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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16일 찦차를 대절해 갈리수와르를 출발 베니와 바글룽을 거쳐 포카라에 도착하여 숙소를 정하고, 다음날 티벳 난민촌 등 포카라를 둘러보고, 2월18일 자가담바 버스를 타고 근 한달만에 카트만두로 돌아왔다.

 

 

 

갈리수와르의 아침이 밝아오자 전날 갑론을박 끝에 예약한 짚차가 도착했다. 베니와 바글룽을 거쳐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트랙이 시작되는 나야풀을 지나 포카라까지 우리를 싣어줄 찦차는 출발했다. 대절비는 6000루피로 정했다. 짚차는 출발한지 10분도 안되어 베니라는 도시에 진입했다. 교통의 중심도시로 알려져 있는 베니는 역시 넓은 버스파크에 많은 차들이 몰려 있었다. 그런데 우리가 탄 찦은 무슨 이유에선지 바로 갈 길로 들어서지 않고 베니 시내로 들어가 몇 곳을 들러 짐을 싣기도 하고 사람을 만나기도 하며 시간을 지체했다. 아침 일찍 출발해야지만 베니로 돌아오는 손님을 싣을 수 있다고 새벽 출발을 종용하던 가이드의 주장이 무색할 정도였다. 아마도 기사는 포카라로 가는 김에 지인들의 소소한 부탁을 받아 해결하려는 것 같았다. 차를 대절한 우리의 입장에서는 클레임을 걸 수있는 상황인데도 기사가 우리에게 양해를 구하지도 않았고 하다못해 가이드의 상황설명도 없었다. 네팔이기 때문일까. 이런 상황에서도 기사가 매너가 없다거나 부당하게 우리의 시간을 빼앗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차라리 네팔사람들은 참 관대하고 느긋하다는 느낌을 주었다. 네팔리들은 우리를 기다리게 했지만 자신들도 아무 꺼리낌 없이 늘 웃으면서 남을 기다려주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땅을 밟아보지도 못한 베니에 대한 인상을 아무 것도 남기지 못하고 칼리간다끼를 건넌 찦은 달리기 시작했다. 베니를 출발한 뒤 오른쪽으로 강을 끼고 30여분을 달렸을까, 차는 포카라-바글룽 하이웨이를 벗어나 우회전을 해서 다리를 건너 다시 우회전을 해서 바글룽으로 향했다. 바글룽 역시 아무런 사전 준비없이 방문하게 된 도시다.  가이드는 흰두사원을 추천했고 나는 덧붙여 바글룽 시가지를 차로 한바퀴 돌아 겉할기라도 해보자는 제안을 덧붙였다. 가이드의 설명으로는 바글룽 사원은 오전 특정시간까지만 비흰두인에게 개방되기때문에 시간에 늦지 않게 도착해야 된다고 갈리수와르에서 출발할 때, 그리고 베니를 떠나 바글룽으로 향하는 중에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정작 베니에서 찦의 기사가 시간을 허비할 때는 아무 소리도 하지 않았다. 우리가 사원에 도착했을 때는 비흰두교도에게는 이른 아침에만 개방된다는 가이드의 설명과 무관하게 사원의 문은 우리에게 활짝 열려 있었다. 

 

이전에 닥신칼리의 사원과 전날 갈리수와르에 이어 바글룽의 Kalika Bhagwati Temple은 세번째 방문한 흰두사원이었다. 흰두교에 대한 사전 지식이 없는 상태로 들른 흰두 사원은 붉은색 장식이 많아 전체적으로 화려한 색감이지만 무서운 신상이 많고 특히 염소 등을 제물로 받치는 장면을 목격하거나  그 흔적을 볼 때는 소름끼치고 혐오스럽기도 했다. 아주 옛날에는 많은 종교가 사람을 제물로 바쳤고 세월이 지나면서 동물로 대체되다가 마지막에는 돈이 제물을 대신하는 과정을 겪었다면 힌두교는 아마도 동물을 번죄하는 단계에 머물러 있는지도 몰랐다. 물론 힌두교가 가장 오래되고 포용적이고 풍부한 종교의 하나라는 사실을 부인할 순 없지만 아직 산 동물을 재물로 바치는 의례는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이 날도 애초로운 눈빛으로 울어대던 어린 염소가 가차없이 목이 잘리고 그 피를 뿌리는 제례가 진행되었지만 지금까지 방문한 3힌두사원중 가장 오래 머물며 꼼꼼이 둘러보고 줄을 서서 이마에 티카를 찍고 예배까지 올렸다.        

 

바글룽 시내를 한바퀴 돈뒤 그냥 아무것도 안하고 스쳐 지나가기에 아쉬워 찦을 내려 음료수를 사서 한병씩 돌렸다.  음료수를 마시고 차는 바로 바글룽을 나와 강을 건너고 조금 전 벗어났던 바글룽-포카라 하이웨이를 다시 올라탔다. 편한 길을 따라 평화로운 마을을 지나고 어디라도 내려서 걸어도 좋을 아름다운 풍경 속을 차는 달렸다.  풍경 하나하나가 그냥 스쳐지나가 내 기억속에 머물지 못하고 사라져갈 것을 생각하니 이 모든 것이 아쉬움을 넘어 슬프게 느껴졌다. 어떤 장소 어떤 순간에도 머물 수 없고 오직 확실한 것은 바로 이 순간이라는 섭리가 애닯펐다. 안나푸르나 라운드가 끝나가는 시간 아쉬움과 서글픔이 내 마음에 차올랐다.

 

이미 익숙해진 안나푸르나베이스캠프 코스의 출발점인 나야풀을 지나 길가 식당에 차를 세운뒤 기사는 식사를 하지 못했다며 식당안으로 사라졌다. 네팔사람들은 아침겸 점심을 오전 10시경 먹는 생활습관을 가지고 있는데 그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덕분에 안나푸르나 라운드가 완전히 끝내기 직전 차를 내려 네팔의 산과 들, 안나푸르나 기슭의 삶의 터전을 다시 한번 느껴볼 수 있었다. 가난 속에서 아름답게 지켜온 네팔리들의 삶의 온기와 긍지를 안나푸르나를 통해 다시금 반추했다.  

 

근 40일만에 포카라로 돌아왔다. 그동안 카트만두 인근 도시를 주유하고 안나푸르나를 한바퀴 돌았다. 다시 돌아온 포카라는 초록이 더 짙어졌고, 날은 더 더워져 있었다. 두 가이드와 4명의 트레커는 식당을 찾아 점심을 나누고 바수에게 약속했던 선글라스를 선물했다. 가이드하고는 카트만두서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고 헤어졌다. 그리고 숙소를 찾아 잠깐 거리를 헤멘뒤 이쁜 정원이 달린 값싼 숙소에 짐을 풀었다. 온수가 나오고 와이파이가 되면서 이쁜 정원이 딸린 [Hotel Elia]에서 하루에 1000루피, 우리 돈으로 만원정도에 방을 얻었다. 우리에겐 충분한 시설이였고, 여행자의 거리인 레이크사이드에 접해있으면서도 조금은 덜 번잡한 거리여서 모든게 마음에 들었다. 짐을 풀자마자 M과 나는 호텔을 나서서 이발소를 들렀다. 바로 호텔과 붙어있는 작은 이발관이었다.  한국 떠난뒤 거의 두달만에  산적머리가 되어버렸는데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좀 깔끔해지고 싶었다. "Only hair cut, please!"를 외치고 비몽사몽간에 이발을 마치자 "Ok!"를 몇번이나 반복해서 외쳤던 이발사는 컷트비, 안면 마사지비, 안마비, 두피마사지비, 세발비 등등을 붙여 무려 두사람 이발비로 6000루피 가량을 요구했다. 잠깐 실랑이를 벌이다 요구를 거의 다 들어주고 나왔는데, 혼자서 쇼핑 갖다가 뒤늦게 이발소를 들렀던 D역시 엄청난 바가지를 쓰고 왔다. 우리는 이날 포카라판  "3얼간이"를 찍었다며 스스로를 위무했다. 그날 이후 포카라를 떠날 때까지 몇번을 더 마주친 이발사는 우리에게 반가운 인사를 보냈지만 우리는 그를 마주치는 것이 너무 싫었다.  나쁜 기억을 빨리 잊고 싶은데 그 이발사에게 너무나 즐거운 기억이었을 것이 틀림 없었다.  '낮술'에서 저녁을 먹으며 포카라의 밤을 맞았다. 

