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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봉화 춘양농협 2층 강당에서는 지난 3월 9일 정태인 선생님의 강연에 이어  [한미FTA가 나에게 미치는 영향은 무엇인가]라는 주제로 이해영 선생님의 강연이 있었습니다. 이날 강연은 봉화군 농민회의 주도로 봉화군 농업인단체연합이 주최하고  춘양성당과 옥방교회 등의 지원과 춘양농협의 장소 제공 등의 후원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면단위에서 이루어진 소박한 강연회였지만, FTA발효에 대한 지역 농민의 불안과 이해영 교수님의 유명세 덕분인지 강당이 꽉찰 정도로 많은 지역농민이 참여하여 이해영선생님으부터 정부가 주장하는 한미FTA의 잇점이 왜 허구이고 어떻게 기만적인 낱낱히 이해할 수 있는 값진 강연을 청취할 수 있었습니다.

정태인 선생님이 지난 강연에서 말씀하신 것은 크게 두가지로 이해할 수 있었는데, 한가지는 한미FTA를 통해 이익을 얻는 측과 피해를 입는 측의 대립은 한국과 미국이라는 국가 단위가 아니라 한미자본과 한미민중이라는 계급구도라는 것과, 또 한가지는 자본의 목적은 상품시장의 활성화보다 공공영역에 대한 시장 확대가 핵심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어서 오늘 이해영 교수님의 강연을 통해 새롭게 배우게 된 사실은 한미FTA가 정부측 입장에 따를 때조차 국가적 이익을 가져오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달리말해 1% 재벌이 얻는 이익은 바로 99% 민중이 부담하는 것에 다름아니고 따라서 국가의 총체적 이익은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즉 정부가 한미FTA를 통해 얻게 될것이라고 홍보하는 경제성장, 물가하락에 따른 소비 진작, 투자유치에 의한 일자리 증가는 완전한 기만이라는  것입니다.

'경제 성장'에 대해 살펴보면 국제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표준모델을 이용해 시뮬레이션할 때 한미 FTA를 통해 10년동안 약 0.3%정도의 GDP성장을 가져올 것으로 드러나는데 이와 같은 결과를 숨기기 위해 정부는  [생산성증대 효과 고려 모델]이라는 발명품을 통해 약 5.6%의 성장 효과가 있을 것이라 선전하고 있다고 합니다.

두번째 한미 FTA가 발효되면 소비자는 물가 하락으로 삶의 질이 올라갈 것이라고 하지만 약 8%의 관세가 사라진다고 해도 일시적이고 한정된 품목의 가격하락이 있을 뿐이지 실제적인 소비 진작을 낳을 정도의 물가 하락은 없다는 것입니다. 500만원짜리 샤넬백의 8%의 관세가 없어진다고 해도 그 수입원가인 70만원의 8%인 5만6천원의 가격하락만 있을 뿐이고, 이 조차도 수입상의 의지에 달려있다고 봐야되고, 또 청바지를 보아도 백화점에서 미국산 청바지 신품이 20만원 정도한다고 봤을 때 수입원가가 3만원이고 관세 10%가 사라져도 약 3천원 정도의 가격 하락 밖에 기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세번째 미국 자본 투자유치로 신규일자리가 증대할 것이라고 하지만 이미 한EU FTA를 통해 가져올 것이라고 했던 일자리 27만개 창출이 허구로 드러났듯 이 조차 아무런 근거없는 선정용 문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통상적으로 GDP1%에 일자리 약 7~8만개가 창출되는데, 년 0.03%의 GDP성장에 따라 약 2,000개의 일자리가 창출되는 것으로 산출되는데 이는 의미없는 수치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덧붙여 의료민영화에 따른 국민건강권에 대한 위협, 서비스 역조에 따른 국부의 유출 등 많은 문제점에 대해 말씀하셨지만 특히 농업 피해에 대한 설명이 가장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정부는 한미 FTA에 따른 농어업 피해 예상액을 약 12조 7천억원으로 보고, 피해보전대책으로 10년간 22조원의 투융자 계획을 세워놓았다고 큰소리 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22조에는 기존 농어업정책 예산 21조를 포함되어 있어 실제 신규예산은 1조에 불과하여 정부가 예상하는 피해약 12조 7천억의 부담은 고스란히 농어민에게 지워진다는 사실은 참으로 경악스러웠고, 그런 기만적인 선전을 하고 있는 MB정부가 가증스러웠습니다.

강연을 마치고 나오니 머리를 명징해졌는데 가슴은 답답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의 이익에 목을 메는 정부는 한미 FTA를 발효해 버렸고 나아가 한중FTA마저 추진하겠다고 나서는데 힘없는 농민은 무엇을 어떻게 해서 이 국면을 헤쳐나갈 수 있을지 막막하기만 했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30분 동안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투표를 통해 정권을 바꾸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고 그외 다른 길은 없는지,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되어 현정권에서 라도 스스로 한미FTA를 철회하도록 할 수는 없는지, 그 과정에서 한명의 농민으로 할 수 있는 역할이 무엇인지... 묻고 또 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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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의 내성천-영주댐 순례를 마치고 2시간을 달려 도착한 곳은 상주시 중동면에 있는 '새중동식당'이다. 평범한 외관과 단초로운 메뉴지만 나온 음식에는 시골인심이 듬뿍 담겨있다. 마음씨 좋아보이는 주인 아주머니가 지율스님을 반가이 맞이하는 걸 봐서 두분의 인연이 깊어보였다.


밥을 먹으며 지율스님과 가벼운 말씀을 몇마디 나눈 것에 불과 했지만 식사를 마치자 나도 모르게 스님의 삶에 대해, 스님의 생각에 대해 조금은 이해가 깊어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한편 그분의 삶에 대해 무한한 존경과 경외심을 느끼면서도 또 한편 앙상한 뼈대가 승복위로 들어나고 왠지 조금의 걸음에도 지쳐보이시는 모습을 대할 때는 가슴 깊이에서 울컥 생명가진 모든 것의 어쩔 수 없는 안스러움이 느껴졌다. 그냥 맛난 것 드시고, 따뜻한 방에서 편히 지내셔도 좋을 분이 어찌 그리도 힘든 삶을 살으시는지 안스럽기도 하고 감히 그런 생각을 하는 나 자신의 불경스러움에 놀래기도 했다.


