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1월 29일 아침 Upper Ngadibazar에서 출발하여, 바훈단다까지 오전에 걷고 Germu에서 1박을 한뒤, 1월 30일 옛 트레킹 코스 반대편 서쪽 강둑 절벽을 따라 돌을 깨고 만든 새길로 Tal까지 가서 1박을 했다.

 

우리는 Ngadi의 롯지에서 최악의 시설과 최고의 친절을 동시에 경험했다. 배갯머리에 쥐똥이 쌓이고 유리도 없는 창은 방 안밖의 구별을 불가능하게 했지만 모처럼 손님을 맞은 사우지 사우니는 연신 우리가 자신의 롯지를 찾아주어 너무 행복하다고 했다. 우리가 누군가를 행복하게 해줄수 있다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더할나위 없는 행복한 트레킹이 될 것을 예감하면서 라운드 둘째 날을 맞았다. 

 


점심을 먹은 바운단다까지의 길은 편안했다. 날씨는 온화했고 바람도 없고 맑고 투명했다. 그냥 숨을 쉬고 걷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행복에 겨워지는 그런 날이었다. 얼굴에 웃음기가 번지고 하루종일 걸어도 지칠 것 같지 않은 기분으로 도착한 바훈단다의 롯지는 평화로웠다. 바훈은 브라만을 뜻하고 단다는 언덕을 뜻한다니 바훈단다는 '브라만이 사는 언덕 마을'일 것이다. 여전히 작동하고 있는 카스트의 최상단 계층이 모여사는 마을은 다른 마을과 어떻게 다른지 모르겠지만 일단은 깨끗하고 잘 사는 동네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햇살 좋은 Hotel Superb View 정원에서 점심을 먹고 차를 마시고 그냥 그 자리에 눌러 앉고 싶기도했지만 마지못해 다시 배낭을 짊어지고 길을 나섰다. 못내 아쉬운 가이드는 그냥 여기서 하루를 쉬자고 제안했지만 하루를 마무리하기엔 걸은 길이 너무 짧았다. 


   


길을 걸으며 나는 5년전의 기억과 지금을 비교하고 기억의 흔적을 드덤고 달라진 것들을 확인했다. 5년전 있던 것이 없어지고 그 때 없던 것이 새로 생겨난 분명한 것이 있었다. 당나귀와 댐이 그것이다. 5년전 트래킹 내내 앞서거니 뒤서거니 같이 했던 그 많던 당나귀들이 보이질 않았다. 마르샹디강따라 찻길이 뚤리면서 그많은 당나귀와 노새들 그리고 목동들이 다 사라진 것 같았다. 당나귀와 노새대신 차와 기사가 더 많은 짐을 손쉽게 고산지대 마을로 나르게 되었으니 주민의 삶은 훨씬 덜 고달파졌을 것이다. 길을 걷는 내내 귀전에 울리던 방울소리가 귀국후에도 한참을 이명으로 남아 나를 몽환 속으로 이끌곤 했었는데 이제 나귀의 방울과 발자욱 소리 대신에 간혹 지나가는 차가 우리를 감짝 놀래키곤 했다. 변화는 바람직하고 피해갈 수 없는 것이긴 한데 그 많던 당나귀는 어디로 가고 그 목동은 운전기사가 되었을까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그전에 없던 것이 새로 생겨난 것은 바로 댐이었다. Upper Marsyandi 수력댐은 중국의 원조로 네팔의 전력난을 해소하는데 기여할 수력발전소라고 했다. 세계 2위의 수자원보유국이면서 수도 카트만두 조차 하루 몇시간밖에 전기가 들어오지 않던 시절은 벌써 옛이야기가 되었고 이번 여행중에는 기적같이 거의 정전이 없었다. 그것이 바로 이런 수력댐 덕분일진대 댐이 옛길을 삼키고 마을을 내쫏고 풍경을 변화시킨 것에 대해 마음 아파 할 수만은 없었다. 내 보기 좋자고 그들에게 불편을 감수하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아닌가? 그래도 입안엔 쓴맛이 남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중국 자본에 네팔이 휘둘리지 않기를, 네팔의 개발과 발전이 네팔의 자연의 아름다움을 집어 삼키지 않는 방향으로 나아가기를 빌며 댐을 피해 길을 걸었다. 



이른 오후에 게르무 레인보우 롯지에 도착했고 하루를 마무리하기로 했다. 아름다운 마르샹디 동쪽강둑위에 형성된 게르무 마을은 아름다웠고, 레인보우 롯지는 깨끗하고 운치있었다. 여유있는 오후시간을 빨래와 샤워, 그리고 편안한 휴식으로 보내고 지나온 길을 반추하며 이른 잠자리에 들었다.  행복의 절정에는 늘 그늘이 끼기 마련일까? 바훈단다를 지나며 문득 얼굴을 스쳐지나는 바람에 나의 청춘을 지배하던 불안을 환기했다. 수만갈래의 길이 앞에 놓여있던 시절 그 어느 길도 선택할수 없어 불안만이 나의 자의식을 확인시켜 주었었다. 헤어날 수 없었던 불안의 심연에서 나마 그 불안사이를 비집고 게으름을 만끽하던 나의 청춘은 감히 아름다웠다고 말 할수있을 것이다.  희미한 기억속을 비집고 정체를 드러낸 그 느낌이 온전히 나의 것이 된다면 내 나머지 삶은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여행은 지나간 나의 삶을 온전히 되돌려받는 축복이다.



