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촘롱을 벗어나기위해 Chhomrong Khola(촘롬천)까지 2,400여개의 돌계단을 걸어 해발 600m 정도를 내려갔다. 한 숨을 돌리고 다시 가파른 오르막 길을 힘겹게 걸어 고도 800m 정도를 올리니 Upper Sinuwa다. 촘롱과 시누와 사이의 계단길은 알려진 데로 가히 '죽음의 계단'이라고 말할만 했다. 길이 오르락 내리락하면서 피곤한 근육도 풀리 숨도 돌리고 해야하는데 오르막이든 내리막이든 한 방향으로만 계속 이어지면 그땐 걷는 맛이 죽을 맛이 된다. 오늘이 그랬다. Siwal에서 간드룩 가는 길이 그랬고 오늘 촘롱에서 시누와가는 길이 그랬다. 그보다는 덜했지만 Bamboo를 향해 이어지던 내리막 돌계단도 만만하지가 않았다. 내리막길이 하행길에는 다시 오르막으로 변해 있을 것이다.


아내는 파샹이 말한 계단의 수가 맞는지 세어본다며 촘롱천까지 내려가는 길에 아무 말이 없었다. 계단 수를 세어보는 아내를 방해하기 위해 말을 걸어도 단답형 대답만 하고 이내 계단 세기에 몰두했다. 결국 끝까지 계단을 세어 본 아내는 계단이 넓어 서너발씩 걸은 칸을 고려한다면 대충 맞는 것 같다고 했다.


시누와에서 물을 마시고 잠시 쉬었다. 포카라 호텔에서 20루피하던 1리터짜리 미네랄워터가 간드룩부터는 120루피 이상 했다. 파샹은 비싼 물을 얻어 먹는게 부담스러웠는지 내외국인 이중가격제를 이용해 자신이 물을 살테니 저녁 때 돈을 계산해 달라고 했다. 나는 'Good idea!'라고 답했고, 이후 반값에 물을 먹을 수 있었지만 이 역시 오래가지 못했다. 도반에서부터는 롯지 주인이 네팔리가 미네랄워터를 사서 먹을 리가 없다는 이유로 파샹에게 물을 팔지 않겠다고 했기 때문이다. 역시 장사하는 사람은 눈치가 빨랐다. 그러고 보니 롯지에서 네팔리에게 미네랄워터를 반값인 7~80루피에 팔아서는 전혀 이문이 없는 것 같았다.


안나푸르나 베이스켐프에 다가갈수록 당연히 고도가 높아진다. 오늘 묵게 된 히말라야 마을은 해발 2900m. 그런데 고도가 높아지는 꼭 그만치 물가도 따라 올랐다. 방값, 물값, 음식값 모두 비싸다. 시누아까지는 조랑말이 들어온다고 했다. 거기서부터는 식자재며 생활용품을 모두 사람이 직접 지고 날라야한다. 조랑말과 사람이 직접 날라온 식재료로 만든 음식을 싸니 비싸니 말하는 것도 우습고 당연히 고마운 마음으로 받아들여야할 것이다. 내일 도착할 MBC(마차푸차레 베이스캠프)나 ABC(안나푸르나베이스캠프)는 여기 히말라야 보다도 훨씬 더 비쌀 것이란다. 당연할 일이다.


오늘 점심을 먹은 밤부에서 파샹도 달밧을 250루피나 주었단다. 투어리스트에세 350루피를 받으니 포터에게는 단지 100루피만 깍아준 셈이었다. 라운드 코스에서는 투어리스트 2명을 대동한 네팔리에게 방값과 음식값을 전혀 받지 않았다. 숙식이 공짜일뿐아니라 특별히 덤으로 다른 서비스를 제공하기도 하는 것 같았다. 최소한 파샹의 달밧에는 우리가 먹는 달밧에는 없는 야크 고기나 계란후라이가 거의 항상 올라가 있었다. 우리 트레커는 왜 '플레인 달밧'이고, 너 파샹은 '스페셜 달밧'이냐며 놀리기라도 하면 파샹은 자기 접시에 올라와있는 야크고기를 아내와 나에게 한조각씩 나누어 주기도 했다. 그런데 ABC코스에 접어 들면서 파샹도 돈을 내고 밥을 사 먹어야 했고, 처음 사울리바자르에서 100루피를 내던 달밧을 이곳 히말랴야에서는 250루피나 내게 되었다. 계속 밥값을 대신 내어줄까 고민하기도 했지만, 이미 숙식비를 포함한 하루 12불이라는 포터비를 지불한 상태고, 또 여정이 끝나면 일정한 팁도 주어야 하기 때문에 그냥 두기로 했다.


ABC코스에 접어들어 오늘 처음으로 다이님 룸에 스토브를 켰다. 스토브는 유료였고, 1인당 100루피씩 이었다. 호주와 영국인팀, 한국인 팀을 합하니 스무명가량되었는데 트레커들에게만 받는건지 네팔리들에게도 받는 건지 알수 없지만 여하튼 100루피씩 받아가지고 비싼 석유값이 충당이 될지 궁금했다. 안그래도 비싼 석유를 말통에 담아 당나귀 등에 지워 시누와까지 나르고, 다시 그 말통을 사람이 짊어지고 이곳까지 날라왔을 걸 생각하니 1인당 100루피가 싸게 느껴졌다. 스토브는 저녁 식사 전에 불을 붙여 식사후 두어시간 켜 주었다. 저녁을 먹고나서 곤한 몸이지만 추운 방으로 돌아가기 싫은 트레커들은 그 시간동안 인사도 하고 여행정보도 나누고 수다도 떨었다. 영어가 능통해서 영국과 호주에서 온 청년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다면, 세계평화에 대해, 영국의 이라크 침공의 부당성에 대해, 신자유주의의 미래에 대해 청년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니 공부 열심히 하지 않은 게 뒤늦게 후회되었다. 다음 여행을 위해 영어공부를 열심히 해야지 하고 또 헛된 다짐을 했다.


이제 내일이면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에 도달할것이다. 이제 긴 여행은 거의 종반으로 접어들었다. 12월 29일 집을 나와 1월 26일 귀가 예정이니 이제 일정이 열흘쯤 남은 셈이다. 나는 그동안 무엇을 얻었을까?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 오는 곳이 아니라 비우러 오는 곳이 네팔이라는데... 나는 그동안 무엇을 버렸는지 모르겠다. 텅빈 머리, 고갈된 열정, 잃어버린 꿈.... 아직모르겠다. 동생에게 떠밀려 시작한 이번 여정의 의미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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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킹을 떠나온 뒤 가장 잘 잤다. 한번을 침대에서 떨어지고 새벽3시에 깰 때까지 뭔가 조금은 불안하고 종잡을 수 없는 꿈속을 헤맸다. 잠도 깊고 꿈도 깊어 눈을 뜨니 갑자기 방안이 낯설고 여기가 어딘지 깨닫기에는 조금의 시간이 걸렸다. 집 나온 지 2주가 다 되어 가는데 아직 시차 적응이 안 되는 건지 아니면 고도 탓인지 늘 새벽 일찍 눈이 떠진다. 시차나 고도 탓이 아니라 저녁시간에 마땅히 할 거리를 못 찾아 초저녁에 잠이 들어서인지도 모르겠다. 저녁을 먹고 룸으로 돌아오면 추위 때문에 바로 침낭에 들어갈 수밖에 없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경우도 있었지만 들어와도 약한 조명 때문에 헤드라이트에 의지해 책이라도 보고 일기라도 적다 보면 쉬 눈도 피곤해 지고 졸리워 진다. 그러니 초저녁에 잠에 골아 떨어지고 꼭 새벽 3시면 잠이 깬다. 그때부터 이리 뒤척 저리 뒤척이면서 창이 밝아 오기를 기다린다.


