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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1일 차메를 출발, 브라탕, 두쿠르포카리를 거쳐 어퍼피상에서 하루 밤을 머물고, 2월2일 가파른 오르막을 힘겹게 올라 갸루에서 점심을 먹고 나왈까지 걸어 하루를 마무리했다.



차메의 아침은 분주했다. 고산증으로 하산중인 캐나다 청년은 사우니를 통해 짚차를 알아보고 이른 아침 도망가듯 떠나갔다. 도로는 좁고 가파랐고 포장이나 가드레일은 물론 없었다. 사륜차가 아니면 다닐 수도 없는 열악한 조건인데 눈까지 얼어붙어 나같으면 도저히 그 길을 차를 타고 내려갈 자신이 없었다. 짚이 떠난뒤 사우니 이야기로도 작년에도 사람과 짐을 가득 실은 차가 수백미터 아래 마르샹디로 떨어져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등 역시나 사고가 빈발한다고 했다.  캐나다 청년은 떠나갔지만 탄촉부터 그 청년을 따라왔다는 검정개는 우리곁에 남아 있었다. 어제 저녁 롯지 복도에 잠을 자던 검정개는 롯지의 개가 아니고 그 청년을 따라 들어온 낯선 개라고했다. 낯선 개가 롯지 실내에 들어와 복도에서 잠을 자도록 버려두는 네팔리들의 동물에 대한 태도가 참 남달랐다.



길을 나서기전 롯지에서 일을 보던 13살 소녀 수니타에게 축구공과 아주 조금의 용돈을 쥐어주었다. 그 아이는 일찍 아버지를 여위고 엄마는 다른 롯지에서 일을 하고 자신도 역시 포탈라 롯지에서 심부름을 하면서 입을 들고 학교를 다니고 있다고 했다. 맑은 눈에 꿈많은 아이가 살아갈 세상이 꽃길은 아닐 지언정 제발 험하고 곡절많은 가시발길이 아니길 빌면서 롯지를 나섰다. 깔리(검정개)도 우리를 따라 길을 나섰다.

 


차메를 벗어나기위해 한바탕 법석을 떨어야했다. 우리를 따라 나선 깔리를 지나는 길목마다 지키고 있던 다른 개들이 그냥 두질 않았다. 집단으로 덤벼드는 개를 쫒고 우리 뒤로 숨어드는 깔리를 지키면서 겨우 마을을 벗어났다.  길을 걷기 시작하자 마자 탈레큐를 지났다. 우리는 숲속으로 들어갔다가 금방 나오고  조금 가파른 듯한 언덕길을 오르다가도 어느새 편안한 길을 걷고 있었다. 누구라도 지치지 않고 편안히 걷기에 딱 좋은 길이 이어졌다. 날씨 마저 최상의 날이었다. 공기는 건조하고, 하늘은 투명하도록 새파란 빛에 흰구름마저 어울렸다. 계곡을 갈라 파란 하늘이 열리고 그 너머로 설산이 얼굴을 내미는 아름다운 길은 아무리 걸어도 지칠 것 같지 않았다.   



 

차메를 떠난지 두세시간이나 지났을까 목이 마르고 잠시 쉬어 가고 싶을 때쯤 커다란 사과 과수원이 길따라 가꾸어져 있고 농장 시설이 있는 브다땅을 지났다. 오랜만에 신선한 과일향이 그리워 과수원에 딸려 있는 듯한  bhratang Tea House에서 배낭을 벗었다. 말라 비틀어진 조그마한 사과를 생각보다 훨씬 높은 가격에 사고, 예상보다 시원하고 향그러운 데다 가격까지 싼 사과쥬스를 한잔씩 나누었다.  사과농사를 짓는 입장에서 볼때 과수 상태는 볼 것도 없었지만 그 규모만은 놀랄만했다.  대규모의 농장이 소농의 삶의 터전을 흡수하는 방식이 아니라 지역 농민에게 도움이 되는 방식으로  가꾸어지기를 빌었다. 땀이 마르고 겉옷을 찾을 만치 몸이 식은 뒤 다시 걷기 시작했다.

 


 

입안에 가득 사과향을 머금고 브라탕을 출발하자마자 좁고 긴 계곡을 이루는 절벽을 깨서 만든 위태로운 길이 나왔다. 사람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 건지 어떻게 이런 절벽을 깨서 길을 만들 생각을 했을까 신기하기만 했다. 반터널같은 길을 지나 가파른 숲길을 통과하자 갑자기 시야가 넓어지고  오른쪽으로 깍아세운듯한 암벽능선이 보이기 시작했다. 디쿠르포카리에 접근하자 이 암벽 능선은 우리의 시야를 압도하는데  '스와르가 드와르'(혹은 paungda Danda)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빙하의 침식이 만든 무려 1500m 높이의 바위 한개로 이루어진 절벽으로  여기 사는 티벳사람들은 자신이 죽으면 그 바위산을 넘어 고향 티벳으로 돌아간다고 믿는다고 했다.

 

 

Dhukure Pokhari를 지나면 이날 하루의 휴식이 기다리고 있는 Pisang이지만 피상은 마르샹디 계곡을 따라 형성된 Low Pisang과 마르상디 계곡을 벗어나 북쪽 산자락에 자리잡고 있는 Upper Pisang으로 나누어져 있고, 이번에는 Upper Pisang을 택해 길을 잡았다. Dhukure Pokhari를 왼편으로 끼고 돌아, 멋진 나무다리를 밟고 마르샹디를 건너 완만한 언덕길을 잡아 3km쯤 걸었다. 

 

 

Pisang 마을을 들어서자 가파른  골목길을 타고올라 마을의 제일 높은 위치에 자리잡은 롯지에 짐을 풀었다. 빨래를 들고 데크에 나가서니 시야가 너무나 시원했다.  마르샹디 계곡아래 Low Pisang을 내려다 보고, 고개를 들어 안나푸르나 2봉을 비롯한 산군들을 바라다 보다가, 다시 눈을 돌려 '스와르가 드와르'넘어 지나온 길을 더듬었다. 그리고 오른쪽을 눈을 돌리니 우리가 넘어야할 쏘롱라로 이어지는 가는 길들이 헌준한 산들 사이에 실가락 처럼 사라졌다. 

 

 

숙소를 나와 마을 꼭대기에 있는 불교 사원에서 남은 오후 시간을 보냈다. Gompa의 역사는 알수 없었지만 마을 사람들이 기부해서 만든 절이라고 했다. 사찰내 건물의 대부분은 새로 지어진 듯 했고 오래된 절이 갖는 멋은 없어 보였다. 그래도 우리는 본전에 들어가 모두 부처앞에 절을 올렸다. 우리의 가이드 바수와 나브라즈는 흰두교 신자지만 부처와 시바가 다르지 않다고 했다. 나는 무신론자지만 그 순간에는 여기 터잡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신을 존중하고 싶었다. 그리고 십몇년을 같이 살다 네팔로 떠나오기 직전 생을 마친 우리집 강아지 초롱이의 명복을 빌었다. 롯지로 돌아와 전망 좋은 다이닝 룸에서 해지는 안나푸르나의 멋에 취해 밤을 맞았다.

 

 

하루에 600m를 높여 고도 3300m인 Upper Pisang에서 아주 가벼운 고산증이 왔다. 조금의 불면과 가슴두근거림 정도라서 걱정스러울 정도는 아니었지만 아직 갈 길이 머니 내 몸 상태의 변화에 대해 세심한 관찰이 필요해 보였다.  피상을 벗어나 수평에 가까운 길은 마르샹디의 흐름과 같이 하면서 한시간 쯤 걸은 뒤 출렁다리를 건너자 마자 길은 갑자기 가파른 상승길로 바뀌었다. 단 한번의 내리막이나 평지도 없이 가파른 오르막길은 끝없이 이어졌다. 거의 심리적 육체적 한계치에 도달할 즈음 작은 Tea House가 나왔고 우리는 갸루 입구에 도착을 했다.

 

 

우리는 잠시 차를 나누며 숨을 고른뒤 애매한 점심시간때문에 고민하다가 좀 더 걷기로 하고 출발 했다. 하지만 마을을 관통하는 골목길을 벗어나자 마자 우리는 발길을 돌려 되돌아왔다. 다음 마을까지 거리도 멀고 혹시 문을 연 식당이 없을 수도 있다는 가이드의 조언을 받아들여  엿다. 사람의 온기가 식어 한산하고 쓸쓸한 마을로 돌아왔지만 문을 연 식당을 찾을 수 없었다. 여행안내서에는 이곳 주민들이 주로 야크를 키우고 곡물을 재배하면서 오래 전에 획득한 무역영업권을가지고 여전히 무역업에 종사한다는 설명을 읽었지만 눈으로 확인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마을 입구에 들어섰을 때 우리를 붙잡던 식당으로 돌아가니 놓친 손님을 다시 받게된 사우니가 반갑게 우리를 맞았다.

