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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16일 찦차를 대절해 갈리수와르를 출발 베니와 바글룽을 거쳐 포카라에 도착하여 숙소를 정하고, 다음날 티벳 난민촌 등 포카라를 둘러보고, 2월18일 자가담바 버스를 타고 근 한달만에 카트만두로 돌아왔다.

 

 

 

갈리수와르의 아침이 밝아오자 전날 갑론을박 끝에 예약한 짚차가 도착했다. 베니와 바글룽을 거쳐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트랙이 시작되는 나야풀을 지나 포카라까지 우리를 싣어줄 찦차는 출발했다. 대절비는 6000루피로 정했다. 짚차는 출발한지 10분도 안되어 베니라는 도시에 진입했다. 교통의 중심도시로 알려져 있는 베니는 역시 넓은 버스파크에 많은 차들이 몰려 있었다. 그런데 우리가 탄 찦은 무슨 이유에선지 바로 갈 길로 들어서지 않고 베니 시내로 들어가 몇 곳을 들러 짐을 싣기도 하고 사람을 만나기도 하며 시간을 지체했다. 아침 일찍 출발해야지만 베니로 돌아오는 손님을 싣을 수 있다고 새벽 출발을 종용하던 가이드의 주장이 무색할 정도였다. 아마도 기사는 포카라로 가는 김에 지인들의 소소한 부탁을 받아 해결하려는 것 같았다. 차를 대절한 우리의 입장에서는 클레임을 걸 수있는 상황인데도 기사가 우리에게 양해를 구하지도 않았고 하다못해 가이드의 상황설명도 없었다. 네팔이기 때문일까. 이런 상황에서도 기사가 매너가 없다거나 부당하게 우리의 시간을 빼앗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차라리 네팔사람들은 참 관대하고 느긋하다는 느낌을 주었다. 네팔리들은 우리를 기다리게 했지만 자신들도 아무 꺼리낌 없이 늘 웃으면서 남을 기다려주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땅을 밟아보지도 못한 베니에 대한 인상을 아무 것도 남기지 못하고 칼리간다끼를 건넌 찦은 달리기 시작했다. 베니를 출발한 뒤 오른쪽으로 강을 끼고 30여분을 달렸을까, 차는 포카라-바글룽 하이웨이를 벗어나 우회전을 해서 다리를 건너 다시 우회전을 해서 바글룽으로 향했다. 바글룽 역시 아무런 사전 준비없이 방문하게 된 도시다.  가이드는 흰두사원을 추천했고 나는 덧붙여 바글룽 시가지를 차로 한바퀴 돌아 겉할기라도 해보자는 제안을 덧붙였다. 가이드의 설명으로는 바글룽 사원은 오전 특정시간까지만 비흰두인에게 개방되기때문에 시간에 늦지 않게 도착해야 된다고 갈리수와르에서 출발할 때, 그리고 베니를 떠나 바글룽으로 향하는 중에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정작 베니에서 찦의 기사가 시간을 허비할 때는 아무 소리도 하지 않았다. 우리가 사원에 도착했을 때는 비흰두교도에게는 이른 아침에만 개방된다는 가이드의 설명과 무관하게 사원의 문은 우리에게 활짝 열려 있었다. 

 

이전에 닥신칼리의 사원과 전날 갈리수와르에 이어 바글룽의 Kalika Bhagwati Temple은 세번째 방문한 흰두사원이었다. 흰두교에 대한 사전 지식이 없는 상태로 들른 흰두 사원은 붉은색 장식이 많아 전체적으로 화려한 색감이지만 무서운 신상이 많고 특히 염소 등을 제물로 받치는 장면을 목격하거나  그 흔적을 볼 때는 소름끼치고 혐오스럽기도 했다. 아주 옛날에는 많은 종교가 사람을 제물로 바쳤고 세월이 지나면서 동물로 대체되다가 마지막에는 돈이 제물을 대신하는 과정을 겪었다면 힌두교는 아마도 동물을 번죄하는 단계에 머물러 있는지도 몰랐다. 물론 힌두교가 가장 오래되고 포용적이고 풍부한 종교의 하나라는 사실을 부인할 순 없지만 아직 산 동물을 재물로 바치는 의례는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이 날도 애초로운 눈빛으로 울어대던 어린 염소가 가차없이 목이 잘리고 그 피를 뿌리는 제례가 진행되었지만 지금까지 방문한 3힌두사원중 가장 오래 머물며 꼼꼼이 둘러보고 줄을 서서 이마에 티카를 찍고 예배까지 올렸다.        

