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30일만에 돌아온 카트만두에서 일주일이라는 긴 휴식을 취하고 2월 26일 동방항공을 통해 한국으로 돌아왔다. 지나고 보니 카트만두에서 보낸 정확히 8일동안은 여행이라기보다는 비록 짧지만 '머물고 생활하기'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카트만두 도착후 마야거르츄는 우리의 숙소를 넘어 하나의 생활 거점이 되었다. 인근 가게에서 야채와 기타 식재료를 사서 조리를 해서 나누어 먹고, 심심해지면 수어러꾸떼 골목길을 통해 여행자의 거리인 타멜로 나와 하루종일 어슬렁 거렸다. 타멜은 여전했다. 비시즌이라서 덜 분빈다고는 했지만 전세계에서 몰려든 다양한 국적의 트레커들이 골목을 휩쓸고 다녔고 더 많은 네팔리들은 자신의 삶의 터전으로 몰려들어 늘 활기가 넘쳤다. 타멜의 끝에 붙어있는 대형 시장인 아산바자르는 온갖 물품과 이를 찾는 네팔리의 발길로 분주했다. 딱히 필요한 것도 없이 마냥 시장을 지나는 네팔리들에 묻혀 아산바자르를 지날 때는 나 역시 무슨 절실한 것을 찾아 시장을 헤메는듯 삶의 긴장감이 높아졌다. 

 

숙소룸의 전등이 어두워 책을 보기가 힘들어 19일은 보조랜턴을 사러 타멜의 몇몇 등산용품점을 들락거린뒤 마음에는 들지만 비싸서 망설여지는 앙징맞은 블랙 다이아몬드 LED등을 2800루피에 구입했다. 그리고 오고가는 길에 몇몇 골동품가게에 들러 작은 기념품 몇개를 구입했다. 일행 D는 싱잉벨이라는 울림소리가 신비로운 청동그릇을 여러 가게에서 여러개를 구입했다. 값도 값이지만 무게가 부담스러워 나는 싱잉벨대신에 주로 나무 목각을 구입했다. 토템인듯 귀신같은 토속적인 인형들은 인상적이지만 집에 가져가기엔 어울리지 않아 보여 주로 동물형상의 목각을 구입했다. 한 골동품 가게에서 작은 말모양의 청동상을 보고 마음에 들어 딸에게 선물해 줄까 망설였는데 결국 크기나 형태에 비해 비싼 5-6만원하는 청동상을 구입하지 못했다. 한참 국내에서 최순실이 자신의 딸에게 삼성이라는 거대 기업을 동원해 말을 뇌물로 받아 챙겨주는 알뜰한 모정이 뉴스로  흘러나오는 때에 나는 5-6만원하는 말 조각 청동상 하나 딸에게 사주기가 부담스러웠다. 

 

하루를 어떻게 보낸지 모르게 카트만두에도 밤이 왔다. 벌써 여러번 들렀고 이날도 같은 거리를 몇번을 왔다갔다했는지 모를 정도로 하루종일 타멜거리를 헤멘셈인데 그래도 복잡한 타멜의 골목을 다 파악할 수 없었다. 아산바자르와 왕궁 그리고 더바르광장 같은 대표적인 장소로 이동하는 동선 정도를 겨우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타멜의 대표적인 한식당인 '한국사랑'에서 부대찌게로 하루를 마무리했다. 한국사랑에는 짐작과는 달리 한국여행객보다 훨씬 많은 네팔리 손님이 진을 치고 있었다. 한국에서 일했던 노동자들이 추억의 한국음식을 찾았을 수도 있고, 아니면 한국을 동경하는  젊은 친구들이 몰려온건지도 몰랐다.

 

 

2월 20일의 아침은 일찍 맞았다. 식전에 숙소를 나와 스와얌부를 향해 걸었다. 막 깨어나기 시작한 주택가골목을 이른 출근을 하는 네팔리와 나란히 걸었다. M은 전날도 이른 아침에 스와얌부나트를 다녀왔는데 이날도 같이 동행했다. 숙소가 있는 수어러꾸데에서 스와얌부너트까지는  30~40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스와얌부나트는 원숭이가 많이 살아 Monkeys Temple이라고도 불리는 네팔의 가장 중요한 불교사원중의 하나로 유구한 역사와 전설이 이어져오고 있는 여행자들의 필수적인 방문처다. 불교사원이라고는 하지만 힌두신앙을 나타내는 다양한 장식과 시설이 공존하며 사원을 뒤덮은 향과 촛불, 끝없이 이어지는 신도들의 참례행렬, 그리고 카트만두 시내 전체가 내려다 보이는 환상적인 조망이 카트만두 방문객이면 꼭 찾아야 할 곳으로 여겨졌다. 우리 역시 다른 곳은 한번 방문으로 끝냈지만 스와얌부나트는 이날을 포함해 여러번 찾았다.

