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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0일 묵니나트를 출발해 자르곳을 지나 Upper Mustang으로 들어가는 마을 까크베니에서 머문 뒤, 11일 깔리깐다기를 따라 좀솜까지 걸었다.  



 

구원의 땅 묵디나트에서 문득 두고온 집을 생각했다. 따뜻한 물이 나오고, 드끈뜨끈한 방바닥에  깨끗한 이불 그리고 맛있는 밥이 있는 집이 왜 갑자기 생각났는지 알수 없다. 여정이 40여일을 넘기면서 나도 모르게 거친 네팔 생활에 조금은 지쳤는가보다. 고산증의 위험도, 고산의 추위도, 힘든 강행군도 다 지나갔고 오직 따뜻한 햇살 속을 걷는 일만 남게되자 간사한 몸이 더 편하고 싶어진게 틀림없다. 그래도 여행을 마치고 귀국하고 나면 이 곳 네팔이 엄청 그리울 것이 분명한데 나이가 들수록 잊고 버려야 하는데 그리운 것이 늘어나서 큰 일이다. 



밤새 기온이 떨어졌는지 샤워실 물이 얼어 나오지 않아 고양이 세수를 하고 길을 나섰다. 전날 한국서 일하신다는 네팔리의 가족들도 묵다나트 사원을 참배하고 자신의 길을 가기 위해 숙소를 나섰다. 가벼운 작별인사를 나누었지만 그분의 차가 시동이 걸리지 않았다.  밤새 떨어진 기온 탓인지 시동이 걸리지 않는 네팔리의 짚차를 같이 밀어 겨우 시동이 걸리는 것을 확인하고 서로의 안녕을 빌며 작별했다. 라니포와에서 멀지 않은 거리에 있는 신비한 마을  자르곳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자르곳은 깔리깐다끼 계곡을 향해 돌출된 언덕 위에 형성된 마을로 멀리서 보면 위태롭기까지 했다.  



자르곳의 좁은 골목길을 따라 사원을 찾았다. 굳이 우리가 보기 원하는 걸 말하지 않아도 가이드 바수는 항상 앞장서 곰파를 향했다. 뭐 딱히 보여줄게 없기도 하겠지만 이곳 네팔리의 삶을 지탱하는 근본이 종교다보니 사원은 그들의 삶의 중심이 틀림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개별 사원의 특성을 이해하기에는 식견이 없으나 마을의 규모나 생활 형편을 사원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작고 가난한 마을의 사원과 크고 경제적으로 넉넉한 마을의 사원은 같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자르곳 역시 별다르지 않았지만 사원은 깨끗했고 마을의료나 교육관련 시민조직의 사무실도 사원과 붙어있어 나름 마을 공동체의 중심 역할을 하고 있어 보였다. 사나워 보이는 개의 환대를 받으며 사원을 나와 네팔리의 체취를 쫏아 골목을 누빈뒤 다시 가던 길을 따라 까그베니로 향했다. 



까그베니 가는 길은 묵디나트까지의 길과 확연히 달랐다. 베시사하르부터 묵디나트까지는 산행이었다면 묵디나트 이후 까그베니까지는 황량한 평원을 걷는 사막횡단 같은 느낌이 들었다. 길은 메마르고 척박한 황무지 능선이 이어지고 가파르게 깍힌 게곡과 파스텔톤이 번지는 신비한 색감의 능선들이 무스탕 특유의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그래도 금방 조성되었거나 조성중인 찻길을 따라 드물지만 여행객을 위한 찻집이나 롯지가 자리잡고 있었다.  물론 Upper Mustang이나  Dolpo와 같은 극한 오지의 느낌은 확실히 덜했다. 

   

 

묵디나트에서 까그베니까지의 길은 멀지 않았다. 서두르지 않고 걸어 늦지 않은 점심시간에  도착했다. 그래도 중간에 가게앞에 베틀을 두고 야크나 산양 털로 만들었다는 수제 숄과 머플러를 전시한 가게에서 구경도 하고, 가게와 붙어있는 찻집에서 차를 마시는 등 여유롭게 쉬기도 했다. 길은 편했고, 간혹 지나가는 차가 먼지를 일으켰지만 다행히 많지 않았다. 전봇대를 세우고 전선을 까는 기사들을 만나 물어보니 길을 따라 인터넷을 설치하고 있다고 했다. 지구상 몇안되는 오지의 대명사격인 무스탕에 인터넷이 들어오고 있다니 좀 씁쓸하기도 했지만 현지 주민의 삶을 생각한다면 환영할 수밖에 없었다. 



까그베니의 멋은 마을에 들어서기전 언덕위에서 내려다볼 때 확연히 다가왔다. 깔리깐다기와 묵디나트에서 흘러오는 강이 만나 이루어진 조금은 옹색한 계곡아래 형성된 퇴적지에 자리잡은 마을은 주변 황무지 산이나 능선과는 달리 초록색을 띠고 있었다. 거대한 무채색의 산과 구릉과 강 사이에 한 조각의 연두빛 마을이 자리잡고 있는 풍경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까그베니 덕분에 연두빛이 이렇게 도드라진 색상인지 난생 처음 알게 되었다.    



편한 걸음 끝에 도착한 까그베니의 롯지 [Hotel Nilgiri View]에 짐을 푸니 넉넉히 마을을 둘러볼 수 있는 오후 시간이 남겨져 있었다. 가이드가 인도한 롯지는 멋진 조망을 가지고 있었고 시설은 운치있고 편안했다. 점심을 먹고 마을 산책을 나섰다. 먼저 마을을 가로질러 Kag Chode Thupten Samphel Ling Monastery를 찾았다. 안내서를 보니 나름 역사가 깊고 규모있는 사원으로 교육사업 등을 하고 있으며 사원의 유지를 위해 후원도 받고 있었다. 흙과 나무로 거칠게 만든 탑은 본전으로 보였고 그 옆에는 신축 건물이 지어져 있었는데 본전을 마주보는 현대식 2층 건물에는 많은 티벳탄들이 공동생활을 하는 것 처럼 보였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는 티벳탄으로 보이는 신도들이 양지바른 마당 가에 모여 앉아 찬송을 하고 있었다. 운좋게 예불 시간에 우리가 도착한 것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어쩌면 예배 시간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하루 온종일 예배 중인지도 몰랐다. 늘 기도와 찬송으로 삶을 채우는 티벳탄들이 일은 언제하는지 궁금했다. 나는 네팔 여정중에 그들이 일을 하는 경우보다 기도하는 경우를 더 많이 본것 같았다. 그들에게 현세는 단지 스쳐지나가는 한 과정에 불과할테니 열심히 일하고 무엇가를 이루기 위해 분투할 장이 아닐 것이 분명했다. 집착할 아무런 이유도 없는 그들의 삶이 부러웠다. 



골목이라기 보다는 집과 집사이의 틈을 비집고 지나간다고해야 더 정확할 것같은 미로를 지나 Upper Mustang이 시작하는 지점에 도착했다. 깔리깐다키의 강폭은 광활하다고 표현해도 좋을 만했지만 건기다 보니 수량은 많지않았고 강을 따라 걷기에는 적격이었다. 우리는 모두 강으로 내려가 강바람을 맞으며 모래를 만지고 강물에 손을 적시며 강이 시작되었을 알수 없는 신비한 세계의 느낌을 더듬었다. 자갈을 던져 물수제비를 뜨고, 자갈을 뒤져 암모나이트 화석을 주우며 멀리 무스탕 깊숙히 자리잡고 있는 Lo Mantang까지 걸어가고싶은 마음을 가라앉혔다. 깔리깐다끼를 통해 Upper Mustang의 맛만 보고 마을로 돌아왔다. 



롯지는 비수기라서 손님이 우리밖에 없었지만 시설이나 진열해 놓은 상품 등을 보니 꽤 부유한 롯지로 느껴졌다. 제일 아랫층이 식당과 주방이 있고 2층에는 객실과 주인의 살림집이 있었고 우리가 지낸 3층은 객실과 다이닝 룸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층과 층을 잇는 계단이나 룸을 이어주는 복도가 오래된 일본이난 중국의 목조 건물같이 고색찬연하고 오밀조밀한 운치가 있었다. 그래서인지 하루밤 잠과 세끼 식사를 해결하기 위해 1층 식당과 3층 다이닝 룸을 잇는 계단을 수십번 오르락 내리락 거렸지만 불편하거나 힘들지 않았다.   

[Hotel Nilgiri View]는 교양있고 단정한 차림의 아가씨가 우리를 안내하고 식사 주문을 받았는데 그 당당함에 미루어 주인집 딸이 분명해 보였다. 나중에 나타난 꽤째째한 옷차림에 힐긋힐긋 우리를 살피며 부엌을 하는 식모아이 우리 때문에 이웃에서 급히 불려 온 낮은 계급의 딸로 보였다. 좁은 공간에서 롯지 주인딸과 식모아이를 대하니 단정함과 남루함, 도도함과 비굴함을 나누는 계급성의 현실을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아렸다. 정전으로 촛불을 켜는 바람에 더 운치있는 저녁 식사를 하고 하루를 마무리했다. 침실로 돌아오니 깔끔한 이부자리에 깔리깐다키 강바람에 날려온 한주먹의 모레가 먼저 내려 앉아 있었다.

 

 

아침 일찍 강건너 수직 절벽 아래에는 동네 꼬마들이 다 모여 있었다. 아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아슬아슬하게 절벽을 타고 올라 무슨 이유에선지 돌을 굴렸다. 그 충격으로 엄청난 토사가 큰 소리를 내면서 강으로 굴러 떨어졌다. 우리 가이드도 아이들이 왜 그러는지 알지 못했고 우리도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없었다. 그런데 우리 숙소 앞을 지나던 중년 여성 한분이 아이들을 향해 고함을 지르고 화를 내는 것으로 보아 아마 아이들이 위험을 즐기는 것같이 느껴졌다. 저러다가 한 순간 아이들의 목숨을 잃을 만지 위험한 장난을 하는데도 그 여성말고 온동네 사람들이 그냥 무관심해 보이는 것은 늘 목숨을 위협하는 위험이 산적해 있는 삶의 조건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무스탕의 마을 까그베니를 뒤로하고 한없는 아쉬움을 남기고 돌아서며 나는 빌었다. 내 살아 생전에 까그베니를 넘어 무스탕과 돌포를 주유할 수 있는 한달 여정의 기회가 꼭 주어지기를! 좀솜으로 가는 길은 단순했다. 왼편으로 닐기리봉과 틸리초크를 스쳐지나며 멀리 다울라기리 산군을 향해 깔리깐다끼는 흘렀고 우리의 걸음도 따라 흘렀다. 간혹 길과 강의 경계가 흐려지는 곳에서는 강으로 내려섰다가 다시 물을 만나면 강둑으로 나오는 과정을 반복했다. 강을 따라 걷는 길은 평탄했고 편안했다. 고도의 변화가 없는 수평을 길을 물처럼 흘러갔다.

 

 

까그베니를 출발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Ekle Bhattee 라는 강변마을을 만났다. 두세개의 롯지와 레스토랑이 있는 작은 마을인데 강과 마을의 경계가 불확실 해 꼭 우기에는 물에 잠길듯한 위치에 자리잡고 있었다. 마을입구의 조용한 첫 집에서 차를 마시고 쉬었다가 출발하자마자 근처 롯지앞에 모여있는 한무리의 트레커들을 만났다. 대부분의 트레커들이 소롱라를 넘어 묵디나트를 지나 좀솜쪽으로 하산하는데 반해 이들은 좀솜에서 출발해서 묵디나트 쪽으로 상행중이었다. 덕분에 오랜만에 트레커를 조우한 셈이다.

 

 

 

Ekle Bhattee 를 출발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점심무렵  좀솜까지 도착했다. 좀솜은 마을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컸다. 포카라서 오는 정기 비행기를 맞는 비행장 까지 있는 곳이다보니 많은 롯지와 여행관련 업체들, 그리고 지역 군대까지 주둔하고 있는 이 근처의 중심도시로 느껴졌다. 시가지를 쭉 가로질러 거리가 거의 끝나는 지점에서 숙소를 잡았다.

 

 

 

이른 도착으로 오후는 티니가온이라는 가까운 마을 까지 작은 트레킹을 떠났다. 그냥 호텔에서 쉬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일행 M의 유혹에 굴복했다. 가이드에게는 자유를 선물했지만 굳이 우리를 따라 나섰다. 강을 동쪽으로 건너 30여분 정도 산길을 오르니 좀솜 시가지가 내려다 보이는 티니가온에 도착했다. 농사철도 아니고 여행 성수기도 아닌 계절 탓인지 아니면 마을은 늘 이런 모습인지 알 수 없었지만 티니가온 역시 인기척이 드물 정도로 한산었다. 영업중인 식당을 겨우 찾아 차를 마시고 마을을 관통해 다시 되돌아 내려오는 골목길에서 만난 장난꾸러기 아이들이 무척이나 반가웠다.  아이들이  줄고 학교가 사라지는 한국의 농촌에서 사는 나의 과민반응이겠지만 늘 마을을 만나면 걱정이 앞선다. 이 마을은 대대손손 사람의 삶이 이어지기를 빌며 숙소로 돌아왔다. 

 

 

 

트레커 조차 만나기 힘든 여정 끝에 모처럼 좀솜에서 사람들을 만났다. 두 한국 청년을 비롯해 국적이 다른 몇몇 트레커와 여행중이라는 네팔리 두 대학생까지 여정은 다르지만 같이 좀솜에 있고 그것도 한 호텔에 머물게 되었다는 것 만으로도 친근감이 느껴졌다. 우리의 가이드는 네팔 아가씨와 담소를 나누느라 정신이 없었고, 우리는 탁자 밑에 넣어주는 숯불의 온기에 녹아들었다. 반가운 마음과는 달리 여정과 관련한 몇마디 말밖에 주고받지 못했지만  네팔의 거친 자연과 삶을 찾아 온 한국 청년 학생들을 보면 왜 그리 대견스러운지 모르겠다. 내가 그 나이 때는 네팔이라는 나라도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이 조금은 억울하긴 했지만 그래도 지금 이 순간 그들 청년과 내 삶을 나누고 있다는 사실이 자랑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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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6일 마낭을 출발하여 야크카르카에서 점심을 먹고 오후 3시경 레다르에서 도착하여 걸음을 멈추고, 2월 7일 9시경 출발하여 정오가 되기 전에 해발 4,450m인 소롱패디에 도착해서 짐을 풀고 다음날 새벽에 있을 쏘롱라 패스를 준비했다.



