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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흐만은 [휴먼카인드]에서 인류보편의 속성에 대한 낡은 물음을 제기하고 새로운 방식의 답을 구한다. 사실 인간의 본성이 선한가. 악한가라는 질문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제기되어 왔던 낡은 질문이다. 정답은 선하거나 악하거나 아니면 백지상태라는 3가지 선택지 안에 있을 뿐이다. 어떤 답을 선택하든지 자유지만 왜 그와 같은 답을 선택했는가를 설득력 있게 논증해 들어가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필자의 시도가 가지는 매력은 주장의 선명함보다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논거를 구하는 접근방식의 설실함에 있다. 필자는 종교적 신념이나 철학적 분석이 아니라 실증적 사료에 입각한다. 한축으로는 현재 인간의 의식을 장악하고 있는 인간본성에 대한 악한 이해를 논박하고, 또 다른 한축으로는 인간의 선한 본성이 어떻게 형성되었고 어떻게 현실 속에서 여전히 작동하고 있는지를 실증한다. 따라서 필자의 주장을 무너뜨리기 위해서는 최종적 주장에 대한 거부가 아니라 실증적 논거에 대한 반박을 통해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독자로서 나는 그의 주장에 최종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지점이 있긴 하지만 구체적 실증에 대한 반박은 쉽지 않았다. 이것은 어쩌면 실증의 어려움에 기인할 것이다.

 

먼저 필자는 현대 문명이 인간의 본성은 악하다는 전제 위에 구축된 것으로 이해한다. 그에 따르면 홉스의 인간관에 기반을 둔 아담 스미스의 경제학과 마키아벨리 정치학이 현대 사회를 구성하는 철학적 사상적 기반이다. 구체적 현실을 보면 인간과 사회에 대한 비관적 인식이 팽배하고 부정적 뉴스가 미디어를 장악하고 있다. 우리는 긍정적인 것보다 부정적인 것에 다 많이 영향을 받는 부정편향에 빠져있고, 넘쳐나는 부정적 뉴스에 묻혀 가용성 편향에 경도되어 있다. 이런 비관적인 견해는 기독교 초기 원죄개념 속에서도 드러난다. 원죄개념은 종교개혁 뒤에도 존속하고, 신앙보다 이성을 우위에 두는 계몽주의 사상에 그대로 계승된다. 인간을 살인자의 후손으로 지칭한 프로이드나, 삶이란 하나의 전투라고 설파했던 헉슬리는 모두 스미드와 마키아벨리의 후손에 다름 아니다. 이것이 필자가 밝히는 현실을 지배하는 인간 본성은 악하다는 인식의 원인이자 결과다.

 

필자는 상식을 비집고 반박의 근거를 물색한다. 먼저 필자가 소환한 엠마 골드만은 인간의 악한 본성을 피력한 사상가들을 정신적 사기꾼이라 일갈한다. 엠마 골드만의 주장을 이어 인간 본성을 악하다고 규정한 실증적 연구들에 대한 비판을 이어간다. 그 과정에서 우리가 친숙하게 접해왔던 필립 짐바르도의 스탠포드 교도소 실험(루시퍼 이펙트/이 실험은 인지부조화와 권력의 힘을 설명)’, 스탠리 밀그램의 전기충격 실험’(파괴적인 권위에 굴복하는 대중심리 테스트), 키티 제노비스의 사건(방관자 효과/1964, 키티 제노비스가 뉴욕 시의 자기 집 근처에서 다른 많은 주민들이 알아챌 수 있는 조건에서 강도에게 살해당한 사건)의 허구성에 대한 필자의 주장을 만난다. 이들 사건은 인간의 악마성을 논증하기 위한 사례들이지만 의도적으로 왜곡되고 편파적으로 해석된 오류투성이 일뿐이라는 것이 필자의 주장이다.

