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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월13일 포카라를 떠나 카트만두에 도착, 14일 타멜과 박타푸르를 주유하다 15일 일행들은 모두 한국으로 출국하고 우리 부부만 덩그러니 남아 새로운 여행을 시작하다.

네팔 최고급 버스라는 자가담바를 타고 포카라 카투만두간 트리뷰반 하이웨이를 하루종일 달렸다. 예상 시간 7시간이라고 하지만 예상은 그냥 예상일 뿐이었다. 버스가 겨우 카트만두로 들어서는 마지막 고갯길을 넘어설 무렵 출발한지 9시간이 다되어 가고 있었다. 긴 시간이지만 버스는 아늑했고 길은 편안했다. 일반 마이크로버스 같은 난폭운전도 없었고 스튜어디스의 서비스도 지루함을 줄이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푹신한 좌석에 깊게 앉아 따사로운 햇살을 받으며 지난밤 꾸었던 지독한 꿈을 회상했다.

늘 반복되는 꿈이지만 세월이 가도 공포는 줄지 않았다. 나의 악몽은 늘 30살 전후에 멈춰. 대학원생의 신분이지만 학문을 계속할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다른 삶의 전망도 없고, 결혼은 하고 아이까지 있는 상황에서 먹고살 방도도 없는데 목을 죄는 수업의 하중은 날로 더해가는그때로 나는 다시 돌아간다.  꿈 속에서는 늘 나는 나를 확신하지 못한다. 과외를 할려고하지만 내가 가르칠수 있을까 영어는 원래 못하고 수학은 다 잊어버렸는데 어떻게하지 가슴졸인다 이어진 꿈에서 리포터를 제출해야하는데, 졸업논문을 작성해야하는데, 공부를 해야하는데 마냥 식은 땀을 흘리며 쫒기게 된다. 그리고 장면이 바뀌어 과사무실엘 갔는데 갑자기 내가 학생인지 확신이 들지 않고 졸업식장을 갔는데 내가 졸업생이 맞는지 학점은 다 땄는지 확신이 들지 않아 당황하며 잠을 깼다. 늘 반복된 꿈이지만 사랑곳까지 와서 같은 꿈을 꾸고 식은땀을 흘리며 선잠을 깨고나니 기분이 착잡했다. 힘들었던 그 시기를 지나온지 25년이 넘었는데 나의 무의식은 아직 그 시절에 사로 잡혀 있는걸까 알 수 없었다.

버스가 카트만두로 들어서는 검문소를 지나자 시커면 흙먼지가 거리를 휩쓸고 버스를 덮쳤다. 창틈으로 스민 먼지에 이내 목은 칼칼해지고 뿌연 흙먼지가 온몸에 달라붙었다. 도로는 온통 공사 중이었고, 비가 내린 기억조차 없는 건기다 보니 한순간 앞이 아무 것도 보이지 않을 만치 두터운 먼지가 거리를 덮고 있는데다 심각한 교통체증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카트만두에 들어선지 한시간이 훨씬 넘어 종점인 안나푸르나 호텔 마당에 도착했다. 카트만두 뷰띠끄호텔에 메일로 픽업을 부탁해놓은 택시와 룸보이 빔센이 우리를 맞았다. 교통체증으로 정확히 예정시간 3시간을 넘겨 우리가 도착했는데 기사는 그 3시간 동안 우리를 기다렸다고 했다. 불평이라기보다는 아무렇지도 않은 사실을 단지 알리는 표정이 더 당혹스러웠다. 혹시 우리만 손님으로 받아도 오후 벌이로 충분하다고 받아들이는 건지 묻고 싶었지만 감히 묻지 못했다. 어떤 경우도쫒기지 않는 것 같은 시간에 여유롭고 관대한 네팔인의 품성이 부러웠다.  모처럼 숙소 인근의 마은틴스테이크하우스에서 저녁을 먹고 아까운 저녁시간을 잠으로 채웠다.

일행의 출국을 앞두고 온전히 남은 카트만두의 마지막 하루를 시작하면서 정확히 어떻게 보낼 것인지 계획하지 못했다. 호텔을 나와 타멜 거리거리를 걷고 쇼핑도 하고 그리고도 시간이 남아 논의 끝에 박타푸르를 향했다. 일행들은 이미 여행 초기에 파수파티나트와 보드낫을 다녀왔기 때문에 남은 반나절을 값지게 보내기에 박타푸르만한 곳이 없었다. 라트나 버스파크에서 버스를 타고 30분이 채 지나지 않아 박타푸르에 도착했다. 박타푸르는 지난 2015년 4월 25일 대지진으로 엄청난 타격을 받았다는데 그 상처가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일부 건물은 흔적없이 무너져 내렸고, 골목몰목의 건물들 조차 긴 막대와 대나무로 아슬아슬하게 받쳐져있는 경우가 많았다. 불안해서 어떻게 저기에 살까 걱정되었지만 마땅한 대안이 없는 상황에서 주민들은 위험을 감내할 수 밖에 없는 처지같았다.

