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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을 기다려온 네팔 여정 두달이 끝났다. 출국에 앞서 마지막 하루를 라트나 버스파크, 파탄, 그리고 카트만두 최고의 번화가 더바마그를 걷고 2월 26일 출국 당일 아침 일찍 다시 한번 더 스와얌부나트를 다녀왔다. 오후 늦게 출발한 비행기는 쿤밍과 상하이를 거쳐 2월 27일 저녁 늦게 인천에 도착했다.  

 

 

2월 25일 출국에 앞서 남은 마지막 하루를 어떻게 시작할까 고민하며 눈을 떴다. 즉흥적으로 카트만두 북쪽의 Shivpuri Nagarjun National Park로 가기로 마음먹었다. 마지막 하루는 숲길을 걷고 싶었다. 무작정 라트나 버스파크로 향했다. 가는 길에 대학가를 지났고 각종 정치구호가 담벼락에 그려져있고 적기가 휘날리는 대학가는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는 네팔청년들의 역동성과 기개가 느껴졌다. 라트나 버스파티에 도착했지만 나가르준행 버스를 찾을 수 없었다.  몇번을 묻고 헤메다 꼭 나가르준을 가야할 이유도 없어 발을 돌려 택시를 잡아 타고 파탄으로 향했다.  

 

 

이번에는 파탄 드바르광장으로 진입하지 않고 주로 외곽을 걸었다.  발길이 닿는데로 파탄의 골목길을 걷고 또 걸었다. 예식이 진행중인 힌두사원을 들러 향과 연기에 취해 넋을 놓고 앉아있다가 다시 주택가 골목길로 걸음을 옮겨 네팔리의 삶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몰려가는 아이들 틈에서 나는 등교하는 학생이 되었다가, 일없이 길가에 앉아 해바라기를 하는 여인들을 보면 나도 심심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진 한 사람의 방랑자가 되었다. 일터를 오고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도 평범한 네팔리 노동자가 되었다. 우리는 아무 생각없이 골목을 어슬렁거리는 사이 네팔리의 삶을 닮아갔다. 늘 목적의식을 가지고 빠릿빠릿 바쁘게 살아야 잘 사는 인생이라는 강박에 쫒겨온 인생 50년을 되돌아 보고 어떤 삶이 더 좋은 삶인지 더 가치있는 삶인지 곱씹었다. 앞으로 살아가면서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아무런 계획도 일도 만남도 없는 그런 공백을 내 일상에 주기적으로 배치하는 삶을 살아야지 다짐했다.

 

버스를 타고 라트나로 돌아와서 더바마그 거리로 향했다. 익숙한 브랜드의 가게들이 즐비한 카트만두의 가장 현대적 거리의 풍경은 한국의 도시와 다르지 않았다. 아내는 옷가게로 들어가고 나는 베스킨라빈스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달콤한 아이스크림에 녹아들었다. 쇼핑백을 들고 나온 아내와 한국 도시의 어느 쇼핑가를 걷는듯 우리는 여행객스러워졌고 조금은 들뜬 걸음으로 나라야니티 왕궁박물관을 지나고 꿈의 정원을 스쳐 타멜거리를 찾았다. 네팔을 떠나기전 사라진 식욕을 찾고 기운을 되찾아 줄 마지막 성찬을 찾아 헤멘끝에 한 일식집에 들어갔다. 하지만 이날 저녁 식사는 네팔 여정 최악의 음식으로 기억에 남았다.  허탈한 마음으로 숙소로 돌아가는 타멜거리에서 아쉬운 카트만두의 마지막 밤을 맞았다. 

  

 

남루한 여정이 저문다. 내 일생에서 가장 화려한 일탈이었을 두달의 네팔 체류가 마지막 밤을 남기고 있다. 가슴 뜨겁고 벅찬 순간들을 기억하지만 난 벌써 봄볕아래 새로운 여정의 단꿈에 빠져든다. 인생이 아름다운 것은 인간은 모두가 여행자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머물고 가지고 집착하지 않고 그저 인생은 잠시 스쳐가는 여정임을 받아들이게 된다면 나는 혹독한 히말라야의 가난 속에서도 뭍 생명에게 손을 내밀고,  지진으로 무너진 벽돌더미위에서도 활짝 웃을 수 있는 네팔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나의 이번 여정은 어떻게 정리되어야하나 잠시 발을 멈추지만 나의 여정은 내일 또다시 쿤밍으로 상하이로 인천으로 그리고 봉화로 이어질 것 임을 깨닫는다. 나는 여행 중에 히말라야를 들렀고 다시 여행이 한국으로 이어질 뿐이다. 주어진 시간을 정하는 것은 나의 몫이 아니지만 여행이 끝나는 그때까지 나는 나의 몸에 집중하고 내 몸과 마음이 가는데로 나를 맡기고 싶다.

 

2월 26일 드디어 네팔을 떠나야되는 날이 밝았다. 다행히 몸 상태는 조금 나아졌다. 아직 식욕도 없고 먹고난뒤 소화를 확신할 수 없어 배는 고프지만 아침을 건너뛰었다. 쿤밍가면 맛난 음식을 만날지 모르다는 기대로 대신했다. 익숙한 수어러꾸떼 골목을 나와 스와얌부나트로 향했다.  숙소 마야거르츄와 닿아있는 일종의 예능고등학교인 Star High School의 담벼락에도 인사를 전하고 그동안 거의 매일 지나치던 고깃간에 묶여있던 죽어간 염소들에게도 명복을 빌었다. 골목끝에 방치되어 있는 지난 지진으로 무너진 호텔 부지를 지키며 남아있는 한그루의 정원수에게도 안부를 남겼다. 