 

바글룽 시내를 한바퀴 돈뒤 그냥 아무것도 안하고 스쳐 지나가기에 아쉬워 찦을 내려 음료수를 사서 한병씩 돌렸다.  음료수를 마시고 차는 바로 바글룽을 나와 강을 건너고 조금 전 벗어났던 바글룽-포카라 하이웨이를 다시 올라탔다. 편한 길을 따라 평화로운 마을을 지나고 어디라도 내려서 걸어도 좋을 아름다운 풍경 속을 차는 달렸다.  풍경 하나하나가 그냥 스쳐지나가 내 기억속에 머물지 못하고 사라져갈 것을 생각하니 이 모든 것이 아쉬움을 넘어 슬프게 느껴졌다. 어떤 장소 어떤 순간에도 머물 수 없고 오직 확실한 것은 바로 이 순간이라는 섭리가 애닯펐다. 안나푸르나 라운드가 끝나가는 시간 아쉬움과 서글픔이 내 마음에 차올랐다.

 

이미 익숙해진 안나푸르나베이스캠프 코스의 출발점인 나야풀을 지나 길가 식당에 차를 세운뒤 기사는 식사를 하지 못했다며 식당안으로 사라졌다. 네팔사람들은 아침겸 점심을 오전 10시경 먹는 생활습관을 가지고 있는데 그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덕분에 안나푸르나 라운드가 완전히 끝내기 직전 차를 내려 네팔의 산과 들, 안나푸르나 기슭의 삶의 터전을 다시 한번 느껴볼 수 있었다. 가난 속에서 아름답게 지켜온 네팔리들의 삶의 온기와 긍지를 안나푸르나를 통해 다시금 반추했다.  

 

근 40일만에 포카라로 돌아왔다. 그동안 카트만두 인근 도시를 주유하고 안나푸르나를 한바퀴 돌았다. 다시 돌아온 포카라는 초록이 더 짙어졌고, 날은 더 더워져 있었다. 두 가이드와 4명의 트레커는 식당을 찾아 점심을 나누고 바수에게 약속했던 선글라스를 선물했다. 가이드하고는 카트만두서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고 헤어졌다. 그리고 숙소를 찾아 잠깐 거리를 헤멘뒤 이쁜 정원이 달린 값싼 숙소에 짐을 풀었다. 온수가 나오고 와이파이가 되면서 이쁜 정원이 딸린 [Hotel Elia]에서 하루에 1000루피, 우리 돈으로 만원정도에 방을 얻었다. 우리에겐 충분한 시설이였고, 여행자의 거리인 레이크사이드에 접해있으면서도 조금은 덜 번잡한 거리여서 모든게 마음에 들었다. 짐을 풀자마자 M과 나는 호텔을 나서서 이발소를 들렀다. 바로 호텔과 붙어있는 작은 이발관이었다.  한국 떠난뒤 거의 두달만에  산적머리가 되어버렸는데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좀 깔끔해지고 싶었다. "Only hair cut, please!"를 외치고 비몽사몽간에 이발을 마치자 "Ok!"를 몇번이나 반복해서 외쳤던 이발사는 컷트비, 안면 마사지비, 안마비, 두피마사지비, 세발비 등등을 붙여 무려 두사람 이발비로 6000루피 가량을 요구했다. 잠깐 실랑이를 벌이다 요구를 거의 다 들어주고 나왔는데, 혼자서 쇼핑 갖다가 뒤늦게 이발소를 들렀던 D역시 엄청난 바가지를 쓰고 왔다. 우리는 이날 포카라판  "3얼간이"를 찍었다며 스스로를 위무했다. 그날 이후 포카라를 떠날 때까지 몇번을 더 마주친 이발사는 우리에게 반가운 인사를 보냈지만 우리는 그를 마주치는 것이 너무 싫었다.  나쁜 기억을 빨리 잊고 싶은데 그 이발사에게 너무나 즐거운 기억이었을 것이 틀림 없었다.  '낮술'에서 저녁을 먹으며 포카라의 밤을 맞았다. 

