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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군 농민회는 지난 10월28일 여의도에서 진행된 한미FTA저지 집회에 다녀왔습니다. 농민회 동지들은 모두가 사과수확에 하루가 급한 처지에도 불구하고 일손을 뒤로 미루고 길을 나섰습니다. 
여의도에 도착해서는 비싼 주차비에 모두들 놀랐지만 다행히 하루 최고 15,000원인 한강 둔치 주차장에 차를 세울 수 있었고, 국회앞까지 걸어서 집회에 합류했습니다.
집회에 도착하자마자 도로옆 화단에 펼쳐앉아 춘양동지들이 춘양장터에서 준비해온 김밥과 삶은 계란으로 늦은 점심을 떼우고 본격적으로 집회에 합류했습니다.

집회가 행진으로 이어지고, 마지막에는 한미FTA국회상정을 막기위해 국회 진입을 시도했지만 시위자보다 더 많은 경찰과 물대포를 동원해 시위대를 공격하고 연행했습니다. 경찰과 대치하는 곳 마다 맨 앞줄에는 여성동지들이 나서 몸으로 악으로 경찰의 저지선을 뚫었습니다.  결국 폭력경찰에의해 다 연행되었지만 용감하게 국회경내에 진입해 한미 FTA 결사 반대 구호를 외치는 대학생들의 모습에 가슴 뜨거웠습니다. 불편한 몸으로 동지들의 부축을 받으며 국회 경내에 들어선 백기완선생님의 투쟁에 숙연해지기도 했습니다.

오후 늦게 이날 국회상정을 포기한다는 소식에 시위를 정리하고 봉화동지들은 한강둔치공원에 다시 모여 남은 안주로 소주잔을 기울이며 이날 하루의 노고를 서로 치하하며 동지애를 다졌습니다.  평생을 이렇게 싸워오신 농민회선배 동지들과 함께한 가슴벅찬 하루였습니다

이날 최고의 히트는 서울올라가는 동안 길학이 형님이 제안한 구호였습니다.
"고추수입 앞장서는 명박이 고추 똑따삐자!!"
모두 박장대소를 하며 꼭 연단에 올라가 이 구호를 외쳐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그리고 두번째 히트는 면사무소에서 온 '동향파악' 전화였습니다.
두려울 게 없기에 참가자 명단 불러주고 "면장님이 여비주실라꼬예?"라고 되물었더니 상당히 당혹스러워하는 눈치였습니다. 일제시대에 시작되어 군사독재시절에나 하던 주민 동향파악이 명박이 시대에 다시 부활한 것을 보니 씁쓸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한국 농업을 볼모로 내어주고, 나아가 한국을 미국의 한 주로 갖다바치려는 이완용의 후손 이명박 일당의 시도가 11월 초에 다시 있을 거랍니다. 한미FTA저지를 위한 투쟁에 더 많은 농민이 함께 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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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년 10월10일 있은 경북농민대회를 다녀왔습니다.


올해 농산물이 비싸다고
농민이 돈을 벌고 부자가 된듯 여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여름 내내 이어진 장마로 농사비를 배로 늘고
수확은 반으로 줄었는데
그나마 다행스럽게
그네들이 신봉하는 시장원리에 따라
농산물 가격이 오른 것에 불과합니다.

 
그렇게 오른 농산물 가격마저 못마땅한 현정권은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이명박정권은  1%를 위한 경제 정책을 통해
국가 경제를 파탄내고 
급기야 물가폭등을 야기했습니다. 
하지만 이를 무마하고자 농산물 가격 상승이
 전체 물가 상승을 주도한양
여론몰이 끝에
돼지고기 수입에 항공료까지 보조해 주며

망국적 농산물 수입을 자행해 그나마 올랐던 농산물 가격마저
바닥으로 끌어내렸습니다.

흉년에 농산물 가격마저 없는 농촌은
연말에 닥칠 농자금 상환에 벌써부터 걱정이 태산이고,
농자재 외상값에 농자금 이자 그리고 아이들 등록금 걱정에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바로 이를 때 정책적 구제에 나서야할 국가는 침묵하고 있고,
농민이 사회의 일원임을 애써 무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농민들은 경북도청으로 달려가
'재난지구'지정 등을 통한 지원을 요구했습니다.
우리는 국가의 존재이유를 묻고,  
농민의 사회적 기여도에 맞는 공정한(!) 정책적 지원을 요청했지만
그들은 멀찌기 물대포를 세워놓고 로봇같은 무장 경찰로 애워싸고
우리의 목소리를 짓눌렀습니다.

늘 그렇듯 우리는 우리가 뜻을 같이하고 
없는 주머니 털어 버스 대절해서
같이 고함이라도 지를 수 있었던 것에 만족하며

마을로 돌아왔습니다.
 
경북농민대회에 참여하고나서
절망하지 않고, 오히러 즐거운 마음 기쁜 마음으로
마을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같이한 이웃형님이 있고, 형수님이 있고,
아우가 있고 어르신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늘 지는 싸움을 해도 농민은 절망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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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이축제 기간 4일동안 자연미술체험부스를 맡아 오고가면서

다른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농민들의 절규가 담긴 현수막들이다.
물론 내가 농사로 밥먹고 살아야하는 처지기 때문에
그들 구호가 더욱 절실히 다가왔을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축제장의 어떤 볼거리보다도 농민회에서 붙인현수막이
더 가슴에 와닿는 진짜 이유는  
군민의 절대다수인  농민의 이해와 무관한 축제가 
농민의 절망과 소외감을 더욱 두드러지게 했기 때문이다.

농업, 농민의 문제... 한 지자체의 문제일 수도 없고 
결국의 국가의 정체성과 맞불리는 문제겠지만
그래도 지역에서 할 수 있고 지자체가 선도할 수 있는 
정책적 수단이 얼마든지 있어 보이는데 
나는 아직 지역에서 희망을 확인하지 못하고 있다.

