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난방은 없었지만 베시사하르 최고급이라는 호텔 투쿠체서 온수로 샤워를 하고 숙면을 취한뒤  예약한 아침을 먹기 위해 다이닝 룸으로 내려왔다. 전날 마이크로 버스 시간을 알아보고 8시 출발을 위해 7시 30분에 아침 식사를 예약해 둔 상태였다. 버스 시간에 늦지 않기 위해 배낭까지 다 챙겨 내려왔는데 호텔 종업원들은 그제사 움직이기 시작하는 눈치였다. 식사를 예약해 둔 시간을 넘기고도 전혀 서두는 기색이 없었다. 결국 시간은 촉박해지고 예약했던 메뉴를 취소하고 간단한 누들수프로 급히 아침 허기를 떼우고 호텔을 나섰다.  호텔 앞 도로에서 이내 도착한 마이크로 버스 지붕에 배낭을 싣었다. 마낭에서부터 계속 마주쳤던 호주 청년 커플도 같은 호텔에서 묵고 똑같이 아침을 기다리다 포기하고 같은 마이크로 버스에 짐을 싣었다. 


 
출발시간을 넘긴 마이크로버스는 승객에게 타라는 말도 없었고 다른 승객들로부터도 짐만 받아 지붕에 싣었다 . 짐을 싣던 버스는 우리에게 아무런 이야기도 없이 갑자기 출발해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어떤 상황인지 몰라 파샹에게 물어봐도 자기도 무슨 일인지 모르겠단다. 호주 커플은 우리를 쳐다보고 우리는 호주 커플을 쳐다보며 서로 지금 상황을 이해하고 공감하려 노력했지만 도대체 상황파악이 되질 않았다. 막 깨어나는 베시사하르 거리를 둘러보며 시간을 보냈지만 차가 떠난지 30분이 되어도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도저히 더 참을 수가 없어 파샹을 앞세워 버스매표소로 가 물어보니 별거아닐거다, 차 기름 넣으러 간것 아니냐는 확실하지 않은 답변을 전해줬다.


더이상 자세한 상황 파악을 포기하고 버스가 떠난 자리가 시야에 들어오는 반경내에서 그냥 베시사하르 거리를 구경하고 있으니 9시 30분이 넘어 우리 배낭을 싣은 마이크로 버스가 원래 떠났던 자리로 되돌아왔다. 기사도 조수도 아무런 해명이 없고 1시간 30분을 기다린 네팔리들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표정이다. 출발시간이 어떻고 승객에게 사전 설명을 해야되는것 아니냐는 식의 논쟁은 전혀 성립할 수 없는 상황이다. 포카라에 오늘 가기만 하면 되는것 아니냐는 승객들의 느긋함이 부러웠다. 나역시 출발 시간을 아무 설명없이 1시간이상 기다리게 한 것에 대한 원망보다, 그나마 도망가지 않고 버스가 돌아와준게 어디냐는 안도감이 더 컸다.

버스는 이내 출발했지만 시가지를 벗어나기까지 조수는 계속 문짝에 메달려 '포카라'를 외쳤다. 몇명의 승객이 더 탔지만 남은 좌석이 한두개 남은 상태에서 시가지를 벗어났다. 한 5분이나 달렸을까 핸드폰을 받고 통화하던 기사는 갑자기 좁은 길을 억지로 유턴을 해 다시 베시사하르로 향했다. 시내에 들어선 버스는 한참을 달려 주택가 골목까지 들어가 중년부인 한분을 태웠다. 순전히 짐작이지만 사적으로 아는 사람의 연락을 받고 승객을 더 실으러 돌아온 것 같았다. 신기하게도 승객들은 여전히 아무런 표정의 변화가 없었고 ,기사 역시 전혀 미안한 기색이 없었다. 버스를 예정시간보다 1시간 30분이나 늦게 출발시키거나, 버스의 노선을 벗어나 기사 마음대로 차를 운행해도 되는, 이 모든 것이 용납되는 네팔의 교통문화가 황당하고도 재미있었다.



베시사하르에서 포카라까지 이어지는 풍경은 슬픈 아름다움이 넘쳤다. 능선을 따라 이어지는 계단 논들, 흙먼지 날리는 길가의 낡은 주택들, 떼국물 떨어지는 아이들의 차림... 소읍을 지날 때마다 조수는 '포카라'를 외쳤고 나중에는 차 지붕까지 승객들이 올라탔다. 차창 밖으로 펼쳐진 네팔 농촌의 풍경을 사진기에 담고 싶었지만 좁아 터진 차 안에서 사진을 찍기에는 너무 힘들었다. 포카라로 가는 길에 펼쳐진 네팔 농촌의 풍경을 카메라가 아니라 내 눈을 통해 마음속에다 수천 컷이나 퍼 담았다. 그리고 나는 70년대 초반 철없던 소년으로 돌아가 한껏 뛰어 놀던 진해 장복산언저리의  닭소리, 개소리, 차소리, 아이들 소리를 듣고, 밥냄새, 똥냄새, 사람냄새 그리고 삶에서 묻어나는 모든 인간적인 요소가 뒤죽박죽 혼란스러운 속에서 애틋히 지켜나왔을 사람의 따사로운 온기를 느끼며 졸고 있었다.