나중에 아내가 지율스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언론에 비친 지율스님은 엄격하고 강인한 인상으로 다가왔는데, 직접 뵈니 너무 가날프고 여린 분이더라. 그런데 어떻게 그런 분이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그렇게 힘든 싸움을 할 수 있었을까 이해가 잘 안되었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분 자신이 약하고 여리기 때문에 세상의 여리고 약한 뭍 생명들에 대해 무심할 수 없었는가보다.'


 식사를 마치자마자 상주보 공사 현장으로 달려갔다. 강이 있고, 마을이 있고, 두어마리 물새가 한가로히 놀고 있는 그런 강은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다는 듯 우리를 맞은 강은 그야말로 공사현장 그자체였다. 거대한 콘크리트 구조물과 인간 마음대로 막고 틀은 물이 고여 썩어가고, 그리고 아무런 문제도 없다는듯, 레미콘차들은 오고가며 계속 콘크리트를 붓고 있었다.
 


모든 자연스러움이 야만이고, 자연은 철저히 정복해야될 대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권력을 쥐고, 대중은 그런 권력자의 생각에 암묵적으로 동의하거나, 마찰을 회피하기위해 모른척 외면함으로써 눈앞의 저런 파괴와 뭍생명에 대한 대량 학살이 아무렇지도 않게 자행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내 자신도 분노만할뿐 어디서 부터 어떻게 해야할지 혼동스럽고 무기력하기만 했다.     

 


상주보를 뒤로하고 경천대로 향하는 길에 경천교를 건넜다. 운전을 하지 않는 일행들은 차에서 내려 다리를 걸어서 건넜고, 차를 운전하는 분들은 차를 다리 건너 자전거박물관 옆에 주차를 해 놓고 역시 다리에 올라 모래를 퍼담는 포크레인과 질주하는 덤프트럭이 점령하고 있는 낙동강을 내려다봤다. 모래를 싣은 덤프트럭이 눈으로봐서 시속 7~80km는 족히 되어 보이는 속도로 강둑을 질주했다. 먼지가 뽀얗게 일어 바람에 흩날리고 강은 아무렇지도 않은듯 의연했지만
고통을 참고 속깊은 울음을 삼키고 있을 것만 같았다.


강은 죽어가는데 경천대를 찾는 상춘객의 발길은 끝없이 이어졌다. 50대 후반의 남여가 무리지어 와작지껄하게 웃으며 개나리꽃이 만발한 산길을 쓸고 지나갔지만 그들은 고개를 조금만 돌려 보면 보이는 강의 파괴현장에 대해선 무관심해 보였다. 눈 앞의 봄꽃을 즐기면서도 바로 발아래서 일어나고 있는 대대적인 자연파괴행위에 대해선 무심할 수 있는 것은 어떤 연유일까 궁금했다.    


경천대에 올라  비록 상처투성이일망정 아직도 이렇게 아름다운 강이 그냥 죽어가도록 바라다보고만 있어야하는 현실이 가슴아팠다. 단지 강의 마지막 모습을 내려다 보고 마음속 깊이 그 풍경을 새기고 또 새겼다. 일행들과 마지막 사진을 찍고 지율스님의 말씀을 듣는 것으로 이날의 순례는 마무리했다. 발길을 돌려 내려오는 길에 경천대에 있는 정자를 지났다. 정자는 이름하여 무우정이란다. '걱정이 없다'는 무우정이지만 무우정에서 내려다보는 세상은 참으로 걱정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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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 대한민국에 고한다]( 2011년 발행, 21세기북스)를 읽고

요즘 조국 교수가 인기가 많다. 모든 걸 다 갖추고 있으면서 거기다가 '개념'까지 있는 인물이다 보니 그럴만도 하다. 하여튼 섹시한 진보 인사의 한명인 조국은 그 뛰어난 상품성으로 인해 앞으로도 한참은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그의 한마디 한 동작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의 표적이 될 것이 분명하다.

사실 이번 붐은 조국이 낸 [진보집권플랜]과 바로 이 책 [조국,대한민국에 고한다]가 촉발한 듯하지만 그보다는 이명박의 폭정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안세력화 되고 있지 못한 무능한 진보세력의 현 정치구도에서 대중의 열망이 만들어 낸 측면이 많아보인다. 다시 말해 조국에 대한 인기는 일정정도 대중들이 선호하는 인물, 학벌, 개인적 자질 등등에 기반하고 있는게 사실 이지만 더 중요하게는 현 정치적 지형이 대안적 진보, 다시말해 '성찰하는 진보' 인사를 요청하고 있기때문일 것이다.

그런 이해 혹은 오해를 가지고 [조국, 대한민국에 고한다]를 읽고나서 솔직히 조금은 아쉬움을 느꼈다. 은연중에 나는 그의 책을 통해 무슨 대단한 신체제에 대한 마스터 플랜이나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할 미래상을 제시하고 그를 구현하기위한 정교한 로드맵이라도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 분명하다. 벌써 25년은 된 것 같은데 지금은 까마득히 잊혀졌지만 '사회구성체 논쟁'류의 책이나 당시의 이런저런 정치서적을 통해 늘 단언적이고 명료한,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교시'를 제공받았던 기억이 난다. 적은 분명하고 적을 물리치고 새롭게 건설될 사회상은 명료했다. 다시 말해 그 시대에는 모든 정치 서적이 사회 변혁의 '전략과 전술'을 담고 있었다고 봐도 무방할 것 같다.

사실 그와같은 실천이론의 한계가 진보세력의 답보상태를 지속시키는데 일정정도 기여한 측면이 있고, 여하한 이유에서건 정체된 진보의 이론, 조직, 실천의 한계에 대한 지적이 조국이 말하는 성찰하는 진보의 요구로 나타난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때 그 청년들은 세월을 겪고 현실은 훨씬 더 풍부하다는 사실을 알아챘기 때문이다.

그와같은 입장에서 조국은 명료한 시대규정과 체제분석, 그리고 전략 전술을 내어놓지 않고 훨씬 부드러운 말투로 우리사회의 진보, 우리사회의 진전을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상식, 진보적 상식 혹은 합리적 상식을 각각의 세력 혹은 분야를 향해 직언한다.