 

2월 17일 아침 게으른 잠에서 깨어나 샤워를 하고 호텔인근의 식당에서 아침을 해결한뒤, 와이프는 호텔에서 스케치나 하면서 쉬겠다고 남고, 남자 3명이서 Tashi Palkhel  티벳 난민촌을 찾아 길을 나섰다. '할란촉'에서 '제로킬로미터'라는 지명의 교차로에 이르고 거기서 다시 버스를 갈아타고 전날 포카라로 돌아올때 달렸던 길을 바글룽 쪽으로 되돌아갔다. 버스가 포카라 시가지를 벗어날 즈음에 왼쪽 언덕위에 룽다와 타르초가 휘날렸다. 우리와 닮은 사람들이 사는 타시팔켈 티벳난민촌에 도착했다. 같은 몽골계라서 그런지 티벳탄을 만날 때 마다 꼭 어릴 때 동네에서 부댓기며 살아가던 이웃을 떠올리게 된다, 지나간 시절의 이웃 아저씨나 삼촌같은 사람들을 다시 만날 수 있는 타시 팔켈 티벳난민촌은 조용했다. 골목을 뒤덮은 고요와 한적함이 현실감을 줄였고 꼭 타임머신을 타고 50년전 어린시절로 되돌아온듯 몽롱했다. 골동품가게가 있고 기념품을 팔고 있는 노점상들이 있었지만 방문객이라고는 우리밖에 없었다. 마을을 돌기전에 먼저 식당에 들러 물소고기를 듬뿍 넣은 뚝바를 먹으며 삶의 현실감을 되찾았다. 

 

식당을 나오자마자 마을입구에 있는 골동품 가게를 들러 작은 기념품을 사고 D로부터 멋진 골동품 주전자를 선물로 받았다. 가지고 싶은 것은 많았지만 소유의 덪없음을 깨우쳐주는 사찰입구에서 욕심을 다 채울 수는 없었다. 마을을 둘러보고 캠프촌과 사원 그리고 멀리 포카라 변두리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위 뷰포인트까지 올랐다. 그리고 골목길을 따라 내려와 사랑곳에서 짚라인이 이어지는 "Hemja 번지점프"를 지나 또다른 불교 사원을 들렀다. 사원은 확장 공사중이었고 아마도 승려 부속학교를 운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무렇지도 않게 낯선 사람이 들고 나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이들의 무경계심이 불교의 탓인지 네팔리의 심성  탓인지는 알수 없었다.  참 신기하게도 가는 곳마다 네팔리들은 사람에 대한 경계심을 드러내는 경우를 본적이 없었다. 

 

티벳 불교 사원과 고향을 떠난 이국에서 난민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모여사는 난민촌 골목길을 걷던 3명의 일행은 각자의 상념에 빠져 길을 잃었고 모두 흩어지고 말았다. 우여곡절끝에 나는 M과 만났지만 결국 D는 합류하지 못했다. 리버사이드로 돌아오가는 버스라고 올랐지만 몇정거장 못가서 내리게 되고 다시 한참을 걸어 '제로킬로미터'라는 거리에 가서야 겨우 리버사이드를 가는 버스에 오를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혹시 한국인이냐며 물어온 한국에서 일한 적이 있다는 네팔리를 만나 친절한 안내를 받기도 했다. 어렵게 돌아온 호텔에 길잃은 D 마저 돌아오자 지난 달 친구들과 안나푸르나를 걸을 때 신세졌던 가이드 라마님과 연락이 닿았다. 오랜만에 만나 나는 늘 궁금한 것이 많은 네팔의 삶에 대해 물었지만 한국에서 노동자로 오래 근무한 적이 있는 라마는 늘 한국의 삶과 '사업'에 대해 궁금한 것이 더 많았다. 지난 여정을 함께한 모두 '산마루식당'에 둘러 앉아 행복한 포카라의 마지막 밤을 만끽했다. 

 

카트만두로 돌아가는 날 아침 일찍 잠을 깼다. 전날 라마를 통해 예약해둔 자가담바 버스를 타기위해 짐을 끌고 할란촉으로 나갔다. 7시에 온다던 버스는 오지 않고 아침마다 지고다니며 이른 출근객과 여행객을 대상으로 파는 거리의 빵으로 아침을 떼우고 있자니 예정시간을 30분이나 지나서 버스는 도착했다. 그나마 안도하며 버스에 올라 조용히 창가를 통해 물러나는 포카라의 거리를, 리버사이드와 댐사이드의 지난 여정의 흔적을 드듬었다. 이제 그리움으로 변해버릴 포카라에서의 기억들을 곱씹으며 하루종일 버스는 포카라-카트만두간 프리씨비 고속도로를 달렸다. 차창을 쓰쳐 뒤로 물러나는 풍경들이 초등학교 졸업 앨범의 가슴시린 사진마냥 어렴풋한 기억으로 나의 뇌리에 쌓여갔다.  