버스는 베시사하르를 떠난 지 3시간만에 포카라에 접어 들었다. 포카라로 들어서는 진입로를 따라 한무리의 시위대가 지나갔다. 또 얼마를 달리니 각가지 전통의상을 차려입은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행진하고 있었는데 구릉족의 민족 축제가 열리고 있다고 했다. 드디어 활력이 넘치는 도시다운 도시, 포카라에 도착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포카라 표지판을 본지 한참을 지나서야 시내 한 복판에 버스는 섰고, 승객들 대부분은 종점이 어딘질 몰라 내리기를 망설였다. 파샹 역시 버스를 타고 포카라에 와 본적이 없는 표정이다. 조수의 알아들을 수 없는 고함소리를 듣고서야 파샹과 버스를 내리고 지붕위의 배낭을 받아내렸다. 순간 우리는 일군의 사람들로 포위되었다. 택시기사며 호텔 메니저라는 사람들이 제각각 뭐라고 외치면서 명함을 건네고 우리 배낭을 잡아 당겼다. 상황파악이 안되는 중에 파샹은 우리보다 더 당황스런 표정이다. 이들을 완전히 물리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해 보였고, 자의반 타의반으로 올라탄 택시는 우리 일행과 자칭 호텔 메니저라는 사람을 싣고 포카라의 최종 목적지 레이크사이드로 향했다. 뒤돌아보니 버스를 내렸던 거리가 Prithri Chowk였다.
카트만두보다는 그래도 잘 정비되고 쓰레기도 덜한 포카라 시내를 가로질러 트레커들의 본거지인 레이크 사이들를 향해 택시는 달렸다. 쏘롱아를 넘어 서너번 정도 포카라에 왔던 적이 있다는 파샹은 서울에 올라온 촌 아이처럼 들떤 표정이었고, 연신 고개를 두리번 거리며 도시 풍경에 빠져들었다.


택시는 이내 레이크 사이드의 한 호텔에 도착했다. 호텔의 스텝들이 대하는 것으로 비추어 볼 때 호텔메니저라며 우리와 같이 동행한 사람은 사실 이 호텔의 스텝이 아니라 그냥 거리의 삐끼였다. 그들 끼리 한참을 수근거린 뒤에야 온수 샤워가 가능한 룸의 숙박료가 1층은 8불, 2층은 10불, 3층은 15불이라며, 2층은 레이크만 보이고 3층은 안나푸르나와 레이크를 다 볼 수 있다고 했다. 나는 호텔 마당에서 배낭을 지키고 있고, 아내만 룸을 보러 올려보냈다. 이왕이면 조망이 좋은 방을 얻을 생각이었지만 황당하게도 2,3층 방은 모두 예약이 끝나버렸다고 했다. 사실 이미 레이크 사이드에 도착했으니 널린게 호텔이라 우리는 아무 걱정이 없었지만 우리를 안내한 '삐끼'는 당황스런 기색이 역력했다. 연신 'My mistake. I'm Sorry!'를 외치며 이 호텔보다 더 좋은 조건의 다른 호텔로 안내하겠다며 앞장을 섰다. 


폭설로 안나푸르나 라운드 코스가 막히면서 많은 트레커들이 포카라로 몰려와 비수기임에도 호텔이 거의 만원이라고 했다.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바로 옆에 있는 Touch Nepal Hotel에 방을 얻었다. 숙박비 1,000루피에 핫샤워가 가능하고, 학국 음식을 먹을 수 있고 한국인이 운영하는 '산촌다람쥐'가 바로 붙어 있었다. 스텝이 이끄는 데로 호텔 뒷편으로 이어진 흐름한 식당으로 따라가니 한국음식 냄새가 확 느껴졌다. 산촌다람쥐 주인장을 소개받고 다시 호텔 룸으로 돌아와 짐을 풀었다. 호텔은 단체 어린이 손님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아이들이 떼거리로 호텔 복도를 몰려다니고, 잘 보인다던 페와 호수는 아예 보이질 않았고, 안나푸르나 연봉은 산정상만 조그만하게 시야에 들어왔다.


날이 저물기 전에 서둘러 호텔을 나섰다. 산촌다람쥐에서 늦은 점심으로 돼지제육볶음을 먹고 말로만 들어오던 레이크사이드 거리를 돌아 페와 호수가를 걸었다. 포카라는 안나푸르나를 찾는 외국인 들이 꼭 거쳐가야만하는 네팔 최고의 현대 도시이자 관광의 중심지라고 했다. 하지만 현대적인 도시라고 하기에는 너무 낙후되었고 호텔 방이 동이날만치 많은 트레커들이 몰려왔다고 했지만 거리는 한산했다. 안나푸르나 산속에 오래 머물다 내려온 사람들에게 포카라는 분명 파라다이스같은 도시로 다가갔을 것이지만, 나는 아직 현대문명이 그렇게 반가울 만치 오래 산속에 있지도 않았고, 포카라를 즐길만한 마음의 준비도 없었다. 쇼핑말고는 또 무엇을 할지 망설이다가 날이 저물고, 점심때 먹은 돼지고기 제육볶음에 반한 파샹이 다시 원하는 'Korean Food'을 찾아 산촌다람쥐로 돌아왔다.