게르무에서는 씼고 쉬고 잠도 잘 잤지만 포터 바순의 나쁜 술버릇이 드러났다. 전날 나디에서 술주정이 부끄러웠던지 바순은 내가 권한 락시까지 거절하며 쏘롱라패스후에 묵디나트에서나 같이 한잔하자며 패스전에는 '노소주'한다고 호언했다. 하지만 부억을 들락날락 거리던 바순은 호언한지 두시간도 안되어 술냄새를 풍기며 수다스러워졌다. 더 가관인 것은 알콜이상의 뭔가를 한 낌새를 느낄 수 있었다. 계속 실없이 웃고 떠들어 분위기가 불편해지기 전에 모두들 침실로 흩어졌지만 잠자리에 든 뒤에도 룸의 얇은 벽을 통해 한참을 동료 라마라쉬와 떠들어되는 라마의 취한 목소리를 들어야했다. 



가파른 강둑을 내려와 마르샹디강을 건너니 상계가 나오고 강의 서쪽 길을 걸어 Shrichaur의 Boomerang 롯지를 지났다. 시리사우르를 지나자 지그재그의 가파른 길을 한참 올라가니 강과 마을을 조망할 수 있는 지점에 도달했다.  Jagat 이후에는 강을 건너 티벳탄이 소금을 나르던 아름다운 산길을 당나귀와 한줄로 나란히 걸고 싶었다. 하지만 강의 서쪽으로 새로 찻길이 나면서 사람의 발길이 끊긴 구길은 관리가 안되는지 여기저기 산사태로 끊겨 있고 었다. 딸까지는 가파른 암벽 절벽을 깨서 만든 위태로운 돌길이 이어졌다. 발아래 천길 낭떨어지 아래 마르샹디 강이 흐르고 머리위 절벽은 돌이라도 굴러내리지 않을까 위태롭기까지 했다. 대신 소금을 나르던 티벳탄의 발길을 따라 걷던 옛길의 따뜻함은 줄었지만 가파른 절벽위를 가르는 길은 시원함을 넘어 아찔한 조망을 우리에게 선물했다. 


새로난 찻길이 우리를 딸까지 이끄는 동안 다행히 먼지를 일으키며 우리를 놀래키던 차를 몇대 만나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구길이 오르락내리락 사람을 지치게 했다면 새길은 구길보다 평탄하긴했어도 훨씬 더  길어진 것 같았다.  도저히 길을 만들 수 없어 보이던 절벽을 깨고 돌면서 길을 내다보니 길은 산 구비를 따라 멀리 돌기도하고 아예 마르샹디강이 보이지 않는 산넘어가지 이어지기도 했다. 역시 농가가 있고 아이들이 있고 집에서 키우는 염소가 있던 아기자기한 아름다움이 사라진 새길은 우리를 쉬 지치게 했다. 딸이 멀리 보이기 시작하면서부터 우리는 더 빨리 지쳐갔다. 손에 잡힐 듯 보이는 딸은 쉽게 다가오지 않았고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겨우 딸을 향해 가파른 언덕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카트만두의 숙소 마야거르츄를 출발할 때 파샹님으로부터 제안을 받은게 있었다.  어떤 트레커가 축구공과 학용품을 맡기면서 고산지대의 아이들에게 전달해주기를 부탁했다고 했다. 파샹님은 그 축구공과 학용품을 우리가 좀 전달해주면 안되겠냐고 했다. 사실 트레킹 짐을 싸면서는 가능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최소한의 짐만남기는 것이 철칙인데 예정에 없던 축구공 3개와 문구 한짐을 맡아 고산지대까지 지고 가기에는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그것을 마련해 주었던 분의 따뜻한 마음을 거역할 수 없어 각자의 배낭에 한개씩의 축구공과 문구를 나누어 지고 왔다.  딸이라고해봤자 고작 해발 1700여미터밖에 되지 않으니 아직 공을 나누어 줄 때가 되지 않았지만 이날 첨으로 예정에 없던 축구공 나눔을 해야했다. 

강변으로 내려오니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망치로 자갈을 깨고 있었다. 집을 짖거나 도로를 포장할 때 사용할 잔자갈을 직접 망치로 깨서 만들고 있는 것이라고했다. 눈과 코주변은 물론 온 몸을 돌먼지로  뽀얗게  뒤집어 쓴 아이들이 하얀 이를 드러내며 우리를 향해 나마스태를 외쳤다. 하루에 1달러전후의 저임금 아동노동이 극심하다는 네팔의 현장을 우리는 한가로운 트래커로 막딱뜨린 셈이었다. 값싼 동정심이라고 비난받을 지도 모르지만 순간 가슴이 너무 아려왔다. 그 아이들에게 무어라도 해주고 싶었고 나도 모르게 배낭을 열고 축구공을  꺼냈다. 한 아이를 불러 축구공을 주었다. 이 아저시가 왜 이러지 어리둥절하면서도 너무 좋아하던 그아이의 얼굴이 나의 마음에 새겨졌다. 그 아이의 마음에는 어떤 기억이 남겨질 모르지만 나는 그 아이의 얼굴을 통해 나의 유년을 느끼고 세상의 가난과 그 가난 속에서 삶의 온기를 지키는 아름다운 사람들의 사랑과 연대를 생각했다. 그 아이의 얼굴로 기억될 딸에서 하루의 길을 멈췄다. 


반응형
반응형


힘든 여정이다. 딸에 오후 5시쯤 도착하기 까지 쉬지 않고 걸었다. 하산이라고 느긋하게 내려올 수도 있었지만 남은 15일의 일정을 고려해 시간을 아껴야했다. 사실 남은 여정이 빡빡해서라기 보다는 욕심이 앞섰기 때문이겠지만 베시사하르에서 포카라로,  포카라에서 ABC코스를 다녀오고 다시 포카라에서 좀 느긋한 시간을 갖고 싶었다. 베시사하르로 되돌아 내려오는 여정에서는 올라갈 때보다 꼭 2배의 속도로 걷기를 강행했다. 차메에서 출발해 상행 때 하루 걸리던 티망까지 반나절도 걸리지 않고 내려왔다. 티망에서 점심을 먹기에는 너무 일러 다나큐까지 더 내려와서야 늦은 점심을 먹었다.
  