짙은 구름이 하늘을 뒤덮고 거친 바람이 모래바람을 일으키는 밤이 지나고 아침을 맞았다. 바람은 여전했지만 다행이 눈은 오지 않았고 하늘은 조금 개여있었다. 아침을 먹고 옷깃을 여미고 거친 바람을 맞으며 쏘롱라를 향해 출발했다. 마낭을 벗어나면서 길을 두갈래로 갈라졌다. 왼편의 길을 선택하면 강사르 마을을 지나 틸리초로 가게 되지만 우리는 쏘롱라를 향해 가는 오른쪽 길을 선택했다. 강사르와 틸리초는 5년전에도 폭설로 길이 끊어지는 바람에 가보지 못했는데 이번에도 인연이 닿지 않으니 영영 못가볼 곳으로 남을 것 같아 아쉬웠다. 마낭을 완전히 벗어나기 전 뒤돌아 마르샹디강과 마낭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 올라 지나온 길을 살폈다. 불탑을 지나며 쏘롱라를 무사히 넘어 다시 마낭으로 내려오는 일이 없기를 빌며 걸음을 재촉했다. 



Chulu East 산허리를 타고 군상까지 가황무지 길은 경사가 심했다. 모래바람을 맞으며 한시간 만에 해발 400m이상을 올려야하는 힘든 코스였다. 그래도 외편의 계곡을 넘어 멀리 틸리초 피그와 닐기리 봉이 이루는 절경을 보는 낙에 그나마 우리의 지친 걸음은 힘을 얻었다. 군상에서 쉬어가며 차라도 한잔 할려고 했지만 롯지는 비어있고 마당에 찬바람만 가득했다. 아쉬움을 털고 일어나 다음 마을인 야크카르카까지 강행군을 이어갔다. 다행히 군상을 지나서는 경사가 완만하고 편안한 길이 이어졌다.



점심이 다가오자 가는 눈발이 날리고 짙은 안개가 끼기 시작했다. 오후 1시즈음 야크카르카에 도착해 늦은 점심을 먹었다. 카르카가 집을 뜻한다니 야크의 집, 다시말해 방목 중인 야크가 머무는 동네나 야크치기 목동이 지내는 움막이 있던 동네 정도일 것이다. 역시나 야크카르카에 접근하자 방목중인 야크떼를 만날 수 있었다.  하지만 목동의 움막을 확인할 길이 없고 트레킹 덕분인지 야크카르카는 번듯한 숙소가 여러채 들어서 롯지촌을 이루고 있었다. 야크집에 들러 점심을 해결했으니 우리는 야크가 된 기분으로 불순한 날씨를 뚫고 우리의 길을 나아갔다.



오후3시무렵 해발 4200미터인 Ledar에 도착했다. 하루 650m의 고도를 올려 몸이 지치기도 했지만 이후 고도 적응을 위해 걸음을 멈추었다. Ledar로 들어서는 출렁다리를 건너자마자 첫 롯지에 짐을 풀었다.  롯지의 손님은 단촐했다. 두 스페인 남자와, 중국인 커플 그리고 우리 일행 4명이 전부였다. 그리고 서너명의 가이드와 롯지 운영자 두어명이 같이 있어 그나마 든든했다.  고도가 높아진 만치 기온이 내려가고 바람과 눈보라가 몰아치는 날씨 탓인지 모두다 다이님 룸에 몰려 들었다. 책과 지도를 펼쳐놓고 차를 마시며 야크 똥을 태우는 난로가에서 몸을 녹이니 마음까지 녹아들었다. 


  


이번 여정 처음으로 4,000m 고도에 진입하고 나니 조금은 불안했다.  아직은 호흡이 간혹 불편한것 빼고는 비교적 잘 먹고 잘 걷고 있는 셈이지만 산아래서 지낼 때의 몸과 비교해서는 분명 정상이 아닌 것 같았다. 그래도 벌써 식욕도 잃고 배탈에 두통에 불면증까지 시달리는 나의 두 일행에 비해서는 우리 부부는 거의 철인 수준인 듯 멀쩡했다. 다이닝 룸에 불살이 줄어들자 차가운 룸의 침낭을 기어들었다. 계곡을 쓸고 지나가는 눈바람 소리를 들으며 춥고 불안한 잠을 청하며 지나온 길을 더듬었다. 한걸음한걸음 발을 옮길 때마다 지나온 삶을 곱씹고 살아갈 삶을 그려본다. 많은 아쉬움은 남지만 결코 내 삶이 후회스런 삶은 아니었다. 지금의 희열 그리고 다가올 삶의 가슴뛰는 모험이 더 중요하다.



레다르의 밤은 험악했다. 밤새 거친 바람이 집을 흔들고 눈발이 천장틈으로 들어와 얼굴에 뿌려졌다.  9시에 침낭에 들었지만 자정에 눈이 떴다. 다행히 잠자리에 들무렵보다 호흡은 좋아졌다. 다시 감빡 잠이들다가도 금새 집이 흔들리고 바람소리가 하늘을 가르는 불안한 기운에 눈이 떠졌다.  마당을 나서니 바람은 사람마저 저 계곡 밑으로 날려버릴듯이 기세가 등등했다. 레다르의 밤은 너무 길었다. 수백번을 뒤척여도 아침은 오지 않았다.



새벽잠이 설핏 들었다가 억지로 일어나 다이닝룸에 들러니 8시였다. 스페인 트래커는 벌써 숟가락을 댄듯 만듯한 접시를 물리고 길을 나설 채비를 하고 있었다. 밤새 호흡곤란으로 고생한 D와 두통으로 고생한 M은 아침을 맞아 상태가 호전되었다고 했다. 그래도 모두 얼굴은 부풀고 두통과 소화불량으로 상태가 정상이 아닌 몸을 이끌고 길을 나섰다. 평단한 능선을 따라 3시간 동안 스무명가량의 트레커와 네팔리가 행렬을 지어 나아간다. 안나푸르나를 스쳐 멀리 소롱피크를 지나 출루 이스트 출루 웨스트를 비켜 꾸역꾸역 길을 줄였다. 큰 산을 걷는 사람의 움직임이 워낙 작아서 사람은 산과 같이 부동의 상태로 있고 오직 바람만이 산과 계곡을 쓸고 지나가는 것 같았다.   레다르를 출발한지 1시간 넘겨 계곡을 건너 서쪽으로 넘어가니 길은 가파르고 위험했다. 드디어 험준한 안나푸르나에 들어섰음을 실감했다.

 


정오가 되기전 소롱패디에 도착한다. 쏘롱라를 넘기 전 우리의 마지막 숙소가 될 소롱패디는 고도 4,450m였다.  방을 얻고 짐을 풀고 들어선 다이님룸에는 10여명의 서양팀이 자리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몇몇 개별 트래커들이 들러 점심을 먹고는 모두들 하나같이 길을 나섰다. 점심시간이 지나자 모두가 떠나고 마지막으로 중국인 커플마저 하이켐프를 향해 떠난뒤 소롱패디에는 우리만남게 되었다거친바람이 불지만 양지자른 다이닝 룸이 아늑하고 따뜻해서 4명모두 책을 한권씩쥐고 해드는 창가에 띄엄띄엄 앉았다. 나는 이내 긴의자에 몸을 눞이고 잠이 들었다고즈늑한 봄날의 평온이 우리를 감싸고 있던 소롤패디에서의 오후는 행복했다.

 


오후3시경 하이캠프로 떠났던 중국인 커플이 다이닝룸에 들어 섰다. 하이캠프 직전에 심한 두통으로 일단 퇴각했단다. 그리고 뉴질랜드 커플이 한쌍 도착했고 마지막으로 석양녁에 히피처림의 런던보이가 들어섰다. 다국적 트레커들이 둘러앉아 야크똥난로에 불을붙이고 화려한 소롱패디의 저녁을 맞았다. 이제 메뉴를 외울 때도 지났지만 늘 끼니가 다가오면 모두가 메뉴를 뒤척였다. 그래봤자 선택지는 뻔했다. 삶은 계란에 퍽퍽한 빵, 야채튀김을 뒤적이다가 다 먹지못하고 내일의 일용할 양식으로 남겼다.



다음 날 있을 대망의 소롱라 패스를 위해 일찍들 잠자리로 떠났다. 마지막까지 난로의 온기를 아껴 자리를 지켰지만 어둡고 차가운 방에 들어서며 시계를 보니 고작 720분이었다. 한컵의 물로 양치만하고 누운 잠자리가 너무나 낯설었다. 내가 누울 곳이 아닌 곳에 누워있는 듯한 어색한 잠자리를 뒤척이다 잠깐 잠이 들고 다시 눈을 떠 시간을 확인하니 고작 자정을 넘기고 있었다. 다시 몸을 뒤집다가 결국 2시를 겨우 넘겨 일어나 침대에 걸터앉고 말았다. 4시에 기상해서 4시반까지 식사를 하고 5시에 쏘롱라를 향해 출발하기로 되어있었는데 2시에 기상을 하고 나니 밤은 춥고 길고 시간은 느렸다.



이번 여정의 최고 고도이자 고비인 5400미터의 소롱라는 5년전 폭설로 마낭 에서 돌아서면서 넘지 못했다. 이제 곧 소롱라를 넘고나면 이번 여정의 성격이 바뀌게 될 것이다. 먼저 고산증의 위험에서 해방되고 하산 길로 접어든다. 베시사하르를 출발해 마르상디강을 따라 열흘을 넘겨 고도를 높혀왔던 여정은 칼리칸다키강을 따라 12일 여정의 하산길에 접어들게 되는 것이다. 마낭주의 산록과 마르상디강변의 초지를 거쳐왔던 여정은 무스탕의 황량한 황무지와 그 황무지를 갈라 무스탕에 삶의 터전을 키워주었던 검은강 칼히칸다끼를 따라 흘러갈 것이다. 하루하루 고도가 낮아지고 기온이 오르고 그리고 네팔 최고의 현대적 휴양도시인 포카라로 들어가면 이번 여정은 끝이 난다.  



이번 여정에서 소롱라가 기점이 되듯 이번 두달의 네팔여행이 내삶의 새로운 시작이길 빌었다. 유예된 꿈들, 이루지못한 계획들, 무산된 다짐들, 미완의 시도들 이 모든 것을 버리고 새롭게 내일을 시작하는 불가능한 꿈을 꾸며 새벽 4시를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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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1일 차메를 출발, 브라탕, 두쿠르포카리를 거쳐 어퍼피상에서 하루 밤을 머물고, 2월2일 가파른 오르막을 힘겹게 올라 갸루에서 점심을 먹고 나왈까지 걸어 하루를 마무리했다.



차메의 아침은 분주했다. 고산증으로 하산중인 캐나다 청년은 사우니를 통해 짚차를 알아보고 이른 아침 도망가듯 떠나갔다. 도로는 좁고 가파랐고 포장이나 가드레일은 물론 없었다. 사륜차가 아니면 다닐 수도 없는 열악한 조건인데 눈까지 얼어붙어 나같으면 도저히 그 길을 차를 타고 내려갈 자신이 없었다. 짚이 떠난뒤 사우니 이야기로도 작년에도 사람과 짐을 가득 실은 차가 수백미터 아래 마르샹디로 떨어져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등 역시나 사고가 빈발한다고 했다.  캐나다 청년은 떠나갔지만 탄촉부터 그 청년을 따라왔다는 검정개는 우리곁에 남아 있었다. 어제 저녁 롯지 복도에 잠을 자던 검정개는 롯지의 개가 아니고 그 청년을 따라 들어온 낯선 개라고했다. 낯선 개가 롯지 실내에 들어와 복도에서 잠을 자도록 버려두는 네팔리들의 동물에 대한 태도가 참 남달랐다.



길을 나서기전 롯지에서 일을 보던 13살 소녀 수니타에게 축구공과 아주 조금의 용돈을 쥐어주었다. 그 아이는 일찍 아버지를 여위고 엄마는 다른 롯지에서 일을 하고 자신도 역시 포탈라 롯지에서 심부름을 하면서 입을 들고 학교를 다니고 있다고 했다. 맑은 눈에 꿈많은 아이가 살아갈 세상이 꽃길은 아닐 지언정 제발 험하고 곡절많은 가시발길이 아니길 빌면서 롯지를 나섰다. 깔리(검정개)도 우리를 따라 길을 나섰다.

 


차메를 벗어나기위해 한바탕 법석을 떨어야했다. 우리를 따라 나선 깔리를 지나는 길목마다 지키고 있던 다른 개들이 그냥 두질 않았다. 집단으로 덤벼드는 개를 쫒고 우리 뒤로 숨어드는 깔리를 지키면서 겨우 마을을 벗어났다.  길을 걷기 시작하자 마자 탈레큐를 지났다. 우리는 숲속으로 들어갔다가 금방 나오고  조금 가파른 듯한 언덕길을 오르다가도 어느새 편안한 길을 걷고 있었다. 누구라도 지치지 않고 편안히 걷기에 딱 좋은 길이 이어졌다. 날씨 마저 최상의 날이었다. 공기는 건조하고, 하늘은 투명하도록 새파란 빛에 흰구름마저 어울렸다. 계곡을 갈라 파란 하늘이 열리고 그 너머로 설산이 얼굴을 내미는 아름다운 길은 아무리 걸어도 지칠 것 같지 않았다.   



