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1월24일 유후인을 떠나 후쿠오카의 엑셀도큐하카다호텔에 짐을 풀고,
텐진거리와 캐널시티 등 도심을 둘러보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그 다음날 일찍 텐진역에서 기차로 한시간 거리인 운하의 도시 야나가와로 향했다.
나카야마 미호가 출연했던 [도코맑음]이란 영화의 배경이 되기도했고,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야나가와 수로이야기]로 알려진 야나가와는  
최근 MB표 운하를 선전한는데 이용되면서 한국인에게 더욱 친숙해진 곳이다.


이번 규슈여행에서 야나가와 코스를 선택한 것은
도시를 실핏줄처럼 잇는 수로를 따라 가와쿠다리라는 뱃놀이를 즐기며
가족이라는 인연의 고마움을 다시 생각하면서
결혼 생활 20년이라는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기위해서 였다.
또한 아직도 개발광풍이 몰아치고
개발만능이라는 야만이 지배하는 나라에 살다보니
개발과 환경, 인간과 자연의 조화로운 공존을 구현한
아름다운 도시의 한 전형을 보고싶고 또 걷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MB의 야만적 토건주의를 옹호하기위해 이용했다는 야나가와 운하는
환경재앙적 개발주의와 극단적으로 다른 환경 친화적 개발의 산표본이었다.
야나가와 운하가 생기게 된 배경부터가 4대강사업과는 극단적으로 판이했다. 
한때 도시를 가르는 물길이 쓸모가 없어지고 오염되어 흉물이 되어가자 
시당국은 수로를 콘크리트 관으로 다 대체하고
묻어버리는 계획을 입안하고 추진하려 했다고 한다.
이때 야나가와의 한 말단 공무원이 이 계획을 반대하고 나서서
손수 혼자서 도랑을 치우고, 물길을 다듬어 나가기 시작했다.
이에 시민들이 호응하면서 개발계획은 철회되고 쓸모가 없어진 운하가
야나가와를 대표하는 상징물로 서서히 바뀌어 나가게 되었다.
오늘날 물의 도시 야나가와를 상징하는 운하는 
바로 그와같은 반개발주의 시민운동의 결과물이다.
이를 통해 야나가와는 상징적인 친환경적 도시로 부각되면서
년 100만명이상의 관광객을 끌어들이는 도시로 탈바꿈할 수 있었다고 한다.


텐진역에서 가와쿠다리 티킷을 산뒤, 기차를 타고 한시간을 달린 뒤 야나가와 역에 내려섰다. 조그만 시골 기차역같은 한산함과 소박함이 묻어나는 역사를 벗어나오자 가와쿠다리를 안내하는 안내원이 10분뒤에 셔틀버스기 온다며 대기실로 안내했다. 조그마한 대기실은 훈기가 넘쳤지만 야나가와 안내 팜플릿 몇 종류와 야나가와를 홍보하는 영상을 내보내는 TV가 전부인 소박한 공간이었다. 젊은 한국인 커플 한쌍과 관광객이 아니라 바같 추위를 피해 들어온듯한 일본 노인 한분이 전부인 탓에 자그마한 대기실도 조금은 허전해 보였다. 10분도 지나지 않아 셔틀버스가 도착했고, 셔틀 버스에 오른지 5분도만에 드디어 가와쿠다리 출발지점에 도착했다. 
  


나루터에는 같은 모양의 작은 배들이 나란이 늘어서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고, 쌀쌀한 날씨와 이른 시간때문인지 한산하기만 했다. 주변 풍경을 사진으로 남기다가, 얼마 기다리지 않아 아이와 함께 나온 일본인 가족과 한국인 커플 그리고 우리 가족해서 8명이 한 배를 탔다. 신발을 벗고 배에 오르자 작은 배는 한사람 한사람이 탈때마다 좌우로 크게 흔들려 금방이라도 뒤집어 질듯했다. 배의 중간에는 일본식 난방탁자인 코타츠가 놓여있었고 사람들은 모두 코다츠에 발을 넣었다. 이내  할아버지 사공이 삿대를 젓자 배는 수로를 따라 나아가기 시작했다. 


야나가와를 물의 도시, 운하의 도시라고 하지만 야나가와의 운하는 거대한 콘크리트 운하와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친환경적인 작은 수로에 불과했다. 이들 수로들은 집과 집을 잇고, 길과 길을 이으며 야나가와 항구까지 이어지는 작은 뱃길이면서 동시에 도시를 가로지르는 도랑이기도 했다. 수로를 따라 늘어진 나무와 숲, 세월의 때가 묻어나는 작은 집들의 아기자기한 정원들, 그리고 그 수로가  인간들만의 것이 아니라 오리들 자신들을 위한 것이기도 하라는 사실을 시위하는 오리떼 가족... 배는 물위를 흐르듯 나아가고, 나의 상념은 지난 세월을 지나 다가올 먼 미래를 오가며 흔들렸다. 수로의 폭은 점점 넒어지고 물길이 깊어지다가 어느새 샛강으로 접어 들기도하고, 다시 넒은 수로로 나아가기를 여러번  능수능란한 늙은 사공의 숨결이 가빠져 갔지만 작은 배는 물살을 일으키며 중심을 잡아 흔들림이 없었다.    


