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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희를 통해 '까미노 데 산티아고'를  알게되었다.
"살다보면 그런 날이 온다. 다 버리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기에는 이미 늦은 것 같고, 가던 길을 그냥 가기에는 왠지 억울한 순간. ‘이렇게 살 수도, 이렇게 죽을 수도 없는 나이’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이대로는 안되겠다 싶은 그런 날"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702010935451&code=900306
경향신문 연재글에서 우연히 만난 김남희의 이 문장에 매료되어 까미노를 알게되고 그 매력에 빠져들었다. 카미노 관련 책과 자료를 모으며 언젠가는 꼭 길을 떠나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까미노는 시들해져버리고 나는 다시 시코쿠길에 필이 꽂히기 시작했다.

올초 평생 처음 떠난  일본 여행을 전후해 일본 관련 책들을 보고, 일본에 매료되었고 시코쿠 길을 알게 되었다. 시코쿠길은 일본 진언종의 창시자 고보 다이시의 순례길을 따라 일본을 이루는 4개 섬중 제일 작은 시코쿠 섬 둘레의 88개 사찰을 도는 1200km의 길이다. 그 길은 고보 다이시의 깨달음을 함께하는 엄숙한 길이기도 하지만 나에게는 단지 자연과의 깊은 교감을 나누며 일본의 삶과 문화를 깊이 느끼고 배우고 즐기기에 너무나 좋은 도보여행길일 뿐이다. 그래서 다시 시코쿠 길은 나의 3번째 일본 여행길 목록에 올려졌고, 그리고 다음달 계획잡아놓은 결혼 20주년 규슈가족여행을 준비하면서 이 책 [일본의 걷고싶은길2-규슈, 시코쿠 편]을 읽게 되었다. 


이책은 규슈와 오키나와 그리고 시코쿠 섬의 대표적인 트레킹 코스를 소개하고 있다. 규슈의 유후인과 부속섬인 야쿠시마, 오이타현의 유후인, 오키나와 본섬과 부속섬인 이시카기섬, 이리오모테섬 그리고 이 책의 3분지2를 채우고 있는 시코쿠 순례길을 다루고 있다. 물론 이 책은 기본적인 여행 안내 정보를 담고는 있지만 그렇다고 순전히 여행 안내서는 아니다. 김남희의 다른 책들과 마찬가지지만 정보는 덤일뿐이고 책은 줄기는 작가의 사색의 흔적이고 자연과 인간, 인간과 인간간의 소통과 교감의 기록이다.


이 책의 첫장을 채우고 있는 야쿠시마는 규슈 남단에 부속되어있고 울릉도의 3배정도 되는 크기의 섬이란다. 일년 내내 비가내리고 원시 열대림이 덮여있는 이 섬은 미야자키 하야오의 만화영화 [원령공주]의 배경이기도 하다. 물이끼가 바위를 덮고, 수백년 된 삼나무가 울창해 그 숲속 어디엔가  숲을 지키는 정령이 살고 있을 것만 같은 그런 섬이다. 그 섬을 걷고 도 걸어 수령이 7,200여년이 되었다는 삼나무 조몬스기를 만나러 가는 길은 필자 김남희가 정념 삶을 과정 속에서 내칠 수 없었던 근본적인 물음, 인간과 우주, 삶과 죽음의 신비에 대한 물음에 대한 해답을 찾아가는 길인듯 하고, 긴 여정끝에 만난 조몬스기는 필자 김남희에게 말없이 세상의 진리를 전해  줄 것 같다. 최소한 야쿠시마를 걸다보면 육식화된 몸, 동물적인 정신이 숲의 정기에 씻겨 초식화된 몸으로 식물적인 정신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을 것 같다. 김남희를 통해 내 생에 꼭 한번 가보고 싶은 곳의 목록에 야쿠시마를 올려본다.

필자의 두번째 발길은 오이타 현의 유후인으로 향한다. 유후인은 유휴가케산으로로 둘러쳐진 조그마한 마을이다. 온천이 있고, 조그마한 가게들이 빼꼭히 들어찬 거리가 있고, 작은 미술관과 민예점들이 늘어선 관광지다. 유후인은 1970년대에 와서 '기획된' 관광마을이란다. 하지만 '관광마을'의 어감이 주는 인공적 혹은 조잡한 이미지가 필자를 통해 유후인의 역사를 들어보면 확 사라진다. 대규모 개발과 보전의 갈림길에서 주민자치기구를 결성하여 보전의 길을 선택하고, 단순한 보전을 넘어 마을이 존속할 수 있는 생활기반을 있는 그대로의 자연과 주민들의 삶과 같이 해 왔던 지역 문화를 이용하여, 최소한의 단장을 통해 오늘날 일본인이 살아 생전에 가장 가고싶어 하는 마을로 거듭나게 했단다. 껍데기만 보고 다소 실망스러웠던 유후인을 필자를 통해 다시 느껴 볼 수 있게 된 점이 너무 고맙다.