농민이 주인되는 세상.
농민이 대접받고 농업의 가치가 인정되는 세상은 
영영 오지 않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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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밥상머리에서 '다단계에 빠진 대학생'  이야기가 나왔다. 한 언론사에 따르면 서울의 거여동, 마천동에 일대에 5,000명 이상의 대학생들이 다단계에 빠져 쪽방집단 합숙을 하고 있단다. 서울 전역으로 보면 약 1만명 정도의 대학생들이 다단계에 빠져있을 것으로 추정된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서울시의  대학생 수를 약 100만명으로 상정한다면 학생 백명당 1명은 다단계에 빠져있는 셈이었다.

대학생 딸을 둔 부모의 입장에서 남의 일로만 느껴질 수 없기도 했지만, 다 떠나서 왜 우리 대학생들이 그렇게 다단계로 내몰리고 있을까 생각할수록 이해할 수 없었고 분통이 터졌다. 아내와 저녁 식사 시간 내내 왜 그럴까, 왜 대학생들이 다단계로 내몰리거나 스스로 몰려들까 묻고 또 물었다.

먼저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지만 비대해진 물직적 욕망, 돈에 대한 집착이 다단계로 학생들의 발길을 이끄는 것으로 보인다. 학생들은 생활고든 소비벽이든 늘 돈이 궁하도록 생활패턴이 셋팅되어 있다. 이는 물론 대학생에 한정된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또한 이는 학생 개개인의 생활습관이나 '정신상태'와 관련된 문제라기 보다는 물질지향적 사회시스템, 가치 체계 전반이 개인을 지배해서 생기는 현상으로 보인다. 여하튼 한국의 대학생들은 늘궁핍하다.

또한 한국사회의 대학생들은 심화되어가는 한국의 정글 자본주의, 극소수 재벌의 독식으로 치닫는 카지노 자본주의 속에서 아무런 개인적 대응력을 갖추지 못한채 절망하고 있다. 여기서 카지노 자본주의란 자본주의의 한 종류가 아니라 자본주의의 한 속성을 말하는 것이다. 소위 '돈내고 돈먹는' 사회에서 그들의 미래는 사회적, 정책적 수단을 통해서 최소한 수준조차도 전혀 보장받고 있지 못하다. 대학생들 대부분은 졸업과 동시에 실업의 늪에 빠지거나 기대에 못미치는 불안정하고 자존감을 주지 못하는 일자리에 삶의 기탁해야할 형편이다. 그래서 그들은 늘 불안하다.

그리고 더욱 중요하게는 우리 사회의 성숙한 '개인 주체'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가족이나 지역 공동체가 무너진뒤 성숙한 개인주체성을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서 개인들이 정체성을 찾는 과정에서 집단이라는 권위에 의존해 매몰되는 현상의 하나가 한국사회의 폭발적인 종교산업의 번창을 가져왔듯, 같은 이유에서 다단계의 폭발적 번창을 이해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사실 대부분의 종교는 다단계 속성을 가지고, 모든 다단계 역시 일종의 종교적 성격을 가지는 것으로 보인다. 집단적 의존이라는 측면에서 그렇다. 사실 학생들이 대학생이 되기까지 언제 한번 입시로 부터 자유롭게 정체성 확립을 위한 정신적 모색의 기회를 가져보기나 했을까. 그래서 그들은 늘 외롭고 그래서 소속감을 원하는지 모르겠다.

결국 한국의 대학생들은 궁핍한 주머니, 미래에 대한 불안, 그리고 외로움 이라는 세가지 이유에서 다단계에 빠져 있는 것 같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뉴스를 검색했다. 기사를 읽다가 발견한 것이지만 부정적 내용의 기사에는 꼭 '다단계' 앞에 '불법' 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런 기사는 불법 다단계와 합법다단계가 구별되어야 하고 합법 다단계는 당연히 보호 받아야할 것으로 상정하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한참을 검색해 봤지만 과문한 탓으로 불법다단계와 합법다단계을 나누는 본질적인 차이는 무엇인지 확인하지 못했다. 자본금의 규모, 합숙의 강요 유무, 반품의 가능 유무 등등 지엽적이고 기술적인 차이를 나열한 자료들을 볼 수 있었지만 다단계의 가치 창출(?) 시스템의 본질적 차이로 불법과 비불법을 나누고 있는 내용을 확인하지 못했다. 고용창출 등 다단계의 순기능을 주장하는 기사도 보이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공감할 수가 없었다.

이런저런 자료를 찾아보니 한국사회에서 약 360만 명 정도가 다단계 종사자란다. 전국의 총 취업자수를
2300만명이라고 본다면 360만이라는 숫자의 크기가 어느정도인지 짐작이 간다.  360만 다단계 종사자가 취업자통계에 포함되었는지 알수 없고, 또한 소위 합법다단계 종사자 수만 집계 한건지도 모를 일이지만 어떤 경우든 충격이 줄어드는 것은 아닐 것이다.
 
