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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1일 차메를 출발, 브라탕, 두쿠르포카리를 거쳐 어퍼피상에서 하루 밤을 머물고, 2월2일 가파른 오르막을 힘겹게 올라 갸루에서 점심을 먹고 나왈까지 걸어 하루를 마무리했다.



차메의 아침은 분주했다. 고산증으로 하산중인 캐나다 청년은 사우니를 통해 짚차를 알아보고 이른 아침 도망가듯 떠나갔다. 도로는 좁고 가파랐고 포장이나 가드레일은 물론 없었다. 사륜차가 아니면 다닐 수도 없는 열악한 조건인데 눈까지 얼어붙어 나같으면 도저히 그 길을 차를 타고 내려갈 자신이 없었다. 짚이 떠난뒤 사우니 이야기로도 작년에도 사람과 짐을 가득 실은 차가 수백미터 아래 마르샹디로 떨어져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등 역시나 사고가 빈발한다고 했다.  캐나다 청년은 떠나갔지만 탄촉부터 그 청년을 따라왔다는 검정개는 우리곁에 남아 있었다. 어제 저녁 롯지 복도에 잠을 자던 검정개는 롯지의 개가 아니고 그 청년을 따라 들어온 낯선 개라고했다. 낯선 개가 롯지 실내에 들어와 복도에서 잠을 자도록 버려두는 네팔리들의 동물에 대한 태도가 참 남달랐다.



길을 나서기전 롯지에서 일을 보던 13살 소녀 수니타에게 축구공과 아주 조금의 용돈을 쥐어주었다. 그 아이는 일찍 아버지를 여위고 엄마는 다른 롯지에서 일을 하고 자신도 역시 포탈라 롯지에서 심부름을 하면서 입을 들고 학교를 다니고 있다고 했다. 맑은 눈에 꿈많은 아이가 살아갈 세상이 꽃길은 아닐 지언정 제발 험하고 곡절많은 가시발길이 아니길 빌면서 롯지를 나섰다. 깔리(검정개)도 우리를 따라 길을 나섰다.

 


차메를 벗어나기위해 한바탕 법석을 떨어야했다. 우리를 따라 나선 깔리를 지나는 길목마다 지키고 있던 다른 개들이 그냥 두질 않았다. 집단으로 덤벼드는 개를 쫒고 우리 뒤로 숨어드는 깔리를 지키면서 겨우 마을을 벗어났다.  길을 걷기 시작하자 마자 탈레큐를 지났다. 우리는 숲속으로 들어갔다가 금방 나오고  조금 가파른 듯한 언덕길을 오르다가도 어느새 편안한 길을 걷고 있었다. 누구라도 지치지 않고 편안히 걷기에 딱 좋은 길이 이어졌다. 날씨 마저 최상의 날이었다. 공기는 건조하고, 하늘은 투명하도록 새파란 빛에 흰구름마저 어울렸다. 계곡을 갈라 파란 하늘이 열리고 그 너머로 설산이 얼굴을 내미는 아름다운 길은 아무리 걸어도 지칠 것 같지 않았다.   



 

차메를 떠난지 두세시간이나 지났을까 목이 마르고 잠시 쉬어 가고 싶을 때쯤 커다란 사과 과수원이 길따라 가꾸어져 있고 농장 시설이 있는 브다땅을 지났다. 오랜만에 신선한 과일향이 그리워 과수원에 딸려 있는 듯한  bhratang Tea House에서 배낭을 벗었다. 말라 비틀어진 조그마한 사과를 생각보다 훨씬 높은 가격에 사고, 예상보다 시원하고 향그러운 데다 가격까지 싼 사과쥬스를 한잔씩 나누었다.  사과농사를 짓는 입장에서 볼때 과수 상태는 볼 것도 없었지만 그 규모만은 놀랄만했다.  대규모의 농장이 소농의 삶의 터전을 흡수하는 방식이 아니라 지역 농민에게 도움이 되는 방식으로  가꾸어지기를 빌었다. 땀이 마르고 겉옷을 찾을 만치 몸이 식은 뒤 다시 걷기 시작했다.