 

2월 17일 아침 게으른 잠에서 깨어나 샤워를 하고 호텔인근의 식당에서 아침을 해결한뒤, 와이프는 호텔에서 스케치나 하면서 쉬겠다고 남고, 남자 3명이서 Tashi Palkhel  티벳 난민촌을 찾아 길을 나섰다. '할란촉'에서 '제로킬로미터'라는 지명의 교차로에 이르고 거기서 다시 버스를 갈아타고 전날 포카라로 돌아올때 달렸던 길을 바글룽 쪽으로 되돌아갔다. 버스가 포카라 시가지를 벗어날 즈음에 왼쪽 언덕위에 룽다와 타르초가 휘날렸다. 우리와 닮은 사람들이 사는 타시팔켈 티벳난민촌에 도착했다. 같은 몽골계라서 그런지 티벳탄을 만날 때 마다 꼭 어릴 때 동네에서 부댓기며 살아가던 이웃을 떠올리게 된다, 지나간 시절의 이웃 아저씨나 삼촌같은 사람들을 다시 만날 수 있는 타시 팔켈 티벳난민촌은 조용했다. 골목을 뒤덮은 고요와 한적함이 현실감을 줄였고 꼭 타임머신을 타고 50년전 어린시절로 되돌아온듯 몽롱했다. 골동품가게가 있고 기념품을 팔고 있는 노점상들이 있었지만 방문객이라고는 우리밖에 없었다. 마을을 돌기전에 먼저 식당에 들러 물소고기를 듬뿍 넣은 뚝바를 먹으며 삶의 현실감을 되찾았다. 

 

식당을 나오자마자 마을입구에 있는 골동품 가게를 들러 작은 기념품을 사고 D로부터 멋진 골동품 주전자를 선물로 받았다. 가지고 싶은 것은 많았지만 소유의 덪없음을 깨우쳐주는 사찰입구에서 욕심을 다 채울 수는 없었다. 마을을 둘러보고 캠프촌과 사원 그리고 멀리 포카라 변두리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위 뷰포인트까지 올랐다. 그리고 골목길을 따라 내려와 사랑곳에서 짚라인이 이어지는 "Hemja 번지점프"를 지나 또다른 불교 사원을 들렀다. 사원은 확장 공사중이었고 아마도 승려 부속학교를 운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무렇지도 않게 낯선 사람이 들고 나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이들의 무경계심이 불교의 탓인지 네팔리의 심성  탓인지는 알수 없었다.  참 신기하게도 가는 곳마다 네팔리들은 사람에 대한 경계심을 드러내는 경우를 본적이 없었다. 

 

티벳 불교 사원과 고향을 떠난 이국에서 난민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모여사는 난민촌 골목길을 걷던 3명의 일행은 각자의 상념에 빠져 길을 잃었고 모두 흩어지고 말았다. 우여곡절끝에 나는 M과 만났지만 결국 D는 합류하지 못했다. 리버사이드로 돌아오가는 버스라고 올랐지만 몇정거장 못가서 내리게 되고 다시 한참을 걸어 '제로킬로미터'라는 거리에 가서야 겨우 리버사이드를 가는 버스에 오를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혹시 한국인이냐며 물어온 한국에서 일한 적이 있다는 네팔리를 만나 친절한 안내를 받기도 했다. 어렵게 돌아온 호텔에 길잃은 D 마저 돌아오자 지난 달 친구들과 안나푸르나를 걸을 때 신세졌던 가이드 라마님과 연락이 닿았다. 오랜만에 만나 나는 늘 궁금한 것이 많은 네팔의 삶에 대해 물었지만 한국에서 노동자로 오래 근무한 적이 있는 라마는 늘 한국의 삶과 '사업'에 대해 궁금한 것이 더 많았다. 지난 여정을 함께한 모두 '산마루식당'에 둘러 앉아 행복한 포카라의 마지막 밤을 만끽했다. 

 

카트만두로 돌아가는 날 아침 일찍 잠을 깼다. 전날 라마를 통해 예약해둔 자가담바 버스를 타기위해 짐을 끌고 할란촉으로 나갔다. 7시에 온다던 버스는 오지 않고 아침마다 지고다니며 이른 출근객과 여행객을 대상으로 파는 거리의 빵으로 아침을 떼우고 있자니 예정시간을 30분이나 지나서 버스는 도착했다. 그나마 안도하며 버스에 올라 조용히 창가를 통해 물러나는 포카라의 거리를, 리버사이드와 댐사이드의 지난 여정의 흔적을 드듬었다. 이제 그리움으로 변해버릴 포카라에서의 기억들을 곱씹으며 하루종일 버스는 포카라-카트만두간 프리씨비 고속도로를 달렸다. 차창을 쓰쳐 뒤로 물러나는 풍경들이 초등학교 졸업 앨범의 가슴시린 사진마냥 어렴풋한 기억으로 나의 뇌리에 쌓여갔다.  

 

 

돌아온 카트만두의 숙소 마야거르츄는 여전했다. 내일이면 산으로 떠난다는 사람들이 있고. 아침에 산으로 떠났다는 사람들의 이야기와 온기가 남아 있었다. 우리는 슬그머니 마야거르츄의 원주민인양 스며들어 그들과 자연스레 하나가 되었다.  우리가 없는 사이 다른 많은 사람들이 마야거르츄를 들러고 그리고 안나푸르나나 랑탕, 그리고 히말라야를 거친뒤 다른 사람이 되어 돌아와 다시 머문뒤 한국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우리는 산전수전 다 겪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마야거르츄에 돌아왔지만 안나푸르나로 떠나기 전의 자신과 달라진게 아무것도 없음을 애써  자각하지 못한듯 안타까워하지도 부끄러워하지도 않은채 편한 표정으로 세상을 마주했다. 

 

 

오랜만에 돌아온 카트만두의 첫날도 타멜거리로 나갔다.  특별히 할 일도 목적지도 없이 타멜의 거리를 걷고 이런 저런 가게를 들러  기념품을 샀지만 네팔에서 제일 유명하다는 서점인 pilgrim bookstore에서 두권의 책과 몇가지 기념품을 샀다. 여정이 끝나고 귀국하고 나면  네팔의 마오주의 혁명사를 다룬 [The Bullet and The Ballot Box]와 네팔의 역사를 간략하게 정리한 [The History of Nepal]을 틈틈히 읽으며 네팔에서 보낸 나의 시간들을 반추할 것이다. 저녁은 타멜거리의 블랙올리브에서 성찬으로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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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2일 좀솜에서 출발하여 Syang이라는 마을을 지나 마르파에서 점심을 해결하고 차이로 숲길을 따라 투구체에 도착하여 하루를 마무리했다. 다음날 투구체를 출발하여 코켄탄티에서 점심을 먹고 칼로파니 지나 가사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아침 일찍부터 좀솜공항에는 비행기가 도착하고 이어서 이륙을 준비했다.  공항과 붙어 있는 숙소다 보니 비행기 소음이 장난이 아니었다. 숙소 옥상에 나가 가까이서 프로펠라 비행기가 이착륙하는 장면을 구경했다. 포카라와 좀솜을 잇는 정기항공노선이지만 좁은 계곡을 오르내리는 항로가 위험하다보니 사고도 잦은 구간이다. 쏘롱라를 넘은 대부분의 트레커는 여기서 걸음을 멈추고 비행기로 포카라로 빠져버린다. 우리는 가능한한 포카라 가장 가까이 까지 고집스럽게  걸음을 계속하기로 했다. 다울라기리 쪽으로 올라 포카라로 향하는 비행기가 사라져 간 깔리깐다끼 강을 따라 우리도 길을 나섰다. 