다단계가 지배하는 한국 대학 사회의 모습은 카지노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현 한국사회의 한 단면이다. 가슴은 분통으로 터지지만 해결을 위한 처방은 단순하다. 지금보다 학비는 훨씬 싸져야 한다. 반값등록금은 그래서 나온 주장이다. 생존경쟁은 완화되어야하고, 이는 복지의 강화만이 유일한 방책이다. 사회적 안정망과 재교육 시스템이 갖춰지고, 사회적 가치가 공정하게 분배된다면 '대학가 다단계 기승' 같은 문제는 그야말로 봄눈녹듯 사라질 것이다. 물론 자살공화국의 오명도 더불어 사라지고 말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숙제를 우리손으로 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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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내가 고등학교 1학년 시절 소위 '고추파동'이 났다. 기억을 되살려보면 내가 살던 진해서는 아예 국내산 고추를 구경조차 하기 어려웠던것 같다. 어머니가 고추를 사지 못해 걱정하시던 모습이 어렴풋이 기억이 나고, 결국 인도, 멕시코 등으로 부터 수입했다는 모양도 다르고 맛도 맵기만 한 이상한 고추를 평년의 고추값보다도 더 비싸게 사서 먹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리고 까마득이 잊었다. 내 자신이 농사꾼이 될 거라고 생각도 못했기 때문이기도 했고, 1년에 우리가족이 고작해야 5근의 고추도 먹지 않는 식생활의 변화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나는 얼치기 농사꾼이 되어 벌써 15년째 농사를 짓고 있다. 그러다 보니 고추값은 내가 고추농사를 하든 말든 매년 가을만 되면 나의 주관심사의 하나가 되었다. 고추값은 이곳 산골 농민의 1년 생계가 달린 문제고, 그에 따라 당연히 지역 상가의 경기와도 직결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1997년 IMF로 온나라가 들썩이던 그 때, 내가 들어와 살기 시작한 비나리마을은 IMF보다도 고추값 폭락으로 더 고통받고 있었다. 고추 상품 1근 600g가격이 2,200원전후로 형성이 되면서 끝물 고추수확을 포기한 집이 한집두집이 아니었다. 그해 고추수확에 나선 할머니들의 하루 일당이 20,000원에서 22,000원 정도 였으니 하루 일당으로 약 10근의 상품 건고추를 받아가는 셈이었다. 숙련된 한명의 인부가 하루수확하는 건고추 양이 약 40~50근 정도이고, 또 인부들은 따로 교통비를 지불하고 인근의 영주 등으로부터 매일 공수해 오든지 아니면 아예 가을 내내 불러서 같이 지내면서 먹이고 재워야했기 때문에 인부를 사서 수확을 하느니 차라리 하품은 수확을 하지 않는 것이 합리적인 상황이었다.

그런데 고추값 폭락의 와중에 고추농사를 지으며 평생을 살아오신 어르신들의 사고속에서 하나의 로망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이른바 "1978년 고추파동의 추억"이었다. 

1978년 도시에 살던 우리 가족이 고추를 구하지 못해, 아니 고추 살 돈이 없어 헉헉되던 시절  고추농사를 짖던 분들은 일생에 다시 못올 영화를 누리고 있었다고 한다. 고추 한근을 보자기에 싸서 봉화장엘 들고 나가 팔면, 이런저런 부식거리도 사고, 고무신도 사서 들어오는 길에 선술집에서 막걸리한잔을 하고도 돈이 남았다고 했다. 도대체 고추한근이 얼마였기에 그럴수 있었는가하면 그때 가격으로 무려 만원을 넘어섰다고 한다. 지금 물가로 환산하면 대충 6~7만원으 족히 될것이다. 그러니고추 한근이면 충분히 그럴말한 값어치가 있었을 것이다.

박정희가 죽기 1년전, 한국 농촌에 선물로 남긴 것이 바로 고추 1근 1만원의 신화다. 이는 새마을운동이란 무기로 한국 농촌공동체를 해체한 일등공신인 박정희가 아직도 옛어르신의 뇌리에 위대한 지도자로 남아있을 수 있게 하는데 적지 않을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짐작된다. 아직도 '그때가 좋았는데...'를 읊조리는 어르신은 꼭 고추 한근 1만원의 신화를 입에 올리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올해 33년만에 다시 '고추파동'이 났다. 하지만 이번 고추파동은 평년작의 50% 이상 감수한 1978년 정도의 파동에는 미치지 못하는가보다. 오올해  평년수확량의 약 34% 정도가 감수된 전망이라고 한다. 그리고 가격면에서도 1978년의 만원은 지급 가격 2만원의 족히 3배이상의 화폐 가치를 띤다고 볼 때 올해의 고추값 상승은 '고추파동'이라고 이름붙이기에는 조금 지나치다고 볼 수 있다.

정부는 올해 고추 수확예상량은 평년보다 약 34% 정도 감수된 7만9천여톤으로 보고 있다. 신문들을 보면 현재 소비자 가격은 약 2만원 정도로 형성되고 있는데 정부의 개입으로 매주 400여톤, 총 8,000여톤의 정부물량이 시장에 풀릴 것으로 보이고, 또 좋은 날씨가 이어지고 추석이 지나면서 고추값이 하락세로 접어 들것이라는 기사가 넘쳐난다.

이들 고추 관련 기사들이 공유하고 있는 인식의 전제는 현재 형성되고 있는 고추가격이 지나치게 높다는 사실이다. 경제 대통령이라는 MB가 국가 경제를 파탄시키고 물가고로 서민의 목을 죄고 있는 상황에서 내가 아무리 농민이지만 지나친 농사물 가격상승은 바람직하지 않다는데 동감한다. 하지만 올해 고추가격과 수확량을 감안하면 평년에 비해 농민이 얼마정도 경제적 이익을 보았을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생산량 감소에 따른 가격 상승은 시장경제의 신봉자들인 그들에겐 '공정'하기 이를데 없는 현상인데, 농산물 가격하락에 그렇게도 둔감한 정부가 가격 상승에는 이렇게 호들갑을 떠는 모습을 보니 참 어이가 없다.