 


 

입안에 가득 사과향을 머금고 브라탕을 출발하자마자 좁고 긴 계곡을 이루는 절벽을 깨서 만든 위태로운 길이 나왔다. 사람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 건지 어떻게 이런 절벽을 깨서 길을 만들 생각을 했을까 신기하기만 했다. 반터널같은 길을 지나 가파른 숲길을 통과하자 갑자기 시야가 넓어지고  오른쪽으로 깍아세운듯한 암벽능선이 보이기 시작했다. 디쿠르포카리에 접근하자 이 암벽 능선은 우리의 시야를 압도하는데  '스와르가 드와르'(혹은 paungda Danda)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빙하의 침식이 만든 무려 1500m 높이의 바위 한개로 이루어진 절벽으로  여기 사는 티벳사람들은 자신이 죽으면 그 바위산을 넘어 고향 티벳으로 돌아간다고 믿는다고 했다.

 

 

Dhukure Pokhari를 지나면 이날 하루의 휴식이 기다리고 있는 Pisang이지만 피상은 마르샹디 계곡을 따라 형성된 Low Pisang과 마르상디 계곡을 벗어나 북쪽 산자락에 자리잡고 있는 Upper Pisang으로 나누어져 있고, 이번에는 Upper Pisang을 택해 길을 잡았다. Dhukure Pokhari를 왼편으로 끼고 돌아, 멋진 나무다리를 밟고 마르샹디를 건너 완만한 언덕길을 잡아 3km쯤 걸었다. 

 

 

Pisang 마을을 들어서자 가파른  골목길을 타고올라 마을의 제일 높은 위치에 자리잡은 롯지에 짐을 풀었다. 빨래를 들고 데크에 나가서니 시야가 너무나 시원했다.  마르샹디 계곡아래 Low Pisang을 내려다 보고, 고개를 들어 안나푸르나 2봉을 비롯한 산군들을 바라다 보다가, 다시 눈을 돌려 '스와르가 드와르'넘어 지나온 길을 더듬었다. 그리고 오른쪽을 눈을 돌리니 우리가 넘어야할 쏘롱라로 이어지는 가는 길들이 헌준한 산들 사이에 실가락 처럼 사라졌다. 

 

 

숙소를 나와 마을 꼭대기에 있는 불교 사원에서 남은 오후 시간을 보냈다. Gompa의 역사는 알수 없었지만 마을 사람들이 기부해서 만든 절이라고 했다. 사찰내 건물의 대부분은 새로 지어진 듯 했고 오래된 절이 갖는 멋은 없어 보였다. 그래도 우리는 본전에 들어가 모두 부처앞에 절을 올렸다. 우리의 가이드 바수와 나브라즈는 흰두교 신자지만 부처와 시바가 다르지 않다고 했다. 나는 무신론자지만 그 순간에는 여기 터잡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신을 존중하고 싶었다. 그리고 십몇년을 같이 살다 네팔로 떠나오기 직전 생을 마친 우리집 강아지 초롱이의 명복을 빌었다. 롯지로 돌아와 전망 좋은 다이닝 룸에서 해지는 안나푸르나의 멋에 취해 밤을 맞았다.

 

 

하루에 600m를 높여 고도 3300m인 Upper Pisang에서 아주 가벼운 고산증이 왔다. 조금의 불면과 가슴두근거림 정도라서 걱정스러울 정도는 아니었지만 아직 갈 길이 머니 내 몸 상태의 변화에 대해 세심한 관찰이 필요해 보였다.  피상을 벗어나 수평에 가까운 길은 마르샹디의 흐름과 같이 하면서 한시간 쯤 걸은 뒤 출렁다리를 건너자 마자 길은 갑자기 가파른 상승길로 바뀌었다. 단 한번의 내리막이나 평지도 없이 가파른 오르막길은 끝없이 이어졌다. 거의 심리적 육체적 한계치에 도달할 즈음 작은 Tea House가 나왔고 우리는 갸루 입구에 도착을 했다.