약 1시간의 뱃놀이는 금방 끝이 났다. 발걸음은 선착장에 올려놓자  언제 다시 와 볼 수 있을까는 생각에 가슴이 저렸다. 하지만 다 저 물처럼 흘러가는 것. 향유했던 지난 시간의 기억이나마 소중히 간직하고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은 큰 복이 아니겠는가. 아쉬움을 뒤로하고 한시간을 배로 내려온 수로를 거슬러 이번에는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수로와 도로가 헤어지고 한참을 주택지 사이를 헤메기도하면서 원래의 출발지인 야나가와 역을 찾아 나갔다. 깨끗하고 소박한 야나가와의 골목골목을 헤메는 재미에 푹빠져 한시간을 넘어 걷다가 결국 길을 놓쳐버려 다시 한시간을 더 묻고 찾고 한 끝에 야나가와 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오랜동안 가졌던 야나가와 방문의 꿈, 카와구타리를 해 보고 싶었던 꿈은 실현되었지만 야나가와를 떠나는 기차를 기다리는 마음은 아쉬움으로 가득찼다. 세상의 모든 삶의 터전이 다 이처럼 아름다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자연과 인공이 조화롭게 어우려져 사는 삶의 공간을 향유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복된 경우인가, 그리고 앞으로 살아갈 우리의 삶의 터전은 바로 이렇게 가꾸어나가야하지 않을까는 생각이 이어지고, 기차는 다시 후쿠오카로 향했다.


후쿠오카로 향하는 기차간에서 멀리 일본의 도시와 농촌의 풍경을 두눈 가득 담았다. 바로 그 순간 나는 일본이 부러워졌다. 최소한 환경과 전통에 대한 일본인의 애착만큼은 우리가 소중히 여기고 배워와야할 것들이 아닌가? 아직까지 박정희식 개발만능주의가 국민의 의식을 지배하고, 바로 그와같은 국민의 의식이 MB라는 구시대의 괴물을 현실에 불러들이는 악마의 주술에 빠져있는  우리 사회가 안타까웠다. 하지만 오늘의 일본인들 그와같은 개발만능의 시기가 없었겠는가. 시행착오를 피하면 좋겠지만 인간은, 인간의 세상은 그렇게 완벽할 수가 없는걸 어떻하겠는가. 그래서 인간세상인 것을!


하루의 여정으로 끝이 난 야나가와는 하루보다는 훨씬 더 큰 기억으로 나의 뇌리에 남아 오랫동안 나의 삶을 데워줄 것이다. 반추할 수 있는 행복했던 시간을 선사한 야나가와와의 인연에 감사하면서 2011년 야나가와 여행은 저물어갔다. 




반응형
반응형

 
이 책은 일본여행에 앞서 같은 시리즈인 [후쿠오카]편과 함께 구입했다. 후쿠오카편에 실망한 만치 그 책과 크게 다르지 않은 유후인벳부편에도 당연히 실망했다. 개인의 취향에 맞는 책을 찾아 보는 것이 맞겠지만 적어도 이런류의 여행안내서는 좀더 다양하고 풍부한 컨텐츠를 다루어주어 다양한 독자에게 고루 만족을 주어야할것으로 생각된다.
 
규슈여행관련 책에서 유후인에 대한 여행 정보를 다루고 있긴하지만 유후인 여행시 휴대할 목적으로 콤펙트한 여행안내서를 구할려고 했고 검색에서 유일하게 잡혔던 책이었기 때문에 망설임없이 이 책을 구입했다.

너무 야박한 평을 하게 되어 가슴아프지만, [후쿠오카]편과 거의 중복된 '여행코디네이트'도 불만스러웠고 작은 책에 산만하게 들어가 있는 사진 정보는 너무 지나쳤다싶은 만치 많았다. 진짜 여행과정 내내 안내자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가볍고 알찬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파악할 수 있는 휴대용 영행안내서를 원했었는데 책을 직접 보지 못하고 인터넷상에서만 확인하고 구입한 나의 불찰이 무엇보다 클 것이다.

 

반응형
반응형

 


이번 가족 일본여행을 계획하면서 그래도 결혼 20주년 기념여행이라는 기분을 나게 하는 이벤트를 무엇으로 할까 잠시 고민했다. 결론은 료칸이었다. 이전에 가족이랑 떨어져  혼자서 단체연수로 규슈여행을 갔을 때 이런저런 대중(?) 료칸같은데서 몇밤을 지낸 적이 있었고, 그때 료칸의 멋에 반해 오랫동안 가족만의 여행을 꿈꿔왔기 때문이다. 최종적으로 전체 5박의 일정중 1박을 선상에서 하고, 3박을 값싼 비즈니스 호텔을 이용한다고 해도 적어도 하루만은 료칸에서 하룻밤의 사치를 향휴하는 것으로 잡았다.

하지만 료칸은 비용이 만만치가 않고, 서비스가 천태만상이어서 선택에 어려움이 많았다. 일단 지역은 처와 딸을 동반한 여행이니만치 쿠로가와나 고코노에보다는 일본 여성들이 최고로 좋아한다는 유후인으로  정했다. 그렇지만 유후인만 해도 100여개의 료칸이 성업중이다보니 최종 결정은 여전히 쉽지 않았다. 일단은 가격도 싸면서 독립된 노천탕도 있는 중급정도의 료칸 을 찾기 시작했다.  그렇게 선택한 것이 [유데이 코우노쿠라]다.

코우노쿠라는 유후인 역에서 좀 거리가 되었지만 다행히 료칸측에서 원하는 시간과 장소로 차량을 보내준다고해서 미리 송영예약까지 한뒤 출국을 했다. 아침에 하카다항에 도착하자마자 버스터미날로 이동하여 '유후인고'라는 고속버스를 이용 점심무렵에 유후인에 도착했다. 역앞에 있는 가게의 코인락커에 가방을 넣어두고  유후인의 골목골목을 누비며 즐거운 시간을 보낸 뒤 오후 5시가 다가오자  약속장소인 유후인 역앞엘 나갔다.  역시 일본답게도 정확한 시간에 송영승합차가 도착했다. 밝게 웃는 젊은 여성분이 운전하는 승합차를 타고 유후인 외곽을 삥 둘러 10여분만에 코우노쿠라에 도착했다. 

