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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을 기다려온 네팔 여정 두달이 끝났다. 출국에 앞서 마지막 하루를 라트나 버스파크, 파탄, 그리고 카트만두 최고의 번화가 더바마그를 걷고 2월 26일 출국 당일 아침 일찍 다시 한번 더 스와얌부나트를 다녀왔다. 오후 늦게 출발한 비행기는 쿤밍과 상하이를 거쳐 2월 27일 저녁 늦게 인천에 도착했다.  

 

 

2월 25일 출국에 앞서 남은 마지막 하루를 어떻게 시작할까 고민하며 눈을 떴다. 즉흥적으로 카트만두 북쪽의 Shivpuri Nagarjun National Park로 가기로 마음먹었다. 마지막 하루는 숲길을 걷고 싶었다. 무작정 라트나 버스파크로 향했다. 가는 길에 대학가를 지났고 각종 정치구호가 담벼락에 그려져있고 적기가 휘날리는 대학가는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는 네팔청년들의 역동성과 기개가 느껴졌다. 라트나 버스파티에 도착했지만 나가르준행 버스를 찾을 수 없었다.  몇번을 묻고 헤메다 꼭 나가르준을 가야할 이유도 없어 발을 돌려 택시를 잡아 타고 파탄으로 향했다.  

 

 

이번에는 파탄 드바르광장으로 진입하지 않고 주로 외곽을 걸었다.  발길이 닿는데로 파탄의 골목길을 걷고 또 걸었다. 예식이 진행중인 힌두사원을 들러 향과 연기에 취해 넋을 놓고 앉아있다가 다시 주택가 골목길로 걸음을 옮겨 네팔리의 삶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몰려가는 아이들 틈에서 나는 등교하는 학생이 되었다가, 일없이 길가에 앉아 해바라기를 하는 여인들을 보면 나도 심심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진 한 사람의 방랑자가 되었다. 일터를 오고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도 평범한 네팔리 노동자가 되었다. 우리는 아무 생각없이 골목을 어슬렁거리는 사이 네팔리의 삶을 닮아갔다. 늘 목적의식을 가지고 빠릿빠릿 바쁘게 살아야 잘 사는 인생이라는 강박에 쫒겨온 인생 50년을 되돌아 보고 어떤 삶이 더 좋은 삶인지 더 가치있는 삶인지 곱씹었다. 앞으로 살아가면서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아무런 계획도 일도 만남도 없는 그런 공백을 내 일상에 주기적으로 배치하는 삶을 살아야지 다짐했다.

 

버스를 타고 라트나로 돌아와서 더바마그 거리로 향했다. 익숙한 브랜드의 가게들이 즐비한 카트만두의 가장 현대적 거리의 풍경은 한국의 도시와 다르지 않았다. 아내는 옷가게로 들어가고 나는 베스킨라빈스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달콤한 아이스크림에 녹아들었다. 쇼핑백을 들고 나온 아내와 한국 도시의 어느 쇼핑가를 걷는듯 우리는 여행객스러워졌고 조금은 들뜬 걸음으로 나라야니티 왕궁박물관을 지나고 꿈의 정원을 스쳐 타멜거리를 찾았다. 네팔을 떠나기전 사라진 식욕을 찾고 기운을 되찾아 줄 마지막 성찬을 찾아 헤멘끝에 한 일식집에 들어갔다. 하지만 이날 저녁 식사는 네팔 여정 최악의 음식으로 기억에 남았다.  허탈한 마음으로 숙소로 돌아가는 타멜거리에서 아쉬운 카트만두의 마지막 밤을 맞았다. 

  

 

남루한 여정이 저문다. 내 일생에서 가장 화려한 일탈이었을 두달의 네팔 체류가 마지막 밤을 남기고 있다. 가슴 뜨겁고 벅찬 순간들을 기억하지만 난 벌써 봄볕아래 새로운 여정의 단꿈에 빠져든다. 인생이 아름다운 것은 인간은 모두가 여행자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머물고 가지고 집착하지 않고 그저 인생은 잠시 스쳐가는 여정임을 받아들이게 된다면 나는 혹독한 히말라야의 가난 속에서도 뭍 생명에게 손을 내밀고,  지진으로 무너진 벽돌더미위에서도 활짝 웃을 수 있는 네팔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나의 이번 여정은 어떻게 정리되어야하나 잠시 발을 멈추지만 나의 여정은 내일 또다시 쿤밍으로 상하이로 인천으로 그리고 봉화로 이어질 것 임을 깨닫는다. 나는 여행 중에 히말라야를 들렀고 다시 여행이 한국으로 이어질 뿐이다. 주어진 시간을 정하는 것은 나의 몫이 아니지만 여행이 끝나는 그때까지 나는 나의 몸에 집중하고 내 몸과 마음이 가는데로 나를 맡기고 싶다.

 

2월 26일 드디어 네팔을 떠나야되는 날이 밝았다. 다행히 몸 상태는 조금 나아졌다. 아직 식욕도 없고 먹고난뒤 소화를 확신할 수 없어 배는 고프지만 아침을 건너뛰었다. 쿤밍가면 맛난 음식을 만날지 모르다는 기대로 대신했다. 익숙한 수어러꾸떼 골목을 나와 스와얌부나트로 향했다.  숙소 마야거르츄와 닿아있는 일종의 예능고등학교인 Star High School의 담벼락에도 인사를 전하고 그동안 거의 매일 지나치던 고깃간에 묶여있던 죽어간 염소들에게도 명복을 빌었다. 골목끝에 방치되어 있는 지난 지진으로 무너진 호텔 부지를 지키며 남아있는 한그루의 정원수에게도 안부를 남겼다. 

 

 

스와얌부나트로 가는 골목길을 걸으며 한발한발 기억을 되새기고 얼굴을 스치는 카트만두의 바람에게도 안부를 남겼다. 도착한 스와얌부나트는 이른 아침부터 참배객과 관광객의 발길이 붐비기 시작했고 사원앞 공터에는 각지각색의 야채를 진열한 노점상이 삶의 온기와 세상의 아름다움을 더하고 있었다. 나는 탐욕스레 모든 것을 눈에 담았지만 곧 흐려지고 잊혀질 풍경임을 알기에 마음이 아렸다. 스와얌부나트의 진짜 주인인 원숭이들에게도 작별인사를 남겼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네팔리들이 즐겨찾는 스넥가게에서 점심을 해결했다. 배가 고파서라기보다는 공복을 채울 무언가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허전한 기분을 네팔의 음식으로 달래고 숙소로 돌아가 두달을 지고 이고 다닌 짐을 챙겼다. 먹고 소비하고 준 그만치 새로운 것들로 채워진 배낭은 여전히 배가 불렀다. 택시로 도착한 트리뷰반공항은 나름 변해가고 있었다. 조금은 더 친절해졌고 대합실도 5년전에 비해 좋아져 있었다. 비행기는 예정시간 한시간을 넘겨 출발했다. 지난 두달 동안 나의 삶이 있었던 네팔의 산하가 구름속으로 사라졌다. 네팔의 산하가 그리고 맺었던 모든 인연이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쿤밍에서 환승에 문제가 생겼다. 공항청사에서 어슬렁 거리다 체크인 시간을 넘겨버렸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헐레벌떡 달려갔더니 이미 마감한 게이트를 열고 우리를 입장 시켜줬다. 하지만 고마운 마음으로 올라 탄 비행기는 끝내 이륙하지 못했다. 거의 한시간을 비행기에 같혀 지체한 뒤에 기체고장이라며 대체기로 갈아탈 것을 요구했다. 결국 상해에서 인천가는 연결편의 출발시간을 넘겨버렸다. 그런데 웬걸! 상해에 도착해보니 우리를 싣고갈 인천행 비행기는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게 아닌가! 역시 연착이나 결항이 잣다는 동방항공이지만 그만치 스케줄 조정이 유연한것 같았다. 한국으로 돌아오는 승객들은 상해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안내 팻말을 든 항공사 직원을 따라 숨차게 뛰어가 인천행 비행기에 올랐고 예상시간보다 많이 늦긴했지만  무사히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카트만두에서 쿤밍으로, 쿤밍에서 상하이로, 상하이에서 인천으로 이어지는 30시간의 귀향길 끝에 두달동안 그리워하던 딸을 안았다.

  

 

이번 네팔 여정에서 나는 많은 네팔의 변화를 읽었다. 계곡에는 댐이 들어서고, 카트만두에는 수도를 설치하는 공사가 진행중이었다. 카트만두와 포카라에는 정전이 사라졌고 도시의 쓰레기는 눈에 띄이게 줄었다. 거리에는 손을 벌리던 거지 아이들도 만날 수 없었고 네팔리의 발걸음에는 자신감이 늘었다. 그리고 카트만두 낙후성의 상징이다시피한  바그마티강은 정화작업이 한창 진행중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번 여행을 통해 내 자신의 변화를 더 읽고 싶었다.  나이를 먹었고, 체력은 그만치 줄었음을 느꼈다. 그러나 마음 속에 평생을 키워온 '화'를 벗어던지고 자신과 세상에 보다 관대해지고, 이미 늦었기에 조바심도 버린 나를 만나고 싶었다. 하지만 나의 그런 모습은 쏘롱라에도 깔리간다키에서도 만나지 못했다. 그래서 다음 여정의 계획을 가슴에 품는다. 그때는 지금의  딱 절반의 속도로, 꼭 네팔 어딘가에 있을 보고싶은 나를 찾아 걷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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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트만두에서 보낸 첫 삼일은 휴식의 시간이었다면 마지막 4일은 지난 두달의 여행을 되돌아보고 기억의 창고 한켠에 차곡히 정리하는 시간이었다. 타멜거리를 또박또박 걸으며 곧 떠나게될 네팔에 대한 절절한 사랑을 추스리고 귀국한뒤 새로 시작할 한국에서의 생활을 위해 마음을 다잡았다.    

안나푸르나 라운드를 마치고 먼지투성이 카트만두로 돌아온 뒤 가벼운 몸살기가 계속 이어졌다. 그래도 하루하루 아무 망설임없이 카트만두로 돌아온 지난 몇일을 알차고 신나게 보냈다. 숙소와 타멜 거리를 오가고 스와얌부나트와 더바르광장, 그리고 아산바자르의 골목을 누볐다. 타멜 최고의 슈퍼마켓인 Shop Right Supermarket과 Pilgrims Book house도 들락날락거리며 기념품을 사기도 하고 구경도 했다. Pilgrims Book house는 서점이지만 동시에 머플러나 직물제품을 비롯한 각종 기념품을 갖추고 있었다. 카트만두에 체류한지 몇일이 지나자 나는 골목 구멍가게에서 야채를 사고 내가 필요한 물품을 어디를 가야 구할 수 있는지 대충 파악이 되었다. 나는 나 자신이 카트만두 시민이 다 되어감을 느꼈다. 

22일은 하루종일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숙소에서 빈둥거렸다. 일단 몸살기를 가라앉힌뒤 움직이는 것이 낮겠다고 판단했다. 그러다가 저녁이 되자 일행들과 같이 숙소를 나서서 타멜을 거쳐 다시 스몰스타를 찾았다. 뚱바가 그리워서가 아니라 남은 네팔에서의 시간이 아까워서 저녁시간을 숙소에서 그냥 보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우울한 표정의 종업원이 날라다 주는 안주와 뚱바를 앞에 두고 나도 모르게 손이 갔다. 하지만 몸은 이미 술을 받아들이기에 너무 지쳐있었다. 뚱바 한잔에 복통과 현기증에 오한까지 왔다. 겨우겨우 몸을 추스러 숙소로 돌아왔지만 몸살은 더 심해져있었다. 이날 하루 어떻게 보냈는지 단 한장의 사진도 남기지 않았다.  이상하게 이번 두달의 네팔 여행중에 꼭 카트만두에서 탈이 났다. 여행 초기에 식중독으로 고생하더니 여행 막바지에 다시 심한 몸살까지 앓게 되었다. 카트만두 먼지에 내 몸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역시 나는 산체질인 것 같았다. 몸이 무너지니 한국이 그리워졌다. 이제 돌아가도 미련이 없을 만치 걷고 먹고, 만나고 웃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23일 몸살에 지친 몸을 이끌고 타멜로 나섰다. 네팔 고유 브랜드라는 가게에서 티도 사고 재래식 옷가게에서 네팔리 스타일의 편안한 일상복도 한벌 샀다. 발길을 옮겨 타멜의 남쪽 골목 어딘가를 걷고 있는데 군악대의 연주소리가 들렸다. 음악 소리를 찾아 도착한 곳에선 거리의 악단이 연주를 하고 있었다. 상황을 보니 부유한 집안의 혼사가 있는 모양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꽃으로 장식한 차가 나타났다. 하지만 나에게는 오직 나를 위한 특별한 이벤트로 다가왔다. 여행이 끝나감에 따라 몸도 지치고 나도 모르게 조금은 우울해지기 시작했는데 악단의 연주를 보고 듣는 순간 내 몸과 마음은 갑자기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내 몸에서 다 빠져 나가 버린 기운이 다시 돌아오고 한없이 가라앉았던 기분도 풀리기 시작했다. 훈풍에 구름이 가쉬듯 나는 두달여정을 3일 남겨두고 내 자신에게 삶의 에너지가 충만해져옴을 느꼈다. 조금은 낡은 제복을 입은 단원들의 진지하고 신명이 넘치는 연주는 엉뚱하게도 나 자신의 삶에 대한 태도를 되돌아보게 했다. '초라할지언정 진지함을 잃지 않고 나름대로 신나게 살자'고 읊조리며 나는 발걸음을 옮겼다.   