 

 

사원은 다행히 지난 2015년 지진의 피해가 크지 않았다. 무너진 부속건물을 비롯해 피해의 흔적은 아직 여기저기 늘려있었지만 스와얌부나트의 상징적 건물인 스튜파는 의젓하게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제3의 눈으로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우리는 참배객들과 함께 똑같은 경건한 마음으로 세상의 평화와 모든 고통받는 존재의 평온을 빌며 덤으로 우리 자신의 삶이 좀더 알차고 아름다울 수 있기를 기도했다.  사원의 입구 오른편에는 신도들이 모여 전통 악기를 연주하며 예불을 드리고 있었다. 예불소리가 너무나 절실하게 마음에 녹아들어 우리는 걸음을 멈첬다.  한참을 예불을 들은뒤 발길을 돌려 스와얌부나트를 내려오는 우리의 발걸음은 올라갈 때와는 달라있었다. 

사원아래 식당가에서 네팔 전통 빵들로 아침을 해결했다. 참배온 네팔리 할머니들과 같은 빵들을 주문했는데 모양도 재미있고 값도 쌌지만 맛은 없었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싱잉벨을 직접 만드는 가게에 들러 일행 D는 싱잉벨을 구입하고, 우리는 숙소 거의 다와서 이전에 박타푸르 왕만 먹었다는 요플레인 주주더히를 사서 숙소로 돌아왔다. 주주더히는 토기그릇에 담겨져 아침 일찍 몇몇 대리점같은 가게에만 배달이 되어오기 때문에 이른 아침 시간 외에는 살 수가 없었다.  다 먹고 남은 토기만 남다보니 주주더히를 담았던 토기가 마야거르츄 마당 한컷에 켜켜히 쌓여갔다.

안나푸르나 라운드를 같이 했던 가이드 바수가 숙소를 찾아왔다. 한번 이야기가 있었던 자신의 고향집에 우리를 초대하고 싶어했다. 카드만두 북쪽에 있는 나가르준 어딘가가 자신의 고향집이고 그곳에서 부모님이 물고기를 기르고 있는데 같이 농장도 체험하고 물고기도 잡아 먹고 놀자고 제안했다. 딱히 다른 일정이 없어 같이할까하는 마음이 있었지만 다른 일행들이 반기질 않았고 특히 바수의 술버릇때문에 마음 편히 따라갈 수 없는 눈치라서 포기했다. 바수는 상당히 서운해 하는 것 같았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대신에 수어러꾸떼 골목길 구멍가게에서 장을 보고 숙소에서 조리를 해서 끼니를 해결한뒤 밤이 되자 네팔 전통주인 뚱빠로 유명한 스몰스타를 찾아 한잔하는 것으로 하루를 마무리했다.

2월 21일도 마찬가지로 정해진 일정이나 목적지가 없는 하루였다. 이날 오후에 출국한다며 네팔의 특산물인 야크치즈를 사러가는 분들과 함께 숙소를 나섰다. 숙소에서 10여분 걸어서 정부가 운영한다는 유제품 공장인  DDC Dairy Ltd.  로 향했다. 공장에 도착은 했지만 의사소통의 부족으로 공장 사무실로 들어가 치즈를 요구하자 담당이 외출중이라며 한참을 기다리게 했는데 마침내 담당은 돌아왔지만 치즈 판매는 공장내의 다른 매장에서 하고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우리는 제법 많은 양의 야크치즈를 사서 숙소로 돌아온 뒤 다시 일행과 함께 숙소를 나서 두바르 광장을 향했다. 타멜을 지나면서 헝겊으로 만든 작은 브로치같은 값싸고 실용적인 선물을 사고 딸을 위한 인형도 같이 구입했다. 그리고 타멜의 길고 복잡한 골목을 통해 두바르 광장에 도착했다. 두바르광장으로 진입하지 않고 멀리서 보아도 지진의 피해가 심각해 보였다. 지진으로 심각하게 무너지고 파손된 두바르광장이지만 입장료는 1000루피 그대로였다. 4명의 일행이 4만원 가량의 돈을 내고 들어가기에는 아까운 구석도 있고, 굳이 두바르 광장을 봐야할 이유도 없어 걸음을 돌렸다.

두바르광장을 비켜선 우리의 걸음은 정처없이 이어졌다. 타멜을 중심으로 한  관광객의 거리를 벗어나 네팔리들의 삶의 터전인 카트만두의 구석구석을 뒤지기 시작했다. 가는 곳마다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어머니의 아이들 부르는 소리가 있고, 단 한번도 끊어지지 않고 종교적 상징물이 늘려있고 한 블록을 벗어나기 전에 꼭 규모를 갖춘 힌두사원을 만났다.  보여주기위한 박제화된 공간이 아니라 날것 그대로의 네팔리의 삶을 더 가까이서 보고 느끼는 발길을 이어가다보니 어느새 우리는 스와얌부나트를 가기 위해 건너야했던 바그마티강의 지류인 비슈누마티강에 이르렀다. 강을 따라 발길을 북쪽으로 돌려 우리의 출발지를 향했다. 

반응형
반응형

 

2월16일 찦차를 대절해 갈리수와르를 출발 베니와 바글룽을 거쳐 포카라에 도착하여 숙소를 정하고, 다음날 티벳 난민촌 등 포카라를 둘러보고, 2월18일 자가담바 버스를 타고 근 한달만에 카트만두로 돌아왔다.

