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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4일 가사를 출발하여 먼지투성이 찻길을 따라 걸어 다나에서 점심을 먹고 따또파니에서 하루의 여정을 멈추었다. 2월 15일 드디어 걸음을 마무리하고 버스로 따또파니를 출발하여 Galeshwor에 도착해 숙소에 짐을 풀고 마을을 탐방하고 흰두사원을 참배했다.  

 

가사의 플로리다롯지를 나설 때까지 어제 저녁의 산불은 이어지고 있었다. 눈에 띄게 불길이 치솟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느린 걸음으로 위로위로 번져가고 있었다. 강의 동쪽에 형성된 오솔길을 통해 걸어가고 싶었지만 산불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강의 서쪽에 만들어진 찻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고도가 낮아지고 도시가 가까워질수록 찻길은 넓어지고 그만치 지나는 차의 수도 늘어갔다.  어떻게든 먼지를 피하기 위해 가능한한 찻길을 벗어나 산길을 선택해 걷곤했지만  어쩔 수 없이 다시 찻길로 내려와 먼지를 뒤집어 쓰야하는 구간이 늘어났다. 

 

가사를 벗어나 남쪽으로 향하는 길은 어느새 열대의 기운이 느껴졌다. 길가에 바나나나무가 늘어섰고, 수확이 끝나가는 오렌지과수원이 드문드문 이어졌다. 유채꽃은 막 노랑 꽃순을 터트렸고, 복숭아와 자두 끛은 만발했다. 부지런한 들꽃은 이미 지기 시작했고 배낭을 짊어진 등짝에는 땀이 흘렀다. 땀에 젖고 더위에 지쳐갈 무렵 Rupse Chhahara(아름다운 폭포)가 나왔다. 길 오른쪽으로 폭포가 올려다 보였지만 물이 줄어 볼폼은 없었다. 차라리 길 왼편 강쪽으로 "세계에서 제일 깊은 계곡"이라는 간판이 있었고 따라가 보니 계곡을 내려다보는 전망대가 있었다. 거기서 보는 깊게 패인 강줄기의 계곡이 더 멋있었다. 

 

Rupse Chhahara를 지나 Dana에서 차가 지나갈 때마다 온몸으로 음식을 가려야하는 먼지 투성이 길가 식당에서 달밧을 먹었다. 기후가 온화한 지역까지 내려온데다 주변에 푸성귀도 많이 키우고 있어 잔뜩 기대했는데 달밧에는 야채로 만든 떠꺼리 반찬이 빠져 있었다. 조금은 실망스러운 점심을 먹고 다시 먼지 날리는 무미건조한 길을 나섰다. 다행히 얼마가지 않아 강을 건너고 차와 먼지가 없는 마을길로 접어들었고 네팔리의 삶이 있는 아름다운 마을들을 지났다. 아이들이 한참 공놀이 중인 학교를 지나고 돌담에 붉은 꽃기린 꽃과 가시과 어울리는 아름다운 마을을 지났다.    

 

 

하루 여정을 마무리할 따토파니에 오후 3시반 즈음 도착했다. Old Kamala라는 롯지에 짐을 풀었다. 따토파니는 우리가 두발로 이어오던 여정을 멈추고 오랫동안 잊었던 차로 남은 여정을 이어갈 곳이었다. 트레킹 종료를 축하하는 백숙을 주문해놓고 간단한 세면도구를 챙기고 "따뜻한 물"을 의미하는 마을이름 그대로 따토파니를 향했다.  따토파니의 야외온천은 역시나 기대 이하였다.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구간에서 만났던 지누단다보다 접근성은 좋았으나 한적함이나 밀림속에 숨어있는 은밀함이 주는 신비함이 없었다개방적이고 번잡한 시골장터같은 개방성이 당혹스러울 정도였다비쩍마른 맨몸을 다중앞에 드러내야하는 곤혹스러움에 한참을 망설이다 옷을 벗었다

기대 이하의 수온에 물이끼와 오물이 둥둥 떠다니는 따토파니에 몸을 담구었다그래도 도시를 떠나온지 처음 잠겨보는 온수를 몸은 반긴다좀더 나아보이는 옆탕에는 거의 모든 사람이 집결해있어 차라리 호젖함을 선택해 덜 따뜻하고 지저분하지만 사람이 적은 탕을 선택했다네팔리 주민들도 상당히 많아보이고 트레킹 중에는 만나지 못했던 젊은 서양트레커도 10여명이 넘어보였다트레킹도중에 만났던 다 큰 서양아가씨가 팬티차림으로 아는 채를 하고 인사를 건넸다서양인들은 자신의 몸에대한 의식이 우리와는 참 다른 것 같았다. 저렇게 세상에 대해 당당하고 의연하게 자신의 몸을 드러낼 수 있는 태도가 참 부러웠다.

먼저 탕에 들어간 가이드 바수는 온천에 붙은 가게에서 맥주부터 찾았다. 주문해 둔 닭백숙에 반주라도 한잔할 생각이었는데 가이드 바수의 술주정이 걱정되었다. 목욕을 마치고 돌아온 롯지에는 수학여행 왔는지 학생들이 롯지의 1층을 채우고 있었다. 시간이 일러 따토파니의 골목을 돌다가 롯지의 별관같은 다이닝 룸에서 저녁을 멋었다. 주문해 둔 백숙이 나왔지만 그저그랬다. 조금 먹다보니 동닭울 덜 삶아 안쪽은 아직 다 익지도 않았다. 닭은 다시 물린뒤 한참 야심한 시간에야 본격적으로 저녁을 먹기 시작했다찬이 없는 백숙을 먹기가 곤혹스러워 네팔 김치인  아짜르를 요구했다. 무짠지같은 '물러아짜르'가 나와서 그나마 덜 느끼하게 솥을 비웠다딱 한잔이 아쉬웠지만 알콜릭인 바수가 신경쓰여 아예 술없는 백숙잔치가 되어버렸다고객이 고용한 가이드 눈치를 봐야하는 상황이 기가찼다.