먼저 조국은 MB가 이상사회의 모델로 삼고 있는 두바이와 싱가포르의 허상을 지적함으로써 현정부의 국정철학의 부재 혹은 그 시대적 낙후성을 지적한다. 그리고 이어서 한국의 보수세력과 진보세력을 향해 쓴소리를 내어 놓는다. 그의 발언은 시민의 정치적 정체성에 대한 반성을 요청하기도하고 법률가의 눈에 비친 부정의한 법현실을 질타하고 올바른 법치가 무엇인가에 대한 생각도 피력하고 있다. 하지만 독자의 한사람으로 나는 그의 자본에 대한 고언에 이 책의 핵심이 놓여있여야한다고 생각한다. 자본에 대한 규정, 체제모색적 이해없이 현 시대는 극복될 수 없음을 필자 역시 인정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필자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이 부분 역시 충분하지 않은 내용때문에 적잖은 실망을 느꼈다.

사실 이책은 체계적인 이론을 제시하거나, 정치적 입장을 정리해 놓은 글이 아니다. 좀 다양한 분야에 대한 필자의 생각을 단속적으로 언론에 게제한 것을 모아놓은 이 책은 참 쉽게 읽힌다. 하지만 책을 덮고 전체를 아우르는 이해를 도모하기엔 좀 어려움이 따른다. 부분은 다 공감하고 수용하면서도 책을 덮고 그려보는 이 책이 담고 있는 세상의 상은 그렇게 투명하게 다가오질 않기때문이다. 그런면에서 나는 필자 조국의 다음 저술은, 물론 극단적인 나 개인적 기대에 불과하지만. 좀더 확실한 우리사회의 비젼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글로 채워졌으면 한다.

물론 독자의 한사람이 갖는 주제넘는 기대와는 별도로 이책은 우리 사회의 보수세력과 진보세력이 공이 인정하는 가치 기반을 높이는 작업에 일정 성공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국사회에서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보수와 진보의 대결을 훨씬 높은 차원으로 나아가야하며, 정정당당한 이념적, 정책적 대결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공정한 룰의 만들고 그 수준을 높이는 일은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한국의 보수세력은 합리적 보수세력에 기생하는 극우 파시스트세력을 스스로 떨쳐내가기 위해 노력해야하고, 진보 개혁은 시대정신을 읽고 대중의 열망을 반영하는 진보적 정책, 대안 체제의 발굴에 보다 유능해져야할 것이다.

조국같은 분이 그와같은 상식의 전도사로, 보수와 진보의 소통을 매개하고, 진보적 가치에 대한 합당한 가치 평가가 이루어지는 공정한 경쟁을 도모하는 거간꾼으로 나선것에 경의를 표한다. 이 책 한권이 그와 같은 과제를 수행하는데 얼마만한 효과를 발휘하게 될런지 모르지만 최소한 우리사회의 정치적 상식의 격을 높이는데에 일정정도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아뭏튼 필자 조국이 건강한 좌파지식인, 한국의 노옴 촘스키로 지속적으로 활동해 나가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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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정부 들어서고 나서 전정권과 민주세력에 대한 치졸한 보복과 탄압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제는 문화단체에 지급해왔던 사회단체 보조금을 가지고 장난질을 치며 예술인을 모욕하는 지경에 이르렸습니다. 그동안 문화단체나 기관의 유능한 인사들에 대해 불법적이고 야만적인 모욕과 협잡을 통해 자리빼앗기 만행을 저지르더니 이제 지역의 문학단체에 까지 마수를 뻗쳐 고사작전에 들어갔나봅니다. 
한국작가회의 경북지회를 지지하는 한 시민으로서 아래 보도자료를  게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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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득할 수 없는 사회단체 보조금

작가회의 경북지회는 보조금 수령을 거부한다.
 
 
1월 31일 경북도청은 2011년 사회단체 보조금 지원액을 각 사회단체에 통보했다. 128개 단체가 보조금을 신청했으나 30여개 단체가 탈락되고 100여 개의 단체에 총16억 원의 보조금을 지급할 예정이라고 한다. 가장 많은 보조금을 받게 된 단체는 한국예총경상북도연합회로 운영비 5천만 원을 지급받게 되었고, 가장 적은 단체는 청소년행복세상 경북지부의 200만 원이다.
 
경북도는 각 사회단체로부터 보조금신청서를 받아서, 외부 심사위원회의 심사를 거쳐서 공정하게 지급했다고 하지만, 한국작가회의 경북지회는 공정성과 기준을 믿을 수 없다면서 크게 반발하고 있다. 작가회의 경북지회는 심사위원 명단과 심사점수를 공개해 줄 것을 경상북도에 정보공개 신청을 했으나 아직 아무런 답이 없다고 한다. 해당 기준에는 경상북도를 대표하는 사회단체여야 함에도 일부 지역의 동호인 성격의 단체도 포함되어 있고, 같은 성격의 단체의 같은 사업임에도 형평성에 맞지 않는다고 했다.
 
한국작가회의 경북지회(지회장 권석창 시인)는 11년째 매년 850만 원 가량의 지원을 받아, 문집 <작가정신>과 <경북작가 시선집>을 발간하고, 문학 강연회, 경북문학인의 밤 등의 행사를 열어왔는데, <작가정신> 발간비 500만원이 삭감되어 제 12호 <작가정신>을 발간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한다. 거의 같은 사업을 하는 문학단체인 한국문인협회 경북지회에는 <경북문단> 발간에 1,800만 원이 지급된 데 비해 한국작가회의 경북지회에 350만 원이 지급된 것도 납득할 수 없는 일이라 했다.
 
한국작가회의 경북지회 권석창 지회장은 ‘한국문학을 대표하는 대다수의 문인들이 소속된 한국작가회의의 지역 단체인 경북지부가 350만 원으로 문학 활동을 하라는 것은 문인을 모욕하는 일일 뿐만 아니라 한국작가회의에 대한 모욕이다. 전국의 어느 광역시, 도도 한국작가회의 지회에 이런 보조금을 주는 지자체는 없다. 보조금 수령을 정중히 거절한다.’고 말했다.
 
