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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결에 경운기 소리를 듣고 눈을 떠니 새벽 4시 반이 조금 넘었다. 오늘은 앞집 형님댁이 고추를 심는 날이다. 늘 신세만 지고 살다보니 일년에 하루라도 농사일을 돕고 싶었는데 오늘도 오전에 군청에 들어갈 약속이 있다. 그래도 이왕 눈 뜬 김에 일찍이라도 나가서 돕다가 볼 일을 보러 갈 요량으로 집을 나서니 5시 20분이다. 바로 형님댁 비닐하우스에서 고추 모종을 싣기 시작했다.

 

 

형님 내외는 벌써 밭에 가서 계시질 않았지만, 마냥 기다리기에도 그렇고 또 밭으로 나가보기에도 일단 고추 모종이라도 트럭에 싣고 있으니 형수님이 모종 한 경운기를 밭머리에 싣어다 놓았다며 돌아오셨다. 그렇게 형님 내외랑 오늘 심을 고추 모종 나르기를 시작했다. 서너 트럭을 나르고 나니 형수님께서 이른 아침상을 차려 놓으셨다.

 

 

아침상머리에는 벌써 이웃들이 모여계셨다. 도시에 나가 사시다가 내년부터 고향으로 돌아와 농사를 지으시겠다는 이웃 할머니의 자제분과 늘 씩씩하게 사시는 수야 어머님과 같이 고추 모종을 한차 더 싣고 밭에 도착했다. 모종을 내리고 작업 준비를 시작하니 길학이 형님내외, 심봉남 전부녀회장님, 성철이 어머님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밭으로 모여드셨다.

 

 

북삽을 들어본지 참 오랜만이었다. 딱 1년만에 잡아 보는 북삽을 들고 밭골에 앉으니 고향집에 온듯 마음 편안했다. 3마지기 밭에 일꾼만 10여명 모였으니 오전이면 여유롭게 일을 마무리할 거 같았다. 창목이 형님이 앞장을 서서 이랑에 구명을 뚫고 나가면 한 사람이 모종을 넣고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북삽을 들고 모종에 북을 주며 그 뒤를 따랐다. 간혹 한명이 호스를 당기거나 모종을 나르고 그렇게 손밭이 착착 맞아 드니 일이 일같지가 않고 재미가 났다.

 

 

그런데 갑자기 생각지도 않은 구름이 몰려오고 청명한 봄 하늘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8시가 조금 넘어 한줄기 소나기가 내리기 까지 했다. 애간장을 태우는 반갑지 않은 비를 맞으며 하늘을 보시는 밭주인 앞집 형님의 얼굴에도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하지만 어떻게든 오전에 고추 정식을 끝내보려고 모두가 하나같이 비에도 아랑곳없이 고추를 심어나갔다.

 

 

 

오전 9시가 되자 밭이 절반이나 줄었다. 10시 약속 때문에 죄송한 마음만 남겨둔체 집으로 돌아왔다. 씻고 옷을 갈아입고 약속장소로 가는 길에 갑자기 굵은 소나기가 쏟아 붙기 시작했다. 오늘따라 비나리마을에는 일꾼을 사온 주민까지 여러가구가 고추를 심고 있었는데 더 이상 견뎌볼 수 없는 거친 소나기가 대지를 쓸어내렸다. 안타까운 마음을 안고 마을을 떠나 하루 볼일을 다 마치고 오후 일찍 들어오니 다시 마을은 봄 햇살이 쨍쨍했다. 언제 비에 쫏겨 달아났냐는 듯 온 주민이 고추밭마다 매달려 고추를 심고 있었다.



 

큰 비든 센 바람이든 자연은 잠시잠깐 농부를 놀래키고 일손을 놓게 하지만, 망연자실 하늘을 보던 농부는 이내 굳건한 표정으로 밭으로 향한다. 농부가 가진 그런 결기가 척박한 사회적, 자연적 조건속에서 우리 농업을 지켜오게 한 원동력일 것이다. 오늘 애간장을 태우고, 비에 쫏겨 도망까지 치며 심은 곡절 많은 고추는 틀림없이 씩씩하게 잘 자라 넉넉한 가을을 가져다 줄 것이다. 올 가을 고추농사 대풍이뤄 함박웃음 머금은 앞집 형님내외 얼굴을 꼭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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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봄은 이래저래 바쁜 일들이 많았습니다.
연초부터 일본 연수도 다녀오고,
딸아이가 진학을 해서 객지로 내보내고,
밭에는 사과나무도 심었습니다.
거기다가 집마당을 넓히고 석축도 쌓고,
밭은 농로와 도수로 공사로 적지않은 시간을 들여 고생을 해야했습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 평년에 하지 않던 짓을 저질렀습니다.
매년 마을에서 꼴찌로 고추를 심다가
올해 처음으로 본밭은 아니지만 마당의 텃밭에나마
마을에서 1등으로 고추를 250여포기 심게 되었습니다.
3일전 밭에서 경운기 작업을 하다가
오후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로 작업이 중단되었는데
왠 마음이 갑자기 동해서 비를 맞아가며
텃밭에 고추를 심게 되었습니다.


비를 맞으며 하는 일은 나름의 희열이 있습니다.
이번에는 날씨바람에 조금춥긴했지만
여름같으면 땀도 나지않고, 햇살에 지치지도 않다보니
저는 개인적으로 비를 맞으면 일을 하기를 조금 즐기기도 합니다.
단지 그마음에 이왕 옷도 버렸으니 고추나 심자고
덤벼든 일이지만 일을 마치고 나니
아직 어린 고추모가 애초롭기만 했습니다.
그래도 잘자라길 바라는 마음으로 
축원을 하고, 남은 골에 옥수수며 양대콩이며, 땅콩까지 호기롭게 다 심었습니다.
물론 본밭이 아니고 집앞 200여평의 텃밭에 불과하지만
올해 처음으로 동네에서 1등으로 고추도 심고, 
여러가지로 뿌듯한 하루를 마감했습니다. 


그런데 고추를 심은지 이틀만에 갑자기 기온이 떨어지고,
싸락눈까지 내리는 날씨가 이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저께의 예상 최저기온은 영상1도, 다행히 고추모가 얼지 않았습니다.
어제의 예상 최저기온 역시 영상1도였지만,
기상청 정보를 보니 영하1.5도를 기록했답니다.
그래도 다행히 고추모가 살아남았습니다.
그런데 오늘아침 예상최저기온이 영하1도랍니다.
어제밤늦게 있는 비닐을 펼쳐 반정도는 덮어두었지만
나머지는 오늘아침 추위에 살아남을 수 있을지 걱정입니다.
아침에 비가내리고 바람이 불면,
서리가 오지 않아 고추모가 살수 있지만,
바람도 없이 고요한 중에 서리가 내리면 고추모는 끝장입니다.
무론 250여포기에 불과해 날이 풀린뒤 다시 심으면 그 뿐이지만
제발 애처로운 고추모가 이번 추위에 살아남을 수 있기를 
천지신명께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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