 

식사중에 다음 일정을 협의해서 나브라즈가 제안한 바글룽 쪽으로 마음을 굳히자 바수가 반발했다. 바수는 어떤 이유에선지 고라파니로 일정을 고집했다. 초기 일정으로 한달전 다녀온 고라파니를 나는 다시 갈 이유가 없었다. 바수는 자신의 의견이 통하지않자 얹짢아하는 기색으로 자신은 포카라로 들어가지 않고 바로 카트만두에 돌아가겠다고 선언했다. 바수의 고집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다은날 아침 술이 깨고나면 달라질 것을 기대하고 논의를 접었다.

 

좁은 계곡으로 따토파니의 아침이 깨어나자 갈리스와르행 로컬버스를 타고 출발했다. 바수가 고집하던 고라파니를 가기위해서는 따토파니를 벗어나자마자 좌측으로 길을 돌려 안나푸르나 보전지역으로 진입해야 했지만 우리는 고라파니를 대신해 바글룽을 선택했고, 걷기를 대신해 버스를 선택했다. 근 20여일만에 차를 타니 절로 신이 났다. 네팔은 걸기 위해서 왔고 나는 걷기를 너무나 좋아한다고 싣컷 자랑해왔는데 막상 차를 타니 그렇게 좋을 수 없었다. 입이 절로 벌어지고 버스의 진동에 따라 어깨가 들썩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험준한 계곡을 지나고 도저히 차가 지나갈 수 없을 것 같은 험한 길을 요동치며 지날 때는 얼굴에 웃음이 가쉬고 등에 식은 땀이 났다. 늘 이 길을 다니는 사람은 무감각해져 있을지 모르지만 나는 도저히 평정심을 유지할 수 없었다. 계곡옆으로 차가 바짝붙으면 온 힘을 다해 손잡이를 잡고 두발을 있는 힘껏 버팅겼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얼마가 길을 내려왔는지 어느 순간 마음이 편해지고 버스에 흐르던 네팔 음악이 귀에 들려오기 시작했다. 목적지인 갈리수와르가 가까워졌다. 

 

 

 

원래 짰던 계획에는 없던 갈리수와르에 도착했다. 비교적 큰 도시에 큰 규모의 흰두사원이 있고 하루정도 쉬어가기에 좋은 도시로 느껴졌다. 전날 저녁부터 기분이 상해있던 바수는 버스지붕에서 배낭을 내리다 배낭에 얼굴을 맞았다. 선글라스가 부서졌고 다행히 얼굴에 다친데는 없었다.  포카라까지 같이 가지않고 바로 카트만두로 돌아가겠다던 바수를 포카라에 가서 새로 선글라스를 사주겠다며 달랬다. 버스정류장에서 주택가를 지나 깔리깐다키와 다울라기리쪽에서 내려오는 한 지류와 만나는 절묘한 지점에 자리잡은 호텔리버사이드에 여장을 풀었다.  

  

Galeshwor에 이르자 불교문화권은 끝나고 흰두문화권에 접어 들었다는 것을 실감했다. 타르초와 룽다가 사라지고 사원은 화려한 색감을 자랑했다. 네팔의 불교는 한국의 불교와는 사원의 분위기에서 큰 차이가 났다. 아마도 흰두교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그럴 것이다. 그리고 물어보면 힌두교와 불교는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보고 흰두교도가 불교사팔을 참배하거나 그 반대의 경우에 대한 거부감이 전혀 없어 보였다.  그래도 불교지역과 힌두교 지역은 확실히 분위기가 달랐다.  기후나 지형때문인지도 모르지만 힌두교가 지배적인 지역의 사람들이 확실히 동적이고 낙천적인것 같았다. 갈리슈와르가 그랬다. 

 

 

두 강이 만나는 지역을 신성시하는 힌두의 전통에 따라 갈리슈와르도 꽤 중요한 힌두사찰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고보니 우리가 여장을 푼 롯지를 비롯해 갈리수와르 전체가 트래커보다는 순례자가 주로 찾는 곳이라는 인상이 들었다. 시가지를 둘러보고 힌두교 사찰인 Radha Krishna Mandir를 들렀다.  암반위에 지어진 사찰은 그 암반을 포함해 거대한 조각품같이 조형적이었다. 힌두교사찰에서는 우리도 힌두신자와 같이 시바신에게 참배를 하고, 헌금을 한뒤에 Tika라고 불리는 꽃을 이겨 만든듯한 붉은 반죽을 이마에 찍었다. Tika 는 행운을 가져 온다고 하니 남은 우리의 여정은 안전하고 즐거운 시간이 될 것이 틀림없었다. 

 

손님이라고 우리밖에 없는 식당에서 지금까지 산중에서 먹을 수 없었던 생선튀김을 비롯해 거한 저녁식사를 즐겼다.  내일이면 네팔 최고의 현대적 도시이자 휴양도시인 포카라에 들어갈 기대에 부풀어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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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0일 묵니나트를 출발해 자르곳을 지나 Upper Mustang으로 들어가는 마을 까크베니에서 머문 뒤, 11일 깔리깐다기를 따라 좀솜까지 걸었다.  



 

구원의 땅 묵디나트에서 문득 두고온 집을 생각했다. 따뜻한 물이 나오고, 드끈뜨끈한 방바닥에  깨끗한 이불 그리고 맛있는 밥이 있는 집이 왜 갑자기 생각났는지 알수 없다. 여정이 40여일을 넘기면서 나도 모르게 거친 네팔 생활에 조금은 지쳤는가보다. 고산증의 위험도, 고산의 추위도, 힘든 강행군도 다 지나갔고 오직 따뜻한 햇살 속을 걷는 일만 남게되자 간사한 몸이 더 편하고 싶어진게 틀림없다. 그래도 여행을 마치고 귀국하고 나면 이 곳 네팔이 엄청 그리울 것이 분명한데 나이가 들수록 잊고 버려야 하는데 그리운 것이 늘어나서 큰 일이다. 



