스럽기도 했지만 큰 마을이 인접한 야산을 헤쳐 나가기엔 큰 어려움이 없었다. 담푸스는 차량이 들어올 수 있는 큰 마을이었다. 넓은 비포장길을 따라 형성된 건물은 롯지와 가게를 겸한 주택들이 많았고 수공예 기념품을 만들고 파는 공방도 여럿 보였다. 한 공방 앞을 지나자 젊은 남자가 직접 만들었다는 천 제품을 들어 보이며 한국어로 호객을 하기도 했다. 오스트렐리안 캠프를 떠난지 한 시간도 안되어 우리는 이미 도시로 접어든 느낌이었다. 담푸스를 지나 패디로 향하는 길은 논밭사이의 오솔길과 농가와 농가를 잇는 아름다운 돌길이 이어졌다. 길을 나설 때가지 뿌리던 비가 그치고 투명한 햇살과 따스한 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분명 안나푸르나는 한겨울인데 고도를 낮추어 페디로 접어드니 한국의 봄날처럼 온화한 기운이 넘쳐났다.

오스트렐리안 캠프를 떠난지 두세시간이 지났을까, 페디에서 포카라 나야풀간 도로와 만나는 가파른 돌계단을 내려서자 파샹이 불러놓은 택시가 기다리고 있었다. 택시가 과속과 위험한 추월을 시작하자 이미 습관이 되어버린 요구를 했다. '나는 바쁘지 않으니 천천히 운전해 주세요.' 그래도 그 한마디에 택시는 속도를 줄였고 이내 네팔 최고의 현대적 도시인 포카라에 접어들었다. 포카라 떠난 지 몇일 되었다고 도시의 생동감이 반갑고 북적이는 사람의 발길에 흥이 일었다. 부산한 사람들의 움직임 속에 또 한 사람의 장례행렬이 이어지고, 몰려다니는 아이들의 분주한 동작들이 장례행렬과 함께 어우려졌다. 산은 산대로 아름다워 우리의 발길을 불렀지만 도시는 또 나름의 도시다운 인간미가 넘쳐났다.

 산행전 묵고 짐을 맡긴 '터치 네팔 호텔'에서 짐을 찾아 파샹의 소개로 미리 예약한 '베스트 탑 뷰 호텔'로 향했다. 베스트 탑 뷰 호텔 역시 레이크 사이드의 중심에 있었다. 중급 호텔로 조식 포함 하루 22불에 하루종일 뜨거운 물이 나오고 미네랄 워터가 제공된다고 했다. 밤이면 암흑 천지로 변하는 네팔에서 하루종일 따뜻한 물이 나오는 호텔은 나에게 대단한 호사임이 분명했다. 파샹의 친구가 성수기에 스텝으로 근무한다는 이유로 선택된 호텔이지만 비교적 만족스러웠다.

호텔에 짐을 풀고 레이크 사이드의 거리로 나서니 오후 2시가 지났다. 급한 빨레를 세탁소에 맡기고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식당을 찾아 두리번 거리다가 내일이면 헤어질 파샹을 위해 점심과 저녁 메뉴의 선택권을 주었다. 파샹에게 트레킹 동안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 무어냐고 물었더니 피자라고 했다. 그래서 두어번 롯지에서 피자를 시켰지만 두번 다 맛이 형편없었다. 그래서 파샹에게 포카라 가면 마지막 만찬은 꼭 고급 피자로 하자고 제안했고 파샹은 좋아했다. 역시 파샹은 점심으로 '피자'를 선택했다. 레이크사이드의 한 피자가게에 들어갔다. 유럽풍의 고급스런 분위기에 피자와 햄버거 스파게티까지 하나같이 맛이 좋았다. 파샹도 만족스러워 했는데 특히나 평소에 마음껏 마실 기회가 거의 없는 콜라를 너무 좋아하는 것 같았다.

점심을 먹고나니 거의 3시가 다 되어 다른 일정을 잡기에는 이미 늦은 시간이 되었다. 그렇다고 뚜렷하게 할 일도 없어 마냥 레이크 사이드를 싸돌아 다녔다. 하지만 레이크 사이드는 30분 길게 잡아 1시간이면 넉넉하게 돌아볼 수 있을 정도의 규모에 불과했다. 거리와 접한 2층 가페에서 레이크 사이드 거리의 아름다운 가게와 이곳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바라다보며 향기로운 커피를 마셨다. 거리는 한산했고 네팔리와 관광객의 표정은 여유로왔다. 우리는 세상과 삶의 아름다움을 음미하고, 안나푸르나에서 보낸 여정을 회상하며 포카라에서의 반나절을 향유했다. 다시 거리로 나와 같은 길을 서너바퀴나 돌다가 일몰을 맞는 페와 호수가에 머물렀다.  해지는 페와호수는 부풀은 의식을 잠재우고 들뜬 마음을 가라앉혔다. 호수만치 차분한 마음으로 나는 뜬금없이 고향 진해의 바닷가를 떠올렸다.  순간 갯내음이 입안에 번지고 고향에서 부모님과 살아가고 있는 동생을 생각했다.  그리고 지나간 모든 시간들이 다시 그리워졌다.

호텔에서 쉬고 있기로 한 파샹은 저녁시간에 한국음심점인 산마루 식당에서 만나기로 했다. 파샹이 오늘 저녁메뉴로 'Korean Food'을 원했기 때문이다. 산마루 식당에서 '불고기 백반'을 먹었고 다행히 파샹은 아주 맛있어 했다. 다시 베스크 뷰 호텔로 돌아와 파샹과 커피를 한잔 들며 그동안의 수고에 감사한 마음을 전하며 작별의 아쉬움을 달랬다. 포카라에서 카트만두로 귀환할 버스비와 얼마간의 팁을 주었지만 더 많이 주지 못하는 처지가 못내 아쉬웠다.

이번 여정이 즐거울 수 있었던 것은 단연 파샹을 만난 행운 때문이었다. 늘 즐거운 표정으로 씩씩하게 앞서 나가며 우리 부부의 모든 편의를 살펴주었던 파샹이 없었다면 이번 여행의 묘미는 반감되었을지도 모른다. 네팔의 정치적 상황과 네팔 청년의 고민을 나누며 네 딸이 살아갈 한국과 파샹이 살아갈 네팔의 현실을 비교하며 안타까움을 나눴고, 우리 모두의 행복한 미래상을 같이 그려보던 시간이 그리웠다. 마낭을 오르고 다시 내려오던 길에서 맞은 눈보라 속에서 파샹과 우리 부부는 트레커와 포터가 아니라 도반이자 가족이 되었다. 서로의 안전을 보살피며 서로의 즐거움을 북돋기 위해 애써던 시간들은 우리 부부가 살아가는 동안 내내 그리움으로 되살아 추억이 되었다.

집을 떠난지 처음으로 산마루식당의 전화를 빌려 딸 아이와 통화를 했다. 다행히 잘지내고 있다고 하고,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외할머니도 잘 신다는 소식을 받으니 조했던 시간들이 뒤로 밀려났다. 내 전화는 네팔에 입국하자마자 먹통이 되었다. 아내의 전화기가 있긴 했지만 와이파이 존은 없고, 3G망은 요금이 무섭고, 요금을 따로 내고 롯지에서 충전을 했지만, 산이 높아 아예 먹통이 된 전화 핑게로 집 나온지 22일 만에 딸한테 안부를 묻게 되었다. 롯지에서 요금을 내고 유선전화를 사용할 수도 있었지만 사실은 그냥 한국으로 전화하기가 싫었다. 혹시라도 아주 나쁜 소식이 있어 여정을 중단하고 돌아가게 되거나, 소소한 문제들이 있어 내가 여기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이 걱정만 떠안게 되는 그런 상황이 싫었다. 오로지 그냥 연락을 끓고 여정에 몰두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늘 딸아이에 대한 걱정은 목에 걸린 생선까시처럼 가쉬지 않았다. 여행내내 따라다니던 생선까시가 전화 한통화로 쏙 빠져 버렸다. 날듯이 마음이 가벼워졌다.