 

 

 

좀솜을 벗어나자마자 홍수가 휩쓸고 지나간듯 거친 지형의 계곡 합류점을 건넜다. 그리고 바로 깔리깐다기를 벗어나 오른쪽 가파른 언덕길을 통해 Syang으로 향했다. Syang은 전날 들렀던 티니가온과는 다른 또 다른 멋이 있는 마을이었다. 골목은 정갈했고 마을은 훨씬 정돈된 느낌이 들었다. 사람이 떠나가는 마을이 아니라 머물고 살아가고 자자손손 이어갈 마을로 사람의 훈기가 느껴졌다. 양지바른 담벼락 아래 해바라기를 하고 마을의 느낌을 온 몸으로 받아들여 평온한 마음으로 마을을 걸었다. 마을을 벗어날 즈음 한 네팔리 아가씨가 학교앞에서 등교하던 아이들과 과자를 난주어 주면서 놀고 있었다. 우리의 가이드는 금방 그 아가씨랑 친해져 좀솜으로 올라간다는 사람을 왔던 길을 되돌아 우리와 합류하게했다. 이날 걸음을 멈춘 투쿠체까지 같이 걸었던 그 아가씨는 무슨 연유로 가던 길을 되돌아 우리와 합류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왜 다시 떠나갔는지 끝내 이해할 수 없었다.

 

Syang을 지나 마르파까지 가는 길은 초록이 완연했다. 해발 고도가 3000m이하로 내려 온 뒤로 늘어가던 초록빛이 네팔 사과의 최고 생산지인 마르파가 다가오자 더욱 진해졌다. 2월에도 아랑곳없이 마르파에는 봄이 오고 있었다. 멀리 설산을 등지고 깔리깐다끼 강을 안은 초록 밀밭과 살구꽃이 어우러진 과수원의 풍경이 평화로웠다. 네팔 사과 브랜디의 산지로 유명한 마르파가 다가오자 나의 가슴은 뛰기 시작했다. 마르파가 브랜디의 산지라서가 아니라 네팔 사과의 주산지라는 사실이 사과 농사를 짓는 한국 농부에게는 각별하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마르파의 사과농사에 대한 기술적 경영적 정보는 하나도 중요한 것이 없겠지만 사과나무가 자라고 계절이 오면 꽃이 피고 잎이나고 열매가 달려 빨갛게 익어갈 네팔의 한 마을을 만났다는 그 사실이 나에게는 소중했다. 마르파는 좀솜에서 거리 멀지 않았다. 점심무렵 좀솜 베니간 도로를 벗어난 우리의 걸음은 마르파를 들어서기 시작했다.

사과의 산지로만 알고 있던 마르파는 한적한 농촌 마을이 아니라 트레커의 발길이 머무는 주요한 거점도시였다. 다울라기리 베이스캠프 코스로 들어가는 체크포스트가 있고 따라서 호텔과 레스토랑은 물론 트레킹관련 용품 가게까지 즐비했다. 도시가 번화한 만치 공동체 도서관과 교육 시설도 갖추어져있고 한때 일본인의 발길이 붐볐는지 '사꾸라' 라는 이름의 호텔도 있었다. 우리는 식사를 하고 마르파를 벗어나기전에 마르파를 조망할 수 있는 언덕위에 자리잡은 사원을 방문했다. 계단을 통해 사원에 이르자 많은 신도들이 마당에서 식사를 나누고 있었다. 식사중인 무리를 가로질러 지나가기가 불편했지만 마르파를 조망할 수있는 위치까지 올라가 전체가 한 덩어리로 붙어있는 듯 꽉짜인 마르파의 전경을 눈에 담았다.  

마르파에서 애플브랜디를 사고싶었지만 그 무게에 지레 겁이나 포기하고 다음 행선지인 차이로를 향했다. 차이로는 깔리깐다끼를 서쪽으로 넘어 티벳탄 캠프가 있는 숲속마을이었다. 이때부터 이날 오후는 투쿠체에 이르기까지 아름답고 편안한 숲길이 계속 이어졌다. 고개를 들어 멀리 설산을 보지않는다면 길은 한국의 야트막한 야산의 숲길과 진배없었다. 오후내내 길은 평탄했고 녹색의 숲은 짙고 싱그러웠다.

투쿠체에 들어설 무렵 오후가 깊어져 마음이 급해지기 시작했다. 비시즌이다보니 몇몇 숙소는 아예 문을 닫았고 마땅한 숙소를 쉬 찾지 못했다. 가이드로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는데 다행히 마을이 끝나갈 무렵 손님을 받는 숙소를 구할 수 있었다. 그렇지 못했다면 우리는 야간 트레킹을 두어시간 더해서 다음 숙소를 찾아야만 하는 어려운 상황에 처할뻔했다. 짐을 풀고나니 가이드 나브라즈는 이곳에서 애플 브랜디 공장을 운영중인 친구가 있다며 몇병 싸게 해줄테니 사기를 권했다. 우리는 사고싶지만 아직 걸어야할 길이 많은데 짐을 감당할 수가 없다고 답했다. 하지만 나브라즈는 자신들이 그정도는 얼마든지 들어줄 수 있다고 강권하는 바램에 한명당 두어병의 브랜디를 사게 되었다.

 

숙소의 옥상에는 다이닝룸으로  사용되는 유리온실같은 작은 공간이 있었다. 아직은 아침저녁으로 쌀쌀한 날씨인데 다이닝 룸은 따듯했다. 그 시간까지 손님이 우리밖에 없다보니 우리는 다이닝 룸을 우리만의 공간인양 점령했다. 늦게 칠레 트레커 한팀이 합류하기 전까지 우리는 다이닝 룸에서 커피와 담배를 나누며 해지는 다울라기리를  바라다보는 호사를 누렸다. 강길에서 숲길로, 좀솜에서 시작해 상과 마르파와 차이로를 지나 투쿠체까지 참 많이 걷고 행복했던 하루를 나브라즈가 사온 애플브랜디를 한잔 나누며 마무리했다. 룸에 들어와 침대에 누워서 처음으로 이제 한국으로 돌아가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관계, 환경, 그리고 삶에 대해 더 사랑하게 될 것같은 예감에 사로잡혔다. 집이 그리워졌다.

2월 13일의 아침이 밝자 간단한 조식을 해결하고 짐을 싸는데 우리 가이드와 롯지 주인간에 싸늘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가이드는 식사도 거부하고 빨리 떠나기만을 바라는 눈치였다. 대충 파악한 바로는 어제 저녁 외부에서 사온 브랜디를 마신 것에 롯지 사우니가 기분나쁜 소리를 한것 같았다. 롯지도 브랜디를 파는데 왜 외부에서 사온 술을 마셨냐고 사우니가 따진것 같았다. 우리는 나름대로 양해를 구했다고 알고 있었는데 우리와 가이드, 가이드와 사우니, 그리고 우리와 사우니간의 삼각 소통에 문제가 있었던 것 같았다.

투쿠체를 출발해 얼마지나지 않아 라르중이라는 마을에서 식당에 들러 간식을 먹으며 휴식을 취했다. 숙소의 사우니와 틀어진 가이드가 아침을 굶고 출발한 덕에  우리까지 든든한 참을 먹고 다시 길을 이어갔다. 라르중을 지나 점심을 해결한 코켄탄티까지 이어지는 길은 어제의 느낌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우리는 강을 따라 평탄한 초록 숲길을 걸었고 걸음이 이어질수록 나무는 높고 초록빛깔은 더 짙어졌다.  숲길을 벗어나면 하상으로 내려와 사막같은 강바닥을 자갈을 밝고 걷고 다시 길을 만나면 초록 숲으로 걸음을 이어갔다. 깔리깐다끼의 오후 바람이 워낙 유명해 오전동안 걷고 오후에는 걸음을 멈추라는 가이드북의 안내에 잔뜩 긴장했는데 우리 일정 동안에는 그렇게 험한 바람을 만나지 않았다. 우리는 오전에도 걷고 오후에도 깔리깐다끼를 따라 마냥 걸었다.