밤새 기온이 떨어졌는지 샤워실 물이 얼어 나오지 않아 고양이 세수를 하고 길을 나섰다. 전날 한국서 일하신다는 네팔리의 가족들도 묵다나트 사원을 참배하고 자신의 길을 가기 위해 숙소를 나섰다. 가벼운 작별인사를 나누었지만 그분의 차가 시동이 걸리지 않았다.  밤새 떨어진 기온 탓인지 시동이 걸리지 않는 네팔리의 짚차를 같이 밀어 겨우 시동이 걸리는 것을 확인하고 서로의 안녕을 빌며 작별했다. 라니포와에서 멀지 않은 거리에 있는 신비한 마을  자르곳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자르곳은 깔리깐다끼 계곡을 향해 돌출된 언덕 위에 형성된 마을로 멀리서 보면 위태롭기까지 했다.  



자르곳의 좁은 골목길을 따라 사원을 찾았다. 굳이 우리가 보기 원하는 걸 말하지 않아도 가이드 바수는 항상 앞장서 곰파를 향했다. 뭐 딱히 보여줄게 없기도 하겠지만 이곳 네팔리의 삶을 지탱하는 근본이 종교다보니 사원은 그들의 삶의 중심이 틀림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개별 사원의 특성을 이해하기에는 식견이 없으나 마을의 규모나 생활 형편을 사원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작고 가난한 마을의 사원과 크고 경제적으로 넉넉한 마을의 사원은 같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자르곳 역시 별다르지 않았지만 사원은 깨끗했고 마을의료나 교육관련 시민조직의 사무실도 사원과 붙어있어 나름 마을 공동체의 중심 역할을 하고 있어 보였다. 사나워 보이는 개의 환대를 받으며 사원을 나와 네팔리의 체취를 쫏아 골목을 누빈뒤 다시 가던 길을 따라 까그베니로 향했다. 



까그베니 가는 길은 묵디나트까지의 길과 확연히 달랐다. 베시사하르부터 묵디나트까지는 산행이었다면 묵디나트 이후 까그베니까지는 황량한 평원을 걷는 사막횡단 같은 느낌이 들었다. 길은 메마르고 척박한 황무지 능선이 이어지고 가파르게 깍힌 게곡과 파스텔톤이 번지는 신비한 색감의 능선들이 무스탕 특유의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그래도 금방 조성되었거나 조성중인 찻길을 따라 드물지만 여행객을 위한 찻집이나 롯지가 자리잡고 있었다.  물론 Upper Mustang이나  Dolpo와 같은 극한 오지의 느낌은 확실히 덜했다. 

   

 

묵디나트에서 까그베니까지의 길은 멀지 않았다. 서두르지 않고 걸어 늦지 않은 점심시간에  도착했다. 그래도 중간에 가게앞에 베틀을 두고 야크나 산양 털로 만들었다는 수제 숄과 머플러를 전시한 가게에서 구경도 하고, 가게와 붙어있는 찻집에서 차를 마시는 등 여유롭게 쉬기도 했다. 길은 편했고, 간혹 지나가는 차가 먼지를 일으켰지만 다행히 많지 않았다. 전봇대를 세우고 전선을 까는 기사들을 만나 물어보니 길을 따라 인터넷을 설치하고 있다고 했다. 지구상 몇안되는 오지의 대명사격인 무스탕에 인터넷이 들어오고 있다니 좀 씁쓸하기도 했지만 현지 주민의 삶을 생각한다면 환영할 수밖에 없었다. 



까그베니의 멋은 마을에 들어서기전 언덕위에서 내려다볼 때 확연히 다가왔다. 깔리깐다기와 묵디나트에서 흘러오는 강이 만나 이루어진 조금은 옹색한 계곡아래 형성된 퇴적지에 자리잡은 마을은 주변 황무지 산이나 능선과는 달리 초록색을 띠고 있었다. 거대한 무채색의 산과 구릉과 강 사이에 한 조각의 연두빛 마을이 자리잡고 있는 풍경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까그베니 덕분에 연두빛이 이렇게 도드라진 색상인지 난생 처음 알게 되었다.    



편한 걸음 끝에 도착한 까그베니의 롯지 [Hotel Nilgiri View]에 짐을 푸니 넉넉히 마을을 둘러볼 수 있는 오후 시간이 남겨져 있었다. 가이드가 인도한 롯지는 멋진 조망을 가지고 있었고 시설은 운치있고 편안했다. 점심을 먹고 마을 산책을 나섰다. 먼저 마을을 가로질러 Kag Chode Thupten Samphel Ling Monastery를 찾았다. 안내서를 보니 나름 역사가 깊고 규모있는 사원으로 교육사업 등을 하고 있으며 사원의 유지를 위해 후원도 받고 있었다. 흙과 나무로 거칠게 만든 탑은 본전으로 보였고 그 옆에는 신축 건물이 지어져 있었는데 본전을 마주보는 현대식 2층 건물에는 많은 티벳탄들이 공동생활을 하는 것 처럼 보였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는 티벳탄으로 보이는 신도들이 양지바른 마당 가에 모여 앉아 찬송을 하고 있었다. 운좋게 예불 시간에 우리가 도착한 것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어쩌면 예배 시간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하루 온종일 예배 중인지도 몰랐다. 늘 기도와 찬송으로 삶을 채우는 티벳탄들이 일은 언제하는지 궁금했다. 나는 네팔 여정중에 그들이 일을 하는 경우보다 기도하는 경우를 더 많이 본것 같았다. 그들에게 현세는 단지 스쳐지나가는 한 과정에 불과할테니 열심히 일하고 무엇가를 이루기 위해 분투할 장이 아닐 것이 분명했다. 집착할 아무런 이유도 없는 그들의 삶이 부러웠다. 