티망에 도착할 때 쯤 혹시 배가 고프지 않냐고 파샹에게 물었다. 네팔리들은 보통 아침을 먹지 않거나 간단히 해결하고 오전 11시전에 이른 점심겸 아침을 먹는다고 들었다. 그래서 포터를 위해 점심을 11시정도는 먹을 수 있도록 여정을 배려하는 것이 좋다고 한다. 혹시 오전 일정이 늦어지면 꼭 파샹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우리가 파샹을 생각하는 만치 또 파샹은 우리 생활습관에 자신을 맞추려 했고 그러다보니 12시 이전에 점심을 먹는 경우가 드물었다. 하지만 오늘은 탄촉에서 블랙티를 한잔 나눈 것을 제외하곤 간식도 휴식도 없이 계속 걸었다. 혹시라도 파샹이 배가 고프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지만, 역시 파샹은 또 'No problem!'이다.


점심을 좀더 내려가 다라파니 정도에서 먹기로 결정하고 티망을 스쳐지나갈 때 상행 때 묵은 롯지 앞을 지났다. 마당에서 롯지 사오니(주인아주머니)가 우리 일행을 알아보고 인사를 했다. 파샹과 무슨 이야긴지 짧은 대화를 나누고는 집안으로 들어갔다. 배낭을 돌담에 내려놓고 잠시 쉬고 있자니 사오니께선 파샹을 줄 차 한 잔과 책을 한 권 들고 나왔다. 퍄상이 얼굴에 가득 웃음을 지으며 나에게 책을 건넸다. 그 책은 내가 상행 때 짐을 줄인답시고 룸 탁자에 남겨두고 온 [바가바드기타]가 아닌가. 매정하게 버린 강아지가 다시 돌아왔다면 아마 그런 기분이었을 것이다. 반갑기도 하고 좀 머슥하기도 한 이중적인 감정이 일었다. '내가 잊고 간 것이 아니라 버린 것이다'고 말을 하기에는 책보기가 낯부끄럽기도 했고, 책을 챙겨놓았다가 전해주는 사오니의 정성과 그 책을 자랑스레 건네주는 파샹의 우쭐함에 찬물을 끼얹기도 싫었다. 무조건 반가운 표정을 짓고 고맙다는 인사를 드렸다. 사실 별반 반갑지 않은 [바가바드 기타]가 다시 나의 품에 돌아왔다. 어쩔 수 없는 인연인가 보다. 폭설이 와서 쏘롱라가 막히지 않았다면, 티망을 지나면서 묵었던 롯지 앞을 지나는 시간에 사오니가 마당에 나와 있지 않았다면, 그렇지 않더라도 사오니께서 불쏘시개로 태우거나 그냥 쓰레기로 버려버렸다면, 혹은 롯지 룸에 두었다가 어떤 한국인 트레커가 한국책을 발견하고 반가운 마음에 가져가 버리기라도 했다면 다시 만날 수 없는 책이 아닌가? 다시 내 손에 들어오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우연이 겹치고 또 겹쳤는지를 생각하니 [바가바드기타]를 다시는 가벼히 여길 수 없게 되었다. 억만겁의 인연이 겹쳐 나의 손에 돌아온 [바가바드 기타]를 그동안 짐이 줄어 여유로와진 배낭에 고히 모셨다.


티망에 도착하기전에 차메와 티망사이에 있는 탄촉이란 마을에서 블랙티를 한잔 나눌 때 작은 소동이 있었다. 티하우스에 배낭을 내려놓고 차를 시키는데 바로 차메서 부터 상하행 여정을 같이 하고 있는 한국 남녀 청년과 그들의 포터가 도착했다. 블랙티 6잔을 시키고 그들이 내놓은 네팔 쿠키를 나누며 담소를 즐기고 있는데 화장실 갔던 아내가 화장실 자물쇠와 키 뭉치를 변기에 빠뜨려 버렸다며 난감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지만 '돈'이 들어가야 하는 상황인 것같아 짜증이 났다. 그런데 웬걸 티하우스의 여주인은 또 'No problem'이란다. 이런저런 여행후기에서 네팔리들과의 나쁜 해후에 대한 글들을 읽은 적이 여러번 있었지만 우리가 라운드 중에 만난 인연은 하나같이 선하고 친절한 네팔리 뿐이었다. 가난한 살림에 자물쇠는 돈이 들어가야 하는 공산품으로 적어도 블랙티 몇잔을 팔아서는 살 수 없는 값이 분명했지만 여주인은 꽨찮다는 것이었다. 고맙다는 인사를 드리고 길을 떠나려다 마음에 남는 미안함때문에 아내와 잠시 답례를 고민했다. 아내는 한국에서 가져왔지만 많이 입을 기회가 없었던 자신의 추리닝 상의를 배낭에서 꺼내 티하우스의 사오니에게 드렸다. 한국돈으로 오육만원은 족히 하는 추리닝이 아까웠지만 아내는 미련이 없어 보였고, 추리닝을 받은 사오니는 의외의 선물에 너무 즐거운 표정을 지으니 잠시 들던 아깝다는 생각이 싹 사라졌다.



다나큐에 오후 1시쯤 도착해서 포탈라게스트 하우스에서 어제 눈에 젖은 옷을 햇살좋은 마당에 늘어놓고 달밧을 시켰다. 'Potala'는 티벳 불교의 성지 '포탈라궁'이나 포탈라궁이 있는 지역의 지명을 가리킬 것이다. 티벳탄이 운영하는 롯지답게 다이닝룸 한쪽에는 불교식 제단이 설치되어있고 제단앞에선 귀여운 두 아이가 놀고 있었다. 얼굴에 온통 콧물을 바르고 있어 더 귀여운 아이들이 사진기를 들이되자 이쁘게 웃어준다. 햇살이 비치는 창밖에는 맑은 하늘이 싱그럽고 눈이 가쉰 골목은 봄날의 나른한 오후 풍경같이 따사롭고 한가로왔다. 아름답고 평화로운 거리를 힘겨운 삶의 짐을 지고 상행하는 네팔리의 발길이 이어졌지만, 짐을 진 그분들이 이어가는 세상살이를 고달프게 느끼기엔 따스한 햇살과 파란하늘, 한가한 골목의 풍경이 너무 평화롭다. 같이 짐을 지고 올라가며 서로 농을 치는 네팔리의 표정에도 웃음이 한가득이다. 내 마음의 평화가 단지 투사되었을 뿐인지도 모르겠지만 그 순간 내 마음의 평화가 온 세상의 평화이기도 하다면 얼마나 좋을까는 생각이 들었다.