박타푸르는 카트만두와 파탄과 더불어 카트만두벨리의 3대왕국의 하나로 17세기 후반 조성된 왕국이라고했다. 순례자의 도시를 의미하며 BHADGAON이라고도 불리는 박타푸르는 다른 왕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개발이 덜되어 온전히 중세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듀바르 광장을 지나 지명도 모르고 어디로 이어지는 지도 모르는 골목길을 헤메기 시작했다. 도자기가마터도 지나고 여러가지 야채를 파는 노점상들이 늘어서 있는 골목도 지나 눈에 익은 Nyatapola 탑에 이르렀다. 그 자체가 하나의 사원이고 그앞쪽 마당에 같은 이름의 카페에서 5년전 차를 마시던 기억이 새로웠다.

광장과 사원으로 어우러진 구역을 서쪽으로 나와 인공호수 근처에 이르자 많은 인파들의 북적되고 음악소리가 들려왔다. 소리와 풍경을 쫒아 학교 운동장 같은 곳을 드러서니 수십명의 아이들이 가사를 입고 무슨 예식을 하고 있었다. 어쩌면 저 가사를 입은 아이들이 승려가 되는 예식을 올리는 그런 자리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행사는 그리 엄숙해 보이지 않았고 조금은 분주하고 소란스러웠다. 10여명으로 구성된 팀들이 나와 노래를 부르고 의상이 달라 꼭 부족을 달리하는 것같이 보이는 다른 팀이 이어서 노래를 불렀다. 한쪽에 늘어놓은 게시판 같은 것에는 기부금으로 보이는 목록을 적어놓기도 했고 마당 한켠에는 손수건 모양의 여러색갈의 천을 가지런히 늘어놓고 참가자들끼리 음식을 나누고 있었다. 영문을 몰라 휘둥그래한 눈으로 인파들 사이를 헤메다 카트만두로 돌아가기 위해 버스파크를 찾았다. 박타푸르를 떠나려는 우리 눈앞에 갑자기 전통밴드가 지나가고 신상을 앞세운 행진이 이어졌다. 타악기 중심의 거친주는 애조와 더불어 신령한 서정을 선물했다.  가락과 풍광에 매혹되어 행렬의 끝이 사라질 때까지 넋을놓았다.

 

 

 

카트만두로 돌아오니 라트나 버스파크에서 타멜로 이어지는 거리의 공터에는 수천명의 궁중이 모여 있고 길은 인파로 넘쳐났다. 무슨 정치 집회인지 축제인지를 끝내 물어보지도 못한 채 우리는 군중들의 파도에 휩쓸려 가까스레 타멜로 돌아왔다. 그런데 돌아오는 길에 카트만두 광장 인근에서 와이프를 잊어버렸다. 입장료를 10불이나 내야되는 구역인데 와이프는 현지주민같은 자연스런 걸음으로 무사통과를 해 버렸고 우리 일행은 쫒아들어가기 위해서는 입장료를 내야하는 상황이 되어 그냥 연락을 시도해서 다른 곳에서 만나는게 낮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일행들이 선물을 사러 돌아다니는 사이 나는 와이파이가 되는 까페에 들어가 와이프랑 연결을 시도했다.  연결은 되다가 말다가 불완전했지만 겨우겨우 최소한의 의사소통은 될 수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일행들은 먼저 네와르 음식 전문점이면서 문화공연도 하는 유명하다는 Nepali Chulo로 향했다. 일행들에겐 오늘이 네팔에서의 마지막 밤이다 보니 특별한 이벤트가 필요했다. Nepali Chulo는 여러군데 묻고 정보를 얻어 가장 고급스런 네팔전통식당으로 알고 선택했다. 먼저 도착한 일행들의 가슴을 졸인 끝에 와이프는 릭샤를 타고 도착했고 공연과 식사를 진행했다. 하지만 네팔물가를 고려할 때 엄청나게 비싼 식사임에도 불구하고 공연은 평범했고, 음식은 기대 이하였다. 나름대로 고급스런 식당건물이 음식값을 부풀려놓은 것으로 밖에 이해되지 않았지만 네팔에서의 마지막 만찬은 조금은 억울하게 끝이 났다.