 

 

스와얌부나트로 가는 골목길을 걸으며 한발한발 기억을 되새기고 얼굴을 스치는 카트만두의 바람에게도 안부를 남겼다. 도착한 스와얌부나트는 이른 아침부터 참배객과 관광객의 발길이 붐비기 시작했고 사원앞 공터에는 각지각색의 야채를 진열한 노점상이 삶의 온기와 세상의 아름다움을 더하고 있었다. 나는 탐욕스레 모든 것을 눈에 담았지만 곧 흐려지고 잊혀질 풍경임을 알기에 마음이 아렸다. 스와얌부나트의 진짜 주인인 원숭이들에게도 작별인사를 남겼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네팔리들이 즐겨찾는 스넥가게에서 점심을 해결했다. 배가 고파서라기보다는 공복을 채울 무언가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허전한 기분을 네팔의 음식으로 달래고 숙소로 돌아가 두달을 지고 이고 다닌 짐을 챙겼다. 먹고 소비하고 준 그만치 새로운 것들로 채워진 배낭은 여전히 배가 불렀다. 택시로 도착한 트리뷰반공항은 나름 변해가고 있었다. 조금은 더 친절해졌고 대합실도 5년전에 비해 좋아져 있었다. 비행기는 예정시간 한시간을 넘겨 출발했다. 지난 두달 동안 나의 삶이 있었던 네팔의 산하가 구름속으로 사라졌다. 네팔의 산하가 그리고 맺었던 모든 인연이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쿤밍에서 환승에 문제가 생겼다. 공항청사에서 어슬렁 거리다 체크인 시간을 넘겨버렸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헐레벌떡 달려갔더니 이미 마감한 게이트를 열고 우리를 입장 시켜줬다. 하지만 고마운 마음으로 올라 탄 비행기는 끝내 이륙하지 못했다. 거의 한시간을 비행기에 같혀 지체한 뒤에 기체고장이라며 대체기로 갈아탈 것을 요구했다. 결국 상해에서 인천가는 연결편의 출발시간을 넘겨버렸다. 그런데 웬걸! 상해에 도착해보니 우리를 싣고갈 인천행 비행기는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게 아닌가! 역시 연착이나 결항이 잣다는 동방항공이지만 그만치 스케줄 조정이 유연한것 같았다. 한국으로 돌아오는 승객들은 상해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안내 팻말을 든 항공사 직원을 따라 숨차게 뛰어가 인천행 비행기에 올랐고 예상시간보다 많이 늦긴했지만  무사히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카트만두에서 쿤밍으로, 쿤밍에서 상하이로, 상하이에서 인천으로 이어지는 30시간의 귀향길 끝에 두달동안 그리워하던 딸을 안았다.

  

 

이번 네팔 여정에서 나는 많은 네팔의 변화를 읽었다. 계곡에는 댐이 들어서고, 카트만두에는 수도를 설치하는 공사가 진행중이었다. 카트만두와 포카라에는 정전이 사라졌고 도시의 쓰레기는 눈에 띄이게 줄었다. 거리에는 손을 벌리던 거지 아이들도 만날 수 없었고 네팔리의 발걸음에는 자신감이 늘었다. 그리고 카트만두 낙후성의 상징이다시피한  바그마티강은 정화작업이 한창 진행중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번 여행을 통해 내 자신의 변화를 더 읽고 싶었다.  나이를 먹었고, 체력은 그만치 줄었음을 느꼈다. 그러나 마음 속에 평생을 키워온 '화'를 벗어던지고 자신과 세상에 보다 관대해지고, 이미 늦었기에 조바심도 버린 나를 만나고 싶었다. 하지만 나의 그런 모습은 쏘롱라에도 깔리간다키에서도 만나지 못했다. 그래서 다음 여정의 계획을 가슴에 품는다. 그때는 지금의  딱 절반의 속도로, 꼭 네팔 어딘가에 있을 보고싶은 나를 찾아 걷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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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24일 복통 중에 짐을 싸서 닥신칼리를 거쳐 파르핑에서 하루를 접고, 25일 분가만티를 통해 다시 파탄으로 복귀 1박을 하고, 26일 카트만두의 숙소 마야거르츄로 돌아가 이후 여정을 20여일동안 같이할 또 다른 일행 M과 D를 맞았다.

 

전날 복통으로 아무 것도 못하고 있는 사이 L은 타멜 거리를 카메라에 담으며 혼자 돌아다녔다. 계속 숙소에서 밍거적 거리고 있기에는 시간이 아까웠고, 어렵게 네팔에서 만난  L을 고려해도 그냥 있을 수가 없었다. 타멜만치 친숙해져 버린 라트나 버스파크로 향했다. 일차 목적지를 Shree Dakshinkali Temple로 정했다. 버스를 찾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진 않았고 일부노선이 파업 중이었지만 다행히 닥신칼리행은 운행 중이었다. 

 

 

닥신칼리로 가는 길은 도심을 벗어나자마자 비포장길이었다. 앞을 분간하기 힘들만치 두터운 먼지가 일고, 엉성한 창틀을 통해 실내로 밀려 들어왔다. 마스크를 했지만 숨쉬기가 쉽지 않았다.  차안의 공기는 탁했고 그렇다고 창문을 열 수도 없는 두어시간을 견딘뒤에야 닥신칼리 입구의 버스파크에 도착했다. 먼지만 아니었으면 버스를 타고 온 2시간이 나름 즐거운 여행길이었을테고, 바같의 풍경에 좀더 몰입할 수 있었을 텐데 많이 아쉬웠다. 사실 여행 중에 사전 공부 없이 만나는 풍경은 무미건조할 수 있다. 순간순간 스쳐 지나가는 풍경에 스토리를 입히고 나의 기억 속에 저장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일정한 사전 정보를 가지고 바라다보는 풍경일 때 비로소 의미를 가지고 나의 것이 되기가 훨씬 쉬울 것이다. 사실 그런 면에서 닥신칼리는 나에게 미지의 장소였다. 제물로 희생된 동물의 비피린내가 진동하는 끔직한 흰두사원이라는 것 말고는 아무런 이해도 없었다.