저녁을 먹고 올라간 룸에는 잘 나온다던 온수가 어느 수도꼭지에서도 나오질 않았고 전기는 사위가 어두워진뒤 한참만에야 들어왔다. 사설전기에 연결된 희미한 보조등 하나에 의지해 룸에 머물렀지만 레이크 사이드 거리는 암흑천지로 변했다. 날이 저물면서 시작한 비는 어느새 천둥번개를 동반한 폭우로 바뀌고 바람마져 거칠게 호텔 창을 두드리니 호텔 룸이 영락없는 감옥같이 느껴졌다. 레이크사이드 거리는 불빛 하나없이 완전히 문을 닫았고 우리가 머무는 호텔은 로비나 다이닝 룸이 휴식을 취할 만한 시설이 못되었다. 비가 때리는 창 넘어 번쩍이는 번개빛에 드러나는 도시의 윤곽 넘어 눈속에 묻혀있을 안나푸르나를 걱정했다. '눈때문에 안나푸르나 라운드를 포기 했는데, 이러다간 ABC(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코스 마저 포기해야되는거 아닌가?' 걱정을 안고 잠을 청했다.
반응형
반응형
 

트레킹을 떠나온 뒤 가장 잘 잤다. 한번을 침대에서 떨어지고 새벽3시에 깰 때까지 뭔가 조금은 불안하고 종잡을 수 없는 꿈속을 헤맸다. 잠도 깊고 꿈도 깊어 눈을 뜨니 갑자기 방안이 낯설고 여기가 어딘지 깨닫기에는 조금의 시간이 걸렸다. 집 나온 지 2주가 다 되어 가는데 아직 시차 적응이 안 되는 건지 아니면 고도 탓인지 늘 새벽 일찍 눈이 떠진다. 시차나 고도 탓이 아니라 저녁시간에 마땅히 할 거리를 못 찾아 초저녁에 잠이 들어서인지도 모르겠다. 저녁을 먹고 룸으로 돌아오면 추위 때문에 바로 침낭에 들어갈 수밖에 없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경우도 있었지만 들어와도 약한 조명 때문에 헤드라이트에 의지해 책이라도 보고 일기라도 적다 보면 쉬 눈도 피곤해 지고 졸리워 진다. 그러니 초저녁에 잠에 골아 떨어지고 꼭 새벽 3시면 잠이 깬다. 그때부터 이리 뒤척 저리 뒤척이면서 창이 밝아 오기를 기다린다.


하루 종일 걸을 때는 사실 아무 생각이 없다. 그냥 걷는다. 그리고 생각은 꼭 이렇게 이른 새벽에 침낭 속에서만 하는 것 같다. 어제 하루 어떤 길을 걷고, 어떤 사람들을 만나고, 어떤 풍경 속에서 보냈는지 되짚어 보고 오늘 보낼 하루의 여정을 머리 속에 그려본다. 오늘은 마르샹디강 서편을 따라 Nayagon까지 간다. 시간은 남을 것 같은데 Nayagon을 지나 Khudi까지 가기에는 너무 멀고 그 사이에는 묵을 수 있는 롯지가 없다. 그리고 내일 베시사하르를 거쳐 포카라로 간다.



창문에 엹은 새벽 빛이 비치기 시작하고 조랑말 방울소리가 은은히 들려온다. 무거운 짐을 지고 힘든 길을 올라가기 위해 새벽부터 부산을 떠는 조랑말의 울음소리가 새벽 안개를 타고 번져왔다. 조랑말 소리가 꿈과 현실의 경계에 나의 의식을 한참 붙들어 놓는다. 더 이상 침낭 속에 머물 수 없을 만치 창이 밝아오고 나서야 침대를 내려섰다.


참 오랜만에 핫 샤워를 하고, 푹 잠을 잔 덕분에 출발하는 몸이 가벼웠다. 그래도 여정에 지침 몸, 오르막이 나오면 호흡이 가쁘고 힘겹긴 마찬가지였고, 다시 내리막이 나오면 고장 난 오른쪽 4번째 발가락이 쑤시고 아팠다. 그래도 고개를 들면 흰 눈을 지고 있는 아득한 산허리에 수백 겹으로 첩첩이 쌓인 5평 다락 논 산자락이 눈에 들어오고, 산꼭대기 언덕 위에 옹기종기 부락을 이루고 살아 온 네팔리의 삶의 무게가 가슴에 다가왔다. 여행자의 몸으로 안나푸르나 산허리를 주유하는 나의 삶은 얼마나 사치스럽고, 그에 반해 저들이 지고 사는 삶의 무게는 얼마나 무거운가! 하지만 그 무거운 삶을 짊어지고 살아가는 네팔리의 터전인 안나푸르나는 또 얼마나 깊고 숭고한지 한발한발 내딛는 발걸음마다 되새겼다.


딸에서 참체까지는 순탄한 내리막길이 이어졌다. 온화한 햇살 속을 마르샹디 계곡을 따라 걸으며, 간혹 상행하는 트레커와 나마스테!’를 주고 받았다. 트레커들과 네팔리들이 겨울을 견딜 양식과 생필품을 싣은 조랑말 대열과 조우했고, 강 건너 너럭바위 위에서 놀고 있는 원숭이들과 알아듣지 못하는 인사를 나눴다. 식생은 바뀌어 바나나 같은 열대 과일들이 눈에 들어오고 강물은 점점 푸르러갔다. 눈이 끝나는 길부터는 먼지가 일기 시작했고, 길은 조랑말 똥으로 덮혀 있었다. 하지만 조랑말 똥과 먼지는 거슬리지 않았고 우리의 발걸음은 탄력이 붙기 시작할 때쯤 참체에 도착했다.


