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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8일 새벽 4시에 기상하여 간단한 식사후 쏘롱라를 향해 출발, 하이캠프를 지나 해발 5,416m인 쏘롱라에 정오무렵 도착, 이후 묵디나트를 향해 하산하여 저녁무렵 Ranipauwa에 도착 Hotel  North Pole에서 짐을 풀고 이틀을 머물렀다.



밤새 뒤척이다 새벽 4시에 기상하여 아침을 먹는둥 마는둥하고 점심으로 빵을 챙겨 5시에 롯지를 나섰다. 사방은 암흑천지지만 머리에 해드랜턴을 단 10여명의 트레커와 더댓명의 가이드 포터가 나란히 쏘롱라를 향해 출발했다. 좁고 가파른 길이 우리를 맞이했다. 다행히 바람도 눈도 없고 기온도 차갑지 않았다. 다리 아프고 숨이 찬 것 말고는 아무런 장애가 없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우리는 눈앞만 비추는 핸드랜턴에 의지해 오직 발디딜 곳만 확인하고 걸어야 했다.  설사 주변이 밝았다고 해도 발이라도 미끌어지는 순간 천길 낭떨어지가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라 경치에 신경쓸 겨를도 없었을 것이긴 했다. 긴 침묵 속에 해드랜턴의 불빛이 점점이 이어지는 가파른 길을 걷고 또 걸었다. 



어둠에 묻힌 절경을 보지 못하고 세 걸음 걷고 한숨을 돌리고 다시 세 걸음을 걷고 동행의 상태를 살피고 그렇게 계속해서 걷다보니 어느새 먼동이 트고 주변이 밝아 왔다. 갑자기 암흑 속에서 산들이 기적같이 살아났다. 산중에서 이런 일출을 맞을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는데 안나푸르나는 덤으로 가슴벅찬 감동을 안겨주었다. 아침 여명이 히말라야를 깨우고 우리의 걸음은 좀더 자유로워졌다. 출발하고 1시간 15분 남짓 지났을까 해발 4950m의 마지막 롯지가 있는 하이캠프에 도착했다. 짧은 시간에 고도를 무려 400m나 올린 셈이었다. 전날 하이캠프에서 잠을 잔 트레커들은 이미 다 출발하고 한명도 남아있지 않았다. 쏘롱패디에서 출발한 우리 일행들만 롯지에 들러 커피를 마시고 숨을 고른뒤 다시 길을 나섰다.

 

 

중국인 커플과 뉴질랜드인 커플 그리고 우리 한국인 4명에 3명의 포터가 나란히 출발했다. 음지의 위험한 눈길이 계속 이어지고 고도를 높일수록 시야는 더 넓고 자유로워졌다. 왔던 길을 뒤돌아보면 멀리 Chulu East(6429m)자태가 공룡 등짝같이 경이로웠고, 우리가 가는 길의 왼쪽으로는 Khumjungar(6759m)로 이어지는 산세의 흐름이 아름다웠다.  하지만 트래커들은 모두 지쳐가기 시작했고 걸음은 쳐졌고 숨은 가파졌다. 그리고 점점 사람과 사람 사이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우리 부부는 아까운 체력을 소진하지 않기 위해 걸을 수 있을 때 최대한 올라가자는 마음으로  다른 팀들을 추월해서 앞서 나가기 시작했다. 



쏘롱라에 다가 갈수로 나는 나도 모르게 호흡과 다리, 그리고 시간과 거리에만 정신이 쏠렸다. 가쁜 숨과 아픈 다리가 해가 지기전에 묵디나트로 나를 데려다 줄수 있을까하는 사실만 중요해지고 더 중요한 나머지는 사소해지는 이상한 경험을 하였다.  걸음을 통해 산의 기운을 느끼고, 안나푸르나가 선물하는 절경에 취해 생명의 환의에 들뜰줄 알았는데 나의 걸음은 고난의 구간을 벗어나기에 바쁘기만했다. 하이캠프를 나선지 꼭 4시간만에 쏘롱라에 도착했다.  