 

닥신칼리는 외래 관광객이 그리 많이 찾지 않는 곳 같았다. 버스를 같이 타고온 승객들은 대부분 현지인으로 사원에 참배를 오거나 가까운 사람들과 함께 나들이라도 온것 같았다. 한무리의 젊은 아가씨들이 버스에서부터 우리에게 대화를 시도했다. 낯선 외국인을 보고 반갑고 호기심이 일었는지 어디서 왔는지, 왜 왔는지, 어디로 갈건지 등등을 물었지만 우리의 영어는 짧고 단편적인 대화를 넘어설 수 없었다. 버스파크에서 내리자마자 현지인이 가는 식당에서 간단한 식사를 하고 사원을 향해 걸었다. 그리 멀지 않은 계곡 속에 '피비린내 나는' 사원이 자리하고 있었다.  다행히 이날은 재물을 희생하는 의식이 많지 않은 날인지 핏빛 바닥을 맨발로 지나가야하긴 했어도 직접 살육장면을 보지 못했다. 흰두교도가 아닌 사람은 들어갈 수 없다는 성전도 바로 옆의 통로를 지나며 볼 수 있었는데 선입견이 준 느낌 때문에 오래 머물고 싶지는 않았다. 사원을 지나 오르막을 한참 올라 전망대가 있었지만 전망대로 올라가는 입구의 기념품 가게와 노점상을 구경하며 그들의 삶을 느끼는 것 만으로도 닥신칼리 방문은 충분했다.

닥신칼리에 오래 머물지 않고 바로 파르핑을 물어 걷기 시작했다. 한번씩 차가 지나갈 때 마다 바람방향을 살피며 먼지를 피해 뛰어야했는데 다행스럽게 길은 멀지 않았고 파르핑 시내는 금방 나왔다. 많지 않은 네팔 여행중에 만난 도시는 늘 사원과 사원을 찾는 순례객을 위한 숙소가 혼재되어 었다. 생활과 종교를 따로 데어놓을 수 없을 만치 삶이 종교와 밀착되어 있는 것 같았다. 파르핑도 다르지 않았다. 구불구불 이어지는 골목길을 지나 신시가지로 접어들기 전에 만난 숙소를 다 지나치고 막상 숙소를 찾기 시작할 무렵에는 마땅한 곳이 나타나지 않았다. 한산한 가게앞에서 현지인에게 숙소를 물었더니, 네팔에서 늘 그랬지만 주변의 사람들이 다 몰려 들어 나에게 길을 알려주기 위해 의견을 모았다. 네팔리의 친절함은 내가 경험한 세계에서는 의문의 여지 없이 최고였다.

숙소를 잡고, 창을 통해 해지는 파르핑의 삶을 바라다 보면서 하루를 정리했다. 타멜거리를 떠나 닥신칼리를 경유해 파르핑까지 많은 풍경을 하루동안 스쳐 지나쳤다. 나에겐 풍경이었지만 그곳에 터잡아 살아가는 네팔리에게는 구구절절한 삶의 현장일진대 여행자의 눈으로 오늘 하루 그들의 삶을 모욕하지 않았기를 빌었다. 그리고 낯선 나라를 이렇게 여행자로 떠돌 수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말할 수 없는 축복이거늘 나는 왜 늘 나의 삶을 스스로 부정하고 탈주를 꿈꿀까 스스로에게 반문했다. 일상이 주는 안락함과에 겨워 방랑의 낭만을 갈구하는걸까? 나는 진정 무엇에 목말라하는지 스스로 물었지만 답을 찾지 못했다. 그래서 남은 일정의 여행은 순례가 되어야했다.

안개속을 번져오는 노래소리에 눈을 뜨며 parphing의 아침을 맞았다.  신을  찬미하고 새로운 하루를 맞은 생명의 환희를 담은 어린 여학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까이에 여학교 기숙사라도 있는건지 아니면 사원에서 들려오는 소린지 알수 없었지만 나는 궁금하지 않았다. 나에겐 그냥 파르핑 전체가 사원과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방을 나와 아침 햇살에 삶이 피어나는 파르핑의 시가지를 내려다 봤다. 게스트하우스 4 층에서 내려다보이는 앞집 옥상에는 향을 올리고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는 여인이 보였다. 그녀는 어떤 신에게 무엇을 축원하고 소원했을까 알 수 없었지만 나는 단지 어둠을 이기고 아침을 맞는 모든 삶앞에 우리는 숙연해진다는 사실을 알수 있었다. 그녀 역시 자신의 안녕과 욕망의 충족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생명의 안녕과 존재의 기쁨을 축원했을 것이라고 믿어졌다.

숙소를 체크아웃하고 인근의 바라이요기니 템플을 향했다. 나의 새벽잠속으로 달콤하게 녹아들었던 찬송이 사원에서 울려나왔다. 이제는 어린 여학생의 목소리가 아니라 삶의 경륜이 묻어나는 탁한 목소리였다. 가사를 하나도 이해하지 못하는 찬송이지만 그 절실한 축원의 마음을 느끼기에는 충분했다. 찬송장면을 사진으로 남기고도 싶었지만 그냥 마음에 담고 사원을 나왔다. 계단을 내려오자 맞닥뜨린 남루한 요들의 불편한 적선요구를 외면하고. 계단 모퉁이에서 농산물을 펼쳐놓고 손님을 기다리는 아주머니들과 눈을 맞춰 웃음을 나누고 도로를 만나는 길모퉁이 까페에서 아침을 청한다.