파샹과의 마지막 저녁을 먹고 호텔로 돌아왔다. 하루 22불자리 호텔이라고 그래도 무료로 카메라 밧데리 충전이 되고, 온수가 나오고, 아침식사가 나오고, 인터넷이 되었다. 로비에 놓인 1대의 컴퓨터에는 늘 사람들이 붐볐다. 호텔을 들고 나면서 계속 컴퓨터를 차지하기 위해 노렸지만 내 차례는 돌아오지 않았다. 스텝에게 물어보니 오후3시부터 초저녁 정전전까지 컴퓨터를 할수 있다고 했다. 3층 객실에서 로비까지 몇번을 들락거린 끝에 컴퓨터 앞에 앉을 수 있었다. 카메라 메모리를 백업하려 시도했지만 파일은 많고 속도는 느려터져 중간에 포기하고 말았다. 파일 복사중에 웹브라우즈를 열고 비나리마을 홈페이지와 네이버에 연결을 시도했다. 무려 23일만의 인터넷 접속이었다. 가슴이 한정없이 두근거리고 밀려났던 나의 삶들이 한꺼번에 죄여오는듯 갑자기 나의 삶의 무게가 중력을 얻었다. 고산 체질인가? 고산지대에서는 고산증을 전혀 느끼지 못하다가, 저지대로 오니 갑자기 나의 삶이 버겁게 다가온다. 멀리 보냈던 현실이 컴퓨터를 만지는 순간 나의 코앞으로 바짝 다가왔다. 알수 없는 긴장이 나의 몸을 감싸고 여행후 처음으로 가벼운 복통이 일어났다. 신경증이다. 초조와 불안은 내 삶의 필수불가결한 현실인가보다. 마을 홈페이지는 첫화면에서 멈춰 자유게시판의 게시물 목록만 조금 보이다 만다. 재부팅을 하고나서 다행히 네이버에 접속이 되었다. 눈에 띄는 뉴스가 보였다. '곽노현 첫출근'... 순간 반가왔다. 하지만 이어 선정적인 중앙일보기사가 눈에 띄인다. '곽노현 사건 판결 판사 알고보니...'아마 또 자기들의 입맛에 맞지 않는 판결을 내린 판사에 대한 사상검증 시비일 것이다. 뉴스를 클릭했지만 컴퓨터가 또 다운이다.

마을 홈페이지에 인사를 남기고, 나의 블로그와 페이스북을 들어가 보겠다던 기대는 포기하고 룸으로 돌아왔다. 온수로 샤워를 하고 양말을 빨고, 아내와 내일 새벽 파샹을 떠나 보낸 뒤의 우리 일정을 논의 했다. 이제 우리는 안나푸르나에서는 완전히 벗어났다. 우리에게는 네팔 최고의 현대도시 포카라와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라는 도시에서 보낼 수 있는 다섯밤과 여섯 낮이 남아있다. 어떻게 배분하고 무엇을 하며 보낼지 궁리를 하다가, 참체에서 만난 호주인이 권해서 염두에 두었던 반디푸르 여정을 포기하고 일단 내일 하루는 포카라의 박물관을 순례하고, 그 다음날 카트만두로 '투어리스트 버스'를 타고 가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파샹이 떠난뒤 영어도 네팔어도 안되는 우리 부부의 여정이 조금은 불안하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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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 잘 자지 못했다. 평소보다 제법 늦게까지 다이님룸에서 다른 트레커들과 노닥거리다 방에 들었지만 옆방에 든 호주트레커들이 늦게 까지 떠들어 되었다. 지금까지 묵은 롯지 대부분은 방과 방사이 벽체를 합판 한장으로 막아놓았는데 이곳 히말라야 롯지도 마찬가지였다. 또 벽쪽으로 침대가 붙어 있어, 마찬가지로 옆방의 침대가 합판 한장 넘어 붙어있다보니 밤이 깊어 조용해지면 옆방 손님의 숨소리까지 들릴 정도였다. 그런 방에 묵을수록 소음을 내지 않기 위해 신경을 써야하는데 옆방의 청년들은 전혀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여행 초반에 티망의 롯지 2층에서 묵을 때 밤에 잠시 화장실을 다녀온 적이 있었다. 그런데 다음날 1층에서 묵었던 네팔리들이 내가 밤새 쿵쿵 거리고 돌라다녀 자신들의 잠을 깨웠다며 항의성 농을 걸었다. 사실은 내가 아니고 옆방의 트레커가 배탈이났는지 밤새 들락날락 거린 거였다. 아뭏튼 롯지는 최소한의 재료로 만든 숙소기때문에 단열이나 방음 같은 거는 전혀 고려치 않고 지은 집이다. 그래서 늘 옆방에 젊잖은 손님이 들기를 기원해야하는데 어제는 재수가 없었다.


찌뿌등한 몸을 이끌고 밤새 눈이 내린 길을 나섰다. 여전히 눈발을 계속 휘날리고 안나푸르나 연봉들은 구름 속에 사라지고 없었다. 흰쿠동굴에 이르자 상행인 트레커들이 소복히 바위 아래 모여 있었고, 잠시 쉬는 사이 하행길 트레커들도 바위 밑으로 모여들었다. ABC(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상황이 궁금했는데 무사히 다녀오는 사람들은 만나니 조금은 안도가 되었다. 그들 대부분은 한국인이었다. 하행인 트레커들은 조금은 과장된 표정으로 자신들이 얼마나 힘들게 다녀왔는지 이야기했고, 그리고 기상으로 봐서 오늘 상행인 사람들이 베이스캠프에 도달할 수 있을 지 걱정이라며 겁을 주었다. 사실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고도가 4200m라는 사실도 조금은 부담스러웠고, 꼭 거기까지 가야할 이유도 없었기에 MBC(마차푸차레 베이스 캠프)에서 머물고 내일 아침 일찍 배낭을 두고 안나푸르나 베이스 캠프까지 다녀오는 것도 괜찮다는 생각도 있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오늘의 기상과 다른 여건의 변화에 달려 있는 것이기에 그대까지 어떤 결정도 내리지 않았다.


흰쿠동굴을 떠난뒤 곧 바로 데우랄리에 도착했다. 눈발을 계속 굵어지고 그만치 시야는 점덤 좁아져 갔다. 뜨거운 블래티를 한잔하고 온수로 물통을 채웠다. 시누와를 지나면서부터 1리터 페트병에 담긴 공산품인 미네랄워터는 더이상 팔지 않았다. 지고 올라오기가 불가능하다는 이야기다. 대신 '따토파니'라고 자연수를 끓여서 팔았다. 미네랄워터보다 값은 싼데 물맛은 별로고 간혹 모레같은 불순물도 보였다. 사실 네팔리들은 그 물을 끓이지도 않고 그냥 마시는데 아무런 탈이 없다. 하도 여행안내정보에서 자연수를 마시지 말라고 해서 계속 미네랄워터만 사서 마셨는데 좋은 선택인지는 잘 모르겠다.