 

 

돌아온 카트만두의 숙소 마야거르츄는 여전했다. 내일이면 산으로 떠난다는 사람들이 있고. 아침에 산으로 떠났다는 사람들의 이야기와 온기가 남아 있었다. 우리는 슬그머니 마야거르츄의 원주민인양 스며들어 그들과 자연스레 하나가 되었다.  우리가 없는 사이 다른 많은 사람들이 마야거르츄를 들러고 그리고 안나푸르나나 랑탕, 그리고 히말라야를 거친뒤 다른 사람이 되어 돌아와 다시 머문뒤 한국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우리는 산전수전 다 겪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마야거르츄에 돌아왔지만 안나푸르나로 떠나기 전의 자신과 달라진게 아무것도 없음을 애써  자각하지 못한듯 안타까워하지도 부끄러워하지도 않은채 편한 표정으로 세상을 마주했다. 

 

 

오랜만에 돌아온 카트만두의 첫날도 타멜거리로 나갔다.  특별히 할 일도 목적지도 없이 타멜의 거리를 걷고 이런 저런 가게를 들러  기념품을 샀지만 네팔에서 제일 유명하다는 서점인 pilgrim bookstore에서 두권의 책과 몇가지 기념품을 샀다. 여정이 끝나고 귀국하고 나면  네팔의 마오주의 혁명사를 다룬 [The Bullet and The Ballot Box]와 네팔의 역사를 간략하게 정리한 [The History of Nepal]을 틈틈히 읽으며 네팔에서 보낸 나의 시간들을 반추할 것이다. 저녁은 타멜거리의 블랙올리브에서 성찬으로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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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월13일 포카라를 떠나 카트만두에 도착, 14일 타멜과 박타푸르를 주유하다 15일 일행들은 모두 한국으로 출국하고 우리 부부만 덩그러니 남아 새로운 여행을 시작하다.

네팔 최고급 버스라는 자가담바를 타고 포카라 카투만두간 트리뷰반 하이웨이를 하루종일 달렸다. 예상 시간 7시간이라고 하지만 예상은 그냥 예상일 뿐이었다. 버스가 겨우 카트만두로 들어서는 마지막 고갯길을 넘어설 무렵 출발한지 9시간이 다되어 가고 있었다. 긴 시간이지만 버스는 아늑했고 길은 편안했다. 일반 마이크로버스 같은 난폭운전도 없었고 스튜어디스의 서비스도 지루함을 줄이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푹신한 좌석에 깊게 앉아 따사로운 햇살을 받으며 지난밤 꾸었던 지독한 꿈을 회상했다.

늘 반복되는 꿈이지만 세월이 가도 공포는 줄지 않았다. 나의 악몽은 늘 30살 전후에 멈춰. 대학원생의 신분이지만 학문을 계속할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다른 삶의 전망도 없고, 결혼은 하고 아이까지 있는 상황에서 먹고살 방도도 없는데 목을 죄는 수업의 하중은 날로 더해가는그때로 나는 다시 돌아간다.  꿈 속에서는 늘 나는 나를 확신하지 못한다. 과외를 할려고하지만 내가 가르칠수 있을까 영어는 원래 못하고 수학은 다 잊어버렸는데 어떻게하지 가슴졸인다 이어진 꿈에서 리포터를 제출해야하는데, 졸업논문을 작성해야하는데, 공부를 해야하는데 마냥 식은 땀을 흘리며 쫒기게 된다. 그리고 장면이 바뀌어 과사무실엘 갔는데 갑자기 내가 학생인지 확신이 들지 않고 졸업식장을 갔는데 내가 졸업생이 맞는지 학점은 다 땄는지 확신이 들지 않아 당황하며 잠을 깼다. 늘 반복된 꿈이지만 사랑곳까지 와서 같은 꿈을 꾸고 식은땀을 흘리며 선잠을 깨고나니 기분이 착잡했다. 힘들었던 그 시기를 지나온지 25년이 넘었는데 나의 무의식은 아직 그 시절에 사로 잡혀 있는걸까 알 수 없었다.