 

 

분가마티는 지도상 직선거리로 얼마되지 않았지만 파르핑과 분가마티를 가르고 있는 바그마티 강 때문일까, 마땅한 버스 노선을 찾을 수 없었다. 파탄까지 나가서 다시 분가마티로 가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택시는 어떻게든 분가마티로 바로 갈수 있을 거란 기대를 가지고 물어보니 한 기사가 선듯 나서주었다. 안도하며 올라탄 택시는 카트만두 쪽으로 달리기만 하고 분가마티는 더 멀어지는 것 같았다. 기사도 나중에는 길에 대한 확신이 없었던지 지나는 다른 기사나 주민에게 묻기 시작했고, 다시 방향을 파르핑 쪽으로 잡아 왔던 길을 되돌아왔다. 결국은 분가마티에 도착하지 못한 택시는 우리를 한적한 강가의 철제 다리 근처 마을에 내려놓고 도망가듯 사라져 갔다.

 

 

걷기 위해 온 네팔이니 우리는 개의치 않고 걷기 시작했다. 강이라기 보다 하수구에 더 가까운 바그마티 강을 건너고 다시 강을 따라 북쪽으로 방향을 잡아 한참을 헤메야했다. 강을 벗어나자 연두색으로 살아나는 밭둑길이 나오고 멀리 시가지가 시야에 들어왔다. 아직 1월에 불과해지만 아열대기후인 네팔의 들녘은 벌써 봄를 닮아 있었다. 정갈하고 아름다운 전원 도시로 알려진 분가마티로 향하는 들길은 아름다웠다. 겨우 길을 찾고 따가운 햇살을 맞으면 오르막길을 올라 분가마티를 만났다.

 

도착한 분가마티는 남루했다. 지난 지진의 여파때문일까, 시가지 자체가 여느 다른 도시와는 달리 낡고 지저분했다. 뿌연 먼지를 뒤집어 쓴 건물들은 위태로웠고, 방치되어 있었다. 인적이 드물고 생기없는 골목길을 돌아 겨우 물어 찾아간 민속박물관은 초라했다. 지금까지 카트만두나 포카라를 중심으로 주요한 도시만 돌아다닌 끝에 처음으로 관광루트에서 벗어나 만난 도시가 분가마티가 아닐까는 생각도 들었다. 지금까지는 네팔의 허상들이었고, 분가마티가 네팔의 진상이란 말인가, 알수 없었다. 버스파크 근처에서 너무 싼 가격에 놀란 식당에서 모모와 사모사 그리고 콜라로 점심을 해결하고 파탄행 버스에 몸을 맡겼다.

 

5일만에 다시 찾은 파탄이 반가웠다. 편한 잠자리와 풍부한 먹거리가 있고, 사람들의 활기와 아름다운 건축물이 즐비한 파탄으로 돌아왔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 벅찼다. 지난 몇일간 계속되는 복통으로 체력은 현저히 떨어졌다. 마땅히 먹을 것도 없었는데다가 무얼 먹어도 소화가 되지 않았다. 그렇게 몇일을 지내다보니 실제보다 훨씬 긴 여정을 다녀온듯 몸도 지쳤고 마음도 처졌다. 그래도 긴 흥정 끝에  Lalit Heritage Home에 짐을 풀었다. 파탄 드바르광장이 내려다 보이는 환상적인 조망의 룸에서 짐을 풀자 메니저가 커피를 날라왔다. 고마운 마음에 팁을 건넸지만 팁이 호텔비에 이미 포함되어 있다며 사양했다, 고맙고 기분 좋았다. 커피향을 맡으며 아름다운 건축물이 조화롭게 모여있고 그 사이를 살아가는 인파를 행복한 눈으로 한참을 바라다 보다 어둠이 내리는 파탄의 아름다움에 흠뻑 젖어갔다.

 

처음으로 파탄에서 아침을 맞았다. 역시 신을 경배하는 찬양소리에 이른 잠을 깼다. 작고 아기자기한 룸때문인지 편안하고 아늑한 잠자리를 누렸다. 간혹 도시의 밤하늘을 울리는 개짓는 소리에 잠을 깨기도 했지만 나의 숙면을 방해하지 못했다. 밤새 도시를 뒤덮던 개울음 소리는 아침을 알리는 서광이 비치자 자취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 찬양소리 사이로 일과를 시작하는 사람들의 기척이 늘어만 갔다. 방을 나와 옥상을 올라갔다. 소박한 정원 넘어 파탄 두바르 스퀘어의 아름다운 풍광이 한눈에 들어왔다.

밤새 보이지 않던 숙박객들이 조식을 들기 위한 다이닝룸에 부쩍였다. 모처럼 한국인들도 만나고 지진 피해를 복구하기 위해 지원온 일본인들도 있었다. 일어를 하는 L은 일본인들을 고향사람 만난듯 반가워 대화를나누었다. 외국어가 절실해 지는 순간이었다. 한국에서 M과 D가 도착하고 안나푸르나 라운드를 준비하는 여정의 터닝 포인트에 도달하는 날, 우리는 타멜거리로 되돌아 가기 위해 Heritigi Home을 나섰다.  

교통체증으로 한국같으면 살인이라도 날것 같은 골목을 지나 타멜행 버스를 찾았다. 다시 돌아온 타멜거리를 걷고 숙소 마야거르츄에 짐을 풀었다. 일정 없는 하루를 한가롭게 보냈다. 오후에 M과 D가 도착해 반갑게 맞고 다시 타멜 거리로 나섰다. 타멜거리에서 제일 규모가 크다는 Shop Right Supermarket에서 트레킹 물품을 사고, 한국에서 일했던 네팔 노동자가 운영한다는 Small Star 주점에서 뚱바(Tungba)를 마셨다. 뚱바는 수수같이 보이는 꼭또라는 곡물을 발효해 통에 담은 뒤 뜨거운 물을 붓고 빨대로 마시는 네팔만의 술이었다. 왠지 술에 흠뻑 젖고 싶은 날이지만 불편한 속과 다음 여정을 위해 참았다. 