타멜 산책을 끝내고 5년전 추억이 깃든 꿈의 정원을 찾았다. [Garden of Dream]은 타멜쵸크에서 나라얀히티 왕궁박물관쪽으로 가는 길 왼편에 높은 담으로 둘러싸여 있는 이질적인 공간이다. 오래전 개인이 꾸민 저택과 정원이 우여곡절 끝에 공공의 소유가 되고 다시 시민의 휴식처로 개방된 유료 정원이 되었다. 역시 산책중인 외국인 관광객은 몇명 되지 않았고 대부분의 손님들은 데이트중인 네팔리 청춘들이었다. 그래도 화구를 펼쳐놓고 작업중인 서양인 할아버지의 모습이 가장 멋졌다. 우리는 정원 산책 끝에 내부에서 운영중인 레스트랑의 가장 좋은 야외 테이블을 차지했고 아내는 펜을 꺼내고 스케치북을 펼쳤다. 카트만두의 중심부에 있으면서 카트만두의 소음과 먼지와 단절된 이색적인 공간에서 식사를 하며 아내와 나는 지난 여정의 추억을 음미했다. 이만치면 되었다는 안도감 혹은 포만감을 느끼면서도 눈을 감으면 마르샹디와 깔리깐다키 줄기가 어른거리고 설산에서 피어나는 흰구름처럼 뭉개뭉개 그리움이 피어올랐다. 모든 걸 버리고 줄여야될 나이에 자꾸 그리움이 늘면 큰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돌아온 숙소에서 내일이면 라오스로 떠날 팟상을 위한 삼겹살파티가 열렸다. 네팔을 같이 사랑하고 같은 숙소에 지내는 인연을 나눈 분들과 함께 자리를 했지만 나는 술한잔에 나가 떨어져 룸으로 올라와 침대로 기어들었다. 낮에 살아났던 몸이 밤이 되자 다시 무너져 내렸다. 나의 몸 상태와 무관하게 다음 날이 시바신의 탄신일로 시바라티 축제가 열린다고 했다. 룸의 창문을 흔드는 축포소리와  상공을 화려하게  수놓는 불꽃놀이가 카트만두의 밤을 잠들지 못하게 했다

 

2월 24일 시바라티축제가 있는날 팟상은 라오스로, 나의 일행 M과 D는 한국으로 떠났다. 갑자기 마야거르추에 정적이 감돌았다. 원래 여행은 이렇게 좀 쓸쓸해야하는 법이라고는 하지만 갑자기 닥친 공복처럼 견디기 힘들었다. 시바라티축제가 열리는 파슈파티나트로 가기 위해 숙소를 박차고 나왔다. 골목을 벗어날 무렵 한무리의 아이들이 줄로 길을 막고 우리가 지나가자 손을 내밀며 무언가를 요구했다. 처음에는 상황파악이 안되어 당황했는데 이날 하루 종일 걷다보니 이런 아이들을 수도 없이 만나게 되었다. 알고 보니 시바 탄신일 날에만 허용되는 일종의 전래놀이로 아이들이 길을 막고 어른들에게 통행료를 요구하는 것이었다. 아이들은 일년 365일중 이날 하루만이라도 세상의 모든 골목이 우리들의 것임을 선언하는 셈이었다. 골목을 지키는 아이들은 지나가는 사람뿐 아니라 오토바이든 택시든 마구잡이로 단속(!)했고 대부분은 아이들에게 져주는 것으로 보였다. 나중에는 우리도 가게에 들러 아이들에게 나누어주기 위해  잔돈을 한주먹 바꾸어 주머니에 넣고 다녔다.    

 

큰길로 나서니 공휴일이라 그런지 거리가 한산했다. 쉽게 택시를 잡고 축제가 열리는 퍄슈파니나트로 갈 것을 부탁했다. 생각보다 비싼 흥정끝에 택시는 곡예하듯 대로를 피해 골목과 골목을 이어달렸지만 끝내 파슈파티나트에 도달하지 못했다. 목적지의 절반을 겨우 넘겨 군경에 의해 교통은 완전히 통제되어 있었고 파슈파티나트로 향하는 모든 길은 차없는 거리로 축제장으로 변해 있었다. 그래도 택시비는 출발전에 흥정한 데로 다 받아갔고 우리는 축제를 즐기는 네팔리 무리에 휩쓸려 파슈파티나트로 향했다. 하늘에는 헬기들이 축하 현수막을 늘어트리고 비행 중이고 파슈파티나트가 가까워질수록 인파는 불어났다. 역시나 경찰들의 거친 단속이 눈쌀을 찌푸리게 했지만 기념품이나 먹거리를 파는 노점상들도 전국에서 다 모여든 것처럼 엄청난 수로 늘어났고 그 종류도 다양해졌다. 네팔은 물론 멀리 인도서까지 모여들었다는 사두들의 무리도 보이기 시작했다. 축제에 참여하기 위해서 모여든 순례객들의 차림을 보니 그들에게 종교가 얼마나 절실할 것인지 저절로 느껴졌다. 많은 순례객들이 거리에서 노숙을 한듯 집채만한 이불보따리를 길가에 쌓아두고 있었다. 시바신의 탄신일을 축하하기위해 노숙도 마다않고 먼길을 달려온 것이 분명했다. 

 

 

이날 비힌두교도에게는 파슈파티나트 입장을 허용하지 않는다고 했다. 우리는 파슈파티나트로 들어가는 입구의 도로까지만 네팔리 무리에 섞여 축제를 즐기고 되돌아섰다. 축제장을 벗어나기 위해 한참을 걸어 그나마 인파가 적은 가게를 찾아 네팔식 스넥으로 점심을 해결했다. 그리고 다시 걷다보니 카트만두 최초의 대형 수퍼마켓이라는 Bhat Bhateni에 들러게 되었다. 구경도 하고 장을 보고 숙소로 되돌아왔다. 식욕이 있고 출국일이 좀 더 남았다면 바구니 가득 장을 봐서 맛난 요리를 싣컷 해 먹고 싶었지만 조금 샀던 식재료도 결국 다 못해먹고 귀국길에 올라야 했다. 그래도 네팔에서의 마지막 장을 보고 숙소에서 하루의 남은 시간을 조리와 식사 그리고 휴식으로 보내고 그리고도 남는 시간에 귀국을 위한 짐을 싸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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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일만에 돌아온 카트만두에서 일주일이라는 긴 휴식을 취하고 2월 26일 동방항공을 통해 한국으로 돌아왔다. 지나고 보니 카트만두에서 보낸 정확히 8일동안은 여행이라기보다는 비록 짧지만 '머물고 생활하기'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카트만두 도착후 마야거르츄는 우리의 숙소를 넘어 하나의 생활 거점이 되었다. 인근 가게에서 야채와 기타 식재료를 사서 조리를 해서 나누어 먹고, 심심해지면 수어러꾸떼 골목길을 통해 여행자의 거리인 타멜로 나와 하루종일 어슬렁 거렸다. 타멜은 여전했다. 비시즌이라서 덜 분빈다고는 했지만 전세계에서 몰려든 다양한 국적의 트레커들이 골목을 휩쓸고 다녔고 더 많은 네팔리들은 자신의 삶의 터전으로 몰려들어 늘 활기가 넘쳤다. 타멜의 끝에 붙어있는 대형 시장인 아산바자르는 온갖 물품과 이를 찾는 네팔리의 발길로 분주했다. 딱히 필요한 것도 없이 마냥 시장을 지나는 네팔리들에 묻혀 아산바자르를 지날 때는 나 역시 무슨 절실한 것을 찾아 시장을 헤메는듯 삶의 긴장감이 높아졌다. 

 

숙소룸의 전등이 어두워 책을 보기가 힘들어 19일은 보조랜턴을 사러 타멜의 몇몇 등산용품점을 들락거린뒤 마음에는 들지만 비싸서 망설여지는 앙징맞은 블랙 다이아몬드 LED등을 2800루피에 구입했다. 그리고 오고가는 길에 몇몇 골동품가게에 들러 작은 기념품 몇개를 구입했다. 일행 D는 싱잉벨이라는 울림소리가 신비로운 청동그릇을 여러 가게에서 여러개를 구입했다. 값도 값이지만 무게가 부담스러워 나는 싱잉벨대신에 주로 나무 목각을 구입했다. 토템인듯 귀신같은 토속적인 인형들은 인상적이지만 집에 가져가기엔 어울리지 않아 보여 주로 동물형상의 목각을 구입했다. 한 골동품 가게에서 작은 말모양의 청동상을 보고 마음에 들어 딸에게 선물해 줄까 망설였는데 결국 크기나 형태에 비해 비싼 5-6만원하는 청동상을 구입하지 못했다. 한참 국내에서 최순실이 자신의 딸에게 삼성이라는 거대 기업을 동원해 말을 뇌물로 받아 챙겨주는 알뜰한 모정이 뉴스로  흘러나오는 때에 나는 5-6만원하는 말 조각 청동상 하나 딸에게 사주기가 부담스러웠다. 

 

하루를 어떻게 보낸지 모르게 카트만두에도 밤이 왔다. 벌써 여러번 들렀고 이날도 같은 거리를 몇번을 왔다갔다했는지 모를 정도로 하루종일 타멜거리를 헤멘셈인데 그래도 복잡한 타멜의 골목을 다 파악할 수 없었다. 아산바자르와 왕궁 그리고 더바르광장 같은 대표적인 장소로 이동하는 동선 정도를 겨우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타멜의 대표적인 한식당인 '한국사랑'에서 부대찌게로 하루를 마무리했다. 한국사랑에는 짐작과는 달리 한국여행객보다 훨씬 많은 네팔리 손님이 진을 치고 있었다. 한국에서 일했던 노동자들이 추억의 한국음식을 찾았을 수도 있고, 아니면 한국을 동경하는  젊은 친구들이 몰려온건지도 몰랐다.

 

 

2월 20일의 아침은 일찍 맞았다. 식전에 숙소를 나와 스와얌부를 향해 걸었다. 막 깨어나기 시작한 주택가골목을 이른 출근을 하는 네팔리와 나란히 걸었다. M은 전날도 이른 아침에 스와얌부나트를 다녀왔는데 이날도 같이 동행했다. 숙소가 있는 수어러꾸데에서 스와얌부너트까지는  30~40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스와얌부나트는 원숭이가 많이 살아 Monkeys Temple이라고도 불리는 네팔의 가장 중요한 불교사원중의 하나로 유구한 역사와 전설이 이어져오고 있는 여행자들의 필수적인 방문처다. 불교사원이라고는 하지만 힌두신앙을 나타내는 다양한 장식과 시설이 공존하며 사원을 뒤덮은 향과 촛불, 끝없이 이어지는 신도들의 참례행렬, 그리고 카트만두 시내 전체가 내려다 보이는 환상적인 조망이 카트만두 방문객이면 꼭 찾아야 할 곳으로 여겨졌다. 우리 역시 다른 곳은 한번 방문으로 끝냈지만 스와얌부나트는 이날을 포함해 여러번 찾았다.

 

 

사원은 다행히 지난 2015년 지진의 피해가 크지 않았다. 무너진 부속건물을 비롯해 피해의 흔적은 아직 여기저기 늘려있었지만 스와얌부나트의 상징적 건물인 스튜파는 의젓하게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제3의 눈으로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우리는 참배객들과 함께 똑같은 경건한 마음으로 세상의 평화와 모든 고통받는 존재의 평온을 빌며 덤으로 우리 자신의 삶이 좀더 알차고 아름다울 수 있기를 기도했다.  사원의 입구 오른편에는 신도들이 모여 전통 악기를 연주하며 예불을 드리고 있었다. 예불소리가 너무나 절실하게 마음에 녹아들어 우리는 걸음을 멈첬다.  한참을 예불을 들은뒤 발길을 돌려 스와얌부나트를 내려오는 우리의 발걸음은 올라갈 때와는 달라있었다. 

사원아래 식당가에서 네팔 전통 빵들로 아침을 해결했다. 참배온 네팔리 할머니들과 같은 빵들을 주문했는데 모양도 재미있고 값도 쌌지만 맛은 없었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싱잉벨을 직접 만드는 가게에 들러 일행 D는 싱잉벨을 구입하고, 우리는 숙소 거의 다와서 이전에 박타푸르 왕만 먹었다는 요플레인 주주더히를 사서 숙소로 돌아왔다. 주주더히는 토기그릇에 담겨져 아침 일찍 몇몇 대리점같은 가게에만 배달이 되어오기 때문에 이른 아침 시간 외에는 살 수가 없었다.  다 먹고 남은 토기만 남다보니 주주더히를 담았던 토기가 마야거르츄 마당 한컷에 켜켜히 쌓여갔다.