까그베니를 지난 뒤로 깔리깐다끼강을 도대체 몇번을 건넜는지 모른다. 강의 왼편길을 걷다가 다시 강을 건너 오른편 길을 걷고, 그리고 언덕을 만나면 강으로 내려섰다가 다시 강둑을 올라 또 강을 건넜다. 코켄탄티을 만나기 위해서 찻길을 벗어나 다시 강의 동쪽으로 건넜다. 코켄탄티 마을은 몇 가구되지 않는 소박한 마을이었다. 그나마 강쪽으로 붙어있는 집들은 수해로 무너져 내려 지난 홍수의 흔적을 안고 있었다. 강과 마을이 너무 붙어있고 강과 길이 거의 수평에 가까운 마을이다 보니 또 언제 수해를 당할 지 위태로워 보였다. 우리는 조그만 롯지에서 점심을 주문하고 덜마른 빨래를 배낭에서 꺼내 햇볕에 늘었다. 차를 마시며 지도를 보고 다음 일정을 검토하며 점심을 기다리는 시간이 충만했다. 걸어서 좋고, 걷다가 쉬어서 좋고, 쉬다가 다시 걷는 것 또한 좋으니 어쩌면 걷기는 인간의 가장 완벽한 행위인지도 모르겠다.

 

 

고도를 낮추고 길이 산에서 멀어지는 만치 사람의 발길과 마을의 훈기는 늘었다. 코켄탄틴을 지나면서부터 마을도 마을과 마을을 잇는 길도 분위기가 달라졌다. 찻길과 트레킹코스를 교차하며 우리의 길을 찾아나가면서 만나는 사람들의 활기가 달랐다. 산에서 만나 사람들은 아직 겨울에 갖혀 추위에 웅크리고 봄을 잊고 있었다면 고도가 낮아지고 벌써 봄이 느껴지는 지대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얼굴에 화색이 돌고 걸음걸이도 씩씩해졌다. 초록색이 들판에서 시작해 산으로 번져감에 따라, 봄은 우리 마음에서 시작해 몸에서 완성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코켄탄티를 출발해 오후의 휴식을 깔로파니에서 커피를 마시며 보냈다. 커피를 마신 깔로파니 게스트하우스는 규모도 있고 시설도 고급스러웠는데 우리 가이드는 하루 일정을 거기서 멈출 것을 제안했다. 좋은 숙소에서 지내고싶은 마음이 없지는 않았지만 걸음을 멈추기에는 너무 이른 시간이었다. 일정상 너무 일찍 걸음을 멈추면 다음날 일정이 늘어나 고생할 수밖에 없어서 제안을 받아들일수 없엇다. 아쉬워하는 가이드와 함께  예정된 숙소가 있는 가사까지 다시 걸었다. 

 

 

가사에 도착해 "플로리다 게스트하우스"에 짐을 풀었다. 미지근한 물이 나오다 찬물로 바뀌어 버린 수도꼭지에 몸을 맡기고 나니 온기가 절실했다. 다행히 우리에 이어서 두어팀의 트레커도 들어섰고 같은 숙소에 지내게 된 손님이 늘어나니 다이닝룸에 숯불 난로가 들어오고 온기가 흘렀다. 너무 붐비지도 않고 쓸쓸하지도 않을 정도의 손님이 함께 하는 숙소가 딱 좋았다. 

 

 

 

롯지와 가까운 안나푸르나 산자락에 산불이 났다. 불길이 커졌다 작아졌다 살아 움직이고 흰 연기가 쉼없이  피어났지만 산불을 꺼기위한 어떤 움직임도 보이질 않았다. 네팔리들은 아무도 산불을 의식하지 않는듯 태연했는데, 산불이 번져봤자, 눈이 쌓여 있는 고도에서 멈출 수 밖에 없고 우거진 숲이 없어 크게 신경쓸것도 없다고 생각하는 건지 아니면 험준한 산악지대에 산불을 끌 소방헬기도 없고 인력으로 끈다는 것도 불가능하니 그냥 방치하기 때문인지는 알수 없었다. 불 타는 산 아래 마을의 숙소에서 조금은 불안한 잠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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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8일 새벽 4시에 기상하여 간단한 식사후 쏘롱라를 향해 출발, 하이캠프를 지나 해발 5,416m인 쏘롱라에 정오무렵 도착, 이후 묵디나트를 향해 하산하여 저녁무렵 Ranipauwa에 도착 Hotel  North Pole에서 짐을 풀고 이틀을 머물렀다.



밤새 뒤척이다 새벽 4시에 기상하여 아침을 먹는둥 마는둥하고 점심으로 빵을 챙겨 5시에 롯지를 나섰다. 사방은 암흑천지지만 머리에 해드랜턴을 단 10여명의 트레커와 더댓명의 가이드 포터가 나란히 쏘롱라를 향해 출발했다. 좁고 가파른 길이 우리를 맞이했다. 다행히 바람도 눈도 없고 기온도 차갑지 않았다. 다리 아프고 숨이 찬 것 말고는 아무런 장애가 없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우리는 눈앞만 비추는 핸드랜턴에 의지해 오직 발디딜 곳만 확인하고 걸어야 했다.  설사 주변이 밝았다고 해도 발이라도 미끌어지는 순간 천길 낭떨어지가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라 경치에 신경쓸 겨를도 없었을 것이긴 했다. 긴 침묵 속에 해드랜턴의 불빛이 점점이 이어지는 가파른 길을 걷고 또 걸었다. 



어둠에 묻힌 절경을 보지 못하고 세 걸음 걷고 한숨을 돌리고 다시 세 걸음을 걷고 동행의 상태를 살피고 그렇게 계속해서 걷다보니 어느새 먼동이 트고 주변이 밝아 왔다. 갑자기 암흑 속에서 산들이 기적같이 살아났다. 산중에서 이런 일출을 맞을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는데 안나푸르나는 덤으로 가슴벅찬 감동을 안겨주었다. 아침 여명이 히말라야를 깨우고 우리의 걸음은 좀더 자유로워졌다. 출발하고 1시간 15분 남짓 지났을까 해발 4950m의 마지막 롯지가 있는 하이캠프에 도착했다. 짧은 시간에 고도를 무려 400m나 올린 셈이었다. 전날 하이캠프에서 잠을 잔 트레커들은 이미 다 출발하고 한명도 남아있지 않았다. 쏘롱패디에서 출발한 우리 일행들만 롯지에 들러 커피를 마시고 숨을 고른뒤 다시 길을 나섰다.

 

 

중국인 커플과 뉴질랜드인 커플 그리고 우리 한국인 4명에 3명의 포터가 나란히 출발했다. 음지의 위험한 눈길이 계속 이어지고 고도를 높일수록 시야는 더 넓고 자유로워졌다. 왔던 길을 뒤돌아보면 멀리 Chulu East(6429m)자태가 공룡 등짝같이 경이로웠고, 우리가 가는 길의 왼쪽으로는 Khumjungar(6759m)로 이어지는 산세의 흐름이 아름다웠다.  하지만 트래커들은 모두 지쳐가기 시작했고 걸음은 쳐졌고 숨은 가파졌다. 그리고 점점 사람과 사람 사이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우리 부부는 아까운 체력을 소진하지 않기 위해 걸을 수 있을 때 최대한 올라가자는 마음으로  다른 팀들을 추월해서 앞서 나가기 시작했다. 