또 박승민 사무국장은 ‘정신을 중요시하는 작가에게 모욕을 주는 경상북도의 문화 행정에 대해 강하게 비판하면서 회원들이 가진 지면을 통해서 혹은 인터넷 매체를 통해서 이러한 문화 행정이 바로잡힐 때까지 저항의 글쓰기를 펼쳐나가겠다.’
고 말했다.
 
며칠 전 운명하신 작가회의 소속 소설가 박완서 선생은 ‘문상 오는 가난한 문인들에게 일체의 조의금을 받지 말고 후하게 대접하라.’고 유언을 했을 만큼 문인들은 가난하다. 작가회의 경북지회는 가난한 주머니를 털어 단체를 운영해야 할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고 회원들은 말한다. 11년 동안 발간되던 <작가정신> 발간을 멈출 수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자료제공 : 한국작가회의 경북지회 (지회장 권석창, 사무국장 박승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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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27일 오전, 마을 행사를 치루고 영주에 장을 보러 나가는 길에 전화가 왔다.
MBC방송국인데 홍수관련하여 비나리마을 주민과 인터뷰를 하겠단다.
인터뷰를 마을 위원장과 이장에게 미루고, 아무 생각없이 장을 보고  그날의 일들은 잊었다.
그런데, 몇일전 우연히 PD수첩에서 4대강사업 홍보의 허구성과 청와대내 비밀 태스크포스팀이 운영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폭로하는 중에 비나리마을 관련한 영상과 인터뷰가 나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무슨 회괴망칙한 일인가? 비나리마을 주민도 모르게 4대강사업 홍보에 비나리마을 홍수 영상이 이용되었다니! 비록 뒤늦었지만 PD수첩에서 보도했듯이 비나리마을 홍수예방과 사대강 사업의 연관성이 전혀없다는 사실에 대해 비나리마을 주민의 한 사람으로서 한마디 안할수 없다.



일단, 비나리마을 앞을 흐르는 낙동강 상류 지역은 그 잘난 사대강 사업 영역이 아니다. MB식 어거지에 따르면 하상을 준설하면 지하수면이 낮아져 상류의 홍수가 예방되고, 보를 쌓으면 물조절이 되어 하류의 홍수가 예방된단다. 그리고 상류의 가뭄은 보를 쌓아 물을 가두어 두고 필요할 때 사용할 수 있어 예방이 된다나 어쩐다나 '둥근 사각형'같은 말같지 않은 말은 뒷전으로 밀쳐둬도 4대강준설 지역과 비나리마을은 다행히도 너무 멀다.



그리고 2002년 루사나 2003년 매미 때 홍수 피해는 내가 알기는 주로 강원도 지역에 집중했고, 2008년 비나리마을 인근의 춘양면에 홍수가 나고 산사태가 나서 많은 주민이 목숨을 잃었는데 그때도 하류지역의 피해는 그리 많지 않은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분명한 것은 우리나라의 최근 홍수 피해는 거의 강의 최상류지역, 산간지역에 집중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PD수첩 [사대강 수심 6m의 비밀]편에 너무나 잘 나와 있다.
 
그리고 정부는 마을주민에게는 알리지도 않고 2006년 태풍 매미때 낙동강이 범람해 마을 입구가 물에 잠기고 버스정류장위에 통나무가 올라 앉는 상황을 기기괴괴한 영상효과까지 더해 비나리마을을 상습수해지역으로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이점에 대해 사대강사업 세력은 지금 당장 비나리마을 주민에게 공개사과해야 한다. 비나리마을에 살기 시작한 지 14년동안  비나리마을 앞을 지나는 낙동강 최상류가 범람해 길이 잠긴 것은 3~4번쯤 되는 것으로 기억한다. 그중 한번 정도는 마을입구쪽의 밭들이 수몰되어 적지않은 농작물 피해를 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비나리마을 안에 홍수 피해가 발생하여 인명이나 재산상의 큰 피해가 난적은 한번도 없다. 정당성을 가지지않은 4대강사업을 홍보하기위해 애궂은 비나리마을을 이용하다니 비나리마을 주민은 기가 차고 억장이 무너진다.



토건세력이 '녹색성장'을 선점하고, 개발론자들이 먼저 환경과 생태에 대해 떠벌리며 그 본질을 왜곡한지 벌써 3년째다. 진실되지 못한 정권으로 말미암아 무엇보다 말의 참뜻이 심각하게 훼손되고 있다. 독재자가 민주주의를 이야기하고, 종미주의자가 민족의 이익과 평화를 독점하려드는 기괴한 상황은 끝이 나야한다. 무엇보다 사대강 사업과 관련하여 없는 정당성을 억지로 만들어 내기위해 애궂은 비나리마을까지 끌여들여야 하는 궁색한 처지에서 MB정권이 벗어나길 빈다.  

MB의 모든 정치행위를 지배하는 것은 노무현대통령에 대한 열등감이다. MB에게 조언컨데 죽어서도 산자의 목을 죄는 정적에게 질투만하지말고 배우기 위해 노력하길 빈다. 노무현대통령이 이렇게 시퍼렇게 대중의 사랑속에 살아있는 것은 바로 그의 진실성, 진정성 때문이다. 더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그래서 사대강사업 관련한 정부의 입장에 변화가 있길 빌고, 그 변화는 바로 솔직해지는 것이다. 바로 그 지점에서 토론도 가능하고 정치적 조정도 가능하고 타협도 가능하다.  MB 당신의 입장에서는 한국의 미래상이 토목공화국이 맞다고, 그래서 희생을 치르더라도 토목업자을 살리는 일이 한국 사회의 미래를 위해 바람직하다고, 환경도 좋지만은 개발이 더 좋고 더 바람직한 세상을 만들어나가는 길이라고 믿고 있다고 실토를 하면. 그때부터 한국의 미래비젼이 토목중심이어도 좋을지, 한국 사회의 현실이 환경보다는 건설이 우선인 상황인지 토론이 가능하지 않겠는가?

여하튼 4대강 사업 홍보에 이용당한 비나리마을 주민의 한사람으로서 한마디안할 수 없어 몇마디 남기지만, 솔직히 이 정권은 구제불능이다. 하루라도 빨리 이 거짓 세월이 끝나길 빌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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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댐은 환경적 재앙을 넘어 사회문화적 재앙이다.