 

 

우리는 잠시 차를 나누며 숨을 고른뒤 애매한 점심시간때문에 고민하다가 좀 더 걷기로 하고 출발 했다. 하지만 마을을 관통하는 골목길을 벗어나자 마자 우리는 발길을 돌려 되돌아왔다. 다음 마을까지 거리도 멀고 혹시 문을 연 식당이 없을 수도 있다는 가이드의 조언을 받아들여  엿다. 사람의 온기가 식어 한산하고 쓸쓸한 마을로 돌아왔지만 문을 연 식당을 찾을 수 없었다. 여행안내서에는 이곳 주민들이 주로 야크를 키우고 곡물을 재배하면서 오래 전에 획득한 무역영업권을가지고 여전히 무역업에 종사한다는 설명을 읽었지만 눈으로 확인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마을 입구에 들어섰을 때 우리를 붙잡던 식당으로 돌아가니 놓친 손님을 다시 받게된 사우니가 반갑게 우리를 맞았다.

 

 

뚝바를 시키고 사우니가 밀가루 반죽을 미는 동안 나브라즈는 사우니를 통해들은 마을 사정을 전했다. 갸루에는 7명의 아이가 있는데 그중 3명이 카트만두 유학중이고 이 마을도 점점 사람이 줄어 마을이 비어가고 있다고 했다. 네팔 역시 저개발상태를 벗어나기 위해 도시화를 할 수밖에 없다고 보면 산간에 형성된 갸루같은 외진 마을이 사라져가는 현상도 피해갈 수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사람도 나고 죽듯 마을 역시도 생겨나고 소멸하는 순환과정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이 당연한데도 이 마을에 사람이 줄고 있고 머지않아 마을 자체가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가슴이 아팠다.

 

 

갸루에서 나왈까지도 메마른 산자락을 따라 길이 이어졌다. 계절 탓도 있겠지만 주변의 숲은 빈약했고, 자갈 투성이 흙은 푸석거렸고, 키작은 식물들은 거친땅에 뿌리를 내리고 겨우 연명하는듯 애초로웠다. 그래도 어퍼피상 트렉을 선택하고 가파른 오르막을 올라 갸루를 지나고 다시 수평의 길을 따라 나왈까지 가는 길은 탁월한 조망을 우리에게 선물했다. 갸루를 향해 한번도 쉬지 않고 600m의 고도를 올리 때는 후회가 컸지만, 막상 갸루 이후 수평의 길을 걸으며 안나푸르나 2봉, 피상 피크, 그리고 안나푸르나 4봉을 손에 닿은듯 가까이서 마주하면서는 우리의 선택이 자랑스러웠다.  갸루를 출발한지 2시간이 안되어 멀리 나왈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왈 역시도 주변의 산과 언덕, 밭과 초지를 닮아 눈에 드러나지 않는 흙빛 마을이었다. 마을이 갸루 보다는 크고, 마을을 이루는 터전 역시 넓어 보였지만 사람의 발길이 드문 것은 전혀 차이가 없었다. 마을은 비어있는듯 조용하고 오고가는 사람의 흔적이 드물었다. 하루종일 주민을 만난 것은 손에 꼽을 만치 적었고 트레커는 단 한명도 만나지 못했다. 순전히 계절탓만은 아닌 것 같았다. 우리를 따르던 깔리도 어느 순간 사라졌다. 기회가 되면 고기를 듬뿍 넣은 볶은밥이라도 한그릇 시켜줄려고 마음 먹고 있었는데 우리의 행동이 너무 굼떴다. 더이상 기다리지 못한 깔리는 다른 인심좋은 트레커를 따라 자신의 길을 간것이 틀림없었다. 나왈의 밤은 깊고 편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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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부터 피자를 먹고 830 마르샹디 만다라 호텔을 출발했다. 마을이 아침 추위에 얼어붙어 있는 시간, 멀리 산정은 눈부신 햇살로 깨어나고 있었다. 차메를 벗어나면서 아내와 그리고 다시 퍄상과 기념 사진을 찍고 눈 쌓인 침엽수 숲길로 접어 들었다. 눈다운 눈이 쌓여있는 지대로 접어드니 길을 걷는 느낌이 색다르다. 고개는 자꾸 아래로 향한다. 쌓인 눈을 보고, 눈 밟는 소리를 들으며 가파른 절벽을 아슬아슬하게 깍아 만든 조랑말 길을 걸었다. 다시 숲을 만나니 '설국' '닥터지바고'의 장면들이 뜬금없이 기억났다. 숲 속에서 만난 눈은 마당이나 길에서 만나던 눈과 기억을 되살리고 상상력을 자극하는 힘이 달랐다. 그냥 이렇게 눈 덮인 숲 속을 하루 종일 헤매도 지치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예정대로라면 점심을 브라탕에서 먹고 오후 일찍 처음으로 3,000m이상 고산지대 마을인 피상에 도착해야 했다. 하지만 여정이 예정대로 착착 진행되기만 한다면 여행의 묘미는 반감될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점심을 먹기로 한 브라탕에는 영업을 하고 있는 롯지가 하나도 없었다. 아니 마을에는 한 명의 주민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이 폭설에 영업은 고사하고 자신이 먹을 양식을 조달 받는 것 조차 힘든 상황일 것이다. 겨울 한철 산을 내려와 배를 채우고 체온을 보전하는 것도 쉽지 않겠지만 그렇다고 고스란히 겨울을 나기에는 더 힘들었을 것이다. 겨울 동안 집을 떠나 목숨을 부지하는 일은 그들에겐 선택의 여지 없는 생존 방식인지도 모르겠다. 겨울 비수기... 생존마저 쉽지 않은 주민들은 아이를 앞세우고 최소한의 살림만 챙겨 하산을 한다. 마을은 비고 혹 지나는 트레커만 마을에 인기척을 남긴다. 알 수 없는 일이다. 네팔리들이 떠난 자리에 왜 문명을 자랑하는 선진국(!)의 호사로운 트레커들이 발길을 디미는지...