히말라야에서 흰쿠동굴을 지나 데우랄리까지 꼭 2시간이 걸렸다. 쉬엄쉬엄 걷기도 했고 눈때문에 빨리 걸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데우랄리를 나와 마차푸차레 베이스캠프로 향했다. 밤새내리던 눈은 하루종일 끊이질 않았고 고도를 높일수록 점점 더 거세졌다. 데우랄리를 지나면서부터는 설경이 눈에 들어오지 않고 오직 맹목적인 걸음에 몰두하게 되었다. 마음속에 조금의 두려움도 싹트고, 특히나 데데우랄리지나 MBC가는 계곡에서는 나도 모르게 마음이 달아오르고 서둘기까지 했다. 파샹 이야기로는 삼년전 바로 이 계곡에서 눈사태로 십여명이상의 트레커와 포터가 목숨을 잃었다고 했다. 사태가 일어난 코스는 약 15분 걸리는 계곡길이었는데 왼쪽 사면의 경사나 쌓인 눈을 봐서는 사태가 일어날 지역같지 않았다. 파샹에게 물어보니, 그 경사의 상단부에 눈이 쌓였다가 일시에 무너져 내리는 특수한 지형탓에 사고가 잦다고 했다.


데우랄리에서 MBC까지 다시 2시간이 걸려 오후 1시경 MBC에 도착 했다. ABC에서 이제 막 도착했다는 한국인 남성 한분은 거의 사력을 다해 내려오다 여러번 넘어지고 굴렀다면서 계속 하행을 할지 어쩔지 걱정이 태산같았다. 무리하지 않는게 좋을 듯 했지만 그렇다고 추운 롯지에 계속 머물수도 없는 상황이라 그분은 결국 계속 하행을 하기로 하고 롯지를 나섰고, 다음은 우리가 결정을 할 차례가 되었다. 계속 ABC까지 올라갈지 아니면 MBC에 머물다 내일 아침 ABC까지는 가벼운 차림으로 다녀와서 하산을 할지 아직 결정하지 못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점심을 먹고 나니 더 이상 고민이 필요 없게 되었다. 호주청년, 한국청년 할 것 없이 모두 ABC까지 올라가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고 보니 우리 부부만 덩그러니 MBC에 남을 이유가 없어 보였다. 차라리 먼저 롯지를 나섰다. 우리 포터 파샹은 MBC에 올라온 예닙곱명의 네팔리 중에서 가장 젊었다. 꼭 그래야만하는 것은 아닌것 같았지만 다른 네팔리들이 파샹에게 제일 앞에서 길을 뚫고 나갈 것을 종용했다. 파샹이 맨앞에서 길을 찾고 우리 부부가 뒤따랐다.


MBC부터는 눈발도 눈발이지만 안개인지 구름인지 사방천지에 아무 것도 볼 수가 없게 되엇다. 눈과 구름이 발밑과 머리 위, 그리고 사방에서 우리를 감쌌다. 사방팔방이 흰색이고 우리는 그속에 갇혀버렸다. 사방 10m의 공간에 갇혀 그밖의 상황을 알 수없는 채로 그냥 맹목적으로 걷고 또 걸었다. 길은 눈속에 숨고 산은 구름 속에 숨었다. 사람의 발길은 눈속에 묻혔고, 우리 뒤를 따라 올라오던 트레커들은 안개속에 숨었다가 간혹 흐르는 구름이 엹어지면 나타나기도 했지만 너무 멀리 떨어져 갔다. 나의시야는 1m앞의 발자욱에 묶이고 그 냥 발길을 이어갔다. 아무런 이유도 없다. 합리도 사리도 판단도 없이 그냥 걸었다. 구름속에 잠시 나타났던 ABC는 아무리 걸어도 가까워져 오는 것 같지가 않고 어느새 짙은 구름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이렇게 3시간을 걸으니 멀리 ABC 안내간판이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기쁨 마음에 달려가 아내와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캠프로 올라갔다.


ABC에 도착하자 한치 앞을 볼 수 없게 내리던 눈이 먼추고 잠시 구름이 물러났다. 역시 우리는 운이 좋았다. 눈때문에 산을 볼 수 있을 거라는 기대도 없이 올라왔는데 석양을 받고 황금빛으로 피어나는 마차푸차레와 안나푸르나가 우리를 반겨줬다. ABC는 나같은 일반인이 안나푸르나봉에 접근할 수 있는 최고의 한계다. 5분정도 걸어서 View Point까지 가면 숙소 보다 해발이 조금 더 높아지겠지만 하여튼 안나푸르나 베이스 캠프에서 안나푸르나정상으로 진입해 들어가기 위해서는 엄격한 기준에 따라 당국의 허가를 받아야한단다. 몇명의 셀파에 적지않은 입산료, 보험료 등을 부담해야되지만 무엇보다 자신의 생명을 담보하지 않으면 접근할 수 없는 지역이기 때문이다.


캠프에 도착하니 롯지 두군데가 문을 열고 있었다. 호주팀을 다른 롯지로 가고 우리 부부는 파샹의 권유로 캠프입구 오른쪽 롯지에 들어섰다. 이어서 한국인 여성 한 분이 들어오고, 해가 떨어질 무렵 한국 청년 커플까지 도착했다. 방은 배정되었지만 아예 방을 둘러보지도 않았고 저녁내내 다이닝 룸에서 지냈다. 4,200미터의 고도 때문에 모두 얼굴이 대문짝만하게 부풀었고, 또 고산증의 위험때문에 술도 한잔 나눌 수 없었지만 모두다 추운 방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눈꼽만치도 없어 보였다. 급기야는 네팔 여행을 떠나와 처음으로 다이닝 룸의 길다란 의자에서 롯지 식구와 한국인 트레커 그리고 네팔리 포터들 까지 모두 같이 자기로 했다. 외국에서 오랫동안 노동자 생활을 하셨다는 사오지는 이불까지 내놓으면 편의를 봐주셨다. 이렇게 내 생애 최고의 고지에서 얇지만 편안한 잠을, 꿈길 사나왔지만 마음 따뜻한 밤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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촘롱을 벗어나기위해 Chhomrong Khola(촘롬천)까지 2,400여개의 돌계단을 걸어 해발 600m 정도를 내려갔다. 한 숨을 돌리고 다시 가파른 오르막 길을 힘겹게 걸어 고도 800m 정도를 올리니 Upper Sinuwa다. 촘롱과 시누와 사이의 계단길은 알려진 데로 가히 '죽음의 계단'이라고 말할만 했다. 길이 오르락 내리락하면서 피곤한 근육도 풀리 숨도 돌리고 해야하는데 오르막이든 내리막이든 한 방향으로만 계속 이어지면 그땐 걷는 맛이 죽을 맛이 된다. 오늘이 그랬다. Siwal에서 간드룩 가는 길이 그랬고 오늘 촘롱에서 시누와가는 길이 그랬다. 그보다는 덜했지만 Bamboo를 향해 이어지던 내리막 돌계단도 만만하지가 않았다. 내리막길이 하행길에는 다시 오르막으로 변해 있을 것이다.


아내는 파샹이 말한 계단의 수가 맞는지 세어본다며 촘롱천까지 내려가는 길에 아무 말이 없었다. 계단 수를 세어보는 아내를 방해하기 위해 말을 걸어도 단답형 대답만 하고 이내 계단 세기에 몰두했다. 결국 끝까지 계단을 세어 본 아내는 계단이 넓어 서너발씩 걸은 칸을 고려한다면 대충 맞는 것 같다고 했다.