 

상행 때 점심을 먹었던 롯지에서 블랙티를 한잔하고 있는데 위에서 만났거나 같은 롯지에서 머물렀던 트레커들이 하나둘 몰려왔다. 3명의 독일인 그룹과 단독 트레킹에 나선 호주인 그리고 한국인 청년이 마을로 들어섰다. 독일인 그룹은 차를 타지 않고 베시사하르까지 끝까지 걸어갈 태세였고, 호주인은 불불레에서 상행할 때 마르샹디 동편의 구 코스를 걸었는데 그 길이 너무 이상에 남아 다시 그 길로 걸어서 불불레까지 갈 예정이라고 했다. 이틀 전 차메에서 같이 출발했던 한국 학생들은 차가 들어올 수 있는 첫 마을인 참체에서 짚을 타고 떠나 베시사하르까지 가서 다시 로컬버스를 타고 오늘 포카라에 입성할 거란다. 서로의 행운을 빌며 학생들을 싣은 차는 출발했고 우리는 학생들이 짚을 타고 지난 길을 걸으며, 이제 평생 다시 못올 것 같은 마르샹디강을 눈이 시리도록 보고 또 보며 걸었다. 참체에서 자가트까지 1시간, 자가트에서 다시 상계까지 1시간을 더 걸었다.


자가트에서 점심을 먹었다. 달밧! 파샹은 거의 매끼를 달밧만 먹었다. 물론 아침은 누들 수프 같은 간단한 메뉴를 선택했지만 점심과 저녁의 꼭 달밧이다. 달밧은 밥과 콩국, 커리와 나물 한가지로 이루어진 네팔리의 가장 보편적인 식단인 것 같았다. 콩국은 식당마다 한국의 메주콩을 재료로 하는 집이 있고, 또 팥이나 녹두 같은걸 재료로 하는 집이 있는 정도의 차이가 있었다. 커리는 감자, 야채 등의 재료의 변화에 따라 조금의 차이가 있었는데 가장 변화가 많은 것이 바로 나물이었다. 고도가 높지 않은 마을에서는 식사를 주문받고 나서 밥을 안치고, 밥이 되는 사이 텃밭에서 한국의 유채같은 것을 뜯어와 삶아서 나물을 무쳐내었다. 나물거리가 없는 곳에서는 한국의 김치와 거의 유사한 "achar"라고 불리는 저장 음식을 내어놓는다. 무우말래이나 당근, 혹은 고추같을 걸 주재료로해서 숙성시킨 아자르를 우리부부는 '네팔 김치' 라고 불렀고, 파샹은 '피클'이라고 했다. 상행길에 딸에서 맛을 본 뒤, 묵는 롯지마다 달밧을 시키면 꼭 아자르가 있는지 물어본다. 나중에는 투명 용기에 담긴 아자르가 식당 구석이나 찬장에 있는지 살피게 되었고, 훅시라도 발견하게 되면 '저게 무어냐' ' 곡 한국 김치같다' '맛좀 볼 수 있느냐'고 물었다. 한번 두번 얻어 먹고나서는 달밧에 아자르 대신 야채나물이 나와도 꼭 아자르를 추가로 얻어 먹었다. 오늘도 자가트에서 달밧에 따라 나온 갓 뜯어온 싱싱한 나물무침에 아자르까지 푸짐하게 먹고 나서 롯지를 나섰다.



상행길에 묵었던 시리사우르를 지나자 맑았던 하늘에 짙은 구름이 몰려들고 이내 한방울 두방울 비를 떨어트렸다. 파샹은 지난 이틀간의 강행군에 지쳤는지 'Hard Walking! Hard Today!"를 연신 외치며 차를 타고 싶은 눈치다. 상계에서 차를 타면 오늘 중으로 베시사하르에 도착하고 내일 점심을 포카라에서 먹을 수 있다며 계속 유혹한다. 사실 우리도 무리한 하산으로 지쳐 있는 상황에서 파샹의 유혹을 물리치기 어려웠다. 하지만 참체에서는 1인당 1200루피나 하는 차비도 만만치 않았고, 또 특별히 차를 타야 할 이유도 없어 차의 유혹을 뿌리칠 수 있었다. 사실 깍아 지른 절벽 위로 이어지는 좁고 가파르고 파이고 거친 노면의 길을 브레이크도 핸들도 기어도 믿을 수 없는 차를 타고 싶지가 않았다. 걷기 위해 온 여정을 줄이기 위해 그 모든 위험을 감수하고 굳이 차를 탈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참체에서 외면했던 차를 상계에 이르러 결국 탈 수 밖에 없었다. 마침 상계에 이르자 빗방울이 굵어지고 출발 직전의 짚 차까지 대기하고 있었다. 어쩔 도리 없이 짚에 올랐다.


상계에서 짚을 타고 불불레까지 1시간 40여분동안 죽음의 도로를 달렸다. 길을 막는 염소떼들, 잘 키운 수박 통만한 돌들이 나뒹굴고 도저히 차가 다닐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길을 짚은 잘도 달렸다. 길은 좁고 왼편은 마르샹디 강이 흐르는 깍아 지른 절벽이었지만 상행인 차와 절묘하게 교행했다. 상행 때에 강 건너편에서 절벽 위에 걸쳐있는 실낱 같은 길을 보면서 무서워서 저 길을 어떻게 차가 다니겠냐고 했던 기억이 났다. 하지만 네팔리들에게 이런 도로를 차를 타고 달리는 일은 일상적인 것이 보명해 보였다. 파샹에게 깍아지른 절벽을 가리키며 '무섭지 않냐'고 물어보자 전혀 무섭지 않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하지만 젊은 운전기사는 초긴장한 모습으로 두 눈을 번들거리며 너무나 진지하게 운전을 했다. 한번씩 핸드폰을 받는 것 말고는 최선을 다하는 것 같은 기사의 운전 실력에 기대어 차를 탄지 2시간반만에 살아서 불불레에 도착했다.