 

차메를 떠난지 두세시간이나 지났을까 목이 마르고 잠시 쉬어 가고 싶을 때쯤 커다란 사과 과수원이 길따라 가꾸어져 있고 농장 시설이 있는 브다땅을 지났다. 오랜만에 신선한 과일향이 그리워 과수원에 딸려 있는 듯한  bhratang Tea House에서 배낭을 벗었다. 말라 비틀어진 조그마한 사과를 생각보다 훨씬 높은 가격에 사고, 예상보다 시원하고 향그러운 데다 가격까지 싼 사과쥬스를 한잔씩 나누었다.  사과농사를 짓는 입장에서 볼때 과수 상태는 볼 것도 없었지만 그 규모만은 놀랄만했다.  대규모의 농장이 소농의 삶의 터전을 흡수하는 방식이 아니라 지역 농민에게 도움이 되는 방식으로  가꾸어지기를 빌었다. 땀이 마르고 겉옷을 찾을 만치 몸이 식은 뒤 다시 걷기 시작했다.

 


 

입안에 가득 사과향을 머금고 브라탕을 출발하자마자 좁고 긴 계곡을 이루는 절벽을 깨서 만든 위태로운 길이 나왔다. 사람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 건지 어떻게 이런 절벽을 깨서 길을 만들 생각을 했을까 신기하기만 했다. 반터널같은 길을 지나 가파른 숲길을 통과하자 갑자기 시야가 넓어지고  오른쪽으로 깍아세운듯한 암벽능선이 보이기 시작했다. 디쿠르포카리에 접근하자 이 암벽 능선은 우리의 시야를 압도하는데  '스와르가 드와르'(혹은 paungda Danda)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빙하의 침식이 만든 무려 1500m 높이의 바위 한개로 이루어진 절벽으로  여기 사는 티벳사람들은 자신이 죽으면 그 바위산을 넘어 고향 티벳으로 돌아간다고 믿는다고 했다.

 

 

Dhukure Pokhari를 지나면 이날 하루의 휴식이 기다리고 있는 Pisang이지만 피상은 마르샹디 계곡을 따라 형성된 Low Pisang과 마르상디 계곡을 벗어나 북쪽 산자락에 자리잡고 있는 Upper Pisang으로 나누어져 있고, 이번에는 Upper Pisang을 택해 길을 잡았다. Dhukure Pokhari를 왼편으로 끼고 돌아, 멋진 나무다리를 밟고 마르샹디를 건너 완만한 언덕길을 잡아 3km쯤 걸었다. 

 

 

Pisang 마을을 들어서자 가파른  골목길을 타고올라 마을의 제일 높은 위치에 자리잡은 롯지에 짐을 풀었다. 빨래를 들고 데크에 나가서니 시야가 너무나 시원했다.  마르샹디 계곡아래 Low Pisang을 내려다 보고, 고개를 들어 안나푸르나 2봉을 비롯한 산군들을 바라다 보다가, 다시 눈을 돌려 '스와르가 드와르'넘어 지나온 길을 더듬었다. 그리고 오른쪽을 눈을 돌리니 우리가 넘어야할 쏘롱라로 이어지는 가는 길들이 헌준한 산들 사이에 실가락 처럼 사라졌다. 

 

 

숙소를 나와 마을 꼭대기에 있는 불교 사원에서 남은 오후 시간을 보냈다. Gompa의 역사는 알수 없었지만 마을 사람들이 기부해서 만든 절이라고 했다. 사찰내 건물의 대부분은 새로 지어진 듯 했고 오래된 절이 갖는 멋은 없어 보였다. 그래도 우리는 본전에 들어가 모두 부처앞에 절을 올렸다. 우리의 가이드 바수와 나브라즈는 흰두교 신자지만 부처와 시바가 다르지 않다고 했다. 나는 무신론자지만 그 순간에는 여기 터잡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신을 존중하고 싶었다. 그리고 십몇년을 같이 살다 네팔로 떠나오기 직전 생을 마친 우리집 강아지 초롱이의 명복을 빌었다. 롯지로 돌아와 전망 좋은 다이닝 룸에서 해지는 안나푸르나의 멋에 취해 밤을 맞았다.

 

 

하루에 600m를 높여 고도 3300m인 Upper Pisang에서 아주 가벼운 고산증이 왔다. 조금의 불면과 가슴두근거림 정도라서 걱정스러울 정도는 아니었지만 아직 갈 길이 머니 내 몸 상태의 변화에 대해 세심한 관찰이 필요해 보였다.  피상을 벗어나 수평에 가까운 길은 마르샹디의 흐름과 같이 하면서 한시간 쯤 걸은 뒤 출렁다리를 건너자 마자 길은 갑자기 가파른 상승길로 바뀌었다. 단 한번의 내리막이나 평지도 없이 가파른 오르막길은 끝없이 이어졌다. 거의 심리적 육체적 한계치에 도달할 즈음 작은 Tea House가 나왔고 우리는 갸루 입구에 도착을 했다.

 

 

우리는 잠시 차를 나누며 숨을 고른뒤 애매한 점심시간때문에 고민하다가 좀 더 걷기로 하고 출발 했다. 하지만 마을을 관통하는 골목길을 벗어나자 마자 우리는 발길을 돌려 되돌아왔다. 다음 마을까지 거리도 멀고 혹시 문을 연 식당이 없을 수도 있다는 가이드의 조언을 받아들여  엿다. 사람의 온기가 식어 한산하고 쓸쓸한 마을로 돌아왔지만 문을 연 식당을 찾을 수 없었다. 여행안내서에는 이곳 주민들이 주로 야크를 키우고 곡물을 재배하면서 오래 전에 획득한 무역영업권을가지고 여전히 무역업에 종사한다는 설명을 읽었지만 눈으로 확인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마을 입구에 들어섰을 때 우리를 붙잡던 식당으로 돌아가니 놓친 손님을 다시 받게된 사우니가 반갑게 우리를 맞았다.

 

 

뚝바를 시키고 사우니가 밀가루 반죽을 미는 동안 나브라즈는 사우니를 통해들은 마을 사정을 전했다. 갸루에는 7명의 아이가 있는데 그중 3명이 카트만두 유학중이고 이 마을도 점점 사람이 줄어 마을이 비어가고 있다고 했다. 네팔 역시 저개발상태를 벗어나기 위해 도시화를 할 수밖에 없다고 보면 산간에 형성된 갸루같은 외진 마을이 사라져가는 현상도 피해갈 수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사람도 나고 죽듯 마을 역시도 생겨나고 소멸하는 순환과정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이 당연한데도 이 마을에 사람이 줄고 있고 머지않아 마을 자체가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가슴이 아팠다.

 

 

갸루에서 나왈까지도 메마른 산자락을 따라 길이 이어졌다. 계절 탓도 있겠지만 주변의 숲은 빈약했고, 자갈 투성이 흙은 푸석거렸고, 키작은 식물들은 거친땅에 뿌리를 내리고 겨우 연명하는듯 애초로웠다. 그래도 어퍼피상 트렉을 선택하고 가파른 오르막을 올라 갸루를 지나고 다시 수평의 길을 따라 나왈까지 가는 길은 탁월한 조망을 우리에게 선물했다. 갸루를 향해 한번도 쉬지 않고 600m의 고도를 올리 때는 후회가 컸지만, 막상 갸루 이후 수평의 길을 걸으며 안나푸르나 2봉, 피상 피크, 그리고 안나푸르나 4봉을 손에 닿은듯 가까이서 마주하면서는 우리의 선택이 자랑스러웠다.  갸루를 출발한지 2시간이 안되어 멀리 나왈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왈 역시도 주변의 산과 언덕, 밭과 초지를 닮아 눈에 드러나지 않는 흙빛 마을이었다. 마을이 갸루 보다는 크고, 마을을 이루는 터전 역시 넓어 보였지만 사람의 발길이 드문 것은 전혀 차이가 없었다. 마을은 비어있는듯 조용하고 오고가는 사람의 흔적이 드물었다. 하루종일 주민을 만난 것은 손에 꼽을 만치 적었고 트레커는 단 한명도 만나지 못했다. 순전히 계절탓만은 아닌 것 같았다. 우리를 따르던 깔리도 어느 순간 사라졌다. 기회가 되면 고기를 듬뿍 넣은 볶은밥이라도 한그릇 시켜줄려고 마음 먹고 있었는데 우리의 행동이 너무 굼떴다. 더이상 기다리지 못한 깔리는 다른 인심좋은 트레커를 따라 자신의 길을 간것이 틀림없었다. 나왈의 밤은 깊고 편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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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31일 아침 Tal을 출발 카르테지나 다라파니에서 점심을 먹고 바가르찹지나 다나큐에서 길을 멈추고, 2월1일 다나큐를 출발 티망지나 탄촉에서 점심을 먹고 고토지나 차메에서 하루 일정을 마무리 했다. 



딸을 출발해 마르상디의 동쪽 강변길을 걷다가 출렁다리를 넘어 서쪽 찻길로 접어들었다. 얼마를 걷다가 다시 동쪽으로 강을 건너고 마을이 보이는 데서 서쪽으로 강을 넘어오니 카르테다. 역시  걷는 길은  옛길이 좋다. 그 길을 걸은 사람과 동물의 발자욱이 보이고, 흘린 땀내가 맡아지고, 사연 깊은 이야기가 들려 오기 때문이다. 산과 강이 만나 위태롭지만 아름다운 강과 산과 하늘빛이 조화로운 카르테를 지나 이른 점심 무렵 다라파니에 도착했다. 다라파니는 마나슬루산군과 안나푸르나 라운드코스가 갈라지는 분기점에 자리잡은 마을이다. 동쪽 계곡으로 들어가서 마나슬루 산군으로 갈까, 가던 길을 이어 서쪽으로 계속가서 쏘롱라까지 올라갈까 마음이 흔들리는 마을 다라파니에서 점심을 먹었다. 



딸 지나 다라파니까지도 그랬지만 다라파니 지나  다나큐까지 이어지는 길도 평탄했다. 중간의 바가르찹은 오래전 산사태로 롯지들이 매몰되는 사고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었지만 눈으로 보기에는 흔적을 느낄 수 없었다. 하루 종일 강을 따라 편안한 길만 걸다보니 동네 뒷산 산책 나온 듯 마음이 가벼웠다. 고산증을 느끼거나 추위를 걱정할 만치 높은 고도도 아니고, 그렇다고 너무 더워 걷기에 불편하게 낮은 고도도 아닌데다가 가파르고 험한 길도 없었다. 앞으로 하루하루 고도가 높아지고 길은 험해지고 추위와 고산증의 위험이 커지겠지만 아직까지는 실감이 나지 않아다. 



하루 밤을 쉬어갈 다나큐가 다가오자 하늘은 잔뜩 찌푸렸고 끝내  진눈깨비를 뿌렸다. 진눈깨비를 맞으며 Hotel Peacefull & Restaurant를 들어섰다. 룸에 배낭을 내려놓자마자 한기를 느끼고 다이닝 룸을 찾아 난로를 부탁했다. 네팔에서 아직까지 훨훨 타는 난로를 본적이 없었고 이 롯지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부족한 연료로 지핀 알뜰한 작은 불씨 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따뜻했다. 난로가로 모여든 중국인 커플과 우리 일행은 덜마른 빨래를 말리고, 지도를 살펴 내일의 일정을 체크하고, 난로가 전해주는 온기에 기대어 여행이 주는 행복에 취했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얼마되지 않아 계곡에 어둠이 깔리고 빗소리가 굵어졌다. 그때 갑자기 한무리의 네팔리가 조용하던 다이닝룸을 들이 닥치고  씨끌벅쩍해지면서 우리의 안식은 끝이 났다. 



룸으로 돌아와 침낭에 들어가니 자기에는 너무 이른 시간이었다. 지루한 저녁 시간을 줄이려 모처럼 책을 들었다. 혹시하면서 굳이 배낭에 넣어 온 덕분에 참 오랜만에 니이체를 읽었다. 하지만 글은 눈에 들어오지 않고 그냥 가슴만 울릉거렸다.  내 젊은 날의 꿈들이 꿈틀거리며 되살아났다. 인식에 내 삶을 온전히 받치겠다는 호기는 간데없고 생활의 노예가 되어 힘겹게 견뎌온 나의 삶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과잉 자의식과 무기력 말고는 달리 규정할 수 없는 나의 지난 세월이 이제는 후회하기에도 너무 늦었건지도 몰랐다. 남은 나의 인생을 잘 살자는 다짐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사실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남은 한가지는 그냥 있는 그대로의 내 삶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고 그런 태도가 나이가 주는 지혜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 덕분에 단잠이 들었다.



2월 1일 아침 다나큐의 Hotel Peacefull & Restaurant 을 나오니 밤새 내리던 비는 거치고 말쑥한 하늘이 우리를 맞았다. 마을을 벗어난뒤 얼마지나지 않아 가파른 숲길을 만났다. 다나큐에서 티망까지 무려 700m의 고도를 1시간 남짓만에 올려야 하니 모처럼 숨이 차고 땀이 났다. 몇구비의 비탈진 산길을 올라 시야가 시원하게 터이는 마을에 도착하니 티망이었다. 티망에서 서쪽으로 눈을 돌리니 마나슬루봉이 손에 닿일듯 바짝 다가와 있었다. 어제 내린 진눈깨비가 고도 덕분에 티망에서는 눈이되어 쌓여있고 동네 아이들이 눈썰매를 타느라 정신이 없었다. 아이들 노는 모습을 사진에 담다가 사진만으로 당이 차지 않아 어른들도 나섰다. 아이들에게 부탁해서 썰매를 빌려 바수와 라마나쉬 그리고 우리도 잠시잠깐이나마 동심으로 돌아갔다.



