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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1일 아침, 뷰띠크 호텔 체크아웃하고 택시로 마야거르츄로 이동하여 짐을 풀고, 왕궁박물관과 파탄을 돌아다니고, 22일 공항에서 앞으로 일주일 여정을 같이할 L씨를 맞이하고 타멜에서 시간을 보낸 뒤, 복통을 만나 23일 내내 방에서 보냈다.


100리터 배낭 두개와 두사람이 소형 택시를 타고 마야거르츄가 있는 수어러꾸떼로 향한다. 5분만에 도착한 마여거르츄는 트레커들이 다 떠나고 적막감마저 감돌았다. 혼자 계신 관리자분께 인사만 하고 방으로 짐을 옮긴뒤 단촐한 차림으로 Narayanhiti Palace Museum으로 향한다. 타멜거리를 지나고 Garden of Dream을 지나 10시가 조금 넘어 박물관에 도착했다. 11시에 문을 연다니 30분이나 남은 이른 시간이지만 가족나들이객들로 붐비기 시작했. 주변을 둘러보니 안내문이 있고 박물관 입장을 위해 지켜야하는 규칙이 나열되어 있었는데 상당히 위압적이었. 역시 권위적 권력의 소산이겠지만 왕은 죽었고 왕정은 무너졌으며 좌파 민주정부가 들오선지 10년이 지났지만 아직 네팔은 변화를 시도하는 단계에 머물러있는 듯 보였. 거리에서 가장 당당하고 멋진 사람이 총을 든 군인이거나 경찰인 국가에서 시민은 늘 초라하다. 사실 카트만두가 그랬다.

 

박물관은 네팔의 마지막 왕인 가렌드라가 폐위되는 2007년 까지 살던 왕궁이지만 2008년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박물관으로 공개되었다고 한다. 오전 11시부터 오후 3시까지 문을 여는 박물관은 입장을 위해서는 엄격한 소지품 검사를 받고 가방은 물론 촬영을 못하도록 핸드폰까지 맡겨 놓아야 했다. 내부관람 중에도 삼엄한 경비를 서고 있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는데 그렇다고 관람을 방해받지는 않았다. 박물관은 나름 볼거리가 풍부했고, 여행객이라면 한번쯤은 들러 네팔 왕실의 삶을 통해 네팔 문화를 이해하는 기회를 가져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물관을 통해 나는 네팔이 고립된 왕국이 아니라 세계와 풍부한 교류를 한 개방적인 나라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사실 네팔의 역사에 대해 충분한 지식없이 왕궁박물관을 둘러보니 그야말로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한  '구경'이상이 될수 없었다. 단지 네팔 혁명과 왕정의 붕괴과정에 대해 일말의 뉴스라도 접해보았다고 비렌드라 왕의 일가가 아들 디펜드라에 의해 살해된 현장을 둘러볼 때는 왠지 모를 섬뜻함이 느껴졌다. 공식적으로는 왕자 디펜드라가 사랑한 인도 여인과의 결혼을 반대한 부모에 대한 반감으로 술과 마약에 취해 총기를 난사한 사건으로 정리가 되었다고한다. 하지만 비렌드라의 동생으로 비명횡사한 형으로부터 왕위를 물러받은 가렌드라의 음모라는 설을 민간에서는 더 믿고 있었다. 어쩌면 민중의 혁명열기에 국토의 대분분이 장악되고 대도시만 간신히 남아 있던 상황에서 왕정의 종말을 예감한 디펜드라의 광기가 발로되어 일어난 사건이 아닌가 싶기도했다. 종말은 에견되어 있었고 그 악역을 디펜드라가 맡은 것뿐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Narayanhiti Palace Museum을 나와 카트만두밸리의 세왕국중 하나였던 파탄을 향해 남쪽으로 걸었다. 5~6km나 되는 잛지 않은 거리였지만 택시도 버스도 마다하고 걷기로했다. 안나푸르나를 걷는 것과는 달리 혼탁한 공기를 마시며 걷는 도심 트레킹은 쉽지 않은 일이지만 여행자의 거리라는 타멜을 벗어나 그야말로 카트만두의 날것 그대로를 느끼고 싶었다.  mapsme에 목적지를 입력하고 하염없이 걸었다. 앱의 특성때문이겠지만 미로같은 골목길을 오고가는 네팔리와 어깨를 부딪고 만나는 꼬마들과 눈을 맞추고 미소를 주고 받으며 걸을 수 있었다. 어느 순간에는 내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 내가 서있는 곳이 어디인지 당혹스럽기도 했지만 다시 길을 이어주는 앱 덕분에 어느새 바그마티강에 이르고 강을 건너자 UN공원이라는 곳이 나왔다. 청춘 남여들이 데이터를 하는 곳이지만 청춘이 지난 우리 부부도 나무 그늘을 찾아 들어 간식을 먹고 음료를 마시며 휴식을 취했다. 