쏘롱라에 다가 갈수로 나는 나도 모르게 호흡과 다리, 그리고 시간과 거리에만 정신이 쏠렸다. 가쁜 숨과 아픈 다리가 해가 지기전에 묵디나트로 나를 데려다 줄수 있을까하는 사실만 중요해지고 더 중요한 나머지는 사소해지는 이상한 경험을 하였다.  걸음을 통해 산의 기운을 느끼고, 안나푸르나가 선물하는 절경에 취해 생명의 환의에 들뜰줄 알았는데 나의 걸음은 고난의 구간을 벗어나기에 바쁘기만했다. 하이캠프를 나선지 꼭 4시간만에 쏘롱라에 도착했다.  



먼저 도착한 안도감도 잠시 걷기를 멈추자 추위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일행을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지자 걱정도 되기 시작했다. 쏘롱라 옆 언덕까지 올라 왔던 길을 되돌아봐도 일행의 흔적은 보이질 않았다. 그렇다고 되돌아 가보기엔 올라온 길이 너무 아까웠다. 무려 한시간이나 지체한 뒤에 먼저 나의 일행이 거의 탈진 상태로 도착했다.  11시 30분이었다. 자신의 작은 배낭마저 포터에게 넘기고 몸만 겨우 올라왔지만 막상 도착해서는 그랟 기운을 차렸다. 같이 간식을 나누고 사진을 찍는 사이 뉴질랜드 커플과 중국인 커플도 도착했다. 어떻게 된 것이 나이와 역순으로 쏘롱라에 도착하는 걸 보니 젊다고 튼튼한 것은 아닌게 확실했다. 우리 부부는 괜한 우쭐함에 어깨 힘이 들어갔다.



정오가 되자 우리 부부는 제일 먼저 출발했다. 상행길과 마찬가지로 서로 각자의 체력메 맞춰 걸어나갔다. 하행길의 풍광은 상행길에 비할 바는 못되었다. 발을 딛고 선 주변의 풍경은 초라했다. 하지만 고개를 들면 멀리 병풍처럼 앞을 가로 막고 선 다울라기리 산군의 숨막힐 듯한 풍광에 탄성이 절로 나왔다. 다울라기리까지 걸어갈 요랑이었는지 쉼없이 내달려 오후 2시반에 고도 4,200m의 바즈라마을에 도착했다. 파라다이스 롯지에서 시벅쥬스와 정체를 알 수 없는 rhubarb 쥬스를 와이프랑 나눠 마시며 일행을 기다렸다. 롯지주인에게 담배를 요청하니 새갑을 구하지 못해 자신의 담배 2개비를 나누어 주었다. 무려 한시간이 지나서야 일행이 도착했다, 상행길 한시간 하행길 한시간을 기다림으로 보냈다. 너무 좋은 체력이 문제였다. 그런데 사실 그 기다림의 시간이 너무 좋았다.



3시반에 도착한 일행과 차를 마시고 4시에 바즈라를 출발하여 530분에 묵디나트를 지나 Ranipauwa에 도착했다. Ranipauwa는 네팔여정중 최고의 풍경을 가진 가장 드라마틱한 마을이었다. 꿈속에서나 그리던 풍광을 지닌 Ranipauwa는 높은 설산이 멀리 둘러쳐진 활무지로 형성된 너른 구릉지의 양지바른 언덕위에 자리잡고 있는 오래된 마을이었다.  석양을 받으며 꿈속같이 안온한 느낌을 주던 마을은 밤이 되니 설산과 구름 그리고 달빛과 타르초가 어울려 내 눈과 마음을 맑게해 주었다. 어린 시절 골목길을 나설 때 서늘한 밤공기 주던 알 수 없던 울렁거림이 다시 되살아남을 느낄수 있었다. 



마을을 관통해 거의 끝에 다다라서야 외관이 조금 낡은 Hotel North Pole에서 방을 구했다.  외관은 낡고 복도 끝에 설치된 세면장과 화장실은 불편하기 이를데 없었다. 하지만 친절한 주인이 피워주는 숯불 난로 하나로 모든 불편함을 잊을만했다. 특히나 생각보다 싼 가격에 맛난 야크스테이크를 먹을 수 있어서 행복했다.  



새벽 4시에 일어나 하루에 고도를 1,000m나 높이고 다시 1,600m를 내린 쏘롱라 패스를 축하하면서 락시를 한잔 나누면  서로의 노고를 격려했다. 고산증으로 인해 배탈과 두통 호흡곤란을 겪은 두 친구와 특히 우리 짐까지 지고 힘든 하루를 용케 견뎌낸 두 가이드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그러고 보니 우리 부부만 전혀 아무렇지도 않게 쏘롱라를 넘은 것 같았다. 하지만 지나고 보니 새벽부터 어두워지기 직전까지 이번 여정 중 가장 많이 걸은 하루였고 가장 극적인 최고 고도를 넘어온 하루였지만 의외로 기억에 남는 풍경은 많지 않았다. 나름 힘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날은 네팔 여정중 가장 많이 걷고 가장 조금밖에 못본 하루가 된 셈이다. 


 

마낭에서 고소적응을 위해 이틀을 머문뒤 다시 묵디나트 Ranipauwa에서 이틀을 머물렀다. 이번에는 고소적응이 아니라 그냥 쉬기 위해서 이틀을 머물기로 했지만 Ranipauwa도 그냥 쉬기에는 가볼 곳이 너무 많았고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이틀도 부족할 것 같았다. 하지만 많은 것을 보기보단 차라리 더 많은 휴식을 위해 단촐한 일정을 잡았다.

 

 

먼저 전날 지나쳤던 묵디나트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원래의 마을 이름보다는 그냥 묵디나트로 불리는 라니포와와 붙어있는 듯 가깝게 느꼈는데 그래도 막상 걸어보니 30여분이 걸렸다. 겨울 사원은 한산했고 엄숙했다. 몇몇 관광객이 말을 타고 사원앞 공터에서 소란을 떨긴 했지만 계절상 많지 않은 순레객이 단정한 몸가짐으로 사찰을 돌고 108갈래의 성수로 몸을 씻어 죄를 씻고 다시 태어나는 의식을 치루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은 늘 죄업을 쌓고 있고 자신의 삶이 부정한 것에 물들어 있다고 생각하는가 보다. 약육강식의 세계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싸워야 하는 삶이고, 거기다가 어리석기까지 하다보니 늘 후회로 점철된 것이 인생일 것이다. 그래서 종교가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묵니나트를 흐르는 108줄기의 물로  몸을 씻고 사원 뒷마당 언덕에 입던 속옷마저 벗어 던지고 나면 저분들은 깨끗한 몸과 마음으로 다시 자신의 현실 속으로 돌아갈 것이다. 복잡한 삶의 방정식에 비해 너무나 단순한 답에 불과하지만 그 소박한 믿음을 통해서마나 삶에 생기를 불어넣을 수 있다면 뭘 더 바라겠는가.

묵니나트를 나와 Ranipauwa주변의 작은 사원과 언덕위에 새로 조성된 비슈누상까지 둘러보는 것으로 하루의 일정을 마쳤다. 오랜만에 샤워와 빨래를 하고 성대한 저녁상을 받은 자리에서 옆테이블의 한국에서 일하신다는 네팔 노동자 가족을 만났다. 오랜만에 귀국해서 가족들과함께 묵니나트에 참배 여행을 왔다고 했다. 한국에서 일하고 계시다는 것 만으로도 괜히 반가웠다.  

 

술기운에 일찍 잠이 들었다가 불편한 꿈에 쫒겨 새벽 3시에 잠을 깼다. 30대 초반부터 따라다니던  꿈은 늘 나를 세상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불안한 상황 속으로 몰아 넣는다.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하고, 스스로 누구인지 조차 확신하지 못하는 나는 늘 이십대와 삼십대의 경계에 서 있었다. 꿈을 깨고 나서 나는 스스로 물었다. 결국 어떤 것도 선택하지 못하고 세월의 힘에 밀려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닐까. 내가 하고자 하는 것, 하고 싶은 것을 마주하지 못하고 회피했다는 자책감이 나를 엄습했다.