 

두달 여정의 절반이 지나는 밤 침대에 누우니 많은 생각들이 일었다. 나는 스스로에게 다그치듯 묻기 시작했다. 나는 네팔을 또 올까? 올 수 있을까? 오고싶을까? 아무 대답도 가능하지 않았다. 너는 네팔에 뭐 하러 왔지? 왜 네팔을 그토록 목말라했지? 질문은 이어졌지만 심경만 복잡해 질뿐 답을 구할 수 없었다. 나에게 네팔은 내 삶의 알리바이인가? 나의 순수를 보증해주는 방패일까? 위장막 혹은 화려한 목걸이같은 장식일까? 먼지와 차가운 방, 입에 맞지 않는 먹거리를 감수하고도 네팔을 찾은 나는 내 자신에게 얼마나 정직한 것일까 문득 묻고 싶어졌다.  집이 그립고 딸이 보고싶고 뽀득뽀득 윤기나는 접시에 상큼한 야채를 담은 그런 식탁보가 있는 아침이 그리워졌다. 아직 한달이나 남았잖아! 문득 조갑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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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1일 아침, 뷰띠크 호텔 체크아웃하고 택시로 마야거르츄로 이동하여 짐을 풀고, 왕궁박물관과 파탄을 돌아다니고, 22일 공항에서 앞으로 일주일 여정을 같이할 L씨를 맞이하고 타멜에서 시간을 보낸 뒤, 복통을 만나 23일 내내 방에서 보냈다.


100리터 배낭 두개와 두사람이 소형 택시를 타고 마야거르츄가 있는 수어러꾸떼로 향한다. 5분만에 도착한 마여거르츄는 트레커들이 다 떠나고 적막감마저 감돌았다. 혼자 계신 관리자분께 인사만 하고 방으로 짐을 옮긴뒤 단촐한 차림으로 Narayanhiti Palace Museum으로 향한다. 타멜거리를 지나고 Garden of Dream을 지나 10시가 조금 넘어 박물관에 도착했다. 11시에 문을 연다니 30분이나 남은 이른 시간이지만 가족나들이객들로 붐비기 시작했. 주변을 둘러보니 안내문이 있고 박물관 입장을 위해 지켜야하는 규칙이 나열되어 있었는데 상당히 위압적이었. 역시 권위적 권력의 소산이겠지만 왕은 죽었고 왕정은 무너졌으며 좌파 민주정부가 들오선지 10년이 지났지만 아직 네팔은 변화를 시도하는 단계에 머물러있는 듯 보였. 거리에서 가장 당당하고 멋진 사람이 총을 든 군인이거나 경찰인 국가에서 시민은 늘 초라하다. 사실 카트만두가 그랬다.

 

박물관은 네팔의 마지막 왕인 가렌드라가 폐위되는 2007년 까지 살던 왕궁이지만 2008년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박물관으로 공개되었다고 한다. 오전 11시부터 오후 3시까지 문을 여는 박물관은 입장을 위해서는 엄격한 소지품 검사를 받고 가방은 물론 촬영을 못하도록 핸드폰까지 맡겨 놓아야 했다. 내부관람 중에도 삼엄한 경비를 서고 있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는데 그렇다고 관람을 방해받지는 않았다. 박물관은 나름 볼거리가 풍부했고, 여행객이라면 한번쯤은 들러 네팔 왕실의 삶을 통해 네팔 문화를 이해하는 기회를 가져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물관을 통해 나는 네팔이 고립된 왕국이 아니라 세계와 풍부한 교류를 한 개방적인 나라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사실 네팔의 역사에 대해 충분한 지식없이 왕궁박물관을 둘러보니 그야말로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한  '구경'이상이 될수 없었다. 단지 네팔 혁명과 왕정의 붕괴과정에 대해 일말의 뉴스라도 접해보았다고 비렌드라 왕의 일가가 아들 디펜드라에 의해 살해된 현장을 둘러볼 때는 왠지 모를 섬뜻함이 느껴졌다. 공식적으로는 왕자 디펜드라가 사랑한 인도 여인과의 결혼을 반대한 부모에 대한 반감으로 술과 마약에 취해 총기를 난사한 사건으로 정리가 되었다고한다. 하지만 비렌드라의 동생으로 비명횡사한 형으로부터 왕위를 물러받은 가렌드라의 음모라는 설을 민간에서는 더 믿고 있었다. 어쩌면 민중의 혁명열기에 국토의 대분분이 장악되고 대도시만 간신히 남아 있던 상황에서 왕정의 종말을 예감한 디펜드라의 광기가 발로되어 일어난 사건이 아닌가 싶기도했다. 종말은 에견되어 있었고 그 악역을 디펜드라가 맡은 것뿐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Narayanhiti Palace Museum을 나와 카트만두밸리의 세왕국중 하나였던 파탄을 향해 남쪽으로 걸었다. 5~6km나 되는 잛지 않은 거리였지만 택시도 버스도 마다하고 걷기로했다. 안나푸르나를 걷는 것과는 달리 혼탁한 공기를 마시며 걷는 도심 트레킹은 쉽지 않은 일이지만 여행자의 거리라는 타멜을 벗어나 그야말로 카트만두의 날것 그대로를 느끼고 싶었다.  mapsme에 목적지를 입력하고 하염없이 걸었다. 앱의 특성때문이겠지만 미로같은 골목길을 오고가는 네팔리와 어깨를 부딪고 만나는 꼬마들과 눈을 맞추고 미소를 주고 받으며 걸을 수 있었다. 어느 순간에는 내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 내가 서있는 곳이 어디인지 당혹스럽기도 했지만 다시 길을 이어주는 앱 덕분에 어느새 바그마티강에 이르고 강을 건너자 UN공원이라는 곳이 나왔다. 청춘 남여들이 데이터를 하는 곳이지만 청춘이 지난 우리 부부도 나무 그늘을 찾아 들어 간식을 먹고 음료를 마시며 휴식을 취했다. 