 

 

15일 친구들은 트리뷰반 공항을 통해 출국하고 우리부부는 왠지 모를 허기를 느꼈다. 당장 내일부터 우리 부부 단독의 여정을 이어갈 예정이라 조금은 홀가분하고 들떠야할 것 같아지만 기분은 한없이 가라앉았다. 기분전환을 위해 호텔을 나섰고 네팔민속박물관을 찾아 나라얀히티왕궁앞의 더바마그 거리를 걸었다. 지도에는 나와있는 민속박물관은  찾지 못하고 인근에서 옥류관이라는 북한식당을 우연히 맞딱뜨렸다. 반가운 마음에 식당을 들어섰는데 우리를 맞는 여성 종업원의 눈길은 곱지 않았다. 주관적인 느낌일까 의아했지만 최대한 편하게 마음을 먹고 음식을 주문했다. 음식에 대해서는 인상적이지 않았지만 식당의 분위기는 오랫동안 뇌리에 남을 것 같았다. 왠지 모를 서먹함과 낯설음이 현지 네팔리 식당보다 더한 느낌이 들었다. 찾지 못한 민속박물관의 위치를 물어보니 네팔산지가 3년이 된다는 종업원은 알지 못한다고 답변했다. 그리고 무엇인가 물어볼까봐 미리 경계하는 듯한 눈빛이 가슴아팠다. 정치 체제의 차이가 같은 한족사이에서도 이리 정서적 벽을 세울 수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지난 보름을 같이 했던 일행들이 떠난 타멜거리를 걸으며 저녁을 맞았다.  5명의 일행이 떠나간 타멜은 갑자기 텅 비어보였다. 나에게는 네팔 여정을 같이 하기 전의 친구는 네팔 여행을 같이한 뒤의 친구와 같은 사람일 수 없었다.  나는 그들과 평생 네팔의 추억을 나누고 의지하며 살아갈 사람으로 새로운 인연을 시작하게 된지도 몰랐다. 그래서 기뻐야했고, 마음 따뜻해야했다. 그런데 쓸쓸함이 밀려오고 걸음은 허전해졌다. 조금은 고급스런 저녁으로 스스로를 위무하고 일찍 들어온 호텔에서 남은 한달 반의 여정을 계획하며 얉은 잠을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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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안한 잠을 푹잤다. 눈은 일찍 떴지만 잠은 충분했다. 남은 경비를 계산해 보고 필요한 선물목록을 만들고, 남은 일정을 살펴보고 일어나 세수를 하고 전날 사둔 빵으로 아침을 떼우고도  7시가 되지 않았다. 다시 침낭속으로 들어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 '바가바드기타'를 읽었다. 브라만과 아트만, 그리고 현신인의 이야기들, 행동하지도 느끼지도 않는 경지, 절대지... 아침부터 머리가 지끈 거렸다.

8시 30분 더이상 견디지 못하고 숙소를 나왔다. 타멜 거리를 벗어나 오늘 목적지인 세계문화 유산에 등제된 박타푸르행 버스파크를 향해 길을 더듬어 나갔다. 하지만 지도와 실제를 일치시키기엔 지도는 너무 단순했고 길은 너무 복잡했다. 한참을 걷다가 출근중인 행인에게 길을 묻고 우리 위치를 확인해보니 우리는 반대 방향으로 걸어 버스파크에서 더 멀어져 있었다. 박다푸르행 버스 파크는 타멜에서 걸어가도 될 만치 가까운 곳이었는데, 아침부터 지치기 싫어 결국 택시를 타고 버스 파크에 도착했다. 버스를 타고 가다 개통한지 얼마되지 않는 멋진 도로를 달렸다. 네팔와서 한번도 보지 못한 신호등까지 설치되어 있는 도로 곳곳에는 일본의 원조로 만들어졌음을 알리는 안내 간판이 있었다. 버스를 탄지 30여분 지나 박타푸르에 도착했다. 한 사람당 15달러나 하는 비싼 입장료 때문에 잠시 망설였지만 그냥 포기하기엔 너무 아쉬웠다.