 

 

 

갈리수와르의 아침이 밝아오자 전날 갑론을박 끝에 예약한 짚차가 도착했다. 베니와 바글룽을 거쳐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트랙이 시작되는 나야풀을 지나 포카라까지 우리를 싣어줄 찦차는 출발했다. 대절비는 6000루피로 정했다. 짚차는 출발한지 10분도 안되어 베니라는 도시에 진입했다. 교통의 중심도시로 알려져 있는 베니는 역시 넓은 버스파크에 많은 차들이 몰려 있었다. 그런데 우리가 탄 찦은 무슨 이유에선지 바로 갈 길로 들어서지 않고 베니 시내로 들어가 몇 곳을 들러 짐을 싣기도 하고 사람을 만나기도 하며 시간을 지체했다. 아침 일찍 출발해야지만 베니로 돌아오는 손님을 싣을 수 있다고 새벽 출발을 종용하던 가이드의 주장이 무색할 정도였다. 아마도 기사는 포카라로 가는 김에 지인들의 소소한 부탁을 받아 해결하려는 것 같았다. 차를 대절한 우리의 입장에서는 클레임을 걸 수있는 상황인데도 기사가 우리에게 양해를 구하지도 않았고 하다못해 가이드의 상황설명도 없었다. 네팔이기 때문일까. 이런 상황에서도 기사가 매너가 없다거나 부당하게 우리의 시간을 빼앗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차라리 네팔사람들은 참 관대하고 느긋하다는 느낌을 주었다. 네팔리들은 우리를 기다리게 했지만 자신들도 아무 꺼리낌 없이 늘 웃으면서 남을 기다려주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땅을 밟아보지도 못한 베니에 대한 인상을 아무 것도 남기지 못하고 칼리간다끼를 건넌 찦은 달리기 시작했다. 베니를 출발한 뒤 오른쪽으로 강을 끼고 30여분을 달렸을까, 차는 포카라-바글룽 하이웨이를 벗어나 우회전을 해서 다리를 건너 다시 우회전을 해서 바글룽으로 향했다. 바글룽 역시 아무런 사전 준비없이 방문하게 된 도시다.  가이드는 흰두사원을 추천했고 나는 덧붙여 바글룽 시가지를 차로 한바퀴 돌아 겉할기라도 해보자는 제안을 덧붙였다. 가이드의 설명으로는 바글룽 사원은 오전 특정시간까지만 비흰두인에게 개방되기때문에 시간에 늦지 않게 도착해야 된다고 갈리수와르에서 출발할 때, 그리고 베니를 떠나 바글룽으로 향하는 중에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정작 베니에서 찦의 기사가 시간을 허비할 때는 아무 소리도 하지 않았다. 우리가 사원에 도착했을 때는 비흰두교도에게는 이른 아침에만 개방된다는 가이드의 설명과 무관하게 사원의 문은 우리에게 활짝 열려 있었다. 

 

이전에 닥신칼리의 사원과 전날 갈리수와르에 이어 바글룽의 Kalika Bhagwati Temple은 세번째 방문한 흰두사원이었다. 흰두교에 대한 사전 지식이 없는 상태로 들른 흰두 사원은 붉은색 장식이 많아 전체적으로 화려한 색감이지만 무서운 신상이 많고 특히 염소 등을 제물로 받치는 장면을 목격하거나  그 흔적을 볼 때는 소름끼치고 혐오스럽기도 했다. 아주 옛날에는 많은 종교가 사람을 제물로 바쳤고 세월이 지나면서 동물로 대체되다가 마지막에는 돈이 제물을 대신하는 과정을 겪었다면 힌두교는 아마도 동물을 번죄하는 단계에 머물러 있는지도 몰랐다. 물론 힌두교가 가장 오래되고 포용적이고 풍부한 종교의 하나라는 사실을 부인할 순 없지만 아직 산 동물을 재물로 바치는 의례는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이 날도 애초로운 눈빛으로 울어대던 어린 염소가 가차없이 목이 잘리고 그 피를 뿌리는 제례가 진행되었지만 지금까지 방문한 3힌두사원중 가장 오래 머물며 꼼꼼이 둘러보고 줄을 서서 이마에 티카를 찍고 예배까지 올렸다.        

 

바글룽 시내를 한바퀴 돈뒤 그냥 아무것도 안하고 스쳐 지나가기에 아쉬워 찦을 내려 음료수를 사서 한병씩 돌렸다.  음료수를 마시고 차는 바로 바글룽을 나와 강을 건너고 조금 전 벗어났던 바글룽-포카라 하이웨이를 다시 올라탔다. 편한 길을 따라 평화로운 마을을 지나고 어디라도 내려서 걸어도 좋을 아름다운 풍경 속을 차는 달렸다.  풍경 하나하나가 그냥 스쳐지나가 내 기억속에 머물지 못하고 사라져갈 것을 생각하니 이 모든 것이 아쉬움을 넘어 슬프게 느껴졌다. 어떤 장소 어떤 순간에도 머물 수 없고 오직 확실한 것은 바로 이 순간이라는 섭리가 애닯펐다. 안나푸르나 라운드가 끝나가는 시간 아쉬움과 서글픔이 내 마음에 차올랐다.

 

이미 익숙해진 안나푸르나베이스캠프 코스의 출발점인 나야풀을 지나 길가 식당에 차를 세운뒤 기사는 식사를 하지 못했다며 식당안으로 사라졌다. 네팔사람들은 아침겸 점심을 오전 10시경 먹는 생활습관을 가지고 있는데 그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덕분에 안나푸르나 라운드가 완전히 끝내기 직전 차를 내려 네팔의 산과 들, 안나푸르나 기슭의 삶의 터전을 다시 한번 느껴볼 수 있었다. 가난 속에서 아름답게 지켜온 네팔리들의 삶의 온기와 긍지를 안나푸르나를 통해 다시금 반추했다.  