티망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뒤 다음 목적지인 탄촉을 향했다. 고도 3, 000m인 티망에서 탄촉까지는 300m의 고도를 내려야 하는 완만한 내리막 숲길이 이어졌다.  탄촉 직전  Evergreen Hotel & Restaurant의 눈쌓인 야외에서 따뜻한 햇살을 받으며 점심을 먹고 지난 한달간 나의 머리와 얼굴을 지켜주던 모자를 남겨두고 길을 나섰다. 계곡으로 내려가 다시 오르막을 타고 산사태로 무너져 조금은 위험해 보이는 길을 통해 마을로 들어섰다. 어떤 마을은 지나고 나서야 더 머물렀어야 했다는 미련이 남곤했는데  탄촉 마을이 꼭 그랬다. 딸이나 차메는 트레커가 붐비고 트레커를 위해 만들어진 마을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면 탄촉은 그와 반대였다.  탄촉은 주민에게는 트레커가 낯설고, 트레커에게는 주민을 마주치기가 어색한 전통적인 산간 마을로 다가왔다.  



야외에서 눈을  밟으며 점심을 먹고 출발한뒤 한시간여만에  Naar -Fu 계곡과 마르샹디강이 만나는 koto 를 지나고 오후 3시 30분에 마낭주의 수도 차메에 도착했다. 지금까지 가이드에게 숙소 선택을 거의 맡기다 싶이 해 왔는데 이날만은 우리가 롯지를 정했다. 한국에서 오랜동안 일을 해서 한국어에 능통하고 한국인의 식성과 문화를 전적으로 이해하는 사우니(여주인)가 운영하는 Potala Guest House에 짐을 풀었다. 



모처럼 한국어에 능통한 사우니를 만나니 묻고 싶은 것도 많았고 말하고 싶은 것도 많았다. 롯지의 여주인은 서울 근처 도시에서 오랜동안 일을 하다가 이명박정권 때 불법체류 노동자로 적발되어 추방당했고 지금도 한국가서 일하고싶다는 뜻을 내비췄다. 우리에게는 무척이나 친절했고 한국식 수제비를 맜있는 깍두기와 함께 내어 놓아 우리를 기쁘게 해주셨다. 안나푸르나 라운드 중에 어쨌던 한식을 먹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못했는데 배가 작아서 아쉬웠다. 



나에게 차메는 본격적인 산으로 들어가는 입구같은 마을로 느껴졌다. 차메 다음 코스인 피상만해도 해발 3300m나 되니 술과 담배를 자유롭게 할 수 있는 마지막 마을이 차메인 셈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차메에 도착하면 똥바라도 한잔하고 쏘롱라를 넘을 때 까지는 술과 담배를 절제하기로 마음먹었다. 첫 라운드 때는 그래도 나름 절제를 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이번에는 그렇지 못했다. 해발 3500m인 마낭에서 마지막 술을 마시고 해발 5400m인 쏘롱라를 넘을 때까지 담배를 계속 피워댔다.  



포탈라롯지는 밤새 정전이 되었다. 정전된 방에 일찍 올라가기도 그렇고 무엇보다 난로가 있는 다이닝 룸을 떠나기 싫어 밍거적 거렸다. 그나마 다이닝 룸은 충전지를 이용해 켜진 여린 전등이 있었다. 심한 고산증으로 쏘롱라를 넘지 못하고 하산한 캐나다 청년과 쏘롱라를 향해 우리와 같이 올라가야할 씩씩한 스페인 청년 그리고 영어에 젬병인 우리 일행이 난로를 사이에 두고 어색한 대화를 나누었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네팔 트레킹 때는 늘 밤이 길다. 이번에도 그랬다. 내가 트레킹을 할 수 있는 계절이 꼭 겨울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산이 높고 계곡이 깊어서 그렇기도할 것이지만 아마도 잦은 정전도 한몫을 하는 것 같다. 밤은 긴데 책을 보기에는 눈이 시리고, TV나 PC도 없고 폰도 와이파이가 불안전하니 마땅히 할짓이 하나도 없다. 영어가 짧으니 대화상대를  만나도 그냥 간단한 인사이상으로 대화를 이어나갈 수가 없다. 그러다보니 생각이 많아진다. 생각이 많아진다는 것은 좋게 말하며 자신에게 온전히 집중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할 것이다. 



정전마저 되어 일찍 침대에 들었지만 두 눈은 감기지 않고 의식은 말똥말똥 되살아나니  밀쳐둔 생각들이 구름처럼 밀려 왔다. 삶의 현장을 탈출해 보내게 된 두달의 네팔 망명(!)이 이후 나의 삶에 어떤 변화를 가져다 줄까, 아니면 그 자체 어떤 의미가 있을까는 의문이 일었다. 하지만 이번 여정을 통해 단지 쉬는 것 이상의 어떤 것을 바란다면 그것은 과욕이 분명한 것 같았다. 굳이 의미를 부여한다면 그냥 일상의 긴장 속에 굳은 의식의 근육을 풀수 있도록  내 자신에게 스스로 자유를 선물하는 것 정도가 전부가 아닐까 생각되었다. 하지만 단지 그 정도를 위해서 두달의 시간과 비용을 지불해도 좋은가는 물음에는 단호히 그렇다고 정리했다. 지금까지 나에게 여행보다 대단한 일상이 있어본 적이 없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 확실하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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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30일 집을 나와 201712일 카트만두에 도착, 여정을 시작하고, 228일 집으로 돌아오는 2달동안의 네팔여행을 기록한다. 이 기록은 순전히 우리 부부 자신만을 위한 것이다. 다른 여행자를 위해 정보를 제공할 만치 섬세하게 여행을 기록하지도 못했고, 여행이 끝난 지 7개월이 지나 벌써 흐릿해지기 시작한 기억에 의존하다보니 이 모든 기록의 정확성도 떨어진다. 그래도 내가 늙도록 살아 더 이상 여행을 떠날 수 없을 만치 건강이 악화되었을 때 그나마 위안받을 수 있을 나만의 화려했던 지난 시절의 기록으로 2달여정의 네팔여행을 남긴다.


사실 5년전 했던 한달간의 안나푸르나 여행후 내내 네팔병앓이를 해왔고, 모든 힘든 순간을 다음 네팔행을 핑계로 이겨왔다. 그래서 네팔은 내 마음의 고향이 되었고 어쩌면 내 인생에 새로운 전기를 줄 미지의 샹그릴라이기도 했다. 지난 5년 막연한 네팔 커피 농장의 꿈을 키워보기도 했고, 지금과는 다른 네팔에서의 새로운 삶을 그려보기도 했다. 이번 여행은 그 가능성을 타진하는 여행이 아니라 그 불가능성을 확인하는 여행이 될 것이라는 예감을 가졌었고 사실 결과도 그랬다. 더 이상 네팔은 나에게 지금의 삶을 대체하는 새로운 삶이 가능한 공간이 아니라 내가 사는 한국과 공존하는 내 삶의 또 하나의 공간으로 자리잡았다.


이번 여정의 큰 얼개는 대충 3축으로 잡았다. 봉화친구들로 구성된 9명의 팀과 함께하는 보름 정도의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트레킹, 그리고 카트만두밸리 중심으로 여러 도시들을 탐방하다 운남여행을 통해 카트만두에 들어올 예정인 한명의 친구와 보내게 될 열흘정도의 도시여행, 그리고 나를 네팔로 안내한 비스타리님과 또 다른 친구한명 그리고 우리 부부가 함께 할 안나푸르나 라운드가 그것이다. 5년전 폭설로 마낭에서 돌아서야했던 쏘롱라는 다시 넘고 묵티나트와 까그베니를 지나 칼리칸다끼 강마을을 걸으며 무스탕을 맛보고 포카라에서 긴 휴식을 가질 예정이었다.


여행은 늘 계획에서 어긋나면서 더 멋지게 된다. 사실 마지막 까지 중간에 보름쯤 시간을 만들어 에베레스트베이스캠프를 걸어볼 마음도 먹었지만 다 포기했다. 여기저기 커피농장도 둘러볼 계획도 무산되었고 먹기여행이자던 다짐도 물거품이 되었다. 그리고 카트만두에서 만난 식중독과 안나푸르나 라운드뒤에 닥친 심한 몸살이 여정의 역동성을 떨어뜨렸다. 더 많이 걷고 더 많은 사람과 풍경을 만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고, 부부만 하던 여정과는 달리 거의 가이드에 준하는 책임을 느껴야했던 일행이 있는 여정은 결국 본전이긴 하지만 잃는 것과 얻는 것이 있었다.



이번 여행내내 여행을 왜 하는지 스스로 묻고 또 물었다. 누구는 삶이 여행이라고 했다. 여행 중에 도 다른 여행을 떠나는 것은 삶이 여행임을 망각해 가는 일상을 깨고 삶 자체가 여행임을 스스로 환기하기 위한 행위인지도 모르겠다. 땅에 뿌리내려야하는 농사꾼이 집만 나서면 마냥 좋고 자유로워짐을 느낀다. 그래서 늘 줄타기하는 인생이지만 그래도 길을 걸으면 내가 가진 모든 갈등과 긴장, 내 생각과 삶이 품은 모순들이 다 조화를 이루고 해결되니 길을 나설 수밖에 별 도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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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으로 돌아가는 날, 아침 늦게 눈을 떴지만 어제와 다른 도시의 분위기가 창으로 전해졌다. 먼저 가까이 타멜거리를 울려대던 택시의 클락션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도시의 하루를 준비하는 분주한 발길도 느껴지지 않았다. 대신 멀리서 군중들이 외침이 느리게 전해져 왔다. 간단히 세수를 하고 짐을 싼뒤 카트만두에서의 마지막 반나절을 누리기 위해 방을 나섰다.

숙소 로비에 내려가니 오늘 카트만두는 총파업중이라고 했다. 모든 택시와 버스가 운행을 중단하니 평소보다 두어시간 서둘러 공항으로 향해라고 했다. 오후 3시 40분에 카트만두 트리뷰반 공항을 이륙, 한국시간 26일 새벽 1시에 인천에 도착예정이니 타멜에서 점심을 먹고 공항으로 나갈려든 계획을 수정해야만 했다. 일단은 상황을 살피러 타멜거리를 나섰다. 지금가지 봐왔던 타멜거리가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우릴 맞았다. 차는 자취도 없이 사라졌고, 식당이며 선물가게며 조그만 구멍가게까지 문을 연곳이 단 한군데도 보이질 않았다. 간혹 릭샤라는 인력거가 지나가곤 했지만 타멜거리는 평소의 번잡함이 싹 가쉰 말쑥한 얼굴이었다. 타멜을 빠져나와 멀리 시위대의 구호가 들리는 곳으로 발길을 잡았다. 대로로 나서자 무장경관들이 군데군데 나와있었고 멀리 한무리의 시위대가 지나가고 있었다. 냅다달려 시위대 근처까지 가서 사진을 찍고 상황을 살폈지만 도대체 저들이 무슨 요구를 걸고 시위를 하는지 도무지 알아낼 재간이 없었다.

두세 무리의 시위대가 여러방향에서 나와 사거리에서 집결해 더 큰 무리를 이뤄 타멜 외곽을 돌아 왕궁쪽으로 행진을 계속했다. 도로에는 간혹 군경을 싣을 트럭과 엠블란스가 싸이렌을 울리며 지나갈 뿐 거리는 차를 대신해 시위대와 시민이 차지하고 있었다. 차로부터 해방된 도로를 걸으니 이유를 알 수 없는 해방감이 나의 가슴에도 벅차올랐다. 시위대를 마냥 따라갈 수도 없었고, 오늘 카트만두의 상황을 살펴보고 택시나 버스없이 공항으로 나갈 방법도 알아볼 겸 다시 숙소로 돌아왔다. 숙소의 스텝이 전한 이야기로는 오늘 시위가 석유값 폭등에 따라 생활이 어렵게 된 운전자 노조를 중심으로 조직되고 있다고 했다. 네팔은 모든 노동자조직, 시민조직, 기타 단체들이 잘 조직되어 있는데 이번 이슈에 동조해 전국적인 총파업이 일어나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오전 동안 카트만두 시내를 더 돌아다닐려고 했던 계획은 물건너갔고 어떻게 안전하게 공항으로 달려갈 것인가가 문제가 된 상황이었다. 하지만 스텝이야기로는 총파업은 일상적인 사건에 불과하고, 여행자들은 위해서는 별도의 셔틀버스가 운행되기 때문에 큰 걱정은 하지 말라고 했다. 타멜초크 지나 어제 방문했던 '꿈의 궁전'근처에 가면 타멜과 공항사이를 운행하는 임시 셔틀버스가 거의 30분 간격으로 운행된다는 것이었다. 최악의 경우 걸어서라도 갈 수 있을 만치 넉넉한 시간을 두고 공항으로 갈 방법을 찾으려고 했는데 이외로 쉬운 해결책이 있어 안도했다. 그렇지만 교통수단이 없고, 모든 가게며 관공서 공원까지도 문을 닫은 카트만두 시내를 둘러 볼만한 흥도 나지 않았고 또 혹시나 하는 일말의 불안감 때문에 최대한 빨리 공항으로 가기로 마음 먹었다.

셔틀버스가 정차한다는 타멜입구쪽으로 가니 벌써 여행자들이 배낭을 매고 끌고 불안한 표정으로 몰려들기 시작하고 있었다. 수십명의 무장경관들이 무료한 표정으로 거리를 지키고 있었고 멀리 시위대의 함성이 간간히 들려오기도 하는 타멜입구는 평소의 번잡함이 사라져 오히려 공기도 맑고 햇살도 투명해 더 평화롭게 느껴졌다. 일시에 외국인 여행객들이 몰려들어 조금 어수선해지기 시작할 무렵 [투어리스트 버스]가 도착했다. 한대의 버스가 떠난뒤 또 한참을 지난뒤 두번째 버스가 도착했을 때 우리부부도 잽싸게 줄을 서고 버스에 오를 수 있었다. 버스는 3명의 무장경관이 동승해 시위대가 점거한 거리를 살피며 버스를 호위했다. 버스는 시위대가 막아선 길을 피하기 위해선지 아니면 또 다른 호텔에서 외국인을 싣기위해선지 큰길을 피해 골목같은 우회로로 돌아 몇번을 정차해 승객을 더 싣은 뒤 공항에 도착했다.