버스가 카트만두로 들어서는 검문소를 지나자 시커면 흙먼지가 거리를 휩쓸고 버스를 덮쳤다. 창틈으로 스민 먼지에 이내 목은 칼칼해지고 뿌연 흙먼지가 온몸에 달라붙었다. 도로는 온통 공사 중이었고, 비가 내린 기억조차 없는 건기다 보니 한순간 앞이 아무 것도 보이지 않을 만치 두터운 먼지가 거리를 덮고 있는데다 심각한 교통체증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카트만두에 들어선지 한시간이 훨씬 넘어 종점인 안나푸르나 호텔 마당에 도착했다. 카트만두 뷰띠끄호텔에 메일로 픽업을 부탁해놓은 택시와 룸보이 빔센이 우리를 맞았다. 교통체증으로 정확히 예정시간 3시간을 넘겨 우리가 도착했는데 기사는 그 3시간 동안 우리를 기다렸다고 했다. 불평이라기보다는 아무렇지도 않은 사실을 단지 알리는 표정이 더 당혹스러웠다. 혹시 우리만 손님으로 받아도 오후 벌이로 충분하다고 받아들이는 건지 묻고 싶었지만 감히 묻지 못했다. 어떤 경우도쫒기지 않는 것 같은 시간에 여유롭고 관대한 네팔인의 품성이 부러웠다.  모처럼 숙소 인근의 마은틴스테이크하우스에서 저녁을 먹고 아까운 저녁시간을 잠으로 채웠다.

일행의 출국을 앞두고 온전히 남은 카트만두의 마지막 하루를 시작하면서 정확히 어떻게 보낼 것인지 계획하지 못했다. 호텔을 나와 타멜 거리거리를 걷고 쇼핑도 하고 그리고도 시간이 남아 논의 끝에 박타푸르를 향했다. 일행들은 이미 여행 초기에 파수파티나트와 보드낫을 다녀왔기 때문에 남은 반나절을 값지게 보내기에 박타푸르만한 곳이 없었다. 라트나 버스파크에서 버스를 타고 30분이 채 지나지 않아 박타푸르에 도착했다. 박타푸르는 지난 2015년 4월 25일 대지진으로 엄청난 타격을 받았다는데 그 상처가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일부 건물은 흔적없이 무너져 내렸고, 골목몰목의 건물들 조차 긴 막대와 대나무로 아슬아슬하게 받쳐져있는 경우가 많았다. 불안해서 어떻게 저기에 살까 걱정되었지만 마땅한 대안이 없는 상황에서 주민들은 위험을 감내할 수 밖에 없는 처지같았다.

박타푸르는 카트만두와 파탄과 더불어 카트만두벨리의 3대왕국의 하나로 17세기 후반 조성된 왕국이라고했다. 순례자의 도시를 의미하며 BHADGAON이라고도 불리는 박타푸르는 다른 왕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개발이 덜되어 온전히 중세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듀바르 광장을 지나 지명도 모르고 어디로 이어지는 지도 모르는 골목길을 헤메기 시작했다. 도자기가마터도 지나고 여러가지 야채를 파는 노점상들이 늘어서 있는 골목도 지나 눈에 익은 Nyatapola 탑에 이르렀다. 그 자체가 하나의 사원이고 그앞쪽 마당에 같은 이름의 카페에서 5년전 차를 마시던 기억이 새로웠다.

광장과 사원으로 어우러진 구역을 서쪽으로 나와 인공호수 근처에 이르자 많은 인파들의 북적되고 음악소리가 들려왔다. 소리와 풍경을 쫒아 학교 운동장 같은 곳을 드러서니 수십명의 아이들이 가사를 입고 무슨 예식을 하고 있었다. 어쩌면 저 가사를 입은 아이들이 승려가 되는 예식을 올리는 그런 자리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행사는 그리 엄숙해 보이지 않았고 조금은 분주하고 소란스러웠다. 10여명으로 구성된 팀들이 나와 노래를 부르고 의상이 달라 꼭 부족을 달리하는 것같이 보이는 다른 팀이 이어서 노래를 불렀다. 한쪽에 늘어놓은 게시판 같은 것에는 기부금으로 보이는 목록을 적어놓기도 했고 마당 한켠에는 손수건 모양의 여러색갈의 천을 가지런히 늘어놓고 참가자들끼리 음식을 나누고 있었다. 영문을 몰라 휘둥그래한 눈으로 인파들 사이를 헤메다 카트만두로 돌아가기 위해 버스파크를 찾았다. 박타푸르를 떠나려는 우리 눈앞에 갑자기 전통밴드가 지나가고 신상을 앞세운 행진이 이어졌다. 타악기 중심의 거친주는 애조와 더불어 신령한 서정을 선물했다.  가락과 풍광에 매혹되어 행렬의 끝이 사라질 때까지 넋을놓았다.