아뭏튼 나는 고추의 생산 전과정을 소상히 알고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그리고 한국 농촌공동체의 유지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고추 한근 2만원은 결코 지나치게 비싼 가격은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것이라 믿는다. 곧 지나가버라겠지만, 나는  올해 처음으로 정상적인 고추가격을 기쁜마음으로 목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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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최저임금위원회가 노동자 단체를 배제한 상태에서
내년도 최저임금을 처리했다.  시급 4,580원을 날치기 처리하면서 언론은 6% 라는 상승율을 전면에 내세우며 날치기처리의 부당성과 4,580원의 초라함을 숨기려 했다.
분배의 정의가 이루어지지 않는 사회는 미래가 없다는 단순한 사실을 외면하고, 가진 자들만을 위한 세상으로 몰아가는 자본가들의 부에 대한 극악한 집착과 맹목이 두렵기조차하지만 최저임금의 비현실성과 부당성을 떠나
우리 사회에 드리우고 있는 그늘이 너무나 많고 또 짙다. 그중에서 노인 노동에 대한 부당한 댓가와 처우가  가장 큰 그늘중의 하나이지 않을까 생각된다.


몇일전 몇년째 고추가루를 보내드리고 있는 부산의 한 냉면집의 부탁으로
고추를 구하러 영주의 고추도매상거리를 찾았다. 벌써 7월 하순을 접어드는 탓에 마을에도 고추가 떨어져 시장을 찾았지만 도매상거리서마저 고추를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한달여만 있으면 햇고추가 나오기 시작할터이니
묵은 고추를 쌓아둔 가게가 없었다.

몇집을 스쳐지나가다가 할머니 한분이 가게 앞마당에서 고추 꼭지를 다듬는 모습을 발견하고 고추맛을 보고, 주인할머니를 만나  가격을 흥정하고, 구입을 결정했다. 문제는 고추가루를 급히 보내어야하다보니 현장에서 바로 고추를 다듬어 가는 편이 나을것 같아 꼭지를 다 따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주인할머니가 이웃가게에서 고추꼭지를 딸 할머니를 한분 더 구해오시어 주인할머니를 포함해 3분의 할머니가 고추 꼭지를 따기 시작했다. 그동안 나는 농협마트에서 시장을 보고 1시간만에 돌아왔지만 아직 작업은 진행중이어서 작업하시는 할머니들과 잠시잠깐동안  꼭지 따는 노임에 대해 이런저런 말씀을 나누었다.


할머니 말씀에 따르면 고추 꼭지를 따는 노임은 꼭지를 딴 고추 1kg당 300원에서, 상태가 좋지않아 가위로 병든부위를 오려내는 작업을 할 경우 1kg에 600원까지 받으신단다.   내가 2시간가량을 기다려 받은 고추는 36kg이니깐 할머니 3분이 2시간 가량 작업을 해서 15.000원정도의 작업비를 번 셈이었다. 시급으로 따진다면 할머니 한분당 약 2500원정도씩이 되었다.

미안한 마음에 한개 600원짜리 얼음과자를 사드렸지만 그 얼음과자 한개값이면 고추꼭지를 2kg이나 따야한다는 사실에 죄지은 마음이 들었다. 이런 일감조차 많지않아 보통 하루에 만원 정도의 벌이가 되지만 그냥 심심풀이로 나오신다고 할머니는 변명아닌 변명을 늘어놓어셨다. 고추 꼭지를 따본 사람은 알겠지만 이런 작업은 심심풀이로 할 수 있는 작업이 아니다. 손가락도 아프고, 어깨쭉지며 허리며 한시간만 작업해도 가위를 집어던지고 싶을 만치 고통스런 작업이다. 아무리 만성이 되었다고 해도 고추꼭지를 따고 일어서는 할머니는 한참을 허리를 펴지 못하고, 고통에 찬 신음소리를 내시고야만다. 분명한 것은 이 일이 절대로 심심풀이 일 수 없다는 사실이다.

요즘 길을 가다보면 '노인일자리사업'이란 글자가 찍인 초록색 조끼를 입고
쓰레기를 줍고 풀을 베는 노인분들의 무리를 만나볼 수 있다. 들어보니 하루 4시간 일주일 2~3일 일하고 월 20만원 가량을 받으신단다. 정확한 임급과 노동조건은 모르겠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퇴약볕아래 쓰레기를 줍고 계신 할머니 할아버지를 보는 것만으로도 울컷 화가 치민다. 우리사회가 노인분들에게 눈꼽만하 임금으로 길가 쓰레기까지 줍게만드는 것을 목도하는 일은 참으로 고통스럽다.

그것을 '생산적복지'라고 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노인네 한분한분은 우리 사회에 충분한 자기역할을 다해 오신 분으로 응당 노후가 보장되고 적절한 보상이 주어져야 할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런 일자리조차 수요는 많고 공급은 달려 거의 경쟁적으로 담당공무원에게 매달리는 노인분들이 많다는 소리를 들었지만 그리고 단지 돈이 아니고 존엄한 삶을 위한 '일'에 대한 요구가 더 클 수 있다는 것도 거짓말은 아니지만 그래도 나는 평생을 충분히 노동해온 할머니 할아버지의 손에  집게를 들리고 쓰레기를 줍게 해서 월 20여만원의 댓가를 주는 제도를 무슨 노인일자리 복지정책인양 하는 것이 너무나 못마땅하다.

적어도 노인노동에 대한 정당한 댓가가 어떻게 주어질 수 있을지, 노인노동력을 활용할 수 있는 '존엄한' 일자리는 어떻게 만들어져야하는지 고민하는 것이 바로 노인복지정책을 만드는 일이 아닐까 생각된다.