불불레에 도착하자
Check Point에 들르기 위해 나 혼자 짚에서 내렸다. 팀스카드에 확인 도장을 찍고 나니 이제 안나푸르나 라운드는 미완으로나마 종결되었다는 사실이 실감났다. 오로지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불불레서 부터 베시사하르까지는 상행 때 고물 로컬 버스를 타고 달려 온 길이다. 베시사하르에서 불불레까지 들어올 때는 이 길 역시 그렇게 무서웠었는데 이제 다시 같은 길을 따라 짚을 타고 달리는 데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상계에서 불불레까지의 길이 워낙 거칠고 위험하다보니 불불레에서 베시사하르까지의 길은 안락하다 못해 졸립기까지 했다.


오후 5시에 아침에 세운 계획보다 하루 빨리 베시사하르에 접어들었다. 차가 시내에 들어오자 마자 기사는 운전대를 놓았고 다른 사람이 차에 올라 운전을 하기 시작했다. 왜냐고 묻자 파샹은 운전기사가 너무 지쳐 다른 기사에게 운전대를 넘긴 것이란다. 사실 그 거친 길을 초긴장한 상태로 상하행 다 운전을 하다보 면 지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승객보다는 그래도 운전기사가 훨씬 더 신경이 곤두섰을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파샹은 베시사하르에 도착하자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에베레스트 중턱에서 태어나 살다가 카트만두로 나온 파샹이 산보다는 도시를 좋아하는 건 당연할 것이다. 파샹은 신나는 발걸음으로 베시사하르에서 제일 좋은 호텔이라며 Tuckche Peak Hotel로 우리를 이끌었다. 호텔비가 부담되지 않을까 걱정스러웠지만 우리의 걱정에 아랑곳하지 않고 당당하게 앞장서는 파샹을 따라 호텔로 들어섰다. 남중의 수도인 베시사하르에서 가장 좋다는 호텔이지만 낡고 초라했고 요금도 700루피(한국돈 만원)로 그리 비싸지 않았다. 4층의 룸에 짐을 풀고 베시사하르의 거리로 나섰다. 이미 해는 떨어져 초저녁 인데, 하루의 노고를 접고 집으로 돌아가는 네팔리의 분주한 발걸음이 골목 가득 넘쳐났다. 몰려다니는 아이들, 어른들의 바쁜 발걸음, 야채가게 앞에 모여든 아주머니들, 길가에 앉아 분주한 골목을 바라다보며 지는 하루 해를 아쉬워하는 할머니들 사이를 뚫고 골목으로 접어 들었다.


상가와 접한 주택가 골목에는 네팔리의 삶의 소리와 향기가 넘쳐났다
. 모퉁이마다 구멍가게가 있고, 골목은 뛰어다니는 아이들의 생동감 넘치는 목소리로 가득했다. 그리고 그 생동감을 지키고 키워준 가정의 따사로운 온기가 창문을 넘어 번져 나오고 있었다. 창에 희미한 불이 들어오고 나는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 골목을 걸으며 깊은 상념에 빠져들었다. 1960년대 말에서 70년대 초까지 내가 '국민학교'를 다니던 시절의 진해시 여좌동 재건주택의 골목 속으로 나의 의식은 빨려 들어갔다. 다시 돌아가 어른의 눈으로 봤을 때 그렇게 좁을 수 없었던 그 골목이 그 아이의 눈에는 왜 그리도 넓고 풍성했는지. 그 골목을 이리저리 휩쓸고 돌아다니던 아이들의 무리가 보이고, 웃음소리,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그 속에 낯익은 한 아이가 달려가는 모습이 보였다. 멀리서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만 놀고 들어 온나. 저녁 먹어야지!"


 

반응형
반응형


이틀째 비걱정을 하면서 잠이 들었다.
건기에 이게 무슨 일이람! 물소리에 흠뻑 빠져 깊은 잠이 들었다가 창문을 스미는 빛을 느끼며 놀라 깨었다. 눈을 뜨자마자 오늘 날씨가 어떤지 제일 먼저 궁금했다. 창문에 비치는 밝은 기운과는 달리 여전히 귓가에는 물소리가 맴돌았다. 이상하다 싶어 창을 열어  젖혔을 때 왠걸, 검은산과 대비되며 더욱 파랗게 보이는 하늘이 눈안에 가득찼다. 나도 모르게 '우와' 함성을 질렀다. 지난 밤 폭포와 강물과 비가 어우려져 내던  물소리를 들으며 잠이 들었는데, 밤새 빗소리가 슬그머니 빠져버린지도 모르고 아침을 맞은 것이다.
 


마당을 내려서니 롯지 주변에는 온통 조랑말이다. 롯지는 트렉커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짐을 지고 올라가는 사람들과 조랑말 무리에게도 쉬어가고, 자고 가는 곳이었던 것이다. 다이닝 룸에서 우리 부부와 독일인 트렉커 3명, 그리고 2마리의 검은 개와 하산중인 백인 트렉커 한명이 같이 식사를 했다. 그동안 마부는 조랑말들에게 옥수수가 든 자루를 하나씩 입에다 달아주었다. 입에 옥수수가 든 자루를 달고 각자 머리를 처박고 자루안에서 우물우물 아침을 먹는 모습이 너무 재미있었다. 아마 모든 조랑말이 고루 먹을 수 있도록 하는 조치 같았다.