 

 

뚝바를 시키고 사우니가 밀가루 반죽을 미는 동안 나브라즈는 사우니를 통해들은 마을 사정을 전했다. 갸루에는 7명의 아이가 있는데 그중 3명이 카트만두 유학중이고 이 마을도 점점 사람이 줄어 마을이 비어가고 있다고 했다. 네팔 역시 저개발상태를 벗어나기 위해 도시화를 할 수밖에 없다고 보면 산간에 형성된 갸루같은 외진 마을이 사라져가는 현상도 피해갈 수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사람도 나고 죽듯 마을 역시도 생겨나고 소멸하는 순환과정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이 당연한데도 이 마을에 사람이 줄고 있고 머지않아 마을 자체가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가슴이 아팠다.

 

 

갸루에서 나왈까지도 메마른 산자락을 따라 길이 이어졌다. 계절 탓도 있겠지만 주변의 숲은 빈약했고, 자갈 투성이 흙은 푸석거렸고, 키작은 식물들은 거친땅에 뿌리를 내리고 겨우 연명하는듯 애초로웠다. 그래도 어퍼피상 트렉을 선택하고 가파른 오르막을 올라 갸루를 지나고 다시 수평의 길을 따라 나왈까지 가는 길은 탁월한 조망을 우리에게 선물했다. 갸루를 향해 한번도 쉬지 않고 600m의 고도를 올리 때는 후회가 컸지만, 막상 갸루 이후 수평의 길을 걸으며 안나푸르나 2봉, 피상 피크, 그리고 안나푸르나 4봉을 손에 닿은듯 가까이서 마주하면서는 우리의 선택이 자랑스러웠다.  갸루를 출발한지 2시간이 안되어 멀리 나왈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왈 역시도 주변의 산과 언덕, 밭과 초지를 닮아 눈에 드러나지 않는 흙빛 마을이었다. 마을이 갸루 보다는 크고, 마을을 이루는 터전 역시 넓어 보였지만 사람의 발길이 드문 것은 전혀 차이가 없었다. 마을은 비어있는듯 조용하고 오고가는 사람의 흔적이 드물었다. 하루종일 주민을 만난 것은 손에 꼽을 만치 적었고 트레커는 단 한명도 만나지 못했다. 순전히 계절탓만은 아닌 것 같았다. 우리를 따르던 깔리도 어느 순간 사라졌다. 기회가 되면 고기를 듬뿍 넣은 볶은밥이라도 한그릇 시켜줄려고 마음 먹고 있었는데 우리의 행동이 너무 굼떴다. 더이상 기다리지 못한 깔리는 다른 인심좋은 트레커를 따라 자신의 길을 간것이 틀림없었다. 나왈의 밤은 깊고 편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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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31일 아침 Tal을 출발 카르테지나 다라파니에서 점심을 먹고 바가르찹지나 다나큐에서 길을 멈추고, 2월1일 다나큐를 출발 티망지나 탄촉에서 점심을 먹고 고토지나 차메에서 하루 일정을 마무리 했다. 



딸을 출발해 마르상디의 동쪽 강변길을 걷다가 출렁다리를 넘어 서쪽 찻길로 접어들었다. 얼마를 걷다가 다시 동쪽으로 강을 건너고 마을이 보이는 데서 서쪽으로 강을 넘어오니 카르테다. 역시  걷는 길은  옛길이 좋다. 그 길을 걸은 사람과 동물의 발자욱이 보이고, 흘린 땀내가 맡아지고, 사연 깊은 이야기가 들려 오기 때문이다. 산과 강이 만나 위태롭지만 아름다운 강과 산과 하늘빛이 조화로운 카르테를 지나 이른 점심 무렵 다라파니에 도착했다. 다라파니는 마나슬루산군과 안나푸르나 라운드코스가 갈라지는 분기점에 자리잡은 마을이다. 동쪽 계곡으로 들어가서 마나슬루 산군으로 갈까, 가던 길을 이어 서쪽으로 계속가서 쏘롱라까지 올라갈까 마음이 흔들리는 마을 다라파니에서 점심을 먹었다. 



딸 지나 다라파니까지도 그랬지만 다라파니 지나  다나큐까지 이어지는 길도 평탄했다. 중간의 바가르찹은 오래전 산사태로 롯지들이 매몰되는 사고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었지만 눈으로 보기에는 흔적을 느낄 수 없었다. 하루 종일 강을 따라 편안한 길만 걸다보니 동네 뒷산 산책 나온 듯 마음이 가벼웠다. 고산증을 느끼거나 추위를 걱정할 만치 높은 고도도 아니고, 그렇다고 너무 더워 걷기에 불편하게 낮은 고도도 아닌데다가 가파르고 험한 길도 없었다. 앞으로 하루하루 고도가 높아지고 길은 험해지고 추위와 고산증의 위험이 커지겠지만 아직까지는 실감이 나지 않아다. 



하루 밤을 쉬어갈 다나큐가 다가오자 하늘은 잔뜩 찌푸렸고 끝내  진눈깨비를 뿌렸다. 진눈깨비를 맞으며 Hotel Peacefull & Restaurant를 들어섰다. 룸에 배낭을 내려놓자마자 한기를 느끼고 다이닝 룸을 찾아 난로를 부탁했다. 네팔에서 아직까지 훨훨 타는 난로를 본적이 없었고 이 롯지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부족한 연료로 지핀 알뜰한 작은 불씨 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따뜻했다. 난로가로 모여든 중국인 커플과 우리 일행은 덜마른 빨래를 말리고, 지도를 살펴 내일의 일정을 체크하고, 난로가 전해주는 온기에 기대어 여행이 주는 행복에 취했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얼마되지 않아 계곡에 어둠이 깔리고 빗소리가 굵어졌다. 그때 갑자기 한무리의 네팔리가 조용하던 다이닝룸을 들이 닥치고  씨끌벅쩍해지면서 우리의 안식은 끝이 났다. 



룸으로 돌아와 침낭에 들어가니 자기에는 너무 이른 시간이었다. 지루한 저녁 시간을 줄이려 모처럼 책을 들었다. 혹시하면서 굳이 배낭에 넣어 온 덕분에 참 오랜만에 니이체를 읽었다. 하지만 글은 눈에 들어오지 않고 그냥 가슴만 울릉거렸다.  내 젊은 날의 꿈들이 꿈틀거리며 되살아났다. 인식에 내 삶을 온전히 받치겠다는 호기는 간데없고 생활의 노예가 되어 힘겹게 견뎌온 나의 삶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과잉 자의식과 무기력 말고는 달리 규정할 수 없는 나의 지난 세월이 이제는 후회하기에도 너무 늦었건지도 몰랐다. 남은 나의 인생을 잘 살자는 다짐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사실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남은 한가지는 그냥 있는 그대로의 내 삶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고 그런 태도가 나이가 주는 지혜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 덕분에 단잠이 들었다.



2월 1일 아침 다나큐의 Hotel Peacefull & Restaurant 을 나오니 밤새 내리던 비는 거치고 말쑥한 하늘이 우리를 맞았다. 마을을 벗어난뒤 얼마지나지 않아 가파른 숲길을 만났다. 다나큐에서 티망까지 무려 700m의 고도를 1시간 남짓만에 올려야 하니 모처럼 숨이 차고 땀이 났다. 몇구비의 비탈진 산길을 올라 시야가 시원하게 터이는 마을에 도착하니 티망이었다. 티망에서 서쪽으로 눈을 돌리니 마나슬루봉이 손에 닿일듯 바짝 다가와 있었다. 어제 내린 진눈깨비가 고도 덕분에 티망에서는 눈이되어 쌓여있고 동네 아이들이 눈썰매를 타느라 정신이 없었다. 아이들 노는 모습을 사진에 담다가 사진만으로 당이 차지 않아 어른들도 나섰다. 아이들에게 부탁해서 썰매를 빌려 바수와 라마나쉬 그리고 우리도 잠시잠깐이나마 동심으로 돌아갔다.



티망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뒤 다음 목적지인 탄촉을 향했다. 고도 3, 000m인 티망에서 탄촉까지는 300m의 고도를 내려야 하는 완만한 내리막 숲길이 이어졌다.  탄촉 직전  Evergreen Hotel & Restaurant의 눈쌓인 야외에서 따뜻한 햇살을 받으며 점심을 먹고 지난 한달간 나의 머리와 얼굴을 지켜주던 모자를 남겨두고 길을 나섰다. 계곡으로 내려가 다시 오르막을 타고 산사태로 무너져 조금은 위험해 보이는 길을 통해 마을로 들어섰다. 어떤 마을은 지나고 나서야 더 머물렀어야 했다는 미련이 남곤했는데  탄촉 마을이 꼭 그랬다. 딸이나 차메는 트레커가 붐비고 트레커를 위해 만들어진 마을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면 탄촉은 그와 반대였다.  탄촉은 주민에게는 트레커가 낯설고, 트레커에게는 주민을 마주치기가 어색한 전통적인 산간 마을로 다가왔다.  



