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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9일 아침 Upper Ngadibazar에서 출발하여, 바훈단다까지 오전에 걷고 Germu에서 1박을 한뒤, 1월 30일 옛 트레킹 코스 반대편 서쪽 강둑 절벽을 따라 돌을 깨고 만든 새길로 Tal까지 가서 1박을 했다.

 

우리는 Ngadi의 롯지에서 최악의 시설과 최고의 친절을 동시에 경험했다. 배갯머리에 쥐똥이 쌓이고 유리도 없는 창은 방 안밖의 구별을 불가능하게 했지만 모처럼 손님을 맞은 사우지 사우니는 연신 우리가 자신의 롯지를 찾아주어 너무 행복하다고 했다. 우리가 누군가를 행복하게 해줄수 있다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더할나위 없는 행복한 트레킹이 될 것을 예감하면서 라운드 둘째 날을 맞았다. 

 


점심을 먹은 바운단다까지의 길은 편안했다. 날씨는 온화했고 바람도 없고 맑고 투명했다. 그냥 숨을 쉬고 걷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행복에 겨워지는 그런 날이었다. 얼굴에 웃음기가 번지고 하루종일 걸어도 지칠 것 같지 않은 기분으로 도착한 바훈단다의 롯지는 평화로웠다. 바훈은 브라만을 뜻하고 단다는 언덕을 뜻한다니 바훈단다는 '브라만이 사는 언덕 마을'일 것이다. 여전히 작동하고 있는 카스트의 최상단 계층이 모여사는 마을은 다른 마을과 어떻게 다른지 모르겠지만 일단은 깨끗하고 잘 사는 동네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햇살 좋은 Hotel Superb View 정원에서 점심을 먹고 차를 마시고 그냥 그 자리에 눌러 앉고 싶기도했지만 마지못해 다시 배낭을 짊어지고 길을 나섰다. 못내 아쉬운 가이드는 그냥 여기서 하루를 쉬자고 제안했지만 하루를 마무리하기엔 걸은 길이 너무 짧았다. 


   


길을 걸으며 나는 5년전의 기억과 지금을 비교하고 기억의 흔적을 드덤고 달라진 것들을 확인했다. 5년전 있던 것이 없어지고 그 때 없던 것이 새로 생겨난 분명한 것이 있었다. 당나귀와 댐이 그것이다. 5년전 트래킹 내내 앞서거니 뒤서거니 같이 했던 그 많던 당나귀들이 보이질 않았다. 마르샹디강따라 찻길이 뚤리면서 그많은 당나귀와 노새들 그리고 목동들이 다 사라진 것 같았다. 당나귀와 노새대신 차와 기사가 더 많은 짐을 손쉽게 고산지대 마을로 나르게 되었으니 주민의 삶은 훨씬 덜 고달파졌을 것이다. 길을 걷는 내내 귀전에 울리던 방울소리가 귀국후에도 한참을 이명으로 남아 나를 몽환 속으로 이끌곤 했었는데 이제 나귀의 방울과 발자욱 소리 대신에 간혹 지나가는 차가 우리를 감짝 놀래키곤 했다. 변화는 바람직하고 피해갈 수 없는 것이긴 한데 그 많던 당나귀는 어디로 가고 그 목동은 운전기사가 되었을까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그전에 없던 것이 새로 생겨난 것은 바로 댐이었다. Upper Marsyandi 수력댐은 중국의 원조로 네팔의 전력난을 해소하는데 기여할 수력발전소라고 했다. 세계 2위의 수자원보유국이면서 수도 카트만두 조차 하루 몇시간밖에 전기가 들어오지 않던 시절은 벌써 옛이야기가 되었고 이번 여행중에는 기적같이 거의 정전이 없었다. 그것이 바로 이런 수력댐 덕분일진대 댐이 옛길을 삼키고 마을을 내쫏고 풍경을 변화시킨 것에 대해 마음 아파 할 수만은 없었다. 내 보기 좋자고 그들에게 불편을 감수하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아닌가? 그래도 입안엔 쓴맛이 남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중국 자본에 네팔이 휘둘리지 않기를, 네팔의 개발과 발전이 네팔의 자연의 아름다움을 집어 삼키지 않는 방향으로 나아가기를 빌며 댐을 피해 길을 걸었다. 