코우노쿠라는 벌써 여러번 료칸예약사이트를 통하거나, 블로그를 뒤져 친숙해져 있었다. 차가 도착하자 마당까지 쫒아나온 직원으로 보이는 아주머니의 환영을 받으며 물과 나무가 어우려진 일본식 정원을 지나 본관에 들어섰다. 조그마한 로비에 카운터가 있고, 여주인은 간단한 인사 후에 숙박부를 내밀었다. 숙박부를 적고나자 직원은 앞장서서 시설안내를 했다. 로비의 왼쪽은 공동식사처고 오른쪽으로 좁은 복도가 나오고 바로 공용 온천이 았었다. 공용온천 출입구 앞에는 작은 쇼파와 기념품 판매대, 여행 안내 홍보불같은 것이 비치되어 있었고, 공용온천은 남여 탕 입구가 나란이 붙어있었고, 온천을 들어서면 바로 실내탕이고 실내탕에 붙어 노천탕으로 나가게 이어져 있었다.
 
우리가 하루밤을 지낼 방은 본관의 현관을 나와 본관의 왼편에 있는 별채의 첫호실이었다. 무릎높이에 있는 열쇠를 열고 들어선 방은 지붕이 높은 다다미방으로 침실과 코다츠가 있는 다실이 붙어있는 형식으로 세식구가 자기에는 공간이 아까울 만치 큰방이었다. 옷장과 이불장은 벽장으로 설치되어 있었고, 이런저런 가구와 도자기 같은 장식품들로 실내가 꾸며져 있었다. 침실방의 한쪽에 미닫이 문을 열자 화장대와 세면시설이 있는 작은 방이 나왔고, 그 방에서 또 다른 문을 열자 그 방은 일본다운 작은 화장실이었다. 앙증맞은 공간에 설치된 세면실과 화장실을 보니 진해에서 일본식건물이었던 이모집과 외삼촌 집에서 숨박꼭질하고 놀던 어린 시절이 생각이 났다. 어린시절 놀던 일본식 집들은 모두 목조 2층 건물이었고, 또 구석구석 작은 공간들이 많아 사촌들과 숨박꼭질놀이를 하고 놀기에 너무나 좋았다. 그렇게 숨겨진 공간이 많은 집들은 그만치 또 많은 비밀을 간직하고 수많은 이야기거리와 가슴 아린 추억을 담고 있었다. 벌써 40여전 전의 일이 되어버린 꼬마의 뇌리속에 묻혀 있던 추억들이 이렇게 유후인의 한 료칸에서 상기되자 갑자기 가슴이 먹먹해 졌다. 장례도 참석하지 못했던 이모님의 다정했던 얼굴이 떠오르고 지금은 다 연락을 끊고 사는 외사촌들의 얼굴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방을 안내하고 저녁 식사시간을 예약받은 직원 아주머니가 방을 나가자 우리세 식구는 기다렸다는 듯 짐을 아무렇게나 던져놓고 온 방을 뒤지듯이 구석구석 살펴보고 신기해하고 재미있어 했다. 그리고 겉옷을 벗어던지고 유카타를 입었다. 색상이 중성적이라서 딸과 아내는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유카타를 입고 게다를 신을 수 있도록 버버리 장갑같이 엄지발가락만 따로 있는 양말을 신었다. 사진을 찍고 미리 준비되어 있던 차를 마시고도 저녁식사까지는 시간이 남아 세식구가 모두 남여공용탕과 전용 노천탕으로 헤어져 온천을 했다. 남여공용탕은 하나의 탕을 남녀탕으로 간막이를 하고, 다시 각각의 탕을 실내외로 간막이쳐서 노천탕과 실내탕으로 나눈 그런 구조였다. 실내탕 바닥에도 노천탕에서 흘러들어온 낙엽이 손에 잡혔고, 남여탕은 대나무 한겹으로 구분되어 있어 서로 대화를 나눌수도 있었다. 절묘하게 택일을 한 덕분인지 알 수 없지만 우리 가족이 도착했을 때는 모두 8실이라는 료칸에 손님이 전혀 없었다. 나중에 저녁 늦게 부부로 보이는 한쌍의 손님이 들어오긴 했지만 아뭏튼 공용탕마저 독탕으로  잘 알지도 못하는 료칸매너(?)의 부담없이 싣컷 즐길수 있었다.

흩어진 세식구가 다시 모여 식사처에서 소위 '가이세끼' 요리로 저녁을 들었다. 기대가 너무 컸는지 그렇게 대단한 요리는 아니었지만 해산물과 육고기를 고루 갖춘 일본 요리를 한 코스씩 즐기다 보니 무려 한시간 30분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아마 식사 한끼에 90분 걸린 것은 내 오십 평생 처음일 것이다. 직원 한분이 거의 우리 테이블에 붙어있다시피하며 음식을 내어오고 접시를 치우고 그리고 잘 알아듣진 못했지만 각각의 요리에 대한 이런저런 설명을 해주었다. 사실 체질이 머슴체질이다 보니 난생 처음 받는 서비스가 불편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살다가 한번씩 이렇게나마  대접받는 시간들을 갖는 것도 괜잖은 것 같았다.