필자의 발길은 오끼나와와 이시가키섬 등을 거쳐 시코쿠에 이른다. 이책의 2/3분량을 차지하고 있는 시코쿠 길은 책의 분량만치 오랜 역사를 가진 순례길이다. 일본인의 정신세계를 이루는 양축의 하나인 불교의 순례길이자 수백년동안 민중의 삶속에 녹아 든 풍습과 문화를 낳은 시코쿠 순례길은 어쩌면 일본의 가장 대표적인 걷기 길인지도 모른다. 그 길을 따라 김남희는 이 길을 만든 당사자인 고보 다이시의 가르침이 아니라 시코쿠 순례길이 만든 길가 주민들의 인정과 삶을 대하는 태도로 부터 많은 것을 배우고 느까고 있는 것 같다. 이 길을 걷고 나면 사람에 의해 받은 상처가 치유되고, 사사로운 원과 한이 보편적인 인류애로 승화될 것 같은 희망을 준다. 나도 언젠가 오헨로상이 되어 시코쿠 길위에서 상처 받은 다른 사람들과 포옹할 수 있을 것 같다. 필자 김남희가 고맙다.

시코쿠와 규수 지역의 대표적 걷기길에 대한 김남희의 여행기인 이책은 일본의 도시에 국한된 시야를 가진 사람들에겐 일본 이해의 폭을 일본의 농촌, 일본의 자연까지 넓힐 수 있도록 안내할 것 같다. 그리고 김남희가 길을 걷는 내내  '친절한 일본인과 뻔뻔한 일본정부'사이의 괴리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는 문제에 봉착했다고 한다. 나 역시 이제 막 배우기 시작한 일본의 매혹적인 문화가 어떻게 평생을 가져왔던 일본에 대한 선입견과 조화를 이루거나 그 선입견을 수정해 나갈 지 아득하기만 하다. 하지만 김남희의 발길을 따라 일본의 자연, 일본인의 삶을 날 것 그대로 속속들이 만나다 보면 추악한 국가권력과 분리된 일본의 매력을 갈등없이 받아들일 수 있을 것만 같다.  

[일본의걷고 싶은 길]을 만나 다시 한번 더 일본의 아름다움에 빠져들고, 한달 앞으로 다가온 규슈여행에 대한 기대감으로 가슴 부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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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2C(봉화, 영양, 영월, 청송)라고 불리는 경북과 강원도의 지자체가 시군간 공동사업의 하나로 '외씨버선길'을 만든다. 주관을 (사) 경북북부연구원이란 곳에서 맡았고, 그 산하에 일종의 '사업단'을 지난 7월 1일자로 발족시켰단다. 이 사업과 관련하여 봉화군민의 한사람으로 지난 5월 제주 올레길 연수에 이어 이번 지리산둘레길 벤치마킹을 다녀왔다. 하지만 두번의 연수를 통해서도  안타깝게도 '외씨버선길'의 성공에 대한 확신은 아직 없다. 그 이유중 가장 중요한 것은 두번의 연수를 통해서도 외씨버선길의 실체에 대해 별로 듣지 못했다는 것이다. 조지훈의 시 [승무]의 한구절에 나오는 '외씨버선'으로 BY2C를 대표하는 걷기길의 이름으로 삼는다는 것과 이 지역의 문화적 자연적 자원을 통합한 '생태관광길'을 만든다는 것과 이미 일부 예산은 내려와 있고, 3년간 총 100억이 투자될 거라는 사실이 내가 아는 '외씨버선길'에 대한 전부다.