이른 오후에 게르무 레인보우 롯지에 도착했고 하루를 마무리하기로 했다. 아름다운 마르샹디 동쪽강둑위에 형성된 게르무 마을은 아름다웠고, 레인보우 롯지는 깨끗하고 운치있었다. 여유있는 오후시간을 빨래와 샤워, 그리고 편안한 휴식으로 보내고 지나온 길을 반추하며 이른 잠자리에 들었다.  행복의 절정에는 늘 그늘이 끼기 마련일까? 바훈단다를 지나며 문득 얼굴을 스쳐지나는 바람에 나의 청춘을 지배하던 불안을 환기했다. 수만갈래의 길이 앞에 놓여있던 시절 그 어느 길도 선택할수 없어 불안만이 나의 자의식을 확인시켜 주었었다. 헤어날 수 없었던 불안의 심연에서 나마 그 불안사이를 비집고 게으름을 만끽하던 나의 청춘은 감히 아름다웠다고 말 할수있을 것이다.  희미한 기억속을 비집고 정체를 드러낸 그 느낌이 온전히 나의 것이 된다면 내 나머지 삶은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여행은 지나간 나의 삶을 온전히 되돌려받는 축복이다.



게르무에서는 씼고 쉬고 잠도 잘 잤지만 포터 바순의 나쁜 술버릇이 드러났다. 전날 나디에서 술주정이 부끄러웠던지 바순은 내가 권한 락시까지 거절하며 쏘롱라패스후에 묵디나트에서나 같이 한잔하자며 패스전에는 '노소주'한다고 호언했다. 하지만 부억을 들락날락 거리던 바순은 호언한지 두시간도 안되어 술냄새를 풍기며 수다스러워졌다. 더 가관인 것은 알콜이상의 뭔가를 한 낌새를 느낄 수 있었다. 계속 실없이 웃고 떠들어 분위기가 불편해지기 전에 모두들 침실로 흩어졌지만 잠자리에 든 뒤에도 룸의 얇은 벽을 통해 한참을 동료 라마라쉬와 떠들어되는 라마의 취한 목소리를 들어야했다. 



가파른 강둑을 내려와 마르샹디강을 건너니 상계가 나오고 강의 서쪽 길을 걸어 Shrichaur의 Boomerang 롯지를 지났다. 시리사우르를 지나자 지그재그의 가파른 길을 한참 올라가니 강과 마을을 조망할 수 있는 지점에 도달했다.  Jagat 이후에는 강을 건너 티벳탄이 소금을 나르던 아름다운 산길을 당나귀와 한줄로 나란히 걸고 싶었다. 하지만 강의 서쪽으로 새로 찻길이 나면서 사람의 발길이 끊긴 구길은 관리가 안되는지 여기저기 산사태로 끊겨 있고 었다. 딸까지는 가파른 암벽 절벽을 깨서 만든 위태로운 돌길이 이어졌다. 발아래 천길 낭떨어지 아래 마르샹디 강이 흐르고 머리위 절벽은 돌이라도 굴러내리지 않을까 위태롭기까지 했다. 대신 소금을 나르던 티벳탄의 발길을 따라 걷던 옛길의 따뜻함은 줄었지만 가파른 절벽위를 가르는 길은 시원함을 넘어 아찔한 조망을 우리에게 선물했다. 


새로난 찻길이 우리를 딸까지 이끄는 동안 다행히 먼지를 일으키며 우리를 놀래키던 차를 몇대 만나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구길이 오르락내리락 사람을 지치게 했다면 새길은 구길보다 평탄하긴했어도 훨씬 더  길어진 것 같았다.  도저히 길을 만들 수 없어 보이던 절벽을 깨고 돌면서 길을 내다보니 길은 산 구비를 따라 멀리 돌기도하고 아예 마르샹디강이 보이지 않는 산넘어가지 이어지기도 했다. 역시 농가가 있고 아이들이 있고 집에서 키우는 염소가 있던 아기자기한 아름다움이 사라진 새길은 우리를 쉬 지치게 했다. 딸이 멀리 보이기 시작하면서부터 우리는 더 빨리 지쳐갔다. 손에 잡힐 듯 보이는 딸은 쉽게 다가오지 않았고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겨우 딸을 향해 가파른 언덕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카트만두의 숙소 마야거르츄를 출발할 때 파샹님으로부터 제안을 받은게 있었다.  어떤 트레커가 축구공과 학용품을 맡기면서 고산지대의 아이들에게 전달해주기를 부탁했다고 했다. 파샹님은 그 축구공과 학용품을 우리가 좀 전달해주면 안되겠냐고 했다. 사실 트레킹 짐을 싸면서는 가능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최소한의 짐만남기는 것이 철칙인데 예정에 없던 축구공 3개와 문구 한짐을 맡아 고산지대까지 지고 가기에는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그것을 마련해 주었던 분의 따뜻한 마음을 거역할 수 없어 각자의 배낭에 한개씩의 축구공과 문구를 나누어 지고 왔다.  딸이라고해봤자 고작 해발 1700여미터밖에 되지 않으니 아직 공을 나누어 줄 때가 되지 않았지만 이날 첨으로 예정에 없던 축구공 나눔을 해야했다. 