트리뷰반 공항은 삼엄한 경비속에 많은 여행객들로 붐비고 있었다. 1층 로비에 들어가기 위해서 먼저 여권을 검사하고, 1층에서 발권뒤 탑승구가 있는 2층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트 앞에서 또 무장경관이 여권과 항공권을 검사했다. 1층로비에서 안나푸르나 라운드 때 차메에서 만났던 학생 커플을 반갑게 만나 같이 햄버거로 아침을 떼웠지만 공항청사안에는 제대로된 식당도 매점도 없었다. 생각보다 너무 빨리 공항에 도착하는 바람에 서너시간을 공항 청사안에서 지내야만 했다. 청사안은 일반적인 국제공항에 비해 좁고 빈약해서 별다른 놀거리가 없었다. 시골의 버스터미날 수준의 조그만한 매점에서 사먹을 수 있는 것이라고는 맛없는 햄버거가 거의 전부였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발권을 하고 승강구가 있는 청사 2층으로 올라갔다. 조금 더 큰 매점과 레스토랑 그리고 선물을 살 수 있는 가게들이 있었지만 특별히 돈을 쓸 일이 없었다. 쓰고 남은 네팔돈을 기부받는 함이 2개 있었는데 한개는 적십자가 그려져 있었고 또 한개는 무종교를 표방한 기부함이었다. '신없는 성덕'을 꿈꾸는 나는 무종교를 표방한 함에 남은 네팔 돈을 넣었다. 공항에서 만난 한국인 모녀여행객으로부터 여행사에서 제공한 도시락을 얻어 먹고 청사안을 수십바퀴를 돈 뒤에나 비행기에 올라 한국으로 향할 수 있었다.

 

 

비행기가 카트만두 상공으로 솟아오르자 멀리 우리가 걸었던 안나푸르나와 함께 에레레스트 산맥이 눈에 들어왔다. 알 수 없는 벅찬 감정이 마음을 흔들었다. 살아생전에 꼭 하고 싶었던 어떤 일을 끝낸것 같은 성취감이 아니라 안나푸르나에서 보낸 시간과 그 시간속에서 보낸 나의 삶을 놓아두고 떠나는 아쉬움이 밀물같이 몰려왔다. 멀리 사라져가는 히말라야 산맥을 바라다보며 살아온 날에 대한 고마움과 살아갈 날에 대한 희망을 되새기며 얇은 잠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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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6시 30분에 파샹과 같이 아침을 먹고 작별을 했다. 파샹은 7시에 투어리스크 버스파크에서 카트만두행 버스를 타기로 되어 있었다. 우선은 작별을 하지만 몇 일뒤 카트만두에서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고 아쉬움을 달랬다. 룸에서 잠시 시간을 보내고 우리 부부도 호텔을 나섰다. 파샹의 안내없이 지도와 짧은 영어에 의지해 투어리스트 버스파크까지 걸었다. 학교운동장 보다 너른 빈터가 버스파크라고 했다. 텅빈 버스파크에 붙은 가게에 들러 물어보니 바로 거기서 예매를 하라고 했다. 아직 교통편에 대한 마음을 정하지 않았지만 매표소 직원은 내일 아침에 바로 떠날 차표를 사지 못하면 카트만두에는 다음 날 갈 수 밖에 없다며 미리 예매할 것을 강권했다. 긴 판단없이 그냥 네팔 정부가 운영하는 일종의 국영 버스표를 예매했다. 1인당 18불에 미테랄 워터 한병씩에 고급 점심식사를 제공한다고 했다. 모든 종류의 카트만두행 버스는 7시부터 출발을 시작하기 때문에 반드시 7시 이전에 버스 파크에 도착해야된다는 알듯 모를듯한 설명을 했다. 7시면 7시지 7시 부터 출발하는데 정확한 출발시간을 미리 알수 없고 그래도 7시까지는 버스파크로 나와있지 않아 버스를 놓치면 내 책임이라니 조금은 억울했다. 하지만 여기는 네팔이고 나는 여행중이니 모든 것이 용납 되었다. 여행은 사람을 관대하게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버스파크를 나와 멀리 마차푸차레가 보이는 북쪽을 향해 시가지를 계속 걸었다. 시끌벅적한 시장통을 지났다. 시장은 삶의 의미를 되새겨 보게 하는 참 좋은 순례지다. 아우성과 몸부림이 넘쳐나는 장바닥을 지나며 우리 삶의 끈을 잇는 생명활동의 근본을 되새겼다. 먹고 사는 일이 다 그렇고 그렇겠지만 네팔거리에서는 늘 날 것으로 삶의 속살을 마주 할 수 있었다. 호객으로 목이 터져라 외치지만 그들은 늘 즐거워 보이고, 한가해 보이다 못해 심심해 보였다. 남루한 형색에 좌판의 물건을 다 팔아도 돈 될 것 같지 않은 형편이지만 그들에게 그것은 삶은 전부일 것이다. 그래도 그들은 심각하고 초조하고 우울하지 않았다. 뭐, 자살율 세계최고의 사회, 한국에서 온 사람에게는 어떤 나라를 여행해도 다 그렇게 보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시장을 지나고 주택가도 지나고 그냥 포카라를 하염없이 걸었다. 레이크사이드를 벗어나자 마자 외국인 관광객임이 확 드러나는 우리 차림이 사람의 눈길을 끄는 것 같았다. 아이들이 따라 붙고 'Hallo!를 외쳤다. 나중에는 대여섯명의 아이들이 무리를 지어 반복적으로 할로를 외치며 따라붙었다. 지나ㅏ는 여성 여행객으로 보이는 사람에게 다가가 주머니에 손을 집어 넣어 놀라게 만들고 내게도 가까이 다가와 카메라를 뺏어려 드는 아이까지 있었다. 어느 순간 아이들이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뭐 그래봤자 아이들은 아이들이니깐 웃어넘길 수 밖에 없었다. 어른들도 눈만 마주치면 '니하오?' ' 안뇽하세요' '곤니찌와!'를 번갈아 외치며 방긋 웃어준다. 친절한 네팔리들이 반갑고 고마우면서도 마음이 조금은 아려왔다. 네팔리들은 이방인에 대해 철저히 방어의식을 버려버린 사람들 같았다.

네팔에 있는 거의 대부분의 현대적 시설들은 외국의 원조에 기대어 지을 수 있었고 지금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세계 12대 빈국의 하나인 네팔의 주산업은 농업이지만 다음은 관광이라고 했다. 네팔 농업의 조건은 자연적으로나 기술적으로나 거의 최악으로 보였다. 현대적 공장이라곤 하나도 없는 네팔은 오직 관광에 목을 멜 수밖에 없는 형편이 분명했다. 그래서 그런지 네팔은 관광객을 상대로한 적대적 범죄가 거의 없고, 젊은 여성이 혼자서 트레킹을 떠나도 위험하지 않을 정도라고 했다. 관광객에게 위해를 가하면 자신들의 밥줄을 끊는 셈이 되기 때문에 일종의 금기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뿐아니라 레스토랑이며, 롯지며, 호텔이며 관광객이 머무는 곳은 모두 최대한 서구인에 맞추어져 세팅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키가 179cm인 내가 사용하기에 불편할 만치 높게 달리 소변기며, 세면대며 아예 네팔리는 그런 시설을 사용하지도 않을 것이라는 전제하에 지어진 시설도 그렇고 안나푸르나 라운드중에 만난 롯지 대부분의 식단 역시 서구인의 기호에 맞춰져 있었다. 먹고 사는 일이, 그리고 네팔의 가난이 가슴이 아팠다.

스리야나 사거리를 지나 길은 넓었지만 인파는 별로 없는 한산한 '뉴로드'로 접어들었다. 지도와 표지판판을 따라 주택가 골목길을 통과하니 다시 큰 길을 만나고 길건너 오늘의 첫 목적지인 'Regional Museum'이 눈에 들어왔다. 박물관을 들어서니 단체관람 온 어린 학생들이 막 관람을 마치고 나왔는지 기념사진을 촬영중이었다. 우리가 다가가자 교사로 보이는 여성이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을 했다. 단정한 교복을 입고 나란히 서있는 아이들이 싱그럽고 이뻤다. 그 아이들이 밝은 미소에 네팔의 미래가 보였다. 소액의 입장료를 내고 들어선 전시장은 낡고 초라했다. 소장된 민속자료들도 먼지가 앉고 거미줄이 쳐져 소박한 전시물이 더욱 초라하게 보였다. 농기구에서 부터 생활 연장들을 비롯해 각 민족의 결혼예식과 장례식의 전통을 재현해 놓은 전시물을 둘러 보는 일은 시간을 아껴야하는 여정에서 불필요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전시장을 나와 정원을 걸으며 그래도 이 박물관이 보다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길 바라는 마음에 여행기를 쓴다면 꼭 다음 여행객들이 이 곳 박물관을 찾아가볼 만한 곳으로 여기게 만들고 싶었다. 낡고 초라한 민속박물관이지만 네팔이의 삶을 느껴 볼 수 있는 귀한 기회를 누리는 일이 바로 이 박물관을 유지하고 더욱 풍성하게 가꾸는 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Regional Museum'을 나와 오늘의 두번째 목적지인 올드바자르를 향했다. 올드바자르는 지금까지 지나온 다른 시장에 비해 더 규모가 크고 인파가 붐볐다. 여행자의 거리인 레이크 사이드보다 경기가 좋지 않은 시장인지는 모르겠지만 포카라의 가장 번화한 거리가 아닌가 여겨졌다. 시장을 관통하며 오렌지를 한봉지 사먹고, 아내는 문양 도장을 파는 상인에게 재미로 손등을 내밀었다가 도장을 찍히고 생각지도 않은 돈을 뜯기기도 했다. 어린 거지 여자아이에게 작은 돈을 건네자, 자신의 동생들을 데리고 와서는 동생들에게도 돈을 달라고 떼를 썼다. 올드 바자르를 지나며 겪은 사소한 애피소드가 우리의 여정을 풍부하게 했다.

세번째 목적지인 Bhindhyabasini사원을 향했다. 지도상으로는 얼마되지 않는 거리인데 골목에서 길을 잃고 헤메다 보니 시간을 지체했다. 배는 고파왔고 마땅히 사먹을 만한 곳이 없었다. 낡은 이삼층 짜리 벽돌 건물이 늘어선 전통마을 같은 거리를 지나고 버스파크로 보이는 지역을 벗어나자 겨우 간판을 찾고 목적지에 도착했다. 사원은 언덕위에 세워져 있고 그 아래 시민공원같은 잔디밭에는 가족나들이를 나오 네팔리들이 붐비고 있었다. 어쩌면 사원을 참배한 뒤 한가한 시간을 가지고 있는지도 몰랐다. 사원을 오르는 계단에는 적선을 요구하는 장애인과 노인, 아이들의 손길이 발걸음을 잡았다. 이 역시 보시를 통해 받는 사람과 베푸는 사람이 더불어 굶주림을 면하고 업을 벗는 종교적 의식의 한가지로 보였다. 사원은 큰 예배가 있는 날인지 좁은 경내가 사람들로 꽉차있었다. 여기저기 향불이 피어오르고 수십명씩 뭉쳐 탑을 돌고 무엇인가를 신상에 뿌리는 등의 의식을 진행했다. 사람들의 열기와 소음, 특히나 향불 연기 때문에 경내에 오래 머물 수가 없었다. 사방에 뿌려져 흰두교 특유의 붉은 색이 주는 공포감과 향불 연기가 품은 알 수 없는 냄새에 쫒겨 사원 뒷편의 계단을 통해 사원을 벗어났다.

공원과 사원을 올라가는 계단 근처에는 몇몇 식당이 성업중이었다. 허기라도 면하기 위해 이곳 저곳을 둘러 봤지만 이곳은 외국인이 찾는 관광지가 아닌지 우리가 먹을 만한 음식을 팔고 있지 않았다. 딱 한 군데 스파게티 등의 서양식 메뉴가 있는 식당에 들어섰지만 오늘은 식당 전체가 예약되어 있어 손님을 받을 수 없다고 했다. 할 수 없이 길가 조그만 구멍가게 겸 식당에 들어가 종류를 알수 없는 음식을 골고루 선택해 허기를 떼웠지만 너무 달아 식사대용이 되지 못했다. 네팔에 들어와 근 한달만에 처음으로 먹기에 힘든 음식을 시킨셈이었다.

오늘 네번째 목적지인 Gurkha Memorial Museum을 향했다. 사실 말이 목적지지 그냥 포카라라는 도시를 구석구석 걷고 싶어 정할 일정이었다. 포카라를 남북으로 거의 관통해 구르카 기념박물관에 도착했다. 다리도 아프고 부실한 점심때문에 허기도 졌다. 구르카 기념 박물관은 구르카족이라는 특정 민족의 민속 박물관 정도로 생각했는데 막상 박물관을 들어서니 완전히 군사박물관이었다. 박물관은 구르카족이 얼마나 용맹한 민족인지 그리고 얼마나 많은 전쟁에 참가해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영연맹이 지어준 것이라고 했다. 시대에 따른 쿠르카 용병의 변천사와 복장, 무기 등을 전시하고 있었고 특히 참가한 전투와 그 전투에서 전공을 세운 전쟁 영웅들을 기념하고 있었다.

사실 전시장을 도는 내내 분노가 치밀었다. 중간에 박물관을 나오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견디기 힘들었다. 특정 민족을 선택해 그들의 충성심과 용맹성을 부추켜 필요한 용병으로 길러 자국의 이익을 위해 전쟁에 투입해온 사악한 제국주의의 범죄행위를 칭송하고 기념하기 위한 공간에 입장료를 내고 들어왔다는 사실이 못내 억울했다. 아직도 영국주도로 용병을 모집하고 있고, 네팔 내에는 용병 양성소가 수십개나 운영되고 있으며, 이삼년에 한번씩 용병을 모집할 때는 거의 100대 1의 경쟁률을 기록한다는 사실이 너무나 가슴 아팠다. 가난한 네팔리가 단기간에 큰 돈을 질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길이 용병이 되는 것이라는 사실이 가슴 아팠지만, 그들의 삶의 조건을 이용해 그들의 목숨을 사서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투입하는 '선진국' 영연방의 야만성이 용납되는 현실에 화가 났다.