 

 

나는 지금 나의 사회활동이 있고, 농사가 있고, 내 인생을 스스로 즐길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다는 생각으로도 내 자신을 위무할 수 없었다. 나는 한번도 뜨거워본 적이 없었고, 그 어디에도 제대로 한번 미쳐보지 못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구원의 땅 묵다나트에서도 나는 평화를 얻지 못했다. 바람에 휘날리는 타르초 소리를 들으며 다시 잠을 청했다. 내 귀에 울리는 타르초 소리는 바람이 불경을 읽는 소리일까 아니면 내 마음에 이는 번뇌와 갈등의 아우성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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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4일 Nawal을 출발하여 뭉지와 Braga를 거쳐 Manang에 도착해서 하루 여정을 마치고, 2월 5일 쏘롱라 패스에 앞서 고산에 적응하고 체력을 비축하기 위해 마낭에서 하루를 더 쉬었다. 


갸루에서 나왈까지의 느낌 그대로 나왈에서 뭉지까지 길은 이어졌다. 산등성이는 메마른 돌투성이 흙이 드러나고 드문드문 식물이 자라고  있었다. 야크의 먹이가 되는 키작은 초목이 자라는 목초지는 될지언정 밭을 갈고 곡식을 심기에는 땅은 너무 경사지고 거칠었다.  멀리 마르샹디 계곡으로 홈대 비행장이 내려다 보이는 길을 따라 걷다가, 고개를 들어 마르샹디 계곡을 다라 서북쪽을 향하면 멀리 강가푸르나와 안나푸르나 3봉이 눈에 들어왔다. 이 아름다운 길의 기억을 기록에 남기기에는 나의 글은 너무나 짧고 사진으로 다 담기에는 또 놓치는 것이 너무 많은 하루였다.   




나왈을 출발해 2시간여를 걸어설까? 우리는 Low Pisang에서 Hongde를 거쳐 오는 길과 만나는 나왈에 도착했다. 나왈은 험준한 아난푸르나 산등성이에서는 보기 드물게 너른 초지로 이루어진 마을이었다. 역시 야크의 교잡종으로 보이는 소가 한가롭게 마른 풀을 뒤지고 있었고, 말은 초지 사이를 흐르는 개울에서 물을 마시고 있었다. 말이 물을 마시는 사이 마부도 쉬기 위해 말을 내렸고, 우리도 배낭을 벗고 쉬어가기로 마음 먹었다. 뭉지는 말도 마부도 트레커도 짐을 벗고 쉬어가기 좋은 동네였다. 너른 초지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는 소들을 바라다 보면서 우리 역시 인생의 짐을 내려놓고 시벅쥬스를 한잔 가득 마시며 한가로이 해바라기를 했다.


   


나왈에서 마르샹디 강을 만나 30여분을 더 걸으니 마낭 직전 마을인 Braga에 도착했다. 강쪽 길가에는 롯지촌이 형성되어 있었고 오른쪽 산자락아래는 사찰과 함께 민가들이 옹기종기 모여 마을을 이루고 있었다. 동네 앞에 너른 초지 중간에는 불상이 세워져 있었고 주변에는 몇개의 벤치도 놓여져 있었다. 동네의 광장같은 역할을 하는 공유지 같았다. 우리가 마을에 들어설 무렵 수업을 마친 한무리의 꼬마들이 우리 앞을 지나갔다. 아이들을 보니 장난기가 발동했다. 우리에게  남아있는 2개의 축구공 중에 한개를 주고 싶었다. 아이들에게 축구를 하자며 불러 세워 잠시 잠깐이나마 같이 공을 찼다. 좀 더 놀고 싶었지만 브라가도 3,500m 고도의 고산 마을이다보니 금방 숨이 찼다.  




브라가를 지나 마르샹디강을 따라 30분도 걷지 않아 마낭이 올려다보이는 지점까지 도착했다. 마낭 도착전 마지막 휴식을 위해 차우타라(chautara)에서 배낭을 벗고 숨을 돌렸다. 본격적인 고산 트레킹을 시작하는 마을 마낭에서 보낼 이틀의 휴식에 가슴설레이며 마을을 들어선뒤 Tilicho Hotel을 찾아 짐을 풀었다.  모처럼 밀린 빨래를 하고, 마을을 돌아보고, 생필품을 사고 그러고도 시간이 남아 가이드 바수의 부추킴에 넘어가 뚱바를 파는 가게를 찾아 자리를 잡고 일행을 불렀다. 맛있는 애플파이로 기억될 Tilicho Hotel에서의 첫날이 저물었다.  




고도적응일로 꼭 하루 더 쉬어갈 것을 강권하는 안내서들에 따라 우리도 마낭에서 걸음을 멈췄다. 사실 마낭에서의 하루는 단지 쉬기 만을 위한 날은 아니다. 2박 3일을 지내도 다 둘러보지 못한 숱한 명소와 볼거리가 널려 있기 때문이다.  강가푸르나 호수와 빙하,  Milerepa's Cave와  Ice Lake 만해도 하루에 다 가 볼 수 없을 정도인데 나는 틸리초로 가는 길목에 있는 강사르 마을을 가보고 싶었다. 하지만 계획은 틀어지고 명소들은 다 건너 뛰고 가까이 마을 산책으로 하루를 보내기로했다.




게으른 아침을 보낸뒤 우리는 늦게 롯지를 나와 전날 스쳐 지나왔던 Braga로 향했다. 목적지 없이 보내는 하루를 브라가 곰파를 찾는 것으로 시작했다. 가파른 계단을 통해 올라간 곰파는 500년 이상된 사원이라고 했고 나름 세월의 멋을 간직하고 있었지만 사람의 손길을 받지 못하고 낡아가는 느낌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계절적인 이유로 일시적으로 비워져 있는 건지는 알수 없었지만 사람이 살지 않고 마을에 의해 관리되는 곰파치고는 너무나 방치된 느김이었다. 지금까지 들렀던 티벳불교 사원 거의 대부분이 중건중이거나 잘 관리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브라가 곰파는 그렇지 못했다.




브라가 곰파에서 내려와 마르샹디를 건너 강가푸르나와 마르샹디가 만나 형성된 널다란 초원을 걸었다. 늘 바람처럼 가벼워지고 자유롭고 싶다던 소망이 그 순간만은 이루어진것 같았다. 우리는 초원 여기저기에 흩어져 풀을 뜯는 말들 사이로 풀잎처럼 가벼운 몸과 마음으로 정처없이 걷고 또 걸었다. 일년 365일을 살면서 단 하루라도 가야할 곳도 없고, 기다리는 사람도 없고, 시간을 느낄 필요도 없는 진공같은 평화를 내 자신에게 선물하고 싶었는데 그 작은 소망이 마낭에서 마침내 이루어지고 있었다.



마르샹디는 강물은 많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맨발로 건널만치 적은 수량도 아니었다. 한참을 강을 거슬러 마낭 시가지가 끝나는 위치까지 가서야 다리를 만났다. 가파른 강둑을 올라 마을을 들어서니 마땅히 할일이 없이 마을을 배회하고 있던 바수와 나브라즈와 마주쳤다. 마지막 남은 축구공과 학용품을 전해줄만한 아이들을 만나지 못한 바수와 나브라즈는 우리를 마낭 곰파로 안내하며 마낭곰파에 딸린 마을 공동체 조직에서 아이들을 위한 프로그램 같을 것을 운영하고 있고 그곳에 기증하면 좋겠다는 제안 했다. 