하루 종일 걸을 때는 사실 아무 생각이 없다. 그냥 걷는다. 그리고 생각은 꼭 이렇게 이른 새벽에 침낭 속에서만 하는 것 같다. 어제 하루 어떤 길을 걷고, 어떤 사람들을 만나고, 어떤 풍경 속에서 보냈는지 되짚어 보고 오늘 보낼 하루의 여정을 머리 속에 그려본다. 오늘은 마르샹디강 서편을 따라 Nayagon까지 간다. 시간은 남을 것 같은데 Nayagon을 지나 Khudi까지 가기에는 너무 멀고 그 사이에는 묵을 수 있는 롯지가 없다. 그리고 내일 베시사하르를 거쳐 포카라로 간다.



창문에 엹은 새벽 빛이 비치기 시작하고 조랑말 방울소리가 은은히 들려온다. 무거운 짐을 지고 힘든 길을 올라가기 위해 새벽부터 부산을 떠는 조랑말의 울음소리가 새벽 안개를 타고 번져왔다. 조랑말 소리가 꿈과 현실의 경계에 나의 의식을 한참 붙들어 놓는다. 더 이상 침낭 속에 머물 수 없을 만치 창이 밝아오고 나서야 침대를 내려섰다.


참 오랜만에 핫 샤워를 하고, 푹 잠을 잔 덕분에 출발하는 몸이 가벼웠다. 그래도 여정에 지침 몸, 오르막이 나오면 호흡이 가쁘고 힘겹긴 마찬가지였고, 다시 내리막이 나오면 고장 난 오른쪽 4번째 발가락이 쑤시고 아팠다. 그래도 고개를 들면 흰 눈을 지고 있는 아득한 산허리에 수백 겹으로 첩첩이 쌓인 5평 다락 논 산자락이 눈에 들어오고, 산꼭대기 언덕 위에 옹기종기 부락을 이루고 살아 온 네팔리의 삶의 무게가 가슴에 다가왔다. 여행자의 몸으로 안나푸르나 산허리를 주유하는 나의 삶은 얼마나 사치스럽고, 그에 반해 저들이 지고 사는 삶의 무게는 얼마나 무거운가! 하지만 그 무거운 삶을 짊어지고 살아가는 네팔리의 터전인 안나푸르나는 또 얼마나 깊고 숭고한지 한발한발 내딛는 발걸음마다 되새겼다.


딸에서 참체까지는 순탄한 내리막길이 이어졌다. 온화한 햇살 속을 마르샹디 계곡을 따라 걸으며, 간혹 상행하는 트레커와 나마스테!’를 주고 받았다. 트레커들과 네팔리들이 겨울을 견딜 양식과 생필품을 싣은 조랑말 대열과 조우했고, 강 건너 너럭바위 위에서 놀고 있는 원숭이들과 알아듣지 못하는 인사를 나눴다. 식생은 바뀌어 바나나 같은 열대 과일들이 눈에 들어오고 강물은 점점 푸르러갔다. 눈이 끝나는 길부터는 먼지가 일기 시작했고, 길은 조랑말 똥으로 덮혀 있었다. 하지만 조랑말 똥과 먼지는 거슬리지 않았고 우리의 발걸음은 탄력이 붙기 시작할 때쯤 참체에 도착했다.


 

상행 때 점심을 먹었던 롯지에서 블랙티를 한잔하고 있는데 위에서 만났거나 같은 롯지에서 머물렀던 트레커들이 하나둘 몰려왔다. 3명의 독일인 그룹과 단독 트레킹에 나선 호주인 그리고 한국인 청년이 마을로 들어섰다. 독일인 그룹은 차를 타지 않고 베시사하르까지 끝까지 걸어갈 태세였고, 호주인은 불불레에서 상행할 때 마르샹디 동편의 구 코스를 걸었는데 그 길이 너무 이상에 남아 다시 그 길로 걸어서 불불레까지 갈 예정이라고 했다. 이틀 전 차메에서 같이 출발했던 한국 학생들은 차가 들어올 수 있는 첫 마을인 참체에서 짚을 타고 떠나 베시사하르까지 가서 다시 로컬버스를 타고 오늘 포카라에 입성할 거란다. 서로의 행운을 빌며 학생들을 싣은 차는 출발했고 우리는 학생들이 짚을 타고 지난 길을 걸으며, 이제 평생 다시 못올 것 같은 마르샹디강을 눈이 시리도록 보고 또 보며 걸었다. 참체에서 자가트까지 1시간, 자가트에서 다시 상계까지 1시간을 더 걸었다.


자가트에서 점심을 먹었다. 달밧! 파샹은 거의 매끼를 달밧만 먹었다. 물론 아침은 누들 수프 같은 간단한 메뉴를 선택했지만 점심과 저녁의 꼭 달밧이다. 달밧은 밥과 콩국, 커리와 나물 한가지로 이루어진 네팔리의 가장 보편적인 식단인 것 같았다. 콩국은 식당마다 한국의 메주콩을 재료로 하는 집이 있고, 또 팥이나 녹두 같은걸 재료로 하는 집이 있는 정도의 차이가 있었다. 커리는 감자, 야채 등의 재료의 변화에 따라 조금의 차이가 있었는데 가장 변화가 많은 것이 바로 나물이었다. 고도가 높지 않은 마을에서는 식사를 주문받고 나서 밥을 안치고, 밥이 되는 사이 텃밭에서 한국의 유채같은 것을 뜯어와 삶아서 나물을 무쳐내었다. 나물거리가 없는 곳에서는 한국의 김치와 거의 유사한 "achar"라고 불리는 저장 음식을 내어놓는다. 무우말래이나 당근, 혹은 고추같을 걸 주재료로해서 숙성시킨 아자르를 우리부부는 '네팔 김치' 라고 불렀고, 파샹은 '피클'이라고 했다. 상행길에 딸에서 맛을 본 뒤, 묵는 롯지마다 달밧을 시키면 꼭 아자르가 있는지 물어본다. 나중에는 투명 용기에 담긴 아자르가 식당 구석이나 찬장에 있는지 살피게 되었고, 훅시라도 발견하게 되면 '저게 무어냐' ' 곡 한국 김치같다' '맛좀 볼 수 있느냐'고 물었다. 한번 두번 얻어 먹고나서는 달밧에 아자르 대신 야채나물이 나와도 꼭 아자르를 추가로 얻어 먹었다. 오늘도 자가트에서 달밧에 따라 나온 갓 뜯어온 싱싱한 나물무침에 아자르까지 푸짐하게 먹고 나서 롯지를 나섰다.