시누와에서 물을 마시고 잠시 쉬었다. 포카라 호텔에서 20루피하던 1리터짜리 미네랄워터가 간드룩부터는 120루피 이상 했다. 파샹은 비싼 물을 얻어 먹는게 부담스러웠는지 내외국인 이중가격제를 이용해 자신이 물을 살테니 저녁 때 돈을 계산해 달라고 했다. 나는 'Good idea!'라고 답했고, 이후 반값에 물을 먹을 수 있었지만 이 역시 오래가지 못했다. 도반에서부터는 롯지 주인이 네팔리가 미네랄워터를 사서 먹을 리가 없다는 이유로 파샹에게 물을 팔지 않겠다고 했기 때문이다. 역시 장사하는 사람은 눈치가 빨랐다. 그러고 보니 롯지에서 네팔리에게 미네랄워터를 반값인 7~80루피에 팔아서는 전혀 이문이 없는 것 같았다.


안나푸르나 베이스켐프에 다가갈수록 당연히 고도가 높아진다. 오늘 묵게 된 히말라야 마을은 해발 2900m. 그런데 고도가 높아지는 꼭 그만치 물가도 따라 올랐다. 방값, 물값, 음식값 모두 비싸다. 시누아까지는 조랑말이 들어온다고 했다. 거기서부터는 식자재며 생활용품을 모두 사람이 직접 지고 날라야한다. 조랑말과 사람이 직접 날라온 식재료로 만든 음식을 싸니 비싸니 말하는 것도 우습고 당연히 고마운 마음으로 받아들여야할 것이다. 내일 도착할 MBC(마차푸차레 베이스캠프)나 ABC(안나푸르나베이스캠프)는 여기 히말라야 보다도 훨씬 더 비쌀 것이란다. 당연할 일이다.


오늘 점심을 먹은 밤부에서 파샹도 달밧을 250루피나 주었단다. 투어리스트에세 350루피를 받으니 포터에게는 단지 100루피만 깍아준 셈이었다. 라운드 코스에서는 투어리스트 2명을 대동한 네팔리에게 방값과 음식값을 전혀 받지 않았다. 숙식이 공짜일뿐아니라 특별히 덤으로 다른 서비스를 제공하기도 하는 것 같았다. 최소한 파샹의 달밧에는 우리가 먹는 달밧에는 없는 야크 고기나 계란후라이가 거의 항상 올라가 있었다. 우리 트레커는 왜 '플레인 달밧'이고, 너 파샹은 '스페셜 달밧'이냐며 놀리기라도 하면 파샹은 자기 접시에 올라와있는 야크고기를 아내와 나에게 한조각씩 나누어 주기도 했다. 그런데 ABC코스에 접어 들면서 파샹도 돈을 내고 밥을 사 먹어야 했고, 처음 사울리바자르에서 100루피를 내던 달밧을 이곳 히말랴야에서는 250루피나 내게 되었다. 계속 밥값을 대신 내어줄까 고민하기도 했지만, 이미 숙식비를 포함한 하루 12불이라는 포터비를 지불한 상태고, 또 여정이 끝나면 일정한 팁도 주어야 하기 때문에 그냥 두기로 했다.


ABC코스에 접어들어 오늘 처음으로 다이님 룸에 스토브를 켰다. 스토브는 유료였고, 1인당 100루피씩 이었다. 호주와 영국인팀, 한국인 팀을 합하니 스무명가량되었는데 트레커들에게만 받는건지 네팔리들에게도 받는 건지 알수 없지만 여하튼 100루피씩 받아가지고 비싼 석유값이 충당이 될지 궁금했다. 안그래도 비싼 석유를 말통에 담아 당나귀 등에 지워 시누와까지 나르고, 다시 그 말통을 사람이 짊어지고 이곳까지 날라왔을 걸 생각하니 1인당 100루피가 싸게 느껴졌다. 스토브는 저녁 식사 전에 불을 붙여 식사후 두어시간 켜 주었다. 저녁을 먹고나서 곤한 몸이지만 추운 방으로 돌아가기 싫은 트레커들은 그 시간동안 인사도 하고 여행정보도 나누고 수다도 떨었다. 영어가 능통해서 영국과 호주에서 온 청년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다면, 세계평화에 대해, 영국의 이라크 침공의 부당성에 대해, 신자유주의의 미래에 대해 청년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니 공부 열심히 하지 않은 게 뒤늦게 후회되었다. 다음 여행을 위해 영어공부를 열심히 해야지 하고 또 헛된 다짐을 했다.


이제 내일이면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에 도달할것이다. 이제 긴 여행은 거의 종반으로 접어들었다. 12월 29일 집을 나와 1월 26일 귀가 예정이니 이제 일정이 열흘쯤 남은 셈이다. 나는 그동안 무엇을 얻었을까?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 오는 곳이 아니라 비우러 오는 곳이 네팔이라는데... 나는 그동안 무엇을 버렸는지 모르겠다. 텅빈 머리, 고갈된 열정, 잃어버린 꿈.... 아직모르겠다. 동생에게 떠밀려 시작한 이번 여정의 의미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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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팔로 떠나오기전 인터넷을 뒤지며 트레킹 일정을 준비하면서 알게된 간드룩은 막연하기도 하고 자의적이기도 하지만 이상적인 꿈의 산촌마을처럼 그려졌다. 그래서 꼭 일정에 넣고 싶었고 그리고 하루쯤 머물며 아름다운 안나푸르나 산촌마을의 삶을 느껴보고 싶었다. 눈을 떠자마자 찬바람을 마다하지 않고 창을 열고 마차푸차레가 여명속에서 신비한 자태를 드러내는 모습을 한동안 지켜본 뒤 하루를 시작했다. 우리부부는 일정을 정하지 않은 채 식전부터 마을길을 나섰다. 새벽부터 들리던 예불소리를 쫒아 언덕의 경사를 따라 촘촘히 들어선 건물 사이를 이어지는 좁다란 돌길을 따라 걸었다. 간드룩이 비록 큰 마을이지만 얼마 걷지 않아 조그만 사원에 도착했다. 한분의 여승이 예불을 보고있는 조그만 사원은 보잘것 없었지만 간드룩의 주민에게는 유일한 마음의 안식처안 곳 같았다. 몇몇 네팔리는 잠시잠깐 들러 예불을 드리고 돌아갔고, 나는 마당을 서성이며 마을의 풍경을 사진에 담는 사이 아무런 종교도 갖지 않아 그래서 아무 종교나 다 받아들일 수 있는  아내는 법당안으로 들어가 한국의 절에서 하듯 티벳의 부처에게 절을 올렸다. 

 
부처의 신통력보다는 소박한 사원의 살림살이가 더 마음을 움직였을게 분명하지만 아내는 지갑을 가지고 온 나에게 작은 돈을 받아 불전함에 넣고 돌아나왔다. 아내가 딸의 행복을 빌었는지, 세상의 평화를 빌었는지 아니면 우리부부의 안전한 여정을 빌었는지 모르지만 사원은 나서는 발걸음이 좀더 편안하게 느껴졌다. 사원을 나와 발길 닿는데로 걷가보니 막다른 골목에 다다라 돌아나오기도 하고, 주인 떠난 집 마당을 가로질러 낮은 돌담을 뛰어넘어 막힌 길을 뚫기도 하면서 걷다보니 [구릉 민속박물관]이라는 안내 간판을 달고 있는 소박한 롯지와 마주쳤다. 입장료를 내고, 롯지의 주인 아주머니같은 분이 지켜선 민속박물관을 아내 혼자 둘러보는 사이 나는 건물들 사이로 아침 햇살을 받으며 하얀 봉우리를 드러낸 안나푸르나만 눈이 빠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다시 골목을 누비다 돌아온 숙소에서 하루의 일정을 결정했다. 하루를 더 머물며 온종일 둘러볼 만치 간드룩은 그렇게 규모있는 마을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그냥 쉬기에는 너무 추웠고, 편안하고 다뜻한 공간을 찾는 것을 불가능해 보였다. 아침을 먹고 나서 폴란드인 트레커는 하산길을 떠나고 우리는 배낭을 챙겨 다시 상행길에 올랐고 한국 청년들과 동행하게 되었다.