고대 이집트에서 피라미드는 신성과 왕권의 완전한 결합을 나타내는 절대 권력의 상징물이었다. 진시황은 중국대륙을 처음으로 통일한 황제의 권능을 만천하에 드러내기 위해 자금성을 짓고, 만리장성을 쌓았다. 유사 이래로 이렇게 대규모 토목공사는 인간의 물질적 생활상의 필요성에서 뿐 아니라 지배자의 권능을 과시하고 강화하는 상징물을 만들어내기 위해 이루어져 왔다. 근대사회에 들어와 토목건축 기술 등이 폭발적으로 발전함에 따라 마천루와 도로 등이 근대화, 문명화의 상징으로 지배 권력의 권능을 드러내는 상징물로 등장했다. '댐'으로 대표되는 대규모 토목공사 역시 현대 과학기술의 총화로 인간의 물질적 요구와 더불어 '문명화'의 상징이 필요한 곳에서 이루어져 지배 권력의 정당성을 강화하는 하나의 액세서리 역할을 톡톡히 했다. 대규모 토목 건축물은 '우리 같은 후진 사회에 위대한 지도자가 나타나 이렇게 대단한 진보를 이루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정치적 선전탑 노릇을 한 것이다. 히틀러가 그랬고, 스탈린이 그랬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개발독재자인 박정희가 그랬다. 자연을 '미개'로 폄하하고, 무조건적인 개발을 근대화, 문명화로 신봉하던 서구의 도구적 합리성이 독재자 박정희를 만나 한국식 개발독재로 자행되었던 것이다.

세상은 돌고 도는지 21세기 한국에 다시 개발독재의 바람이 분다. 이른바 '사대강 죽이기 사업'으로 대표되는 MB표 개발 독재는 국토의 대동맥마다 포클레인을 들이대고 콘크리트로 쳐 바르고 있다. 강은 인공적 수로가 되고, 물은 자연스런 흐름을 잃고 '합리화'되어 토막토막 잘리어 보에 막히고 댐에 갇히고 있다. 그런데 사대강 삽질은 사대강에서 끝나지 않는다. 부활한 개발독재의 망령에 고무되어 토건자본이 설쳐 되기 시작했다. 봉화 운곡천에 산업폐기물 처리장 건설을 시도하는가 하면, 지역주민의 반대와 댐의 효율성의 문제 등으로 보류되었던 '송리원댐'이 MB표 개박독재를 만나 화려하게 부활했다. 운곡천 산업폐기장은 주민들의 결사반대로 다행히 저지되었지만, 영주댐은 ‘댐 건설’이 가져올 효과에 대한 개발주의의 환상에 빠진 지역주민의 무관심속에서 일사천리로 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영주의 경계 안에 세워지는 댐은 당연히 영주의 지역성을 드러내어야 한다며 '영주댐'이라는 명칭으로 개명까지 할만치 토건세력은 의기양양 하다. 지역의 경계 안에 개발의 상징인 댐이 건설된다는데 대해 지자체가 갖는 얼토당토않은 자부심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그런데 과연 영주댐이 영주시민의 자랑일 수 있을까? 과연 영주댐이 영주 지역사회에 어떤 측면에서든 긍정적인 물질적 효용을 가져다줄까?

세계적으로 대표적인 댐으로 이집트 나일 강의 에스원 댐이 있다. 에스원 댐은 1960년에서 1970년에 걸쳐 건설된 댐의 용량은 세계 제2위인 1690억 톤에 이른다. 에스원 댐은 이집트 현대화와 개발의 상징물로 대대적으로 홍보되고 이집트 국민에게 자긍심을 심어주기조차 했다. 하지만 댐 건설 후에 댐 유역 주민들 사이에 수질계통의 감염증이 급격히 증가하고, 주흡혈충증(住吸血蟲症)이 만연하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홍수로 쓸려나가던 염분이 출구를 잃어 관개 농지 35%가 염해를 입고, 나일 강이 운반해내던 연간 1억 톤의 비옥한 토양이 줄어 화학비료를 쓰지 않으면 농사를 지을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피해는 이렇게 육지서만 일어난 것도 아니다. 나일 강 인근의 해안은 침식되어 지중해 연안에서 연간 1만 8천 톤이던 정어리 어획량이 고작 5천 톤으로 감소되기도 했다. 이렇게 아프리카 개발과 산업화의 상징인 에스원 댐은 이제 무분별한 수자원 개발로 인한 환경파괴의 대표적 사례가 되어버렸다.

최근에 중국은 양쯔강에 샨샤댐을 건설했다. 샨샤댐은 댐의 길이가 2309m, 높이가 185m, 제방 두께가 15m로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댐에 물이차면 우리나라 소양댐 저수량의 13배가 넘는, 무려 4백억 톤 규모의 거대한 인공호수가 형성되게 된다. 중국은 세계 최대의 인공 댐을 건설하는데 있어 MB의 사대강 사업과는 비교되지 않은 만치 나름대로 철저한 준비와 절차를 밟았다. 샨샤댐은 1918년 쑨원에 의해 처음 제기되었다고 한다. 그 후 1930년대 국민당 정부에 의해 전문가들이 초빙되어 검토에 들어가고, 몇 번의 중단과 여러 가지 우여곡절 끝에 1984년에야 댐 건설에 대한 결정이 이루어졌다. 이에 따라 전국의 전문가들이 모여 수년간에 걸쳐 환경적, 사회적, 경제적, 기술적 측면에 대한 철저한 검토와 심도 깊은 토론의 과정을 거친 후 비로서 1988년에야 최종결론을 도출했다고 한다. 이후 2006년 완공되었으니 샨샤댐 건설에 무려 100년의 세월이 걸린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샨샤댐은 가장 최근의 인공적 환경재앙의 대명사가 되고 있다. 일단 댐 건설로 120만 명의 주민이 삶의 터전을 잃고 이주해야만 했고, 중국의 주요한 역사 유물이 엄청나게 수몰되었다. 그리고 무려400억 톤에 달하는 댐의 저수량은 지구지표의 특정지점에 국부적인 압력을 가하게 되고 이는 지압의 변동을 초래하여 지진을 일으키고 나아가 지구의 자전축의 변화까지 초래할 정도라고 한다. 최근 중국에 빈발하는 지진과 이로 인한 막대한 인명과 재산상의 피해는 바로 샨샤댐의 건설과 무관하지 않음을 주장하는 학자와 단체가 늘어나고 있다. 그뿐 아니라 황해의 유입수량이 줄어들어 바다의 염도가 올라가 바다식생이 변화하고 있고, 샨샤 지역의 기온이 상승하여 고비사막 등 만주벌에 증기 공급이 막혀 황사발생이 증가하고 있다. 샨샤댐이 완공된 지 몇 년 지나지 않았지만 벌써 숱한 환경피해가 발행하고 있으니 앞으로 어떤 재앙이 닥치게 될 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댐 찬성론자들은 댐을 통해 물 공급 문제를 해결할 수 있고, 댐을 통해 수해도 조절하고, 덤으로 댐 주변을 관광지화 해서 지역사회의 경제를 윤택하게 하고, 댐 자체의 근무 인력으로 일자리가 증가하는 등의 긍정적 효과를 내세우며 적극적으로 영주댐 건설을 옹호하고 있다. 또한 영주댐 같은 중규모 댐은 샨샤댐 같은 대규모 댐이 초래하는 환경재앙과는 무관하다고 한다. 사실 일부 일리가 있는 주장이기는 하다.