막상 박타푸르 구역안으로 들어서니 박다푸르가 왜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고 입장료가 그만치 비싼지 금방 공감이 되었다. 지금은 사라져버린 옛왕국의 영화를 느끼면서 살아있는 문화 유산사이를 걸었다. 박다푸르 구역내의 모든 건물은 대부분 붉은 벽돌로 지어진 2백년이상된 건물들이지만 여전히 사람이 살고 있었다. 전시용 으로 만든 '민속촌'이거나 거주민이 없이 보전되고 있는 박제화된 유적지가 아니라 그대로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시가지 자체가 그냥 살아있는 문화유산이었다. 카트만두 시내에서 만난 아산바자르의 골목에서 보았던 낡은 건물의 때묻고 썩고 삯은 문지방, 갈라진 벽돌 그리고 골목을 넘쳐나는 쓰레기와 가난한 네팔리의 삶은 지금은 사라진 네팔의 옛 영화를 증명하기에 조금은 부족해 보였다. 하지만 박타푸르에 들어서자 여전히 가난한 사람들의 삶이 가감없이 드러나는 중에도 밀집한 적벽돌 건물과 사원, 탑과 길을 덮은 붉은 벽돌의 화려한 문양 등이 지금은 떼가 타고 낡고 삯았지만, 한 때 이 왕국이 얼마나 번창했고 아름답고 위대한 문명을 자랑했는지 쉬 느낄 수 있었다.

아침 일찍 박다푸르를 찾은 덕분에 우리가 도착했을 때 구역내에는 관광객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다행히 관광지가 아니라 주민들의 삶의 터전인 박타푸르의 모습을 느낄 수 있어 오히려 좋았다. 등교하는 학생들과 출근중인 주민들의 분주한 발걸음으로 고색창연한 박다푸르는 삶의 훈기가 돌고 생동감이 넘쳐났다. 오늘 하루 다른 일정은 전혀 잡혀있지 않았고 오직 박다푸르만 보고 느끼고 걸으면 되었기 때문에 출근길에 바쁜 네팔리 사이로 너긋하니 골목과 광장을 오가며 박다푸르의 과거와 현재를 소요했다. 골목 모퉁이에 차려진 구멍가게의 물건들을 살피고, 시골장터같은 골목을 지나면서는 우리 역시 장보러 나온 사람마냥 네팔리와 휩쓸려 난전을 두루 살폈다.

 

시간이 지나고 하나둘 관광객의 발길이 늘어나자 우리는 다시 그들과 어우려져 관광객의 눈으로 다시 박다푸르를 보기 시작했다. 같이 광장을 가로지르며 탑과 석조 조형물을 배경으로 사진도 찍고, 군인들이 경비중인 흰두사원을 이교도가 들어갈 수 있는 지점까지 들어가도 보고, 박다푸르의 과거와 현대의 예술작품이 동시에 전시되어 있는 박물관도 들렀다. 광장은 점점 더 관광객의 발길이 늘어났지만 의외로 박물관 안은 한적했다. 사실 박물관 안에 전시된 작품보다 박물관 바같에서 만날 수 있는 네팔리의 삶과 삶을 이어가는 공간, 그리고 삶이 묻어나는 각가지 생활용품, 장식 등이 더 예술적이라서 굳이 박물관에 입장료를 내고 들어올 필요가 없는지도 물랐다. 박물관에 전시된 작품보다 전시공간이 된 건물이 더 멋있는 박물관을 나왔다. 광장을 내려다볼 수 있는 탑에 올라 박타푸르 광장들을 쓸고 지나가는 관광객과 네팔리의 걸음속에 묻어나는 박다푸르의 옛 향기를 맡고, 현재의 삶을 느끼고, 그 미래를 점쳤다.  

박다푸르의 중심 듀발스퀘어에 이르자 수년전 아내가 네팔 여정중에 잠시 들렀지만 정확히 기억해 내지 못해 안타까워했던 네팔의 사원을 회상해 내었다. 분명 카트만두 어디 전통 시장 같은 곳이었다며 카트만두에 도착하자 마자 이야기를 꺼냈지만 아산바자르와 타멜을 포함해 카트만두 시내를 다 뒤지고도 찾아 내지 못한 추억의 장소를 박타푸르에 와서 확인하게 되었다. Cafe Nyatapola! 듀발스퀘어 한켠에 자리잡고 있는 3층 짜리 낡은 목조건물로 바로 그 카페가 아내와 여성문화계 선배 동료들과 함께 티벳을 거쳐 잠시 네팔에 들렀을 때 차를 마시며 네팔의 향기를 느껴볼 수 있었던 곳이었다. 배도 출출해지고 다리고 지쳐갈 즈음 Cafe Nyatapola에 들어섰다. 제일 위층 듀발스퀘어 전체가 내려다 보이는 모퉁이에 자리에 잡아 간단한 샌드위치를 들고 커피를 마셨다. 이제 한가롭게 차라도 마시는 시간이면나의 가슴에는 여행의 설레임보다 끝나가는 여정에 대한 아쉬움이 차올랐다. 다 지나가리다. 하지만 세상의 섭리가 어그러지는 숱한 순간들이 있었듯 내 작은 삶을 이루는 지금의 시간도 잠시 잠깐이나마 흐름을 멈춘다면 얼마나 좋을까...