어제 간드룩에 거의 도달해서부터 눈이 흩뿌려진 길로 접어들었고, 간드룩을 지나자 음지에는 제법 길이 미끄러울만치 눈이 쌓여있곤 했다. 햇살이 좋은 양지에서 눈의 흔적이 사라졌다가 다시 산모퉁이를 돌아 음지로 돌아서면 이내 눈길이 나타났다. 촘롱으로 가기 위해서는 Mudi Khola(무디 강)의 한 지류인 Kimlung Khola를 건너기 위해 가파른 북쪽 사면의 내리막길을 한참을 내려가야했는데 거기서는 눈이 발목까지 빠지고 처음으로 아이젠을 사용해야 했다. 킴룽강에 거의 내려 서서는 다시 눈이 사라지고 강을 건너 남향의 킴룽마을에 들어서니 따사로운 햇살이 한국의 이른 봄을 느끼게 했다. 킴룽은 조그마하고 한적한 마을로 네댓가구의 집이 있었지만 인기척이 드물었다. 선택의 여지 없이 들어선 롯지에서 점심을 먹고 타우룽을 거쳐 촘롱을 향해 길고 가파른 오르막을 오후 내내 걸었다. 잠시 잠깐 혼자서 앞서가다 랜드슬라이드가 생겨 끊긴 구길로 접어들어, 파샹을 걱정시키고 되돌아나와야 했던 것말고는 순탄한 하루 였다. 가파른 길 탓에 지치고 힘든 순간도 있었지만 고개를 들면 안나푸르나 흰봉우리가 우리를 격려하고, 뒤돌아보면 언제 이만치나 왔는지 실감이 나지 않을 마치 까마득히 먼 지나온 길을 보면서 위로받을 수 있었다.


오후 5시 30분이 지나
해발 2,170m이 촘롱에 도착했다. 아침에 서둘렀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조금 무리하면 시누아까지 갈 수 있는 일정이었지만 파샹은 시누아는 음식도 숙소도 전망도 다 좋지 않다며 촘롱에 머물 것을 제안했다. 파샹의 제안에 따라 촘롱에 머물기로 결정을 했고, 한국인 청년들은 그들의 가이드 단골 롯지로 가고 우리는 파샹의 단골집이라는 Fishtail 게스트하우스에 들어섰다. Fishtail 게스트하우스의 건물은 낡고 지저분했다. 하지만 방문앞의 테크에서 바라다 보는 안나푸르나 연봉과 마차푸차레는 너무나 비현실적인 풍경으로 시야를 압도했다. 파샹이 음식과 숙소 그리고 전망을 내세워 촘롱에 머물자고 제안했지만 앞의 두가지는 인정하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마지막 전망 하나만은 파샹의 안목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숙소의 2층 룸에서 나와 데크에 앉아 정면에서 안나푸르나를 바라다 보면 현실과 비현실 사이의 경계가 애매해져 오히려 큰 달력 그림을 눈앞에 펼쳐놓은 것 같았다.


안나푸르나를 향한 코스가 촘롱부터는 외길이다보니 많은 한국인 트레커들이 들러는지 마을 입구부터 한국어 간판이 보였다. 김치가 있고 닭백숙이 된다는 간판을 걸고 있는 롯지가 드러 있었고 우리가 묵게된 Fishtail 게스트하우스에서도 한국음식이 가능했다. 음식가리지 않고 꼭 현지식을 먹기를 고집하는 나도 갑자기 '김치'라고 쓰인 간판을 보자마자 입안에 군침이 도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먹고싶어서기도 했지만 도대채 네팔에서 담은 한국 김치는 어떤 맛일지, 정말 제대로 김치를 담기나 한건지 궁금해서라도 김치를 꼭 먹어보고 싶었다. 닭백숙은 돈도 양도 부담스러워 저녁메뉴로 참치 김치찌개를 시키고 다이닝룸에 앉아 더욱 가까워진 안나푸르나를 바라다 보고 있으니 이내 음식이 나왔다. 냄비가 아니라 사발에 각각 2인분을 담고 밥 두그릇이 나왔다. 한국처럼 밑반찬이 있는 것도 아니고 덩그러니 김치찌개 한 사발에 밥 한공기가 전부였다. 참치캔은 거의 냄새만 날 만치 넣은것 같았지만 그래도 김치 특유의 시큼한 향이 코를 자극했다. 망설임없이 밥공기를 들어 김치찌게에 들이부어 눈깜짝할 새 먹어 치웠다. 금새 그릇을 비우고는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손님이 우리 둘뿐이고 특별 메뉴인 김치찌게를 덤으로 더 얻어먹을 수는 없는 조건. 깨끗이 단념하고 김치찌개의 여운이 입안에 감도는 행복한 느낌을 만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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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성벽력에 창문이 흔들리고, 장대비가 창을 때리는 소리를 들으며 잠이 들었는데 새벽에 눈을 뜨니 언제 그랬냐는듯 하늘은 시치미를 떼고 파란 얼굴로 우리를 맞이했다. 창 넘어 멀리 마차푸차레와 안나푸르나 남봉이 황금빛 아침 햇살을 받으며 신비한 자태를 드러냈다. 안나푸르나의 중심으로 떠나는 아침, 밤새 우리를 불안하게 했던 비가 씻긴듯이 지나가고 이렇게 청명한 하늘과 말숙한 산의 자태를 대하니 절로 힘이 났다. 


하지만 상쾌한 아침은 호탤과의 마찰로 끝이 났다. 호텔 터치네팔에서 아침부터 온수 문제로 한바탕했다. 네팔에 들어온지 보름이 되었지만 아직까지 한번도 롯지나 레스토랑에서 클레임을 제기한 적이 없었다. 다 마음의 준비를 하고 왔기 때문에 어지간한 것은 받아들일 수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네팔리의 친절에 마음 편안한 여정이었기 때문이기도했다. 그런데 아내는 이날만은 그냥 넘어가기가 힘들었는지 바로 호텔 카운트로 따지러 내려갔다. 전날 저녁 스텝이 룸차지 1000루피에 24시간 온수 샤워가 가능하다고 했던 것은 순전히 거짓말이었다. 다시 안나푸르나로 떠나기에 앞서 머리라도 감고 싶었던 아내는 결국 프론트에 내려가 항의를 하게 된 것이었다. 아내의 항의를 무시하다 재차 항의를 한 뒤에야, 스탭들이 가스통을 짊어지고 오르락 내리락 거린 끝에 다른 호실에 온수가 나오도록 설치했으니 샤워를 하라고 했다. 샤워는 포기하고 그냥 머리만 감고 식사시간을 기다렸다.


그런데 다시 아침 식사도 문제가 되었다. 전날 8시에 예약해 둔 음식을 시간이 다된 뒤에야 단체 손님이 많아서 조리가 불가능하다고 알려왔다. 짧은 영어에 따질 엄두도 나지 않고, 이렇게 좋은 아침에 더이상 투닥거리는 것도 싫어 그냥 간단한 음식으로 되는데로 달라고 했더니, 기름에 튀긴 빵과 커리 한종지를 내 놓았다. 주는 데로 먹고 룸에 올라와 짐을 싸고 카운트로 내려가 계산을 하니 마당에는 호텔에서 불러놓은 택시가 도착해 있었다.