야외에서 눈을  밟으며 점심을 먹고 출발한뒤 한시간여만에  Naar -Fu 계곡과 마르샹디강이 만나는 koto 를 지나고 오후 3시 30분에 마낭주의 수도 차메에 도착했다. 지금까지 가이드에게 숙소 선택을 거의 맡기다 싶이 해 왔는데 이날만은 우리가 롯지를 정했다. 한국에서 오랜동안 일을 해서 한국어에 능통하고 한국인의 식성과 문화를 전적으로 이해하는 사우니(여주인)가 운영하는 Potala Guest House에 짐을 풀었다. 



모처럼 한국어에 능통한 사우니를 만나니 묻고 싶은 것도 많았고 말하고 싶은 것도 많았다. 롯지의 여주인은 서울 근처 도시에서 오랜동안 일을 하다가 이명박정권 때 불법체류 노동자로 적발되어 추방당했고 지금도 한국가서 일하고싶다는 뜻을 내비췄다. 우리에게는 무척이나 친절했고 한국식 수제비를 맜있는 깍두기와 함께 내어 놓아 우리를 기쁘게 해주셨다. 안나푸르나 라운드 중에 어쨌던 한식을 먹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못했는데 배가 작아서 아쉬웠다. 



나에게 차메는 본격적인 산으로 들어가는 입구같은 마을로 느껴졌다. 차메 다음 코스인 피상만해도 해발 3300m나 되니 술과 담배를 자유롭게 할 수 있는 마지막 마을이 차메인 셈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차메에 도착하면 똥바라도 한잔하고 쏘롱라를 넘을 때 까지는 술과 담배를 절제하기로 마음먹었다. 첫 라운드 때는 그래도 나름 절제를 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이번에는 그렇지 못했다. 해발 3500m인 마낭에서 마지막 술을 마시고 해발 5400m인 쏘롱라를 넘을 때까지 담배를 계속 피워댔다.  



포탈라롯지는 밤새 정전이 되었다. 정전된 방에 일찍 올라가기도 그렇고 무엇보다 난로가 있는 다이닝 룸을 떠나기 싫어 밍거적 거렸다. 그나마 다이닝 룸은 충전지를 이용해 켜진 여린 전등이 있었다. 심한 고산증으로 쏘롱라를 넘지 못하고 하산한 캐나다 청년과 쏘롱라를 향해 우리와 같이 올라가야할 씩씩한 스페인 청년 그리고 영어에 젬병인 우리 일행이 난로를 사이에 두고 어색한 대화를 나누었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네팔 트레킹 때는 늘 밤이 길다. 이번에도 그랬다. 내가 트레킹을 할 수 있는 계절이 꼭 겨울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산이 높고 계곡이 깊어서 그렇기도할 것이지만 아마도 잦은 정전도 한몫을 하는 것 같다. 밤은 긴데 책을 보기에는 눈이 시리고, TV나 PC도 없고 폰도 와이파이가 불안전하니 마땅히 할짓이 하나도 없다. 영어가 짧으니 대화상대를  만나도 그냥 간단한 인사이상으로 대화를 이어나갈 수가 없다. 그러다보니 생각이 많아진다. 생각이 많아진다는 것은 좋게 말하며 자신에게 온전히 집중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할 것이다. 



정전마저 되어 일찍 침대에 들었지만 두 눈은 감기지 않고 의식은 말똥말똥 되살아나니  밀쳐둔 생각들이 구름처럼 밀려 왔다. 삶의 현장을 탈출해 보내게 된 두달의 네팔 망명(!)이 이후 나의 삶에 어떤 변화를 가져다 줄까, 아니면 그 자체 어떤 의미가 있을까는 의문이 일었다. 하지만 이번 여정을 통해 단지 쉬는 것 이상의 어떤 것을 바란다면 그것은 과욕이 분명한 것 같았다. 굳이 의미를 부여한다면 그냥 일상의 긴장 속에 굳은 의식의 근육을 풀수 있도록  내 자신에게 스스로 자유를 선물하는 것 정도가 전부가 아닐까 생각되었다. 하지만 단지 그 정도를 위해서 두달의 시간과 비용을 지불해도 좋은가는 물음에는 단호히 그렇다고 정리했다. 지금까지 나에게 여행보다 대단한 일상이 있어본 적이 없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 확실하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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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든 여정이다. 딸에 오후 5시쯤 도착하기 까지 쉬지 않고 걸었다. 하산이라고 느긋하게 내려올 수도 있었지만 남은 15일의 일정을 고려해 시간을 아껴야했다. 사실 남은 여정이 빡빡해서라기 보다는 욕심이 앞섰기 때문이겠지만 베시사하르에서 포카라로,  포카라에서 ABC코스를 다녀오고 다시 포카라에서 좀 느긋한 시간을 갖고 싶었다. 베시사하르로 되돌아 내려오는 여정에서는 올라갈 때보다 꼭 2배의 속도로 걷기를 강행했다. 차메에서 출발해 상행 때 하루 걸리던 티망까지 반나절도 걸리지 않고 내려왔다. 티망에서 점심을 먹기에는 너무 일러 다나큐까지 더 내려와서야 늦은 점심을 먹었다.
  



티망에 도착할 때 쯤 혹시 배가 고프지 않냐고 파샹에게 물었다. 네팔리들은 보통 아침을 먹지 않거나 간단히 해결하고 오전 11시전에 이른 점심겸 아침을 먹는다고 들었다. 그래서 포터를 위해 점심을 11시정도는 먹을 수 있도록 여정을 배려하는 것이 좋다고 한다. 혹시 오전 일정이 늦어지면 꼭 파샹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우리가 파샹을 생각하는 만치 또 파샹은 우리 생활습관에 자신을 맞추려 했고 그러다보니 12시 이전에 점심을 먹는 경우가 드물었다. 하지만 오늘은 탄촉에서 블랙티를 한잔 나눈 것을 제외하곤 간식도 휴식도 없이 계속 걸었다. 혹시라도 파샹이 배가 고프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지만, 역시 파샹은 또 'No problem!'이다.


점심을 좀더 내려가 다라파니 정도에서 먹기로 결정하고 티망을 스쳐지나갈 때 상행 때 묵은 롯지 앞을 지났다. 마당에서 롯지 사오니(주인아주머니)가 우리 일행을 알아보고 인사를 했다. 파샹과 무슨 이야긴지 짧은 대화를 나누고는 집안으로 들어갔다. 배낭을 돌담에 내려놓고 잠시 쉬고 있자니 사오니께선 파샹을 줄 차 한 잔과 책을 한 권 들고 나왔다. 퍄상이 얼굴에 가득 웃음을 지으며 나에게 책을 건넸다. 그 책은 내가 상행 때 짐을 줄인답시고 룸 탁자에 남겨두고 온 [바가바드기타]가 아닌가. 매정하게 버린 강아지가 다시 돌아왔다면 아마 그런 기분이었을 것이다. 반갑기도 하고 좀 머슥하기도 한 이중적인 감정이 일었다. '내가 잊고 간 것이 아니라 버린 것이다'고 말을 하기에는 책보기가 낯부끄럽기도 했고, 책을 챙겨놓았다가 전해주는 사오니의 정성과 그 책을 자랑스레 건네주는 파샹의 우쭐함에 찬물을 끼얹기도 싫었다. 무조건 반가운 표정을 짓고 고맙다는 인사를 드렸다. 사실 별반 반갑지 않은 [바가바드 기타]가 다시 나의 품에 돌아왔다. 어쩔 수 없는 인연인가 보다. 폭설이 와서 쏘롱라가 막히지 않았다면, 티망을 지나면서 묵었던 롯지 앞을 지나는 시간에 사오니가 마당에 나와 있지 않았다면, 그렇지 않더라도 사오니께서 불쏘시개로 태우거나 그냥 쓰레기로 버려버렸다면, 혹은 롯지 룸에 두었다가 어떤 한국인 트레커가 한국책을 발견하고 반가운 마음에 가져가 버리기라도 했다면 다시 만날 수 없는 책이 아닌가? 다시 내 손에 들어오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우연이 겹치고 또 겹쳤는지를 생각하니 [바가바드기타]를 다시는 가벼히 여길 수 없게 되었다. 억만겁의 인연이 겹쳐 나의 손에 돌아온 [바가바드 기타]를 그동안 짐이 줄어 여유로와진 배낭에 고히 모셨다.