식사를 마치고나서 방으로 돌아와 보니, 어느새 직원이 이부자리를 깔아놓았다.  료칸에서의 시간을 잠으로 다 보내기가 무척이나 아쉬웠지만 사실 료칸을 먹고 씻고 자기위한 공간이 아닌가. 특히나 전날 선상에서 자는둥 마는둥 밤을 샌데다가  또 하루종일 유후인 거리를 헤메다보니 피곤이 물밀듯 몰려왔다. 도대체 저녁을 먹고 나서 잠들기 전에 우리 세식구가 무슨 대화를 하고 무엇을 했는지 아무런 기억도 나지 않을 만치 깊고 편안한 잠속으로 골아 떨어졌다. 

일찍 잠자리에 든 탓에 새벽 일찍부터 눈을 떳다. 무슨 특명이라도 받은 듯이 식전 온천을 즐기기 위해 탕을 찾아 들었다. 얼굴에 눈을 맞으며 김이 피어오르는 온천수에 눈이 내려 녹는 풍경을 고즈넉이 바라다 봤다. 문득 이 호사를 누려도 좋을지 별일이 없을지 걱정이 될만치 그 순간의 시간이 너무나 충만했다. 온몸의 긴장이 풀리고 오래동안 누적된 마음의 때가 녹아 흐르는 듯 편안햐졌고 사르르 두눈이 감겼다. 

저녁에 먹었던 가이세끼요리에 비해 훨씬 간단한, 하지만 너무나 넉넉한 아침을 먹고 나서도 가능한 한 많은 시간은 코우노쿠라에서 보내고 싶어 송영 시간을 10시로 부탁했다. 아침식사후 또 세식구는 각각의 탕으로 흩어져 온천을 하고 그래도 시간이 남아 코우노쿠라 근처 마을을 산책했다. 아무것도 없는 간혹 눈발이 흩어지는 평범한 일본 농촌의 마을안길을 걸으며 코우노쿠라에서 보낸 하루밤의 사치를 마무리 했다.











반응형
반응형




2010년 1월초, 마을 사업 관련해서 마을주민과 함께 일본 연수를 떠났고 그때 1시간 정도 유후인을 스쳐 지나갈 수 있었다 눈발이 날리고 찬바람이 몰아쳐 그 짧은 1시간마저 유후인을 보는둥마는둥 보내고 말았지만, 그때 가이드로부터 유후인이 '일본여성이 일생에 꼭 한번 여행을 오고 싶어하는 곳'으로 최고로 인기있는 관광지라는 말이 인상에 남았었다. 그리고 귀국후 이런저런 자료를 보면서 유후인의 매력에 빠져들었고, 지난 1월 23일에야 아내와 딸을 동반하고 1박까지 하는 넉넉한 일정으로 유후인을 찾았다.

내가 아는 유후인은 참 특별한 관광지다. 대단한 역사문화적 자산이 남겨진 곳도 아니고, 자연 경관이 유별나서 사람을 매혹시키는 그런 곳도 아니다. 골프장이나 대형 리조트, 호텔 인프라는 아예 찾아볼 수도 없다. 현대문명의 현란함도 도시적 매력도 없고 그렇다고 전원의 목가적 풍경만으로는 관광지가 되기에 아무리 봐도 부족한 지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구 만2천여 명에 동서 8km, 남북 22km의 유후인은 년 400만 명의 관광객이 찾아오는 일본 최고의 관광지중 하나다. 유후인은 인구나 도시 면적으로만 본다면 봉화읍 정도와 크게 다를 바가 없는 지역이다. 그런데 도대체 어떤 매력이 유후인을 그토록 성공적인 관광지로 자리 잡게 했을까?


그 비밀을 풀기 위해 우선 유후인을 인상짓는 몇 가지 자원을 생각해 봤다. 유후인을 내려다보는 해발 1500m가 넘는 유후다게라는 산이 있다. 유후다케는 아소쿠주 국립공원의 일부로 화산작용으로 생겨난 산이다. 이 유후다케를 비롯해 해발 1000m가 넘는 산록이 유후인을 둘러싸고 있다. 산세로 따진다면 물론 보기에 아름다운 산들이지만 그것만으로는 유후인의 성공을 설명할 수 없다. 유후다케는 유후인의 명성을 통해 알려진 산으로 유후인의 작은 자원일 뿐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기 때문이다.
 


유후인을 찾았던 사람들은 유후인의 긴린코 호수를 잊지 못한다. 긴린코 호수는 관광객이 제일 많이 붐비는 거리의 끝에 위치한 조그마한 연못이다. 석양이 비칠 때면 호수에서 뛰어오르는 붕어의 비늘이 금빛으로 빛난다고 해서 긴린코(金鱗湖)라고 이름 붙인 호수다. 온천과 냉천이 함께 솟아나 항상 김이 피어나는 신비로운 호수로 주변의 아기자기한 미술관이나 카페들과 잘 어울려 그 아름다움이 빼어난 호수지만 자그마한 크기의 호수에 불과하다. 긴린코 호수가 가진 이름의 의미가 관광객의 흥미를 끄는 것도 사실이고, 주변경관과 어우려져 신비로운 매력을 드러내는 호수의 아름다움에 탄복할 수밖에 없지만 이 역시 유후인의 매력을 다 설명해 주기엔 턱없이 부족한 자원이다.


유후인은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만든 대표작인 <이웃집 토토로>와 <센과 이치로의 행방불명>의 배경이 된 곳이다. 그러다보니 이들 만화영화의 주인공을 형상화한 케릭터 상품이 즐비하고, 전문 가게들마저 성업 중이다. 이 역시 유후인의 큰 관광자원의 하나지만 유후인의 명성을 충분히 설명해주지는 못한다.