 


브라탕에서 점심을 먹기로 한 계획은 깨어지고 다시 길을 걸었다. 파샹은 하산중인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선 다음 마을인 디쿠르 포카리에 문은 연 롯지가 하나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브라탕에 도착할 때는 고프지도 않던 배가 고파지기 시작하고, 괜히 조갑증이 들었지만 다행히 디쿠르 포카리까지 가는 길은 완만하고 그리 길지 않았다. 오후 1가 조금 넘어 디쿠르 포카리에 도착했다. 디쿠르 포카리에서 먹은 식사는 최악이었다. 식재료가 넉넉하지도 않았겠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는 트레커들에게 충분한 질의 음식을 서비스할 이유도 없었는가 보다. 달밧의 밥은 식은 밥을 다시 뎁힌 것이 분명해 보였고, 따라 나오는 찬들도 부실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배가 고팠다는 사실이지만 결국 다시 길을 떠나는 즈음에 포터들이 롯지 주인에게 항의하는 사단이 났다. 거기다가 메뉴에다가 스티커로 붙여 올린 가격을 적어놓은 것도 문제가 되었다고, 먼저 출발한 우리에게 뒤에 출발해 다시 만난 트렉커들이 알려주었다. 어차피 한번 스쳐 지나가는 길인데 우리는 실망할 것도 서운한 것도 없었지만 늘상 다녀야 되는 포터들에겐 롯지의 그런 처사가 참기 어려웠나 보다.



불불레서부터 차메까지는 다른 동행 없이 우리부부만 걸었는데, 오늘 처음 차메에서 만난 트레커들과 동행이 되었다. 특수학교 선생님이신 학국인 여성분, 인도에서 왔다는 한국 청년, 제주에서 왔다는 한국 여학생이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말벗이 되었고, 차메의 롯지에서 만난 호주인과 이번 여정에서 제일 처음으로 만났던 독인인들도 그룹이 되어 조금은 위험해져 가는 눈길을 같이 걸었다. 혹시라도 시야에서 멀어지면 잘 오고 있는지 뒤돌아보게 되고, 앞서가다 쉬고 있을 때 도착하기라도 하면 서로 반가운 얼굴로 맞아주는 관계만으로도 여정의 피로가 줄고 낯설고 깊은 숲이 주는 무서움도 잊을 수 있었다.