티망에 도착하기전에 차메와 티망사이에 있는 탄촉이란 마을에서 블랙티를 한잔 나눌 때 작은 소동이 있었다. 티하우스에 배낭을 내려놓고 차를 시키는데 바로 차메서 부터 상하행 여정을 같이 하고 있는 한국 남녀 청년과 그들의 포터가 도착했다. 블랙티 6잔을 시키고 그들이 내놓은 네팔 쿠키를 나누며 담소를 즐기고 있는데 화장실 갔던 아내가 화장실 자물쇠와 키 뭉치를 변기에 빠뜨려 버렸다며 난감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지만 '돈'이 들어가야 하는 상황인 것같아 짜증이 났다. 그런데 웬걸 티하우스의 여주인은 또 'No problem'이란다. 이런저런 여행후기에서 네팔리들과의 나쁜 해후에 대한 글들을 읽은 적이 여러번 있었지만 우리가 라운드 중에 만난 인연은 하나같이 선하고 친절한 네팔리 뿐이었다. 가난한 살림에 자물쇠는 돈이 들어가야 하는 공산품으로 적어도 블랙티 몇잔을 팔아서는 살 수 없는 값이 분명했지만 여주인은 꽨찮다는 것이었다. 고맙다는 인사를 드리고 길을 떠나려다 마음에 남는 미안함때문에 아내와 잠시 답례를 고민했다. 아내는 한국에서 가져왔지만 많이 입을 기회가 없었던 자신의 추리닝 상의를 배낭에서 꺼내 티하우스의 사오니에게 드렸다. 한국돈으로 오육만원은 족히 하는 추리닝이 아까웠지만 아내는 미련이 없어 보였고, 추리닝을 받은 사오니는 의외의 선물에 너무 즐거운 표정을 지으니 잠시 들던 아깝다는 생각이 싹 사라졌다.



다나큐에 오후 1시쯤 도착해서 포탈라게스트 하우스에서 어제 눈에 젖은 옷을 햇살좋은 마당에 늘어놓고 달밧을 시켰다. 'Potala'는 티벳 불교의 성지 '포탈라궁'이나 포탈라궁이 있는 지역의 지명을 가리킬 것이다. 티벳탄이 운영하는 롯지답게 다이닝룸 한쪽에는 불교식 제단이 설치되어있고 제단앞에선 귀여운 두 아이가 놀고 있었다. 얼굴에 온통 콧물을 바르고 있어 더 귀여운 아이들이 사진기를 들이되자 이쁘게 웃어준다. 햇살이 비치는 창밖에는 맑은 하늘이 싱그럽고 눈이 가쉰 골목은 봄날의 나른한 오후 풍경같이 따사롭고 한가로왔다. 아름답고 평화로운 거리를 힘겨운 삶의 짐을 지고 상행하는 네팔리의 발길이 이어졌지만, 짐을 진 그분들이 이어가는 세상살이를 고달프게 느끼기엔 따스한 햇살과 파란하늘, 한가한 골목의 풍경이 너무 평화롭다. 같이 짐을 지고 올라가며 서로 농을 치는 네팔리의 표정에도 웃음이 한가득이다. 내 마음의 평화가 단지 투사되었을 뿐인지도 모르겠지만 그 순간 내 마음의 평화가 온 세상의 평화이기도 하다면 얼마나 좋을까는 생각이 들었다.


식사가 나오기를 기다리면서 파샹은 '태양열 온수'가 된다며 머리를 감을 것을 권했다. 머리를 감은지 한참이나 되었고 슬슬 머리가 건질거리기 시작했지만 아직은 고도가 있어 추위가 겁이 났다. 파샹만 머리를 감고 아내와 난 사양했다. 양배추 볶음이 같이 나온 달맛을 맛있게 먹고 잠시 휴식을 취하니 막 도착했을 때 와는 달리 한기가 느껴졌다. 아내와 나는 머리를 감지 않은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안도하며 길을 나섰다.


다라파니를 지나고 카르테에 접어드니 휘날리는 적기가 우리 일행을 맞았다. 반가운 마음에 파샹에게 물어보니 마오주의자가 장악하고 있는 마을이란다. 몇년 전에는 정부군과 맞선 자치주로 전운이 감돌았는지 모르지만 이제 마오주의 정당이 집권당이 된 마당이니 더 이상의 긴장감은 없어 보였다. 단지 적기는 우리 마을이 어떤 사상을 공유하고 어떤 마을의 미래를 꿈꾸는지 나타내주는 표식으로만 다가왔다. 그들이 공유한 사상이나 공통의 꿈이 가진 현실성을 확인할 수는 없지만 여하튼 마을 공동체의 역동성이 살아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마을의 공기가 달리 느껴졌다. 여전히 인적은 많지 않았지만 햇살은 더 따스하고 마을이 가진 문화적 정치적 저력이 마을의 밝을 미래를 예견케했다.



상행길에 'South korea is good!'을 외치며 엄지손가락을 세워주던 네팔리를 만났던 지점의 롯지에 잠시 배낭을 내려놓고 차를 마셨다. 한 때 꿈꾸던 해방구를 네팔의 안나푸르나 산중에서 만난 셈이니 잠시 머물며 담배라도 한가치 안할 수가 없었다. 적기가 휘날리는 마을 '카르테'를 벗어나려는 찰나 '맛있는 김치있어요' 라고 쓰인 한글 표지판이 눈에 들어왔다. 작은 표지판은 성공한(!) 자본주의 국가인 한국에서 많은 트레커들이 오고 있고 또 한국에서 노동자로 일했던 네팔리가 살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었다.  한글표지판이 보여 주는 현실과 마을 입구를 지키던 붉은 깃발이 품고 있는 꿈이 공존하는 카르테는 오래도록 기억될 것 같다.


오후 5시에 오늘의 목적지 딸에 도착했다. 역시 '김치있어요'라고 씌여 있는 마르상디 호텔 마당에는 노란 단국화가 길손을 맞이했다. 이츰 룸에 짐을 풀고 마당에 내려와 파란 벤치에 앉아 커피를 한잔하며 딸에 내리는 저녁 어스름을 맞았다. 오늘 하루 상행 이틀분 여정을 주파하며 고도 약 2,700미터에서 1,700미터까지 1,000미터를 내려왔다. 이틀동안 백설의 설국에서 초록의 겨울 아열대 지역까지 약 46km를 걸어 고도를 1,700여미터 줄인 셈이다. 이틀 연속된 강행군으로 몸은 지칠데로 지쳤지만 핫샤워를 하고, 파샹이 좋아하는 피자까지 시켜 푸짐한 저녁상에 로컬와인까지 한잔 나누니 몸이 봄햇살에 눈처럼 녹아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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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눈을 뜨니 여전히 창밖은 흐리고 가는 눈발이 날리고 있었다. 미련없이 하산하기로 마음먹고 잠을 청했지만 막상 아침을 맞았는데도 상황이 변화된게 없어 조금은 실망스러웠다. 다이님 룸에 모인 트레커들 역시 어제 올라온 한국인 남성 한분만 빼고 모두 하산을 결정한 상태다. 티벳탄 브레드를 먹고 룸으로 돌아와 하산을 위해 배낭을 꾸렸다. 예티호텔을 나서니 차메에서 동행했지만 다른 숙소에서 지내게 된 한국인 여성분은 기상이 좋아질 때까지 하루이틀 더 기다려 보겠다며 남으시겠다고 했다. 그 말을 듣자 다시 순간적으로 멈짓거렸다. 하지만 마낭에서 이삼일 지체하다 결국 쏘롱라를 넘지 못하고 하산을 하게 되면 안나푸르나 라운드뿐 아니라 ABC(안나푸르나 베이스 캠프) 코스조차 시도하지 못하게 될 수도 있어 다시 자라는 미련의 싹을 잘랐다. 서로의 행운을 빌며, 그리고 큰 아쉬움과 또 하나의 삶의 과제를 안고 뒤돌아섰다. 언제가 될지 기약할 수 없지만 살아생전에 꼭 한번 다시 쏘롱라를 찾아야만할 것같은 과업을 받은듯 발걸음이 무거웠다. 
 