 

 

Patan은 산스크리트어로 Lalitpur라고 하고 City of Beauty라는 의미라고 했는데 역시 아름다운 도시였다. 카트만두와 박타푸르 그리고 랄리푸르가 공존하던 시절 전쟁 대신에 서로 도시를 아름답게 가꾸는 걸로 경쟁했다고 한다. 그 덕분이겠지만 랄리푸르 역시 박타푸르나 카트만두 못지 않은 아름다눈 건축물들이 듀바르 광장을 중심으로 집중되어 있었다. 듀바르 광장은 입장료를 받고 있는데 이날은 체크 없이 입장이 가능했다. 특별한 날이었는지 근무자가 자리를이탈한 건지 알수 없는 이유로 입장료없이 두바르거리들 들어섰다. 5년전의 기억을 더듬어 지난 지진의 흔적을 찾았고, 사라진 건축물의 빈자리도 보이고 여기 저기 복구공사가 한창인 곳도 많았지만 그나마 도시의 경관 전체가 주는 느낌은 손사되지 않고 살아있는 것 같아 무척 다행스러웠다. 거리는 그곳을 삶의 터전으로 살아가는 주민들의 무심한 표정과 주변을 두리번 거리는 관광객의 호기심 어린 눈이 어지럽게 교차하고 있었다.  아내는 아름다운 거리를 스케치하고 나는 현지인의 무료한 표정으로 파탄의 골목골목을 걷고 오후 늦은 시간에 어렵게 버스길을 물어 타멜로 돌아왔다.

 

1월 22일, 한국에서 쿤밍 여행 끝에 카트만두로 들어와 우리랑 합류하기로 되어있던 L님이 오는 날 공항 마중 말고는 특별히 정해진 일정이 없었다. 수어러꾸떼 골목의 가게에서 장을 보고 직접 조리를 해서 식사를 해결하고 빨레를 한 것 말고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그래도 시간은 가고 도착 예정시간인 오후 4시 30분이 다가오자 숙소에 부탁해 택시를 불렀다. 공항까지는 금방 도착했어야 했지만 길이 막혔고 차는 돌았다. 혹시라도 낯선 공항에 먼저 도착해 헤메지나 않을까, 호객꾼들에게 혼줄이나 나지 않을까 걱정되었지만 역시 네팔의 만만디 수속 덕분에  무리없이 만날 수 있었다. 외국서 만나서 더 반가운 상봉을 하고 숙소로 돌아와 짐을 풀고 타멜을 지나 북한 식당 옥류관으로 향했다. 모처럼 한국서 온 지인과 북한 동포가 서비스하는 한식을 신나게 먹고 내게 주어진 삶에 감사했다. 

1월 23일의 아침을 맞기위해 엄청난 댓가를 치뤄야했다. 전날 북한식당 옥류관에서 먹은 음식이 문제를 일으켰다. 전날 옥류관에서 보낸 즐거운 기억은 악몽으로 변했다. 복통과 설사 오한에 현기증까지 거의 탈진한 채로 아침을 맞았다. 주문한 음식을 대신해 권유한 육개장이 문제인것 같았다. 육개장을 전혀 먹지않은 L은 아무 문제가 없었고, 조금 먹은 와이프는 배탈 정도에 머물렀고, 거의 대부분을 먹은 나는 완전히 초죽음이 되었다. 가져온 비상 약을 먹고 숙소에 부탁해 네팔 약국에서 사다주는 약까지 먹었지만 몸은 정상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하루를 완전히 침대에서만 지내고 나서 극심한 오한과 현기증에서는 벗어났지만 음식을 조금만 입에 대어도 바로 복통과 설사가 잇달았다. 잘 먹고 살찌는 여행이라는 목표는 완전히 무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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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출국준비와 비행스트레스까지 참 피곤한 하루였다. 그래도 시차때문인지 설레임때문인지 
새벽일찍 눈이 뜨인다. 3시 30분! 한국시간으로 7시 정도 되었겠지. 어제 초저녁부터 정전이 되더니 새벽에 또다시 정전이다. 창밖 골목은 불빛 구경조차 하기 힘든 암흑천지였지만 다행히 자이언트 민박은 충전지가 설치되어 있어 기본 조명등이나마 들어왔다. 트레킹에 앞서 오늘 하루 카트만두 '관광'을 위해 지도를 펼치고 헤드라이트를 켰다. 헤드라이트를  안나푸르나로 접어들기 전부터 그것도 네팔의 수도인 카트만두에서 사용하기 시작할 줄은 미처 몰랐다.
 


아침을 먹고 집을 나섰다. 숙소가 있는 따까리 바자르에서 타멜거리를 목표로 오직 간단한 지도에 의지해 걷기 시작했다. 막 문을 열고 가게 앞을 쓸고, 또 가게마다 집집마다 작은 종교의식 같은 것을 치르는 장면을 목도하면서 하루의 삶이 시작되는 카트만두 거리의 아침을 호흡했다. 몇번이나 길을 잘못들고, 다시 몇번이나 길을 물어 타멜거리에 도착했다. 서점에 들러 안나푸르나 라운드 안내 지도를 사고 뚜렷한 목적지 없이 그냥 길을 걸었고 아센바자르와 인드라초크, 그리고 듀발스퀘어 를 지났다. 아센바자르는 시내 중심부에 있는 재래시장 같은 곳이다. 카트만두 시민의 일상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아센바자르의 골목을 한참 누비고 다니며 낯설 네팔의 삶을 들여다 보는 재미에 다리 아픈줄 몰랐다.