식사가 나오기를 기다리면서 파샹은 '태양열 온수'가 된다며 머리를 감을 것을 권했다. 머리를 감은지 한참이나 되었고 슬슬 머리가 건질거리기 시작했지만 아직은 고도가 있어 추위가 겁이 났다. 파샹만 머리를 감고 아내와 난 사양했다. 양배추 볶음이 같이 나온 달맛을 맛있게 먹고 잠시 휴식을 취하니 막 도착했을 때 와는 달리 한기가 느껴졌다. 아내와 나는 머리를 감지 않은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안도하며 길을 나섰다.


다라파니를 지나고 카르테에 접어드니 휘날리는 적기가 우리 일행을 맞았다. 반가운 마음에 파샹에게 물어보니 마오주의자가 장악하고 있는 마을이란다. 몇년 전에는 정부군과 맞선 자치주로 전운이 감돌았는지 모르지만 이제 마오주의 정당이 집권당이 된 마당이니 더 이상의 긴장감은 없어 보였다. 단지 적기는 우리 마을이 어떤 사상을 공유하고 어떤 마을의 미래를 꿈꾸는지 나타내주는 표식으로만 다가왔다. 그들이 공유한 사상이나 공통의 꿈이 가진 현실성을 확인할 수는 없지만 여하튼 마을 공동체의 역동성이 살아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마을의 공기가 달리 느껴졌다. 여전히 인적은 많지 않았지만 햇살은 더 따스하고 마을이 가진 문화적 정치적 저력이 마을의 밝을 미래를 예견케했다.



상행길에 'South korea is good!'을 외치며 엄지손가락을 세워주던 네팔리를 만났던 지점의 롯지에 잠시 배낭을 내려놓고 차를 마셨다. 한 때 꿈꾸던 해방구를 네팔의 안나푸르나 산중에서 만난 셈이니 잠시 머물며 담배라도 한가치 안할 수가 없었다. 적기가 휘날리는 마을 '카르테'를 벗어나려는 찰나 '맛있는 김치있어요' 라고 쓰인 한글 표지판이 눈에 들어왔다. 작은 표지판은 성공한(!) 자본주의 국가인 한국에서 많은 트레커들이 오고 있고 또 한국에서 노동자로 일했던 네팔리가 살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었다.  한글표지판이 보여 주는 현실과 마을 입구를 지키던 붉은 깃발이 품고 있는 꿈이 공존하는 카르테는 오래도록 기억될 것 같다.


오후 5시에 오늘의 목적지 딸에 도착했다. 역시 '김치있어요'라고 씌여 있는 마르상디 호텔 마당에는 노란 단국화가 길손을 맞이했다. 이츰 룸에 짐을 풀고 마당에 내려와 파란 벤치에 앉아 커피를 한잔하며 딸에 내리는 저녁 어스름을 맞았다. 오늘 하루 상행 이틀분 여정을 주파하며 고도 약 2,700미터에서 1,700미터까지 1,000미터를 내려왔다. 이틀동안 백설의 설국에서 초록의 겨울 아열대 지역까지 약 46km를 걸어 고도를 1,700여미터 줄인 셈이다. 이틀 연속된 강행군으로 몸은 지칠데로 지쳤지만 핫샤워를 하고, 파샹이 좋아하는 피자까지 시켜 푸짐한 저녁상에 로컬와인까지 한잔 나누니 몸이 봄햇살에 눈처럼 녹아내렸다.

반응형
반응형


새벽 5시 물과 안개가 잔뜩 묻은 조랑말 방울 소리에 잠이 깼다. 방울소리는 같은 지상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아니라 멀리 하늘에서 내려오거나 아니면 땅속 깊이에서 솟아나는 소리같다. 중국영화의 귀신이라도 나오는 장면에서 배경음으로 사용하면 적격일 그런 소리다. 가만히 누워 한참을 가까워 졌다 멀어져 가는 방울 소리를 들으며 몽환속으로 빠져든다. 나에게 안나푸르나를 소리로 기억하라면 아마도 저 조랑말이 달고 다니는 방울소리가 될 것 같다. 조랑말 방울소리는 안나푸르나의 거친 자연과 네팔리의 고단한 삶, 그리고 어설픈 트레커의 설레임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아침을 먹기위해 들어선 다이닝룸에서 피상에서 리턴한다는 혼자 여행을 하는 독일인을 만났다. 그는 눈과 추위를 대비한 옷과 장비를 전혀 준비해 오지 않아 도저히 더 오을 자신이 없었다고 했다. 우리는 네팔라면이라는 Nuddle Soup을 먹으며, 리턴하는 독일인이 조그만 카메라에 담아 온 피상의 눈풍경을 구경했다. 그는 우리의 행운을 빌며 길을 떠났고, 우리는 짐을 챙겨 그가 내려온 길을 되짚어 올라가기 위해 롯지를 나섰다.

딸은 추웠다. 계곡 안에 위치한 딸은 해가 늦게 뜨고 일찍지고, 또 계곡을 따라 정상의 얼음바람이 쓸고 내려왔다. 으슬으슬 추운 게 아니라 본격적으로 추위가 느껴진다. 길을 걸으니 손과 귀가 시리다.