구르카 박물관을 나와 오늘의 마지막 일정인 안나푸르나 박물관을 들렀지만 우리가 도착했을 때 막 문을 닫고 있었다. 문을 닫던 직원은 박물관은 오후 3시에 문을 닿으니 내일 다시 오라고 안내했다. 하루종일 걸은 탓에 몸도 지치고 해서 숙소가 있는 레이크사이드로 가는 로컬버스를 올랐다. 버스 정류장이 있긴하지만 아무데나 버스를 세우고 승객을 싣고 내리고 하기 때문에 그냥 길가에 서서 지나는 버스에 대고 '레이크 사이드'만 외치면되었다. 레이크 사이드로 가는 길에 시위대에 길이 막혔지만 우회도로를 통해 금새 레이크사이드 입국에 도착했다.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로 떠나기 전에 들렀던 레이크 사이드 거리는 한국인 천지였는데 그동안 한국인은 사라지고 중국인 천지로 바뀌어 있었다. 코리언시즌중이라지만 설날을 맞아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한국으로 돌아가 버렸기 때문이었다. 벌써 낯 익어버린 레이크사이들 거리를 걷다가 저녁 식사를 하기에는 으른 시간에 허기를 면하기 위해 페와호수가의 한 레스토랑에 들렀다. 빵과 커피를 시키고 평화로운 호수의 풍광에 취해 있는데 레스토랑 스텝 한 분이 말을 걸어왔다. "Are you Chiness?" 우리는 한국인이라고 대답하자 그는 바로 한국말로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나 하국 가요. 세달있으면 가요." 그분은 곧 한국에 노동자로 들어갈 예정이시고 5년계획으로 한국에서 일을 하실거라고 했다. 그리고 바로 이 레스토랑에만해도 3명이 같이 한국으로 가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누운 의자에 기대어 지는 해가 지는 페와 호수를 바라다보고 있었고 그는 서서 말을 걸었다. 어색한 자세를 바로 잡았지만 참 할 말이 많으면서도 막상 무슨 말을 해야할지 당혹스러웠다.

그는 곧 시작할 한국생활에 대한 기대와 두려움을 동시에 드러냈다. 한국인을 만나 최대한 한국에 대해 이야기를 누고 싶은 눈치였다. 그는 한국의 추위에 대해 물었다. 여기보다는 많이 추울 거라고 대답하고 한국사람은 네팔 사람이 부지런해서 인기가 많다고 말했지만 순전히 한국 자본가의 입장에서 나온 평가일뿐이라고는 말하지 못했다. 이곳에 와서 네팔에 오래 체류하신 분들 입을 통해 네팔사람이 부지런하고 순하고 말잘들어 한국 공장에서 다른 동남아 노동자에 비해 인기가 많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지만 그것은 순전히 일을 시켜 먹는 사람들의 기준에 따른 평가일 뿐이었다. 한국사람은 성질이 급하고 '빨리빨리'를 입에 달고 다니지만 좋은 사람들이고, 한국은 좋은 나라라고 말했지만 다하지 못한 말이 입안에 맴돌았다. 하지만 진심을 다해 축하를 드리고 레스토랑을 나섰다.

"좋은 경험이 될겁니다. 축하드립니다.!"

페와 호수가를 거닐다 커피를 마셨던 레스토랑과 인접한 '부메랑 레스토랑'이라는 곳에서 포카라의 마지막 저녁을 보냈다. 포카라의 마지막 밤은 조금은 화려하고 싶었다. 스테이크를 시키고, 민속공연을 보면서 날이 저무는 페와 호수를 두눈에 가득 담았다. 네팔리들이 전통의상을 입고, 전통 악기를 연주하며, 렛산피리리를 부르는 저녁... 테이블 사이에는 장작불이 이글거리고, 호수 건너편 대기속으로 사라져가는 겹겹히 쌓인 산과 산들 그리고 포카라의 빛을 모아 반짝이는 페와 호수의 잔물결을 바라다 보다가 나는 갑자기 진해 앞바다가 목이 메이도록 그리워졌다. 해지는 바다의 섬들 사이를 배를 타고 지나며 그 아름다움에 취해 "그래 지금 여기서 죽어도 좋을 것 같다'며 호기롭게 생각했던 스무살 시절이 생각났다. 그 청년은 이제 패기를 잃고 세월의 힘에 씻겨 50대 장년의 눈으로 해지는 호수를 바라다 보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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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푸르나의 아쉬운 마지막 밤을 보내고 빗소리 들으며 아침을 맞으니 오늘은 산을 떠나 도시 포카라로 들어서는 날이다. 아침을 들고 서성이다 비가 가늘어지자 과감히 지름길을 잡아 담푸스로 향했다. 담푸스 가는 지름길은 트레킹 코스를 벗어나 수목과 바위가 어우러진 소로들이었다. 간혹 방목중인 소들이 길을 막고 있었고, 논밭이 보이는 언덕위에서 길이 수풀 속으로 사라져 당혹스럽기도 했지만 큰 마을이 인접한 야산을 헤쳐 나가기엔 큰 어려움이 없었다. 담푸스는 차량이 들어올 수 있는 큰 마을이었다. 넓은 비포장길을 따라 형성된 건물은 롯지와 가게를 겸한 주택들이 많았고 수공예 기념품을 만들고 파는 공방도 여럿 보였다. 한 공방 앞을 지나자 젊은 남자가 직접 만들었다는 천 제품을 들어 보이며 한국어로 호객을 하기도 했다. 오스트렐리안 캠프를 떠난지 한 시간도 안되어 우리는 이미 도시로 접어든 느낌이었다. 담푸스를 지나 패디로 향하는 길은 논밭사이의 오솔길과 농가와 농가를 잇는 아름다운 돌길이 이어졌다. 길을 나설 때가지 뿌리던 비가 그치고 투명한 햇살과 따스한 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분명 안나푸르나는 한겨울인데 고도를 낮추어 페디로 접어드니 한국의 봄날처럼 온화한 기운이 넘쳐났다.

오스트렐리안 캠프를 떠난지 두세시간이 지났을까, 페디에서 포카라 나야풀간 도로와 만나는 가파른 돌계단을 내려서자 파샹이 불러놓은 택시가 기다리고 있었다. 택시가 과속과 위험한 추월을 시작하자 이미 습관이 되어버린 요구를 했다. '나는 바쁘지 않으니 천천히 운전해 주세요.' 그래도 그 한마디에 택시는 속도를 줄였고 이내 네팔 최고의 현대적 도시인 포카라에 접어들었다. 포카라 떠난 지 몇일 되었다고 도시의 생동감이 반갑고 북적이는 사람의 발길에 흥이 일었다. 부산한 사람들의 움직임 속에 또 한 사람의 장례행렬이 이어지고, 몰려다니는 아이들의 분주한 동작들이 장례행렬과 함께 어우려졌다. 산은 산대로 아름다워 우리의 발길을 불렀지만 도시는 또 나름의 도시다운 인간미가 넘쳐났다.

 산행전 묵고 짐을 맡긴 '터치 네팔 호텔'에서 짐을 찾아 파샹의 소개로 미리 예약한 '베스트 탑 뷰 호텔'로 향했다. 베스트 탑 뷰 호텔 역시 레이크 사이드의 중심에 있었다. 중급 호텔로 조식 포함 하루 22불에 하루종일 뜨거운 물이 나오고 미네랄 워터가 제공된다고 했다. 밤이면 암흑 천지로 변하는 네팔에서 하루종일 따뜻한 물이 나오는 호텔은 나에게 대단한 호사임이 분명했다. 파샹의 친구가 성수기에 스텝으로 근무한다는 이유로 선택된 호텔이지만 비교적 만족스러웠다.

호텔에 짐을 풀고 레이크 사이드의 거리로 나서니 오후 2시가 지났다. 급한 빨레를 세탁소에 맡기고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식당을 찾아 두리번 거리다가 내일이면 헤어질 파샹을 위해 점심과 저녁 메뉴의 선택권을 주었다. 파샹에게 트레킹 동안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 무어냐고 물었더니 피자라고 했다. 그래서 두어번 롯지에서 피자를 시켰지만 두번 다 맛이 형편없었다. 그래서 파샹에게 포카라 가면 마지막 만찬은 꼭 고급 피자로 하자고 제안했고 파샹은 좋아했다. 역시 파샹은 점심으로 '피자'를 선택했다. 레이크사이드의 한 피자가게에 들어갔다. 유럽풍의 고급스런 분위기에 피자와 햄버거 스파게티까지 하나같이 맛이 좋았다. 파샹도 만족스러워 했는데 특히나 평소에 마음껏 마실 기회가 거의 없는 콜라를 너무 좋아하는 것 같았다.

점심을 먹고나니 거의 3시가 다 되어 다른 일정을 잡기에는 이미 늦은 시간이 되었다. 그렇다고 뚜렷하게 할 일도 없어 마냥 레이크 사이드를 싸돌아 다녔다. 하지만 레이크 사이드는 30분 길게 잡아 1시간이면 넉넉하게 돌아볼 수 있을 정도의 규모에 불과했다. 거리와 접한 2층 가페에서 레이크 사이드 거리의 아름다운 가게와 이곳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바라다보며 향기로운 커피를 마셨다. 거리는 한산했고 네팔리와 관광객의 표정은 여유로왔다. 우리는 세상과 삶의 아름다움을 음미하고, 안나푸르나에서 보낸 여정을 회상하며 포카라에서의 반나절을 향유했다. 다시 거리로 나와 같은 길을 서너바퀴나 돌다가 일몰을 맞는 페와 호수가에 머물렀다.  해지는 페와호수는 부풀은 의식을 잠재우고 들뜬 마음을 가라앉혔다. 호수만치 차분한 마음으로 나는 뜬금없이 고향 진해의 바닷가를 떠올렸다.  순간 갯내음이 입안에 번지고 고향에서 부모님과 살아가고 있는 동생을 생각했다.  그리고 지나간 모든 시간들이 다시 그리워졌다.

호텔에서 쉬고 있기로 한 파샹은 저녁시간에 한국음심점인 산마루 식당에서 만나기로 했다. 파샹이 오늘 저녁메뉴로 'Korean Food'을 원했기 때문이다. 산마루 식당에서 '불고기 백반'을 먹었고 다행히 파샹은 아주 맛있어 했다. 다시 베스크 뷰 호텔로 돌아와 파샹과 커피를 한잔 들며 그동안의 수고에 감사한 마음을 전하며 작별의 아쉬움을 달랬다. 포카라에서 카트만두로 귀환할 버스비와 얼마간의 팁을 주었지만 더 많이 주지 못하는 처지가 못내 아쉬웠다.

이번 여정이 즐거울 수 있었던 것은 단연 파샹을 만난 행운 때문이었다. 늘 즐거운 표정으로 씩씩하게 앞서 나가며 우리 부부의 모든 편의를 살펴주었던 파샹이 없었다면 이번 여행의 묘미는 반감되었을지도 모른다. 네팔의 정치적 상황과 네팔 청년의 고민을 나누며 네 딸이 살아갈 한국과 파샹이 살아갈 네팔의 현실을 비교하며 안타까움을 나눴고, 우리 모두의 행복한 미래상을 같이 그려보던 시간이 그리웠다. 마낭을 오르고 다시 내려오던 길에서 맞은 눈보라 속에서 파샹과 우리 부부는 트레커와 포터가 아니라 도반이자 가족이 되었다. 서로의 안전을 보살피며 서로의 즐거움을 북돋기 위해 애써던 시간들은 우리 부부가 살아가는 동안 내내 그리움으로 되살아 추억이 되었다.

집을 떠난지 처음으로 산마루식당의 전화를 빌려 딸 아이와 통화를 했다. 다행히 잘지내고 있다고 하고,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외할머니도 잘 신다는 소식을 받으니 조했던 시간들이 뒤로 밀려났다. 내 전화는 네팔에 입국하자마자 먹통이 되었다. 아내의 전화기가 있긴 했지만 와이파이 존은 없고, 3G망은 요금이 무섭고, 요금을 따로 내고 롯지에서 충전을 했지만, 산이 높아 아예 먹통이 된 전화 핑게로 집 나온지 22일 만에 딸한테 안부를 묻게 되었다. 롯지에서 요금을 내고 유선전화를 사용할 수도 있었지만 사실은 그냥 한국으로 전화하기가 싫었다. 혹시라도 아주 나쁜 소식이 있어 여정을 중단하고 돌아가게 되거나, 소소한 문제들이 있어 내가 여기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이 걱정만 떠안게 되는 그런 상황이 싫었다. 오로지 그냥 연락을 끓고 여정에 몰두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늘 딸아이에 대한 걱정은 목에 걸린 생선까시처럼 가쉬지 않았다. 여행내내 따라다니던 생선까시가 전화 한통화로 쏙 빠져 버렸다. 날듯이 마음이 가벼워졌다.