안나푸르나 라운드를 같이 했던 가이드 바수가 숙소를 찾아왔다. 한번 이야기가 있었던 자신의 고향집에 우리를 초대하고 싶어했다. 카드만두 북쪽에 있는 나가르준 어딘가가 자신의 고향집이고 그곳에서 부모님이 물고기를 기르고 있는데 같이 농장도 체험하고 물고기도 잡아 먹고 놀자고 제안했다. 딱히 다른 일정이 없어 같이할까하는 마음이 있었지만 다른 일행들이 반기질 않았고 특히 바수의 술버릇때문에 마음 편히 따라갈 수 없는 눈치라서 포기했다. 바수는 상당히 서운해 하는 것 같았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대신에 수어러꾸떼 골목길 구멍가게에서 장을 보고 숙소에서 조리를 해서 끼니를 해결한뒤 밤이 되자 네팔 전통주인 뚱빠로 유명한 스몰스타를 찾아 한잔하는 것으로 하루를 마무리했다.

2월 21일도 마찬가지로 정해진 일정이나 목적지가 없는 하루였다. 이날 오후에 출국한다며 네팔의 특산물인 야크치즈를 사러가는 분들과 함께 숙소를 나섰다. 숙소에서 10여분 걸어서 정부가 운영한다는 유제품 공장인  DDC Dairy Ltd.  로 향했다. 공장에 도착은 했지만 의사소통의 부족으로 공장 사무실로 들어가 치즈를 요구하자 담당이 외출중이라며 한참을 기다리게 했는데 마침내 담당은 돌아왔지만 치즈 판매는 공장내의 다른 매장에서 하고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우리는 제법 많은 양의 야크치즈를 사서 숙소로 돌아온 뒤 다시 일행과 함께 숙소를 나서 두바르 광장을 향했다. 타멜을 지나면서 헝겊으로 만든 작은 브로치같은 값싸고 실용적인 선물을 사고 딸을 위한 인형도 같이 구입했다. 그리고 타멜의 길고 복잡한 골목을 통해 두바르 광장에 도착했다. 두바르광장으로 진입하지 않고 멀리서 보아도 지진의 피해가 심각해 보였다. 지진으로 심각하게 무너지고 파손된 두바르광장이지만 입장료는 1000루피 그대로였다. 4명의 일행이 4만원 가량의 돈을 내고 들어가기에는 아까운 구석도 있고, 굳이 두바르 광장을 봐야할 이유도 없어 걸음을 돌렸다.

두바르광장을 비켜선 우리의 걸음은 정처없이 이어졌다. 타멜을 중심으로 한  관광객의 거리를 벗어나 네팔리들의 삶의 터전인 카트만두의 구석구석을 뒤지기 시작했다. 가는 곳마다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어머니의 아이들 부르는 소리가 있고, 단 한번도 끊어지지 않고 종교적 상징물이 늘려있고 한 블록을 벗어나기 전에 꼭 규모를 갖춘 힌두사원을 만났다.  보여주기위한 박제화된 공간이 아니라 날것 그대로의 네팔리의 삶을 더 가까이서 보고 느끼는 발길을 이어가다보니 어느새 우리는 스와얌부나트를 가기 위해 건너야했던 바그마티강의 지류인 비슈누마티강에 이르렀다. 강을 따라 발길을 북쪽으로 돌려 우리의 출발지를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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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16일 찦차를 대절해 갈리수와르를 출발 베니와 바글룽을 거쳐 포카라에 도착하여 숙소를 정하고, 다음날 티벳 난민촌 등 포카라를 둘러보고, 2월18일 자가담바 버스를 타고 근 한달만에 카트만두로 돌아왔다.

 

 

 

갈리수와르의 아침이 밝아오자 전날 갑론을박 끝에 예약한 짚차가 도착했다. 베니와 바글룽을 거쳐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트랙이 시작되는 나야풀을 지나 포카라까지 우리를 싣어줄 찦차는 출발했다. 대절비는 6000루피로 정했다. 짚차는 출발한지 10분도 안되어 베니라는 도시에 진입했다. 교통의 중심도시로 알려져 있는 베니는 역시 넓은 버스파크에 많은 차들이 몰려 있었다. 그런데 우리가 탄 찦은 무슨 이유에선지 바로 갈 길로 들어서지 않고 베니 시내로 들어가 몇 곳을 들러 짐을 싣기도 하고 사람을 만나기도 하며 시간을 지체했다. 아침 일찍 출발해야지만 베니로 돌아오는 손님을 싣을 수 있다고 새벽 출발을 종용하던 가이드의 주장이 무색할 정도였다. 아마도 기사는 포카라로 가는 김에 지인들의 소소한 부탁을 받아 해결하려는 것 같았다. 차를 대절한 우리의 입장에서는 클레임을 걸 수있는 상황인데도 기사가 우리에게 양해를 구하지도 않았고 하다못해 가이드의 상황설명도 없었다. 네팔이기 때문일까. 이런 상황에서도 기사가 매너가 없다거나 부당하게 우리의 시간을 빼앗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차라리 네팔사람들은 참 관대하고 느긋하다는 느낌을 주었다. 네팔리들은 우리를 기다리게 했지만 자신들도 아무 꺼리낌 없이 늘 웃으면서 남을 기다려주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땅을 밟아보지도 못한 베니에 대한 인상을 아무 것도 남기지 못하고 칼리간다끼를 건넌 찦은 달리기 시작했다. 베니를 출발한 뒤 오른쪽으로 강을 끼고 30여분을 달렸을까, 차는 포카라-바글룽 하이웨이를 벗어나 우회전을 해서 다리를 건너 다시 우회전을 해서 바글룽으로 향했다. 바글룽 역시 아무런 사전 준비없이 방문하게 된 도시다.  가이드는 흰두사원을 추천했고 나는 덧붙여 바글룽 시가지를 차로 한바퀴 돌아 겉할기라도 해보자는 제안을 덧붙였다. 가이드의 설명으로는 바글룽 사원은 오전 특정시간까지만 비흰두인에게 개방되기때문에 시간에 늦지 않게 도착해야 된다고 갈리수와르에서 출발할 때, 그리고 베니를 떠나 바글룽으로 향하는 중에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정작 베니에서 찦의 기사가 시간을 허비할 때는 아무 소리도 하지 않았다. 우리가 사원에 도착했을 때는 비흰두교도에게는 이른 아침에만 개방된다는 가이드의 설명과 무관하게 사원의 문은 우리에게 활짝 열려 있었다. 

 

이전에 닥신칼리의 사원과 전날 갈리수와르에 이어 바글룽의 Kalika Bhagwati Temple은 세번째 방문한 흰두사원이었다. 흰두교에 대한 사전 지식이 없는 상태로 들른 흰두 사원은 붉은색 장식이 많아 전체적으로 화려한 색감이지만 무서운 신상이 많고 특히 염소 등을 제물로 받치는 장면을 목격하거나  그 흔적을 볼 때는 소름끼치고 혐오스럽기도 했다. 아주 옛날에는 많은 종교가 사람을 제물로 바쳤고 세월이 지나면서 동물로 대체되다가 마지막에는 돈이 제물을 대신하는 과정을 겪었다면 힌두교는 아마도 동물을 번죄하는 단계에 머물러 있는지도 몰랐다. 물론 힌두교가 가장 오래되고 포용적이고 풍부한 종교의 하나라는 사실을 부인할 순 없지만 아직 산 동물을 재물로 바치는 의례는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이 날도 애초로운 눈빛으로 울어대던 어린 염소가 가차없이 목이 잘리고 그 피를 뿌리는 제례가 진행되었지만 지금까지 방문한 3힌두사원중 가장 오래 머물며 꼼꼼이 둘러보고 줄을 서서 이마에 티카를 찍고 예배까지 올렸다.        

 

바글룽 시내를 한바퀴 돈뒤 그냥 아무것도 안하고 스쳐 지나가기에 아쉬워 찦을 내려 음료수를 사서 한병씩 돌렸다.  음료수를 마시고 차는 바로 바글룽을 나와 강을 건너고 조금 전 벗어났던 바글룽-포카라 하이웨이를 다시 올라탔다. 편한 길을 따라 평화로운 마을을 지나고 어디라도 내려서 걸어도 좋을 아름다운 풍경 속을 차는 달렸다.  풍경 하나하나가 그냥 스쳐지나가 내 기억속에 머물지 못하고 사라져갈 것을 생각하니 이 모든 것이 아쉬움을 넘어 슬프게 느껴졌다. 어떤 장소 어떤 순간에도 머물 수 없고 오직 확실한 것은 바로 이 순간이라는 섭리가 애닯펐다. 안나푸르나 라운드가 끝나가는 시간 아쉬움과 서글픔이 내 마음에 차올랐다.

 

이미 익숙해진 안나푸르나베이스캠프 코스의 출발점인 나야풀을 지나 길가 식당에 차를 세운뒤 기사는 식사를 하지 못했다며 식당안으로 사라졌다. 네팔사람들은 아침겸 점심을 오전 10시경 먹는 생활습관을 가지고 있는데 그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덕분에 안나푸르나 라운드가 완전히 끝내기 직전 차를 내려 네팔의 산과 들, 안나푸르나 기슭의 삶의 터전을 다시 한번 느껴볼 수 있었다. 가난 속에서 아름답게 지켜온 네팔리들의 삶의 온기와 긍지를 안나푸르나를 통해 다시금 반추했다.  

 

근 40일만에 포카라로 돌아왔다. 그동안 카트만두 인근 도시를 주유하고 안나푸르나를 한바퀴 돌았다. 다시 돌아온 포카라는 초록이 더 짙어졌고, 날은 더 더워져 있었다. 두 가이드와 4명의 트레커는 식당을 찾아 점심을 나누고 바수에게 약속했던 선글라스를 선물했다. 가이드하고는 카트만두서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고 헤어졌다. 그리고 숙소를 찾아 잠깐 거리를 헤멘뒤 이쁜 정원이 달린 값싼 숙소에 짐을 풀었다. 온수가 나오고 와이파이가 되면서 이쁜 정원이 딸린 [Hotel Elia]에서 하루에 1000루피, 우리 돈으로 만원정도에 방을 얻었다. 우리에겐 충분한 시설이였고, 여행자의 거리인 레이크사이드에 접해있으면서도 조금은 덜 번잡한 거리여서 모든게 마음에 들었다. 짐을 풀자마자 M과 나는 호텔을 나서서 이발소를 들렀다. 바로 호텔과 붙어있는 작은 이발관이었다.  한국 떠난뒤 거의 두달만에  산적머리가 되어버렸는데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좀 깔끔해지고 싶었다. "Only hair cut, please!"를 외치고 비몽사몽간에 이발을 마치자 "Ok!"를 몇번이나 반복해서 외쳤던 이발사는 컷트비, 안면 마사지비, 안마비, 두피마사지비, 세발비 등등을 붙여 무려 두사람 이발비로 6000루피 가량을 요구했다. 잠깐 실랑이를 벌이다 요구를 거의 다 들어주고 나왔는데, 혼자서 쇼핑 갖다가 뒤늦게 이발소를 들렀던 D역시 엄청난 바가지를 쓰고 왔다. 우리는 이날 포카라판  "3얼간이"를 찍었다며 스스로를 위무했다. 그날 이후 포카라를 떠날 때까지 몇번을 더 마주친 이발사는 우리에게 반가운 인사를 보냈지만 우리는 그를 마주치는 것이 너무 싫었다.  나쁜 기억을 빨리 잊고 싶은데 그 이발사에게 너무나 즐거운 기억이었을 것이 틀림 없었다.  '낮술'에서 저녁을 먹으며 포카라의 밤을 맞았다. 

 

2월 17일 아침 게으른 잠에서 깨어나 샤워를 하고 호텔인근의 식당에서 아침을 해결한뒤, 와이프는 호텔에서 스케치나 하면서 쉬겠다고 남고, 남자 3명이서 Tashi Palkhel  티벳 난민촌을 찾아 길을 나섰다. '할란촉'에서 '제로킬로미터'라는 지명의 교차로에 이르고 거기서 다시 버스를 갈아타고 전날 포카라로 돌아올때 달렸던 길을 바글룽 쪽으로 되돌아갔다. 버스가 포카라 시가지를 벗어날 즈음에 왼쪽 언덕위에 룽다와 타르초가 휘날렸다. 우리와 닮은 사람들이 사는 타시팔켈 티벳난민촌에 도착했다. 같은 몽골계라서 그런지 티벳탄을 만날 때 마다 꼭 어릴 때 동네에서 부댓기며 살아가던 이웃을 떠올리게 된다, 지나간 시절의 이웃 아저씨나 삼촌같은 사람들을 다시 만날 수 있는 타시 팔켈 티벳난민촌은 조용했다. 골목을 뒤덮은 고요와 한적함이 현실감을 줄였고 꼭 타임머신을 타고 50년전 어린시절로 되돌아온듯 몽롱했다. 골동품가게가 있고 기념품을 팔고 있는 노점상들이 있었지만 방문객이라고는 우리밖에 없었다. 마을을 돌기전에 먼저 식당에 들러 물소고기를 듬뿍 넣은 뚝바를 먹으며 삶의 현실감을 되찾았다. 