택시비를 물으니 나야풀 가는 로컬버스 터미널까지 200루피라고 했다. 그러면서 택시기사는 아예 1시간 30분이 걸리는 나야풀까지 1,500루피에 바로 가자고 제안했다. 로컬버스는 일단 기다려야하고, 시간도 30분에서 1시간이 더 걸리고, 위험하고, 지저분하고, 좁아서 불편하단다. 다 맞는 말이었다. 파샹까지 나서서 그냥 택시로 가자고 종용했다. 터미날에서 배낭을 들고 내리고 ,버스를 기다렸다가 다시 버스 지붕에 배낭을 싣고 타고 내리고 하는 그 모든 것이 귀찮은 눈치였다. 3일간의 강행군에 지친 파샹을 위해 500루피 정도 돈을 더 쓰고 택시로 나야풀까지 가기로 마음먹었다. 단 조건을 달았다. "만약 당신이 천천히 안전하게 운전할 것을 약속한다면 이 택시로 나야풀까지 가고 그렇지 않다면 내리겠다." 당연히 기사분은 "OK!"를 외쳤고 네팔 온 뒤 처음으로 베스트 드라이버를 만났다.



위험한 추월이나 급발진, 급제동 없이 천천히 모는 택시를 타고 느긋하게 나야풀로 향했다. 멀리 안나푸르나 흰봉우리가 드러나는 위치에서는 "Take Photo!"를 외치며 택시를 길가에 세워주기까지 했다. 정말 처음으로 긴장감없이 차를 타고 포카라 에서 나야풀까지 산자락에 터를 잡고 살아가는 네팔리의 삶을 느껴 볼 수 있었다. 포카라 시내를 벗어나면서 S자 고갯길을 끝없이 오르고 그리고 끝없이 내려오니 나야풀이었다. 길은 분명히 'Highway"였는데 바닥은 페이고 일부는 아예 포장의 흔적조차 없는 구간이 허다했다. 아무데나 아무런 표지도 없이 공사를 벌여놓고 길을 막고 있는 곳도 몇군데 있었다. 뭐 그래도 네팔리들은 아무도 화를 내거나 짜증을 내지 않았다, 여기는 네팔이니깐!!


나야풀에 도착하자마자 블랙티를 한잔씩 마시고 걷기 시작했다. 나야풀의 체크 포스크에 등록을 하고, 곧이어 침룽으로 향하면서 한번 더 체크포스트에서 체크를 한뒤 사울리바자르로 향했다. 안나푸르나로 들어가는 입구인 나야풀은 한국의 여느 국립공원 입구처럼 상가들이 즐비하고 사람의 발길이 붐볐다. 하지만 안나푸르나를 향해 10분 20분 올라갈수록 상점도 민가도 드물어지고, 침룽을 지나고 사우디바자르가 가까워지면서는 트레커들의 발길도 줄어들었다. 상행 트레커는 만나기가 어려웠고 간혹 하행 트레커를 싣은 택시가 우리를 스쳐 내려가기도 했지만 우리가 만만 하행 트레커 거의 대부분은 한국인이었다. 파샹이야기로는 안나푸르나 겨울은 트레커의 발길이 줄어 비수기라고 하지만 오히러 한국인 트레커가 집중적으로 몰려 "Korean Season"이라 부른다고 했다.



사울리바자르에서 점심으로 달밧을 먹고 한가로이 햇살을 받으며 한참을 쉬다가 다시 걷기를 시작했다. 길따라 조각밭에는 유채꽃이 이쁘고 나락을 베어낸 빈논 한켠에 자라고 있는 감자며 양배추며 마을 양파의 파릇한 잎이 싱그러웠다. 한국의 늦은 가을이나 이른 봄처럼 공기는 차지만 햇빛을 따사로운 길을 걸었다. 산길이 아니라 들길을 걷는 편안함이 좋았다. 안나푸르나에서 흘러내리는 모디강(Modi Khola) 을 거슬러 좀더 올라가니 산등성이를 따라 간드룩으로 가는 길과 모디강을 따라 시와이(Siwai)쪽으로 갈라지는 갈림길이 나왔는데 파샹을 지름길을 안다며 오른쪽 갈림길인 시와이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길이 복잡하지 않아 어떻게든 간드룩 가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을 것으로 보였는데, 어느 순간 파샹은 헤메기 시작했다. 만나는 네팔리마다 몇번을 길을 물은 파샹은 자신감이 없는 표정으로 간드룩을 포기하고 임레, 쿠미, 지누단다를 거쳐 촘롬으로 바로 갈 것을 제안했다. 간드룩과는 점점 거리가 벌어져 간드룩을 갈려면 가파른 돌계단길을 두 시간이상 계속 걸어야만 된다는 것이었다.


간드룩은 이번 여행을 떠나오기 전에 사전 조사를 통해 알게된 마을이었는데 가파른 계단 논 끝에 형성된 척박한 삶의 조건을 가진 마을이지만 아름답고 풍성한 그런 꿈의 마을같은 느낌으로 느껴져 꼭 가보고 싶었던 마을이었다. 파샹은 가능하면 덜 걷고 편안한 길을 선택하려 했지만 이 지점에서 처음으로 내가 고집을 피웠다. '나는 농사꾼이고 역시 산골에 산다. 그래서 네팔여행중에 간드룩이라는 마을에 하루 지내면서 내가 사는 마을과 꼭 비교해 보고 싶었다. 나에게 간드룩은 이상적인 꿈의 마을로 느껴진다. 그래서 좀 힘들더라도 간드룩을 가고싶다.' 고.


시와이로 가는 길은 'Old Road'라고 불렀는데, 새길이 나면서 지금은 트레커의 발길이 많이 준 논두렁길이었다. 목이 말랐지만 티하우스를 쉬 만날 수 없을 정도로 쇠락한 한가롭고 호젓한 길이었다. 특히나 모디강 계곡을 건너 나란히 형성된 란드룩을 마주보면서 걸을 수 있어 너무 좋았다. 파샹이야기로는 나야풀이 안나푸르나 여정의 출발지가 되기 전까지는 페디를 시작으로 란드룩을 거쳐 안나푸르나 산군속으로 트레커들이 들어갔다고 했다. 그런데 파샹은 내가 내려오는 길에 란드룩을 가자고 하니깐 란드룩은 숙소도 별로고 음식도 좋지 않다고 하면서 난색을 표했고, 또 오후에 유일하게 만난 한국인 트레커도 자신은 란드룩을 통해 올라갔는데 지금 내려오는 이 길이 더 좋다며 란드룩을 권하질 않았다. 그래도 나는 상행길에는 간드룩을 가고, 하행길은 꼭 란드룩으로 가야지하고 마음 먹었다.


마실 물이 떨어져 목이 마를 때 즈음, 시아와를 지나며 티하우스를 만났다. 애타게 찾던 티하우스를 만나 반가웠지만 우리를 더 애타게 기다렸을 한 소년을 만났다. 어디에 찔렸는지 부딪쳤는지 알수 없지만 한쪽 발이 퉁퉁 부은 소년이 티하우스 앞에서 우리와 마주치자 애처로운 얼굴로 다가와 자신의 발을 가리키며 말을 걸었다. "Have you medicine?" 말을 하지 않아도 상황이 이해되는 그런 국면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가진 것은 몇개의 대일벤드와 후시딘 그리고 아스피린이 거의 전부였다. 발은 곪는지 퉁퉁부어 있었지만 의학적 지식도 없고 약품도 없으니 우리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었다. 그냥 후시딘을 발라주고 대일밴드 여분과 통증을 줄이는데 도움이 될지 몰라 아스피린을 주었지만 별로 도움이 될것 같지 않았다.