 

 


나에게 카트만두는 [종교]의 도시로 다가왔다. 집집마다 종교적 예식에 따라 아침부터 예를 올리고, 쵸크라고 불리는 사거리마다 종교적 상징물이 자리하고 있고, 골목골목을 따라 블록마다 사원이 없는 곳이 없을 정도로 카트만두는 종교에 젖어 있었다. 왕정이 종식되고 좌파 정권이 들어섰다고는 하지만 네팔은 여전히 종교의 지배를 받고 있는 것 같았다. 과장하자면 그냥 카트만두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성전으로 보였다. 자료를 보니 국민의 80%이상이 흰두교인이고 나머지는 거의 티벳불교도라고 보아도 무관하단다. 흰두교와 불교도 서로 교차되고 융합되어 내부적으로는 모르지만 나같은 이방인의 눈에는 서로 다르지 않았고, 표면적으로는 종교분쟁이라곤 일어날 수 없는 곳으로 보였다. 거기다가 최근에 한국 기독교의 공격적인 선교까지 이루어지고 있다고하니 네팔은 당분간 종교의 '도가니'로 남아 있을 것 같다.


'종교'가 없는 네팔은 상상할 수도 없지만 네팔의 해방은 좌파정권에 의한 자본가 타도보다는, 인민의 삶을 종교로 부터 분리하는데서 시작되어야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다. 주택가든 상가든 여기저기 산재한 흰두사원에는 사람들의 발길이 넘쳐나고 노인네들 뿐아니라 청년들까지 종교적 예를 취하는 모습을 쉽게 목격할 수 있는 것으로 봐서 네팔의 종교적 전통이 그대로 신세대로까지 이어져 옮을 느낄 수 있었다. 전통적 가치를 지키고 살아가는 공동체의 모습에 안도를 하면서도 여전히 종교적 교리에 갖혀있는 인민의 삶은 지금의 가난과 혼란의 원인이면서 네팔의 미래를 옥죄는 장애로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이는 나의 주관적인 감상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내가 네팔을 얼마나 안다고!!


타멜에서 걸어서 30분 거리라는 스와얌부사원을 찾아 나섰지만 길을 잘못들어 1시간 가량을 헤멨다. 소떼가 쓰레기 더미와 검게 썩은 물을 헤집고 다니는 비슈누마티강을 건너 주택가의 비포장길을 한참을 걸어서야 국립박물관을 확인하고 이를 기준으로 삼아 스와얌부 사원을 찾을 수 있었다. 사원이 있는 언덕 아래 길게 늘어선 마니차를 참배 온 네팔리를 따라 돌리며 내 역시 불교도가 된양 세상에 가득 찬 고통이 조금이라도 줄기를 빌었다. 정문이 따로 있는지 모른채 일명 'Monkey Temple' 답게 원숭이가 무리지어 놀고 있던 스와얌부 사원의 후문으로 들어섰다.


스와얌부사원은 2천년이나 된 카트만두에서 제일 오래된 사원이라고 했다. 스와얌부사원은 티벳불교인 라마교사원이지만 네팔의 사원들이 다 그렇듯 흰두교의 영향을 깊게 받고 있어 보였다. 사실 흰두교의 영향인지 네팔불교 자체의 특징 인지 알 수 없었지만 한국 불교의 정갈하고 선적인 분위기와는 사뭇 달랐다. 분주한 사람들의 발길이며, 관광 상품들을 파는 삼점과 사찰이 한 덩어리로 어우러진 어수선한 주변 풍경, 사찰의 풍경에 조금은 당혹스러웠다. 사원의 입구 한 켠에는 단체로 참배 온 듯한 사람들이 모여 식사를 하고 있었는데, 난생 처음으로 손으로 직접 밥을 떠 먹는 장면은 조금 역겹기도 했다. 또 사원 여기저기에 피워놓은 향불때문에 머리가 아프고 구토가 날 지경이었다. 하지만 네팔은 네팔 나름의 삶이 있고 문화가 있고 종교가 있을 터. 그래서 내가 네팔에 온 것이 아닌가! 이 모든 것에 익숙해 지는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스와얌부 사원의 구석구석을 둘러보고, 다른 관광객들과 섞여 사진을 찍고 카트만두 시내를 조망했다. 먼지와 매연으로 덮인 카트만두가 한눈에 들어왔다. 그래도 편안한 자리가 있으면 차분히 앉아 차라도 한잔 하며 쉬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스와얌부는 그럴만한 곳이 아니었다. 장터만치나 혼잡한 사원을 벗어나기 위해 올라갈 때와 반대편의 정문으로 가파른 계단을 내려왔다. 계단을 따라 거지 아이들이 여럿 보였고 그중에는 한 가족으로 보이는 여자와 서너명의 아이가 함께 구걸을 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사원은 또 다른 의미의 생활터전일진대 나는 그들을 어떻게 대해야할지 당혹스러웠다. 값싼 동정도 그렇다고 냉정한 합리성도 통하지 않는 지점으로 내몰린 듯한 당혹감을 느끼면서 나는 스와얌부 사원을 벗어났다.