골목이라기 보다는 집과 집사이의 틈을 비집고 지나간다고해야 더 정확할 것같은 미로를 지나 Upper Mustang이 시작하는 지점에 도착했다. 깔리깐다키의 강폭은 광활하다고 표현해도 좋을 만했지만 건기다 보니 수량은 많지않았고 강을 따라 걷기에는 적격이었다. 우리는 모두 강으로 내려가 강바람을 맞으며 모래를 만지고 강물에 손을 적시며 강이 시작되었을 알수 없는 신비한 세계의 느낌을 더듬었다. 자갈을 던져 물수제비를 뜨고, 자갈을 뒤져 암모나이트 화석을 주우며 멀리 무스탕 깊숙히 자리잡고 있는 Lo Mantang까지 걸어가고싶은 마음을 가라앉혔다. 깔리깐다끼를 통해 Upper Mustang의 맛만 보고 마을로 돌아왔다. 



롯지는 비수기라서 손님이 우리밖에 없었지만 시설이나 진열해 놓은 상품 등을 보니 꽤 부유한 롯지로 느껴졌다. 제일 아랫층이 식당과 주방이 있고 2층에는 객실과 주인의 살림집이 있었고 우리가 지낸 3층은 객실과 다이닝 룸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층과 층을 잇는 계단이나 룸을 이어주는 복도가 오래된 일본이난 중국의 목조 건물같이 고색찬연하고 오밀조밀한 운치가 있었다. 그래서인지 하루밤 잠과 세끼 식사를 해결하기 위해 1층 식당과 3층 다이닝 룸을 잇는 계단을 수십번 오르락 내리락 거렸지만 불편하거나 힘들지 않았다.   

[Hotel Nilgiri View]는 교양있고 단정한 차림의 아가씨가 우리를 안내하고 식사 주문을 받았는데 그 당당함에 미루어 주인집 딸이 분명해 보였다. 나중에 나타난 꽤째째한 옷차림에 힐긋힐긋 우리를 살피며 부엌을 하는 식모아이 우리 때문에 이웃에서 급히 불려 온 낮은 계급의 딸로 보였다. 좁은 공간에서 롯지 주인딸과 식모아이를 대하니 단정함과 남루함, 도도함과 비굴함을 나누는 계급성의 현실을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아렸다. 정전으로 촛불을 켜는 바람에 더 운치있는 저녁 식사를 하고 하루를 마무리했다. 침실로 돌아오니 깔끔한 이부자리에 깔리깐다키 강바람에 날려온 한주먹의 모레가 먼저 내려 앉아 있었다.

 

 

아침 일찍 강건너 수직 절벽 아래에는 동네 꼬마들이 다 모여 있었다. 아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아슬아슬하게 절벽을 타고 올라 무슨 이유에선지 돌을 굴렸다. 그 충격으로 엄청난 토사가 큰 소리를 내면서 강으로 굴러 떨어졌다. 우리 가이드도 아이들이 왜 그러는지 알지 못했고 우리도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없었다. 그런데 우리 숙소 앞을 지나던 중년 여성 한분이 아이들을 향해 고함을 지르고 화를 내는 것으로 보아 아마 아이들이 위험을 즐기는 것같이 느껴졌다. 저러다가 한 순간 아이들의 목숨을 잃을 만지 위험한 장난을 하는데도 그 여성말고 온동네 사람들이 그냥 무관심해 보이는 것은 늘 목숨을 위협하는 위험이 산적해 있는 삶의 조건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무스탕의 마을 까그베니를 뒤로하고 한없는 아쉬움을 남기고 돌아서며 나는 빌었다. 내 살아 생전에 까그베니를 넘어 무스탕과 돌포를 주유할 수 있는 한달 여정의 기회가 꼭 주어지기를! 좀솜으로 가는 길은 단순했다. 왼편으로 닐기리봉과 틸리초크를 스쳐지나며 멀리 다울라기리 산군을 향해 깔리깐다끼는 흘렀고 우리의 걸음도 따라 흘렀다. 간혹 길과 강의 경계가 흐려지는 곳에서는 강으로 내려섰다가 다시 물을 만나면 강둑으로 나오는 과정을 반복했다. 강을 따라 걷는 길은 평탄했고 편안했다. 고도의 변화가 없는 수평을 길을 물처럼 흘러갔다.

 

 

까그베니를 출발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Ekle Bhattee 라는 강변마을을 만났다. 두세개의 롯지와 레스토랑이 있는 작은 마을인데 강과 마을의 경계가 불확실 해 꼭 우기에는 물에 잠길듯한 위치에 자리잡고 있었다. 마을입구의 조용한 첫 집에서 차를 마시고 쉬었다가 출발하자마자 근처 롯지앞에 모여있는 한무리의 트레커들을 만났다. 대부분의 트레커들이 소롱라를 넘어 묵디나트를 지나 좀솜쪽으로 하산하는데 반해 이들은 좀솜에서 출발해서 묵디나트 쪽으로 상행중이었다. 덕분에 오랜만에 트레커를 조우한 셈이다.

 

 

 

Ekle Bhattee 를 출발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점심무렵  좀솜까지 도착했다. 좀솜은 마을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컸다. 포카라서 오는 정기 비행기를 맞는 비행장 까지 있는 곳이다보니 많은 롯지와 여행관련 업체들, 그리고 지역 군대까지 주둔하고 있는 이 근처의 중심도시로 느껴졌다. 시가지를 쭉 가로질러 거리가 거의 끝나는 지점에서 숙소를 잡았다.