노인들이 주눅들지 않고 당당해 질 수 있는 사회가 진짜 선진국이다. 
노인분들에게 그분들이 받아야할 응분의 댓가를 지불하는 사회가 바로 공정한 사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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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30일, 경북
봉화군 봉성면 우곡성지 내 청소년수련관에서 참여당 삼각끈담쟁이동호회 회원들과 가족 그리고 기타 참여당 지지자들이 단합대회를 가졌다. 준비단계에서 100여명의 회원 가족 등이 참석할 예정이었지만갑작스런 폭우성 비바람에 참가 인원이 30여명으로 줄었다. 
주최측인 봉화군지구당 준비위원회 위원장이신 "사과꽃향기"님을 비롯한 지역 당원가족분들이 여러 날을 준비해 100여명이상의 손님을 맞을 음식과 잠자리등 충분한 준비를 하였지만 직전에 있은 김해을 재선거 결과와 행사 당일의 불순한 기후 때문에 참가인원이 대폭줄게 된 것이었다.

나는 참여당 당원이 아니지만 아내가 참여당 당원이다보니 "사과꽃향기"님으로부터 연락을 받게되었고, 잠시 망설이긴 했지만 단지 봉화지역분들이 보고싶어 행사에 참여를 하게 되었다. 사과꽃향기님은 1여년전 연락을 주시어 만나게된 분으로 척박한 지역 토양에서 기필코 참여당 지구당을 만들고말겠다는 포부를 가지고 나에게 연락을 하셨던 분이다. 그분의 열의에 감명을 받고 어떻게든 도울 수 있는 길이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지긴 했지만 내 자신이 정치적 기반이 조금은 다르고 무엇보다 일상의 삶에 쫒겨 이내 잊어 버리고 말았었다.

나는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인간적 존경심을 가지고 정치적 지지자로서 그의 정치적 꿈을 실천하는 한명의 시민으로 살아가길 원하는 사람이지만  참여당의 당원이 아닌 타당의 당원인 사람으로 이날 모임에 참가하는 것이 다소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나의 이러한 기우와는 달리 행사 참여자 모두가 반겨주시고 배려해 주신 덕에 참으로 편안하고 의미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특히나 행사 예상 참여자가 대폭 줄어들어 힘빠지고, 성의없는 행사가 되지 않을까 걱정을 했었는데 나의 그런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고 모이신 한분한분이 열정과 동지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즐겁고 진지한 행사를 진행해나갔다.

행사중에 참여자 한분한분이 자기소개를 하는 기회가 있 을때 나는 나의 정치적 정체성을 드러내고 봉화군 같은 지역사회에서 진보 개혁을 표방하는 사람이라면 설사 당을 달리할지라도 당원동지나 진배없이 반갑고 소중하다는 사실을 고백했다. 나아가 수구 한나라당이 완전히 장악하고 있는 경북북부지역의 봉화군 같은 지역사회에서는 최소한 반한나라당을 지향하는 개인이나 세력은 동지적 연대를 가지고 서로 협력해야함을 주장했다. 

이날 알게 된 사실이지만 봉화군에 참여당  진성당원이 불과 수명에 불과하고, 잘 모르긴 해도 사회당이나 진보신당은 물론 민주노동장, 나아가 민주당 마저 진성당원이 몇명에 불과하지 않을까 짐작할 수 있었다. 이런 지역 현실에서 서울 중심의 중앙정치무대에서  진보개혁진영의 정당들이 뿔뿔이 흩어지도록 하는 작은 정치적 차이는 아무런 의미가 없으며 비록 정치적 지향이 달라 정당을 달리할 지라도 동일한 정치적 실천의 기반을 공유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

지난 재보선이후 이명박정부, 수구 한나라당을 제압하고 다시 우리 사회를 진보의 길, 평화의 길로 되돌려 놓을 수 있을 가능성을 확인하게 되면서 진보개혁진영의 통합의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그 진행은 지지부진하고  통합을 위한 논의과정이 생산적이지 못한 모습을 드러내면서, 진보개혁세력의 대통합과 민주개혁정부로의 교체를 희망하는 한 사람으로서 다소간 실망감을 느끼게 된다, 그런 현실에서 봉화군같은 정치적으로 척박한 토양에서 몇몇에 지나지 않는 진보개혁인사들이 지역사회에 진보의 씨앗을 뿌리는 일에 실천을 같이하고 통합을 위한 토론과 학습을 선도적으로 진행해 나간다면 얼마나 좋을까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나아가 밤낮 정치권을 비판하는 민주시민 개개인이 자신이 상대적으로나마 지지하는 정당에 가입을 하고 큰 틀에서 우리사회가 진전시켜나가야할 가치를 진작시키는 일에 작은 실천들을 같이 해 나간다면,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중앙'에서 하지 못하는 일을 작은 지역에서 해 내고 오히러 '중앙'에 압력을 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생각한다. 한 당의 당원이 서너명에 불과한 봉화군이지만  "봉화군 진보개혁군민 연석회의"같은 모임을 하면서 작은 차이를 극복하고 큰 차이의 해법을 찾아내는 작업을 선도적으로 해나간다면 얼마나 멋진 일이겠는가! 
 
나는 그날 참여당 봉화군 지구당 준비위원회 위원장님과 그외의 당원들의 열정, 그리고 그 순수한 인간미에 혹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역사회의 좋은 분들이 한분두분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에 가입을 하고, 그런 분들이 어떻게든 함께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지역사회에서 사회당 당원이 참여당의 지구당이 건설될 수 있도록 당원모집에 협력과 지원을 아끼지 않고, 4대강 죽이기 같은 명백한 정치적 이슈에 공동대응을 한다면, 지리멸렬한 중앙정치가 바귀고 나아가 불의한 세상조차 쉽게 바꿔낼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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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마하트마 간디에 대해 잘 모른다. 내가 알고 있는 간디는 비폭력 불복종이라는 수단으로 영국제국주의의 침략과 수탈로 부터 인도를 해방시켰다. 그리고 그는 무소유와 평화라는 가치를 끝까지 관철하며 아름다운 인류공동체의 이상을 추구했다. 그는 대중을 이끌고 해방투쟁을 수행한 현실주의자이면서, 권력과 금력 그리고 탐욕으로부터 자유로운 세상에 대한 꿈을 추구한  이상주의자였다. 그는 인도의 신분차별제도인 카스트 제도를 폐지시키기 위해 투쟁했고, 온간 인종적, 종교적 편견과 차별이 없는 세상을 갈구했다. 하지만 간디는 이차세계대전이 끝나고 인도가 해방되고나서 얼마안있어 이슬람교를 부인하고 카스트제도를 옹호하는 흰두교도가 쏜 흉탄에 서거했다. 그리고 그는 인도인의 가슴에 또 하나의 신으로 남게되었다. 이것이 내가 알고 있는 마하트마 간디에 대한 전부이다.