영주댐은 2009년 7월에 착공하여 2014년에 완공예정이다. 총 예산 8380억 원을 들여 댐 길이 380m에 높이 50m, 그리고 저수량은 1억8100만 톤이 될 예정이란다. 인근 안동댐에 비해 1/7에 불과한 영주댐은 연간 2억 톤의 용수를 확보하여 92%를 하천유지 용수로 흘러 보내고, 1000만 톤을 생활용수, 공업용수 영주 등 인근 도시에 공급할 예정으로 그 과정에서 연 약 16Gwh의 전기도 생산하게 된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 찬성론자들이 말하는 긍정적 효과는 미미하고 그 부작용은 이루 말 할 수 없다. 벌써 영주댐 수몰 예정지는 삶의 터전을 잃고 고향을 등져야 할 주민들이 늘어나고 있으며 댐의 수위가 올라옴에 따라 총 511가구가 삶의 터전을 잃고 고향을 떠나가야 한다. 물론 금전적 보상이 주어질 것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어쩌면 그 지긋지긋한 농사를 때려치울 수 있어 더 좋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겠지만 그것도 천만의 말씀이다. 수몰 예정지의 땅은 이미 많은 면적이 땅 투기 꾼의 손아귀에 들어가 있고 수몰 농민의 80%가량이 소작농이다. 보상비라는 돈을 움켜지는 사람과 삶의 터전을 잃게 되는 사람이 같은 사람이 아니다.

댐건설로 지역에 가져올 경제적 효과도 명확하지 않다. 일단 수몰예정지의 마을공동체가 파괴되고 주민들이 떠나고 나면 그만치 지역의 인구는 감소한다. 인구가 감소하는 만치 지역경제가 입는 손실은 늘어나게 마련이다. 토목공사를 통해 지역경제가 입는 효과는 얼마나 될까? 이것 역시 미지수다. 건설기간 내에 일시적으로 일정한 일자리가 늘어나게 되지만 이는 안정적인 일자리 창출과는 거리가 멀고, 건설 후 댐 관리 인원만치 일자리가 생겨나게 되지만 댐 건설로 인한 피해에 견준다면 미미하기 이를 데 없다. 댐 인근 지역 농지에 주는 피해는 산정하기도 쉽지 않을 만치 심각하다. 영주댐 건설을 반대하는 시민단체에서 추정하는 예상 피해액은 연 1,000억 원 이상이다. 그 정도의 피해를 상쇄하고 남을 만치 영주댐건설이 가져올 경제적 효과가 클까? 시민은 지방권력과 토건세력들이 제시하는 자기들만의 셈법을 믿을 수 없다.

이미 영주댐 공사는 상당히 진행되고 있다. 정확이 공정의 몇%가 진행되었는지 모르지만 댐 건설지 일대의 강과 산을 포클레인으로 전부 파헤쳐놓았고 마을은 황폐화되기 시작했다. MB식 밀어붙이기가 가져올 환경재앙이 공포스럽다. 댐 찬성론자들은 댐의 규모가 작아 환경영향이 미미한 것처럼 호도하지만 댐이 크면 큰 대로, 댐이 작으면 작은 대로 환경변화는 피할 수 없고 그로 인한 재앙은 예측하기조차 쉽지 않다. 봉화군 명호면에 있는 소수력댐인 [명호댐]은 규모면에서 얼마 되지 않지만 댐건설이후 명호 이나리강의 수질이 얼마나 악화되었는지 지역주민은 절실히 느끼고 있다. 투명하던 강바닥에 청태가 끼고 한 번씩 댐이 방류라도 하면 흙탕물이 강 전체를 뒤덮는다. 당연히 강에 서식하던 각종 민물고기 등의 식생도 엄청나게 바뀌었고 댐 유역을 중심으로 안개가 빈발하여 교통장애와 농작물피해가 일어나고 있다.

세계적 조류가 댐건설에서 댐 해체와 원상복구로 바뀌어가는 시점에 이루어지는 영주댐 건설은 시대를 역행하는 처사임에도 불구하고 지방권력이 강행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영주댐 건설은 MB식 사대강사업과 동일선상에서 환경적 재앙만 가져오는 것이 아니다. 시대착오적인 사대강 사업과 영주댐 건설이 가능하도록 하는 사회문화적 풍토는 또한 결과적으로 다시 그와 같은 풍토를 강화하는 데 기여한다. 영주댐 건설을 백지화하고 원상복구를 요구하는 시민들은 영주댐이 가져올 환경재앙을 넘어 그와 같은 사회문화적 재앙에 주목한다.

먼저 영주댐 사업의 시행과정에서 드러나는 개발독재의 망령이다. 수몰지구 문화재의 현상변경 절차를 무시하거나 환경영향평가를 무시하는 등 불법과 탈법적 방법을 총동원해 밀어붙이는 모습에서 개발독재자가 되어가는 지방권력의 추악한 모습을 본다. 영주댐건설 같은 주요한 사안에 대한 지역민의 민의는 철저히 무시되고, 지방권력은 독재자의 범죄행위에 가까운 행태를 여과 없이 드러낸다. 절차적 정당성을 상실하고 철저히 토건자본에 봉사하기 위해 자행되는 국토 유린은 지방권력의 배후에 있는 박정희와 히틀러의 모습을 드러내준다. 유사 이래 한반도 최대의 환경재앙이 될 사대강 사업에 기대어 지역의 작은 개발독재자가 되기를 마다하지 않는 지방권력은 ‘댐’을 통해 또 다른 권력을 탐한다.