강변으로 내려오니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망치로 자갈을 깨고 있었다. 집을 짖거나 도로를 포장할 때 사용할 잔자갈을 직접 망치로 깨서 만들고 있는 것이라고했다. 눈과 코주변은 물론 온 몸을 돌먼지로  뽀얗게  뒤집어 쓴 아이들이 하얀 이를 드러내며 우리를 향해 나마스태를 외쳤다. 하루에 1달러전후의 저임금 아동노동이 극심하다는 네팔의 현장을 우리는 한가로운 트래커로 막딱뜨린 셈이었다. 값싼 동정심이라고 비난받을 지도 모르지만 순간 가슴이 너무 아려왔다. 그 아이들에게 무어라도 해주고 싶었고 나도 모르게 배낭을 열고 축구공을  꺼냈다. 한 아이를 불러 축구공을 주었다. 이 아저시가 왜 이러지 어리둥절하면서도 너무 좋아하던 그아이의 얼굴이 나의 마음에 새겨졌다. 그 아이의 마음에는 어떤 기억이 남겨질 모르지만 나는 그 아이의 얼굴을 통해 나의 유년을 느끼고 세상의 가난과 그 가난 속에서 삶의 온기를 지키는 아름다운 사람들의 사랑과 연대를 생각했다. 그 아이의 얼굴로 기억될 딸에서 하루의 길을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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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7일 네팔 들어온지 한달이 지났고 새로운 한달을 안나푸르나 라운드로 시작하기 위해 길을 떠나기전 하루의 여유를 카트만두 여러 곳을 둘러보는 것으로 보냈다. 28일 버스로 베시사하르까지 가서 바로 걷기를 시작하여 불불레 지나 라디바자르에서 라운드 첫 밤을 지냈다.  


아침에 눈을 뜨니 비가 내리고 있었다. 건기에 내리는 비는 축복이라고 했다. 대기의 먼지가 씻기고 마야거르츄의 마당은 촉촉히 젖어들었다.  우리가 걸을 길들 역시 먼지가 가라앉고 적당히 젖어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니 기분이 좋아졌다.  내일이면 우리 부부는 M과 D와 함께 안나푸르나 라운드를 떠나고  미리 와있던 L은 귀국길에 오르니 모두가 같이 하는 이날 하루가 더없이 소중했다. 일행이 늘어 택시 한대로 움직일 수 있는 규모를 넘어서다보니 2대를 부탁했다. 파슈파티나트로 향했다. 



카트만두를 찾는 방문자들이 꼭 들러야 하는 곳 중의 하나가 Pashupatinath다. 파슈파티나트는 네팔에서 가장 유명한 힌두교 사원으로  멀리 인도서까지  순례자들이 찾아 오는 곳이라고 했지만 우리에게는 노천 화장의식을 하는 하는 곳으로 더 알려져 있다. 사원과 일체를 이루고 있는 화장장인 아라 갓(aarya ghat)은 파괴의 신인 시바신의 화신인 파슈파티(야수의 왕)에게 받쳐진 사원의 한 부분일 뿐이다. 핵심적인 사원내부만 비힌두교도에게 입장을 금지하고 있지만 거의 날것 그대로의 흰두 예식과 화장 의식을 접할수 있는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중의 하나다.

 

 

택시에서 내려 일행을 찾는 동안 가는 비가 보도를 적시고 있었다. 비둘기떼의 어지러운 날개짓과 비가 만나니 파슈파니나트의 풍경이 더 스산해졌다. 1인당 천루피의 입장료를 내고 사람들의 흐름에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몇걸음 걷지 않아 갑자기 군인들이 다가와 나의 걸음을 막아섰다. 아무 생각없이 힌두교도만 들어갈 수 있는 사원 입구로 향하다 군인으로부터 제지를 받은 것이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방향을 바꾸어 허용된 구역 안으로 들어서니 말라가는 바그마티강과 강변의 화장터가 눈에 들어왔다. 오직 하나의 화장터에서만 마지막 불꽃이 사그라들고 있었다. 오늘은 또 어떤 사연을 간직한 삶이 지상에서 그 삶의 마지막 흔적을 지우게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구구절절한 이야기를 듣지 않아도 한명의 삶이 가졌을 모든 순간들의 희열과 고통, 그리고 그의 마음을 채웠을 그리움과 공허가 물밀듯 다가왔다.  그리고 죽음을 바라다 보는 산사람들의 마음에 피어오를 만가닥 상념의 소용돌이가 느껴졌다. 