상행길에 묵었던 시리사우르를 지나자 맑았던 하늘에 짙은 구름이 몰려들고 이내 한방울 두방울 비를 떨어트렸다. 파샹은 지난 이틀간의 강행군에 지쳤는지 'Hard Walking! Hard Today!"를 연신 외치며 차를 타고 싶은 눈치다. 상계에서 차를 타면 오늘 중으로 베시사하르에 도착하고 내일 점심을 포카라에서 먹을 수 있다며 계속 유혹한다. 사실 우리도 무리한 하산으로 지쳐 있는 상황에서 파샹의 유혹을 물리치기 어려웠다. 하지만 참체에서는 1인당 1200루피나 하는 차비도 만만치 않았고, 또 특별히 차를 타야 할 이유도 없어 차의 유혹을 뿌리칠 수 있었다. 사실 깍아 지른 절벽 위로 이어지는 좁고 가파르고 파이고 거친 노면의 길을 브레이크도 핸들도 기어도 믿을 수 없는 차를 타고 싶지가 않았다. 걷기 위해 온 여정을 줄이기 위해 그 모든 위험을 감수하고 굳이 차를 탈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참체에서 외면했던 차를 상계에 이르러 결국 탈 수 밖에 없었다. 마침 상계에 이르자 빗방울이 굵어지고 출발 직전의 짚 차까지 대기하고 있었다. 어쩔 도리 없이 짚에 올랐다.


상계에서 짚을 타고 불불레까지 1시간 40여분동안 죽음의 도로를 달렸다. 길을 막는 염소떼들, 잘 키운 수박 통만한 돌들이 나뒹굴고 도저히 차가 다닐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길을 짚은 잘도 달렸다. 길은 좁고 왼편은 마르샹디 강이 흐르는 깍아 지른 절벽이었지만 상행인 차와 절묘하게 교행했다. 상행 때에 강 건너편에서 절벽 위에 걸쳐있는 실낱 같은 길을 보면서 무서워서 저 길을 어떻게 차가 다니겠냐고 했던 기억이 났다. 하지만 네팔리들에게 이런 도로를 차를 타고 달리는 일은 일상적인 것이 보명해 보였다. 파샹에게 깍아지른 절벽을 가리키며 '무섭지 않냐'고 물어보자 전혀 무섭지 않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하지만 젊은 운전기사는 초긴장한 모습으로 두 눈을 번들거리며 너무나 진지하게 운전을 했다. 한번씩 핸드폰을 받는 것 말고는 최선을 다하는 것 같은 기사의 운전 실력에 기대어 차를 탄지 2시간반만에 살아서 불불레에 도착했다.


불불레에 도착하자
Check Point에 들르기 위해 나 혼자 짚에서 내렸다. 팀스카드에 확인 도장을 찍고 나니 이제 안나푸르나 라운드는 미완으로나마 종결되었다는 사실이 실감났다. 오로지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불불레서 부터 베시사하르까지는 상행 때 고물 로컬 버스를 타고 달려 온 길이다. 베시사하르에서 불불레까지 들어올 때는 이 길 역시 그렇게 무서웠었는데 이제 다시 같은 길을 따라 짚을 타고 달리는 데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상계에서 불불레까지의 길이 워낙 거칠고 위험하다보니 불불레에서 베시사하르까지의 길은 안락하다 못해 졸립기까지 했다.


오후 5시에 아침에 세운 계획보다 하루 빨리 베시사하르에 접어들었다. 차가 시내에 들어오자 마자 기사는 운전대를 놓았고 다른 사람이 차에 올라 운전을 하기 시작했다. 왜냐고 묻자 파샹은 운전기사가 너무 지쳐 다른 기사에게 운전대를 넘긴 것이란다. 사실 그 거친 길을 초긴장한 상태로 상하행 다 운전을 하다보 면 지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승객보다는 그래도 운전기사가 훨씬 더 신경이 곤두섰을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파샹은 베시사하르에 도착하자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에베레스트 중턱에서 태어나 살다가 카트만두로 나온 파샹이 산보다는 도시를 좋아하는 건 당연할 것이다. 파샹은 신나는 발걸음으로 베시사하르에서 제일 좋은 호텔이라며 Tuckche Peak Hotel로 우리를 이끌었다. 호텔비가 부담되지 않을까 걱정스러웠지만 우리의 걱정에 아랑곳하지 않고 당당하게 앞장서는 파샹을 따라 호텔로 들어섰다. 남중의 수도인 베시사하르에서 가장 좋다는 호텔이지만 낡고 초라했고 요금도 700루피(한국돈 만원)로 그리 비싸지 않았다. 4층의 룸에 짐을 풀고 베시사하르의 거리로 나섰다. 이미 해는 떨어져 초저녁 인데, 하루의 노고를 접고 집으로 돌아가는 네팔리의 분주한 발걸음이 골목 가득 넘쳐났다. 몰려다니는 아이들, 어른들의 바쁜 발걸음, 야채가게 앞에 모여든 아주머니들, 길가에 앉아 분주한 골목을 바라다보며 지는 하루 해를 아쉬워하는 할머니들 사이를 뚫고 골목으로 접어 들었다.


상가와 접한 주택가 골목에는 네팔리의 삶의 소리와 향기가 넘쳐났다
. 모퉁이마다 구멍가게가 있고, 골목은 뛰어다니는 아이들의 생동감 넘치는 목소리로 가득했다. 그리고 그 생동감을 지키고 키워준 가정의 따사로운 온기가 창문을 넘어 번져 나오고 있었다. 창에 희미한 불이 들어오고 나는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 골목을 걸으며 깊은 상념에 빠져들었다. 1960년대 말에서 70년대 초까지 내가 '국민학교'를 다니던 시절의 진해시 여좌동 재건주택의 골목 속으로 나의 의식은 빨려 들어갔다. 다시 돌아가 어른의 눈으로 봤을 때 그렇게 좁을 수 없었던 그 골목이 그 아이의 눈에는 왜 그리도 넓고 풍성했는지. 그 골목을 이리저리 휩쓸고 돌아다니던 아이들의 무리가 보이고, 웃음소리,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그 속에 낯익은 한 아이가 달려가는 모습이 보였다. 멀리서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만 놀고 들어 온나. 저녁 먹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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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5시 물과 안개가 잔뜩 묻은 조랑말 방울 소리에 잠이 깼다. 방울소리는 같은 지상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아니라 멀리 하늘에서 내려오거나 아니면 땅속 깊이에서 솟아나는 소리같다. 중국영화의 귀신이라도 나오는 장면에서 배경음으로 사용하면 적격일 그런 소리다. 가만히 누워 한참을 가까워 졌다 멀어져 가는 방울 소리를 들으며 몽환속으로 빠져든다. 나에게 안나푸르나를 소리로 기억하라면 아마도 저 조랑말이 달고 다니는 방울소리가 될 것 같다. 조랑말 방울소리는 안나푸르나의 거친 자연과 네팔리의 고단한 삶, 그리고 어설픈 트레커의 설레임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아침을 먹기위해 들어선 다이닝룸에서 피상에서 리턴한다는 혼자 여행을 하는 독일인을 만났다. 그는 눈과 추위를 대비한 옷과 장비를 전혀 준비해 오지 않아 도저히 더 오을 자신이 없었다고 했다. 우리는 네팔라면이라는 Nuddle Soup을 먹으며, 리턴하는 독일인이 조그만 카메라에 담아 온 피상의 눈풍경을 구경했다. 그는 우리의 행운을 빌며 길을 떠났고, 우리는 짐을 챙겨 그가 내려온 길을 되짚어 올라가기 위해 롯지를 나섰다.

딸은 추웠다. 계곡 안에 위치한 딸은 해가 늦게 뜨고 일찍지고, 또 계곡을 따라 정상의 얼음바람이 쓸고 내려왔다. 으슬으슬 추운 게 아니라 본격적으로 추위가 느껴진다. 길을 걸으니 손과 귀가 시리다.