 

 

 

카트만두로 돌아오니 라트나 버스파크에서 타멜로 이어지는 거리의 공터에는 수천명의 궁중이 모여 있고 길은 인파로 넘쳐났다. 무슨 정치 집회인지 축제인지를 끝내 물어보지도 못한 채 우리는 군중들의 파도에 휩쓸려 가까스레 타멜로 돌아왔다. 그런데 돌아오는 길에 카트만두 광장 인근에서 와이프를 잊어버렸다. 입장료를 10불이나 내야되는 구역인데 와이프는 현지주민같은 자연스런 걸음으로 무사통과를 해 버렸고 우리 일행은 쫒아들어가기 위해서는 입장료를 내야하는 상황이 되어 그냥 연락을 시도해서 다른 곳에서 만나는게 낮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일행들이 선물을 사러 돌아다니는 사이 나는 와이파이가 되는 까페에 들어가 와이프랑 연결을 시도했다.  연결은 되다가 말다가 불완전했지만 겨우겨우 최소한의 의사소통은 될 수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일행들은 먼저 네와르 음식 전문점이면서 문화공연도 하는 유명하다는 Nepali Chulo로 향했다. 일행들에겐 오늘이 네팔에서의 마지막 밤이다 보니 특별한 이벤트가 필요했다. Nepali Chulo는 여러군데 묻고 정보를 얻어 가장 고급스런 네팔전통식당으로 알고 선택했다. 먼저 도착한 일행들의 가슴을 졸인 끝에 와이프는 릭샤를 타고 도착했고 공연과 식사를 진행했다. 하지만 네팔물가를 고려할 때 엄청나게 비싼 식사임에도 불구하고 공연은 평범했고, 음식은 기대 이하였다. 나름대로 고급스런 식당건물이 음식값을 부풀려놓은 것으로 밖에 이해되지 않았지만 네팔에서의 마지막 만찬은 조금은 억울하게 끝이 났다.

 

 

15일 친구들은 트리뷰반 공항을 통해 출국하고 우리부부는 왠지 모를 허기를 느꼈다. 당장 내일부터 우리 부부 단독의 여정을 이어갈 예정이라 조금은 홀가분하고 들떠야할 것 같아지만 기분은 한없이 가라앉았다. 기분전환을 위해 호텔을 나섰고 네팔민속박물관을 찾아 나라얀히티왕궁앞의 더바마그 거리를 걸었다. 지도에는 나와있는 민속박물관은  찾지 못하고 인근에서 옥류관이라는 북한식당을 우연히 맞딱뜨렸다. 반가운 마음에 식당을 들어섰는데 우리를 맞는 여성 종업원의 눈길은 곱지 않았다. 주관적인 느낌일까 의아했지만 최대한 편하게 마음을 먹고 음식을 주문했다. 음식에 대해서는 인상적이지 않았지만 식당의 분위기는 오랫동안 뇌리에 남을 것 같았다. 왠지 모를 서먹함과 낯설음이 현지 네팔리 식당보다 더한 느낌이 들었다. 찾지 못한 민속박물관의 위치를 물어보니 네팔산지가 3년이 된다는 종업원은 알지 못한다고 답변했다. 그리고 무엇인가 물어볼까봐 미리 경계하는 듯한 눈빛이 가슴아팠다. 정치 체제의 차이가 같은 한족사이에서도 이리 정서적 벽을 세울 수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지난 보름을 같이 했던 일행들이 떠난 타멜거리를 걸으며 저녁을 맞았다.  5명의 일행이 떠나간 타멜은 갑자기 텅 비어보였다. 나에게는 네팔 여정을 같이 하기 전의 친구는 네팔 여행을 같이한 뒤의 친구와 같은 사람일 수 없었다.  나는 그들과 평생 네팔의 추억을 나누고 의지하며 살아갈 사람으로 새로운 인연을 시작하게 된지도 몰랐다. 그래서 기뻐야했고, 마음 따뜻해야했다. 그런데 쓸쓸함이 밀려오고 걸음은 허전해졌다. 조금은 고급스런 저녁으로 스스로를 위무하고 일찍 들어온 호텔에서 남은 한달 반의 여정을 계획하며 얉은 잠을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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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라도 할 것 없이 새벽 일찍부터 눈이 떴는지 호텔이 분주했다.  호텔서 제공하는 간단한 토스트로 아침을 때우고 나니 이내 부탁한 택시가 도착했다. 2박을 한 팀들은 벌써 매니저와 룸보이랑 몇 년을 알고 지낸 사람들처럼 오래 작별인사를 나누고 팁을 아끼지 않았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이 왜 그리 많을까 늘 의심하고 삶의 크기를 줄이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로만 이루어진 9명의 팀이지만 짐은 만만하지 않았다. 룸보이의 도움까지 받아가며 9개의 중대형 배낭과 또 그에 못지않은 소형 배낭 그리고 손가방까지 다 모아놓으니 한 트럭분은 되어 보였다. 두 대의 택시에 나눠 빈병 물 채우듯 빈틈없이 짐과 사람을 구겨 넣으니 그래도 숨 쉴 공간은 남았다