그와 같은 연장선에서 숫자는 중앙에 종속된 지방권력들이 항상 빠지는 함정이다. '몇 천억 짜리 무슨 무슨 사업 유치' 등을 내세우며 지역사회에 지대한 공헌을 하게 된 양 떠벌리는 지자체장은 도대체 그렇게 따온 예산이 지역사회에 어떤 영향을 줄지 생각하지 않는다. 8000억을 들여 영주댐을 만들 때 가져올 긍부정적 효과에 대해 면밀히 검토하거나 기회비용의 측면은 고려하지 않는다. 무조건적인 예산 따오기에 목을 매고, 외적 실적 위주로 행정을 집행한다. 중앙권력에 기생하는 지역의 식민권력자들에 의해 과대포장 되는 그 돈으로 지역민의 복지를 강화하고, 지역 농업, 농민을 위한 정책을 시행하고, 지역민의 삶을 윤택하게 할 문화 복지에 사용한다면 백보 양보해도 댐으로 인해 지역사회가 얻을 긍정적 효과와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주민의 삶의 질을 높이는데 기여할 것이다.

영주댐은 영주를 살리고 영주경제를 윤택하게 하는 사업이 아니다. 영주댐은 경제적 환경적 재앙은 물론 그 과정에서 지역사회의 정신문화적 풍토까지 해치는 재난이다. 하지만 이미 권력은 온갖 절차적 과정을 무시하고 강산을 파헤쳐버렸다. 도대체 어떻게 수습해야 할 지 가름이 되지 않는 상황이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고 어쩔 수 없는 숙명으로 받아들여야 할까? 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영주댐 건설 반대운동은 지역의 환경을 지키는 운동과정을 통해 지역 사회에서 민주주의의 가치를 확산하고 주민을 조직하는 과정이고, 일정한 시기에 국한된 특정사업에 대한 반대운동에 머물지 않고 지속적인 지역사회의 변화에 기여하는 운동이다. 따라서 영주댐 건설 반대운동은 자연과 환경, 민주주의와 주민자치의 가치를 확산하고, 주민의 권익과 생존권을 지켜나가기 위한 운동으로 발전하고 고양되어 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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밭에서 살아도 시간이 부족한 농번기에
집마당 파헤친다고 몇일동안 생고생을 했습니다.
매주있는 미술관 수업 때도 그렇고.
어쩌다가 작은 행사라도 하면
작지않은 우리집 마당이지만 늘 방문객들이 몰고 오는 차들로 
곽 차 버립니다. 어떤 날은 차를 댈 곳이 없어
우왕좌왕하기도 합니다.

지난달 밭에 사과나무를 심는다고 포크레인을 불렸는데
떡본김에 제사지낸다고 좁을 마당을 넓히는 작업을 시켰습니다.
하지만 본 작업이 사과나무 심는 일이다보니
마음은 급하고 할일은 많아 그냥 대충 뒤뜰의 언덕을 까서 펴는 것으로 마무리 짓고
곧장 사과밭으로 내달렸습니다.

훗날 넓혀놓은 마당꼴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아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아예 호미와 삽만으로
원하는 모양으로 마당을 다시 깍고 돌담을 쌓기로 마음먹었습니다.
포크레인으로 하면 30분이면 할 작업인데
그뒤로 틈만 나면 한삽 두삽 흙을 퍼서 마당에 깔고
돌들은 골라내어 앞 개울에다 가져다 버렸습니다.
이렇게 골라낸 돌만 손수레로 스무차는 될 것같습니다.


이제 마당 모양은 잡았는데 돌로 석축을 쌓는 일이 남았습니다.
석축쌓기는 일단 밭일들 좀 끝내 놓은뒤 덤벼들 생각입니다.

삽질을 하다보니 'MB.정부의 사대강죽이기 삽질이 생각납니다.
동력 엔진을 이용하지 않고 순전히 사람의 손으로하는 작업의 진수가 바로 '삽질'입니다.
당연히 사대강 죽이기 포크래인질을 삽질로 표현하는 것은 조금 어패가 있습니다.
그런데 '삽질'이란 말은 '삽으로 하는 노동'을 넘어 더 넓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도 아마 군대에서 통용되어 오는 의미로 알고 있습니다.
삽질은 '계속 반복해야하는 쓸데없는 짓', 혹은
'성과가 쉬 드러나지 않으나 힘들고 지루한 일'을 지칭합니다.
특히나 어떤 일을 처리하거나 해결하는데 있어
그 원인이 되는 것과 다른 엉뚱한 처방에 입각하여 시도하는 행위나
목적과 수단이 어긋나는 행위를 지칭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맨날 바쁘기만 한데 성과는 없는 사람을 두고 '삽질하고 있네.'라고 놀리기도 하고,
어떤 사태를 엉뚱하게 파악하고 대처하는 경우, 예를 들면
자동차를 수리하는데 연료계통에 고장이 났는데,
전기계통을 뜯어 수리한다고 진땀을 흘리고 있으며 '삽질하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집 마당은 지난 한주의 삽질을 통해 많이 정비되었습니다.
디딤돌 위쪽의 터가 두배정도 넓어진 셈입니다.
적어도 이전보다 2~3대 정도의 자동차가 더 주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명박정부의 사대강 죽이기 삽질은 어떤 성과를 가져올까요?
녹색개발이라는 미명아래 4대강 젓줄을 다 파헤치고 콘크리트를 갖다 부은뒤에
어떤 결과가 그들의 손아귀에 전리품으로 남아있을까요?
멀쩡한 사대강을 파헤쳐 운하로 만들겠다던 사람들이
운하의 허구성이 들어나자 무슨 관광용 보를 만들어 
그냥 방치(?)되어 있는 4대강을 관광자원화하겠다고 우기다가
그 역시도 말이 안되자 이제는 멀쩡히 살아있는 4대강을 
죽은 강이라고 우기고 그 강을 살리겠다고 
복지예산과 한국 미래 성장동력이 될 IT예산,
그리고 지방교부금등 지역예산을 줄여가며 
4대강 올인을 하고 있습니다.