 

 

딸을 떠나 도착한 첫마을인 카르테 골목에 한국어 간판이 보인다. '맛있는 김치 있어요.' 그리고 길가 롯지 마당에서 모여있던 네팔리들이 말을 건넨다. 'Are you korean?' 나의 답이 떨어지자 마자 남한인지 북한인지를 다시 묻는다. 나중에 알았지만 네팔사람들에게 한국은 남과 북 공히 관심의 대상인가보다. 한 때는 북한과 관계가 좋았고, 다시 남한과 사이가 좋아졌지만 네팔은 집권당이 공산당인 나라다보니 남북 양쪽에 다 연이 닿아있다. 하지만 더 많은 네팔리들이 남한의 노동자로 인연을 맺고, 또 훨씬 많은 남한 사람들이 네팔을 왕래하다보니 네팔에서 지금은 남한이 더 인지도가 높은 것 같았다. 활짝 웃는 얼굴로 그는 나를 향해 엄지 손가락을 세워보이며 말한다. 'North korea is bad. South korea is good!' 하지만 내가 남한 사람이라서 기분이 좋을리가 없다. 우리의 분단현실이 그냥 씁쓸할 뿐이다.


다라파니를 지나면서 체크 포스트를 들르고, 바가르찹에서 점심을 먹었다, 우리는 토마토 스파게티를 먹었고, 파상은 달밧을 먹었다. 오늘 따라 달밧을 먹는 파상의 얼굴이 어둡다. 롯지를 떠나며 물으니 달밧의 밥이 식은 밥이었단다. 사오지에게 항의를 했고, 다시는 그 롯지에 들러지 않을 것이란다. 롯지나 레스토랑에 포터 한명이 트레커 두명을 데리고 오면 기본적으로 포터의 숙식은 무료로 제공되고 있는데 대부분의 경우 포터의 음식은 우리 트레커의 것보다 훨씬 좋았다. 우리는 보통 달밧을 먹고, 파샹은 야크고기나 계란 프라이가 덤으로 얹혀져있는 달밧을 먹었다. 보통 포터는 한 테이블에서 식사를 하지 않고 주방 한구석에서 롯지 식구들이랑 같이 식사를 하는 것 같았는데 우리는 딸에서 부터 우리가 밥을 사지 않더라도 같은 테이블에서 먹기를 종용했다. 그러다보니 늘 파샹이 무얼 먹는지 알 수 밖에 없었는데 오늘 점심을 먹은 레스토랑은 파샹에게 큰 실례를 범한 셈이었다.



힘든 하루다. 길을 따라 끝없이 올라와 다시 올려다보면 안나푸르나의 남은 높이는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간혹 마주치는 트레커들은 하나같이 쏘롱라 패스를 포기하고 되돌아가는 중이란다. 쏘롱라를 향해 가고 있는 사람은 우리 부부와 파샹, 슈리샤우르스의 부메랑롯지에서 같이 지낸 독인인 3명, 그리고 3명의 호주인이 전부다. 들리는 말로는 소롱패티와 마낭 등 쏘롱라를 가는 길목 마을에는 서른명 가량의 트레커들이 쏘롱라 패스를 시도하기 위해 대기 중이라고 했다. 그중 일부는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하고 다시 올라갔던 길을 되돌아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쏘롱라 패스가 불가능하다면 다시 불불레로 리턴해서 버스로 포카라를 거쳐 베니, 따또파니 그리고 좀솜까지 이틀에 거쳐 버스여행을 해야한다. 끔찍하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오직 일기가 좋아져 쏘롱라를 건널 수 있기를 빌 뿐이다.



첨으로 눈길로 접어들었다. 오늘의 목적지 피망이 가까워지면서 열대우림같은 수풀에 눈이 쌓혀있는 기묘한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눈을 밟기 시작하자 이제 본격적으로 겨울 안나푸르나에 접어든 느낌이 든다. 피망을 30여분 남겨둔 길에서 티벳탄 차림의 가족 무리를 여럿 만났다. 파샹이야기로는 그 중 한 가족은 틸리초 캠프에서 눈에 길이 막혀 트레커의 발길이 끊기면서 겨울을 나기 위해 저지대로 내려가는 중이란다. 오늘 만난 대부분의 네팔리들은 다 겨울을 견디기 위해 하산중인 것같았다. 마지막으로 만난 네팔리가족은 예닙곱살 되는 소녀와 그 부모다. 부모는 남루한 옷차림에 등짐을 하나씩 지고 있었고 , 아이는 떼국 떨어지는 무심한 표정의 얼굴로 눈덮인 길을 양말도 신지 않은 발로 조리만 신고 걷고 있었다. 우리와 마주친 소녀는 손을 내밀며 "Sweet! Pen!"을 읊조렸다. 순간 나는 괜한 혼란에 빠졌고 우물쩍 거리는 사이 소녀는 손을 거두고, 서운한거 하나없다는 듯 무심한 표정으로 부모를 따라 멀어져 갔다. 그 아이의 시린 눈망울이 오랫동안 나의 가슴에 남아있을 것 같다.



5시 30분이 지나 어둑어둑해질 무렵 티망에 도착했다. 티망은 사방이 눈덮인 산으로 둘러 쌓여있었다. 본격적으로 안나푸르나 안으로 들어서는 느낌과 함께 왠지 춥고 조금은 무섭기도 했다. 나중에 알았지만 너무 늦게 도착한 마을은 늘 그런 느낌이었다. 차라리 아침 일찍 출발하고, 오후에는 넉넉하게 도착해 햇살을 받고 동네를 한바퀴라도 돌게되면 그런 느낌이 들지 않았다. 티망은 해발 2200m다. 하루 일일정도 힘들었고 또 해발 2,000m에 도달한 기념으로 '락시'라는 로컬와인을 한잔씩 나누었다. 야생 과일로 만들었다고 하는데 정종맛이 났다. 달밧과 락시 그리고 네팔 담배 한개비로 길었던 하루의 여정을 마무리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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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째 비걱정을 하면서 잠이 들었다.
건기에 이게 무슨 일이람! 물소리에 흠뻑 빠져 깊은 잠이 들었다가 창문을 스미는 빛을 느끼며 놀라 깨었다. 눈을 뜨자마자 오늘 날씨가 어떤지 제일 먼저 궁금했다. 창문에 비치는 밝은 기운과는 달리 여전히 귓가에는 물소리가 맴돌았다. 이상하다 싶어 창을 열어  젖혔을 때 왠걸, 검은산과 대비되며 더욱 파랗게 보이는 하늘이 눈안에 가득찼다. 나도 모르게 '우와' 함성을 질렀다. 지난 밤 폭포와 강물과 비가 어우려져 내던  물소리를 들으며 잠이 들었는데, 밤새 빗소리가 슬그머니 빠져버린지도 모르고 아침을 맞은 것이다.
 


마당을 내려서니 롯지 주변에는 온통 조랑말이다. 롯지는 트렉커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짐을 지고 올라가는 사람들과 조랑말 무리에게도 쉬어가고, 자고 가는 곳이었던 것이다. 다이닝 룸에서 우리 부부와 독일인 트렉커 3명, 그리고 2마리의 검은 개와 하산중인 백인 트렉커 한명이 같이 식사를 했다. 그동안 마부는 조랑말들에게 옥수수가 든 자루를 하나씩 입에다 달아주었다. 입에 옥수수가 든 자루를 달고 각자 머리를 처박고 자루안에서 우물우물 아침을 먹는 모습이 너무 재미있었다. 아마 모든 조랑말이 고루 먹을 수 있도록 하는 조치 같았다.