디쿠르 포카리를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오후 3 30, 목적지인 피상에 도착했다. 드디어 처음으로 3,000m 고지 마을에 도착한 것이다. 피상은 Upper Pisang Low Pisang으로 나누어져 있는 제법 큰 마을인데 동행 중 한 분만 Upper Pisang으로 올라가고 나머지 모두는 Low Pisang Tilicho Hotel에 짐을 풀었다. 듣기로는 오래 전부터 적기가 휘날리고 있었다는 겨울 피상은 인적마저 드물어 활기라곤 없었다. 멀리 Upper Pisang에서 내려다 보는 마을 풍광이 너무나 아름다웠다고, 일찍 짐을 푼 한국 청년은 Upper Pisang까지 산책을 다녀와서 전해주었다. 우리 부부는 추위에 쫒겨 가까운 마을 길만 잠깐 산책하고 돌아왔다. 내려다보는 마을 풍광이 아름답다고는 했지만 올려다보는 마을풍경 역시 너무나 아름다웠다. 지금도 이렇게 좋은데 풀이 돋고 아이들이 골목을 누비며 뛰어다니는 계절이 오면 얼마나 더 아름다울까 생각하니 언제 다시 한번 더 오고 싶은 욕심이 일었다.


바깥 추위를 듬뿍 안고 다이닝 룸으로 들어섰다. 롯지 주인은 다이닝 룸에 막 난로를 피우고 있었다. 차메서 부터 롯지에 난로를 피우기 시작했는데, 고도가 높아지는 그만치 추워지고 또 트레커의 밀도가 높아졌기 때문인 것 같았다. 다이닝 룸에서 저녁 식사를 기다리며 낯설진 않지만 아직은 서먹한 사람들과 하나의 난로를 사이에 두고 둘러 앉았다. 호주인 3, 독일인 3명 그리고 우리 부부를 포함한 한국인 5명이 둘러앉았다. 한국인 사이에는 벌써 서먹함이 사라진지 오래지만 거의 대화를 나누지 못한 외국인들은 그렇지 못했다.

호주인 3명은 부자 지간이라고 했다. 1995년에 왔던 트레킹의 기억을 아들에게 나눠주고 싶어 장성한 두 아들과 함께 다시 안나푸르나를 찾았단다. 독인인은 두 형제와 아우의 아내 사이인데, 형은 이번이 9번째 네팔 여행이라고 했다. 동생과 제수씨는 첫 안나푸르나 여행인데 형의 권유로 동행하게 되었단다.


각자의 여행 동기는 다르겠지만 롯지의 난로가에 앉아 있는 서양인 트레커들에게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었다. 모두 책을 들었다는 것! 독인인 세분도 책을 읽고 있었지만 호주인 부자는 조금 색달랐다. 호주인 아버지는 톨스토이의 [안나카네리나]를 읽고 있었다. 두꺼운 책인데, 바로 그 책을 15여년 전 네팔 여행 때 들고 다니며 읽었다고 하셨다. 그 말씀을 확인이라도 하시듯 호주인 아버지는 책갈피에서 그때 받았던 영수증 하나를 찾아내어 우리에게 보여주셨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받은 상장을 엄마에게 내보일 때보다도 더 뿌듯한 표정이었다. 그 표정 뒤에 지난 세월 동안 쌓았을, 인생의 애환을 얼마나 많이 감추고 있을까? 그의 아내는 어떤 사람이고 그리고 지금 어디에 있는지, 왜 동행하지 않았는지, 그리고 그 세월 동안 그는 어떤 일을 하면서 어떤 사람들을 만나고 또 어떤 삶을 살았을까? 그리고 그 세월을 되돌아 보는 그의 마음에는 어떤 서정이 물들고 있을까? 모든 게 궁금했지만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의 큰아들은 [Empire: How Britain Made the Modern World]를 읽고 있었다. 제목만 들어도 골치가 찌근거리는 책을 트레킹의 동반자로 선택한 그의 취향이 유별나 보였다. 여행 때는 평소에 읽히지 않던 두꺼운 책을 들고 떠나라는 누군가의 조언이 생각났다. 그땐 그냥 우스개 소리로만 여겼는데 진짜 그는 그런 신조를 받드는 사람을 만난 셈이었다. 그리고 아우는 카뮈의 [이방인]을 읽고 있었다. 그냥 보기에 좋았다.