 

식당을 나오자마자 마을입구에 있는 골동품 가게를 들러 작은 기념품을 사고 D로부터 멋진 골동품 주전자를 선물로 받았다. 가지고 싶은 것은 많았지만 소유의 덪없음을 깨우쳐주는 사찰입구에서 욕심을 다 채울 수는 없었다. 마을을 둘러보고 캠프촌과 사원 그리고 멀리 포카라 변두리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위 뷰포인트까지 올랐다. 그리고 골목길을 따라 내려와 사랑곳에서 짚라인이 이어지는 "Hemja 번지점프"를 지나 또다른 불교 사원을 들렀다. 사원은 확장 공사중이었고 아마도 승려 부속학교를 운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무렇지도 않게 낯선 사람이 들고 나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이들의 무경계심이 불교의 탓인지 네팔리의 심성  탓인지는 알수 없었다.  참 신기하게도 가는 곳마다 네팔리들은 사람에 대한 경계심을 드러내는 경우를 본적이 없었다. 

 

티벳 불교 사원과 고향을 떠난 이국에서 난민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모여사는 난민촌 골목길을 걷던 3명의 일행은 각자의 상념에 빠져 길을 잃었고 모두 흩어지고 말았다. 우여곡절끝에 나는 M과 만났지만 결국 D는 합류하지 못했다. 리버사이드로 돌아오가는 버스라고 올랐지만 몇정거장 못가서 내리게 되고 다시 한참을 걸어 '제로킬로미터'라는 거리에 가서야 겨우 리버사이드를 가는 버스에 오를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혹시 한국인이냐며 물어온 한국에서 일한 적이 있다는 네팔리를 만나 친절한 안내를 받기도 했다. 어렵게 돌아온 호텔에 길잃은 D 마저 돌아오자 지난 달 친구들과 안나푸르나를 걸을 때 신세졌던 가이드 라마님과 연락이 닿았다. 오랜만에 만나 나는 늘 궁금한 것이 많은 네팔의 삶에 대해 물었지만 한국에서 노동자로 오래 근무한 적이 있는 라마는 늘 한국의 삶과 '사업'에 대해 궁금한 것이 더 많았다. 지난 여정을 함께한 모두 '산마루식당'에 둘러 앉아 행복한 포카라의 마지막 밤을 만끽했다. 

 

카트만두로 돌아가는 날 아침 일찍 잠을 깼다. 전날 라마를 통해 예약해둔 자가담바 버스를 타기위해 짐을 끌고 할란촉으로 나갔다. 7시에 온다던 버스는 오지 않고 아침마다 지고다니며 이른 출근객과 여행객을 대상으로 파는 거리의 빵으로 아침을 떼우고 있자니 예정시간을 30분이나 지나서 버스는 도착했다. 그나마 안도하며 버스에 올라 조용히 창가를 통해 물러나는 포카라의 거리를, 리버사이드와 댐사이드의 지난 여정의 흔적을 드듬었다. 이제 그리움으로 변해버릴 포카라에서의 기억들을 곱씹으며 하루종일 버스는 포카라-카트만두간 프리씨비 고속도로를 달렸다. 차창을 쓰쳐 뒤로 물러나는 풍경들이 초등학교 졸업 앨범의 가슴시린 사진마냥 어렴풋한 기억으로 나의 뇌리에 쌓여갔다.  

 

 

돌아온 카트만두의 숙소 마야거르츄는 여전했다. 내일이면 산으로 떠난다는 사람들이 있고. 아침에 산으로 떠났다는 사람들의 이야기와 온기가 남아 있었다. 우리는 슬그머니 마야거르츄의 원주민인양 스며들어 그들과 자연스레 하나가 되었다.  우리가 없는 사이 다른 많은 사람들이 마야거르츄를 들러고 그리고 안나푸르나나 랑탕, 그리고 히말라야를 거친뒤 다른 사람이 되어 돌아와 다시 머문뒤 한국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우리는 산전수전 다 겪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마야거르츄에 돌아왔지만 안나푸르나로 떠나기 전의 자신과 달라진게 아무것도 없음을 애써  자각하지 못한듯 안타까워하지도 부끄러워하지도 않은채 편한 표정으로 세상을 마주했다. 

 

 

오랜만에 돌아온 카트만두의 첫날도 타멜거리로 나갔다.  특별히 할 일도 목적지도 없이 타멜의 거리를 걷고 이런 저런 가게를 들러  기념품을 샀지만 네팔에서 제일 유명하다는 서점인 pilgrim bookstore에서 두권의 책과 몇가지 기념품을 샀다. 여정이 끝나고 귀국하고 나면  네팔의 마오주의 혁명사를 다룬 [The Bullet and The Ballot Box]와 네팔의 역사를 간략하게 정리한 [The History of Nepal]을 틈틈히 읽으며 네팔에서 보낸 나의 시간들을 반추할 것이다. 저녁은 타멜거리의 블랙올리브에서 성찬으로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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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24일 복통 중에 짐을 싸서 닥신칼리를 거쳐 파르핑에서 하루를 접고, 25일 분가만티를 통해 다시 파탄으로 복귀 1박을 하고, 26일 카트만두의 숙소 마야거르츄로 돌아가 이후 여정을 20여일동안 같이할 또 다른 일행 M과 D를 맞았다.

 

전날 복통으로 아무 것도 못하고 있는 사이 L은 타멜 거리를 카메라에 담으며 혼자 돌아다녔다. 계속 숙소에서 밍거적 거리고 있기에는 시간이 아까웠고, 어렵게 네팔에서 만난  L을 고려해도 그냥 있을 수가 없었다. 타멜만치 친숙해져 버린 라트나 버스파크로 향했다. 일차 목적지를 Shree Dakshinkali Temple로 정했다. 버스를 찾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진 않았고 일부노선이 파업 중이었지만 다행히 닥신칼리행은 운행 중이었다. 

 

 

닥신칼리로 가는 길은 도심을 벗어나자마자 비포장길이었다. 앞을 분간하기 힘들만치 두터운 먼지가 일고, 엉성한 창틀을 통해 실내로 밀려 들어왔다. 마스크를 했지만 숨쉬기가 쉽지 않았다.  차안의 공기는 탁했고 그렇다고 창문을 열 수도 없는 두어시간을 견딘뒤에야 닥신칼리 입구의 버스파크에 도착했다. 먼지만 아니었으면 버스를 타고 온 2시간이 나름 즐거운 여행길이었을테고, 바같의 풍경에 좀더 몰입할 수 있었을 텐데 많이 아쉬웠다. 사실 여행 중에 사전 공부 없이 만나는 풍경은 무미건조할 수 있다. 순간순간 스쳐 지나가는 풍경에 스토리를 입히고 나의 기억 속에 저장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일정한 사전 정보를 가지고 바라다보는 풍경일 때 비로소 의미를 가지고 나의 것이 되기가 훨씬 쉬울 것이다. 사실 그런 면에서 닥신칼리는 나에게 미지의 장소였다. 제물로 희생된 동물의 비피린내가 진동하는 끔직한 흰두사원이라는 것 말고는 아무런 이해도 없었다.

 

닥신칼리는 외래 관광객이 그리 많이 찾지 않는 곳 같았다. 버스를 같이 타고온 승객들은 대부분 현지인으로 사원에 참배를 오거나 가까운 사람들과 함께 나들이라도 온것 같았다. 한무리의 젊은 아가씨들이 버스에서부터 우리에게 대화를 시도했다. 낯선 외국인을 보고 반갑고 호기심이 일었는지 어디서 왔는지, 왜 왔는지, 어디로 갈건지 등등을 물었지만 우리의 영어는 짧고 단편적인 대화를 넘어설 수 없었다. 버스파크에서 내리자마자 현지인이 가는 식당에서 간단한 식사를 하고 사원을 향해 걸었다. 그리 멀지 않은 계곡 속에 '피비린내 나는' 사원이 자리하고 있었다.  다행히 이날은 재물을 희생하는 의식이 많지 않은 날인지 핏빛 바닥을 맨발로 지나가야하긴 했어도 직접 살육장면을 보지 못했다. 흰두교도가 아닌 사람은 들어갈 수 없다는 성전도 바로 옆의 통로를 지나며 볼 수 있었는데 선입견이 준 느낌 때문에 오래 머물고 싶지는 않았다. 사원을 지나 오르막을 한참 올라 전망대가 있었지만 전망대로 올라가는 입구의 기념품 가게와 노점상을 구경하며 그들의 삶을 느끼는 것 만으로도 닥신칼리 방문은 충분했다.

닥신칼리에 오래 머물지 않고 바로 파르핑을 물어 걷기 시작했다. 한번씩 차가 지나갈 때 마다 바람방향을 살피며 먼지를 피해 뛰어야했는데 다행스럽게 길은 멀지 않았고 파르핑 시내는 금방 나왔다. 많지 않은 네팔 여행중에 만난 도시는 늘 사원과 사원을 찾는 순례객을 위한 숙소가 혼재되어 었다. 생활과 종교를 따로 데어놓을 수 없을 만치 삶이 종교와 밀착되어 있는 것 같았다. 파르핑도 다르지 않았다. 구불구불 이어지는 골목길을 지나 신시가지로 접어들기 전에 만난 숙소를 다 지나치고 막상 숙소를 찾기 시작할 무렵에는 마땅한 곳이 나타나지 않았다. 한산한 가게앞에서 현지인에게 숙소를 물었더니, 네팔에서 늘 그랬지만 주변의 사람들이 다 몰려 들어 나에게 길을 알려주기 위해 의견을 모았다. 네팔리의 친절함은 내가 경험한 세계에서는 의문의 여지 없이 최고였다.

숙소를 잡고, 창을 통해 해지는 파르핑의 삶을 바라다 보면서 하루를 정리했다. 타멜거리를 떠나 닥신칼리를 경유해 파르핑까지 많은 풍경을 하루동안 스쳐 지나쳤다. 나에겐 풍경이었지만 그곳에 터잡아 살아가는 네팔리에게는 구구절절한 삶의 현장일진대 여행자의 눈으로 오늘 하루 그들의 삶을 모욕하지 않았기를 빌었다. 그리고 낯선 나라를 이렇게 여행자로 떠돌 수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말할 수 없는 축복이거늘 나는 왜 늘 나의 삶을 스스로 부정하고 탈주를 꿈꿀까 스스로에게 반문했다. 일상이 주는 안락함과에 겨워 방랑의 낭만을 갈구하는걸까? 나는 진정 무엇에 목말라하는지 스스로 물었지만 답을 찾지 못했다. 그래서 남은 일정의 여행은 순례가 되어야했다.

안개속을 번져오는 노래소리에 눈을 뜨며 parphing의 아침을 맞았다.  신을  찬미하고 새로운 하루를 맞은 생명의 환희를 담은 어린 여학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까이에 여학교 기숙사라도 있는건지 아니면 사원에서 들려오는 소린지 알수 없었지만 나는 궁금하지 않았다. 나에겐 그냥 파르핑 전체가 사원과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방을 나와 아침 햇살에 삶이 피어나는 파르핑의 시가지를 내려다 봤다. 게스트하우스 4 층에서 내려다보이는 앞집 옥상에는 향을 올리고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는 여인이 보였다. 그녀는 어떤 신에게 무엇을 축원하고 소원했을까 알 수 없었지만 나는 단지 어둠을 이기고 아침을 맞는 모든 삶앞에 우리는 숙연해진다는 사실을 알수 있었다. 그녀 역시 자신의 안녕과 욕망의 충족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생명의 안녕과 존재의 기쁨을 축원했을 것이라고 믿어졌다.

숙소를 체크아웃하고 인근의 바라이요기니 템플을 향했다. 나의 새벽잠속으로 달콤하게 녹아들었던 찬송이 사원에서 울려나왔다. 이제는 어린 여학생의 목소리가 아니라 삶의 경륜이 묻어나는 탁한 목소리였다. 가사를 하나도 이해하지 못하는 찬송이지만 그 절실한 축원의 마음을 느끼기에는 충분했다. 찬송장면을 사진으로 남기고도 싶었지만 그냥 마음에 담고 사원을 나왔다. 계단을 내려오자 맞닥뜨린 남루한 요들의 불편한 적선요구를 외면하고. 계단 모퉁이에서 농산물을 펼쳐놓고 손님을 기다리는 아주머니들과 눈을 맞춰 웃음을 나누고 도로를 만나는 길모퉁이 까페에서 아침을 청한다.

 

 

분가마티는 지도상 직선거리로 얼마되지 않았지만 파르핑과 분가마티를 가르고 있는 바그마티 강 때문일까, 마땅한 버스 노선을 찾을 수 없었다. 파탄까지 나가서 다시 분가마티로 가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택시는 어떻게든 분가마티로 바로 갈수 있을 거란 기대를 가지고 물어보니 한 기사가 선듯 나서주었다. 안도하며 올라탄 택시는 카트만두 쪽으로 달리기만 하고 분가마티는 더 멀어지는 것 같았다. 기사도 나중에는 길에 대한 확신이 없었던지 지나는 다른 기사나 주민에게 묻기 시작했고, 다시 방향을 파르핑 쪽으로 잡아 왔던 길을 되돌아왔다. 결국은 분가마티에 도착하지 못한 택시는 우리를 한적한 강가의 철제 다리 근처 마을에 내려놓고 도망가듯 사라져 갔다.