부메랑 롯지의 사오지가 길 떠나는 우리에게 맑게 개인 하늘을 가리키며 'Clear sky! Good luck!'을 외치며 활짝 웃어주셨다. 기분 좋은 출발을 하고, 파샹이 'Short cut'이라며 제안하는 길을 벗어난 가파른 산등성을 한참을 올랐다. 그때서야 저 멀리 롯지에서 막 출발해 우리를 뒤따르는 독일인 트레커들의 모습이 보였다. 포터나 가이드 없이 2명의 남자와 한명의 여자가 모두 100리터짜리로 보이는 배낭을 지고 있었다. 큰 키에 건장한 체격 때문인지, 100리터 짜리 배낭을 지고 걷는 그들의 모습이 우리가 조그만 백펙하나 짊어지고 걷는 모습과 별반 달라보이지 않았다. 아내와 잠시 외모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보통 네팔리의 두배는 되어 보이는 저들의 저 건장한 체격만으로도 최초의 조우에서 저들은 얼마나 우월해 보였고, 또 네팔리는 얼마나 주눅이 들었을까. 외모가 주는 선입견은 어떻게 형성이 되는건지 외모가 강박이 된 한국에 사는 사람으로서 한참을 이야기를 나누며 길을 걸었다.


차가 들어올 수있는 마지막 마을인 참체에 도착했다. 얼마전까지만해도 상계까지 차가 들어왔는데 최근에 사륜짚차가 참체까지 들어올 수 있게 된었단다. 지금도 로컬버스는 불불레까지만 들어오는데, 길 공사가 진척되면서 차가 올라갈 수 있는 한계가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오래전 안나푸르나 라운드 출발점은 베시사하르였다고 한다. 해가 가고 길이 만들어지면서 라운드 출발점이 점점 북쭉 마을로 옮겨져왔다. 아직도 과정을 중시하는 서양 트레커들중 일부는 고집스럽게 베시사하르부터 라운드를 시작하기도 하지만, 결과를 중시하는 풍조는 라운드 출발점을 점점 북쪽으로 옮겨버렸다. 라운드 코스에서 실제적으로 배제된 마을들은 손님이 줄어들면서 차차 사그라들고 있었다. 베시사하르는 그나마 람중주의 수도라서 괜잖아 보였지만 불불레를 기점으로 롯지의 외관이 확연히 달라보였고, 벌써 불불레마저 기울어가는 느낌을 지울수가 없었다. 더 많은 트레커를 끌어들이기 위한 길때문에 그렇게 사라져가여하는 마을들이 생긴다는 사실이 가슴아팠다.
 

 
참체를 지나자 다시 흰눈 쌓인 산넘어에 짙은 구름이 이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비가 대수냐, 그냥 하루 더 머물면 되지!' 생각은 그렇게 하면서도 이 비가 산정에서는 눈이고, 눈이 길을 막으며 일정은 중단되고, 일정이 중단되면 다시 올라온 길을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면서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아니나 다를까 참체에서 만난 트레커들은 피상에서 눈에 길이 막혀 쏘롱라 패스를 포기하고 하산중이라고 했다. 피상에는 눈이 30~40cm나 쌓였고, 쏘롱라는 짐작하기 조차 어려울만치 많은 눈이 쌓였다고했다. 지난 이틀 내린 비가 모조리 산정에서는 눈으로 쌓인 것이다. 올라 가면서 내려오는 트렉커들을 한명 두명 만날 때 마다 걱정은 점점 현실성을 얻었다. 아직 눈을 밟지도 않았는데 벌써 멀리 눈덮인 산정을 올려다보면서 구체적으로 하산을 고려해야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


어떻게 온 안나푸르나 라운드인데 피상에서 돌아가다니... 파샹말로는 짐작할 수가 없단다. 나는 정답을 빨리 얻기를 원했고 산은 쉬 그 답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 'May be... May be...' 파생을 말끝을 흐리며 쏘롱라 패스가 불가능하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가능하다고도 할수 없단다. 일단 마낭 까지 3일 정도 더 올라가야하니깐 그때까지 바람이 눈을 쓸어가거나, 햇살이 좋아 눈이 녹거나, 그것도 아니면 쏘롱라를 넘기 위해 대기중인 트레커들이 모여 무리지어 함께 쏘롱라 패스를 시도해 볼 수가 있을 거하고 했다. 모든 것은 바람과 햇빛 그리고 운수에 달린 셈이다.


자가트 입구를 들어서는 곳에 학교가 보였다. 어제 묵은 롯지의 사우지가 학교 교사라고 했었는데, 아침에 롯지를 나와 한시간쯤 지나 티하우스에서 쉬고 있다가 그를 다시 만났다. 학교로 출근 중이란다. 그는 담배를 원했고 나는 담배를 건네며 잠시 한두마디를 나누다 시간이 없다며 먼저 출발을 했다. 바로 그 사우지가 아이들을 가르키다가 나를 알아보고 반가운 인사를 하며 손을 흔들었다. "나마스테!!" 학교 건물은 수업중인 다른 학생들이 들어있는지 아니면 그냥 실외의 햇살이 좋아 실외수업을 하는 건지 알수 없었지만 10명의 아이들 세무리가 따로 수업을 받고있었다. 그 풍경이 너무 아름다워 한참을 바라다 보았다. 저들의 가난을 뛰어 넘는 아름다움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나만의 감상에 불과한 것일까? 객관적인 행복을 평가하는 기준이 있고 그 기준에 비추어 저들의 삶이 행복하다고 할 수 있는걸까? 지금은 고난을 벗어난 자가 이제는 가진 자의 눈으로 가지는 복고적 취향일뿐일까? 이런저런 생각이 일었지만 나는 염치없이 얼굴가득 미소를, 가슴에 가득 온기를 얻고 다시 길을 걷기 시작했다.