빈라덴은 사우디에서 부호의 아들로 태어나 청년기에 영국에 유학을 다녀왔고, 이슬람교리에 깊이 심취했으며, 그리고 아프카니스탄에 소련이 침공하자 아프칸의 해방을 위해 투쟁하는 이슬람 전사의 조직인 무자헤딘에 헌신했다. 그는 유산으로 물러받은 엄청난 부를 이용해 무자헤딘에 물질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직접 무장전사로서 전투에도 참여하기도 하면서 이슬람의 해방을 추구하는 알카에다라는 국제적인 조직을 결성하는 등 이슬람의 탁월한 지도자로 성장했다. 그 과정에서 소련의 아프칸 침공을 빌미로 이슬람 지역에서 미국의 지배력을 강화하기 위한 미국의 군수물자지원과 군사기술 지원을 받기도 했다. 한때 소련이라는 북극곰을 잡기위한 미국의 사냥개 역할도 마다않던 빈라덴이지만 소련과 아프칸 간의 전쟁이 끝나고 다시 미국이 이라크를 침략하는 국면이되면서 빈라덴은 다시 전면적인 반미, 반 이스라엘 투쟁에 나서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그 유명한, 항공기를 이용한 911 미국무역센타 공격을 감행하게 된다.  이후 미국은 911공격을 빌미로 아프칸과 이라크 등을 공격하며 대이슬람전쟁을 확대하고 노골적인 중동 지배야욕을 드러내며 반미투쟁의 상징이된 빈라덴을 제거하기 위한 무자비한 군사작전을 10여년간 강행한다. 그리고 몇일전 미국은 빈라덴의 사살을 공표하며 '테러와와 전쟁'에서 한 단계의 승리를 선언했다. 그리고 알카에다 등 반미 전사들에 대한 대대적인 섬멸작적을 예고하고 있다. 

간디는 인도의 성인이 되었고, 한국에서 조차 청소년기부터 '위인전'을 통해 완전한 삶의 전형으로 배워야하는 20세기 최고의 위인중 한명으로 알려져있다. 한국에만도 '간디'를 내세운 교육기관의 이름이 한둘이 아니고 생태적 삶, 금욕적 삶의 전형으로 까지 추앙받고 있다. 간디에 대한 그런 판단은 동서양의 구분을 뛰어 넘으며 이미 하나의 통일적인 상으로 굳건히 자리잡았다. 

빈라덴에 대한 평가는 이슬람세계와 미국을 중심으로 한 바깥세상에서 극단적으로 분열되어 있다. 우리는 빈라덴의 죽음을 테러분자에 대한 정당한 처단이라며 환호하는 미국인들의 영상과 더불어 이슬람의 위대한 정신적 지도자에 대한 야만적 학살행위라며 이에 대한 보복을 다짐하는 시위대의 모습도 쉽게 볼 수 있다. 그 사이 어디쯤 빈 라덴의 참 모습이 있을 것 같다.

'비폭력 불복종'이라는 무기를 든 간디를 영국 제죽주의들은 얼마나 무서워했을까? 나는 솔직히 그점에 대해 판단할 수 없다. 그리고 영국으로부터 인도가 독립하는데 간디의 비폭력 노선이 얼마나 영향을 미쳤는지도 잘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당시에도 무장저항운동을 시도했던 조직들이 활동했을 것이 분명하고, 또 2차세계대전이 끝나자 간디가 제창한 비폭력 불복종 독립운동을 하지 않았던 대부분의 식민지들도 독립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인도인의 입장에서 비폭력노선과 무장 투쟁 노선중 어느 것이 더 현실적이고 합당한 선택이었을까는 그리 쉽게 판단해 버릴 수 있는 문제는 아닌것 같다.

빈라덴은 테러리스트라고 명명한 자들은 사실 비교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할 정도의 군사력 우위를 바탕으로 정당한 군사작전이라는 이름으로 무자비한 살육을 자행해 오고 있는 세력들이다. 아버지 부시가 이라크를 침공했을 때 저항을 포기하고 무기를 버리고 패주하는 이라크 장병 수만명을 사막의 한가운데서 에서 첨단 무기로 살육했다. 아들 부시는 아프칸과 또다시 이라크를 침공해 무고한 민간인을 포함해 수십만의 인명을 아무 꺼리낌없이 살육했다. 미국은 세계 수백곳에 군사기지를 건설하고 미국의 이익에 반하는 모든 것을 불의로 몰아세우며 무자비한 군사공격과 정보공작을 일삼고 있다. 그리고 오직 미국의 이익을 지키는데 도움이 된다고 판단되는 정보를 가진 무고한 시민을 포함해 알카에다 요원 등을 납치해 관타나모 기지에 강제 구금하고 첨단 과학적 지식에 기반한 고문을 자행해 정보를 얻었다. 미국은 그렇게 얻어낸 정보를 이용해 비 무장상태인 빈라덴을 가족과 함께 사살하고, 그의 육신마저 자기들 마음대로 처리해 버렸다. 그리고 미국은 자신들은 테러리스트를 정당하게 응징했다고 주장하며 승리에 도취해 광분하고 있다.