마낭을 벗어나자마자 잔뜩 찌푸린 하늘이 재법 굵은 눈을 뿌리기 시작했다. 거친 바람이 계곡을 타고 불어내리고 하늘에서는 함박눈이 시야를 가릴 만치 거칠게 쏱아졌다. 지상에 닿은 눈조차 다시 바람을 타고 대지를 쓸고 지나가며 따갑게 얼굴을 때렸다. 눈발이 세어지는 만치 마음이 급해지고 발걸음이 빨라졌다. 앞서간 트레커들 덕분에 다행히 길은 눈위에 드러나 있었다. 눈을 피해 고개를 수그리고 길의 흔적만 쫒아 말없는 행군이 이어졌다. 브라카에서 잠깐 티하우스를 들러 몸을 녹였다. 티하우스의 젊은 부부와 어린 아이의 차림에 가난이 묻어났지만 애틋한 삶의 온기가 사랑스러웠다. 두잔의 히말라야 커피를 주문하고, 다시 파샹이 마시는 밀크차를 두잔 더 주문해서 모두 5잔의 차를 마시고도 90루피밖에 받지 않았다. 그렇게 하루 몇잔의 차를 팔아 어린 자식과 더불어 겨울을 나는 그들의 가난하지만 불행하지 않은 삶이 애틋했다.


티하우스의 따뜻한 부뚜막을 떠나기가 아쉬웠지만 목적지 차메까지 어두워지기 전에 도착하려면 서둘려야했다. 티하우스를 나와 뭉지와 홈데, 피상까지 단숨에 내달랐다. 올라올 때 묵었던 피상의 틸리초호텔에서 점심을 먹고, 체력을 장담할 수 없어 다른 트레커들보다 먼저 일어나 출발했다. 한시간 정도 걷다가 쉬기를 반복하다보니 늦게 출발한 한국인 학생들이 우리를 추월했다. 거침없이 내리는 눈은 배낭이며 어깨며 머리며 할 것없이 수북히 쌓였다가 무너져 내렸다. 그런데 목덜미에 쌓인 눈이 속을 썪였다. 배낭과 등사이에 흘러든 눈이 체온으로 녹아 옷안으로 흘러들어왔다. 축축해진 등이 당장은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몸에 열이 나도록 걷고 있을 때는 별게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혹시라도 중간에 걸음을 멈추게 된다면 급격히 체온을 떨어트릴 수 있기 때문에 계속 신경이 쓰였다.


눈발은 옅어졌다 다시 강해지기를 반복했지만 하루종일 멈추지 않았다. 퍄상은 틈 날때마다 확짝 웃으며 "Goog Decision! We are Lucky!"를 외쳤다. 마낭에 머물렸다간 어쩌면 올라가지도 내려오지도 못한채 몇일동안 갇혀버릴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대단한 폭설이었다. 평생 한번도 보지 못한 거친 눈보라 속을 하루종일 걸었다. 그나마 오후부터는 마음도 조금 풀리고 자신감도 붙으면서 폭설이 내리는 안나푸르나 진풍경에 빠져들었다.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안나푸르나의 설경을 두눈에 가득 담고 아내와 눈만 마주치면 "우와 죽인다!"를 백번도 더 외친것 같다.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걷는듯 신비롭고 장엄한 풍경 속에 한 생명으로 들어와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고맙게 느껴졌다.


폭설 속에도 마낭을 향해 올라오는 트레커들을 만날 수 있었다. 한두명씩 올라가는 트레커들도 서너 팀 만났지만 한번은 7~8명 되는 한팀의 한국인 트레커들과도 만났다. 올라가는 분들은 위의 상황을 물었고 우리는 그분들의 행운을 빌었다. 한번은 네팔 트레킹을 몇 번 하셨다는 비슷한 연배의 한국인 남자를 만났다. 그분은 나의 배낭이 무거워 보인다며 포터에게 왜 더 많은 짐을 지우지 않냐며 물어왔다. 그분이 보시기에 내가 너무 지쳐보이거나 약해보였는지 모르겠다. 아뭏튼 그분의 나에 대한 선의에 고맙다는 인사를 드리고 헤어졌다. 나는 파샹을 쳐다보고 눈웃음을 보냈고, 파샹은 무슨 영문인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어쩌면 고산지대에 살면서 어려서부터 무거운 짐을 져 나르던 네팔리들이 우리같은 약골에 비해 두세배의 짐을 져 나를는게 당연한 건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나는 파샹이 고용된 포터라기 보다는 라운드 내내 그냥 동행길의 친구로 남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고, 지금까지 그는 충분히 좋은 그 역할 다 하고 있었다.


피상을 떠나 어떻게 걸었는지도 모르게 디카리포카리와 브라탕 탈레규를 거쳐 차메에 도착했다. 아직 어둠이 내리기 전인 5시 반에 하루의 강행군이 끝났다. 이틀 걸려 올라갔던 거리를 하루만에 내려온 것이다. 올라갈 때 묵었던 마낭주의 수도 차메의 같은 숙소인 마르상디 만다라호텔에 지을 풀었다. 벌써 도착한 트레커와 네팔리들이 다이님룸에 가득했다. 타오르는 장작난로를 둘러싸고 서너명의 호주청년들, 1명의 일본인 산악인과 너댓명의 가이드와 셀파들, 그리고 한국인 학생과 포터가 다이닝룸을 채우고 있었다.


일본인 산악인은 오늘 지나온 마을 피상을 내려다보는 해발 6090m의 피상피크를 등정하고 막 내려왔다고 했다. 그는 많이 지쳐보였고 거의 주변에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은채 거친 숨을 쉬며 자신의 육체적 변화에 의식을 집중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전문산악인으로 많은 산들을 등정했고, 이번에는 혼자서 세명의 셀파와 같이 피상피크를 올랐단다. 알고보니 피상피크는 피상에 있던 한국인 위령비에 새겨진 고인들이 등정하다 사고를 당한 바로 그 산이었다. 그의 나이는 60살이라고 했다. 그 연세에 만만하지 않은 정상을 등정하고 왔으니 그의 지친 모습과 주변에 의식을 빼앗기지 않고 자신에 집중해 있던 모습이 이해가 되었다. 같이 했던 셀파들은 모두 큰일을 막 치룬 사람 특유의 의기양양함과 조금은 들떤 모습이었다.


7시가 넘어 사면이 어둠에 둘러쌓여 깜깜하게된 뒤에야 마낭에서 비슷하게 출발했던 3명의 독일 트레커가 도착했다. 같이 피상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우리 보다 늦게 출발한 그들이 보이지 않아 걱정이 되었지만 윗마을 어딘가에 숙소를 잡아거니 생각하고 잊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어둠이 덮친 위험한 길을 마다않고 차메까지 강행군을 한 셈이었다. 눈을 뒤집어 쓰고 추위에 지친 그들을 위해 글거리는 난로가에 모여 앉아 얼굴이 발갇게 익은 우리는 모두 일어나 환호를 질러주고 박수를 쳤다. 3000m이상의 고도에서 그것도 한치앞이 안보이는 폭설을 뚫고 하루에 800m의 고도를 줄이며 28km를 걷는 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독일인 트레커 중 형인 사람은 이번이 9번째 네팔 트레킹이라고 했다. 마지막 까지 마낭에서 쏘롱라로 올라갈 것인지 아니면 돌아 내려갈 것인지 갈등할 때 그의 판단은 나에게도 중요했다. 그는 혼자라면 쏘롱라 패스를 강행할 생각이었지만 첫 트레킹에 고산증때문에 두통에 시달리는 동생과 재수씨와 같이 강행하기에는 자신이 없어 하산을 결정한다고 했다. 우리에겐 포터 파샹의 판단이 더 중요했지만 트레킹 베테랑인 그의 판단도 무시할 수 없었다.


저녁을 먹으며 오늘 수고한 파샹을 위해 네팔 막걸리인 '창'을 시켰다. '창'은 곡물로 빗은 술인데 메뉴에는 'Local Beer'라고 나와 있었다. 맥주라고는 하지만 우리나라 막걸리와 술의 색이나 맛이 비슷했다. 아내와 나도 한잔씩 마셨는데 이날은 힘든 여정때문이기도 했지만 상행 때의 긴장감이 사라져서인지 거의 모든 트레커들이 '창'과 '락시'를 주문했다. 파샹은 전문산악인이 꿈이다보니 체력을 관리하기 위해 담배도 피우지 않고 술은 좋아하지만 딱 한잔 이상 마시지 않는다고 했다. 술값 때문인지 아니면 술을 절제하기 위해선지 모르지만 파샹은 늘 그 한잔을 한모금 한모금 맛을 음미하면서 아끼며 마셨다.