 

동시에 필자는 인간 본성의 선함이 드러난 사례들을 통해 본질적으로 인간 본성은 선함을 논증해 들어간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정치 지도자의 필독서였던 구스타브 르봉의 [군중심리학]에 입각해 대중의 동요와 공동체의 붕괴를 촉발하기 위해 민간에 대한 무차별공습이 이루어지는데 공습의 결과는 대중들을 더 결속하게 하고 협력하게 만들었을 뿐이다. 독일에 의한 런던 대공습, 연합군에 의한 드레스덴 대공습, 그리고 미국에 의한 베트남 대공습은 이를 결정한 정치집단의 의도가 무참히 박살나는 계기가 되었을 뿐 소기의 목적을 전혀 달성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인간은 위기에 처해 동요하고 광란에 빠지고 폭력적인 본성을 드러낸다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침착함을 잃지 않고 협력하고 의지했다. 위기가 인간의 선한 본성을 드러냈을 뿐이다 는 것이 필자의 주장이다.

 

이 책은 총 18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각각은 인간의 악한 본성을 주장하는 자들의 논거를 격파하거나 착한 본성을 드러내는 사례들로 구성되어있다. 그 각각을 나열해 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자연 상태에서 인간의 악한 본성이 표출되는 과정을 그린 파리대왕은 아태섬에 표류한 실제 사건과는 완전히 상반된다. 실제로 무인도에 표류한 소년들은 협력하고 의지하고 희생했다. 인간은 호모퍼피로 인간의 생존력은 지능이나 근력이 아니라 친화성에서 나온다. 전쟁에서 다른 인간을 향해 총을 쏠 수 있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다. ‘공유지의 비극은 지식인의 상상이지 현실을 반영 하지 못한다. 방관자효과 이론과는 달리 현실은 재난에 처한 타인을 위해 서로 희생하는 역방관자 효과가 더 많다.

 

하지만 필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인간은 600만 명을 학살한 가스실을 만들고 가장 잔인한 폭력을 행사하는 폭력적 문명을 동반하는가는 물음을 제기하고 이에 답한다. 그가 제사하는 답은 권력이 부패하는 과정인 후천적 반사회화공감의 역설을 제기한다. 특히 공감은 혈통, 영토 등 근친성을 공유하는 집단 간 내부 결속과 동시에 외부에 대한 배타성을 가져온다. 배타성은 타자에 대한 몰이해에 기반 하는 폭력성에 다름 아니다. 여기서 [사피엔스]의 필자 유발 하라리와 브레흐만이 대척한다. 하라리는 인간이 가진 상상의 공동체가 인간의 유대와 결속 공감을 통한 문명의 창조를 낳았다고 본다면, 브레흐만은 그 상상의 공동체가 동시에 인간을 가장 잔인한 동물로 만드는 함정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섬뜩하고 기발하고 향후 논의의 여지가 있는 주장이다.

 

결론적으로 그의 주장은 명료하고 직선적이라 따라가기가 쉽다보니 분량에 비해 드물게 잘 익히는 책이다. 하지만 책을 덮으면서 많은 시사점을 얻었다고는 하지만 쉬 그의 결론에 동의하기가 망설여지는 것은 사실이다. 그가 반복하는 플라시보 효과와 시노보 효과를 대비해 펼친 주장은 논증이 아니라 도덕적 제안으로 들린다. 자기 충족적 예언이 실현되는 것처럼 인간본성이 선하다고 이해하는 순간 인간본성은 선하게 귀결된다는 것은 논증이 아니라 희망사항이고 교리에 가깝다. ‘인간 본성에 대한 이해현실속의 악을 줄이고 선을 증진하기 위한 대응은 논리적 연관이 없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그와 같은 필자의 입장은 지구온난화문제에 대한 입장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문제의 심각성을 부각시키며 비관적인 주장을 펼치면 자기충족적 예언이 되어 정말 지구가 종말을 맞을지도 모르니 인간의 회복탄력성을 믿고 낙관적으로 대응하자는 것은 과학적 주장이 아니라 희망사항의 피력으로 들릴 뿐이다.

 

하지만 한권의 책으로 가치를 따진다면 뤼트허르 브레흐만의 [휴먼카인드]는 우리 시대에 꼭 필요한 성찰을 담고 있다. 인류 문명이 가진 비극의 지점들을 짚고 희망을 만들기 위한 지식인의 모범적인 노력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사족을 달자면 새로운 세상에 대한 성찰과 모색은 이 시대 가장 필요한 지식인의 책무이고 이에 충실한 필자는 기본소득제의 선구자를 자청하고 나서는 것은 어쩌면 당연해 보인다. 필자의 다음 책은 아마도 기본소득제에 관한 것이 아닐까 짐작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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