나는 우선 간디의 삶이 정확히 어떠했는지 잘 알지 못하지만 분명히 간디는 식민지배 권력자들의 기준에서 용납되는 삶을 살았던 것이 분명하다. 제국주의자들의 이익이라는 필터를 통과한 간디는 세계적인 인물로 등극하면서 20세기가 낳은 위인의 한명이 될 수 있었다. 빈라덴의 본모습에 대해서도 나는 잘 알 수 없다. 하지만 빈 라덴은 미국을 위시한 서방의 이익에 철저히 맞서 이슬람제국을 건설하기 위해 투쟁한 전사였다는 사실 하나는 분명해 보인다.

간디와 빈라덴은 비슷하지만 다른 삶을 살았다. 두 사람은 서방의 지배를 받고 있는 나라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영국에서 공부를 하고 돌아와 인도의 해방, 이슬람의 해방을 위해 투쟁했다. 간디는 비폭력 노선을 견지했고 서방의 인정과 지지를 얻어 위인으로 등극했다. 빈라덴은 무장노선을 견지했고 서방의 철저한 증오심의 대상이 되어 테러리스트의 수괴로 몰아세워졌고 끝내 무자비하게 살해되었다. 

나는 간디와 빈 라덴에 대한 일면적인 평가에 의문을 가진다. 그리고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진리인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사실 미국인의 진실, 이슬람의 진실은 서로 다르다. 영국의 진실과 인도의 진실도 아마 다를 것이다. 그래서 나는 간디가 옳은지 빈라덴이 옳은지 판단할 수 없다.  어쩌면 간디와 빈 라덴 두 사람의 간극이 사실은 그리 넓지 않은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나는 빈라덴을 무장투쟁 전사로 만든 시대와 그 시대를 주도한 미국에 대해 분노하면서, 그의 삶에 경의를 표하고, 그의 죽음을 애도한다. 이슬람인의 가슴에 영원한 별이 된 빈라덴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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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호초등학교 2011 운영위원회가 열렸습니다. 명호초등학교는 학생수가 쉰명을 넘지 않는 봉화군 명호면 소제지의 조그마한 시골학교입니다. 그러다보니 그동안 학부모들은 운영위원회가 있는지 없는지조차도 잘 몰랐는데다가, 학교의 편의대로 편안한 사람을 지목하여 임명을 하고 형식적인 회의를 진행해 온 듯합니다. 그러던 것이 한 학보무가 우연한 기회에 학교측에서 특정인을 지목하여 운영위원으로 임명하려한 사실을 알게되었고, 이에 몇 학부모가 문제를 제기하고 정상적인 절차를 요구한 끝에 이번 운영위원회가 구성되게 되었습니다. 



지난 4월 14일, 학부모 위원2인과 교직원 위원 2인, 그리고 학부모 위원의 추천을 받은 지역주민 1인 등 5명으로 구성된 명호초등학교 운영위원회가 2011년 첫 회의를 가졌습니다. 저는 지역주민 몫으로 학부모들의 추천으로 운영위원으로 참가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첫 운영위원회를 참석하고 나니 이런저런 아쉬움이 많이 남아 마음이 편치 않은 구석이 있었습니다.

사실  첫 회의다 보니 간단한 상견례도 가지고 앞으로 학교 운영위원회를 어떤 마음으로 참여할 것인지, 또는 학교 운영위원회를 통해 지역사회와 학교의 건강한 관계의 형성이나 교류 등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 감을 잡는 기회로 삼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일단은 그동안 학교운영위원회를 형식적으로 구성해서 거의 음성적으로 운영한 부분에 대한 지적과 함께 향후 운영위원회의 정상화를 촉구하고싶었고, 운영위원회가 학교측에서 제시하는 문서나 받고 대충 읽다가 박수나치고 커피나 한잔하고 헤어지는 식으로 운영되지 않기 위해서는 조금은 긴장을 가지고 밀도있는 운영을 하고싶다는 뜻을 밝히기도 했습니다. 특히 첫 운영위원회 이틀전에 전화상으로 회의 통보를 받고 회의 직전에 회의 안건에 대한 자료를 건네받은 입장에서는 회의에 임하는 학교측의 성실성에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음을 지적하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다 많은 이야기를 가슴에 묻고 회의를 끝낼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오직 저 자신에게 있었습니다. 먼저 바쁜 일상을 이유로 운영위원으로 참여를 해 달라는 이웃 학무모들의 요청을 스스로 수락하고도 '초등학교 운영위원회'에 대한 이해를 높이기 위한 어떤 노력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운영위원회가 어떻게 구성되고 어떻게 운영 되어야 하는지, 학교운영위원회의 권한과 의무는 무엇인지조차 이해하지 못했고, 교육일반에 대해 가지고 있는 생각을 어떻게 어느 부분까지 개진할 수 있는 것인지 조차 파악하지 못한채로 회의에 참석하는 불성실을 저질렀기 때문입니다.

시골의 학교는 지역사회의 중심이었습니다. 학교는 마을 공동체의 주요한 한 축으로 주민들의 삶과 긴밀히 결합되어 주민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결집시키는데 주요한 역할을 하고, 주민의 꿈을 그리고, 마을의 미래를 만들어나가게 하는 정신적 활력의 생산공장이었습니다. 주민이 쌀을 모아 터를 사고 벽돌을 찍어 학교를 지었고, 선생님은 학생들의 선생님일 뿐아니라 마을 지식인의 산표본이었습니다. 선생님은 학생의 역할모델이 되었고, 지역 주민의 기대와 존경을 한몸에 받았습니다. 