다이닝룸의 온기가 아쉬워 쉬 방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한참을 파샹과 우리가 오늘 얼마나 좋은 결정을 했는지, 우리는 얼마나 운이 좋은 사람인지 되뇌이며 건배를 했다. 힘든 여정을 잘 견뎌낸 아내와 자칭 'Strong Man'인 나 그리고 우리 부부의 길동무가 되어준 파샹은 서로를 치켜세우고 격려하며 또 건배를 했다. 그리고 파샹이 궁금해하는 한국에 대해, 내가 궁금해 하는 네팔에 대해 이갸기를 나누었다. 파샹은 자신은 부자를, 권력자를 혐오하는 마오주의자라고 고백했다. 나 역시 나의 정치적 입장과 한국의 정치상황, 네팔의 정치상황에 대해 짧은 언어와 식견으로 혼동스런 대화를 주고 받으며 밤이 깊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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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부터 피자를 먹고 830 마르샹디 만다라 호텔을 출발했다. 마을이 아침 추위에 얼어붙어 있는 시간, 멀리 산정은 눈부신 햇살로 깨어나고 있었다. 차메를 벗어나면서 아내와 그리고 다시 퍄상과 기념 사진을 찍고 눈 쌓인 침엽수 숲길로 접어 들었다. 눈다운 눈이 쌓여있는 지대로 접어드니 길을 걷는 느낌이 색다르다. 고개는 자꾸 아래로 향한다. 쌓인 눈을 보고, 눈 밟는 소리를 들으며 가파른 절벽을 아슬아슬하게 깍아 만든 조랑말 길을 걸었다. 다시 숲을 만나니 '설국' '닥터지바고'의 장면들이 뜬금없이 기억났다. 숲 속에서 만난 눈은 마당이나 길에서 만나던 눈과 기억을 되살리고 상상력을 자극하는 힘이 달랐다. 그냥 이렇게 눈 덮인 숲 속을 하루 종일 헤매도 지치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예정대로라면 점심을 브라탕에서 먹고 오후 일찍 처음으로 3,000m이상 고산지대 마을인 피상에 도착해야 했다. 하지만 여정이 예정대로 착착 진행되기만 한다면 여행의 묘미는 반감될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점심을 먹기로 한 브라탕에는 영업을 하고 있는 롯지가 하나도 없었다. 아니 마을에는 한 명의 주민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이 폭설에 영업은 고사하고 자신이 먹을 양식을 조달 받는 것 조차 힘든 상황일 것이다. 겨울 한철 산을 내려와 배를 채우고 체온을 보전하는 것도 쉽지 않겠지만 그렇다고 고스란히 겨울을 나기에는 더 힘들었을 것이다. 겨울 동안 집을 떠나 목숨을 부지하는 일은 그들에겐 선택의 여지 없는 생존 방식인지도 모르겠다. 겨울 비수기... 생존마저 쉽지 않은 주민들은 아이를 앞세우고 최소한의 살림만 챙겨 하산을 한다. 마을은 비고 혹 지나는 트레커만 마을에 인기척을 남긴다. 알 수 없는 일이다. 네팔리들이 떠난 자리에 왜 문명을 자랑하는 선진국(!)의 호사로운 트레커들이 발길을 디미는지...

 


브라탕에서 점심을 먹기로 한 계획은 깨어지고 다시 길을 걸었다. 파샹은 하산중인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선 다음 마을인 디쿠르 포카리에 문은 연 롯지가 하나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브라탕에 도착할 때는 고프지도 않던 배가 고파지기 시작하고, 괜히 조갑증이 들었지만 다행히 디쿠르 포카리까지 가는 길은 완만하고 그리 길지 않았다. 오후 1가 조금 넘어 디쿠르 포카리에 도착했다. 디쿠르 포카리에서 먹은 식사는 최악이었다. 식재료가 넉넉하지도 않았겠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는 트레커들에게 충분한 질의 음식을 서비스할 이유도 없었는가 보다. 달밧의 밥은 식은 밥을 다시 뎁힌 것이 분명해 보였고, 따라 나오는 찬들도 부실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배가 고팠다는 사실이지만 결국 다시 길을 떠나는 즈음에 포터들이 롯지 주인에게 항의하는 사단이 났다. 거기다가 메뉴에다가 스티커로 붙여 올린 가격을 적어놓은 것도 문제가 되었다고, 먼저 출발한 우리에게 뒤에 출발해 다시 만난 트렉커들이 알려주었다. 어차피 한번 스쳐 지나가는 길인데 우리는 실망할 것도 서운한 것도 없었지만 늘상 다녀야 되는 포터들에겐 롯지의 그런 처사가 참기 어려웠나 보다.



불불레서부터 차메까지는 다른 동행 없이 우리부부만 걸었는데, 오늘 처음 차메에서 만난 트레커들과 동행이 되었다. 특수학교 선생님이신 학국인 여성분, 인도에서 왔다는 한국 청년, 제주에서 왔다는 한국 여학생이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말벗이 되었고, 차메의 롯지에서 만난 호주인과 이번 여정에서 제일 처음으로 만났던 독인인들도 그룹이 되어 조금은 위험해져 가는 눈길을 같이 걸었다. 혹시라도 시야에서 멀어지면 잘 오고 있는지 뒤돌아보게 되고, 앞서가다 쉬고 있을 때 도착하기라도 하면 서로 반가운 얼굴로 맞아주는 관계만으로도 여정의 피로가 줄고 낯설고 깊은 숲이 주는 무서움도 잊을 수 있었다.


디쿠르 포카리를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오후 3 30, 목적지인 피상에 도착했다. 드디어 처음으로 3,000m 고지 마을에 도착한 것이다. 피상은 Upper Pisang Low Pisang으로 나누어져 있는 제법 큰 마을인데 동행 중 한 분만 Upper Pisang으로 올라가고 나머지 모두는 Low Pisang Tilicho Hotel에 짐을 풀었다. 듣기로는 오래 전부터 적기가 휘날리고 있었다는 겨울 피상은 인적마저 드물어 활기라곤 없었다. 멀리 Upper Pisang에서 내려다 보는 마을 풍광이 너무나 아름다웠다고, 일찍 짐을 푼 한국 청년은 Upper Pisang까지 산책을 다녀와서 전해주었다. 우리 부부는 추위에 쫒겨 가까운 마을 길만 잠깐 산책하고 돌아왔다. 내려다보는 마을 풍광이 아름답다고는 했지만 올려다보는 마을풍경 역시 너무나 아름다웠다. 지금도 이렇게 좋은데 풀이 돋고 아이들이 골목을 누비며 뛰어다니는 계절이 오면 얼마나 더 아름다울까 생각하니 언제 다시 한번 더 오고 싶은 욕심이 일었다.


바깥 추위를 듬뿍 안고 다이닝 룸으로 들어섰다. 롯지 주인은 다이닝 룸에 막 난로를 피우고 있었다. 차메서 부터 롯지에 난로를 피우기 시작했는데, 고도가 높아지는 그만치 추워지고 또 트레커의 밀도가 높아졌기 때문인 것 같았다. 다이닝 룸에서 저녁 식사를 기다리며 낯설진 않지만 아직은 서먹한 사람들과 하나의 난로를 사이에 두고 둘러 앉았다. 호주인 3, 독일인 3명 그리고 우리 부부를 포함한 한국인 5명이 둘러앉았다. 한국인 사이에는 벌써 서먹함이 사라진지 오래지만 거의 대화를 나누지 못한 외국인들은 그렇지 못했다.

호주인 3명은 부자 지간이라고 했다. 1995년에 왔던 트레킹의 기억을 아들에게 나눠주고 싶어 장성한 두 아들과 함께 다시 안나푸르나를 찾았단다. 독인인은 두 형제와 아우의 아내 사이인데, 형은 이번이 9번째 네팔 여행이라고 했다. 동생과 제수씨는 첫 안나푸르나 여행인데 형의 권유로 동행하게 되었단다.


각자의 여행 동기는 다르겠지만 롯지의 난로가에 앉아 있는 서양인 트레커들에게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었다. 모두 책을 들었다는 것! 독인인 세분도 책을 읽고 있었지만 호주인 부자는 조금 색달랐다. 호주인 아버지는 톨스토이의 [안나카네리나]를 읽고 있었다. 두꺼운 책인데, 바로 그 책을 15여년 전 네팔 여행 때 들고 다니며 읽었다고 하셨다. 그 말씀을 확인이라도 하시듯 호주인 아버지는 책갈피에서 그때 받았던 영수증 하나를 찾아내어 우리에게 보여주셨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받은 상장을 엄마에게 내보일 때보다도 더 뿌듯한 표정이었다. 그 표정 뒤에 지난 세월 동안 쌓았을, 인생의 애환을 얼마나 많이 감추고 있을까? 그의 아내는 어떤 사람이고 그리고 지금 어디에 있는지, 왜 동행하지 않았는지, 그리고 그 세월 동안 그는 어떤 일을 하면서 어떤 사람들을 만나고 또 어떤 삶을 살았을까? 그리고 그 세월을 되돌아 보는 그의 마음에는 어떤 서정이 물들고 있을까? 모든 게 궁금했지만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의 큰아들은 [Empire: How Britain Made the Modern World]를 읽고 있었다. 제목만 들어도 골치가 찌근거리는 책을 트레킹의 동반자로 선택한 그의 취향이 유별나 보였다. 여행 때는 평소에 읽히지 않던 두꺼운 책을 들고 떠나라는 누군가의 조언이 생각났다. 그땐 그냥 우스개 소리로만 여겼는데 진짜 그는 그런 신조를 받드는 사람을 만난 셈이었다. 그리고 아우는 카뮈의 [이방인]을 읽고 있었다. 그냥 보기에 좋았다.