 

 

걷기 위해 온 네팔이니 우리는 개의치 않고 걷기 시작했다. 강이라기 보다 하수구에 더 가까운 바그마티 강을 건너고 다시 강을 따라 북쪽으로 방향을 잡아 한참을 헤메야했다. 강을 벗어나자 연두색으로 살아나는 밭둑길이 나오고 멀리 시가지가 시야에 들어왔다. 아직 1월에 불과해지만 아열대기후인 네팔의 들녘은 벌써 봄를 닮아 있었다. 정갈하고 아름다운 전원 도시로 알려진 분가마티로 향하는 들길은 아름다웠다. 겨우 길을 찾고 따가운 햇살을 맞으면 오르막길을 올라 분가마티를 만났다.

 

도착한 분가마티는 남루했다. 지난 지진의 여파때문일까, 시가지 자체가 여느 다른 도시와는 달리 낡고 지저분했다. 뿌연 먼지를 뒤집어 쓴 건물들은 위태로웠고, 방치되어 있었다. 인적이 드물고 생기없는 골목길을 돌아 겨우 물어 찾아간 민속박물관은 초라했다. 지금까지 카트만두나 포카라를 중심으로 주요한 도시만 돌아다닌 끝에 처음으로 관광루트에서 벗어나 만난 도시가 분가마티가 아닐까는 생각도 들었다. 지금까지는 네팔의 허상들이었고, 분가마티가 네팔의 진상이란 말인가, 알수 없었다. 버스파크 근처에서 너무 싼 가격에 놀란 식당에서 모모와 사모사 그리고 콜라로 점심을 해결하고 파탄행 버스에 몸을 맡겼다.

 

5일만에 다시 찾은 파탄이 반가웠다. 편한 잠자리와 풍부한 먹거리가 있고, 사람들의 활기와 아름다운 건축물이 즐비한 파탄으로 돌아왔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 벅찼다. 지난 몇일간 계속되는 복통으로 체력은 현저히 떨어졌다. 마땅히 먹을 것도 없었는데다가 무얼 먹어도 소화가 되지 않았다. 그렇게 몇일을 지내다보니 실제보다 훨씬 긴 여정을 다녀온듯 몸도 지쳤고 마음도 처졌다. 그래도 긴 흥정 끝에  Lalit Heritage Home에 짐을 풀었다. 파탄 드바르광장이 내려다 보이는 환상적인 조망의 룸에서 짐을 풀자 메니저가 커피를 날라왔다. 고마운 마음에 팁을 건넸지만 팁이 호텔비에 이미 포함되어 있다며 사양했다, 고맙고 기분 좋았다. 커피향을 맡으며 아름다운 건축물이 조화롭게 모여있고 그 사이를 살아가는 인파를 행복한 눈으로 한참을 바라다 보다 어둠이 내리는 파탄의 아름다움에 흠뻑 젖어갔다.

 

처음으로 파탄에서 아침을 맞았다. 역시 신을 경배하는 찬양소리에 이른 잠을 깼다. 작고 아기자기한 룸때문인지 편안하고 아늑한 잠자리를 누렸다. 간혹 도시의 밤하늘을 울리는 개짓는 소리에 잠을 깨기도 했지만 나의 숙면을 방해하지 못했다. 밤새 도시를 뒤덮던 개울음 소리는 아침을 알리는 서광이 비치자 자취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 찬양소리 사이로 일과를 시작하는 사람들의 기척이 늘어만 갔다. 방을 나와 옥상을 올라갔다. 소박한 정원 넘어 파탄 두바르 스퀘어의 아름다운 풍광이 한눈에 들어왔다.

밤새 보이지 않던 숙박객들이 조식을 들기 위한 다이닝룸에 부쩍였다. 모처럼 한국인들도 만나고 지진 피해를 복구하기 위해 지원온 일본인들도 있었다. 일어를 하는 L은 일본인들을 고향사람 만난듯 반가워 대화를나누었다. 외국어가 절실해 지는 순간이었다. 한국에서 M과 D가 도착하고 안나푸르나 라운드를 준비하는 여정의 터닝 포인트에 도달하는 날, 우리는 타멜거리로 되돌아 가기 위해 Heritigi Home을 나섰다.  

교통체증으로 한국같으면 살인이라도 날것 같은 골목을 지나 타멜행 버스를 찾았다. 다시 돌아온 타멜거리를 걷고 숙소 마야거르츄에 짐을 풀었다. 일정 없는 하루를 한가롭게 보냈다. 오후에 M과 D가 도착해 반갑게 맞고 다시 타멜 거리로 나섰다. 타멜거리에서 제일 규모가 크다는 Shop Right Supermarket에서 트레킹 물품을 사고, 한국에서 일했던 네팔 노동자가 운영한다는 Small Star 주점에서 뚱바(Tungba)를 마셨다. 뚱바는 수수같이 보이는 꼭또라는 곡물을 발효해 통에 담은 뒤 뜨거운 물을 붓고 빨대로 마시는 네팔만의 술이었다. 왠지 술에 흠뻑 젖고 싶은 날이지만 불편한 속과 다음 여정을 위해 참았다. 

 

두달 여정의 절반이 지나는 밤 침대에 누우니 많은 생각들이 일었다. 나는 스스로에게 다그치듯 묻기 시작했다. 나는 네팔을 또 올까? 올 수 있을까? 오고싶을까? 아무 대답도 가능하지 않았다. 너는 네팔에 뭐 하러 왔지? 왜 네팔을 그토록 목말라했지? 질문은 이어졌지만 심경만 복잡해 질뿐 답을 구할 수 없었다. 나에게 네팔은 내 삶의 알리바이인가? 나의 순수를 보증해주는 방패일까? 위장막 혹은 화려한 목걸이같은 장식일까? 먼지와 차가운 방, 입에 맞지 않는 먹거리를 감수하고도 네팔을 찾은 나는 내 자신에게 얼마나 정직한 것일까 문득 묻고 싶어졌다.  집이 그립고 딸이 보고싶고 뽀득뽀득 윤기나는 접시에 상큼한 야채를 담은 그런 식탁보가 있는 아침이 그리워졌다. 아직 한달이나 남았잖아! 문득 조갑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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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월13일 포카라를 떠나 카트만두에 도착, 14일 타멜과 박타푸르를 주유하다 15일 일행들은 모두 한국으로 출국하고 우리 부부만 덩그러니 남아 새로운 여행을 시작하다.

네팔 최고급 버스라는 자가담바를 타고 포카라 카투만두간 트리뷰반 하이웨이를 하루종일 달렸다. 예상 시간 7시간이라고 하지만 예상은 그냥 예상일 뿐이었다. 버스가 겨우 카트만두로 들어서는 마지막 고갯길을 넘어설 무렵 출발한지 9시간이 다되어 가고 있었다. 긴 시간이지만 버스는 아늑했고 길은 편안했다. 일반 마이크로버스 같은 난폭운전도 없었고 스튜어디스의 서비스도 지루함을 줄이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푹신한 좌석에 깊게 앉아 따사로운 햇살을 받으며 지난밤 꾸었던 지독한 꿈을 회상했다.

늘 반복되는 꿈이지만 세월이 가도 공포는 줄지 않았다. 나의 악몽은 늘 30살 전후에 멈춰. 대학원생의 신분이지만 학문을 계속할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다른 삶의 전망도 없고, 결혼은 하고 아이까지 있는 상황에서 먹고살 방도도 없는데 목을 죄는 수업의 하중은 날로 더해가는그때로 나는 다시 돌아간다.  꿈 속에서는 늘 나는 나를 확신하지 못한다. 과외를 할려고하지만 내가 가르칠수 있을까 영어는 원래 못하고 수학은 다 잊어버렸는데 어떻게하지 가슴졸인다 이어진 꿈에서 리포터를 제출해야하는데, 졸업논문을 작성해야하는데, 공부를 해야하는데 마냥 식은 땀을 흘리며 쫒기게 된다. 그리고 장면이 바뀌어 과사무실엘 갔는데 갑자기 내가 학생인지 확신이 들지 않고 졸업식장을 갔는데 내가 졸업생이 맞는지 학점은 다 땄는지 확신이 들지 않아 당황하며 잠을 깼다. 늘 반복된 꿈이지만 사랑곳까지 와서 같은 꿈을 꾸고 식은땀을 흘리며 선잠을 깨고나니 기분이 착잡했다. 힘들었던 그 시기를 지나온지 25년이 넘었는데 나의 무의식은 아직 그 시절에 사로 잡혀 있는걸까 알 수 없었다.

버스가 카트만두로 들어서는 검문소를 지나자 시커면 흙먼지가 거리를 휩쓸고 버스를 덮쳤다. 창틈으로 스민 먼지에 이내 목은 칼칼해지고 뿌연 흙먼지가 온몸에 달라붙었다. 도로는 온통 공사 중이었고, 비가 내린 기억조차 없는 건기다 보니 한순간 앞이 아무 것도 보이지 않을 만치 두터운 먼지가 거리를 덮고 있는데다 심각한 교통체증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카트만두에 들어선지 한시간이 훨씬 넘어 종점인 안나푸르나 호텔 마당에 도착했다. 카트만두 뷰띠끄호텔에 메일로 픽업을 부탁해놓은 택시와 룸보이 빔센이 우리를 맞았다. 교통체증으로 정확히 예정시간 3시간을 넘겨 우리가 도착했는데 기사는 그 3시간 동안 우리를 기다렸다고 했다. 불평이라기보다는 아무렇지도 않은 사실을 단지 알리는 표정이 더 당혹스러웠다. 혹시 우리만 손님으로 받아도 오후 벌이로 충분하다고 받아들이는 건지 묻고 싶었지만 감히 묻지 못했다. 어떤 경우도쫒기지 않는 것 같은 시간에 여유롭고 관대한 네팔인의 품성이 부러웠다.  모처럼 숙소 인근의 마은틴스테이크하우스에서 저녁을 먹고 아까운 저녁시간을 잠으로 채웠다.

일행의 출국을 앞두고 온전히 남은 카트만두의 마지막 하루를 시작하면서 정확히 어떻게 보낼 것인지 계획하지 못했다. 호텔을 나와 타멜 거리거리를 걷고 쇼핑도 하고 그리고도 시간이 남아 논의 끝에 박타푸르를 향했다. 일행들은 이미 여행 초기에 파수파티나트와 보드낫을 다녀왔기 때문에 남은 반나절을 값지게 보내기에 박타푸르만한 곳이 없었다. 라트나 버스파크에서 버스를 타고 30분이 채 지나지 않아 박타푸르에 도착했다. 박타푸르는 지난 2015년 4월 25일 대지진으로 엄청난 타격을 받았다는데 그 상처가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일부 건물은 흔적없이 무너져 내렸고, 골목몰목의 건물들 조차 긴 막대와 대나무로 아슬아슬하게 받쳐져있는 경우가 많았다. 불안해서 어떻게 저기에 살까 걱정되었지만 마땅한 대안이 없는 상황에서 주민들은 위험을 감내할 수 밖에 없는 처지같았다.

박타푸르는 카트만두와 파탄과 더불어 카트만두벨리의 3대왕국의 하나로 17세기 후반 조성된 왕국이라고했다. 순례자의 도시를 의미하며 BHADGAON이라고도 불리는 박타푸르는 다른 왕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개발이 덜되어 온전히 중세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듀바르 광장을 지나 지명도 모르고 어디로 이어지는 지도 모르는 골목길을 헤메기 시작했다. 도자기가마터도 지나고 여러가지 야채를 파는 노점상들이 늘어서 있는 골목도 지나 눈에 익은 Nyatapola 탑에 이르렀다. 그 자체가 하나의 사원이고 그앞쪽 마당에 같은 이름의 카페에서 5년전 차를 마시던 기억이 새로웠다.

광장과 사원으로 어우러진 구역을 서쪽으로 나와 인공호수 근처에 이르자 많은 인파들의 북적되고 음악소리가 들려왔다. 소리와 풍경을 쫒아 학교 운동장 같은 곳을 드러서니 수십명의 아이들이 가사를 입고 무슨 예식을 하고 있었다. 어쩌면 저 가사를 입은 아이들이 승려가 되는 예식을 올리는 그런 자리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행사는 그리 엄숙해 보이지 않았고 조금은 분주하고 소란스러웠다. 10여명으로 구성된 팀들이 나와 노래를 부르고 의상이 달라 꼭 부족을 달리하는 것같이 보이는 다른 팀이 이어서 노래를 불렀다. 한쪽에 늘어놓은 게시판 같은 것에는 기부금으로 보이는 목록을 적어놓기도 했고 마당 한켠에는 손수건 모양의 여러색갈의 천을 가지런히 늘어놓고 참가자들끼리 음식을 나누고 있었다. 영문을 몰라 휘둥그래한 눈으로 인파들 사이를 헤메다 카트만두로 돌아가기 위해 버스파크를 찾았다. 박타푸르를 떠나려는 우리 눈앞에 갑자기 전통밴드가 지나가고 신상을 앞세운 행진이 이어졌다. 타악기 중심의 거친주는 애조와 더불어 신령한 서정을 선물했다.  가락과 풍광에 매혹되어 행렬의 끝이 사라질 때까지 넋을놓았다.