먼저 도착한 안도감도 잠시 걷기를 멈추자 추위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일행을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지자 걱정도 되기 시작했다. 쏘롱라 옆 언덕까지 올라 왔던 길을 되돌아봐도 일행의 흔적은 보이질 않았다. 그렇다고 되돌아 가보기엔 올라온 길이 너무 아까웠다. 무려 한시간이나 지체한 뒤에 먼저 나의 일행이 거의 탈진 상태로 도착했다.  11시 30분이었다. 자신의 작은 배낭마저 포터에게 넘기고 몸만 겨우 올라왔지만 막상 도착해서는 그랟 기운을 차렸다. 같이 간식을 나누고 사진을 찍는 사이 뉴질랜드 커플과 중국인 커플도 도착했다. 어떻게 된 것이 나이와 역순으로 쏘롱라에 도착하는 걸 보니 젊다고 튼튼한 것은 아닌게 확실했다. 우리 부부는 괜한 우쭐함에 어깨 힘이 들어갔다.



정오가 되자 우리 부부는 제일 먼저 출발했다. 상행길과 마찬가지로 서로 각자의 체력메 맞춰 걸어나갔다. 하행길의 풍광은 상행길에 비할 바는 못되었다. 발을 딛고 선 주변의 풍경은 초라했다. 하지만 고개를 들면 멀리 병풍처럼 앞을 가로 막고 선 다울라기리 산군의 숨막힐 듯한 풍광에 탄성이 절로 나왔다. 다울라기리까지 걸어갈 요랑이었는지 쉼없이 내달려 오후 2시반에 고도 4,200m의 바즈라마을에 도착했다. 파라다이스 롯지에서 시벅쥬스와 정체를 알 수 없는 rhubarb 쥬스를 와이프랑 나눠 마시며 일행을 기다렸다. 롯지주인에게 담배를 요청하니 새갑을 구하지 못해 자신의 담배 2개비를 나누어 주었다. 무려 한시간이 지나서야 일행이 도착했다, 상행길 한시간 하행길 한시간을 기다림으로 보냈다. 너무 좋은 체력이 문제였다. 그런데 사실 그 기다림의 시간이 너무 좋았다.



3시반에 도착한 일행과 차를 마시고 4시에 바즈라를 출발하여 530분에 묵디나트를 지나 Ranipauwa에 도착했다. Ranipauwa는 네팔여정중 최고의 풍경을 가진 가장 드라마틱한 마을이었다. 꿈속에서나 그리던 풍광을 지닌 Ranipauwa는 높은 설산이 멀리 둘러쳐진 활무지로 형성된 너른 구릉지의 양지바른 언덕위에 자리잡고 있는 오래된 마을이었다.  석양을 받으며 꿈속같이 안온한 느낌을 주던 마을은 밤이 되니 설산과 구름 그리고 달빛과 타르초가 어울려 내 눈과 마음을 맑게해 주었다. 어린 시절 골목길을 나설 때 서늘한 밤공기 주던 알 수 없던 울렁거림이 다시 되살아남을 느낄수 있었다. 



마을을 관통해 거의 끝에 다다라서야 외관이 조금 낡은 Hotel North Pole에서 방을 구했다.  외관은 낡고 복도 끝에 설치된 세면장과 화장실은 불편하기 이를데 없었다. 하지만 친절한 주인이 피워주는 숯불 난로 하나로 모든 불편함을 잊을만했다. 특히나 생각보다 싼 가격에 맛난 야크스테이크를 먹을 수 있어서 행복했다.  



새벽 4시에 일어나 하루에 고도를 1,000m나 높이고 다시 1,600m를 내린 쏘롱라 패스를 축하하면서 락시를 한잔 나누면  서로의 노고를 격려했다. 고산증으로 인해 배탈과 두통 호흡곤란을 겪은 두 친구와 특히 우리 짐까지 지고 힘든 하루를 용케 견뎌낸 두 가이드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그러고 보니 우리 부부만 전혀 아무렇지도 않게 쏘롱라를 넘은 것 같았다. 하지만 지나고 보니 새벽부터 어두워지기 직전까지 이번 여정 중 가장 많이 걸은 하루였고 가장 극적인 최고 고도를 넘어온 하루였지만 의외로 기억에 남는 풍경은 많지 않았다. 나름 힘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날은 네팔 여정중 가장 많이 걷고 가장 조금밖에 못본 하루가 된 셈이다. 