유후인의 참 매력을 드러내는 규정은 다름 아닌 “친환경 관광도시”라고 한다. 하지만 어떤 자원들이 유후인을 친환경관광도시가 만들었는지, 그리고 어떤 과정을 통해 오늘날의 친환경 관광도시 유후인이 탄생되었는지 살펴보지 않고는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없을 것 같다.
 


유후인은 1975년 오이타현을 중심으로 일어난 지진으로 유후인의 대표적 호텔건물이 붕괴하는 등 참사를 겪었다. 당시 유후인은 인근의 유명한 관광지인 벳부 덕분에 ‘작은 벳부’라고 불리며 지명도가 높아지던 시기였는데 지진에 의해 그 명성이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될 위험에 처하게 된 것이다. 그때 마을 주민을 중심으로 지진이 초래한 위기를 극복하고자 ‘마을재건위원회’가 구성되었는데, 마을재건위원회는 대규모 관광단지 조성 사업 같은 개발을 통한 극복 방안과 유후인의 고유한 경관을 보존하면서 주민의 삶의 질을 우선시하는 개발 방향을 높고 대립하기도 했지만 결국 투표를 통한 주민의 선택으로 ‘보존’으로 방향을 잡았다고 한다. 이후 주민자치위원회는 음악제와 영화제 등을 만드는 등 유후인을 문화와 예술이 넘치는 마을로 만들어가면서 동시에 ‘정감 있는 마을 만들기 조례’를 재정하고 지역의 농업, 관광, 주민의 삶까지 아우르는 지속가능하고 친환경적인 지역 개발 모델을 구상하고 실천했다고 한다. 1988년에는 유후인에 3,600실 규모의 대형 리조트 건설이 추진되었는데, 이 때문에 일부 주민의 이해관계가 대립하기도 했지만 민관이 함께 이를 저지하고, 아예 1990년에는 유후인 내에 5층 이상의 건물을 짓지 못하게 하는 조례까지 재정해 버렸다고 한다. 그런 주민들의 노력이 오늘날 유후인을 전국 최고의 ‘친환경관광도시’로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특히 유후인 브랜드를 만들어 나가는 과정에서 핵심적인 것은 유후인의 고유한 가치를 스스로 확인하고 이를 중심에 놓고 지역의 발전 방향을 잡아나갔다는 것이다. 물론 그 과정은 주민자치활동의 일환으로 이루어졌고 당연히도 주민주도적인 공유 과정이 선행되었다. 결정과정의 공유는 자발적 참여를 이끌어내는 결정적인 힘이 되었을 것은 당연지사라 할 것이다. 유후인의 고유한 가치를 찾는 과정은 좁게 보면 유후인 인근의 최대 관광지인 벳부와의 차별성을 찾고 확립해 나가는 과정이었다. 벳부가 일본경제의 상승기에 단체관광, 기업관광이 주를 이룰 때 번성하여 남성중심, 밤거리와 유흥가, 대형 숙박시설 등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면, 휴후인은 그와 정확히 반대되는 가치에 기반하고 있다. 유후인 관광자원은 여성 중심적이고 가족중심적인 가치에 기반 하여, 예술, 문화쇼핑, 생활체험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유후인은 시대적 트랜드의 변화를 먼저 읽고 자신의 고유한 차별적 가치를 그 중심에 세움으로써 성공적인 지역개발 모델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와 같은 유후인 만의 고유한 관광정신을 가장 잘 구현해 보이고 있는 것이 바로 ‘유노쓰보’ 거리다. 이 거리는 유후인역에서 긴린코 호수에 이르는 약 2km정도 되는 거리다. 이 길을 중심으로 작은 골목길들이 이어져 있고, 골목 마다 수십 개의 미술관과 공방, 베이커리, 까페, 그리고 각종 특산물과 기념품, 공예품, 골동품 가게 등이 늘어서 있다. 미술관이라고는 하지만 대단한 시설의 화려한 건물은 하나도 없고 오밀조밀한 거리에 그만그만한 규모의 소박한 미술관들이 전부다. 사실 어느 것이나 하나를 떼어놓고 본다면 특별한 것이 없다. 그런데 유노쓰보 거리의 이들 모든 것이 어울려 만들어 내는 분위기가 일년에 400만의 관광객을 끌어들이는 중심적인 매력으로 승화한다. 사람들은 문화예술의 빛 아래서 나름의 취향에 따라 금상 고로케와 유후인 에끼벤을 사먹고, 유후인 버거와 유후인 롤케익을 즐기며 충만감을 느끼고 행복해 하는 것이다.


유후인은 대중의 소박한 정서에 철저히 부합하는 관광지다. 특별히 화려한 것도 대단한 것도 없는 거리에 대중적 감수성에 부합하는 작은 자원들이 어울려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지역 주민의 행복한 삶을 우선시 하는 관광개발을 펼쳤다는 것이다. 단적인 예로 대규모 호텔이 들어설 경우, 지자체는 세입 증대라는 이익이 있겠지만 주민과 관광객의 관계는 단절되고, 고유한 지역의 경관과 정서는 파괴되고 만다. 유후인은 그런 식의 대형 호텔의 건설을 저지하면서 오늘날 100여개의 중소 료칸이 성업하게 되는 여건을 지켜낼 수 있었고, 그렇게 지켜진 료칸 자체가 하나의 중심적인 유후인의 관광자원이 되었다.