 

 

 

이른 도착으로 오후는 티니가온이라는 가까운 마을 까지 작은 트레킹을 떠났다. 그냥 호텔에서 쉬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일행 M의 유혹에 굴복했다. 가이드에게는 자유를 선물했지만 굳이 우리를 따라 나섰다. 강을 동쪽으로 건너 30여분 정도 산길을 오르니 좀솜 시가지가 내려다 보이는 티니가온에 도착했다. 농사철도 아니고 여행 성수기도 아닌 계절 탓인지 아니면 마을은 늘 이런 모습인지 알 수 없었지만 티니가온 역시 인기척이 드물 정도로 한산었다. 영업중인 식당을 겨우 찾아 차를 마시고 마을을 관통해 다시 되돌아 내려오는 골목길에서 만난 장난꾸러기 아이들이 무척이나 반가웠다.  아이들이  줄고 학교가 사라지는 한국의 농촌에서 사는 나의 과민반응이겠지만 늘 마을을 만나면 걱정이 앞선다. 이 마을은 대대손손 사람의 삶이 이어지기를 빌며 숙소로 돌아왔다. 

 

 

 

트레커 조차 만나기 힘든 여정 끝에 모처럼 좀솜에서 사람들을 만났다. 두 한국 청년을 비롯해 국적이 다른 몇몇 트레커와 여행중이라는 네팔리 두 대학생까지 여정은 다르지만 같이 좀솜에 있고 그것도 한 호텔에 머물게 되었다는 것 만으로도 친근감이 느껴졌다. 우리의 가이드는 네팔 아가씨와 담소를 나누느라 정신이 없었고, 우리는 탁자 밑에 넣어주는 숯불의 온기에 녹아들었다. 반가운 마음과는 달리 여정과 관련한 몇마디 말밖에 주고받지 못했지만  네팔의 거친 자연과 삶을 찾아 온 한국 청년 학생들을 보면 왜 그리 대견스러운지 모르겠다. 내가 그 나이 때는 네팔이라는 나라도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이 조금은 억울하긴 했지만 그래도 지금 이 순간 그들 청년과 내 삶을 나누고 있다는 사실이 자랑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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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6일 마낭을 출발하여 야크카르카에서 점심을 먹고 오후 3시경 레다르에서 도착하여 걸음을 멈추고, 2월 7일 9시경 출발하여 정오가 되기 전에 해발 4,450m인 소롱패디에 도착해서 짐을 풀고 다음날 새벽에 있을 쏘롱라 패스를 준비했다.



짙은 구름이 하늘을 뒤덮고 거친 바람이 모래바람을 일으키는 밤이 지나고 아침을 맞았다. 바람은 여전했지만 다행이 눈은 오지 않았고 하늘은 조금 개여있었다. 아침을 먹고 옷깃을 여미고 거친 바람을 맞으며 쏘롱라를 향해 출발했다. 마낭을 벗어나면서 길을 두갈래로 갈라졌다. 왼편의 길을 선택하면 강사르 마을을 지나 틸리초로 가게 되지만 우리는 쏘롱라를 향해 가는 오른쪽 길을 선택했다. 강사르와 틸리초는 5년전에도 폭설로 길이 끊어지는 바람에 가보지 못했는데 이번에도 인연이 닿지 않으니 영영 못가볼 곳으로 남을 것 같아 아쉬웠다. 마낭을 완전히 벗어나기 전 뒤돌아 마르샹디강과 마낭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 올라 지나온 길을 살폈다. 불탑을 지나며 쏘롱라를 무사히 넘어 다시 마낭으로 내려오는 일이 없기를 빌며 걸음을 재촉했다. 



Chulu East 산허리를 타고 군상까지 가황무지 길은 경사가 심했다. 모래바람을 맞으며 한시간 만에 해발 400m이상을 올려야하는 힘든 코스였다. 그래도 외편의 계곡을 넘어 멀리 틸리초 피그와 닐기리 봉이 이루는 절경을 보는 낙에 그나마 우리의 지친 걸음은 힘을 얻었다. 군상에서 쉬어가며 차라도 한잔 할려고 했지만 롯지는 비어있고 마당에 찬바람만 가득했다. 아쉬움을 털고 일어나 다음 마을인 야크카르카까지 강행군을 이어갔다. 다행히 군상을 지나서는 경사가 완만하고 편안한 길이 이어졌다.



점심이 다가오자 가는 눈발이 날리고 짙은 안개가 끼기 시작했다. 오후 1시즈음 야크카르카에 도착해 늦은 점심을 먹었다. 카르카가 집을 뜻한다니 야크의 집, 다시말해 방목 중인 야크가 머무는 동네나 야크치기 목동이 지내는 움막이 있던 동네 정도일 것이다. 역시나 야크카르카에 접근하자 방목중인 야크떼를 만날 수 있었다.  하지만 목동의 움막을 확인할 길이 없고 트레킹 덕분인지 야크카르카는 번듯한 숙소가 여러채 들어서 롯지촌을 이루고 있었다. 야크집에 들러 점심을 해결했으니 우리는 야크가 된 기분으로 불순한 날씨를 뚫고 우리의 길을 나아갔다.



오후3시무렵 해발 4200미터인 Ledar에 도착했다. 하루 650m의 고도를 올려 몸이 지치기도 했지만 이후 고도 적응을 위해 걸음을 멈추었다. Ledar로 들어서는 출렁다리를 건너자마자 첫 롯지에 짐을 풀었다.  롯지의 손님은 단촐했다. 두 스페인 남자와, 중국인 커플 그리고 우리 일행 4명이 전부였다. 그리고 서너명의 가이드와 롯지 운영자 두어명이 같이 있어 그나마 든든했다.  고도가 높아진 만치 기온이 내려가고 바람과 눈보라가 몰아치는 날씨 탓인지 모두다 다이님 룸에 몰려 들었다. 책과 지도를 펼쳐놓고 차를 마시며 야크 똥을 태우는 난로가에서 몸을 녹이니 마음까지 녹아들었다. 