 

마낭에서 고소적응을 위해 이틀을 머문뒤 다시 묵디나트 Ranipauwa에서 이틀을 머물렀다. 이번에는 고소적응이 아니라 그냥 쉬기 위해서 이틀을 머물기로 했지만 Ranipauwa도 그냥 쉬기에는 가볼 곳이 너무 많았고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이틀도 부족할 것 같았다. 하지만 많은 것을 보기보단 차라리 더 많은 휴식을 위해 단촐한 일정을 잡았다.

 

 

먼저 전날 지나쳤던 묵디나트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원래의 마을 이름보다는 그냥 묵디나트로 불리는 라니포와와 붙어있는 듯 가깝게 느꼈는데 그래도 막상 걸어보니 30여분이 걸렸다. 겨울 사원은 한산했고 엄숙했다. 몇몇 관광객이 말을 타고 사원앞 공터에서 소란을 떨긴 했지만 계절상 많지 않은 순레객이 단정한 몸가짐으로 사찰을 돌고 108갈래의 성수로 몸을 씻어 죄를 씻고 다시 태어나는 의식을 치루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은 늘 죄업을 쌓고 있고 자신의 삶이 부정한 것에 물들어 있다고 생각하는가 보다. 약육강식의 세계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싸워야 하는 삶이고, 거기다가 어리석기까지 하다보니 늘 후회로 점철된 것이 인생일 것이다. 그래서 종교가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묵니나트를 흐르는 108줄기의 물로  몸을 씻고 사원 뒷마당 언덕에 입던 속옷마저 벗어 던지고 나면 저분들은 깨끗한 몸과 마음으로 다시 자신의 현실 속으로 돌아갈 것이다. 복잡한 삶의 방정식에 비해 너무나 단순한 답에 불과하지만 그 소박한 믿음을 통해서마나 삶에 생기를 불어넣을 수 있다면 뭘 더 바라겠는가.

묵니나트를 나와 Ranipauwa주변의 작은 사원과 언덕위에 새로 조성된 비슈누상까지 둘러보는 것으로 하루의 일정을 마쳤다. 오랜만에 샤워와 빨래를 하고 성대한 저녁상을 받은 자리에서 옆테이블의 한국에서 일하신다는 네팔 노동자 가족을 만났다. 오랜만에 귀국해서 가족들과함께 묵니나트에 참배 여행을 왔다고 했다. 한국에서 일하고 계시다는 것 만으로도 괜히 반가웠다.  

 

술기운에 일찍 잠이 들었다가 불편한 꿈에 쫒겨 새벽 3시에 잠을 깼다. 30대 초반부터 따라다니던  꿈은 늘 나를 세상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불안한 상황 속으로 몰아 넣는다.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하고, 스스로 누구인지 조차 확신하지 못하는 나는 늘 이십대와 삼십대의 경계에 서 있었다. 꿈을 깨고 나서 나는 스스로 물었다. 결국 어떤 것도 선택하지 못하고 세월의 힘에 밀려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닐까. 내가 하고자 하는 것, 하고 싶은 것을 마주하지 못하고 회피했다는 자책감이 나를 엄습했다.

 

 

나는 지금 나의 사회활동이 있고, 농사가 있고, 내 인생을 스스로 즐길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다는 생각으로도 내 자신을 위무할 수 없었다. 나는 한번도 뜨거워본 적이 없었고, 그 어디에도 제대로 한번 미쳐보지 못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구원의 땅 묵다나트에서도 나는 평화를 얻지 못했다. 바람에 휘날리는 타르초 소리를 들으며 다시 잠을 청했다. 내 귀에 울리는 타르초 소리는 바람이 불경을 읽는 소리일까 아니면 내 마음에 이는 번뇌와 갈등의 아우성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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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 보통 추위가 아니었나보다. 일어나 물병을 찾아 컵에 물을 부으니 물이 나오질 않는다. 물병을 때리자 얼음가루가 컵안으로 쏱아진다. 방에 난방이 따로 없으니 당연한 일이다. 티망에서부터 눈길로 접어들었지만 확실히 3,000m가 넘는 고지인 피상은 추위가 확연히 다른 것 같다. 이렇게 본격적으로 추워지면 4천, 5천 고지로 올라가서는 얼마나 더 추워질지 걱정이다. 어제 만난 하산 트렉커들은 견디기 힘들만치 추웠다고들 호들갑을 떨었다. 마낭이 영하 20도 정도라고 했다. 내가 사는 곳도 겨울아침이면 영하20도정도씩 자주 내려가니깐 못견딜 정도는 아니겠구나 안도가 되었다.
 