바그마티 강을 건너  시바신에게 받쳐졌다는 Pandra Shivalaya라는 탑들 사이를 걷고, 강가의 둥근 반석위에서  의식을 치루고 있는 사람들의 처진 어깨를 바라다 보다 가파른 계단을 올라 동산의 정상에 올랐다. 동산을 이루고 있는 므르가스탈리 숲을 가로지르는 길은 한치의 틈도 없이 사원과 탑들이 빼곡히 채워져 있었고, 탑들마다 시바신이 타기를 기다리는 Nandi의 궁둥이가 우리를 반겼다. 비맞은 원숭이가 추운듯 서로 엉켜 웅크렸지만 낯선 방문객을 마득잖은 눈으로 바라단 볼 때는 주인의 위엄이 느껴졌다. 하지만 비에 젖은 Prasad(신전에 받치는 음식)를 주워먹을 때의 눈빛은 혹시나 낯선 인간들에게 나의 몫을 뺏기지난 않을까는 초조함과 비루함을 담고 있었다.  삶은 존엄과 비천 사이에 두루 걸쳐 있는 것! 그점은 모든 생명에게도 해당할 것이기에 우리는 늘 겸손해야하는 지도 모르겠다. 



북동쪽으로 방향을 잡아 동산을 내려오니 시바의 아내 Parvati의 자궁이 묻힌 자리에 세워진  Shree Guhyeshwori Temple이 있었다.  이 사원은 불임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임신을 축원하는 유명한 사원이라고 했는데 지난 지진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공사가 한창이었다. 사원을 지나 바그마티 강을 건너니 한적한  주택가가 이어졌다. 그리 멀지 않은 거리라 6명의 일행은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었고 아무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얼마나 걸었을까? 대로를 벗어나 골목으로 접어든뒤 혹시라도 길이 어긋날까 일행을 기다렸는데 결국 와이프가 보이질 않았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고 길이 갈라지는 지점에서 다른 길을 택해 달려가 보았지만 하늘로 솟아는지 만날 수 없었다. 하지만 보드낫이라는 목적지를 공유하고 있으니 택시를 타도 되고 물어서 걸어 와도 그리 멀지 않은 곳이라 남은 일행 5명은 보드낫으로 향했다.


 

보드낫은  여전했다. 입구는 인파가 붐비고 앞길은 차들이 엉켜 복잡했다. 티벳 불교의 성지 답게 각지 에서 모여든 티벳탄 순례자들과 우리같은 방문자들로 북적였다. 옛날 한때는 티벳 라사와 카트만두를 오가는 무역상이 머룰던 타망족의 마을이었던 이 구역 일대는 이제 티벳이 중국에 복속된 뒤 망명한 피벳탄의 집단거주질 바뀌었다고 했다. 보드낫 안으로 들어서자 스튜파를 도는 티벳탄들의 무리를 따라 나도 모르게 휩쓸리며 내가 가진 세상에 대한 기원을 읊조리기 시작했다. 순례객이 스튜파를 도는 의식을 kora라고 하는데 언젠가 다큐에서 몸을 겨우 가누는 할머니가 오체 투지를 하며 kora를 하는 이유를 묻자 뭍 생명의 고통을 들기위해서라고 하던 인터뷰가 떠올랐다. 나도 내 자식의 성공이 아니라, 나의 부귀와 영화가 아니라 세상의 생명 가진 모든 존재의 안녕을 빌며 스튜파를 두어바퀴 돌았다. 그리고 스튜파를 감싸고 있는 건물의 전망좋은 레스토랑에 자리를 잡고 어렵게 와이파이를 연결해 길일흔 와이프와 접촉했다.

 


일찍 숙소롤 돌아와 내일이면 떠날 안나푸르나 라운드를 위해 짐을 쌌다. 빠진 것은 없는지, 빼도 될 짐은 없는지 꼼꼼히 살피고 20여일동안 입에 맞는 음식을 접하지 못할 것에 대비해 저녁을 삼겹살로 준비했다. 벌써 익숙해진 가까운 골목길 구멍가게에서 식재료를 사서 밥을 하고 고기를 구웠다.  마야거르츄의 팟샹은 어떻게 구했는지 냉동 삼겹살을 조달해 주었고 다른 일행과도 같이 음식을 나누고도 고기가 남았다.  모처럼 속이 편안했고, 마음 편히 식사를 하고 나니 라운드 내내 계속 속이 안좋으면 어쩌지 하는 걱정이 사라졌다. 역시 나는 산 체질이라 산을 가기 전날부터 몸이 살아난다고 너스레를 떨며 침실로 돌아왔다. 