 

 

 

카트만두로 돌아오니 라트나 버스파크에서 타멜로 이어지는 거리의 공터에는 수천명의 궁중이 모여 있고 길은 인파로 넘쳐났다. 무슨 정치 집회인지 축제인지를 끝내 물어보지도 못한 채 우리는 군중들의 파도에 휩쓸려 가까스레 타멜로 돌아왔다. 그런데 돌아오는 길에 카트만두 광장 인근에서 와이프를 잊어버렸다. 입장료를 10불이나 내야되는 구역인데 와이프는 현지주민같은 자연스런 걸음으로 무사통과를 해 버렸고 우리 일행은 쫒아들어가기 위해서는 입장료를 내야하는 상황이 되어 그냥 연락을 시도해서 다른 곳에서 만나는게 낮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일행들이 선물을 사러 돌아다니는 사이 나는 와이파이가 되는 까페에 들어가 와이프랑 연결을 시도했다.  연결은 되다가 말다가 불완전했지만 겨우겨우 최소한의 의사소통은 될 수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일행들은 먼저 네와르 음식 전문점이면서 문화공연도 하는 유명하다는 Nepali Chulo로 향했다. 일행들에겐 오늘이 네팔에서의 마지막 밤이다 보니 특별한 이벤트가 필요했다. Nepali Chulo는 여러군데 묻고 정보를 얻어 가장 고급스런 네팔전통식당으로 알고 선택했다. 먼저 도착한 일행들의 가슴을 졸인 끝에 와이프는 릭샤를 타고 도착했고 공연과 식사를 진행했다. 하지만 네팔물가를 고려할 때 엄청나게 비싼 식사임에도 불구하고 공연은 평범했고, 음식은 기대 이하였다. 나름대로 고급스런 식당건물이 음식값을 부풀려놓은 것으로 밖에 이해되지 않았지만 네팔에서의 마지막 만찬은 조금은 억울하게 끝이 났다.

 

 

15일 친구들은 트리뷰반 공항을 통해 출국하고 우리부부는 왠지 모를 허기를 느꼈다. 당장 내일부터 우리 부부 단독의 여정을 이어갈 예정이라 조금은 홀가분하고 들떠야할 것 같아지만 기분은 한없이 가라앉았다. 기분전환을 위해 호텔을 나섰고 네팔민속박물관을 찾아 나라얀히티왕궁앞의 더바마그 거리를 걸었다. 지도에는 나와있는 민속박물관은  찾지 못하고 인근에서 옥류관이라는 북한식당을 우연히 맞딱뜨렸다. 반가운 마음에 식당을 들어섰는데 우리를 맞는 여성 종업원의 눈길은 곱지 않았다. 주관적인 느낌일까 의아했지만 최대한 편하게 마음을 먹고 음식을 주문했다. 음식에 대해서는 인상적이지 않았지만 식당의 분위기는 오랫동안 뇌리에 남을 것 같았다. 왠지 모를 서먹함과 낯설음이 현지 네팔리 식당보다 더한 느낌이 들었다. 찾지 못한 민속박물관의 위치를 물어보니 네팔산지가 3년이 된다는 종업원은 알지 못한다고 답변했다. 그리고 무엇인가 물어볼까봐 미리 경계하는 듯한 눈빛이 가슴아팠다. 정치 체제의 차이가 같은 한족사이에서도 이리 정서적 벽을 세울 수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지난 보름을 같이 했던 일행들이 떠난 타멜거리를 걸으며 저녁을 맞았다.  5명의 일행이 떠나간 타멜은 갑자기 텅 비어보였다. 나에게는 네팔 여정을 같이 하기 전의 친구는 네팔 여행을 같이한 뒤의 친구와 같은 사람일 수 없었다.  나는 그들과 평생 네팔의 추억을 나누고 의지하며 살아갈 사람으로 새로운 인연을 시작하게 된지도 몰랐다. 그래서 기뻐야했고, 마음 따뜻해야했다. 그런데 쓸쓸함이 밀려오고 걸음은 허전해졌다. 조금은 고급스런 저녁으로 스스로를 위무하고 일찍 들어온 호텔에서 남은 한달 반의 여정을 계획하며 얉은 잠을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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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1/02

아침 햇볕이 공항라운지를 비추기 시작하고 닫혔던 가게들이 하나둘 셔터를 올리는 때가 되어 서야 밤새 찾지 못했던 청사내 호텔을 발견할 수 있었다. 지난 밤새 경찰인지 경비인지 공항근무자들에게 물어보았지만 하나같이 대답은 No! 한마디였다. 난 공안이지 안내원이 아니라는 간고한 입장표명으로만 느껴졌다. 사실 공항은 엄중한 공간이기도하지만 많지 않은 여행경험 중에 이렇게 피부로 와 닿는 삼엄한 경비는 처음이었다. 몽둥이와 방패까지 든 군인들이 청사 내를 끝없이 순찰하고 청사로 들어오는 사람들을 줄을 세우고 일정한 숫자가 되면 한꺼번에 입장을 시켰다. 이런 시스템은 공항 보안의 문제라기보다는 시민으로 하여금 국가 권력의 살아있음을 몸으로 느끼고 굴종케 하는 장치로 느껴졌다. 아마도 티벳 독립운동과 관련한 긴장 때문으로 이해되지만 티벳 사람은 좋아하지만 티벳 독립은 또 다른 문제로 느끼는 내같은 사람에게도 거부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카투만두 트리뷰반공항을 향하는 비행기에 올랐다. 동방항공에 대한 수많은 악플들과는 달리 비행기는 쾌적했고 승무원은 친절했다. 우리가 탄 비행기는 4시간여 비행 끝에 멀리 눈덮인 히말라야가 보이는 카트만두 하늘에 다달았다. 하늘은 쾌청했고 석양에 물든 서쪽 하늘의 적란운이 멋있었다. 그런데 곧 착률 할 것 같은 비행기는 공항사정으로 착륙시간을 지체해야 했다. 오전내내 안개로 밀렸던 비행기들의 이착륙으로 내가 탄 비행기는 한 시간을 넘도록 땅을 딛지 못했다. 긴장과 울렁거림으로 힘든 시간을 견뎌내자 석양이 지는 초저녁 하늘을 이고서 비행기는 활주로에 닿았다. 세계에서 제일 위험하다는 루클라공항에 착륙한 것도 아닌데 승객들은 너나할 것 없이 환호하고 박수를 쳤다. 가슴 벅찼다. 5년을 기다린 네팔행인데 너무 쉽게 도착하면 안될 일이긴 했다.

 


청사로 들어서며 5년전 기억을 되살리며 공항과 주변을 훑어보았지만 지난 기억은 흐리고 지금 있는 모든 풍경은 늘 항상 그렇게 있어온 것들처럼 친숙했다. 입국 비자비를 심사원이 아니라 은행창구에서 내는 것으로 달라진 공항을 나왔다. 5년 전과 똑같이 달려드는 삐끼들을 비집고 예약된 픽업택시를 찾았다. 배낭을 억지로 빼앗아 택시에 싣어 주던 삐끼가 팁을 요구했지만 잔돈을 미리 준비하지 못해 그냥 무시했다. 없는 살림에 100달러지폐를 팁으로 줄 수는 없었다. 무시하라는 택시기사의 싸인을 받고, 또다른 하국 여성 여행자 한사람과 같이 픽업택시에 몸을 싣었다. 꽉 막힌 카트만두 시내를 가로지르며 5년전 기억을 더듬었다. 카투만두 거리의 소란과 무질서는 여전했지만 5년전에 비해 차량은 늘어났고 사람들은 더 붐볐다. 곽막힌 도로를 따라 정체는 이어졌고 예상시간을 함참 넘겨 예약해둔 카투만두 뷰티크 호텔에 도착했다.

 


하루 먼저 여정에 오른 일행과 반가운 조우를 하고나니 나의 네팔 오는 길은 집나온 지 무려 34일이 걸린 셈이었다. 같이 늙어가고 싶은 친구들과 네팔에서의 첫 식사를 했다. 비싼 한식이나 고급레스토랑이 아니라 호텔 인근의 누추한 네팔리 식당에서 하는 식사라 더 즐거웠다. 익숙한 친우들이지만 바로 이 순간 한층 각별한 인연으로 다가왔다. 나에게 7명의 동행은 인생의 아주 중요한 순간을 나눈 친구가 된 것이다. 나에게 네팔 여행은 그저 소비하는 여행상품이나 그저 그런 일상의 한 조각이 아니라 일생일대의 대 이벤트였기 때문이다. 식사를 마치고 가슴 울렁이는 타멜 거리의 가로질러 숙소로 돌아왔다. 우리는 각자의 방으로 흩어졌고 곧 시작할 트레킹을 위한 짐을 꾸렸다. 나는 피곤한 몸을 침대에 뉘웠지만 내일부터 시작한 꿈같은 여정에 가슴 부풀어 네팔에서의 첫밤을 쉬 잠들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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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으로 돌아가는 날, 아침 늦게 눈을 떴지만 어제와 다른 도시의 분위기가 창으로 전해졌다. 먼저 가까이 타멜거리를 울려대던 택시의 클락션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도시의 하루를 준비하는 분주한 발길도 느껴지지 않았다. 대신 멀리서 군중들이 외침이 느리게 전해져 왔다. 간단히 세수를 하고 짐을 싼뒤 카트만두에서의 마지막 반나절을 누리기 위해 방을 나섰다.

숙소 로비에 내려가니 오늘 카트만두는 총파업중이라고 했다. 모든 택시와 버스가 운행을 중단하니 평소보다 두어시간 서둘러 공항으로 향해라고 했다. 오후 3시 40분에 카트만두 트리뷰반 공항을 이륙, 한국시간 26일 새벽 1시에 인천에 도착예정이니 타멜에서 점심을 먹고 공항으로 나갈려든 계획을 수정해야만 했다. 일단은 상황을 살피러 타멜거리를 나섰다. 지금가지 봐왔던 타멜거리가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우릴 맞았다. 차는 자취도 없이 사라졌고, 식당이며 선물가게며 조그만 구멍가게까지 문을 연곳이 단 한군데도 보이질 않았다. 간혹 릭샤라는 인력거가 지나가곤 했지만 타멜거리는 평소의 번잡함이 싹 가쉰 말쑥한 얼굴이었다. 타멜을 빠져나와 멀리 시위대의 구호가 들리는 곳으로 발길을 잡았다. 대로로 나서자 무장경관들이 군데군데 나와있었고 멀리 한무리의 시위대가 지나가고 있었다. 냅다달려 시위대 근처까지 가서 사진을 찍고 상황을 살폈지만 도대체 저들이 무슨 요구를 걸고 시위를 하는지 도무지 알아낼 재간이 없었다.

두세 무리의 시위대가 여러방향에서 나와 사거리에서 집결해 더 큰 무리를 이뤄 타멜 외곽을 돌아 왕궁쪽으로 행진을 계속했다. 도로에는 간혹 군경을 싣을 트럭과 엠블란스가 싸이렌을 울리며 지나갈 뿐 거리는 차를 대신해 시위대와 시민이 차지하고 있었다. 차로부터 해방된 도로를 걸으니 이유를 알 수 없는 해방감이 나의 가슴에도 벅차올랐다. 시위대를 마냥 따라갈 수도 없었고, 오늘 카트만두의 상황을 살펴보고 택시나 버스없이 공항으로 나갈 방법도 알아볼 겸 다시 숙소로 돌아왔다. 숙소의 스텝이 전한 이야기로는 오늘 시위가 석유값 폭등에 따라 생활이 어렵게 된 운전자 노조를 중심으로 조직되고 있다고 했다. 네팔은 모든 노동자조직, 시민조직, 기타 단체들이 잘 조직되어 있는데 이번 이슈에 동조해 전국적인 총파업이 일어나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오전 동안 카트만두 시내를 더 돌아다닐려고 했던 계획은 물건너갔고 어떻게 안전하게 공항으로 달려갈 것인가가 문제가 된 상황이었다. 하지만 스텝이야기로는 총파업은 일상적인 사건에 불과하고, 여행자들은 위해서는 별도의 셔틀버스가 운행되기 때문에 큰 걱정은 하지 말라고 했다. 타멜초크 지나 어제 방문했던 '꿈의 궁전'근처에 가면 타멜과 공항사이를 운행하는 임시 셔틀버스가 거의 30분 간격으로 운행된다는 것이었다. 최악의 경우 걸어서라도 갈 수 있을 만치 넉넉한 시간을 두고 공항으로 갈 방법을 찾으려고 했는데 이외로 쉬운 해결책이 있어 안도했다. 그렇지만 교통수단이 없고, 모든 가게며 관공서 공원까지도 문을 닫은 카트만두 시내를 둘러 볼만한 흥도 나지 않았고 또 혹시나 하는 일말의 불안감 때문에 최대한 빨리 공항으로 가기로 마음 먹었다.

셔틀버스가 정차한다는 타멜입구쪽으로 가니 벌써 여행자들이 배낭을 매고 끌고 불안한 표정으로 몰려들기 시작하고 있었다. 수십명의 무장경관들이 무료한 표정으로 거리를 지키고 있었고 멀리 시위대의 함성이 간간히 들려오기도 하는 타멜입구는 평소의 번잡함이 사라져 오히려 공기도 맑고 햇살도 투명해 더 평화롭게 느껴졌다. 일시에 외국인 여행객들이 몰려들어 조금 어수선해지기 시작할 무렵 [투어리스트 버스]가 도착했다. 한대의 버스가 떠난뒤 또 한참을 지난뒤 두번째 버스가 도착했을 때 우리부부도 잽싸게 줄을 서고 버스에 오를 수 있었다. 버스는 3명의 무장경관이 동승해 시위대가 점거한 거리를 살피며 버스를 호위했다. 버스는 시위대가 막아선 길을 피하기 위해선지 아니면 또 다른 호텔에서 외국인을 싣기위해선지 큰길을 피해 골목같은 우회로로 돌아 몇번을 정차해 승객을 더 싣은 뒤 공항에 도착했다.