난로가에 둘러앉아 모두 책을 읽고 있는 사이 이번 여정에 같이했다 티망에서 버린 [바가바드 기타]를 아쉬워 하며 나는 대책 없는 상념에 빠져들었다. 나의 상념은 종횡무진 흐트러지고, 의식의 시간조차 무너졌다. 모든 기억의 직선과 곡선이 자신의 고도를 잃고 엉켜버렸다. 오직 책과 연관된 기억의 타래만이 끝없이 이어졌다. 고등학교 시절 학교공부에 완전히 흥을 잃고 밤새 읽던 책들, 결국 학교생활을 접고 방구석에 처박혀 읽어대던 책들, 그리고 정말 책을 읽어야 했던 대학시절 나태한 생활 속에서 간간히 잡았던 책들이 기억나면서 그 책들을 통해 접한 세상의 이야기들, 그 책을 통해 만들어나갔던 내 인생의 꿈들, 삶의 의미들을 반추했다.


책을 좋아하던 소년 시절, 책이 열었던 새로운 세계에 매혹되었고 그리고 언젠가는 다시 어른의 눈으로 꼭 다시 읽겠다고 다짐했었다. 하지만 세월에 침식된 기억은 다시 읽고 싶었던 책들의 목록마저 깡그리 잊어 버렸다. 누구나 한번쯤 읽고 던져버렸을 [이방인]을 성인이 되어 다시 읽고 있는 사람과 마주앉아 나는 그 책을 읽던 소년의 눈에 세상을 다시 둘러본다. 이제는 책과 거리가 먼 삶을 살면서 세상에는 책보다 더 중요한 것이 많다는 핑계를 얻었다. 하지만 책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라고 여기는 것들 조차 행하지 못하는 삶을 살면서 늘 그리움으로 남아있는 인식의 목마름은 회피할 수 없었다. 여행 중에 만난 사람들과 그들이 들고 있는 책을 보면서 나는 내 삶을 끌어가는 가치들을 되돌아보고 나의 사는 방식, 나의 세상에 대한 처신을 뒤돌아본다.



여행은 익숙한 것들과의 작별이란다, 물론 한시적이지만! 나는 이번 여행을 통해 '' 자신으로부터 가능한 멀리 벗어나 멀리 있는 를 바라다 보고 싶었다. 지금의 나를 이루는 시간 속에서 남은 상처, 편견, 편향, 나쁜 기억들 그 모든 것으로부터 여행기간 동안만이라도 나 자신을 놓아주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지금 이 시간 자유로운가 스스로 묻는다. 낯선 길, 낯선 마을, 낯선 사람들 속에서, 나의 취향과 다른 음식을 먹고 익숙하지 않은 언어로 대화를 나누지만 잠시 잠깐 잊혀지는 익숙한 일상은 늘 나의 뇌리를 따라다닌다. 그나마 한정된 시간이 지나고 나면 나는 다시 나의 익술한 삶속으로 돌아갈 것이다. 하지만 여행이 준 환희의 기억을 가진 나는 이전의 내가 아닐 지도 모르겠다. 집 떠나온지 9, 안나푸르나를 걷기 시작한지 6일이다. 이제 서서히 안나푸르나의 모든 것에 익숙해 지고 있다.


호사로운 여정이다. 포터 퍄상의 극진한 서비스와 걷고, 먹고, 놀고, 자는 하루의 일과가 길을 따라 이어진다. 벌써 6일째. 아직 이번 여행에 주어진 시간은 많다. 이제 쉰! 아직 네 인생에 주어진 시간도 많다. 이번 여행의 기회를 준 모든 사람, 모든 운명에 감사한다. 그리고 응당 세상을 향해 그 고마움을 표해야 할 것이지만, 우선은 나의 여정이 나의 아내, 나의 포터 그리고 숱하게 만난 트레커와 내가 거쳐 지나간 모든 마을, 모든 롯지의 사람들에게 좋은 느낌, 작은 기쁨, 한 세상을 더불어 살아가는 같은 생명으로서의 연대감, 연민 같은 것이 남았으면 좋겠다. 관광객이 쓸고 지나간 자리에 나뒹구는 맥주 캔, 과자봉지, 담배꽁초, 그리고 무시당했다는 불쾌감, 욕망의 자극, 부러움이나 열등감, 시기심... 그런 나쁜 흔적을 남기지 않았기를 네팔리의 신, 티벳탄의 신들께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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