안나푸르나 라운드를 떠나는 날 아침이 밝었다. 지난 일주일 같이 했던 L은 한국으로 돌아가고 남은 4명은 같이 안나푸르나로 떠나는 날  마야거르추의 아침은 일찍 시작됐다. 6시 30분 L과 아쉬운 작별을 하고 앞으로 20여일의 여정을 같이할 2명의 포터 라마나쉬와 Basu 그리고 4명의 트레커가 2대의 택시를 타고 겅거부 뉴버스파크로  향했다. 도착한 겅거부는 5년전의 남루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언제 들어섰는지 번듯한 건물과 넓은 버스 승강장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곧 출발한 버스는 역시 시원하게 뚤린 RING ROAD를 따라 칸트만두를 벗어나기 위해 달리기 시작했다. 길은 달라졌지만 수시로 서고 가기를 반복하면서 문을 연채로 위태롭게 매달린 조수가 호객을 하는 모습은 달라진 것이 없었다. 버스는 거의 1시간 반 만에 카트만두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포카라를 가는 프리씨비 하이웨이를 둠레까지 달려 둠레에서 북쪽으로 방향을 잡은 버스의 시야에 설산들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가슴뛰는 설산의 풍경을 배경으로 그 아래 산중턱에 터잡아 살아가는 삶이 도드라지게 다가왔다. 오후 1시 30분이 넘어 안나푸르나가 시작하는 마을 베시사하르에 도착했다. 오래전 유일한 출발지 였던 베시사하르는 불불레까지 길이 나면서 트레커의 외면을 받기 시작했고, 다시 참체까지 길이나고 결국 마낭까지 길이 나면서 트레킹 출발점의 면모를 잃어버렸다고했다. 버스를 내린 우리는 이때까지 트레킹 출발점을 정하지 못했고 라마라쉬가 차를 구하러 사라진 뒤에 길가 식당에서 요기를 했다. 시간에 맞춰 출발하는 버스를 구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우리는 차를 타고 불불레까지 가서 걷기를 시작했던 지난 여정과는 달리 이번에는 베시사하르부터 바로 걷기를 작정했다. 



베시사하르를 출발해서 불불레 까지 가는 길은 편안했다. 마르샹디강을 따라 형성된 길을 걷고 민가를 만나니 아직 우리의 걸음은 산에 들어가지 못했고 하루종일 마을길로 이어졌다. 길도 단순했고 멀리 설산이 우리의 목적지를 안내하니 그냥 멀리 설산을 보고 걷고 또 걸었다. 불불레가 얼마 남지 않은 길을 지나자 마을 잔치가 한창인 것 같았다. Basu에게 물어보니 이날이 구릉족에게는 '로사르'라고 하는 설날이고 이웃의 친인척이 함께 모여 음식을 나누고 춤과 노래로 하루를 보낸다고 했다. 산업화의 댓가로 우리에겐 사라진 옛풍습을 낯선 안나푸르나 기슭에서  목격하게 되니 마음이 따듯해져 왔다. 흐뭇하게 바라다 보는 우리를 보고 춤 삼매경에 빠진 남성분이 손짓을 하며 우리에게 같이 할 것을 권했지만 오늘 가야만될 거리도 있고 실례도 될 것 같아 그냥 합장으로 인사하고 가던 길을 걸었다.



오늘 쉬었으면 하던 마을인 불불레를 도착했다. 지난 5년간 불불레는 강건너 동쪽 마을에도 찻길이 생기고 강과 롯지는 길로 갈라섰다. 집과 강과 마을이 한데 엉커 조화롭던 풍경은 사라지고 조금은 삭막하고 어설픈 불불레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어다,. 오랫만에 만난 친구가 너무 변해 있어 왠지 서먹한 그런 기분이 들었다.  바수와 라마나쉬는그리 멀지 않은 곳에 숙소가 있다며  우리가 계속 걷기를 권했다. 트레킹 첫날은 무리하지 않고 몸을 푸는 정도만 걸고 불불레에서 묵을 예정이었지만 잠깐의 망설임끝에 Upper Nadibazar 까지 걷게되었다. 우리는 지쳤고 해가 떨어져갈 무렵 5시 반이 넘어서야 낡고 허름한 롯지에 도착했다. 하지만 롯지는 마음에 들지 않았고, 첫 숙소 선정부터 가이드에게 속은 느낌이 들었다. 



불불레 지나면서 언제부턴가 우리의 포터들과 동행을 하게된 어떤 사람이 있었는데 그 분이 바로 이 롯지의 주인이었다. 나는 와이파이와 온수가 되는 롯지를 원했지만 가이드는 곤혹스런 표정이 역력했다. 아마도 롯지 주인의 호객에 넘어가 여기까지 무리해서 왔는데 우리는 불만스러워 보였고, 그렇다고 다른 롯지를 찾아 나설려니 해는 떨어지고 이 롯지 주인에게 미안하기도 해 곤란해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내일 부터는 숙소 결정에 좀더 관여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라운드 첫 숙소인 Upper Nadhibazar의 Annapurna Garden Restaurant & Guesthouse라는 이름의 남루한 롯지에 짐을 풀었다.