2009년 이웃과 떠난 봉화군 명호면 관창리의 마을길걷기

아직은 충분히 알지 못한 상태에서 드는 생각이지만  두번의 연수를 통해 만난 올레길과 둘레길의 사례와 '외씨버선길'은 거의 완전히 서로 대척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가치를 찾아 길을 기획하고, 그 가치를 중심으로 사람이 모여 가장 생태적이고 공동체적인 방식으로 만들어 나가는 길이 올레길과 둘레길이라면 외씨버선길은 어쩌면 가장 개발주의적이고 토목주의적인 사업방식에 기반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외씨버선길'은 길의 실체보다 예산이 먼저 확보된 성과주의적이고  예산따먹기식 사업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관과 관변단체가 토목주의적 사업 방식으로 추진하는  '걷기 길 만들기'는 사실 형용모순이다. '걷기길'을 만드는 과정이 바로 그와같은 토목주의,  개발만능주의의 주류문화에 대한 저항이자 대안의 모색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몰각한 걷기길 만들기는 애시당초 불가능하다. 걷기길은 길의 원초적 폭력성을 극복하고 마을과 마을,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을 잇는 생명의 길, 순환의 길이다. 
 
올레길이나 둘레길은 단지 물리적 공간에 놓여있는 길이 아니다. 흙바닥위에 길이 놓이기 전에 사람과 사람 사이에 더불어 나눌 가치가 확보되고, 사람의 마음과 마음을 잇는 정신의 길, 마음의 길이 먼저 형성되었다. 그와같은 과정없이 뜬금없이 '예산'만으로 만들어지는 길은 말이 '걷기길'이지 기존의 '도로'에 다르지 않다.  '외씨버선길' 만들기에 다리를 놓고 고속도로를 건설하는 토목공사적 마인드로 접근할 경우 그 결말은 말할 필요도 없이 비극적일 것이다.

그래서 '길의 가치, 길의 정당성에 대한 지역주민의 승인과정이 있는가?' 는 물음은 길을 만드는 과정 끝까지 되풀이 해서 묻고 또 물어야하는 '주문'이다. 그 과정을 무시한 대표적 사업이 바로 MB의 4대강폭거다. 그래서 사람들은 4대강 사업의 비극적 종말을 예견한다.  외씨버선길은 그와 같은 오류을 피해야한다. 시작부터 잘못끼워진 단추라면 다시 풀어 처음부터 다시꿰거나 덜 궨 아랫단추부터라도 재대로 궤어야 한다. 안동의 퇴계예던길의 사례가 바로 지역주민과의 공감없는 사업의 어려움을 잘 보여주고 있다.

멀리보면, 스페인의 카미노 데 산티아고나 일본의 시코쿠 순례길이 천년넘어 이어지고 세계인으로부터 사랑받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아낸다면, 다리를 놓고 고속도로를 건설하는 토목공사적 마인드로 '걷기길'을 만들어 봤자 끝내 실패하고 말 이유들을 충분히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걷기길은 순례길이고, 치료의 길이고, 화해와 소통의 길이다. 단순화하면 길은 문화고 가치다.

외씨버선길'의 앞날이 순탄하지 못할 것 같은 예감을 피할 수 없는 또 하나의 이유는 바로 '외씨버선길' 정신의 부재다. 제주 올레길과 지리산 둘레길의 정신이 무엇인지 제시하라고 누군가 요구한다면 버벅거릴 수 밖에 없겠지만 '올레주의' '지리산주의'라고 해도 좋을 그 나름의 독특한 가치가 있고 철학이 있다. 그런데 '외씨버선길'은 나름의 고유한 '정신'이나 '가치' 나아가 테마 자체가 없거나 너무나 미약하다. 조지훈이 인지도가 높은 시인이고, 승무가 그의 대표적인 시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래도 2% 부족함을 지울수가 없다.

그래서 나는 '외씨버선길' 만들기를 반대하는가?
그렇지는 않다. 걷기는 시대의 트랜드를 넘어 인간 삶의 필수행위의 하나로 자리잡을지 모른다. 따라서 '외씨버선길'이 단지 올레길이나 둘레길보다 늦게 시작해서 실패할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러면 어떻게 외씨버선길을 만들면 좋을까? 앞으로 마을길을 걸으며 수없이 곱씹고 고민해야할 것이다.
단지 현 사업단이 운영되는 3년의 사업기간이 사업의 완성이 아니라 외씨버선길의 초석을 닦는 기간이어야한다는 것과 더불어 '외씨버선길'을 만드는 과정이 단기적 프로젝트의 성공사례나 중안중부예산 따오기의 성공사례가 아니라 수백년을 이어질 명품길을 만든 사례가 될 수 있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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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 한번은 순례여행을 떠나라'(경민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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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코쿠 지방의 88개 성지순례 사찰 중 75번 사찰인 젠츠우지를 순례 중인 일본인들. 이들은 이승의 업장을 없애기 위해서 흰색 수의를 입고 다니며 88개 사찰을 순례한다./김은진 기자
 

책 제목만 보고 나는 대답했다.