트리뷰반 공항은 삼엄한 경비속에 많은 여행객들로 붐비고 있었다. 1층 로비에 들어가기 위해서 먼저 여권을 검사하고, 1층에서 발권뒤 탑승구가 있는 2층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트 앞에서 또 무장경관이 여권과 항공권을 검사했다. 1층로비에서 안나푸르나 라운드 때 차메에서 만났던 학생 커플을 반갑게 만나 같이 햄버거로 아침을 떼웠지만 공항청사안에는 제대로된 식당도 매점도 없었다. 생각보다 너무 빨리 공항에 도착하는 바람에 서너시간을 공항 청사안에서 지내야만 했다. 청사안은 일반적인 국제공항에 비해 좁고 빈약해서 별다른 놀거리가 없었다. 시골의 버스터미날 수준의 조그만한 매점에서 사먹을 수 있는 것이라고는 맛없는 햄버거가 거의 전부였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발권을 하고 승강구가 있는 청사 2층으로 올라갔다. 조금 더 큰 매점과 레스토랑 그리고 선물을 살 수 있는 가게들이 있었지만 특별히 돈을 쓸 일이 없었다. 쓰고 남은 네팔돈을 기부받는 함이 2개 있었는데 한개는 적십자가 그려져 있었고 또 한개는 무종교를 표방한 기부함이었다. '신없는 성덕'을 꿈꾸는 나는 무종교를 표방한 함에 남은 네팔 돈을 넣었다. 공항에서 만난 한국인 모녀여행객으로부터 여행사에서 제공한 도시락을 얻어 먹고 청사안을 수십바퀴를 돈 뒤에나 비행기에 올라 한국으로 향할 수 있었다.

 

 

비행기가 카트만두 상공으로 솟아오르자 멀리 우리가 걸었던 안나푸르나와 함께 에레레스트 산맥이 눈에 들어왔다. 알 수 없는 벅찬 감정이 마음을 흔들었다. 살아생전에 꼭 하고 싶었던 어떤 일을 끝낸것 같은 성취감이 아니라 안나푸르나에서 보낸 시간과 그 시간속에서 보낸 나의 삶을 놓아두고 떠나는 아쉬움이 밀물같이 몰려왔다. 멀리 사라져가는 히말라야 산맥을 바라다보며 살아온 날에 대한 고마움과 살아갈 날에 대한 희망을 되새기며 얇은 잠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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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국 하루전이라고 급할 것은 없지만 마지막 남은 시간을 아껴 숙소를 나섰다.  타멜거리로 나와 아침 일찍부터 문을 연 베이커리에서 따끈따끈한 빵과 진한 커피를 들고 여분의 빵을 가방에 담아 길을 나섰다. 갓 깨기 시작한 타멜거리에는 택시들이 늘어서기 시작했다. 빵집을 나서자마자 택시를 잡았다. 좁은 택시 안에 굵은 향을 2개나 피우고 있던 기사와  300루피에 흥정을 하고 보드낫을 향했다. 역시 난폭운전을 했다. 제발 천천히 가자고 외쳤지만 그는 'God bless you!'를 읊조리며 전혀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그는 지름길인지 좁은 골목으로 접어 들어 노폭에 아랑곳없이 과속과 곡예운전으로 금새 보드낫에 도착했다.

보드낫은 네팔의 사원답게 문앞부터 아수라장이었다. 택시와 사람, 상인과 순례객, 네팔리와 관광객이 뒤엉킨 사이를 뚫고 정문을 향해 다가가자 거지와 사두들의 내민 손이 정신을 빼놓았다. 1인당 160루피의 입장료를 내고 들어선 보드낫은 사진을 통해 미리 낯을 익힌 반구형의 탑을 중심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행렬이 이어지고 있었다. 부처의 눈을 그려놓은 탑은 거칠지만 위엄있고, 단조로운 형태지만 나름 조형미를 갖추고 있었다. 네팔내 최고의 티벳 불교 성지로 알려진 보드낫은 종교를 넘어 티벳 문화와 삶, 전체를 느낄 수 있는 특이한 곳이었다. 머리 장식을 유별나게 하는 네팔 젊은 남성들의 모습도 눈에 띄이고 티벳 승려의 행렬도 이어졌다. 병든 노인네들의 힘겨운 발걸음과 젊은이의 발길 또한 붐비는 보드낫의 풍경은 어쩌면 '티벳'에서 종교의 지배력을 잘 드러내 주는 곳이기도 했다. 티벳 불교에 대해 아는 바가 없지만 스투파를 둘러싼 종교 물품을 파는 가게며 관광기념품 가게며 레스토랑, 호텔의 모습 그리고 보드낫 구역에 속하면서 원형 스투파와 그를 둘러싼 원형의 상가건물뒤 골목으로 들어가면 다양한 채소와 생활용품을 파는 시장이 들어서 있었다. 식육점까지 버젓이 사찰의 영역안에서 조금도 어색하지 않게 공존하면서 또 다른 내세의 삶을 꿈꾸게 만드는 티벳 불교는 이미 '종교'가 아니라 티벳탄의 삶 자체로 보였다. 또한 티벳불교는 티베탄에겐 이미 정치적, 현실적 권력이기도 한 것 같았다.

전날 파샹을 만났을 때 오늘 파샹 역시 보드낫에 올 일이 있었다고 했지만 우리가 보드낫을 떠나기전까지 파샹을 만날 수 없었다. 우리가 너무 이른 시간에 보드낫에 왔기 때문인 것 같았다. 다시 택시를 타고 퍄슈파나트로 향했다. 보드낫에서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있는 파슈파나트는 네팔 흰두교도의 성지로 나는 그냥 흰두교식 '화장장'으로 알고 있던 곳이었다. 사원은 역시 입구부터 상인과 사두들, 그리고 거지와 순례객에다가 우리같은 관광객들까지 뒤엉켜 장터를 이루고 있었다. 한사람당 500루피의 입장료를 내고 사원을 들어서니 가족을 잃은 슬픔을 종교적 의식을 통해 극복하고자 하는 망인의 가족들과 더불어 이 모든 과정에 개입하여 삶을 이어가는 사두와 점성술사 그리고 자칭 '가이드'들의 발길 또한 분주했다.

매표소에서 부터 우리를 따라 나선 '가이드'는 시간당 얼마간의 돈을 요구하며 조금은 성가시게 따라 붙었다. 거부의사를 밝히자 그는 떨어져 갔지만 또 다른 가이드가 다시 우리를 따라 붙었다. 한국어가 농통하지는 않았지만 기본적인 단어는 구사하는 네팔리였다. '화장', '제사', '부자;, '보통사람', '시체' , '3시간', '오천루피' 등의 단어를 구사하며 다가선 두번째 가이드마저 사양했지만 그를 통해 나는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부자를 화장하는 곳과 보통 사람을 화장하는 곳이 다르고, 보통사람들은 오천루피의 비용을 내고 화장을 하고, 시신을 화장하는데는 약 3시간 정도의 시간이 걸리고, 강 한쪽의 사각형 돌판은 화장을 하는 곳이고, 맞은 변 둥근 돌판은 제사를 지내는 곳이라는 사실까지 고스란히 그를 통해 들었지만 나는 팁도 주지않고 그를 내쳐버렸다. 누군가에게 서비스를 받고 돈을 지불하는 일에 익숙하지 않다보니 가이드의 도움을 받는 일이 왠지 어색하기만했다. 구체적인 지식을 얻지 못하더라도 그냥 혼자 조용히 사원의 분위기나 살피며 걷고싶기도 했다. 나중에 생각하니 내가 너무 위축되어 가이드를 거부한 것은 옳지 않은 선택으로 여겨졌다. 혹시라도 이와 비슷한 다음 기회가 있다면 꼭 가이드비를 부담해서라도 도움을 받기로 마음 먹었다.

파슈파티나트의 화장장은 흰두들이 성스러운 강으로 여기는 갠지스강의 지류인 바그마티강을 따라 늘어서 있었다. 파수파티나트를 가로 지르는 바그마티강은 작은 규모에다 수량도 많지 않았고, 시신을 태운뒤에 쓸어넣은 쓰레기와 위에서 부터 유입되는 생활폐수 등으로 강물이 시커멓게 썩어 있었다. 하지만 그 더러운 강물로 시신을 닦는 의식을 치루고 그 강물로 세수를 하고 몸을 씻으며 흰두들은 마음의 평화를 얻고 있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그 강물에 들어가 시신에서 나온 금이빨 같은 것을 얻기위해 강바닥을 뒤지고 있었다. 성스러운 바그마티강에 들어가 하루종일 강바닥을 뒤지는 사람들은 강물에 오래 머문 만치 더 많은 시바신의 가호를 받고, 동시에 강을 통해 물질적 구원까지 받고 있었다.

화장장을 들어서니 막 불붙기 시작한 시신과 다타들어가 뼈만 남은 것 같은 시신 그리고 저멀리 막 종교의식을 치루며 화장을 준비하는 한무리의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화장을 진행하는 사람은 시신이 타들어가는 모습이 흉칙하게 드러나지 않도록 계속해서 시신에 짚을 얹었다. 이전에 덜 탄 시신의 일부를 원숭이들이 들고 다니며 뜯어 먹는 경우도 있다고 들은 적이 있었는데 사원안을 돌아다니는 원숭이 떼가 많았지만 다행히 화장터까지 접근하는 놈은 없어 보였다. 화장중인 시신들은 지키고 있는 가족이나 지인들이 많지 않아 보였는데 화장을 준비하며 종교의식을 치루고 있는 무리는 재법 많은 사람들이 같이 하고 있었다. 죽음이 삶을 이기고, 삶의 증거인 육체마저 지우는 의식이 화장이지만 그래도 한 생명으로 세상을 살다가는 그 순간이나마 누구도 쓸쓸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전의 가난이 죽어서도 계속되고, 생전의 부귀와 영화를 죽어서도 누리는 것을 보면 그래도 죽음보다 삶이 더 강한 것 같았다.

화장을 준비 중인 무리에서 한 여성의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곧 화장을 시작하기위해 강물로 시신의 발을 닦는 마지막 의식을 치루는 과정을 진행하고 있었는데 그녀는 죽은 자의 아내로 보였다. 이제 곧 사랑했던 사람의 시신에 불이 붙고 그가 한 생명으로 이세상을 살았던 물직적 흔적이 지워져버리게 된 순간 그녀는 종교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죽음의 고통 그리고 슬픔에 몸부림쳤다. 결국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죽음의 한계, 그 상실과 잊혀짐의 공포를 어떻게 '종교'가 전부 구제해 줄 수 있겠는가. 정신줄을 놓고 발작적으로 시신을 붙들고 오열라는 그녀의 모습에 나또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애써 눈물을 감추고 바그마티강건너 돌계단을 한참 올라 부도들이 늘어서 있고 그 사이를 원숭이 떼가 한가로이 놀고 있는 언덕위 유적지를 걸었다.

아침 일찍 시작한 여정을 끝내고 타멜로 돌아오니 늦은 점심시간이었다. 안나푸르나 여정을 준비하며 알게 되었던 한국 식당 '소풍'으로 향했다. '소풍'은 산을, 네팔을 사랑했던 남녀가 만나 그 사랑의 증표로 남긴 타멜 뒷골목의 소박한 식당이었다. 산에서 만나 사랑하고, 산에 더 가까이 지내기 위해 타멜에 식당겸 여행객의 쉼터를 열었지만, 아내는 이내 병이 들고 영영 세상을 등져버렸다고 했다. 그들 부부가 꿈꾸었던 '소풍'은 이제 네팔 여성들의 손에 운영되고 있었다. 주인이 바뀌었는지, 어떤 형태로 운영되고 있는 지는 알 수 없지만 여전히 '소풍'은 소박한 쉼터로 우리를 맞았다. '소풍'은 안나푸르나로 히말라야로 떠나거나 되돌아 온 사람들에게 휴식을 취하며 지난 여정을 곱씹고 새로운 꿈을 꿀 수 있게 하는, 산과 세상을 잇는 간이역으로 남아있었다.

소풍에서 '떡뽁기'를 먹고 타멜 거리로 나와 어제 눈여겨 보았던 선물가게에서 작은 목각 몇가지를 구입했다. 생각보다 싸게, 오랜 흥정이 필요없이 새와 소와 물고기, 사자 등의 동물을 부조로 새긴 목각 몇개를 사고나니 작은 배낭이 한짐이 되었다. 숙소로 돌아가 배낭을 내려놓고 다시 타멜 거리로 나왔다. 서점을 들러 네팔 전통문양집고 여신에 대한 책을 사고, 선물가게에서 허브차를 사고, 수퍼마켓에서 유명한 인도산 립그로스인 '립밤'을 샀는데 그래도 시간이 남았다. 남은 시간동안 가 볼 만한 곳으로 [Garden of dreams]로 정하고 찾아나서니 타멜쵸크를 지나 왕궁 쪽으로 방향을 잡자마자 바로 그곳이었다.