네팔 최고의 버스라는 포카라행 자가담바의 출발점인 타멜에서 차로 5분거리가 되지 않는 안나푸르나호텔로 향했다. 타멜 거리를 지나는 가깝지만 혼잡스럽고, 몸은 불편한 시간동안 나는 막 시작한 여정에 대한 가슴 부푼 기대보단 타멜의 거리와 얽힌 기억의 흔적을 쫒는데 여념이 없었다. 5년 전 들렀던 레스토랑이며 호텔의 위치, 그리고 마트와 서점을 더듬었다. 그를 리가 없지만 혹시라도 2천만 네팔인구중에 내가 아는 2~3 명중의 한명이 우연이 이 길을 지나가지 않을까 나의 눈은 열심히 거리를 훑었다. 지난 추억에 대한 미련인지, 나는 이 거리에 낯선 사람이 아니라는 확인을 받고 싶은 욕망인지 혼란스러웠다. 어쩌면 갈수록 흐릿해 지는 기억의 확실성을 움켜지려는 집착인 것도 같았다.

이내 도착한 안나푸르나호텔은 별천지였다혼잡하고 지저분한 카트만두의 거리와는 물리적으로 단절된 채 네팔의 가난과도 무관한 공간으로 다가왔다싱그러운 나무와 꽃들한적하고 편안한 정원 그리고 그 속을 거니는 여유로운 사람들... 이 모든 것을 누릴 권리가 나에게도 있을까 드는 의심을 애써 외면하고 싱그러운 카트만두의 정취에 마양 취했다정원을 거닐고 향기로운 아침공기를 들이쉬며 안나푸르나 여정을 같이할 길동무들과 기념 사진을 찍었다그래도 제일 젊은 L이 제안한 연출 사진이 가장 멋졌다서로 맞댄 흐린 얼굴 넘어 무언가 뜨거운 꿈을 공모하는 짜릿한 유대감이 느껴졌다.

혼잡한 카트만두 시내를 지나 버스는 이내 네팔의 산하를 달렸다네팔리의 삶이 스민 산자락 다락밭들과 차장으로 스치는 멀리 눈덮인 봉우리가 우릴 반겼다들뜬 눈으로 차창을 스치는 먼 산과 네팔리의 삶이 깃든 마을을 바라봤다. 뛰어노는 아이들과 지나가는 소마저 나를 반겨주는 듯 정겨웠다카드만두 분지를 벗어나기 위한 산자락 길은 여전했지만 포장을 새로 하고 난간을 세워 훨씬 안전해진 느낌이 들었다아무데나 버스를 멈추고 볼일을 보게 하던 5년전과 달리 그래도 휴게소다운 휴게소가 있고 길가의 쓰레기도 훨씬 줄어들었다버스에서길가에서휴게소에서 마주치는 네팔리마다 특유의 여유 있고 편안한 표정으로 여행객을 맞았다. 2015년 대지진 이후 인심이 팍팍해지고 거칠어졌다는 소문과는 달리 네팔의 표정은 5년전보다 더 밝게 다가왔다.