박타푸를를 빠져나와 타멜행 버스에 올랐다. 버스는 곧바로 카트만두로 접어들었고 트리뷰반 공항을 스쳐지나갔다. 카트만두-박다푸르간 새길을 따라 번화가를 달리자 건물외벽에 늘어선 간판과 광고판이 눈에 들어왔다. 익숙한 삼성과 엘지같은 한국기업은 물론 코카콜라, 소니같은 세계적 자본의 간판이 즐비했다. 척박한 땅 네팔에서도 자본은 자신의 지배 공간을 확장하며 무한 증식을 계속하고 있었다. 익숙한 세계적 자본의 광보판보다 더 인상적인 것은 어학학원을 홍보하는 플랭카드였다. 네팔은 편집광처럼 영어 공부에 몰빵하는 한국보다도 어쩌면 더 외국어 공부에 자신의 미래를 거는 사람이 많은지도 몰랐다. 대부분의 초등학교에서 외국어를 가리키고 아예 '외국어 초등학교'까지 있는 모양이었다. 외국어를 배워 외국으로 나가 돈을 벌고 자신의 꿈을 실현하는 기회를 잡거나, 네팔에 남아서도 관광을 위시한 비지니스에 외국어가 필수적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런지 아니면 영어와 네팔어의 구조적 유사성 때문인지 초급 교육을 받은 정도면 다 영어를 어느정도 구사한다고 했고 실제로 만나보니 그런것 같았다. 대학나온 한국사람보다 초등학교만 나온 네팔사람들이 영어를 더 잘 하는것 같았다.

그런데 학원 안내 플랭카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드러나듯 몇년전부터 네팔에는 한국어 붐이 일어났다고 했다. 한국은 그들에게 기회의 땅이고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고 했다. 네팔리에게 물어보니 일본을 더 선망하지만 일본은 현실적으로 들어가 일자리를 덛기가 너무 힘들고 두번째로 한국을 선호하는데 한국은 자신만 잘하면 들어가 일을 구할 수 있는 현실적으로 실현 가능한 나라로 여긴다고 했다. 그러다보니 최근에는 한국어가 제일 인기있는 외국어가 되었다고 했고, 역시 여행중에 가이드든 포터든 지나는 사람들이건 우리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이야기하면 자가와 말을 걸고 자신이 아는 두어마디의 한국어를 자랑하기도 했다. 박타푸르를 나와 카트만두거리를 달리면서 한국 자본의 힘을 느껴야 하는 이율배반적인 묘한 감정을 안고 타멜에 도착했다.

인드라쵸크, 아산바자르 그리고 타멜거리를 배회하다 다시 J.Vill을 찾아나섰다. 다행히 안나푸르나 라운드 때 차메에서 만났던 한국학생들을 만났다. 참체에서 포카라로 먼저 떠난 학생들은 반디푸르에서 머물다 오늘 카트만두에 들어왔다며 J.Vill의 위치를 알고 있었다. 드디어 파샹을 상봉했다. 혹시라도 카트만두에서 만나 맛있는거 사먹자고 한 약속이 빈말이 될까봐 걱정했었는데 다행히 파샹을 만나게 되어 너무 기뻤다. 파샹과 청량음료와 피자를 먹고 파샹의 소개로 자신의 친구가 운영한다는 '캐시미르 샾'에 들러 야크와 야생 염소의 속털로 만들었다는 머플러를 구입하고 파샹의 삼촌이 운영한다는 여행사에 들러 인사를 나누었다. 파샹까지 봤으니 마음에 남을 일들이 다 다 끝나 마음도 편해졌다. 해도 저물어 숙소에 들러 구입한 선물을 내려놓고 '경복궁'이라는 한식당에 들러 맛있는 된장찌게를 먹었다. 그리고 내일의 여정을 그리며 '네팔짱'의 두번째 밤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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