높은 담으로 둘러싸진 '꿈의 궁전'은 카트만두 시내를 처음 걸었을 때 이미 그 앞을 지나갔던 곳이었다. 까페와 레스토랑이 있는 작은 공원 정도로 생각하고 들어선 '꿈의 궁전'은 군인인지 경찰인지 정복차림의 근무자가 있고 입장료를 받고 있었다. 매표소를 지나 궁전안으로 들어서니 '꿈의 궁전'은 네팔과는 다른 그리스 로마 시대의 정원인양 서구적 형태의 건축물과 조경으로 꾸며진 대저택으로 보였다. 나눠준 안내문을 보니[꿈의 궁전]은 1920년대 쯤 한 장군의 사저로 지어졌다가 그의 실각으로 방치된 뒤 정부에 귀속되었다고 했다. 그 뒤 호주정부의 지원으로 원래 규모의 절반정도로 복원된뒤 네팔 정부 문부성 관리하에 유료 공원으로 개방하고 있다고 했다.

'꿈의 궁전'은 카트만두의 연장이 아니라 철저히 단절된 서구적 공간으로 다가왔다. 건축물은 물론이고 너른 정원, 정원에 깔린 잔디, 아름다운 조경수들, 장미덩쿨, 분수와 파고라, 벤치등 모든 것이 서구적 조형미를 띠고 있었는데 신기하게도 카트만두 시내 한 복판에 있는 공간이 고요하기기까지 했다. 어느 것 하나 카트만두스러운 점이라곤 없는 '꿈의 정원'이지만 다행히 정원을 노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네팔리였다. 사실 '꿈의 궁전'은 카트만두를 찾고 안나푸르나나 에베레스트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찾기에는 뭔가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서구적 멋을 한껏 낸 정원이지만 서구인이 혹하기에는 뭔가 부족했다. 적어도 네팔을 찾는 서구인 대부분은 특히나 더욱 네팔스러운 것들을 찾아 나설 것이기 때문이다. 정원 구석구석의 벤치에는 청춘 남녀들이 뜨겁게 포옹을 하고 사랑을 속삭이고 있었고 우리는 그 사이를 지나 정원을 한바퀴 돌고 못들어진 야외 까페에서 커피를 마셨다. 해가 떨어지는 카트만두의 별천지 '꿈의 정원'에서 커피 향에 취해 지난 여정을 되돌아보고 내일이면 돌아가야 될 한국에서의 생활을 가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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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안한 잠을 푹잤다. 눈은 일찍 떴지만 잠은 충분했다. 남은 경비를 계산해 보고 필요한 선물목록을 만들고, 남은 일정을 살펴보고 일어나 세수를 하고 전날 사둔 빵으로 아침을 떼우고도  7시가 되지 않았다. 다시 침낭속으로 들어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 '바가바드기타'를 읽었다. 브라만과 아트만, 그리고 현신인의 이야기들, 행동하지도 느끼지도 않는 경지, 절대지... 아침부터 머리가 지끈 거렸다.

8시 30분 더이상 견디지 못하고 숙소를 나왔다. 타멜 거리를 벗어나 오늘 목적지인 세계문화 유산에 등제된 박타푸르행 버스파크를 향해 길을 더듬어 나갔다. 하지만 지도와 실제를 일치시키기엔 지도는 너무 단순했고 길은 너무 복잡했다. 한참을 걷다가 출근중인 행인에게 길을 묻고 우리 위치를 확인해보니 우리는 반대 방향으로 걸어 버스파크에서 더 멀어져 있었다. 박다푸르행 버스 파크는 타멜에서 걸어가도 될 만치 가까운 곳이었는데, 아침부터 지치기 싫어 결국 택시를 타고 버스 파크에 도착했다. 버스를 타고 가다 개통한지 얼마되지 않는 멋진 도로를 달렸다. 네팔와서 한번도 보지 못한 신호등까지 설치되어 있는 도로 곳곳에는 일본의 원조로 만들어졌음을 알리는 안내 간판이 있었다. 버스를 탄지 30여분 지나 박타푸르에 도착했다. 한 사람당 15달러나 하는 비싼 입장료 때문에 잠시 망설였지만 그냥 포기하기엔 너무 아쉬웠다.

막상 박타푸르 구역안으로 들어서니 박다푸르가 왜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고 입장료가 그만치 비싼지 금방 공감이 되었다. 지금은 사라져버린 옛왕국의 영화를 느끼면서 살아있는 문화 유산사이를 걸었다. 박다푸르 구역내의 모든 건물은 대부분 붉은 벽돌로 지어진 2백년이상된 건물들이지만 여전히 사람이 살고 있었다. 전시용 으로 만든 '민속촌'이거나 거주민이 없이 보전되고 있는 박제화된 유적지가 아니라 그대로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시가지 자체가 그냥 살아있는 문화유산이었다. 카트만두 시내에서 만난 아산바자르의 골목에서 보았던 낡은 건물의 때묻고 썩고 삯은 문지방, 갈라진 벽돌 그리고 골목을 넘쳐나는 쓰레기와 가난한 네팔리의 삶은 지금은 사라진 네팔의 옛 영화를 증명하기에 조금은 부족해 보였다. 하지만 박타푸르에 들어서자 여전히 가난한 사람들의 삶이 가감없이 드러나는 중에도 밀집한 적벽돌 건물과 사원, 탑과 길을 덮은 붉은 벽돌의 화려한 문양 등이 지금은 떼가 타고 낡고 삯았지만, 한 때 이 왕국이 얼마나 번창했고 아름답고 위대한 문명을 자랑했는지 쉬 느낄 수 있었다.

아침 일찍 박다푸르를 찾은 덕분에 우리가 도착했을 때 구역내에는 관광객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다행히 관광지가 아니라 주민들의 삶의 터전인 박타푸르의 모습을 느낄 수 있어 오히려 좋았다. 등교하는 학생들과 출근중인 주민들의 분주한 발걸음으로 고색창연한 박다푸르는 삶의 훈기가 돌고 생동감이 넘쳐났다. 오늘 하루 다른 일정은 전혀 잡혀있지 않았고 오직 박다푸르만 보고 느끼고 걸으면 되었기 때문에 출근길에 바쁜 네팔리 사이로 너긋하니 골목과 광장을 오가며 박다푸르의 과거와 현재를 소요했다. 골목 모퉁이에 차려진 구멍가게의 물건들을 살피고, 시골장터같은 골목을 지나면서는 우리 역시 장보러 나온 사람마냥 네팔리와 휩쓸려 난전을 두루 살폈다.

 

시간이 지나고 하나둘 관광객의 발길이 늘어나자 우리는 다시 그들과 어우려져 관광객의 눈으로 다시 박다푸르를 보기 시작했다. 같이 광장을 가로지르며 탑과 석조 조형물을 배경으로 사진도 찍고, 군인들이 경비중인 흰두사원을 이교도가 들어갈 수 있는 지점까지 들어가도 보고, 박다푸르의 과거와 현대의 예술작품이 동시에 전시되어 있는 박물관도 들렀다. 광장은 점점 더 관광객의 발길이 늘어났지만 의외로 박물관 안은 한적했다. 사실 박물관 안에 전시된 작품보다 박물관 바같에서 만날 수 있는 네팔리의 삶과 삶을 이어가는 공간, 그리고 삶이 묻어나는 각가지 생활용품, 장식 등이 더 예술적이라서 굳이 박물관에 입장료를 내고 들어올 필요가 없는지도 물랐다. 박물관에 전시된 작품보다 전시공간이 된 건물이 더 멋있는 박물관을 나왔다. 광장을 내려다볼 수 있는 탑에 올라 박타푸르 광장들을 쓸고 지나가는 관광객과 네팔리의 걸음속에 묻어나는 박다푸르의 옛 향기를 맡고, 현재의 삶을 느끼고, 그 미래를 점쳤다.  

박다푸르의 중심 듀발스퀘어에 이르자 수년전 아내가 네팔 여정중에 잠시 들렀지만 정확히 기억해 내지 못해 안타까워했던 네팔의 사원을 회상해 내었다. 분명 카트만두 어디 전통 시장 같은 곳이었다며 카트만두에 도착하자 마자 이야기를 꺼냈지만 아산바자르와 타멜을 포함해 카트만두 시내를 다 뒤지고도 찾아 내지 못한 추억의 장소를 박타푸르에 와서 확인하게 되었다. Cafe Nyatapola! 듀발스퀘어 한켠에 자리잡고 있는 3층 짜리 낡은 목조건물로 바로 그 카페가 아내와 여성문화계 선배 동료들과 함께 티벳을 거쳐 잠시 네팔에 들렀을 때 차를 마시며 네팔의 향기를 느껴볼 수 있었던 곳이었다. 배도 출출해지고 다리고 지쳐갈 즈음 Cafe Nyatapola에 들어섰다. 제일 위층 듀발스퀘어 전체가 내려다 보이는 모퉁이에 자리에 잡아 간단한 샌드위치를 들고 커피를 마셨다. 이제 한가롭게 차라도 마시는 시간이면나의 가슴에는 여행의 설레임보다 끝나가는 여정에 대한 아쉬움이 차올랐다. 다 지나가리다. 하지만 세상의 섭리가 어그러지는 숱한 순간들이 있었듯 내 작은 삶을 이루는 지금의 시간도 잠시 잠깐이나마 흐름을 멈춘다면 얼마나 좋을까...

박타푸를를 빠져나와 타멜행 버스에 올랐다. 버스는 곧바로 카트만두로 접어들었고 트리뷰반 공항을 스쳐지나갔다. 카트만두-박다푸르간 새길을 따라 번화가를 달리자 건물외벽에 늘어선 간판과 광고판이 눈에 들어왔다. 익숙한 삼성과 엘지같은 한국기업은 물론 코카콜라, 소니같은 세계적 자본의 간판이 즐비했다. 척박한 땅 네팔에서도 자본은 자신의 지배 공간을 확장하며 무한 증식을 계속하고 있었다. 익숙한 세계적 자본의 광보판보다 더 인상적인 것은 어학학원을 홍보하는 플랭카드였다. 네팔은 편집광처럼 영어 공부에 몰빵하는 한국보다도 어쩌면 더 외국어 공부에 자신의 미래를 거는 사람이 많은지도 몰랐다. 대부분의 초등학교에서 외국어를 가리키고 아예 '외국어 초등학교'까지 있는 모양이었다. 외국어를 배워 외국으로 나가 돈을 벌고 자신의 꿈을 실현하는 기회를 잡거나, 네팔에 남아서도 관광을 위시한 비지니스에 외국어가 필수적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런지 아니면 영어와 네팔어의 구조적 유사성 때문인지 초급 교육을 받은 정도면 다 영어를 어느정도 구사한다고 했고 실제로 만나보니 그런것 같았다. 대학나온 한국사람보다 초등학교만 나온 네팔사람들이 영어를 더 잘 하는것 같았다.

그런데 학원 안내 플랭카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드러나듯 몇년전부터 네팔에는 한국어 붐이 일어났다고 했다. 한국은 그들에게 기회의 땅이고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고 했다. 네팔리에게 물어보니 일본을 더 선망하지만 일본은 현실적으로 들어가 일자리를 덛기가 너무 힘들고 두번째로 한국을 선호하는데 한국은 자신만 잘하면 들어가 일을 구할 수 있는 현실적으로 실현 가능한 나라로 여긴다고 했다. 그러다보니 최근에는 한국어가 제일 인기있는 외국어가 되었다고 했고, 역시 여행중에 가이드든 포터든 지나는 사람들이건 우리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이야기하면 자가와 말을 걸고 자신이 아는 두어마디의 한국어를 자랑하기도 했다. 박타푸르를 나와 카트만두거리를 달리면서 한국 자본의 힘을 느껴야 하는 이율배반적인 묘한 감정을 안고 타멜에 도착했다.

인드라쵸크, 아산바자르 그리고 타멜거리를 배회하다 다시 J.Vill을 찾아나섰다. 다행히 안나푸르나 라운드 때 차메에서 만났던 한국학생들을 만났다. 참체에서 포카라로 먼저 떠난 학생들은 반디푸르에서 머물다 오늘 카트만두에 들어왔다며 J.Vill의 위치를 알고 있었다. 드디어 파샹을 상봉했다. 혹시라도 카트만두에서 만나 맛있는거 사먹자고 한 약속이 빈말이 될까봐 걱정했었는데 다행히 파샹을 만나게 되어 너무 기뻤다. 파샹과 청량음료와 피자를 먹고 파샹의 소개로 자신의 친구가 운영한다는 '캐시미르 샾'에 들러 야크와 야생 염소의 속털로 만들었다는 머플러를 구입하고 파샹의 삼촌이 운영한다는 여행사에 들러 인사를 나누었다. 파샹까지 봤으니 마음에 남을 일들이 다 다 끝나 마음도 편해졌다. 해도 저물어 숙소에 들러 구입한 선물을 내려놓고 '경복궁'이라는 한식당에 들러 맛있는 된장찌게를 먹었다. 그리고 내일의 여정을 그리며 '네팔짱'의 두번째 밤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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