부메랑 롯지의 사오지가 길 떠나는 우리에게 맑게 개인 하늘을 가리키며 'Clear sky! Good luck!'을 외치며 활짝 웃어주셨다. 기분 좋은 출발을 하고, 파샹이 'Short cut'이라며 제안하는 길을 벗어난 가파른 산등성을 한참을 올랐다. 그때서야 저 멀리 롯지에서 막 출발해 우리를 뒤따르는 독일인 트레커들의 모습이 보였다. 포터나 가이드 없이 2명의 남자와 한명의 여자가 모두 100리터짜리로 보이는 배낭을 지고 있었다. 큰 키에 건장한 체격 때문인지, 100리터 짜리 배낭을 지고 걷는 그들의 모습이 우리가 조그만 백펙하나 짊어지고 걷는 모습과 별반 달라보이지 않았다. 아내와 잠시 외모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보통 네팔리의 두배는 되어 보이는 저들의 저 건장한 체격만으로도 최초의 조우에서 저들은 얼마나 우월해 보였고, 또 네팔리는 얼마나 주눅이 들었을까. 외모가 주는 선입견은 어떻게 형성이 되는건지 외모가 강박이 된 한국에 사는 사람으로서 한참을 이야기를 나누며 길을 걸었다.


차가 들어올 수있는 마지막 마을인 참체에 도착했다. 얼마전까지만해도 상계까지 차가 들어왔는데 최근에 사륜짚차가 참체까지 들어올 수 있게 된었단다. 지금도 로컬버스는 불불레까지만 들어오는데, 길 공사가 진척되면서 차가 올라갈 수 있는 한계가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오래전 안나푸르나 라운드 출발점은 베시사하르였다고 한다. 해가 가고 길이 만들어지면서 라운드 출발점이 점점 북쭉 마을로 옮겨져왔다. 아직도 과정을 중시하는 서양 트레커들중 일부는 고집스럽게 베시사하르부터 라운드를 시작하기도 하지만, 결과를 중시하는 풍조는 라운드 출발점을 점점 북쪽으로 옮겨버렸다. 라운드 코스에서 실제적으로 배제된 마을들은 손님이 줄어들면서 차차 사그라들고 있었다. 베시사하르는 그나마 람중주의 수도라서 괜잖아 보였지만 불불레를 기점으로 롯지의 외관이 확연히 달라보였고, 벌써 불불레마저 기울어가는 느낌을 지울수가 없었다. 더 많은 트레커를 끌어들이기 위한 길때문에 그렇게 사라져가여하는 마을들이 생긴다는 사실이 가슴아팠다.
 

 
참체를 지나자 다시 흰눈 쌓인 산넘어에 짙은 구름이 이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비가 대수냐, 그냥 하루 더 머물면 되지!' 생각은 그렇게 하면서도 이 비가 산정에서는 눈이고, 눈이 길을 막으며 일정은 중단되고, 일정이 중단되면 다시 올라온 길을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면서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아니나 다를까 참체에서 만난 트레커들은 피상에서 눈에 길이 막혀 쏘롱라 패스를 포기하고 하산중이라고 했다. 피상에는 눈이 30~40cm나 쌓였고, 쏘롱라는 짐작하기 조차 어려울만치 많은 눈이 쌓였다고했다. 지난 이틀 내린 비가 모조리 산정에서는 눈으로 쌓인 것이다. 올라 가면서 내려오는 트렉커들을 한명 두명 만날 때 마다 걱정은 점점 현실성을 얻었다. 아직 눈을 밟지도 않았는데 벌써 멀리 눈덮인 산정을 올려다보면서 구체적으로 하산을 고려해야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


어떻게 온 안나푸르나 라운드인데 피상에서 돌아가다니... 파샹말로는 짐작할 수가 없단다. 나는 정답을 빨리 얻기를 원했고 산은 쉬 그 답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 'May be... May be...' 파생을 말끝을 흐리며 쏘롱라 패스가 불가능하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가능하다고도 할수 없단다. 일단 마낭 까지 3일 정도 더 올라가야하니깐 그때까지 바람이 눈을 쓸어가거나, 햇살이 좋아 눈이 녹거나, 그것도 아니면 쏘롱라를 넘기 위해 대기중인 트레커들이 모여 무리지어 함께 쏘롱라 패스를 시도해 볼 수가 있을 거하고 했다. 모든 것은 바람과 햇빛 그리고 운수에 달린 셈이다.


자가트 입구를 들어서는 곳에 학교가 보였다. 어제 묵은 롯지의 사우지가 학교 교사라고 했었는데, 아침에 롯지를 나와 한시간쯤 지나 티하우스에서 쉬고 있다가 그를 다시 만났다. 학교로 출근 중이란다. 그는 담배를 원했고 나는 담배를 건네며 잠시 한두마디를 나누다 시간이 없다며 먼저 출발을 했다. 바로 그 사우지가 아이들을 가르키다가 나를 알아보고 반가운 인사를 하며 손을 흔들었다. "나마스테!!" 학교 건물은 수업중인 다른 학생들이 들어있는지 아니면 그냥 실외의 햇살이 좋아 실외수업을 하는 건지 알수 없었지만 10명의 아이들 세무리가 따로 수업을 받고있었다. 그 풍경이 너무 아름다워 한참을 바라다 보았다. 저들의 가난을 뛰어 넘는 아름다움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나만의 감상에 불과한 것일까? 객관적인 행복을 평가하는 기준이 있고 그 기준에 비추어 저들의 삶이 행복하다고 할 수 있는걸까? 지금은 고난을 벗어난 자가 이제는 가진 자의 눈으로 가지는 복고적 취향일뿐일까? 이런저런 생각이 일었지만 나는 염치없이 얼굴가득 미소를, 가슴에 가득 온기를 얻고 다시 길을 걷기 시작했다.



자가트를 지나면서 조롱말 행렬이 이어진다. 조롱망은 이곳 안나푸르나의 유일한 교통수단이다. 피상을 지나 해발 3280m의 홈데에 비행장이 있어 소형비행기가 트렉커들을 싣어 나르기도 하지만 이곳에 살아가는 사람들은 비행기를 이용한 운송은 꿈도 꾸지 못한다. 쌀과 커피, 나아가 집을 짓는데 쓰일 양철스레이트며 목재까지도 사람이 직접나르거나 조롱말을 이용한다. 대여섯마리 혹은 이삼십마리의 조롱말이 무리를 지어 등에 프로판 까스통이나 석유통, 음료수나 곡식 같은 무거운 짐을 지고 가파른 산길을 오른다. 아내는 길가로 비켜서며 저 조랑말들은 전생에 무슨 업이 많아 여기서 조랑말로 태어나 저 고생을 하냐며 안스러워한다. 그렇다고 조랑말을 이끌고 길을 가는 마부의 삶이 그 조랑말보다 뭐 특별히 나을 것도 없어 보였다.