  


이번 여정 처음으로 4,000m 고도에 진입하고 나니 조금은 불안했다.  아직은 호흡이 간혹 불편한것 빼고는 비교적 잘 먹고 잘 걷고 있는 셈이지만 산아래서 지낼 때의 몸과 비교해서는 분명 정상이 아닌 것 같았다. 그래도 벌써 식욕도 잃고 배탈에 두통에 불면증까지 시달리는 나의 두 일행에 비해서는 우리 부부는 거의 철인 수준인 듯 멀쩡했다. 다이닝 룸에 불살이 줄어들자 차가운 룸의 침낭을 기어들었다. 계곡을 쓸고 지나가는 눈바람 소리를 들으며 춥고 불안한 잠을 청하며 지나온 길을 더듬었다. 한걸음한걸음 발을 옮길 때마다 지나온 삶을 곱씹고 살아갈 삶을 그려본다. 많은 아쉬움은 남지만 결코 내 삶이 후회스런 삶은 아니었다. 지금의 희열 그리고 다가올 삶의 가슴뛰는 모험이 더 중요하다.



레다르의 밤은 험악했다. 밤새 거친 바람이 집을 흔들고 눈발이 천장틈으로 들어와 얼굴에 뿌려졌다.  9시에 침낭에 들었지만 자정에 눈이 떴다. 다행히 잠자리에 들무렵보다 호흡은 좋아졌다. 다시 감빡 잠이들다가도 금새 집이 흔들리고 바람소리가 하늘을 가르는 불안한 기운에 눈이 떠졌다.  마당을 나서니 바람은 사람마저 저 계곡 밑으로 날려버릴듯이 기세가 등등했다. 레다르의 밤은 너무 길었다. 수백번을 뒤척여도 아침은 오지 않았다.



새벽잠이 설핏 들었다가 억지로 일어나 다이닝룸에 들러니 8시였다. 스페인 트래커는 벌써 숟가락을 댄듯 만듯한 접시를 물리고 길을 나설 채비를 하고 있었다. 밤새 호흡곤란으로 고생한 D와 두통으로 고생한 M은 아침을 맞아 상태가 호전되었다고 했다. 그래도 모두 얼굴은 부풀고 두통과 소화불량으로 상태가 정상이 아닌 몸을 이끌고 길을 나섰다. 평단한 능선을 따라 3시간 동안 스무명가량의 트레커와 네팔리가 행렬을 지어 나아간다. 안나푸르나를 스쳐 멀리 소롱피크를 지나 출루 이스트 출루 웨스트를 비켜 꾸역꾸역 길을 줄였다. 큰 산을 걷는 사람의 움직임이 워낙 작아서 사람은 산과 같이 부동의 상태로 있고 오직 바람만이 산과 계곡을 쓸고 지나가는 것 같았다.   레다르를 출발한지 1시간 넘겨 계곡을 건너 서쪽으로 넘어가니 길은 가파르고 위험했다. 드디어 험준한 안나푸르나에 들어섰음을 실감했다.

 


정오가 되기전 소롱패디에 도착한다. 쏘롱라를 넘기 전 우리의 마지막 숙소가 될 소롱패디는 고도 4,450m였다.  방을 얻고 짐을 풀고 들어선 다이님룸에는 10여명의 서양팀이 자리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몇몇 개별 트래커들이 들러 점심을 먹고는 모두들 하나같이 길을 나섰다. 점심시간이 지나자 모두가 떠나고 마지막으로 중국인 커플마저 하이켐프를 향해 떠난뒤 소롱패디에는 우리만남게 되었다거친바람이 불지만 양지자른 다이닝 룸이 아늑하고 따뜻해서 4명모두 책을 한권씩쥐고 해드는 창가에 띄엄띄엄 앉았다. 나는 이내 긴의자에 몸을 눞이고 잠이 들었다고즈늑한 봄날의 평온이 우리를 감싸고 있던 소롤패디에서의 오후는 행복했다.

 


오후3시경 하이캠프로 떠났던 중국인 커플이 다이닝룸에 들어 섰다. 하이캠프 직전에 심한 두통으로 일단 퇴각했단다. 그리고 뉴질랜드 커플이 한쌍 도착했고 마지막으로 석양녁에 히피처림의 런던보이가 들어섰다. 다국적 트레커들이 둘러앉아 야크똥난로에 불을붙이고 화려한 소롱패디의 저녁을 맞았다. 이제 메뉴를 외울 때도 지났지만 늘 끼니가 다가오면 모두가 메뉴를 뒤척였다. 그래봤자 선택지는 뻔했다. 삶은 계란에 퍽퍽한 빵, 야채튀김을 뒤적이다가 다 먹지못하고 내일의 일용할 양식으로 남겼다.



다음 날 있을 대망의 소롱라 패스를 위해 일찍들 잠자리로 떠났다. 마지막까지 난로의 온기를 아껴 자리를 지켰지만 어둡고 차가운 방에 들어서며 시계를 보니 고작 720분이었다. 한컵의 물로 양치만하고 누운 잠자리가 너무나 낯설었다. 내가 누울 곳이 아닌 곳에 누워있는 듯한 어색한 잠자리를 뒤척이다 잠깐 잠이 들고 다시 눈을 떠 시간을 확인하니 고작 자정을 넘기고 있었다. 다시 몸을 뒤집다가 결국 2시를 겨우 넘겨 일어나 침대에 걸터앉고 말았다. 4시에 기상해서 4시반까지 식사를 하고 5시에 쏘롱라를 향해 출발하기로 되어있었는데 2시에 기상을 하고 나니 밤은 춥고 길고 시간은 느렸다.