아침으로 삶은 감자와 애플팬케익을 먹고 8시 45분 Tilicho Hotel을 나섰다. 어제 추위에 쫒기며 대충 둘러봤던 마을을 다시 한번도 찬찬히 들여다 보았다. 마을을 벗어나자 마자 작은 강을 건너고 오른쪽으로는 Upper Pisang쪽으로 가는 길이고 왼편으로 마낭쪽으로 갈라지는 지점에 탑이 하나 있다. 무슨 탑인지 멀리서 사진을 찍고 가까이 다가가 보니 생각지도 않은 곳에 한국인 위령탑이 아닌가. 찬찬히 읽어 보니 1989년 9월 나와 동갑내기 산악인이 이곳에서 생을 마감한 것이다. 그때라면 내가 대학을 막 졸업하고 취업과 학문, 그리고 또 다른 인생길을 놓고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잠시 헤메다가 다시 대학원을 준비하던 시기가 아니던가? 그 시퍼런 청춘에 그분들은 이곳 낯선땅 안나푸르나의 눈속에 잠이 드신 것이다. 대학원 진학이라고는 하지만 마땅히 하고 싶은 것도 없고, 살고싶은 삶은 살 용기는 부족하여 단지 결정을 유보하기 위한 고육지책에 불과했던 것이 사실인데, 그 분들은 이곳 피상의 설산을 오르며 자신의 삶의 가능성을 찾고 대자연의 신비 앞에서 주어진 자신의 삶을 축복하며 마지막 생명의 에너지를 불사른 것이 아닌가?


그시절 그 나이 때는 보통사람이 외국여행을 한다는 것은 감히 상상도 못할 일이었지만, 만약 내가 기회가 주어져 이곳 안나푸르나를 밟았다면 나의 삶의 또 다른 가능성을 확인할 수도 있었을 지도 모르겠다. 그때 내게 주어진 우주는 좁았고, 눈은 어두웠고, 심장은 약해빠졌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망설임 속에서 나이만 먹어 온 나의 긴 삶과 청춘을 불살라 그렇게 낯선 설산에서 생을 마감한 그 분들의 짧은 삶이 대비되면서 앞으로 살아갈 내 인생의 무게가 묵직하게 느껴졌다. 두 분의 명복을 빌며 걸음을 재촉했다.



한시간이나 걸었을까? 멀리 비행장이 있다는 홈데가 보이는 언덕엘 올라섰다. 나로다라 언덕이란다. 전망대가 있고 홈데와 홈데 넘어 안나푸르나 연봉들이 한눈에 들어오는 멋진 조망이다. 배낭을 벗고 한참을 쉬며 고도가 높아감에 따라 억지로 줄이고 있던 담배를 한대 피웠다. 삶의 곡절이 많은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살아가다가 이렇게 한번씩이라도 전망이 확 터이는 그런 경험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는 얼토당토 안한 생각이 일었다. 하지만 내 삶의 전망이야 그 자리에 그냥 만들어져 있는 풍경이 아니고 스스로 만들어나가야하는 걸, 내가 게을러서, 그리고 소심한 탓에 지금 답답한 삶을 살고 있는걸 누구탓을 하겠는가? 다시 배낭을 짊어지고 내리막길로 들어섰다.



길은 눈속에 파묻히고 온데 간데 사라졌지만, 눈 속에 숨은 길을 찾아 네팔리들이 내놓은 발자국을 따라 끝없이 걷었다. 눈은 점점 깊어졌다. 잠시 쉴 때는 아름다운 설경에 감탄하면서도, 길을 걷기 시작하면 이내 풍경은 다 잊어버리고 오직 시야는 앞사람의 발자국만 쫒아 기계적인 걸음에 내몰였다. 풍경에 빠져들기엔 발길이 너무 바쁘기 때문이다.