가파른 돌길을 조리를 신고 오르락 내리락거리는 마부의 잰 발걸음이 위태롭고 안스럽다. 저 마부는 또 무슨 팔라자 저 고생일까? 조롱말은 태어나면서 자신을 소유한 주인의 삶에 곧바로 종속되었겠지. 선택의 여지 없이 짐꾼 조롱말로 거친 안나푸르나를 오르락내리락 거릴 수 밖에 없었겠지. 그렇다고 조롱말 무리를 부리는 마부의 삶은 또 어떤가. 초라한 몸골, 조롱말보다 더 거칠어 보이는 발, 일본 조리같은 값싼 슬리퍼에 의지해 가파르고 날카로운 돌길을 오르내리며 자신과 가족의 생계를 잇는 그의 삶이 조롱말의 삶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거의 하루종일 조랑말 무리와 헤어지고 다시 만났다. 한번 헤어진 무리와 다시 만나기도 했겠지만 안나푸르나를 오르는 사람들보다 조랑말 수가 훨씬 많게 느껴진다. 어쩌면 그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저 조랑말이 우리 부부가 먹을 쌀과 야채를, 그리고 안나푸르나 골짜기에 터잡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식량과 생필품들을 다 나르고 있으니 말이다. 조랑말을 보고 마부를 보고 그리고 어느새 나의 눈길은 퍄샹을 향했다. 걸음을 재촉해 파샹과 나란히 걸었다. "파샹, 나는 전통 네팔리 노래를 하나 알고 있다." 파샹에게 말을 건넸다. 'Really?' 아마 파샹은 내가 어떤 노래를 알고 잇는지 이미 짐작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Resam Phiriri!"


"레쌈 삐리리"는 네팔을 한번이라도 다녀온 사람이나 최소한의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다 아는 노래다. 일명 '트레킹 송'이라고도 알려져 있는데 트렝킹 중에 포터나 네팔리 주민들이 부르는 모습도 볼 수 있고, 카투만두나 포카라의 관광지에 가면 그냥 거리에서도 들을 수 있을 만치 대중적인 노래다. 한국의 아리랑 만치 네팔리와 삶이 녹아들어있는 레쌈피리리는 네팔리의 삶과 사랑을 담고 있지만 우리의 아리랑이 그렇듯 수많은 버젼이 있다. 그중에서 트렉커들에겐 "I am a donkey. You are a monkey."라는 가사가 가장 절실하게 마음에 다가올 것 같다. 내가 이 구절을 읊조리자 파샹을 박장대소한다. 그렇게 같이 웃고 있었지만 나의 마음 한 구석이 조금은 아려왔다. 나의 딸보다 어린 스무살 짜리 청년에게 짐을 들리고 산을 걷다니!





사실 누군가에게 나 자신의 짐을 맡긴다는 것은 참 곤혹스런 일이다. 어린 시절 '김일의 레스링' 만치나 나를 사로잡았던 '타잔'을 보면서, 흑인에게 짐을 맡기고 낭만적인 정글탐험을 하는 백인을 증오했던 기억이 났다. 그런데 지금 내가 그 백인의 역할을 하고 있는것이 아닐까? 분명히 괜한 자의식에 불과할 것이다. 포터를 고용하는 일만치 네팔을 위한 일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네팔포터인권협회'인지 하는 단체에서 20kg이하로 포터의 짐을 싸라고 권장하는 데로 배낭 3개를 각각 18kg, 15kg, 5kg으로 나누어 쌌다. 파샹은 18kg배낭에 자신의 짐 2~3kg을 합쳐 20kg 전후의 짐을 졌고, 나 역시 15kg짜리 배낭에 한번씩 지친 아내의 배낭을 덤을 들다보니 사실 파샹과 나의 짐 무게 차이는 별로 없었다. 그래서 퍄샹은 아내의 배낭을 자기가 지겠다고 몇번이나 제안했고, 연신 'You are strong!'을 외치며 나를 치켜세우기도 했다.


파샹은 고향이 에베레스트가 있는 솔로쿰부의 해발 3500m에 있는 마을이란다. 루크라비행장까지는 걸어서 1주일정도 걸리고, 차가 들어올 수 있는 길까지는 한 이틀 정도 걸리는 오지 마을이라고 했다.
아직 나이는 어리지만 3~4년 전부터 포터를 하고 있고 꿈은 전문 산악인이란다. 어차피 학교를 나와도 취업할 때가 없으니 전공은 의미가 없단다. 벌써 에베레스트의 7500m, 8250m정상까지는 여러번 등정을 했고, 안나푸르나 라운드도 5번째라고 했다. 그렇게 벌어 파샹은 전문산악인의 꿈을 키우면서 여동생을 카투만두로 불러 학교를 시키고 있었다. 건실하고 믿음직그럽고, 눈치 빠르고 재취있는 파샹과 동행하게 된 것은 이번 여정에서 만난 가장 큰 행운의 하나였다.


참체에서 점심을 먹고, 마르샹디강과 나란히 길을 걸었다. 강 건너편은 깍아지른 절벽이지만 그 절벽을 깨고 길을 내고 있었다. 파샹이야기로는 벌써 3~4년째 공사중이란다. 말이 길 공사지 중장비를 볼 수도 없다. 그냥 다이나마이트와 사람의 힘을 주로 이용해 길 공사를 하다보니 진척이 없다고 했다. 머지않아 안나푸르나 라운드 코스가 차도로 대체되고 지금 걷는 이 길은 풀숲에 묻혀 사라지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이길을 따라 이루어진 마을들 역시 수풀에 묻혀가겠지.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 길 공사를 비판하고 있다. 하지만 이 또한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세태의 흐름, 시대의 변화를 무시하고 그들의 '무지'와 '탐욕'을 비난하는 사람들의 뜻이 이해는 되지만 무조건 동의만을 할 수 없었다. 저 길을 통해 아이들은 도시로 떠나가겠지만, 그래도 저 길은 그들의 꿈이 이어지는 길이고, 그들을 위한 의료와 교육이 들어올 길이기도 하지 않은가? 그들의 불편함, 고통은 공유하지 않으면서 그들이 터잡고 살아가는 자연을 보전해라고만 하는 것은 이기적인 요구가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오후 2시반이되자 목적지인 딸에 가까워졌다. 오늘은 조금 일찍 걸음을 멈추고 양말도 빨고, 쉬기로 했다. 딸로 넘어가는 가파른 언덕을 마주하니 벌써 다 온 느끼이었지만 그 언덕을 오르는 일이 그리 만만하지 않았다. 언덕에 접어들자 머릴 군이들이 나타났고 뭐라고 고함을 지르며 손짓을 해왔다. 한참 만에 파샹은 곧 건너 길공사장에서 다이나마이트 폭파가 있으니 빨리 몸을 피해라고 한다고 했다. 하지만 좁은 계곡에서 그것도 더 높은 위치에서 다이나마이트를 터뜨리면 도대체 어디로 몸을 감추라는 말인가. 오르막 길에 힘들어하는 아내를 재촉하여 땀을 뻘뻘 흘린뒤 군인들이 서있는 언덕위에 도착했다. 그 위치라면 폭파예정지보다 지대도 높고, 옆에 또다른 언덕이 막아서있기도 해서 안전해 보였다. 속속 도착하는 트레커와 네팔리, 그리고 군인들이 옹기종기 모여 폭파를 기다렸다. 산중에서 뜻하지 않은 구경거리를 만난 셈이었다. 군인들에게 물어보니 5분뒤 폭파한다고 했다. 땀을 뻘뻘 흘리고 올라왔는데 담배 한가치를 피우는 사이 땀이 가쉬고 한기가 들었다. 배낭을 열어 외투를 끄집어 내다가 보니 커피믹서가 한껏 부풀어 있었다. 고도 2,000m도 되기 전에 기압차로 인해 저렇게 커피믹서가 부풀어 오르니 고도 4천 5천에서는 커피믹서가 터지고 사람의 몸도 한껏 부풀어 오른다는 말이 실감이 났다. 트레킹 안내 간판을 읽고 있는데 갑자기 폭파는 일어났고 돌가루 먼지가 계곡을 덮고 멀리 딸쪽으로 날려가는 것을 보면서 가던 길을 마저 가기로 했다.