유후인 거리를 걷다보면 관광지라기보다는 잠시 산책 나온 거리, 내 집에서 거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친숙하고 마음 편안한 공원에 나온 것 같은 기분에 빠진다. 그것은 유후인의 거리가 관광이 아니라 ‘생활’, ‘체험’을 모토로 하는 유후인의 관광정신을 철저히 구현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모처럼의 가족 여행을 유후인으로 선택한 것은 먼저 우리가족이 유후인의 매력을 즐기기 위한 것이었고 그리고 부가적으로 내가 사는 봉화, 그리고 비나리마을의 바람직한 개발 방향에 대한 착안을 얻기 위해서 였다. 1박2일의 유후인 여행으로 뭐 대단한 성과를 얻을 수있겠냐만 그래도 오랫동안 유후인은 나의 뇌리에 남아 곱씹어야 될 생각거리를 제공해 줄 것이 분명해 보였다. 다 떠나서도 그 이틀 동안 동안 딸과 아내와 함께 유노쓰보거리를 걸으며 다코야끼를 사먹고, 벌꿀 아이스크림을 나누어 먹던 행복한 시간은 오랫동안 기억에 남아 나의 메마른 삶을 훈훈하게 뎁혀줄것 같다.


  


반응형
반응형

누구나  살다보면 어느 순간 자신의 삶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사물의 색이 바래고 자신의 삶을 이끌던 의미 혹은 희망 같은게 하잖아 보이게 되는 때가 있을 것이다. 사실 요즘 내가 그랬다.대충 살아 온 시간들,  확 늘어버린 나이, 불투명한 앞날... 거기다가 앞으로 살아갈 동안 의지할 수 있는 돈도 재능도 사람도 가지고 있지 못한 빈털털이라는 사실까지 어느 것 하나 위안을 얻을 곳이 없었다.

그렇게 내 삶의 가치, 가능성, 의미는 이미 바닥을 드러냈고 사람에 대한, 세상 모든 존재에 대한 신비감마저 잃어버리고 어쩌면 삶이 다하는 그날 까지 이렇게 무료하고 무의미하게  하루하루 늙어가야하지 않을까하는 무력감에 시달렸다.

그러나가 지난주 분명 일탈일 수 밖에 없는 여행을 떠났다. 그것도 결혼20주년을 핑게로, 멀리 규슈까지. 이런저런 즐거움과 행복감 충만한 시간들도 있었지만 이번 여행의 가장 큰 수확은 생각지도 않은 유후인의 화가 東 勝吉(ひがし かつきち)과의 만남이다.


東 勝吉은 오이타 현에서 1908년에 태어나 유후인에서 2007년에 돌아가신 분이다. 그를 유후인의 화가라고 칭하는 이유는 그의 노후를 보내고 영면한곳이 바로 유후인의 노인요양원인 '온수원'이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그의 화가로서의 활동이 바로 그 유후인의 '온수원'에서 시작되었고,  작품의 전부가 이루어졌고, 또 평가 받았기 때문이다.


여성이 좋아한다는 이유로 찾은 유후인에서 아내와 딸과 더불어 하루 낮을 보내고 하루밤의 사치를 위한 료칸의 송영을 기다리는 시간, 한기를 피하고자 유후인 역사의 대기실 같은 작은 홀에 들어섰다. 30여평의 홀의 사면에는 수준이 고르지 못한 다양한 그림들이 걸려있었고,  그림 한점한점을 한참을 둘러보다가 그 그림들이 83세 이상의 노인들이 그린 그림이라는 사실을 알고  깜짝놀래기도 했다. 하지만 더 놀라운 사실은 바로 그 전시회가  바로 유후인이 낳은 어떤 화가를 기념하기위한 정기 공모전이었고, 그 화가는 다름아닌 83세에 첫 붓을 잡은 東 勝吉이라는 분이라는 사실이었다.


東 勝吉은 가난하고 힘든 삶 끝에 78세에 유후인의 노인보호시설인 '온수원'에 입소하고 83세가 되어서야 평생 처음으로 붓을 잡았다고 한다. 그리고 89세에 바로 그 유후인 역 홀에서  첫 전시회를 가지고 2007년 99세에 숨을 거두기 까지 작업에 몰두 했다고 한다.

나는 사실 그의 작품을 예술적으로 평가할 재주가 없다. 하지만 나의 눈에 비친 그의 작품은 어느 프로 작가의 작품들보다도 뛰어나게 아름다왔으며 감동적이었다. 나는 그의 삶과 예술에 대해 여행 내내 곱씹어 떠올릴 수 밖에 없었다. 그는 자신이 가진 재능을 83년 동안 고이 간직하고 살아왔으면서도 그전에는 그 사실을 전혀 느끼지 못했을까? 예술은 후천적인 노력보다는 천부적인 재능이 더 중요할까? 화가가 되고 싶은데 타고난 재주가 없어 예술이라는 병을 평생 앓아야만 하는 사람은 불행할까, 아니면 불가능한 꿈이나마 가지고 살아가니 행복하다고 해야할까? 그가 노년에나마 화가로서의 자신의 삶을 불사를 수 있었던 것은 일본의 노인 복지 시스템 덕분이겠지? 건데 어떻게 예술교육이라곤 한번도 받아본 적이 없는 사람의 붓에서 저런 색이, 저런 선이, 저런 조형미가 탄생할 수 있었지?  끝없는 상념들이 꼬리에 고리를 물ㄹ고 일어났지만 정작 더 중요한 사실은 사람들은 자신도 인식하지 못한 재능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고, 그 가능성의 실현 여부를 떠나 하나의 삶이 가진 가능성의 존재 자체가 그 삶을 이끄는 힘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그를 통해 느끼게 된 것이다.
거의 모든 삶은 자신이 가진 가능성을 고히 간직하고 무덤속으로 가져가버리겠지만 하여튼 바닥나지 않는 가능성의 영역안에 자신의 삶이 놓여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은 참 중요하지 않을까. 내가 東 勝吉을 알게 되고 기쁘하는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다. 이제 쉰이다, 희망을 갖자!

http://www.yufuinartstock.com/ARTSTOCK.html






반응형
반응형


결혼 20주년 첫 가족 일본여행을 떠나며...