 

근 40일만에 포카라로 돌아왔다. 그동안 카트만두 인근 도시를 주유하고 안나푸르나를 한바퀴 돌았다. 다시 돌아온 포카라는 초록이 더 짙어졌고, 날은 더 더워져 있었다. 두 가이드와 4명의 트레커는 식당을 찾아 점심을 나누고 바수에게 약속했던 선글라스를 선물했다. 가이드하고는 카트만두서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고 헤어졌다. 그리고 숙소를 찾아 잠깐 거리를 헤멘뒤 이쁜 정원이 달린 값싼 숙소에 짐을 풀었다. 온수가 나오고 와이파이가 되면서 이쁜 정원이 딸린 [Hotel Elia]에서 하루에 1000루피, 우리 돈으로 만원정도에 방을 얻었다. 우리에겐 충분한 시설이였고, 여행자의 거리인 레이크사이드에 접해있으면서도 조금은 덜 번잡한 거리여서 모든게 마음에 들었다. 짐을 풀자마자 M과 나는 호텔을 나서서 이발소를 들렀다. 바로 호텔과 붙어있는 작은 이발관이었다.  한국 떠난뒤 거의 두달만에  산적머리가 되어버렸는데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좀 깔끔해지고 싶었다. "Only hair cut, please!"를 외치고 비몽사몽간에 이발을 마치자 "Ok!"를 몇번이나 반복해서 외쳤던 이발사는 컷트비, 안면 마사지비, 안마비, 두피마사지비, 세발비 등등을 붙여 무려 두사람 이발비로 6000루피 가량을 요구했다. 잠깐 실랑이를 벌이다 요구를 거의 다 들어주고 나왔는데, 혼자서 쇼핑 갖다가 뒤늦게 이발소를 들렀던 D역시 엄청난 바가지를 쓰고 왔다. 우리는 이날 포카라판  "3얼간이"를 찍었다며 스스로를 위무했다. 그날 이후 포카라를 떠날 때까지 몇번을 더 마주친 이발사는 우리에게 반가운 인사를 보냈지만 우리는 그를 마주치는 것이 너무 싫었다.  나쁜 기억을 빨리 잊고 싶은데 그 이발사에게 너무나 즐거운 기억이었을 것이 틀림 없었다.  '낮술'에서 저녁을 먹으며 포카라의 밤을 맞았다. 

 

2월 17일 아침 게으른 잠에서 깨어나 샤워를 하고 호텔인근의 식당에서 아침을 해결한뒤, 와이프는 호텔에서 스케치나 하면서 쉬겠다고 남고, 남자 3명이서 Tashi Palkhel  티벳 난민촌을 찾아 길을 나섰다. '할란촉'에서 '제로킬로미터'라는 지명의 교차로에 이르고 거기서 다시 버스를 갈아타고 전날 포카라로 돌아올때 달렸던 길을 바글룽 쪽으로 되돌아갔다. 버스가 포카라 시가지를 벗어날 즈음에 왼쪽 언덕위에 룽다와 타르초가 휘날렸다. 우리와 닮은 사람들이 사는 타시팔켈 티벳난민촌에 도착했다. 같은 몽골계라서 그런지 티벳탄을 만날 때 마다 꼭 어릴 때 동네에서 부댓기며 살아가던 이웃을 떠올리게 된다, 지나간 시절의 이웃 아저씨나 삼촌같은 사람들을 다시 만날 수 있는 타시 팔켈 티벳난민촌은 조용했다. 골목을 뒤덮은 고요와 한적함이 현실감을 줄였고 꼭 타임머신을 타고 50년전 어린시절로 되돌아온듯 몽롱했다. 골동품가게가 있고 기념품을 팔고 있는 노점상들이 있었지만 방문객이라고는 우리밖에 없었다. 마을을 돌기전에 먼저 식당에 들러 물소고기를 듬뿍 넣은 뚝바를 먹으며 삶의 현실감을 되찾았다. 

 

식당을 나오자마자 마을입구에 있는 골동품 가게를 들러 작은 기념품을 사고 D로부터 멋진 골동품 주전자를 선물로 받았다. 가지고 싶은 것은 많았지만 소유의 덪없음을 깨우쳐주는 사찰입구에서 욕심을 다 채울 수는 없었다. 마을을 둘러보고 캠프촌과 사원 그리고 멀리 포카라 변두리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위 뷰포인트까지 올랐다. 그리고 골목길을 따라 내려와 사랑곳에서 짚라인이 이어지는 "Hemja 번지점프"를 지나 또다른 불교 사원을 들렀다. 사원은 확장 공사중이었고 아마도 승려 부속학교를 운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무렇지도 않게 낯선 사람이 들고 나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이들의 무경계심이 불교의 탓인지 네팔리의 심성  탓인지는 알수 없었다.  참 신기하게도 가는 곳마다 네팔리들은 사람에 대한 경계심을 드러내는 경우를 본적이 없었다. 