자가트를 지나면서 조롱말 행렬이 이어진다. 조롱망은 이곳 안나푸르나의 유일한 교통수단이다. 피상을 지나 해발 3280m의 홈데에 비행장이 있어 소형비행기가 트렉커들을 싣어 나르기도 하지만 이곳에 살아가는 사람들은 비행기를 이용한 운송은 꿈도 꾸지 못한다. 쌀과 커피, 나아가 집을 짓는데 쓰일 양철스레이트며 목재까지도 사람이 직접나르거나 조롱말을 이용한다. 대여섯마리 혹은 이삼십마리의 조롱말이 무리를 지어 등에 프로판 까스통이나 석유통, 음료수나 곡식 같은 무거운 짐을 지고 가파른 산길을 오른다. 아내는 길가로 비켜서며 저 조랑말들은 전생에 무슨 업이 많아 여기서 조랑말로 태어나 저 고생을 하냐며 안스러워한다. 그렇다고 조랑말을 이끌고 길을 가는 마부의 삶이 그 조랑말보다 뭐 특별히 나을 것도 없어 보였다.


가파른 돌길을 조리를 신고 오르락 내리락거리는 마부의 잰 발걸음이 위태롭고 안스럽다. 저 마부는 또 무슨 팔라자 저 고생일까? 조롱말은 태어나면서 자신을 소유한 주인의 삶에 곧바로 종속되었겠지. 선택의 여지 없이 짐꾼 조롱말로 거친 안나푸르나를 오르락내리락 거릴 수 밖에 없었겠지. 그렇다고 조롱말 무리를 부리는 마부의 삶은 또 어떤가. 초라한 몸골, 조롱말보다 더 거칠어 보이는 발, 일본 조리같은 값싼 슬리퍼에 의지해 가파르고 날카로운 돌길을 오르내리며 자신과 가족의 생계를 잇는 그의 삶이 조롱말의 삶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거의 하루종일 조랑말 무리와 헤어지고 다시 만났다. 한번 헤어진 무리와 다시 만나기도 했겠지만 안나푸르나를 오르는 사람들보다 조랑말 수가 훨씬 많게 느껴진다. 어쩌면 그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저 조랑말이 우리 부부가 먹을 쌀과 야채를, 그리고 안나푸르나 골짜기에 터잡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식량과 생필품들을 다 나르고 있으니 말이다. 조랑말을 보고 마부를 보고 그리고 어느새 나의 눈길은 퍄샹을 향했다. 걸음을 재촉해 파샹과 나란히 걸었다. "파샹, 나는 전통 네팔리 노래를 하나 알고 있다." 파샹에게 말을 건넸다. 'Really?' 아마 파샹은 내가 어떤 노래를 알고 잇는지 이미 짐작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Resam Phiriri!"


"레쌈 삐리리"는 네팔을 한번이라도 다녀온 사람이나 최소한의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다 아는 노래다. 일명 '트레킹 송'이라고도 알려져 있는데 트렝킹 중에 포터나 네팔리 주민들이 부르는 모습도 볼 수 있고, 카투만두나 포카라의 관광지에 가면 그냥 거리에서도 들을 수 있을 만치 대중적인 노래다. 한국의 아리랑 만치 네팔리와 삶이 녹아들어있는 레쌈피리리는 네팔리의 삶과 사랑을 담고 있지만 우리의 아리랑이 그렇듯 수많은 버젼이 있다. 그중에서 트렉커들에겐 "I am a donkey. You are a monkey."라는 가사가 가장 절실하게 마음에 다가올 것 같다. 내가 이 구절을 읊조리자 파샹을 박장대소한다. 그렇게 같이 웃고 있었지만 나의 마음 한 구석이 조금은 아려왔다. 나의 딸보다 어린 스무살 짜리 청년에게 짐을 들리고 산을 걷다니!





사실 누군가에게 나 자신의 짐을 맡긴다는 것은 참 곤혹스런 일이다. 어린 시절 '김일의 레스링' 만치나 나를 사로잡았던 '타잔'을 보면서, 흑인에게 짐을 맡기고 낭만적인 정글탐험을 하는 백인을 증오했던 기억이 났다. 그런데 지금 내가 그 백인의 역할을 하고 있는것이 아닐까? 분명히 괜한 자의식에 불과할 것이다. 포터를 고용하는 일만치 네팔을 위한 일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네팔포터인권협회'인지 하는 단체에서 20kg이하로 포터의 짐을 싸라고 권장하는 데로 배낭 3개를 각각 18kg, 15kg, 5kg으로 나누어 쌌다. 파샹은 18kg배낭에 자신의 짐 2~3kg을 합쳐 20kg 전후의 짐을 졌고, 나 역시 15kg짜리 배낭에 한번씩 지친 아내의 배낭을 덤을 들다보니 사실 파샹과 나의 짐 무게 차이는 별로 없었다. 그래서 퍄샹은 아내의 배낭을 자기가 지겠다고 몇번이나 제안했고, 연신 'You are strong!'을 외치며 나를 치켜세우기도 했다.