 

 

딸을 떠나 도착한 첫마을인 카르테 골목에 한국어 간판이 보인다. '맛있는 김치 있어요.' 그리고 길가 롯지 마당에서 모여있던 네팔리들이 말을 건넨다. 'Are you korean?' 나의 답이 떨어지자 마자 남한인지 북한인지를 다시 묻는다. 나중에 알았지만 네팔사람들에게 한국은 남과 북 공히 관심의 대상인가보다. 한 때는 북한과 관계가 좋았고, 다시 남한과 사이가 좋아졌지만 네팔은 집권당이 공산당인 나라다보니 남북 양쪽에 다 연이 닿아있다. 하지만 더 많은 네팔리들이 남한의 노동자로 인연을 맺고, 또 훨씬 많은 남한 사람들이 네팔을 왕래하다보니 네팔에서 지금은 남한이 더 인지도가 높은 것 같았다. 활짝 웃는 얼굴로 그는 나를 향해 엄지 손가락을 세워보이며 말한다. 'North korea is bad. South korea is good!' 하지만 내가 남한 사람이라서 기분이 좋을리가 없다. 우리의 분단현실이 그냥 씁쓸할 뿐이다.


다라파니를 지나면서 체크 포스트를 들르고, 바가르찹에서 점심을 먹었다, 우리는 토마토 스파게티를 먹었고, 파상은 달밧을 먹었다. 오늘 따라 달밧을 먹는 파상의 얼굴이 어둡다. 롯지를 떠나며 물으니 달밧의 밥이 식은 밥이었단다. 사오지에게 항의를 했고, 다시는 그 롯지에 들러지 않을 것이란다. 롯지나 레스토랑에 포터 한명이 트레커 두명을 데리고 오면 기본적으로 포터의 숙식은 무료로 제공되고 있는데 대부분의 경우 포터의 음식은 우리 트레커의 것보다 훨씬 좋았다. 우리는 보통 달밧을 먹고, 파샹은 야크고기나 계란 프라이가 덤으로 얹혀져있는 달밧을 먹었다. 보통 포터는 한 테이블에서 식사를 하지 않고 주방 한구석에서 롯지 식구들이랑 같이 식사를 하는 것 같았는데 우리는 딸에서 부터 우리가 밥을 사지 않더라도 같은 테이블에서 먹기를 종용했다. 그러다보니 늘 파샹이 무얼 먹는지 알 수 밖에 없었는데 오늘 점심을 먹은 레스토랑은 파샹에게 큰 실례를 범한 셈이었다.



힘든 하루다. 길을 따라 끝없이 올라와 다시 올려다보면 안나푸르나의 남은 높이는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간혹 마주치는 트레커들은 하나같이 쏘롱라 패스를 포기하고 되돌아가는 중이란다. 쏘롱라를 향해 가고 있는 사람은 우리 부부와 파샹, 슈리샤우르스의 부메랑롯지에서 같이 지낸 독인인 3명, 그리고 3명의 호주인이 전부다. 들리는 말로는 소롱패티와 마낭 등 쏘롱라를 가는 길목 마을에는 서른명 가량의 트레커들이 쏘롱라 패스를 시도하기 위해 대기 중이라고 했다. 그중 일부는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하고 다시 올라갔던 길을 되돌아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쏘롱라 패스가 불가능하다면 다시 불불레로 리턴해서 버스로 포카라를 거쳐 베니, 따또파니 그리고 좀솜까지 이틀에 거쳐 버스여행을 해야한다. 끔찍하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오직 일기가 좋아져 쏘롱라를 건널 수 있기를 빌 뿐이다.



첨으로 눈길로 접어들었다. 오늘의 목적지 피망이 가까워지면서 열대우림같은 수풀에 눈이 쌓혀있는 기묘한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눈을 밟기 시작하자 이제 본격적으로 겨울 안나푸르나에 접어든 느낌이 든다. 피망을 30여분 남겨둔 길에서 티벳탄 차림의 가족 무리를 여럿 만났다. 파샹이야기로는 그 중 한 가족은 틸리초 캠프에서 눈에 길이 막혀 트레커의 발길이 끊기면서 겨울을 나기 위해 저지대로 내려가는 중이란다. 오늘 만난 대부분의 네팔리들은 다 겨울을 견디기 위해 하산중인 것같았다. 마지막으로 만난 네팔리가족은 예닙곱살 되는 소녀와 그 부모다. 부모는 남루한 옷차림에 등짐을 하나씩 지고 있었고 , 아이는 떼국 떨어지는 무심한 표정의 얼굴로 눈덮인 길을 양말도 신지 않은 발로 조리만 신고 걷고 있었다. 우리와 마주친 소녀는 손을 내밀며 "Sweet! Pen!"을 읊조렸다. 순간 나는 괜한 혼란에 빠졌고 우물쩍 거리는 사이 소녀는 손을 거두고, 서운한거 하나없다는 듯 무심한 표정으로 부모를 따라 멀어져 갔다. 그 아이의 시린 눈망울이 오랫동안 나의 가슴에 남아있을 것 같다.



5시 30분이 지나 어둑어둑해질 무렵 티망에 도착했다. 티망은 사방이 눈덮인 산으로 둘러 쌓여있었다. 본격적으로 안나푸르나 안으로 들어서는 느낌과 함께 왠지 춥고 조금은 무섭기도 했다. 나중에 알았지만 너무 늦게 도착한 마을은 늘 그런 느낌이었다. 차라리 아침 일찍 출발하고, 오후에는 넉넉하게 도착해 햇살을 받고 동네를 한바퀴라도 돌게되면 그런 느낌이 들지 않았다. 티망은 해발 2200m다. 하루 일일정도 힘들었고 또 해발 2,000m에 도달한 기념으로 '락시'라는 로컬와인을 한잔씩 나누었다. 야생 과일로 만들었다고 하는데 정종맛이 났다. 달밧과 락시 그리고 네팔 담배 한개비로 길었던 하루의 여정을 마무리 했다.