오후 1시나 되어서야 홈데에 도착했다. Maya 식당이라는 곳에 들어서니 미리 도착한 분들이 반갑게 인사를 해온다. 우선 음식을 시켜놓았는데 뒤쳐진 제주 여학생이 감감 무소식이다. 눈구덩이에 혹시라도 길을 잃으면 보통 일이 아니다. 모두다 걱정을 하고 있었는데 15분 정도 늦게 도착한다. 추위에 쫒겨 너나할 것 없이 모두 롯지의 부엌에 몰려든다. 좁은 부엌이 조리에 불편할 만치 사람들이 들어서자 가이드 한분이 남자들은 다이닝룸으로 나가달란다. 와이프와 학국인 여선생님은 부엌에 남아 롯지 주인의 아이들과 놀아준다. 역시 특수학교 선생님 이셨어 그런지 말이 통하지 않는 네팔 아이들 조차 소통하고 공감하는 능력이 탁월하다. 나중에 식사가 끝나가자 아이들이 다가와 'pen'을 요구했다. 아내가 가방에서 한개를 꺼내 주자, 자기 언니 것도 하나 더 달라고 한다. 어쩔 수 없이 또 하나를 주고 나니 우리가 쓸 게 없을까봐 걱정스럽다.


체크포스트에 들러 체크를 하고 홈데 비행장의 상황을 살폈다. 혹시라도 쏘롱라 패스가 불가능해질 경우 비행기로라도 이동해야하는 상황이 될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자갈밭 활주로에 소형비행기를 별로 타고 싶지 않았지만 상황이 악화되면 그역시 어쩔 수 없는 선택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근래에 비행기가 오지도 않았고 가지도 않았단다. 역시 활주로는 두터운 눈이 그대로 쌓여있어 혹시라도 지금 비행기가 온다고해도 활주로에 눈을 치우는데만 몇일은 족히 걸릴 것같다. 소형 비행장에 짧은 활주로지만 장비라고는 하나도 없이 오직 육체노동으로 눈을 치워야하기 때문이다. 되돌아 하산 하게 될 경우 홈데에서 비행기를 이용하는 대안은 가능성이 없어 보였다.


뭉지와 브라카는 어떻게 지났는지 기억도 없다. 미리 카투만두에서 듣고서 기대했던 '베이커리'를 만날 수 있었지만 모조리 휴업중이었다. 오래 실망하고 할 것도 없이 군침만 삼키고는 그냥 계속 걸음을 재촉했다. 오직 눈만보고 하루를 보낸 것 같다. 예상보다 눈이 깊어 시간이 지체되어 날이 저물기 전에 마낭에 도착하려면 여유가 없었다. 홈데를 떠난 뒤로는 빨리 마낭에 도착하는 목적말고는 아무생각없이 발을 내디뎠던것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덕위에 자리한 마낭을 들어설 때는 산그늘이 짙어 저녁 어스름으로 변해가는 시간이었다. 하루의 트레킹을 마치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이었지만 그나마 어둠이 길을 삼키기 전에 도착한 것에 안도했다. 마낭을 둘러보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이고, 또 사람의 활기가 사라진 마을을 구경할 흥도 나지 않았다.


지난 몇일 알고보면 파샹이 늘상 이용하고 안면이 있는 롯지에서 묵게 되었지만 파샹은 꼭 마지막 나의 의사를 물었다. 내가 롯지의 선택권을 줬음에도 불구하고 꼭 롯지를 선택하기 전에 나의 의사를 물었는데 사실 '이러러저러해서 이 롯지가 좋고 저 롯지는 좋지 않다. 어떤 롯지를 선택하겟는가?'는 식으로 물어오니 솔직히 물어보나 마나다. 나의 'OK! This is good!' 한 마디는 단지 파샹을 존중하는 제스추어불과했다. 특별히 고집할 이유가 없는한 가이드나 포터가 선택하는 롯지에 대부분 머무는가보다. 우리도 그랬고, 다른 팀들도 다 그랬는데, 오직 한명만 다른 롯지로 향했다. 그분의 포터가 원하는 단골롯지로 향한것 같다, 우리는 'Yeti Hotel'을 들어섰다.