파샹과의 마지막 저녁을 먹고 호텔로 돌아왔다. 하루 22불자리 호텔이라고 그래도 무료로 카메라 밧데리 충전이 되고, 온수가 나오고, 아침식사가 나오고, 인터넷이 되었다. 로비에 놓인 1대의 컴퓨터에는 늘 사람들이 붐볐다. 호텔을 들고 나면서 계속 컴퓨터를 차지하기 위해 노렸지만 내 차례는 돌아오지 않았다. 스텝에게 물어보니 오후3시부터 초저녁 정전전까지 컴퓨터를 할수 있다고 했다. 3층 객실에서 로비까지 몇번을 들락거린 끝에 컴퓨터 앞에 앉을 수 있었다. 카메라 메모리를 백업하려 시도했지만 파일은 많고 속도는 느려터져 중간에 포기하고 말았다. 파일 복사중에 웹브라우즈를 열고 비나리마을 홈페이지와 네이버에 연결을 시도했다. 무려 23일만의 인터넷 접속이었다. 가슴이 한정없이 두근거리고 밀려났던 나의 삶들이 한꺼번에 죄여오는듯 갑자기 나의 삶의 무게가 중력을 얻었다. 고산 체질인가? 고산지대에서는 고산증을 전혀 느끼지 못하다가, 저지대로 오니 갑자기 나의 삶이 버겁게 다가온다. 멀리 보냈던 현실이 컴퓨터를 만지는 순간 나의 코앞으로 바짝 다가왔다. 알수 없는 긴장이 나의 몸을 감싸고 여행후 처음으로 가벼운 복통이 일어났다. 신경증이다. 초조와 불안은 내 삶의 필수불가결한 현실인가보다. 마을 홈페이지는 첫화면에서 멈춰 자유게시판의 게시물 목록만 조금 보이다 만다. 재부팅을 하고나서 다행히 네이버에 접속이 되었다. 눈에 띄는 뉴스가 보였다. '곽노현 첫출근'... 순간 반가왔다. 하지만 이어 선정적인 중앙일보기사가 눈에 띄인다. '곽노현 사건 판결 판사 알고보니...'아마 또 자기들의 입맛에 맞지 않는 판결을 내린 판사에 대한 사상검증 시비일 것이다. 뉴스를 클릭했지만 컴퓨터가 또 다운이다.

마을 홈페이지에 인사를 남기고, 나의 블로그와 페이스북을 들어가 보겠다던 기대는 포기하고 룸으로 돌아왔다. 온수로 샤워를 하고 양말을 빨고, 아내와 내일 새벽 파샹을 떠나 보낸 뒤의 우리 일정을 논의 했다. 이제 우리는 안나푸르나에서는 완전히 벗어났다. 우리에게는 네팔 최고의 현대도시 포카라와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라는 도시에서 보낼 수 있는 다섯밤과 여섯 낮이 남아있다. 어떻게 배분하고 무엇을 하며 보낼지 궁리를 하다가, 참체에서 만난 호주인이 권해서 염두에 두었던 반디푸르 여정을 포기하고 일단 내일 하루는 포카라의 박물관을 순례하고, 그 다음날 카트만두로 '투어리스트 버스'를 타고 가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파샹이 떠난뒤 영어도 네팔어도 안되는 우리 부부의 여정이 조금은 불안하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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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일찍 눈을 떴다. 저만치 멀어진 안나푸르나를 뒤돌아보며 [Modi Khola Guest House]를 나섰다. 밤새 2층 룸의 계단을 지켜주던 깔리는 길 떠나는 우리를 따라나서 한참을 배웅했다. 이미 만남과 이별이 습관이 되었을 깔리는 그래도 작별이 서운했는가 보다. 마을을 벗어나자 마자 얼마 안있어 이 마을의 이름을 바꾼 '뉴 브릿지'를 건넜다. 이 일대에서 처음으로 쇠줄을 걸쳐 만든 흔들다리였기에 아예 마을 이름까지 [뉴 브릿지]가 되었을터인데, 너무 빨리 만든 덕분에 이제는 낡아 대표적인 '올드' 브릿지가 되어 있었다. 한쪽 죄줄이 늘어져 다리가 모로 기울고 발판은 군데 군데 구멍이 나 있었다. 그래도 이름만은 '뉴 브릿지'로 오래도록 남아있을 다리를 건너 란드룩으로 방향을 잡아 하염없이 걷고 또 걸었다.

 

 

안나푸르나 산중에서 보내는 마지막 날, 길은 편했고 날씨마저 좋아 눈이 시리도록 흰 안나푸르나를 하염없이 뒤돌아보고 또 뒤돌아 보며 우리의 끝나가는 여정을 아쉬워했다. 상행 때는 쉬 다가오지 않던 산들이 하행 길엔 순식간에 덧없이 멀어져 갔다. 이제 가면 언제오나! 적금이라도 들어 5년뒤를 계획해 보지만 세상은 넓고, 인생은 짧으니 아마 이번이 이승에서 안나푸르나와의 마지막 인연이 될지도 알수 없는 노릇! 앞은 보지도 않고 뒤를 돌아보고 다시 고개를 떨구어 내가 딛고 있는 땅을 보고, 그리고 다시 고개를 돌려 걸어온 길과 멀어져 가는 안나푸르나를 바라다보기를 반복했다. 분명 다음 목적지는 포카라고, 카트만두고 그리고 인천으로 이어져야하는데 나는 정처없이 걷는 방랑자가 되었다. 어느 순간 나의 걸음을 이끄는 것은 계획이나 일정이 아니라 오직 앞에 놓인 길이 되어버렸다. 저 길이 나를 어디로 인도할지 모르는 사람처럼 나는 기가 죽었고 조심스러워졌다. 수백, 수천년 동안 비탈진 안나푸르나 산자락을 일구어 씨를 뿌리고 낱알을 거두어 가족의 삶을 지켜온 네팔리의 피와 땀, 사랑과 미움, 그리움과 그윽한 삶의 희열이 베일 돌길을 따라 꼭 한 발짝씩만 내디뎠다. 우리 삶이 그러하듯 걸음에 어떤 비약도 없었다, 걸어온 만치 새 걸음의 토대가 되고, 그 토대에서 내딛는만치 내 삶의 현실이 되었다.

 

 

안나푸르나 눈이 녹아 흐르기 시작한 차가운 물이 모여 Modi Khola를 이루고, 그 강이 흘러 깍아 세운비탈진 산자락에 따데기같은 다락 논을 일구어 생명을 보전하고 마을을 일구며 살아온 네팔리의 삶터를 가로질렀다. 촘롱강 건너 상행길에 걸었던 사울리바자르에서 간드룩으로 이어지던 길이 오늘 하행길과 나란히 이어졌다. 고개마루마다 놓여진 길손을 위한 쉼터를 '쪼따로'라 불렀다. 쪼따로에 앉아 강건너 바라다 본 아득한 길들이 실날같이 가날프고 아름다웠다. 내가 언제 저 길을 걸었고, 저 끝없는 돌계단을 한칸 두칸 올라 저 아찔한 고개마루에 터잡은 간드룩을 거쳐 갔던가! 벌써 상행길의 기억은 가물거리기 시작하고 이미 나의 마음속에 하나의 추억으로 남아버렸다.

 

 

뉴브릿지를 떠나 Tolka를 지나면서 점심을 먹었다. 메뉴는 전통 구릉족 빵이라는데 빵은 지금까지 먹었던 티벳 빵과 구별이 되지 않았는데 딸려나온 국이 꼭 한국 된장국이었다. 된장만 안들어갔지 말린 시레기를 잘게 썰어 넣고 콩가루를 넣어 뻑뻑하니 끓인 국이었다. 전통 구릉족 빵을 주문하자 파샹은 조금 걱정스런 표정으로 되물었는데 아마 그런 시레기국을 우리가 잘 먹어낼지 걱정이 되었던 것 같았다. 구릉족 시레국을 맛있게 잘 먹는 우리를 보고 파샹은 신기해 했다. 롯지를 나와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길을 역시 초행인 파샹과 같이 더듬어 나갔다. 톨카를 지나 포타나가 다가오자 길이 여러갈래로 갈라지고 엉키면서 우리는 멈출 수밖에 없었다. 어느 길이 우리를 포타나로 이끌지 파샹도 몰랐고 물을 수 있는 주민들도 보이지 않았다. 할 수없이 란드룩에서 만난 홍콩인 커플 트레커를 기다렸다. 아니 홍콩인 커플을 안내하는 포터와 가이드를 기다렸다. 그들의 안내로 잃어버린 길을 되찾아 다시 걷다보니 얼마 지나지 않아 포타나 체크 포인드가 나왔다. 팀스카드에 Check-Out 도장을 받고 나니 나는 이제 더이상 트레커가 아니게 되었다. 그 순간부터 나는 단지 네팔 투어리스트의 한명일뿐!

 

 

오늘 하루 한국인 트레커를 한명도 만나질 못했다. '코리언시즌'이라 불리는 만치 겨울 비수기 2달동안 전체 트레커의 절반 이상이 한국인이라는 ABC에서 하루종일 한국인을 만나지 않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고 했다. 나야풀, 사우디바자르, 간드룩, 촘롱구간이나 따다파니, 따또파니, 푼힐, 촘롱구간과는 달리 촘롱에서 지누단다를 거쳐 란드룩, 톨카, 팜푸스, 페디로 이어지는 구간은 거의 한국인이 없는 것 같았다. 나야풀로 바로 하행하는 것보다 하루 반나절을 더 길게 잡아야 하는 코스를 선택해 산중에서 지친 몸을 이끌고 지체하기에는 한국인의 성정에 어우리지 않는 코스인지도 모르겠다. 포타나의 체크체크포스틀 빠지며 근무자에게 물으니 오늘은 한명의 한국인도 체크포스트를 지나지 않았다고 했다.

 

 

포타나 체크포인트에서 길을 물어 '오스트렐리안 캠프'를 찾았다. 담푸스로 바로 빠기기에는 아직 트레킹에 미련이 남아있기도 했지만 떠나는 안나푸르나를 마지막으로 바라다 보기 위한 선택이었다. 중국인 커플의 가이드 말로는 '오스트렐리안 캠프'가 주 트레킹 코스에서 조금 떨어져 있긴 하지만 멋진 View Point면서 조용하게 지낼 수 있는 마을이라고 했다. 또 한가지, 톨카를 지날 때 만난 한 네팔리로부터 오스트레릴리안 캠프에 한국인이 살고 있고 롯지를 운영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이왕이면 그곳에서 지낼까 하는 생각도 있었다.

 

 

오스트렐리안 캠프는 40여년전 오스트렐리안 무리가 캠프를 한데서 연유한 지명이라고 했다. 포타나에서 담푸스로 빠지기 전 오른쪽 언덕길을 15분정도 오르다 야트막하게 보이는 뒷산을 등지고 삼면이 트인 꽤 넓은 평지가 나오고 4~5개의 롯지가 자리잡고 있었다. 마을은 외졌고 아름답고 그리고 멋진 뷰포인트에 자리잡고 있었다. 파샹이 나서 지나는 네팔리에게 한국인이 운영하는 롯지를 물었다. 이 동네에는 20여년전에 들어와 살고 있는 한국인이 있긴 하지만 롯지를 운영하지는 않고 그냥 조용히 '마음 공부'를 하고 계신다고 했다. 마을 구경 삼아 동네 끝까지 갔다가 마지막 롯지면서 마을 이름을 가져온 '오스트렐리안 캠프'가 열렸던 자리에 터잡은 [오스트렐리안 캠프 게스트 하우스]에 방을 잡아 방해받지 않는 시야를 얻었다.

 

 

짐을 풀고 마당을 나서니 멀리 구름 위에 떠있는 사우스 안나푸르나, 히운출리, 마차푸차레 그리고 람중히말이 한눈에 눈에 들어왔다. 검은 대지위에 짙은 구름이 머물고, 구름이 엹어져 하얗게 번지는 사이로 안나푸르나의 자태가 들어났다. 흰구름과 흰 산이 만나니 구름이 산을 만들고 산이 구름으로 흩어졌다. 지상으로부터 하늘로 번져 올라가는 어둠이 희색으로 우뚝 솟은 안나푸르나를 더욱 두드러지게 해 오히러 현실감이 떨어졌다. 산이 산이 아니고 하늘에 떠 있는 '하늘 궁정'같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니 멀리 페와딸이 보이고 아득히 포카라 넘어 겹겹산들이 깊었다. 혹시 영산 다울라기리를 볼수 있을까 기대했지만 확인할 길이 없었고 다울라기리 방향으로 짙은 구름까지 끼어 다음을 기약했다.

 

 

 

 

다이님 룸에 들어서니 한명의 손님이 창가를 지키고 있었다. 네팔리와 똑같은 외모에 파샹이 말을 건넸지만 그는 알아듣지 못했고 알고 보니 일본인이라고 했다. 그는 들어서는 우리 일행에게 눈인사도 보내지 않고 담배를 피우고 차를 마시고, 식사를 마치고 또 담배를 피웠지만 시선은 늘 창밖으로 향해있었다. '나마스테. 곤니찌와.' 인사를 건네도 착한 얼굴로 눈인사만 주었을 뿐 그의 시선은 여전히 창밖으로 향했고 마음은 멀리 떠나있는 표정이었다. 그가 룸으로 돌아간뒤 사오지가 전하길 그는 일주일째 이 롯지에 머물고 있으면서 하루종인 창가에 앉아 먼산만 바라보고 있다고 했다. 그는 어떤 사연을 품고 안나푸르나의 산 언저리에 방을 얻어 일주일 내내 창밖만 바라다 보고 있는건지, 그리고 이 마을에 20년째 살고 있다는 한국인은 또 어떤 사연을 품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태산같은 짐을 지고 안나푸르나 돌계단을 아슬아슬하게 내 딛는 조랑말의 삶의 무게나, 5평 따데기 논을 일구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네팔리의 삶의 무게처럼 한사람 한 사람에게 주어진 몫의 삶은 다 그렇게 힘겹고 아픈 건지도 모르겠다. 고도는 낮아지는 만치 삶의 무게는 그만치 더 무겁게 다가왔다. 