 

 

반응형
반응형


이틀째 비걱정을 하면서 잠이 들었다.
건기에 이게 무슨 일이람! 물소리에 흠뻑 빠져 깊은 잠이 들었다가 창문을 스미는 빛을 느끼며 놀라 깨었다. 눈을 뜨자마자 오늘 날씨가 어떤지 제일 먼저 궁금했다. 창문에 비치는 밝은 기운과는 달리 여전히 귓가에는 물소리가 맴돌았다. 이상하다 싶어 창을 열어  젖혔을 때 왠걸, 검은산과 대비되며 더욱 파랗게 보이는 하늘이 눈안에 가득찼다. 나도 모르게 '우와' 함성을 질렀다. 지난 밤 폭포와 강물과 비가 어우려져 내던  물소리를 들으며 잠이 들었는데, 밤새 빗소리가 슬그머니 빠져버린지도 모르고 아침을 맞은 것이다.
 


마당을 내려서니 롯지 주변에는 온통 조랑말이다. 롯지는 트렉커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짐을 지고 올라가는 사람들과 조랑말 무리에게도 쉬어가고, 자고 가는 곳이었던 것이다. 다이닝 룸에서 우리 부부와 독일인 트렉커 3명, 그리고 2마리의 검은 개와 하산중인 백인 트렉커 한명이 같이 식사를 했다. 그동안 마부는 조랑말들에게 옥수수가 든 자루를 하나씩 입에다 달아주었다. 입에 옥수수가 든 자루를 달고 각자 머리를 처박고 자루안에서 우물우물 아침을 먹는 모습이 너무 재미있었다. 아마 모든 조랑말이 고루 먹을 수 있도록 하는 조치 같았다.


부메랑 롯지의 사오지가 길 떠나는 우리에게 맑게 개인 하늘을 가리키며 'Clear sky! Good luck!'을 외치며 활짝 웃어주셨다. 기분 좋은 출발을 하고, 파샹이 'Short cut'이라며 제안하는 길을 벗어난 가파른 산등성을 한참을 올랐다. 그때서야 저 멀리 롯지에서 막 출발해 우리를 뒤따르는 독일인 트레커들의 모습이 보였다. 포터나 가이드 없이 2명의 남자와 한명의 여자가 모두 100리터짜리로 보이는 배낭을 지고 있었다. 큰 키에 건장한 체격 때문인지, 100리터 짜리 배낭을 지고 걷는 그들의 모습이 우리가 조그만 백펙하나 짊어지고 걷는 모습과 별반 달라보이지 않았다. 아내와 잠시 외모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보통 네팔리의 두배는 되어 보이는 저들의 저 건장한 체격만으로도 최초의 조우에서 저들은 얼마나 우월해 보였고, 또 네팔리는 얼마나 주눅이 들었을까. 외모가 주는 선입견은 어떻게 형성이 되는건지 외모가 강박이 된 한국에 사는 사람으로서 한참을 이야기를 나누며 길을 걸었다.


차가 들어올 수있는 마지막 마을인 참체에 도착했다. 얼마전까지만해도 상계까지 차가 들어왔는데 최근에 사륜짚차가 참체까지 들어올 수 있게 된었단다. 지금도 로컬버스는 불불레까지만 들어오는데, 길 공사가 진척되면서 차가 올라갈 수 있는 한계가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오래전 안나푸르나 라운드 출발점은 베시사하르였다고 한다. 해가 가고 길이 만들어지면서 라운드 출발점이 점점 북쭉 마을로 옮겨져왔다. 아직도 과정을 중시하는 서양 트레커들중 일부는 고집스럽게 베시사하르부터 라운드를 시작하기도 하지만, 결과를 중시하는 풍조는 라운드 출발점을 점점 북쪽으로 옮겨버렸다. 라운드 코스에서 실제적으로 배제된 마을들은 손님이 줄어들면서 차차 사그라들고 있었다. 베시사하르는 그나마 람중주의 수도라서 괜잖아 보였지만 불불레를 기점으로 롯지의 외관이 확연히 달라보였고, 벌써 불불레마저 기울어가는 느낌을 지울수가 없었다. 더 많은 트레커를 끌어들이기 위한 길때문에 그렇게 사라져가여하는 마을들이 생긴다는 사실이 가슴아팠다.
 

 
참체를 지나자 다시 흰눈 쌓인 산넘어에 짙은 구름이 이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비가 대수냐, 그냥 하루 더 머물면 되지!' 생각은 그렇게 하면서도 이 비가 산정에서는 눈이고, 눈이 길을 막으며 일정은 중단되고, 일정이 중단되면 다시 올라온 길을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면서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아니나 다를까 참체에서 만난 트레커들은 피상에서 눈에 길이 막혀 쏘롱라 패스를 포기하고 하산중이라고 했다. 피상에는 눈이 30~40cm나 쌓였고, 쏘롱라는 짐작하기 조차 어려울만치 많은 눈이 쌓였다고했다. 지난 이틀 내린 비가 모조리 산정에서는 눈으로 쌓인 것이다. 올라 가면서 내려오는 트렉커들을 한명 두명 만날 때 마다 걱정은 점점 현실성을 얻었다. 아직 눈을 밟지도 않았는데 벌써 멀리 눈덮인 산정을 올려다보면서 구체적으로 하산을 고려해야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


어떻게 온 안나푸르나 라운드인데 피상에서 돌아가다니... 파샹말로는 짐작할 수가 없단다. 나는 정답을 빨리 얻기를 원했고 산은 쉬 그 답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 'May be... May be...' 파생을 말끝을 흐리며 쏘롱라 패스가 불가능하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가능하다고도 할수 없단다. 일단 마낭 까지 3일 정도 더 올라가야하니깐 그때까지 바람이 눈을 쓸어가거나, 햇살이 좋아 눈이 녹거나, 그것도 아니면 쏘롱라를 넘기 위해 대기중인 트레커들이 모여 무리지어 함께 쏘롱라 패스를 시도해 볼 수가 있을 거하고 했다. 모든 것은 바람과 햇빛 그리고 운수에 달린 셈이다.