 

티벳 불교 사원과 고향을 떠난 이국에서 난민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모여사는 난민촌 골목길을 걷던 3명의 일행은 각자의 상념에 빠져 길을 잃었고 모두 흩어지고 말았다. 우여곡절끝에 나는 M과 만났지만 결국 D는 합류하지 못했다. 리버사이드로 돌아오가는 버스라고 올랐지만 몇정거장 못가서 내리게 되고 다시 한참을 걸어 '제로킬로미터'라는 거리에 가서야 겨우 리버사이드를 가는 버스에 오를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혹시 한국인이냐며 물어온 한국에서 일한 적이 있다는 네팔리를 만나 친절한 안내를 받기도 했다. 어렵게 돌아온 호텔에 길잃은 D 마저 돌아오자 지난 달 친구들과 안나푸르나를 걸을 때 신세졌던 가이드 라마님과 연락이 닿았다. 오랜만에 만나 나는 늘 궁금한 것이 많은 네팔의 삶에 대해 물었지만 한국에서 노동자로 오래 근무한 적이 있는 라마는 늘 한국의 삶과 '사업'에 대해 궁금한 것이 더 많았다. 지난 여정을 함께한 모두 '산마루식당'에 둘러 앉아 행복한 포카라의 마지막 밤을 만끽했다. 

 

카트만두로 돌아가는 날 아침 일찍 잠을 깼다. 전날 라마를 통해 예약해둔 자가담바 버스를 타기위해 짐을 끌고 할란촉으로 나갔다. 7시에 온다던 버스는 오지 않고 아침마다 지고다니며 이른 출근객과 여행객을 대상으로 파는 거리의 빵으로 아침을 떼우고 있자니 예정시간을 30분이나 지나서 버스는 도착했다. 그나마 안도하며 버스에 올라 조용히 창가를 통해 물러나는 포카라의 거리를, 리버사이드와 댐사이드의 지난 여정의 흔적을 드듬었다. 이제 그리움으로 변해버릴 포카라에서의 기억들을 곱씹으며 하루종일 버스는 포카라-카트만두간 프리씨비 고속도로를 달렸다. 차창을 쓰쳐 뒤로 물러나는 풍경들이 초등학교 졸업 앨범의 가슴시린 사진마냥 어렴풋한 기억으로 나의 뇌리에 쌓여갔다.  

 

 

돌아온 카트만두의 숙소 마야거르츄는 여전했다. 내일이면 산으로 떠난다는 사람들이 있고. 아침에 산으로 떠났다는 사람들의 이야기와 온기가 남아 있었다. 우리는 슬그머니 마야거르츄의 원주민인양 스며들어 그들과 자연스레 하나가 되었다.  우리가 없는 사이 다른 많은 사람들이 마야거르츄를 들러고 그리고 안나푸르나나 랑탕, 그리고 히말라야를 거친뒤 다른 사람이 되어 돌아와 다시 머문뒤 한국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우리는 산전수전 다 겪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마야거르츄에 돌아왔지만 안나푸르나로 떠나기 전의 자신과 달라진게 아무것도 없음을 애써  자각하지 못한듯 안타까워하지도 부끄러워하지도 않은채 편한 표정으로 세상을 마주했다. 

 

 

오랜만에 돌아온 카트만두의 첫날도 타멜거리로 나갔다.  특별히 할 일도 목적지도 없이 타멜의 거리를 걷고 이런 저런 가게를 들러  기념품을 샀지만 네팔에서 제일 유명하다는 서점인 pilgrim bookstore에서 두권의 책과 몇가지 기념품을 샀다. 여정이 끝나고 귀국하고 나면  네팔의 마오주의 혁명사를 다룬 [The Bullet and The Ballot Box]와 네팔의 역사를 간략하게 정리한 [The History of Nepal]을 틈틈히 읽으며 네팔에서 보낸 나의 시간들을 반추할 것이다. 저녁은 타멜거리의 블랙올리브에서 성찬으로 마무리했다. 

 

반응형
반응형
1월 21일 아침, 뷰띠크 호텔 체크아웃하고 택시로 마야거르츄로 이동하여 짐을 풀고, 왕궁박물관과 파탄을 돌아다니고, 22일 공항에서 앞으로 일주일 여정을 같이할 L씨를 맞이하고 타멜에서 시간을 보낸 뒤, 복통을 만나 23일 내내 방에서 보냈다.


100리터 배낭 두개와 두사람이 소형 택시를 타고 마야거르츄가 있는 수어러꾸떼로 향한다. 5분만에 도착한 마여거르츄는 트레커들이 다 떠나고 적막감마저 감돌았다. 혼자 계신 관리자분께 인사만 하고 방으로 짐을 옮긴뒤 단촐한 차림으로 Narayanhiti Palace Museum으로 향한다. 타멜거리를 지나고 Garden of Dream을 지나 10시가 조금 넘어 박물관에 도착했다. 11시에 문을 연다니 30분이나 남은 이른 시간이지만 가족나들이객들로 붐비기 시작했. 주변을 둘러보니 안내문이 있고 박물관 입장을 위해 지켜야하는 규칙이 나열되어 있었는데 상당히 위압적이었. 역시 권위적 권력의 소산이겠지만 왕은 죽었고 왕정은 무너졌으며 좌파 민주정부가 들오선지 10년이 지났지만 아직 네팔은 변화를 시도하는 단계에 머물러있는 듯 보였. 거리에서 가장 당당하고 멋진 사람이 총을 든 군인이거나 경찰인 국가에서 시민은 늘 초라하다. 사실 카트만두가 그랬다.