 
어느 것 하나 명쾌한 적이 없는 이명박정부지만
4대강죽이기 사업은 참으로 이해가지 않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현 정권의 대표 정책입니다.

위대한 삽은 더러운 MB의 손아귀에서 해방되어
신성한 삽질의 본령을 되찾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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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과 진실, 그리고 진리의 함의는 다르다.
그 정확한 차이는 모르겠지만 MB수하의 한국군 수뇌부가
이번 천안함 침몰사건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작태는
사실과 진실, 진리에 대한 개념의 재정의 요할 만치 가히 충격적이다.
그뿐아니다. 이번 사태 때문에 지금까지의 한국 개그 역사는 물론
세계 추리소설의 역사도 다시써야할 사태에 직면하게 되었다.
대단한 MB의 한국군이다.
 
27~8여년전 14개월짜리 해군 방위병을 제대한 나는
대단한 군사적 상식도 없다.
선박이나 바다에 대한 지식은 더더군다나 깡이다.
그리고 이번 천암한 침몰 사건과 관련한 언론의 여러 정보를 취합해 차맞추고 분석해
부유하는 정보속에서 획기적인 '진실'을 정제해낼 제주도 시간도 없다.
그냥 먹고살기 바쁜 국민의 한사람으로 이번 사건을 볼 뿐이다.

그렇기때문에 덧없이 스러져간 시퍼런 청춘들앞에
눈물흘리고 그들을 사지에 몰아넣고, 그들의 죽음를 조작하고
더럽히는 권력의 핵심을 향해 피끓는 분노를 느낀다.

흔히 이야기 한다. 진실은 하나라고.
그런데 천안함사건에는 사실도 진실도 없다.
모든 것이 혼제되고, 혼용되고
상호 침투되어 있다. 그냥 사실과 진실 그리고 진리가 뭉트그려 한가지다.
꼬리가 소를 흔들듯 말단의 사실 하나가 드러나면 사건의 전말,
진실이 그 근저에서 부터 흔들린다.
그런데 기가막힌 것은 온갖 추론과 추정, 정보수짐과 분석의 전과정을
장악하는 절대절명의 '진리'가 있다는 것이다.

그 '진리'가 모든 추론을 지배하는 대전제다.
조중동의 모든 기사는 그 대전제를 부터 철저히 연역적이다.
천박한 3단논법이 그들이 유일한 논리다.
몇가지 예를볼까?

한국군의 임무는 MB를 보호하는 것이다.
천암함의 암초충돌로 인한 침몰은 MB에게 타격을 준다.
천암함은 암초에 충돌하지 않았다.

한국군의 임무는 MB를 보호하는 것이다.
피로파괴에 의한 천안함 침몰이 밝혀지면 MB정부에 타격을 준다.
따라서 천안함은 피로파괴에 의해 침몰하지 않았다. 
(*피로파괴에 의한 침몰은 군의 사기에 부정적 영향을 주고,
토목건설중심의 MB정부의 정책철학에 타격을 줄 수 있단다.) 

한국군의 임무는 MB를 보호하는 것이다.
북한잠수정의 어뢰공격으로 천안함이 침몰했다면 MB정부에 타격을 주지않는다.
그러면서 천안함은 북잠수정의 어뢰공격으로 침몰했다.
(*북의 공격이 있었고, 이를 막아내지 못해 생떼같은 우리 수병들이
수장되었다면 더더욱 함장을 비롯한 군 수뇌부, 나아가 MB에게 타격이 가야하지 않을까?
하지만 철저히 반북, 반공의식에 사로잡힌 국민은 대북 적대감과 복수심을 키울뿐 군의 책임, 정권의 책임을 묻지 않는다. 위대한 극우의 나라 대한민국! 죽여주는 세상이다.)

MB와 그 수하의 군 수뇌부, 그리고 조중동을 위시한 극우언론의 3각 동맹이
환상의 팀워크를 통해 위대한 추리극 하나를 완성해가고 있다.
이 완벽한 '추리극'은 한준위의 순직, 금양호의 침몰 등
사건의 실체가 드러나는 것을 가리는 장치로,
애국주의의 극적 효과를 더하는 장치로 더욱 그 작품성을 더하고 있다.
계속되는 죽음들에 의해 개별 죽음의 절실함은 묻혀지고
엉뚱한 애국적 추리극 하나가 완성되어 가고 있다.

하지만 그 추리극의 대단원은 
환상의 3각동맹만 모르지 모든 국민은 다 알고 있다.
MB정권의 몰락이다.
MB정권의 수장이다.
 
이번 천안함 사고 대응과정에서 보여준 한군군, MB정권의 유치한 작태는 
오직 한가지 군수뇌부의 충성경쟁에 그 원인이 있다.
사고의 원인을 밝혀내고 향후 반복될 수 있는 같은 유형의 사고를 줄이기 위한 노력도 없다.
사고로 실종된 생떼같은 수병들을 구조하는 것도 그들의 긴박한 제1과제도 아니다.
오직 천안함 사고로 각하께 돌아갈 정치적 파장을 최소화하는 것,
그 절대절명의 목표아래 수병의 목숨도, 사고의 진실도 다 뭍혀버렸다.
계속되는 군 수뇌부의 거짓말, 극우신문들의 호들갑 그리고 충돌질....

수뇌부의 머리속에는 천암함 사건 시나리오가 따로 만들어져 있다. 
북한이 공격했어야했고, 영웅적인 대응을 했으나,  
간악한 적에 의해 분하게도 천안함은 침몰했고...
그 과정에서 영웅이 출현하고 현장에 각하가 등장했다.
적에 대한 피끓는 적개심과 죽어간 전우에 대한 복수심으로 불타는 
병사들의 각오가 찬 모습이 TV를 장식한다.

천암함의 침몰 광경에서
거짓말정권의 최후가 보인다.
결국 희생자는 애꿋은 수병이듯,
간악한 정권의 사악한 음오에 빠진 국민들이 불쌍하다. 
하지만 안다.
천안함의 침몰은 MB정권의 종말을 상징하고 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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