 


롯지 건물은 시설이라고 할 것도 없을 정도로 양철과 폐목재로 지어 비와 바람을 가리는 수준이었다. 녹슬고 구겨진 양철로 얼기설기 꾸린 움막수준의 건물은 그렇다고 해도 눕기에도 겁이 나는  곰팡내 나는 침대는 사실 받아들이기 불편했다. 그래도 그물망 창으로 들어오는 차가운 밤바람은 막아야할 것 같아 특별히 주인게게 부탁해 받은 얇고 작은 천을 스카치 테이프로 발라 잠자리를 갖추었다. 다이닝 룸에서 주문한 식사를 받았는데 역시 손님이 거의 없는 시즌이니 식재료가 잘 갖춰줘 있을 리가 없고 음식은 초라했다. 



하지만 이 모든 악조건에도 주인 내외의 친절은 우리의 마음을 풀어주기에 충분했다. "당신들을 우리 집에 모실 수 있어 너무나 행복합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찌그렸던 인상을 펼 수밖에 없었고, 아무런 불편함도 없고 만족스럽다는 표정으로 인사를 건넬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말뿐이 아니고 시설이나 물질로는 할 수 없는 띠뜻한 마음으로 우리를 대했다. 준비한 식사가 맛이 없지는 않은지를 묻고, 빈 접시를 채워주고 그리고 식사가 거의 끝나가자 온기가 있는 부억으로 우리를 초대했다.  젊어서 요리사로 바같 세계를 떠돌았다는 낯선 네팔리 한분을 포함해 모두가 모닥불을 중심으로 옹기종기 둘러 앉아 라운드의 첫 저녁을 맞았다. 



나디에서의 낭만적인 모닥불 파티는 일찍 끝났다. 자리를 같이했던 롯지 주인과의 관계는 알 수 없었던 네팔리는 우리에게 친절하고 우호적이었다. 미국에서 피자가게에서 일을했다며 우리 곁을 떠나지 않고 잘 알아듣지도 못하는 우리를 붙들고 끝임없이 영어를 늘어놓았다. 그는 마리화나를 하고 우리에게 권하기도 했다. 분위기에 젖은 바수는 락시를 들이키고 어느 순간 수다스러워졌다. 마리화나에 취한 네팔리와 술에 취한 바수가 자리의 분위기를 일찍 흐려놓는 바람에 다뜻한 모닥불의 아까운 불씨를 포기하고 침실로 흩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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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지붕을 때리는 빗소리와 마르상디 계곡을 흐르는 물소리에 흠뻑 젖어 아침을 맞았다. 난감한 상황이다. 바람이 숭숭 지나가는 방안에 갇혀 하루를 지체하기에는 주변 상황이 너무 좋지 않다. 고산지대로 접어들려면 한참을 멀었지만 비때문인지, 계곡을 따라 흘러내리는 찬바람때문인지 어슬어슬 춥다. 사실 딱히 비를 피해 돌아다닐 만한 곳도 없어 만약 출발하지 않는다면 하루종일 롯지안에서 왔다갔다 하는 수 밖에 없다. 일단 아침을 먹고 짐을 챙긴뒤 커피를 마시며 날이 개이기를 기다렸다. 난방이 되는 곳이라면 데크에 앉아 하루종일 마르상디 강을 내려다보면서 커피나 마시며 보내는 것도 썩 나쁘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 즈음 다행이 빗방울이 가늘어지고 바람이 잦아들었다.



한국에서 미리 챙겨온 1회용 비옷이 3개 있어 하나씩 걸치고 길을 나서기로 했다. 파샹은 비속을 걷고 싶어하지 않은 눈치였지만 나의 조갑증이 그 정도의 비에 하루를 지체하는 걸 용납할 수가 없었다. 길을 나섰다. 길 양쪽으로 몇개의 롯지가 자리 잡고 있는 불불레의 골목길을 벗어나자 편안한 시골길이 이어졌다. 마르샹디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코스다 보니 길은 강과 가까워졌다가 다시 멀어지고, 멀어졌다가 다시 가까와졌다. 비가 내리는 아침 나절에 길을 가는 사람이 드물었지만, 간혹 어디 장에라도 가는 듯한 주민들과 마주쳤다. 오솔길에서 일대일로 마주치는 주민들을 외면할 수도 없는 노릇, 나도 모르게 목례를 했다. 한번 두번 마주치면서 그들로부터 돌아오는 인사는 한결같이 '나마스테!'였고 어느사이 나도 그들과 같이 합장을 하며 '나마스테!'를 자연스레 읇조리기 시작했다.