'그래. 떠나자 한번쯤은...'

하지만 금새 의문이 떠올랐다.

'중세도 아닌데 갑자기 순례길이라니?'

'나는 종교인도 아니잖아?'

그리고 짧은 망설임끝에 보다 근본적인 결론에 도달했다.

'그래 역시 일생에 한번은 순례길을 떠나야지.

아니 우리 인생이 바로 순례길의 연속이 아니든가?'

 

'' '걷기'가 유행이 되는 시절을 낳은

인간이 지나온 역사를 뒤돌아보자.

인간은 어느날 스스로 만물의 영장이기를 포기했다.

그것은 지상의 모든 존재를 식민통치하는 신으로부터 버림받아서가 아니라,

인간 스스로 낡은 신과 더불어 새로운 신을 맞이했기 때문이다.

 

새로운 신을 통해 인간은 지상의 천국을 열망했고,

그리고 지상의 천국이 세워지는 하늘에는 항상 낡은 신의 호위가 있었다.

그렇게 인간은 세계를 지배하려했지만,

새로운 신은 또다시 인간을 통해 세계를 지배하고자 했다.

결국 낡은 신은 두터운 철문과 높은 담이 둘러처진 교회에 갇혔고,

인간을 지배하기 시작한 새로운 신은 베일을 벗고 본색을 드러냈다.

그것은 '자본'이었다.

위대한 조물주와 만물의 영장인 인간의 계약은 깨어지고,

세상은 '자본'의 식민통치를 받게 되었고,

인간은 자본의 지배를 수행하는 '총독'이 되었다.

 

그 결과는 참혹했다.

인간은 스스로의 가치를 포기하고,

자본의 노예로서 인신포기각서에 서명해야했다.

이제 인간은 물량화되고, 계량화되고

그리고 이윤을 위한 '투입 요소'가 되었다.

그것도 위대한 '자본'의 하위 범주로 말이다.

 

그리고 자본의 지배가 정교해지는 만치

인간은 인간 본연의 모습에 목말라했다

인간은 세계를 지배하고자하는 꿈에 의문을 제기했고,

이제 그 스스로의 삶의 지배자가 되고자 했다.

그렇게 인간은 새로운 신도 낡은 신도 아닌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섬기는 존재가 되었다.

인간은 섬기면서 동시에 섬김을 받는자가 되고자 했다.

 

그 깨달음의 끝에 사람들은 갑자기 길을 나서기 시작했다.

스스로 자기 삶의 가치를 찾아 길을 떠난단다.

신경정신과가 보편화되고, 우울증이 마음의 감기 정도로 받아들여지는 세상,

온갖 치유 프로그램이 범람을 하고,

기성종교의 틀을 넘어 새로운 종교마저

위대한 과학의 시대를 침범하는데

 

인간은 다시 흙과 바람과 태양과 몸이 만나는 원초적 경험을 찾아 나선 것이다.

'걷기'는 그렇게 붐이 되었고, 카미노데 산티아고가 오시코쿠순례길이

그리고 올레길과 지리산 둘레길이 탄생했다.

 

순례길에서는 지친 다리의 노고를 들어주고,

순례 도중에 죽음을 맞이할 경우 비목으로 쓸 지팡이 츠에는

어쩌면 순례가 끝난 뒤에서 영원히 가슴 속에 담고 다녀야할 지팡이 인지도 모르겠다.

살아서 의지타가, 죽어서 비목으로 남길 손때 찌든 지팡이 하나쯤 가슴속에 안고 산다면,

우리는 자신의 삶을 그래도 덜 천대하고 더 사랑하게 되지 않을까?

 

인생의 한번은, 최소한 한번은 스스로의 삶을 찾아 먼 순례길을 떠나야 한다. 그길은 영원한 방랑의 길이 아니라 잃어버린 자신의 삶의 가치를 찾아 출발지점으로 돌아오는 길이다. 그리고 순례를 떠나기 전과는 다른, 순례를 다녀왔던 사람의 새로운 삶을 살고 싶다.

 

이 책이 테어나도록 한, 필자의 우울에 경의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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