자가트 입구를 들어서는 곳에 학교가 보였다. 어제 묵은 롯지의 사우지가 학교 교사라고 했었는데, 아침에 롯지를 나와 한시간쯤 지나 티하우스에서 쉬고 있다가 그를 다시 만났다. 학교로 출근 중이란다. 그는 담배를 원했고 나는 담배를 건네며 잠시 한두마디를 나누다 시간이 없다며 먼저 출발을 했다. 바로 그 사우지가 아이들을 가르키다가 나를 알아보고 반가운 인사를 하며 손을 흔들었다. "나마스테!!" 학교 건물은 수업중인 다른 학생들이 들어있는지 아니면 그냥 실외의 햇살이 좋아 실외수업을 하는 건지 알수 없었지만 10명의 아이들 세무리가 따로 수업을 받고있었다. 그 풍경이 너무 아름다워 한참을 바라다 보았다. 저들의 가난을 뛰어 넘는 아름다움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나만의 감상에 불과한 것일까? 객관적인 행복을 평가하는 기준이 있고 그 기준에 비추어 저들의 삶이 행복하다고 할 수 있는걸까? 지금은 고난을 벗어난 자가 이제는 가진 자의 눈으로 가지는 복고적 취향일뿐일까? 이런저런 생각이 일었지만 나는 염치없이 얼굴가득 미소를, 가슴에 가득 온기를 얻고 다시 길을 걷기 시작했다.



자가트를 지나면서 조롱말 행렬이 이어진다. 조롱망은 이곳 안나푸르나의 유일한 교통수단이다. 피상을 지나 해발 3280m의 홈데에 비행장이 있어 소형비행기가 트렉커들을 싣어 나르기도 하지만 이곳에 살아가는 사람들은 비행기를 이용한 운송은 꿈도 꾸지 못한다. 쌀과 커피, 나아가 집을 짓는데 쓰일 양철스레이트며 목재까지도 사람이 직접나르거나 조롱말을 이용한다. 대여섯마리 혹은 이삼십마리의 조롱말이 무리를 지어 등에 프로판 까스통이나 석유통, 음료수나 곡식 같은 무거운 짐을 지고 가파른 산길을 오른다. 아내는 길가로 비켜서며 저 조랑말들은 전생에 무슨 업이 많아 여기서 조랑말로 태어나 저 고생을 하냐며 안스러워한다. 그렇다고 조랑말을 이끌고 길을 가는 마부의 삶이 그 조랑말보다 뭐 특별히 나을 것도 없어 보였다.


가파른 돌길을 조리를 신고 오르락 내리락거리는 마부의 잰 발걸음이 위태롭고 안스럽다. 저 마부는 또 무슨 팔라자 저 고생일까? 조롱말은 태어나면서 자신을 소유한 주인의 삶에 곧바로 종속되었겠지. 선택의 여지 없이 짐꾼 조롱말로 거친 안나푸르나를 오르락내리락 거릴 수 밖에 없었겠지. 그렇다고 조롱말 무리를 부리는 마부의 삶은 또 어떤가. 초라한 몸골, 조롱말보다 더 거칠어 보이는 발, 일본 조리같은 값싼 슬리퍼에 의지해 가파르고 날카로운 돌길을 오르내리며 자신과 가족의 생계를 잇는 그의 삶이 조롱말의 삶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거의 하루종일 조랑말 무리와 헤어지고 다시 만났다. 한번 헤어진 무리와 다시 만나기도 했겠지만 안나푸르나를 오르는 사람들보다 조랑말 수가 훨씬 많게 느껴진다. 어쩌면 그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저 조랑말이 우리 부부가 먹을 쌀과 야채를, 그리고 안나푸르나 골짜기에 터잡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식량과 생필품들을 다 나르고 있으니 말이다. 조랑말을 보고 마부를 보고 그리고 어느새 나의 눈길은 퍄샹을 향했다. 걸음을 재촉해 파샹과 나란히 걸었다. "파샹, 나는 전통 네팔리 노래를 하나 알고 있다." 파샹에게 말을 건넸다. 'Really?' 아마 파샹은 내가 어떤 노래를 알고 잇는지 이미 짐작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Resam Phiriri!"


"레쌈 삐리리"는 네팔을 한번이라도 다녀온 사람이나 최소한의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다 아는 노래다. 일명 '트레킹 송'이라고도 알려져 있는데 트렝킹 중에 포터나 네팔리 주민들이 부르는 모습도 볼 수 있고, 카투만두나 포카라의 관광지에 가면 그냥 거리에서도 들을 수 있을 만치 대중적인 노래다. 한국의 아리랑 만치 네팔리와 삶이 녹아들어있는 레쌈피리리는 네팔리의 삶과 사랑을 담고 있지만 우리의 아리랑이 그렇듯 수많은 버젼이 있다. 그중에서 트렉커들에겐 "I am a donkey. You are a monkey."라는 가사가 가장 절실하게 마음에 다가올 것 같다. 내가 이 구절을 읊조리자 파샹을 박장대소한다. 그렇게 같이 웃고 있었지만 나의 마음 한 구석이 조금은 아려왔다. 나의 딸보다 어린 스무살 짜리 청년에게 짐을 들리고 산을 걷다니!