블랙티를 마시고 미네랄워터를 한병사서 다시 길을 나섰다. 이내 임레라는 곳을 지나게 되고 그곳에서부터 왼쪽 가파른 다락논 언덕을 치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논두렁사이로 게속 이어지는 가파른 길은 모두 돌담과 돌바닥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밤새 내리던 열대성 소나기가 쓸고 지나간 돌길은 말끔히 씻겨져 있었고 그 길을 먼지라고는 한톨도 없는 투명한 공기를 들이쉬며 걷다보니 가파른 길이 주는 고통도 잊을 정도로 좋았다. 돌담에 앉아 잠시 쉬다보며 옷길을 파고드는 찬바람에 몸을 움츠렸지만 걷고 있는 동안에는 땀이 이마에 맺힐 만치 따뜻한 하루가 계속되었다. 몇일뒤면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의 설원에서 시린 손을 비비며 따뜻한 날들을 그리워할까 믿어지지가 않았다.



파샹은 오늘 자신이 실수하는 바람에 간드룩 가는 길을 잘못들어 여정이 힘들고 늘어졌다면 미안해 했다. 그러면서 한 농가에 들어가 사탕수수대를 샀는지 3자루 들고 와 하나씩 주면서 목이 마를 때 정말 좋다며 어떻게 껍질을 까서 씹어서 단물을 빨아 먹을 수 있는지를 보여 주었다.  Old Road로 선택하는 바람에 두어시간을 더 걷고, 가파른 오르막에 숨막혔지만 나는 트레커가 거의 없는 아름다운 돌담길, 언덕길을 한도 끝도 없이 걸을 수 있었서 좋아다며 파샹을 격려했다. 올라가도 올라가도 줄어들지 않던 길이 멀리 높은 산에 해거름이 드리울 때쯤 거의 간드룩에 도달한 것 같았다.



마지막 언덕길을 오르며 길가에 홀로 남겨진 병들고 야윈 조랑말 한마리와 마주쳤다. 파샹 이야기로는 그 조랑말은 평생을 힘든 짐을 나르다 이제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홀로 남아 있는 것이라고 했다. 늙고 병든 조랑말이 더이상 짐을 나를 수 없을 만치 쇠약해지면 주인은 조랑말에 달려있던 모든 인공적인 장신구나 안장, 연장 등을 풀어주고 홀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한적한 풀밭에 풀어 놓는다고 했다. 그리고 몇일 뒤 조랑말이 숨을 거두면 불교식으로 장례를 치뤄주고 흰천으로 몸을 감아 매장을 해준다는 것이었다. 평생 인간을 도와 고생한 조랑말을 위해 장례나마 예를 갖쳐 정성껏 치뤄주는 네팔리들의 숭고한 삶의 자세가 너무나 아름답게 느껴졌다.


쓸슬이 죽음을 맞는 조랑말을 뒤로하고 언덕을 오르자 이내 간드룩 입구가 나타났다. 도착한 간드룩은 내가 꿈꾸던 그런 곳은 아니었지만 나름의 삶을 꿋꿋하게 영위하는 아름다움 사람들이 사는 그런 마을같았다. Mudi Hotel에 여정을 풀고, 하산중인 폴란드인 트레커와 짧은 영어로 대화를 나누고, 한국인 청년 2명과도 인사를 나누었다. 풀란드인 트레커는 한국을 잘 알고 있었고 한국인 친구도 있다고 하면서 마차푸차레 베이스캠프에서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까지 보통은 두어시간이면 여유있게 주파가 가능하지만 지금은 폭설로 어림이 없다고 했다. 자신은 장장 4시간 넘어 걸려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에 도착했다고 했다. 거기다가 어제 비가 고스란히 안나푸르나에는 눈으로 내렸을 걸 생각하니 혹시 라운드에 이어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마저 포기해야되는 상황이 될까 걱정스러웠다.


달빛 받은 안나푸르나, 마차푸차레, 히운출리가 창으로 가득 비치는 방에서 길고 추운 간드룩의 밤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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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방은 없었지만 베시사하르 최고급이라는 호텔 투쿠체서 온수로 샤워를 하고 숙면을 취한뒤  예약한 아침을 먹기 위해 다이닝 룸으로 내려왔다. 전날 마이크로 버스 시간을 알아보고 8시 출발을 위해 7시 30분에 아침 식사를 예약해 둔 상태였다. 버스 시간에 늦지 않기 위해 배낭까지 다 챙겨 내려왔는데 호텔 종업원들은 그제사 움직이기 시작하는 눈치였다. 식사를 예약해 둔 시간을 넘기고도 전혀 서두는 기색이 없었다. 결국 시간은 촉박해지고 예약했던 메뉴를 취소하고 간단한 누들수프로 급히 아침 허기를 떼우고 호텔을 나섰다.  호텔 앞 도로에서 이내 도착한 마이크로 버스 지붕에 배낭을 싣었다. 마낭에서부터 계속 마주쳤던 호주 청년 커플도 같은 호텔에서 묵고 똑같이 아침을 기다리다 포기하고 같은 마이크로 버스에 짐을 싣었다. 


 
출발시간을 넘긴 마이크로버스는 승객에게 타라는 말도 없었고 다른 승객들로부터도 짐만 받아 지붕에 싣었다 . 짐을 싣던 버스는 우리에게 아무런 이야기도 없이 갑자기 출발해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어떤 상황인지 몰라 파샹에게 물어봐도 자기도 무슨 일인지 모르겠단다. 호주 커플은 우리를 쳐다보고 우리는 호주 커플을 쳐다보며 서로 지금 상황을 이해하고 공감하려 노력했지만 도대체 상황파악이 되질 않았다. 막 깨어나는 베시사하르 거리를 둘러보며 시간을 보냈지만 차가 떠난지 30분이 되어도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도저히 더 참을 수가 없어 파샹을 앞세워 버스매표소로 가 물어보니 별거아닐거다, 차 기름 넣으러 간것 아니냐는 확실하지 않은 답변을 전해줬다.


더이상 자세한 상황 파악을 포기하고 버스가 떠난 자리가 시야에 들어오는 반경내에서 그냥 베시사하르 거리를 구경하고 있으니 9시 30분이 넘어 우리 배낭을 싣은 마이크로 버스가 원래 떠났던 자리로 되돌아왔다. 기사도 조수도 아무런 해명이 없고 1시간 30분을 기다린 네팔리들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표정이다. 출발시간이 어떻고 승객에게 사전 설명을 해야되는것 아니냐는 식의 논쟁은 전혀 성립할 수 없는 상황이다. 포카라에 오늘 가기만 하면 되는것 아니냐는 승객들의 느긋함이 부러웠다. 나역시 출발 시간을 아무 설명없이 1시간이상 기다리게 한 것에 대한 원망보다, 그나마 도망가지 않고 버스가 돌아와준게 어디냐는 안도감이 더 컸다.

버스는 이내 출발했지만 시가지를 벗어나기까지 조수는 계속 문짝에 메달려 '포카라'를 외쳤다. 몇명의 승객이 더 탔지만 남은 좌석이 한두개 남은 상태에서 시가지를 벗어났다. 한 5분이나 달렸을까 핸드폰을 받고 통화하던 기사는 갑자기 좁은 길을 억지로 유턴을 해 다시 베시사하르로 향했다. 시내에 들어선 버스는 한참을 달려 주택가 골목까지 들어가 중년부인 한분을 태웠다. 순전히 짐작이지만 사적으로 아는 사람의 연락을 받고 승객을 더 실으러 돌아온 것 같았다. 신기하게도 승객들은 여전히 아무런 표정의 변화가 없었고 ,기사 역시 전혀 미안한 기색이 없었다. 버스를 예정시간보다 1시간 30분이나 늦게 출발시키거나, 버스의 노선을 벗어나 기사 마음대로 차를 운행해도 되는, 이 모든 것이 용납되는 네팔의 교통문화가 황당하고도 재미있었다.