마낭 곰파에 들어서니 7~8명의 사람들이 마주앉아 차를 돌리고 예불을 준비중이었다. 학용품이나 전달하고 부처님 앞에 공양이나 하고 나올 참이었다가 갑자기 곰파의 안내를 받아 경내에 착석하고 차까지 대접받았는데 곧바로 예정에 없던 예불에 참여까지 하게 되었다. 혹시 방문객을 위한 공연 개념의 예불이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겠냐는 생각이 더 크게 들었다. 전통악기를 연주하며 불경을 외는 네팔리의 목소리에 우리 모두는 푹 빠져 들었다. 고단한 삶이 그대로 묻어나는 투박한 형식의 예불이 억지로 짜내는 화려한 성전의 경건함보다 더 절실하게 다가왔다. 제도화가 덜된 날것 그대로의 종교를 만난듯한 감동은 오래도록 남을 것 같았다. 이렇게 예불마저 참여하고 나니 쏘롱라를 향한 우리의 발걸음에 부처님의 가호가 함께할 것이라는 믿음이 나를 든든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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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7일 네팔 들어온지 한달이 지났고 새로운 한달을 안나푸르나 라운드로 시작하기 위해 길을 떠나기전 하루의 여유를 카트만두 여러 곳을 둘러보는 것으로 보냈다. 28일 버스로 베시사하르까지 가서 바로 걷기를 시작하여 불불레 지나 라디바자르에서 라운드 첫 밤을 지냈다.  


아침에 눈을 뜨니 비가 내리고 있었다. 건기에 내리는 비는 축복이라고 했다. 대기의 먼지가 씻기고 마야거르츄의 마당은 촉촉히 젖어들었다.  우리가 걸을 길들 역시 먼지가 가라앉고 적당히 젖어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니 기분이 좋아졌다.  내일이면 우리 부부는 M과 D와 함께 안나푸르나 라운드를 떠나고  미리 와있던 L은 귀국길에 오르니 모두가 같이 하는 이날 하루가 더없이 소중했다. 일행이 늘어 택시 한대로 움직일 수 있는 규모를 넘어서다보니 2대를 부탁했다. 파슈파티나트로 향했다. 



카트만두를 찾는 방문자들이 꼭 들러야 하는 곳 중의 하나가 Pashupatinath다. 파슈파티나트는 네팔에서 가장 유명한 힌두교 사원으로  멀리 인도서까지  순례자들이 찾아 오는 곳이라고 했지만 우리에게는 노천 화장의식을 하는 하는 곳으로 더 알려져 있다. 사원과 일체를 이루고 있는 화장장인 아라 갓(aarya ghat)은 파괴의 신인 시바신의 화신인 파슈파티(야수의 왕)에게 받쳐진 사원의 한 부분일 뿐이다. 핵심적인 사원내부만 비힌두교도에게 입장을 금지하고 있지만 거의 날것 그대로의 흰두 예식과 화장 의식을 접할수 있는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중의 하나다.

 

 

택시에서 내려 일행을 찾는 동안 가는 비가 보도를 적시고 있었다. 비둘기떼의 어지러운 날개짓과 비가 만나니 파슈파니나트의 풍경이 더 스산해졌다. 1인당 천루피의 입장료를 내고 사람들의 흐름에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몇걸음 걷지 않아 갑자기 군인들이 다가와 나의 걸음을 막아섰다. 아무 생각없이 힌두교도만 들어갈 수 있는 사원 입구로 향하다 군인으로부터 제지를 받은 것이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방향을 바꾸어 허용된 구역 안으로 들어서니 말라가는 바그마티강과 강변의 화장터가 눈에 들어왔다. 오직 하나의 화장터에서만 마지막 불꽃이 사그라들고 있었다. 오늘은 또 어떤 사연을 간직한 삶이 지상에서 그 삶의 마지막 흔적을 지우게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구구절절한 이야기를 듣지 않아도 한명의 삶이 가졌을 모든 순간들의 희열과 고통, 그리고 그의 마음을 채웠을 그리움과 공허가 물밀듯 다가왔다.  그리고 죽음을 바라다 보는 산사람들의 마음에 피어오를 만가닥 상념의 소용돌이가 느껴졌다. 



바그마티 강을 건너  시바신에게 받쳐졌다는 Pandra Shivalaya라는 탑들 사이를 걷고, 강가의 둥근 반석위에서  의식을 치루고 있는 사람들의 처진 어깨를 바라다 보다 가파른 계단을 올라 동산의 정상에 올랐다. 동산을 이루고 있는 므르가스탈리 숲을 가로지르는 길은 한치의 틈도 없이 사원과 탑들이 빼곡히 채워져 있었고, 탑들마다 시바신이 타기를 기다리는 Nandi의 궁둥이가 우리를 반겼다. 비맞은 원숭이가 추운듯 서로 엉켜 웅크렸지만 낯선 방문객을 마득잖은 눈으로 바라단 볼 때는 주인의 위엄이 느껴졌다. 하지만 비에 젖은 Prasad(신전에 받치는 음식)를 주워먹을 때의 눈빛은 혹시나 낯선 인간들에게 나의 몫을 뺏기지난 않을까는 초조함과 비루함을 담고 있었다.  삶은 존엄과 비천 사이에 두루 걸쳐 있는 것! 그점은 모든 생명에게도 해당할 것이기에 우리는 늘 겸손해야하는 지도 모르겠다. 



북동쪽으로 방향을 잡아 동산을 내려오니 시바의 아내 Parvati의 자궁이 묻힌 자리에 세워진  Shree Guhyeshwori Temple이 있었다.  이 사원은 불임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임신을 축원하는 유명한 사원이라고 했는데 지난 지진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공사가 한창이었다. 사원을 지나 바그마티 강을 건너니 한적한  주택가가 이어졌다. 그리 멀지 않은 거리라 6명의 일행은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었고 아무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얼마나 걸었을까? 대로를 벗어나 골목으로 접어든뒤 혹시라도 길이 어긋날까 일행을 기다렸는데 결국 와이프가 보이질 않았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고 길이 갈라지는 지점에서 다른 길을 택해 달려가 보았지만 하늘로 솟아는지 만날 수 없었다. 하지만 보드낫이라는 목적지를 공유하고 있으니 택시를 타도 되고 물어서 걸어 와도 그리 멀지 않은 곳이라 남은 일행 5명은 보드낫으로 향했다.


 

보드낫은  여전했다. 입구는 인파가 붐비고 앞길은 차들이 엉켜 복잡했다. 티벳 불교의 성지 답게 각지 에서 모여든 티벳탄 순례자들과 우리같은 방문자들로 북적였다. 옛날 한때는 티벳 라사와 카트만두를 오가는 무역상이 머룰던 타망족의 마을이었던 이 구역 일대는 이제 티벳이 중국에 복속된 뒤 망명한 피벳탄의 집단거주질 바뀌었다고 했다. 보드낫 안으로 들어서자 스튜파를 도는 티벳탄들의 무리를 따라 나도 모르게 휩쓸리며 내가 가진 세상에 대한 기원을 읊조리기 시작했다. 순례객이 스튜파를 도는 의식을 kora라고 하는데 언젠가 다큐에서 몸을 겨우 가누는 할머니가 오체 투지를 하며 kora를 하는 이유를 묻자 뭍 생명의 고통을 들기위해서라고 하던 인터뷰가 떠올랐다. 나도 내 자식의 성공이 아니라, 나의 부귀와 영화가 아니라 세상의 생명 가진 모든 존재의 안녕을 빌며 스튜파를 두어바퀴 돌았다. 그리고 스튜파를 감싸고 있는 건물의 전망좋은 레스토랑에 자리를 잡고 어렵게 와이파이를 연결해 길일흔 와이프와 접촉했다.

 


일찍 숙소롤 돌아와 내일이면 떠날 안나푸르나 라운드를 위해 짐을 쌌다. 빠진 것은 없는지, 빼도 될 짐은 없는지 꼼꼼히 살피고 20여일동안 입에 맞는 음식을 접하지 못할 것에 대비해 저녁을 삼겹살로 준비했다. 벌써 익숙해진 가까운 골목길 구멍가게에서 식재료를 사서 밥을 하고 고기를 구웠다.  마야거르츄의 팟샹은 어떻게 구했는지 냉동 삼겹살을 조달해 주었고 다른 일행과도 같이 음식을 나누고도 고기가 남았다.  모처럼 속이 편안했고, 마음 편히 식사를 하고 나니 라운드 내내 계속 속이 안좋으면 어쩌지 하는 걱정이 사라졌다. 역시 나는 산 체질이라 산을 가기 전날부터 몸이 살아난다고 너스레를 떨며 침실로 돌아왔다. 