이번 여정의 최고 고도이자 고비인 5400미터의 소롱라는 5년전 폭설로 마낭 에서 돌아서면서 넘지 못했다. 이제 곧 소롱라를 넘고나면 이번 여정의 성격이 바뀌게 될 것이다. 먼저 고산증의 위험에서 해방되고 하산 길로 접어든다. 베시사하르를 출발해 마르상디강을 따라 열흘을 넘겨 고도를 높혀왔던 여정은 칼리칸다키강을 따라 12일 여정의 하산길에 접어들게 되는 것이다. 마낭주의 산록과 마르상디강변의 초지를 거쳐왔던 여정은 무스탕의 황량한 황무지와 그 황무지를 갈라 무스탕에 삶의 터전을 키워주었던 검은강 칼히칸다끼를 따라 흘러갈 것이다. 하루하루 고도가 낮아지고 기온이 오르고 그리고 네팔 최고의 현대적 휴양도시인 포카라로 들어가면 이번 여정은 끝이 난다.  



이번 여정에서 소롱라가 기점이 되듯 이번 두달의 네팔여행이 내삶의 새로운 시작이길 빌었다. 유예된 꿈들, 이루지못한 계획들, 무산된 다짐들, 미완의 시도들 이 모든 것을 버리고 새롭게 내일을 시작하는 불가능한 꿈을 꾸며 새벽 4시를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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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9일 아침 Upper Ngadibazar에서 출발하여, 바훈단다까지 오전에 걷고 Germu에서 1박을 한뒤, 1월 30일 옛 트레킹 코스 반대편 서쪽 강둑 절벽을 따라 돌을 깨고 만든 새길로 Tal까지 가서 1박을 했다.

 

우리는 Ngadi의 롯지에서 최악의 시설과 최고의 친절을 동시에 경험했다. 배갯머리에 쥐똥이 쌓이고 유리도 없는 창은 방 안밖의 구별을 불가능하게 했지만 모처럼 손님을 맞은 사우지 사우니는 연신 우리가 자신의 롯지를 찾아주어 너무 행복하다고 했다. 우리가 누군가를 행복하게 해줄수 있다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더할나위 없는 행복한 트레킹이 될 것을 예감하면서 라운드 둘째 날을 맞았다. 

 


점심을 먹은 바운단다까지의 길은 편안했다. 날씨는 온화했고 바람도 없고 맑고 투명했다. 그냥 숨을 쉬고 걷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행복에 겨워지는 그런 날이었다. 얼굴에 웃음기가 번지고 하루종일 걸어도 지칠 것 같지 않은 기분으로 도착한 바훈단다의 롯지는 평화로웠다. 바훈은 브라만을 뜻하고 단다는 언덕을 뜻한다니 바훈단다는 '브라만이 사는 언덕 마을'일 것이다. 여전히 작동하고 있는 카스트의 최상단 계층이 모여사는 마을은 다른 마을과 어떻게 다른지 모르겠지만 일단은 깨끗하고 잘 사는 동네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햇살 좋은 Hotel Superb View 정원에서 점심을 먹고 차를 마시고 그냥 그 자리에 눌러 앉고 싶기도했지만 마지못해 다시 배낭을 짊어지고 길을 나섰다. 못내 아쉬운 가이드는 그냥 여기서 하루를 쉬자고 제안했지만 하루를 마무리하기엔 걸은 길이 너무 짧았다. 


   


길을 걸으며 나는 5년전의 기억과 지금을 비교하고 기억의 흔적을 드덤고 달라진 것들을 확인했다. 5년전 있던 것이 없어지고 그 때 없던 것이 새로 생겨난 분명한 것이 있었다. 당나귀와 댐이 그것이다. 5년전 트래킹 내내 앞서거니 뒤서거니 같이 했던 그 많던 당나귀들이 보이질 않았다. 마르샹디강따라 찻길이 뚤리면서 그많은 당나귀와 노새들 그리고 목동들이 다 사라진 것 같았다. 당나귀와 노새대신 차와 기사가 더 많은 짐을 손쉽게 고산지대 마을로 나르게 되었으니 주민의 삶은 훨씬 덜 고달파졌을 것이다. 길을 걷는 내내 귀전에 울리던 방울소리가 귀국후에도 한참을 이명으로 남아 나를 몽환 속으로 이끌곤 했었는데 이제 나귀의 방울과 발자욱 소리 대신에 간혹 지나가는 차가 우리를 감짝 놀래키곤 했다. 변화는 바람직하고 피해갈 수 없는 것이긴 한데 그 많던 당나귀는 어디로 가고 그 목동은 운전기사가 되었을까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그전에 없던 것이 새로 생겨난 것은 바로 댐이었다. Upper Marsyandi 수력댐은 중국의 원조로 네팔의 전력난을 해소하는데 기여할 수력발전소라고 했다. 세계 2위의 수자원보유국이면서 수도 카트만두 조차 하루 몇시간밖에 전기가 들어오지 않던 시절은 벌써 옛이야기가 되었고 이번 여행중에는 기적같이 거의 정전이 없었다. 그것이 바로 이런 수력댐 덕분일진대 댐이 옛길을 삼키고 마을을 내쫏고 풍경을 변화시킨 것에 대해 마음 아파 할 수만은 없었다. 내 보기 좋자고 그들에게 불편을 감수하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아닌가? 그래도 입안엔 쓴맛이 남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중국 자본에 네팔이 휘둘리지 않기를, 네팔의 개발과 발전이 네팔의 자연의 아름다움을 집어 삼키지 않는 방향으로 나아가기를 빌며 댐을 피해 길을 걸었다. 



이른 오후에 게르무 레인보우 롯지에 도착했고 하루를 마무리하기로 했다. 아름다운 마르샹디 동쪽강둑위에 형성된 게르무 마을은 아름다웠고, 레인보우 롯지는 깨끗하고 운치있었다. 여유있는 오후시간을 빨래와 샤워, 그리고 편안한 휴식으로 보내고 지나온 길을 반추하며 이른 잠자리에 들었다.  행복의 절정에는 늘 그늘이 끼기 마련일까? 바훈단다를 지나며 문득 얼굴을 스쳐지나는 바람에 나의 청춘을 지배하던 불안을 환기했다. 수만갈래의 길이 앞에 놓여있던 시절 그 어느 길도 선택할수 없어 불안만이 나의 자의식을 확인시켜 주었었다. 헤어날 수 없었던 불안의 심연에서 나마 그 불안사이를 비집고 게으름을 만끽하던 나의 청춘은 감히 아름다웠다고 말 할수있을 것이다.  희미한 기억속을 비집고 정체를 드러낸 그 느낌이 온전히 나의 것이 된다면 내 나머지 삶은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여행은 지나간 나의 삶을 온전히 되돌려받는 축복이다.