 

박물관은 네팔의 마지막 왕인 가렌드라가 폐위되는 2007년 까지 살던 왕궁이지만 2008년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박물관으로 공개되었다고 한다. 오전 11시부터 오후 3시까지 문을 여는 박물관은 입장을 위해서는 엄격한 소지품 검사를 받고 가방은 물론 촬영을 못하도록 핸드폰까지 맡겨 놓아야 했다. 내부관람 중에도 삼엄한 경비를 서고 있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는데 그렇다고 관람을 방해받지는 않았다. 박물관은 나름 볼거리가 풍부했고, 여행객이라면 한번쯤은 들러 네팔 왕실의 삶을 통해 네팔 문화를 이해하는 기회를 가져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물관을 통해 나는 네팔이 고립된 왕국이 아니라 세계와 풍부한 교류를 한 개방적인 나라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사실 네팔의 역사에 대해 충분한 지식없이 왕궁박물관을 둘러보니 그야말로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한  '구경'이상이 될수 없었다. 단지 네팔 혁명과 왕정의 붕괴과정에 대해 일말의 뉴스라도 접해보았다고 비렌드라 왕의 일가가 아들 디펜드라에 의해 살해된 현장을 둘러볼 때는 왠지 모를 섬뜻함이 느껴졌다. 공식적으로는 왕자 디펜드라가 사랑한 인도 여인과의 결혼을 반대한 부모에 대한 반감으로 술과 마약에 취해 총기를 난사한 사건으로 정리가 되었다고한다. 하지만 비렌드라의 동생으로 비명횡사한 형으로부터 왕위를 물러받은 가렌드라의 음모라는 설을 민간에서는 더 믿고 있었다. 어쩌면 민중의 혁명열기에 국토의 대분분이 장악되고 대도시만 간신히 남아 있던 상황에서 왕정의 종말을 예감한 디펜드라의 광기가 발로되어 일어난 사건이 아닌가 싶기도했다. 종말은 에견되어 있었고 그 악역을 디펜드라가 맡은 것뿐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Narayanhiti Palace Museum을 나와 카트만두밸리의 세왕국중 하나였던 파탄을 향해 남쪽으로 걸었다. 5~6km나 되는 잛지 않은 거리였지만 택시도 버스도 마다하고 걷기로했다. 안나푸르나를 걷는 것과는 달리 혼탁한 공기를 마시며 걷는 도심 트레킹은 쉽지 않은 일이지만 여행자의 거리라는 타멜을 벗어나 그야말로 카트만두의 날것 그대로를 느끼고 싶었다.  mapsme에 목적지를 입력하고 하염없이 걸었다. 앱의 특성때문이겠지만 미로같은 골목길을 오고가는 네팔리와 어깨를 부딪고 만나는 꼬마들과 눈을 맞추고 미소를 주고 받으며 걸을 수 있었다. 어느 순간에는 내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 내가 서있는 곳이 어디인지 당혹스럽기도 했지만 다시 길을 이어주는 앱 덕분에 어느새 바그마티강에 이르고 강을 건너자 UN공원이라는 곳이 나왔다. 청춘 남여들이 데이터를 하는 곳이지만 청춘이 지난 우리 부부도 나무 그늘을 찾아 들어 간식을 먹고 음료를 마시며 휴식을 취했다. 

 

 

Patan은 산스크리트어로 Lalitpur라고 하고 City of Beauty라는 의미라고 했는데 역시 아름다운 도시였다. 카트만두와 박타푸르 그리고 랄리푸르가 공존하던 시절 전쟁 대신에 서로 도시를 아름답게 가꾸는 걸로 경쟁했다고 한다. 그 덕분이겠지만 랄리푸르 역시 박타푸르나 카트만두 못지 않은 아름다눈 건축물들이 듀바르 광장을 중심으로 집중되어 있었다. 듀바르 광장은 입장료를 받고 있는데 이날은 체크 없이 입장이 가능했다. 특별한 날이었는지 근무자가 자리를이탈한 건지 알수 없는 이유로 입장료없이 두바르거리들 들어섰다. 5년전의 기억을 더듬어 지난 지진의 흔적을 찾았고, 사라진 건축물의 빈자리도 보이고 여기 저기 복구공사가 한창인 곳도 많았지만 그나마 도시의 경관 전체가 주는 느낌은 손사되지 않고 살아있는 것 같아 무척 다행스러웠다. 거리는 그곳을 삶의 터전으로 살아가는 주민들의 무심한 표정과 주변을 두리번 거리는 관광객의 호기심 어린 눈이 어지럽게 교차하고 있었다.  아내는 아름다운 거리를 스케치하고 나는 현지인의 무료한 표정으로 파탄의 골목골목을 걷고 오후 늦은 시간에 어렵게 버스길을 물어 타멜로 돌아왔다.