하지만 산업사회가 진전되고 또 그만치 마을이 붕괴되면서 마을공동체에서 가지던 학교의 위상은 줄어들기만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이제는 지역 학교의 선생님이 어떤 분이 계시고 어떤분이 오고 가셨는지 마을 주민 대부분은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습니다. 그리고 마을의 학교는 그동안 지역사회내에서 가졌던 모든 역할을 다 버리고 오직 경쟁교육, 입시교육의 하위 기지로서의 역할만 부여받게 되었습니다. 학력평가 전국 몇 위, 도내 몇 위라는 잣대로 평가되는 시골학교는 대부분 그 자신의 독자적 가치와 무관하게 형편없는 하류 학교로 낙인찍히지 않기 위해 발버둥쳐야하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학교운영위원회는 시골학교가 가지고 있는 제도적 문제를 푸는 장이 절대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산골학교의 특별한 가치를 빛나게하는 교육을 실현하고, 지역공동체와 통합된 학교의 위상을 회복하는데 미미한 기여라도 하는 운영위원회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2011년 명호초등학교 첫운영위원회를 가진뒤 또 하나의 큰 숙제를 떠맡은 기분입니다. 다행스럽게 산골마을의 학교는 학부모와 선생님이 함께 조금만 노력하면 얼마든지 아름다움 학교를 만들어나갈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작기 때문에, 그리고 복잡하지 않기 때문에 산골학교는 아름다운 자연속에서 다른 생명,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사는 삶의 가치는 익히고, 마을 공동체와 하나된 학교를 만드는 일을 제일 먼저 실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름다운 명호초등학교를 만들어나가는 일에 참여하게 된 기쁨을 계속 이어가기 위해 공부하는 운영위원이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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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정부 들어서고 나서 전정권과 민주세력에 대한 치졸한 보복과 탄압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제는 문화단체에 지급해왔던 사회단체 보조금을 가지고 장난질을 치며 예술인을 모욕하는 지경에 이르렸습니다. 그동안 문화단체나 기관의 유능한 인사들에 대해 불법적이고 야만적인 모욕과 협잡을 통해 자리빼앗기 만행을 저지르더니 이제 지역의 문학단체에 까지 마수를 뻗쳐 고사작전에 들어갔나봅니다. 
한국작가회의 경북지회를 지지하는 한 시민으로서 아래 보도자료를  게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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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득할 수 없는 사회단체 보조금

작가회의 경북지회는 보조금 수령을 거부한다.
 
 
1월 31일 경북도청은 2011년 사회단체 보조금 지원액을 각 사회단체에 통보했다. 128개 단체가 보조금을 신청했으나 30여개 단체가 탈락되고 100여 개의 단체에 총16억 원의 보조금을 지급할 예정이라고 한다. 가장 많은 보조금을 받게 된 단체는 한국예총경상북도연합회로 운영비 5천만 원을 지급받게 되었고, 가장 적은 단체는 청소년행복세상 경북지부의 200만 원이다.
 
경북도는 각 사회단체로부터 보조금신청서를 받아서, 외부 심사위원회의 심사를 거쳐서 공정하게 지급했다고 하지만, 한국작가회의 경북지회는 공정성과 기준을 믿을 수 없다면서 크게 반발하고 있다. 작가회의 경북지회는 심사위원 명단과 심사점수를 공개해 줄 것을 경상북도에 정보공개 신청을 했으나 아직 아무런 답이 없다고 한다. 해당 기준에는 경상북도를 대표하는 사회단체여야 함에도 일부 지역의 동호인 성격의 단체도 포함되어 있고, 같은 성격의 단체의 같은 사업임에도 형평성에 맞지 않는다고 했다.
 
한국작가회의 경북지회(지회장 권석창 시인)는 11년째 매년 850만 원 가량의 지원을 받아, 문집 <작가정신>과 <경북작가 시선집>을 발간하고, 문학 강연회, 경북문학인의 밤 등의 행사를 열어왔는데, <작가정신> 발간비 500만원이 삭감되어 제 12호 <작가정신>을 발간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한다. 거의 같은 사업을 하는 문학단체인 한국문인협회 경북지회에는 <경북문단> 발간에 1,800만 원이 지급된 데 비해 한국작가회의 경북지회에 350만 원이 지급된 것도 납득할 수 없는 일이라 했다.
 
한국작가회의 경북지회 권석창 지회장은 ‘한국문학을 대표하는 대다수의 문인들이 소속된 한국작가회의의 지역 단체인 경북지부가 350만 원으로 문학 활동을 하라는 것은 문인을 모욕하는 일일 뿐만 아니라 한국작가회의에 대한 모욕이다. 전국의 어느 광역시, 도도 한국작가회의 지회에 이런 보조금을 주는 지자체는 없다. 보조금 수령을 정중히 거절한다.’고 말했다.
 
또 박승민 사무국장은 ‘정신을 중요시하는 작가에게 모욕을 주는 경상북도의 문화 행정에 대해 강하게 비판하면서 회원들이 가진 지면을 통해서 혹은 인터넷 매체를 통해서 이러한 문화 행정이 바로잡힐 때까지 저항의 글쓰기를 펼쳐나가겠다.’
고 말했다.
 
며칠 전 운명하신 작가회의 소속 소설가 박완서 선생은 ‘문상 오는 가난한 문인들에게 일체의 조의금을 받지 말고 후하게 대접하라.’고 유언을 했을 만큼 문인들은 가난하다. 작가회의 경북지회는 가난한 주머니를 털어 단체를 운영해야 할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고 회원들은 말한다. 11년 동안 발간되던 <작가정신> 발간을 멈출 수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자료제공 : 한국작가회의 경북지회 (지회장 권석창, 사무국장 박승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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