안나푸르나 라운드를 떠나는 날 아침이 밝었다. 지난 일주일 같이 했던 L은 한국으로 돌아가고 남은 4명은 같이 안나푸르나로 떠나는 날  마야거르추의 아침은 일찍 시작됐다. 6시 30분 L과 아쉬운 작별을 하고 앞으로 20여일의 여정을 같이할 2명의 포터 라마나쉬와 Basu 그리고 4명의 트레커가 2대의 택시를 타고 겅거부 뉴버스파크로  향했다. 도착한 겅거부는 5년전의 남루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언제 들어섰는지 번듯한 건물과 넓은 버스 승강장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곧 출발한 버스는 역시 시원하게 뚤린 RING ROAD를 따라 칸트만두를 벗어나기 위해 달리기 시작했다. 길은 달라졌지만 수시로 서고 가기를 반복하면서 문을 연채로 위태롭게 매달린 조수가 호객을 하는 모습은 달라진 것이 없었다. 버스는 거의 1시간 반 만에 카트만두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포카라를 가는 프리씨비 하이웨이를 둠레까지 달려 둠레에서 북쪽으로 방향을 잡은 버스의 시야에 설산들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가슴뛰는 설산의 풍경을 배경으로 그 아래 산중턱에 터잡아 살아가는 삶이 도드라지게 다가왔다. 오후 1시 30분이 넘어 안나푸르나가 시작하는 마을 베시사하르에 도착했다. 오래전 유일한 출발지 였던 베시사하르는 불불레까지 길이 나면서 트레커의 외면을 받기 시작했고, 다시 참체까지 길이나고 결국 마낭까지 길이 나면서 트레킹 출발점의 면모를 잃어버렸다고했다. 버스를 내린 우리는 이때까지 트레킹 출발점을 정하지 못했고 라마라쉬가 차를 구하러 사라진 뒤에 길가 식당에서 요기를 했다. 시간에 맞춰 출발하는 버스를 구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우리는 차를 타고 불불레까지 가서 걷기를 시작했던 지난 여정과는 달리 이번에는 베시사하르부터 바로 걷기를 작정했다. 



베시사하르를 출발해서 불불레 까지 가는 길은 편안했다. 마르샹디강을 따라 형성된 길을 걷고 민가를 만나니 아직 우리의 걸음은 산에 들어가지 못했고 하루종일 마을길로 이어졌다. 길도 단순했고 멀리 설산이 우리의 목적지를 안내하니 그냥 멀리 설산을 보고 걷고 또 걸었다. 불불레가 얼마 남지 않은 길을 지나자 마을 잔치가 한창인 것 같았다. Basu에게 물어보니 이날이 구릉족에게는 '로사르'라고 하는 설날이고 이웃의 친인척이 함께 모여 음식을 나누고 춤과 노래로 하루를 보낸다고 했다. 산업화의 댓가로 우리에겐 사라진 옛풍습을 낯선 안나푸르나 기슭에서  목격하게 되니 마음이 따듯해져 왔다. 흐뭇하게 바라다 보는 우리를 보고 춤 삼매경에 빠진 남성분이 손짓을 하며 우리에게 같이 할 것을 권했지만 오늘 가야만될 거리도 있고 실례도 될 것 같아 그냥 합장으로 인사하고 가던 길을 걸었다.



오늘 쉬었으면 하던 마을인 불불레를 도착했다. 지난 5년간 불불레는 강건너 동쪽 마을에도 찻길이 생기고 강과 롯지는 길로 갈라섰다. 집과 강과 마을이 한데 엉커 조화롭던 풍경은 사라지고 조금은 삭막하고 어설픈 불불레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어다,. 오랫만에 만난 친구가 너무 변해 있어 왠지 서먹한 그런 기분이 들었다.  바수와 라마나쉬는그리 멀지 않은 곳에 숙소가 있다며  우리가 계속 걷기를 권했다. 트레킹 첫날은 무리하지 않고 몸을 푸는 정도만 걸고 불불레에서 묵을 예정이었지만 잠깐의 망설임끝에 Upper Nadibazar 까지 걷게되었다. 우리는 지쳤고 해가 떨어져갈 무렵 5시 반이 넘어서야 낡고 허름한 롯지에 도착했다. 하지만 롯지는 마음에 들지 않았고, 첫 숙소 선정부터 가이드에게 속은 느낌이 들었다. 



불불레 지나면서 언제부턴가 우리의 포터들과 동행을 하게된 어떤 사람이 있었는데 그 분이 바로 이 롯지의 주인이었다. 나는 와이파이와 온수가 되는 롯지를 원했지만 가이드는 곤혹스런 표정이 역력했다. 아마도 롯지 주인의 호객에 넘어가 여기까지 무리해서 왔는데 우리는 불만스러워 보였고, 그렇다고 다른 롯지를 찾아 나설려니 해는 떨어지고 이 롯지 주인에게 미안하기도 해 곤란해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내일 부터는 숙소 결정에 좀더 관여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라운드 첫 숙소인 Upper Nadhibazar의 Annapurna Garden Restaurant & Guesthouse라는 이름의 남루한 롯지에 짐을 풀었다.

 


롯지 건물은 시설이라고 할 것도 없을 정도로 양철과 폐목재로 지어 비와 바람을 가리는 수준이었다. 녹슬고 구겨진 양철로 얼기설기 꾸린 움막수준의 건물은 그렇다고 해도 눕기에도 겁이 나는  곰팡내 나는 침대는 사실 받아들이기 불편했다. 그래도 그물망 창으로 들어오는 차가운 밤바람은 막아야할 것 같아 특별히 주인게게 부탁해 받은 얇고 작은 천을 스카치 테이프로 발라 잠자리를 갖추었다. 다이닝 룸에서 주문한 식사를 받았는데 역시 손님이 거의 없는 시즌이니 식재료가 잘 갖춰줘 있을 리가 없고 음식은 초라했다. 



하지만 이 모든 악조건에도 주인 내외의 친절은 우리의 마음을 풀어주기에 충분했다. "당신들을 우리 집에 모실 수 있어 너무나 행복합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찌그렸던 인상을 펼 수밖에 없었고, 아무런 불편함도 없고 만족스럽다는 표정으로 인사를 건넬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말뿐이 아니고 시설이나 물질로는 할 수 없는 띠뜻한 마음으로 우리를 대했다. 준비한 식사가 맛이 없지는 않은지를 묻고, 빈 접시를 채워주고 그리고 식사가 거의 끝나가자 온기가 있는 부억으로 우리를 초대했다.  젊어서 요리사로 바같 세계를 떠돌았다는 낯선 네팔리 한분을 포함해 모두가 모닥불을 중심으로 옹기종기 둘러 앉아 라운드의 첫 저녁을 맞았다. 



나디에서의 낭만적인 모닥불 파티는 일찍 끝났다. 자리를 같이했던 롯지 주인과의 관계는 알 수 없었던 네팔리는 우리에게 친절하고 우호적이었다. 미국에서 피자가게에서 일을했다며 우리 곁을 떠나지 않고 잘 알아듣지도 못하는 우리를 붙들고 끝임없이 영어를 늘어놓았다. 그는 마리화나를 하고 우리에게 권하기도 했다. 분위기에 젖은 바수는 락시를 들이키고 어느 순간 수다스러워졌다. 마리화나에 취한 네팔리와 술에 취한 바수가 자리의 분위기를 일찍 흐려놓는 바람에 다뜻한 모닥불의 아까운 불씨를 포기하고 침실로 흩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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