나는 호젓이 떠나는 여행을 꿈꾸고, 혼자만의 시간을 그리워한다.
여행은 모든 익숙한 것들로 부터 벗어나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기회다.
멀리서 바라다 보는 '나',  '나'를 둘러싼 삶터,
그리고 '나'와 관계 맺고 살아가는 사람들...
길을 나서면 이 모든 것이 나의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의 것이 된다.
'나'는 '그'가 되고 그는 고개를 들어 멀리 수평선 넘어 번지는 석양을
그 자신의 눈으로 바라다 본다.


낯선 눈으로 익숙한 것을 바라다보는 생소함이 내가 꿈꾸는 여행의 묘미다.
하지만 그 생소함은 너무 친숙해서 느끼지 못하게 된 사물들을 발견하게하고,
익숙함의 궁극을 나타내는 나자신을 회복하고,
궁극적으로는 모든 존재의 상처받은 신비를 치유하는데 묘약이 될 것이다.

객관화된 자신을 '그'의 눈으로 바라다보면서 '그'가 산 삶을 되짚어보고,
'그'가 살아갈 앞날의 삶을 꿈꾸는 여행은 결국 떠난 자리로 돌아오기 위한 여정이다.
나는 더 멋진 유랑을 꿈꾸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최대치는 여행일뿐이다.
여행은 길고 지루한 인생이라는 길위에서 잠시 느티나무 그늘로 스며들어
낡은 운동화나마 벗어 먼지를 털고 다시 신는 그런 시간이다.
나는 운동화를 고쳐신고 느티나무 가지 사이로 번져오는 햇살과
파란 하늘을 바라다 보며 새로운 여정을 시작할 것이다.

여행이 단순한 '소비행위'일뿐인 시대에
그래도 굳이쇼핑센타를 가지 않고 배낭을 매고 길을 나서는 것은 
단지 지나간 시절에 대한 향수나
몸에 베어있어 버리지 못하는 타성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나는 아직도 세상의 모든 존재가 다 그 신비를 잃지 않길 바라고
마찬가지로 세상의 모든 여행이 설레임으로 가득차길 빈다.
세상의 모든 작은 여행들이 우주여행의 황홀함을 나눠갖는다면
사람들은 좀더 따뜻하고 충만한 의미속에서 살아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 난생 처음으로 가족일본 여행을 떠난다.
우리 가족은 규슈에서 5박6일의 짧지 않은 시간을 부유할 것이다.
유후인의 거리를 지나 관광객의 발길이 닿지 않는 마을 속으로 스며들고
후쿠오카 빌딩 숲의 한 모둥이에 쳐박혀 잊혀져가는 가게에서 우동을 먹으며,
익숙한 가족의 의미와 인연의 깊이를 되짚고 
우리가 살아있는 이 세계의 신비를 회복하는 시간을 가지고싶다.
그리고 다시 진부한 일상으로 돌아와 진부하지 않은 삶을 도모하고 싶다.
익숙한 모든 것을 그리워하기 위한 떠남에서 돌아야
모든 존재와 모든 관계에 스민 사랑을 회복하고 싶다.


1월22일 봉화출발 / 부산발 카멜리아호
1월23일 하카다항 도착 유후인으로 이동 / 코우노쿠라 료칸에서 1박
1월24일 후쿠오카로 이동 /하카다도큐 엑셀 호텔 1박
1월25일 야나가와로 이동/ 다자이후 관광 / 1박
1월26일 후쿠오카 관광 / 1박
1월27일 하카다항 출발 부산 귀환
1월28일 봉화 도착

반응형
반응형

김남희를 통해 '까미노 데 산티아고'를  알게되었다.
"살다보면 그런 날이 온다. 다 버리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기에는 이미 늦은 것 같고, 가던 길을 그냥 가기에는 왠지 억울한 순간. ‘이렇게 살 수도, 이렇게 죽을 수도 없는 나이’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이대로는 안되겠다 싶은 그런 날"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702010935451&code=900306
경향신문 연재글에서 우연히 만난 김남희의 이 문장에 매료되어 까미노를 알게되고 그 매력에 빠져들었다. 카미노 관련 책과 자료를 모으며 언젠가는 꼭 길을 떠나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까미노는 시들해져버리고 나는 다시 시코쿠길에 필이 꽂히기 시작했다.

올초 평생 처음 떠난  일본 여행을 전후해 일본 관련 책들을 보고, 일본에 매료되었고 시코쿠 길을 알게 되었다. 시코쿠길은 일본 진언종의 창시자 고보 다이시의 순례길을 따라 일본을 이루는 4개 섬중 제일 작은 시코쿠 섬 둘레의 88개 사찰을 도는 1200km의 길이다. 그 길은 고보 다이시의 깨달음을 함께하는 엄숙한 길이기도 하지만 나에게는 단지 자연과의 깊은 교감을 나누며 일본의 삶과 문화를 깊이 느끼고 배우고 즐기기에 너무나 좋은 도보여행길일 뿐이다. 그래서 다시 시코쿠 길은 나의 3번째 일본 여행길 목록에 올려졌고, 그리고 다음달 계획잡아놓은 결혼 20주년 규슈가족여행을 준비하면서 이 책 [일본의 걷고싶은길2-규슈, 시코쿠 편]을 읽게 되었다. 