스와얌부 사원을 벗어나 다시 타멜 쪽으로 한참을 걷다가 길가 구멍가게에서 음료수를 사 마시고 한참을 쉬었다. 아내와 이야기 끝에 파탄 듀발스퀘어를 가기로 하고 마침 앞을 지나가는 택시를 불렀다. 파탄 두발스쿼어를 외치고 말로만 듣던 택시비 흥정에 들어갔다. 기사는 700루피를 요구했지만 나는 300루피를 제시했다. 흥정이 이루어지지 않아 그냥 걸어서 가겠다며 출발을 한 뒤에야 택시는 따라오면서 그 가격에 타라고 해서 카트만두서 처음으로 택시를 탑승했다. 역시 예상했던데로 급가속, 급정거에 지그재그 운전을 진땀을 흘리며 감수한 뒤에야 목적지에 도착했다.


파탄은 카트만두일대의 옛 3대왕국중 하나이고 듀발스퀘어 왕궁을 말한다고 하니 카트만두 일대에는 3곳의 듀발스퀘어가 있단다. 오전에 지나왔던 카트만두 듀발스퀘어와 파탄 듀발스퀘어 , 그리고 아직 가 보지 못한 박타푸르 듀발스퀘어가 그것이다. 3곳 모두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고 하는데 그중 2곳을 오늘 방문하게 되었고 스와얌부사원도 세계문화유산에 지정되어 있다고 하니 오늘 하루만에 3곳의 세계문화유산을 들른 것이 아닌가!


파탄 듀발스퀘어는 카트만두 듀발스퀘어와는 조금은 다른 분위기다. 밀집한 3~4층 벽돌목조 건문사이의 좁다란 골목을 따라 돌아가면 교차로가 나오고 교차로마다 어김없이 탐 등 종교적 상징물이 나오는 것은 똑 같았지만 파탄은 더 오래고 더 정갈해 보이고 왕궁도 규모면에서도 더 크 보였다. 사실 오전에 카트만두 듀발스퀘어와 아산 바자르 일대를 배회할 때는 더더욱 그랬지만 이날 하루 여정은 사전 공부가 없다보니 정확히 저 건물이 무엇인지. 저 탑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냥 카트만두의 삶을 느끼고 그 공기를 호흡하는데 만족했다.



그렇게 본다면 이날 하루의 여행은 참 만족스러웠다. 타멜에서 지도를 사고, Pyaphal광장의 한 레스토랑 옥상에서 토스트와 커피를 마시고, 네팔리와 부딪히며 시장골목골목을 누비고, 시내를 벗어나 주택지까지 헤메고 다니고, 3곳의 세계문화유산을 들르고, 그 유명한 네팔택시를 3번이나 타보고, 파탄의 왕궁에서 식사를 하고, 그리고 무엇보다 솣한 네팔리와 어깨를 부딪고 발을 밟고 밟히고, 수십번 나마스테를 외친 오늘은 하루의 여정치고는 너무나 길고 풍성했다. 카트만두 시내의 거의 절반을 헤집고 다녔으니 나중에 지도를 보니 순전히 걸은 거리만도 15km는 족히 되는것 같았다.


파탄의 왕궁 한켠에서 운영중인 레스토랑에서 커피와 이른 저녁을 시켜 먹고 한참 휴식을 취한 뒤 다시 택시를 탔다. 지도만 보고 '싱가 듀바르'라는 명칭의 큰 건물 표식을 보고 무조건 그쪽으로 향했다. 택시를 내리고 보니 군인들이 경비를 서고 있는 그냥 현정부청사가 아닌가! 할 수 없이 걸어서 타멜로 향했다. 타멜로 가는 길에 석유공급이 딸려 정국이 혼란스럽다고 하더니 한 주유소는 군인들이 경비를 삼엄하게 서고 있었다.


그리고 카트만두 듀발스퀘어 쪽으로 방향을 잡아 걷다가 적기를 휘날리는 한 무리의 시위대와 마주쳤다. 시위대는 구호를 외치고 무엇인가를 주장하는 연설도 하고 있었지만 나는 시위대의 주장이 무엇인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무장 경찰들은 산만하게 여기 저기 무리를 지어 하품을 하며 서 있었고 길가는 시민들은 별반 관심을 보이지도 않아보였다. 폐지된 왕정을 복원하라는 주장을 펼치는 일부 정치세력들이 자주 시위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적기를 들고 있는 것으로 봐서 왕정복고주의자들은 아닌것 같았다. 어쩌면 좌파정권 수립뒤 부패한 자본과 관료 사회에 대한 응징과 재산환수를 요구하는 건 아닌지 짐작해 보았다. 왕정은 폐지되고 권력은 바뀌었지만 관료사회의 부패는 워낙 뿌리깊고, 종교와 결합된 상층 지배층은 칼을 들이밀기에는 너무나 강고하다. 이런 현실에서 국가 예산의 2/3를 외국 원조에 의존하는 네팔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걱정스럽다. 좌파정권도 어찌할 수 없는 네팔의 가난과 부패가 가슴아팠다.


하루의 긴 여정을 마치고 숙소에 돌아와서야 오늘이 한해가 끝나는 12월 31일이라는 사실을 새롭게 떠올렸다. 정전중인 깜깜한 거리를 나서기도 뭐했지만 막상 거리를 나선들 마땅히 하고 싶은 것도 없어 그냥 방안에서 가는 2011년의 마지막 밤을 보냈다. 밤이 깊어가자 그래도 시내쪽 하늘에 가느다란 레이져 광선이 흔들리고 숙소와 가까운 거리에서 노래소리와 소란이 일기 시작했다. 소란은 밤늦게 까지 계속되었고, 한해를 낯선 땅에서 보내고 새해를 안나푸르나 라운드로 시작할 꿈을 부풀리며 아내와 지난 여정을 정리하고 이어질 일정을 계획하며 하루를, 2011년 한해를, 그리고 카트만두에서 보내는 2번째 밤을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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