 

1월 22일, 한국에서 쿤밍 여행 끝에 카트만두로 들어와 우리랑 합류하기로 되어있던 L님이 오는 날 공항 마중 말고는 특별히 정해진 일정이 없었다. 수어러꾸떼 골목의 가게에서 장을 보고 직접 조리를 해서 식사를 해결하고 빨레를 한 것 말고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그래도 시간은 가고 도착 예정시간인 오후 4시 30분이 다가오자 숙소에 부탁해 택시를 불렀다. 공항까지는 금방 도착했어야 했지만 길이 막혔고 차는 돌았다. 혹시라도 낯선 공항에 먼저 도착해 헤메지나 않을까, 호객꾼들에게 혼줄이나 나지 않을까 걱정되었지만 역시 네팔의 만만디 수속 덕분에  무리없이 만날 수 있었다. 외국서 만나서 더 반가운 상봉을 하고 숙소로 돌아와 짐을 풀고 타멜을 지나 북한 식당 옥류관으로 향했다. 모처럼 한국서 온 지인과 북한 동포가 서비스하는 한식을 신나게 먹고 내게 주어진 삶에 감사했다. 

1월 23일의 아침을 맞기위해 엄청난 댓가를 치뤄야했다. 전날 북한식당 옥류관에서 먹은 음식이 문제를 일으켰다. 전날 옥류관에서 보낸 즐거운 기억은 악몽으로 변했다. 복통과 설사 오한에 현기증까지 거의 탈진한 채로 아침을 맞았다. 주문한 음식을 대신해 권유한 육개장이 문제인것 같았다. 육개장을 전혀 먹지않은 L은 아무 문제가 없었고, 조금 먹은 와이프는 배탈 정도에 머물렀고, 거의 대부분을 먹은 나는 완전히 초죽음이 되었다. 가져온 비상 약을 먹고 숙소에 부탁해 네팔 약국에서 사다주는 약까지 먹었지만 몸은 정상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하루를 완전히 침대에서만 지내고 나서 극심한 오한과 현기증에서는 벗어났지만 음식을 조금만 입에 대어도 바로 복통과 설사가 잇달았다. 잘 먹고 살찌는 여행이라는 목표는 완전히 무너졌다. 

반응형
반응형
19일 아침 파노라마롯지를 도보로 출발 둘리켈 버스파크에서 버스를 탑승하여 박다푸르까지 가고, 다시 1km를 걸어 버스를 갈아타고 나가르곳에 도착하여 1박을 한뒤 20일 카트만두 타멜로 돌아와 이전 묵었던 카트만두 뷰띠그호텔에서 하루를 더 묵었다.  

 

예정에 없던 2박을 하게된 둘리켈 파노라마 롯지를 나오며 주인에게 거듭 감사한 마음을 전했다. 물론 가격을 지불했지만 피우던 담배와 유심카드까지 신세를 지고 편안하고 평화로운 이틀을 묵을수 있었던 것에 대해 감사했다.  한적한 아침 산길을 걸어 민가를 만나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간혹 오토바이나 차량이 지나가기도 했지만 편안함을 방해할 정도는 아니었는데 롯지를 나온지 얼마되지 않아 길가에 여기 저기 흩어져 있는 지폐를 발견했다. 10여장의 지폐를 주워 세어보니 모두 245루피나 되었다. 한국돈으로 3000원 정도되는 돈이지만 공무원 한달 월급이 10만원 전후인 나라에서 하루 일당은 되는 돈이었다. 주운 돈을 다시 산길에 뿌려둘 수도 없고 어떻게 처리할지 고만하다가 지도상으로 우리가 가기로 예정된 코스안에 얼마되지 않아 경찰서가 있어 신고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하지만 우리보다 더 난감한 것은 경찰같았다. 분실물에 대한 처리 규정이 없는 건지 바디랭귀지로 설명을 했지만 경찰서 정문을 지키는 경찰은 그 돈을 받을 수 없다고 그냥 가져가라고 했다. 곤혹스럽긴 했지만 경찰마저 인정해 주는 불로소득을 주머니에 넣었다. 나에게 둘리켈은 불안으로 시작해서 행복을 주고, 마지막으로 행운까지 선사한 멋진 도시로 남았다.

  


둘리켈에서 카트만두 방향으로 가는 버스는 많아 보였다. 티벳 국경을 넘는 Kodari고개에서 카트만두로 이어지는 Arniko Highway 상에 있는 둘리켈은 교통의 요지였다.  버스는 이어졌고 거의 기다리지 않은 채 바로 탑승할 수 있었다.  Panauti와 갈라지는 Banepa까지는 낯선 길이었지만 그 다음부터는 그래도 한번 지나갔다고 익숙한 길이 이어졌다. 박타푸르까지는 한시간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다. 박타푸르에 도착한 지점은 나가르곳 가는 버스를 탑승하는 곳과 달랐다. 1km쯤 걷고 물어서 승객이 곽차 빈좌석이 없는 나가르곳행 버스에 올랐다. 버스는 굴곡지고 가파른 오르막 길을 달려 나가르곳 종점에 도착했다. 