 

 

비교적 싼 음식값에 풍성한 저녁을 주문했다.  롯지 주인 식구들이 먹기위해 조리했다는 메뉴에 없던 닭고기 조림 한접시에 락시까지 한잔 시켜놓고 안나푸르나에서 보내는 마지막 저녁을 보내며 나의 삶을, 그리고 세상을 살아가는 뭇 생명의 삶을 그 삶의 무게를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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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일찍 영인이 아빠를 만나 쓴 식전 담배를 같이 하면서 하루를 시작했다.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를 향해 올라갈 사람과 지누단다를 지나 뉴브릿지까지 내려가야할 사람의 만남은 짧았다. 뭐라고 더 절실한 인사말이라도 남겨야할 것 같은데 그냥 가벼운 미소를 서로의 안부를 기원했다. 어제 저녁은 이래저래 풍성했다. 이번 여정의 최고점인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를 딛고 해발 3000m 이하로 내려왔다는 안도감 때문이기도 했고, 반가운 사람을 만났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제대로 된 김치를 먹을 수 있었던 날이었다. 전날 저녁 먹었던 김치 맛을 한번 더 느끼고 싶어 오늘 아침에는 아예 롯지 주인에게 김치찌게를 끓여 달라고 요청했다.  같이 김치찌게를 시켜 먹자고 작당한 여선생님은 적당량의 물만 붓고 끓여주기만 하면 된다고 가이드분에게 설명까지 덧붙였다. 김치찌게에다 맨밥을 시켜 신나게 먹고나니 오히려 식사비도 더 싸게 치였다.




어제 오후에 비까지 내리던 날씨가 자고 일어나니 더 할 나위 없이 쾌청했다. 해가 나기 시작하니 고도가 낮아진 만치 기온마저 올라 밤의 한기는 온데 간데 없고 팍팍한 여정의 피로마저 풀려 온 몸에 기운이 솟았다. Upper-Sinuwa에서 곧바로 돌계단을 따라 하염없이 내려가는 길에 Low-Sinuwa를 지났다. 화창한 햇살아래 지나는 길과 집이 하나같이 단정했다. 길가에는 쓰레기를 찾아볼 수 없었고, 마당은 모두 비질까지 해 놓았다. 구질구질한 생활 도구들도 말끔히 치워진 모습이었다. 마을로 들어서니 음악소리가 울려퍼지고 심상찮은 기운이 감돌았다. 아니나 다를까, 오늘 이 동네에서 결혼식이 있다고 했다. 가파른 산동네에 공터라고는 있을 수 없는 형편이니 그나마 넓은 길에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처마밑에 세워둔 앰프에서 경쾌한 음악이 흘러나오고 화려하지 않지만 단정한 차림의 젊은이들이 음악에 맞춰 이쁘게 춤까지 추고 있었다. 어른들은 마당 한켠에는 솥을 걸어놓고 온동네 가득차게 연기를 피우며 잔치 음식을 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온동네가 잔치집 분위기였다.



예식장이라는 공간에서 진행되는 재력과 사회적 지위를 과시하는 형식만 남은 결혼식에 초대될 때마다 사회적 의무를 피하지 못해 그냥 체면치레로 자리를 지키던 한국의 결혼식 문화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결혼식'이 서비스업의 하나가 되고 신랑 신부는 서비스 상품을 소비하는 소비자로 결혼생활을 시작하는 것이 아닐까 늘 마음이 편치않은 한국의 결혼식과는 달리 집마당에서 온동네 이웃이 다 모여 치루는 결혼식은 축복이 넘치고 삶의 숭고함이 느껴졌다. 그것은 나의 복고적 심성이나 편향된 취향 탓일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결혼식은 온동네가 같이 한 이틀 먹고, 마시고, 춤추고, 놀면서 사랑의 숭고함을 확인하고, 진정한 축복을 주고받을 만치 중요한 인생의 한 계기로 받아들이는 그들의 삶이 더 아름답게 느껴졌다. 오늘 결혼하는 새 신부신랑의 행복을 빌며, 그들의 귀한 인연을 축복하며 촘롱을 향해 하염없이 이어지는 돌계단을 내려갔다.


우리가 걷는 길을 나란히 걸어 촘롱의 학교로 등교하는 아이들과 스쳤다. 죽니 사니 하며 진땀을 빼면서 오르락 내리락 해야했던 촘롱-시누아 구간의 돌계단을 10살도 안되 보이는 이 아이들은 매일 등하교를 하고 있었다. 아이들 모습이 너무나 정겨웠다. 단정한 교복에 까만 구두를 신은 여학생의 발랄한 발걸음이 가파른 촘롱의 2400개 돌계단의 부담을 함껏 들어줬다. 이 곳 네팔의 살골짜기에도 교육열풍이 불었는지 모르겠지만 촘롱에 들어서 학교와 가까워지자 의외로 등교하는 아이들이 북적였다. 파샹이야기로는 약 80%의 학생들이 진학을 한다고 했다. 어떤 자료에선가 보니 그중 약 80% 학생이 또 학업을 다 마치지 못하고 중도에 그만둔다는 이야기도 본 것 같았다. 학교를 중도에 그만두는 경우도 그렇지만 아예 학교 문턱도 가보지 못하는 아이들은 농사일에 가사일에 어려서 부터 혹독한 삶을 산다고 했다. 사실 여정중에 '나마스테! Sweet!"을 외치며 손을 내미는 아이들은 교복을 입지 않았고, 방과중인 시간에 집에 길에 남아있는 아이들이었다. 왕정 독재 체제에서 막 벗어나서 세계 최고 빈국의 대열에서 탈출하려는 네팔 정부의 몸부림이 얼른 큰 성과를 이루었으면 좋겠지만 당장 그 아이들이 처한 삶의 조건이 너무나 안타까웠다. 마음으로 그 아이들의 삶에 축복이 있길 빌고 돌아섰지만 오래도록 마음이 게운하지가 않았다.


촘롱에 오르니 확실히 물가가 달라졌다. 물가가 싸지니깐, 싼 맛에 파샹이 좋아하는 환타를 사주고 간식도 사먹었다. 한국에서도 흔한 다국적 상표들의 초코렛과 포장이 엉성한 네팔산 과자를 샀는데 네팔과자는 싼 대신 맛도 덜하고 모레가 씹혀 다 먹지 못했다. 상행길에 묵었던 롯지를 지나 촘롱을 벗어나서 바로 외쪽 가파른 돌길을 따라 까마득히 아래 Mudi Khola 가 흐르고 있었고 그 계곡 가까이에 지누단다가 보였다. 지누단다로 내려 가는 길은 한산했다. 올라오는 사람도 내려가는 사람도 없었는데 중간쯤에서 단 한명의 트레커를 만날 수 있었다. 짐작으로 80살은 넘어 보이는 한 백인 할머니가 가이드의 도움을 받으며 이 거친 안나푸르나를 걷고 있었다. '나마스테!'라고 인사를 건네며 스쳐 지나갔지만 내리막길 내내 그 할머니의 여정과 삶이 궁금했다. 나는 여든 살이 넘어 다시 안나푸르나를 찾을 만치 건강한 몸과 정신을 보전할 수 있을까 생각했지만 자신이 없었다. 뒤돌아보면 가파른 돌계단을 몇개 오르지 못하고 쉬고, 다시 쉬고 언제 저 많은 돌계단을 다 올라가실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하루에 우리가 가는 일정의 오분지 일은 고사하고 그냥 평길을 걷는 것 조차 불편해 보이는데 그분은 왜 이 길을 혼자 나섰는지 알 수 없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안나푸르나에 묻었을까? 아니면 살아생전에 꼭 오고 싶었던 안나푸르나를 이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황혼에나마 그 꿈을 이루고 계신건가, 아니면 젊어서 같이 걷던 남편을 먼저 여의고 사랑하는 남편의 자취를 쫒아 다시 안나푸르나를 오르는 것일까...


지누단다의 한 롯지에서 점심을 주문하고 전날 비에 젖은 옷들을 따사로운 햇살아래 늘어놓으니 그냥 오늘 여기서 머물러버릴까는 생각도 들었다. 점심을 먹고 곧바로 노천 온천을 향했다. 15분 걸려 내려가서 30분 걸려 올라와야 되는 강에 바로 붙어 있는 노천 온천이라 했다. 동네 목욕탕만한 탕이 두개에 샤워를 할수 있도록 호수를 박아 물을 흘리고 있는 꼭지가 세개인 온천에 도착했다. 흐름한 양철 가건물이 탈의실로 쓰였고, 할아버지 한분이 관리를 하고 있었다. 이 온천을 보전하고 가꾸는데 필요하다며 1인당 50루피를 기부라는 이름으로 요구했다. 햇살은 따사로운데 계곡의 바람은 차서 옷을 벗고 물까지 뛰어가다시피해서 따뜻한 온천물에 몸을 담갔다. 물은 이끼인지 부유물이 떠다녔지만 그래도 땀에 절은 나의 몸은 고스란히 온천에 녹아들고 생명의 충만감에 빠져들었다. 그 순간 내가 살아있음이 얼마나 고마운지, 얼마나 행복한지 몰랐다. 파샹과 그동안 묵은 땀을 씻어내고 피로를 씻고 한참을 다뜻한 물에서 그 순간의 행복을 만끽했다. 관리인 할아버지가 파샹과 같이 목욕하는 우리 사진을 찍어 주셨다.


파샹은 전날 사람이 많을 것 같다며 온천을 하지말자는 뜻을 밝혔는데 왠걸 온천을 하는 동안도 그렇고 온천까지 오르락 내리락 거리는 동안에도 단 한명의 트레커 밖에 만날 수 없었다. 아마 파샹은 지누단다를 지나 란드룩으로 해서 페디로 빠지는 일정보다 간드룩에서 나야풀로 빠지는 빠른 일정을 택해 빨리 포카라로 가고 싶어 뻥을 친것 같았다. 온천을 우리만 누리는 호사를 더 만끽하고 싶었지만 마음을 고쳐먹고 다시 지누단다로 올라와 롯지에 맡겨놓았던 배낭을 찾아 매고 뉴브릿지로 향했다. 지누단다에서 다시 한참을 내리막길을 걸어 Kimrong khola에 이르러 쉬고 있자니 우리가 비켜 왔던 아가씨들이 파샹에게 농을 걸었다. 서로 길이 갈라져 멀어져 가면서도 아가씨들은 계속 파샹에게 무어라고 농을 던지고 파샹은 계속 싱글벙글 입을 다물지를 못했다. 나도 덩달아 파샹에게 배낭은 나에게 주고 저 아가씨들 따라가라고 부추키며 놀리니깐 얼굴마저 새빨갛게 변했다. 파샹의 순진무구한 그 설레임이 아름다웠고 그럴 수 있는 나이가 부러웠다.



새 다리를 놓아 마을 이름조차 뉴브릿지로 변해 버린 마을은 두세개의 롯지가 전부인 조그마한 마을 이었다. 다른 트레커도 보이질 않고 단지 닭을 지고 나르는 짐꾼 몇이 앞 롯지에 방을 얻은 것 같았다.조금 일찍 도착한 덕분에 롯지 주변을 산책하고 마당에 풀어놓은 개 한마리와 놀 수 있었다. 덩치 큰 검은 개가 한마리 2층 룸으로 가는 계단을 지키고 있었는데 우리는 그냥 '칼리'라고 불렀다. 이 개의 진짜 이름은 뭔지 모르지만 파샹을 통해 검은 개는 네팔어로 '칼리 꾸꾸루'고 그냥 줄여서 '깔리'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미리 배웠두었기 때문에 그냥 보이는 검은 개는 다 깔리라고 불렀다. 깔리를 타고 넘어야 1층으로 내려갈 수 있어 부담스러웠지만 깔리는 순하디 순한 성품이어서 자신을 타고 넘어가도 감은 눈을 뜨지도 않았다. 그래도 밤 늦게 아내가 룸에서 20m는 족히 떨어져 있는 화장실에 갈 때는 크게 짖어대어 믿고 있던 사람을 깜짝 놀라게 했다.


데크에 앉아 식사를 기다리며 해지는 안나푸르나를 바라보니 벌써 산이 제법 멀어져 있었다. 같이 하산하던 트레커들은 전부 간드룩이나 따다파니 쪽으로 하산했는지 아무도 보이질 않았다. 그래도 이쪽 방향으로 내려오기로 한 여선생님을 기다렸지만 날이 어둡도록 내려오시질 않았다. 아마 지누단다에서 여정을 푸신 것 같았다.


다른 롯지에서도 그랬지만 이곳도
부엌이 아니라 꼭 헛간 같은 데서 따로 조리를 했다. 내가 알기로는 이곳은 나무로 음식을 하지 못하게 규제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안나푸르나 보전지역내에서는 산림을 보호하기 위해 가스나 석유를 사용하게 하는데, 가스나 석유가 워낙 비싸서 그렇겠지만 손님이 적고 시간 여유가 있을 때는 그냥 헛간에서 나무로 조리를 하는 것 같았다. 롯지 주인집 딸이 조리를 하면서 자꾸 힜끗거리며 낯선 트레커인 우리를 쳐다봤다. 그 아이는 바같 세상이 궁금한 것이 분명했다. 우리가 묻혀 들어 온 바같 세상의 바람따라 어쩌면 저 아이도 언젠가는 부모의 뜻과 무관하게 세상 밖으로 떠나갈지 알 수 없었다.



식사가 나오고 우리는 하산 기념으로 락시를 한잔 시켰다. 파샹은 자신의 달밧에 따라 나온 토마토 아자르와 염소 젖을 맛보게 했다. 토마토 아자르는 모양과 맛이 꼭 걸죽한 김치국물같아 입맛을 돋구었고, 염소 젖은 가공을 했는지 요플레같이 건데기가 있고 시끔하니 먹을 만 했다. 파샹은 달밧에 얹혀있는 버팔로 고기도 아내와 나에게 한토막씩 건네주었다. 먹어보니 맛이 좋았다. 매운 고추를 넣고 간장에 조린 듯한 버팔로 고기는 우리 입맛에 딱 맞았다. 파샹에게 부탁해서 버팔로 고기를 따로 한 접시 주문해서 안주를 삼고, 락시를 한잔하며 핸드폰으로 김광석을 털어놓고 해 지는 안나푸르나를 올려다보았다. '다 좋다'는 말밖에 할 말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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