'나마스테!' - 내안의 신이, 당신 안의 신께 안부를 묻습니다. 나라마다 인사말이 다 다르지만, 내가 아는 한 '나마스테!'같이 절실한 인사말은 아직 보지 못했다. "나는 한국에서 온 여행객이고 당신은 네팔리지만 우리는 그냥 스쳐지나가며 의례적인 인사를 나누는 것이 아니다. 당신과 내가 국적이 다르고 인종이 다르고 어쩌면 재산이나 학식, 신분이나 사회적 지위가 전부 다를 지 모르지만 그 껍데기를 모두다 벗어던지고, 이 순간 오직 당신과 내안의 가장 순수한 자아가 마주친 것입니다. " 이날이 다 가기 전에 '나마스테!'가 입에 익었지만, 나는 이번 여정이 다 끝나도록 그 의미를 결코 잊을 수가 없었다.


불불레를 떠난지 한시간이 되기 전에 다시 빗방울이 굵어졌고 우리는 다행히 티하우스를 만나 비를 피하기로 했다. 커피와 블랙티 등과 간단한 과자와 음료수를 파는 1평가량의 판자집에 비때문인지 아침부터 노인과 중년의 네팔리가 차를 마시고 있었다. 트레커들이 익숙한 분들이시겠지만 비를 피해 들어 온 낯선 방문자에게 많은 관심을 보였다. 커피를 주문하고 국적을 묻는 그분들과 한국에서 가져간 과자를 나누며 동문서답식 대화를 표정으로 나누는 사이 비가 잦아 들었다. 다시 길을 나서고, 나디바자르를 지날 무렵 비가 그치고 파란 하늘과 흰구름이 걸린 산의 상큼한 자태가 눈에 들어왔다. 비옷을 벗어버리자 발걸음이 더욱 가벼워졌다. 비가 그쳐서인지 길을 따라 만나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그 사이에 어디부턴가 'Sweet!''을 외치며 손을 내미는 아이들과 마주치기 시작했다.


여행안내책자에서 네팔아이들에게 과자를 주면 충치가 늘어 결국 건강상의 문제를 일으키기 때문에, 그보다는 어려서부터 구걸 습성을 키운다는 이유로 과자를 나누어 주는 것을 피하라고 조언했다. 충분히 공감하면서도 막상 그런 아이들을 막딱뜨릴 때는 어찌 처신해야할 지 혼란에 빠졌다. 단것을 원하는 아이들의 욕구는 너무나 당연한 것 아닌가. 나중에 일어날 건강상의 문제는 또 그나름대로 해결해 나가기 위한 노력이 있어야 하고 우선은 그 아이들이 원하는 것을 제공하는 것이 옳지 않은가는 생각도 지울 수 없었다. 아이들뿐 아니라 아이를 안은 어른들까지 같이 손을 내밀 때는 솔직히 구걸이 아니라 그냥 낯선 사람의 신기한 먹거리를 맛보고 싶어하는 친근한 관심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자신의 삶의 터전을 즐기러 온 낯선 나라 사람들에게 자신이 원하는 것을 요구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지 않냐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또 내가 누리는 것을 그네들도 누리고 싶다는 권리를 주장하는 것으로도 다가왔다. 끝내 답을 내리지 못하고 우선은 가진 것을 그냥 나누기로 했다.


나디바자르를 지나 바훈단다까지는 편안한 시골길이 이어졌지만, 바훈단다의 '단다'가 언덕을 의미하듯 마지막 마을로 접어들기 위해서는 제법 가파른 언덕길을 한참 올라야했다. 파샹이 먼저 올라간 언덕길을 올라가는데 한무리의 사람들이 어떤 물체를 둘러싸고 웅성거리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무슨 일인지, 그 사람들이 둘러싸고 있는 것이 혹시 파샹인가하는 터무니 없는 걱정도 들었다. 하지만 막상 가까이 다가갔을 때 사람들 사이로 큰 소가 한마리 누워 있었다. 바로옆 언덕에서 소가 굴러 심한 부상을 입고 일어서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소는 눈만 껌뻑이고 대나무로 만든 큰 들것을 가져온 사람들은 걱정스런 표정으로 어떻게 소를 들어 나를 수 있을까 의견을 나누는 것 같았다. 부상 당한 소의 안녕을 빌며 마지막 남은 언덕길을 올라 바훈단다로 들어섰다.








바훈단다에서 점심을 주문하고 습한 겉옷을 벗어 햇빛에 늘고, 멀리 걸어온 길을 되돌아봤다. 어떻게 걸어왔는지 지나온 길이 아득하다. 다시 갈 길을 올려다보니 멀리 안나푸르나는 흰 구름속에 자신의 자태를 감추고 있다. 한시간을 기다려 나온 점심은 양이 너무 작아 '누들수프'를 하나더 시켜 먹다보니 2시가 다 되었다. 식사를 마치고 한국의 당나무같이 켜켜이 세월을 지고 마을의 공터 중심에 서있는 아름들이 나무 그늘아래서 시원한 바람을 맞았다. 걸을 때 흐르던 땀은 온데간데 없고 금방 한기가 느껴지니 출발해야할 때가 되었나보다.