게르무에서는 씼고 쉬고 잠도 잘 잤지만 포터 바순의 나쁜 술버릇이 드러났다. 전날 나디에서 술주정이 부끄러웠던지 바순은 내가 권한 락시까지 거절하며 쏘롱라패스후에 묵디나트에서나 같이 한잔하자며 패스전에는 '노소주'한다고 호언했다. 하지만 부억을 들락날락 거리던 바순은 호언한지 두시간도 안되어 술냄새를 풍기며 수다스러워졌다. 더 가관인 것은 알콜이상의 뭔가를 한 낌새를 느낄 수 있었다. 계속 실없이 웃고 떠들어 분위기가 불편해지기 전에 모두들 침실로 흩어졌지만 잠자리에 든 뒤에도 룸의 얇은 벽을 통해 한참을 동료 라마라쉬와 떠들어되는 라마의 취한 목소리를 들어야했다. 



가파른 강둑을 내려와 마르샹디강을 건너니 상계가 나오고 강의 서쪽 길을 걸어 Shrichaur의 Boomerang 롯지를 지났다. 시리사우르를 지나자 지그재그의 가파른 길을 한참 올라가니 강과 마을을 조망할 수 있는 지점에 도달했다.  Jagat 이후에는 강을 건너 티벳탄이 소금을 나르던 아름다운 산길을 당나귀와 한줄로 나란히 걸고 싶었다. 하지만 강의 서쪽으로 새로 찻길이 나면서 사람의 발길이 끊긴 구길은 관리가 안되는지 여기저기 산사태로 끊겨 있고 었다. 딸까지는 가파른 암벽 절벽을 깨서 만든 위태로운 돌길이 이어졌다. 발아래 천길 낭떨어지 아래 마르샹디 강이 흐르고 머리위 절벽은 돌이라도 굴러내리지 않을까 위태롭기까지 했다. 대신 소금을 나르던 티벳탄의 발길을 따라 걷던 옛길의 따뜻함은 줄었지만 가파른 절벽위를 가르는 길은 시원함을 넘어 아찔한 조망을 우리에게 선물했다. 


새로난 찻길이 우리를 딸까지 이끄는 동안 다행히 먼지를 일으키며 우리를 놀래키던 차를 몇대 만나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구길이 오르락내리락 사람을 지치게 했다면 새길은 구길보다 평탄하긴했어도 훨씬 더  길어진 것 같았다.  도저히 길을 만들 수 없어 보이던 절벽을 깨고 돌면서 길을 내다보니 길은 산 구비를 따라 멀리 돌기도하고 아예 마르샹디강이 보이지 않는 산넘어가지 이어지기도 했다. 역시 농가가 있고 아이들이 있고 집에서 키우는 염소가 있던 아기자기한 아름다움이 사라진 새길은 우리를 쉬 지치게 했다. 딸이 멀리 보이기 시작하면서부터 우리는 더 빨리 지쳐갔다. 손에 잡힐 듯 보이는 딸은 쉽게 다가오지 않았고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겨우 딸을 향해 가파른 언덕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카트만두의 숙소 마야거르츄를 출발할 때 파샹님으로부터 제안을 받은게 있었다.  어떤 트레커가 축구공과 학용품을 맡기면서 고산지대의 아이들에게 전달해주기를 부탁했다고 했다. 파샹님은 그 축구공과 학용품을 우리가 좀 전달해주면 안되겠냐고 했다. 사실 트레킹 짐을 싸면서는 가능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최소한의 짐만남기는 것이 철칙인데 예정에 없던 축구공 3개와 문구 한짐을 맡아 고산지대까지 지고 가기에는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그것을 마련해 주었던 분의 따뜻한 마음을 거역할 수 없어 각자의 배낭에 한개씩의 축구공과 문구를 나누어 지고 왔다.  딸이라고해봤자 고작 해발 1700여미터밖에 되지 않으니 아직 공을 나누어 줄 때가 되지 않았지만 이날 첨으로 예정에 없던 축구공 나눔을 해야했다. 

강변으로 내려오니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망치로 자갈을 깨고 있었다. 집을 짖거나 도로를 포장할 때 사용할 잔자갈을 직접 망치로 깨서 만들고 있는 것이라고했다. 눈과 코주변은 물론 온 몸을 돌먼지로  뽀얗게  뒤집어 쓴 아이들이 하얀 이를 드러내며 우리를 향해 나마스태를 외쳤다. 하루에 1달러전후의 저임금 아동노동이 극심하다는 네팔의 현장을 우리는 한가로운 트래커로 막딱뜨린 셈이었다. 값싼 동정심이라고 비난받을 지도 모르지만 순간 가슴이 너무 아려왔다. 그 아이들에게 무어라도 해주고 싶었고 나도 모르게 배낭을 열고 축구공을  꺼냈다. 한 아이를 불러 축구공을 주었다. 이 아저시가 왜 이러지 어리둥절하면서도 너무 좋아하던 그아이의 얼굴이 나의 마음에 새겨졌다. 그 아이의 마음에는 어떤 기억이 남겨질 모르지만 나는 그 아이의 얼굴을 통해 나의 유년을 느끼고 세상의 가난과 그 가난 속에서 삶의 온기를 지키는 아름다운 사람들의 사랑과 연대를 생각했다. 그 아이의 얼굴로 기억될 딸에서 하루의 길을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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