파샹은 고향이 에베레스트가 있는 솔로쿰부의 해발 3500m에 있는 마을이란다. 루크라비행장까지는 걸어서 1주일정도 걸리고, 차가 들어올 수 있는 길까지는 한 이틀 정도 걸리는 오지 마을이라고 했다.
아직 나이는 어리지만 3~4년 전부터 포터를 하고 있고 꿈은 전문 산악인이란다. 어차피 학교를 나와도 취업할 때가 없으니 전공은 의미가 없단다. 벌써 에베레스트의 7500m, 8250m정상까지는 여러번 등정을 했고, 안나푸르나 라운드도 5번째라고 했다. 그렇게 벌어 파샹은 전문산악인의 꿈을 키우면서 여동생을 카투만두로 불러 학교를 시키고 있었다. 건실하고 믿음직그럽고, 눈치 빠르고 재취있는 파샹과 동행하게 된 것은 이번 여정에서 만난 가장 큰 행운의 하나였다.


참체에서 점심을 먹고, 마르샹디강과 나란히 길을 걸었다. 강 건너편은 깍아지른 절벽이지만 그 절벽을 깨고 길을 내고 있었다. 파샹이야기로는 벌써 3~4년째 공사중이란다. 말이 길 공사지 중장비를 볼 수도 없다. 그냥 다이나마이트와 사람의 힘을 주로 이용해 길 공사를 하다보니 진척이 없다고 했다. 머지않아 안나푸르나 라운드 코스가 차도로 대체되고 지금 걷는 이 길은 풀숲에 묻혀 사라지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이길을 따라 이루어진 마을들 역시 수풀에 묻혀가겠지.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 길 공사를 비판하고 있다. 하지만 이 또한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세태의 흐름, 시대의 변화를 무시하고 그들의 '무지'와 '탐욕'을 비난하는 사람들의 뜻이 이해는 되지만 무조건 동의만을 할 수 없었다. 저 길을 통해 아이들은 도시로 떠나가겠지만, 그래도 저 길은 그들의 꿈이 이어지는 길이고, 그들을 위한 의료와 교육이 들어올 길이기도 하지 않은가? 그들의 불편함, 고통은 공유하지 않으면서 그들이 터잡고 살아가는 자연을 보전해라고만 하는 것은 이기적인 요구가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오후 2시반이되자 목적지인 딸에 가까워졌다. 오늘은 조금 일찍 걸음을 멈추고 양말도 빨고, 쉬기로 했다. 딸로 넘어가는 가파른 언덕을 마주하니 벌써 다 온 느끼이었지만 그 언덕을 오르는 일이 그리 만만하지 않았다. 언덕에 접어들자 머릴 군이들이 나타났고 뭐라고 고함을 지르며 손짓을 해왔다. 한참 만에 파샹은 곧 건너 길공사장에서 다이나마이트 폭파가 있으니 빨리 몸을 피해라고 한다고 했다. 하지만 좁은 계곡에서 그것도 더 높은 위치에서 다이나마이트를 터뜨리면 도대체 어디로 몸을 감추라는 말인가. 오르막 길에 힘들어하는 아내를 재촉하여 땀을 뻘뻘 흘린뒤 군인들이 서있는 언덕위에 도착했다. 그 위치라면 폭파예정지보다 지대도 높고, 옆에 또다른 언덕이 막아서있기도 해서 안전해 보였다. 속속 도착하는 트레커와 네팔리, 그리고 군인들이 옹기종기 모여 폭파를 기다렸다. 산중에서 뜻하지 않은 구경거리를 만난 셈이었다. 군인들에게 물어보니 5분뒤 폭파한다고 했다. 땀을 뻘뻘 흘리고 올라왔는데 담배 한가치를 피우는 사이 땀이 가쉬고 한기가 들었다. 배낭을 열어 외투를 끄집어 내다가 보니 커피믹서가 한껏 부풀어 있었다. 고도 2,000m도 되기 전에 기압차로 인해 저렇게 커피믹서가 부풀어 오르니 고도 4천 5천에서는 커피믹서가 터지고 사람의 몸도 한껏 부풀어 오른다는 말이 실감이 났다. 트레킹 안내 간판을 읽고 있는데 갑자기 폭파는 일어났고 돌가루 먼지가 계곡을 덮고 멀리 딸쪽으로 날려가는 것을 보면서 가던 길을 마저 가기로 했다.


 5분도 걷지 않아 멀리 딸이 보이기 시작했다. '딸'은 좁은 계곡이 갑자기 넓어지면서 강물이 느려지고 모래밭이 넓게 형성된 지형에 자리잡고 있다. 강과 높다란 암석절벽사이에 형성된 모래밭에 세워진 마을이 조금은 위태롭게 느껴졌다. 우기에 강물이 넘치기라도 하면 도망갈 때도 없어 보였지만 어쨌던 사람들이 잘 살고 있으니 그런 일은 없었는가 보다. 역시 파샹의 선택에 따라 Peaceful Lodge에 짐을 풀고, 양말을 빨고, 맛있는 식사를 하고, 강물소리와 롯지 뒷편 절벽으로 부터 떨어지는 폭포소리에 빠져 잠이 들었다.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