 

불불레 롯지가 너무 허름했고, 또 네팔에 들어온 뒤로 샤워를 해 본적이 없었는데 파샹이야기로는 게르무의 롯지에서 핫샤워가 가능하다고 했다. 다시 물으니 그 이후의 대부분 롯지에서는 핫샤워가 가능한데 추가 비용을 지불해야만 한단다. 자주는 아니지만 그래도 집을 나선지 일주일이 다 되가고, 특히나 카트만두 먼지속을 지나 온 만치 이날은 꼭 샤워를 하고 싶었다. 해가 떨어진 계곡에 저녁어스름이 퍼지기 시작하는 오후 4시 정도 게르무에 도착했다. 퍄샹은 강건너 폭포가 보이고 계곡 위 아래로 조망이 좋은 레인보우호텔이라는 깨끗한 롯지에 묵을 것을 권유했다. 하지만 애초의 일정에 비슷하게라도 맞추기 위해 한 마을 정도를 더 올라가기로 결정했고 다음 목적지인 상계로 향했다. 게르무에서 상계까지는 지척이었다. 문제는 상계의 롯지가 대부분 형편없이 낡았고, 파샹이야기로는 음식도 좋지않다고 했다. 상계 다음은 자가트라는 마을이지만 1시간 이상 걸리는 거리라 시간적으로 좀 힘든 조건이고, 다시 게르무로 돌아가자니 짐을 나르는 조랑말 무리와 함께 한참을 내려온 깍아지른 절벽을 따라 다시 오솔길을 올라가야만했다. 결국 대안으로 상계에서 30여분 거리에 있고 두세개의 롯지가 있는 슈리샤우르라는 마을까지 더 걷기로 했다.


상계에 머물 생각으로 달려왔다가 다시 더 걷기로 하니 여벌로 걷는 걸음은 더 힘들게 느껴졌다. 아내와 마찬가지로 나도 첫날 걸음 치고는 너무 많이 걷는다는 느낌이었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슈리샤우르의 부메랑 롯지에 들어서니 단정한 외관이 마음에 들었다. 사우지(주인)를 만나 묵기로 하고, 2층 방을 구경하기 위해 올라가는 계단 끝에 덩치 큰 검정개 두마리가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순간 겁을 먹었지만, 문이 열려있던 한 방에서 개를 부르는듯한 사람 소리가 들렸고 개들은 그 방으로 쪼르륵 달려들어갔다. 개가 몰려 들어간 방에는 침대에 누워있던 백인 남자 트레커가 눈인사를 했다.




방에 짐을 풀고 내려와 쉬고 있는 사이 한무리의 서양인이 마당을 들어섰다. 하루 종일 길을 걸었지만 하루를 묵을 롯지 마당에서 첫 트레커를 만난 것이다. 마당에는 탁자가 하나밖에 없어 같이 앉아도 괜찮을지 물어왔고 혼쾌히 그들과 한 탁자에 앉게 되었다. 주고 받는 대화를 통해 그들이 독일인인 것을 알게 되었다. 의례적인 인사를 하고 나서 그들은 우리 부부의 국적을 물어왔다. 그리고 목적지 등을 묻는 한두마디의 어설픈 대화가 이어졌지만 나의 영어로는 더이상의 대화가 불가능했다. 난데없이 산 중에서 영어공부 열심히 하지 않을 걸 후회하게 되다니, 상당히 억울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촛불아래 저녁을 먹고, 파상과 한참을 그리고 롯지 주인과는 잠깐씩 영어와 한국어 그리고 몸과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고 집을 떠나온지 처음으로, 아니 인천공항 찜질방에서 샤워를 한지 처음으로 따뜻한 물로 샤워를 했다. 벌써 몇일 되었다고 김이 무럭무럭 나는 물을 보니 신기하기 이를데 없었다. 뜨거운 물에 손을 대니 기분마져 좋아졌다. 뜨거워졌다가 차가워졌다가 온도가 일정하지 않은 가스 온수기로 문고리가 제대로 붙어있지 않아 언제라도 누가 벌컥 문을 열고 들어올지 모르는 화장실 공간에서 불안한 샤워지만 너무나 가뿐하고 상쾌한 기분에 젖어 침대에 누웠다. 쉬 잠이 들지 않아 일어나 창을 여니 깜깜한 계곡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오직 소리를 통해서만 강과 폭포가 가까이 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었다. 밤이 깊어가면서 다시 빗방울이 들었다. 또 밤새 강물 소리와 폭포소리 그리고 빗소리에 흠뻑 젖어 눅눅한 아침을 맞을 것 같다는 걱정을 나누며 잠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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