 5분도 걷지 않아 멀리 딸이 보이기 시작했다. '딸'은 좁은 계곡이 갑자기 넓어지면서 강물이 느려지고 모래밭이 넓게 형성된 지형에 자리잡고 있다. 강과 높다란 암석절벽사이에 형성된 모래밭에 세워진 마을이 조금은 위태롭게 느껴졌다. 우기에 강물이 넘치기라도 하면 도망갈 때도 없어 보였지만 어쨌던 사람들이 잘 살고 있으니 그런 일은 없었는가 보다. 역시 파샹의 선택에 따라 Peaceful Lodge에 짐을 풀고, 양말을 빨고, 맛있는 식사를 하고, 강물소리와 롯지 뒷편 절벽으로 부터 떨어지는 폭포소리에 빠져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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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지붕을 때리는 빗소리와 마르상디 계곡을 흐르는 물소리에 흠뻑 젖어 아침을 맞았다. 난감한 상황이다. 바람이 숭숭 지나가는 방안에 갇혀 하루를 지체하기에는 주변 상황이 너무 좋지 않다. 고산지대로 접어들려면 한참을 멀었지만 비때문인지, 계곡을 따라 흘러내리는 찬바람때문인지 어슬어슬 춥다. 사실 딱히 비를 피해 돌아다닐 만한 곳도 없어 만약 출발하지 않는다면 하루종일 롯지안에서 왔다갔다 하는 수 밖에 없다. 일단 아침을 먹고 짐을 챙긴뒤 커피를 마시며 날이 개이기를 기다렸다. 난방이 되는 곳이라면 데크에 앉아 하루종일 마르상디 강을 내려다보면서 커피나 마시며 보내는 것도 썩 나쁘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 즈음 다행이 빗방울이 가늘어지고 바람이 잦아들었다.



한국에서 미리 챙겨온 1회용 비옷이 3개 있어 하나씩 걸치고 길을 나서기로 했다. 파샹은 비속을 걷고 싶어하지 않은 눈치였지만 나의 조갑증이 그 정도의 비에 하루를 지체하는 걸 용납할 수가 없었다. 길을 나섰다. 길 양쪽으로 몇개의 롯지가 자리 잡고 있는 불불레의 골목길을 벗어나자 편안한 시골길이 이어졌다. 마르샹디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코스다 보니 길은 강과 가까워졌다가 다시 멀어지고, 멀어졌다가 다시 가까와졌다. 비가 내리는 아침 나절에 길을 가는 사람이 드물었지만, 간혹 어디 장에라도 가는 듯한 주민들과 마주쳤다. 오솔길에서 일대일로 마주치는 주민들을 외면할 수도 없는 노릇, 나도 모르게 목례를 했다. 한번 두번 마주치면서 그들로부터 돌아오는 인사는 한결같이 '나마스테!'였고 어느사이 나도 그들과 같이 합장을 하며 '나마스테!'를 자연스레 읇조리기 시작했다.


'나마스테!' - 내안의 신이, 당신 안의 신께 안부를 묻습니다. 나라마다 인사말이 다 다르지만, 내가 아는 한 '나마스테!'같이 절실한 인사말은 아직 보지 못했다. "나는 한국에서 온 여행객이고 당신은 네팔리지만 우리는 그냥 스쳐지나가며 의례적인 인사를 나누는 것이 아니다. 당신과 내가 국적이 다르고 인종이 다르고 어쩌면 재산이나 학식, 신분이나 사회적 지위가 전부 다를 지 모르지만 그 껍데기를 모두다 벗어던지고, 이 순간 오직 당신과 내안의 가장 순수한 자아가 마주친 것입니다. " 이날이 다 가기 전에 '나마스테!'가 입에 익었지만, 나는 이번 여정이 다 끝나도록 그 의미를 결코 잊을 수가 없었다.


불불레를 떠난지 한시간이 되기 전에 다시 빗방울이 굵어졌고 우리는 다행히 티하우스를 만나 비를 피하기로 했다. 커피와 블랙티 등과 간단한 과자와 음료수를 파는 1평가량의 판자집에 비때문인지 아침부터 노인과 중년의 네팔리가 차를 마시고 있었다. 트레커들이 익숙한 분들이시겠지만 비를 피해 들어 온 낯선 방문자에게 많은 관심을 보였다. 커피를 주문하고 국적을 묻는 그분들과 한국에서 가져간 과자를 나누며 동문서답식 대화를 표정으로 나누는 사이 비가 잦아 들었다. 다시 길을 나서고, 나디바자르를 지날 무렵 비가 그치고 파란 하늘과 흰구름이 걸린 산의 상큼한 자태가 눈에 들어왔다. 비옷을 벗어버리자 발걸음이 더욱 가벼워졌다. 비가 그쳐서인지 길을 따라 만나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그 사이에 어디부턴가 'Sweet!''을 외치며 손을 내미는 아이들과 마주치기 시작했다.


여행안내책자에서 네팔아이들에게 과자를 주면 충치가 늘어 결국 건강상의 문제를 일으키기 때문에, 그보다는 어려서부터 구걸 습성을 키운다는 이유로 과자를 나누어 주는 것을 피하라고 조언했다. 충분히 공감하면서도 막상 그런 아이들을 막딱뜨릴 때는 어찌 처신해야할 지 혼란에 빠졌다. 단것을 원하는 아이들의 욕구는 너무나 당연한 것 아닌가. 나중에 일어날 건강상의 문제는 또 그나름대로 해결해 나가기 위한 노력이 있어야 하고 우선은 그 아이들이 원하는 것을 제공하는 것이 옳지 않은가는 생각도 지울 수 없었다. 아이들뿐 아니라 아이를 안은 어른들까지 같이 손을 내밀 때는 솔직히 구걸이 아니라 그냥 낯선 사람의 신기한 먹거리를 맛보고 싶어하는 친근한 관심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자신의 삶의 터전을 즐기러 온 낯선 나라 사람들에게 자신이 원하는 것을 요구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지 않냐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또 내가 누리는 것을 그네들도 누리고 싶다는 권리를 주장하는 것으로도 다가왔다. 끝내 답을 내리지 못하고 우선은 가진 것을 그냥 나누기로 했다.


나디바자르를 지나 바훈단다까지는 편안한 시골길이 이어졌지만, 바훈단다의 '단다'가 언덕을 의미하듯 마지막 마을로 접어들기 위해서는 제법 가파른 언덕길을 한참 올라야했다. 파샹이 먼저 올라간 언덕길을 올라가는데 한무리의 사람들이 어떤 물체를 둘러싸고 웅성거리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무슨 일인지, 그 사람들이 둘러싸고 있는 것이 혹시 파샹인가하는 터무니 없는 걱정도 들었다. 하지만 막상 가까이 다가갔을 때 사람들 사이로 큰 소가 한마리 누워 있었다. 바로옆 언덕에서 소가 굴러 심한 부상을 입고 일어서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소는 눈만 껌뻑이고 대나무로 만든 큰 들것을 가져온 사람들은 걱정스런 표정으로 어떻게 소를 들어 나를 수 있을까 의견을 나누는 것 같았다. 부상 당한 소의 안녕을 빌며 마지막 남은 언덕길을 올라 바훈단다로 들어섰다.