난로가에 둘러앉아 모두 책을 읽고 있는 사이 이번 여정에 같이했다 티망에서 버린 [바가바드 기타]를 아쉬워 하며 나는 대책 없는 상념에 빠져들었다. 나의 상념은 종횡무진 흐트러지고, 의식의 시간조차 무너졌다. 모든 기억의 직선과 곡선이 자신의 고도를 잃고 엉켜버렸다. 오직 책과 연관된 기억의 타래만이 끝없이 이어졌다. 고등학교 시절 학교공부에 완전히 흥을 잃고 밤새 읽던 책들, 결국 학교생활을 접고 방구석에 처박혀 읽어대던 책들, 그리고 정말 책을 읽어야 했던 대학시절 나태한 생활 속에서 간간히 잡았던 책들이 기억나면서 그 책들을 통해 접한 세상의 이야기들, 그 책을 통해 만들어나갔던 내 인생의 꿈들, 삶의 의미들을 반추했다.


책을 좋아하던 소년 시절, 책이 열었던 새로운 세계에 매혹되었고 그리고 언젠가는 다시 어른의 눈으로 꼭 다시 읽겠다고 다짐했었다. 하지만 세월에 침식된 기억은 다시 읽고 싶었던 책들의 목록마저 깡그리 잊어 버렸다. 누구나 한번쯤 읽고 던져버렸을 [이방인]을 성인이 되어 다시 읽고 있는 사람과 마주앉아 나는 그 책을 읽던 소년의 눈에 세상을 다시 둘러본다. 이제는 책과 거리가 먼 삶을 살면서 세상에는 책보다 더 중요한 것이 많다는 핑계를 얻었다. 하지만 책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라고 여기는 것들 조차 행하지 못하는 삶을 살면서 늘 그리움으로 남아있는 인식의 목마름은 회피할 수 없었다. 여행 중에 만난 사람들과 그들이 들고 있는 책을 보면서 나는 내 삶을 끌어가는 가치들을 되돌아보고 나의 사는 방식, 나의 세상에 대한 처신을 뒤돌아본다.



여행은 익숙한 것들과의 작별이란다, 물론 한시적이지만! 나는 이번 여행을 통해 '' 자신으로부터 가능한 멀리 벗어나 멀리 있는 를 바라다 보고 싶었다. 지금의 나를 이루는 시간 속에서 남은 상처, 편견, 편향, 나쁜 기억들 그 모든 것으로부터 여행기간 동안만이라도 나 자신을 놓아주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지금 이 시간 자유로운가 스스로 묻는다. 낯선 길, 낯선 마을, 낯선 사람들 속에서, 나의 취향과 다른 음식을 먹고 익숙하지 않은 언어로 대화를 나누지만 잠시 잠깐 잊혀지는 익숙한 일상은 늘 나의 뇌리를 따라다닌다. 그나마 한정된 시간이 지나고 나면 나는 다시 나의 익술한 삶속으로 돌아갈 것이다. 하지만 여행이 준 환희의 기억을 가진 나는 이전의 내가 아닐 지도 모르겠다. 집 떠나온지 9, 안나푸르나를 걷기 시작한지 6일이다. 이제 서서히 안나푸르나의 모든 것에 익숙해 지고 있다.


호사로운 여정이다. 포터 퍄상의 극진한 서비스와 걷고, 먹고, 놀고, 자는 하루의 일과가 길을 따라 이어진다. 벌써 6일째. 아직 이번 여행에 주어진 시간은 많다. 이제 쉰! 아직 네 인생에 주어진 시간도 많다. 이번 여행의 기회를 준 모든 사람, 모든 운명에 감사한다. 그리고 응당 세상을 향해 그 고마움을 표해야 할 것이지만, 우선은 나의 여정이 나의 아내, 나의 포터 그리고 숱하게 만난 트레커와 내가 거쳐 지나간 모든 마을, 모든 롯지의 사람들에게 좋은 느낌, 작은 기쁨, 한 세상을 더불어 살아가는 같은 생명으로서의 연대감, 연민 같은 것이 남았으면 좋겠다. 관광객이 쓸고 지나간 자리에 나뒹구는 맥주 캔, 과자봉지, 담배꽁초, 그리고 무시당했다는 불쾌감, 욕망의 자극, 부러움이나 열등감, 시기심... 그런 나쁜 흔적을 남기지 않았기를 네팔리의 신, 티벳탄의 신들께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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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날 마신 락시 한잔이 다 얼굴로 갔나보다. 일어나자 마자 얼굴을 만져보니 내 것이 아닌듯 퉁퉁 불어있다. 한잔의 술이 이렇게 대단한 걸까? 아니면 일종의 고산증일까. 티망의 고도는 고작 2,270m인데 벌써 고산증이 올리는 없다. 순전히 술한잔 때문인 것 같다. 아직 고산이라고 하기엔 멀었지만 어제는 그래도 가파른 길때문인지 걷는데 힘이 부치기 시작했다. 그래서 출발전에 최대한 짐을 줄여보려고 이것저것 뒤척여보지만 마땅히 버릴 것이 없다. 다 욕심때문이겠지만 그래도 여정의 초입부터 너무 많이 버렸다가 나중에 필요한 사태가 오면 어쩌나 걱정이 든다.  몇종류의 상비약중 오래된 것은 버리고 쓸만한 잡동사니는 롯지에 남기기로 한다. 그래봤자 무게로 몇백그램이상 되지 않는다. 다시 짐을 뒤척여보니 마지막 짐은 역시 책이다.


[바가바드 기타]!  책표지 안쪽에 1985년에 구입한 걸로 기록되어 있다. 인도철학사 수업 때문에 구입한 책인데 작고 가볍다. 그래서 이번 여정에 동행하게 되었는데 벌써 짐으로 느껴진다. 네팔이 흰두교국가고 인도 문화권이라는 생각에 들고 온 책인데 영 정이 들지 않는다. 저녁 때마다 몇번 펼치기는 했지만 읽히지가 않았다. 읽은지 26년이나 지난 책을 그것도 까마득히 잊고 살던 인도의 경전을 읽는다는 것은 애시당초 불가능했다. 우파니샤드, 절대 지혜, 아르주나와 크리쉬나, 브라만과 아트만, 우주, 궁극적 존재... 눈에 들어오는 단어마다 다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같이 낯설고 생뚱맞다. 안나푸르나가 있고. 그 언저리에 살아가는 삶들이 있고, 그 산속을 걸으며 그들의 삶과 나의 삶을 생각하는 지금 브라만이나 우주, 궁극의 지혜는 너무 멀고 무겁다. 내 발을 딛는 땅의 구체성, 내 발바닥 감촉의 직접성에 빠져든 내가 지금 바가바드기타를 읽는다는 것은 허영이고 기만으로 느껴졌다, 지금 읽히지 않는다고 해서 나중에 다시 읽을 것 같지도 않다. 방을 나서면서 과감하게 탁자에 남겨놓는다. 아마 불쏘시개로 사라지겠지. 아니면 혹시 다음 한국인 트레커가 이 책의 주인이 되고 다시 읽힌다면 더할 나위없이 좋으련만... 지금 나에게 [바그바드기타]는 단지 짐일 뿐이다.


오믈렛과 티베탄 브레드로 아침을 해결하고 티망의 마나슬루 호텔을 나선다. 이내 아침 산그늘 추위에 얼어붙은 티망을 벗어나 밝을 햇살 속에 드러난 따뜻한 마을길과 산길을 걷는다. 이름 모를 마을을 지나고, 소와 개들을 만나고, 그리고 어제처럼 하산중인 사람들을 만난다. 지나는 작은 마을들은 비어있고, 길을 오가는 소와 개는  춥고 외로워 보인다. 겨울철만 비워둔 집인지 마당이 단정하게 정리된 집은 그나마 정감이 느껴진다. 한쪽 벽이 허물어가고, 마당에 아무렇게나 자란 풀이 말라가는 집은 흉물스럽다 못해 처연하기조차 하다. 너른 마을을 지나도 사람 구경하기가 쉽지 않다. 여전히 사람사는 세상이지만 티망을 지나서부터는 점점 안나푸르나로 빨려 들어가는듯 흰산이 가까워진다. 사진기의 앵글 가득 흰산이 잡히고, 목덜미를 지나는 바람에 냉기가 감돈다.       