내 인생의 화려한 한때를 즐길 마음의 준비도 없이 포카라에 도착했다카트만두를 떠나자마자 포카라를 향해 달리는 버스 속에서 내내 이번 여행의 의미를 물었다나는 이번 여행을 통해 무엇을 얻고자 하는가 곱씹었다굳이 바란다면 이번 여행이 내 마음의 지병인 화를 다스리는 순례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버스를 내리며 다짐했다. ‘잊자쉬자놀자걷자아무것도 하지 말고 계획하지 말자.’ ‘여행의 의미를 찾고나의 삶을 생각하고 미래를 꿈꾸는 것조차 피하자.’ 그냥 먹고 걷고 쉬는 것이 이번 여행의 유일한 목적이고자 다짐하며 나는 지금껏 열심히 살아왔고 충분히 쉴 자격이 있다고 스스로를 위무했다.

버스정류장엔 우리의 가이드 라마가 차량과 직원을 대동하고 마중 나와 있었다전화와 카톡으로 연락만 주고받다가 처음 마주하고 보니 상상했던 인상보다 훨씬 강직해보였고 보스 기질의 사업가 기풍이었다서둘러 인사를 나누는 사이 우리 짐은 라마가 준비한 차로 옮겨졌고 예약했던 호텔이 문제가 있다며 막 새로 들어선 다른 호텔로 우리를 안내했다정식 개업도 안한 것 같은 새 호텔에 짐을 풀고 나자 우리는 새장에서 해방된 새들처럼 포카라 리버사이드거리로 쏟아져 나갔다안나푸르나를 걷는 모든 여행자들의 발길이 머물고 오래전 전세계 히피들이 모여들었다는 리버사이드 거리를 내 자신이 걷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 울릉거렸다. 9명의 일행은 뒷골목의 골목대장이라도 된 듯 의기양양하게 리버사이드 거리를 휩쓸며 구경도 하고 쇼핑도 하다가 해직녁이 다되어서야 페와호수가로 몰려갔다.

페와호수는 여전히 평화롭고 아름답고 물가를 거닐고 뱃놀이를 하는 사람들은 행복해 보였다그 속에 나도 한 부분이고 싶어 선뜻 흥정을 하고 두 대의 배에 나누어 올랐다배는 호수가운데 떠 있는 작은 사원이자 섬인 바라히 힌두사원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코스였다배에 오르자 모두 물 만난 고기마냥 자유를 얻었다누가 먼저 시작했는지 모르지만 우리는 주변을 잊고 노래를 시작했다잊혀진 80년대의 색 바랜 민중가요가 페와호수에 번져나갔다물살 때문인지 우리 노래의 울림 때문인지 물에 비친 안나푸르나 연봉이 흔들렸다. 

도착한 바라히사원은 임신을 원하는 사람이 참배를 하면 소원을 이룰 수 있다는 풍문이 있었다하지만 우리는일행은 더 이상 자식을 얻을 연배가 하나도 없으니 다들 무슨 소원들을 빌었는지 모르겠다안나푸르나 연봉이 비친 페와호수가 석양이 물들 때 출발했던 곳으로 돌아오는 배에서 나는 빌었다안전한 산행과 즐거운 동행을그리고 우리 딸의 행운과 건강을, 우리부부의 사랑과 건강을, 어머니의 건강과 장수를 그리고 정의로운 대한민국을소원을 빌다보니 나는 여전히 바라는 게 너무 많고 버리지 못하고 지고 가는 짐이 너무 많은 욕심쟁이라는 사실을 다시 절감했다.

페와호수와 리버사이드 거리가 어둠에 물들자 우리는 민속공연과 모닥불이 있는 부메랑식당으로 몰려갔다.  여정을 같이할 가이드 라마님도 동석해서 일정과 비용을 조율하고, 맛있는 스테이크와 맥주를 정겨운 친구들과 나누니 가는 밤이 아쉬웠다.  포카라의 밤이 깊으니 곧 만나게 될 산들이 그리워졌다. 내일 여정이 우리를 부메랑에 모래 머물지 못하게 했다. 사람을 미치게하던 봄밤의 기운을 느끼며  리버사이드 거리를 지나 숙소로 돌아왔다. 산행을 위한 짐을 다시 한번 챙기고 침대에 몸을 눞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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