사실 누군가에게 나 자신의 짐을 맡긴다는 것은 참 곤혹스런 일이다. 어린 시절 '김일의 레스링' 만치나 나를 사로잡았던 '타잔'을 보면서, 흑인에게 짐을 맡기고 낭만적인 정글탐험을 하는 백인을 증오했던 기억이 났다. 그런데 지금 내가 그 백인의 역할을 하고 있는것이 아닐까? 분명히 괜한 자의식에 불과할 것이다. 포터를 고용하는 일만치 네팔을 위한 일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네팔포터인권협회'인지 하는 단체에서 20kg이하로 포터의 짐을 싸라고 권장하는 데로 배낭 3개를 각각 18kg, 15kg, 5kg으로 나누어 쌌다. 파샹은 18kg배낭에 자신의 짐 2~3kg을 합쳐 20kg 전후의 짐을 졌고, 나 역시 15kg짜리 배낭에 한번씩 지친 아내의 배낭을 덤을 들다보니 사실 파샹과 나의 짐 무게 차이는 별로 없었다. 그래서 퍄샹은 아내의 배낭을 자기가 지겠다고 몇번이나 제안했고, 연신 'You are strong!'을 외치며 나를 치켜세우기도 했다.


파샹은 고향이 에베레스트가 있는 솔로쿰부의 해발 3500m에 있는 마을이란다. 루크라비행장까지는 걸어서 1주일정도 걸리고, 차가 들어올 수 있는 길까지는 한 이틀 정도 걸리는 오지 마을이라고 했다.
아직 나이는 어리지만 3~4년 전부터 포터를 하고 있고 꿈은 전문 산악인이란다. 어차피 학교를 나와도 취업할 때가 없으니 전공은 의미가 없단다. 벌써 에베레스트의 7500m, 8250m정상까지는 여러번 등정을 했고, 안나푸르나 라운드도 5번째라고 했다. 그렇게 벌어 파샹은 전문산악인의 꿈을 키우면서 여동생을 카투만두로 불러 학교를 시키고 있었다. 건실하고 믿음직그럽고, 눈치 빠르고 재취있는 파샹과 동행하게 된 것은 이번 여정에서 만난 가장 큰 행운의 하나였다.


참체에서 점심을 먹고, 마르샹디강과 나란히 길을 걸었다. 강 건너편은 깍아지른 절벽이지만 그 절벽을 깨고 길을 내고 있었다. 파샹이야기로는 벌써 3~4년째 공사중이란다. 말이 길 공사지 중장비를 볼 수도 없다. 그냥 다이나마이트와 사람의 힘을 주로 이용해 길 공사를 하다보니 진척이 없다고 했다. 머지않아 안나푸르나 라운드 코스가 차도로 대체되고 지금 걷는 이 길은 풀숲에 묻혀 사라지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이길을 따라 이루어진 마을들 역시 수풀에 묻혀가겠지.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 길 공사를 비판하고 있다. 하지만 이 또한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세태의 흐름, 시대의 변화를 무시하고 그들의 '무지'와 '탐욕'을 비난하는 사람들의 뜻이 이해는 되지만 무조건 동의만을 할 수 없었다. 저 길을 통해 아이들은 도시로 떠나가겠지만, 그래도 저 길은 그들의 꿈이 이어지는 길이고, 그들을 위한 의료와 교육이 들어올 길이기도 하지 않은가? 그들의 불편함, 고통은 공유하지 않으면서 그들이 터잡고 살아가는 자연을 보전해라고만 하는 것은 이기적인 요구가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오후 2시반이되자 목적지인 딸에 가까워졌다. 오늘은 조금 일찍 걸음을 멈추고 양말도 빨고, 쉬기로 했다. 딸로 넘어가는 가파른 언덕을 마주하니 벌써 다 온 느끼이었지만 그 언덕을 오르는 일이 그리 만만하지 않았다. 언덕에 접어들자 머릴 군이들이 나타났고 뭐라고 고함을 지르며 손짓을 해왔다. 한참 만에 파샹은 곧 건너 길공사장에서 다이나마이트 폭파가 있으니 빨리 몸을 피해라고 한다고 했다. 하지만 좁은 계곡에서 그것도 더 높은 위치에서 다이나마이트를 터뜨리면 도대체 어디로 몸을 감추라는 말인가. 오르막 길에 힘들어하는 아내를 재촉하여 땀을 뻘뻘 흘린뒤 군인들이 서있는 언덕위에 도착했다. 그 위치라면 폭파예정지보다 지대도 높고, 옆에 또다른 언덕이 막아서있기도 해서 안전해 보였다. 속속 도착하는 트레커와 네팔리, 그리고 군인들이 옹기종기 모여 폭파를 기다렸다. 산중에서 뜻하지 않은 구경거리를 만난 셈이었다. 군인들에게 물어보니 5분뒤 폭파한다고 했다. 땀을 뻘뻘 흘리고 올라왔는데 담배 한가치를 피우는 사이 땀이 가쉬고 한기가 들었다. 배낭을 열어 외투를 끄집어 내다가 보니 커피믹서가 한껏 부풀어 있었다. 고도 2,000m도 되기 전에 기압차로 인해 저렇게 커피믹서가 부풀어 오르니 고도 4천 5천에서는 커피믹서가 터지고 사람의 몸도 한껏 부풀어 오른다는 말이 실감이 났다. 트레킹 안내 간판을 읽고 있는데 갑자기 폭파는 일어났고 돌가루 먼지가 계곡을 덮고 멀리 딸쪽으로 날려가는 것을 보면서 가던 길을 마저 가기로 했다.


 5분도 걷지 않아 멀리 딸이 보이기 시작했다. '딸'은 좁은 계곡이 갑자기 넓어지면서 강물이 느려지고 모래밭이 넓게 형성된 지형에 자리잡고 있다. 강과 높다란 암석절벽사이에 형성된 모래밭에 세워진 마을이 조금은 위태롭게 느껴졌다. 우기에 강물이 넘치기라도 하면 도망갈 때도 없어 보였지만 어쨌던 사람들이 잘 살고 있으니 그런 일은 없었는가 보다. 역시 파샹의 선택에 따라 Peaceful Lodge에 짐을 풀고, 양말을 빨고, 맛있는 식사를 하고, 강물소리와 롯지 뒷편 절벽으로 부터 떨어지는 폭포소리에 빠져 잠이 들었다.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