점심을 해결하기 위해 우선 maps.me에 cafe du mont을 목적지로 설정하고 찾아 나섰다. 소나무 숲속으로 이어지는 깨끗한 도로를 따라 1.2km를 걸었지만 길은 군부대로 가로막혔고 다시 되돌아 버스에서 하차한 지점에 이르러 방향을 되찾고 목적지에 도착했다. 다행히 왕복 한시간여를 걸은 길은 차들이 거의 다니지 않는 한적한 포장도로로 양쪽으로 쭉쭉뻗은 소나무 숲이 형성되어 있어 시간내어 일부러 걷기에도 부족함이 없는 좋은 길이었다. cafe du mont은  lonely planet에 소개된 Peaceful Cottage라는 호텔의 부속식당으로 독특한 외관이 인상적이었다, 괜잖은 음식과 조망이 마음에 들기도 했고 숙소를 다시 찾아나서기도 귀찮아 흥정을 통해 전망좋고 넓은 방을 50불에 묵기로 하고 일찍 짐을 풀었다. 나가르곳이 물가가 비싸기로 유명하다고는 했는데 역시 이정도의 호텔이 50불이니 분명히 싼것은 아니었다.   

 

 

둘리켈이후 3일째 호텔방에서 보내는 시간이 늘었다. 이날도 빨래를 하고, 샤워를 하고  지난 여정을 정리하고 다음 일정을 계획한다는 핑게로 Lonely planet Nepal을 뒤척거리며 방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산책을 나왔지만 호텔 주변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맴돌다가 호텔 옥상에 올라 바라다 본 해지는 히말라야는 참 인상적이었다. 둘리켈에서 바라다 본 히말라야가 조금 더 앞으로 다가온 듯한 느낌이 들었고 카트만두 인근 최고의 히말라야 뷰포인트라 할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울라기리에서 에베레스트 그리고 칸첸중가까지 다 조망권에 들어온다고 하지만 저산이 어떤 산인지는 구분할 필요도 없이 그냥 히말라야의 신령함에 압도될 뿐이었다.

 

과분한 호텔에서의 하루를 보내고 13식에 네팔리 한달 월급에 해당하는8960루피를 지불하고 나오는 발걸음이 가볍지 않았다. 단지 그때문만은 아니겠지만 Nagargot은 나같은 여행자에게 적당한 여행지는 아닌 것 같았다. 단지 히말라야를 조망한다는 것 하나로 찾아 오기에는 다른 매력이 적었고, 관광지화된 마을은 네팔 산간 마을의 따뜻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설화에 따르면 오래 전에 카트만두는 물이 가득찬 호수였는데 칼로 산허리를 쳐 물을 빼내어 지금의 도시 카트만두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장본인인 문수보살이 3일간 머문 곳이 다름아니라 바로 나가르곳이라고 알려져 있다. 설화는 재미있었지만 관광지다 보니 물가는 비싸고 대부분 시즌에는 번잡하기 까지 하다고 했다.  

 

호텔을 10시에 나와 버스파크에 도착하니 이미 만차여서 이번에는 11시까지 기다렸다가 좌석에 앉아 출발했다. 박타푸르까지 인당 50루피의 차비를 내고 다시 타멜행 버스로 갈아타니 인당 25루피의 요금을 요구했다. 저렇게 싼 요금으로 크고 깨끗한 버스를 이용해 여행할 수 있는 네팔이 새삼 고마웠다. 5일만에 돌아온 카트만두는 여전히 혼동과 소음, 먼지와 쓰레기의 천국이었다. 그 점이 싫거나 낯설지 않고 더 반가운 라트나버스파크에서 버스를 내려 타멜로 행했다. 어느새 카트만두는, 특히나 타멜거리는 나의 마음속에서 고향처럼 편안한 안식처로 변해 있었다. 한식당인 경복궁을 찾아 오랜만에 김치지개와 제육뽁음으로 맛있는 점심을 먹었다.

 

 

몇일 있으면 새로 합류한 일행이 있어 카트만두에서 지금까지 지내던 숙소를 새 숙소롤 옮기로 결정하고 바로 새 숙소인 "마야거르츄"를 찾아 나섰다. 타멜 거리를 지나고 이전에 네팔짱이 있던 골목을 벗어나 북쪽으로 5분거리에 있는 "수어러 꾸떼" 라는 지역에 있는 National Star High School 까지는 잘 갔는데 바로 옆에 위치한다는 숙소는 한참을 더 헤멘뒤에나 찾을 수 있었다. "마야거르츄"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는 의미로 이전에 한국에서 노동자로 근무하면서 네팔 노동자의 인권 운동을 하시다가 추방당했다는 라미찬씨가 운영한다고 했다. 문재인씨가 네팔 트레킹을 할 때 머문 숙소로도 유명세를 타고 있었고, 대문에서부터 세월호를 추모하는 노란리본이 걸려있는 것이 범상치않은 숙소로 다가왔다. 촛불집회가 이어지고 있는 한국 상황을 외면하고 떠나온 여정이다보니 늘 마음에 무거웠는데  노란 리본이 반갑고 고마웠다.

 

마야거르츄는 조용하고 깨끗했고, 공동 운영하신다는 파샹님은 친절했다. 다음주에 합류할 일행의 예약상황을 확인하고 우리 부부도  안나푸르나 라운드와 숙소를 부탁하고 카투만두 뷰티끄 호텔로 돌아왔다. 오랜만에 만난 룸보이 빔센은 벌써 서먹해진 표정으로 우릴 맞았고 우리는 전체 일정의 3분지 1을 지나는 날의 저녁을 화려한 타멜거리의 레스토랑에서 보냈다.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