'니 하오마!' 한 무리의 하산중인 트레커들과 조우했다. 할머니와 함께 한 가족으로 이루어진 팀같다. 그 할머니는 나를 중국인으로 보았지만 나는 그들의 발음을 듣고 그들이 일본인임을 알아 본다. '곤니찌와!' 나의 인사에 그들은 국적을 물어온다. 그분들이 다시 인사를 정정한다. '안녕하세요.' 그리고 이어서 내려 오는 한무리의 사람들과 엉킨다. 중국인 팀은 피상에서 철수 중이란다. 국적을 묻지 않았던 한 팀은 하이캠프에서 이틀을 대기하다가 결국 포기 하고 내려온단다. 서로 행운을 빌며 손을 흔들고 돌아서지만 또 얼마가지 않아 하산중인 트레커와 마주친다. '쏘롱라를 지나 오시는 길이세요?' 뻔히 알면서 자꾸 묻는다. 혼자 하산중인 어떤 백인 청년은 기다렸다는 듯 마구마구 위의 상황을 쏟아낸다. 무슨 말인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쏘롱라 패스를 포기하고 내려가는 중이고, 위의 상황이 너무 좋지않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다 하산중이지만 그래도 반대편에서 쏘롱라를 넘어 온 사람들을  만나고 우리도 쏘롱라를 넘을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싶었는데 아무도 없다. 올라가는 무리와 내려가는 무리가 뒤엉키고 나면 다시 올라가는 사람들끼리 얻은 정보를 나눈다. 결론은 연초부터 지금까지 러시아 트레커 1명만이 유일하게 쏘롱라를 패스했다는 것이다. 갈수록 절망적이다.  


티망을 출발한지 2시간을 조금 지나, 무장한 군인들이 삼엄한 경계를 하고 있는 마을에 들어섰다. 붉은 깃발이 걸려있고, 마을 초입의 건물에 [HILALI AUTONOMOUS STATE]라고 적혀 있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안나푸르나 산자락에 새로운 세상에 대한 꿈이 심어지고 자라고 있었던 흔적들이다. '자치'라는 단어를 보자 뜬금없이 나의 가슴도 뜨거워진다. '중앙'권력을 배제하고 공동체의 구성원이 스스로의 삶을 결정해 나가는 새로운 세상에 대한 꿈은 아마 '자본'과 '국가'가 소멸하는 먼 훗날까지 인류의 가슴에 불을 지필 것이다. 물론 안나푸르나 산자락 마을의 '자치'와 '해방'은 추상적인 꿈이 아니라 지주의 횡포, 폐습의 억압 등 현실적인 질곡을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이었을 것이다.  



그들의 꿈과 열정이  마오주의 분파 등 좌파 정당으로 모아져 네팔은 큰 정치적 격변을 겪었고 지금도 그 여진이 진행중이다.  마오주의 공산당이 합법정당화되고  집권에 성공하면서, 1997년에 시작된 내전이 2006년에 종식되었다는 네팔. 이어서 2008년에 국민투표를 통해 왕정이 폐지 되어 네팔은 해방되었지만 '정권획득'보다 더 심원한 문제는 부정부패의 척결, 기득권 일소, 가난으로부터의 국민의 구제였다. 가난한 소국 네팔이 이 아름다운 자연만치 정의롭고, 풍요로운 사회가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문제의 해결은 지연되고 40여개 이상의 정당이 난립한 정치는 혼란스럽단다. 그와 같은 현실에 합류하기를 거부하는 일부좌파는 나름의 자치구, 해방구를 기반으로 현정부에 저항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15,000명의 목숨을 앗아간 내전의 총소리는 사라졌지만 인민의 삶을 옥죄던 근원적인 악이었던 부패하고 무능하고 폭압적인 왕정이 폐지 되었을 뿐 그로 인해 야기된 네팔의 사회적 과제들은 아무것도 해결된 것이 없어 보인다. 
 


차메에 도착한 것이 11시 30분. 차메는 마냥주의 HeadQuart란다. 마을의 초입에 안전한 식수를 유상으로 공급하는 [SAFE DRINKING WATER STATION]이 있고, 얼마 안가서 일종의 보건소인지 사설 병원인지 [HAMRO MEDICAL HALL]이 있다. 이들 역시 계절탓인지 문이 굳게 잠겨있다. 초라한 [MEDICAL HALL]의 외양이 이곳 의료상황을 말해주는 것 같다. 시가지로 접어드니 일종의 농업기술센타, 경찰서가 있고 은행도 있다. 은행은 무장한 군인이 길 양쪽을 경계하고 있는 것이 참 인상적이다. 그만치 치안이 불안전하다는 증거인가? 아니면 아직 내전의 여진이 남아 있는 걸까?


어제 딸에서 티망까지 오르는데 조금 힘들었기 때문에 오늘은 차메까지만 오르고 남는 시간을 쉬기로 했다. 도착하자마자 짐을 부리고 바로 커리라이스를 주문한뒤 차메의 거리를 나섰다. 차메는 베시사하르를 떠난 뒤 만난 제일 큰 마을이다. 사실 마낭주의 수도라지만 그렇다고 도시라고 이름 붙이기에는 마을의 규모를 넘지 않는다. 차메는 단지 조금 큰 마을인 셈이다. 한 주의 행정 중심답게 있을 것은 다 있지만 산골마을의 정취를 헤칠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마을의 곰파를 돌고,  마을길을 따라 마니차를 돌리며 온천이 있다는 파샹의 말을 듣고 찾아나섰다. 차메의 끝단, 강이 흐르고 있고 그 강을 건너 온천이 있단다. 막상 다리를 건너 온천을 가리키는 표지를 따라가니 온천 시설이 아니라 그냥 강둑 여기저기 바위 밑에서 온수가 솟아오르고 온수가 솟는 바위마다 서너명씩 모여 빨래도 하고 목욕도 하는 그야말로 노천온천이다. 따사로운 햇살이 내리비치는 큰 바위위에 앉아 안나푸르나의 눈이 녹아 내린 찬 강물과 안나푸르나의 땅속에서 솟은 뜨거운 물이 만나는 진풍경을 바라다본다.


 롯지로 돌아오는 길에  우리가 머무는 롯지 바로 옆 건물 2층에 여성인권보호센타가 있다. 작은 빨래를 하고, 배낭의 짐을 정리하다보니 우리가 가진 짐을 줄이면서 작은 도움이 될만한 것들이 나온다. 이번 여정을 떠나면서 집에 뒹굴던 묵은 상비약을  챙겨왔는데, 또 한의사 친구와 약사친구가 집나선 친구를 위해 챙겨준 상비약까지 필요이상의 약을 가져오게 되었다.  오늘 [여성인권보호센타] 를 보고, 마을 초입의 보건소를 생각해보니 우리가 가진 상비약을 나눈다면 도움이 될 것 같았다.  파샹과 아내는 너무 많이 가져온 물휴지와 상비약을 들고 여성인권센타를 다녀왔다. 아내는 용도와 투약법을 설명하기에 힘이 들었지만 그들의 정말 고마워하는 모습에 감명받았단다. 기부는 작은 것을 나누고 큰 마음을 같이하는 것인가보다.



차메에서 첫 롯지다운 롯지를 만났다. 위로 올라올수록 롯지의 시설은 좋아지고 트레커의 발길이 잦다. 길을 걷기 시작한지 5일만에 한국인 트레커를 만나고, 다이닝룸에서 난로불을 사이에두고 자리가 마련되었다. 독일인 3명, 프랑스인 1명, 한국인 5명, 그리고 국적이 기억나지 않는 서너명의 백인들...그리고 몇명의 네팔리가이드와 포터가 둘러 앉으니 거의 국제적 모임이 된 셈이다. 짧은 영어 탓에 숯한 대화의 주제는 포기되고 대화의 주제는 하나, 우리 모두 쏘롱라를 건너갈 수 있을까 없을까다.  오직 인도서 인턴과정을 마치고 여행길에 올랐다는 대구청년만이 영어로 대화를 나눈다. 독일인들은 원래 과묵한 성격탓인지 서먹한 자리가 이어지다 결국 자국인끼리의 수다로 모아진다. 특수학교 선생님, 대학생인 제주 아가씨 이렇게 모두 오랜만에 사람과 사람이 만나 길떠난 자의 설레임을 서로 나누다 보니 여행의 참맛이 느껴진다.


장작 난로만치나 훈훈한 저녁시간을 가지고 룸으로 돌아오니 하루의 피로가 몰려온다. 잠에 골아 떨어져 다시 눈을 떠니 새벽 2시 50분. 초저녁 9시에 잠이 들어 새벽 3시전에 눈을 뜨니 새벽 시간이 너무길다. 모처럼 여행경비를 정리하고 일기를 쓰고 싶어 안경을 찾으니 보이질 않는다. 온방의 짐을 다 뒤적이다 보이질 않는 일기를 쓰고 다시 잠을 청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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