바훈단다에서 점심을 주문하고 습한 겉옷을 벗어 햇빛에 늘고, 멀리 걸어온 길을 되돌아봤다. 어떻게 걸어왔는지 지나온 길이 아득하다. 다시 갈 길을 올려다보니 멀리 안나푸르나는 흰 구름속에 자신의 자태를 감추고 있다. 한시간을 기다려 나온 점심은 양이 너무 작아 '누들수프'를 하나더 시켜 먹다보니 2시가 다 되었다. 식사를 마치고 한국의 당나무같이 켜켜이 세월을 지고 마을의 공터 중심에 서있는 아름들이 나무 그늘아래서 시원한 바람을 맞았다. 걸을 때 흐르던 땀은 온데간데 없고 금방 한기가 느껴지니 출발해야할 때가 되었나보다.






 

불불레 롯지가 너무 허름했고, 또 네팔에 들어온 뒤로 샤워를 해 본적이 없었는데 파샹이야기로는 게르무의 롯지에서 핫샤워가 가능하다고 했다. 다시 물으니 그 이후의 대부분 롯지에서는 핫샤워가 가능한데 추가 비용을 지불해야만 한단다. 자주는 아니지만 그래도 집을 나선지 일주일이 다 되가고, 특히나 카트만두 먼지속을 지나 온 만치 이날은 꼭 샤워를 하고 싶었다. 해가 떨어진 계곡에 저녁어스름이 퍼지기 시작하는 오후 4시 정도 게르무에 도착했다. 퍄샹은 강건너 폭포가 보이고 계곡 위 아래로 조망이 좋은 레인보우호텔이라는 깨끗한 롯지에 묵을 것을 권유했다. 하지만 애초의 일정에 비슷하게라도 맞추기 위해 한 마을 정도를 더 올라가기로 결정했고 다음 목적지인 상계로 향했다. 게르무에서 상계까지는 지척이었다. 문제는 상계의 롯지가 대부분 형편없이 낡았고, 파샹이야기로는 음식도 좋지않다고 했다. 상계 다음은 자가트라는 마을이지만 1시간 이상 걸리는 거리라 시간적으로 좀 힘든 조건이고, 다시 게르무로 돌아가자니 짐을 나르는 조랑말 무리와 함께 한참을 내려온 깍아지른 절벽을 따라 다시 오솔길을 올라가야만했다. 결국 대안으로 상계에서 30여분 거리에 있고 두세개의 롯지가 있는 슈리샤우르라는 마을까지 더 걷기로 했다.


상계에 머물 생각으로 달려왔다가 다시 더 걷기로 하니 여벌로 걷는 걸음은 더 힘들게 느껴졌다. 아내와 마찬가지로 나도 첫날 걸음 치고는 너무 많이 걷는다는 느낌이었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슈리샤우르의 부메랑 롯지에 들어서니 단정한 외관이 마음에 들었다. 사우지(주인)를 만나 묵기로 하고, 2층 방을 구경하기 위해 올라가는 계단 끝에 덩치 큰 검정개 두마리가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순간 겁을 먹었지만, 문이 열려있던 한 방에서 개를 부르는듯한 사람 소리가 들렸고 개들은 그 방으로 쪼르륵 달려들어갔다. 개가 몰려 들어간 방에는 침대에 누워있던 백인 남자 트레커가 눈인사를 했다.




방에 짐을 풀고 내려와 쉬고 있는 사이 한무리의 서양인이 마당을 들어섰다. 하루 종일 길을 걸었지만 하루를 묵을 롯지 마당에서 첫 트레커를 만난 것이다. 마당에는 탁자가 하나밖에 없어 같이 앉아도 괜찮을지 물어왔고 혼쾌히 그들과 한 탁자에 앉게 되었다. 주고 받는 대화를 통해 그들이 독일인인 것을 알게 되었다. 의례적인 인사를 하고 나서 그들은 우리 부부의 국적을 물어왔다. 그리고 목적지 등을 묻는 한두마디의 어설픈 대화가 이어졌지만 나의 영어로는 더이상의 대화가 불가능했다. 난데없이 산 중에서 영어공부 열심히 하지 않을 걸 후회하게 되다니, 상당히 억울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촛불아래 저녁을 먹고, 파상과 한참을 그리고 롯지 주인과는 잠깐씩 영어와 한국어 그리고 몸과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고 집을 떠나온지 처음으로, 아니 인천공항 찜질방에서 샤워를 한지 처음으로 따뜻한 물로 샤워를 했다. 벌써 몇일 되었다고 김이 무럭무럭 나는 물을 보니 신기하기 이를데 없었다. 뜨거운 물에 손을 대니 기분마져 좋아졌다. 뜨거워졌다가 차가워졌다가 온도가 일정하지 않은 가스 온수기로 문고리가 제대로 붙어있지 않아 언제라도 누가 벌컥 문을 열고 들어올지 모르는 화장실 공간에서 불안한 샤워지만 너무나 가뿐하고 상쾌한 기분에 젖어 침대에 누웠다. 쉬 잠이 들지 않아 일어나 창을 여니 깜깜한 계곡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오직 소리를 통해서만 강과 폭포가 가까이 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었다. 밤이 깊어가면서 다시 빗방울이 들었다. 또 밤새 강물 소리와 폭포소리 그리고 빗소리에 흠뻑 젖어 눅눅한 아침을 맞을 것 같다는 걱정을 나누며 잠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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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신의 땅 안나푸르나로 떠납니다.
안나푸르나는 저에게 혹독한 자연의 원초적 힘이 살아있는  미지의 세계이지만,
그곳에 터잡아 살아가는 사람들에겐
나름의 역사와 문화를 일구어 가는 안락한 삶의 보금자리입니다.

많은 바같세상 사람들이 안나푸르나를 찾는 이유는 어쩌면 
안나푸르나가 간직한 원시적 생명력이 주는 어떤 힘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서구화된 문명에 적응해 살아가면서도,
나름의 고유한 문명을 일구고 살아온 사람들의 원초적 삶에 대해 목말라 하고, 안락한 삶에 겨워 그와는 또 다른 원시적 건강성에 기반한 삶에 대한
새로운 욕망에 들떠 있는 이중성이 그 이유일까 두렵습니다.

이번 여정을 통해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얻어올까 생각해 봅니다.
위대한 자연앞에 서서, 그 위대한 자연에 순응해서
작게, 낮게 살아가는 사람들과 마주해서
나는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배울 수 있을지,
무엇을 버리고 또 다른 무엇을 얻어을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12월 29일 인천공항에서 밤을 새고 30일 카트만두에 들어가
불불레서부터 트레킹을 시작 마낭을 거쳐
토롱라를 넘어 묵티낫, 고레파니까지,
다시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를 걷고 포카라에서 걸음을 멈출 계획입니다.
1월26일 인천에 돌아와 우리가족의 삶의 터전인 비나리마을에 돌아오면
세상은, 그리고 나 자신을 어떻게 바뀌었을까 궁금합니다.

2011년 12월 29일 아침 집을 나서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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