마당은 통행이 가능할 정도의 공간만 남기고 모조리 누구덩이다. 사람이 사는지, 영업은 하는지 온기라곤 없고 인기척도 없다. 파샹이 윗층으로 올라갔다 오더니 룸번호를 알려주며 키를 준다. 키를 들고 가까스레 찾은 방에 짐을 부리고, 이틀밤을 지낼 곳이라서 빨래를 맡기기 위해 거리로 나섰다, 역시 세탁소는 많았지만 문을 연곳은 하나도 없었다. 지나가는 네팔리 말로는 주인이 카트만두로 겨울을 나러 갔단다 . '그래, 이 와중에 왠 빨래는... ' 쉽게 포기하고 롯지로 돌아와 양말이라도 빨 요랑이었지만 화장실은 물도 나오지 않는다.


맨 위층인 4층에 있는 다이닝룸으로 향했다. 겉에서 보기엔 영업을 하는지 마는지 의아했었는데 그동안 트렉커들이 몰려왔나보다. 호주 등에서 왔다는 20세전후의 예닐곱명의 젊은이들로 다이닝룸이 왁작지걸 소란스럽다. 같은 일행이 아니었지만 모두들 쏘롱패디나 하이캠프 등에서 이삼일씩 날이 좋아지기를 기다리다가 결국 쏘롱라를 넘어가는 것을 포기하고 되돌아 내려왔단다. 어디 미개척지를 정복이라도 하고 온양 의기양양한 젊은이들의 열기로 다이닝 룸이 후끈거렸다. 구석에 세워져 있는 기타를 들고 노래까지 부르며 차가운 안나푸르나의 밤을 뜨겁게 달구었다.


인적이 드문 산중 마을에서 사람을 만나는 것 만치 반가운 일이 없지만 올라가기위해 마낭에 도착한 사람들에게 등정을 포기하고 하산중인 사람들과의 만남은 썩반갑지 않을 수 밖에 없었다. 계속 올라 갈 것인가 되돌아 내려갈 것인가 하는 어려운 결정의 순간이 다가온 셈이다. 파샹은 계속 비관적인 전망을 내어놓으며 설사 쏘롱라를 통과한다고 해도 묵디나트, 까그베니까지 완전히 빙판이라서 위험하기 이를데 없단다. 솔직히 같이한 몇일사이 파샹은 항상 짧은 하루의 목표치, 그리고 느린 일정을 제안했다. 가이드가 편안한 일정을 원하는 것은 당연지사고 혹시라도 위험이 따르는 시도는 피하고자하는 당연한 일일것이다. 하지만 파샹의 판단을 전적으로 따르다보면 트렉킹이 그야말로 관광투어가 되어버릴 것이 붐명했다. 판단을 마낭에서 지내는 이틀동안 천천히 상황파악을 더 하고 내리자고 미루었지만 사실 나 역시 비관적인 생각이 들었다.


한고비를 넘기고 다음 일정을 확정한 청년들은 홀가분함때문인지 계속 들떠 있었고 시끄럽기까지 했다. 상행인 트레커들은 나이도 나이였지만 몸도 그만치 피곤한 상태인데다가 또 아직 쏘롱라 패스를 포기할 것인지 시도할 것인지 결정을 못한 상태의 긴장감 때문인지 난로가에 둘러앉아 묵묵히 불만 쬐고 있었다. 날이 저물고 상행인 일행은 모두 비슷한 시간에 저녁을 주문했는데 그때 먼저 주문한 청년들이 음식이 나왔다. 돌접시 위에서 계속 지글거리며 맛난 향과 김이 무럭무럭 나는 그 음식이 이곳에서 먹을 수 있는 최고급 음식인 야크스테이크라고 했다. 이 말을 듣는 거의 동시에 모두 '주문 취소'를 외치고는 주문을 다시 하겠다고 나섰다. 800루피면 비싼편에 드는 다른 음식값의 두배가 넘는 가격이지만 강행군을 한 이날 하루는 그래도 다들 그 정도의 저녁 식사비가 아깝지 않은 눈치였다. 안나푸르나 라운드를 떠나와 이날 최고의 음식으로 고단한 육신을 위로하고 따뜻한 다이님룸에서 밤이 깊어지기를 기다리다가 침실로 돌아왔다.


침실 화장실은 물도 나오지 않고, 방안에는 화장실 냄새가 가득했다. 창밖은 눈발이 다시 굵어지고 바람역시 거세져 약한 외창을 부서져라 흔들어댔지만 곤한 몸은 아랑곳하지 않고 잠을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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