베시사하르에서 포카라까지 이어지는 풍경은 슬픈 아름다움이 넘쳤다. 능선을 따라 이어지는 계단 논들, 흙먼지 날리는 길가의 낡은 주택들, 떼국물 떨어지는 아이들의 차림... 소읍을 지날 때마다 조수는 '포카라'를 외쳤고 나중에는 차 지붕까지 승객들이 올라탔다. 차창 밖으로 펼쳐진 네팔 농촌의 풍경을 사진기에 담고 싶었지만 좁아 터진 차 안에서 사진을 찍기에는 너무 힘들었다. 포카라로 가는 길에 펼쳐진 네팔 농촌의 풍경을 카메라가 아니라 내 눈을 통해 마음속에다 수천 컷이나 퍼 담았다. 그리고 나는 70년대 초반 철없던 소년으로 돌아가 한껏 뛰어 놀던 진해 장복산언저리의  닭소리, 개소리, 차소리, 아이들 소리를 듣고, 밥냄새, 똥냄새, 사람냄새 그리고 삶에서 묻어나는 모든 인간적인 요소가 뒤죽박죽 혼란스러운 속에서 애틋히 지켜나왔을 사람의 따사로운 온기를 느끼며 졸고 있었다.


버스는 베시사하르를 떠난 지 3시간만에 포카라에 접어 들었다. 포카라로 들어서는 진입로를 따라 한무리의 시위대가 지나갔다. 또 얼마를 달리니 각가지 전통의상을 차려입은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행진하고 있었는데 구릉족의 민족 축제가 열리고 있다고 했다. 드디어 활력이 넘치는 도시다운 도시, 포카라에 도착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포카라 표지판을 본지 한참을 지나서야 시내 한 복판에 버스는 섰고, 승객들 대부분은 종점이 어딘질 몰라 내리기를 망설였다. 파샹 역시 버스를 타고 포카라에 와 본적이 없는 표정이다. 조수의 알아들을 수 없는 고함소리를 듣고서야 파샹과 버스를 내리고 지붕위의 배낭을 받아내렸다. 순간 우리는 일군의 사람들로 포위되었다. 택시기사며 호텔 메니저라는 사람들이 제각각 뭐라고 외치면서 명함을 건네고 우리 배낭을 잡아 당겼다. 상황파악이 안되는 중에 파샹은 우리보다 더 당황스런 표정이다. 이들을 완전히 물리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해 보였고, 자의반 타의반으로 올라탄 택시는 우리 일행과 자칭 호텔 메니저라는 사람을 싣고 포카라의 최종 목적지 레이크사이드로 향했다. 뒤돌아보니 버스를 내렸던 거리가 Prithri Chowk였다.
카트만두보다는 그래도 잘 정비되고 쓰레기도 덜한 포카라 시내를 가로질러 트레커들의 본거지인 레이크 사이들를 향해 택시는 달렸다. 쏘롱아를 넘어 서너번 정도 포카라에 왔던 적이 있다는 파샹은 서울에 올라온 촌 아이처럼 들떤 표정이었고, 연신 고개를 두리번 거리며 도시 풍경에 빠져들었다.


택시는 이내 레이크 사이드의 한 호텔에 도착했다. 호텔의 스텝들이 대하는 것으로 비추어 볼 때 호텔메니저라며 우리와 같이 동행한 사람은 사실 이 호텔의 스텝이 아니라 그냥 거리의 삐끼였다. 그들 끼리 한참을 수근거린 뒤에야 온수 샤워가 가능한 룸의 숙박료가 1층은 8불, 2층은 10불, 3층은 15불이라며, 2층은 레이크만 보이고 3층은 안나푸르나와 레이크를 다 볼 수 있다고 했다. 나는 호텔 마당에서 배낭을 지키고 있고, 아내만 룸을 보러 올려보냈다. 이왕이면 조망이 좋은 방을 얻을 생각이었지만 황당하게도 2,3층 방은 모두 예약이 끝나버렸다고 했다. 사실 이미 레이크 사이드에 도착했으니 널린게 호텔이라 우리는 아무 걱정이 없었지만 우리를 안내한 '삐끼'는 당황스런 기색이 역력했다. 연신 'My mistake. I'm Sorry!'를 외치며 이 호텔보다 더 좋은 조건의 다른 호텔로 안내하겠다며 앞장을 섰다. 


폭설로 안나푸르나 라운드 코스가 막히면서 많은 트레커들이 포카라로 몰려와 비수기임에도 호텔이 거의 만원이라고 했다.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바로 옆에 있는 Touch Nepal Hotel에 방을 얻었다. 숙박비 1,000루피에 핫샤워가 가능하고, 학국 음식을 먹을 수 있고 한국인이 운영하는 '산촌다람쥐'가 바로 붙어 있었다. 스텝이 이끄는 데로 호텔 뒷편으로 이어진 흐름한 식당으로 따라가니 한국음식 냄새가 확 느껴졌다. 산촌다람쥐 주인장을 소개받고 다시 호텔 룸으로 돌아와 짐을 풀었다. 호텔은 단체 어린이 손님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아이들이 떼거리로 호텔 복도를 몰려다니고, 잘 보인다던 페와 호수는 아예 보이질 않았고, 안나푸르나 연봉은 산정상만 조그만하게 시야에 들어왔다.


날이 저물기 전에 서둘러 호텔을 나섰다. 산촌다람쥐에서 늦은 점심으로 돼지제육볶음을 먹고 말로만 들어오던 레이크사이드 거리를 돌아 페와 호수가를 걸었다. 포카라는 안나푸르나를 찾는 외국인 들이 꼭 거쳐가야만하는 네팔 최고의 현대 도시이자 관광의 중심지라고 했다. 하지만 현대적인 도시라고 하기에는 너무 낙후되었고 호텔 방이 동이날만치 많은 트레커들이 몰려왔다고 했지만 거리는 한산했다. 안나푸르나 산속에 오래 머물다 내려온 사람들에게 포카라는 분명 파라다이스같은 도시로 다가갔을 것이지만, 나는 아직 현대문명이 그렇게 반가울 만치 오래 산속에 있지도 않았고, 포카라를 즐길만한 마음의 준비도 없었다. 쇼핑말고는 또 무엇을 할지 망설이다가 날이 저물고, 점심때 먹은 돼지고기 제육볶음에 반한 파샹이 다시 원하는 'Korean Food'을 찾아 산촌다람쥐로 돌아왔다.


저녁을 먹고 올라간 룸에는 잘 나온다던 온수가 어느 수도꼭지에서도 나오질 않았고 전기는 사위가 어두워진뒤 한참만에야 들어왔다. 사설전기에 연결된 희미한 보조등 하나에 의지해 룸에 머물렀지만 레이크 사이드 거리는 암흑천지로 변했다. 날이 저물면서 시작한 비는 어느새 천둥번개를 동반한 폭우로 바뀌고 바람마져 거칠게 호텔 창을 두드리니 호텔 룸이 영락없는 감옥같이 느껴졌다. 레이크사이드 거리는 불빛 하나없이 완전히 문을 닫았고 우리가 머무는 호텔은 로비나 다이닝 룸이 휴식을 취할 만한 시설이 못되었다. 비가 때리는 창 넘어 번쩍이는 번개빛에 드러나는 도시의 윤곽 넘어 눈속에 묻혀있을 안나푸르나를 걱정했다. '눈때문에 안나푸르나 라운드를 포기 했는데, 이러다간 ABC(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코스 마저 포기해야되는거 아닌가?' 걱정을 안고 잠을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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