이책은 규슈와 오키나와 그리고 시코쿠 섬의 대표적인 트레킹 코스를 소개하고 있다. 규슈의 유후인과 부속섬인 야쿠시마, 오이타현의 유후인, 오키나와 본섬과 부속섬인 이시카기섬, 이리오모테섬 그리고 이 책의 3분지2를 채우고 있는 시코쿠 순례길을 다루고 있다. 물론 이 책은 기본적인 여행 안내 정보를 담고는 있지만 그렇다고 순전히 여행 안내서는 아니다. 김남희의 다른 책들과 마찬가지지만 정보는 덤일뿐이고 책은 줄기는 작가의 사색의 흔적이고 자연과 인간, 인간과 인간간의 소통과 교감의 기록이다.


이 책의 첫장을 채우고 있는 야쿠시마는 규슈 남단에 부속되어있고 울릉도의 3배정도 되는 크기의 섬이란다. 일년 내내 비가내리고 원시 열대림이 덮여있는 이 섬은 미야자키 하야오의 만화영화 [원령공주]의 배경이기도 하다. 물이끼가 바위를 덮고, 수백년 된 삼나무가 울창해 그 숲속 어디엔가  숲을 지키는 정령이 살고 있을 것만 같은 그런 섬이다. 그 섬을 걷고 도 걸어 수령이 7,200여년이 되었다는 삼나무 조몬스기를 만나러 가는 길은 필자 김남희가 정념 삶을 과정 속에서 내칠 수 없었던 근본적인 물음, 인간과 우주, 삶과 죽음의 신비에 대한 물음에 대한 해답을 찾아가는 길인듯 하고, 긴 여정끝에 만난 조몬스기는 필자 김남희에게 말없이 세상의 진리를 전해  줄 것 같다. 최소한 야쿠시마를 걸다보면 육식화된 몸, 동물적인 정신이 숲의 정기에 씻겨 초식화된 몸으로 식물적인 정신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을 것 같다. 김남희를 통해 내 생에 꼭 한번 가보고 싶은 곳의 목록에 야쿠시마를 올려본다.

필자의 두번째 발길은 오이타 현의 유후인으로 향한다. 유후인은 유휴가케산으로로 둘러쳐진 조그마한 마을이다. 온천이 있고, 조그마한 가게들이 빼꼭히 들어찬 거리가 있고, 작은 미술관과 민예점들이 늘어선 관광지다. 유후인은 1970년대에 와서 '기획된' 관광마을이란다. 하지만 '관광마을'의 어감이 주는 인공적 혹은 조잡한 이미지가 필자를 통해 유후인의 역사를 들어보면 확 사라진다. 대규모 개발과 보전의 갈림길에서 주민자치기구를 결성하여 보전의 길을 선택하고, 단순한 보전을 넘어 마을이 존속할 수 있는 생활기반을 있는 그대로의 자연과 주민들의 삶과 같이 해 왔던 지역 문화를 이용하여, 최소한의 단장을 통해 오늘날 일본인이 살아 생전에 가장 가고싶어 하는 마을로 거듭나게 했단다. 껍데기만 보고 다소 실망스러웠던 유후인을 필자를 통해 다시 느껴 볼 수 있게 된 점이 너무 고맙다.



필자의 발길은 오끼나와와 이시가키섬 등을 거쳐 시코쿠에 이른다. 이책의 2/3분량을 차지하고 있는 시코쿠 길은 책의 분량만치 오랜 역사를 가진 순례길이다. 일본인의 정신세계를 이루는 양축의 하나인 불교의 순례길이자 수백년동안 민중의 삶속에 녹아 든 풍습과 문화를 낳은 시코쿠 순례길은 어쩌면 일본의 가장 대표적인 걷기 길인지도 모른다. 그 길을 따라 김남희는 이 길을 만든 당사자인 고보 다이시의 가르침이 아니라 시코쿠 순례길이 만든 길가 주민들의 인정과 삶을 대하는 태도로 부터 많은 것을 배우고 느까고 있는 것 같다. 이 길을 걷고 나면 사람에 의해 받은 상처가 치유되고, 사사로운 원과 한이 보편적인 인류애로 승화될 것 같은 희망을 준다. 나도 언젠가 오헨로상이 되어 시코쿠 길위에서 상처 받은 다른 사람들과 포옹할 수 있을 것 같다. 필자 김남희가 고맙다.

시코쿠와 규수 지역의 대표적 걷기길에 대한 김남희의 여행기인 이책은 일본의 도시에 국한된 시야를 가진 사람들에겐 일본 이해의 폭을 일본의 농촌, 일본의 자연까지 넓힐 수 있도록 안내할 것 같다. 그리고 김남희가 길을 걷는 내내  '친절한 일본인과 뻔뻔한 일본정부'사이의 괴리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는 문제에 봉착했다고 한다. 나 역시 이제 막 배우기 시작한 일본의 매혹적인 문화가 어떻게 평생을 가져왔던 일본에 대한 선입견과 조화를 이루거나 그 선입견을 수정해 나갈 지 아득하기만 하다. 하지만 김남희의 발길을 따라 일본의 자연, 일본인의 삶을 날 것 그대로 속속들이 만나다 보면 추악한 국가권력과 분리된 일본의 매력을 갈등없이 받아들일 수 있을 것만 같다.  

[일본의걷고 싶은 길]을 만나 다시 한번 더 일본의 아름다움에 빠져들고, 한달 앞으로 다가온 규슈여행에 대한 기대감으로 가슴 부푼다.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