 

 

Patan은 산스크리트어로 Lalitpur라고 하고 City of Beauty라는 의미라고 했는데 역시 아름다운 도시였다. 카트만두와 박타푸르 그리고 랄리푸르가 공존하던 시절 전쟁 대신에 서로 도시를 아름답게 가꾸는 걸로 경쟁했다고 한다. 그 덕분이겠지만 랄리푸르 역시 박타푸르나 카트만두 못지 않은 아름다눈 건축물들이 듀바르 광장을 중심으로 집중되어 있었다. 듀바르 광장은 입장료를 받고 있는데 이날은 체크 없이 입장이 가능했다. 특별한 날이었는지 근무자가 자리를이탈한 건지 알수 없는 이유로 입장료없이 두바르거리들 들어섰다. 5년전의 기억을 더듬어 지난 지진의 흔적을 찾았고, 사라진 건축물의 빈자리도 보이고 여기 저기 복구공사가 한창인 곳도 많았지만 그나마 도시의 경관 전체가 주는 느낌은 손사되지 않고 살아있는 것 같아 무척 다행스러웠다. 거리는 그곳을 삶의 터전으로 살아가는 주민들의 무심한 표정과 주변을 두리번 거리는 관광객의 호기심 어린 눈이 어지럽게 교차하고 있었다.  아내는 아름다운 거리를 스케치하고 나는 현지인의 무료한 표정으로 파탄의 골목골목을 걷고 오후 늦은 시간에 어렵게 버스길을 물어 타멜로 돌아왔다.

 

1월 22일, 한국에서 쿤밍 여행 끝에 카트만두로 들어와 우리랑 합류하기로 되어있던 L님이 오는 날 공항 마중 말고는 특별히 정해진 일정이 없었다. 수어러꾸떼 골목의 가게에서 장을 보고 직접 조리를 해서 식사를 해결하고 빨레를 한 것 말고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그래도 시간은 가고 도착 예정시간인 오후 4시 30분이 다가오자 숙소에 부탁해 택시를 불렀다. 공항까지는 금방 도착했어야 했지만 길이 막혔고 차는 돌았다. 혹시라도 낯선 공항에 먼저 도착해 헤메지나 않을까, 호객꾼들에게 혼줄이나 나지 않을까 걱정되었지만 역시 네팔의 만만디 수속 덕분에  무리없이 만날 수 있었다. 외국서 만나서 더 반가운 상봉을 하고 숙소로 돌아와 짐을 풀고 타멜을 지나 북한 식당 옥류관으로 향했다. 모처럼 한국서 온 지인과 북한 동포가 서비스하는 한식을 신나게 먹고 내게 주어진 삶에 감사했다. 

1월 23일의 아침을 맞기위해 엄청난 댓가를 치뤄야했다. 전날 북한식당 옥류관에서 먹은 음식이 문제를 일으켰다. 전날 옥류관에서 보낸 즐거운 기억은 악몽으로 변했다. 복통과 설사 오한에 현기증까지 거의 탈진한 채로 아침을 맞았다. 주문한 음식을 대신해 권유한 육개장이 문제인것 같았다. 육개장을 전혀 먹지않은 L은 아무 문제가 없었고, 조금 먹은 와이프는 배탈 정도에 머물렀고, 거의 대부분을 먹은 나는 완전히 초죽음이 되었다. 가져온 비상 약을 먹고 숙소에 부탁해 네팔 약국에서 사다주는 약까지 먹었지만 몸은 정상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하루를 완전히 침대에서만 지내고 나서 극심한 오한과 현기증에서는 벗어났지만 음식을 조금만 입에 대어도 바로 복통과 설사가 잇달았다. 잘 먹고 살찌는 여행이라는 목표는 완전히 무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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